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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07 20:35:48

계파 갈등


1. 개요

계파 갈등()은 말 그대로 계파 간의 갈등을 말하는 정치 용어다. 내부 분열의 한 종류다. 끝끝내 하나의 당으로 묶이기 어렵다고 여겨지는 경우에는 분당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만인이 서로를 견제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일어나며, 독재나 왕정 국가에서는 독재 집단 내부적에서만 일어난다.

계파 갈등은 정체성 정치가 약하고 빅 텐트정당이 정권을 과점하는 양당제 혹은 일당제 체제에서 많이 발생한다. 유럽의 다당제는 각자의 정체성과 지역등을 이유로 당을 만들고, 의원선거가 끝나면 연정의 형태로 합의하여 연립정권을 만드는 것이 일상적이고, 당 내부에서 계파간 갈등이 발생하더라도 어느 한 당이 의석수가 많지 않는한 계파 갈등이 표면화되기 힘드나, 영국,미국,일본,한국은 양당제가 자리잡혀있고 여야 할거 없이 빅 텐트를 형성하여 의석을 과점 혹은 독점하기 때문에 당 내의 정치 스펙트럼이 필연적으로 넓고 그 안에서 계파 갈등이 심각할 수 밖에 없는 구조이다. 처음부터 이런 나라는 계파 갈등으로 인한 분열과 정치비용 부담을 막겠다고 소수정당에 불리한 각종 제도를 심어놓은게 보통이라 어쩔수 없이 양대 정당의 당원이 되는 것 외엔 정치를 하기 어렵다. 중국같은 1당제 국가는 애초에 중국공산당외에는 구색정당이거나 정치참여가 불가능 하기 때문에 정치판 자체가 계파 갈등이다.

2. 원인

계파갈등의 원인은 매우 다양한 데 우선 자리의 한계를 들 수 있다. 자리는 한정적이므로 자리를 차지하고 분배하기 위해 집단적으로 뭉치고 분열한다. 이 과정을 단계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개개인들은 가지고 있는 자원에 따라 권력(자원 분배 권한)을 부여받지 않고, 모두 동등한 1인 1권력을 가지고 있다.
2. 가장 큰 권력을 획득하려는 개개인들은 자연스럽게 연합하여 정당이라는 형태를 구성하게 된다. 연합하지 못한 자는 권력에서 배제된다. 이에 따라 많은 정당이 생겨난다.
3. 최종적으로 한 정당이 가장 큰 권력을 획득한다. 권력 정당은 이제 정책을 통해 떡고물을 분배해야 한다. 권력을 분배하려는데 개개인에게 돌아가는 떡고물이 너무 적다는 생각이 든다.
4-1. 그래도 떡고물을 분배한다. 구성원에게 돌아가는 떡고물이 적어지면서 타인을 설득하고 행동할 유인을 잃고 흩어진다. 다시 1로 돌아간다.
4-2. 떡고물을 분배하지 않고 다시 갈등(계파갈등)을 일으킨다. 갈등함으로서 중심을 잃고 흩어진다. 다시 1로 돌아간다.
이러한 과정이 국가의 소멸까지 무한 반복되면서, 궁극적으론 그 누구도 장기 집권을 하지 못한다. 따라서 이런 계파 갈등이 일어나는 것 자체가 민주주의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며, 계파갈등은 민주주의의 작동방식으로 인해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하지만 오히려 이 때문에 국가의 효율이나 생산성이 떨어지게 되는 악영향도 일어난다.

또 다른 원인으로는 정치 이념의 차이를 들 수 있다. 정책을 정하는 것을 두고 대립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빚어지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자민당이라는 하나의 당이 압도적인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일당 우위 정당제), 자민당이라는 틀 내에서 계파 갈등이 벌어지는 일이 많다. 한 정당 내에 교섭단체가 여러 개 있을 수 있는(복수교섭단체) 규정 역시 계파 내 세력 경쟁을 가능하게 하는 한 요소이다. 자민당의 파벌에 대해서는 이 글을 참조.

3. 해결책

계파 갈등은 민주 국가의 정당에서는 자연스레 발생하는 문제이므로, 어떤 당이든 계파나 소집단 갈등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 이를 무리하게라도 해결하려면 당을 반민주적으로 운영하면서 상대 계파를 숙청하는 것 외에는 답이 없다.

당연히 이런 식으로 해결을 시도할 경우 후폭풍을 피할 수 없을 뿐더러, 당이 선거에서 참패하는 등 대형 악재를 직면할 경우, 당을 살려낼 만한 대안 세력의 부재로 인해 당의 몰락을 가속화하게 된다. 그러므로 계파가 다르다고 무조건 적대하는 것이 아닌, 서로 적당히 합의를 봐서 협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담으로 말레이시아에서는 당 내 계파 갈등이 극에 달하면 아예 사회등록부가 정당 등록을 취소시킨다. 실제로 1987년 ~ 1988년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이 명백한 집권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극에 달한 계파 갈등, 리더십 문제로 사회등록부가 정당 등록을 말소했으며, 이 때문에 오늘날의 UMNO는 당시 마하티르 빈 모하맛을 위시로 하던 당권파가 꾸린 신 UMNO(UMNO Baru)다.

그 이전 UMNO는 구 UMNO(UMNO Lama)로 구분한다. 이외에도 UMNO와 협력한 인민진보당2018년 총선 전후로 극심한 내홍을 겪다가 2019년 초 등록이 취소되었다.

4. 사례

4.1. 대한민국

4.1.1. 대한민국 정당 내 계파 갈등사

4.1.2. 보수정당

4.1.2.1. 한나라당

18대 국회 기준, 당시 한나라당 내 계파는 박근혜의 친박계와 이명박의 친이계가 있었다. 이 당시에는 한나라당 주요 현역 정치인들이 대부분이 친이계였고 및 당시 신한국당-한나라당 당적을 가졌던 상도동계 대부분이 친이계로 편입되면서 이 세력이 매우 비대해, 안국포럼[18] 등을 위시한 이명박 직계와, 친이계의 좌장 이재오를 위시해 모인 온건 보수성향 혹은 이재오의 최측근들로 구성된 이재오계, MB정부 초반 제1실세이자 상왕으로 불렸던 이상득의 측근들과 다수의 영포라인으로 뭉친 이상득계로 친이계끼리도 분파가 형성돼 있었다.

여담으로 MB정부 초반에는 이상득계의 목소리가 강했으나 후반기로 들어갈수록 이상득의 권력이 내림세로 기울면서 이재오계의 세력이 강해졌고 이재오가 이상득을 밀어내고 제1실세로 등극하게 된다. 이후 이상득계는 친박계와 제법 연대하여 이재오계를 견제했다.

MB정부 초중반만 해도 친이계가 주류였으나, 2009년부터 2010년까지 친박계가 조금씩 원내대표와 최고위원으로 오르는 일도 있었고 2011년부터 다시 친박계가 성장하는 형태였고 MB정부의 지지율이 떨어졌지만, 여전히 친이계 주도권의 형태가 계속되다가 2012년 총선 이전에 터진 박희태 돈봉투 파문과 최구식 사건 및 DDOS 사태 논란으로 범 친이계면서 당의 사령탑을 맡았던 홍준표가 여론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사퇴함과 동시에 박근혜 비대위체제로 변모하면서 친이계가 몰락하여 비 당권파가 되고 친박계가 주류로 바뀌었다. 그리고 새누리당으로 이름을 바꿈과 동시에 이 마저 당권을 잡았다. 이후에는 친이친무, 친유남원정을 비롯한 기타 비박 세력들과 같이 움직이게 된다.
4.1.2.2. 바른정당

어이없는 건 바로 위에 있는 새누리당에서 계파 갈등으로 분리된 정당인데 또 계파 갈등이 벌어졌고 일부는 위에 있는 새누리당의 후신인 자유한국당으로 '복당'했다.

친이계의 경우, 최측근으로 분류되는 친이 원로들은 늘푸른한국당을 창당하고 있었고, 바른정당의 경우에는 현역 친이계들이 이들과 같이 창당해서 친무와 친유의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했었다.

그런데 집권하면서 여권이 된 더불어민주당과, 더불어민주당의 우군 역할을 하면서 범 여권이 된 정의당이명박 前 대통령을 적폐청산 대상으로 지목하고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바른정당의 친이계들은 바른정당 2차 탈당사태 때 정병국을 제외하고 거의 다 자유한국당으로 복당했다.

2018년 1월에는 이명박의 최측근 김백준의 구속 직후 이명박이 피의자로 전환되면서 완전히 궁지에 몰리자, 친이계의 본진이었던 늘푸른한국당 지도부들도 당을 해산하고 이재오를 비롯한 지도부들은 대부분 자유한국당으로 입당하게 된다. 다만, 늘푸른한국당 내의 젊은 당원들이나 자유한국당에 대해 거부감이 심한 당원들은 대부분의 지도부를 따라가지 않고 바른미래당에 남았다.
4.1.2.3. 국민의힘

국민의힘은 당장 직전 선거에서 참패를 해 내 코가 석자 신세라서 일단 겉으로는 잠잠했다. 그러나 2021년 보궐선거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상황이 나아지자 지금까지 암묵적으로 위기상황이라는 상호 공감하에 어느정도 잠잠해졌던 계파 갈등이 다시 불거지기 시작했다.

친유 등 다양한 출신의 국민의힘 초선 그룹들과 한나라당, 새누리당, 자유한국당, 미래통합당 시절의 영남권 기반 중진들 간의 계파 갈등 조짐이 나와 지지자들이 우려 하고 있다. #

2021년 재보선 이후 1차 전당대회 사이에 국민의힘 초선 그룹은 국민의힘의 고질적인 특정 지역 정당 문제에 대해 비판하며 특정 지역 정당을 극복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기존의 영남 중진 의원들은 특정 지역 정당이라는 단어 자체가 없다고 부정하며 반발하고 있다.

또 다른 계파들의 와해 및 초선 의원들의 친유 비율이 높아지면서 친유 세력이 커지고 친유계의 김웅 의원이 지도부 도전을 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자 일부 의원들이 친유에 대해 지적하며 의심을 하거나 국민의힘 의원들 사이에서도 일부 친유를 견제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돌고 있는 상황.# #

아직 와해되지 않은 잔여 친박계의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에 대한 반발과 이에 대한 탄핵에 대해서 인정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탄핵 인정 측 간의 갈등이 다시 터져나왔다. 이에 대해 사면론 까지 거론하며 호응하는 중진과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해 선을 그으며 명백한 잘못이며 이에 대해 일부라도 탄핵을 부정해서는 안된다는 반발이 있다.# #

국민의힘/제1차 전당대회 당시 당대표 후보였던 나경원, 주호영 후보가 당시 여론조사 1위를 달리던 이준석 후보를 견제하는 과정에서 그가 친유로 분류된다는 점 때문에 보수 야권에서 대선후보 지지율 1위를 달리는 윤석열 전 검찰총장을 위시한 당 외 주자들 대신 유승민 후보를 밀어주는 편파 정치를 하지 않겠느냐고 공격하기도 했었다.

이준석 후보와 유승민 전 의원이 이를 일축하고 이후 당선된 이준석 대표가 비교적 고른 당 내 인사를 진행하고 이른바 '이준석 효과'라 불리는 전당대회 흥행과 국민의힘 우호도 상승에 찬물 끼얹지 말자는 당내 분위기 때문에 친유 소장파와 구 당권파의 갈등은 잠잠하지만, 본격적으로 대선 경선 레이스가 펼쳐질 경우 계파 논쟁이 다시 불거질 가능성도 존재한다.

대선 후보로 윤석열 후보가 선출되는 과정에서 이른바 윤핵관이 대두되고, 이준석 대표와 크고 작은 마찰이 빚어지면서 계파 구도가 친윤 vs 비윤으로 재편되고 있다. 일단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연승을 거두면서 다소 소강상태를 보이고 있지만, 이준석 대표에 대한 친윤계 인사들의 불만이 간간히 나오고 있어서 불씨는 여전히 남아있다고 볼 수 있었다.

이런 가운데, 성접대 의혹으로 이준석 대표가 당원권 6개월 정지라는 중징계를 받고, 윤석열 대통령이 권성동 대표 직무대행과의 텔레그램 채팅방에서 이 대표를 '내부총질하던 당대표'로 비유하는 채팅을 올린 것이 드러나면서 재집권 후 2개월여 만에 다시 친윤 vs 비윤의 갈등이 격화되었다.

그러나 이후 제3회 전당대회에서 윤석열과 척을 진 이들이 대부분 당대표 출마를 포기하거나 사퇴하는 등 비윤은 또다시 친윤에게 억눌린것으로 보인다.

4.1.3. 민주당계 정당

4.1.3.1. 새정치민주연합

새정치민주연합의 전신인 통합민주당 시절부터 갈등이 있었다. 통합민주당도 새천년민주당의 후신인 민주당열린우리당의 후신인 대통합민주신당이 야권 통합과 같은 민주당계 뿌리라는 이유로 새천년민주당-열린우리당 시절부터 이어져 온 갈등을 풀지 않고 합당해서 만들어 진 정당이다. 합당한 이후에 세월이 흐를수록 갈등이 더욱 커졌고, 새정치민주연합에서는 신세력인 안철수 세력도 이 갈등에 합류하여 더욱 더 갈등이 심해졌다.

이쪽의 경우 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으로 대표되는 새정치민주연합 분당으로 돌이킬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안철수는 야당 의원임에도 불구하고 여당인 새누리당 공격보다 자당 당 대표인 문재인을 더 많이 공격하는 일도 있었다. 다른 비노(혹은 비문) 세력들도 문재인을 공격했지만 안철수만큼은 하진 않았다. 이후 안철수와 친안과 호남중진들은 탈당하고 국민의당을 창당한다. 새정치민주연합에 잔류한 세력은 당명을 더불어민주당으로 변경한다.
4.1.3.2. 더불어민주당

2017년 대통령 선거 경선 과정에서 처음으로 대립했고 문재인이 경선을 통과하자 반문재인 & 친이재명 지지자들이 문재인보다 성향에서 공통분모가 더 많은 심상정으로 빠지면서 서로 감정이 나빠지다가 문재인이 결국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일단 갈등은 가라앉았다.

2018년 지방 선거의 경기도지사 경선 과정에서는 친문재인 지지층이 전해철을 더불어민주당 경기도지사 후보로 내려다 인지도에서 밀려서 이재명이 후보로 나오자 친문재인 지지층이 이에 불복하면서 차라리 남경필을 찍자며 반이재명 투쟁을 하지만 결국 이재명이 압도적인 차이로 경기도지사에 당선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기권표가 1위였으나 국내 법상 '기권표가 1위를 할 경우 재투표' 같은 법령이 없기 때문에 2위인 이재명이 경기도지사에 당선되었다.

2018년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당내 보수파인 김진표가 이재명 탈당을 논의할 수 있다고 말하자 강성 친문들은 김진표로 결집 하면서 이재명을 내치려 하지 않는 이해찬을 비토했고[24][25] 이 과정에서 호남 출신인 송영길은 잊혀졌지만 압도적인 인지도와 강한 여당을 내세운 이해찬이 당선됐고 김진표는 민주당 내 호남당원들이 지지하는 송영길에게도 밀려서 3위로 떨어졌다.

이후 강성 친문들이 이해찬, 추미애, 송영길 등을 친이재명으로 몰아가기 시작하자, 전세가 역전되어 극문들이 비판받기 시작하고 다시 갈등이 고조된다. 이 파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아, 경찰이 혜경궁 김씨를 김혜경이라 주장했음에도[26] 한때는 이재명을 맹비난했던 범친문 진영에서 이재명을 우호적으로 바라보는 등 오히려 강성 친문이 자충수를 두었다는 평. 이후 계파가 사실상 크게 3세력으로 쪼개지고 있는 상황이다. 당세의 대다수는 중립이거나 친문재인친이재명이 겹치는 온건파들이다. 양극단이 큰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2019년 6월 5일에 시험적으로 열린 민주당 당원 게시판에서도 이들이 싸움을 벌이고 있다.기사

안철수가 동교동계 호남 중진들을 데리고 나갔고, 문재인 정부가 여러 논란으로 지지율이 떨어져도 최소한 문재인에게 투표했던 40%의 고정 지지층은 잘 지키고 있기 때문인지, 2020년 기준으로 다른 당에 비하면 내부분란이 적은 편이다. 계파 갈등이 당의 지지율을 깎아 먹던 걸 기억 하는 친문 지지자들은 이러면 중도층이 내부 갈등이 터지는 야당보다는 안정적인 여당에 힘을 실어준다며 이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한겨레의 성한용 선임기자가 내부총질이 없으면 정치 역동성이 사라지고 비주류 계파가 정권을 잡아왔다며 비판 하는 사설을 쓰기도 했지만사설 친문 지지자들은 이 사설에 매우 부정적이다.[27] 21대 총선에서도 더불어민주당이 승리하면서 친문이 전성기 시절의 친이나 친박보다 더한 강력한 힘을 가진 상태다.

2020년 총선 이후 친문 지지층은 원래 지지하던 조국김경수는 재판 중이고 이낙연이 강력한 대선 주자로 올라갔기 때문에 이낙연을 지지하기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이재명이 대법원에서 무죄취지 파기환송되면서, 대선주자 지지율 2위로 박빙까지 치고 올라오거나 일부 여론조사에서는 이낙연을 추월하기도 하는 등 양강 구도가 시작되려는 상황이다. 그런데 민주당 지지층 내에서는 이낙연이 50%의 지지를 받고있는데, 이재명은 30% 정도뿐이라서, 강성 친문 지지층은 "이거 일부러 국민의 힘이나 야당 지지자들이 일부러 이낙연을 대선에서 배제하려고 이재명으로 일단 역선택하는거 아니냐."는 설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낙연의 2021년 1월 1일 이명박-박근혜 사면 발의 논란과 중대재해기업처벌법 후퇴 논란 등으로 인해 민주당 지지층에서 이낙연의 지지율이 내려가고 이재명의 지지율이 오르게 되었다. 2021년 기준으로는 민주당 지지층 내 지지율이 역전되어 이재명이 50%, 이낙연이 30%로 바뀌었다.

2021년 1월 6일에도 당 홈페이지의 당원 게시판에서 이재명을 지지하는 당원이 '이낙연 당 대표 퇴진 찬반투표'란 글을 만들었고, 이에 대항해 이낙연을 지지하는 당원이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출당 찬반투표'를 만드는 대결이 펼쳐졌다. 즉 친이재명 지지자들과 친이낙연 지지자들 간의 대결이 벌어진 것. #

2021년 2월 들어서는 이재명이 주장하는 기본소득제 문제에 대해 이낙연, 정세균, 임종석 등이 반박하는 등 이재명과 당내 인사들의 갈등도 표면으로 떠올랐다. # 또한 이재명의 탈당설도 조금씩 나오고 있다. 일단 이재명 본인은 '민주당이 없으면 이재명도 없다'라며 탈당설을 일축했다.

2021년 재보궐선거에서 민주당이 대패하면서 선거를 지휘했던 이낙연이 치명타를 받고 그 여파로 이재명의 지지율이 상승했다. 그러나 강성 친문 지지층은 여전히 이재명을 비토하면서 결국 대선 경선에서 친이재명 vs 친이낙연의 '명낙대전'이 시작됐다.

20대 대선 민주당 경선 때는 더불어민주당 지지층이 이재명 지지자이낙연 지지자로 분열되었다. 이재명 지지자들은 주로 수도권과 40~50대 남성, 이낙연 지지자들은 주로 전라도[28]와 20~30대 여성이었다. 즉, 더불어민주당의 핵심 지지층들이 지역연령성별에 따라 나뉘어진 양상을 보였다.

그리고 이낙연이 경선에서 패배하면서 사실상 경선불복 선언을 하고 일부 이낙연 지지자들이 경선 결과에 불복 이낙연 지지자 민주당 경선 선관위 결정 불복 시위을 일으키며 '민주당 경선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요청하는 등 법적 대응에 나선다. 그러나 원로 인사등의 압박#등으로 결국 이낙연측이 경선 결과에 마지못해 승복하고 이재명과 함께 정권 재창출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은 하면서 명낙대전 갈등은 일단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하지만 이낙연계인 박광온 공보단장[29]이 이재명 후보를 겨냥한 국민의힘의 네거티브 방어에 소극적인 면모를 보이거나 이낙연 경선 선거캠프의 정운현은 아예 이재명을 지지할 수 없다며 윤석열 지지로 돌아서는 등 갈등의 불씨는 아직 남아있는 상황이다.

결국 2022년 대선에서 불과 0.7%p차로 석패하고, 2022년 8회 지방선거에서는 전통적 민주당 지지층의 투표 포기로 인해 참패하자 그 패배의 원인으로 이재명을 위시한 이재명계를 지목하고 있는 이낙연이낙연계, 이낙연 지지자들을 '수박', '똥파리'라 부르며 이낙연계를 비난하는 이재명계의 갈등과 이에 이재명과 이재명계의 탓이라는 반박이 충돌하며 가라앉았던 계파갈등이 본격화되고 있다.

다만 이낙연은 이미 몇달 전부터 미국 유학이 예정되어 있던 상태라 현재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상태이고 이재명 또한 지방선거에서 이재명계만 살고 당은 죽어버린 그림이 되어버린 데다가 잇다른 선거들 때문에 잠시 미뤄졌던 이재명 개인의 의혹들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며 검찰의 수사가 본격적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당장 이낙연을 신경쓸 겨를이 없다. 양 계파의 중심들은 한발 뒤로 물러선 채 주변 인물들이 이들을 대신해 싸우고 있는 상황이다.

이재명 체포동의안 표결에서 1번째는 부결이 됐지만 30~38명 대의 민주당 의원들이 가결, 기권, 무효표를 던지면서 아슬아슬한 부결로 나왔기 때문에 당 분열이 심화됐다. 그런데 민주당원들과 민주당 지지층 절대다수는 이재명을 지지 하면서 가결, 기권, 무효표를 던진 의원들을 색출 하려는 움직임도 있기 때문에 강성 반명파 의원 3-4명 정도를 제외 하면 숨어 버린 상태가 됐다. 하지만 2023년 9월 21일, 기권, 무효표를 던졌던 민주당 의원들이 2번째 체포동의안에서 대거 가결표를 던지면서 가결됐고, 그래서 친명계와 비명계의 갈등이 더욱 심화됐다. 하지만 구속영장 기각 되고 2023년 하반기 보궐선거에서 대승을 하면서 이재명과 친명계가 더욱 강한 입지를 차지하게 됐다.

4.1.4. 진보정당

민주노동당 이후 진보신당, 통합진보당, 정의당 등 한국의 거의 모든 진보정당들은 심각한 계파 갈등을 겪어 왔다. 이는 작게는 당 내 갈등에서부터 크게는 분당과 신당 창당까지 진보진영 내부의 크고 작은 분열을 야기했다. 다만 이는 특정 인물을 기반으로 한 계파 갈등이라기보다는 이념과 정치 노선의 차이로 인한 갈등의 양상이 크므로 '정파 갈등'이라는 용어가 더욱 적합하다.

진보당 사건 이후 실질적인 첫 제도권 진보정당이었던 민주노동당의 당 내 갈등 구도는 8~90년대 학생운동노동운동의 내부 정파 구도에서 이어져온 것으로, 크게 자주파로 칭하는 NL[30]과 평등파로 칭하는 PD[31]의 갈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32] 처음 민주노동당 창당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민주노총 위원장이었던 권영길과 90년대 초반부터 진보정치운동을 해 왔던 노회찬 등 범PD로 분류되는 인물들이었지만, 군자산의 약속 이후 전국 NL계열 단체들의 총연합회인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약칭 전국연합)이 집단으로 당에 입당하여 패권을 장악하려 시도함으로 인해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인천연합이 일으킨 용산지구당 사태를 비롯하여 각 지역 지구당에 해당 지역에 살지도 않는 NL 또는 다함께 활동가들이 집단으로 입당하여 지구당을 장악하는 등의 사태가 빈번하게 발생한 것이다. 이 당시 민주노동당은 제17대 총선에서 10석을 확보하여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상 내부에서는 분당의 싹이 자라나고 있었던 셈이다.

이렇게 고조되어 가던 당 내 갈등은 2006년 당 내 NL 인사들의 일부가 북한에 민주노동당 당원 명부를 정파별로 정리해서 넘긴 일심회 사건이 터지며 급속도로 커져 나가기 시작하고, 2007년 대선 후보 선출 경선 과정에서 절정에 다다른다. NL들은 머릿수와 조직력에서 우세했으나 권영길, 노회찬, 심상정만큼 인지도가 높은 후보를 내세울 수 없었기에 결국 셋 중 가장 정파성이 약한 권영길을 조직적으로 지원하여 '코리아 연방'이라는 슬로건을 이끌어냈다. 권영길은 51 대 49 정도의 근소한 차이로 심상정과의 결선투표에서 승리했으나 본선에서 2002년 대선보다도 떨어지는 수준의 득표를 얻어 참패하고, 머지않아 심상정을 비대위원장으로 한 혁신비대위가 구성되나 비대위가 제시한 혁신안은 당 내 NL들의 거센 반대에 가로막혀 채택되지 못한다. 결국 심상정, 노회찬, 조승수를 위시한 PD 계열 활동가들과 당원들은 민주노동당을 탈당 후 진보신당을 창당한다.

노심조와 당 내 좌파 당원들의 탈당으로 만들어진 진보신당은 평등, 평화, 생태, 연대라는 야심찬 슬로건으로 출발했으나, 제18대 총선에서 0.06%라는 근소한 차로 봉쇄조항에 걸려 원내진입에 실패한다. 이듬해 보궐선거에서 울산 북구 조승수 의원의 당선으로 원내정당이 되기는 했지만 당 내 갈등의 싹은 역시나(..) 무럭무럭 자라나고만 있었다. 친정인 민주노동당, 창조한국당,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이후 등장한 국민참여당 등 야권 세력과의 연대 여부를 쟁점으로 하여 찬반 여부에서 파벌이 갈리기 시작했는데 2010년 지방선거가 그 갈등을 여실히 보여 주는 사례였다. 당시 경기도지사에 출마한 심상정 후보는 당 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민참여당과의 야권연대에 호의적이었고, 결국 당원들과의 소통 없이 선거 하루 전 유시민 후보 지지선언을 한 후 사퇴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다.[33] 이 당시 심상정 후보는 당원게시판 등지에서 당원들의 격렬한 성토의 대상이 되었다.

지방선거가 끝난 이후 본격적인 야권 통합 논의가 시작됨에 따라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을 논의하게 되는데, 지도부를 제외한 많은 수의 당원이 통합에 반대함에 따라[34] 당 내 갈등 양상이 본격화된다. 결국 진보신당은 2011년 열린 당대회에서 진보대통합 안건을 부결시키게 된다. 이에 반발한 노심조를 비롯한 일부 활동가들은 진보신당을 탈당하여 새진보통합연대라는 그룹을 차리고 통합진보당 창당에 참여했다. 진보신당에 남은 이들은 19대 총선을 독자적으로 치러낸 후 득표율 미달로 정당등록이 취소됨에 따라 진보신당연대회의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으며, 사회당과의 합당을 거친 후 노동당이라는 이름으로 당명을 개정한다.

4.2. 외국


[1] 한국민주당 출신[2] 이승만 정권 이탈 세력[3] 민정계와 공화계 모두 같은 박정희의 세력을 뿌리로 하던 세력이었고, 이들은 추구하는 사상도 대체적으로 일치했으나, 결정적으로 의회주의를 지지하는지의 여부가 달랐다. 수장이 군부 출신 전두환-노태우였던 민주정의당은 입법부와 행정부의 단결을 추구했고, 민주공화당을 이끌었던(그리고 군복을 벗은 지도 오래 된) 김종필이 만든 신민주공화당은 의회의 대통령 권한으로부터의 철저한 분리를 추구했다.[4] 민정계 중에서 YS 밑으로 들어간 대표적인 인물로는 김윤환최병렬이 있다.[5] 김원기, 노무현[6] 통일국민당 출신[7] 신정치개혁당 출신[8] 손학규 + 이부영, 김부겸 등 통추 출신 개혁 성향 인사들. 통추 출신 의원들은 2003년 열린우리당 창당에 참여하면서 민주당계로 돌아갔고, 손학규 역시 2007년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민주당계 정치인으로 변신한다.[9] 다만 개혁파나 대선당시에 친노였음에도 천신정과의 반목이 있던 인사나 당 사수파들은 잔류했다. 김상현, 조순형 같은 원로나 추미애가 이런 행보를 펼쳤다. 반면 애초에 후단협이었던 박병석, 설송웅, 김명섭 등이 열린우리당에 동참하기도 했고.[10] 친노계는 이 시기만 해도 중간보스격인 정동영계, 이해찬계, 김한길계, 천정배계, 정세균계 등으로 분리되어 있었고, 여기에 민평련 세력(1세대 운동권/김근태계)와 486세대(2세대 운동권/우상호, 임종석 등)이 가세하여 서로 지분을 나눠먹는 형국이었다. 여기에 여러 중진들이 끼어있는 형태였고.[11] 특히 이상민 의원은 재선 의원 시절에 자유선진당 소속이었음에도 사실상 민주당 의원들과 일치하는 진보적인 성향을 띄며 독자행보를 보였고, 의원수 1석이 모자랐던 선진당은 독자행보를 펼치던 이상민을 제어하지도 못 하는 상황이었다. 구 민주계의 조순형이나 이용희, 권선택, 김창수 같은 열린우리당 출신들이 선진당 당론을 따라가던 것과 대조적.[12] 친무, 친이, 친유, 소장파[13] 호남계, 김한길계, 친안[14] 정광용[15] 그러나 이 셀프제명은 이후 법원이 가처분 신청을 인용하여 무효로 판단하면서 이들 의원들은 도로 민생당 소속이 되었다.[16] 심재철, 나경원[17] 김진태, 김태흠, 서병수[18] 김영우조해진 등이 안국포럼 출신으로 잘 알려져 있다.[19] 이중 남경필은 2018년 1월에 탈당을 하고, 홍준표 대표의 연락을 받고 얼마 후에 자유한국당으로 입당하게 된다. 원희룡은 2018년 4월에 바른정당의 후신인 바른미래당을 탈당하게 된다.[20]친노, 친문[21] 친안철수, 동교동계, 손학규계, 호남계[22] 루리웹 북유게, 트위터[23] 딴지일보, 클리앙[24] 김진표는 김대중 때부터 계속 민주당에서 활동한 민주당 원로 정치인이지만 민주당 내 보수파이자 개신교 관련 논란 때문에 그다지 인기가 없던 정치인이었다. 순전히 이재명을 탈당시킨다고 해서 강성 친문 사이에서 호의적인 정치인이 되어버린 것이다.[25] 다만 이 일은 더불어민주당 지지층 내에서도 강성 친문들에 대한 반발이 대폭 상승하는 계기가 됐다. 강성 친문들이 민주당 내 주요 정치인들 다수를 이재명과 연관이 있다고 주장하며 공격했기 때문이다. 이들 온건, 중도 성향 민주당 지지층은 강성 친문들을 극문이라고 지칭하고 저들이 권순욱 등에게 놀아나고 있다고 주장하며 강성 친문과 대립하였다.[26] 후에 결국 무혐의 처분이 되었다.[27] 이들 대부분이 친노 출신이며, 이들은 당시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이 노무현 대통령을 들이받았다고 생각하기때문에, 내부총질에 해당한다고 보이는 의원에겐 가차없다.[28] 특히 전남-광주 지역[29]수원시 정 국회의원[30] National Liberation(민족해방).[31] People's Democracy(민중민주)[32] 그 외에도 IST(국제 사회주의자 경향)의 노선을 따르는 다함께(현 노동자연대) 등의 내부 그룹이 있었으나, 큰 구도는 NL과 PD의 대립 구도였다.[33]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표용지에는 이미 이름이 찍혀나온 상태로, 유시민 후보는 한나라당 김문수 후보에게 꽤 큰 표차로 패배하고 만다.[34] 진보신당의 당원 대다수는 민주노동당에서 갈등을 겪고 온 이들이었으므로 민주노동당과의 재통합에 부정적이었고, 좌파들의 입장에서 신자유주의 정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의 후신으로밖에 볼 수 없는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에는 그보다 더(..) 부정적이었다.[35] 특히 미국 민주사회주의자들(D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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