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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호 (1982) | → | 김진우 (1983~1988) | → | 박준태 (1989~1992. 6. 2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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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영 (1982~1988) | → | 김진우 (1989) | → | 김동수 (1990~19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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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우 金鎭雨 | Kim Jin-Woo | |
출생 | 1958년 9월 24일 |
경기도 인천시 (現 인천광역시) | |
사망 | 2008년 7월 (향년 49세)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송림초 - 상인천중 - 인천고 - 인하대 |
신체 | 193cm |
포지션 | 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 입단 | 1983년 1차 지명 (삼미) |
소속팀 | 삼미 슈퍼스타즈-청보 핀토스-태평양 돌핀스 (1983~1988) MBC 청룡 (1989) |
병역 | 예술체육요원[1] |
[Clearfix]
1. 개요
前 삼미-청보-태평양, MBC 청룡 소속의 포수.2. 선수 경력
인천고-인하대를 졸업했으며 포지션은 포수. 아마 시절 강타자로 이름이 높았으며 1982년 서울 세계야구선수권 대회에서 국가대표로 뛴 경력도 있다.1983년 삼미 슈퍼스타즈에 입단, 그 해 15홈런을 기록하며 향후 삼미의 4번 타자[2]와 안방마님 자리를 굳건히 지켜줄 것으로 기대받았으나 이후 기록한 성적표는 팬들의 기대에 미흡했다고 전해진다. 87년에는 성적이 급격하게 하락하는데 여기에 더해 강태정 감독에게 반발하다가 싸대기를 맞고 라디오에 김진우의 부인이 나와 억울함을 호소하기까지한 일이 있었다. 떨어지는 실력에 더해 이런 일까지 있었으니 결국 주전 마스크는 인천고 후배인 김동기의 차지.
거기에 더해 88년 시즌을 앞두고 교통사고를 당하며 시력이 나빠지는 후유증을 겪으며 청보에서 방출. 이듬해 MBC에 입단했으나 1할대의 부진한 성적만 남기고 그 해를 마지막으로 프로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통산성적은 타율 0.250, 43홈런, 173타점.
82년은 국가대표로 인해 프로에서 뛰지 못했고 88년 시즌을 앞두고 심각한 부상을 입었기에 83년부터 87까지 5년이 그의 커리어 전부인셈. 클래식스탯으로는 데뷔년도인 83년이, 세이버스탯으로는 86년이 커리어하이다.
세이버로 보면 그가 포수로 활동한 83년~87년까지 sWAR는 이만수에 이은 2위다. [3]
83년은 sWAR 리그 6위 (4.12), wRC+ 리그 17위(122.9) 로 포수부문은 이만수에 이은 전 분야 2위
84년은 sWAR 1.98 (포수2위) [4]
85년은 sWAR 2.61 (포수3위) [5] [6]
86년은 sWAR 4.58 (포수 산정시, 이 경우 리그 4위), 2.8 (스탯티즈에서 지명타자로 분류하여 손해, 수정 필요), wRC+ 150.4 (리그 7위)
wRC+ 150은 역대 포수 중 이만수, 박경완, 양의지, 강민호만 올라본 고지.[7] 하지만 1986년이 역대 KBO(1982~2020) 중 가장 투고인 시즌인 까닭에 클래식스탯 (타율 0.286에 홈런 8개 타점 41 ) 만 보면 낮아보일 수 있다.
거기다가 과거 타자들 수비 기록이 엉망으로 기록된 탓에 KBO 사이트에선 지명타자가 김진우의 86년 대표 포지션으로 기록되어 있었으며, 스탯티즈에선 이 기록을 그냥 가져와 세부 기록없이 100% 지명타자로 뛴 것으로 된 것으로 설정되었다.
실제로는 86년 포수부문 골든글러브 투표 2위에 올랐고 114시도 51저지로 그 해 포수 중 가장 많은 도루시도를 겪었을 정도로 확실히 포지션을 포수라 봐도 무방할 수치였다. 이런 상황 때문에 당시 경기를 못 본 사람들은 그 해 포수로 뛰었다는 것을 모르며, 손쉽게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WAR에서 포수 프리미엄은 커녕 오히려 1 가까이 손해를 받아 총합 2.80을 받았다.
포지션 전부를 포수를 봤다고 가정하면 sWAR은 4.58 정도로, 1986년 타자 4위까지 뛰어오른다.
아마시절 강타자로 유명하여 포수와 1루수를 보았고 포수로서 어깨는 강했는데 투수리드는 그다지 신통치 않았다고 한다.
어깨의 경우 1983년 120개 도루시도 중 60개를 저지하며 무려 5할의 도루 저지율을 기록했고 1984년에도 롯데 한문연에 이어 도루저지율 2위였다. 86년에도 114시도 51저지로 출장 경기 2/3을 따질 경우 리그 1위
올스타전에는 1983년과 1984년엔 팬투표로 베스트 10에 뽑혀 포수로 선발 출전하였고 85년, 86년, 87년엔 감독 추천으로 출전하였다.
현재 기록상으로 보기에는 다소 부족해보이지만 당대 80년대 포수로 한정하면 이만수에 이은 독보적인 리그 넘버 2 이었던 선수로 요약할 수 있다.
당시에도 이만수가 없는 올스타전 서군에서 포수로 뽑히는 것이나 골든글러브 득표 2위의 케이스 들이 이를 증명한다고 볼 수 있겠다. [8] 86년 골든글러브가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편이었는데 이만수가 부상으로 자주 빠져 100 경기 중 59게임만 나오고 239타석으로 규정타석 진입에는 실패했기 때문. 86년 골든글러브 기준이 포수로 54경기 출장, 타율 2할5푼 이상이었기 때문에 이만수가 아슬아슬하게 후보로 포함되었고 비록 수비이닝이 다소 부족한 이만수에게 상을 줘도 되느냐는 논란이 있었을지언정 65:20이라는 투표차로 이만수가 받으며 수상에 실패했다.
3. 은퇴 후
은퇴 이후의 행적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2002년 9월 인천 SK행복드림구장에서 열린 동산고 vs 인천고 OB의 친선경기에 인천고 유니폼을 입고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내 팬들을 감개무량하게 만들기도 했다.2008년 7월 당뇨 합병증으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항간의 소문으로는 은퇴 후 직장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얼마 못가 그만두었고 상당히 어렵게 생활하며 음주로 건강을 망쳤다는 얘기도 있다. # 예전의 명성과는 달리 그의 빈소는 상당히 쓸쓸했다고 한다. 청보 시절 감독이었던 허구연의 경우 며칠 뒤 일어난 정민태 은퇴 소식과 함께 충격적인 소식으로 뽑으며 명복을 빌었다. #
4.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삼진 | 출루율 | 장타율 |
1983 | 삼미 | 99 | .253 | 92 | 10 | 1 | 15 | 49 | 46 | 3 | 58 (3위) | 44 (5위) | .354 | .409 |
1984 | 80 | .224 | 55 | 8 | 0 | 9 | 27 | 28 | 1 | 37 | 49 | .325 | .367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삼진 | 출루율 | 장타율 |
1985 | 삼미 / 청보 | 82 | .266 | 73 | 14 | 0 | 8 | 31 | 35 | 0 | 35 | 51 | .346 | .405 |
1986 | 91 | .286 | 86 | 19 | 4 | 8 | 41 | 35 | 9 | 45 | 44 | .374 (4위) | .455 | |
1987 | 58 | .238 | 43 | 8 | 0 | 3 | 16 | 20 | 3 | 29 | 26 | .341 | .331 | |
1988 | 1군 기록 없음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삼진 | 출루율 | 장타율 |
1989 | MBC | 61 | .159 | 14 | 3 | 0 | 0 | 9 | 4 | 0 | 17 | 26 | .290 | .193 |
KBO 통산 (6시즌) | 471 | .250 | 363 | 62 | 5 | 43 | 173 | 168 | 16 | 221 | 240 | .346 | .388 |
5. 여담
- 포지션별 등번호중에 포수 최초로 깨뜨린 사례가 되었고, 그 당시에 포수는 보통 대개 2번, N2번, 20번대로 가져가 쓰는 것이 불문율인데, 사실 원래 2번을 쓰려다가 전설의 4할타자 백인천이 이적하면서 투수들이 선호하는 11번을 달게 되었다.[9]
- 안경낀 포수의 원조이자 최초는 야쿠르트 스왈로즈 후루타 아츠야로 생각될 수 있겠지만 사실 김진우 선수가 최초이자 원조다.
- 1983~1985년까지 배터리를 이룬 장명부와는 팀 내부의 전체 단합에도 악영향을 미칠 정도로 사이가 지독하게 안 좋았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장명부가 선발로 등판하면 금광옥 또는 최영환이 선발로 마스크를 쓰고 김진우는 벤치에 앉는 일도 허다했고, 심지어는 1984년엔 장명부가 같은 재일동포 출신인 롯데 홍문종의 도루왕을 지원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김진우는 해태의 김일권이 1루에 나가면 도루저지를 게을리 하는 등의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결국 그해 도루왕은 김일권의 차지였다.
장명부가 홍문종 견제 성실히 하고 김진우는 김일권 잡았으면 도루저지율 6할 찍었을듯
- 마찬가지로 재일교포인 김기태와도 사이가 안 좋았다고 한다. 위의 장명부, 홍문종과의 일화를 보면 전체적으로 재일교포를 싫어했던 게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
김우근이 에러했다고 화낸 기사도 있으니 그냥 동료들과 사이가 안 좋은 게 아닐까
- 마구마구에선 김고우란 가명으로 등장. 처음에는 스페셜밖에 없었으나 이후 재평가를 통해 83년도에 친 15홈런이 144G 환산하면 22개가 된다는 점 때문인지 파워형 레어 포수를 받았다. 포수리드와 주자킬러가 동시에 된다는 점은 장점.
6. 관련 문서
[1]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 대회 우승#[2] 전설의 타이거즈에 출연한 방수원이 밝히길 KBO 최초의 노히트 노런에 아웃카운트 1개만 남긴 상황에서 투수 방수원과 마지막으로 대결했던 타자가 김진우였으며 투스트라이크 노볼 상황에서 실투를 했으나 다행히 파울볼이 됐다고 한다. 다음 공은 볼이었는데 심판이 스트라이크로 판정해 그대로 경기가 끝났고 김진우는 분통을 터뜨렸다고 한다.[3] 3위는 근소한 차이의 유승안이지만 뒤에 얘기할 86년 포지션 문제를 적용하면 1.8정도의 차이가 더 나게 된다. 다만 그것을 감안해도 88년이나 89년까지 셀 경우 우위를 차지하는 것은 유승안.[4] 규정타석 미달 (8개구단 포수 중 이만수만 규정타석 달성)[5] 포수2위는 같은 팀의 금광옥[6] 규정타석 미달 (8개구단 포수 중 이만수만 규정타석 달성)[7] 김동수는 146.5로 살짝 모자라고 김동기는 1988년 191.9를 기록했으나 부상으로 인한 시즌아웃 때문에 규타 미달이다.[8] 하지만 넘버 1인 헐크는 김진우가 wRC+ 150 찍었다고 대단하다고 하고 있을 동안 6년 연속 wRC+ 170 이상, 두 번은 200을 찍고 있었다(…)[9] 사실 1 더하기 1은 2여서 11번을 선택하게된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