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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장점
2.1. 엘리트 이력2.2. 깨끗한 병역 이력2.3. 법무부장관 재임 시절 정책2.4. 극우적 주장과의 선긋기2.5. 명태균 게이트로부터 자유로움2.6. 법조계의 상명하복·전관예우 폐습으로부터 자유로움
3. 복합적4. 단점4.1. 부정적인 여론조사 지표4.2.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참패4.3. 검사 출신 정치인에 대한 반감4.4.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 관련 말바꾸기 논란4.5. 선출직 공무원 경력 부재
1. 개요
한동훈의 대권주자로서의 장단점을 정리한 문서다.국민의힘 당헌당규에는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하고자 하는 자는 선출직 당직으로부터 대통령 선거일 1년 6개월 전에 사퇴해야 한다"는 '당권-대권 분리 규정'이 있는데, 한 전 대표는 21대 대선일로부터 약 5개월 반 전에 당대표직을 사퇴했기 때문에 해당 규정에 따르면 출마가 불가능하다. 다만 "상당한 사유가 있는 때에는 대통령후보자선거관리위원회가 심의하고 최고위원회의 또는 비상대책위원회의 의결로 정할 수 있다"는 예외규정도 당헌당규에 같이 있고, 당 선관위는 조기대선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해 이 예외규정을 적용했기 때문에 한 전 대표의 당내 경선 입후보가 가능하게 되었다. 따라서 정치권 일각의 주장과 달리 한 전 대표의 대선 출마는 당헌당규에 위배되지 않는다. #
2. 장점
2.1. 엘리트 이력
강남 8학군[1]-서울대 법대-아이비 리그[2] 학력을 가졌으며, 서울대학교 재학 시절인 22살에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검사 시절에도 내내 두각을 드러냈는데, 법무부-대검-서울중앙지검의 '골든 트라이앵글' 내에서 근무하였고[3], 여러 정재계 거물들을 수사하고 죄값을 치르게 하여 특수통으로서 명성을 얻었을 뿐 아니라, 검찰 내의 헤게모니를 다루는 주요 정책 직위[4]에서 기획 능력까지 인정받으며 최연소 검사장 타이틀의 주인공이 되었다.
한동훈의 엘리트 이력으로 인해 정치권과 언론으로부터 좀 더 주목을 받게 된 측면도 있지만, 엘리트 이력은 딱히 한동훈만의 장점은 아니고 다른 정치인들 중에서도 내로라하는 학벌, 경력을 가진 사람들도 많다.[5] 스펙만 따지면 역대 최고였지만 세 차례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된 이회창 전 총리의 사례도 있으며, 그 외에 서울대 법대나 해외 유학 약력을 지닌 학벌 좋은 정치인들은 매우 많다. 또한, 지나치게 엘리트적인 삶을 살아 온 점 역시 사람에 따라선 마이너스 요소이기도 한데, 서민이나 사회적 약자들의 고충을 이해할 수 있겠느냐는 지적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기에 마냥 장점만으로 보지 않는 일각의 견해도 있다.[6] 한동훈 역시 이를 의식한 듯이 사회적 약자들을 대상으로 봉사활동·기부 등의 활동을 여러 번 하였고,[7] 당대표 시절에는 '격차해소'와 같은 복지·민생정책들을 강조했다.
2.2. 깨끗한 병역 이력
병역 역시 대한민국 공군 법무 대위로 전역하였다. 정치인의 도덕성을 평가할 때 빠지지 않는 요소 중 하나가 병역 문제인데, 특히 남성들의 대부분이 병역의 의무를 수행하는 징병제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병역 관련 논란은 국민들의 역린을 건드리고 정치 활동에 치명타를 줄 수도 있는 문제이기에 깨끗한 병역 이력은 큰 장점이 될 수 있다.게다가 부동시로 군미필이서 군에 대해 잘 모르는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일으켰다는 점, 그리고 민주당과 국민의힘, 제3당의 주요 21대 대선 예비후보들[8] 중 현역 군필자가 한동훈과 안철수(해군 대위)와 유정복(육군 중위), 이철우(육군 상병) 4명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 깨끗한 군 이력이 더욱 돋보이는 장점이 될 수 있다.
또한 복무 중 근무지의 영관급 장교를 혼자 인지수사해 수뢰죄로 구속시키고 이에 반발하는 헌병대장을 체포하며 군생활을 성실하게 한 점은 권력에 고개 숙이지 않았던 행적들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과거부터 그렇게 실천해왔다는 인식을 국민들에게 보이기에도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2.3. 법무부장관 재임 시절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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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시행령을 통한 검수완박 및 검경 수사권 조정 보완[9] ▲ 추미애 장관 재임 중에 폐지됐던 금융·증권범죄합동수사단 부활 및 정식 직제화 ▲ 국가재정범죄합동수사단 및 보이스피싱합동수사단 신설 ▲ 반부패·강력부를 반부패부와 마약·조직범죄부로 분리 등 검찰의 범죄대응 역량을 최대한으로 강화하고 있다.
또한 검찰 업무 이외에도 ▲ 교정직 공무원 처우 개선 ▲ 변호사시험 CBT 도입 및 장애인 응시자 편의지원 확대 ▲ 현대사 관련 문제 해결[10] ▲ 국가배상 남성차별 철폐 ▲ 투자이민제 기준 상향 ▲ 스토킹처벌법 및 전자장치부착법 개정[11] ▲ 사형 집행시효 30년 폐지 ▲ 국외도피 피고인 재판시효 정지 ▲ 범죄피해자 보호 정책 등 비검찰 업무에도 세심하게 신경써서 법무부 안팎에서 크게 호평받고 있다.
한동훈표 정책들을 전체적으로 봤을 때, 형사·검찰 분야[12]에서는 엄벌주의·법치주의에 기반한 보수적 색채를, 과거사 문제[13]에 대해서는 인권친화적인 진보적 색채를 띠고 있으며, 출입국·이민 분야[14]이나 상사 분야[15]에서는 실용주의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국민들은 범죄자 처벌에 대해 온정주의보다 엄벌주의적 접근을 선호하기 때문에 한동훈의 형사분야 정책들이 국민정서에 부합하는 측면이 있다.
한동훈표 정책들 중 일부는 국회에서 법안이 통과되어야 가능한데, 국회를 통과한 법안도 있는 반면 통과하지 못한 법안도 있다.
2.4. 극우적 주장과의 선긋기
여느 국민의힘 정치인들과 달리 부정선거론을 전혀 주장하지 않았으며 우파 유튜버들과 전혀 접점이 없다. 또한 윤석열 정부 비상계엄에 대해서도 즉각적으로 비판적인 입장을 밝히고 최종적으로 탄핵 찬성을 택했기 때문에 민주당의 "내란동조" 프레임으로부터 자유로운 편이다.22대 총선 지휘 당시 구설수에 올랐던 도태우 변호사[16]의 공천을 취소하는 등 극우 및 친윤 세력과 완전히 선을 긋는 행보를 보였다. 이후 국민의힘 제4차 전당대회에서도 신의한수·전광훈·고성국·이봉규·배승희 등 대형 우파 유튜버들로부터 "윤석열 대통령을 배신했다"는 식으로 공격을 받았지만, 이를 뚫고 당원투표 및 여론조사에서 62.8%의 압도적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당대표 재임 중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자 신속하게 반대 메시지를 내며 국회로 향했고[17] 자당 국회의원들로 하여금 국회 본회의장에 가서 계엄 해제 표결에 참여할 것을 지시해 18인의 자당 국회의원이 계엄 해제에 투표했다.[18][19] 이후 탄핵에 대해서는 수차례 말을 바꾸었다는 비판을 받긴 했지만, 1차 탄핵안 반대도 윤석열의 비상계엄을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야당이 윤석열 정부의 한미일 위주 외교 정책을 탄핵사유로 적시한 점 및 탄핵보다 질서 있는 조기퇴진이 국론분열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점 2가지를 근거로 한 것이었고, 이후 한미일 위주 외교가 탄핵사유에서 제외되고[20] 윤 대통령이 질서 있는 조기퇴진을 거부하면서 최종적으로 2차 탄핵안은 찬성으로 입장을 정리했다. 이로 인해 탄핵 반대파들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고 지도부가 붕괴해 타격을 입긴 했지만, 극우 세력의 구심점인 윤석열 대통령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는데 성공했다. 당대표 사퇴 선언 때는 부정선거 음모론자 및 우파 유튜버들을 겨냥해 "극단주의자들에 동조하거나 그들이 상업적으로 생산하는 공포에 잠식당한다면 보수에 미래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후 본인의 저서 <국민이 먼저입니다>에서도 "(예산삭감과 탄핵남발 등) 민주당이 자행한 폭거들로 인해 대통령이 느꼈을 좌절감과 국가의 미래에 대한 우려에 대해 공감한다"면서도, 비상계엄이 위헌·위법이라는 주장은 굽히지 않았으며, 계엄령이 대한민국의 안보·경제 및 여당에 악영향을 미쳤음을 강조했다.[21] 또한 '경고성 계엄' 및 '계몽령' 등의 계엄 옹호론에 대해서도 이해하기 어렵다고 반론했다. #
이에 따라 대통령 탄핵에 강력히 반대했던 친윤계와 분명히 선을 그으면서 향후 중도~중도보수 진영을 중심으로 정치적 재기를 모색할 여지를 남겨둔 것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
과거 한동훈의 당 운영에 대해 비판한 바 있었던 함운경 국민의힘 마포구 을 당협위원장은 2024년 12월 한동훈 대표 사퇴 이후 "한동훈 당대표 덕분에 국민의힘은 계엄찬성정당, 내란동조정당, 위헌정당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지키고 민주공화국을 지키는 정당이라 말할 수 있게 됐다"며 "난 그간 당신의 당 운영에 대해선 비난해왔지만 당신의 장점을 잘 못봤다. 비상계엄시 행한 결단과 결정으로 국민의힘을 살린 점에 감사드린다"고 평했다. #
이후 2025년 4월 윤 대통령 파면 전후로 함경우와 서정현 등 당내 일부 비한·친윤 출신 인사들이 한동훈 지지선언을 하기도 했다. #
결과적으로 당대표 재임 시절 내내 윤석열 및 친윤들과 각을 세우고, 비상계엄에 대한 반대 및 대통령 탄핵까지 찬성하게 된 이러한 일련의 행보들은 당장 그의 정치적 입지를 좁힌 것은 사실이나, 위헌, 위법한 계엄 선포 행위에 가장 먼저 반대하고, 민주주의 헌정 질서를 지키고자 했던 용기 있는 행위로 볼 수 있기에, 길게 보면 그에게는 정치 행보 내내 가져갈 수 있는 큰 정치적 자산이 생긴 셈이라 할 수 있다. 결국 2025년 4월 4일 윤석열의 파면이 확정되면서, 계엄에 반대하고 탄핵 소추를 이끌어냈던 그의 선택이 정당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셈이 되었고, 이후 조기 대선 국면에서도 명분이 있으므로 어느 정도 길이 열렸다고 볼 수 있다.
2.5. 명태균 게이트로부터 자유로움
국민의힘 대권주자인 오세훈 서울시장, 홍준표 전 대구시장, 당권주자인 윤상현 의원, 개혁신당 의원인 이준석등이 현재 명태균 게이트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되어서 진위에 관계없이 일단 대선에 나오면 계속 발목이 잡힐 가능성이 높은 것과 달리, 한동훈은 명태균 게이트에 아예 연루된 바 없고 친한계 인사들 역시 친윤계와 달리 명태균과의 접점이 없다. 물론 국민의힘 내 대권주자들 중에서는 유승민 전 의원 역시 명태균 게이트에 연루되지 않았으나, 유승민 전 의원에 비해 한동훈 전 대표의 인지도와 지지율이 매우 앞서는 상태이다.경향신문에서는 "정치권에선 명씨 논란이 커지더라도 한동훈 대표가 잃을 것은 없다는 의견이 많다"며 "명태균씨와 관계가 있었다고 언급되는 윤석열 대통령과 오세훈 시장 등 정치권 주요 인사와 차별화를 꾀할 수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고 보도했다. # 본 사건으로 창원지검이 국민의힘 당사를 압수수색할 때도 한 대표와 친한계는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22] #
또한 명태균 게이트의 핵심 인물인 김영선 의원이 "공천해 주지 않으면 김건희 여사의 공천 개입을 폭로하겠다"고 국민의힘 의원들에게 압박한 것으로 드러났으며 친윤계를 중심으로 김상민 검사[23]와 김영선 의원을 공천하거나 경선에 올리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한동훈 당시 비대위원장이 "김상민 전 검사, 김영선 전 의원 모두 단수공천은 물론 경선도 안 된다"고 지시를 내려 김상민·김영선 모두 공천에서 탈락됐다. 한동훈 위원장은 김영선의 협박에 대해서 "할 테면 하라고 해라"라고 말하기도 했다. 두 사람의 공천 탈락 후 한동훈 전 대표와 대통령실 사이가 더 멀어진 것이라는 소문도 있다. #
2.6. 법조계의 상명하복·전관예우 폐습으로부터 자유로움
정치권에서 여러 차례 논란이 되는 소재 중 하나가 하급자·약자에 대한 갑질 내지는 하대이며, 검찰의 조직문화에 대한 주요한 비판점들 중 하나 역시 '검사동일체'로 일컬어지는 특유의 상명하복 문화이다. 대표적으로 김문수 전 고용노동부장관의 '도지삽니다' 사건과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의 '노룩패스' 사건은 엄청난 논란이 되었고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회자되고 있다.[24] 특히 검찰총장 출신인 윤석열 전 대통령은 집권 기간 내내 수직적 리더십으로 인해 검찰식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는데, 이를테면 수직적 당정관계에 대해서 많은 지적이 나왔고, # 이재용 등의 재벌 총수들을 도열시키고 떡볶이를 먹는 모습이 구설수에 올랐으며, # 입틀막 경호로 세간의 비판을 야기하는가 하면, 결정적으로 비상계엄 발동으로 나라를 권위주의 시대로 되돌렸다는 비판을 받았다. 게다가 파면 후에도 "사람을 쓸 때는 충성심이 가장 중요하다"는 발언을 한 사실이 전해지면서 비판을 받았다. #반면 한동훈은 검찰 고위직을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권위주의나 상명하복, 갑질 같은 논란이 발생한 적 자체가 없으며, 오히려 이들과 정반대로 권위를 내려놓고 타인을 배려하는 면모를 보여줬다. 공격적이고 강경한 태도를 보여준 적은 많지만, 그 대상은 이재명 등 야당 정치인이나 친윤계 정치인으로 한정되었다. 이와 관련된 개별적인 사례들은 한동훈/여담 문서 참조. 이 덕분에 본인의 장점들 중 하나로 '강강약약'을 여러 차례 강조할 수 있게 되었다. # # #
그리고 부장판·검사급 이상을 역임한 법조인들의 폐습으로 지적되는 것 중 하나가 전관예우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한 뒤 과거의 고위직 경력으로부터 오는 인맥과 정보력 등을 이용해 재판·수사에서 각종 특혜를 얻는 것에 대해 사회적으로 비판적인 시각이 많다.
그러나 한동훈은 대검찰청 반부패강력부장 등의 검사장급 이상 고위직을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전관예우를 안 받는 것을 넘어서 전관예우를 철저히 경계하는 스타일이다. 일례로 2024년 국민의힘 당대표 후보 2차 토론회 중 '정치를 안 했다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었을지' 질문이 나오자, 공직이 끝나면 변호사는 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고 지역에 있는 로스쿨에서 형법과 형사소송법을 가르치는 교수[25]를 했을 것이라고 답했다. # 또한 검사 시절에도 '전관예우 변호사'를 일절 만나지 않았다는 일화도 있다. 검사 시절 검사장 출신 선배도 변호사로 개업하면 잘 만나주지 않았으며, 설혹 만나더라도 여느 검사처럼 '검사장님'이라며 예우하지 않고 꼬박꼬박 '변호사'라고 칭했다. #
3. 복합적
3.1. 화술·화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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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훈 장관의 발언이 온오프라인상에서 반복적으로 화제에 오르기도 했으며 <한동훈 스피치>라는 책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또한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 의원들과 질의응답을 할 때마다 매번 이슈에 오르며 지지층에게 호평을 받았다.
한동훈의 말이 처음으로 주목받았던 것은 채널A 사건 때로, 이동재 채널A 기자와 나눈 대화의 녹취록이 외부에 공개되자 여러 발언들이 화제가 되었다.
이후 법무부장관 후보자 청문회에서 친조국 성향 처럼회 소속 의원들의 공세에도 아주 침착하게 답하는 모습을 보였고, 법무부장관 취임 이후에도 대정부질문이나 법사위 회의 등에서 야당 의원들의 지속적인 강경한 질문에도 밀리지 않고 대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화술이 뛰어나다거나 사이다 같다는 평을 받는다.[26]
야당의 공세에 대한 대응뿐만 아니라 몇몇 정책·이슈에 대한 스피치에서도 강점을 드러냈다. 일례로 ▲ 류호정 의원과의 비동의간음죄 찬반 토론 ▲ 역대 정부의 경제정책들과 법무부의 출입국·이민 정책을 주제로 한 강연 ▲ 국가배상 제도개선 브리핑 등이 크게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세간의 호평을 받았다.
반대로 부정적 평가 측에서는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는 반문 화법이라고 주장하며, 이로 인해 논란이 된 적이 있다.# 간단히 '예', '아니오'로 대답할 수 있는 사안에도 '말씀하십시오.'로 대답하며 국민의힘 안에서도 '너무 직설적'이라거나, '싸우러 국회 나온다는 느낌을 준다'는 평이 있다. 이재오 상임고문은 "한 장관이 정부의 무게를 실어 점잖게 답변해야 한다",“장관 자리에서 할 수준의 말들은 아니고 정치 패널로 나와서 할 만한 수준"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법사위에서 한동훈과 대립이 많은 더불어민주당 박용진 의원은 라디오에 나와 한동훈에게 "아주 유치한 논법을 계속 쓰신다. 그래서 저는 제도개선을 물으려고 그랬더니 '문재인 정부 때 사과했나요?' 이렇게 말한다"라고 개인적인 평가를 한 적이 있다. # 한겨레 신문의 칼럼에서는 "집권 여당 대표로서는 말이 너무 많고 필요 이상으로 공격적"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한동훈 발언에 해석이 필요한 경우가 생기면서 '서초동 사투리'를 쓰는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2023년 12월 19일 김건희 특검법에 대해선 “선전·선동하는 악법”이란 말과 “법 앞에 예외는 없어야 한다”는 표현을 동시에 꺼내 어디에 방점을 두었는지를 놓고 엇갈린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
3.2. 강성지지층의 존재
우선 강성지지층의 존재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일례로 이재명의 경우 강성지지층의 지지에 힘입어 압도적인 득표율로 전당대회에서 당대표에서 당선되고 22대 총선에도 승리하며 대권주자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한동훈도 마찬가지로 한동훈줌 등 강성지지층의 지지에 힘입어 과반 이상의 득표로 전당대회에서 당대표에 당선되며 22대 총선 참패로 흔들리던 입지를 되찿았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강성지지층의 존재가 마냥 한동훈의 대권가도에 도움이 된다고는 할 수 없다. 팬덤이 결집하게 되면 중도층의 눈쌀을 찌푸리게 만드는 극성 팬덤으로 비화되고, 그렇게 되면 지지하는 중도층으로부터 정치인과 정당의 지지도를 깎아먹을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온라인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 기타 국내 드라마 갤러리에는 한동훈과 관련된 기사 링크를 공유하며 호의적 댓글엔 추천, 비판적 댓글엔 비추천을 누를 것을 요청하는 게시글들 올리기도 했다. 이러한 행보에 대해 한국일보에서도 22대 총선이 가까워질수록 극성 지지자가 늘어날 가능성이 있는 만큼, 정치권에서 먼저 이를 적극 경계하는 메시지를 내줄 필요가 있다고 지적을 하기도 했다.#
22대 총선까지는 무난하게 넘어가나 싶었으나 결국 국민의힘 4차 전당대회 때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한동훈 지지자들과 원희룡 지지자들간에 주먹다짐이 오가는 폭력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물론 먼저 한동훈의 연설에 야유를 보내며 시비를 걸은 것은 원희룡 지지자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맞대응으로 폭력을 행사한 것은 정당화될수도 없고, 중도층의 눈쌀을 찌푸리게 만드는 행위인 것이 명백하다. 결국 한동훈마저도 당황하며 "국민의힘이 국민께 보여드려야 할 모습은 이런 게 아닙니다"라며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진정할 것을 요구하는 일이 벌어졌다. 한동훈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강성 지지층을 어떻게 컨트롤할 것인지도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본인의 저서 “국민이 먼저입니다”가 정식 출간이 되기 이전부터 이미 각종 인터넷 서점의 정치/사회 카테고리의 1위를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도 다시 한번 팬덤, 즉 강성 지지층의 힘이 증명되었다. 정치인 한동훈의 가장 강점이 될 수 있는 자산이기도 함과 동시에, 상술했던 것처럼 부정적인 영향이 나타날 경우 큰 약점이 될 수 있는 양면적 존재라 볼 수 있겠다.[27]
3.3. 국민의힘 대표로서의 성과
한동훈은 2024년 7월 23일 당대표에 당선되었고, 12월 14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 가결 직후에 최고위원들이 사퇴하면서 지도부가 붕괴하는 바람에 12월 16일 사퇴했다. 따라서 당대표 재임 기간이 5개월도 안 돼 성과를 논하기에는 짧은 기간일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 있다.한동훈 체제 출범 이후 가시적 성과가 나오지 않는다는 평가가 나왔다. 본인이 전당대회 때 공언했던 제3자 추천 채상병 특검법의 경우, 이재명 대표 및 박찬대 원내대표가 제3자 추천 특검법안을 받아들인다고 하였지만, 친윤계를 중심으로 당내 의원들 사이에서 특검법 자체에 부정적인 분위기가 우세해 쉽게 추진하지 못했고 결국 당대표 재임 중 법안을 발의하지 못했다.[28] 김경수 전 경남지사 복권 및 의대 2000명 증원 문제에 대해서도 윤석열 대통령과 이견을 드러냈지만, 윤석열 대통령이 한동훈 대표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아 본인의 의사가 관철되지 못했다.
2024년 하반기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의정갈등 장기화와 김건희 리스크, 명태균 게이트 등 여러 악재가 있었지만, 금정구를 자주 찾아 유세하고 김건희 여사에 대해 활동 중단, 검찰의 납득할 만한 결정, 대통령실 인적 쇄신 등 3대 요구 사항을 던지기도 했다.# 그 결과 텃밭인 금정구청장·강화군수를 사수하는 데 성공했다. 여러 언론들은 "한동훈의 쇄신론이 먹혔다", "선거 패배 기록을 끊고 한동훈 리더십이 탄력을 받게 되었다", "체면치레는 했다" 등의 평가를 내놓았다.# # # # 특히 금정구청장 선거에서는 22%p차로 윤일현 국민의힘 후보가 압승해 22대 총선 때보다도 오히려 득표율이 올랐는데, 당내에서는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부산에 진을 치고 선거를 이끌었다. 부산 금정 선거 승리는 한 대표 개인기가 다했다", "한 대표가 부산 금정에서 유세에 나서면 주민들이 모여들었다. 마치 피리 부는 사나이 같았다"라는 평가가 나왔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막판에 명태균이란 대형 악재가 터졌는데도 20%P 이상 차이를 나게 한 것은 한동훈의 덕이다. 당과 대통령실을 분리하는 전략이 잘 먹힌 것"이라며 "한동훈 대표와 이재명 대표가 모두 본전은 했지만 굳이 따지자면 한 대표의 공이 더 컸다"고 분석했다. 김상일 정치평론가는 "부산 금정은 명태균 관련 이슈가 터지기 전에도 박빙, 위기란 말이 나왔다. 그런 상황에서 용산 쇄신을 한 대표가 꺼내들었다. 그건 승부수였다"며 "전후 사정을 볼 때 금정에서 여권이 좋은 결과를 내는 데 기여를 할 만한 요소는 한 대표가 용산에 용기 있게 쇄신을 말한 것밖에 찾을 수 없다"고 평가했다.# 이종훈 정치평론가는 "한 대표가 '지역일꾼론'을 꾸준히 이야기하고 김 여사 리스크를 차단하려 공을 들인 것이 판세를 유리하게 만들었다고 본다"며 "김영배 의원이 고인에 대한 모욕 발언을 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다.# 박성민 정치컨설팅 민 대표는 "(여당 지지층이) 대통령 때문에 선거가 어려워졌지만 한동훈 대표가 구했다, 한동훈 대표가 가려고 하는 방향이 맞다, 한동훈 대표에게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메시지를 준 것"이라며 "한 대표가 요구한 세 가지가 좀 먹혔다"라고 평가했다.#
한동훈이 나간 이후 권영세-권성동 쌍권 체제에서 치러졌던 첫 선거인 2025년 재보궐선거의 경우, 국민의힘의 전통적인 텃밭이었던 거제와 분당에서까지 패배했고 부산교육감[29]도 진보 후보가 과반을 득표했다. 이에 친한계에서는 지난 재보선 때의 승리를 언급하며 당의 각성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 #
원외 신분이고 여소야대의 정치적 환경임에도 본인이 추진했던 여러 법안들이 국회를 통과하며 입법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금융투자소득세 폐지, 가상자산 과세 2년 유예 등 민생과 관련한 현안들을 자주 이야기하면서 여론전을 펼쳤고, 다수당인 민주당은 금투세 및 가상자산 과세에 대해 기존 입장을 바꾸고 관련 법안들을 통과시켜 실질적인 성과를 내기도 했다. # 안보 및 보훈 분야에서는 국가배상법 개정안과 군인재해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 #
3.4. 윤석열과의 관계설정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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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 시절부터 윤석열의 동료[30]였고, 윤석열 정부에서 법무부장관이라는 요직을 지냈기 때문에 한때 대표적인 친윤 인사로 꼽혔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의 지지율이 임기 초부터 줄곧 낮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고 2023년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국민의힘 후보가 17% 넘는 격차로 더불어민주당 후보에게 대패를 당해 선거에서도 높은 정권심판 여론이 확인되었다.
이 가운데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의 사퇴로 인해 당대표 자리가 공석이 되자, 제22대 총선을 불과 100일 정도 앞두고 한동훈은 법무부장관직을 사퇴하였고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직이라는 중책을 맡음으로써 정계에 입문하였다. 이 당시 한동훈 비대위원장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과제는 총선 승리였고, 이를 위해 윤석열 대통령과의 차별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이에 따라 한동훈도 비대위원장 시절부터 다음과 같이 여러 차례 윤석열 정부와의 차별화를 시도하였고, 이로 인해 윤석열 대통령과의 갈등이 여러 차례 발생했다.
- 비상대책위원장 시기
- 김건희 명품백 수수 의혹에 대해서는 "함정 몰카"라면서도 "그렇지만 전후 과정에서 아쉬운 점이 있고, 걱정하실 만한 부분들이 있었다", "국민의 눈높이에서 생각할 문제"라고 지적했다. #
- 이종섭 호주대사 임명 논란과 황상무 언론인 협박 논란에 대해서도 "이 대사는 즉각 귀국하고, 황 수석은 스스로 거취를 결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 다시 용산과 충돌하기도 했다. #
- 윤 대통령의 의대 증원 관련 대국민담화를 두고서는 유연화를 요청하면서 2차례나 사퇴 의사를 밝히는 등 배수진을 치기도 했다. #
- 연설 중에 "여당을 이끄는 사람으로서 여러분이 정부와 여당에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점에 대해서 너무 죄송하다. 우리 정부가 여러분 눈높이에 부족한 게 있을 것"이라면서 "정부·여당에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제게 말해달라. 책임지고 목숨 걸고 해결하겠다"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
- 대표적인 친윤계 인사들 중 하나인 장예찬 전 청년최고위원[31]의 공천을 취소했다.
- 비상대책위원장 사퇴 이후~당대표 당선 이전
- 윤석열 정부의 해외직구 규제에 대해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
- 국민의힘 4차 전당대회 출마선언에서 수평적 당정관계를 강조하고, 채상병 특검법에 찬성하는 입장을 밝혔다.[32] #
- 김건희 여사 문자 무응답 사건이 폭로되었다. 이 사건은 한동훈 본인이 적극적으로 차별화를 시도한 것은 아니지만, 친윤계의 폭로 및 공격로 인해 의도치 않게 차별화된 사례로 볼 수 있다.
- 충청권 합동연설회에서 윤석열 정부의 R&D 예산 삭감에 대해 "거칠었고 정교하지 못했다. 저희가 반성한다"는 메시지를 냈다. #
- 당대표 시기
- 윤석열 대통령이 드루킹 여론조작 사건으로 실형을 살았던 김경수 전 경남지사의 복권을 추진하자, 이에 대해서 반대 입장을 밝혔다. # #
- 의대 증원 및 의료대란 문제와 관련해 2026학년도 의대 증원을 유예하자고 제안했지만, 대통령실이 해당 제안을 거부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
- 2024년 하반기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김건희 리스크가 불거지면서 윤석열 대통령에게 ▲ 대통령실 인적쇄신 ▲ 김건희 여사 대외활동 중단 ▲ 의혹 규명 협조 등 3가지를 요구했으며, 그 외에도 특별감찰관 도입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
- 윤석열 정부 비상계엄 직후 신속하게 반대 매시지를 냈으며, 자당 국회의원들에게 계엄 해제 표결에 참여할 것을 지시했다. 이후 탄핵에도 찬성했다.
이러한 한동훈의 차별화 시도에 대해서는 크게 3가지의 평가가 존재한다. 국민의힘 내 친한 진영에서는 "한동훈은 윤석열 대통령에게 바른 말을 할 줄 아는 충신"이라는 식으로 차별화가 적절히 이루어졌다는 취지로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부정적인 평가는 크게 두 가지로 갈리는데, 더불어민주당·조국혁신당·개혁신당 등 반윤 진영에서는 "한동훈은 여전히 윤석열의 아바타"라는 식으로 차별화가 없었다는 취지의 평가를 하는 반면, 국민의힘 내 친윤 진영에서는 "한동훈은 배신자"라는 식으로 차별화 자체가 부적절했다는 정반대 취지의 평가를 하고 있다.
참고로, 현직 대통령이 인기가 낮아 여당 내 대권주자들이 차별화를 시도하였던 사례는 과거부터 여러 차례 발생한 바 있으며, 이 중 일부는 긍정적 평가를 받기도 했고 부정적 평가를 받기도 했다. 제17대 대선의 정동영 후보는 노무현 현 대통령 여당 탈당 요구라는 초강수까지 뒀지만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에게 큰 표차로 패배했다. 정동영은 반노 유권자에게는 여전히 참여정부의 황태자로 비쳐졌으며, 노무현 대통령과 각을 세우는 과정에서 친노 유권자의 인심을 잃으면서 친노와 반노, 어느 쪽으로부터도 확실한 지지세를 모으지 못했다. # 반면 제18대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는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낮았음에도 이명박과의 차별화에 성공해[33]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 하지만 이명박과 박근혜는 같은 당 소속일 뿐 오랜 기간동안 다른 당들과의 관계를 뛰어넘는 숙적이었고, 특히 17대 대선 경선에서 적정선 없는 네거티브를 쏟아부어서[34] 온 국민들 앞에서 자기들이 정적임을 공개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35]
당정관계 문제가 이슈화되면서 이와 관련한 여론조사들가 발표되었다. 뉴시스가 여론조사 전문기관 에이스리서치에 의뢰해 2024년 6월 25~26일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차기 국민의힘 대표는 윤 대통령과 어떤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가'에 대해 "대통령실과의 차별화"(32.4%), "현안별 견제와 협력"(27.8%), "당정일체"(16.6%), "여당 중심"(15.6%) 순으로 조사되었다. 특히 국민의힘 지지층 내에서도 "현안별 견제와 협력"(32.8%), "당정일체"(26.9%), "여당 중심"(22.9%), "대통령실과의 차별화"(14.4%) 순으로 조사되어, 국민의힘 지지층들조차 정부여당이 한 목소리를 내는 당정일체보다 때에 따라 정부와 여당이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낼 수도 있는 관계를 선호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
3.4.1. 긍정적 평가
비대위원장 시절 한동훈은 여러 대통령발 악재들에 대해 정부를 향해 적절하게 지적했다는 평가가 존재한다. 이러한 노력에 대해 비윤계에 속하는 김재섭 도봉구 갑 당선인[36]도 "기대했던 것보다는 황상무 수석 문제, 이종섭 대사에 관한 문제도 빠른 메시지를 냈다. 사퇴하는 게 맞다, 의대 정원 문제에 있어도 유연하게 하는 게 맞다, 김건희 여사 문제도 마찬가지다. 어느 정도 거리두기를 하는 데 있어서도 한동훈 위원장이 노력을 했던 것 같다"고 했다. # 윤희숙 후보 역시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의 이종섭·황상무 관련 입장 표명에 대해 "현장에서 뛰는 선수 입장에선 대단히 감사한 일"이라고 밝혔다. #게다가 비대위원장 시절 차별화를 시도할 만한 여건 자체가 안 되었다는 반론도 있다. 한동훈 본인은 과거 비대위 시절에 대해 "연극이 이미 시작되었고 연극 2막에서 주인공 배우가 부상당해서 대체 배우로 올라가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비유하면서 "지금까지 진행되는 상황과 진행되는 체제에서 변용을 가져올 수 있는 재량이 거의 없었던 상태"라고 당시의 한계를 설명했다. #
제4차 전당대회 때는 김건희 여사 문자 무응답 사건이 폭로되면서 원희룡·나경원 등 친윤 후보들로부터 집중포화를 당했지만,[37] 이후 오히려 무당층을 중심으로 본인의 지지율이 급등하기도 했으며 # 당원투표 및 여론조사를 합산해 62.8%의 압도적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2024년 하반기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여러 대통령발 악재들이 있었지만 텃밭을 지켜내는 데는 성공했는데, 그 이유로 윤석열 대통령과의 차별화를 꼽는 의견이 있다. 재보궐선거 관련 내용은 본 문서 3.3문단 참조.
윤석열 정부 비상계엄 당시에도 계엄 해제에 빠르게 앞장섰고, 이후 대통령 탄핵과 관련해서는 말바꾸기 논란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최종적으로 탄핵 찬성 입장으로 정리했다. 이로 인해 민주당의 "내란동조" 프레임으로부터는 자유로워지게 되었다. 실제로 민주당에서조차 계엄 건에서만큼은 한동훈을 공격하지 못하며, 오히려 “다시 봤다”는 식으로 인정하는 편이다. 비상계엄 관련 내용은 본 문서 2.4문단 참조.
3.4.2. 부정적 평가
한동훈은 윤석열 정부의 초대 법무부장관을 지냈기 때문에 윤석열 정부 국정운영 중 일부에 대한 책임론도 야권에서 제기되었다. 한동훈은 윤석열 정부 인사 검증을 담당한 법무부 인사정보관리단을 이끌면서 윤석열 정부의 인사 실패의 일정 책임이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비대위원장 재임 중에 윤석열과의 갈등이 발생하자, 이준석 등 일부 정치권 인사들이 '약속대련설'을 주장하기도 하였다.[38] 그리고 국민의힘의 총선 참패 이후에는 한동훈이 윤석열과의 차별화에 실패했고, 윤석열 정부와 한 몸으로 받아들여졌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 #
전당대회에서 채상병 특검법 찬성 입장을 밝힌 것에 대해서도 진정성에 대한 의구심이 나왔다. 비대위원장 임기 중에 해병대 예비역들의 참배 요구를 외면했다는 논란이 불거진 바 있어, 해병대 예비역 연대 회장은 "진정성에 의심이 갈 수밖에 없는 상황"라고 언급하였다.[39] # 또한 이준석 개혁신당 의원은 한동훈 후보가 진정성을 가지고 있다면 민주당식 특검이 아닌, 한 후보가 주장하는 특검에 대해 이른바 친한계 현역 의원[40] 8명 정도를 설득해 내야 한다고 발언하였다. # 그러나 당대표 퇴임 때까지도 친한계에서 채상병 특검법은 발의되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와 관련해서는 찬반 입장을 여러 차례 바꿨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본 문서 4.4문단 참조.
한동훈 전 대표가 실제로 차별화를 충실히 했는지와는 별개의 문제로, 차별화 시도 자체가 정말로 효과가 있는가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되었다. 대통령과 어떤 관계를 어떻게 정립하든 한동훈으로선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본격적으로 윤 대통령과 차별화한 노선을 택하면 친윤계의 비판을 맞닥뜨려야 한다. # 현안을 두고 윤 대통령에게 유리한 입장을 나타낼 경우 상임위 등에서 대야 협상 여지가 줄어들고, 대통령실이 불쾌할 정도로 선을 그을 경우 윤석열·한동훈 충돌로 인한 지지층의 우려가 이어질 수 있다. 한동훈은 대통령실과 멀지도 가깝지도 않는 관계를 유지하면서, 대통령실과 야당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해야 되는 복잡한 상황에 처해있다. #
또한 아무리 차별화를 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윤석열 정부의 집권여당 소속으로서 정부 지지율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정부 지지율이 매우 낮아 국민의힘 자체에 투표하지 않는 국민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 같은 상황은 강서구청장 재보궐선거, 제22대 총선에서 제대로 드러났다.
3.5. 정치적 손해를 감수하는 행보
한동훈은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취임 직후 22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이를 통해서 '셀프 공천' 및 '공천 잡음' 등의 논란[41]을 사전에 차단했다는 해석도 나왔다. 당내에서도 불출마에 대해 호평이 나왔으며, 민주당 내 비명계는 이를 명분으로 이재명을 압박하기도 했다. # # 하지만 총선 불출마로 인해 국회의원으로서의 경험을 쌓지 못하게 되어 본인의 정치 경력에는 페널티가 되기도 했다. 사실 호남 등 극단적인 험지가 아니고서야 한동훈 정도라면 충분히 당선은 되었으리라 보는 것이 맞음에도 그러지 않음으로써, 호평은 있었고 과감한 이미지를 만드는 데는 성공했으나, 의원 배지가 없기에 대표 시절에도 원외 대표의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제4차 전당대회 당대표 후보 출마의 경우도, 총선 참패 이후 윤석열 정부의 지지율이 굉장히 낮은 상황이라는 점, 당내 친윤계 인사들이 한동훈을 견제하고 있었다는 점, 원외 당대표라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점 등으로 이미지 소모를 우려해 불출마 의견이 많았지만, 전당대회에 출마해 당대표에 당선되었다. 당대표 재임 중 여러 일들이 있었지만, 사방에 적이 깔려있는 적대적 정치 환경과 국회의원 경험이 없는 원외 당대표 신분의 한계 속에서 비상계엄이라는 초대형 악재가 발생했고 윤석열 대통령 탄핵에 찬성하면서 지도부 붕괴 및 사퇴라는 새드 엔딩을 맞이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동훈의 당대표 불출마가 더 나았을 것이다고도 단언하기는 힘들다. 여러 악재들을 피할 수는 있는 대신, 아무런 공직이나 당직도 없는 상태여서 사람들에게 잊혀질 가능성도 있었고, 검사 시절 윤석열 대통령의 2인자였던 이미지와 윤석열 정부의 법무부장관 출신 때문에 여전히 친윤이라는 비판과 오해를 살 수도, 아무리 윤석열 정부의 실정이 가장 큰 원인을 차지했다 한들 총선에서 참패한 여당의 비대위원장이라는 꼬리표를 영원히 극복하지 못 할 수도 있었고,[42] 결국 그런 상태에서 대선에 출마했다면 "아무것도 안 하다가 대선 때만 모습을 비춘다"는 말이 나올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결과론적인 얘기이지만 당대표를 했던 덕분에 윤석열 및 친윤계와의 완전한 단절에 성공하고, 아바타 이미지를 벗어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비상 계엄에 반대하고 여당 대표임에도 대통령을 탄핵 소추하고, 파면까지 이어지게 한 덕에, “내란 공모자” 이미지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되었다. 이는 헌법을 수호하고 자유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했던 의지였다고 볼 수 있기에, 길게 보면 한동훈의 정치 일생 최대의 자산을 얻었다고 볼 수도 있다.
이러한 그의 정치적 손해를 감수하는 면모는 2025년 4월 10일 대선에 공식 출마 선언에서도 다시 한 번 드러났다. 대통령 권한 축소 및 4년 중임제, 그리고 국회 양원제 도입 개헌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또한, 다음 총선과 대선의 시기를 맞출 것을 약속하며, 자신은 이번에 당선되면 그 다음 대선에는 출마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하였다. 즉, 개헌 임무를 모두 완수하고 3년만에 깔끔하게 물러날 것임을 내세운 것. 이는 한동훈의 그간 성향을 드러낼 뿐 아니라 일종의 승부수를 던진 것이라 볼 수 있으며, 어떻게 작용할 것인지는 지켜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4. 단점
4.1. 부정적인 여론조사 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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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훈이 여권 유력 대권주자로 주목받은 이유가 '유능함과 정의'는 아니라는 여론조사가 있다. 2023년 10월 16일부터 10월 18일까지 시사인이 의뢰하고 한국리서치가 진행한 여론조사에서 '한동훈 장관이 여권에서 유력한 대선주자가 된 이유가 유능하고 정의롭기 때문이다'를 물었고, 이에 그렇다가 27.9%, 아니다가 61.6% 로 나타났다. 이를 통해 유능과 정의가 한동훈의 대권주자로서의 장점으로 인지되지 않거나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것으로 나타났다.#[43]
2024년 1월 29일~31일 리서치뷰가 실시한 정기조사 중 여야 대표 호감도를 묻는 설문에서 한동훈에 대한 호감은 40%, 비호감은 50%로 나와 비호감도가 우세했다. #[44] 데일리안이 여론조사공정에 의뢰해 2024년 3월 18~19일 이틀 간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이재명에 대한 긍정평가는 증가한 반면 한동훈에 대한 부정평가가 늘어났다. 한동훈의 당대표 수행 부정평가가 늘어는 것은 국민의힘 공천 파동이 생기면서 평가절하된 것으로 보인다. #[45] 2024년 6월 24~25일 미디어토마토가 진행한 여론조사에서 ‘이재명 전 대표와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 중 누구를 더 신뢰하고 호감을 느끼나’라는 질문에 이재명 44.8%, 한동훈 33.1%로 나타나, 이재명의 호감도가 더 높다는 결과가 나왔다. #[46]
2024년 9월, 차기 대권주자 적합도 여론조사에서 이재명 대표 44.5%에 비해 한동훈 대표 22.0%라는, 2배 가까이 되는 지지율 하락 및 격차가 발생하였다.#
2025년 4월, 한동훈의 진보층 비호감도는 85%(호감도 12%), 보수층 비호감도는 75%(호감도 22%)로 모두 높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다. 다른 대선주자는 대체로 반대 진영의 높은 비호감도를 지지층의 호감도로 만회하는 모양새를 띠지만, 한동훈은 '아군 진영'에서도 비호감도가 높은 셈이다.#
2025년 4월, 국민의힘 제21대 대통령 후보 경선의 룰을 감안하여 조사한 3곳의 여론조사[47]에서 김문수 전 고용노동부 장관 24%에 한동훈 전 국민의 힘 대표 13%로 밀리는 결과가 나왔다. 그와 동시에 홍준표 전 대구시장 14%,오세훈 서울시장[48] 14%과의 오차범위 내 접전을 펼치고 있는 상황이다.#
4.2.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참패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겸 총괄선거대책위원장으로서 제22대 국회의원 선거를 이끌었으나 국민의힘의 대참패로 패장으로서의 책임론에 직면하며 차기 대권주자로서의 앞길이 불투명해졌다.#선거 전부터 정치권 일각에서는 패배 책임 기준이 야권의 패스트트랙을 막을 수 있는 121석으로 거론됐으나 이마저도 실패하여 책임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졌다.## 2020년 제21대 총선 당일 사퇴한 황교안 전 미래통합당 대표의 선례와 같이 비대위원장 사퇴 가능성이 거론되었으며, 결국 총선 다음날 비상대책위원장 사퇴 의사를 밝혔다.#
한겨레는 한동훈이 총선에서 보수의 외연 확장에 한계를 노출했다는 기사를 냈다. 기사에 따르면 한동훈은 윤석열 대통령과 선명한 차별화를 하지 못했다는 평가도 나왔고, 공식 선거운동 기간에는 강한 발언으로 중도·무당층의 반발을 샀다고 한다.# 동아일보는 이조 심판론이 총선 전략에 독이 됐으며 전략의 총체적 부재였다는 평가가 여권에서 나온다면서 정치권은 흑과 백의 일도양단 싸움을 하는 곳이 아니라는 점을 간과했다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경향신문은 총선 과정에서 당초 한동훈에게 기대됐던 미래 비전이 아닌, 이조심판론 등 야당을 공격하는 싸움꾼 이미지가 생겼다는 기사를 냈다.# 중앙일보는 선거운동 초반부터 물밑에서는 불안 징후가 없지 않았다. ‘후보는 없고, 비대위원장만 있는 선거’라는 후보들의 볼멘소리가 이날 비극의 암시였다고 보도했다.#
국민의힘 총선 선거 운동 과정에서 후보는 없고, 비대위원장만 있는 선거라는 주장도 나왔다. 릴레이 셀카 등으로 스타 효과를 극대화하는 전략을 내세웠지만 정작 한동훈이 주목도를 독식하는 바람에 지역구 후보 득표에 실질적 도움이 크지 않았다는 주장이다.[49]# 한동훈이 중도층 외연 확장에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한동훈 원톱 한계론이 제기되었지만, 유승민[50] 등 다른 인물에게 선거에서 역할을 맡기지 않았다.[51] #
홍준표 대구시장은 “총선은 당 비대위원장이 주도해서 한 것”이라며 한동훈 책임론의 불씨를 지폈다.[52]# '윤석열의 멘토'로 알려진 신평 변호사는 "한동훈 위원장의 당무 독점력이 지나쳤다"면서 "한 위원장이 이번 총선을 어디까지나 자신의 대권 행보, 그 하나의 예행 연습, 이런 식으로 삼아온 건 그분의 여러 언행에서 우리가 충분히 엿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김무성, 황교안이나 이낙연처럼 선거 참패 후 재기에 실패하고 대권주자에서 이탈하여 몰락한 케이스도 많다. 그러나 이미 선거 패배 당시에도 6~70대였던 김무성(2016년 기준 만 64세), 황교안(2020년 기준 만 63세)[53], 이낙연(2024년 기준 만 71세)과 달리 한동훈은 2024년 기준 만 51세로 정치인으로써는 아직 젊은 편이고,[54] 우리나라 정치 역사에서도 선거 참패 이후에 절치부심하여 재기에 성공한 케이스도 여럿 있었다.[55]
게다가 21대 총선은 당시 당대표였던 황교안의 실책이 매우 막중했지만, 22대 총선은 김건희 디올백 의혹, 이종섭 호주대사 임명 논란과 황상무 언론인 협박 논란, 윤석열 대파 논란, R&D 예산 대폭 삭감, 의사-정부 갈등과 의료대란, 채상병 사건 외압논란 등으로 지지를 크게 깎아먹은 윤석열-김건희 부부와 용산 대통령실의 책임론이 한동훈 책임론보다 훨씬 강하게 분출되었다. 실제로 정진석, 김기현 등 친윤계 의원들은 과거 국민의힘 3차 전당대회를 앞두고 "22대 총선은 당대표가 아닌 대통령의 얼굴로 치러지는 선거"라고 말한 바 있다.## #
그리고 한동훈이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취임하기 불과 2개월 반 전에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국민의힘이 참패했을 정도로 정부여당에 대한 민심이 상당히 차가워서 개헌저지선 확보 여부도 불투명했을 정도였고, 이런 최악의 상황 속에서 한동훈은 본인이 자발적으로 나선 게 아니라 당의 요청을 받고 2023년 12월 하순에 비상대책위원장에 취임해 불과 약 100일 동안 직을 수행했다. 임기 초 1~2월쯤만 해도 직무수행 여론조사에서 한동훈 비대위원장에 대해서는 긍정적 평가가 많았다가,[56] 3월부터 이종섭 사태 등의 변수로 인해 판세가 불리하게 된 것이었다.
실제로 여론조사에 따르면 연령·지역·성별·진영을 불문하고 윤석열-김건희 부부의 책임이라는 응답이 압도적으로 많으며, 이러한 조사 결과는 총선 직후부터 7월까지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다. 서요한 여론조사공정 대표는 "국민의힘 전당대회 중 친윤 그룹에 의해 제기되고 있는 '한동훈 책임론'은 국민들에게 먹혀들지 않는 것으로 확인된다"라고 했다.#
- 뉴스토마토가 미디어토마토에 의뢰해 2024년 4월 13일~14일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총선 참패에 대해 "윤석열 대통령의 책임"이라는 응답이 68%,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의 책임"이라는 응답이 10%로 조사되었다. 국민의힘 지지층에서조차 "윤석열 책임" 45.1% 대 "한동훈 책임" 9.6%로, '윤 대통령의 책임'이란 응답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 여론조사꽃이 2024년 4월 12~13일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CATI(전화면접) 방식에서는 "윤석열 대통령 책임" 54.1%, "김건희 여사 책임" 10.2%, "국민의힘 당 지도부 책임" 7.2%,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 책임" 6.7%, ARS 방식에서는 "윤석열 대통령 책임" 57.1%, "김건희 여사 책임" 9.2%,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 책임" 8.7%, "국민의힘 당 지도부 책임" 7.5%로 조사되었다. 해당 여론조사 역시 국민의힘 지지층들 사이에서도 한동훈 책임론보다 윤석열 책임론이 훨씬 많았다.#
- 데일리안이 여론조사공정에 의뢰해 2024년 5월 20일~21일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의힘 총선 패배에 대해 62.0%가 "윤석열 대통령 책임", 12.5%가 "한동훈 전 위원장 책임"이라고 답했다. 국민의힘 지지자 중에서는 "윤석열 대통령 책임" 45.5%, "한동훈 전 위원장 책임" 8.1%로 조사되었다.#
- 데일리안이 여론조사공정에 의뢰해 2024년 7월 15일~16일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의힘 총선 패배에 대해 39.6%가 "윤석열 대통령 책임", 21.6%가 "김건희 여사 책임"[57], 11.8%가 "한동훈 전 위원장 책임", 10.1%가 "국민의힘 당원 전체 책임"이라고 답했다. 국민의힘 지지자 중에서는 "윤석열 대통령 책임" 23.6%, "김건희 여사 책임" 19.8%[58], "한동훈 전 위원장" 책임 14.7%, "당원 전체 책임" 12.8%로 조사되었다.#
국민의힘 내부에서는 비윤계를 중심으로 "용산발 악재 속에서 한동훈은 최선을 다했다", "오히려 한동훈 덕분에 보수층이 결집해 개헌저지선은 지켜냈다" 등의 옹호 의견도 나오고 있다.
- 김재섭 도봉구 갑 당선인[59] - "한동훈 위원장이 더 질 수 있는 것을 그나마 덜 지게 했다고 보는 입장인데, 정부 여당에 엄청난 악재들이 있는 상황 속에서 그걸 한동훈의 개인기로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했다"면서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을 옹호했다.# 김재섭 당선인은 CBS 라디오에서 "한 전 위원장은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본인의 모든 역량을 다 발휘하려고 한 것"이라며 "거의 모든 이슈[60]에 대해 한 전 위원장이 그래도 국민 눈높이에 맞게 대통령실에 요구했다"고 말했다.#
- 김웅 의원[61] - "100일 동안 나름 최선을 다하고 패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사람에게 그런 조롱을 던지는 것은 비열한 것"이라고 한동훈 책임론을 주장한 홍준표 대구시장을 비판했다.#
- 김미애 의원 -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이 당의 요청을 받고 뒤늦게 등판한 점을 거론하며, "처음에는 상당히 좋았다.[62] 좋을 때는 다 가만히 있다가 나빠지니까 뒤에서 다른 말을 하는 건 옳지 않다"면서 "한동훈 비대위원장을 우리가 세웠고 전국을 돌면서 열심히 했다. 그러면 우리 모두의 책임이지 홍 시장처럼 한동훈 비대위원장에 대해 말해선 안 된다"라고 지적했다.#
- 김영우 전 의원 - "지난해 연판장으로 엉망이었던 전당대회, 비정상적 강서구청장 공천과 선거 참패, 총선 과정에서 불거진 의대 정원 논란과 이종섭, 황상무 사건은 가히 놀라웠다"며 "그래도 한 전 위원장의 지원유세로 소위 보수층의 자포자기와 분열을 막을 수 있었다", "누가 한동훈에게 돌을 던지랴. 이건 아니다. 정말 아니다"라고 한동훈 전 위원장을 옹호했다.#
- 김상욱 울산 남구 갑 당선인 - "당이 정말 어려울 때 나서셨다. 사실 쉬울 때 하는 건 누구나 한다고 생각한다. 근데 어려울 때 반 발짝 내딛기는 정말 쉽지 않은 일"이라면서 "참 큰 용기를 내주셨고 또 한동훈 비대위원장님께서 선거기간 정책이나 아니면 현안에 대해서 말씀하셨던 것들을 되짚어보면 상당히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셨다고 생각한다"라고 인터뷰했다. 그리고 "특히 무엇보다 총선을 지휘하시면서도 공천을 처음부터 받지 않겠다 고 시작하셨다. 본인을 내려놓고 시작을 하셨고 또 선거 이후에 깨끗하게 모든 것을 내려놓으셨는데 저는 이런 모습들에서 제가 배움을 또 많이 얻었다. 그래서 저는 상당히 존경하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 김종혁 국민의힘 조직부총장 - "우리 당에 오랫동안 켜켜이 쌓인 문제들에 대해 취임 100일쯤 된 비대위원장한테 모든 책임을 지라고 하는 건 염치없는 짓"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번 선거 참패 원인을 따지자면 대통령실의 문제, 당 지도부의 문제, 후보 개개인의 역량 문제가 다 종합된 것"이라면서도 "다만 가장 큰 바람이 어디서부터 불어왔는지는 다 아는 사실 아닌가. 그걸 모르는 국민이 있겠나"라며 사실상 용산 대통령실을 겨냥했다.#[63]
- 조해진 의원 - "한 전 위원장에게는 비대위원장이라는 직책에 따른 형식적 책임이 있을 뿐 실질적 책임은 따로 있다"면서 "정권 심판이 대세가 된 상황에서 내부에서 계속 발목이 잡히는 그에게 선거의 흐름을 바꿔놓기를 기대하는 것은 불가항력의 요구였다", "그의 입당 이후 승기가 무르익었을 때 거기에 찬물을 끼얹고 참패를 자초한 동인이 무엇이었는지는 당원이 알고 국민이 안다"라고 했다.#
- 고동진 강남구 병 당선인 - "한동훈 책임이라고 하는 건 잘못됐다. 지난해 12월 말에 당에 와서 100일 동안 온몸을 불살라 일한 사람 아닌가. 회사 생활을 하다가도 실수할 때 있다. 잘못한 사람이 (만회를 위해) 더 죽자 살자 달려들 수 있다. 한 번 더 기회를 줄 수도 있어야 한다. 리더가 무조건 물러나는 게 최선책은 아니다"라고 했다. # 그리고 갤럭시 노트7 폭발 사고에 대해 언급하며 "당시 문제를 가장 정확히 아는 사람이 (책임자인) 저를 포함한 임직원이었고 이들이 문제를 분석하고 대책을 만들었기 때문에 사고를 수습하고 새로운 시리즈를 개발할 수 있었다"면서 "정치권에서는 선거에 참패했으니 빠지라고 한다. 이것이 여의도 관행인 것 같은데 합리적이지 않다"라고 했다.#
이조심판론, 셀카, 한동훈 원톱 체제 등의 비판에 대해서도 여러 반론이 제기되었다.
- 이조심판론 관련 반론 - 박상수 국민의힘 인천 서갑 조직위원장은 "(비관적인 상황에서) 당 지도부가 고육지책으로 (중도층이 아닌) 우리 전통 지지층의 결집을 위해 이조심판론을 들고 왔다고 본다", "지지층 결집으로 100석을 지키는 게 급했던 것이다. 정무적으로 우리 전통 지지층을 결집시키고 100석을 지켜냈다는 점에서 이조심판론은 그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라고 옹호했다.# 유의동 의원은 "결과론적으로는 좋지 않은 수단이었지만 국정운영에 대한 국민적 반감이 강한 상태에서 한 전 위원장이 선택할 수 있는 수단은 많지 않았다"며 "이런저런 시도들을 했었지만 다 무위에 그쳤다"라고 설명했다.# 장동혁 국민의힘 원내수석대변인[64]은 "이조심판론을 유일한 원인이나 가장 큰 원인으로 말하는 것은 너무 결과를 갖고 얘기하는 것"이라며 "선거 운동할 때 한동훈 전 위원장에게 지원 유세 한 번만 더 와달라고 해놓고 지금 와서는 이조심판론 때문에 졌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적절치 않다"라고 반박했다.##
- 셀카 관련 반론 - 현장에서 지지자들의 요청이 쇄도했기 때문에 셀카를 찍어준 것이다. # 이상민 국민의힘 의원은 "셀카도 인기가 있으니까 셀카 찍지 인기가 없으면 셀카 찍겠느냐"며 "그건 오히려 한동훈 위원장의 그런 거를 당이 활용한 거 아니겠느냐"라고 옹호했다.# 국민의힘 전당대회 토론회 중 악플 읽기 코너에서도 '셀카 좀 그만 찍어!'라는 악플이 나왔는데, 한동훈 후보 본인은 이에 대해 "저는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고 싶다. 저를 보러 와주시고 자기 시간 내서 오신 분들에게 친절하게 해드리고 싶다"면서 "오시는 분들에게 셀카 찍어드리는 거 앞으로도 해드리겠다"라고 답했다.#
- 한동훈 원톱 체제 관련 반론 - 2016년 총선-2017년 대선-2018년 지선-2020년 총선에서 보수정당이 연이어 참패하면서 전국적인 인지도와 중량감을 가진 인물이 거의 없어졌기 때문에, 한동훈 말고 세울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전국적인 인지도와 중량감이 있다고 할 만한 인물들(예: 나경원, 안철수, 원희룡 등)은 모두 지역구 여론조사에서 접전[65] 또는 열세[66]라는 결과가 나오면서 각자 본인의 선거를 치르기에 바빴다. 박상수 인천 서갑 조직위원장은 "우리가 민주당보다 쓸 수 있는 자원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함을 원인으로 삼는 것이 맞다"라고 옹호했다.#
한동훈에게 적대적인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조차도 "한동훈 위원장 혼자의 책임은 절대 아닐 것"이라며 "가장 비난받아야 할 건 윤석열 정부"라고 했다.[67]#
김종인 전 개혁신당 상임고문은 한동훈 책임론과 관련해 "한 전 위원장이 국민의힘 패배를 최소화하는 데는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며 "사실 국민의힘은 지난 2년 동안의 평가를 바탕으로 패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있었다"고 평가했다.#
어쨌든 이래저래 향후 대권가도에는 상당한 타격을 입은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며, 이 위기를 재도약의 기회로 바꿀 수 있는지가 한동훈이 이재명이나 문재인, 홍준표, 안철수처럼 패배의 위기를 딛고 일어서느냐, 제2의 이낙연, 황교안이 되어 몰락하느냐를 결정할 것이다. 그나마 한동훈은 전술했듯 아직 정치인 치고는 젊은 편이라 다시 일어설 시간은 충분히 있고, 총선 참패 후에도 보수층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어서, 이낙연, 황교안에 비해 상황 자체는 훨씬 나은 편인 것이 위안이다.
2024년 7월 23일 국민의힘 4차 전당대회 결과, 한동훈 후보가 당원투표에서 62.69%, 국민의힘 지지층 및 무당층 여론조사에서 63.46%라는 압도적인 득표율을 기록해, '총선 참패 책임론'이 한 후보에게 전혀 먹히지 않았다는 평가가 나왔다.# 또한, 당대표 당선으로 정치적 타격을 딛고 화려하게 부활했으나 이후 당 최고위원 5인의 줄사퇴로 지도부가 붕괴하였고, 대표직을 상실하였다.
4.3. 검사 출신 정치인에 대한 반감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검사 출신 정치인에 대해 전반적인 국민들의 정서가 부정적으로 기울었다. 문재인 정부 말기~윤석열 정부 초반에 반짝 특수를 누렸던 '검사 정치'가 빠르게 퇴출 중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 윤석열 정부 출신 전직 고검장조차 "국민이 검사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있다”면서“퇴직 검사의 정치 입문을 10년 동안 막는 제도를 법제화하자"고 제안했다. # 검사 출신들이 윤석열 정부 요직에 등용되는 비중이 증가하고, 거기에 국민의힘 총선 후보로 대거 공천될 것이라는 소문[68]이 검사 출신 정치인에 대한 반감을 키운 배경으로 작용했다. 야권에서는 검찰 공화국이라는 비난을 하였으며, 국민의힘 내부에서도 윤석열 정부 들어 검찰 출신들이 너무 많이 나서서 국민 여론이 악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 # #검찰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도 많이 하락했다. 한국갤럽이 2025년 4월 8~10일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검찰에 대한 신뢰도는 경찰, 공수처, 법원, 헌법재판소 등 다른 사법 관련 기관보다 뒤쳐지는 꼴지를 기록했으며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신뢰한다'는 응답보다 2배 이상 높았다. #
12.3 비상계엄을 일으킨 윤석열 전 대통령에게 받은 충격으로 인해 검찰 출신에 대한 국민적 거부감을 쉽게 극복하기 어려울 것이며, 검찰 출신 대통령 탄핵 이후 국민이 또 검찰 출신을 대통령으로 택하긴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있다. #
이러한 지적에 대해 한동훈 전 대표는 "검사정치라며 싸잡아 비난하는 건 받아들일 수 없다"며 여러 반론을 내놓았다. 한 전 대표는 ▲ 검찰총장을 그만둔 뒤 대통령으로 바로 직행했던 윤석열 대통령과 다르게 본인은 법무부장관 및 당대표를 역임했다는 점 ▲ 까라면 까고 물라면 무는 검찰 특유의 상명하복 문화로부터 자유롭다는 점 ▲ 당대표 시절 줄세우기를 하지 않았다는 점 등을 꼽았다. # #
4.4.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 관련 말바꾸기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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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한동훈/비판 및 논란#s-6.4|6.4]]번 문단을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한동훈/비판 및 논란#|]][[한동훈/비판 및 논란#|]] 부분을
참고하십시오.한동훈은 윤석열 정부 비상계엄 처음부터 계엄에 명확히 반대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윤석열과 확실히 차별화될 기회를 얻었으나,[69] 계엄이 종료된 후 바로 윤석열의 탄핵을 막겠다는 입장을 공표했다. 그러다 하루만에 조속한 직무정지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친윤계의 주도로 당론이 '탄핵안 반대'로 추인된 것에 불쾌감을 표현해 탄핵에 찬성한 것으로 해석되었으나, "거취 문제를 당에 위임하겠다"는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가 나온 이후 다시 탄핵 반대 입장을 밝혔다. 결국 혼란 속에서 1차 탄핵소추안은 국민의힘 의원 105인[70]이 불참함에 따라 결국 의결정족수(재석인원 200명)를 채우지 못해 표결이 무산되었다. # 계엄-탄핵정국으로 대통령의 지지율이 10% 초반대로 떨어진 가운데 이 같은 행보는 장기적으로 한동훈의 정치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은 한동훈의 태도는 계엄사태를 일으킨 내란죄 피의자로 몰리게된 대통령의 정치적 생명을 연장시키는 모양새라는 평가가 나왔다. #
한동훈은 표결에 불참해 안건을 불성립시키는 방식을 편법이라며 그렇게 되지 않을 거라고 말한 바 있는데, 정작 대통령 탄핵안 표결에 대부분 의원이 불참하면서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 다만 탄핵 표결안 불참은 의원총회에서 당론으로 정해진 것이었고, 본인은 원외였기 때문에 당론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는 점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 이후 나중에 본인이 직접 밝히길, 당시 탄핵안 내용에 북중러의 외교를 도외시 했다는 황당한 내용이 담겨 있었기 때문에 가결되어서는 안되었다는 입장을 밝혔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에서 국민의힘 소속 국회의원들이 안철수 의원과 김예지, 김상욱 의원을 제외하고 전원 표결에 참석하지 않았다. 심지어 표결에 참여한 세 명중 안철수는 친한계조차 아니라서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설령 친한계 의원들의 상당수가 뒤늦게 표결에 참여한다고 해도, 그의 계파 소속 의원들이 당론을 따라서 퇴장한 것은 사실이므로[71], 그 의원들 개개인의 평과는 별개로 본인의 정치인으로서의 행보는 그대로 발목을 잡힌 셈이 되었다.
이후, 한 대표가 대통령 임기 단축 로드맵을 곧 발표할 것이라는 정보가 나왔으나, 임기 단축이라는 선택지 자체를 야당은 물론, 여론에서도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아니므로, 사실상 윤석열 감싸기에 동참한다는 비판을 피하기가 어렵다. 특히 대표적인 친한계 정치인인 조경태가 탄핵 찬성론에서 반대론으로 급선회한 이유에 대한 질문에 "한동훈 대표의 입장을 따른다."라고 대답한데서, 친한계 역시 표결에 참여한 소수를 빼면 기본적으로 반대론이 지배적이었음이 밝혀졌다. 이 때문에 하술하듯이 윤석열 정부가 몰락하는 순간에 본인도 함께 몰락하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는 의견도 있었다. 물론 윤석열의 몰락 전 친윤계가 한 대표를 먼저 숙청해 버릴 가능성도 농후하다.
8일 11시에 있었던 담화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의 2선 후퇴 후에 국무총리와 당대표간의 정례회담을 통한 긴밀한 당정관계를 확립하는 식으로 향후 국정을 이끌겠다고 했는데, 여전히 실질적으로 국정은 윤석열의 손바닥 안에 놓여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72]
이후 윤석열 대통령 본인이 당에 거취를 맡기겠다는 입장을 스스로 뒤집고 자진해서 조기퇴진할 의지가 없음을 밝혔다. 이로 인해 14일 결국 일부 국민의힘 의원들이 탄핵 찬성으로 돌아서 탄핵이 가결되며 윤석열의 직무가 정지되었고, 한동훈 본인은 표결 전날에 탄핵에 찬성한다는 입장을 확실히 밝히면서 일단은 끝까지 윤석열 정부에 휘둘린다는 낙인이 찍히는 데서는 벗어났다. 그렇기 때문인지 한동훈은 자신이 계엄을 주도하거나, 그에 협력하지 않았다는 것을 근거로 당 대표직을 유지하겠다고 공언했지만 탄핵 가결 이후 당 최고위원 5인이 전원 사퇴하며 지도부가 붕괴되었고 이로 인해 이틀 뒤 국민의힘 당대표에서 사임하면서 국회의원도 대표도 아닌 일반 평당원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제일 먼저 윤석열의 불법 계엄에 반대하고,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73] 국회에 18명의 의원들과 함께 들어가서 반대 표결을 이끌어 냈던 그 결연함을 일관성 있게 유지해지 못했던 것이 본인에게는 큰 패착이 되었다. 다만, 결국 늦게나마 탄핵에 찬성하고, 이를 가결시킴으로써, 최소한 "내란의힘"이라는 조롱을 받으며 윤석열의 부역자라 비난받고 있는 국민의힘의 상황에서는 가장 자유롭게 되었다. 또한, 탄핵 가결에 대한 책임론으로 친윤들의 공작질에 당해 사실상 당대표직에서 쫓겨남으로써 "소통령"이라는 낙인과 함께 결국 윤석열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당초의 예상에서는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 다만, 그 대신에 자신의 최측근인 장동혁과
보수진영 내에서도 계엄에 반대하며 윤석열의 퇴진을 요구하는 여론이 2024년 말까지만 해도 압도적으로 높았지만# 탄핵소추 이후 2025년 들어 보수진영 내의 정치적 판도가 바뀌면서 보수층 한정으로는 윤석열의 탄핵을 반대하는 여론이 높아지면서# 윤석열에 반기를 들어 친윤으로부터 배신자로 낙인찍힌 한동훈이 강경 보수측에서의 입지가 점점 없어져가고 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도층을 중심으로 탄핵 찬성 여론이 압도적으로 높기에, 향후 복귀 이후 본인이 어떤 행보를 가져가느냐에 따라 달라질 여지는 있지만, 이미 탄핵정국의 주도권은 더불어민주당이 가져간데다, 상술한 말바꾸기 행보 등으로 진보층에게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단단히 박혔으므로, 이마저도 불투명한 상황이다.
이후 해당 논란에 대해 한동훈 전 대표는 본인의 저서 <국민이 먼저입니다>에서 "기본적인 방향에 있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입장이었다"고 반박했다. 한 전 대표의 반박 요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대통령은 직에서 물러나야 하며, 물러날 때까지 국군통수권 등 직무를 수행해서는 안 된다"는 게 한동훈 본인의 확고한 생각이었다.
- 그러나 만약 탄핵 국면으로 가게 될 경우 헌법재판소 심판 과정 내내 대한민국이 두 편으로 쪼개져 갈등과 반목이 커질 것이며, 이와 반대로 조기퇴진은 대통령이 자기 잘못에 따른 결과에 승복하는 것이니 지지층 반발도 최소화할 수 있다. 그래서 내놓은 것이 '질서 있는 조기퇴진'이었다. 그리고 '탄핵심판 과정 내내 나라가 분열될 것'이라는 본인의 우려는 적중했다.
- (거취 문제를 당에 위임하겠다는) 대통령 말을 믿은 것이 너무 순진했던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지만, 대통령은 한동훈 본인한테만 개인적으로 얘기한 게 아니라 대국민담화를 통해 온 국민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약속한 것이었다. 그 상황에서 "대통령 말 못 믿겠으니 탄핵밖에 방법이 없다"라는 식으로 대응할 수는 없었고 그 뜻을 존중해 1차 탄핵소추 표결에서 반대 입장을 드러냈다. 이후 대통령이 조기퇴진할 의사가 없음을 드러냈으니 탄핵밖에는 선택지가 없어졌다.
길지만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우선 다소 이상적이더라도 최선의 방법을 시도는 해보고 나서 탄핵에 대해 논해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겠는가 라는 것이다. 그가 우려했던대로 탄핵소추안이 가결되고 나서, 헌재의 결정이 있을때까지 국론 분열, 예상보다 상당한 시간적 소모[76] 가 발생하였다. 따라서 한동훈의 주장이 틀렸다고 볼 순 없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도층이나 정치에 관심없는 사람들의 시선에서는 위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한동훈이 말바꾸기를 하며 간을 봤다고 보일 수 있기에 이런 이미지를 어떻게 탈피할지가 이번 경선, 대선에서의 과제가 될 것이다.
4.5. 선출직 공무원 경력 부재
검사, 법무부장관 등 임명직 공무원으로서 활동 경력과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당대표 등 정당 당직자로서의 활동 경력은 존재하지만, 국회의원 및 지방자치단체장 등의 선출직 공무원으로서의 경력이 없으며,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불출마를 택했다. 만일 제21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게 된다면 선배 윤석열과 마찬가지로 본인의 첫 선거가 바로 대선이 된다.물론 정치 경력이 없어도 윤석열처럼 당선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윤석열의 경우 당시 여러 가지 상황이 모두 그에게 유리하게 돌아가[77] 대통령에 당선된 정말 흔치 않은 케이스이다.
게다가 그렇게 당선된 윤석열 역시 임기 동안 정치 경력 부족에서 비롯한 여러 문제점과 한계를 드러내며 임기 초 지지율 급락 사태를 맞기도 했고, 결국 그러한 부분들이 영향을 미쳐 비상계엄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자충수를 두며 탄핵이라는 최악의 결과를 자초했기 때문에 앞으로 한국 정치사에 있어서 짧은 시간 내 이런 사례가 다신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하기 어렵다.
앞으로 윤석열 같은 케이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신인보다는 정치인으로서 커리어와 경험을 가진 사람을 지지할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동훈 위원장이 22대 총선에서 차라리 불출마보다 강남3구 같은 보수 강세 지역구이거나 비례대표일지언정 배지를 달아서 원내에 진입하는 것이 앞으로 행보에 도움이 될 수 있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국회의원으로서 원내에서 목소리를 내는 것과 원외에서 내는 것은 천지차이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선출직 경력이 없다는 지적에 대해서 한동훈 전 대표는 "경험이 많다고 해서 정치를 잘 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요지로 반박했다. 한 전 대표는 "김건희 여사의 문제가 많이 있었고, 민심도 (문제에) 동의하지 않았나. 그때 왜 저만 지적했을까. 경험이 부족해서였겠냐. 다른 사람들은 경험이 많아서 그때 입 꾹 닫고 탬버린 치면서 아부하고 있었나. 그런 경험은 필요 없다"고 했다. 이어서 "저는 김 여사, 이종섭·황상무, 명태균, 의대 정원 2000명 고수, 김경수 사면복권 등 문제를 제기했다. 저만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나선 게 문제 아닌가 싶다"며 "저는 구태 정치를 한 경험, 사법리스크 경험, 명태균 리스크의 경험도 없다. 대신 어려운 상황에서 민심을 권력에 전하고, 권력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아부하지 않았던 경험이 있다"라고 덧붙였다. #
우선 21대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로 선출되는 것은 불발되었으니, 이후에 있을 선거에서 한동훈 본인이 출마할 가능성이 매우 높으므로, 시간의 흐름으로 인해 해당 리스크가 어느 정도 정리될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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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대고등학교[2] 컬럼비아 대학교 로스쿨[3] 경향교류 원칙(수도권-지방 근무 순환)에 따른 부산 근무, 조국 수사 이후 추미애, 박범계 장관에 의한 4연속 좌천을 제외하면, 골든 트라이앵글 내에서 단 1번도 벗어나지 않았다.[4] 법무부 검찰과 수석검사, 대검 정책기획과장[5] 현재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중 고졸 대통령은 김대중, 노무현 뿐인데 이들이 학창 시절을 보낸 시대상으로 보면 고졸만 해도 충분히 고학력이었고 소학교(국민학교)만 나온 사람이 남녀를 불문하고 반 이상이었다.[6]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이나 대권주자급 체급을 지닌 정치인들의 삶은 대체로 순탄하지 않았다. 군사정권의 탄압이나 노동운동 등으로 인해 우여곡절이 많은 민주당계 대권주자들까지 가지 않더라도, 보수 정당에서도 이명박, 김영삼 등도 삶에 굴곡이 많았다. 다른 대권주자급인 홍준표만 해도 어려운 성장 과정이나 검사 임관 이후 고난이 많았다.[7] 그동안의 활동 내역에 대해서는 한동훈/여담 문서 참조.[8] 더불어민주당 - 김경수(근위지절강직, 면제) / 김동연(근시, 보충역 방위) / 이재명(장애6급 판정, 면제)
국민의힘 - 김문수(중이염, 면제) / 나경원(해당 없음) / 홍준표(저체중 및 근시, 보충역 방위)
개혁신당 - 이준석(산업기능요원 병역특례 대체복무)[9] 마약범죄, 위증죄 등 일부 범죄에 대한 검사의 수사개시권을 시행령으로 보장했다.[10] 인혁당 사건 피해자 과다배상금 이자 면제, 제주 4.3 사건 직권재심 확대, 장준하 사건 등 국가배상소송 상소 포기 등.[11] 스토킹범죄 반의사불벌죄 폐지, 온라인스토킹 관련 규정 신설, 스토킹 가해자 전자장치 부착 등[12] 한국형 제시카법, 촉법소년 연령 하향, 가석방 없는 무기징역, 사형 집행시효 30년 폐지, 국외도피 범죄자 재판시효 정지, 검수원복 시행령, 금융증권범죄합동수사단 부활, 대검 마약조직부 부활 등[13] 세월호, 제주 4.3, 인혁당 등[14] 이민청 신설, 과학기술 우수인재 영주귀화 패스트트랙, 숙련기능인력 비자(E-7-4) 전환 쿼터 확대 등[15] 비상장사 물적분할 시 반대주주 주식매수청구권 부여 등[16] 총선을 앞두고 5.18 민주화운동 왜곡 논란 및 일베 게시물 공유 논란이 제기되었다.[17] 제1야당 대표이자, 가장 유력한 대권주자인 이재명보다도 먼저 계엄에 대한 반대 의사를 밝혔다. 심지어 계엄군의 체포 대상에서 한동훈 본인이 포함되어서 잘못하면 자신의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었다.[18] 물론 본인은 원외이기 때문에 표결에 참여하지 못했다.[19] 다수의 의원들은 "국회 본회의장으로 가라"는 한동훈 대표의 지시가 아닌 "당사로 가라"는 추경호 원내대표의 지시를 따랐는데, 이로 인해 추경호 원내대표 및 당사로 향한 의원들은 "내란동조범"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고 추경호는 경찰의 수사선상에 오르게 되었다. 반면 한동훈 본인 및 국회 본회의장으로 향한 의원들은 이런 비난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20] 국내 및 해외의 전문가들로부터 윤석열 정부의 한미일 위주 외교 정책은 탄핵 사유가 될 수 없다는 지적을 받은 야당이 2차 탄핵안에서는 삭제하였다.[21] 헌법재판소도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에서 이와 일맥상통하는 지적을 했다.[22] 한 대표와 친한계의 이런 모습은 여의도 정치권에서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 평가되는데, 윤석열 고발사주 의혹으로 김웅 의원실을 압수수색할 때나 김용 정치자금법 위반 의혹으로 민주연구원을 압수수색할 때는 양당 정치인들의 저항이 굉장히 거셌다.[23] 현직 검사 신분을 유지한 상태에서 총선 출마 선언을 해 논란이 있었고 결국 검찰에서 징계를 받았다.[24] 특히 이 두 사람은 상명하복에 익숙한 법조인 출신 정치인들이 아님에도 이러한 갑질 논란을 일으켰다.[25] 교수직은 연구와 교육에만 전념할 수 있기 때문에 전관예우 폐습으로부터 자유로운 직종에 속한다. 조희대 현 대법원장이나 김영란 전 대법관도 대법관 퇴임 후 교수직을 맡으면서 전관예우의 소지를 피했다.[26] 다만 법무부장관 청문회의 경우, 적극적으로 공세에 나선 의원들이 한국3M이 한ㅇㅇ으로 되어있다고 한동훈과의 관련성을 지적하거나 '이 모 교수'를 '이모(aunt)'라고 해석하는 등 자멸한 측면이 있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27] 다만, 조기 대선 국면에서만 보면 그의 팬덤은 한동훈에게 마이너스보단 플러스가 되고 있다고 보는게 맞아 보인다. 비상계엄 및 탄핵 국면을 거치면서 “배신자” 이미지가 박히며 당대표 선거 때 그를 지지하던 60퍼센트 정도의 당심 상당수가 떠나갔으나, 여전히 팬덤 덕에 20퍼센트 내외의 콘크리트 지지는 남아 있기에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28] 이와 관련해 한동훈 대표 및 친한계 인사들은 제3자 추천 특검법에 대한 한 대표의 입장은 변화가 없으며, 당내 의원들을 설득하고 있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친한계 의원 10명을 확보해 한동훈표 특검법안을 발의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는데, 당 지도부 관계자는 "10명을 통해 특검법안을 발의하는 방안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며 10명 발의가 아닌 당내 설득을 하겠다고 했다. 10명만 모아서 발의하는 방법을 택할 경우, 여권 분열을 노리는 야당의 노림수에 넘어갈 수 있다는 설명이다.# 스스로 친한동훈계라고 밝힌 정성국 의원은 한 대표가 '제3자 특검법안' 발의를 하지 않고 있는 이유에 대해 "여당 대표는 야당 대표와 다르게 결정권을 확실히 갖고 있지 않은 점, 대통령실에서 채상병 특검법에 대해서 부정적인 기류가 그대로인 점, 현재까지 당론이 반대인 점 때문이다"고 말했다. 이어 "모든 일에는 예열이 필요한 데 아직 예열이 없었다"며 예열을 위해 "한 대표가 중진 등을 개별적으로 접촉하고 대통령실과도 소통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야당이 '한 대표가 법안 발의에 필요한 의원 10명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꼰 것에 대해서는 "10명이 없어서 발의 못 하는 건 아니다"라며 "그렇게 하면 당내 소통 부분을 무시한 것이 되기에 그런 상황을 피하려 하기 때문이다"라고 반박했다.#[29] 당과는 관계 없지만, 당내 몇몇 인사들과 탄핵 반대 인사들이 정승윤 후보 지원에 나섰다.[30] 단순히 동료가 아니라 윤석열 사단의 좌장급 인사였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31] 과거 다수의 SNS 게시물들이 구설수에 올랐다.[32] 다만 민주당안에는 반대 의사를 밝히고, 대통령이나 여야 정치권이 아닌 대법원장이 특검을 지명하는 대안을 제시했다. 참고로 조희대 현 대법원장은 윤석열 대통령이 지명하였지만, 더불어민주당 의원들 대부분이 임명동의안 표결에서 찬성표를 던져 찬성 264표, 반대 18표, 기권 10표를 받아 대법원장이 되었다.[33] 미디어리서치가 2011년 6월 8~9일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박근혜 전 대표가 2012년 대선에서 승리하는 것에 대해 "정권 재창출"로 보는 응답(34.6%)보다 "정권 교체"로 보는 응답(50.1%)이 더 우세했다. #[34] 한나라당의 본선 승리가 당연시될 정도로 유리했던 선거라 이 경선이 대통령을 가르는 사실상의 본선이였고, 그래서 둘 다 후환 없이 총공을 퍼부었다.[35] 이 갈등의 여파는 두 대통령이 대통령을 끝마치고 문재인 정부 들어와서도 대한민국 보수를 둘로 갈라놓았을 정도로 깊은 갈등이였다.[36] 처음에는 용산과의 디커플링을 할 수 있는지, 쓴소리를 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어 한동훈 비대위원장 임명에 대해 반대했다.[37] 김건희 문자 무응답 사건에 한동훈 본인은 "집권당 비대위원장과 영부인 사적인 방식으로 공적이고 정무적인 논의를 하는 게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다"며 오히려 문자 무응답이 적절한 처신이라고 반론했다. 실제로 조국 등 야권 정치인들은 김건희를 향해 '국정농단'이라고 비판하고 있었으며, 한동훈이 김건희의 문자에 답장을 했을 경우 한동훈 본인도 야권의 '국정농단' 프레임에 걸릴 수 있었다.[38] 다만 이러한 평가는 현재는 사라졌다.[39] 해병대 예비역 연대 회장은 국민의힘 책임당원이다. #[40] 대략 10명 전후라고 한다.[41] 특히 이 당시에는 친윤·검사 출신들이 대거 공천받을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기에, 공천 잡음 차단에 대한 요구가 더 높았던 시점이었다.[42] 당장 이전 총선 당시 미래통합당 대표로써 총선를 지휘했던 황교안이 총선에서 크게 참패했다는 이유로 2025년 현재까지도 정계로 복귀하지 못하고 원외에서 부정선거 음모론과 극우 행보에만 열중하고 있는 처지로 전락한 것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쉽게 극복할 수 있는 정치적 타격이라고 볼 순 없다.[43] 조사자 : 한국리서치, 의뢰자 : 시사인, 조사기간 : 2023년 10월 16일,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조[44] 조사자 : 리서치뷰, 의뢰자 : 리서치뷰, 조사기간 : 2024년 1월 29일~31일,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조[45] 조사자 : 여론조사공정, 의뢰자 : 데일리안, 조사기간 : 2024년 3월 18~19일,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조[46] 조사자 : 미디어토마토, 의뢰자 : 뉴스토마토, 조사기간 : 2024년 6월 24~25일,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조[47] 한국갤럽(뉴스1) 기준[48] 2025년 4월 기준 불출마 선언[49] 다만 22대 총선은 개별 후보들에 대한 평가들보다 윤석열 정부의 중간평가 성격이 강했고 '정권심판론 VS 야당심판론·정권지원론' 구도가 압도적이었다.[50] 그러나 유승민은 보수층 내에서 여전히 비호감으로 낙인찍혀 있어, 직접 역할을 맡게 될 경우 보수층의 강한 반발과 분열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51] 이와는 반대로 민주당의 경우는 이해찬과 김부겸이 불출마하면서 이재명과 같이 3톱 체제를 형성했고 이재명의 역할을 분담할 수 있게 되었다. # #[52] 다만 홍준표는 이전부터 잠재적인 대선후보들을 자신의 경쟁자로 여기면서 견제해왔다는 것은 감안해야 한다. 홍준표가 한동훈을 원색적으로 비난하자, 당내에서도 김경율, 김웅 등이 홍준표를 향해서 강하게 비판했다.# 국회 직원과 보좌관들만이 글을 올릴 수 있는 '여의도 옆 대나무숲'에서는 "이분의 가장 큰 문제는 본인 밖에 모른다는 것. 당은 이용가치밖에 없는 곳이자 본인이 유일한 적자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수단"이라며, "본인 욕심에 눈이 먼 사람들은 유독 본인의 대권 꿈에 거슬리는 어떤 후보나 정치인이 나오면 물어뜯기 바쁘다"라고 지적했다.#[53] 공교롭게도 황교안은 자신의 운명을 결정지은 21대 총선 당일날이 생일이었다.[54] 한동훈은 2024년 기준 국민의힘 대권주자로 언급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젊은 나이이며, 한동훈 다음으로 젊은 김진태조차도 한동훈보다 9살이나 더 나이가 많다. 또한 범보수정당으로 범위를 넓혀도 한동훈보다 젊은 대권주자는 이준석밖에 없으며, 더불어민주당에서조차도 한동훈보다 젊은 대권주자는 이탄희밖에 없다.[55] 대표적으로 홍준표도 19대 대선과 7회 지선에서 참패했지만, 위기를 딛고 21대 총선에서 재기에 성공한 후 20대 대통령 선거까지 출마해서 한때는 대통령에 당선된 윤석열보다도 경선 지지율이 높았었다. 이재명도 20대 대선, 8회 지선에서 연패했지만 야권 1위 주자를 공고히 유지하고 있다. 문재인도 대선에서 패배했으나 재도전해서 대통령이 되었다. 다만 문재인, 홍준표, 이재명을 한동훈과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우선 문재인은 대선에서 석패했고 홍준표는 애초에 탄핵 대선과 문재인 정부 집권 1년차 이루어진 7회 지선에서 진 거였다. 이재명도 대선은 석패했고 지선은 애초에 윤석열 취임 4주만에 있었던 선거라 이기는 게 불가능한 선거였다. 게다가 8회 지선 당시 실질적인 공천과 선거 지휘는 박지현이 하고 이재명은 지원유세만 했으며, 되려 박지현이 사과 기자회견을 해서 선거를 제대로 말아먹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리고 문재인과 이재명은 선거 패배후 각각 비문계와 비명계를 중심으로 선거 패배 책임론이 대두 되었으나 문재인은 20대 총선 승리로,이재명은 22대 총선 승리로 반대파들을 중심으로 제기된 선거 패배 책임론을 일거에 불식 시켰다. 7대, 13대, 14대 대선에서 낙선하고 15대 대선에서 4수 끝에 대통령으로 당선된 김대중 전 대통령, 13대 대선 낙선 후 재도전 끝에 14대 대통령에 당선된 김영삼 전 대통령은 22대 총선만큼 충격적인 참패가 아니라 간발의 차로 떨어진 석패였기 때문에 한동훈을 이들과 비교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양김은 이미 22대 총선 시점에서의 한동훈 나이(51세)에 김대중은 4선, 김영삼은 무려 7선의 중진이었다. 또한 김영삼은 사회초년생 나이인 26세에 초선의원이 된데다 7선 내내 4대 총선 빼고 전부 당선돼서 한동훈이 아닌 그 누구라도 김영삼과 일대일로 비교하기가 어렵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거기다 요새는 다선의원에 대해 경륜있다는 시각보다 오래 해먹는다는 부정적인 시각을 갖는 경우가 많아져서 정권교체가 빠르기 때문에 7선의원이 나오기는 갈수록 힘들어져서 더더욱. 22대 총선에서 최다선 의원인 추미애가 6선이다.[56] 여론조사 : # # # # #[57] "윤석열 책임" 응답과 "김건희 책임" 응답을 합산하면 61.2%[58] "윤석열 책임" 응답과 "김건희 책임" 응답을 합산하면 43.4%[59] 심지어 김 당선인은 처음에는 한동훈 비대위원장 임명에 대해 반대했었던 사람이다.#[60] 김건희 명품백 논란, 이종섭·황상무 논란 등[61] 한동훈 비대위원장 임명에 반대하면서 한동훈을 북한 김주애에 비유하는 발언을 하여 국민의힘 지지층들 사이에서 욕을 먹었던 사람이다.#[62] 실제로 2024년 2월에는 여당 지지율이 잘 나왔다.[63] 특히 김종혁은 자신이 추진 중인 고양시 서울편입론에 윤석열 정부가 협조는커녕 특례시의 기능을 대폭 강화하겠다고 하여 여당 후보였던 자신과 상반되는 정책을 내놓아 정책의 일관성을 흐트러놓았다고 강력 비판했다.[64] 한동훈 비대위에서 사무총장을 지냈다.[65] 서울 동작을, 경기 성남분당갑[66] 인천 계양을[67] 다만 이 대표의 발언은 한동훈 책임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아무리 한동훈이 잘 했어도 그 뒤를 윤석열 대통령이 뒷받쳐주지를 않았기에 힘들었을 선거라고 비꼬는 것이다.[68] 다만 소문과는 달리 실제로는 검사나 대통령실 출신이 대거 공천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 #[69] 특히 계엄령 중에 한동훈을 체포한다는 지시가 명백히 존재했던 만큼 계엄령의 피해자로 포지셔닝해도 충분히 당위성이 있었다.[70] 국민의힘 총원 108인 중 안철수, 김예지, 김상욱 제외 전원.[71] 속내야 어쨌든, 친한계 의원들조차 한동훈의 의중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 확실히 드러났기 때문이다.[72] 그러나 한덕수 국무총리 탄핵 심판 선고에서 민심 수습과 안정을 위하여 행정부와 여당이 서로 협력하여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지를 국민에게 피력한 것으로 해석되었고, 여당대표와 공동으로 국정을 운영하였다고 볼 만한 직접적 근거나 사례를 찾을 수 없으므로 헌법을 위반했다고 볼 수 없다는 판결이 나오며 공동 국정운영에 대한 위법성 논란은 해소되었다.[73] 비상계엄 직후 대통령이 직접 한동훈을 비롯한 주요 정치인의 체포를 지시했다는 증언들이 속속 나오고 있고, 심지어 HID까지 동원하여 암살 시도까지 했다는 의혹까지 제기되고 있다. 이재명, 조국과 더불어 가장 신변의 위협이 컸던 인물임은 명백한 사실로 보인다.[74] 다만 진종오는 2025년 1월 한동훈과 같이 찍은 사진을 SNS에 올리며 여전히 한동훈이 본인을 품어 준것을 밝히며 다시 친한계로 돌아왔다.[75] 국민의힘 당헌당규에 따르면 선출직 최고위원 5명 중 4명 이상이 사퇴하면 지도부가 붕괴하고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전환해야 하며, 비대위 구성이 완료되는 순간 당대표직을 상실한다. 한동훈 측은 비대위 전환을 막기 위해 친한계 2명 이상을 최고위원으로 당선시키려 했고 전당대회 때 장동혁과 진종오 2명이 최고위원에 당선되면서 목표를 달성했지만, 당초의 예상을 깨고 이들이 배신하면서 축출된 것이다.[76] 3월 말로 예상된 헌재의 결정이 4월 초가 되어서야 나왔다. 이에 대해 한동훈 본인은 만약 질서있는 조기퇴진이 실현되었다면 상황은 아무리 늦어도 3월 안에는 끝날 수 있었기에 충분히 시도할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밝혔다.[77] 사회 갈등 유발, 부동산, 자영업자 손실보상 및 가계부채 등한시 등 각종 직면한 문제 개혁을 외면하고 본인 지지율만 챙기기, 자화자찬 등으로 문재인 대통령과 당시 여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국민들의 비토 정서가 커져 정권심판론이 고조되면서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정치 신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2등이었던 이재명 후보와의 차이는 고작 0.73%밖에 되지 않은, 그야말로 하늘이 도왔다고밖에는 할 말이 없는 차이였다.
국민의힘 - 김문수(중이염, 면제) / 나경원(해당 없음) / 홍준표(저체중 및 근시, 보충역 방위)
개혁신당 - 이준석(산업기능요원 병역특례 대체복무)[9] 마약범죄, 위증죄 등 일부 범죄에 대한 검사의 수사개시권을 시행령으로 보장했다.[10] 인혁당 사건 피해자 과다배상금 이자 면제, 제주 4.3 사건 직권재심 확대, 장준하 사건 등 국가배상소송 상소 포기 등.[11] 스토킹범죄 반의사불벌죄 폐지, 온라인스토킹 관련 규정 신설, 스토킹 가해자 전자장치 부착 등[12] 한국형 제시카법, 촉법소년 연령 하향, 가석방 없는 무기징역, 사형 집행시효 30년 폐지, 국외도피 범죄자 재판시효 정지, 검수원복 시행령, 금융증권범죄합동수사단 부활, 대검 마약조직부 부활 등[13] 세월호, 제주 4.3, 인혁당 등[14] 이민청 신설, 과학기술 우수인재 영주귀화 패스트트랙, 숙련기능인력 비자(E-7-4) 전환 쿼터 확대 등[15] 비상장사 물적분할 시 반대주주 주식매수청구권 부여 등[16] 총선을 앞두고 5.18 민주화운동 왜곡 논란 및 일베 게시물 공유 논란이 제기되었다.[17] 제1야당 대표이자, 가장 유력한 대권주자인 이재명보다도 먼저 계엄에 대한 반대 의사를 밝혔다. 심지어 계엄군의 체포 대상에서 한동훈 본인이 포함되어서 잘못하면 자신의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었다.[18] 물론 본인은 원외이기 때문에 표결에 참여하지 못했다.[19] 다수의 의원들은 "국회 본회의장으로 가라"는 한동훈 대표의 지시가 아닌 "당사로 가라"는 추경호 원내대표의 지시를 따랐는데, 이로 인해 추경호 원내대표 및 당사로 향한 의원들은 "내란동조범"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고 추경호는 경찰의 수사선상에 오르게 되었다. 반면 한동훈 본인 및 국회 본회의장으로 향한 의원들은 이런 비난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20] 국내 및 해외의 전문가들로부터 윤석열 정부의 한미일 위주 외교 정책은 탄핵 사유가 될 수 없다는 지적을 받은 야당이 2차 탄핵안에서는 삭제하였다.[21] 헌법재판소도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에서 이와 일맥상통하는 지적을 했다.[22] 한 대표와 친한계의 이런 모습은 여의도 정치권에서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 평가되는데, 윤석열 고발사주 의혹으로 김웅 의원실을 압수수색할 때나 김용 정치자금법 위반 의혹으로 민주연구원을 압수수색할 때는 양당 정치인들의 저항이 굉장히 거셌다.[23] 현직 검사 신분을 유지한 상태에서 총선 출마 선언을 해 논란이 있었고 결국 검찰에서 징계를 받았다.[24] 특히 이 두 사람은 상명하복에 익숙한 법조인 출신 정치인들이 아님에도 이러한 갑질 논란을 일으켰다.[25] 교수직은 연구와 교육에만 전념할 수 있기 때문에 전관예우 폐습으로부터 자유로운 직종에 속한다. 조희대 현 대법원장이나 김영란 전 대법관도 대법관 퇴임 후 교수직을 맡으면서 전관예우의 소지를 피했다.[26] 다만 법무부장관 청문회의 경우, 적극적으로 공세에 나선 의원들이 한국3M이 한ㅇㅇ으로 되어있다고 한동훈과의 관련성을 지적하거나 '이 모 교수'를 '이모(aunt)'라고 해석하는 등 자멸한 측면이 있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27] 다만, 조기 대선 국면에서만 보면 그의 팬덤은 한동훈에게 마이너스보단 플러스가 되고 있다고 보는게 맞아 보인다. 비상계엄 및 탄핵 국면을 거치면서 “배신자” 이미지가 박히며 당대표 선거 때 그를 지지하던 60퍼센트 정도의 당심 상당수가 떠나갔으나, 여전히 팬덤 덕에 20퍼센트 내외의 콘크리트 지지는 남아 있기에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28] 이와 관련해 한동훈 대표 및 친한계 인사들은 제3자 추천 특검법에 대한 한 대표의 입장은 변화가 없으며, 당내 의원들을 설득하고 있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친한계 의원 10명을 확보해 한동훈표 특검법안을 발의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는데, 당 지도부 관계자는 "10명을 통해 특검법안을 발의하는 방안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며 10명 발의가 아닌 당내 설득을 하겠다고 했다. 10명만 모아서 발의하는 방법을 택할 경우, 여권 분열을 노리는 야당의 노림수에 넘어갈 수 있다는 설명이다.# 스스로 친한동훈계라고 밝힌 정성국 의원은 한 대표가 '제3자 특검법안' 발의를 하지 않고 있는 이유에 대해 "여당 대표는 야당 대표와 다르게 결정권을 확실히 갖고 있지 않은 점, 대통령실에서 채상병 특검법에 대해서 부정적인 기류가 그대로인 점, 현재까지 당론이 반대인 점 때문이다"고 말했다. 이어 "모든 일에는 예열이 필요한 데 아직 예열이 없었다"며 예열을 위해 "한 대표가 중진 등을 개별적으로 접촉하고 대통령실과도 소통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야당이 '한 대표가 법안 발의에 필요한 의원 10명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꼰 것에 대해서는 "10명이 없어서 발의 못 하는 건 아니다"라며 "그렇게 하면 당내 소통 부분을 무시한 것이 되기에 그런 상황을 피하려 하기 때문이다"라고 반박했다.#[29] 당과는 관계 없지만, 당내 몇몇 인사들과 탄핵 반대 인사들이 정승윤 후보 지원에 나섰다.[30] 단순히 동료가 아니라 윤석열 사단의 좌장급 인사였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31] 과거 다수의 SNS 게시물들이 구설수에 올랐다.[32] 다만 민주당안에는 반대 의사를 밝히고, 대통령이나 여야 정치권이 아닌 대법원장이 특검을 지명하는 대안을 제시했다. 참고로 조희대 현 대법원장은 윤석열 대통령이 지명하였지만, 더불어민주당 의원들 대부분이 임명동의안 표결에서 찬성표를 던져 찬성 264표, 반대 18표, 기권 10표를 받아 대법원장이 되었다.[33] 미디어리서치가 2011년 6월 8~9일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박근혜 전 대표가 2012년 대선에서 승리하는 것에 대해 "정권 재창출"로 보는 응답(34.6%)보다 "정권 교체"로 보는 응답(50.1%)이 더 우세했다. #[34] 한나라당의 본선 승리가 당연시될 정도로 유리했던 선거라 이 경선이 대통령을 가르는 사실상의 본선이였고, 그래서 둘 다 후환 없이 총공을 퍼부었다.[35] 이 갈등의 여파는 두 대통령이 대통령을 끝마치고 문재인 정부 들어와서도 대한민국 보수를 둘로 갈라놓았을 정도로 깊은 갈등이였다.[36] 처음에는 용산과의 디커플링을 할 수 있는지, 쓴소리를 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어 한동훈 비대위원장 임명에 대해 반대했다.[37] 김건희 문자 무응답 사건에 한동훈 본인은 "집권당 비대위원장과 영부인 사적인 방식으로 공적이고 정무적인 논의를 하는 게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다"며 오히려 문자 무응답이 적절한 처신이라고 반론했다. 실제로 조국 등 야권 정치인들은 김건희를 향해 '국정농단'이라고 비판하고 있었으며, 한동훈이 김건희의 문자에 답장을 했을 경우 한동훈 본인도 야권의 '국정농단' 프레임에 걸릴 수 있었다.[38] 다만 이러한 평가는 현재는 사라졌다.[39] 해병대 예비역 연대 회장은 국민의힘 책임당원이다. #[40] 대략 10명 전후라고 한다.[41] 특히 이 당시에는 친윤·검사 출신들이 대거 공천받을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기에, 공천 잡음 차단에 대한 요구가 더 높았던 시점이었다.[42] 당장 이전 총선 당시 미래통합당 대표로써 총선를 지휘했던 황교안이 총선에서 크게 참패했다는 이유로 2025년 현재까지도 정계로 복귀하지 못하고 원외에서 부정선거 음모론과 극우 행보에만 열중하고 있는 처지로 전락한 것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쉽게 극복할 수 있는 정치적 타격이라고 볼 순 없다.[43] 조사자 : 한국리서치, 의뢰자 : 시사인, 조사기간 : 2023년 10월 16일,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조[44] 조사자 : 리서치뷰, 의뢰자 : 리서치뷰, 조사기간 : 2024년 1월 29일~31일,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조[45] 조사자 : 여론조사공정, 의뢰자 : 데일리안, 조사기간 : 2024년 3월 18~19일,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조[46] 조사자 : 미디어토마토, 의뢰자 : 뉴스토마토, 조사기간 : 2024년 6월 24~25일,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조[47] 한국갤럽(뉴스1) 기준[48] 2025년 4월 기준 불출마 선언[49] 다만 22대 총선은 개별 후보들에 대한 평가들보다 윤석열 정부의 중간평가 성격이 강했고 '정권심판론 VS 야당심판론·정권지원론' 구도가 압도적이었다.[50] 그러나 유승민은 보수층 내에서 여전히 비호감으로 낙인찍혀 있어, 직접 역할을 맡게 될 경우 보수층의 강한 반발과 분열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51] 이와는 반대로 민주당의 경우는 이해찬과 김부겸이 불출마하면서 이재명과 같이 3톱 체제를 형성했고 이재명의 역할을 분담할 수 있게 되었다. # #[52] 다만 홍준표는 이전부터 잠재적인 대선후보들을 자신의 경쟁자로 여기면서 견제해왔다는 것은 감안해야 한다. 홍준표가 한동훈을 원색적으로 비난하자, 당내에서도 김경율, 김웅 등이 홍준표를 향해서 강하게 비판했다.# 국회 직원과 보좌관들만이 글을 올릴 수 있는 '여의도 옆 대나무숲'에서는 "이분의 가장 큰 문제는 본인 밖에 모른다는 것. 당은 이용가치밖에 없는 곳이자 본인이 유일한 적자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수단"이라며, "본인 욕심에 눈이 먼 사람들은 유독 본인의 대권 꿈에 거슬리는 어떤 후보나 정치인이 나오면 물어뜯기 바쁘다"라고 지적했다.#[53] 공교롭게도 황교안은 자신의 운명을 결정지은 21대 총선 당일날이 생일이었다.[54] 한동훈은 2024년 기준 국민의힘 대권주자로 언급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젊은 나이이며, 한동훈 다음으로 젊은 김진태조차도 한동훈보다 9살이나 더 나이가 많다. 또한 범보수정당으로 범위를 넓혀도 한동훈보다 젊은 대권주자는 이준석밖에 없으며, 더불어민주당에서조차도 한동훈보다 젊은 대권주자는 이탄희밖에 없다.[55] 대표적으로 홍준표도 19대 대선과 7회 지선에서 참패했지만, 위기를 딛고 21대 총선에서 재기에 성공한 후 20대 대통령 선거까지 출마해서 한때는 대통령에 당선된 윤석열보다도 경선 지지율이 높았었다. 이재명도 20대 대선, 8회 지선에서 연패했지만 야권 1위 주자를 공고히 유지하고 있다. 문재인도 대선에서 패배했으나 재도전해서 대통령이 되었다. 다만 문재인, 홍준표, 이재명을 한동훈과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우선 문재인은 대선에서 석패했고 홍준표는 애초에 탄핵 대선과 문재인 정부 집권 1년차 이루어진 7회 지선에서 진 거였다. 이재명도 대선은 석패했고 지선은 애초에 윤석열 취임 4주만에 있었던 선거라 이기는 게 불가능한 선거였다. 게다가 8회 지선 당시 실질적인 공천과 선거 지휘는 박지현이 하고 이재명은 지원유세만 했으며, 되려 박지현이 사과 기자회견을 해서 선거를 제대로 말아먹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리고 문재인과 이재명은 선거 패배후 각각 비문계와 비명계를 중심으로 선거 패배 책임론이 대두 되었으나 문재인은 20대 총선 승리로,이재명은 22대 총선 승리로 반대파들을 중심으로 제기된 선거 패배 책임론을 일거에 불식 시켰다. 7대, 13대, 14대 대선에서 낙선하고 15대 대선에서 4수 끝에 대통령으로 당선된 김대중 전 대통령, 13대 대선 낙선 후 재도전 끝에 14대 대통령에 당선된 김영삼 전 대통령은 22대 총선만큼 충격적인 참패가 아니라 간발의 차로 떨어진 석패였기 때문에 한동훈을 이들과 비교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양김은 이미 22대 총선 시점에서의 한동훈 나이(51세)에 김대중은 4선, 김영삼은 무려 7선의 중진이었다. 또한 김영삼은 사회초년생 나이인 26세에 초선의원이 된데다 7선 내내 4대 총선 빼고 전부 당선돼서 한동훈이 아닌 그 누구라도 김영삼과 일대일로 비교하기가 어렵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거기다 요새는 다선의원에 대해 경륜있다는 시각보다 오래 해먹는다는 부정적인 시각을 갖는 경우가 많아져서 정권교체가 빠르기 때문에 7선의원이 나오기는 갈수록 힘들어져서 더더욱. 22대 총선에서 최다선 의원인 추미애가 6선이다.[56] 여론조사 : # # # # #[57] "윤석열 책임" 응답과 "김건희 책임" 응답을 합산하면 61.2%[58] "윤석열 책임" 응답과 "김건희 책임" 응답을 합산하면 43.4%[59] 심지어 김 당선인은 처음에는 한동훈 비대위원장 임명에 대해 반대했었던 사람이다.#[60] 김건희 명품백 논란, 이종섭·황상무 논란 등[61] 한동훈 비대위원장 임명에 반대하면서 한동훈을 북한 김주애에 비유하는 발언을 하여 국민의힘 지지층들 사이에서 욕을 먹었던 사람이다.#[62] 실제로 2024년 2월에는 여당 지지율이 잘 나왔다.[63] 특히 김종혁은 자신이 추진 중인 고양시 서울편입론에 윤석열 정부가 협조는커녕 특례시의 기능을 대폭 강화하겠다고 하여 여당 후보였던 자신과 상반되는 정책을 내놓아 정책의 일관성을 흐트러놓았다고 강력 비판했다.[64] 한동훈 비대위에서 사무총장을 지냈다.[65] 서울 동작을, 경기 성남분당갑[66] 인천 계양을[67] 다만 이 대표의 발언은 한동훈 책임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아무리 한동훈이 잘 했어도 그 뒤를 윤석열 대통령이 뒷받쳐주지를 않았기에 힘들었을 선거라고 비꼬는 것이다.[68] 다만 소문과는 달리 실제로는 검사나 대통령실 출신이 대거 공천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 #[69] 특히 계엄령 중에 한동훈을 체포한다는 지시가 명백히 존재했던 만큼 계엄령의 피해자로 포지셔닝해도 충분히 당위성이 있었다.[70] 국민의힘 총원 108인 중 안철수, 김예지, 김상욱 제외 전원.[71] 속내야 어쨌든, 친한계 의원들조차 한동훈의 의중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 확실히 드러났기 때문이다.[72] 그러나 한덕수 국무총리 탄핵 심판 선고에서 민심 수습과 안정을 위하여 행정부와 여당이 서로 협력하여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지를 국민에게 피력한 것으로 해석되었고, 여당대표와 공동으로 국정을 운영하였다고 볼 만한 직접적 근거나 사례를 찾을 수 없으므로 헌법을 위반했다고 볼 수 없다는 판결이 나오며 공동 국정운영에 대한 위법성 논란은 해소되었다.[73] 비상계엄 직후 대통령이 직접 한동훈을 비롯한 주요 정치인의 체포를 지시했다는 증언들이 속속 나오고 있고, 심지어 HID까지 동원하여 암살 시도까지 했다는 의혹까지 제기되고 있다. 이재명, 조국과 더불어 가장 신변의 위협이 컸던 인물임은 명백한 사실로 보인다.[74] 다만 진종오는 2025년 1월 한동훈과 같이 찍은 사진을 SNS에 올리며 여전히 한동훈이 본인을 품어 준것을 밝히며 다시 친한계로 돌아왔다.[75] 국민의힘 당헌당규에 따르면 선출직 최고위원 5명 중 4명 이상이 사퇴하면 지도부가 붕괴하고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전환해야 하며, 비대위 구성이 완료되는 순간 당대표직을 상실한다. 한동훈 측은 비대위 전환을 막기 위해 친한계 2명 이상을 최고위원으로 당선시키려 했고 전당대회 때 장동혁과 진종오 2명이 최고위원에 당선되면서 목표를 달성했지만, 당초의 예상을 깨고 이들이 배신하면서 축출된 것이다.[76] 3월 말로 예상된 헌재의 결정이 4월 초가 되어서야 나왔다. 이에 대해 한동훈 본인은 만약 질서있는 조기퇴진이 실현되었다면 상황은 아무리 늦어도 3월 안에는 끝날 수 있었기에 충분히 시도할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밝혔다.[77] 사회 갈등 유발, 부동산, 자영업자 손실보상 및 가계부채 등한시 등 각종 직면한 문제 개혁을 외면하고 본인 지지율만 챙기기, 자화자찬 등으로 문재인 대통령과 당시 여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국민들의 비토 정서가 커져 정권심판론이 고조되면서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정치 신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2등이었던 이재명 후보와의 차이는 고작 0.73%밖에 되지 않은, 그야말로 하늘이 도왔다고밖에는 할 말이 없는 차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