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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티 공화국 République d'Haïti | Repiblik d Ayiti Republic of Haiti | ||
국기 | 국장 | |
Liberté, Égalité, Fraternité 자유, 평등, 우애 | ||
면적 | 27,750km² | |
인구 | 11,680,288명(2022) | 세계 81위 | |
인구 밀도 | 382명/km² (2019) | |
출산율 | 세계은행 자료 2.80명(2020)[1] CIA 자료 2.43명(2022)[2] | |
수도 | 포르토프랭스 | |
접경국 | [[도미니카 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 |
정치 체제 | 무정부 상태[3](2023년) | |
민주주의 지수 | 2.81점, 권위주의 (2023년) (167개국 중 129위)[4] | |
대통령 | 에드가르 르블랑 필스 (과도위원장) | |
총리 | 알릭스 디디에 피스-에메(권한대행) | |
명목 GDP | $210억 9,100만(2022년 10월) | |
1인당 GDP | $1,790(2022년 10월) | |
GDP(PPP) | $390억 7,600만(2022년 10월) | |
1인당 GDP (PPP) | $1,819(2017) | |
수출 | $10억 4000만(2020) | |
수입 | $36억 4천만(2020) | |
지니계수 | 41.1(2017) | |
실업률 | 14.50%(2020) | |
공용어 | 프랑스어, 아이티 크레올어 | |
인종구성 | 흑인 95%, 흑백혼혈 및 백인 5% | |
군대 | 아이티군 | |
국교 | 없음[5] | |
통화 | 구르드 | |
국가(國歌) | 데살린의 노래(La Dessalinienne) | |
남북수교현황 | 대한민국: 1962년 9월 22일 북한: 미수교 | |
교민 수 | 60명 | |
여행경보 | ||
여행금지 | 전 지역[6][7] |
위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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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리브해의 중앙에 있는 히스파니올라(Hispaniola)섬[8] 서부에 위치한 국가이며 해당 섬을 도미니카 공화국과 공유한다.수도는 포르토프랭스(Port-au-Prince)로, 1706년에 프랭스 호(Le Prince, 한국어로 왕자라는 뜻)라는 배가 정박한 항구라는 뜻에서 그 선장이 붙인 이름이었다. 하지만 1680년에 이미 그 연안의 섬들이 왕자의 섬들(Les îlets du Prince)이라고 불렸다는 설도 있다.
아메리카에서 비백인종, 즉 노예였던 흑인들이 주도한 최초의 독립국이지만, 그 이후 오랫동안 외세의 간섭을 받았고, 지금은 지진 및 재해와 정치문제로 아메리카 지역 최악의 파탄국가로 전락했다.
한국에는 불명예스럽게도 2010년과 2021년 두 차례의 지진을 통해 재해국으로 인지도가 생기게 되었다. 지진 여파와 내전 문제로 현재는 무정부국가로 봐도 무방하다.
현재는 갱단들이 곳곳을 장악하여 전쟁을 벌이고 시민들을 약탈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며, 참다가 뿔난 시민들이 갱단을 역으로 패는 일도 일어나고 있다. 정부는 사실상 마비 상태이며, 지역별로 군대 수준으로 중무장한 거대 갱단 집단들이 실질적으로 아이티를 분할 통치하고 있다고 한다.
2. 상징
2.1. 국호
아이티는 히스파니올라섬 선주민 언어인 타이노어의 아이티(Ayiti)에서 유래한 국호이다. 이는 '산이 많은 땅'이라는 뜻이며 아이티(Haïti)라는 국호도 이를 프랑스어식으로 옮긴 것이다. 이름 그대로 국토의 3/4이 산이다.영어로 “헤이티”로 발음하는데다 철자가 Haiti라 아이티란 나라와 헤이티란 나라가 따로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미국인들이 헤이티라 부르는 나라가 바로 아이티다.
2.2. 국기
아이티의 국기는 1803년 아이티 혁명 지도자였던 장자크 데살린이 식민지배자였던 프랑스의 삼색기에서 하얀색을 빼 만든 깃발에서 유래했다. 현재의 국기는 장클로드 뒤발리에가 축출된 1986년에 만들어졌다. 민간에서는 가운데에 국장이 없는 깃발을 사용한다.
1859년부터 1964년까지 사용한 국기는 지금보다 국장이 크게 그려져 있었고, 디자인도 약간 달랐다.
프랑수아 뒤발리에와 장클로드 뒤발리에 부자가 집권하던 1964년부터 1986년까지는 국민통일당의 당기인 검은색과 빨간색의 세로 방향 줄무늬에 국장이 그려진 국기를 사용했고, 비율도 지금과 달랐다.
디자인적인 면에서 봤을 때 국기는 상당히 특이하게 생긴 편이다. 보통 국기에 국장을 넣는다면 배경을 딱히 추가하지 않고 문장이 그려진 부분만 쏙 그려서 추가하는 편이지만 아이티의 국기는 국장의 배경에 하얀색을 채워넣은 듯이 추가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2.3. 국가
자세한 내용은 데살린의 노래 문서 참고하십시오.3. 자연
서인도 제도에서 2번째로 큰 히스파니올라 섬의 서쪽 약 3/8을 차지하고 있는데 히스파니올라 섬 동쪽 약 5/8을 차지하고 있는 도미니카 공화국과 육지로 국경을 맞대고 있다.
지리적으로 작은 나라에 산지가 많고 열대 우림이 우거져 국가 기반 산업이 벌목산업일 정도였으나 이러한 열대림들과 섬 한가운데의 고산지대 등에서는 다양한 생물종의 서식이 확인되어 국제 환경단체에서 환경보호에 열심히 노력 중이다. 벌목산업을 관광산업으로 바꿔가려 한 것은 국가 경제지표도 어느 정도 올라가 좋은 모습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아메리카 전체에서 문맹률이 가장 높은 나라라 성공적이진 않은 편이다. 거기에 글을 아는 사람도 잘 아는 것도 아니라 UN에서 준 에너지바의 제조일자를 유통기한으로 착각해 기한이 지났다면서 버리라고 난리쳐서 사람들이 못 먹고 심지어 밟아버리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지금은 숲이 파괴되기를 거듭해 전 국토의 2%에 불과하며, 옆 동네 도미니카 공화국과의 삼림 비교를 통해 저개발국과 중진국을 비교할 때 흔히 쓰이기도 한다.
아이티 북부에 있는 라바디(Labadie, 영어로는 Labadee)라는 곳은 아름다운 휴양지로 인기가 많다. 다만 이 지역은 아이티에 속해있긴 하나 로얄캐리비안이라는 크루즈사의 사유지다.
최북단의 작은 섬이 알게 모르게 유명한데 캐리비안의 해적의 무대였던 토르투가(Tortuga)섬이다. 론리 아일랜드의 노래 '잭 스패로우'에 나오는 그 아일랜드 토투가 맞다. 스페인어로 '거북이'라는 뜻. 처음 섬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거북이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 실제로 17세기 해적들의 본거지로 쓰였던 곳이다. 현재는 지명이 바뀌어 프랑스어식인 라토르튀(La Tortue)섬으로 개명되었다.
헤이티안 브라운 버드이터, 헤이티안 자이언트 센티페드는 모두 아이티에서 유래한 동물들이다.
4. 역사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의 역사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font-size:0.95em" | 지역 | 서부 | 동부 | |||
북부 | 남부 | |||||
<colbgcolor=#000000> 콜럼버스의 발견 이전 | 타이노인 | |||||
식민지 시대 | 산토도밍고 | |||||
생도맹그 | 산토도밍고 | |||||
생도맹그 | ||||||
19세기 전반 | 아이티 제1제국 | 생도맹그 | ||||
아이티국 | 아이티 제1공화국 | |||||
산토도밍고 | ||||||
아이티 왕국 | ||||||
아이티 제1공화국 | ||||||
스페인 아이티 공화국 | ||||||
아이티 통일 | 아이티 제1공화국 | |||||
19세기 후반~20세기 전반 | 아이티 제1공화국 | 도미니카 제1공화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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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19세기 이전
4.1.1. 비극의 서막
아이티는 1492년 12월 5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훗날 카리브 해로 불리게 되는 서부 대서양의 히스파니올라 섬을 발견한 이후 그 막장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원래 히스파니올라 섬에는 토착민인 10만~50만명의 타이노인[9]이 살았으나 섬의 원주민이던 타이노인과 아라와크인 등 카리브 원주민들이 스페인인들이 묻혀 온 각종 전염병[10]으로 인해 99%가 몰살되었고 남은 원주민들도 학살당했다.[11] 이에 일할 사람조차 없어지자 스페인인들은 서아프리카에의 포르투갈인 노예상들에게서 기니비사우, 앙골라, 상투메 프린시페 출신의 흑인 노예들을 사들여 대거 아프리카에서 신대륙으로 납치해와 노예로 부렸는데, 이들이 현재 아이티인들의 선조이다. 물론 아이티에 원래 살고 있던 토착민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려 오늘날에는 현존하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이 혼혈 타이노는 극소수 남아있다.17세기 말 프랑스가 레이스베이크 조약에 따라 스페인으로부터 히스파니올라 섬의 서반부를 할양받아 생도맹그(Saint-Domingue)라는 이름의 식민지로 지배하게 되었다. 동반부는 여전히 스페인 도독령 산토도밍고(Santo Domingo)로, 같은 말이지만 프랑스어와 스페인어로 구분되는 지역 명칭을 갖게 된다. 이 구분이 지금의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의 구분으로 이어져 오게 된다. 또한, 도미니카인과 아이티인과의 차이도 매우 커지게 되었다.
프랑스는 새로 차지한 생도맹그가 사탕수수 및 커피 등의 재배에 적합함을 알아차리고 대규모 플랜테이션을 구축하고는 서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데려와 노예로 착취했다. 7년 전쟁으로 캐나다와 루이지애나의 광대한 식민지를 영국과 스페인에게 내주어 이후 아메리카에 있는 식민지가 아이티, 마르티니크, 과들루프를 비롯한 소앤틸리스 제도의 일부 조그만 섬들과 기아나 정도밖에 안 되어 아이티를 무척이나 아꼈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이 안정적으로 보일 만큼 가난한 파탄국가로 전락한 지금을 생각해 보면 당혹스럽지만, 아이티 혁명 이전만 하더라도 사탕수수와 커피 플랜테이션 농업이 번성했던 아이티는 당대 최대의 설탕, 커피 생산지였다. 1780년대까지 당시 유럽에서 소비되는 설탕의 약 40%, 커피는 약 60%가 바로 생도맹그 산이었다. 유럽 국가가 아메리카에서 경영하는 단일 식민지 중 가장 부유한 곳으로, 프랑스 국부의 4분의 1을 조성했다. 한때는 무려 70퍼센트를 차지한 통계도 있다. 아이티의 인구도 대단했는데, 노예만 70만 명에 이르러 오늘날 도미니카 공화국 지역의 7배에 달했다. 반면 18세기 당시 도미니카 공화국은 평방킬로미터당 인구밀도가 5명 남짓했을 정도로 인구가 희박했으며 주민들은 소떼를 쳐서 소가죽을 수출하는 곳이었다. 물론 아이티 인구의 90%는 그냥 노예일 뿐이었고 부는 몽땅 프랑스로 돌아갔으며 돈줄은 프랑스인 이주민들의 손에 있었다.
4.1.2. 아이티 혁명
오늘날까지도 아이티 학생이라면 누구나 루베르튀르가 프랑스로 끌려가면서 남긴 마지막 말을 암송한다. “내가 무너진다면 생도맹그의 단 하나뿐인 자유의 나무는 쓰러지고 말리라. 그래도 자유의 나무는 다시 살아나 땅 속 깊이 수많은 새로운 뿌리들을 내리리니.”
- 놈 촘스키, <507년 정복은 계속된다> 중
미국 독립 전쟁과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독립 분위기가 일찍 불거졌다. 미국 독립 전쟁 당시 자유 흑인들은 프랑스군에 입대하여 미국 독립을 위해 싸웠다. 하지만 자유 흑인들은 군에서 활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지위가 계속 떨어지는 것을 눈 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결국 프랑스 혁명 초기 혁명주의자들이 만든 국회에 아이티도 의원을 보내게 되자 자유 흑인들은 자신들도 더 많은 정치적 영향력을 요구하여 백인 농장주 및 백인 빈곤층과 대립하였다.- 놈 촘스키, <507년 정복은 계속된다> 중
그리고 결국 혁명이 시작하기도 전에 자유 흑인 vs 백인 농장주 vs 흑인 노예 vs 백인 빈곤층 구도로 내전을 일으켰다. 또한 이를 배경으로 노예들도 불만이 폭발하게 되어 본격적인 혁명이 시작되었다.
프랑스 혁명정부, 그리고 1799년 이후는 나폴레옹과 전쟁 중이던 영국군과 스페인군까지 자메이카와 스페인령 산토 도밍고에서 아이티를 침략한 결과 자유 흑인, 백인 농장주, 백인 빈곤층, 프랑스군, 영국군, 스페인군이 진흙탕 전쟁을 시작한다. 흥미롭게도 이 세력들은 국가·인종에 기초한 대립 구도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영국과 스페인은 필요할 때는 아이티 혁명군과 손을 잡고, 아닐 땐 싸웠다. 백인 농장주와 백인 빈곤층도 마찬가지. 게다가 자유 흑인들과 흑인 노예들도 자주 싸웠다. 심지어 같은 노예들끼리 싸울 때가 잦았고, 아이티 흑인들은 나폴레옹이 본격적으로 진압을 시작하자 비로소 하나로 뭉치게 된다.[12]
이때 프랑스군은 훨씬 더 좋은 무기를 가졌고 훈련도 잘 받았지만 흑인들의 게릴라전과 황열병을 이기지 못 한다. 당시 아이티에 프랑스 견제를 목적으로 파견된 영국군 23,000여 명 중 15,000여 명이 황열병과 말라리아로 사망했다. 프랑스군의 경우 65,000여 명 중 55,000여 명이 병사했다.
투생 루베르튀르(François-Dominique Toussaint Louverture, 1743년 5월 20일 ~ 1803년 4월 7일)[13]는 아이티의 혁명가, 흑인 독립운동가 중 하나로, 노예제를 끝내고, 프랑스로부터 아이티의 독립 운동을 이끌었다. 또한 프랑스군의 장군 및 생도맹그의 총독으로도 지냈다.[14] 그의 노력으로 흑인 독립군은 아이티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군을 결국 무찔렀다. 그러나 투생은 어처구니없게도 프랑스군의 비열한 함정에 걸려 프랑스로 끌려가 옥사했다. 프랑스군 사령관이 투생에게 협상을 제안하자 투생은 '우리 힘을 보여줬으니 프랑스도 협상을 제대로 하겠지.' 라는 생각으로 프랑스군 진영으로 갔다가 갇힌 것이다. 대단히 비열한 짓거리였지만 투생이 흑인이라서, 그리고 프랑스에서 아이티에서 일어난 백인 학살을 과장해서 선전한 덕택에 비난하는 여론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아이티 혁명군 수뇌부들도 자신들과 달리 투생이 아이티의 완전한 독립을 바라지 않아[15] 어느 정도 대립하는 상황이라 함정인 걸 알면서도 프랑스군 진영에 가는 걸 안 말렸다.
투생이 죽고 난 후 후계자인 장 자크 데살린(Jean-Jacques Dessalines, 1758년 9월 20일 ~ 1806년 10월 17일)에 의해 1804년에 독립하였으며 이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미국 다음으로 가장 빠른 것으로, 흑인이 수반이 된 흑인 주도의 근대적 정부가 구성된 것으로서는 최초의 사례이다.
아이티 독립군의 승리는 당초 나폴레옹의 계획이었던 북아메리카 재식민지화를 수포로 만들었다. 나폴레옹은 아이티에 노예제를 다시 도입하여 예전처럼 돈을 벌고 그 돈으로 7년 전쟁에서 잃은 퀘벡 등 북아메리카 식민지 전체를 재정복할 계획이었지만 오히려 아이티를 잃은 후 그나마 남아있던 루이지애나 식민지까지 포기하기로 한다. 당시 미국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은 이때 루이지애나를 매입해 미국의 영토를 두 배로 늘린다. 아이티 혁명이 미국의 역사에도 큰 영향을 미친 셈[16]이다. 아이티나 퀘벡 등 북아메리카 식민지를 수복하기에는 너무 방어하기가 불리했고 루이지애나도 신생국 미국, 적성국가인 영국과 스페인 등에 둘러싸여서 방어가 곤란했다.
1804년 1월 데살린은 아이티를 독립국으로 선언하여, 종신 총독직을 맡았다. 그리고 총독 취임식에서 프랑스인과 프랑스인의 피가 섞인 흑백혼혈인에 대해 제노사이드 처분을 직접 명령하였다. 이후 데살린은 100일 동안 아이티 도처를 순회하면서 제노사이드 명령의 수행을 손수 지도하고, 백인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과시하였다. 백인이라면 노예제 관여와는 일체가 무관하게 남녀노소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하였고, 물라토 등 흑백혼혈인도 백인의 씨를 받았다고 하여 멸절을 면치 못하였다.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은 데살린의 개인 재단사, 주치의, 독립전쟁에 참전했던 폴란드 참전용사 등 데살린에게 직접 자비를 구걸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 불과하였다.
건국 후 아이티 전역을 돌며 백인에 대한 제노사이드를 손수 집행한 데살린은 같은 해 10월 나폴레옹 1세의 황제 즉위에 대항한다며 스스로 자크 1세라 칭하고 아이티 제국을 수립했다.(아이티 제1제국) 1805년 5월 20일 제국 헌법이 공포되고 농민 군국주의적 국가가 되었는데 알렉상드르 사베 페시옹(Alexandre Sabès Pétion)과 앙리 크리스토프 등의 경쟁자들은 이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황제를 자칭했던 데살린은 옛 동지였던 공화파에 의해 암살되었다. 그는 1806년 10월 17일 포르토프랭스 북쪽의 한 도시에서 반란군에게 붙잡혀 살해되었고, 그의 시체는 잘려져 근처에 묻혔다.
이후 반란의 주역인 알렉상드르 페티옹과 앙리 크리스토프가 반목하면서 아이티는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었다. 페티옹과 크리스토프는 국가원수 자리를 놓고 대립하다가 각각 남부와 북부에서 (남)아이티 공화국과 (북)아이티국을 선포하고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들이 세운 정부는 최초의 흑인 근대 공화정부라는 의의가 있었으나 두 개의 정부, 두 명의 대통령이 등장하여 남북 분할이 야기되었다.
이후 1811년에 앙리 크리스토프가 스스로를 앙리 1세라 칭하고 왕으로 즉위하면서 아이티국은 아이티 왕국으로 전환되어, 북부의 왕국과 남부의 공화국이 대립하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앙리 크리스토프는 자신의 측근들에게 귀족 작위를 하사하며 왕 노릇을 했고, 프랑스의 침공을 막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라페리에르 요새를 건설하며 권위를 과시했다.
그러나 자신이 세운 공화정을 스스로 뒤엎고 왕정을 수립한 행위는 다수의 민중이 그에게 등을 돌리고 남부의 공화국을 지지하는 현상을 야기했다. 그리하여 말년의 앙리 크리스토프는 자신의 백성들이 언제 남부와 손잡고 반기를 들지 두려워하며 살다가 1820년에 권총으로 자살했다. 이후 그의 아들 자크 빅토르 앙리가 왕위를 계승했으나, 불과 며칠만에 남부의 지원을 받은 반란군에게 살해당했고, 남부의 대통령 장피에르 부아예(Jean-Pierre Boyer)가 통일 아이티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다.[17]
한편 이렇게 남북으로 분단된 동안에도 아이티는 누에바 그라나다 독립운동을 하던 시몬 볼리바르에게 병력을 지원하면서[18] 뜻밖에 남아메리카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의 독립에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시기 아이티의 안정화를 더더욱 어렵게 한 것은 아이티의 플렌테이션 경제였다. 설탕과 커피 등 제국주의 국가들의 수요에 전적으로 종속되는 경제구조를 가진 아이티는 독립으로 교역길이 막히고 내전으로 국토가 초토화되면서 전면적인 퇴보를 피할 수 없었다. 식민지 시절의 플렌테이션 경제를 해체하려고 했던 북부 왕정이 무너지고 해외시장과의 교역을 유지하고자 했던 부아예가 승리하면서 내전이 종식되기는 하였으나, 최초의 노예혁명 국가라는 상징성은 제국주의 국가들과의 외교관계 수립를 매우 지난하게 만들었으며, 특히 데살린의 주도로 일어난 백인 제노사이드는 프랑스 내 여론 뿐만 아니라 유럽제국과 미국의 여론을 격앙시켜 더더욱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당시 서양은 아이티인들이 식인종이라는 헛소문을 유포시켜 아이티 독립운동가들은 '무자비한 살인자'에 아이티를 '구원받을 수 없는 곳'처럼 묘사했다. #
4.2. 외세의 간섭 그리고 연이은 독재
4.2.1. 프랑스의 보복
수출에 의한 농업입국으로 경제를 재건하고자 한 부아예는 내전 종식 직후 프랑스와 협상을 시작하였다. 아이티의 경제가 완전히 파탄된 상태였고, 데살린의 백인 학살과 "감히 검둥이 노예 따위가 백인들에게 대들다니"라는 백인 국가들의 인식으로 인해 고립을 겪었던 아이티는 협상에서 매우 불리했고, 프랑스는 절대적인 갑의 입장에 있었다.결국 1825년에 프랑스는 아이티의 독립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 대가로 아이티는 독립 배상금으로 1억 5천만 금 프랑을 물어야 했다. 이른바 '독립 배상금'이라고 하는 이 재산피해 배상금은 필사적으로 관계를 회복하여야만 하였던 아이티가 프랑스에 먼저 제시했던 조건이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배상금으로 만족하지 않았고 프랑스 제품에 대한 관세자주권 포기까지 관철시켜 아이티를 경제적으로 종속시키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렇듯 대외종속적인 경제를 가지고 이웃국가인 도미니카 공화국을 점령하느라 막대한 군비까지 소모하고 있던 아이티가 단기간 내에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채무불이행이 반복되면서 혼란이 고조되곤 했으며, 결국 1838년 프랑스와 아이티는 배상금을 9천만 프랑으로 낮추고 지불기간도 향후 30년으로 늘리기로 합의하였다. 프랑스 정부에 대한 배상금 지불은 1888년에 공식적으로 완료되었으나, 빚을 빚으로 돌려막는 방식이었기에 여전히 아이티는 프랑스나 독일, 미국 등의 은행에서 빌린 막대한 대출금과 이자를 갚아나가야 했다.
여전히 남아있는 대출금은 계속해서 긴장관계를 고조시켰으며, 1903년에 아이티 정부가 프랑스가 소유하고 있던 아이티 국립은행을 사기죄로 고소하기에 이르렀다.[19] 이로 인한 갈등이 점점 심해지자 프랑스 은행들은 1910년에 아이티 국립 은행의 지분 대부분을 미국의 뉴욕 시티 은행에 넘기고 손을 떼게 되었다. 그러나 아이티인들의 기대와는 달리 뉴욕 시티 은행과 미국의 기업가들은 기존의 프랑스 은행들보다도 더 공격적으로 아이티의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이토록 굴욕을 감내하면서 무역로를 뚫고자 한 것은 앞서서 지적하였듯 아이티의 플랜테이션 경제가 전적으로 제국주의 경제에 종속된 구조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이티가 국제시장에 복귀했을 즈음 이미 설탕 생산의 중심지는 쿠바 등 카리브해 각지로 옮겨간 뒤였고, 아이티는 농민들을 강압적으로 농노화하여 과거 프랑스 식민지 시절의 노예 플랜테이션 경제를 모방하기도 하였으나,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시는 과거와 같은 지배적인 위치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설탕을 대신하는 것은 커피 재배였는데, 결과적으로 플랜테이션의 작물을 A에서 B로 옮겨갔을 뿐 경제의 재편과 종속구조의 탈피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처럼 식민지적 경제가 구조적 변화없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옛 백인 노예주 계급을 대체한 것은 과거 아이티 혁명 과정에서 백인들과 함께 제노사이드 등 정치적 핍박을 당했던 흑백혼혈인 즉 물라토 계층이었다. 백인 노예주들의 씨앗을 받은 이들은 백인들의 교육 및 문화적 유산을 상속하여 경제적 특권을 누렸고, 아이티 경제의 식민지적 재종속 과정에서 정치적 지배계급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사회가 흑백혼혈인과 비혼혈흑인으로 갈라지면서 정치적으로도 혼란이 지속되었다. 1843년부터 1915년까지 22명의 대통령이 재임했는데, 이 중 자기 임기를 마친 사람은 단 한 명이고, 세 명은 임기 중 사망, 한 명은 집무실에서 폭살, 한 명은 독살, 한 명은 군중에 의해 오체분시, 한 명은 사임, 그리고 나머지 14명은 전부 혁명으로 전복되었다.
4.2.2. 미군의 점령
1915년 쿠데타로 탄생한 비혼혈 흑인정권은 흑백혼혈인의 사회지배를 종식시키고자 했는데, 그 수단은 공포정치였다. 흑백혼혈 반군이 조직되고 수도 내에도 흑백혼혈 반군에 동조하는 불온한 분위기가 확산되자 흑인정권은 정부 전복을 음모하였다는 죄명으로 200여명의 흑백혼혈 지도자들을 체포하여 처형하였는데, 이 대규모 처형에 대한 역풍으로 흑백혼혈 세력이 결집하여 흑인정권은 진짜로 전복되었고 흑인 대통령은 이들의 손에 오체분시되었다.그리고 이렇게 발생한 무정부 상태를 해결하겠다는 명목으로 미합중국 해병대가 아이티를 침공하여 점령하게 된다. 미 해군 항공대는 항공지원을 명목으로 게임하듯 아이티인들을 기총으로 쏴죽였고 수많은 사람이 미 해병들에 의해 학살당했다.
미군이 개입한 것은 여러 이유가 있다. 1910년에 미국 자본은 프랑스로부터 아이티 국립 은행을 인수하고 아이티의 빚 대부분을 손에 넣었으며, 이를 통해 아이티의 세관을 운영하여 관세를 차지하려 하는 등 아이티의 주권사항을 위협했다. 이에 대해 아이티 정부가 거부하자 월가 등의 미국 자본이 채무불이행 가능성을 주장하며 미국 정부를 설득했다. 미국 정부로써도 자국의 안보를 위해 다수의 이주민들을 내세워서 아이티에서 프랑스 이상의 영향력을 펼쳐나가고 있던 독일에 대한 견제가 필요했는데, 1차 대전으로 인해 아이티에 깊은 이해관계가 있는 프랑스도 독일도 아이티 문제에 개입할 수 없게 된 상황이었다. 이러한 요소가 맞물려서 대서양에서 유럽 열강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자국 기업가들의 이익을 늘릴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고 보고 침공한 것이다.[20] 이렇게 건국 후 한 세기 반 가까이를 빚쟁이들이 나라를 좌지우지했다.
혼혈 여부를 놓고 분열되었던 아이티 사회를 미군정은 식민지 노예주들의 문화적 유산을 누려왔던 혼혈인과 식민지적 차별의 부당성을 호소하는 흑인을 굳이 나누지않고 전부 니거로 취급하고 다 쏴죽임으로서 공평하게 대우하고 미국식 인종차별주의를 아이티에 이식시켰다.[21] 아이티는 국가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미국에 대항했지만 성공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수십 만 명의 아이티인들이 쿠바와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망명하였다. 아이티를 점령한 미국은 아이티 정부에 추가적으로 미국 금융자본으로부터 대규모의 대출을 받을 것을 강요했다. 이 새로운 대출금은 미국 금융자본의 이득으로 흘러들어갔으며, 이 대출상환은 미국의 점령이 끝난 뒤로부터 10년이 더 넘게 지난 1947년까지 지속되었다. 당시 아이티의 현황에 대한 UN보고에 따르면 인구의 90%가 기아수준의 상황에 놓여있었다고 할 정도였다.
미국은 1934년까지 아이티를 군정통치하면서 미국식 헌법과 정치, 경제, 군부를 하나로 결합하는 방식을 강요하였다. 그 결과 아이티는 군부의 입김이 강한 국가로 변모하게 되었다. 그나마 미국도 인프라를 깔고 직업학교를 세우면서 산업화를 진행하는 등 나름의 신경은 썼지만 아이티 전체의 이득은 결코 아니었다. 인프라와 산업화의 대부분은 도시에 집중되었으며 그 과실은 미국인들이 우대한 소수의 혼혈 엘리트들의 것이었다. 인구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흑인들은 오히려 총칼로 위협받으며 도로건설을 위한 강제노동에 끌려갔고, 가혹한 노동환경 속에서 수천명이 죽어나갔으며, 기아와 싸우며 가까스로 하루하루를 버텨나가야 했다. 이 때 생긴 갈등으로 인해 재독립 이후의 아이티가 쿠데타와 군부 독재에 시달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산업화도 얼마 가지 않아 완벽하게 붕괴되어 사실상 나라 자체가 최빈국으로 전락했다.
4.2.3. 군부 쿠데타 및 뒤발리에 정권
미군정 치하에서는 흑백혼혈인과 흑인들의 정치적 대립이 비교적 뒷전으로 밀려났으나, 점령이 종식되자 다수 흑인과의 갈등이 다시 전면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미 점령군이 잔류하던 시기 제도권 내의 정치적 저항세력을 주도한 것은 흑백혼혈인들이었고, 점령이 끝나자 집권한 것도 이들 흑백혼혈인이었으며, 아이티의 국익보다는 자신들의 경제적 이권을 공고히 하는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다수 흑인이 차별받는 상황에 반발하여 1946년 쿠데타가 발생했고, 흑인인 뒤마르세 에스티메(Léon Dumarsais Estimé, 1900~1953)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는 다수 흑인의 권익을 위한 정책을 펼쳤고 등록박람회인 1949 포르토프랭스 엑스포도 개최했는데 개발도상국으로서는 사상 최초다. 그러나 경제정책에 실패하여 결국 흑인 농민계층과 지식인 계층의 지지를 일거에 상실하였고, 50년 헌법을 개정하여 재선을 하려 하자 흑백혼혈인들과 흑인 지식층의 지원을 받은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에스티메를 축출하였다. 에스티메는 1953년에 뉴욕에서 객사하게 된다.그리고 이후 흑인 지식층의 지원을 받는 폴 마글루아르(Paul Eugène Magloire, 1907~2001)의 군부정권이 탄생했다. 이 정권도 마글루아르의 권력욕으로 인해 1956년 일어난 쿠데타로 전복되었다. 1957년 군부의 통제 아래 선거가 실시되어 흑인 다수파를 대표하는 프랑수아 뒤발리에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취임하였다.
그렇게 반세기만에 집권한 유명한 의사 출신[22] '파파독' 프랑수아 뒤발리에(사진에서 왼쪽)는 많은 기대를 받았으나 정작 정신병을 앓으며 완벽히 흑화, 무려 북한이나 이디 아민에 비견되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로 전락하고 만다. 아버지 프랑수아 뒤발리에는 '통통 마쿠트(Tonton Macoutes)'라는 친위대를 이용한 공포 정치와 부두교를 이용한 우상화, 상상을 초월하는 부정선거들로 정권을 연장한 것은 물론이고 직접 정적들을 고문하는 광경을 보면서 흐뭇해할 정도로 잔혹한 인물이었으며, 만 19세의 어린 나이에 권력을 세습받은 아들 장 클로드 뒤발리에(사진에서 오른쪽)는 아이티의 국가 부채보다도 많은 돈을 스위스에 비자금으로 보관할 정도로 부패한 인물이었다.[23] 이 독재 정권은 장 클로드 뒤발리에가 민중 봉기로 쫓겨나는 1986년까지 계속되었다. 당시 아이티 사람들이 뒤발리에 부자를 어느 정도로 증오했냐면, 아들 뒤발리에가 쫓겨난 바로 다음날에 수십명의 통통 마쿠트 대원들이 민중들에게 살해당했으며, 민중들이 아버지 뒤발리에의 무덤에 '뒤발리에는 에이즈 환자'라는 말이 점잖은 편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낙서들을 적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4.3. 아이티 내전
21세기 현시점에는 더 털어봐야 털릴 것도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몰락한 끝에, 결국 UN 주도의 평화유지군이 투입되어서야 어느 정도 안정화되었고, 2017년까지 브라질군이 주축이 된 UN 아이티 안정화 작전(United Nations Stabilisation Mission in Haiti/MINUSTAH)이 계속되었다.워낙 옛부터 국가 막장 테크를 충실하게 탄 덕에 요즘 어린 세대들에게 개판 국가로 더 익숙한 그 베네수엘라보다 더 처참한 지경이 되어 미국 국무부는 아이티를 파탄국가(failed state)로 선언한 지 오래로 2022년 취약국가지수도 120점 만점에 99.7점으로 11위, 아메리카 대륙 국가 중 취약국가지수가 1위인 나라 일 뿐더러[24][25] 거기다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 등 모든 것이 정지되면서 2023년 기준 수도 포르토프랭스와 같이 그 빈자리엔 90%가 여러 갱단이 장악하였는데(#) 설령 시민들에 의해서 갱단들이 정리됐다고 해도 제대로 된 정부 역할을 하지 못하면 무정부 상태 특성상 시민들 속에서 새로운 갱단들이 탄생하며 서로 치고박고 할 여지도 있기 때문에 경찰도 좋은 상황인 것만은 아니다. #
4.3.1. 민주화는 일단 되었으나...
1991년, 좌파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Jean Bertrand Aristide)가 선거로 집권했다. 그러다 반 년 만에 군사 쿠데타에 쫓겨났으나, UN과 미국 지원을 받아 돌아와서 1년 동안 국정을 수행했다.[26] 그 뒤 2002년에도 선거로 집권, 군부를 억누를 목적으로 군을 해체했으며 다국적 기업의 횡포를 견제하고 IMF의 차관 제의를 거부했다. 결국 2004년 반정부 무장 세력의 쿠데타가 일어나[27] 아리스티드는 2년 만에 다시 해외로 쫓겨났다.
설상가상으로 2010년 1월 12일에는 대규모의 지진이 국토를 강타했다. 이 때의 혼란은 극에 달해 지진이 반영된 2011년[28]에는 108.0점으로 5위를 기록하여 아프가니스탄보다도 순위가 높았다. 덕분에 잠시 아이티의 인지도는 올라갔지만, 그 참상도 얼마 안 가 잊혀져 버렸다. 사실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아이티가 그렇게 큰 나라가 아닌데다가 자원이 많은 것도 아닌지라 내전이 벌어져 몇백 만이 죽거나 부상을 당하건 어떻게 되건 국제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한 게 가장 크다.[29] 지진 당시에 뉴스로 알려진 흑인 국가+최빈국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한국에서는 중미가 아니라 아프리카에 있는 국가로 잘못 아는 사람도 은근히 많은 편.
2010년, 인기 가수 출신인 미셀 마르텔리가 농민행동당(Repons Peyizan)을 창당하고 대선에 출마하여 2011년 4월 20일, 제4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2011년 5월 14일, 수도 포르토프랭스 대통령궁 앞 광장에서 국내외 주요 인사 1,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아이티 대통령직에 공식 취임했다.
2016년 11월 20일에 아이티에 있었던 선거에서 집권 여당 민두당[30] 후보인 조브델 모이즈가 당선되었다. # 하지만 여당 후보인 모이즈가 당선되자 반발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
설상가상으로 2016년에는 최대 시속 240km/h[31]의 허리케인 매슈(Matthew)로 공식 수치로만 546명이 사망하고, 실종자 128명, 부상자 439명, 20만 채의 가옥이 파괴되었으며 허리케인으로 직간접적으로 피해를 입은 피해자도 210만 명[32], 재산 피해는 28억 달러에 달하는 엄청난 피해를 남겼다. 당시 아이티 인구가 1071만 명, 아이티 GDP가 140억 달러 미만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사실상 나라 전체가 또다시 박살난 셈이라고 봐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이는 1964년 이후 아이티에 영향을 미친 강력한 태풍이었다고 한다.
2017년 7월 12일에 아이티 정부는 20년 전에 해산된 군대를 재건한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 같은 해인 2017년 9월 경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 국경 지대의 대형 화산이 폭발하여 아이티 동부 주민들의 대피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화산 폭발은 도미니카 공화국에도 본의 아니게 악영향을 주었다.
2018년 초에는 2010년 아이티 지진 당시 옥스팜이라는 구호 단체에서 아이티에서 성매매를 했다는 옥스팜 스캔들이 일어나면서 아이티는 반발했고, 영국과 EU는 재원중단을 검토하는 등 파문이 커지고 있다. #
2018년 7월 8일, 기름값이 오르자 불만을 품은 시민들이 항의데모를 벌였다. # 휘발유값을 1리터에 5달러로 올려버렸는데, 인구의 상당수가 극빈층인 아이티 경제 사정을 감안하자면 차라리 나가 죽으라는 소리인 수준인지라 항의 시위가 대규모로 벌어졌고, 결국 현 총리는 사퇴하게 되었다. #
7월 20일에 국경없는 의사회는 아이티에 세워졌던 산부인과 병원을 폐쇄한다고 밝혔다. #
2018년 10월 6일에 규모 5.9의 지진이 일어나서 최소 11명이 숨졌다. # 안 그래도 8년 전 대지진 복구마저 삽도 제대로 못 뜬 상태인데, 거기서 또 지진이 터졌으니 이제는 국가가 유지되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보일 정도. 그 뒤 2018년 10월 17일에 아이티에서는 베네수엘라가 창설한 석유 원조 프로그램의 자금 유용 스캔들에 항의하는 시위가 발생되었다. # 사실 이 프로그램을 마련한 베네수엘라도 망해버렸단 건 함정이다.
그리고 정부가 부패했다는 주장에 항의하는 시위가 아이티 전역에서 이틀째 계속돼 사실상 모든 활동이 마비되고 2018년 11월 19일에 경찰 1명이 사망하고 외국인 2명을 포함한 3명이 부상당했다. # 2019년 2월 10일에도 반정부시위가 발생되었다. # 게다가 반정부시위 도중에 아이티 남부의 아퀸이란 도시에선 교도소에 수감된 죄수 78명이 탈옥하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
그리고 2019년 2월 18일에 일어난 반정부시위에서 불법 무기를 소지한 혐의로 미국인을 포함한 외국인 7명과 아이티인 1명이 체포되었다. # 하지만 불법 무기를 소지한 혐의를 가진 외국인들은 미국으로 탈출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거기다 9월 중순부터 모이세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격렬해지면서 17명이 숨지고 200명 가까이 다쳤고, 빈민들의 지원도 중단되는 사태까지 발생되었다.(#)
2021년 2월 7일에 아이티 정부가 대통령 암살과 쿠데타 시도를 적발했다며, 야권 성향의 대법관과 경찰 간부 등 20여 명을 체포하자 야권은 불법 체포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 특히 야권 측은 법관을 임시 대통령으로 삼는다고 밝혔다. #
4.3.2. 갱단할거 시대
자세한 내용은 조브넬 모이즈 암살 사건 문서 참고하십시오.모이즈 대통령을 암살한 17명이 대만 대사관에 숨어있다가 체포됐다. #
체포된 용의자들이 대통령 경호를 목적으로 채용된 용병들이라는 증언이 나오면서 실제 대통령을 암살한 무리들은 따로 있다는 증언이 나왔다. 점점 대통령 암살의 진실과 배후 세력은 미궁 속에 빠지고 있다. # 한편 아이티 정권은 대통령 암살 이후 권력 다툼이 심해지고 있다. #
아이티의 클로프 임시 총리는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과의 통화에서 현재 아이티의 경찰력으로는 난국을 헤쳐나가기 힘든 상황이라며 미군 파병을 요청했는데, 바이든 행정부의 경우 혼란에 빠진 상황이다. 현재 바이든 행정부는 미군의 주둔지를 확대하는 것에 부정적이지만, 아이티의 경우 바로 미국 턱 밑에 있어 대규모 난민들이 미국으로 들어올 수도 있고, 중요한 건 역시나 아이티는 현재 미중 패권경쟁의 최전선 역할을 담당하는 대만, 즉 중화민국의 수교국이라는 것이다. 만일 아이티 정부가 대만과의 단교 및 중국 본토와의 수교로 협박을 한다면 대만이 난리칠 게 뻔하니 그야말로 제대로 혼란에 빠진 상황이고, 2020년 제정된 타이완 동맹 보호법에 의거해 아이티는 대만의 수교국이기 때문에 미국 정부가 법안의 내용대로 아이티의 안정을 어느 정도 책임져야 할 의무도 어느 정도 있다. 더구나 대만은 라틴아메리카 몇 나라와 바티칸, 오세아니아의 소국들만 자국 수교국인 상태라 더 절박하기도 하다. 당장 파라과이 같이 중국 쪽으로 붙으려고 하는 나라가 늘고 있는지라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다.
2021년 8월 14일에는 2010년 아이티 지진 보다도 더 큰 대규모의 지진이 국토를 강타했다.
2021년 11월 대선, 총선 예정이었는데, 무기한 연기되는 중이다.#
설상가상으로 아이티는 경제난을 겪고 있다.# 그리고 포르토프랭스의 40%를 갱단이 장악한 것으로 나타났다.# 아이티 내 혼란이 심각해지자 아이티를 떠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유니세프가 아이티에 원유를 긴급 지원했다.#
2022년 1월 31일에서 2월 1일 사이에 발생한 폭우로 홍수가 일어 약 2,500가구가 대피, 3명이 사망했다.
10월 11일부터 시작된 유류비 인상으로 인한 시위가 아이티 전역으로 퍼졌다.# 10월 20일 이후 G9 을 비롯한 갱단의 전쟁과 연료난에 콜레라까지 번지면서 어린이 1,000,000명이 인도적 위기에 시달리는 등 큰 위기를 맞고 있다.# 아이티 정부는 무정부 사태 위기에 빠져 외국군 파견을 정식으로 요청했다.#
2023년 5월 한 갱단이 새벽에 마을을 급습해 약탈하던중 경찰에 의해 일당 몇 명이 체포되자 분노한 주민들이 쏟아져 나와 무장해제당한 갱단을 경찰차 밖으로 끌어내 목에 타이어를 씌우고 불에 태워 죽였다. 경찰들도 이런 주민들을 말리지 못했을 정도. 이 일을 시작으로 시민들도 참을만큼 참았다며 곳곳에서 반격을 하고 있는데 갱단의 주요 간부와 성관계를 가졌던 여성을 끌어내 구타살해 하거나 아예 갱단들의 탄약이 떨어질때까지 도발을 하는식으로 버티고 탄약이 다 소모되면 진입해서 끌어내 처형하는식으로 반격하고 있다. 한 아이티 시민은 "필요한건 칼 100,000개, 갱단들을 단번에 끝장내기 위해서 경찰의 뒤에 있겠다."라며 분노를 참지 않았다. 제아무리 막강한 갱단이라도 식량과 탄약은 한계가 있고 경찰들은 시민들을 말리거나 막을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최소한의 공권력으로 시민들을 지원하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경찰은 자신들도 적극적으로 행동할 것인 만큼 직접 행동하기보다 신고하고 맡겨 달라고 호소했다. 넥레이싱이 벌어진 것도 경찰이 체포에 성공하고 난 뒤였고 시민들의 분노로 인한 반격이 계속될 경우 갱단 또한 보복에 나설 것이며 그러면 유혈사태가 더 심각해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2024년 3월 3일, 아리엘 앙리 총리가 해외 순방을 떠난 사이 갱단들이 수도 포르토프랭스의 교도소를 습격해 4천여명의 죄수들이 탈옥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아이티 정부는 국가비상사태와 야갼통행금지를 선포했으나 갱단들의 행각은 더욱 대범해져서 국가은행과 공항까지 습격하고, 앙리 총리가 퇴진하지 않는다면 대량학살을 저지르겠다고 협박하는 등 막장을 보여주고 있다. 앙리 총리는 현재까지 아이티로 귀국하지 못하고 미국령 푸에르토리코에 머무르고 있는 상태다.
3월 10일 미국과 유럽 대사관, 외교인력이 철수했다. 사실상 갱단이 군벌화하여 정부를 전복한 상황이다. G9 갱의 지미 셰리지에는 앙리 총리의 사임을 요구했다.##
3월 11일, 아리엘 앙리 총리가 사임을 선언했고, 현 야당권을 중심으로 한 과도정부가 수립될 예정이다.
지미 셰리지에의 G9 갱단이 과도 위원회의 지분을 요구하고 있다.# 갱단이 난동을 부리자 이를 막기 위한 자경단의 폭력도 심해지고 있다.#
3월 20일 유엔인도주의업무국이 아이티로 구호품을 보내줬다. 그 와중에 갱단과 자경단의 폭력은 계속되고 있다.#
2023년부터 2024년까지 단 1년 만에 갱단의 폭력의 여파로 6,005명이 숨지고 2023년 한 해에만 313,900명의 피난민이 발생했다는 유엔 보고서가 나왔다. # 참고로 2022년 아이티 인구는 1160만 명도 되지 않는다. 이쯤이면 내전 수순에 들어간 것을 넘어 사실상 아메리카의 소말리아가 된 수준.[34] 심지어 인구 대비 사망자 수로 보면 미얀마 내전보다도 많다.[35] 심지어 2023년 한 해 동안 시리아에서 시리아 내전으로 숨진 사람이 4360명[36]이며(#), 시리아 인구가 아이티 인구의 2배라는 것을 감안하면 현 아이티는 공식적으로만 전쟁 상태가 아닐 뿐 실질적으로는 전쟁 상태라 봐도 무방하다.
2024년 5월 29일, 과도위원회 지명으로 게리 코닐이 아이티 임시 총리로 선출되었다.
아이티의 참상이 유명해지다보니 아이티에서 갱단들이 식인을 저질렀다는 주장도 인터넷에서 많이 돌아다니고 있지만, 미국 국무부, 국경없는 의사회, 휴먼라이츠워치 모두 근거가 없다고 전면 일축했다. #
휴먼라이츠워치와 UN 등의 보고에 따르면 아이티에서는 어린이들이 갱단에 의해 소년병 활동을 강요당하고 있다고 한다. 겨우 8살에 갱단에 가입한 경우도 있었으며, 소년들은 무기와 탄약 사용 훈련을 받은 후 경찰과의 충돌에 투입되고, 심지어 어린 소녀들은 가사 노동을 강요받는 것을 넘어 성노예가 되기도 한다고... 어린이들은 국가가 없는 상황에서 갱단을 그나마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줄 수 있는 장소로 여기기에 갱단에 가담하게 되는데, UN 추산에 따르면 갱단원의 무려 1/3이 어린이라고 한다. 이 정도면 사실상 내전 중인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과 비슷한 상황에 이른 셈. #
2024년 10월 4일 갱단이 포르토프랭스에서 북서쪽으로 100km 떨어진 퐁송드 마을을 공격해 최소 70명(여성 10명, 유아 3명 포함)이 사망하고 3000명이 피난을 떠났는데, 이렇게 2024년 1월부터 9월까지 아이티에서 3661명이 갱단의 폭력으로 사망했고, 이때까지 집을 잃은 사람은 70만 명이 되었다. 또 갱단은 아이티 인구의 1/4에 달하는 270만 명(어린이 50만 명 포함)이 사는 지역, 포르토프랭스의 80%를 장악했다. #
2024년 12월 6일 밤부터 7일까지 모넬 펠릭스라는 갱단 두목이 "부두교의 저주에 걸려 아들이 아프다"며 부두교도들을 겨냥해 마구잡이 살인을 저질러 적어도 184명이 총기와 칼, 마체테 등으로 학살당했으며, 시신은 거리에 훼손된 채 전시되거나 불태워졌다. 희생자 중 127명이 노인이었는데, 노인들이 아들에게 주술을 걸어 아프게 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갱단이 장악한 수도의 범위는 85%로 더 늘어났으며, 유엔 인권 담당자 볼커 터크는 2024년 갱단 폭력으로 인한 사망자가 5000명에 달한다고 밝혔다. 이런 상황 속에서 2024년 6월 미국이 지원하고 케냐가 주도하는 다국적 경찰 병력이 아이티에 배치됐지만 이들은 갱단들을 수도에서 물리치는 것조차 버거운 상황이다. #1 #2
5. 정치
아이티의 정치 정보 | ||
부패인식지수 | 17점 | 2023년, 세계 172위 |
언론자유지수 | 57.38점 | 2023년, 세계 99위 |
민주주의지수 | 2.81점 | 2023년, 세계 129위 |
조브넬 모이즈의 암살, 그로 인한 치안 악화 및 아리엘 앙리의 사임으로 인해 정치는 파탄난 상황. 부패인식지수와 민주주의 지수는 파탄날 대로 파탄났다. 씁쓸하게도 보도관제를 할 정부기관들이 전부 무너졌기에 언론자유지수는 나쁘지 않다. 세계의 자유도 정치적 권리 11점, 시민 자유 19점, 총 30점으로 '부자유'다.[37] 생각보다 민주주의가 높게 평가받은 셈인데, 역설적이게도 국민들을 통제할 정부가 없으니까 이 수준으로나마 건진 격이다.
6. 경제
중앙아메리카 및 카리브해의 경제 | |||||||||||||||||||||||||||||||||||||||||||||||||||||||||||||||||||||||||||||||||||||||||||||||||||||||||||||||||||||||||||||||||||||||||||||||||||||||||||||||||||||||||||||||||||||||||||||||||||||||||||||||||
중앙아메리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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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IMF 통계 기준으로 1인당 GDP는 1,941달러, 195개국 중 150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짐바브웨, 케냐보다 1인당 GDP가 낮은 아메리카의 유일한 최빈국이다. 니카라과(141위, 2,589달러)와 베네수엘라(130위, 3,640달러)보다도 낮은 수치다.[38] 1인당 GDP 자체는 다른 최빈국들보다는 높지만,[39] 그럼에도 1인당 GDP가 아이티의 절반 정도도 안 되는 나라들과 동렬로 취급당한다는 것 자체가 아이티의 경제가 얼마나 작살났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위 문단의 역사만 봐도 알 수 있겠지만 건국 이래로 빚이 많았는데 그것이 이 나라 빈곤의 첫번째 원인이었다. 식량 사정이 매우 나빠 프랑수아 뒤발리에 시대에는 식량 자급률이 80%였지만 미국의 원조 식량이 들어오고 나서부터 농산물 가격이 급락해서, 현재 식량 자급률은 45%대에 불과하며 식량을 원조와 수입에 의존하는 처지다. 특히 아이티에서 경제활동 인구의 2/3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데도 이 모양인것이다.
이런 현상을 '원조의 함정'이라고 부르는데, 원조를 받으면 당장은 기근이 종결되어 좋지만 장기적으로는 식량 가격이 폭락하여 더욱 원조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원래 인구 전체의 필요식량의 20% 정도가 부족하면, 5% 정도는 굶어죽고 40% 정도는 굶어죽지는 않지만, 여성의 경우 임신 출산시 사망률이 무척 높아진다. 따라서 생식활동을 하는 인구 비율이 제한되면서 인구는 유지된다. 문제는 원조물자를 받다보니 인구의 대부분이 생식활동에 참여한다. 따라서 인구가 유지가 아닌 배로 늘게 된다. 결국 더 많은 원조를 받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1960년대에 아이티 인구는 400만명이었지만, 이 당시에 출산율이 5명대를 넘던 시절인지라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였고, 경제발전은 답보 상태에 놓여있었기 때문에 경제 2010년대에는 출산율이 2명대 정도를 기록해서 딱 적당한 수준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산업화가 미비하고 치안은 개판이고 고속도로와 철도가 아예 자국내 1km도 조차 없는등 SOC 인프라도 엉망진창이라 하청 제조업 유치가 제대로 될리가 없다. 그나마 국토에 미개척지라도 있으면 많은 노동력을 바탕으로 개척해나가면 되겠지만 문제가 아이티는 애초에 국토가 작고 플랜테이션으로 빼곡하게 가득 차있는 섬인데다가 인구밀도도 엄청나게 높은 섬이라 개척할 땅이 없다. 그런 상태에서 원조식량으로 인구만 두배 이상 늘었으니 원조가 끊기면 반이상 굶어죽는 건 기정사실이다. 게다가 정부 인사라는 자들은 하나같이 답이 안 나오는 무능력을 자랑하며, 아예 그게 잘못된 줄도 모르는 자들이 대다수를 차지할 정도로 최악이다.[40] 그 결과 전 국민의 80%가 절대빈곤 상태에 처한 절망적인 상태이다.
거기에다 2008년에는 폭풍 4개가 나라를 아예 갈아엎는 바람에 식량 원조도 제대로 받지 못하여 진흙쿠키가 나돌 정도로 식량난이 고조되고 있다. MBC 프로그램이던 W에선 한국인 취재진[41]이 아이티 보건부장관한테 국민들이 진흙 쿠키를 주식으로 먹는다는 사실을 물어보자, "건강에 진흙 쿠키가 유해하다는 증거는 없으며, 앞으로 그런 게 외국인들 눈에 보일 경우 조치를 취하겠다"고 답했다. 그러다가 기생충이 많은 진흙[42]이라는, 초등학생이라도 손쉽게 떠올릴 법한 반박거리를 꺼내어 이야기하자 말문이 막혔는지 바쁘다면서 퇴장해버렸다. 2010년에는 대지진까지 일어나 가뜩이나 빈곤하던 이 나라를 더욱 가난하게 만들었다.
특히 아이티는 이 나라가 속한 북아메리카는 물론 아메리카 전체를 통틀어 가장 경제 수준이 열악한 나라로, 부양력에 비해 인구가 지나치게 늘어나서 삼림마저 모조리 벌목/개간한 탓에 삼림조차 드물며 국토의 황폐화가 가속되고 있다. 현시점에서는 기후 빼면 화성이라고 봐도 무방할 지경이다. 실제 구글어스로 아이티를 보면 왜 화성 취급을 받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 애초에 섬은 농경에는 좋은 환경이 아니지만 아이티가 그나마 해안가에 플랜테이션이 풍부하게 가능했던 것은 배후 삼림이 존재했기 때문인데 목재와 개간지를 구하기 위해 그걸 다 베어버렸으니 그나마 되는 플랜테이션 농장도 가동이 점점 더 어려워질뿐만 아니라 여러문제도 야기되고 있다.
사실 아이티에게 있어 1980대 이전까지만 해도 현지주민들에게 나름대로 보물과 같은 존재이자 살림의 밑천이었던 "크레올", "크리올", "꼬션와"라고 불리는 토종돼지들이 있었는데 미국과 국제기구는 돌림병에 걸린 아이티의 토종돼지를 몰살하고 아이티에 미국 돼지를 들이도록 조언했다. 미국 돼지는 물과 사료 등 사육을 위해 엄청난 비용이 들었지만 아이티의 풍토에 적응하지 못했고, 아이티 농가에 수억달러에 이르는 피해를 주었지만 최근 몇 년 동안 아이티와 프랑스의 농학자들은 아이티의 크리올 돼지와 비슷한 새로운 품종의 돼지를 사육했다. 아이티에 이 돼지들을 다시 살리기 위한 노력이 진행 중이다. 최초의 크리올 돼지는 아이티 시골에서 소수의 개체만 살아남은 것으로 알려졌다. 농업이 황폐화된 아이티에서는 산림 벌채로 숲들도 사라졌고, 2008년에는 식량부족 사태로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번 지진에도 빈민들이 슬럼가의 판자촌에 몰려 살면서 피해가 더욱 커졌다.
1980년 이전 당시 안 그래도 겨우나마 먹고 살려 할 정도였던 아이티 서민들의 생활수준을 야생만도 못한 수준으로 퇴화시킨 원흉으로 현지 사회에 대해 무지한 미국과 국제기구, 민생은 안중에도 없는 부패한 정부, 관리들의 만행이 지적되고 있다.
한국의 경우 원조로 인한 식량자급률 감소를 인구증가(식량소비량 증가)를 통해 다른 산업을 발전시키고, 그 수익으로 해외 식량을 수입하는 방식으로 극복했지만, 아이티는 실패했다.
주요 외화수입원은 의류 산업과 커피 원두 수출로 이 분야에 총 고용인력의 70%가 종사하고 해외에서 일하는 아이티인들의 송금, 그리고 해외원조인데 문제는 이 해외원조의 비중이 전체 대외수입의 과반수를 차지할 정도로 너무 크다는 것이다. 이 탓에 위에 나온 취약국가지수(국가 불안정 지수)의 '외부 의존 및 개입' 지수가 10점 만점에 9.6 밑으로 떨어진 적이 없다. 그나마 받아온 해외원조도 집행이 어떻게 되는지 불투명하며 부패로 인하여 누군가의 뒷주머니로 들어갔을 확률이 매우 높다[43]. 2020년 반정부 시위의 원인 중 하나도 이러한 수십억 달러의 국제 원조자금의 착복논란이었다. 그래서 시위대는 조브넬 모이즈 정권의 퇴진을 외쳤지만# 사실 정권이 바뀌어도 아이티에 딱히 유능하고 깨끗한 정권이 들어설 것이라는 기대는 아무도 하지 않는다.
주요 수출대상국은 미국이다. 국내 유통제품도 70% 이상을 미국에서 수입하고 있다. 미국은 아이티산 섬유제품에 대해 무쿼터·무관세를 적용하고 있으며, 이 정책은 2018년까지 실시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주요 수입품목은 섬유, 의류제품 원자재, 가전제품, 자동차, 플라스틱 제품 등의 공산품, 그리고 곡물, 육류, 야채 등의 식료품이 주를 이룬다. 주요 광물자원으로는 보크사이트, 구리, 금, 대리석 등이 생산되지만, 외국자본이 대다수의 자원을 독점하고 있어 아이티 경제발전에 도움이 안된다.
또한, 물가도 살인적으로 비싼 수준이다. 근로자들의 평균 수입은 적은데 기본적인 생활용품부터 수입해오기 때문에 최빈국답지 않게 물가가 비싸다. 원래 후진국일수록 나라 자체는 가난한데 수도에만 쓸데없이 초호화건물이 늘어선 모습을 보인다. 이는 특권층 등 그 나라의 돈줄을 쥔 1%만이 수도에 몰려 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은 자국의 생산성이 워낙 형편없어 공업 따위는 발전하지도 않아 생필품을 100% 수입에 의존하며, 당연히 이러면 물가는 몇 배로 비쌀 수밖에 없다.
아이티의 물가가 어느정도인가 하면, 그 진흙쿠키가 하나당 30원, 밀가루+기름(마가린)+소금으로 만든 그나마 먹을 수 있는 쿠키가 100원을 좀 넘는데, 들어가는 재료를 생각하면 선진국인 한국 입장에서 봐도 결코 싼 가격이 아니다. 애초에 한국에서 주변에 쉽게 볼 수 있는 불량식품들의 가격이(지금은 좀 올랐지만) 소매상을 통해 구매해도 정말 싼 건 100원인 걸 생각해보자. 아이티의 1인당 GDP는 한국의 1.5%가 조금 넘는다. 더불어 빈부격차는 한국과는 비교가 민망할 수준으로 매우 심각하다. 그나마 먹을 수 있는 밀가루 쿠키는 100원을 좀 넘고, 무기물을 제외한 영양소가 거의 없는 진흙쿠키조차 30원이니 아이티에서 진흙쿠키조차 거의 사치에 가까운 음식인 것이다. 심지어 진흙쿠키의 가격이 현재 150원 가량을 상회한다고 한다.
추가로 물가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하자면, IMF와 세계은행에 따르면 2019년에 아이티의 물가상승률이 무려 20%라고 한다. 그런데 더욱 한심한건 경제성장률이 0.9%밖에 안된다는 사실이다. 거기에 더해 2020년에는 코로나 19로 경제성장률이 -3.7%인데 물가상승률은 25.18%라고 한다. 경제가 고도성장함에 따른 인플레이션은 어쩔 수 없다지만 그것도 아니면서 물가는 허구헌날 천정부지로 치솟기만 하니 정말 생지옥이 따로 없다. 외교부 국가정보
빈부격차가 심각한 수준도 아니고 그냥 빈만 있고 부가 없는 수준이다. 그나마 "라바디"라는 휴양지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긴 한데, 이 지역은 아이티에 속해 있으나 로얄 캐리비안이라는 크루즈사의 사유지라서 관광객들이 아무리 많이 찾아온들 정작 아이티 경제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44] 당연한 말이지만 시골로 내려갈 경우에는 문자 그대로 짐승처럼 사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을 정도.
이러한 상황 덕분에 2010년 비슷한 시기에 지진이 난 칠레는 막상 피해가 적었는데, 아이티는 혼자 무슨 거대괴수라도 습격한 양 박살났다. 칠레는 피해를 금방 복구했으나 이 나라는 10년이 지난 지금도 피해복구는 엄두를 못 내는 판이며, 오히려 2021년에 또다른 지진까지 겹치게 되었다. 또 2019년부터 2022년까지 4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45]
2022년 10월 14일 유엔 세계식량계획(WFP)은 아이티 인구의 거의 절반인 470만여 명이 기아에 직면해 있으며 180만 명 가까이는 식량안보 단계(IPC) 4단계인 '비상' 상태[46]에 처했다고 밝혔다. 뒤이어 WFP는 포르토프랭스 시내 빈민가 시테 솔레이에 사는 주민 약 1만 9천 명의 기아 상태는 '치명적인 수준'이라며 5세 미만 영유아 10만 명가량은 심각한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다고 전했다. #
2023년 7월 UNICEF와 FAO 등이 공동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2020~2022년 기간 영양부족에 시달리는 아이티인이 인구의 45%에 달한다고 하는데, 아이티보다 영양부족 인구 비율이 높은 나라는 마다가스카르(51.0%), 소말리아&중앙아프리카공화국(48.7%), 레소토(46.0%), 북한(45.5%) 이렇게 5개국밖에 없으며, 영양부족 인구 비율이 40%를 넘긴 나라는 이들 6개국이 전부다. pdf 178~191쪽에 2020~2022년 기준 영양실조 인구 비율이 나온다. 그런데 2016년 CIA '더 월드 팩트북' 기준 아이티의 비만율은 22.7%라고 한다.[47] 2012년 기준 아이티의 지니 계수는 0.411로 필리핀보다 높은 수준이다.[48]
7. 외교
자세한 내용은 아이티/외교 문서 참고하십시오.8. 군사
자세한 내용은 아이티군 문서 참고하십시오.9. 문화
부두교와 좀비가 이 나라에서 유래한 것으로도 유명하다.[49] 통계상으로는 대부분의 주민이 가톨릭으로 나오지만, 아이티 주민들 절대다수가 사실상 부두교와 가톨릭을 이중 신앙으로 믿고 있다.과거 아이티가 프랑스 식민지였던 시절 아이티인들은 가톨릭 성화에 나오는 성인들이 누군지 제대로 이해를 못하고[50], 아프리카 토속 신앙의 신들로 생각하고 백인 농장주들 몰래 아프리카 토속 신앙 방식으로 숭배하는 일이 많았다. 이렇게 부두교는 "몰래 가톨릭을 믿는 척하며 실제로는 아프리카에서 원래 자신들이 믿었던 신들을 섬기는" 이중 신앙에서 시작되었다.
현재도 부두교가 가톨릭에 빌붙는 이중신앙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으며, 심지어 캐나다에 난민으로 들어온 아이티인들도 가톨릭과 부두교 이중신앙을 준수하고 있다. 어느 정도인지 몬트리올에서 택시를 탈 때 아이티 출신 기사의 택시를 타면 부두교 부적이 걸려있는 걸 볼 수 있다.
9.1. 언어
사용하는 언어는 프랑스어와 아이티 크레올어. 하지만 프랑스어가 많이 섞인 아이티 크레올어가 주 생활 언어이다. 특히 이 심히 괴이한 프랑스어의 변형 발음은 프랑스어와 비슷한데도, 정작 프랑스인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다.(...)[51] 따라서 교육받은 식자층에서는 프랑스에서 정통 프랑스어를 공부한다. 아이티인이 쓴 것을 보면 예를 들어 봉주르(Bonjour)를 봉주(Bonjou)라고 쓴다.[52] 네덜란드어에서 파생한 아프리칸스어나 영국식 영어와 독일어가 섞인 파푸아뉴기니의 톡 피신과 비슷하다 생각하면 된다. 그러니까 그냥 다른 말이다.그 외 나라가 워낙 엉망이라 타 라틴아메리카 국가에 의존이 불가피해서 스페인어도 자주 쓰인다. 원래부터 도미니카 공화국과 접한 국경에서 쓰이고 있지만, 외국계 기업에 취직을 위해 중요시되고 있고 학교에서도 가르치고 있다.#
당연하겠지만 머리 위에 있고 영향력이 아주 강한 미국, 그리고 카리브에서 짱먹는 영국의 영향으로 영어도 스페인어와 함께 중요시되고 있다.#
10. 사회
나라꼴이 말이 아닌 만큼 평균 수명은 64세로 짧다.그래도 1949년에는 이 나라에서 개발도상국 중 최초로 엑스포를 개최한 적이 있다.
에르타 파스칼트루이요(Ertha Pascal - Trouillot, 1943 ~)라는 여성 대통령이 나온 적이 있다. 비록 선거로 선출된 것이 아닌 반란 때문에 1990년부터 1991년까지 11개월 동안 일시적으로 대통령직 권한을 대행한 것이지만 아이티 최초의 여성 변호사에 법무장관까지 오를 만큼 유능한 인물이었다. 현재는 아이티 백과사전 전기를 저술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아메리카 최악의 최빈국인 만큼 인터넷 보급률이 아메리카 국가 중 유일무이하게 50%를 밑돈다. 아이티의 인터넷 보급률은 2022년 기준 35%다. #
10.1. 치안 문제
폭동, 무장한 갱스터 등 범죄조직들의 납치 사건, 그리고 민생 치안을 해치는 강력범죄들인 강도, 살인, 강간이 자주 발생하는 나라다. 물론 멕시코나 브라질, 베네수엘라, 온두라스, 과테말라, 엘살바도르[53]처럼 뒷세계를 지배하는 거대한 마약 카르텔 형식의 범죄조직 같은게 있는 건 아니다. 그냥 이들은 소규모 범죄집단들이 무장과 단순한 도둑들이나 일반 강도들 조차도 불법무기를 소지했는데, 이를 막을 경찰들의 수는 너무나 모자라고 역량도 아주 형편없어서 수습이 제대로 안되는 것이다. 특히 잦은 부패로 인하여 국제 사회에서 준 돈을 경찰 환경 개선에 투자할 생각은 안하고 오로지 자기 이익만을 위해 쓰며, 2024년 기준으로 부패경찰 지수가 나이지리아 다음이다. 아이티 경찰들은 갱단들을 토벌하려 해도 사정이 나빠서 역으로 갱단에게 패하여 경찰이 살해되고 경찰서가 털려서 경찰의 무기까지 빼앗기는 굴욕을 당하는 상황이다.
어느 정도냐면 최악의 살인율을 자랑하는 온두라스, 베네수엘라 [54] 를 뛰어넘을 정도로 최악이다. 더 충격적인 건 이보다 치안이 나쁘고 살인이 더 일어나는 곳이 소말리아, 예멘,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밖에 없다는 것. 게다가 상술한 네 나라와 엇비슷하다는 얘기도 있다.[55] 너무 치안이 끔찍한 나머지 상술한 것처럼 아이티에서 인구 대비 갱단에 의한 사망자 비율은 미얀마에서 내전 과정에서의 사망자 비율보다 더 심한 수준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감옥의 수용 가능 인원 대비 실제 수감인원 비율만 해도 세계 최고인데, 무려 417%다. 이는 수용인원 1,000명인 감옥에 4,170명이 수감되어 있다는 뜻이다. 물론 감옥이 초과 상태인 국가는 굉장히 흔하지만[56] 아이티의 경우는 교도소의 시설도 매우 열악한데다 과포화가 비정상적으로 높은 수치라 문제가 정말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아이티의 현주소가 얼마나 막장인지는 구글 어스를 통해서도 바로 알 수가 있다. 구글 어스로 수도 포르토프랭스의 중심가 아무데나 골라서 확대해보면 지진이 일어난지 4년 후 찍은 사진인데도 복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서 너저분한 곳이 굉장히 많다. 또한 도로 상황은 아예 신호 체계가 작동하지 않는 것인지 차가 중구난방으로 움직이고 있고, 심지어 차선조차 보이지 않는다. 아프리카, 아메리카에서도 특히 개발이 덜 된 나라들만 고르고 골라서 그 수도를 구글 어스로 살펴봐도 이 정도의 막장성을 보이는 도시는 극히 드물다.[57] 2014~2015년 포르토프랭스 사진. 지진 직후랑 차이가 전혀 없다시피하다. 게다가 7년 동안 콜레라가 기승을 부리고 있고[58] 아이티 국민의 7%가 콜레라에 감염되었다. #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매우 가난해서 돈이 없어서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다. #
2020년에는 몸값 납치가 200% 이상 늘어났다고 할 정도로 치안이 더더욱 엉망이다.
2021년 2월에는 교도소에서 400여명 가량의 갱단원들이 탈옥하는 사태가 벌어져서 치안이 매우 불안정해질 것이라는 경과가 발표됐다.
심지어 2021년 4월 1일에는 예배를 하던 교회를 기관총 무장 강도들이 급습해 온라인 영상으로 목사와 피아니스트 등 4명을 납치하는 일이 벌어졌다. 다들 만우절 쇼로 알았다가 몸값 노리고자 납치한 진짜였는데 다행히도 납치되었던 사람들은 사건 발생 나흘 뒤 무사히 풀려났다. #
2021년 7월, 급기야 아이티의 대통령이 괴한에게, 그것도 집안에서 암살당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현재 아이티에서 가장 강한 갱단은 G9 Fanmi e alye(G9 and Family)갱단으로 수도 포르토프랭스의 9개 갱단의 연합체이다. 아이티를 거의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영향력이 막강한 갱단으로 여기 두목 지미 셰리지에는 사실상 아이티 총리도 무시못할 강력한 실력자로 군림하고 있다.
2024년 갱단이 두목을 구출하기 위해 교도소를 습격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수감자 수천명이 탈옥했다. 총격전으로 인해 10여명 이상이 사망했다.#
2024년 4월, 치안 악화로 한국인 11명이 헬기를 통해서 이웃나라 도미니카공화국으로 철수했다. #
2024년 4월 현재 포르토프랭스 국제공항이 갱단에 의해 폐쇄된 상태이다.
미국과 캐나다에선 이미 여행금지로 지정됐으며, 일본에서도 동월 10일 기준 최고 단계의 경보가 발령된 상태인바 # 아이티의 치안이 개선되려면 수십년은 걸릴 것으로 보인다.
2024년 5월 1일부로 대한민국 외교부에 의해서 여행금지국가로 지정됐는데 이는 아메리카 국가 중 최초라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이다. #
11. 종교
국교가 없는 세속국가이지만 전 식민통치국인 프랑스의 영향으로 기독교가 90% 가량 차지하고 있다. 그 중 개신교가 16%이고, 가톨릭은 거의 80%에 달한다.그러나 미묘한 게,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도 부두교와 관련된 주술을 행하거나, 주술사를 찾거나 관련 비밀결사에 가입되어있는 경우가 많다. 대한민국으로 치면 가톨릭 신자이지만 간소하게나마 무속신앙을 따르거나 제사를 지내는 격이다. 즉, 이에 따르면 아이티 최대의 종교는 시각에 따라서는 기독교가 아니라 부두교로 봐도 될 정도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농담삼아 부두교 드립을 치는 거면 모를까, 아이티 역시도 엄연히 가톨릭 + 일부 개신교의 기독교 위주의 국가다.
한국 가톨릭을 예로 들면, 몇 가지 제한사항만 두고 공식적으로 조상제사를 허용하며, 교리를 무시하고 가볍게 점을 보는 것도 드물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외국인이 한국 가톨릭을 '가톨릭의 탈을 쓴 유교'라거나 무속이라 하는 건 정확하지도 않을 뿐더러, 매우 무례한 것이다.[59]
위에 언급한 교회에 나가는 아이티 사람들 중 부두교 주술을 행하거나 관련 비밀결사에 가입되어 있는 것도 정말 진지하게 하는 것인지 그래도 사회적으로 전통이 깊은 부두교라 다른 종교를 믿더라도 아주 무시하고 배척하기가 어려워 형식상 재미로 이름만 걸어놓고 가입한 것인지 등을 봐야하기 때문이다. 당장 한국에서도 교회 다닌다면서 무당을 찾고 집에서 제사 지내는 사람이 그렇게나 많다. 진짜 독실해서 무당 따위 손절하고 제사를 안 지내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런 나이롱 부류들도 상당수다.
즉 저 아이티 종교인구 중에서 같이 믿더라도 그 중 가톨릭/개신교 등 그리스도교를 더 중요시하는지 부두교를 더 중요시하는지 비율을 따져봐야 한다.[60]
12. 스포츠
같은 섬을 쓰는 도미니카 공화국과는 정반대로 축구가 인기가 있고 야구는 도미니카 공화국과의 국경지대를 제외하면 거의 안 한다. 도미니카 공화국에선 그렇게 많이 검색되는 야구장도 아이티로 옮겨서 찾으면 국경지대에 몇개 있는 수준이다. 다만 MLB에 쓰는 야구공을 이 쪽에서 많이 만들어서 행복한 아이티인의 가설 같은 것은 존재한다. 물론 축구가 야구보다 더 인기가 많은 것과는 별개로 실력은 아메리카 내는 물론 전 세계 기준으로 봐도 약체.12.1. 축구
2013년 1월에 피파 랭킹 38위까지 올라가 사람들이 놀랐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축구를 잘 하는 나라는 아니다. 이조차 역시나 반짝돌풍으로 몇 달 안 가 피파 랭킹이 60 ~ 70위권으로 내려갔으며 2021년 1월 기준 84위다. 그래도 웬만한 아시아 국가들보다 순위가 높다.사실 1970년대에 잘하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북중미 수준에서 잘했다는 것일 뿐이다. 북중미 대륙 챔피언십[61]에서 1973년 자국 대회 우승을 차지하고 1971, 1977년 대회를 준우승한 적이 있으며, 카리브컵 전신인 CFU 챔피언쉽에서 1979년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1974년 서독 월드컵에도 참가했으나 3전 전패하고 탈락했다. 1974년 월드컵에서 당시 1142분 무실점 기록을 이어가던 이탈리아의 디노 조프의 기록을 깬 것도 아이티의 스트라이커 에마뉘엘 사논이다.[62]
2007년에는 트리니다드 토바고에서 개최된 카리브컵에서도 우승을 차지하긴 했지만 이 대회는 중미 대회에서 중하위 나라들이 참가하는 대회이기에 아이티의 우승이 대단한 것도 아니다. 참고로 트리니다드 토바고가 최다 우승 8번이며, 자메이카가 5번 우승했고 축구랑 거리가 먼 쿠바나 마르티니크도 아이티처럼 1번은 우승했던 대회다.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선 일찌감치 예선 탈락했지만 2013년 스페인,[63] 이탈리아와의 평가전에선 각각 1:2, 2:2로 선전했다. 하지만 2013년 7월에 열린 골드컵에선 온두라스, 트리니다드 토바고, 엘살바도르와 맞붙어 1승 2패를 거두며 조 꼴지로 토너먼트에서 탈락했다.
2013년 9월 6일 인천축구전용경기장에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64]와 평가전이 성사되었다. 유럽과 남미 팀들이 여전히 월드컵 예선 진행중이라 대진 상대를 구하기 힘든 상태에서 축구협회는 이란, 쿠웨이트와 평가전을 추진했으나 모두 불발되고 결국 나름 강팀을 상대로 선전을 보인 아이티를 상대로 잡은 듯. 항간에는 축협의 무능을 탓하기도 했지만 같은 시기 일본 역시 대진 상대를 못 구해서 과테말라와 친선전을 가졌다. 결국 아이티는 한국에게 1:4로 패했다.
역시 언어적으로 같은 프랑스에서 아이티 선수들이 여럿 뛰고 있으며 거기서 뛰는 유망주들이 많다. 프랑스 리그에서 활약하고 있는 카옌의 수비수 장 자크 피에르, 낭시의 제프 루이스와 르망의 켈벵스 벨포르 등이 아이티 선수다.
이 외에 월드컵, 대륙간컵, 골드컵 등의 자세한 정보를 알고 싶다면 아이티 축구 국가대표팀 항목 참조. 물론 전적은 아주 형편없고 국제무대에서 어지간하면 얘네는 볼 일도 없다. 오히려 이웃 자메이카 축구 국가대표팀이 월드컵도 나가보고 이래저래 더 강호이다.
13. 관광
히스파니올라 섬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으며, 이중 아이티는 프랑스 쪽의 지배를 주로 받았으므로 관련 유적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특색을 노리기에는 아이티의 상황이 무정부 상태에 가까워 매우 위험하다. 결국 2024년 5월 1일부로 여행금지국가가 되었으며, 여기에 허락 없이 갔다가 발각되면 아이티에서 살아서 돌아온다는 가정 하에 여권법에 의거하여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 원 이하의 벌금 등 형사 처벌과 여권 제한 조치를 받을 수 있다.14. 아이티 출신 인물
독재자 프랑수아 뒤발리에와, 조브넬 모이즈, 장 클로드 뒤발리에, 앙리 1세가 아주 유명하다.삼총사, 몽테크리스토 백작 등을 쓴 알렉상드르 뒤마(아빠)의 친아버지 토마알렉상드르 뒤마가 아이티 섬 출신이다. 뒤마의 친할아버지는 프랑스 출신의 귀족이었고 친할머니는 흑인 몸종이었다. 뒤마의 아버지는 원래대로라면 노예가 됐어야 하나 출생 이후에 부친을 따라 프랑스로 건너가 자유인이 되었고 프랑스군의 첫번째 흑인 장교가 된다. 즉 뒤마(아빠)의 아버지가 아이티 출신의 물라토이고, 뒤마(아빠)는 1/4이 흑인인 셈이다. 결국 뒤마(아빠)의 아들인 춘희를 쓴 뒤마(아들)는 1/8이 흑인이다.
그 와 록 밴드 아케이드 파이어의 멤버인 레진 사샤뉴[65]하고 푸지스의 와이클레프 쟝[66]이 유명하다. 현 세대 미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의 본좌 격 중 한 명인 Mach-Hommy[67]라는 미국/아이티 혼혈 래퍼도 유년 시절을 포르토프랭스에서 보냈다.
스포츠 관련 인물 중 KBO 리그 두산 베어스의 외국인 타자인 호세 미겔 페르난데스는 쿠바를 탈출한 뒤 아이티 국적을 따 해외에서 야구선수 생활을 하고 있다. UFC 라이트헤비금 종합격투기 선수 오빈스 생 프루는 미국계 아이티 국적이다. 수원 KT 소닉붐 소속 농구 선수 캐디 라렌 아이티 국적이다. 축구선수는 레베르톤 피에르, 리셰로 슈프랑거스, 칼렌스 아커스. 프란츠디 피에로등이 있다,
아이티인은 아이티 밖에 상당히 많이 거주하고 있다. 미국에는 1,200,000명, 캐나다에 200,000명, 그리고 도미니카 공화국에는 1,000,000에서 2,000,000 사이의 수가 거주하고 있다. 프랑스에도 90,000명이 거주하며, 바하마에도 80,000명이나 거주한다.
미국에는 아이티인들이 너무 많아서 아이티인들의 이주가 제한되고 있다. 과거 아이티 혁명당시 미국으로 망명한 백인 및 흑백 혼혈층들은 주로 프랑스어권인 루이지애나에 많이 정착했다. 현대의 경제적 난민들은 절반 이상이 바다로 맞닿아 있고 카리브 이민자가 많은 남부 플로리다(마이애미 권역)와 대도시인 뉴욕 - 뉴저지 권역에 자리를 잡고 있고,[68] 그 외에 보스턴이나 북부 플로리다(올랜도,탬파)에도 수만명씩 이주해있다. 대체로 아이티 출신 혹은 아이티계 흑인은 타 미국 흑인과 달리 프랑스식 성명을 써서 금방 구분된다. 유명한 아이티계 미국인으로는 제이슨 데룰로가 있다.
도미니카 공화국에선 주로 사탕수수 농장에서 아이티인들을 써먹는다. 당연히 도미니카인들은 이들을 대놓고 짐승 취급한다. 특히 흑백혼혈 위주인 도미니카 공화국에선 흑인인 아이티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심각하여 아이티 이주 외노자를 대상으로 착취랑 능욕이 난무하여 도미니카에 대한 아이티인들의 감정이 매우 나쁘다.
특이하게 캐나다에도 많은데 퀘벡에 상당수가 거주하고 있으며 레진 샤사뉴와 캐나다의 전 총독이었던 미셸 장(Michaëlle Jean)이 퀘벡 아이티인이다. 아무래도 같은 프랑스 문화권이고 미국에 대한 반감 때문에 차선책으로 캐나다로 많이 이주한 듯.
15. 대중매체
픽션에서는 미국 드라마 히어로즈의 캐릭터 중에는 통칭 헤이션, 즉 아이티인(Haitian)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본명은 불명이고 그냥 이게 이름이다. GTA 시리즈 중 하나인 GTA 바이스 시티에서도 아이티계 갱단이 등장하는데, 돌려 말하지 않고 대놓고 미션 목표에 "아이티인들을 죽여라!"라고 써버려 락스타에게 거대한 고소크리를 안겨주었다.[69] 이 가운데 와이클레프 장은 최근 아이티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했지만 국적상 미국인이라서 불가능하다. 다른 예로 오버워치의 바티스트가 아이티 출신이다.[1] 출처[2] 출처[3] 원래 이원집정부제 국가였으나 정치 혼란 등의 사유로 사실상 무정부 상태다.[4] 조브넬 모이즈 대통령이 암살된 이후인 2022년에는 무려 16계단이 하락했다. 정치 문화나 시민 자유 부문에서는 5-6점대로 비교적 높았으나, 정국 혼란 속에 무정부 상태가 되면서 정부 기능과 선거 과정 및 다원주의 두 가지 부문에서 0.00점을 기록하였다.[5] 아이티 혁명 후 1820년 까지 부두교였다.[6] 외교부 해외안전여행 조브넬 모이즈의 암살과 치안 악화로 인해 출국권고국가였으나, 설상가상으로 대통령 권한대행을 하고 있던 아리엘 앙리 아이티 총리마저 사임해서 이로 인해 치안에 공백이 생겨서 여행금지국가로, 그것도 아메리카 대륙 최초로 지정됐다.[7] 이 외에 아프리카나 중동, 아시아 외 대륙 중에서 전지역이 여행금지로 지정된 국가는 우크라이나로 러시아의 침공으로 인해 여행금지국가로 지정됐다.[8] 고전 라틴어식 발음으로, 프랑스어로는 이스파니올라, 스페인어로는 에스파뇰라다.[9] 1492년 당시 히스파니올라섬 주민의 규모에 대한 추정치는 연구가 진척된 2000년대 지금도 최소 추정치가 10만(Mira Caballos(1997))에서 최대 추정치가 25만~50만(Anderson-Córdova(2017))으로 최소와 최대 차이가 5배나 되니 아직도 합의된게 없다고 봐도 된다. 그래도 최소 추정치가 6만(Verlinden(1973))이고 최대 추정치가 797만 5천(Borah and Cook(1971))으로 최소와 최대 차이가 133배나 되던 1970년대에 비하면 양반이다.[10] 천연두, 수두, 홍역 심지어 그냥 감기 등이었는데 이 중 천연두의 살상력이 가장 화끈했다. 지금은 평범해 보이는 감기도 원주민들은 면역력이 0에 수렴해 대거 폐렴 등 심각한 합병증으로 번져 죽어나갔다. 이런 현상은 19세기에 영국계 미국인들이 서부개척을 하던 시기도 마찬가지라 백인 선교사나 개척자들은 병을 옮기며 돌아다니고 원주민들은 천연두와 홍역으로 대거 쓰러져 나갔다. 그리고 완전히 저항력을 잃은 잔존 원주민 부족들을 사막이나 산 한가운데 원주민 보호구역으로 쫓아냈다.[11] 그래도 카리브 원주민이 아주 DNA가 사라지진 않아서 일부 혼혈은 살아남았다.[12] 이 시기 나폴레옹이 흑인들을 향해 제노사이드를 선언했다거나 유황가스로 학살했다는 설이 나왔다. 다만 정설은 아니다.[13] 본명은 프랑수아도미니크 투생(François-Dominique Toussaint). 루베르튀르는 프랑스어 L'Ouverture에서 유래하여 자신이 직접 붙인 성씨로, '시작'(ouverture. l'은 정관사)을 의미하며 여기서 더 나아가 '개척자'를 뜻한다.[14] 투생은 노예로 태어났지만 혁명 이전에 주인이 그를 풀어줬기 때문에 자유민이었다. 그 이후 프랑스 식민지군에 들어갔고, 자유 흑인들과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교육을 받았다. 여담으로 그를 해방시켜줬던 주인은 투생이 봉기 전에 미리 언질을 줘서 해외로 도피시켰다고 한다.[15] 투생이 프랑스 충성파였던 건 아니고, 당시 식민주의와 노예제가 가장 극렬한 곳이 카리브 해였다. 그런 상황에서 아이티가 프랑스와 완전히 연을 끊고 독립했다간 영국 등 다른 식민 제국들이 프랑스와 다를 바 없는 간섭을 펼칠 수도 있었다.[16] 이후 미국이 괴뢰국을 이용한 농간으로 멕시코까지 침략하고 멕시코인들을 학살하며 엄청난 영토를 확보하여 대자원을 확보하고 경제 최강국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17] (남)아이티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자 앙리 크리스토프의 라이벌이었던 알렉상드르 페티옹은 1818년에 사망했고, 그의 유언에 따라 부아예가 대통령직을 승계한 상태였다.[18] 볼리바르는 페티옹의 남부 정권에게 병력을 지원받았다.[19] 아이티 국립은행이라는 이름이지만 프랑스 은행들의 공동투자로 설립되었으며 본사도 파리에 있었다.[20] 당시 미국 대통령은 우드로 윌슨이었다. 미국은 멕시코 혁명 간섭과 아이티 침공 등을 마무리한 뒤에야 1차 대전에 참전했다.[21] 당시 미국은 짐 크로우 법에 따른 극도로 인종차별주의 국가였고 한 방울 규칙에 따라 혼혈도 흑인 취급하는 나라였다. 즉 아무리 혼혈인이 자기가 잘났다 해도 미국 입장에선 순혈이건 혼혈이건 그게 그거였던 것.[22] 아이티 내에서는 장기려 박사나 슈바이처에 비견되던 위인이었다.[23] 진짜 이쯤 되면 카리브판 김일성, 알아사드이다. 적어도 타 라틴아메리카 국가 독재자들도 소모사 일가(이쪽은 북한보다 먼저 3대 세습을 실현했다.) 정도를 제외하면 세습 따위는 안 했다.[24] 참고로 2022년 시점에 아메리카 대륙에서 취약국가지수 2위인 나라는 베네수엘라로, 91.6점으로 26등을 차지했다.[25] 참고로 아이티는 취약국가지수 10위 안에 들어간 적이 2005, 2006, 2011, 2012, 2013, 2014, 2016, 2023년, 2024년, 이렇게 총 9번이나 있으며, 최고 기록은 2010년 아이티 대지진 후인 2011년에 기록된 108.0점으로, 5위를 기록했다. 2011년 순위에서 아이티 위에는 소말리아, 차드, 수단 공화국, 콩고민주공화국(1~4위순) 4개국밖에 없었으며, 보면 알 수 있듯 내전에 시달리는 최악의 파탄국가들이다. 심지어 아프가니스탄이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했던 게 6위(2010, 2012, 2023)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26] 사실 쿠데타 배후가 미국의 CIA라는 건 세상이 다 아는 공연한 비밀이었다.[27] 상당수는 바로 그 해체된 국군 출신들이었고 이후 이들에 의해 군이 재건되었다.[28] 왜 2010년이 아니냐 하면, 2010년에 '일어난' 지진이 2011년 지수에 '반영된' 것이기 때문이다. 원래 큰 일이 있으면 그 다음 해에 지표가 급속히 나빠진다.[29] 실제로 르완다 학살마저 한창 진행 중일 때에는 학살 자체보다는 난민 문제 위주로 보도되던 판이다.[30] 민주당의 오기가 아닌 대머리를 뜻하는 그 민두다.[31] 포르토프랭스에서 허리케인 속력은 97km/h였다.[32] 인도주의적 지원이 필요한 사람은 140만 명이었다.[33] 스페인어는 이웃나라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쓰고, 영어는 잘 알다시피 머리 위 미국에서 쓰며, 아이티에서는 둘 다 중요한 외국어이지만 공용어는 아니고 통용되는 정도 수준이다. 아이티 국민들 중에서 수도 포르토프랭스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영어나 스페인어를 어설프게나마 구사하는 사람들이 좀 있다.[34] 소말리아도 무정부 상태 하의 내전으로 유명한 나라다.[35] 게다가 미얀마보다 더 막장인 게 미얀마 내전은 2021년부터 3년간 쌓인 수치가 반영된 거지만 아이티 내전은 고작 1년간 쌓인 수치가 반영된 건데도 이 모양이다.[36] 민간인 1889명 포함[37] 2023년까지는 부분 자유였다.[38] 하지만 니카라과는 그래도 치안과 정치, 사회는 아이티에 비교하면 훨씬 좋은 수준이며, 베네수엘라도 왕년에는 나름대로 잘나갔던 나라라서 1가구 1자동차를 보유할 정도는 되기때문에 아이티보다는 상황이 훨씬 낫다. 베네수엘라의 경우 향후 전세계 경기 변동에 의해 얼마든지 바닥에서 치고 올라올 여지가 충분하다는 점은 덤.[39] 동남아시아 하위권 빈곤국인 캄보디아(이쪽은 확실히 최빈국에서 벗어난 상황이다)와 라오스, 2022년 경제가 완전히 박살난 파키스탄, 오세아니아 최빈국인 키리바시보다는 높다.[40] 이 때문에 아이티에서는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과 불만이 매우 높다.[41] 이들이 직접 파는 진흙 쿠키를 사먹어봤는데 먹는 순간 흙이 씹혀서 도저히 더 이상 삼키지도, 씹지도 못하고 뱉어버렸다. 재료는 진흙 절반에 기름 약간, 밀가루 약간, 소금 약간. 이 정도로 넣지만 그마저도 넣지 못한 것들 또한 수두룩하다. 주성분이 흙이다 보니 구우면 그릇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땅바닥에 반죽을 펼쳐서 말리는 게 조리과정의 전부이며 그래서 종종 식중독의 원인이 되곤 한다. 가격은 1개당 한국돈으로 30원 정도. 그냥 밀가루와 기름, 소금만 넣어 구운 건 100원이 넘는데 이건 맛이 없다고 해도 최소한 병 걸릴 걱정 없이 먹을 수는 있었다.[42] 사실 흙을 빵에 넣는다든지 양을 속인 건 과거 유럽에서도 있었는데 주로 흉년 때 이랬다고 한다. 펄 벅의 대지에서도 흉년 속에 아이들이 굶주림에 못이겨 흙을 퍼먹는 게 나오며 우크라이나 대기근 때도 아이들이 이러는 것을 목격한 사례가 있다. 그래도 다들 오래 전 이야기인데 아이티는 이것이 현재진행형이라는 게 문제다.[43] 사실 아이티의 부패는 뒤발리에 부자의 집권 이전에도 극심했는데, 그 심각성을 알려주는 일화가 하나 전해진다. 1937년에 도미니카 공화국의 대통령 라파엘 트루히요의 명령 하에 도미니카군이 아이티 국경 인근 지역인 시바오(Cibao)에 살던 1만 2천여명의 아이티인을 학살하는 일이 일어나자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 정부가 합의를 맺어 학살 생존자들에게 1인당 30달러(2023년 환율로 약 640달러)의 배상금을 지불할 예정이었는데, 아이티의 관료들은 이 배상금을 거의 모두 빼돌리고는 생존자들에게 배상금이라고 1인당 2센트를 지급했다. 이는 2023년 환율로 환산해도 처참한 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500원짜리 동전 하나 던져준 꼴이다.[44] 다른 나라 같으면 해외 여행을 왔는데 도시 하나만 들렀다 가기는 아깝기 때문에 이런 외국 자본의 사유지도 일단 관광객을 끌어들인 후 주변 도시로 퍼뜨리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지만, 이 나라는 여기 아니면 가서 할 것도 없을 정도로 인프라가 전무하기 때문에 대부분 관광객은 가까운 미국에서 이 도시만 방문하고 도로 돌아가는 미국인들이다. 따라서 국부에는 보탬이 전혀 안된다.[45] 2020년(-3.3%)을 제외하면 -1%대 성장이었다.[46] 유엔은 식량 위기의 심각성 정도에 따라 '정상(Minimal)-경고(Stressed)-위기(Crisis)-비상(Emergency)-기근(Famine)' 등 5단계로 분류하고 있으며 3단계 이상을 '급성 식량 위기'(acute food insecurity)로 본다.[47] 이는 룩셈부르크, 독일, 핀란드, 스웨덴, 프랑스 같은 유럽 선진국들보다도 높은 수치다.[48] 허나 처참한 아이티 현실을 잘 보여주면서도 의외로 그만한 수준은 아니다. 막장인 나라꼴을 보면 빈부격차가 극단적이어야 하지만 0,4에서 0.5 구간은 그저 소득격차가 상당히 크다 수준으로 0.5대인 남미, 북한보다도 낮다. 그러나 동시에 아이티 같은 나라에서 겨우 0.4대라는 점에서 그만큼 부자가 적음을 알 수 있다. 아이티의 경우는 애초에 부 자체가 사실상 없다시피한 수준이라 빈부격차가 다른 후진국들마냥 그렇게 심화되지 않았다는 뜻. 비만율은 미국, 나우루마냥 운동도 못하고 정크푸드나 먹게 된 사람들이 많을 수 있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다.[49] 부두교는 서아프리카의 토고, 베냉 지역에서 유래했고 아이티에 해당 지역의 아프리카 노예들이 끌려오며 부두교가 유입된 것이다.[50] 사실 가르쳐줬어야 이해를 한단 말이 맞는게 프랑스인들은 기독교를 전한다고 말만 그렇지 실제로 제대로 성경을 가르친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나온게 다호메이 왕국의 만신전과 기독교, 타이노 인디언의 원시종교가 짬뽕된 부두교였다.[51] 이보다는 훨씬 덜하지만, 스위스의 프랑스어권(제네바 등)에서 쓰는 프랑스어도 프랑스 사람이 들으면 억양이 전혀 달라서 굉장히 생경하게 들린다고 한다.[52] 사실 Bonjour를 한국식으로 읽은 것이 봉주르이고 프랑스 발음을 들어보면 봉주에 더 가깝다.[53] 다만 엘살바도르의 경우에는 최근 들어서 나이브 부켈레의 집권 이후 강력한 단속으로 치안이 개선되어서 살인사건이 한번도 벌어지지 않는 날이 계속 나오고 있고, 미국의 살인률이 엘살바도르의 살인률보다 높게 나오는(...) 기상천외한 기록까지 세웠을 정도로 안정된 편이다.[54] 과거에는 엘살바도르도 이에 해당됐으나 나이브 부켈레 대통령의 강력한 치안 안정화 정책으로 이제는 미국보다도 살인율이 낮아질 정도로 치안이 굉장히 좋아졌다.[55] 심지어 시리아는 치안이 서서히 나아지는 실정이라 실질적으로 보면 시리아보다도 나쁜 수준이다. 실제로 상술했듯 2023년 기준 시리아에서 죽은 사람보다 아이티에서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56] 예를 들자면 대한민국만 해도 2020년대 이전까지 감옥이 포화 상태를 넘어 정원보다 6% 가량이 더 많았었다. 하지만 2010년대 후반부터 새 교도소들도 출범하고 수감자도 아주 조금 줄기는 줄어들어 현재는 101 ~ 102%대로, 1 ~ 2% 가량만 더 많은 상황이며, 정부도 99%를 목표로 새 교도소들도 공사하고 있다. 미국은 수백년짜리 형량을 밥먹듯 때리는 국가답게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수감자를 가지고 있어 이로 인해 교도소 내부에서 발생하는 범죄 또한 심각해 골치가 아프다. 그래도 현재의 미국은 포화상태는 아니고 2인1실 위주이다. 부시정권말 근처였던 2008 ~ 2010년 사이에는 포화상태였는데, 오바마 정권부터 가석방 늘리기, 징역형 가능성이 낮고 벌금형 가능성이 있는 경범죄자 구속 수사 비율 감소, 사형선고 확정자의 사형전 구속 기간 단축(빠른 사형 집행) 등 수감자 줄이기 정책을 바이든 정권까지 이어가면서 수감자가 많이 줄었기 때문이다.[57] 아무리 가난한 나라라고 해도(심지어 그 소말리아, 부룬디마저!) 최소한 정부가 위치해 있는 수도만큼은 도로와 철도도 깔려있고 고층건물들도 버젓이 세워져 있는 등 나라 체계만큼은 그나마 잘잡혀있다. 당장 평양도 외관만큼은 그럴싸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58] 상하수도 체계가 개판이라는 뜻이다. 콜레라는 수인성 전염병이기 때문에 상하수도가 엉망이면 의료체계 하나만으로는 잡기가 어렵다.[59] 특히 라틴아메리카나 필리핀 등 재3세계 가톨릭에 대해서 유난히 이 잣대를 엄격히 들이대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지양하야 할 태도이다. 한국 가톨릭의 조상제사나 멕시코 가톨릭의 망자의 날처럼 지역 교도권이 공적으로 인정한 것은 그것이 아무리 외국인 눈에 괴이하게 보여도 엄연히 가톨릭적인 것이다. 그리고 지역 교도권이 인정하지 않은 것(예: 점술)은 신자들의 사적인 일탈일 뿐이다.[60] 단적으로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자기 종교는 기독교라고 하는 사람이 재미삼아 한번쯤 사주팔자나 타로 점 같은 것들을 보는 경우가 있고, 기독교인이 조상 제사를 지내는 경우도 종종 보인다. 아이티인들이 기독교 교회에 다니면서 부두교도 신경쓰는 이유도 이런 이유에서일 가능성이 있고 자세한 것을 알기 위해선 더 정확한 조사가 필요하다.[61] CONCACAF Championship, 골드컵의 전신이다.[62] 이 골과 역시 사논이 아르헨티나 전에서 기록한 한 골이 아이티가 월드컵에서 기록한 골의 전부이다. 다시 말해 사논은 아이티에서 유일하게 월드컵에서 득점을 기록한 선수였다.[63] 대결 이유가 재미있는 것이 컨페드컵에서 같은 조의 타히티와 대결하게 되자, 약팀을 상대하는 방법을 익히기 위해 대진을 추진했다고 한다.[64] 당시는 홍명보호였다.[65] 가족이 아이티인이었는데, 뒤발리에의 폭압 때문에 캐나다로 망명했다고 한다. 아케이드 파이어의 1집에 수록된 'Haiti'는 이를 다룬 곡이다. "내 태어나지 않은 사촌들은 한밤중에 뒤발리에에게 사냥당했다" 등의 가사로 아이티의 독재를 비판한다.[66] 아이티 난민이며 미국 흑인들에게 차별받은 경험이 주요한 음악적 원천이 됐다고 한다.[67] 아무도 본명을 모를 정도의 신비주의 컨셉으로 잘 알려졌는데, 얼굴을 아이티의 국기로 가리고 활동할 정도로 아이티인 정체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지구상 억압이 된 모두를 위한 깃발이라며 매우 자랑스러워 한다. 아이티의 현 상황을 생각하면... 크흡...[68] 마이애미와 뉴욕 브루클린에는 아예 지역 이름이 '리틀 아이티'인 곳이 있다. 특히 마이애미의 리틀 아이티는 인구가 3만명에 달한다.[69] 이 이후로 비디오 게임에선 (실존하는) 특정 국민이나 세력을 죽이라는 말을 단 한마디도 넣지 않게 된다. 제일 쉬운 예는 모던 워페어 2의 No Russi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