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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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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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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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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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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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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박진만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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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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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천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2~1983)
감독 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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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감독 대행
한동화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3)
김동엽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3)
어우홍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4~1985)
<rowcolor=#ff0> 4대 5대 6대 7대
김동엽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5~1987)
감독 대행
유백만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7)
유백만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8)
배성서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9)
백인천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0~1991)
<rowcolor=#fff> 8대 9대 10대
이광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2~1996)
감독 대행
천보성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6)
천보성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7~1999)
이광은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0~2001)
감독 대행
김성근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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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근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2)
이광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3)
이순철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4~2006)
감독 대행
양승호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6)
김재박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7~2009)
<rowcolor=#fff> 15대 16대 17대 18대 19대
박종훈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0~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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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014)
양상문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4~2017)
류중일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8~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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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경엽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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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중일의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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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1번
황규봉
(1982~1986)
류중일
(1987~1999)
강동우
(2000~2005)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75번
이철성
(1996~1999)
류중일
(2000~2016)
조규제
(2018~2021)
LG 트윈스 등번호 75번
한혁수
(2015~2017)
류중일
(2018~2020)
조인성
(2021~2023)
}}} ||
}}} ||
파일:24프리미어12 프로필_류중일.jpg
<colbgcolor=#00022e><colcolor=#fff>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No.75 [[감독#s-2|
]]'''
류중일
柳仲逸 | Ryu Joong-il
출생 1963년 5월 21일[1] ([age(1963-05-21)]세)
경상북도 영덕군 강구면[2][3]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포항중앙초등학교 (전학)[4]
대구삼덕초등학교 (졸업)
대구중학교 (졸업)[5]
경북고등학교 (졸업)
한양대학교 체육대학 (체육학 83 / 학사)
신체 176cm, 80kg, A형
포지션 유격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87년 1차 지명 (삼성)
소속팀 삼성 라이온즈 (1987~1999)
지도자 삼성 라이온즈 2군 수비·주루코치 (2000)[6]
삼성 라이온즈 1군 수비·주루코치 (2000~2008)[7]
삼성 라이온즈 2군 수비코치 (2009)[8]
삼성 라이온즈 1군 수비코치 (2009~2010)[9]
삼성 라이온즈 감독 (2011~2016)
LG 트윈스 감독 (2018~2020)
경북고등학교 수비·주루 인스트럭터 (2021)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수비코치 (2006 / 2009~2010)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2013~2014 / 2022~)
프런트 삼성 라이온즈 기술 자문 (2017)
병역 방위병 (1990~1992)[10]
가족 배우자 배태연(1963년생)[11]
장남 류호윤(1990년생), 차남 류승훈
종교 불교[12]

1. 개요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2.2. 삼성 라이온즈
3. 연도별 성적4. 지도자 경력5. 여담
5.1. 김도환 KBS 기자 관중일 발언 논란5.2. 류중일의 저주?
5.2.1.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5.2.2. LG 트윈스 감독 시절
6. 관련 문서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야구인. 現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경북고-한양대 졸업 후 1987년 삼성 라이온즈의 1차 지명을 받아 데뷔했다. 1980-90년대 삼성의 주전 유격수로 활약했고, 은퇴 후 삼성에서 지도자 경력을 시작해 2011년 삼성 라이온즈 감독으로 취임했다. 감독 재임 기간 4년 연속 통합우승 및 5년 연속 정규시즌 우승이라는 성과를 이뤘기에 일명 '삼성 왕조'를 건설했다는 평을 받았다. 이후 2018년부터 2020년까지 LG 트윈스 감독을 지냈고, 2022년부터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LG 감독 취임 전까진 로컬 보이[13]1차 지명 출신 원 클럽 플레이어에 지도자 생활까지 삼성에서만 했기 때문에 순수 프랜차이즈 스타 기준에 완벽히 부합하는 인물이었다.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파일:external/67.media.tumblr.com/tumblr_o72v3jpgxR1sqk8veo6_r1_400.png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70주년 기념 OB All-Star
in 2016. 동아일보

OF 상원고

OF 상원고

OF 광주일고

SS 경북고

2B 경북고

3B 배명고

RHP 경북고

LHP 세광고

1B 선린상고

C 경동고

포항 중앙초등학교 2학년때부터 야구를 시작했으며 5학년때 야구부가 해체되자 대구초등학교로 전학하였으나, 5학년이 끝나고 대구초등학교 야구부마저 해체되자 삼덕초등학교로 다시 전학을 갔다. 참고로 초등학교 시절에는 강한 어깨를 살려서 포수를 봤었으나, 대구중학교로 진학하고 난 뒤에는 유격수로 전향하게 된다.
파일:ZcABmrn.jpg
파일:external/static.news.zumst.com/28c2f62f09a74fc8aec8b0baaf27862e.jpg
경북고 시절
전국 무대에 이름을 알린 건 경북고등학교 시절부터이다. 특히, 박노준, 김건우라는 한국 야구 사상[14] 최고의 야구 아이돌 스타를 보유한 선린상고와의 청룡기, 봉황대기 두 대회에 걸친 처절한 결승 명승부에서 경북고의 1번타자를 맡은 2학년 유격수로서 우승에 공헌, 다음 해까지 이어진 3차 경북고 전성시대[15]를 이끌며, 1981년 봉황대기 미기상, 경북고 주장을 맡은 1982년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감투상, 대붕기 전국고교야구대회 최우수선수상을 수상. 초고교급 유격수로 발돋음했다.



특히 1982년 7월 17일, 잠실 야구장에서 개장 기념으로 열린 부산고와의 경기에서는 상대 에이스 김종석을 상대로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 개장 1호 홈런을 기록했다. 기사참조 이래저래 본인 스스로도 상당히 자랑스러워하는 기록인데 2020년 맷 윌리엄스 KIA 타이거즈 감독과 선물 교환을 할 때 "내가 잠실 1호 홈런 주인공이다"라고 자랑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김재박을 존경했다고 한다. 사실 한국 프로야구 유격수 중에서 누가 김재박을 존경하지 않겠냐마는. 이종범, 유지현, 박진만 등을 존경하는 후배 유격수들이 있을 수 있긴 하나, 어차피 이종범, 유지현, 박진만이 존경하는 유격수는 김재박인 만큼 별 차이는 없을듯.

경북고 졸업 후 한양대[16][17][18]로 진학해 국가대표 붙박이 유격수로 활약. 1985년도와 1986년도에 대학 올스타 유격수로 뽑혔다.

2.2. 삼성 라이온즈

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
KBO 골든글러브 유격수 부문 수상자 (1987, 1991)
파일:/image/468/2015/05/29/l_2015053001001715800117293_99_20150529121302.jpg
프로에 뛰어든 그는 1987년 삼성 라이온즈에서 입단 첫 해부터 오대석을 제치고 주전 유격수 자리를 꿰찼으며 11타수 연속 안타라는 진기록을 작성했으며, 1987년과 1991년 두 차례 골든글러브 시상식에서 김재박을 제치고 유격수 부문 수상자 자리를 차지했다.[19]

하지만, 1988년에는 팔꿈치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했고 이 과정에서 전년도에 김용국과 3루를 번갈아 맡았던 오대석이 유격수로 포지션을 옮겨야 했으나 결국 시즌 후 롯데로 이적했다.

1989년부터는 2루수강기웅과 콤비를 이뤘다. 이 키스톤 콤비는 김은식이 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키스톤 콤비로 꼽은 바 있다. 강기웅과 류중일이 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2루수와 유격수는 아니었지만, 키스톤 콤비만큼은 최고였다는 평이었다.[20]

선수 시절에는 한국시리즈 우승과 인연이 없었다. 1987년 준우승, 1990년 준우승, 1993년 준우승. 게다가, 1993년 이후로 삼성은 1996년까지 3년 간 포스트시즌에 올라가지 못했으며 1997년 부터 은퇴 전 마지막 시즌이었던 1999년까지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하였다. 코치로 전향한 뒤로 다시 한 번 준우승을 경험했으나(2001년), 드디어 자신의 소속 팀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다.(2002년, 2005년, 2006년)[21]

1999년 플레이오프 종료 후 FA 자격을 얻었지만 이미 전성기가 지난 뒤였던 데다 삼성 구단의 권유로 명예로운 은퇴를 선택하며 원 클럽 플레이어로 남을 수 있게 되었다. 즉 선수로서의 마지막 경기가 1999년 플레이오프인데, 경기는 삼성쪽으로 기울고로 유명한 그 경기다. 현역 마지막 시즌인 1999년에 주장 완장을 찼다 보니 플레이오프 엔트리에는 들긴 했지만 정작 그 유명한 7차전에는 출전하지 못했다.[22]

은퇴할 때까지 삼성 라이온즈 한 팀에서만 활약한 원클럽맨이며, 은퇴식은 2000년 4월 5일 SK 와이번스와의[23] 개막전에서 열렸다. 참고로 이는 삼성 구단 역사상 최초의 은퇴식이었다. 이후 김현욱, 김한수, 전병호, 김재걸, 양준혁, 이승엽, 권오준 으로 이어지게 된다.

현역 시절 그의 등번호는 1번이었는데, 7번을 달던 팀 선배 김용국태평양 돌핀스트레이드되고 나서도 1번을 계속 달 정도로 1번에 대한 애착이 강하기도 했다. 이 때문인지 경북고등학교 시절에도 등번호가 1번인 줄 아는 사람이 많으나, 경북고 시절에는 16번을 달았었다. 장타력이 약했던 선수라는 인식과 다르게 선동열에게 2번의 홈런을 친 전설의 4인[24] 중 1명이며, 그 중 만루홈런[25]도 있었다. 또한 위의 잠실 1호 홈런과 더불어 포스트시즌 4경기 연속 홈런이라는 기록도 가지고 있다.

기동력과는 거리가 먼 사자군단의 1번 리드오프를 맡았는데, 나름 제 몫을 해주고 주루센스도 좋긴 했지만 109개에 그치는 통산 도루에서 보다시피 전형적인 테이블세터와는 약간 거리가 있었다. 그도 그럴게 거포가 즐비한 삼성 선수단 중 그나마 발빠른 선수가 류중일이였기 때문이다.[26] 후에 비슷한 처지였던 박한이처럼 무리한 1번 타순 고정으로 스탯이 많이 깎였다고 보는 측도 있다. 아닌 게 아니라, 박해민, 김상수의 등장 이전까지 삼성의 통산 도루 1위는 다름아닌 양준혁이었으며 국내 선수 중 시즌 도루 1위는 주전이라기에는 살짝 부족했던 김재걸이며 외국인까지 영역을 넓혀도 빌리 홀밖에 없다.

현역 시절의 별명은 '천재 유격수', '그라운드의 살구꽃', '수비의 달인', '어벙이' 등이 있었다.

선수보다는 감독으로 유명해진 오늘날에는 수비로는 탁월하지만 공격에서 약한 선수였다는 인식이 있는데, 적어도 류중일은 공격에서 김상수와 비교될 선수는 아니었다. 본격적으로 강기웅과 키스톤을 이룬 1990년에는 sWAR 5.44로 리그 전체 타자 중 4위를 기록하기도 했을 만큼의 타격이 준수했다.[27] 1993년에도 sWAR 4.46, wRC+ 134.8을 기록하며 역대급 타선에 힘을 보탰으며, 골든글러브를 받은 1987년과 1991년에도 sWAR 3.1을 넘기며 활약했다. 김상수의 타격 커리어하이인 2011년 타격 sWAR이 경기 수가 늘어났음에도 3.32에 불과하다는 걸 생각하면 엄청난 저평가. 다만 이런 인식이 생긴건 90년대가 투고타저 성향이 강해서 단순 스탯만 보면 OPS가 7할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wRC+로 따지면 얘기가 달라진다. 다만 선수 말년에는 부상에 자주 시달렸고, 그래서 비율 스탯에서 다소 밀리게 되었다.

3. 연도별 성적

역대기록
<rowcolor=#ffffff>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7 삼성 104 352 .287 101 17 2 2 28 57
(5위)
8 42 .364 .362
1988 47 116 .302 35 3 2 0 11 18 5 11 .362 .354
1989 113 329 .246 81 15 3 5 38 39 14 33 .356 .311
1990 120 425 .311
(5위)
132
(3위)
22
(4위)
5 6 45 70
(5위)
23
(4위)
60 .428 .394
1991 90 344 .285 98 14 4 5 45 59 19 38 .392 .352
1992 104 294 .211 62 12 1 5 27 43 8 38 .310 .300
1993 107 377 .281 106 13 1 8 45 58 6 60 .385 .378
(5위)
1994 36 131 .328 43 8 3 4 22 22 5 18 .527 .404
1995 64 155 .226 35 11 1 0 10 11 2 11 .310 .277
1996 111 355 .245 87 13 2 2 35 37 13 44 .310 .327
1997 79 215 .242 52 13 0 8 34 34 1 25 .414 .321
1998 64 140 .200 28 8 0 0 13 14 4 14 .257 .271
1999 56 60 .233 14 1 0 0 6 13 1 7 .250 .313
KBO 리그 통산
(13시즌)
1095 3293 .265 874 150 24 45 359 475 109 401 .367 .343

4. 지도자 경력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류중일/지도자 경력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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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여담

5.1. 김도환 KBS 기자 관중일 발언 논란

본인의 잘못이 아닌 김도환 기자의 잘못이다. 논란이 된 방송영상

2015년 8월 27일 아이 러브 베이스볼 방송 당시 김도환 기자가 뜬금없이 방송에서 관중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일이 벌어졌다. 분명 이승엽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고 앞뒤 맥락을 고려해도 관중일이라는 별명이 나와야할 이유가 전혀없던 상황에서 이런 관중일이라는 별명을 언급했으며, 이 후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변명이랍시고 "다른 기자들도 관중일이라 부른다"는 소리로 스스로를 포장까지 했다.

당연히 삼성팬덤은 이날 폭발했다. 삼갤엠엘비파크는 물론이고 심지어 삼성 라이온즈 공식 홈페이지(삼피)[49]사자 사랑방까지 분노에 가득찬 글들이 올라왔을 정도였다.[50] 이후 변명이랍시고 한 다른 기자들도 관중이라 부른다는 발언에 대해 김은식 작가와 손찬익 기자가 다음과 같은 트윗으로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서 여론은 점점 악화되는 중이다. 김은식 작가의 트윗/손찬익 기자의 트윗

하지만 이후에도 별다른 사과가 없어서 삼성팬들의 분노는 계속 되는 가운데 이번에는 백종인 칼럼니스트가 야구는 구라다라는 칼럼에서 시작부터 관중일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역시 비난받고 칼럼을 수정하는 일도 있었다. 이에 대해 네티즌들의 반응은 백종인 기자는 원래부터 인터넷에 떠도는 별명들을 칼럼에 갖다 썼다며 언론에서도 잘 언급되지 않는 야통(야구대통령)이라는 별명을 썼다는 점을 들어 비하할 의도 없이 해당칼럼을 올렸을 것이라는 의견과 어설프게 후배기자를 감싸려고 굳이 화를 자초했다는 의견으로 나뉘었다.

5.2. 류중일의 저주?

매 시즌 류중일과의 경기에서 가장 크게 우세를 거둔 팀의 감독은, 다음 해를 무사히 마치지 못했다. 한대화 감독은 2012시즌 도중, 김진욱 감독은 2013시즌 후 경질되었다. 김기태 감독은 2014시즌 초반 최악의 성적을 거두다가 사퇴하는 사상 초유의 행동까지 벌였다. 이만수 감독은 2013~2014시즌 2년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로 재계약 불가되었다. 송일수 감독은 2014년에 우세 시즌을 보내고 바로 경질되었다. 2015년에 삼성전에서 가장 우세를 거둔 한화의 김성근 감독도 2016년 최악의 부진을 겪으며 그동안의 명성에 먹칠을 했고, 결국 2017년 경질되었다. 그리고 김성근 감독과 마찬가지로 조원우 감독도 2년 뒤에 경질되었다. 이렇게 우세를 가져가면 2년 안에 감독직에서 잘린다는 류중일의 저주는 너무나도 절묘해서 팬들 사이에서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2013시즌에 삼성에게 상대전적 우위였던(7승 1무 8패) 넥센의 염경엽 감독은 2016년까지 건재했다. 비록 넥센이 2013시즌에만 삼성에게 우위였으나, 2014, 2015시즌에 열세였다고 해도 염경엽 감독이 그대로 있는 것을 보면 억지에 불과했다. 저 드립이 흥하려면 염경엽 감독도 몇 년 전엔 옷 벗었어야 했다.

2015년 삼성을 꺾고 우승한 두산의 김태형 감독도 이 범주에 포함될지 모른다는 의견도 있다. 시즌 전적은 5승 11패로 삼성에게 크게 밀렸지만,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크나큰 재앙을 만나 분위기가 개판이 된 삼성을 상대로 4승 1패로 크게 일축시키고 우승했다. 더구나 두산은 OB시절부터 한국시리즈 우승 다음해에는 항상 크게 망하는 징크스를 갖고 있기 때문에, 과연 두산의 행보, 그리고 김태형 감독의 행보가 어떨지는 2016시즌때 판가름이 날 것이다. 다만, 위의 것은 시즌 전적 기준이라 PS는 표본이 없어서 두산은 무난하게 갈 것으로 보이고, 실제로 그렇게 되는 중이었다.

그러나 류중일이 LG 감독으로 취임하고 두산전 1승 15패를 찍으면서 다시 저주가 나타날지의 관심도 생겼다. 그리고 이 저주는 LG를 1승 15패로 압살했던 두산 베어스가 한국시리즈에서 SK에게 지면서 다시 적용되었다. 하지만 LG팬들에게는 큰 상처를 입었다. 이후 19시즌 SK, 20시즌 키움에게도 저주가 적용되면서 두 시즌 연속으로 같은 팀의 감독이 우세를 가져가면 저주의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예외 조항이 생겼다.

두산이라는 예외 덕에, 삼성 상대로 우세를 보였던 팀들이 시즌 전 약팀으로 평가 받았던 팀인지라 체력 안배를 위해 무리를 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며, 상기된 팀들은 2013년 두산을 제외하고는[51] 팀 전력 상 다음 시즌을 장담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그런 것일 뿐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그리고 위의 팀들은 (두산 빼고) 그 시즌에 하나같이 돌풍의 팀이었다는 것이 있다. 실제로 2011년의 한화는 뭐 말할 것도 없고, 2012년의 두산도 2011년의 내홍 및 불펜진의 과부하가 표면화 되면서 약체 평가를 들었고, 2013년의 LG는 여름 되기 전까지는 기대도 안한 상황 이었으며, 2014년 두산의 경우 팀 분위기가 너무 뒤숭숭했다. 2015년 한화의 경우는 선수 투자를 많이 했지만 객관적인 전력 상으로는 역시 약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상기된 팀들은 두산을 제외하고는 기반이 부실했으니 다음 시즌에 부진해도 이상할 게 없기도 하고 말이다. 그러나 이 반론은 LG 감독 시절의 19 SK, 20 키움에게도 적용되며 조금은 유명무실해졌다. 게다가 이 두 팀은 당해 시즌 전 강팀으로 평가받았다.

5.2.1.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

2011시즌 한화전 9승 10패
한대화 감독: 2012시즌 도중 경질

2012시즌 SK전 9승 10패
이만수 감독: 2012시즌 준우승 후 2013시즌 6위, 2014시즌 5위로 추락하고 2년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하며 재계약 불가

2012시즌 두산전 7승 12패
김진욱 감독: 2013시즌 준우승 후 경질

2013시즌 LG전 7승 9패
김기태 감독: 2014시즌 도중 자진사퇴[51]

2014시즌 두산전 6승 10패
송일수 감독: 2014시즌 후 경질

2015시즌 한화전 6승 10패
김성근 감독: 3년 계약의 마지막인 2017 시즌 도중 경질.

2016시즌 롯데전 5승 11패
조원우 감독: 2016시즌에서 '느그가 프로가'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당해 NC와의 상대전적이 무려 1승 15패. 그리고 2018시즌 후 경질

5.2.2. LG 트윈스 감독 시절

2018시즌 두산전 1승 15패
김태형 감독: 일단 SK에게 한국시리즈 우승을 내주면서 14.5게임차 뒤집기의 불명예 기록. 2022시즌 9위로 추락하고 재계약 불가

2018시즌 한화전 7승 9패
한용덕 감독: 첫 해 한화를 11년만에 포스트시즌으로 진출시켰지만 다음 해 9위, 그다음엔 14연패 당하고 사퇴.

2019시즌 SK전 6승 10패
염경엽 감독: 정규시즌 8월 15일까지 두산과 9게임차 앞서다가 그 이후 부진으로 두산한테 쫒겨 당했고 마지막 경기에서 두산에게 정규리그 우승 헌납하고 9게임차 뒤집기의 불명예 기록한것도 모자라 그리고 플레이오프에서 3위팀 키움 히어로즈에게 피스윕 기록. 2020 시즌 중 건강 문제로 인해 감독대행 체제로 전환 시즌 후 사퇴

2019시즌 키움전 7승9패
장정석 감독: 팀을 한국시리즈를 이끄는등 성과를 냈지만 구단사정으로 인해 재계약 불가통보. 그리고 KIA 단장 취임 후 비리 혐의가 드러나면서 해임.

2020시즌 키움전 6승 10패
손혁 감독: 2020 시즌 중 경질에 가까운 사퇴

2020시즌 롯데전 7승 9패
허문회 감독: 프런트와의 마찰이 시즌이 가면 갈수록 심해지며 최하위로 추락. 결국 2021시즌 도중 경질
출처
2020시즌 삼성전 7승9패
허삼영 감독: 2021시즌 1위 결정전에서 kt wiz에게 1대0 패배로 정규리그 우승 헌납하고 플레이오프에서 4위팀 두산 베어스에게 업셋패배 기록. 2022시즌 팀 구단 최다연패타이 13연패 불명예 기록. 22시즌 도중 경질에 가까운 사퇴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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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 4월 28일.[2] 한때 포항시 출신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경상북도 영덕군 출신이다. 영덕군에서 태어나 포항시에서 야구를 시작해 대구광역시에서 성장하였다.[3] 본적은 경상북도 영천시 고경면이다. #[4] 이곳에서 야구를 시작했다. 자세한 사항은 아래 아마추어 시절 참조.[5] 1년 유급[6] ~6월 4일[7] 6월 5일~[8] ~9월 13일[9] 9월 14일~[10] 1991년 11월 한일 슈퍼게임 때 방위병 신분으로 참가.[11] 부산광역시 출신으로, 남편의 선수 은퇴 이후부터 대구에서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고 있다.[12] 류중일과 다르게 아내는 개신교 신자이며, 대구 우리교회 집사라고 한다. 종교는 다르지만 서로 존중한다고 하며 류중일 본인도 아내의 교회에 나가 우승 헌금을 하기도 했다.[13] 경북 영덕에서 태어나 경북 포항에서 야구를 시작했고, 대구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고등학교는 대경권의 명문 경북고를 졸업했다. 한양대에 재학한 4년을 제외하면 LG로 가기 전까진 대경권을 떠난 적이 없다.[14] 프로야구 사상이 아니다, 전체 한국 야구 사상이다! 이 시절 박노준은 정말로 여고생을 몰고 다니는 아이돌이었다. 봉황대기 결승전 다음날 박노준이 입원한 병원에 당시 서울 시내 여고생들이 병원 앞에서 진을 치고 울먹이더라는 얘기는 아직도 고참 스포츠 기자들 사이에 회자되는 유명한 에피소드이다.[15] 1차 전성기는 남우식, 임신근이 이끈 1970년대 초반, 2차 전성기는 황규봉, 이선희의 1970년대 중반. 그리고 이 때를 마지막으로 경북고 야구부는 기나긴 침체기에 접어들게 된다. 1981년 이후 경북고의 메이저 전국대회 우승은 이승엽이 2학년이었던 1993년 청룡기 우승, 최충연-박세진이 이끈 2015년 봉황대기 우승 단 2회이다. 그럼에도 전국대회 통산 우승 회수는 여전히 1위이다.[16] 삼성 라이온즈의 레전드들 중 대졸 출신은 한양대학교 야구부 출신이 많다. 류중일, 장효조, 이만수, 김시진, 성준 등. 이승엽도 원래 한양대 진학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진학을 포기하고 삼성에 입단했다.[17] 사실 2010년대 프로야구 감독들은 고려대-OB 테크를 탔거나 그 둘 중 한 발짝이라도 걸친 경우가 대부분이며, 거기 속하지 않는 사람들은 죄다 한양대-삼성 테크를 탔다.[18] 경북고 유격수로서 이미 스타 반열로 올라온 류중일에게 대학교의 러브콜이 쏟아진 것은 당연한 일로서, 본인은 연세대에는 이순철(참고로 이순철은 대학교 및 프로 1년차까지만 하더라도 내야수였다)이, 고려대에는 민경삼이 있어서 한양대로 진학했다고 한다 기사참조[19] 결국 오대석은 1987년 김용국과 함께 3루를 번갈아 맡았는데 이 같은 취약점을 극복하지 못한 채 삼성은 1987년 한국시리즈 준우승에 머물렀다[20] 1994년에는 목디스크로 시즌아웃 당했고 다음 해 스프링캠프 때 또다시 목디스크가 재발하여 그 해에는 신인 김재걸한테 주전자리를 빼앗겼다.[21] 만약 그가 선수 시절에도 우승을 했다면 삼성에서 선수, 코치, 감독으로 모두 우승을 이룰수 있었다.[22] 1999년 플레이오프 1차전만 대주자로 출전하여 찰스 스미스의 끝내기 안타때 득점을 하였다.[23] 여담이지만 이 경기는 SK 와이번스가 창단된 뒤 처음으로 열린 공식 경기였다.[24] 나머지 3명은 박승호, 전대영, 김동기다. 선동열은 KBO 커리어 통틀어 28홈런 밖에 맞지 않았으며, 단 한 명에게도 3번 이상 홈런을 허용한 적이 없다.[25] 이를 기록한 3명중에 1명이었으며 나머지 2명은 유승안, 김동기가 있다.[26] 류중일보다 더 빠르고 통산 도루에서도 조금 앞서는 강기웅이 있었지만 강기웅은 주로 클린업 트리오를 맡았다.[27] 그런데 정작 이 시즌에는 골든글러브를 받지 못했고, 다음 시즌에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90년 골든글러브 수상자는 홈런왕(유격수 최초)-타점왕을 차지한 장종훈이다.[28] 류중일이 최초로 우승 반지를 껴 본 것은 코치 시절이던 2002년 한국시리즈 때다.[29] 류지현은 서울 출신에 서울 지역 학교와 대학을 졸업, 선수 생활부터 코치, 감독까지 모두 LG에서만 지냈다. 이쪽은 류중일과 달리 선수 시절에 1번의 우승(1994)를 겪었다. 김종국도 광주 출신에 광주 지역 고등학교를 졸업, 선수 생활부터 코치, 감독까지 모두 KIA에서만 지냈다. 그리고 이쪽도 류중일과 달리 선수 시절에 총 3번의 우승(1996, 1997, 2009)을 경험했고 코치 시절이던 2017년에도 우승을 경험했다. 단, 이 둘은 감독으로써는 우승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류지현은 가을야구에 진출했으나 매번 물을 먹으며 한국시리즈 문턱도 밟지 못했고, 김종국은 뛰어난 전력을 가지고도 좋지 못한 운영으로 5-6위를 기록하며 한국시리즈 근처도 가지 못했다.[30] 류중일보다 한 팀에서 더 오래 뛴 선수/코치로는 같은 팀의 장태수 2군 감독이 있다. 이 쪽은 연수기간 1년을 제외하면 원년부터 2015년 현재까지 계속 삼성 소속이다. 장태수는 류중일보다 명백하게 4년, 구단에서 보내준 연수기간까지 합치면 5년을 더 오래 삼성에 소속되어 있으며 원년부터 현재까지기 때문에 더 찾아볼 것 없이 한 팀에서 재직 최장기록이라 할 수 있다.[31] 이 문서는 살구아재로도 통한다.[32] 즉, KBO에서 현재까지 한 팀에서 선수, 코치, 감독으로 모두 우승 반지를 받아본 사례는 아직까지 없다. 간혹 김태형 전 두산 감독이 유일한 사례로 잘못 알려져 있는데, 김태형의 경우 선수로 1번, 감독으로 3번 우승해본 건 맞지만 2001년 한국시리즈 당시에는 정식 코치가 아닌 플레잉코치 신분이라 엔트리에 없었기 때문에 해당되지 않는다. 김용희 전 롯데 감독이 가장 가까웠는데, 1995년 한국시리즈에 올라가면서 선수, 코치, 감독으로써 한팀에서만 우승기회가 왔으나 감독으로는 아쉽게 준우승에 머물렀다.[33] 기사는 다음과 같다.[34] 최형우라늄, 차르봄바, 채르노빌 등과 함께 핵실험을 한다는 이유로 불리게 되었다.[35] 감독이 난처한 상황에 처했을 때 나타나는 '한 대 피우고 싶으시죠?' 카피다. 잠실야구장 3루측 흡연구역에도 니코스탑 광고가 있다.[36] 특히 노장진은 이 부문에 있어서는 그 정수근이 양반으로 보일 정도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개막장이었다. 자세한건 해당 문서 참고.[37] 출처는 마해영과의 인터뷰.[38] 노장진은 잦은 항명을 일으키다가 모든 구단에 찍혀서 더 이상 현역 생활을 이어 갈 수 없었으며, 김진웅은 공익근무 동안 체중 관리를 전혀하지 않아 살이 엄청나게 쪘고 이로 인해 무릎에도 문제가 생기며 아예 몸을 만드는 것조차 불가능한 상황이 되며 결국 1군에 한번도 못올라오고 30세에 은퇴하고 만다.[39] 이만수, 김성래는 상당히 김성근에게 홀대받은 선수였으며, 강기웅, 류중일은 삼성 수비 시스템 수정에 대한 김성근과의 마찰이 컸다. 결론적으로는 삼성의 수비 스타일의 확립에는 류중일의 방식이 맞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40] 감독 취임 당시 감독으로서의 지향점이 당시 1위 팀 감독이던 김성근이 아니라 전년도에 치열하게 플레이오프를 치렀던 김경문이었던 것도 이를 뒷받침을 한다.[41]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것이지만, 매년 전력이 상승한 상태에서 연속 우승을 한 것이 아닌, 매년 전력이 하락한 상태에서 연속 우승을 한 것이다. 이 쯤되면 설사 실패했더라도 시험대라는 말은 더 이상 하지는 말아야 할 수준이다. 더군다나 삼성은 예전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그 좋은 선수층을 가지고도 우승문턱에서 매번 좌절했었다.[42] 2016 시즌 넥센의 전력과 현재 성적, 그리고 이로 인해 염경엽감독이 받고 있는 긍정적 평가를 보면 알 수 있다.[43] 2011년 개막 때 감독들 중 팀이 바뀌지 않은 채 2016년까지 재직 중인 사람이 류중일 밖에 없었다. 김성근김경문도 지금까지 감독직이긴 하지만 이들은 중간에 새 팀으로 이직해야 했다. 2011~15 감독으로 있던 5년간 13명의 감독이 재계약 포기 내지는 사퇴했는데 류중일만 제 자리를 지키는 유일한 감독이였다.[44] 늘 그랬듯이 발전 없이 1등만 하는 감독이라는 칭찬이지만 2016년에는 진짜로 까는 용도의 별명으로 바뀌었다.[45] 매 시즌마다 시험대에 오른다는 사람들의 반응 때문이었다.[46] 2016년 삼성이 원인 모를 긴 부진에 빠지자 더 자주 쓰이고 있다.[47] 당시에는 류씨가 유씨로 표기되던 때였다.[48] 다만 김재박은 선수 시절 말년에 1번 우승했지만, 류중일은 준우승만 3번을 했다.[49] 삼피 반응[50] 류중일에게 온갖 육두문자를 날리기로 유명한 사사방의 매니저 조차도 분노에 가득찬 글을 남겼고, 해당 카페내에서도 당연히 분노에 가득찬 글들이 올라왔다.[51] 시기가 4월로 시즌 중 아주 극초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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