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제3지대 정당 · 명망가 정당 · 보수 정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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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래연합의 로고 | |
당기를 흔드는 박근혜 | |
한국미래연합 | |
<colcolor=#fb4b00> 영문 명칭 | <colbgcolor=#fff,#1f2023>Korean Coalition for the Future[1] |
창당일 | 2002년 5월 17일 |
해산일 | 2002년 11월 22일[2] |
선행 조직 | |
당 색 | 주황색 (#FB4B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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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02년 5월 17일부터 2002년 11월 22일까지 한국에 존재했던 보수 정당.[3] 당시 한나라당을 탈당했던 박근혜 전 의원이 창당한 정당이다.사무실 주소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나루로 57 (여의도동)에 있었다.
2. 창당 과정
2.1. 창당 배경
10.26 사건 이후 청와대에서 나와 육영재단 이사장 등을 맡으며 신당동에서 살고 있던 박근혜는 1997년 12월 4일 이회창 총재 지지 선언을 하며 한나라당에 입당한다. 하지만 이회창은 대권에서 낙선하고 한나라당은 야당이 됐지만 이회창은 여전히 한나라당을 장악하고 있었고, 박근혜 역시 당내 2인자 비슷하게 떠오르며 부총재직을 맡게 된다. 직후 박근혜는 1998년 재보궐선거에서 대구 달성군 의원으로 당선, 15대 국회에 입성하고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한다.그러한 가운데 이회창과 박근혜의 갈등은 2001년 말부터 생기기 시작했다. 당시 이회창은 대다수의 여론 조사에서 1위를 하며 차기 대권 주자로 입지를 다지고 있었는데, 박근혜도 벌써부터 대권 욕심이 있었는지 이회창을 비판하고 나선 것. 그렇게 되면서 이회창과 박근혜는 대선 경선을 놓고 갈등을 벌이게 되고, 결국 2002년 2월 28일 박근혜는 한나라당을 공식 탈당한다.
이후 박근혜는 무소속으로 활동하다 2002년 4월 26일 신당 창당을 선언하고[4] 창당 발기인 대회를 통해 신당 이름을 '한국미래연합'으로 정했다. 당시 양당체제를 떠난 것이므로 이른바 제3지대 논의가 그 때도 불붙었다. 당시 자유민주연합, 이인제 측, 정몽준 측과 연대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기도 했다. #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격세지감.
그리고 창당 대회 4일 전인 5월 12일, 박근혜는 2박 3일 일정으로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을 만나 회담을 하고 돌아온다.[5] 이 당시 박근혜는 창준위 위원장을 맡고 있었는데, 때문에 당시 보도를 보면 김정일 위원장과 박근혜 위원장이라고 직함이 등장한다.
2.2. 창당 대회
한국미래연합 창당식 영상[6] |
3. 지방선거에서의 처참한 결과
초반 한국미래연합의 지지율과 화제성은 상당했고, 이것이 노풍과 시너지효과를 내서 한나라당이 수도권은 물론이고 영남권에서도 부진할 것이라는 말도 나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지지율과 사람들의 관심도 떨어졌고, 결정적으로 2002년 6월 치러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이 광역단체장 11곳을 싹쓸이하는 대승을 거두며 이회창의 입지는 단단해진데 반해, 미래연합은 고작 2명의 비례대표 광역의원을 배출하는데 그치게 된다.그리고 이렇게 지방선거에서의 처참한 성적표를 받아든 한국미래연합은 독자출마는 커녕 당의 미래조차도 보장받지 못하게 된다. 오죽하면 유시민이 2002년 7월 "한국미래연합은 미래를 추구한다면서 정작 미래는 없는 당"이라는 식으로 풍자하기도 했을 정도. 그와중에 한나라당은 박근혜에게 다시 복당 제안을 하지만, 박근혜는 자존심이 상했는지 이를 거절하며 복당이 무산된다.
4. 후단협과 정몽준
2002년 9월, 2002 한일 월드컵 열풍을 타고 정몽준이 출마를 선언한다. 이로 인해 민주당 내에서는 비노 계층들이 후단협을 만들어 정몽준-노무현 단일화를 요구했고 이에 응하지 않으면 탈당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때 후단협은 당시 하나로국민연합을 창당한 이한동 전 총리 등과 더불어 당시 독자 출마를 시도하던 박근혜에게도 제안을 던졌다. # 심지어 후단협은 노무현, 정몽준, 이한동, 박근혜 등등 후보들의 단일화를 요구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황당한 좌우 컬래버레이션.하지만 박근혜는 정몽준과 함께 할 의사가 없다고 밝혔고[7] 박근혜가 이를 문제삼자 강 변호사가 떠났는데, 막상 박근혜는 정몽준의 통수를 치고 한나라당에 복당했다., 결국 이로 인해 후단협의 초기 계획은 무산되고 노무현-정몽준 두 사람으로 단일화 범위가 좁혀진다.
5. 박근혜의 한나라당 복당과 자진해산
이렇게 되면서 한국미래연합은 사실상 당 간판만 유지한 당이 되어버렸고, 이때 이회창이 다시 박근혜에게 손을 내민다. 초반에는 한나라당 복당을 결사반대했던 박근혜도 사면초가가 되어버려서인지 이회창의 제안에 솔깃해했고, 6차례에 걸친 합의를 통해 결국 2002년 11월 19일 박근혜 의원은 한나라당과 다시 당대당 통합 형식으로 빌리면서 복당하면서 원외정당이 되었다.[8] 11월 22일에는 2차 전당대회를 통해서 자진해산하였다.이후 박근혜는 이회창 캠프에 합류하여 대선 기간 동안 이회창 후보를 도왔지만, 대선에서 또(...) 이회창이 낙마하며 그는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일선에서 빠지게 된다. 그리고 차떼기 사건과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 속에서 기존 당 지도층이 붕괴된 한나라당에 구원투수로 등장한 박근혜는 이회창의 빈자리를 대체하고 한나라당을 장악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6. 당가
한국의 미래가 여기에 있다. 우리의 희망이 이곳에 있다. 뜨거운 가슴으로 나라를 사랑하는 한국미래연합의 희망찬 역사 어제보다 나은 미래 오늘보다 나은 내일 국민과 함께하는 한국미래연합 새 나라 새 정치 여기에 있다. 화합과 번영이 이곳에 있다. 깨끗한 나라, 올바른 사회, 일하는 정당, 행복한 국민 어제보다 나은 미래 오늘보다 나은 내일 국민과 함께하는 한국미래연합 |
7. 기타
2008년에 정광용을 중심으로 한 박사모 세력이 시민당[9]을 인수하여 한국미래연합이라는 이름으로 변경하다가, 1주일만에 도로 시민당으로 환원되었다. 기사8. 역대 지도부
한국미래연합의 경우 당대표의 직함을 '대표운영위원'으로 불렀다. 당시 지도체제가 집단지도체제였기 때문이다. 운영위원은 오늘날의 최고위원에 해당한다. 대표운영위원은 당연히 박근혜가 맡았고, 운영위원에는 조익환(대양통신 공동대표이사), 김한규(전 총무처장관, 전 국회의원), 한상인(정치언어통계학 박사), 최필립(전 리비아 대사), 이상렬(EG건설 회장), 이세영(인천 중·동·옹진 지구당 위원장)의 6명이 선출되었다. #대표운영위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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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처[2] 창당 6개월만에 해산됐다.[3] 대한민국 정당사 제6집에 따르자면 11월 19일 박근혜 전 의원이 당대당 통합의 형식으로 한나라당에 개별 복당하였고 11월 22일 원외정당이 된 한국미래연합은 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신송센터빌딩 3층에서 제 2차 전당대회를 가지면서 자진해산을 결의하였다. 이날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자진해산 신고를 하였고 중앙선관위는 11월 23일 정당법에 따라 등록을 말소하였다.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2명의 한국미래연합 광역비례대표의원들의 경우 대구광역시의회 4대 의원 김형준은 이후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였고 경상북도의회 7대 의원 박두필은 친박의 행보를 계속 걸었다.[4] 마침 이땐 노무현 후보가 새천년민주당 대선 후보로 확정되었던 때였다.[5] 참고로 박근혜 편지 사태는 이 방북 당시의 상황을 바탕으로 논란이 발생한 것이다.[6] 군소정당의 자료는 찾기가 매우 힘든 편인만큼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7] 정몽준이 김재규를 의인이라고 표현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 당시 정몽준 캠프에 김재규를 변호했던 강신옥 변호사가 참여하고 있긴 했다.[8] 결국 공식적인 합당의 법적 절차는 밟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합당이 아니라 복당에 가깝다. # #[9] 더불어시민당과는 무관한 군소정당이었다. 해산 이후 2012년 가인친환경당으로 재창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