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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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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무제 석도안 염민 장건 상앙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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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초대 황제
문제 | 文帝
파일:Sui_Wendi_Tang.jpg
출생 541년 7월 21일
서위 장안 빙익군 반야사
(現 산시성 시안시)
즉위 581년 3월 4일
북주 장안 황궁 임광전
(現 산시성 시안시)
사망 604년 8월 13일 (향년 63세)
보계 인수궁
(現 산시성 바오지시 린유현)
능묘 태릉(泰陵)
재위기간 북주의 수왕(隨王)
581년 1월 3일 ~ 581년 3월 4일
초대 황제
581년 3월 4일 ~ 604년 8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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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C4B3B><colcolor=#ece5b6> 성씨 보륙여(普六茹) → 양(楊)
견(堅)
부모 부황 태조
모후 원명황후
형제자매 5남 3녀 중 장남
배우자 문헌황후
자녀 5남 4녀
종교 불교
신장 189cm[1]
아명 나라연(那羅延)
작호 수국공(隨國公) → 수왕(隨王)
묘호 고조(高祖)
시호 문황제(文皇帝)
연호 개황(開皇, 581년 ~ 600년)
인수(仁壽, 601년 ~ 604년)
}}}}}}}}} ||
1. 개요2. 생애
2.1. 집권 전2.2. 중국의 분열기를 종결짓다2.3. 후대 왕조들에게 길이 영향을 미친 정치 능력2.4. 관롱집단 문제2.5. 고구려-수 전쟁2.6. 말년과 붕어2.7. 사후
3. 평가4. 가족 관계5. 기타6. 대중매체에서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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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external/korean.cri.cn/dab009a69a1ea2da9152ee0c.jpg
카롤루스 대제가 이뤄낸 통일 유럽은 그의 사후 다시금 분열되었으나, 수문제가 이뤄낸 통일 중국은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다.[2]
마이클 하트 著, 《세계사를 바꾼 사람들: 랭킹 100》 中

남북조시대 말기 북주권신이자 수나라의 초대 황제.

묘호는 고조(高祖), 시호는 문황제(文皇帝), 휘는 양견(楊堅)이다.

360여 년 가까이 지속된 위진남북조시대라는 난세를 종식시키고 중국을 통일했으며, 개황성세(開皇盛世)라는 태평성대를 백성들에게 안겨준 성군이었다. 그러나 자식 농사와 후계자 선정을 처참히 실패하여 양견의 제국은 통일 후 40년도 안되어 멸망한다.[3]

2. 생애

2.1. 집권 전

양견은 홍농의 화음 출신으로 수국공 양충(楊忠)[4]과 여씨(呂氏)[5]장남으로 태어났다.

홍농 양씨주나라 대부터 이어진 한족의 명문가[6]로 후대의 기록에서 양견의 집안은 양진의 후손을 자칭했다. 그러나 이것이 문자 그대로 사실일 가능성은 낮다. 선비족 탁발씨가 건국한 북위의 고조 효문제가 지배자인 선비족들의 성씨를 한족 성씨로 바꾸는 과정이 있었고, 이 영향으로 훗날 양견의 아버지인 양충이 한족 성씨인 양씨를 하사받았다. 즉 북위가 한족 땅을 정복하면서 나타난 8주국 선비족 가문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또 하나의 성씨는 보륙여씨(普六茹氏)인데 양충이 서위의 마지막 황제인 공제로부터 하사받은 성이었다.

아버지 양충은 독고신의 부하로 독고신과 양충은 서위의 실권자였던 우문태에게 의지하던 상태였다. 양충은 우문태의 아들인 효민제 우문각이 원씨(탁발씨)의 서위를 멸망시키고 북주를 세울 때 여러 차례 공훈을 쌓아서, 북주 정권에서 공훈을 쌓은 관리 가운데 가장 높은 칭호인 '주국대장군'의 직위에 있었으며 '수국공'에 봉해졌고 재상의 직책이라고 할 수 있는 '대전의'를 맡아 제국의 군정을 장악할 수 있었다.

양견은 부친 양충을 이은 수국공으로서 두각을 드러냈다. 그는 아버지의 공훈 덕분에 다양한 관직에 앉을 수가 있었다. 한번은 서위의 권신인 우문태가 어린 양견을 보고
"이 아이의 골격과 풍채는 세상 사람과 같지 않다."
라며 탄식했다고 한다.

그렇게 양견은 아버지 양충 덕분에 관직이 계속 높아졌고 그런 양견에게 위협을 느낀 북주의 명제 우문육은 관상가 조소에게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라고 지시했는데 그는 양견이 보통 인물이 아님을 알고, 그에게 충성하기 위하여 일부러 명제 우문육에게 양견은 대장군 감에 불과한 인물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양견에게는
"공은 천하의 황제가 될 사람이오, 하지만 사람들을 많이 죽이고 난 뒤에야 비로소 천하가 안정될 것이니, 부디 내 말을 기억하시오."
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한고제 유방처럼 소위 '융준용안'의 풍모였던 것 같다.

이후 양견의 장래가 유망하다고 생각한 독고신은 양견의 나이 16세 때 자신의 딸 독고가라를 시집보냈다. 선비족의 대귀족인 독고신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 양견은 확고한 정치적 입지를 다질 수 있었고, 젊어서부터 양씨 가문과 독고씨 가문의 강력한 후원을 받고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거기다가 573년 무제 우문옹은 양견의 장녀 양여화를 자신의 아들이자 훗날 북주의 선제가 되는 태자 우문윤의 비로 삼았으므로 양견의 정치적 기반은 더욱 확고해졌으며 '표기대장군'과 '대흥군공' 등의 벼슬도 받아 정치적 실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성공은 다른 사람들에겐 위협으로 다가왔기에 그를 시기하고 암살하려고 시도한 사람도 있었다. 어쨌든 양견은 그 뒤에도 군대를 이끌며 북제의 군대를 격파하여 '주국대장군'으로 승진했다.

선제 우문윤이 제위에 오르자 두각을 드러내던 양견은 실권자로 부상하여, 사위인 선제가 순행을 나갈 때면 언제나 양견에게 도성을 지키도록 했다. 선제는 엄격하고 잔혹한 법으로 백성을 다스렸지만, 양견은 백성에게 어진 정치를 베풀어 인심을 얻었기에 점차 장인인 양견에게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으나 나이가 어리고 무능했으며 방탕한 생활을 하여 주변에 자신을 위하는 인재가 존재하지 않았고 때문에 양견을 제거할 수 없었다.

이 시기 선제 우문윤의 황후들이 서로 황제의 총애를 차지하기 위하여 서로 이간질하며 싸우고 있었는데, 그러던 중 양견의 딸인 양황후의 질투에 분노한 선제가 화가 나서 라며 격노했다. 그러고는 내시에게 명령하여 궁궐에 살수들을 매복시킨 뒤, 살수들에게
"만약 양견이 조금이라도 무례한 모습을 보이면 내가 그를 죽이라고 명령할 테니 그때 양견을 죽여라!"
라고 명령했다. 그후 장인인 양견을 궁궐로 불러서 정사를 논의했는데, 양견은 이미 죽을 고비를 많이 넘겼기 때문에 사위인 선제의 뜻을 알아차리고, 화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기 때문에, 선제가 아무리 자극을 하고 무례하게 굴어도 표정 변화조차 없어 죽일 기회를 찾지 못했다.

그렇게 북주에서 봉직하며 살던 중 선제가 579년에 붕어하고 양견의 외손자뻘인 어린 정제 우문천이 즉위했다. 보통 우문천이 양견의 외손자로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지만 친 외손자가 아니다. 물론 양견이 선제 우문윤의 장인인 것은 사실이나 선제는 황후가 4명이었다. 정제는 선제의 황후 중 한 명이었던 천대황후 주씨의 아들로서 양견의 딸인 천원대황후 양씨의 소생이 아니었다. 훗날 황태후 양씨는 양견이 선양을 받고 수나라의 황제로 등극한 뒤 졸지에 황태후에서 공주로 신분이 변하고 말았는데, 이러한 케이스의 또 다른 인물로 신나라의 가황제 왕망의 딸이자 전한 평제의 황후였던 황황실주 왕씨가 있다.

어쨌거나 정제 우문천은 나이가 고작 8살 정도에 불과하여 제대로 국정을 이끌 수가 없었고, 결국 많은 신하들의 동의하에 외조부 '격'인 양견이 조정의 정치를 관장하고 어린 정제를 보좌하며 구석(九錫)을 하사받은 후, 수왕(隨王)이자 승상, 섭정으로서 북주 제국의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당시 조정에는 선제의 동생인 우문찬이 상당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양견은 그에게
"당신이 앞으로 황제가 되실 분이시니 당분간 나랏일에 신경쓰실 것이 아니라 집에서 소식을 기다리면 된다."
고 안심시켰다. 그 다음으로 양견은 지방에 있는 우문씨의 다섯 왕들을 정제의 조서를 위조하여 궁궐로 유인하는 데 성공했고, 즉시 그들의 병권과 인신을 빼앗았다. 이에 이들은 우문씨가 세운 나라의 어린 황제가 양견에게 조종당하는 것을 그냥 보고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그를 암살하기로 했다.

이들 중 한 명인 조왕 우문초는 양견을 자신의 왕부로 초대하여 술을 마실 때 죽일 계획을 세웠다. 조왕의 요청에 응한 양견은 양홍과 원주 등의 측근들을 거느리고 그의 저택으로 갔다, 양견은 조왕이 혹시라도 술에 독을 탈까 봐 마실 술을 직접 들고 갔다. 양견이 저택에 도착하자 조왕은 아들에게
"네가 술안주로 오이를 가지고 들어와라, 내가 칼로 오이를 깎는 척 하면서 양견을 찔러 죽이겠다."
라고 은밀히 말했다. 조왕은 양견을 내실로 안내할 때 두 사람만이 허심탄회하게 술을 마시고 싶다는 명분으로 그가 데리고 온 사람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다만 양견은 양홍과 원주와 같은 최측근만 내실 문 밖에서 대기하게 했다.

양견과 조왕 우문초가 술을 마시며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할 때, 조왕은 계속 칼로 오이를 깎아서 양견에게 먹였고, 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자 조왕은 오이를 먹이는 틈을 타서 양견을 찔러 죽일 기회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원주가 문을 열고 내실로 뛰어들어와서
"승상부에 급히 처리해야 할 공무가 많아서 지금 빨리 승상부로 가야 합니다."
라며 양견을 데리고 나가려고 했다. 그러자 조왕은 원주에게 화를 내면서
"나와 승상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어느 놈이 감히 나서느냐? 당장 물러가라!"
라며 가지 못하게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원주는 칼을 쥔 채 조왕을 노려보며 양견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조왕은 다른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서 원주에게 술을 조금 나눠주고는 거짓으로 구토하는 척을 하면서 후원의 누각으로 갔으나 조왕이 뭔가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생각한 원주는 조왕을 따라갔고, 그를 부축하여 내실로 돌아왔다. 그러자 조왕은 원주를 내쫓기 위해 물을 가져오라 했지만 원주는 듣지 않았다.

때마침 등왕 우문유가 조왕의 왕부에 도착했고, 양견이 그를 맞이하러 내실에서 나왔을 때 원주가 양견에게 귀엣말로
"일이 이상하게 돌아갑니다. 만약 저들이 먼저 선수를 친다면 큰일을 그르치고 말 것입니다. 저는 죽어도 괜찮으니 어서 떠나시지요."
라며 재촉하여, 양견은 내실에 돌아온 후에 바쁜 일이 있다며 측근 양홍과 함께 떠났다. 그러자 조왕이 양견을 막기 위해서 밖으로 나오려고 했으나 원주가 몸으로 문을 가로막아서 그를 나오지 못하게 했고, 그렇게 암살 시도는 끝이 났다. 마치 옛날 《초한지》의 홍문연처럼 원주는 기지를 발휘하여 적진 한가운데에서 목숨이 위험했던 주군 양견을 살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 뒤에 양견은 조왕 우문초와 등왕 우문유에게 반역죄를 뒤집어 씌웠고, 나머지 우문씨의 세 왕도 차례로 제거해 북주의 우문씨 황족과 지방의 세력[7]을 완전히 제압했다. 사실 양견은 자신의 손자뻘이었던 정제를 폐위시키는 것을 주저했다고 한다. 그러자 아내 독고가라가 양견에게 라는 밀서를 보내서 황제가 되는 것을 결심하게 했고, 이에 양견은 마음을 정하여 어린 정제를 압박했다. 결국 이듬해 옥좌를 지킬 힘이 없었던 정제는 제위를 선양한다는 조서를 다음과 같이 내렸다.
"옛날에 임금이 임금에게, 한나라 헌제위나라 원제가 황위를 선양했듯이, 짐도 천하의 안정을 위해 선양하노라."
양견은 많은 찬탈자들이 그랬듯이 정제의 선양을 예의상 세 번 정도 거절하고 난 후 황제의 옥좌에 올랐다. 양견은 수왕(隨王)이었지만 '수(隨)'의 '책받침변(辶)'이 갑자기 가다가 멈춘다는 불길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책받침변(辶)'을 빼고 '수(隋)' 자를 새로 만들어 국호로 정했고, 연호를 개황(開皇)이라고 했다.[8]

황제가 된 양견은 앞서 관상가 조소가 "사람들을 많이 죽이고 난 뒤에야 비로소 천하가 안정될 것"이라 말했듯, 자기에게 양위한 정제는 물론이고 그의 일족인 우문씨를 다 죽여버리며 잔혹한 면모를 보였다.

2.2. 중국의 분열기를 종결짓다

양견은 수나라를 건국한 이후, 장안으로 도읍을 정했다. 원래 문제는 낙양을 수도로 삼으려고 했으나, 서방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장안을 수도로 삼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정적인 군벌들과 북주 근왕 세력의 저항을 받았으나 문제는 이들을 진압하면서 정제 우문천을 비롯한 우문씨 황족을 모두 주살했다. 북방의 돌궐이 자주 침입하자 장성을 세운 뒤에 성 수십 곳을 쌓아서 장성 이남으로 넘어오지 못하게 했고, 이후 화친을 맺어 북방을 안정시켰다.

583년에는 요서 일대에서 저항하던 북제의 잔당인 고보녕 세력을 멸망시켰다.

이후 혈연으로 맺어진 귀족들의 저항과 반감을 극복하고자 남벌을 진행하여 개황 7년(587년)에 소씨의 후량을 공격하여 멸망시켰고, 589년에는 진나라를 공격했다. 당시 진나라의 황제인 진숙보는 사치와 방종에 빠졌고, 간신들의 이야기에만 귀기울여서 나라가 크게 피폐해져 국가 막장 테크를 타고 있었는데 문제 양견은 차남 양광에게 군사를 주어 진나라를 쳐서 없애고 마침내 오래도록 분열했던 중국을 통일했다.

2.3. 후대 왕조들에게 길이 영향을 미친 정치 능력

수문제가 귀족들의 강력한 반발을 억누르고 저마다 토지를 지닌 소규모 자작농을 대규모로 늘리며 삼장제균전제를 확립한 것은 지대한 업적으로, 수문제가 확립한 이런 토지 정책은 중국의 마지막 왕조였던 청나라 시기까지 이어진 통일 왕조들이 토지 정책의 기본적인 틀로 삼았다.

또한 사치를 줄이고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세금을 감면시켜 주었고, 어떤 해에는 아예 세금을 걷지도 않는 행보도 보였다. 현대 국가에서 이렇게 하려면 석유천연가스 같은 자원들이 왕창 나와야 가능한 일이다. 그만큼 수나라의 재정이 좋았고 경기도 활성화됐다는 뜻이다.

지방까지 관리를 파견하고 500가를 향으로, 100가를 리로 조직하여 통치 체계를 한차원 높게 끌어올렸으며[9], 어느 정도 제국의 기틀이 잡히자 관료들에게도 따로 경비를 마련해 주어 관료들과 귀족들이 함부로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못하도록 했다.

게다가 관료들의 부패를 끔찍이 싫어했던 탓에 뇌물수수를 엄격히 밝히는 한편 뇌물과 관련된 관료는 모두 처형했다. 심지어 자기가 뇌물을 보내놓고 받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았을 정도니 다른 것은 몰라도 뇌물과 사치에 한정하여 굉장히 엄격했다고 할 수 있다. 덕분에 당시 관리들의 일상복은 귀한 비단으로는 만들 수가 없었고, 허리띠의 장식도 금옥이 아닌 쇠붙이나 뿔로 만들어야 했다.

황권 강화를 위해 임용 제도를 개혁하여 구품중정제를 폐지하고, 연고지 복무를 금지했으며, 과거제의 전신인 선거제를 도입했다. 물론 강력한 귀족 세력을 없애지는 못했으나 이후 당나라 시대까지 관롱집단의 견제 세력인 과거 출신자들을 기용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으며, 사유화되어가던 관직의 공공성을 고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마디로 수문제가 선거제를 병행하면서 황제는 귀족을 견제할 수 있게 되었다. 선거제를 통해 등용된 관료들은 착실한 친황제파가 되었다. 이는 당나라 중기부터 귀족을 견제할 사대부 계층의 형성을 이루어냈고, 송나라 시기까지 가면 귀족 대신 사대부가 국정의 중심이 되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구당서》와《정관정요》에서 당태종이 신하들과 회의하다가 수문제의 정치는 어떠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신하들은
위사전찬(衛士傳餐)
이라고 했는데, 자신이 혼자 모든 일을 밤늦도록 처결하느라 식사할 시간도 없어서 시위하는 군사들을 시켜 회의하는 곳으로 식사를 날라오게 했다는 뜻이다.[10] 이렇게 문제는 정치와 국가 운영을 신하의 도움을 받기보다 자기 혼자서 다 해먹었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선 《정관정요》에서 당태종이 신하들에게 수문제에 대해 물으니 신하는 혼자서 늦게까지 일을 하는 수문제를 뛰어나고 근면하다고 평가했는데 당태종은 그 말을 부정하고 그건 그가 근면하다기보다는 의심이 많아서 중요한 일은 남에게 맡기지 못하고 자기 혼자서 다 맡은 것일 뿐이며 그래서 국가 운영이 늦어진다고 깠다. 다만 여기서 알 것은 수문제가 중요한 국정 운영과 일은 혼자서 다 맡아서 처리했다는 것을 신하들과 당태종 모두 동의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근면성실했다는 것이다. 여담으로 전술한 수문제의 위사전찬(衛士傳餐)이라는 고사를 똑같이 실행한 이가 후대의 당문종이었다.

수문제 시절 일화 가운데 이런 얘기가 있다. 제주 참군 왕가라는 사람이 70여 명의 죄수를 수도 장안으로 압송하고 있었는데, 도중에 죄수들이 너무 힘들게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죄수들의 몸에 걸친 칼과 쇠사슬을 풀도록 명령하고, 아울러 압송을 담당한 병사들을 모두 해산시킨 뒤, 언제까지 장안에 도착하라고 이야기했다. 만약 죄수들이 도착하지 않으면 자신이 사형받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그러나 죄수들은 모두 약속한 날짜에 한 사람도 도망가지 않고 전부 장안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러자 수문제는 크게 기뻐하면서 죄수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궁궐로 불러 그들에게 주안상을 하사하고 죄를 사면했다. 그리고 왕가의 벼슬을 높여주고 상을 내렸다.

한 번은 관중 지방에 대기근이 들었을 때 수문제는 측근을 보내 백성들이 무엇을 먹고 있는지 알아보도록 했다. 어떤 사람이 콩껍질과 쌀겨를 섞어 만든 떡을 수문제에게 진상하자, 그는 눈물을 흘리며 그것을 신하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자기가 정치를 잘못하여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자책하며 수라의 반찬을 줄이고 오랫동안 술과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다. 또 한 번은 수문제가 이질을 앓은 적이 있었는데 어의가 궁궐에서 이질약을 조제하는데 필요한 호분을 백방으로 찾았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 황제에게 처방할 약도 제대로 만들 수 없을 정도로 궁궐에서 근검절약했던 것이다. 그는 태자 양용에게
"자고로 사치한 제왕들은 오래 가지 못했다. 태자는 근검 절약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라는 훈계도 했다.

조세를 낮추고 하사물을 성대히 내렸음에도 국고가 모두 차 넣어둘 곳이 없어 곁채에 쌓았을 정도였으며, 수문제가 선양을 받은 초기에 집계된 민호가 채 400만 호를 채우지 못했으나 말년에는 890만 호로 늘어나는 업적을 이루었다. 이후 수나라의 붕괴 과정에서 누락된 수많은 인구들은 측천무후를 거쳐 당현종 시절의 전성기인 개원지치에 다다라 겨우 복구된다.[11]

인구 뿐 아니라 경제력 또한 막강해져서 훗날 당나라는 수문제 시기의 경제력을 당현종 천보 초엽이 되어야 따라잡았다. 이때 쌓인 국부가 상상을 초월해 그 이전 왕조들은 꿈도 꾸지 못했던 황하-장강을 연결시키는 대운하 건설을 처음으로 시도했던 것이 수문제 양견이었다. 다만 양견은 대운하 공사를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 대운하 건설로 백성들이 고통받는다는 말 때문에 곧바로 건설을 중단했다.

이처럼 수문제는 스스로 조악한 옷을 입고, 검소한 식단을 유지하며, 모든 일을 하층민의 삶에 따라 시도하려 한 보기 드문 성군이라 할 수 있었고, 이에
"고조가 통일하고 문경치세를 거쳐 무제 시절에야 이룩한 한나라의 번영을 양견은 그가 통일하고 그가 이루어냈다"
라는 찬사를 받을 정도의 뛰어난 정치능력을 선보였다.

물론 이런 수문제도 결점은 있었다. 젊어서부터 학문을 연마하지 않았고, 601년에는 군현의 모든 교육 기관들을 폐지한 후 중앙에 국자감만을 두어 귀족 자제들만 공부하게 했다. 나이가 들수록 관리들에 대한 의심이 깊어져 법의 함정을 파놓고 관리들이 걸려들면 가차없이 처단했으며,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신하에게 툭하면 매질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또한 말년에 감정 기복이 심해져 자신의 기분에 따라 신하들에게 벌을 주거나 상을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점은 있었지만 그가 이룩한 정치 제도는 후에 당나라 율령제의 기초가 되어 이후 중국 국가들과 주변 동아시아 국가 정치 제도의 뼈대로 군림하게 된다.

또한 수문제는 즉위한 해인 581년 태형, 효수, 차열(거열) 같은 혹형들을 폐지하기도 했다.[12]

2.4. 관롱집단 문제

그러나 수문제의 이러한 정책으로 자신들이 무시당한다고 여긴 권문세족들은 수많은 반란을 일으켰다. 이게 소규모라고 보긴 절대 어려운 것이, 수문제와 인척 관계로 연결된 관롱집단의 집단적인 반발에 더해 반란, 특히 대규모 지주가 경제정책의 중심이었던 장강 이남의 옛 남조 지역에서의 반발이 극심했다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대규모 운집만 안 했지, 반란 세력이 들끓었다는 사실을 유념해 볼 수 있다. 한 번의 정복 전쟁으로 통일을 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지주들을 척결해버리기 위해 제2차 통일전쟁을 시작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결국 수나라를 무너트린 것도 대규모 지주 출신인 관롱집단이연이 건국한 당나라였다. 애초에 수나라의 황족인 홍농 양씨와 당나라를 건국한 이연의 농서 이씨 가문이 모조리 한 고을(무천진)에 모여 살던 세력이었다.

이는 양견이 관롱집단이라는 장안 주변 귀족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성장한 제왕이라는 점에서 발생하는 권력에서의 역학 관계로, 그들 덕에 제왕이 될 수 있었던 탓에 그들의 세력과 의견을 무시하기가 현실적으로 힘들어서 발생한 문제였다. 따라서 문제는 말년에 점차 노골적으로 관롱집단과 대립하며 숙청과 비리 척결, 외정이라는 강경책을 단행했던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수문제 양견이 계속해서 관롱 세력들에게 지속적인 강경책을 썼으면 결국에는 관롱집단의 소멸로 이어졌겠지만 양견이 아들과의 정쟁에 휘말리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는 점이다. 수양제가 탈법적인 수단으로 제위에 오르면서 기존 귀족 세력에게 좋은 명분거리 하나를 던져주게 된 것이다.

결국 수양제는 최소 귀족들의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해 대규모로 궁전을 증축하는 한편, 대운하를 건설하고 대규모 정벌 사업을 벌이는 활동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애당초 탈법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제위에 오른지라 귀족 집단의 지지를 받거나 최소한의 반발을 막기 위해 귀족들의 비위를 어느 정도 맞춰줘야 할 이유가 있었다. 결국에는 수양제의 자업자득이었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지금의 시각으로는 골때리는 짓이지만 그 당시에 권문세족들은 이러한 대운하 공사와 정복 사업에 대해 모두 환영하고 찬성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수나라가 멸망한 이후에도 귀족 집단은 계속 존속했으며 관롱집단, 특히 6진 중에서도 무천진을 중심으로 하는 무천진 군벌은 당나라까지 영향을 미쳤다. 물론 당태종 치세기에는 숨을 죽이고 있었으나, 당고종대에 다시 활개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측천무후였다. 다만 측천무후가 날려버린 것은 아니고, 측천무후를 핑계로 당고종이 손을 봤다는 것이 최근의 평가이다.

조선의 숙종장희빈을 핑계로 환국정치를 해서 왕권을 강화한 것과 비슷한 형태였다고 보면 된다. 자세한 것은 측천무후 항목 참고.

2.5. 고구려-수 전쟁

수문제는 고구려사신과 함께 친필을 보냈는데, 그 내용인즉
고구려는 수나라조공을 해 제후국으로 인정받으라는 것과 만약 조공을 거부하고 자신의 뜻에 거역할 경우 자신이 군사를 동원하여 양씨 황족 중 한 명을 고구려의 왕으로 옹립하겠다.
는 내용이었다.

사실 당시 고구려를 제외한 다른 여러 나라들은 이미 중원을 통일한 수나라의 위세에 밀려 제후국으로서 조공을 바치고 있는 모양새였기에, 수문제 입장에선 고구려가 배 째라고 나오면서 버틸 경우 다른 제후국들도 같은 태도를 취할까 염려했고, 이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라 압력을 넣고 만약 고구려가 거절할 시 300,000명의 수•륙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공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고구려가 역으로 선빵을 날린다. 고구려의 영양왕말갈 기병을 동원해 요서에 자리하고 있었던 수나라의 거점인 영주 일대를 공격하는 한편, 거란을 동원하여 발해 연안에 위치한 수나라군을 공격했다. 이런 예상밖의 고구려의 선제 공격으로 뒤통수를 거하게 맞은 수문제는 당혹감과 분노를 감추지 못했고, 얼마 안가 수•륙군 300,000명으로 고구려 침공을 전격 단행했다.

제1차 고구려-수 전쟁 당시 고구려와 수나라 양국 간에 어떤 전투가 발생했고, 전투 양상이 어떠했는지는 기록의 부재로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영양왕이 수문제에게 사과 사신을 보내면서 표문에
"요동 분토(糞土)[13][14]에 있는 신(臣) 고원"
이라 칭하는 사과문을 바쳐 교전없이 퇴각했다는 수나라 측 기록이 전해진다.

그러나 고구려와의 교전에서 대패했다는 정황을 암시하는 듯한 기록들도 존재하기 때문에[15] 수나라 측에서 고의적으로 패전을 축소, 은폐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신채호는 그의 저서 《조선상고사》에 현재는 남아있지 않은 《서곽잡록》(西郭雜錄)과 《대동운해》(大東韻海) 등의 기록을 인용하여 오늘날 진주 강씨의 시조로 전승되는 강이식임유관 전투 등에서 승전을 이뤄내어 이 전쟁을 이끈 주역이라는 설을 내놓기도 했다. 자세한 얘기는 강이식 문서 참조.

한편, 요동 분토의 신 운운하는 사과문의 신빙성과 의도를 떠나 고구려내에서는 역대급 대군을 물리쳤다는 사실에 사기가 고취됐던 모양이다. 전쟁이 끝난 직후 《신집》을 편찬하여 역사를 정리했고, 수나라에 대한 고압적인 태도는 별로 바뀌지 않은 듯하며, 수양제의 조서를 보면 제후국의 예를 따르지 않았으며, 조서를 직접 받지도 않는다고까지 표현한다. 고구려 공격을 부추긴 백제신라를 공격하여 응징하는 한편, 돌궐(쾩튀르크)과는 합종을 시도하여 수나라에 대해 선제적인 대응을 계속했다.

결론적으로 자세한 전황이 어찌 되었든 간에 이 전쟁은 수나라가 고구려와 싸워 개고생했고 이후 재차 고구려를 침공하는데 큰 부담을 느낀 계기가 된 사건인 것은 분명해 보이며, 이는 문제의 아들 양제 시절에도 마찬가지로 이어진다.

2.6. 말년과 붕어

문제는 나라가 안정기에 접어들자 나랏일을 소홀히 하기 시작했는데, 문헌황후 독고씨가 살아있을 때는 그를 끊임없이 설득하여 그나마 국가를 그럭저럭 끌고 갈 수 있었다. 그러나 문헌황후가 602년 8월에 영안궁에서 한질로 사망하자 양견은 큰 충격을 받아 나랏일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고 한다. 이러다가 말년에 다시 양용을 태자로 세우고 양광을 폐위시키려고 했으나, 이를 미리 파악한 양광은 심복이자 자신의 근위장이었던 장형을 시켜 문제를 죽였다.[16] 양용 역시 양광의 근위장인 우문지급에게 목이 졸려 살해당했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604년 7월, 수문제가 중병에 걸려 장안의 인수궁 대보전에 누워있었는데, 문제가 중병으로 오늘 내일하는 상황이 되자 태자 양광과 월국공 양소, 병부상서 유술 등이 대보전을 지켰고, 선화부인과 용화부인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문제 곁에서 시중을 들었다. 수문제는 두 사람이 자기를 시중드느라 휴식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얼마간이라도 휴식하라고 명령했다.

이때 선화부인이 문제의 침궁을 떠나 거처로 가는 도중에 태자 양광을 만났다. 양광은 남조 진나라의 황녀로 수문제의 후궁이 되었던 진씨의 미모에 반해[17] 대담하게도 그녀를 겁탈하려고 했다.[18] 이에 진씨가 울면서 수문제에게
"태자가 무례하였습니다."
하고 하소연하자, 수문제는 그제서야 양광의 진면모를 알고
"그 짐승만도 못한 놈이 나라를 다스리겠다고? 내가 황후의 말을 들은 것이 큰 실책이었구나!"
라고 한탄하며 다시 양용을 복위시키기 위해 유술과 원암을 시켜서 양용을 호출했지만, 이 소식을 들은 양광이 선수를 쳐서 유술과 원암을 체포하여 대리옥에 가두고 자신의 군사와 우문술, 곽연을 시켜 황궁을 포위했다. 태자 양광이 황궁에서 반란을 일으켜 인수궁을 포위했을 때 수문제는
"만약 황후가 살아있다면 짐이 이런 처지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한탄했다고 한다.[19]

그 후 수문제의 처소에서 병 시중을 들던 후궁들이 모두 쫓겨나고, 대신 태자궁 신하인 장형이 들어왔는데, 얼마 뒤인 604년 음력 7월 13일(정미일)에 수문제가 향년 64세에 붕어했다. 붕어 직전의 태자 양광의 의심스러운 행동으로 살해설이 나돌았고, 《자치통감》에서도
"안팎에서는 자못 다른 이야기가 있었다."
며 살해설을 암시하고 있다.[20] 양제가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이야기는 <수서> 선화부인 진씨의 열전에 실려있는데 문제가 병환으로 몸저 누웠을 때 양제가 아버지의 애첩인 선화부인을 겁탈하려 했다. 선화부인이 간신히 달아나 문제에게 이를 알리자 문제는 유술과 원암에게 폐태자 용을 불러오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양소가 그 사실을 양제에게 보고하자 양제는 유술과 원암을 감금하고 장형을 보내 앓아 누워있던 문제를 죽여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양제가 문제를 시해한 방식은 기록에 따라 다르다. <대업약기>에서는 독살되었다고 하였고 <통력>에서는 장형이 문제를 살해할 적에 그 피가 병풍에 튀었다고 하였다. <수서> 방릉왕용전에서는 양제가 유술과 원암을 감금한 것은 문제의 사후였고 이는 곧 문제의 죽음을 틈타 폐태자인 형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라 하는 등 전혀 딴소리를 하고 있다. 그리고 양제의 명령을 받들어 문제를 살해했다는 장형도 이런 음험한 일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수서> 장형전에서는 장형이 문제를 살해한 이야기를 찾아볼 수 없을 뿐더러 양제에게 간언을 아끼지 않았다가 사형을 당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런 장형이 <수서> 편찬 시기에 문제의 시해범으로 둔갑한 것은 아마도 <수서> 양제기에서 언급되었듯이 양제가 황제가 되기 이전부터 그의 측근이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수서>에서 부황 시해의 근거로 삼는 사항은 문제가 세상을 떠날 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같은 <수서>임에도 본기와 열전의 내용이 서로 달라서 어떤 곳에서는 수문제가 죽을 때 자리를 지키지 않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또한 마찬가지로 선화부인 진씨에 대한 음행에서도 서로 다른 기술이 존재하기에 양광이 정말로 아버지를 살해했는지는 약간 의문이 있다.

2.7. 사후

파일:수태릉.jpg
사후 수문제 양견은 태릉에 안장되었으며, 도굴꾼들과 중화민국 시기 군벌들 및 비적들이 도굴하려고 번번히 시도했으나, 현지 주민들이 어차피 별 거 없으니 그만두라고 말렸다. 그럼에도 끈질기게 도굴을 시도했으나 정말로 별 거 없어서 그만뒀다고 한다.

3. 평가

무려 360여 년이나 지속된 대혼란기였던 위진남북조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제위에 올라 현대 중국의 기틀까지 다진 중국사 최고의 성군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일부 사람들은 통일 군주라는 점에서 진시황제, 진무제와 함께 거론하지만, 수문제는 후대에 폭군 취급을 받는 두 사람과 달리 이들과 비교되는 것이 모욕이다.[21] 중국사에서 손꼽히는 암군이자 폭군으로 평가받는 아들이 훗날 모든 것을 말아먹기 전까지 수나라는 문제의 치세에서 매우 안정적으로 성장했다. 문제는 국토를 넓히고 제도를 정비했으며 과거 제도의 전신인 선거제를 통해 수나라를 중앙집권국가로 발전시켰다. 문제 때 연호가 개황(開皇)이었기에 이 시기의 태평성대개황성세(開皇盛世)[22]라 한다.

중국이나 동아시아권보다 서구권에서 비교적 더 높이 평가받는 인물이다. 유럽로마 제국분열 이후 통일되지 못하고 조각조각 나뉜 반면[23], 중국은 수문제가 재통합하여 오늘날의 거대 국가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기에 서양에서는 세계사의 중요 인물을 뽑으면 100위 안. 그것도 제왕들 가운데서 10위 안에 꼽는다. 일명 위대한 중국 황제 성인가한(聖人可汗)이라 하여 중요한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서구에서는 프랑크 왕국카롤루스 대제에 비유하는 경우도 있다.

사실 수나라가 워낙 빠르고도 성대하게 멸망해서 수나라에 관련된 모든 인물에 대한 평가가 좋지 못했기에 수문제 또한 오랫동안 폄하당하거나 무시당했지만, 서양 학자들이 중국사를 공부하면서 평가가 뒤바뀌었다. 특히 후한황건적의 난 이래 400여 년이나 분열했던 중국을 재통일하여 하나 된 중국을 만들어낸 초석을 다진 점을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마이클 하트의 《세계사를 바꾼 사람들: 랭킹 100》에서 채윤, 진시황제, 모택동과 더불어 같이 이름을 올렸다.[24]

서양 학계에서 분열된 유럽에 대응해 하나의 중국이라는 점을 피상적으로만 보아 터무니없이 높게 평가했다는 의견도 있는데, 후한 말 분열된 중국을 280년부터 300년까지 20여 년 정도 서진이 통일하기도 했고, 오호십육국시대전진중국 대륙을 통일하려는 움직임도 없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분열된 중국을 재통합한 업적은 인정할지 몰라도 서양 학계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하나의 중국이라는 정체성을 심어준 인물까지는 아니라는 것이다. 게다가 비교 대상인 카롤루스 대제서로마 제국은 애당초 봉건제라는 한계가 있었기에 나름대로 관료제가 정착해 중앙집권적 통제가 용이했던 중국과 동일선상에서 비교하는 것도 무리이기는 하다.

다만 서구 사학계의 평가를 과대평가로 단정하는 것 역시 적절치 못한 면이 있는데, 하나의 중국이라는 정체성을 심어준 것이 수문제가 아닌 한고제한나라라고 한다면, 이런 식으로 따질 때 유럽사에서 한나라에 대응하는 것은 카롤루스 대제프랑크 왕국이 아니라 아우구스투스로마 제국이다. 로마 제국이든 한나라든 고대사 말기에 나타나 하나의 세계를 통합했고 이 제국의 영역에서 현대에 이르는 유럽 문명권과 중화 문명권의 정체성이 나타났다. 이 두 제국은 내부의 모순 축적과, 제국의 전성기 시절 비문명화된 야만족으로 여겼던 이민족의 위협으로 몰락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덤으로 몰락으로 인해 제국의 중심부를 상실한 이후에도 남은 제국세력은 명맥을 이어가며 결과적으로 통일제국 시대의 문화유산을 보존하여 후세에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했다는 공통점도 있다.

제국이 붕괴하고 그 고토는 통일제국의 영역에서 벗어나 분열기를 겪으며 혼란의 도가니탕을 끓이게 되었고, 이 상황에서 등장하여 분열된 영역의 재통합을 지향했다는 것이 카롤루스 대제와 수문제의 공통점이며, 결국 중국의 재통합으로 이어질 길을 여는데 성공한 수문제와 달리 카롤루스 대제의 시도는 서유럽의 재통합으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이를 두고 수문제는 하나의 중국이라는 정체성을 심어준 인물까지는 아니라고 말한다면, 카롤루스 대제 역시 보편제국 로마라는 정체성을 심어준 인물도 아니기는 마찬가지이다. 카롤루스 대제를 Pater Europae(유럽의 아버지)라고 보는 관점으로 접근한다면 수문제 역시 한나라 멸망 이후 360여 년에 이르는 기나긴 분열과 혼란기 동안 기존 제국의 정치 구조가 완전히 해체된 상황에서 당나라와 이후의 통일 왕조들로 이어질 정치 구조를 구축한 인물이기는 역시 마찬가지이다.

수나라 통일 이전 위진남북조시대에도 부견비수대전과 같이 중국을 재통합하려는 시도가 없지는 않았다고 한다면 이는 로마도 마찬가지였으며, 하다 못해 신성 로마 제국도 통합된 국가로 발전할 여지가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프랑크 왕국은 처음부터 봉건제라는 한계가 있었다고는 하나 수나라 역시 처음부터 관롱집단의 군벌들과 문벌귀족의 폐쇄적인 귀족 세력을 끌어안고 있었다. 물론 중국이 이른 시기부터 중앙집권적 관료제의 전통을 형성해 왔고, 재통합에 유리한 영향력을 끼쳤음은 분명하지만 중국의 관료제라 한들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은 아니었으며 중국이든 유럽이든 강력한 통일국가를 지향하는 군주들은 휘하 군벌들이나 귀족들의 세력을 억누르고 흡수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해야 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서구 학계의 고평가를 분열된 유럽에 대응해 하나의 중국이라는 점을 피상적으로만 평가한 결과물이라는 의견에는 반론의 여지가 있다.

총평하자면 수문제가 분열된 중국을 재통합한 업적을 세웠으나 자식농사에 실패한데다가 제위에 욕심이 많았던 태자인 양광에 의해 석연치 않게 승하했고 양제의 폭정에 의해 수나라가 단기간에 멸망하여 수나라의 평가가 깎였다 정도일 것이다. 다만 수나라 문서의 영향을 보면 알 수 있든이 수나라의 문화, 경제 및 정치 제도들은 후대 당나라에도 이어져 영향을 미치게 된다.

4. 가족 관계

5. 기타

6. 대중매체에서

암군과 폭군이 판을 치는 남북조시대는 물론, 중국사를 통틀어서도 손꼽을 성군이지만, 자식 농사에 실패하고 왕조가 단명해서 그런지 대중매체에서의 수문제에 대한 취급이 별로 좋지 않다. <연개소문>에서는 노망난 늙은이로 전락했고 <대운하>에서는 암군으로 묘사되었다. 이런 묘사는 한국만 그런 게 아니라 중국 매체에서도 마찬가지다.

파일:연개소문_수문제.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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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위본기1(魏本紀一)」 2권 「위본기2(魏本紀二)」 3권 「위본기3(魏本紀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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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권 「위본기4(魏本紀四)」 5권 「위본기5(魏本紀五)」
원각 · 원후 원자유 · 원공 · 원랑 · 원수 · 원보거 · 원흠 · 원곽 · 원선견
6권 「제본기상(齊本紀上)」 7권 「제본기중(齊本紀中)」 8권 「제본기하(齊本紀下中)」
고환 · 고징 고양 · 고은 · 고연 고담 · 고위 · 고항
9권 「주본기상(周本紀上)」 10권 「주본기하(周本紀下)」
우문태 · 우문각 · 우문육 우문옹 · 우문윤 · 우문천
11권 「수본기상(隋本紀上)」 12권 「수본기하(隋本紀下)」
양견 양광 · 양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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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4><tablewidth=100%><tablebgcolor=#000000> 13·14권 「후비전(后妃傳)」 ||
신원황후 · 봉황후 · 기황후 · 평문황후 · 소성황후 · 헌명황후 · 도무황후 · 선목황후 · 소애황후 · 명원밀황후 · 태무황후 · 경애황후
울구려황후 · 문명황후 · 문성원황후 · 헌문사황후 · 효문정황후 · 폐후 풍씨 · 효문유황후 · 효문고황후 · 우황후 · 고황후 · 호황후 · 효명황후 · 효무황후 · 문황후 · 도황후 · 우문황후 · 약간황후 · 효정황후 · 누소군 · 원황후 · 이조아 · 원황후 · 호황후 · 곡률황후 · 호황후 · 목야리 · 풍소련 · 원씨 · 질노씨 · 원호마 · 독고황후 · 아사나 · 이아자 · 양려화 · 주만월 · 진월의 · 원락상 · 울지치번 · 사마영희 · 독고가라 · 소황후
15권 「위제종실전(魏諸宗室傳)」
탁발흘나 · 탁발영문 · 탁발육 · 탁발인 · 탁발수낙 · 탁발퇴 · 탁발소연 · 탁발욱 · 탁발목신 · 탁발육수 · 탁발비간 · 탁발여 · 탁발고
탁발돈 · 탁발석 · 탁발위 · 탁발대두 · 탁발제 · 탁발처진 · 탁발니 · 탁발식군 · 탁발한 · 탁발준(遵) · 탁발건(健) · 탁발순 · 탁발의열 · 탁발굴돌
16권 「도무7왕·명원6왕·태무5왕전(道武七王·明元六王·太武五王傳)」
탁발소 · 탁발희 · 탁발요 · 탁발수 · 탁발처문 · 탁발연 · 탁발려(黎) · 탁발비 · 탁발미 · 탁발범 · 탁발건(健) · 탁발숭 · 탁발준(俊) · 탁발복라 · 탁발한 · 탁발담 · 탁발건(建) · 탁발여(余)
17·18권 「경목12왕전(敬穆十二王傳)」
탁발신성 · 탁발자추 · 탁발소신성 · 탁발천사 · 탁발만수 · 탁발낙후 · 탁발운 · 탁발정 · 탁발장수 · 탁발태락 · 탁발호아 · 탁발휴
19권 「문성5왕·헌문6왕·효문6왕전(文成五王·獻文六王·孝文六王傳)」
탁발장락 · 탁발략(略) · 탁발간(簡) · 탁발약(若) · 탁발맹 · 원희 · 원간(幹) · 원우 · 원옹 · 원상 · 원협 · 원순 · 원유 · 원역 · 원회 · 원열
20권 「위조등전(衛操等傳)」
위조 · 막함 · 유고인 · 울고진 · 목숭 · 해근 · 숙손건 · 안동 · 유업연 · 왕건 · 나결 · 누복련 · 염대비 · 해목 · 화발 · 막제 · 하적간 · 이율 · 해권
21권 「연봉등전(燕鳳等傳)」 22권 「장손숭등전(長孫嵩等傳)」
연봉 · 허겸 · 최굉 · 장곤 · 등언해 장손숭 · 장손도생 · 장손비
23권 「우율제전(于栗磾傳)」 24권 「최영등전(崔逞等傳)」
우율제 최영 · 왕헌 · 봉의
25권 「고필등전(古弼等傳)」
고필 · 장려 · 유결 · 구퇴 · 아청 · 이후 · 을괴 · 주기 · 두대전 · 거이락 · 왕낙아 · 거로두 · 노노원 · 진건 · 내대간 · 숙석 · 만안국
주관 · 울발 · 육진 · 여락발 · 설표자 · 울원 · 모용백요 · 화기노 · 순퇴 · 우문복
26권 「송은등전(宋隱等傳)」
송은 · 허언 · 조옹(刁雍) · 신소선 · 위랑 · 두전
27권 「굴준등전(屈遵等傳)」
굴준 · 장포 · 곡혼 · 공손표 · 장제 · 이선 · 가이 · 두근 · 이흔 · 한연지 · 원식 · 모수지 · 당화 · 구찬 · 역범 · 한수 · 요훤 · 유숭
28권 「육사등전(陸俟等傳)」 29권 「사마휴지등전(司馬休之等傳)」
육사 · 원하 · 유니 · 설제 사마휴지 · 유창 · 소보인 · 소정표
28권 「노현등전(盧玄等傳)」 29권 「고윤등전(高允等傳)」
노현 · 노부 고윤 · 고우 · 고덕정 · 고익 · 고앙
32권 「최감등전(崔鑒等傳)」 33권 「이령등전(李靈等傳)」
최감 · 최변 · 최정 이령 · 이순 · 이효백 · 이예 · 이의심
34권 「유아등전(游雅等傳)」
유아 · 고려 · 조일 · 호수 · 호방회 · 장담 · 단승근 · 감인 · 유연명 · 조유 · 색창 · 송요 · 강식
35권 「왕혜룡등전(王慧龍等傳)」 36권 「설변등전(薛辯等傳)」
왕혜룡 · 정희 설변 · 설치 · 설징
37권 「한무등전(韓茂等傳)」
한무 · 피표자 · 봉칙문 · 여나한 · 공백공 · 전익종 · 맹표 · 해강생 · 양대안 · 최연백 · 요훤 · 이숙인
38권 「배준등전(裴駿等傳)」 39권 「설안도등전(薛安都等傳)」
배준 · 배연준 · 배타 · 배과 · 배관 · 배협 · 배문거 · 배인기 설안도 · 유휴빈 · 방법수 · 필중경 · 양지
40권 「한기린등전(韓麒麟等傳)」 41권 「양파등전(楊播等傳)」
한기린 · 정준 · 이표 · 고도열 · 견침 · 장찬 · 고총 양파 · 양부양소
42권 「왕숙등전(王肅等傳)」 43권 「곽조등전(郭祚等傳)」 44권 「최광등전(崔光等傳)」
왕숙 · 유방(劉芳) · 상상 곽조 · 장이 · 형만 · 이숭 최광 · 최량
45권 「배숙업등전(裴叔業等傳)」
배숙업 · 하후도천 · 이원호 · 석법우 · 왕세필 · 강열지 · 순우탄 · 음중달 · 장당 · 이묘 · 유조 · 부영 · 부수안 · 장열 · 이숙표 · 노시경 · 방량
조세표 · 반영기 · 주원욱
46권 「손소등전(孫紹等傳)」
손소(孫紹) · 장보혜 · 성엄 · 범소 · 유도부 · 녹여 · 장요 · 유도빈 · 동소 · 풍원흥
47권 「원번등전(袁翻等傳)」 48권 「이주영전(爾朱榮傳)」
원번 · 양니 · 가사백 · 조영 이주영
49권 「주서등전(朱瑞等傳)」
주서 · 질열연경 · 곡사춘 · 가현도 · 번자곡 · 후심(2) · 하발승 · 후막진열 · 염현 · 양람 · 뇌소 · 모하 · 을불랑
50권 「신웅등전(辛雄等傳)」
신웅 · 양기 · 고도목 · 기준 · 산위 · 우문충지 · 비목 · 맹위
51·52권 「제종실제왕전(齊宗室諸王傳)」
고침 · 고악 · 고성 · 고영락 · 고현국 · 고사종 · 고언귀 · 고령산 · 고준 · 고엄 · 고유 · 고환(高渙) · 고육 · 북제 · 고식 · 고제 · 고응 · 고윤
고흡 · 고효유 · 고효연 · 고효완 · 고장공 · 고연종 · 고소신 · 고소덕 · 고소의 · 고소인 · 고소렴 · 고백년 · 고량 · 고언리 · 고언덕
고언기 · 고언강 · 고언충 · 고작 · 고엄 · 고곽 · 고정 · 고인영 · 고인광 · 고인기 · 고인옹 · 고인검 · 고인아 · 고인직 · 고인겸 · 고각 · 고선덕
고매덕 · 고질전
53권 「묵기보등전(万俟普等傳)」
묵기보 · 가주혼원 · 유풍 · 파륙한상 · 금조 · 유귀 · 채준 · 한현 · 울장명 · 왕회 · 임상 · 막다루대문 · 사적회락 · 사적성 · 장보락
후막진상 · 설고연 · 곡률강거 · 장경 · 요웅 · 송현 · 왕칙 · 모용소종 · 질열평 · 보대한살 · 설유의 · 모용엄 · 반락 · 팽락 · 포현 · 피경화
기연맹 · 원경안 · 독고영업 · 선우세영 · 부복
54권 「손등등전(孫騰等傳)」
손등 · 고융지 · 사마자여 · 두태 · 울경 · 누소 · 사적간 · 한궤 · 단영 · 곡률금
55권 「손건등전(孫搴等傳)」
손건 · 진원강 · 두필 · 두태 · 울경 · 장찬 · 장량 · 장요 · 왕준 · 왕굉 · 경현준 · 평감 · 당옹 · 백건 · 원문요 · 조언심 · 혁련자열 · 풍자종 · 낭기
56권 「위수등전(魏收等傳)」
위수 · 위장현 · 위계경 · 위난근
57권 「주종실전(周宗室傳)」
우문호 · 우문련 · 우문낙생 · 우문중 · 우문측 · 우문신거
58권 「주실제왕전(周室諸王傳)」
우문진 · 우문직 · 우문초 · 우문검 · 우문순 · 우문성 · 우문달 · 우문통 · 우문형 · 우문강 · 우문현 · 우문정 · 우문실 · 우문찬 · 우문지
우문윤(允) · 우문충 · 우문태(兌) · 우문원 · 우문연(衍) · 우문술(術)
59권 「구락등전(寇洛等傳)」 60권 「이필등전(李弼等傳)」
구락 · 조귀 · 이현 · 양어 이필 · 우문귀 · 후막진숭 · 왕웅
61권 「왕맹등전(王盟等傳)」
왕맹 · 독고신 · 두치 · 하란상 · 질열복귀 · 염경 · 사녕 · 권경산
62권 「왕비등전(王羆等傳)」 63권 「주혜달등전(周惠達等傳)」 64권 「위효관등전(韋孝寬等傳)」
왕비 · 왕사정 · 울지형 · 왕궤 주혜달 · 풍경 · 소작 위효관 · 위진 · 류규
65권 「달해무등전(達奚武等傳)」
강자일 · 약간혜 · 이봉 · 유량 · 왕덕 · 혁련달 · 한과 · 채우 · 상선 · 신위 · 사적창 · 양춘 · 양대 · 전홍
66권 「왕걸등전(王傑等傳)」
왕걸 · 왕용 · 우문규 · 경호 · 고림 · 이화 · 이루목 · 달해식 · 유웅 · 후식 · 이연손 · 위우 · 진흔 · 위현 · 천기 · 이천철 · 양건운 · 부맹 · 양웅 · 석고 · 임과
67권 「최언목등전(崔彥穆等傳)」 68권 「두로녕등전(豆盧寧等傳)」
최언목 · 양찬 · 단영 · 배과 · 당영 · 류민 · 왕사량 두로녕 · 양소(楊紹) · 왕아 ,왕세적한웅 · 하약돈
69권 「신휘등전(申徽等傳)」
신휘 · 육통 · 사적치 · 양천 · 왕경 · 조강 · 조창 · 왕열 · 조문표 · 양대 · 원정 · 양표
70권 「한포등전(韓襃等傳)」
한포 · 조숙 · 장궤 · 이언 · 곽언 · 양흔 · 황보번 · 신경지 · 왕자직 · 두고 · 여사례 · 서초 · 단저 · 맹신 · 종름 · 유번 · 류하
71권 「수종실제왕전(隋宗室諸王傳)」
양정 · 양찬 · 양상 · 양홍 · 양처강 · 양자숭 · 양용 · 양준 · 양수 · 양량 · 양소(楊昭) · 양간 · 양고
72권 「고경등전(高熲等傳)」
고경 · 우홍 · 이덕림
73권 「양사언등전(梁士彥等傳)」
양사언 · 원해 · 우경칙 · 원주 · 달해장유 · 하루자간 · 사만세 · 유방(劉方) · 두언 · 주요 · 독고개 · 걸복혜 · 장위 · 화홍 · 음수 · 양의신
74권 「유방등전(劉昉等傳)」
유방(劉昉) · 유구 · 황보적 · 곽연 · 장형 · 양왕 · 배온 · 원충 · 이웅
75권 「조경등전(趙煚等傳)」
조경 · 조분 · 왕소 · 원암 · 우문필 · 이누겸 · 이원통 · 곽영 · 방황 · 이안 · 양희상 · 장경 · 소효자 · 원수
76권 「단문진등전(段文振等傳)」
단문진 · 내호아 · 번자개 · 주나후 · 주법상 · 위현 · 유권 · 이경 · 설세웅
77권 「장정화등전(張定和等傳)」
배정 · 이악 · 포굉 · 고구 · 영비 · 육지명 · 양비 · 유욱 · 조작 · 두정
78권 「장정화등전(張定和等傳)」
장정화 · 장윤 · 맥철장 · 권무 · 왕인공 · 토만서 · 동순 · 어구라 · 왕변 · 진릉 · 조재
79권 「우문술등전(宇文述等傳)」
우문술 · 왕세충 · 단달
80권 「외척전(外戚傳)」
하눌 · 요황미 · 두초 · 하미 · 여비 · 풍희 · 이혜 · 고조 · 호국진 · 황보집 · 양등 · 을불회 · 조맹 · 호장인 · 여씨
81·82권 「유림전(儒林傳)」
양월 · 노추 · 장위 · 양조 · 평항 · 진기 · 유헌지 · 장오귀 · 유란 · 손혜울 · 서준명 · 동징 · 마자결 · 이흥업 · 양원의 · 풍위 · 장매노 · 유궤사
포계상 · 형치 · 유주 · 마경덕 · 장경인 · 권회 · 장사백 · 장조무 · 곽준 · 심중 · 번심 · 웅안생 · 악손 · 기준 · 조문심 · 신언지 · 하타 · 소해 · 포개 · 방휘원 · 마광 · 유작 · 유현 · 저휘 · 고표 · 노세달 · 장충 · 왕효적
83권 「문원전(文苑傳)」
온자승 · 순제 · 조홍훈 · 이광 · 번손 · 순사손 · 왕포 · 유신 · 안지추 · 우세기 · 유변 · 허선심 · 이문박 · 명극양 · 유진 · 제갈영 · 왕정 · 우작
왕주 · 유자직 · 반휘 · 상덕지 · 윤식 · 유선경 · 조군언 · 공덕소 · 유빈
84권 「효행전(孝行傳)」
장손려 · 손익덕 · 동락생 · 양인 · 염원명 · 오실달 · 왕속생 · 이현달 · 장승 · 창발 · 왕숭 · 곽문공 · 형가 · 진족 · 영선 · 황보하 · 장원
왕반 · 양경 · 전익 · 유인 · 유사준 · 적보림 · 화추 · 서효숙
85권 「절의전(節義傳)」
우십문 · 단진 · 석문덕 · 급고 · 왕현위 · 누제 · 유갈후 · 주장생 · 마팔룡 · 문문애 · 조청 · 유후인 · 석조흥 · 소홍철 · 왕영세 · 호소호
손도등 · 이궤 · 장안조 · 왕려 · 곽염 · 지용초 · 을속고불보 · 이상 · 두숙비 · 이악 · 유원 · 장수타 · 양선회 · 노초 · 유자익 · 요군소
진효의 · 두송지 · 곽세준 · 낭방귀
86권 「순리전(循吏傳)」
장응 · 노옹 · 염경윤 · 명량 · 두찬 · 두원 · 소숙 · 장화업 · 맹업 · 소경 · 노거병 · 양언광 · 번숙략 · 공손경무 · 신공의 · 유검 · 곽현 · 경숙
유광 · 왕가 · 위덕심
87권 「혹리전(酷吏傳)」
우락후 · 호니 · 이홍지 · 장사제 · 조패 · 최섬 · 저진 · 전식 · 연영 · 원홍사 · 왕문동
88권 「은일전(隐逸傳)」
휴과 · 풍량 · 정수 · 최곽 · 서칙 · 장문후
89·90권 「예술전(藝術傳)」
조숭 · 장심(1) · 은소 · 왕조 · 경현 · 유영조 · 이순흥 · 단특사 · 안악두 · 왕춘 · 신도방 · 송경업 · 허준 · 유준세 · 조보화 · 황보옥 · 해법선 · 허준 · 위녕 · 기모회문 · 장자신 · 육법화 · 장승 · 강련 · 유계재 · 노태익 · 경순 · 내화 · 소길 · 양백추 · 임효공 · 유우 · 장주현 · 주담 · 이수 · 서건 · 왕현 · 마사명 · 요승원 · 저해 · 허지장 · 만보상 · 장소유 · 하조
91권 「열녀전(列女傳)」
난릉공주 · 남양공주 · 초국부인
92권 「은행전(恩倖傳)」
왕예 · 왕중흥 · 조수 · 여호 · 조옹(趙邕) · 후강 · 구락제 · 왕거 · 조묵 · 손소(孫小) · 장종지 · 극붕 · 장우 · 포억 · 왕우 · 부승조 · 왕질 · 이견 · 유등 · 가찬 · 양범 · 성궤 · 왕온 · 맹란 · 평계 · 봉진 · 유사일 · 곽수 · 화사개 · 안토근 · 목제파 · 고아나굉
93권 「참위부용전(僭偽附庸傳)」
혁련발발 · 모용외 · 요장 · 풍발 · 걸복국인 · 저거몽손 · 소찰
94권 「고려등전(高麗等傳)」
고려 · 백제 · 신라 · 물길 · 해족 · 거란 · 실위 · 두막루 · 지두우 · 오락후 · 류구 · 왜국
95권 「만등전(蠻等傳)」
만족(蠻) · 요족(獠) · 임읍 · 적토 · 진랍 · 파리
96권 「저등전(氐等傳)」
저족 · 토욕혼 · 탕창 · 등지국 · 당항 · 부국 · 계호국
97권 「서역전(西域傳)」
선선 · 포산국 · 실거반 · 권우마국 · 차사국 · 우전국 · 고창 · 차미 · 언기 · 구차 · 고묵국 · 온숙국 · 울두국 · 오손국 · 소륵국 · 열반국 · 토호라
소월씨 · 아구강국 · 속특국 · 파사국 · 복로니국 · 색지현 · 가색니국 · 고창 · 차미 · 여국
98권 「연연등전(蠕蠕等傳)」
연연 · 우문막괴 · 단질육권 · 고차
99권 「돌궐등전(突厥等傳)」
돌궐 · 철륵
100권 「자서전(自序傳)」
이연수
(1) 본명이 장연(張淵)으로 당고조 이연(李淵)을 피휘하여 심(深)으로 개칭되었다.
(2) 본명이 후연(侯淵)으로 당고조 이연(李淵)을 피휘하여 심(深)으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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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키가 7척 8촌(七尺八寸)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당시 수나라 척단위인 24.2cm로 계산하면 189cm가 나온다.[2] 물론 후술하지만 이는 당시 유럽과 중국이 처한 시대의 차이 때문이다. 그리고 하트의 말대로 수나라 이후 중국이 끝까지 통일국가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오대십국시대나 요나라, 송나라, 금나라의 대립 시기, 그리고 원나라가 대부분을 차지했을 때 남송이 멸망하지 않은 채 버틴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오늘날도 어떤 관점에서 보면 중국은 통일국가가 아니다. 그런데 어찌보면 대만은 당시로나 지금으로나 본디 중화의 본토가 아니므로 어쨌든 현재의 중국이 통일 중국임은 맞다. 아무튼 하트가 말한 것은 중화제국이라는 관념상의 이야기도 포함해 말하는 것이다.[3] 수문제의 죽음에 대해선 양광의 쿠데타 후에 살해되었다는 설과 자연사했다는 설이 맞서고 있다.[4] 태조(太祖) 무원황제(武元皇帝)로 추존.[5] 이름은 여고도(呂苦桃)로 원명황후(元明皇后)로 추존.[6] 《삼국지》의 양표, 양수 부자도 홍농 양씨였다.[7] 울지형, 사마소난, 왕겸 등[8] 하지만 안타깝게도 문제 양견이 붕어한 후에 제위를 물려받은 양제의 폭주 때문에 수나라는 건국한 지 38년 만에 몰락하는 비극을 맞이했다.[9] 현대에도 중화민국(대만)의 행정구역에 향진시구, 리통반으로 남아 있다.[10] 진시황이 하루에 150근의 서류를 저울에 재어놓고 모두 처리하기 전까지는 식사도 하지 않았다는 형석정서(衡石程書)라는 고사성어와 함께 군주가 모든 국정을 자신이 나서서 도맡아하는 경우를 가리킨다.[11] 수문제가 재위 중이던 606년 수나라 인구가 890만 7,000여 호(약 4,600만 명으로 추정), 당현종 재위 당시인 754년경의 당나라 인구가 906만 9,000여 호(약 5,288만 명으로 추정). 즉, 이 말은 수문제의 아들인 수양제가 이후 복구에 오랜 시간이 걸렸을 정도로 개막장짓을 했다는 것이다.[12] 그러나 아들인 수양제가 이를 다시 부활시켰다.[13] 요동의 (糞) 땅(土), 그러니까 자신을 최대한 낮춰서 "쓰레기 같은 땅에 있는"이라는 말을 쓴 것이다.[14] 이는 바꿔 말하면 수문제는 깡촌이나 다스리는 왕에게 패배했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15] 수당교체기때의 대군벌인 두건덕은 수문제 때 고구려에 패배했다고 발언했으며(문황제(수문제) 시절 천하가 강성하여 100만 대군을 일으켰음에도 오히려 고려에 패배했다.(文皇帝時, 天下盛彊, 發百萬衆伐遼東, 猶爲所敗) -《구당서》 <두건덕전>), 문헌황후 독고씨와 수양제 역시 전쟁을 복기하며 당시 고경의 지략이 모자라 고구려에 패배했다고 발언했다. 고구려-당 전쟁 때도 마찬가지로 당나라의 피해를 축소한 정황들이 많기 때문에 여러모로 걸러 듣는 것이 필요한 부분이다.[16] 이는 유송의 3대 황제인 문제 유의륭이 태자인 유소에게 살해당한 이후 벌어진 두번째 사태이다.[17] 선화부인은 원래 진(陳)나라의 황녀인 녕원공주로 진나라를 멸망시킨 총사령관이었던 양광과 그 시절부터 면식이 있었던 사이일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에 드라마 <연개소문>의 묘사처럼 양광이 선화부인에게 욕정을 품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을 가능성이 있다.[18] 혹은 진짜로 겁탈했다는 말도 있다.[19] 중국 학계에서는 수문제가 멸망시켰던 진(陳)나라의 황녀였던 선화공주가 복수를 위해서 양광을 유혹하는 제스처를 취해 부자지간을 이간질 했거나 또는 거짓으로 이야기했을 가능성도 배제하진 않고 있다. 곧 있으면 죽고 제위를 안정적으로 이어받을 수 있으며 후궁도 이미 많았던 양광이 바보도 아니고 굳이 그런 위험수를 둘 필요가 없긴 하다. 선화공주 진씨는 자발적인 결혼 또는 정략결혼이 아닌 나라가 불태워지고 강제로 잡혀 노예가 된 케이스에 가까웠기에, 수문제와 태자 양광에게 좋은 감정이 있진 않았을 것이다.[20] 출처 : 사마광, 권중달(역), 《자치통감》, <수기> 4권 604년[21] 다만 진시황은 초반에는 잘나가다가 통일 이후 지나치게 가혹한 통치를 펼쳐 민심을 잃었다. 무제 사마염도 천하를 얻은 뒤 후계 문제 등을 개판쳐 팔왕의 난이 일어나게 한 계기를 만들었다. 치세 후반부의 행보 때문에 평가를 깎아먹는 두 사람과 달리 수문제는 말년까지도 나라를 잘 다스렸다.[22] 혹은 개황의 치(開皇之治).[23] 그나마 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유럽연합이라는 연합기구가 출범하기는 했다. 다만 유럽연합은 어디까지나 국가연합 수준이고. 절대 통일국가는 아니다. 또한, 유럽연합도 내부 구성 국가들끼리의 내분과 의견 충돌이 심해서 출범 당시 미국과 대등한 수준의 새로운 초강대국이 될 것이라는 예측과는 정반대로 국제 무대에서 별다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24] 출저: 생각하는 힘-세계사컬렉션 15(수·당제국 세계 문화 중심지로 도약하다, 윤미리 지음 -54p-).[25] 양원수(楊元壽)의 아들.[26] 북주 선비족의 권문세가인 주국대장군 독고신의 딸로 어질고 근검절약하며 백성들에게 인자하고 존경받는 황후였다고 전한다. 양견이 일을 마친 뒤에는 함께 집으로 돌아왔고, 금슬이 좋았는지 밤이 깊으면 서로 안고 잠을 청했다고 한다. 또한 새벽에 일어나서 직접 황제가 세수할 물과 의복을 챙겨준 후 함께 가마를 타고 조정으로 갔으며, 정무를 처리하기 위하여 조정으로 들어갈 때면 황후도 남편과 함께 대전 밖까지 나란히 걸어 들어갔다. 당시의 법도로는 아무리 황후라 할지라도 황제와 함께 나란히 걷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남편이 조정에서 나랏일을 논의할 때 문헌황후는 대전 아래에서 조용히 기다렸다고 한다. 황후는 수시로 환관을 보내 황제의 언행을 살폈고 통치 시에도 수문제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무슨 잘못을 저지르면 반드시 시정하도록 했다. 원로들에게는 예를 갖추어서 대했으며, 딸들에게는 몸가짐을 신경쓰도록 했고, 공과 사를 구분해서 형제들을 비롯한 친척을 엄격하게 단속했다. 한 예로 황후와 가까운 친척이 죄를 짓자 황후의 친척이니 살려주려고 했지만, 황후는 이런 일을 사사로운 정으로 처리할 수 없다며 처벌받게 한 적도 있었다. 물론 의욕과 능력은 별개의 문제였던지라 황후의 개입이 좋은 결과만 부르지는 않았지만, 수문제는 이런 아내의 의견을 존중해주었다고 한다. 아마 자신을 받쳐주는 아내가 있다는 점이 지지 세력하고도 싸워야 했던 고독한 제왕의 마음에 크나큰 위안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당장 문헌황후는 자신의 출신 성분이 관롱집단이었음에도 양견의 정치에 지지를 표했다. 그래서 궁궐에서 “수나라에는 2명의 황제가 있다” 하고 이야기 할 정도였다.[27] 능력은 나름 좋았으나 은근슬쩍 여자를 밝히는 모습을 보였다. 그로 인해 어머니 문헌황후에게 미움을 받았고 둘째 양광이 사치와 방탕하다는 모함까지 하면서 결국 폐태자되어 방릉왕(房陵王)으로 강등되었다. 이후 양광이 찬탈을 하면서 우문지급을 보내 목졸라 죽였다.[28] 수나라 때 시호로, 흔히 알려져 있는 양제(煬帝)라는 시호는 추후 당나라 때 올린 시호이다. 황제로써는 아예 폐급이었던 다른 아들들에 비해서는 연기라도 할 줄 아는 등 능력이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으나 현실은 중국사 최악의 폭군.[29] 사치를 심하게 하고 여색을 밝혔으며 백성을 착취했다. 바람기가 얼마나 심했던지 그의 부인이 남편을 독살하기 위해 독약을 넣은 과일을 먹고 병을 얻어 죽었다. 하지만 양준은 그나마 일찍 죽은 터라 다른 형제들에 비하면 그렇게 비참한 말로는 아니었다. 그의 아들인 양호는 큰아버지 양광이 시해당한 후 그를 시해한 우문화급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으나 곧 살해당했다. 대신 수나라 관련 창작물에서는 등장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는데 드라마 <연개소문>에서는 다른 형제들과 달리 5화에서 언급만 하는 정도로 나오고 직접 출연하지는 못했다.[30] 평소 행실이 양준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양광처럼 욕심이 많아서 감히 황제가 되고자 하는 야욕을 드러냈으나 양광의 술수에 걸려들어서 거세되었다.[31] 그나마 수문제의 자식들 중에서는 정상이었지만 외지에서 세력을 키우며 황위를 노렸다. 수문제가 양광에게 죽자 형에게 죽기 싫어서 장례를 치르러 장안으로 오지 않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군사적으로 무능했기에 양광에게 패배하여 포로가 되어버린 뒤 죽었다.[32] 본래 이름은 양려화(楊麗華). 북주 선제 우문윤의 황후였으나 아버지가 황제가 된 뒤에 낙평공주란 칭호를 받았다. 우문윤과의 사이에서 딸이 1명 있었다.[33] 홍콩 TVB의 무협 드라마 <대운하>에서 여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드라마상에서의 이름은 '양아오'이며, 다섯 번째 자식이라서 이름을 '아오'라고 지었다고 언급된다.[34] 진(陳)나라의 황녀 출신으로 진선제의 14번째 딸이었다. 진나라 공주로서의 칭호는 녕원공주(寧遠公主)였다. 수양제 양광이 성적으로 노리고 있었던 인물로 이 인물이 수양제에게 겁탈당할 뻔한 사건으로 인해 수양제가 위기에 처하자 결국 (보통 추정되는 것처럼) 수문제를 죽이게 된다.[35] 야사에서 수문제의 총애를 받다가 문헌황후 독고씨에게 걸려 처형당한 후궁이다.[36] 사실 이것은 황제가 여색에 빠져 정사에 관심을 소홀히하고 방종해지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도 했다. 수나라가 세워지기 바로 몇 년전이 혼란함의 극치였던 위진남북조시대였고, 위진남북조시대에 황제들은 여색에 빠져 정사를 안돌보거나 치정 문제 때문에 살인과 폭력이 난무하여 정치가 혼란했었기 때문에 더욱 더 예민하게 여자 문제를 관리할 필요가 있기도 했다.[37] 1990년대생들에게는 마수리 할아버지로 유명한 이 배우는 2000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아자개 역을 맡았던 배우로 <태조 왕건>과 이환경|작가가 똑같았기에 아자개와 겹치는 부분이 많았고 아내 눈치만 보는 소심한 공처가에다가 궁녀를 더듬으며 실실 웃는 주책맞은 노인내로 부풀려서 영락없는 개그 캐릭터가 되었다.[38] 17화에서 나왔다. 대사는 "그래, 내가 이러고 노는 거 싫어해... 지금도 거리에 나가면, 굶는 백성들이 많아. 헌데, 황제라는 것이 주지육림속에 묻힐 수가 있느냐! 황제가 검소하지 않으면, 황제가 본을 보이지 못하면 신료들이 망가지고, 신료들이 망가지면 일선 관리들이 부패하는 거야!"와 "우리가 입고 먹는 것이 다 백성들에게서 나오는 거야... 이 못난 놈아!" 등이다.[39] 극 중에서 양광은 황위에 오르기 전까지 철저히 연기를 하면서 본 모습을 숨기고, 어디 하나 흠 잡을데 없이 완벽한 인물로 행세했는데 수문제는 인간이란 결코 완벽할 수 없으며 그럼에도 완벽하게 보인다는 것은 분명히 숨기는 것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다만 황후가 죽고, 자신도 병이 깊어지면서 "황태자가 다 알아서 하겠지, 뭐~"하는 태도를 보였다는 점은 변호 불가(특히 26회에서 양수와 양량이 양용이 처해진 상황에 대해 다시 한번 헤아려 달라고 간할 때도 아예 무시하는 것이 압권이었다).[40] 극 중에서는 진귀인이 계략을 꾸며 양광이 자신을 범하려 했음을 수문제에게 고하고 양광이 과연 숨기는 것이 있다고 깨달은 수문제는 양광을 태자 자리에서 폐하고 폐태자 양용을 복위시키라는 황명을 내렸다. 양광의 입장에서는 태자 자리를 내놓거나 황명을 억지로 틀어막고 수문제를 시해하거나 양자택일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41] 특히 장형의 얼굴에 시해당한 문제 양견의 피가 묻어 있었기에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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