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승계 | |||
<colbgcolor=#e6573b> 형성 | <colbgcolor=#ffffff,#1f2023>1971년 | ||
해체 | 1988년[1] | ||
수장 | 이철승 | ||
정치적 이념 | 보수주의 권위주의적 반공주의 중도통합론 | ||
경제적 이념 | 시장자유주의 | ||
주요 정치인 | 송원영 이기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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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민주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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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민당, 신한민주당에서 이철승을 따른 계파이다.2. 상세
1·2차 진산 파동 이후 당내는 범진산계와 반진산계로 나뉘었고, 이철승계는 범진산계의 분파 정도로 주류를 일었다. 다만, 1970년 대통령 경선 때 유진산이 김영삼·김대중·이철승 중 지지율이 40%가 넘었던 김영삼을 지지하자, 당시 있던 이철승계가 반발했다. 1차 투표엔 이철승이 탈락했고, 결국 이철승계가 후에 있을 전당대회에서 김대중계가 이철승을 미는 조건으로 김대중을 2차 투표에서 밀어주며 김대중이 후보로 선출되었다.1974년 유진산의 별세와 함께 유진산계가 해체되었고, 이철승계는 원래 이철승을 지지하던 분파와 후에 합류한 중도파로 이루어졌다. 1974년 7월엔 모든 계파가 그랬듯이, 호남에서 압도적이고 서울·경기·강원지역에서 우세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김영삼에게 졌고, 고흥문계와 신도환계, 정일형, 정해영 등과 함께 신민당 전당대회 각목 난동 사건을 사주했다. 결국 9월에 치러진 임시 전당대회에서 대표최고위원에 선출된다.
1980년 12.12 군사반란 때 신민당이 해산된 뒤 5년간 정계를 잠정 은퇴했다가, 구 신민당 소속, 일부 민주한국당, 민권당과 민중민주당 당원들이 김영삼, 김대중을 중심으로 신한민주당을 창당할 때 같이 들어갔다. 그러나 이민우 구상에 동의하여, 양김이 신한민주당을 탈당하고 신당을 창당할 때 남아있었고, 대통령 직선제가 확립되자 이철승은 퇴물로 전락했고, 이듬해 선거에서 낙선하며 이철승계는 해체된다.
3. 소속 인물
신민당 : 고재청, 김윤덕, 김준섭, 김창환, 류제연, 박병효, 박일, 송원영, 양해준, 엄영달, 오세응, 오홍석, 이기택, 임종기, 조규창, 조세형, 진의종, 최극, 천명기, 최성석, 한영수, 허경만, 황호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