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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대통령 선거 당시 한나라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에서 만든 선거 공보물 |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당시 서로를 향한 비판[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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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을 합친 말로,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의 민주당계 정권 10년(1998년 ~ 2008년)이 끝난 직후 2008년부터 2017년까지 이어진 보수 정권 9년(이명박 ~ 박근혜 정부, 2008년 2월 25일[2] ~ 2017년 3월 10일[3])을 일컫는 말이다. 황교안 권한대행 체제 기간까지 포함해 2017년 5월 10일 오전 8시 9분 이전까지로 계산하는 경우도 있다.두 사람의 이름에 박이라는 글자가 있는데 공교롭게도 이명박은 끝에, 박근혜는 앞에 붙어 있어서 둘을 연결하기 쉽다는 점 때문에 생겨난 신조어다.
지금 와서는 주로 진보층 네티즌들이 당시 보수정권을 비꼬는 의미에서 쓰는 경향이 강하지만 맨 위의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처음 등장한 것은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 당시 박근혜의 이명박 후보 선거유세 지원에서부터였다. 즉, 한나라당 측에서 이명박근혜라는 말을 이때 처음 사용한 것이다. 대선 후보를 선출하기 위한 한나라당 경선에서 친이와 친박으로 나뉘어서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친이와 친박이 서로를 비방하는 과정에서 나온 그 유명한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 '엄청난 검증의 쓰나미가 몰아닥칠 것입니다', '저거 어떻게 쥐어박고 싶었어'가 이쯤 해서 나온 유행어들이었다.[4]
그러다가 진보진영에서 제18대 대통령 선거 쯤부터 박근혜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이명박 정부와 차별화를 시도하는 박근혜에 대해 박근혜나 이명박이나 다를 것 없다는 뜻에서 이명박근혜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장도리의 작가 박순찬은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이명박 시대의 연장에 불과하다는 의미에서 이명박근혜로 표현했다. # 박근혜 정부 시절 야권 지지층에서 정권의 삽질 행보를 비하하는 의미에서 많이 썼으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로는 언론 등에서도 제법 많이 썼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로는 MB503, 716503[5] 등 다른 표현도 자주 사용되고 있으며 2021년 노태우와 전두환의 사망 이후 문재인과 함께 생존하고 있는 전직 대통령이다.
2. 이명박 정부
747 공약[6]을 내세우며 나라 경제를 살리겠다는 목표로 대통령이 되었으나 글로벌 경제위기[7] 속에서 위기상황을 수습하느라 직전 참여정부 때보다 한국의 경제성장률 자체는 낮았던 만큼 경제적으로 아주 큰 성과는 내지 못하였다. 그래도 금융위기 상황에서 비교적 빨리 벗어날 수 있도록 수습을 잘 해[8] 놓았으며 이명박 정부 당시 한국 경제성장률은 세계 평균 경제성장률보다 높았다. 미국과 중국 등 두 양강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외교적으로 매우 강력한 한미관계를 건설했다는 점에서 박근혜 정부보다 훨씬 잘했다는 평가가 많다.등록금[9]과 부동산 가격을 안정시키는 것과 출산율을 초저출산의 마지노선인 1.3명 가까이 올리는 것에 성공하기도 했고, 마이스터고등학교 창립을 통한 고졸 취업율 제고, 아랍에미리트에 원전을 수주하며 세계 6번째로 원전 수출에 성공했다는 것, 무역 1조 달러 달성, 2010 G20 서울 정상회의[10]와 2012 서울 핵안보정상회의를 개최하며 외교적으로 실질 국력 대비[11] 미약했던 한국의 입지를 넓혔다는 것,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성공, 외규장각 의궤 반환 성공 등 경제, 외교적인 면에서는 분명 치적을 남기긴 했다.
허나, '돈 많은 사람이 뒷돈 받진 않겠지.'라는 국민들의 생각으로 대통령에 선출되었지만 결국 BBK 주가조작 사건, 다스 실소유주 논란 등으로 인한 개인적 비리와 측근&친인척 비리 같은 부정부패 문제, 인사 참사가 발목을 잡았고 정두언 등 이명박 정부에 쓴소리하던 일부 측근들에 대한 토사구팽과 더불어 언론 장악 시도를 위해 당시 MBC 사장이었던 엄기영에게 압박을 가해 그의 대표이사직 사퇴를 종용하였으며 엄기영이 MBC를 떠난 후 지방지사에서 떠돌던 김재철을 MBC 사장에 낙하산으로 꽂아넣어 2012년 공영방송 총파업, MBC 장기 파업 사태를 야기하기도 했다.[12] 더불어 종합편성채널 출범을 위한 미디어법 개정 당시 한나라당이 날치기를 강행하면서 문민정부 시절의 1996년 노동법 날치기 때와 크게 다를 게 없다는 비판까지 자초하기도 했다.[13][14]
집권 초반에 광우병 논란[15]과 이로 야기된 2008년 촛불집회의 여파, 노무현에 대한 표적수사로 노무현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것[16]이 줄줄이 겹치면서 이명박 정부에 대한 신뢰도를 대폭 떨어뜨렸고 이후에도 한미 FTA와 4대강 관련 논란이 잦아들지 않았고, 퇴임 후에도 국가정보원·국방부 여론조작 사건[17], 서울시 공무원 간첩조작 사건 등이 드러나 퇴임 후에는 그 전두환보다도 비호감도가 높은 대통령으로 기록되는 굴욕을 겪었다. # ##
결국 그렇게 이명박 정부의 지지도가 떨어지고 실제 2010년 지방선거에서도 한나라당이 패하자 당시 한나라당의 유력 대선후보 주자였던 박근혜는 이명박 정부를 물려받는 선거 전략을 처음부터 버리고 같은 당 소속임에도 여당 내 야당 컨셉으로 이명박 정부를 비난하거나 대립했으며[18][19] 이를 국민들에게 각인시켜 이명박 정부의 실패와 박근혜 본인을 가르려는 전략을 취했다. 허나, 이런 서로에 대한 비판들이 도가 지나친 나머지 둘의 사이는 크게 나빠졌고, 이로 인해 벌어진 것이 바로 친이계와 친박계의 지리한 당내 계파 갈등이었다.
얼마나 사이가 틀어졌으면 친이계와 친박계 둘 다 당권을 잡으면 공천 학살로 상대 세력 축출하기 바빴다. 더 웃픈 건 이게 이명박근혜 정권 9년 내내 이어졌다는 것이다. 18대 총선 당시 일부 박사모들은 공천에서 친박 학살을 주도한 친이계 후보를 떨어뜨리고자 민주당, 민노당 후보들을 지원할 정도였고, 20대 총선에서도 친박계가 공천 학살을 자행하자 비박계에서 이른바 옥새런이라고 불리는 사건을 터뜨리며 계파 갈등의 끝을 보였다.
한편, MB 안티들은 친이계가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때부터 최태민의 양아들인 조순제를 통해 캠프 차원에서 대를 이은 최순실-박근혜 관계의 전모와 박근혜의 무능을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이를 묵인하여 이후 박근혜 정부 탄생에 상당 부분 일조하였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사실 일정 부분 책임도 있는데 박근혜에 대한 각종 의혹과 능력에 의구심을 가지고 가장 먼저 의혹을 제기한 것은 진보도, 야당조차도 아닌 이명박 본인과 친이계 정치인+지지자들이었다. 당장 최태민 논란도 한나라당 경선 도중 가장 먼저 제기된 것이었으며 이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자 진보 성향 언론들조차도 한나라당 경선 당시 이명박 측 캠프에서 정리했던 박근혜와 최태민을 둘러싼 논란과 의혹이 담긴 문건들을 참조할 정도였다. 당시 보수진영에서 박근혜를 밀어내고 이명박을 대권주자로 먼저 선택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이후 박근혜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이들이 보수의 분열을 우려해서 크게 논란이 될 의혹들에 대해 침묵을 택했기에 18대 대선에서 박근혜에 대한 각종 의혹과 논란들이 크게 이슈가 되지 못하고 묻힐 수 있었다.
2017년에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국가정보원 적폐청산 TF의 조사로 이명박 정부의 민낯도 곳곳에서 드러났다. 물론 세계의 자유 지수에서도 선진국 지도자 중 가장 권위주의적인 인물 중 한 명으로 집계되고[20] 탄핵 기각 이후 '폭력 시위'에 대비한다며 계엄령을 모의하다가 걸린[21] 박근혜 체제보다는 양반이긴 하지만 이거저거 한 게 많았다.[22] 원세훈 전 국정원장 시절의 이명박 국정원이 이명박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이명박 정부의 방송장악 블랙리스트를 가동시켜 진보 성향의 문화인들에 대한 정부 지원을 끊어버리고 노골적인 방송 장악과 언론 탄압을 시도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거대한 파장이 일었다.
정부에 반대하는 인물들을 국가 기관(국가정보원, 국군사이버사령부, 국군기무사령부)을 총동원해 무차별적으로 사찰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사찰공화국'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에 대한 가장 유명한 사건이 PD수첩과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도 나온 공직윤리지원관실 민간인 사찰 사건이다. 국가정보원·국방부 여론조작 사건 수사 과정에서 국군사이버사령부가 연예인과 방송인 33인의 SNS를 사찰한 사실이 드러났다. 여기에 기무사령부에서는 수사관의 민간인 불법사찰도 모자라 조선대학교 교수의 이메일을 해킹하다가 걸리기까지 했다. 국정원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만드는 과정에서 문화인들에 대한 광범위한 사찰을 했고 심지어는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종교인 명진스님까지 불법사찰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더 자세한 내용은 국정원 불법 사찰 사건 문서 참고.
여기에 국정원 차원에서 방송장악을 계획해 KBS, MBC, SBS 등의 지상파 방송에 대대적인 '낙하산 인사'를 꽂았다. KBS와 MBC는 공영방송이니까 쉽게 장악했지만, SBS는 민영방송이라 완전 장악에는 실패하고 최금락 전 보도국장을 홍보수석으로, 하금열 전 사장을 비서실장으로 영입해서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는 이명박 정부의 방송장악 블랙리스트와 2012년 공영방송 총파업 문서 참고.
정권 중·후반기에 국가기관과 군을 총동원해 댓글 공작을 비롯한 여론조작을 벌여 제18대 대통령 선거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으며 박근혜 정부를 만드는 데 일조해 정권교체 후 원세훈 전 원장을 비롯한 수많은 국정원 간부들이 구속되었다. '박원순 제압문건' 실행 등 정권 비호를 위해 극우 단체를 지원하여 진보 야권 인사에 대한 흑색선전과 여론조작을 벌이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정보원, 국세청 등 각종 국가기관이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에 개입해 언론플레이와 과잉수사를 벌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사건, 박연차 게이트, 국가정보원·국방부 여론조작 사건 문서 참고.[23] 국정원 비리를 수사하던 검찰이 국정원 특수활동비 청와대 상납 사건을 잡아내 검찰 수사망에 오르게 되었으며 국정원 특수활동비 청와대 상납 사건에 대한 이명박의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되자 BBK 주가조작 사건 피해자들의 이명박 고발로 이어졌고 결국 다스 실소유주 논란, 삼성 다스 소송비 대납사건 등이 재조명되어 결국 포토라인에 서게 되었다.
2018년 3월 22일 23시에 구속영장이 발부되어 이명박은 서울동부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이명박 전 대통령 구속 사건 문서 참고. 2020년 10월 29일에는 대법원이 징역 17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받았으나 그를 수사했던 윤석열이 20대 대선으로 대통령에 올라 2022년 윤석열 정부 특별사면으로 4년 9개월만에 사면되었다.
3. 박근혜 정부
딱히 큰 업적은 없는 정권으로 평가되는 편이다.[24] 당장 박근혜 정부가 내건 대표적인 슬로건 2개가 초기에는 경제민주화, 후기에는 창조경제였는데 알디시피 경제민주화는 제대로 이루어진 것이 없고, 창조경제는 실체도 모호했던 것을 넘어 아예 조롱성 인터넷 밈으로 전락했다. 심지어 출산율 연속 하락으로 인류 역사에 유례없는 초유의 저출산인 출산율 0명대를 찍은 시발점이 된 시기도 박근혜 정부 말기부터(정확히는 2016년부터)이다.[25]게다가 박근혜 임기 말에 드러난 역대급 사건인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통해 청소년부터 노년층까지 극소수의 친박 및 콘크리트 지지층을 제외한 그야말로 대다수의 국민들을 분노하게 만들고 말았으며 해외에서도 선진국 & 민주주의 국가에서 일어난 정치 스캔들 중 최악의 수준이라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이명박 정부는 그래도 앞서 말한 것처럼 부정부패와 권위주의적인 행적 등은 부정적으로 평가받지만 상기한 것처럼 외부에 자랑할 만한 치적도 있는 반면 박근혜 정부는 업적이 있다고 해도 전임들에 비해서는 미미한 수준이었던 것을 넘어 진보 성향 국민들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보수 성향 국민들도 강경 친박을 제외하면 실패한 정권이었다고 마지못해 인정한다. 주관적 평가 다 떼고 그냥 객관적 평가만 놓고 봐도 헌정사상 탄핵당한 첫 정부이자 선진국 국가원수 중 최초로 탄핵당한 인물이다.[26]
심지어 당내에서도 배신의 정치 운운하며 분열만 일으켜 당장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 때 집권 여당인 새누리당에서조차 계파 갈등으로 박근혜와 갈등이 심했던 절반 가량의 비박계 의원들과 일부 친박계 의원들이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주도했을 정도였으며, 헌법재판소에서도 박근혜 탄핵을 만장일치로 결정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좋게 말하자면 박근혜가 최순실을 국정농단할 정도의 관계로 가지 않고 정치적 식견과 철학이 있어 자기가 대통령 업무를 스스로 진행했거나 다른 이들과 소통하는 역량만 있었다면 대통령직에서 탄핵되지 않고 후임 대통령에게 자리를 넘기고 비교적 정상적으로 퇴임하는 등 이토록 처참하게 몰락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만, 이명박과 박근혜를 모두 비난하는 측에서는 꼬리 자르기 식으로 경제 불황, 일자리 문제, 비민주적 통치 행위 등의 문제점을 모두 오직 박근혜에게 뒤집어씌우지 말라고 말하기도 한다. 실제로 박근혜는 이명박 정부에서 전혀 없었던 문제들을 본인이 발생하게 한 것이 결코 아니라 이명박 정부에서 해결하지 못한 고질적인 문제점을 물려받아 이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실정을 저질러서 더욱 악화시킨 것이다. 오죽하면 박근혜가 이명박을 친형조차 관리하지 못하는 무능한 대통령이었다고 비난하고 자신들은 '여당 안의 야당'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이명박과 자신은 다르다며 명확하게 선을 긋는 전략으로 대선에 이겨 대통령이 되었겠는가?
허나, 다르다고 비난하기 바빴을 뿐 결국 박근혜 정부는 능력은커녕 명확한 비전조차 없었으니 당선된 이후에는 자신들이 비방해 왔던 이명박 정부 당시 불거지던 경제 침체기와 경제 성장 실패를 성공적으로 타개하지는 못했고, 오히려 비선실세 논란이 결국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드러나면서 이명박 정부에게 넘어가는 듯 했던 범죄정부 타이틀을 다시 가져왔다.
결국 보수진영에서도 '잃어버린 4년'이라고 하며 박근혜를 보수를 망친 장본인 취급하면서 박근혜와 이명박이 같이 엮이는 것을 어떻게 피하고자 할 정도가 되었다.[27] 심지어 진보 성향을 띄는 사람들 중에도 이명박을 싫어하긴 하지만 그래도 박근혜와 동급 취급을 받을 정도는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28]
당연히 같은 보수진영에서 이름난 정치인들 중에도 박근혜 정부와 거리를 벌린 인물이 많다. 전임 대통령 이명박은 당내에서의 친이-친박 대립으로 인해 박근혜에 대해서 비판적인 태도를 유지해 왔으며 분명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올려줬음에도 야인으로 밀려나 철저하게 냉대받았다. 원조 친박이다 친이로 갈아탄 전여옥 전 의원도 박근혜의 무능함과 비정함을 오랫동안 옆에서 봐 왔기 때문에 시종일관 혹평을 내리며 박근혜 정부를 보수가 아닌 사이비 수구 정권이라고 비판할 정도였다. 19대 대선 시기 바른정당으로 갈라선 유승민은 한때 박근혜 당대표의 비서실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천 문제나 경제 담론 등의 충돌로[29] 노골적으로 버려졌기 때문에 당연히 박근혜를 적대하고, 마찬가지로 한때 그녀의 최측근이었던 진영도 박근혜 정부의 보건복지부 장관에 등용됐지만 증세 없는 복지를 비판하다가 박근혜에게 내쳐져 결국 반대 세력인 더불어민주당에 입당한다. 김무성의 경우에도 공천 문제로 그 유명한 '옥새런' 사건을 벌이는 등 대립하다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발생 이후에는 직접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결국 박근혜는 반대파를 끌어안기는 커녕 아군이었던 지지기반조차도 김해신공항 건설 결정, 성주군 THAAD 배치, 조선일보 디스 등으로[30] 차례차례 통수를 날리면서 대립하다 끝내 최종 보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거의 대부분의 지지 기반을 박살낸다. 게다가 정권 교체 이후 국정원 특수활동비 청와대 상납 사건이라는 전대미문의 사태가 터지면서 박근혜 자신뿐만 아니라 당시 정권 고위 관료들의 도덕적 해이가 극에 달했다는 사실만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결국 이 두 사건 때문에 박근혜 청와대 관료 20명 이상이 구속되거나 불구속 재판을 받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쉽게 말해서 박근혜 정부는 집안 단속도 제대로 못 한 것이다. 보수 입장에서 생각해 봐도 대통령을 배출하고 국회 의석의 절반을 넘긴 여대야소 정권을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이용하다가 공중분해시켜 버린 것이니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정치력을 보였다. 게다가 일반적인(?) 개인적 비리와 측근 비리도 아니고 국가 시스템 전체를 사유화해서 비리를 저지른 가장 질이 나쁜 경우였다.[31] 여기에 더해 다른 인물도 아니고 보수의 주요 대권주자로 10년 넘게 정치판에서 활동하며 노회하다고 평가받던 박근혜가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런 짓거리를 저질렀으니 더 기가 막힐 노릇이다.
하지만 보수 진영에서는 여전히 진영논리로 인해 박근혜를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경우도 있어 보수진영 재건에 큰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 제1 보수정당 내 친박 세력뿐만 아니라 우리공화당, 친박신당 등의 일명 태극기 부대 세력 정당들이 대표적이다. 물론 비박 세력을 보는 대중들의 시선도 마냥 곱지는 못해서 박근혜 정부 시절에는 일부 인사들을 제외하고는 숨죽은 듯 살거나 심지어 편을 들기까지 하던 사람들이 박근혜가 몰락하니깐 이제 와서 자신들은 안 그랬다는 듯 깨끗한 척 큰소리치거나 정치적 신념을 번복하는 듯한 행태로 인해 상당수 중도/진보 유권자들에게는 이들 역시 그냥 박근혜-최순실의 부역자, 적폐일 뿐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따지고 보면 이들 역시 박근혜 정부 탄생에 일조했으니 부역자라는 말이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기는 하다. 물론 본인들 입장에서는 억울한 점도 있을 터이지만 결국은 각자가 판단할 부분이다.
4. 단어 사용의 적합성에 관한 논쟁
2008~2017년 보수정권 9년을 일컬을 때 이명박근혜라고 같이 묶어 부르는 경우가 늘자 일각에선 이명박과 박근혜가 같이 묶일 정도로 비슷하냐는 논쟁이 일기도 했다.주로 이명박이나 박근혜를 지지하는 보수층에서 둘은 차이가 있다는 논리로 이명박근혜라는 명칭을 껄끄럽게 생각하는 편이고[32], 반대로 민주당 계열이나 진보 진영에서는 그게 그거라며 이명박근혜라고 싸잡아 부르는 경향이 있다.
4.1. 찬성하는 의견
4.1.1. 정책 계승
친이 성향을 띤 정치인들과[33] 보수층들은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를 보수에서 서로 떼어놓고 평가하는 시도를 자주 하는데 이는 헛된 희망이자 착각일 뿐이라는 의견도 있다. 왜냐하면 세부 사항들이 달라도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 둘 다 같은 당 소속으로 명백하게 보수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정권들이며 사회문화정책도 비슷하고 대기업 지원을 통한 낙수효과 같은 경제의 기초 방향도 한결 같았기 때문이다.[34] 그래서 이명박의 지지자들도 상당수는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뽑는데에 주저하지 않았다.그 밖에도 이명박 정부에서 추진된 정책들과 기조는 상당 부분 박근혜 정부에 계승되어 계속 이어졌다.[35] 이를 비토하는 진보 성향 언론들에서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을 비난한 논조도 비정규직 문제나 낙수 효과 디스, 반노동이나 반 경제 민주화 정책 등 이명박 전 대통령 때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나마 정치적 계보도에서 차이가 있는 정도지 현실 경제나 사회 문제를 대처하는 방식에서는 큰 노선 차이도 없었다는 것이다.
4.1.2. 별 다를 게 없던 당시 국민 인식
일부 친이 성향의 박근혜와 보수 세력 분리 시도가 날이 가면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데, 그래봤자 결국 이명박과 박근혜 모두 한나라당-새누리당 계보로 이어지는 보수 정당의 대선 주자이자 대통령이었으며 어찌되었건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한 당에 같이 소속되어서 활동했던 정치인들이었다.이들의 관계는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처럼 비슷한 진영이지만 그래도 당은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통일된 보수정당 내의 계파 갈등 사례였다. 결국 당시 대중들이 보기엔 이명박에 이어 박근혜의 집권은 한나라당-새누리당으로 이어진 보수정당의 연임으로 비춰질 뿐이었다. 실제 법리적으로 해석해도 새누리당으로 개명할 때 전신 한나라당의 비례대표들을 모두 이어받아 왔기 때문에 마찬가지다. 단지 주도하는 계파가 친이계에서 친박계로 바뀐 것일 뿐인데, 일반 대중들이 보기에는 그놈이 그놈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4.1.3. 똑같은 여당
이명박 후보를 낸 한나라당과 박근혜 후보를 낸 새누리당은 이름만 바뀌었을 뿐, 결국 같은 당으로 지역의원이나 비례대표도 고스란히 받아 왔으며 이명박도 대통령 마지막해는 새누리당 소속으로 지내며 퇴임 후에도 2017년 1월 1일에 국립묘지 참배와 동시에 새누리당 탈당을 선언하기까지는, 즉 퇴임 후에도 2016년까지는 새누리당 평당원이었다. 결국 같은 당으로 엮인 이상 친이와 친박은 당 내부의 계파 갈등에 불과하고 공식적으로 같은 당으로 활동하면서 정권을 이어받았으면 같이 묶여서 평가하는 관점이 틀렸다고 보기는 어렵다.4.1.4. 보수층 스스로가 연장선상으로 인정
상당수 보수 지지층과 정치인들도 이들을 9년 연임 정권이라고 생각하는 등 이명박근혜의 맥락에 동조하는 모습도 보인다. 2018년 5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홍준표 당시 대표는 박근혜 전 대통령과 친박 성향인들을 대체로 비난하던 스탠스 속에서도 "9년 동안 보수정권이 살린(?) 경제" 운운하며 두 정권을 굳이 분류하지 않고 같이 묶어서 인식하는 모습을 보이며 "좌파정부가 망친 한국을 9년 동안 회복시켜 놨다"는 식으로 정치극단주의스러운 발언을 하기도 했다. 물론 박근혜가 딱히 한 것이 없다보니 박근혜 때의 정치/경제 시스템이 이명박 정부 때 만든 대로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라 이렇게 말해도 박근혜 옹호가 되지 않기 때문이기는 하지만.4.1.5. 박근혜에 대한 범보수적 동정 여론
친이 성향의 정치인들과 지지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보수 전체가 박근혜 전 대통령을 완전히 버렸냐면 그것도 아니다.[36] 19대 대선에서 지지 유세를 하면서 박근혜 사면과 재조사를 약속했던 홍준표 전 지사는 탄핵 불복이냐며 각계의 무수한 비판을 받았음에도 결국 득표는 약 24%로 최종 2위를 차지했다. 반면 박근혜의 탄핵을 보수쪽에선 전면에 나서 추진했던 유승민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지지는 홍준표에 비하면 많이 저조했다.[37] 박근혜에 대한 지지는 크게 꺾였지만 강성 보수 쪽에서는 박근혜에 대한 동정 여론이 상당히 남아 있었다.사실 홍준표는 애초부터 박근혜에 부정적이었던 인물[38]이라 탄핵 당해도 싸다는 입장이었으나[39] 보수 성향이 강한 지지 기반에서 유세시엔 박근혜의 사면, 재조사 요청을 공개적으로 받는 경우도 제법 되다 보니 본인도 속으론 탄핵이 맞다고 생각하는데 지지자들은 또 추스려야 되니 '대통령이 된다면'이라는 조건을 달고 박근혜 사면을 약속하게 된 것이다. 물론 본인 스스로도 이후 될 가능성이 없던 대선이었다고 밝혔을 만큼 판세가 기울어졌다 보니 없는 지지층이라도 좀 더 모아볼 요량으로 걍 질렀다고 보는 것이 옳지만. 그 덕에 당시 홍준표는 종종 논리가 꼬이는 모습도 보였다. 이때 상황도 짜증났는지 이후 친박 세력이 스물스물 기어나오자 탄핵당해 보수 망쳐놓은 세력이 어딜 기어나오느냐는 식으로 또 골탕을 먹였다. 다만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박근혜 탄핵 자체는 인정하지만, 그에 대한 형량이 지나치게 가혹하며 절차가 졸속이었다'고 여전히 오락가락 갈지자 행보를 하는 중이다.
4.2. 반대하는 의견
박근혜 정부가 이명박 정부의 정책을 일부분 계승해서 악화시킨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박근혜 정부를 이명박 정부의 연장선으로 보거나 두 정부를 동일시해서 이명박근혜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는 무리가 있다는 반론도 있다.이는 다른 사례라도 반박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정당만 같을 뿐이지 계파가 달라서 갈등의 요소로 작용한 노태우(민정계)-김영삼(상도동계), 김대중(동교동계)-노무현(친노)의 사례에도 부합된다. 이쪽도 전자는 전임 대통령을 감옥에 보냈고 후자는 전임 대통령 계파가 싫어서 분당을 했기 때문이다. 이명박(친이)-박근혜(친박)도 다르지 않다. 같은 정당 내에서 계파갈등은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이명박 세력은 민정공화계[40]를 기반으로 둔 친박계와 거리를 두는, 이재오 같은 민주파(상도동계+이재오계)+이상득계+당내 소장파+이명박 직계[41]를 지지 기반으로 하는 친이계라는 성질이 상당히 다른 계파였고[42] 결국 3당 합당의 결과물로서 소속된 정당만 같을 뿐 서로 간의 이념이나 생각은 자유민주주의부터 국가권위주의까지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세력들이었다.
4.2.1. 두 사람의 배경부터가 다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크게 문제가 된 이유는 박근혜 본인부터가 박정희의 딸로서 특권의식을 버리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최태민의 딸 최순실 등 과거와 연관된 부분들이 국민들에게 군사독재 시절의 안 좋은 기억을 불러일으켰고, 충성한답시고 저지른 박사모의 행동은 오히려 박근혜에 대한 국민들의 괘씸죄만 더 키웠다.반면, 이명박은 본인부터가 박정희 정권 당시 6.3 항쟁에 참여한 경력이 있으며 군사독재 정권 치하에서 고위관료로 임명되어 정치를 하거나 적극 가담한 이력도 없다.[43] 저지른 비리도 금전적인 부분에 국한된 것으로, 탄핵감으로는 가능할지언정 그 이상의 비난거린 드물다. 고로 이명박근혜라는 개념은 범우파 진영 전체에 과거 군사독재의 망령이라는 프레임을 덮어씌우기 위한 정치공작의 성공사례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주장이다.[44]
이명박은 대통령 이전에 기업인으로서 활동하기도 했으며 서울특별시장으로서는 역대 시장 중에서도 매우 뛰어난 시정을 보여준 것으로 인정받고 남의 후광 하나 없이 온전히 자신의 이미지만으로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45] 즉슨 대통령으로서 비판점도 있긴 하지만 행정능력만큼은 확실히 검증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는 박정희의 딸 혹은 퍼스트레이디 대행을 했던 타이틀만으로 정치인이 되어 국회의원을 하다가[46][47] 시기를 잘 탄 것, 무엇보다 아버지의 후광으로 대통령이 된 것이지 그 이전의 행보는 사실상 검증된 것이 없었다.
4.2.2. 같은 보수정당이지만 정치 사상은 반대
애초에 이명박과 박근혜는 당만 한나라당으로 동일할 뿐 정치 계파나 사상적 계보도는 완전히 반대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즉, 같은 지붕 아래에만 있을 뿐 둘은 절대로 일가친척이 아니라는 것이다.현존하는 한국의 주류 보수정당 내 계파 구도는 크게 2가지 종류의 계파로부터 각각 분리되었다. 바로 김대중과 함께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던 김영삼의 상도동계를 원조로 하는 친이, 친유[48]와 같은 온건보수주의를 표방하는 온건보수 계파와 박정희, 박근혜를 추종하며 권위주의적 반공주의, 사회보수주의, 국민보수주의를 표방하는 친박, 친황과 같은 강경보수 계파가 그 예시이다.[49]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김영삼의 권유로 정계에 입문하거나 온건/개혁보수 성향을 띠는 계파에 속하는 사람은 이회창, 이명박, 이재오[50], 정병국[51] 등 민주화운동 당시 군부독재정권에 의해 고문도 당한 인사들이 많았다. 김무성, 조순, 노무현[52], 이덕화[53] 등이 존재하고 박정희의 후신을 자처하는 계파에 속하는 사람은 박근혜, 최경환, 조원진[54], 이정현, 황교안[55] 등이 존재했다. 특히나 박근혜는 박정희의 딸이라는 혈통적 배경에 유신독재 당시 사망한 모친 대신 퍼스트 레이디 역할도 했던 경험이 있던지라 박정희 독재에 목숨걸고 저항했던 김영삼과 그 후예인 친이계와 꽤나 불편한 사이였다.[56]
4.2.3. 둘의 사이는 원래부터 앙숙이었다
이명박과 박근혜는 각각 한나라당, 새누리당 후보로 선출되어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두 사람이 이루던 진영은 계열부터가 달랐다. 즉, 같은 보수우파 계열이었어도 서로가 추구하는 사고나 사상이 꽤나 상이했다. 덕분에 이명박과 박근혜가 경합하던 17대 대선 후보 경선은 19대 대선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보다 서로에 대한 모독과 인신공격이 훨씬 심각했다.[57] 같은 당임에도 서로간의 공격 수위가 얼마나 심했는지 두 사람의 비리 의혹은 대통령 선거 본선에 가기도 전 이미 당 내 경선 과정에서 거의 전부 다 나왔다고 할 정도이며 실제로 이 때 제기된 의혹이 검찰 수사에 의해 전부 사실로 밝혀지면서 두 사람 모두 대통령 임기가 끝난 후 나란히 구속된다. 19대 및 20대 대선 당시 더불어민주당의 친문계와 친명계가 싸우는 것은 소꿉장난으로 보일 수준이었다. 이 경우는 본인들도 어느정도 선을 넘지 않으려고 하기도 했고. 대신 대선이 끝나고 다시 갈등이 심화되었다.이명박이 후보로 결정되고 대통령에 취임한 뒤에도 한나라당 내부는 이 경선으로 인한 앙금과 후유증 치유를 하지 못해서 친이계와 친박계는 언제나 대립했는데 이는 결국 친이계의 친박계 공천 학살, 친박계의 비박계 공천 학살로 이어졌다. 물론 대선을 앞두고 서로가 손을 잡은 모습을 보였지만, 이것은 그저 이념이 달랐는데도 정권을 잡으려고 서로 손을 내밀었던 DJP연합이나[58] 각종 선거에 단일 후보를 낸 몇몇 단일화 사례처럼 서로 현실적 이익을 취하기 위해 마지못해 손을 잡은 것일 뿐이었다.
게다가 개인적으로 봐도 이명박은 박근혜와 사이가 나빴고, 오히려 한나라당 내에서 대립각을 세운 손학규와 나름 가까웠다. 실제 손학규가 탈당하자 이명박은 아쉬움을 토로했던 반면 박근혜는 그저 야합 대상일 뿐이었다.[59] 심지어 이제는 옛날 이야기가 되었지만 한때는 최측근 이재오의 주선 덕분에 노회찬, 심상정과도 사이가 제법 좋았다. 그 덕에 대통령 당선 직후 이명박은 노회찬, 심상정이 민주노동당을 탈당해 진보신당을 창당했을 때와 진보신당 창당 2주년 기념일 당시 직접 축하 화환을 보내기도 했다. 물론 이후 이명박 정부와의 정책 갈등으로 인해 관계가 다소 멀어지긴 했지만.
이명박과 박근혜의 악연은 사실 박정희 정부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 최태민은 박근혜를 이용해 기업인들에게 돈을 걷고 있었고, 이 때문에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최태민을 싫어해서 마주치기도 꺼려 당시 현대건설 사장이던 자신이 대신 돈을 갖다줬기 때문에 그 시절부터 이명박은 박근혜와 최씨 일가의 관계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18대 대선에서는 새누리당 대선 후보로 이재오를 어떻게든 올리려고 했지만 당시 판세가 기울어 박근혜가 대선 후보로 확정되자 울며 겨자 먹기로 박근혜를 지지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막판까지도 당시 제3지대 돌풍을 일으키던 안철수 후보를 알게 모르게 지원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고[60][61], 이전부터 박근혜를 대통령이 되어서도 안되지만 애초에 될 수도 없는 사람이라고 비판한 것을 보면[62] 어지간히 박근혜에 대한 신뢰가 없었던 모양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본인이 죽음으로 몰고 간 꼴이 된 전임자로 인하여 원수 지간이 되어버린 문재인을 대통령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공공기관(국정원, 국방부)을 동원한 여론조작으로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걸 도와줬지만 박근혜가 본래 이명박과 사이가 좋지 않아 훗날 박근혜는 대통령이 된 이후 친박 세력들을 이용해 친이계가 포함된 비박계의 대다수를 공천 학살을 통해 정계에서 퇴출시켜 버렸고, 이명박과 친이계 세력들은 박근혜 체제 시절 철저하게 냉대받았다. 덕분에 훗날 이명박은 박근혜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몰락하게 되자 훗날 자신이 공격받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박근혜 탄핵에 찬성하며 그녀를 비웃기도 했는데, 이것만 봐도 서로 필요할 때 이용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사이가 안 좋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2.4.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의 경제 정책 차이점
경제 정책만 봐도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는 상반된 모습을 많이 보였다. 일단 공식적으로 이명박 정부는 신자유주의 정책 노선을 지향했는데, 물론 실체적 진실에 대해선 논란이 있지만 어쨌든 이명박 정부에서 실시된 정책은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신자유주의적 특성을 일부 가지고 있었다.[63] 또 이명박 정부에서 과오로 평가받는 대표적인 경제 정책으로 평가받는 자원외교도 5년 임기 안에 성과를 내려고 졸속 추진하다가 일이 망가진 경우지만 당시 미래 자원의 확보에 대한 중요성을 미루어 볼 때 한 번쯤은 시도해 볼 만한 사업이었다. 즉, 정리하면 일단 전체적인 평가야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방향은 확실하게 잡았고 계획도 구체적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좋은 점과 나쁜 점이 확실하게 나타났다.반면, 박근혜 정부의 대표 경제정책인 창조경제는 개념 자체가 상당히 불분명한 가운데 자화자찬으로 바빴고, 아베노믹스에 영감을 얻었다는 초이노믹스 또한 원본이 된다는 아베노믹스와 비교해봐도 열화카피 라는 비판이 있었다. 그 유명한 발언인 증세 없는 복지가 그 사례이다. 물론 이명박 정부 때도 국가 부채가 급증하긴 했지만 그 당시에는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가 커서 옹호의 여지가 있는 반면에 박근혜 정부는 노동개혁과 연금개혁을 추진하며 기득권들의 상당한 저항을 받았다.두 정부가 체결한 대표 FTA였던 한미 FTA와 한중 FTA도 내용을 파고보면 차이가 꽤 나는데 이명박 정부가 촛불집회 등 당시 강력한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한미 FTA를 관철시켜[64] 결과론적으로 긍정적 측면도 인정받은 반면 박근혜 정부의 한중 FTA는 추진은 했지만 경제적인 이익을 얻긴 커녕 되레 한중 FTA 믿고 진출했던 한국 기업들이 몇 년 안 가 북한의 5차 핵실험과 중국 정부의 사드 보복으로 큰 손실만 입게 되었다. 이명박은 최소한 자신의 정치적 이득에 따라 한국 경제의 기둥인 수출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기업을 직접 없애지도 않았다.4.2.5.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의 외교 정책 차이점
이명박 정부는 한미동맹 복원을 비롯한 동맹관계 강화에 역점을 뒀고, 이명박 정부 내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수차례 정상회담을 포함해 훈훈한 모드를 유지했다. 미국의 경쟁국가인 중국과의 관계에서도 이명박의 측근이던 류우익 전 청와대 대통령실 실장을 주중 대사로 파견하는 등 나름 신경을 써 미국과 중국 양강 사이에서 경제적 실익을 얻었다. 물론 천안함 피격 사건과 연평도 포격전 등 북한의 대남 도발 문제에 대한 대응 수위와[65] 중국 어선의 한국 영해 불법 조업 문제 등을 놓고 양국이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그 외에는 한중관계 역시 비교적 큰 무리 없이 무난함을 유지했다.[66] 당장 이명박의 외교 정책에 대한 비판도 자원외교와 임종석 UAE 특사 파견 논란에 국한되어 있지 특정 국가에 노골적으로 치우친 관계 때문에 다른 국가와의 관계를 파탄냈다는 평은 전혀 없다.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중국과 친하게 지내면 북한과 동맹관계에 있는 중국이 북한에 대한 제재와 압력을 더 강화하여 김정은이 굴복하여 핵을 포기할 것이라는 헛된 낙관론에 빠져 지나친 친중 정책을 펼치다가[67] 한미동맹이 이명박 정부 때보다 약해졌고, 심지어 이것조차도 박근혜 정부 말기이던 2016년 북한의 5차 핵실험 당시에는 북한에 대한 제재 압박 참여를 중국에 요구했다가 중국이 순망치한인 북한에 대한 과도한 제재 참여를 거부하며 박근혜 정부가 예상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흘러가자 사드 배치로 인한 중국의 경제 보복에서 영리하게 대처하지 못하여 한국기업이 피해를 입는 등 실속은 영 챙기지 못하는 자충수를 두었다.
한일관계에 있어서도 이명박 정부는 2011년까지는 관계를 비교적 원만하게 유지한 반면[68] 박근혜 정부는 정치/역사 분야와 문화/사회 분야는 따로 가는 투트랙 전략을 쓰라는 전문가들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한채 아베 내각과 정상회담 한차례 하지 않는 등 일본과 대립하다가 뜬금없이 임기 중후반에 위안부 합의에 서명하여 오락가락하는 대일 정책을 보이는[69] 등의 행보로 국내외의 비판과 논란에 직면하기도 했다.
4.2.6. 두 사람의 근무 태도는 천지차이다
정치적 평가는 엇갈리지만 지지자든, 안티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하는 건 두 사람의 성실성만큼은 천지차이라는 것이다. 이명박은 대통령 재임 시기에 평일에는 항상 늦어도 새벽 5시 전에는 일어나 일할 준비를 하고 청와대로 출근하여 오후 7~8시에 퇴근하는 생활을 반복했다. 이명박의 근무 스타일을 따라 할 수밖에 없는 청와대 인력들이 견디다 못해 피로를 호소할 지경이었지만 이런 이명박의 근무 스타일은 임기가 끝날 때까지 한결같았다.[70][71]반면 박근혜가 어땠는지는 박근혜/개인처신 문제 문서의 6.1 문단만 봐도 알 수 있다. 다른 거 다 제쳐놓고 하급 공무원들은 다 일하는데 본인만 수요일을 자체 정기 휴일로 지정했다는 황당한 일 하나만으로도 박근혜는 절대 성실성 면에서 재평가가 불가능하다. 사실 이명박이 조금 특이하다고 할 정도로, 어찌보면 단점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근면해서[72] 박근혜가 평균 정도로 성실했어도 비교가 됐을텐데, 박근혜는 정상인 수준조차 되지 못해 비판을 배로 받았다.[73]
따라서 이명박에게 대통령으로서의 자질 중에서 다른 부분은 부족했다는 비판을 들을 수 있어도 성실성 면에서 절대 부족했다고 볼 수는 없었다.
4.2.7. 기타 업적 차이
이명박은 서울특별시장 시절 행정력을 인정받아 대통령이 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청계천 복원사업과 2004년 서울 시내버스 개편이었다. 우선 청계천 복원은 과거 건설업에서 뛰었던 경력을 살려 그야말로 속전속결식으로 이뤄낸 덕분에 지금의 청계천이 복원되었으니 공이라고 할 만하다. 물론 청계천 복원 사업의 방향성에 대한 의문과 서울시장 시절 본인 임기 내에 복원하겠다는 생각 때문에 마무리가 너무 급해 졸속 처리되었다는 비판은 있었다. 예를 들면 광교 다리 등 여러 문화재를 제 자리에 복원하지 못한 걸 들 수 있겠다. 오히려 청계천 복원과 관련된 비판은 청계천 상인들을 이주시킬 목적으로 조성한 가든파이브 쪽에 집중된다. 가든파이브는 이명박 지지자들도 부정할 수 없는 실정이다.서울특별시 대중교통 개편 문제는 일각에서 비판도 받았던 청계천과 달리 초기의 시민 불편으로 인한 난맥상 정도를 빼면 별다른 문제는 없는 사업이었다.[74] 서울특별시의 버스에 지금의 RBGY 도색을 도입해서 분류한 것도 이명박 시장 시절이다. 당시에는 지랄염병 버스 같은 논란이 조금 일어 버스에 달린 알파벳 분류는 사라졌지만 어쨌든 버스 색을 통일해 가독성이 더 좋아지기는 했다. 도색분류와 함께 진행한 버스의 노선번호 체계 도입 역시 이명박 시장 시절의 업적이다. 새로운 체계를 이해하기만 하면 처음 보는 버스도 노선번호만으로 대략적인 노선의 개형을 추측하는 것이 가능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대중교통 개편 문제 역시 시스템 자체보다는 파생사업인 중앙버스전용차로 사업의 졸속진행[75]과, 티머니 도입 과정에서의 의혹[76] 쪽에 비판이 집중된다. 특히 교통카드 환승시스템은 끝내 이웃한 지자체와의 합의를 임기 중 끝내지 못해서 후임인 오세훈 시장이 마무리하기도 했다.
여하튼 많은 사업을 시행했고, 해당 사업들에 대한 비판도 많지만 성과도 많이 얻은 이명박에 비해 박근혜는 본인이 주도했고 대다수가 인정하는 큰 업적은 거의 없었다. 물론 박근혜도 대통령 재임 시기 여러 업적을 달성하였지만 전임인 이명박에 비해서 크게 체감되는 성과를 세운 것은 거의 없었다.
4.2.8. 두 사람이 구속된 사유 또한 다르다
이명박은 대통령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업인의 속성을 버리지 못하고 기업을 경영하며 터득한 모든 수법을 동원하여 부정부패를 자행했기 때문에[77] 뇌물수수가 주된 구속 사유로서 혐의에서 국정 운영 자체에 관한 내용은 없었다.반면, 박근혜도 구속 사유 중에 부정부패가 있긴 하지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문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최순실이라는 일개 민간인이 국정 전체를 농단하며 부정부패를 일삼았고 박근혜 대통령은 이를 묵인, 협조, 방기했다는 것이 주된 구속 사유였다. 좀 심하게(?) 표현하자면 최순실의 국정농단만 아니었으면 대통령 임기라도 끝까지 다 마칠 수 있었다. 구속 시기도 이명박은 임기 다 채우고 한참 뒤인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에 구속되었지만 박근혜는 임기도 다 채우지도 못하고 2017년 3월, 헌법재판소의 탄핵 판결을 받고 파면되었다.
그러나 2016년 겨울,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여파로 인해 국회에서의 탄핵안이 가결되어 박근혜의 대통령직이 정지 당했을 당시 이루어진 특검 조사 과정에서 박근혜도 최순실과 함께 대기업(삼성이나 SK, 롯데그룹)으로부터 뇌물을 받는 등 부정부패를 손수 저지른 사실이 일부 드러났다. 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국가정보원으로부터 특수활동비를 뇌물을 수수받았던 사실까지 드러났다. 자세한 내용은 국정원 특수활동비 청와대 상납 사건, 국가정보원 대북공작금 유용 사건 문서 참조.
채널A의 시사 프로그램 외부자들에서 이명박근혜 프레임이 온당하냐는 것을 주제로 토론이 벌어진 바가 있었는데, 보수 패널인 전여옥과 안형환은 모두 이명박이 국정 평가에 관해서는 다소 논란이 있지만 박근혜처럼 정신 나간 행위를 한 것은 아니고, 이명박과 박근혜는 사이가 매우 나빴으며, 프레임 갈라 놓기는 위험하다고 하면서 이명박근혜 프레임은 타당하지 않다고 이명박근혜 프레임에 관한 반대 의견을 밝혔다.
5. 비슷한 표현
- 4.19-5.16 이후 약 30여년간 유지되었던 3~6공 초반 군사 정권 시기를 거론할 때 '박ㆍ전ㆍ노 시대'라는 표현이 좌파 평론가 사이에서 어느 정도 돈 적이 있었다.
- 장도리 작가인 박순찬은 이 용어를 활용하여 이두박근과 산삼 년근에서 따 와 '이명박근(근육 근(筋)&뿌리 근(根))' 드립을 치기도 했다. 2013년 10월 17일 2017년 11월 3일
- 2018년 혜경궁 김씨 의혹이 터졌을 당시에는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안티들이 이들을 싸잡아 '이재명박근혜경궁'이라는 표현을 쓰며 퀸의 The Miracle 앨범 커버를 패러디한 짤을 만들기도 했다.#
- 20대 대선에 들어서며 문재인과 이재명을 합쳐 문재명이라고 지칭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이재명이 20대 대선에서 승리할 경우 이 별명이 이명박근혜처럼 같은 당의 연속된 두 정부를 지칭하는 의미로 쓰일 가능성이 높았으나 윤석열의 당선으로 이 별명은 쓰이지 않게 되었다.[78]
6. 기타
- 오마이뉴스 기사에 따르면 박근혜와 이명박은 세 다리 건너 사돈 관계라고 한다. LG와 GS가 두 후보 사이에 놓여 있기 때문이라나. 덤으로 이 기사에서는 박근혜의 사촌언니[79]의 시숙의 처남인 허광수 삼양인터내셔널 회장이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과 사돈을 맺었으니 박근혜가 조선일보의 먼 친척뻘이라는 것도 언급하고 있다. #
7. 관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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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제 둘의 사이는 매우 나빴으며 당내 경선 당시 BBK 주가조작 사건과 박근혜와 최태민의 부적절한 관계 등 서로의 치부를 낱낱히 거론하면서 극한으로 대립했고 퇴임 후 의혹들이 사실로 밝혀지면서 구속 수감되었다. 각각 10년과 11년이 지나 한 명씩 구속되어 재판에 넘겨졌으며 이명박은 징역 17년을, 박근혜는 징역 22년을 선고받았는데 두 사람 모두 구속된 지 약 4년 9개월 만에 사면되었다. 덕분에 당시 한나라당 경선은 "진짜로 흑색선전이 없는 팩트로만 가지고 싸웠다"면서 네티즌들에게 수없이 재평가되기도 했다.[2] 노무현 전 대통령 퇴임 및 이명박 전 대통령 취임일이다.[3] 박근혜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여파로 헌법재판소에 의해 대통령직에서 파면된 날이다.[4] 이명박의 BBK 주가조작 사건, 박근혜와 최태민의 부적절한 관계 등 두 세력의 수장에게 있어 가장 치명상이 될 수 있는 논란의 대부분 이 과정에서 쏟아져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둘은 나란히 대통령이 되었지만 결국 10년이 지난 2017년에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후 이 논란의 뿌리가 드러나 나락으로 떨어졌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둘이 싸우다가 둘 다 망했다는 말도 일리가 있지만 이명박 의혹은 처음에는 박근혜 측에 의해 이 의혹만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 의혹이 드러난 직후 이 의혹을 적극적으로 캐내기 시작한 정봉주와 주진우가 이명박의 의혹에 대해 적극적인 공격을 했고 이명박은 정봉주를 고발했지만 정봉주와 주진우는 지속적으로 이런 사실을 캐냈다. 결국 사실을 캐낸 정봉주와 주진우가 알아낸 사실을 검찰 등에게 자료를 제출하면서 그 증거로 이명박 역시 구속되었다. 그러나 이명박이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퇴임한 지 5년이 지난 뒤에 구속된 것으로 뒷북수사 논란을 빚었다.[5] 이명박과 박근혜의 죄수번호를 붙여 적은 것. 716과 503을 합하면 이명박의 생일이자 결혼기념일, 대통령 당선일인 1219가 된다.[6] 경제성장률 7%, 10년 내 국민소득 4만달러, 세계 7위권 선진국[7] 다만, 2008년 세계금융위기는 서구권이 직격탄을 맞았지 아시아 지역은 당시 중국의 성장 등과 맞물려 피해를 상대적으로 덜 받았다고 평가받는다. 그렇다고 해도 같은 동아시아 국가인 대만은 -1.6%, 일본은 무려 -5.5%의 마이너스 성장률를 기록했다는 것을 감안하면(참고로 1997년 외환 위기 시절인 1998년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5.1%였다.) 겨우겨우 플러스 성장이나마 기록할 수 있었던 한국의 대처는 고평가받을 수밖에 없다. 당시 한국보다 부유했던 남유럽 국가들이 PIGS 소리를 들을 정도로 추락한 것과 비교하면 더욱 주목받을 만하다.[8] 당시에는 국내외 막론하고 한국이 -2 ~ -4% 수준의 마이너스 성장을 할 거라는 의견이 많았지만 실제로는 대침체 시기인 2009년 메이저 선진국 중 호주와 함께 유이하게 플러스 성장(0.8%)을 기록했다.(전체 선진국 중에서도 플러스 성장을 한 5개국 중 4위였다) 그러나 747 공약을 못 지켰다는 것에 대한 국민들의 반발과 고환율로 인한 물가 상승 때문에 당시에는 이런 공적도 계속 주목을 받지 못했다.[9] 다만 당시에는 반값등록금 문제 때문에 주목받지 못했다.[10] 아시아/비G7 국가 중 최초 개최이다.[11] 사실 당시까지만 해도 한국은 스페인에 비해서도 강한 편도 아니었다. 한국이 강대국의 최소 급에 이른 것은 이르면 박근혜 정부 초기, 늦으면 문재인 정부 중기에 들어와서야였다.[12] 이는 국가정보원을 동원해 이명박 정부의 방송장악 블랙리스트를 작성한 것에 기인한 것이다. 사건 당시에는 국정원의 개입이 드러나지 않았다.[13] 이는 후술되어 있지만 군부독재 세력을 계승했다고 평가받는 친박 세력과는 다른 친이계가 벌인 짓이었기 때문에 대중들에게는 또 다른 의미의 실망감을 안겼다. 더 심각한 점은 이런 행위를 말린 (대선에서 박근혜 대신 이명박을 도운) 당내 소장파들조차 눈에 거슬렸는지 죄다 토사구팽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명박 정부의 몰락은 이때부터 시작이었다고 보는 사람들도 많다.[14] 아이러니한 것은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계 정당은 물론 친박계에서 결사반대한 미디어법이 통과된 덕에 JTBC가 설립되고 JTBC는 박근혜의 몰락에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다는 사실이다.[15] 다만 당시 떠돌던 루머들은 후에 터무니없이 뻥튀기된 것으로 밝혀졌다.[16] 다만 이명박은 노무현에 대한 수사를 반대했지만 검찰이 무시하고 노무현을 수사하다가 이 사단이 났으며 심지어 이는 정두언이 증언한 것이다. 그러나 욕은 대통령인 이명박이 다 먹게 되었다.[17] 후에 이명박이 직접 지시한 것으로 확인되었다.[18] 여기서 정점을 찍은 것이 바로 세종시 문제 등 이명박의 공약 파기에 대한 비판들이었다.[19] 다만 이명박 정부 극초기부터 이명박 대통령과 친이계를 매우 비판하면서 야당과 협력한 적이 많다.[20] 실제로 박근혜 정부는 점수 상승을 감안하지 않은 세계의 자유 지수 감소폭이 무려 6점인데(참고로 점수 상승을 감안하지 않은 하락폭은 3점이다.) 어느 수준이냐면 로드리고 두테르테(!!!)와 거의 동급이다. 사실상 선진국 지도자 중에서는 조지프 무스카트, 도널드 트럼프, 베냐민 네타냐후와 함께 한 손에 꼽히는 수준으로 권위주의적인 인물로 평가받았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자세한 사항은 박근혜 정부/평가/민주주의 후퇴 문서 참조. 반면 이명박 정부는 국정원 여론조작 사건으로 2014년 B3이 1점 감점되는 게 점수 하락의 전부였다. 대신 한국의 정치적 권리 등급은 이 사건 하나로 1등급에서 2등급으로 하락했지만.[21] 당연히 이 계획은 문자 그대로 진리국 건국과 동급으로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애초에 탄핵 기각부터가 불가능한 것이었으니... 자세한 사항은 2017년 계엄령 문건 사건 문서 참조.[22] 쉽게 말해 법과 정의 집권 시기 폴란드의 축소판 수준의 체제였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이 둘은 언론장악, 반대파에 대한 흑색선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 전설적인 민주화투사 겸 노벨평화상 수상자에 대한 격하 움직임(법과 정의 정부에서는 레흐 바웬사가 공산당 첩자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등 놀랄 정도로 유사한 행각을 보였다. 사법부 장악은 국정원에서 계획, 이명박에게 보고까지 했다가 이명박도 이건 영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무산되었다. #[23] 다만 이명박은 검찰에게 노무현 대통령을 구속시키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지만 검찰이 이를 어기며 독단적으로 수사를 한 것이라고 하는데 심지어 이는 이명박의 비판자로 전향한 정두언이 증언한 것이라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물론 최고 지도자로써 전직 대통령에 대한 과잉수사를 막지 못한 것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은 질 수밖에 없지만.[24] 최악의 정권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최악은 상당히 주관적인 표현이라 개인의 가치관 등에 따라 의견이 다르다. 예를 들어 독재정권 시절처럼 권위주의적 사회 분위기에 시민들을 탄압하고 고문하던 정권이 더 최악이었다고 보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정치 성향과 관계없이 헌정 사상 최악의 정부로 평가받는 정부는 전두환 정부인데 최순실 게이트 시점에서 박근혜는 그 전두환마저 뛰어넘을 정도로 평가가 극악으로 떨어진 적도 있으며 극우 성향 커뮤니티에서도 문재인을 박근혜 이상으로 증오하기는 할지언정 박근혜를 진심으로 좋은 대통령으로 평가하는 경우는 사실상 전무하다.[25] 물론 출산율 0명대 달성은 박근혜 시기가 아니라 후임인 문재인 정부 시기에 이루어졌지만 출산율 연속 하락의 스타트를 끊은 시기는 박근혜 정부 시기가 맞다.[26]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절까지 따지면 이승만이 탄핵 원조긴 하지만 일단 광복 이후 기준으로는 첫번째 탄핵 인용이다. 외국에서도 탄핵당한 대통령은 매우 드문데 제2차 세계 대전 후 탄핵당한 국가원수는 단 12명밖에 없다.[27] 사실 그렇다고 진짜 '잃어버린 4년'이라는 용어가 많이 쓰이는 것은 아니고, 그냥 최대한 엮이는 것을 피하고 언급하지 않으려고 한다.[28] 박근혜 탄핵 이후 잔잔하게(?) 이명박을 재평가하는 부류들은 부정부패 등 도덕적 문제는 있었을지언정 한미동맹 강화나 G20 정상회의 개최, 2008년 경제위기에서 그럭저럭 선방하는 등 긍정적 부분도 있었다는 점을 강조한다.[29] 말이 담론이나 정책의 충돌이지, 핵심은 자신에 대한 비판을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철저하게 깔아뭉개는 박근혜의 특성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30] 박근혜 정부 말기 접어들며 조선일보가 슬슬 정권의 부패 스캔들 의심 등 견제형 기사를 내기 시작하자 송희영 주필 비리 논란 등을 거론하며 원조 부패 기득권 세력이 누굴 나무라느냐는 식으로 옹골찬 디스를 날렸다. 이는 당시 조선일보가 이명박과 연줄이 있다는 식으로 친박 지지자들 사이에 평이 안좋은 것도 한몫했는데, 이후 탄핵 정국에서 월간조선이 태블릿 PC 날조설 등을 옹호하며(2020년 법원 판결로 허위 보도에 대한 정정 사과문까지 냈다.) 거의 소설급 찌라시로 박근혜를 쉴드친 것을 생각해 보면 웃픈 부분이다.[31] 이명박의 부패라고 해봤자 가장 스케일이 큰 게 차명기업 운영하는 수준으로 박근혜에 비하면 애들 장난 수준이었다.[32] 특히 박근혜 탄핵 이후로는 친이계 쪽에서 껄끄러워하는 경우가 더 많다. 사실 친박계는 탄핵 이후 많이 몰락한 상태기도 하고.[33] 전여옥이 대표적이다. 박근혜 정권을 보수 정권이 아닌 사이비 정권이라는 평까지 했을 정도다. 다만 전여옥은 참여정부 때까진 친박으로 분류될 정도로 박근혜랑 친밀했다. 물론 내부사정은 그들만 알겠지만 어쨌든 친박계에서 팽 당한 이후부턴 친이계로 넘어가 박근혜를 격렬하게 디스하기 시작한다.[34] 실제 이명박이나 박근혜나 대기업/재벌 친화적인 정치를 했다고 알려져 있다(대기업 친화와 기업 친화는 엄연히 다른 말이다). 다만, 박근혜는 재벌 친화적이었다기보다는 재벌들 슬그머니 압박해 돈 뜯어내는 딱 군부 독재 시절 스타일이긴 했다. 이게 문제가 되어 터진 것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시발점이 된 미르재단 문제다.[35] 사실 이 부분이야말로 진영간 인식차가 가장 큰 부분 중 하나이다. 애초에 전제 자체가 다른 것이다.[36] 대다수 한국의 보수계 인사들이 탄핵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 중 상당수는 헌재의 탄핵 결정은 존중하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의 탈탈 털기식 조사같은 그들 기준 정치적 보복 냄새가 나는 행위는 그만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 박근혜 전 대통령을 구속 기소하기로 결정했던 검찰 측에서 일명 돈 봉투 만찬 사건이 터지면서 불만은 더 커졌는데 유영하 변호사는 23일 박근혜 전 대통령 변론 도중 검찰의 박근혜 뇌물죄 적용을 강하게 힐난하며 검찰 측의 말대로면 돈봉투 만찬 사건도 명백하게 뇌물죄 및 수뢰죄가 적용됨을 언급했다. 물론 진보 진영에서는 박근혜나 검사나 둘 다 뇌물죄가 맞으니까 빨리 징역에 처하라고 한다. 뭐, 돈봉투 만찬 사건은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 조금 해프닝적인 성격도 있다.[37] 다만, 이는 유승민이 보수 최대 정당인 자유한국당을 탈당해 소수정당인 바른정당으로 출마했기 때문인 점도 크다. 결국 대선에서는 결선투표제가 도입되지 않는 이상, 사표 방지를 위해서라도 여당과 제1야당 후보의 싸움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당장 당시 자유한국당에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찬성한 의원들 역시 많았기 때문에 홍준표에 간 득표가 무조건 탄핵 반대 세력이 던진 표라고 보는 것은 무리며 박근혜도 과거 독자정당 시도를 한 적이 있었지만 지지부진한 지지율에 소리소문없이 복당한 적이 있었다. 유승민 전 대표는 박근혜가 직접 '배신의 정치' 를 들먹이며 프레임을 씌워댔기 때문에 둘이 단일화했더라도 얻는 이득이 크지 않았을 거라는 시각도 있었다.[38] 반대로 이명박과는 상당히 친밀하였다.[39] 물론 진짜로 탄핵에 찬성한 것이 아니라 탄핵사태에서 무능하게 대처하여 탄핵당한 박근혜에 대한 비판이자 안타까움을 표한 것이다.[40] 군부독재 시절 이들 위주의 정당이었던 민주정의당, 신민주공화당을 가리킨다.[41] 안국포럼 등의 단체. 예를 들어 김영우와 조해진이 안국포럼 출신이었다.[42] 물론 이 중 이명박 정부에 마지막까지 남은 핵심 인사는 이재오 정도뿐이다. 정두언, 남경필 등 소장파들은 초기부터 이상득계와 반목하다가 토사구팽되었고, 이상득계는 이상득이 이명박 정부 시절에 부패 혐의로 구속되며 몰락한다.[43] 박정희 정권 시기이던 1960~1970년대 당시 이명박은 2, 30대의 청장년층이었다.[44] 다만, 이명박은 한나라당 대선 경선 이후 박근혜를 끌어안기 위해 박정희를 추켜세우기도 했는데 문제는 정권을 잡고도 유지되어 박정희 성역화 사업을 계속 추진하였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특히 대선 경선 당시 이명박을 공개 지지했던 김영삼 입장에서는 이명박의 그런 모습은 굉장히 떨떠름했을 것이다. 사실 이는 소위 개혁보수를 표방하는 인사들 자체가 독재추종세력이 많은 어떻게 보면 변질된 한국식 보수의 특성 때문에 이론과 현실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명박은 개혁보수와도 거리가 있는 인물이었지만 친이계에는 분명 개혁보수 세력이 포함되어 있었고, 대표적인 인물 중 한 명이 진짜 자유민주주의적 보수 가치를 찾자고 주창하던 정두언 전 의원이었는데 상기되어 있듯 이명박 정부 초기에 이명박 비난으로 날아갔고 지금은 고인이 되면서 당분간은 맥이 끊겼다고 봐야 할 듯하다.[45] 상대 후보가 노인 비하 발언으로 논란이 된 정동영이었다는 것도 감안해야 하지만, 이를 감안해도 이명박은 민주화 이래 최대 득표율 격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46] 그 5선 국회의원직 또한 4선까지는 텃밭 대구 달성군에서, 그리고 5선은 비례대표로 가져간 것이었다.[47] 심지어 국회의원 시절에도 법안 제출을 잘 하지 않는 의원으로 유명했다. 즉, 이때부터 성실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다.[48] 친유는 사상적 유사성은 있지만 수장인 유승민은 원조친박 출신이라 계보도 측면에선 좀 꼬이긴 한다. 물론 더 따지고 보면 유승민은 친박 이전 이회창계였고 이회창 역시 YS가 픽업한 인물이니 어찌어찌 이어지긴 한다만.[49] 친홍계도 강경보수 계파에 속하지만 비박계이다. 좀 더 정확하게는 독고다이 성격이 강한데 홍준표부터가 본인은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김영삼을 찍었다고 할 만큼 그의 지지자였고 정계도 YS에게 픽업되어 올라와 YS 존경 드립도 치던 키즈였으나 2010년대 들어선 박정희 존경 드립을 치기도 하고 정책적으로도 동성애 비난 등 꽤나 강경보수스런 모습을 보여줘 온건보수주의라고 보긴 어렵다.[50] 70~80년대 민주화 운동을 펼친 운동권의 유명인이었으며 정치 시작도 진보정당인 민중당에서 했으나 결국 총선에서 저조한 득표율로 인해서 해산되었다. 이후 YS에게 픽업되어 지금과 같이 보수정당의 거물이자 친이계의 좌장이 되었는데 민주화 운동가 출신 대통령인 김영삼이 보수정당의 DNA를 바꾸고자 민중당 해체 이후 무주공산이 된 이재오, 김문수 등 재야 출신 민주당계 및 노동운동가들을 자신의 여당인 민주자유당 및 신한국당으로 대거 끌어들이면서 지금과 같이 보수계의 거물로 자리잡게 되었다. 21세기 들어서 친박으로 전향한 김문수와 다르게 이재오는 운동가 시절의 신념을 아직도 가지고 있었는지, 군부독재 세력의 후신이라 할 수 있는 박근혜와도 엄청나게 대립하는 등 독재 행위 및 반민주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비판적인 모습을 보인다.[51] 6월 항쟁을 주도하였다. 정병국은 그가 곤경에 처했을 때 도와준 사람이 김영삼과 상도동계였고, 이후 상도동계에 편입되었다.[52] 노무현은 현재 김대중과 더불어 더불어민주당의 정신적 지주이지만 계보적으로 시초는 같은 PK 출신이기도 한 김영삼의 설득으로 정계에 입문한 YS 라인이었다. 다만 노무현은 1990년 3당 합당에 반발하여 꼬마민주당에 합류했고, 최종적으로 DJ의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해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당계 정당 내 동교동계 - 친노 구도가 만들어지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인연으로 인해서인지 몰라도, 노무현의 친우였던 문재인 전 대통령은 김영삼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게 되었고, 1988년에는 YS의 정계입문 제의를 거절하였으나 2010년대 들어 정계입문을 한 후 김영삼과 화해를 제대로 못 하고 결국 사망한 노무현과 다르게 문재인과 김영삼의 관계는 대체로 원만한 편이였고, 김영삼도 살아생전 상도동 자택에 찾아오는 문재인을 반갑게 맞이하였다. 또한 문재인은 김영삼이 입원할 당시에 문병을 온 적도 있었으며 김영삼이 서거하자 빈소에 조문을 와준 것은 물론, 국가장 영결식에도 참여해서 그를 추모하며 떠나보냈다.[53] 지금은 정치와는 거리를 둔 연예인이지만 한때 김영삼의 제의로 인해서 잠시 정치쪽에 몸을 담은 적도 있었다. 여담으로, 2005년에는 정치사극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자신을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만든 인물인 김영삼하고 사이가 안좋았던 철천치 원수들 중 하나인 독재자 전두환 역할을 맡은 적이 있었다. 참고로 김영삼의 딸(김현철의 누나)이 이덕화의 초등학교 6학년 때 같은 반 친구이기도 하다. 그래서 김영삼은 이덕화를 자신의 장남처럼 대우하고 아꼈다. 이를 계기로 이덕화는 14대 대선시절인 1992년에 민주자유당 대통령 후보인 김영삼의 지지연설 및 대선광고에 출연한 바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15대 총선에 신한국당 소속으로 광명시 갑에 후보로 출마했지만 새정치국민회의의 남궁진에게 낙선하게 되어 한동안 잠적해야 했고, 이후로는 정치하고는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이후 김영삼 서거 당시 빈소에 조문을 오는 등 극진히 예우하였다.[54] 지금이야 강성극우 친박으로 유명한 사람이지만 조원진이 처음 정치쪽에서 일하계 된 계기가 아이러니하게도 박정희와 박근혜 쪽이 아닌 당시 통일민주당에도 입당했었던 상도동계 황병태의 비서관으로써 입문한 것인데 90년대 이후로는 기업인으로써 일하다가 2008년에 박근혜에 대해서 호의를 보여 친박연대로 첫 초선 국회의원을 한 것으로 인해 오늘날과 같은 친박계 정치인이 된것이다.[55] 다만 탄핵 이후 박근혜와 수감시설에 편의시설 안들여보내줬다고 갈등 관계가 좀 있었다.[56] 이명박도 박정희 정부 시절 한일수교 반대 시위를 벌이다가 구속당한 적이 있다. 즉, 젊은 시절부터 강경보수 계파랑은 연이 떨어진 사람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개혁보수파랑도 사이가 원만했던건 아니지만. 정확하게는 집권 초기까진 사이가 괜찮았으나, 정두언 등 개혁보수 세력의 조언을 무시하면서 점점 사이가 멀어진다.[57] 두 대선 모두 어떤 후보가 나가든 당선은 확정적이라는 분위기가 뿌리내린 선거였다는 점은 비슷했으므로 후보 경선 열기가 뜨거웠지만 17대 대선의 한나라당 후보 경선은 이명박, 박근혜 둘 다 우위를 평가하기 힘들 정도로 용호상박이었던 반면 19대 대선의 민주당 후보 경선은 문재인 독주 체제가 쭉 이어져 사실 한나라당 후보 경선에 비하면 그렇게 진흙탕 싸움으로까지 번지진 않았다. 게다가 사상-계보적으로도 친이, 친박만큼 크게 차이나지도 않았다.[58] 다만 DJP연합의 한 축이었던 김종필은 스탠스가 좀 묘하긴 하다. 일단은 박정희 정부 시절 2인자긴 했지만, 현실은 2인자 견제가 매우 심했던 박정희 덕분에 가택수사까지 여러 차례 당할 정도로 박정희와 사이가 틀어졌기 때문이다. 이후 김영삼과는 사이가 좋았고, 김대중 때는 합당 논의도 있을 만큼 나름 사이가 괜찮았으나 김종필이 내부 세력을 제압하지 못해 결국 물 건너가고 본인도 정계 은퇴한다. 이후 보수 진영 원로로 활동하긴 했지만 박근혜와도 사이가 안 좋아 2007년 대선에선 박근혜 대신 이명박을 지지했다. 원조 유승민? 2016~17년 탄핵 사태 당시에도 애비, 애미 안 좋은 점만 물려받았다고(박정희 겁쟁이 의심덩어리다, 육영수 자비로운 이미지는 대외선전용이고 현실은 탐욕스럽다) 본인 스스론 죽어도 하야 안 할 거라고 고집불통이라고 디스하기도 했다.[59] 이명박은 박근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는데도 박근혜가 탄핵 사유를 부인하자 비웃는 말투로 본인이 뭐라 하든 전 국민이 다 알고 있으니 순리에 따르면 된다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60] 그 덕에 안철수 후보가 MB 아바타라는 흑색선전에 시달리기도 했다. 여담으로 MB 아바타라는 발언을 안철수 후보가 먼저 꺼내었다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는데 2012년 대선 당시 언론에서 먼저 제기한 것이다. 그러다 안티들의 공세에 2017년 대선 당시 TV토론회에서 공개적으로 안철수 후보가 꺼냈다가 유치하다며 지지율 하락을 자초했다.[61] 애초에 이명박과 안철수는 사상이 좀 다르고 안철수 본인도 정계 진출 이후 이명박에 비판적이었기에 MB가 지원할 이유가 없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고 원수랑도 손 잡을 수 있는 정계판에서 당시 정치 구도상 친박도 친문도 맘에 안차던 MB 세력이 안철수를 지원해 줄 동기는 충분하긴 했다. 안철수가 명예직에 가깝긴 하지만 MB정부 자문위원회 비슷한 조직에 속했던 적도 있었고.[62] 정두언, 전여옥 전 의원이 자서전에서 공통적으로 한 말이다.[63] 다만, 4대강 정비 사업 등 이명박 정부의 핵심 정책은 오히려 신자유주의 시장경제 정책보다는 케인즈주의 관치경제와 비슷한 형태를 띄어 양쪽 진영에서 동시에 호불호가 나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부분은 2007년부터 기미가 보였고 2008년에 본격적으로 터진 대침체로 인해 신자유주의의 이미지 자체에 타격을 입어 케인스주의가 다시 대두되었다는 점도 어느 정도 감안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64] 다만 한미 FTA를 처음 추진한 건 이명박 정부가 아닌 참여정부였다. 물론 이때 노무현 대통령도 지지층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는데 지지층의 배신감을 이해한다며 오히려 이건 자기가 지지자들을 설득해야 할 문제라고 했다. 지지층에서 딱히 정권따라 입장을 바꾼건 아닌 셈이다. 이런 반대 여론 덕분에 이를 이용해 되레 미국과의 협상에서 좀 더 몫을 챙길 수 있었다는 평도 있다.[65] 이명박 정부는 북한에 대한 강력한 군사적 응징 및 제제 강화를 주장했던 데 반해, 후진타오 정부는 북한에 대한 제재 강화 반대와 남북한 양측의 이성적 대화를 촉구했기에 이로 인해 한중간 갈등이 생기기도 했다.[66] 다만 이것은 당시 중국이 시진핑 정부보다 상대적으로 덜 강경하다고 평가받았던 후진타오-원자바오 집권 시절이었던 것도 고려해야 한다. 실제로 후진타오는 이명박 정부 당시 한국과의 갈등이 있을 때면 이명박의 요구사항을 어느 정도 들어주기도 했다. 다만 중국이 북한의 도발에 대해서 어느 정도 북한 편을 들어 갈등이 아예 없던 것도 아니었다.[67] 오죽하면 미국조차 반대하던 중국 전승절 행사에 참여했을 정도였다. 다만 러시아 전승절 행사에는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으로 발생한 서방과 러시아의 갈등으로 인해 행사 참여 시 발생될 미국과의 외교관계 악화를 고려해서 불참했다.[68] 다만, 이명박도 집권 후반기에는 독도 방문과 일왕 사과 발언 등으로 당시 지지율 회복을 위해 한일관계를 파탄냈다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69] 이는 미국 오바마 정부의 강권 때문이었다는 일각의 주장도 있다. 요는 박근혜는 기본적으로 박정희 사망 이후에 신군부가 집권하는 걸 방관한 미국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데다 하도 다까끼 마사오라는 공격을 들어 어떻게든 친일이라는 딱지를 떼고 싶어했다. 그래서 미국의 반발을 무릅쓰고 친중정책을 펼쳐 전승절까지 참석한 것인데 이는 당연히 당시 오바마 정부를 크게 실망시켜 미국이 대놓고 한일관계에서 일본 편을 드는 상황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예전부터 미국은 중국과 러시아 견제를 위해 일본의 재무장을 찬성했지만 한국 때문에 대놓고 말은 못했는데, 박근혜가 대놓고 친중정책을 하자 눈치볼 것 없이 한일 간 분쟁을 해결하려고 찍어누른 결과물이 위안부 합의였다는 것이다. 다만, 이것도 주장이지 공식 문서 등으로 확인된 확실한 정설은 아니다.[70] 여담으로 이렇게 잠이 없는 사람들은 정신력 문제도 있겠지만 애초에 잠을 많이 자지 않아도 되는 유전자를 가졌다는 기사도 있다.[71] 성실성으로 유명했던 다른 대통령 중엔 노무현 전 대통령도 있는데, 이명박은 그 노무현보다도 더 일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72] 최고 권력자가 너무 부지런해서 아랫사람들이 제대로 따라가지를 못한다던가, 아랫 사람에게 위임해야 더 잘 돌아갈 수 있는 일들조차 최고 권력자가 부지런해서 지나치게 간섭한다던가, 지나치게 무리했다가 건강에 지장이 가면 오히려 손해라던가... 이명박을 비판하거나 진짜로 저런 문제가 있었다는 게 아니라 이런 점들 때문에 반드시 롤모델로 삼아야 될 정도는 아니라는 뜻이다.[73] 19세기에 체스터 A. 아서 미국 대통령도 하루에 6~7시간만 일한다며 게으른 대통령이라고 욕을 먹었지만 적어도 박근혜처럼 멋대로 휴일을 정하지도 않은 것은 물론 미합중국 해군 전력을 강화하고 펜들턴법 제정으로 엽관제의 폐단을 청산하는 등의 큰 치적도 있다. 심지어 국가 발전에 대한 의지가 전혀 없이 기행으로 나라를 망치기만 했던 희대의 독재자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조차 자기 마음대로 평일 중 하루를 휴일로 정했다는 말은 없으며 말년에 사실상 근무를 포기한 수준이었다고 해도 진짜로 아파서 일을 못 했다고 볼 여지가 넘쳐흐른다.[74] 여담으로 전국구 대중교통 개편 문제를 이명박 정부 때 한 걸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는데 알다시피 당시는 참여정부, 즉 민주당 정권 시절이었다. 중앙정부의 지원이 없다면 지방정부로선 한계가 있는 것.[75] 시스템 자체는 충분히 선진적이었지만, 임기 내 완공을 목표로 무리하게 강행한 결과 몇 가지 부작용이 발생했다.[76] 서울시에서 통용되는 기존 교통카드 시스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티머니라는 새로운 회사를 설립하여 정책적으로 지원하면서 기존 사업자가 고사했다. 다만 이는 기존 사업자인 유패스 쪽의 방만경영과 이상한 마케팅의 영향도 있었다.[77] 대통령이 되기 이전부터 전과 11범이었다. 학생 운동시절 전과를 빼더라도 상당한 부정부패를 자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78] 이재명 지지자 측에서 극문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일부 자칭 문파가 반발하고 윤석열 지지선언을 하며 뮨파라는 단어가 만들어지긴 했다.[79] 박정희의 형 박상희의 딸 박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