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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대통령 이전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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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긍정적 평가
2.1. 당 지도부로서 선거 승리2.2. 거대한 정치체급, 당내 리더십2.3. 광우병 사태 우려 발언2.4. 세종특별자치시 원안 고수
3. 부정적 평가
3.1. 의정 활동 부진3.2. 최태민·최순실 일가
4. 논란이 있는 평가5. 관련 문서

1. 개요

제18대 대통령 박근혜의 대통령 이전의 평가를 서술한 문서다.

2. 긍정적 평가

국회의원 재직 당시 한나라당, 새누리당 때 중요한 때마다 당에서 나선 이미지로 정치적 실체가 드러나기 이전까지는 지지자들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2.1. 당 지도부로서 선거 승리

대선후보였던 17대 총선18대 총선 당시 박근혜의 최대 강점이었다. 박근혜는 98년 재보선을 통해 정계에 들어오고 난 후 본인이 출마한 선거에서는 거의 대부분 당선됐다. 07년 한나라당 대통령 경선에서 이명박에게 접전끝에 석패한 것이 유일한 패배였을 뿐이다. 그나마도 당내 경선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 선거 본선에서 진 적은 없다. 08년 친박계가 대규모로 낙천했을 때인 18대 총선에서도 본인은 당선됐다.

당 지도부로서 선거를 이끌 때도 대부분 승리했다. 박근혜가 대구 달성군에만 출마를 했기 때문에 안방 챔피언이라는 평가 절하를 하는 사람도 있지만, 박근혜가 선거의 여왕이 된 이유는 전국 선거에서의 승리이다. 당대표와 비대위로서 총 4번의 선거를 치렀는데 3번 승리를 거뒀으며, 나머지 1번의 패배도 좋지 않은 상황속에서 120석을 지켜내 선방했다는 평가를 얻었다. 또한 대통령이 되어서도 20대 총선 전까지는 지방선거와 각종 재보궐선거에서도 승리를 했다.

17대 총선: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 역풍으로 한나라당의 완패가 예측 됐던 17대 총선에서는 한나라당 대표로서 120석 이상을 얻어 예상 이상의 선방을 해냈다. 천막당사 등 절실한 한나라당의 모습을 어필한 것이 선방의 주요원인으로 분석된다.

2006년 지방선거: 이 선거 때는 노무현 정부에 대한 심판론이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에"한나라당에서 개가 후보로 나와도 당선된다." 는 말이 유행햤을 정도였다. 결과는 한나라당의 완승이었다. 선거 운동 도중 면도칼 테러를 당하는 상황 속에서도 선거운동을 완수했다.

19대 총선: 한나라당2011년 재보궐선거에서 참패를 하고 비대위원장이 되었다. 그 후 총선을 앞두고 여러 쇄신 끝에 15년만에 당을 새누리당으로, 당색을 빨간색으로 바꾸게 되었다.[1] 말기 여당의 입장에서 비대위원장으로 MB정부의 심판론을 이겨내고 과반의석을 확보했다.[2]

18대 대선: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치열한 선거중 하나였으며,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의 1대1 맞대결 구도였다.[3] 당시 야당은 정권심판론을 내세웠고 박근혜의 새누리당은 '경제민주화'라는 보수진영에서는 쉽게 던질 수 없던 아젠다를 던지면서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또한 과거 투표율 70%가 넘으면 진보진영의 후보가 유리하다는 것이 정설이었으나 당시 박근혜 후보는 75% 높은 투표율에도 당선이 되었다.

공식적으로 지원하지는 않으나 박근혜 개인의 이름을 내건 친박연대와 '친박 무소속 연대'가 18대 총선에서 대선전하여 친박연대 14명, 무소속 연대 12~16명[4]이 당선 되었고 특히 친박연대의 비례대표 득표율은 당시 제3당이었던 자유선진당보다 높은 득표율을 냈다. 당시 박근혜의 이름값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즉, 박근혜 본인이 직접 이끌었던 선거는 모두 승리했다.

2.2. 거대한 정치체급, 당내 리더십

17대 총선에서 뛰어난 지휘를 보여주며 선방을 해내 한나라당의 당권 레이스에 참여한 뒤 박근혜는 친이 세력이 당권을 장악했던 한나라당 대선 경선~2009년 초반까지를 제외하면 꾸준히 당의 주류로서 활동했다.

2004년 3월 쇄신의 일환으로 대표최고위원에 선출되었지만 선거에서 선전으로 보수 유권자들에게 좋은 인식으로 남아 이후 치뤄진 2004년 7월 전당대회에서도 대표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비록 이전에 당대표로 활동했던 기간은 단 4개월이라 큰 의미가 없긴 하지만 현재까지도 이회창 이후 유일한 보수정당 당대표 연임사례로 남아있다. 현재 보수정당이 자유한국당 당명변경 이후 당대표의 임기인 2년은 커녕 1년 6개월도 채운 후보가 없는 상황임을 감안하면.. 이후 지도부로서 지휘한 4대 지선에서 엄청난 대승을 거두며 당내 지지도를 더욱더 올렸다.

비록 17대 대선 경선 당시 서울시장으로서 우수한 평가를 받으며 여론조사상에서 큰 우위를 차지한 이명박 후보에게 밀리긴 했지만 그 당시에도 당원 투표에서 이명박 후보를 상대로 승리했을 정도로 당심에서는 우위를 차지했었다.

이명박 정부 수립 이후 친박이 찬밥신세를 받은것과 별개로 친이계와 친노계의 구도로 치열하게 대립되던 2009~2011년에도 차기 대선후보를 묻는 여론조사에서 박근혜는 안철수 대망론이 뜨기 전까지 항상 1위를 차지하며 17대 대선 이후로도 꾸준히 존재감을 유지하였고, 여당은 물론이고 야당 내에서도 박근혜 개인에 대적할수 있는 인물이 없었다[5]. 괜히 홍준표 지도부가 붕괴하자마자, 대선이 1년 남짓하자 바로 비상대책위원장을 맡게 된것이 아니다. 이후 총선에서도 승리하여 무난히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이미 18대 대선 당시 새누리당 후보로 박근혜가 반확정적이었다는 것과 별개로 무려 84%의 어마어마한 득표율을 기록한 것도 주목할만하다. 당을 완전히 휘어잡았던 김영삼 대통령 이후 보수정당 대선 경선에서 이런 득표율을 기록한 사례는 거의 없다. 대부분 비슷한 지지도를 가진 두 대권주자가 치열하게 싸웠는데,[6] 18대 대선때는 당연한듯이 조용했다. 당시 패전처리투수 느낌이 강했던 18대 대선에서의 홍준표[7]와 박근혜와 마찬가지로 강력한 당권을 휘둘렀던 이회창[8]조차 84%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

18대 총선 당시 친박이 외면을 받았지만, 그 2년 남짓한 이명박 정부의 허니문 기간을 제외하면 오히려 한나라당에서 박근혜는 이명박보다 더 당심에서 우수한 평가를 받았고, 전국적으로도 우수한 정치 체급을 자랑했었다. 그 2년간의 시간에서도 이후 서술할 광우병 사태 발언이나 세종시 원안 고수 등 여당안의 야당 컨셉으로 확실하게 존재감을 드러냈고, 박근혜와 달리 17대 대선에 출마까지 성공했지만 참패한 정동영 후보가 이후 계속된 비토로 당권에서 멀어지고 존재감이 옅어진 것과 다르게 당권을 되찾고 대선 출마까지 성공하였다.

2.3. 광우병 사태 우려 발언


이명박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졸속 협상에 대해 우려를 나타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친이계와 친박계의 뿌리깊은 갈등이 숨어 있었으며 사실상 이명박 정부에 대한 박근혜의 불쾌감을 드러낸 것 뿐이다.[9] 사실 국민의 우려가 걱정되었다면 사실상 이명박 정부 초기 야당의 수장이나 다를 바 없었던 박근혜가 협상 전에 진취적으로 문제 해결에 나섰어야 했으나 광우병 협상에 적극적으로 반대 의사를 드러낸 것은 바로 국민이었다.[10] 당시 박근혜는 '반대를 위한 반대'만을 했을 뿐이며, 시위대의 흐름에 숟가락 하나 얹었을 뿐이다.

2.4. 세종특별자치시 원안 고수


이명박 정부는 세종시 행정수도 이전을 무효화하려고 했으나, 박근혜는 이에 반대하여 세종시 행정수도 이전을 지지하는 연설을 국회에서 하였으며, 결국 이 연설 덕으로 세종시는 행정수도의 위치를 고수할 수 있었다. 이 때 박근혜가 행정수도를 옮기기 위한 이유로 국토를 균형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점을 들었다. 수도권 편중화가 심각한 지금의 한국의 실태로 봤을 때, 박근혜가 원안을 고수한 것은 조금이나마 수도권에 인구가 밀집한 현상을 제어하려는 노력을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이러한 박근혜의 국회 활동은 18대 대선에서 충청권이 박근혜를 지지하는 데에 기여를 하였다.[11]

위의 우려 발언과는 다르게 박근혜의 국정에 대한 진정성 있는 의정활동 중 하나. 박근혜가 내세운 수도권 밀집 완화, 정책의 일관성 유지의 필요 등 당위성도 충분했으며, 박근혜가 본인의 정치적 역량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저지를 했으며, 친박계와 친이계의 정치 다툼이라는 배경을 떠나서 반드시 했어야 했다는 점 때문에 높이 평가받을 사건이었지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묻혔다.

3. 부정적 평가

3.1. 의정 활동 부진

3.2. 최태민·최순실 일가

박근혜의 정계 입문 때부터 최순실과 비서실장이였던 정윤회, 최태민의 아내이자 최순실의 어머니인 임선이가 박근혜에게 관여 했었고 임선이는 1998년 재보궐, 15대 총선에서 불법 선거 자금를 제공했단 의혹도 있다.

4. 논란이 있는 평가

4.1. 안방 챔피언

박근혜는 5번의 국회의원 선거 출마 중 앞의 4회를 오직 달성군 단 한 지역구에서만 출마했다. 그러니까 자기 안방에서만 출마했다는 특징이 있다. 그나마 나머지 한 번도 비례대표로 출마한 것이며 20번까지는 안정권이라는 집권여당에서 11번으로 출마해 당선된 것에 불과하다.

다만 전술한 대로 부모의 후광을 이용하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으로 볼 수 있다는 시선도 있으며 사실상 박근혜는 오래 전부터 박정희의 곁에서 퍼스트 레이디의 역할을 하며 정치 쪽에 몸을 담그고 있었던 만큼, 애초에 다른 형제들과는 차별화될 정도로 정치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다소 다른 이들과 차이가 있다.

다만,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문재인을 상대로 박빙의 접전 끝에 당선되었다.

5. 관련 문서


[1] 한나라당은 15년동안 썼던 당명으로 6공화국 이후 가장 오랜기간 쓰였다.[2] 대통령 집권 4 5년차 때가 되면 집권 여당이 대부분 졌다.[3] 양당 후보가 99.50% 득표율을 기록했다.[4] 12~16이라고 한 것은 친박계가 확실한 사람과 굳이 계파 분류를 하자면 친박계로 분류되는 사람을 포함한 표현이기 때문이다.[5] 17대 대선에 참여한 정동영은 당시 당권에서 멀어졌던 상태였으며, 당시 대세였던 친노의 핵심이었던 한명숙유시민은 5대 지선에서의 패배로 큰 타격을 입었다. 손학규정세균은 확고하게 당내지지를 받고있지 않았던 상태라 5대 지선 이후 민주당 후보는 문재인의 정계 참여 전까지 혼돈을 겪었다.[6] 이회창 후보는 14대 대선 당시 이인제 후보와 치열하게 격돌했었고, 박근혜 본인도 이명박 전 시장과 17대 대선에서 치열하게 경합하였고, 20대 대선 역시 윤석열 후보와 홍준표 후보간의 치열한 접전이 이어졌다. 이후 21대 대선 역시 대권주자의 난립으로 보수정당 경선은 치열할것으로 예측된다.[7] 54.15%로 선출[8] 68%로 선출[9] 당시 친박과 친이의 갈등의 골이 얼마나 깊었냐 하면은, 경남 사천시 지역구에서는 친이계 이방호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하자 친박 유권자들이 민주노동당 강기갑에게 몰표를 던져 결국 강기갑을 18대 국회의원으로 당선시켰을 정도이다.[10] 물론 광우병 파동 자체가 과장되었다는 여론도 상당하다 보니 당시 이명박 정부에 대한 무리한 비판도 금물이다.[11] 육영수 전 여사의 고향이 충청권인 것도 생각해볼 점이다.그리고 또한 자기 아버지인 박정희 대통령 또한 백지계획이란 이름으로 지금 보다 더 거대한 규모로 행정수도를 건설하려는 바가 있었던 것 또한 생각할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