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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기 金東基 | Kim Dongki | |
출생 | 1964년 3월 5일 ([age(1964-03-05)]세) |
인천광역시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인천신흥초등학교 동인천중학교 인천고등학교 인하대학교 (1982학번) |
포지션 | 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86년 1차 지명 (청보) |
소속팀 | 청보 핀토스-태평양 돌핀스-현대 유니콘스 (1986~1996) |
지도자 | 안산초등학교 야구부 감독 인천신흥초등학교 야구부 감독 |
병역 | 예술체육요원[1] |
가족 | 형 김상기 |
[Clearfix]
1. 개요
前 프로야구 선수. 출신이나 대학을 보면 알겠지만 김경기와 더불어 인천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인천 연고팀에서만 선수 생활을 한 인천야구의 프랜차이즈 스타이며[2] 금광옥, 김진우의 뒤를 잇는 인천야구 주전 포수의 세 번째 주자였다.인천고 1학년 시절인 1979년부터 인천고의 황금기 속에서 성장했고 1981년 청소년대표로 선발되어 우승에 일조했다. 1984년에는 LA올림픽 대표팀, 1985년 대륙간컵 국가대표 (준우승) 으로 선발되어 일찌감치 대형 포수로 주목을 받았다.[3]
소속팀이 약팀 청보-태평양이었고 활동시기가 1980년대 중반에서 1990년대 중반이라 많이 잊혀졌지만 최근 세이버 스탯 분석이 대중화 되면서 당대 또는 지금까지 막연한 느낌으로만 다가왔던 그의 가치와 활약상이 재조명되고 있다.
2. 평가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인천 연고팀의 주전 포수로서 리그에서 상위권에 꼽히는 기량을 갖췄지만 소속팀이었던 청보 핀토스와 태평양 돌핀스가 구단 역사 중 1989년과 1994년 딱 두 해만 빼면 꼴찌 언저리를 맴돌던 약체팀이라서 평가가 절하된 명포수라고 할 수 있다.그는 짧은 활동기간(11시즌)에도 불구하고 역대 포수 누적 sWAR 8위 (35.13), wRC+ 3위 (125.9) wRAA 6위 (103.2) [4], wOBA 6위 (.361) 을 자랑하며 프로야구 40년사 속의 다른 명 포수들과 당당히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으며 특히 공격력으로 한정해 보면 압도적인 역대 1위 이만수를 제외하고는 80년대의 유승안, 90년대의 박경완, 2010년대 이후의 최고의 공격형 포수인 양의지, 롯데 시절의 강민호 등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5]
그가 활동한 1986년부터 1995년까지의 기록을 보면 동 기간 sWAR는 이만수 40.98 에 이은 압도적 2위 (34.37) 로서 데뷔동기이자 활동시기가 100프로 겹치는 김상국(18.63) 장채근(16)과 비교하면 이들보다 2배 가까이 압도적인 성적을 기록했다. wRC+ (득점가치창조력) 도 125.9 로 장채근 (105.7), 김상국 (98.3) 에 크게 앞선다. 또한 그가 활동한 기간중 90년대 전반기 (90-94년)으로 한정하면 포수 포지션 sWAR 기준 김동수 (20.34) 이만수(15.26) 김동기 (14.87) 김상국(11.45) 장채근(7.78) 순으로 TOP3 이고 WAR+기준으로도 이만수(135.4), 김동수(120.3)에 이은 3위 (120.1) 이다.
2021년 종료 시점 sWAR 누적 기준으로 김동기보다 위에 있는 7명은 박경완, 이만수, 김동수, 홍성흔[6], 강민호, 진갑용, 양의지 이다. 그 아래로 현역 중 가장 높은 순위가 이재원인데, 더블스코어를 넘는 차이라서 당분간 순위가 더 내려갈 일은 없다. 활동시즌을 고려한 연평균 WAR로 따지면, 10년 이상 활약한 포수 중 통산 연평균 WAR 3위 을 자랑한다. [7]
심지어 3000+타석 기준 타석당 WAR로 따져도 이만수-양의지에 이은 포수 3위이며, 모든 포지션을 통틀어 역대 10위이다![8] 통산 OPS도 .785 로 포수 통산 7위 (1500타석 이상).
다만 골든글러브나 개인타이틀을 수상한 적이 없었고 우승도 하지 못하고 은퇴했기에 선수 시절에 받은 사랑에 비해 그에 대한 기억이 퇴색되어 있다.
그나마 당시의 야구전문지 <주간야구>가 1992년 중반에 최고의 포수를 꼽을 때 1위가 김동기, 2위가 김상국(빙그레), 3위가 장채근(해태. 그해 포수 골든글러브)으로 기록된 것이 당대의 위상을 가늠할 봄직하다.아마추어 시절 청소년대표와 국가대표를 7년간 지켰지만, 프로 입단 후에는 약팀 소속이라는 이유로 저평가를 받았던, 그럼에도 인천야구 팬들에게는 태평양의 터줏대감이자 간판 스타로 기억되는 무관의 명포수다.[9]
3. 선수 경력
인천고 시절 형인 김상기와 함께 형제 투, 포수로 유명했다. [10] 고교 시절부터 대학 졸업 때까지 내내 동기생 김상국[11]과 함께 청소년대표, 국가대표 포수를 지냈다.인하대학교를 졸업한 이후 고향팀 청보 핀토스에 지명된 후 팀의 주전 포수로 활약했다. 입단 당시에는 국가대표 출신의 고교 선배 김진우가 주전 포수로 활약했지만 화려했던 아마 시절에 비해 기력이 갈수록 퇴보했고 김진우의 백업이던 금광옥은 평범한 실력을 보여주는데 그쳤다. 결국 김동기에게 기회가 더 주어지게 됐다.
무엇보다 그는 투수진에 비해 타선이 허약했던 태평양 돌핀스에서 윤덕규, 김경기와 더불어 타선을 이끌었다. 특히 1990년대 초중반 4번타자 김경기-5번타자 김동기 타순은 "KK포"라고 불리며 팀의 물방방이 타선에서 그나마 제몫을 해주었다. 또한 이 당시 포수는 방망이가 약한 선수들이 많았지만, 김동기는 연간 10개 이상의 홈런을 뽑아냈기 때문에 80년대 후반-90년대 초중반 공격형 포수로써 명성을 떨쳤다.[12] 특히 선동열에게 강했는데 선동열에게 만루홈런 두 개를 쳤다.
1988년 전기리그 종료 시점 때 타율이 0.379였고 후기리그 초반까지도 0.358의 타율에 10홈런으로 가공할 만한 타격감을 선보였으나 8월 12일 MBC 청룡과의 인천 홈 경기에서 기습번트를 하고 1루로 뛰다가 발목을 접질려 인대가 파열되는 바람에 안타깝게도 전력에서 이탈했다. 그해 타격왕은 MBC 청룡의 김상훈이 0.354의 타율로 차지한다. 타율이 앞서 서술했듯이 부상으로 잔여 시즌에 결장하여 규정타석에 미치지 못함으로 타격왕을 아깝게도 놓칠 수밖에 없었다.[13]
다음 해인 1989년 KBO 리그 최초로 한 시즌 전경기 선발 출전 포수로 등극하며[14] 태평양의 돌풍을 이끌었다. 특히 준플레이오프 1차전에서는 연장 14회 끝내기 결승 3점 홈런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이 경기는 인천 연고팀의 사상 첫 포스트시즌 승리 기록이며 선발로 나선 박정현이 무려 14이닝 완투승을 거둔 경기이기도 했다.
김동기는 1989년 정규시즌 120경기와 포스트시즌 6경기 등 총 126경기에서 선발 포수로 출전하는 투혼을 불살랐는데 따지고 보면 그만큼 태평양의 포수진이 취약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태평양에는 원년 멤버 출신 최영환이 백업 포수로 있었지만 군 복무를 마친 후 기량이 떨어졌기 때문에 김동기의 뒤를 받치기에는 너무나 부족했다. 이밖에 김진한이라는 포수와 훗날 한화 이글스의 주전 포수가 되는 조경택도 이 당시 연습생으로 태평양 유니폼을 입었지만 1군에 출전시킬 수준의 기량이 아니었기에 팀의 유일한 주전 포수인 김동기만이 그 짐을 짊어질 수밖에 없었다.
1993시즌에는 올스타전에 서군 소속으로 출전하였다. 그리고 후술하겠지만 KBO 리그를 대표하는 투수 선동열을 상대로 만루홈런을 터뜨리기도 하였다.
1994년에는 팀이 다시금 상승세를 거두어 2위를 차지하였고, 선수 본인도 0.264의 타율에 15홈런을 쳐서 [15] 23개의 홈런을 쳤던 김경기, 3할타자 윤덕규와 클린업트리오를 이루며 좋은 성적 내는데 큰 역할을 하였으나 LG 트윈스와의 1994년 한국시리즈에서 1승도 못 하고 네 경기를 내리 내주는 바람에 아쉽게도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었다.
1996년 5월 31일 포수로는 두 번째로[18] 1천 경기 출전을 달성했다. 그러나 백업포수가 없었던[19] 팀 사정으로 과부하가 걸렸고 고질적인 허리디스크로 오른다리가 마비되어 1996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였다.
타선이 빈약했던 팀에서 고군분투한 탓에[20] 선수생활이 길지 않았고,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경쟁자들에 밀려 골든글러브는 한번도 못 받았으며[21] 소속 구단이 대기업에 인수되어 팀 전력이 상승하려는 시점에 은퇴해서 인천의 오랜 야구팬들에게만 기억되고 있다.
그럼에도 기록을 보면 이만수의 시대가 가고 박경완의 시대가 오기까지의 사이에 김동수, 장채근과 함께 당대의 정상급 포수로서 당당히 경쟁했던 선수였음을 알 수 있다.[22]
4. 은퇴 이후
보험, 건설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모교 인천신흥초등학교 감독으로 2008년부터 맡고 있었다. 사회인야구 리그에서도 활약하였고, 부천 상동에서 코치를 하기도 했었다. 2022년에는 KBO 히스토리 40 #에서 1989년 준플레이오프에 대한 이야기를 풀었다. 또한 다시 건설업에 종사중임을 밝혔다.2024년 7월 6일 그의 고향인 인천에서 16년 만에 열리는 올스타전에 후배들인 김경기, 정민태, 최정과 함께 시구자로 참여하였다.
5. 선동열의 천적
선동열의 천적 타자였다. 선동열과는 청소년대표시절부터 국가대표까지 대표팀에서 투, 포수로 한솥밥을 먹던 선후배 사이인데, 그래서 그런지 선수 시절 OB 박노준과 함께 선동열을 상대로 유난히도 좋은 타격을 기록했다.선동열에게서 정규시즌 2개의 홈런을 뽑아낸 4명 뿐인 선수 중 한 명으로[23] 1개는 선동열의 319.1이닝 1186타자 무피홈런을 깬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만루홈런이다.[24][25]
통산 대 선동열 타율은 .272 (81타수 22안타)로 역대 선수 중 선동렬을 상대로 가장 안타를 많이 친 타자이기도 하다. 단순히 안타만 많은게 아니고, 타율로 치면 22타수 7안타로 0.318을 기록한 김기태
1987년 5월 5일 경기에서는 선동열을 상대로 무려 4타수 3안타를 기록한 적도 있다.
1993년 맞은 만루홈런에 대해서는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송유석이 술회하기를 본인이 더 던질 수 있는 상황에서도 자진강판했다가[27] 이대진과 김정수가 장작을 쌓더니 선동열이 등판했고 선동열이 김동기에게 만루홈런을 맞으면서 송유석 본인의 승리는 날아가고 게임은 결국 이겨서 선동열이 승수를 챙겼다고 밝혔다.
천적이라는 평답게 선동열을 어느 정도 상대해본 타자들 중에서는 양과 질 면에서 최상급의 성적을 찍었다고 할 수 있는데 선동열이 글러브 안에서 변화구하고 직구 그립 잡을 때 팔뚝 근육의 모양이 달라지는 특징을 읽었던 게 비결이었다고 한다.
6. 여담
- 선수 시절 야구 외의 재주로도 동료들 사이에 화제가 되었다. 소위 말하는 잡기에 능한 재주꾼. 당구는 500을 쳤고[28] 맥주는 1만5000cc 이상은 우습게 마시는 정도였다고 한다.[29]
- 통산 OPS가 .795로 준수한(포수치고는 훌륭한) 장타율+출루율을 지닌 선수였다.
- 초중고 대학교 그리고 프로팀까지 모두 인천에서 활동한 인천의 토박이 스타다.
- 태평양 돌핀스가 창단 후 현대에 인수되기 까지 8시즌 (88~95년) 동안 부동의 주전 포수 였다. 정작 현대로 인수된 이후에는 허리부상으로 인해 몇 경기 뛰지 못하고 은퇴하였으므로[30] 그의 선수 시절 전성기는 태평양의 흥망성쇠와 함께 했기에 김동기 = 태평양 이미지로 남아 있다.인천고 4년후배인 김경기는 현대의 주장을 맡으며 96년 준우승 98년 우승을 이끌고 현대의 색깔이 강하게 남아 있는 것과는 다른 케이스.[31] 물론 김경기도 김동기 (11년)와 비슷한 12년간 선수생활을 하였고 김동기와의 연차 차이(4년) 만큼 그도 2000년부터는 몇 경기 뛰지 못하고 은퇴하였다. 태평양 출신 간판타자 들의 혹사로 인한 조기 은퇴의 대표적인 예.[32]
7.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 ||||||||||||||
연도 | 소속팀 | 출장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장타율 | 출루율 |
1986 | 청보 | 87 | 230 | .248 | 57 | 14 | 1 | 10 | 26 | 20 | 1 | 22 | .448 | .313 |
1987 | 105 | 350 | .277 | 97 | 21 (4위) | 0 | 9 | 48 | 47 | 3 | 55 | .414 | .374 | |
연도 | 소속팀 | 출장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장타율 | 출루율 |
1988 | 태평양 | 62 | 212 | .358 | 76 | 18 | 1 | 10 | 39 | 41 | 3 | 33 | .594 | .441 |
1989 | 120 | 399 | .251 | 100 | 25 (1위) | 1 | 11 | 59 | 61 (5위) | 7 | 84 | .401 | .378 | |
1990 | 114 | 336 | .250 | 84 | 20 | 1 | 14 | 46 | 52 | 5 | 53 | .440 | .352 | |
1991 | 98 | 286 | .262 | 75 | 9 | 1 | 7 | 34 | 37 | 9 | 41 | .374 | .354 | |
1992 | 107 | 333 | .294 | 98 | 15 | 2 | 15 | 58 | 53 | 2 | 53 | .486 | .391 | |
1993 | 93 | 315 | .244 | 77 | 22 | 1 | 3 | 34 | 33 | 1 | 46 | .349 | .340 | |
1994 | 119 | 368 | .264 | 97 | 16 | 0 | 15 | 50 | 49 | 3 | 50 | .429 | .352 | |
1995 | 66 | 173 | .173 | 30 | 4 | 1 | 9 | 28 | 16 | 1 | 23 | .364 | .269 | |
연도 | 소속팀 | 출장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장타율 | 출루율 |
1996 | 현대 | 48 | 99 | .212 | 21 | 2 | 0 | 5 | 13 | 13 | 0 | 14 | .384 | .307 |
KBO 통산 (11시즌) | 1019 | 3101 | .262 | 812 | 166 | 9 | 108 | 435 | 422 | 35 | 474 | .426 | .359 |
8. 관련 문서
[1] 1981년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 대회 우승#[2] 김경기는 서울 출생이고 초등학교와 대학교는 서울에서 나왔고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인천에서 나왔다.[3] 같은 학번 동기로 김상국, 장채근 등이 있었는데 청대부터 국가대표까지 김동기, 김상국이 늘 선발되었다.[4] 7위인 김동수는 60.2[5] 홍성흔의 통산 wRC+를 보고 무리하게 넣으려는 사람이 있는데 통산 wRC+는 지명타자를 뛸 때 상당히 부풀려진 것으로, 홍성흔이 온전히 포수로 출전했던 2007년까지 홍성흔의 wRC+는 102.7로 평균보다 근소하게 뛰어난 타자였으며 장채근보다도 낮았다. 물론 이것도 초창기에 오래선수 생활을 못했던 김진우를 제외하면 이재원과 더불어 역대 10위를 다툴만한 성적이긴 한다.[6] 이쪽은 커리어 절반이 지명타자 출장이다.[7] 이만수 - 양의지 - 김동기 - 강민호 - 박경완 - 김동수 - 진갑용 순[8] #.[9] 국가대표를 함께 한 김상국은 빙그레 전성기에 주전으로 뛰었고, 아마 시절에는 그다지 두각을 내지 못했던 장채근이 당대 최강팀이던 고향팀 해태에서 김무종을 제치고 주전으로 뛰면서 골든글러브도 수차례 받았지만, 김동기는 그런 효과를 누리지 못했다.[10] 형인 김상기는 우투우타 포수인 동생과 달리 좌투좌타 투수였다. 인하대를 졸업한 후 삼미에 입단했지만 큰 인상을 보여주지 못한 채 1987년 시즌이 끝나고 방출되었다. 동생과는 1986~1987시즌 청보에서 같이 뛰면서 KBO 리그 역대 최초 형제 배터리 출장 기록을 쓰게 된다.[11] 삼성 라이온즈 외야수 김동엽의 아버지로도 유명한 포수. 천안북일고와 한양대를 졸업한 후 고향팀 빙그레 이글스의 1차 지명을 받고 10시즌동안 이글스에서 뛰었다. 공교롭게도 김동기와는 말년에 현대에서 만나게 된다. 다만 김동기는 1996년 시즌 후 은퇴했고 김상국도 1997년 시즌 후 은퇴했다.[12] 이만수 역시 두자릿수 홈런을 뽑아냈다.[13] 규정타석만 채웠으면 이만수에 이어 포수 두번째 타격왕이 될수 있었다. 포수 두번째 타격왕은 양의지가 되었다.[14] 야구팬이면 잘 알겠지만 엄청나게 힘든 기록이다. 포수라는 포지션은 경기내내 쭈그리고 앉아있어야 되고 투수의 140~150km/h대의 시속 패스트볼을 받아내야 되는 포지션이라서 다른 선수들에 비해 피로도가 굉장히 높은 포지션이기 때문이다. 이것때문에라도 아무리 안티 야구팬이라도 투수와 포수만은 레져로 안보기도 한다. 이 기록은 2006년 강민호, 2015년 김태군이 계승했다.[15] 홈에서는 .337 원정.190[16] 만약 찬스를 살렸으면 시리즈 향방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17] 94년 포수 부문과 1루수 부문은 한국시리즈 우승 프리미엄이 적용된 대표적인 케이스. 김동기 VS 김동수, 김경기 VS 서용빈. 김경기 문서 참조. 94년도 규정타석은 태평양 김동기, 한화 김상국 2명만이 채웠으며 김동수 선수의 경우 규정타석 미달 (22타석 부족) 이었음에도 우승팀 프리미엄 영향이 크다 볼 수 있다. 다만 세이버매트릭스를 보면 김동수가 김동기를 모두 앞서긴 하지만 규정타석 미달이 무의미.[18] 역대 19번째. 포수 최초는 이만수였다.[19] 물론 백업포수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 당시 장광호가 김동기의 백업포수였다. 장광호는 수비 측면에서 상당한 합격점을 받는 선수였으나 타격 면에서 김동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약했다. 이재주도 이 당시 태평양-현대 소속의 포수였으나 이쪽은 수비가 부실한 탓에 1군에 중용되는 일은 별로 없었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96년 시즌 직전 한화 이글스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김상국을 영입했지만 포수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지 못했다. 결국 이 문제는 1998년 시즌 전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박경완을 사오고 나서야 해결된다.[20] 타선에 어느 정도 곧잘 치는 선수 몇 명이 더 있었다면 의존도가 덜 했겠지만, 태평양 시절에는 김경기와 김동기, 윤덕규 정도 외에는 믿을 만한 타자가 없었다. 때문에 그는 수비뿐만 아니라 타석에서 막중한 책임을 짊어져야 했다.[21] 세이버기록으로는 부동의 1위였으나 당시는 전통적인 스탯과 우승프리미엄이 크게 작용하던 시대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22] 해태의 장채근과 활동시기가 정확히 겹친다. 1986~1995년. 1996년은 김동기도 부상으로 거의 출장을 못해서 장채근과 김동기의 활동시기는 100% 겹친다고 보면 된다.[23] 나머지 3명은 류중일, 전대영, 박승호이다. KBO 포스트시즌까지 포함하면 김성래가 있다.(86한국시리즈 홈런, 93페넌트레이스 홈런)[24] 1993년 4월 29일에 광주에서 벌어진 경기에서 0-4로 뒤진 8회초 2사 만루서 0점대 방어율에 빛나는 선동열을 상대로 동점 만루홈런을 작렬했다. 김동기의 그 해 홈런수는 단 3개뿐이었다.[25] 만루홈런을 뽑아낸 타자는 유승안, 류중일 그리고 김동기 이렇게 총 3명이고, 그중 류중일과 김동기가 선동열에게 2개의 홈런을 뽑아냈다.[26] 한편 최소한의 타격 성적을 낸 타자중 가장 많이 선동열을 상대한 선수는 김광림으로 93타수 20안타(0.215) 이다.[27] 무등구장에서 태평양과의 홈경기에 땜빵선발로 등판했는데 1이닝을 더 던지면 서울 원정을 따라가지 못하고 광주에 잔류를 해야하는 상황이었다. 하필 송유석의 절친이 서울에 가게를 개업해서 오픈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머리를 썼다.[28] 다른 곳도 아니고 점수가 짜디짠 것으로 소문난 인천의 당구점수다.[29] 피쳐 9병에 500미리 캔 하나 더 마셨다고 보면 된다.[30] 96준우승 포수는 그의 만년 백업이었던 장광호.[31] 김경기도 태평양의 8시즌중 6시즌을 뛰었으니까 태평양의 색깔도 강하게 있다.[32] 당시 태평양은 중심타자만 집중 견제하면 되는 팀이었기에 태평양 중심타자인 김동기, 김경기 등은 부상이 와도 출전을 강행할 수밖에 없었고 성적도 타 팀의 선수들에 비해 낮을 수밖에 없는 데다 누적된 부상으로 결국 선수수명이 줄어들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