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ientela(라틴어)
피호제(被護制)
1. 개요
고대 로마의 사회적인 후원 체계로,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자면 후원이라기보다는 지연 내지 혈연에서 비롯된 연줄에 더 가깝다. 후원자인 파트로누스[1]와 도움을 받는 피후원자인 클리엔테스[2] 사이의 쌍무적인 의무 관계로 이루어져있다.이걸 두고 로마빠들은 로마의 정교한 사회관계망 수준을 보여준다고 평가하지만 로마까들은 로마는 전국민이 마피아 조직원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피호제는 로마의 정치적 경직성
2. 내용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클리엔텔라의 전통은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가 창시했다고 하며, 현대 사학자들은 (부족 국가로 출발한 로마의 역사를 고려하여) 클리엔텔라가 부족장과 부족민들의 관계를 기반으로 확장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3] 로마가 주변의 세력을 흡수하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흡수된 부족의 옛 부족장은 귀족(Patricius), 부족민들은 평민(Plebs)으로 편입되었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자칫 소원해질 수 있는 부족장과 부족민들의 관계를 기존처럼 유지하기 위해서 클리엔텔라가 등장했다는 것. 이러한 점으로 인해 클리엔텔라라는 관계를 신분의 고하에 따라 성립된 상하관계라고 오해하기 쉬운데, (대개의 경우에는 신분 차이가 존재했지만) 신분상으로는 동일한 관계에서도 세력의 크기(=정치적 권력 내지 부의 차이)에 따라 클리엔텔라 관계가 성립될 수 있었다. 또한 중세 유럽의 봉건제와 마찬가지로 클리엔텔라 관계는 사회 맨 꼭대기의 유력 귀족 가문에서부터(제정 시기에는 황제) 노예를 제외한 사회의 밑바닥까지 연쇄적으로 형성되었다. 다시 말해서 대부분의 로마인은 누군가의 파트로누스이면서 동시에 누군가의 클리엔테스였다는 말이다.고대 로마 사회에서 가문(Familia)[4]이 '세포'라면 클리엔텔라는 가문이라는 세포를 연결시켜주는 네트워크의 역할이었다. 이러한 클리엔텔라 관계는 법의 강요로 이루어지는 아니라 전적으로 상호간의 신뢰, 라틴어를 사용하자면 fides(신의)에 의존하는 것이었다.[5] 그렇지만 고대 지중해 사회에서 자유민 사이의 신의라는 것은 사회에서 가장 우선시되는 가치였기 때문에, 파트로누스와 클리엔테스 사이의 신뢰 유지는 사실상 관습법의 영역에 속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상술하였듯이, 클리엔텔라의 관계는 파트로누스와 클리엔테스 모두가 의무를 지니는 쌍무적인 성격으로 구성되어있었다. 우선 파트로누스의 경우, 자기 휘하의 클리엔테스가 법적인 분쟁에 휘말렸을 경우 클리엔테스의 소송대리인으로 클리엔테스의 승소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6][7] 또한 클리엔테스가 행하는 사업 내지 가족사를 지원하며, 클리엔테스가 공직에 출마할 경우 그를 도와주는 것 역시 파트로누스의 중요한 의무 중 하나였다. 역으로 파트로누스가 선거에 출마할 경우 당선을 위해 클리엔테스 역시 파트로누스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할 의무가 있었다. 또한 파트로누스가 전쟁에 나선다면 클리엔테스는 파트로누스를 따라서 종군할 의무가 있었고 파트로누스가 포로로 잡힌다면 파트로누스의 몸값을 마련하는 것 역시 클리엔테스의 의무였다.[8] 또한 클리엔테스 관계는 일회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후대로 세습되었다.
해방된 노예들은 더 이상 노예 신분은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이전 주인들의 클리엔테스로 포함되게 된다. 따라서 공화정 아래에서 클리엔텔라 제도는 노빌레스 가문 중 대귀족, 대명망가로 불리는 특정 가문 몇몇을 시작으로 편법으로 악용됐다. 그들은 선거 운동 직전부터 연례행사처럼 의도적으로 집안 가사노예와 그 가족들을 해방노예로 만들고, 자신들과 협력 관계를 구축한 이들을 이탈리아 시골에서 로마와 그 근교 각 선거구에 배당해 파트로누스 자격으로 이주비까지 주면서 이주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그 대가로 선거운동에 동원하고, 투표를 하도록 하면서 상대후보들을 비방했다고. 노예 입장에서도 노예에서 해방시켜주는 것 자체가 고마운 일이고, 클리엔테스가 되어 신분이 높은 주인의 후원을 받는 것도 좋은 일이므로 선거운동 동원 정도는 기꺼이 적극적으로 참여해준다.
이런 행태를 특정 유력 가문과 당주들(특히 클라우디우스 씨족 내의 카이쿠스와 그 장남 풀케르)은 "속보이는 행동"이라고 비난받았다. 그런데 공개적으로 비난받은 클라우디우스 씨족 내의 풀케르 가문 외에도 이 가문의 대척점에 선 코르넬리우스 씨족 내의 스키피오 가문이나 여타 다른 노빌레스 집안들 역시 클리엔텔라 제도를 악용했고, 때론 클라우디우스 가문보다 더 심한 행동(친인척 가문들 내 노예들까지 해방시키는 행동 등)도 주저하지 않았다.
더욱이 시간이 흐르면서 클리엔텔라의 성격 역시 기원전 2세기 이후부터 변화하기 시작한다. 특히, 농한기에 몇 개월만 동원된 후 다시 고향으로 흩어져 농부로 돌아가던 옛 시절에 비해, 바다 건너의 장기간 숙영 원정이 잦아짐에 따라, 로마에서 먼 전역에 배치된 군단 내에서 지휘관과 사병들 사이의 클리엔텔라 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 부분은 전통적인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의 대귀족들의 클리엔텔라 확장과 다른 모습이었다. 그래서 이런 변화는 후기 공화정의 원로원파와 민중파의 대립 못지 않게 로마 정국과 내전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와 같은 관계 형성의 출발은 16년에 걸친 제2차 포에니 전쟁 당시 수년에 걸쳐서 같은 군대를 지휘하는 인물(대표적으로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이 등장할 무렵부터 기미가 보이는데, 확실하게 병사들이 자신들을 지휘하는 지휘관의 클리엔테스로 변모하게 된 시점은 기원전 1세기가 되면서부터다.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기존의 시민군 제도를 직업군인 제도로 재편성한다. 포에니 전쟁 이후 빈부격차가 극심해지면서 시민군의 다수를 차지하던 자영농들이 하나둘씩 경제적으로 몰락하기 시작했고, 이는 로마군의 위기로 이어졌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이우스는 군제를 개편하여, 토지를 잃은 몰락한 자영농과 빈민들을 아예 직업군인으로 만들어버렸고, 그 결과 사병화(私兵化)가 가속화된다. 로마 공화정 말기의 주요 정치인들(가이우스 마리우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은 모두 이러한 방식으로 형성된 자신의 클리엔테스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중앙 정계를 좌우하게 된다. 또한 이 무렵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에서 벗어나 영토를 급속도로 팽창시키는데, 이 과정에서 새로 로마의 영향권 하에 놓인 지역들도 본인들을 정복한 군 지휘관들의 클리엔테스가 된다. 대표적으로 폼페이우스는 마르세유, 그리스와 이베리아 반도, 이집트를 클리엔테스로 두었으며 카이사르 역시 갈리아 일대를 본인의 클리엔테스로 삼는다.[9][10]
시칠리아에 유일하게 클리엔텔라 문화가 남아있다.
서로마 멸망 후 본토 이탈리아는 정치지형과 경제, 군사작전들로 하여금 많은 문화의 변화를 겪었지만, 고립된 거대한 섬이며 충분한 자체생산력을 가진 시칠리아에선 클리엔텔라 문화가 변형된 형태로 존재해왔다. 로마 체제의 소멸 후 지중해 전체의 치안을 유지할 해군력이 부재 상태로 바뀌자 해적이 창궐했고, 서로마 이후 난립한 지역정권들의 수없는 침략을 겪고 폐쇄적으로 변질되었다.
영화 대부에서도 시칠리아 이민자 1세대의 마피아 정신문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1] patronus, 복수로는 patroni. 오늘날 영어로 후원자를 의미하는 Patron의 어원이 바로 이 단어이다.[2] cliens, 복수로는 clientes. 오늘날 영어로 고객을 의미하는 client의 어원.[3] 왜냐하면 가장 전통적인 형태의 파트로누스-클리엔테스 관계는 파트로누스가 클리엔테스에게 자신의 씨족명, 가령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율리우스, 을 하사하는 것으로 형성되기 때문. 당장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로마로 편입시키는 과정에서 본인이 정복한 갈리아의 유력 부족장들에게 율리우스라는 씨족명을 뿌리고 다녔다.[4] 고대 로마에서 가문 내지 가족이라는 것은 단순히 오늘날처럼 혈연적인 관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정에서 일하는 하인 내지 노예까지 포함하는 엄청나게 넓은 범위였다. 그래서 로마의 가족을 현대적인 의미의 가족과 구분하기 위해서 전(全) 가정 내지 대(大) 가정이라고 부르는 유럽의 학자들도 존재한다.[5] 지금도 물질적 거래가 아닌 재능이나 전문성 등을 거래하는 법률, 컨설팅, 예술분야 등 상호 신뢰가 필요한 무형적 거래에서 계약관계를 요청한 사람을 client라고 부른다. 물질적, 일회성 거래의 고객은 customer.[6] 소송대리인의 의무가 파트로누스의 의무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하게 여겨졌다. 따라송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자면 전관예우와 같이 부정부패로 보일 수도 있는 행동 역시 (파트로누스가 그런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의 능력이 된다면) 마땅히 행해야 했다. 자신의 클리엔텔라를 지키지 못한 파트로누스는 큰 불명예와 함께 무능하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었다.[7] 이러한 클리엔텔라 전통이 법조계로 이어져, 영미권에서는 변호사에게 소송 대리를 의뢰하는 의뢰인을 클라이언트라고 부른다.[8] 청년 시기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해적에게 잡혔을 당시의 유명한 일화를 돌이켜보자. 여전히 카이사르가 해적들에게 붙잡혀있는 사이에 로마로 돌아가서 몸값을 마련해온 종자(從者)들이 바로 카이사르의 '클리엔테스'이다.[9] 물론 이렇게 새로 편입된 지역이 로마의 클리엔텔라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그냥 새로운 강자가 등장하니 무릎을 꿇은 것일 뿐. 당장 폼페이우스의 클리엔테스 중 하나였던 이집트는 카이사르의 내전 당시 폼페이우스가 파르살루스 회전에서 참패하고 자국으로 망명하자 재빠르게 태세전환을 시전하고 폼페이우스의 목을 베어 카이사르에게 바친다(...).[10] 덧붙여서 클리엔테스가 파트로누스를 암살이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배신하는 것은 고대 로마인들의 윤리관상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행위였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이집트의 배신 행위에 충격과 공포에 빠져 이집트에게 복수해야 한다는 여론이 대세가 되었다. 카이사르도 이 사실을 알고 크게 슬퍼하며 폼페이우스의 복수라는 명분으로 이집트를 개박살내버렸는데 카이사르가 뛰어난 정치가였음을 감안하면 가는 길이 달라 비참하게 몰락한 옛 친우의 복수도 복수지만 당시 로마 내의 들끓던 여론을 단박에 흡수해 자신의 지지 기반을 다질 목적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