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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5 00:44:24

구품관인법

구품중정제에서 넘어옴
1. 개요2. 고대 중국의 인사제도3. 시초4. 발안5. 특징6. 위ㆍ진의 구품관인법
6.1. 구품중정인가 구품관인법인가6.2. 구품관인법의 기원6.3. 구품관제와 구품관인법6.4. 향품과 기가관의 관계6.5. 기가관과 향품의 관계6.6. 향품과 관리 생활6.7. 관료 피라미드 내부 구조6.8. 구품관인법과 수재, 효렴6.9. 구품관인법과 제과, 시경6.10. 수재, 효렴제도의 쇠퇴6.11. 주대중정(州大中正)의 설치6.12. 구품관인법에 대한 비판6.13. 구품관인법과 청담사상6.14. 위진시대 구품관인법의 작용
7. 남조에서 발달한 유품
7.1. 강남 정권의 성격7.2. 상서의 인사권 장악7.3. 구품관제와 구반선제7.4. 문지 2품의 성립7.5. 한사의 실체7.6. 훈위의 성립7.7. 관료 피라미드 구조의 변천7.8. 한관(寒官)의 발달7.9. 장군호의 발달
8. 양ㆍ진시대의 새로운 경향
8.1. 양무제의 제도 개혁8.2. 유내 18반8.3. 유외 7반8.4. 기가관8.5. 온위(蘊位), 훈위와 서리의 기원8.6. 장군호8.7. 양무제의 귀족주의8.8. 학관과 시경제도8.9. 양대의 수재, 효렴 및 중정제도8.10. 진대의 임자제
9. 북조의 관제와 선거제도
9.1. 북위의 화북 통일9.2. 선비와 한인9.3. 효문제의 새로운 관제9.4. 유외 훈품과 입류(入流)의 문제9.5. 무관의 입선(入選)9.6. 북위의 중정9.7. 성족(姓族)의 상정(詳定)9.8. 북위의 수재, 효렴제도9.9. 북위의 봉건제도9.10. 기가제도9.11. 고과의 여행(勵行)9.12. 북제 치하의 새로운 경향9.13. 북주의 복고주의9.14. 수대의 새로운 제도9.15. 중정의 종언과 과거의 성립
10. 구품관인법에 대한 평가
10.1. 비판
10.1.1. 결과
10.2. 옹호
10.2.1. 문제점과 보완책10.2.2. 결론
11. 구품관인법과 과거제의 관계12. 매체

1. 개요

구품관인법()은 중국의 관리 등용 제도의 하나이다. 지방마다 중정이라는 관리들을 임명하여 이들로 하여금 덕행과 재능을 9품이라는 기준 하에 심사해 중앙정부에 천거하는 제도로, 구품중정제로도 불린다. 삼국시대위나라 문제 조비가 처음 시행한 이후 위진남북조시대를 거쳐 과거 제도가 본격적으로 시행되는 당나라 때까지 오랜 기간 존속했던 제도로, 중국의 문벌귀족 계층을 탄생시키고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공로를 했다.

2. 고대 중국의 인사제도

춘추전국시대에는 대개 부모의 관직과 작위를 자식이 세습하거나, 군주와 개인적으로 알게 되어 특별히 등용되는 형식으로 관리를 채용했다. 춘추전국시대의 많은 인재들의 전기를 보면 연줄을 타고 군주와 대화를 나누고 언변을 드러내 임용되는 일화를 흔히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인재 충원은 비교적 소수에 불과해 정말 실력이 뛰어나고 명망이 높은 소수의 인재들에 한정된 예외적인 사례였다. 선진시대는 대부분의 관직과 작위가 세습되었기에 사회 전반적으로 귀족적이었다.

한나라 시절에는 초창기에는 위와 같은 방법을 따라 관리의 채용 방법은 세습 임용이나 특별 등용 정도였다. 서한 초기에는 임자제(任子制)였다. 이 제도는 관록 2천 석 이상의 관리가 3년간 근무하면 자신의 형제나 아들을 1명 추천하여 낭관으로 올릴 수 있는 제도였다. 그러다 한문제 시기부터 각 지방에 인재를 '추천'해서 올리라고 명령을 내리면서 비상설적인 '천거'가 시작된다. 천거령은 여러 차례 반복되다 아예 상설화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향거리선제다.

유교 사상에 따라 지방관과 지역사회 내에서의 여론과 인품에 따른 채용을 하는 향거리선제는 기본적으로 군국제로 시작했기에 지방 통제력이 약했던 한나라가 종법적 가족질서와 유교정치를 바탕으로 지방세력을 중앙정부로 끌어들이는 연결고리로 작용했다. 지방 호족의 자제가 천거되어 중앙관료가 되면서 호족들이 중앙정계에서 떨어져나갈 동인을 상실하고, 이것을 유교적 시스템으로 포장하는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자연스럽게 이는 한나라 시대에 일반적인 관리 임용 방법이 되었다.

특히 애초에 지방 호족들의 지원을 받고 시작해서 지방세력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광무제한나라복벽에는 향거리선제가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 시기의 향론은 후한의 발달한 경제와 태학으로 대표되는 교육기관을 통한 민간 인재 육성 때문에 비교적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한말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안정적으로 작동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지방 유력자들의 여론을 고려해 천거한다는 구조였으니 지방 유력자 자제들만이 천거되는 것을 피할 수 없었고, 선발 기준이라는 것이 유교적 도덕률이 기반이라 검증할 방법이 마땅히 없었다. 그래서 후대로 가면 무능하고 딱히 도덕적이지도 못 한 인물들이 천거된 반면, 유능한 인물이라 해도 악평이 돌면 천거되지 못하는 부작용이 있었다. 이런 점 때문에 조조는 유재시거를 선포하며 '불인불효'도 상관 없다 해서 당대에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호족들이 중앙 관직으로 진출하는 시스템인 향거리선제에도 불구하고 실제 후한의 시스템은 전혀 다른 형태를 보여주었는데, 그 이유는 지방과는 상관 없이 존재했던 중앙권력의 존재, 환관과 외척 때문이었다. 중앙의 황제는 지방에서 올라온 관료들에 대항해 자신의 세력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해 지방에 권력의 근거를 두지 않는 환관을 중용하고 일부 세력을 외척으로 삼아 자신의 측근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환관과 외척을 측근세력으로 둔 황제권과 지방 호족들이 기반이 된 중앙관료들이 세력 균형을 이룬 것이 후한 초중반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일정 시기가 지나자 중앙관료들은 지방 호족으로서의 모습보다는 관료로서의 정체성이 강화되어 중앙귀족의 모습이 더욱 강해지면서 이런 대립구조가 약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권력이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시스템으로 이행되어가던 찰나에 하필이면 황제들이 잇달아 요절하면서 중앙권력을 둔 대립이 벌어졌다. 중앙귀족의 수장의 위치가 된 외척과 환관이 그 예이다. 이 과정에서 강해지던 황제권은 역으로 추락했고, 외척과 환관의 권력다툼에 지방에서 올라온 호족들이 엮이면서 향거리선제도 무너졌다. 특히 영제 시기, 부패가 극심해지면서 매관매직마저 성행하니 사실상 향거리선제는 그 기능을 상실해버렸다. "수재로 천거된 이가 글을 모르고, 효렴으로 천거된 이가 부모와 별거하고 욕심이 많으며, 용감한 장수라고 천거된 사람은 닭처럼 겁이 많다"는 포박자의 글은 천거제를 기반으로 한 향거리선제의 근본적 한계가 이 시기에는 완전히 걷잡을 수 없어졌음을 보여준다.[1]

3. 시초

이미 멈춰버린 향거리선제가 재기 가능성을 완전히 상실하고 파탄을 맞은 것은 후한 말의 대전란이었다. 향거리선제는 향론(鄕論)을 바탕으로 인재를 채용하는 제도인데, 엄청난 수의 민간인서주대학살 등의 살육을 당하고, 전란을 피해 다른 지방으로 집단으로 이주하거나, 권력자의 정책에 따라서 '강제 이주'를 여러 차례 당하면서 기존의 향촌 사회는 아예 붕괴되어버렸다. 예를 들어, 원상을 따라 오환족의 땅으로 이주했다는 인구가 약 10여만 호 이상, 조조와 손권이 유수구에서 전투 벌일 무렵에는 조조가 강제 이주 명령을 내리자 여강, 구강, 기춘, 광릉의 백성 10만 호가 강동으로 도망쳤다. 이렇게 엄청난 수의 인구가 우르르 이동하니 향촌사회가 기존의 권력구조와 사회질서를 유지하지 못 하는 것은 당연한 일. 이러니 향거리선제를 부활시켜 인물을 천거하는 기존 방법을 쓰고 싶어도 쓸 수 없는 상황이 된다.

이 와중에 잠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명사들의 인물평이다. 당고의 금 이후에 청담에 포함된 인물들이 자신들의 인맥이나 경험을 통해 지역 인물들을 평가하는 것이 일시적으로 향거리선이라는 공식적인 루트를 대체한 것이다. 이때의 인물평으로 유명한 것이 '월단평'으로 유명한 허정허소이고, 형주의 수경선생 사마휘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렇게 인물평을 들어 유명해진 인물들이 명사이고, 이런 명사들이 다시 여론을 형성하는 것이 삼국지의 초기 인물 형성 구조다.

이를 잘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조조다. 조조는 인물평을 받기 위해 허소를 찾아갔고 갖은 노력 끝에 '치세능신 난세효웅'(〈삼국지 위지 무제기〉 기준), 혹은 '청평간적 난세영웅'(《후한서》 기준)이라는 평을 듣고 기뻐한 것도 이를 통해 탁류에 속해 있던 자신이 청류의 세계에서 명사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특히 태위를 지낸 명사인 교현이 조조를 높이 평가한 것은 조조가 명성을 얻는 데 아주 크게 작용했다. 겨우 한마디에 뛸 듯이 기뻐한 것은, 명사의 평가를 얻어내지 못하면 몸으로 때우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면 손견은 명사인 원술의 밑에서 새빠지게 굴러가면서 명성을 얻었고, 유비공융을 도우러 가면서 당대의 명사인 공융이 자기 이름 한 마디 언급해준다고 감격한다. 심지어 유요허소태사자에게 좋은 평을 내리지 않았다 하여 그를 중용하기를 망설일 정도였다.

조조는 자신이 세력을 세운 뒤로는 일단 여론보다 다소 낮은 관품을 내려 즉시채용한 다음, 실력을 보고 나서 그에 준하는 관품을 내리는 방식을 사용하였다.[2] 예를 들어 순욱순유의 추천으로 정욱을 등용하고, 정욱의 추천으로 곽가를 등용하고, 곽가의 추천으로 유엽을 등용하고, 유엽의 추천으로 만총여건을 등용하고, 만총과 여건의 추천으로 모개를 등용하는 피라미드 상법 같은 인재 등용이다.[3]

그러나 위와 같은 방법은 긴박한 상황에서 인재를 모집할 때는 도움이 되었으나 안정된 사회에서 많은 인재를 끌어모을 때는 그리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한데, 군주가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단 한 사람이 전체 영토의 인재를 찾아내고 등용하기는 매우 어렵기 때문에 결국 등용한 신하의 추천으로 또다른 신하를 등용하는 꼴이 되므로 중앙정부와 연줄이 없는 사람은 등용되기가 매우 힘들다. 천거도 알아야 할 수 있는만큼 결국 이 방식은 아무리 뛰어난 인재라도 중앙정부에서 아예 모르는 사람은 등용될 수가 없다는 말이고, 그래서 조조는 반복적으로 구현령을 내렸다.

이 구현령에서 내건 것이 '불인불효 유재시거'인데, 한 마디로 요약해 만일 능력있는 사람이 있어 스스로를 추천해온다면 그 사람에 대한 향론이나 인간적 평판은 무시하고 오로지 능력을 바탕으로 평가해 심지어 뇌물을 받거나 형수를 범한 자라도 발탁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유교적 틀을 벗어났다는 것만 강조하지만, 간단히 말해 춘추전국시대로의 회귀다. 모수자천을 통해 오기와 같이 인격적으로 논란이 있는 인물이나 서한 초기의 명신 진평 같이 인물에 대한 악평이 존재하는 인물도 뽑아 쓰겠다는 것은, 군주인 자신이 직접 그 인물을 판단하여 선발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먼 훗날에 황제가 보는 앞에서 사람들이 모여 시험을 보는 "전시"에 조금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그러나 구현령은 기본적으로 군주의 인물 보는 눈에 지나치게 좌우되며, 극도로 많은 자천자가 등장할 때에는 군주가 그들을 모두 만나볼 수 없다는 근본적 문제가 있다.[4] 결국 조조의 구현령은 인재 선발에서 유교적 가치관이 걸림돌로 작용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공식 선언 정도로 끝나게 된다. 이조차도 극한 난세였던 후한 말 삼국시대, 그것도 조조가 살아 있을 시절에나 적용되었으며, 위문제 조비 때만 되어도 강하게 뿌리박혀 있던 유교적 정서 때문에 공식적 제도로는 발전할 수가 없었다.

4. 발안

이런 문제점을 감안하고 유교 사상에 따라 각 지역의 존경받는 인재를 끌어모으기 위해 진군(陳群)이라는 대신이 조비에게 구품관인법을 제안하여 실시하게 된다.[5]

구품관인법은 한나라의 향거리선제와 조조의 유재시거를 혼합, 장점만을 추려 만들었고, 지역 여론인 향론에 따라 현명함과 덕이 있음을 기준으로 개개 인물의 서열을 매겨 현자와 유덕자의 계층조직을 형성하도록 함으로써 지속적으로 양질의 인재를 중앙정부에 등용하도록 하는 제도였다. 여러 가지 부작용은 있었지만 결국 그 시초는 동한 시기 말기 인재에 대한 평론에서 상당 부분 아이디어를 따온 것이었다.

한나라는 아무래도 400년간 존속한 왕조이기 때문에 구석구석까지 위국의 의향이 철저하게 시행되지는 않는다. 역시 거기에 위 정부의 행동의 한계가 있었다.[6] 만약 모든 일을 위 정부가 생각하는 대로 하려고 하면 그 위에 있는 한나라 정부를 일거에 제거해 버리는 방법밖에 없다. 이른바 구품중정제, 미야자키 이치사다가 말하는 구품관인법은 이러한 시대를 배경으로 출현하였던 것이다.

5. 특징


일단 이런 특징을 가지고 있으면 이론상으로는 중앙정부의 생각과 각 지역의 여론을 종합해서 융화시킬 수 있으며, 실제로도 어느 정도 위나라의 조정내의 관료기구와 각 지방 사족이나, 호족들의 여론을 달래는 데 일조했다. 그리고 구품관인법을 시행하면서 초기에는 전란으로 흩어진 사족을 재규합하고 묻혀버린 인재들을 발굴하는 등 긍정적인 작용을 했다.

조위의 황제들은 전통적인 사대부 출신은 아니었다.[7] 그들이 전통적인 사대부 사회의 일원이 아니었다는 점은 건국 시에 사대부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편 전통적인 사대부의 사고방식을 갖고 있지 않았기에 이들은 오히려 강력한 황제 지배 체제 건설이라는 목표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사회적으로 사대부들이 그들만의 정치적 세계를 만들었기에 진, 한초와 같은 강력한 황제 지배 체제를 구축하는 것은 불가능한 상태였다. 결국 조위의 초대 황제인 문제는 구품중 정제라는 타협안을 통해 자신을 지지했던 사대부들에게 인사권을 보장해주며 사대부들을 국가 체제 안으로 포섭하였다.

그렇다고 구품중정제의 실시가 전적으로 황제권력의 패퇴라고 볼 수만은 없는 것이, 사대부들은 구품중정제에 의해 정치적 지위를 획득하고 권력을 보장받는 대신 국가 공권력에 의해 서열화됨을 감내해야 했기 때문이다.[8] 사대부들의 상호 추천이라는 점에서는 향거리선제의 연장이기도 하지만 결국 사대부들이 국가=중앙권력이 규정하는 서열과 체제 아래 포섭된다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9]

6. 위ㆍ진의 구품관인법

6.1. 구품중정인가 구품관인법인가

무릇 구품중정으로 계속 부르는 것도 아마 송나라 무렵부터 통상화된 명칭이고, 예전에는 《정사 삼국지 위지》 권 22 진군(陣群)전, 《통전》 권 14 등에 있듯이 모두 구품관인지법(九品官人之法)이라고 하였다. 《자치통감》권69 위문제기(魏文帝紀) 본문에는 정확하게 구품관인지법이라 되어 있다.

후한 말 황건의 난과 그 뒤를 잇는 군벌 동탁, 여포의 전횡으로부터 사방에 군웅이 할거하여 중앙 정부가 완전히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버렸을 때, 한나라의 천자를 끼고 사회 질서를 회복하여 전국 13주 가운데 9주를 평정한 것은 위왕 조조였다. 그는 건안 25년 정월에 죽었지만, 아들 조비가 위왕을 잇고 2월에 연호를 연강으로 고쳤다. 10월이 되자 조비가 한나라 헌제를 닦달하여 양위케 하였고, 이에 위조가 성립하였다. 동시에 연호도 황초로 고쳤기 때문에 이 해(220년)는 1년 사이에 건안 25년, 연강 원년, 황초 원년이라는 세 개의 연호를 가지게 되는 드문 해이다.

그런데 이른바 구품중정제도, 미야자키 이치사다가 말하는 구품관인법은 이 해 연강 원년으로 일컬어지고 있던 기간, 곧 2월에서 9월 사이에 반포되었던 것은 확실하다. 이 제도는 지방의 군국에 각각 중정직을 두어 관내의 인물에 대하여 향리에서의 평판을 참작하여 1품에서 9품까지 등급을 매겨 정부에 상신하고, 정부는 이 상신한 품급에 따라 관직에 임명한다는 것이 대략적인 취지이다.

구품중정 혹은 구품관인법에서 9품이라는 것은 중정이 내리는 평점의 9품, 곧 향품의 9품인 것은 일단 인정해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위대에는 이것과 조금 성격이 다른 관품의 9품이 있었다. 대개 한대 관료의 등급은 질(봉록)의 수로 나타나고, 질의 많고 적음이 그대로 상하의 계급이었다. 곧 위로는 삼공이 통칭 만 석으로서 월봉 350곡(斛)이며, 다음은 중 2천 석의 월봉 180곡에서부터 아래로는 좌사(佐史)의 월봉 8곡까지 모두 17등급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것이 위나라가 되면 봉질의 등급 이외에 1품에서 9품까지 관품의 등급이 부가되었다. 삼공은 물론 1품이며, 구경은 대개 질 중2천 석 제3품이며, 이로부터 내려가 현위(縣尉)의 질 2백 석 제9품에 이르는 것이다.

이 관품제도는 위대에 시작된 이후 약간의 변화를 거치면서도 청조 말까지 1700년이나 계속되었기 때문에, 확실히 중국 역사상 중대한 사건이다. 중정이 내리는 향품 9품은 중정과 함께 늦어도 수대에는 소멸해 버렸기 때문에, 이것에 비해 관품 9품제의 시작과 관련된 기사는 종래의 해석에 따르는 한 중국사에서 그 흔적이 인정되지 않는다. 다만 위대의 어떠한 관직이 몇 품이었는가 하는 관품표는 훨씬 후대의 편찬이기는 해도 《통전》 권 36 직관조(職官條)에 실려 있는 것을 볼 수는 있지만, 그 시작 연대도 어떠한 목적에서 시작되었는가도 쓰여 있지 않기 때문에 후세의 연구자도 고증의 실마리가 없어 결국 판단할 수 없게 되어 있는 듯하다.

6.2. 구품관인법의 기원

한나라 황제가 제위를 위왕에게 선양하게 되면 형식적으로는 위왕이 한 조정에 들어가 황제가 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위국의 관료가 그대로 중앙 정부에 눌러앉고 지금까지의 한 조정의 관료가 실업하는 것이 된다. 만약 전부가 실업하는 것을 알게 되면 그들은 힘을 다해 한, 위의 선양에 반대할 것이고, 만약 위국 측이 끝까지 이것을 강했하면 어떤 사태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 없다. 실제로 조조 말기 위나라에 일어난 분란은 그런 성격이 강했던 것이다. 그래서 선양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는 한 조정의 관료를 가능한 한 위나라의 새로운 정부에 흡수하여 실업시키지 않는 것을 보증하고 안심시킬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미 이중 정부를 해소하여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 목적인 이상 한나라의 관료를 관료 체계 그대로 흡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단 한나라의 관료 체계를 해체하고 개인으로 환원한 뒤에 개인의 재능에 따라 새로운 정부에서 적당한 지위를 주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해결책이 된다.

그런데 다가올 위나라의 새로운 정부가 한나라의 관료를 개인으로서 영입한다고 해도 조건 없이는 불가능한 이유가 있었다. 그 하나는 한왕조 관료의 자질 문제이다. 후한 말의 선거, 곧 관리 등용은 조조가 등장할 때까지 극도로 부패해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에 또 하나 위국측이 한나라의 관료를 조건 없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는 한나라의 관료 가운데 반위적인 감정이 여전히 뿌리깊이 남아 있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이다. 한나라의 관료 개인을 받아들이는 위국 측에서는 일단 인물의 자격을 심사하지 않을 수 없다. 구품관인법은 실로 이러한 필요에 의해 창시된 것이다.

6.3. 구품관제와 구품관인법

이 자격 심사는 결국 위국 측의 의향대로 실행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정부 스스로가 하는 것은 공평을 기약할 수 없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그래서 이것을 본적지로 넘겼는데, 여기서 생겨난 것이 군국의 중정이다. 군국의 그 지역 사람 가운데서 중정을 뽑아 그에게 자격 심사를 위임하였던 것이다. 중정의 인물에 대한 평점이 1품에서 9품까지 9등이었던 것은 앞에서 말한 대로다. 중정이, 이 사람은 2품관이 될 수 있는 재덕이 있다고 판단되면 제2품으로 평점하였음에 틀림없다. 다시 바꾸어 말하면 관품9품의 존재를 전제로 한 향품 9품이었던 것이다.

6.4. 향품과 기가[10]관의 관계

그런데 한-위의 선양을 앞에 두고 임시의 조치를 목적으로 실시된 구품관인법도, 항구적인 제도로서 존속하게 되면 그 성격도 조금 바뀌어야만 했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현임관을 주대상으로 한 자격심사였지만, 이번에는 신임관을 주대상으로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거기서 생긴 것이 중정이 내리는 향품과 실제 임관할 때의 9품이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다는 현실이었다. 그러나 최초의 경우에도 향품 2품을 얻었다고 해서 바로 관품 2품의 지위에 임명되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거기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중정이 향리의 평판에 따라 9품을 내렸다면 그 9품은 지금의 상태는 아니고 먼 장래의 귀착점을 예상한 상태에서다. 당시 향리의 평판이라는 것은 반드시 신뢰할 만한 것만은 아니고, 때로는 예상을 벗어날 위험이 많았다. 즉 이것이 구품관인법의 본질적인 약점 가운데 하나였음을 알아야 한다. 이 때문에 발생한 것이 향품의 등급에 비례해서 초임관의 관품을 적당히 조절하는 방법이다.

요컨대 향품보다도 기가관은 4등씩 내려져 있기 때문에 기가관에서 4등 승진했을 때 그 관품과 향품의 수가 일치하게끔 원칙이 정해져 있었다. 다만 실시 때에는 상하 1품 차의 범위 안에서만 재량권을 행사하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상상해도 좋을 것이다.

6.5. 기가관과 향품의 관계

향품은 문벌에 따라 결정되었다. 문벌은 원래 세월을 두고 쌓여서 생기는 것이므로 고위의 귀족은 그 문벌이 더욱 높아져서 문벌 집안 가운데 다시 여러 등급의 계층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러한 가문의 지체를 문지라 하고. 문지의 높고 낮음을 유품이라 한다.

아버지가 획득한 지위가 어떤 형태로든 아들에게 전해지는 것이 임자의 정신이라고 한다면 구품관인법은 아마 성립 초기부터 임자의 정신을 가지고 운용되었다고 생각된다. 바꾸어 말하면, 구품관인법은 한대의 임자제도를 그 안에 온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임자는 그것이 반복되면 귀족제도와 별로 다른 점이 없다. 이 점에서도 구품관인법은 귀족화할 위험을 처음부터 내포하고 있었다.

다만, 한나라제도는 2천 석 이상을 경계로 했는데, 구품관인법은 앞서 말하였듯이 2천 석 이상을 5품으로 세분하고 있고, 주안점은 제3품 이상의 관의 아들이며, 제4품, 제5품 관의 아들은 임자에서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6.6. 향품과 관리 생활

이렇게 보면 중정이 주는 향품은 그 사람의 관료 생활과 중대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초임관이나 기가의 조건이 매우 다르다. 향품 1품은제쳐 두고, 2품을 받고 6품관에서 기가하는 자와 5품을 받고 9품에서 기가하는 자는 출발점에서 이미 3등의 차이가 있다. 더욱이 그 뒤의 관위 승진에서도 적지 않은 차별 대우가 주어졌던 듯하다. 그것은 기가관에서 점차 관위가 오를 때, 받은 향품의 등급에 따라 이후 승진할 길이 대개 정해져 있었던 듯한 것이다.

군국의 중정은 본래 중앙의 사도에 속하며 상서와는 다른 계통이었다. 곧 사도, 중정은 관리 자격을 주고, 상서는 실제 관리의 임면과 출척(黜陟)을 행한다. 그러나 사도는 정1품의 대관이므로 실제의 일은 그 속관인 사도좌장사(司徒左長史), 좌서조(左西曹)의 연속이 취급한다. 군국의 중정은 먼저 군국으로부터 추천받아 사도부에서 임명한다는 형식을 취했던 듯하다. 중정에는 전관(專官)과 영관(領官)이 있다. 영관이란 중앙 정부 근무의 이른바 내관(內官)이 본직 이외에 중정을 겸직하는 것이다.

중정은 그 부하에 청정(淸定), 방문(訪問) 등을 두고 끊임없이 임관자, 미관자(未官者)의 평판을 탐문하도록 한다. 그리고 평판의 여하에 따라서 앞서 내린 향품을 수시로 개정할 수 가 있다.

6.7. 관료 피라미드 내부 구조

관료제는 상층으로 갈수록 수가 적고 하층으로 갈수록 수가 많기 때문에 하나의 피라미드로 간주할 수 있다. 이미 향품에 따라 기가관의 관품이 정해지고 또 그 뒤의 승진의 경로도 대개 정해졌다. 같은 계급의 관품이라도 그것이 향품과의 관계에 따라 몇 종류로 나뉜다. 예컨대 같은 6품관이라도 향품 2품인 사람이 기가해서 나아가는 관직, 향품 3품인 사람이 7품관에서 올라와서 나아가는 관직, 이하 순차적으로 내려가 마지막으로 향품 6품인 사람이 훨씬 하위로부터 올라와서 여기서 끝나게 되는 관직 등, 무릇 다섯 종류의 관직이 있었다. 그런데 6품관의 경우, 이 6품관이 향품과의 관계에서 대개 다섯 종류로 분류된다면 어쩔 수 없이 같은 관품 속에 우열이 생긴다. 예를 들면 같은 6품관이라도 비서랑은 가장 우수한 청년 관리로서 향품 2품을 얻은 자가 언제나 취임하였고, 종사중랑은 다음에 자리하는 향품 3품자가 취임하였으며, 내려가 시어사(侍御史)는 보통 노후한 향품 6품자가 퇴직전에 임명되는 관직이라는 것이 되면, 이번에는 그 경력이 그 관직에 우열을 짓는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 가운데 우수한 자가 나아가는 관을 청관이라고 하고, 열등한 자가 나아가는 관을 한관(寒官: 탁관)이라고 한다.

6.8. 구품관인법과 수재, 효렴

위나라 구품관인법의 본래의 의도는 순수 관료적인 성질을 띤 것으로, 문벌을 떠나 개인의 재덕에 따라 적당한 지위에 적당한 인재를 발탁하는 데 있었다. 그런데 한대 이래 사회에 세력을 떨치고 있던 귀족주의는 갑자기 이 제도를 귀족적인 것으로 변질시켜 버렸다. 아니 구품관인법은 그 실시 처음부터 사뭇 귀족적으로 운영되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던 듯하다. 세력가의 자제가 특별 대우를 받는 것이 귀족주의의 시작이고, 그러한 사실이 쌓여서 귀족제가 성립하는 것이다. 구품관인법의 운영이 귀족적이었다는 것은 다른 측면에서도 고찰할 수 있다. 그것은 한나라 이래의 다른 선거법, 즉 수재,효렴,현량,태학시경(太學詩經) 등과 비교하면 알 수 있다.

수재, 효렴의 급제자는 한대처럼 낭에 임명되었고 각 주마다 한사람이었을 것이다. 주군에서 천거된 수재, 효렴은 중앙에서 시험을 본 뒤 성적에 따라 제(第)가 덧붙여졌는데, 제는 중정이 내리는 향품에 대응되었다. 그리고 수재의 성적은 3등으로 나누어졌던 듯하며, 가령 이것을 갑을병으로 이름 붙이면, 갑은 향품 2품에 상당한다. 특수한 사례를 제외하면, 보통 병에 급제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효렴은 수재보다 조금 자격이 낮다고 알려져 있다. 수재는 주에서 천거되고 효렴은 군에서 천거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중앙에서의 시험도 수재에게는 책(策)을 묻고 효렴에게는 경서의 뜻을 묻는다. 경서의 뜻은 보통의 재능자라도 독서량에 의해 대성할 수 있지만, 문학적인 대책은 천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성적에 따른 향품은 수재와 별로 차이가 없었던 듯하다. 곧 효렴의 기가관을 보면, 역시 갑을병 3등이 있고, 그대로 수재의 그것과 대응했던 듯하다.

6.9. 구품관인법과 제과, 시경

수재, 효렴 같은 과목이 일반적인 선거였던데 대해서 제과(制科)에 해당하는 방식으로서 때에 따라서 인재를 구한다는 취지였던 후세의 선거 방식은 이미 한대부터 존재하였고, 위, 진도 이것을 계승하였다. 위, 진에는 현량과가 많았는데, 이밖에도 방정(方正),직언(直言) 등의 과목도 있었다. 현량과도 역시 갑을병 3등으로 나뉘어 있었다. 다음으로 태학에서 학생에게 경서를 시험하는 제도가 있었다. 태학에서 학생에게 경서의 뜻을 시험하는 경우도 최하의 급제는 향품 4품자에 상당하였고, 다른 공거(貢擧)의 사례와 대비해서 생각하면 병이었을 것이다. 종합하면, 수재, 효렴, 현량, 시경은 모두 갑, 을, 병 3등으로 나누고, 병은 다시 상하로 나뉘어 있었던 듯하다. 그리고 그것이 향품의 2품,3품,4품에 대응되어 있었다.

6.10. 수재, 효렴제도의 쇠퇴

이 당시 수재, 효렴을 천거하는 것은 주군의 장관인 자사, 태수의 책임이지만, 실제로는 중정이 고문을 맡았던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시험을 실시하는 것은 상서였다. 때로는 천자 스스로 책문을 행하는 일도 있었다. 수재, 효렴 및 현량 등의 제과에서도 규칙상으로는 그 성적에 의해 향품 2품 내지 4품을 줄 수 있게 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2품, 3품이 주어지는 경우는 매우 드물고 거의 대부분이 4품으로 제한되어 있었던 듯하다.

게다가 불리한 것은 당시 점차 귀족주의가 만연하여 개인의 재능에 따라 상품을 얻은 자에 대해서는 이부가 관위를 주는 데 인색하였던 듯하다. 이런 현실은 또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사도부와 상서의 차이가 이미 나타났다고도 할 수 있다. 사도는 단순히 자격을 심사하여 관리의 자격을 줄 뿐이지만, 실제로 임명하는 것은 이부의 일이다. 사도부는 이부의 인사에 간섭할 수 없기 때문에 단순히 관리의 자격을 줌으로써 일이 끝난다. 결국 인사의 실권을 쥐고 있던 이부 쪽이 강했던 것이다. 이부에 의한 인사권의 장악이나, 사도, 중정의 유명무실화는 이미 위, 진의 교체기에 그 단서를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세력 있는 집안의 자제로 이미 높은 향품을 얻은 자나 혹은 얻을 가능성이 있는 자가 다시 시험을 받는 것은 적지 않은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래서 수재, 효렴이나 현량의 천거는 배경이 없는 빈천한 자제만이 응시하게 되고, 세가의 자제는 가령 천거되어도 사퇴하는 풍조가 일어났다. 이렇게 되면 점점 수재, 효렴의 지위는 하락하게 되고, 시험을 보는 것도 형식적으로 시행될 뿐이며, 대체로 채점은 병으로 정해졌다. 그렇게 되자 차라리 시험을 폐지해 버리려는 상황에까지 이른다.

한편, 위왕조가 성립하여 강력한 군대를 배경으로 중앙 집권 정부를 수립하자 그것에 반비례해서 지방 세력이 약해졌다. 또 중앙은 의식적으로 지방을 억눌러서 중앙에서 통치하기 쉽게 군을 잘게 나누었다. 그리고 한번 중앙 정부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한 세력가는 그대로 눌러앉아 자손에게 그 지위를 전하려는 경향이 강하였다. 이것은 중앙에서도 지방 피라미드를 디딤돌로 이용하여, 그 위에 전국적인 귀족 피라미드가 형성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이것에 대하여는 구품관인법이 처음부터 귀족적으로 운영된 것도 큰 원인을 이루고 있지만, 위나라 말기에 중정제도가 개정되어 군중정 위에 주중정이 다시 두어진 것이 점점 이 경향을 결정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6.11. 주대중정(州大中正)의 설치

위나라가 구품관인법을 시행하기 위해 지방에 설치한 중정은 처음에는 군중정뿐이었다. 하지만, 위나라의 대신 사마의의 건의로 위나라 말기에 주중정이 설치되었다. 아마 종실은 중정이 될 수 없는 것을 이용하여 사마의의 심복을 지방의 주대중정으로 많이 임명하여 자기 세력의 온존을 꾀하고, 또 지방 호족과 미리 연락망을 몰래 마련해 두려고 꾀하였는지도 모른다. 주대중정이 두어지게 되면, 이것은 군중정과는 성격이 다르다. 왜냐하면 한대까지 지방 자치의 단위는 군이고, 주는 단순히 이것을 감독하는 구분에 불과하며 결코 군 위에 두어진 행정 구분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위, 진 이후도 군은 행정 단위였어도 자치단체적인 색채가 강하다. 주도 마찬가지로 행정 단위이기는 해도 중앙에서 파견한 기관이라는 색채가 농후하다. 따라서 새로 설치된 주대중정이 군의 여론을 종합하기보다는 중앙의 방침을 하달하고 군중정을 감독하는 입장에 놓이는 것도 자연스런 추세이다. 주중정이 설치되자 향품의 결정권이 점차 중앙으로 집중되고 동시에 귀족화되었다.

주대중정이 신설되어 군중정의 신분에 간섭하게 되면 여기에 사도-주대중정-군대중정-군소중정이라는 통속 관계가 생기고, 이른바 일종의 관료 조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계통 속에 편입되어 약간이나마 상하의 개인적인 관계가 성립함으로써 점차 그 독립성이 상실되어 갔다. 그리고 위로부터 억압된 울분은 때때로 아래로 내려가 배출구를 찾으려 하는 일도 있다. 따라서 임명된 중정이 지방의 관리 후보자에게 내리는 향품 또한 매우 자의적으로 결정되었다. 여기서 중정이 내리는 향품이 자의적이라는 것은 어떤 일정한 방향이 있었는데, 그것은 귀족주의였다. 중정의 원래 임무는 아래의 여론을 듣고 이것을 위에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중앙의 사도가 주중정의 신분을 결정하고, 주중정이 읍중정의 신분을 결정하게 되자, 위에서 아래로의 통로가 크게 열리게 되었다. 따라서 중정이 내리는 향품도, 아래의 여론을 위해 전달하기보다는 위의 의향에 영합해서 아래의 여론을 날조하는 결과에 빠졌다.

중정은 말 그대로 중립을 지켜야 하지만 진짜로 완벽한 중립을 지키는 인사는 예나 지금이나 찾아보기 힘들었다. 때문에 각 중정들끼리 담합해서 자신들과 관련을 가진 사람들에게 상품의 상신서를 올리거나 서로를 중정으로 추천함으로써 자신들을 지지하는 파벌을 만들 수 있다. 사마의 일당이 바로 이런 식으로 조위의 기반을 허물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마씨는 일단 집권하자 군대중정과 군소중정에게도 중앙 관직을 겸직시키고 주대중정이 일방적으로 휘두르지 않도록 나름의 장치를 만들었으며, 주대중정이 의견을 올린다고 해도 다시 중앙 이부에서 심사하도록 제도를 바꾸어 견제장치를 마련한다.

구품관인법은 애초에 각 지역의 여론인 향론이 제대로 기능을 하지 않기에 마련한 제도였다. 향론이라 해도 사실상 중앙정부의 중정이 생각한 향론이 되게는 하지 않도록 몇 가지 견제 장치는 마련해두었으며, 이런 견제 장치가 이론적으로 완벽히 작동한 건 아니지만 기능을 발휘한 건 사실이다. 오히려 이런 견제 장치가 지나치게 강화된, 즉 중앙 이부의 심사나 나중 가서는 그마저도 안 통하게 북조 무인 집단의 여론 시위가 먹히게 되면 중정 자체가 무력화되면서 그야말로 지방 민심 자체는 완벽하게 무시되는 것이다.

거기에 뒤에서 말하겠지만 동진 이후 귀족사회가 완성되자 중정들은 사실상 무력화되었고 이부의 판단이 절대시되자 그야말로 지방 민심이 무시되는 빈도나 사태가 잦아지게 된다.

6.12. 구품관인법에 대한 비판

구품중정법의 결함에 대해서는 이미 위나라 때부터 일부에서 비판의 소리가 나오고 있다. 사마의가 태부로서 주중정을 신설하려고 하였을 무렵, 《정사 삼국지》 권 9 하후현전에 나타난 요지를 보면 중정의 존재가 관장(官長)의 권한을 침범한다는 데에 있다.[11]진서》권 45 유의전에 실린 글에 따르면 중정을 두는 것은 여덟 가지의 손해를 낳는데 이는 귀족주의의 폐단, 주도(州都)의 폐단, 참 재능자 무시의 폐단, 무책임의 폐단, 능력의 한계를 넘는 폐단, 헛된 명성의 폐단, 품장(品狀) 부당의 폐단, 실효를 얻지 못하는 폐단만 있을 뿐이고 아무런 이익이 없으므로 마땅히 완전히 폐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중정을 두어서 선비들의 품급을 9품으로 정하게 하여 그 품급을 높이거나 낮게 평점하고 있으니 선비들의 영광과 욕됨이 그의 손에 달려 있고, 인주의 위엄과 벌을 내려주는 권위를 조종하니 천조의 권세를 빼앗은 것이며, 공적으로는 삼사에 대한 부담을 지지 않고 사적으로는 다른 사람의 숨긴 것을 꼬집어 내놓는 일에 대한 거리낌도 없습니다.

마음을 쓰는 것이 수백가지 형태를 띠고 있어서 만가지의 실마리 속에서 영리를 구하게 되니, 염치와 양보하는 기풍이 없어졌고, 다투고 송사를 하는 풍속이 만들어 졌으니, 신은 가만히 성스러운 우리 조정을 위하여 이를 수치스럽게 생각합니다.

대개 중정(中正)을 설치하여 정치의 도에 손해를 끼치는 것에는 여덟가지가 있습니다. 높은 사람이건 아랫사람이건 강한 사람인가 약한 사람인가만 쫒고 있으며,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지도 흥하는 사람인가 쇠퇴하는 사람인가만을 보고 쫒고 있어서 똑같은 사람이라 하여도 열흘 사이에 상황이 달라지고 있으니 상품에는 한문이 없고, 한문에는 세력있는 사람이 없으니 이것이 첫번째입니다.

주도(중정)을 둔 것은 본래 주리에서 청렴하다는 평을 받아서 모든 사람이 그에 귀의하여 복종하는 바여서 장차 여러가지 의견이 있을 경우 이를 진압하여 한마디 말로 향론을 결론 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그 직책은 무거운데 그 일을 맡은 사람은 가벼우니, 공박하고 어기는 향론이 주리에 횡행하여 대신들 사이에서도 서로 미워하고 원수같이 대하는 틈새가 생겨나게 되고 있으니 이것이 두번째입니다.

본래 인격을 구별하는 체계를 세워서 구품으로 한 것은 재주와 덕에서 우수한 사람과 열등한 사람을 구분하려는 것이고, 연배에서도 나이 많은 사람과 아랫 사람을 구분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마침내 우열이 있을 자리가 바뀌고 머리와 꼬리가 거꾸로 되었으니 이것이 세번째입니다.

폐하께서는 선한 사람에게 상을 주시고 악한 사람에게 벌을 주시는데 법을 가지고 재단하지 않은 것이 없는데, 오직 중정을 두어 한나라의 중요한 일을 위탁하면서 일찍이 상을 주거나 벌을 주면서 잘못 된 것을 막으려는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이 그에게 소송을 걸지 못하도록 하였으니, 그로 하여금 종횡하면서 멋대로 모든 일을 하게 하여 돌아보거나 꺼리는 바가 없고, 여러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억울한 사정을 가슴에 품고서 옳은 생각을 쌓아두고도 보고를 올릴 수 없게 되었으니 이것이 네번째입니다.

한 봉국의 선비가 많은면 천명을 헤아리게 되는데, 이 가운데는 혹 떠돌아다니다가 다른 지방으로 이사를 갔고, 어떤 사람은 다른 지방에서 먹을 방도를 찾고 있어서 얼굴을 대하여도 알지 못하게 되었을 것인데, 하물며 그들의 재주의 경우이겠습니까? 그런데 중정이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품급을 모두 정하면서 각자에 대한 상황을 설명해야 했으니 칭찬하는 말은 관부에서 들은 것이고 깎아 내리는 말은 흘러다니는 말에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자기의 판단에 맡겼다면 잘 알지 못하는 가운데 처리하였다는 폐단을 갖고 있는 것이며, 듣고 받아들였다면 피차간에 치우침을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다섯번째입니다.

무릇 인재를 구하는 것은 백성들을 잘 다스리고 싶어서인데, 지금 관직을 담당한 사람의 업적이 드러났는데도 혹은 하품에 있고 관직에서의 업적이 없는데도 높은 서열에 올라 있게 되니, 이는 공로와 실제를 억누르고 헛된 명성만이 융성하는 것이며, 들뜨고 화려한 것을 장점으로 삼고 업적을 상고하는 것을 폐지한 것입니다. 이것이 여섯번째입니다.

무릇 관리라 하여도 사람이 다르고, 해야 할 업무라 하여도 똑같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그 재능이 마땅한지의 상황을 제대로 살피지 아니하고 다만 차레로 9품을 매겨놓고 품급만으로 사람을 채용하기 때문에 혹은 재능으로 보아 잘하는 것이 없는 사람이라도 그 품급에 올라 있는 상태에서 사람을 뽑게되니 본래 가지고 있는 품급이 제한을 받게 되어 헛되이 공론만을 늘어놓아서 품급과 상황을 설명한 것이 서로 맞지 않습니다. 이것이 일곱번째입니다.

9품에서 하품에 올라 있는 사람도 그의 허물을 드러내 놓지 아니하고 있으며, 상품에 올라 있는 사람도 그의 훌륭한 점을 기록해 놓지 않게 되어 있어서 각기 애증을 가지고 그의 사사로운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심어놓고 있으니 사람들이 어찌 덕행을 쌓고 사람과의 관계에 예의 주목하는 데 게으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여덟번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가지고 이것을 평론한다면 직책의 이름은 중정이나 실제로는 간부(간사한 관리)입니다. 업무를 말할 때에는 9품으로 이름 붙였으나 8가지의 손실이 있습니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국가에 손해를 준 것 중에 이보다 더 심한 것은 없습니다. 어리석은 신이 생각하기로는 의당 중정의 제도를 철폐하고 9품제도도 없애서 위나라 시대의 폐단 있는 법을 없애고 한(漢)시대의 아름다운 제도를 다시 만들어야 합니다.

위관 역시 이 제도에 비판을 가했다.
위관은 위가 구품(九品)을 세우고 이것으로 때에 맞추어 임기응변의 방도로 일을 처리하는 제도로 삼았지만, 이는 다스리는 길에 통하지 않는다 여겨 옛 향거리선(鄕擧里選)을 회복하고자 했다. 태위 여남문성왕과 더불어 상소하였다.

옛 성스러운 왕은 어짊을 숭상하여 선한 가르침을 듦으로써, 조정으로 하여금 덕으로 사양하게 하여 민간에 악한 행실이 없게 했습니다. 마을에 있는 다섯 사람의 일에도 정성을 다했고, 서로 검소한 것으로써 족히 여겼으며, 일을 물어 온다면 그를 헤아리고 답하여 그것이 반드시 좋게 처리되게 하였고, 사람이 천명을 알아 빈 곳에서 구함 없이 옛 것으로 돌아와 몸을 수양하도록 했습니다. 이제 어짊을 숭상하는 풍속은 더욱 아름다워지고 악한 것을 내치는 행실은 더욱 도타워졌습니다. 이 향거리선으로 등용된 사람들을 본보기로 삼아 선왕의 법을 널리 펴야 합니다.

이 법은 더욱 내려감으로써 처음에는 성하였지만 점차 쇠하고 있습니다. 위씨(魏氏)는 전복하는 운명을 이어 상란(喪亂)의 뒤에 일어났는데, 인사들이 떠돌아다녀 깊이 생각할 땅이 없었으므로 구품의 제도를 세워 한때의 인재를 선별하는 방도로 삼은 것입니다. 비로소 이것이 만들어지자 향읍의 청의는 작위를 잡지 못하고 포폄을 당했는데, 이가 오히려 학문을 권하고 격려하는 데 넉넉하여 향론의 남은 풍습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의 가운데가 점점 물들자 재물을 계산하고 품을 정하여 천하를 관망하게 했는데, 사람이 오직 귀한 위에 거함으로써 덕을 버리고 불도를 수행하여 뾰족한 칼의 끝에서 많고 적은 것을 다투었습니다. 이가 풍속을 손상하여 그 폐단이 미미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아홉 지경이 한가지로 바로잡혀 광대한 덕화가 비로소 사방에 시작되었는데, 신 등은 모두 방탕한 법규를 모두 말법에서 덜어내어 얫 제도와 비기고, 토단土斷을 정하여 공경의 아래로써 모두 거하는 곳을 바르게 하게 하고, 다시는 현의 손님으로서 먼 무리의 다른 땅에 있는 사람이 없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향료의 다섯 사람이 모두 읍과 리가 되어 군현의 재상이 된다면, 곧 장에 거하여 구품의 제도를 다하여 바로잡고, 좋은 재주를 가진 자를 나아가게 하여 각각의 향론으로 말미암게 하십시오. 그런즉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공경하게 하고, 사람을 편안히 가르쳐 풍속과 더불어 정사를 갖추고, 법을 나란히 맑게 구제하십시오. 사람들이 선함과 선하지 않은 것을 알게 하고, 교류 없이 곧 서로 화려한 것을 다투게 하면 각각 자신에게 구할 것입니다.

이제 구품을 덜고 옛 제도에 따라 조신들이 한가지로 사람을 천거하여 길손의 넓은 재주를 드러내게 하시고, 또 어짊과 공평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힘써 나아가게 함으로써 그 자리의 명암을 밝히고 정성스레 법을 펴야 합니다.

무제는 이를 좋게 여겼지만 이를 따라 고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중정이 설치되기 이전 한대의 인사는 어떻게 시행되었는가 하면 결국 관장의 재량에 맡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관장은 고과에 따라 발탁 임명되었다. 중앙과 지방의 관장은 속관의 진용 편성에 대하여 절대적인 권한을 갖고, 대개 벽소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관장은 자기가 벽소한 속관의 성적을 보고 공과표를 작성한다. 특히 지방에서는 군태수가 그 속관 가운데 성적이 우수한 자를 효렴으로써 중앙으로 보내는 것이다. 그가 중앙의 시험에 통과해서 낭관이 되면 그는 천자 직속의 관원이 되었다. 이것은 이미 장관, 차관이 될 자격이고, 중앙과 지방의 중요한 직무에 나아갈 수 있다. 그는 취임직전에 또 소속 관장의 감독을 받고 고과에 의해 전최(殿最: 우열)의 채점을 받게 된다. 이 채점 결과 지위의 오르내림이 행해져 성적이 좋으면 점차 높은 지위에 등용된다고 하는 기구였던 것이다.

서진시대 구품관인법을 향하여 쏟아진 비난은 뜨겁게 논의되었고, 서진 시대에는 아직 귀족 사회가 완전히 정착되기 전이었기에 서진 정권은 운용에 있어서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구품관인법 비판론자를 중정으로 받아들이거나, 공정하게 중정을 운용하는 상류층 귀족 출신이 등장하는 것이고. 귀족 사회가 중정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는 여건은 남조(남제 이후)나 북조(육진의 난 이후)에 훗날 진행되는 여러 사정으로 귀족 사회 자체가 쇠퇴하거나, 구품중정제에 대한 견제를 지나치게 강화하고 황제 친위 체제란 비선 체제를 지나치게 강화하다보니 귀족 사회 입장에서 중정을 필요로 하지 않게 하는 상황에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12]

6.13. 구품관인법과 청담사상

위, 진 혁명 당시. 그다지 큰 동요 없이 그대로 지위를 인정받았던 귀족 사회는 서진대에 들어가면서 점점 더 귀족적인 색채를 더해갔다. 사마의, 사마사, 사마소 3부자에게 탄압받던 청담풍이 부활했을 뿐만 아니라 이전보다 더 강한 기세로 귀족 사회를 풍미했다. 게다가 이 청담은 구품관인법과 결합했다. 청담은 귀족의 특권이고. 구품관인법도 호족보다 귀족에게 우선적으로 적용되었다. 그 결과 담론 문화인 청담 담론에 뛰어난 자가 향품에서 윗품을 얻어 그대로 높은 관품에서 기가하게 된다. 이러한 풍조를 비난하는 관점으로 볼 때 바로 헛된 명성으로 사람을 취하는 것이었다.

귀족의 취미인 청담도 원래는 개인의 재능을 가장 중시해야 하지만. 그것이 귀족적인 취미라는 사실부터 곧바로 귀족제도로 이행할 수 있는 경향을 가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귀족의 취미는 대개의 경우 하루아침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대를 거쳐 세련되어지기 때문이다. 예컨데 서진 무제 중기부터 관리 등용의 선거를 장악한 산도죽림칠현의 한 사람으로 손꼽힐 정도로 청담에 뛰어났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명족 출신이 아니고 귀족적 취미에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공평한 인사를 시행했다고 일컬어진다. 그런데 무제에 이어 어리석은 혜제가 즉위하고 같은 죽림칠현의 한 사람이면서 명족 출신인 왕융이나 비슷하게 청담에 열중했던 왕연이 선거를 맡자. 양호에게 풍속을 훼손시킬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6.14. 위진시대 구품관인법의 작용

구품관인법에서 중정의 힘이 미치지 않는 구름위의 인사가 있다는 것은 앞서도 언급했지만, 위나라 시대에는 종실이 정치에서 물러나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서진에 들어가면 방침이 바뀐다. 위나라가 근친의 종실을 학대했기 때문에 고립무원에 빠져 일찍 멸망했다고 생각한 서진의 천자는 종실을 우대하여 먼저 그들에게 영토를 주고 봉건 군주로 삼은 뒤에 다시 병력을 갖게 하고 관료를 지배시키며, 게다가 관료의 지위까지 갖게 하였다. 이러한 종실의 관료생활은 일반 귀족과는 별개로 취급하여 아마 중정의 관할 범위 밖에 두어졌고, 종정경(宗正卿)이 관장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다음에 중정의 권한으로부터 절반 가량 이탈한 것에 종실이 아닌 봉건 제후가 있다. 위대에는 종실인 근친자만 왕에 봉해지고 식읍을 받았으며, 이밖에는 명목적인 산후(散侯)가 있는 데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위, 진 혁명의 직전에 혁명에 의한 동요를 막기 위해 사마씨의 의도로 대대적인 봉건제가 채택되었다. 이것이 역사상 5등작의 설치로 기록되어 있는데, 왕과 산후 사이에 5등의 개국작(開國爵)을 설치하여 사마씨의 동료를 봉건 제후로 세운 것이었다. 5등이란 개국공이나 개국후, 개국백, 개국자, 개국남을 말하며, 각각 봉읍을 받고 관품이 정해져 있다.

다음으로, 중정의 직무 범위에서 실질적으로는 일탈하면서도 또한 중정이 향품을 내려야 하는 것은 1품관인 삼공의 자제이다. 삼공의 자제는 대개 통념상 5품관 기가로 정해져있었는데, 삼공의 자제는 대개 통념상 5품관 기가로 정해져있었던 것은 앞서 말하였다. 이들은 주로 청담을 이용하여 사교계에서 활약하는 방법으로 향품을 받았다. 당시에는 보통 20세가 되면 관직에 나아갔기 때문에 그때까지 사교계의 꽃이 되어 있어야 했다.

이밖에 20세 이전의 청소년에 대하여 장래의 전망을 꿰뚫어 보고 향품을 주어야 한다고 하면 중정의 직분 또한 어려운 점이 있다.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불리는 것이 싫으면, 중정은 점쟁이가 될 요량으로 그럴싸한 구실을 달아 장래를 예언하는 향품을 내려야 한다. 한번 높은 향품을 내리면 자기의 인륜에 대한 현명함이 손상되지 않도록 상대를 출세시키지 않으면 곤란한 지경에 처한다. 동시에 낮은 향품을 받은 사람이 출세를 해서도 곤란하다. 그래서 처음 받은 향품이 나중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정이 어떤 한 관료의 모든 평가에 영향을 미쳤던 건 아니었고, 그 외에도 다른 여러 여건이 영향을 미쳤음을 간과하면 안 된다. 예컨대 제아무리 강력한 권력이 있는 황제라고 해도 출신도 근본도 없는 자를 자기 맘에 든다고 갑자기 5품부터 출사시키는 건 꿈도 꿀 수가 없었다. 동시대 로마 제국은 특정 황제나 특정 실권자 마음에 들기만 하면 마굿간지기도 야만족 추장도 하루 아침에 고관이 되거나 패거리를 모아 황제를 시해하고 내란을 일으키는 사태가 잦았으나, 동시대 남북조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던 건 어디까지나 잘 발달된 구품중정제 덕택이었다.

7. 남조에서 발달한 유품

7.1. 강남 정권의 성격

오랜만에 중국의 분열을 통일한 진나라는 안으로는 팔왕의 난, 이어 일어난 영가의 난으로 처음으로 이민족에게 관중중원을 뺏기는 참사를 빚었다. 그러나 종친낭야(琅邪王) (睿)가 강남을 건너서 오나라의 옛 서울인 건강(健康)으로 천도하여 진나라를 이었다. 동진 조정의 관료는 자연히 두 계통이 있었다. 하나는 교성(僑姓), 또 하나는 오성(吳姓)이다. 그리고 어쨌든 왕조가 더부살이를 하는 처지라 측근인 교성이 오성보다 한 단계 높은 지위를 차지하였다. 그들은 이미 본관을 영영 떠났지만[13] 여전히 본관인 (郡)을[14] 내세웠고[15] 각각 주군의 중정직을 계속 유지하였다.

7.2. 상서의 인사권 장악

서진 말 영가의 난으로 위나라에서 시작된 귀족 피라미드는 일시적으로 붕괴했다. 다만 진원제가 건강으로 천도하자, 교성과 오성을 그 구성원으로 하여 종전의 모델에 따른 새로운 귀족 피라미드가 곧 성립했다. 개개의 구성원은 바뀌었지만 피라미드의 형식은 거의 큰 차이가 없었으며, 이미 선례도 경험도 있으므로 어느새 새로운 피라미드가 성립하였던 것이다. 이 귀족 피라미드는 동시에 관료 피라미드이지만, 이것을 관료 체계로 볼 때 서진의 옛 형태와 비교하여 상당한 변화가 보인다.

첫째로 들 수 있는 것은, 관료 피라미드의 실제 뼈대가 완전히 삼공의 손에서 상서의 손으로 이동한 것이다. 조정의 정치는 이후 상서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그런데 동진에 들어가면 원제 때에 순조(荀組)가 전대부터의 원로인 연유로 해서 사도에 임명되었지만 실권이 없었고, 왕도의 사후에는 누차 사도가 결원인 채 방치되는 일이 있었다. 사도부의 비중이 약해진 것은 동시에 중정도, 그 향품의 의미도 크게 감소했음을 나타낸다.

이미 서진시대에 중정이 내리는 향품이 귀족적으로 채점되어 "높은 품에 한문 없고 낮은 품에 세족 없다"라는 상태가 되었는데, 이것이야말로 중정이 실제 필요없게 되는 전제였다. 상서에 보관되어 확실한 증거에 따라 문벌의 상하가 판정되면 바야흐로 중정이 하는 일은 대부분 사라진다. 중정은 귀족제도의 성립에는 중대한 역할을 했지만 일단 귀족제도가 확립되면 동시에 필요없는 존재로 바뀌어 버렸던 것이다. 동진 이후 중정직은 열전 가운데 문벌을 장식하는 직위로 자주 기재되어 있는데, 중정이 활약한 기사도 또 중정을 비난하는 기사도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7.3. 구품관제와 구반선제

그런데 상서이부의 인사권 장악도 특별히 동진이 개국하면서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라 위, 진 시기 동안에 서서히 발달하였던 것이다. 특히 서진 말기부터 9품관제의 운용에서 주목할 만한 현상이 나타난다. 승진의 순서가 반드시 관품의 상하와 일치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9품관제 이외에 하나의 인사 진퇴에 대한 기준이 서진 말 무렵 성립한 듯 보이는 것이 있다.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이것을 바로 유송(劉頌)의 9반제로 알려진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유송의 9반제에서 반은 궁중 석차의 의미이지만, 그것은 단순한 자리의 문제는 아니다. 이 새로운 반차를 정한 것이 이부상서 유송이었던 점 및 석계룡 재기가 9반제를 9반선제로 바꾸어 부르고 있는 점에서 생각하면, 이것은 궁중 석차를 다시 정하는 동시에 다시 관료 승진의 순서까지도 규정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9품관제는 그 상층, 대략 5품 이상 정도의 부분은 단계를 세밀하게 나누고 있지만, 대략 그 6품 이하 부분은 매우 조잡하다. 상당히 나뉘어 있어야 할 많은 관직을 같은 품 안으로 넣어서 섞어 놓은 것이다. 따라서 오랫동안 인사를 행하면 같은 품의 관직 사이에 상하의 차별이 자연히 생긴다. 9품관제를 처음 만들었을 때에는 관직에 청탁의 구별이 생기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귀족주의의 발달에 따라 같은 품의 관직에 청관과 탁관이 생겨버렸다. 따라서 인사 이동을 할 때 탁관에서 청관으로 옮기는 것은 상관없지만, 청관에서 탁관으로 옮겨갈 때 당사자가 실망하지 않도록 준비가 필요하게 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9품관제를 인사의 진퇴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는데는 불충분하였기 때문에 더욱 정밀한 인사 진퇴표가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마 사실상 이미 서진 무렵부터 그러한 필요성이 느껴졌던 것을 유송이 이부상서가 되었을 때 종합적으로 하나의 체계로서 만들어낸 것이 9반선제일 것이다.

7.4. 문지 2품의 성립

위나라 및 서진 초기에는 중정이 내리는 향품에는 권위가 있고, 향품과 그에 대한 기가의 규칙이 대체로 지켜진 듯하다. 하지만, 점차 귀족주의의 심화에 따라 붕괴되어 갔던 것이다. 먼저 첫째로 일어난 것이 향품의 인플레이션 경향이다. 중정이 내리는 향품은 그것이 바로 취직이 아니라 단순한 관리 임용 자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물며 중정은 사도부에 속하여 실제로 관리를 임용하는 상서와는 일단 다른 계통이었기 때문에 중정의 향품이 점차 남발되기 쉬운 것은 자연스런 이치이다. 정부로서도 향품의 인플레이션을 방치할 수만은 없기 때문에 관위의 인플레이션을 유발하는 편법을 쓰게 된다. 이 경향은 서진시대부터 나타난다. 관위의 남발은 바꾸어 말하면 용산관(冗散官)의 설치이다. 향품을 얻은 자에게는 일이 있건 없건 여하튼 한 번은 관직에 임명하는 것이다.

애초 중정이 주는 향품은 원래는 그 개인의 재덕에 따라 평가해야 하는 것이고, 문벌 등을 고려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상품에 한문 없다는 귀족제도의 발달에 따라 향품은 가문의 지체에 따라 정해지게 되었다. 바꿔 말하면 개인의 재덕이 문벌로 바뀐 것이다. 여기서 문지 2품이라는 단어가 생겼다. 재능은 2품으로 인정되어도 만일 문지가 없으면 향품 2품은 주어질 수 없었던 것이다. 향품은 오로지 문지에 의해 결정되고, 문지 2품이라는 귀족 계급이 엄연히 성립해 있었던 것이다.

7.5. 한사의 실체

구품관인법을 설명할 때, 지금까지 향품 5품 이상의 경우만을 문제 삼았다. 왜냐하면 향품 1품을 얻어 5품관에서 기가하는 것은 상당히 특별한 경우이고, 이것을 잠시 제외하면 향품 2품에서 5품까지는 그 본질에서 그다지 큰 차이는 없기 때문이다. 즉 향품 2품을 얻어 6품관에서 기가하는 자나 향품 5품을 얻어 9품관에서 기가하는 자도 결국은 5품 이상에 오를 수 있다. 5품은 법제상의 면역선 위에 있고, 자신의 지위는 대부이고, 그 자손은 사의 신분을 취득할 수 있다. 그런데 개인의 재덕에 따라 주어져야 할 향품이 문벌의 높낮이에 따라 주어지게 된 것은 귀족주의의 발달에서 비롯하지만, 귀족주의가 나타나게 되면 관료 피라미드의 내부 구조도 바뀌어야만 했다.

향품의 인플레이션 경향 탓으로 문지 2품의 범위가 크게 확장되면 그들의 기가관은 6품에만 그치지 않고, 7품관의 일부도 침식한다. 문지 2품인 자의 세력 확장은 하부뿐만 아니라 상부의 5품관 시상의 부분에 대하여도 시도되었음이 틀림없다. 여태까지는 향품 3품이면 3품관에 오를 수 있음이 약속되었다. 그런데 그들에게 약속된 범위가 향품 2품자에 의해 침식되자 그들의 장래가 좁아지고 옹색해져서 쉽게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들 향품 획득 경쟁에 패하여 문지 2품으로 승격할 기회를 잃은, 향품 3품 내지 5품 계급이 한문, 한사인 것이다.

7.6. 훈위의 성립

향품이라는 것은 당장은 기가의 관품을 결정하는 역할을 맡지만, 향품이 필요한 것은 9품 이상 곧 유내관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향품 5품인 자는 9품관으로 기가하는데 대하여 향품 6품 이하의 자는 9품관 이하가 없기 때문에 동일하게 9품관으로 기가하게 되면, 장래는 모르지만 기가 때에는 향품 5품과 향품 6품 이하 사이에는 경중이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에 대한 해답은 원칙적으로는 간단하게 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기가만이 아니라 기가와 함께 이후의 경로가 대체로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향품 6품인 자는 5품 이상의 경우와 같이 어떤 독자적인 경로에 따라 6품관까지 도달한다. 이와는 달리 만일 향품 9품인 자가 있으면 그는 주어진 9품관에 나아간 채 그것으로 일생을 끝마쳐야 했다.

그렇다면 실제로 향품 5품인 자와 6품 이하인 자의 구별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것은 아마 같은 9품 안에서 향품 5품인 자가 나아갈 관과 6품 이하인 자가 나아갈 관 사이에 큰 선이 그어져 있고, 이 선이 훨씬 위쪽의 6품관까지 연장되어 있었다. 이 선은 귀족제도가 발달하면서 바로 사회 계급의 단층선으로 변화한다. 곧 이 선의 오른쪽은 사인, 특히 한사가 나아갈 관이고, 이 선의 왼쪽은 서민이 연공(年功)에 의해 나아가는 것이 허락된 관이다. 이때 고려해야 할 것은 9품관 아래에 유외관(流外官)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유외관은 말할 나위도 없이 서민이 나아가는 지위이다.

시대가 지나면서 귀족제도가 성장하지만, 동시에 사서선이 크고 힘차게 당겨지게 되었다. 바꿔 말하면 서인에서 상승하여 나아가는 관직은 6품 이하의 한쪽 구석에 갇히게 되고 그밖의 관직과는 단절되어 일종의 특수 구역을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특수한 구역의 관직은 이윽고 훈위 또는 훈품이라 불리고 2등에서 6등까지 5단계로 나누어져서 훈2품, 훈3품 이하 훈6품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렇게 사서선의 좌측 아래의 모퉁이에 자리한 훈위라는 것은 원래 유외관이 6품 이하의 향품을 받아 나아가야 하는 지위였지만 훈위가 성립하면 훈위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향품이 필요없게 되었다. 사족은 정문으로 들어가 품관이 되지만, 서민은 통용문으로 들어가 훈위에 나아간다. 그리고 귀족이 세습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훈위라는 지위도 점차 특정의 가문에 정해지는 경향을 낳았다.

7.7. 관료 피라미드 구조의 변천

위대에 시작된 9품관제는 , 무렵이 되면 현저한 변질을 보이고, 따라서 관료 피라미드의 내부 구조도도 완전히 새롭게 고쳐야 할 필요가 생겼다. 특히 송대 송효무제, 송명제의 시대는 남조의 관제상 각 방면에서 큰 변혁이 일어난 시대였다. 주의할 점이 이 시기 9품관제가 거의 원형을 남기지 않을 정도로 개변되어 있는 것이다. 원래 관료제였던 9품관제는 관품의 상하를 구별하는 수평선이 중요했다. 그것이 귀족주의의 영향을 받아 비스듬한 단계를 이루는 사회 계급선이 강화되자 그것에 반비례해서 그림자가 엷어지고 귀족의 기호대로 구부러져 갔던 것이다.
중정의 신분에 대해서도 진나라에서 송나라로 이행할 때 큰 변화가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곧 중정은 중앙 정부의 인사에 거의 관계하지 않고 독자적인 입장에서 향품을 주는 것마저 하지 않으며, 다만 주의 인사에 대해서 주로 문지의 입장에서 발언을 했던 듯하다. 중앙의 인사는 모두 상서에게 일임하고 중정은 간섭하지 않음과 동시에 지방의 인사는 중정의 권한 안에 있고 중앙에서 간섭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구품관인법에 포함된 수재, 효렴제도는 송나라 이후도 위, 진의 격식을 지켜서 계속 시행되었다. 동진 말기에 유명무실해졌던 수재, 효렴의 책시제도가 유유에 의해서 부활되었던 것이다.

관료 피라미드의 구조가 시대의 변천에 따라 변화해 온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렇지만 그것이 너무 지나치게 선례에 의거하고 또 그 선례가 너무 쌓여 그 근본인 9품관제를 잃고 출발점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 되어버렸다. 정치는 원칙에 너무 구애되어도 안 되지만 너무 적당히 짜맞추어도 불편하다. 어느 제도가 변화하는 데에는 변화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 이유를 검토하여 어느 시기가 되면 선례를 정리하고 새로운 체계를 다시 세울 필요가 있다. 양나라 무제야 말로 그러한 임무를 띠고 등장한 인물이다.

7.8. 한관(寒官)의 발달

송, 제시대의 청관은 옮겨 다니는 것이 너무 빈번하고, 청관 가운데 요관이라고 일컬어지는 것 조차 실제 요직의 역할을 다할 수 없는 사정이 있으며, 만약 이 같은 상태라면 반드시 그들을 대신해서 실제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가 달리 있어야 한다는 것을 추측했다. 그리고 이런 역할을 맡은 자가 바로 서인 출신 혹은 한사 출신의 한관이었던 것이다. 한편 귀족주의가 발달하자 그 뒷받침으로서 한관이 발달한 것은 흥미 있는 현상이다. 하지만 한관이라고 하더라도 그 범위는 매우 광범위하다. 편의상 세 가지에 초점을 맞추어 고찰하려고 한다. 첫 번째는 중앙 관아, 특히 상서성의 영사(令史)이고, 두 번째는 천자측근인 중서사인(中書舍人)이며, 세 번째는 지방 부주(府州)의 전첨(典籤)이다.

중앙 관청에는 대개 영사가 배속된다. 요컨대 위대 상서랑은 정책을 입안하고 명령을 하달하는 업무를 담당하지만, 영사는 단순히 명령을 받은 대로 문자를 쓸 뿐이고 그 이상은 관여할 수 없다. 한대의 성서는 마치 참모 본부와 같은 것으로, 상서랑은 스스로 정책의 입안을 맡고 초고까지도 마련하는 참모였지만, 위, 진 이래 상서는 내각과 같이 되고 상서랑은 행정부 국장으로서, 전사는 그 부국장(副局長)으로서 아래에 많은 영사,간(幹)을 거느리는 중앙관청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많은 부하를 거느리게 되자 부의 국장은 그 사무를 부하에게 맡기고 자신은 단지 도장만 찍는 존재로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다음에 들어야 할 한관은 중서사인이다. 원래 중서성은 위에 감(監)과 영(令)이 있고, 황제의 측근에서 옥새나 국새를 보관하고 조칙 등의 문서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는 부서였다. 그것이 정치상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상서성의 발달과 관계가 있다. 곧 원래 천자의 비서인 상서는 중앙 정부로 변화했기 때문에 천자 개인과의 관계가 떨어지게 되었다. 거기서 상서를 대신해 천자의 측근으로서 나타난 것이 중서감, 중서령과 문하시중이다. 중서감, 중서령은 특히 서진 혜제 때와 같이 천자가 어리석을 때에는, 말하자면 천자를 대리해야 하기 때문에 중요한 직무가 되었다. 그 속관에 중서랑 등이 있는데, 모두 청관이고 사인의 관이었다. 그런데 동진의 중반 무렵부터 사인 출신의 청관이 실무에 종사하는 것을 게을리하게 된 것을 싫어하여 천자가 직접 정사를 지휘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송대가 되면 청관인 중서랑도 천자로부터 경원시되어 7품관인 중서통사사인, 그 아래에 주서령사를 둠으로써 천자 내전의 직속 정부가 성립했다. 이 새 정부가 권위를 떨친 것은 송나라 효무제, 명제 무렵부터로 알려진다. 제나라시대에는 명제 때가 사인 정치가 번성한 시기였다. 중서사인 및 주서령사가 본래의 장관인 중서령의 아래를 떠나서 천자에 직속하는 성질은 당대까지 계속되었다.

다음에는 지방 군부의 전첨인데 지방의 도독부가 동진시대부터 점차 강대해져서 때로는 중앙에 대한 반란의 원동력도 되었기 때문에 중앙은 이를 누를 필요를 느끼고 송대부터 종친을 지방의 도독 혹은 자사로서 파견하기 시작했다. 나이 어린 황자를 도독이나 자사에 임명했을 때에는 그 장사나 별가에게 부주의 정무를 장악하게 하고, 이것을 행사(行事)라고 하였는데, 달리 전첨을 임명해서 조정과의 사이를 왕복하면서 천자의 명령을 전달하는 역할도 했다. 전첨은 관제상에서는 도독, 자사의 속료이지만 실제로는 천자가 파견한 대리인이었던 것이다.

상서령사, 중서통사사인, 전첨의 3종류는 한사, 한인이 기용되었던 관직인데, 모두가 훈위였던 것만은 아니다. 상서령사는 사서에 명문이 없지만 아마 훈위였을 것이다. 중서통사사인은 천자의 측근이기 때문에 실질은 훈위와 다르지 않지만 관제상은 품관이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그 아래의 중서주서령사는 만약 상서령사가 훈위라면 이것도 훈위였을 것이다. 전첨은 처음에는 훈위 5품이었지만 뒤에 점차 상위인 7직으로 고쳐졌다.

7.9. 장군호의 발달

선양이 거듭되면 충분한 실력 없이 혁명을 강행하는 폐해가 나타난다. 위나라가 한나라를 대신하고 진나라가 위나라를 대신했을 때는 충분한 실력이 있었기 때문에 이전 왕조의 일족은 상당히 우대를 받고 편안하게 여생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송, 제 이후는 일시의 위기를 틈타 혁명을 강행했기 때문에 여기에 이전 왕조에 대한 비참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귀족 사회로서는 혁명이 평화의 가면 아래에서 단행되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그들은 각각 본래의 기득권을 인정받아 귀족의 지위도, 관료란 지위조차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하튼 혁명은 큰 사건이다. 아무리 귀족 사회가 눈을 감고 사건의 추이를 무관심한 척 보더라도 현실의 문제는 다양한 형태로 그들의 신변에 닥쳐온다. 그 첫째 문제는 이 혁명의 공로자인 군인을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의 방법이다. 진, 송혁명 때의 단도제(檀道濟). 송, 제혁명 때의 유세륭(劉世隆), 왕경칙(王敬則) 같은 무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중앙 정부에 들어가 가장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으며, 그밖의 공신도 각각 지방관 등에 등용되거나 그렇지 않은 경우 장군호를 받아서 봉급을 받을 수 있었다. 서진시대부터는 장군호는 가관(加官)으로서 단순히 명예의 칭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동진 이후 늘 계엄령 아래에 있는 듯한 사외에서는 군태수에게도 장군호가 더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8. 양ㆍ진시대의 새로운 경향

8.1. 양무제의 제도 개혁

남제 24년, 특히 명제 이후의 후반기 역사는 유난히 암울했다. 족손의 지위를 빼앗아 제위에 오른 명제는 이전 천자의 근친을 도살했으며, 명제의 아들 동혼후는 즉위하자 혁명 공포증에 걸려 대신을 자주 살해하였다. 형을 살해당한 소연은 반기를 들어 도읍을 함락시키고 동혼후의 동생 화제를 옹립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화제에게서 양위를 받아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이가 양나라 무제이다.

그런데 무제를 관제 면에서 보면 그가 단행한 개혁은 송, 제시대의 혼란을 이어받아 정리, 재편한 것이기 때문에 후세의 모범이 되었다. 송, 제의 관제는 위, 진 이래의 9품관제가 문란해 지면서 새로운 계제(階制)가 출현했다. 그렇지만 임시적인 선례를 쌓아 갔을 뿐 그 사이에 일정한 방침을 갖지는 못했다. 계급적으로는 문지2품과 한사, 한인 사이에 계급의 분리가 더욱 심각해졌고, 귀족제도 귀족적 관료제도 모두 실제 사회로부터 유리되어 가고 있었다. 지방의 도독부, 그 참군과 중앙 정부 및 그 관료와의 상호 관계는 불명확한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이들 문제는 조만간에 근본적으로 해결되어야 하는 것이었는데, 바로 그때 양나라 무제가 그러한 임무를 다했던 것이다. 그는 즉위 초년에 관제 개혁을 명령하였다. 하지만, 양나라 무제가 정한 최초의 관제는 급작스럽게 이루어져서 종래의 품과 계 사이의 현저한 불균형을 시정한 것에 그쳤다. 그러나 오랜 세월에 걸쳐 문란해진 관제는 좀 더 발본적(拔本的)인 개혁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 요구에 부응해서 나타난 것이 다음 천감 7년의 새로운 제도이다.

8.2. 유내 18반

무제는 천감 7년에 다시 관제 개혁을 단행했는데, 먼저 18반 관제이다. 이 반(班)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이 반은 진나라 유송의 9반선제(九班選制)의 반과 같은 의미라고 생각된다. 곧 반은 원래 조정에서의 석차인데, 궁중 석차는 지위의 상하를 나타내고 동시에 승진의 순서까지도 나타내는 것이다.

양나라의 18반은 정확하게 9품에 대응하고, 단지 수가 두 배가 되어 있기 때문에 9품을 두 배로 할 필요에서 품에 정종을 둔 것이라고 하면, 우리는 바로 종래의 9품이 단순히 두 배가 된 것만으로 신18반제로 이행한 것이라고 보게된다. 여기서 새삼 다시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이 18반 다음에 유외 7반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 양자를 통하여 우리는 18반=2품이라는 답을 끌어낼 수 있다. 이 2품이라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문지 2품 혹은 문지 2품자가 나아갈 대체로 6품 이상의 관을 의미한다.

총체적으로 보아서 양나라 무제의 18반 관제는 지금까지 남조에서 발달한 귀족적 관료제의 집대성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각 반의 맨 앞에 두어진 관직을 보면 거의 모두가 당시 가려 뽑힌 청관이다.

8.3. 유외 7반

문지 2품의 유내 18반의 다음에는 유외 7반이 온다. 유외 7반은 한미한 사인, 곧 한사 계급의 기가관이고, 이 관을 거친 뒤에 유내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문지 2품의 사족과 서민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이 한사로서, 완전히 사족처럼 취급할 수는 없지만 또 완전히 서민과 같이 대우할 수도 없는 계급이다. 유내 18반의 절반 이하에는 부의 속료가 많다. 유외 7반이 되면 거의 모두라고 해도 좋을 자리에 부의 속료의 관명이 열거되어 있다.

8.4. 기가관

유내와 유외를 여기서 구분한 이유는 요컨대 귀족주의의 편의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현실의 문제로서는 문지 2품인 사족의 말류와 한사 사이에 확연한 구별을 세우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귀족의 감정으로서 어딘가에 관문을 만들어 스스로를 구별하고 싶은 바램이 강했을 것이다. 거기서 이 바람을 관제 위에 나타낸 것이 유내와 유외 사이의 선이었던 것이다. 이 선은 기가에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된다.

기가는 일종의 탄생이다. 기가하는 관의 여하에 따라 귀족적 관료 사회에서 귀족성의 정도가 결정된다. 육체적 탄생이 여기에서 비로소 사회적으로 승인받은 것이다. 거기서 유내에서 기가하는가가 큰 문제가 된다. 유내와 유외를 구별하는 선은 그 사람의 출생이 문지 2품인지 아닌지를 기가 때에 낙인찍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아마 송, 제시대부터 행해져 왔을 것이다. 특히 제대에 일반적으로 행해졌던 7직(七職)이라는 말이 한사가 나아갈 7등의 지위를 의미한 것이라면, 이 7직이야말로 양나라의 유외 7반의 전신이고, 당연히 그 당시부터 한사 기가관이 존재했음에 틀림없다. 그것을 조직해서 정연한 하나의 체계로 나타낸 것이 양나라 무제의 유내유외관반표(流內流外官班表)이다.

8.5. 온위(蘊位), 훈위와 서리의 기원

양나라 무제의 새로운 관제에 따르면 유내 18반과 유외 7반 이외에 또 3품 온위와 3품 훈위라는 것이 있다. 이 훈위라는 것은 분명 송, 제의 훈위를 계승한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통전》권37의 양 관반표에는 4품 훈위 이하가 기재되어 있지 않아도 실제는 6품 훈위까지 있었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과연 그렇다면 3품 온위라는 것은, 그것이 3품 훈위 위에 위치했던 점에서 생각하면 실제로는 2품 훈위로 불러야 할 것을 특히 2품이라는 말을 피해 3품 온위로 바꿔 불렀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당시 2품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2품 청관 혹은 문지 2품 따위의 표현처럼 오로지 청류관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며, 혼동을 막기 위해서라도 2품이라는 말을 피하는 쪽이 오해를 낳을 소지가 적었던 것이다.

8.6. 장군호

양나라의 제도에는 완전히 독립적인 장군호가 있다. 대개 장군호에는 내호장군(內號將軍)과 외호장군이 있다. 내호라는 것은 중앙 정부의 일부를 이루는 것이므로 천자의 직속 군대를 지휘하는 장군이다. 이와는 달리 외호는 지방의 도독, 자사 이하가 띠는 장군호로서, 지방의 병사를 지휘하거나 혹은 지휘할 예정인 문무신에게 주어진다. 내호장군은 유내 18반 안에 그 이름이 나열되어 있는데, 조정에 의식 등이 있는 경우는 그들도 각각의 반에 따라 자리하였다. 그런데 장군의 10품 24반은 명확하게 어떤 방식으로 유내 18반과 대응할 테지만 그 방법을 알 수 없다. 다만 최고의 표기, 거기장군은 위, 진 이래 2품관이었다. 장군호는 때에 따라 허호(虛號),융호(戎號), 융질(戎秩) 등으로 불린다.

8.7. 양무제의 귀족주의

무제의 관제 개혁은 송, 제시대에 퇴적된 역사적 사실들을 정리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다만 무제가 이만큼의 정리를 단향한 데에는 역시 그 자신의 일종의 이상이 있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귀족제도와 관료주의의 조화이다. 그러나 당시는 문화도 경제도 귀족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었다. 결국 그의 정책은 일면에서는 상당히 귀족적이고, 다른 일면에서는 좋은 의미의 관료제적으로서 능률을 존중하고 재능 있는 개인을 발굴해서 등용하려 했던 흔적이 보인다.

관 그 자체에 청탁의 구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청류가 나아가면 그 관이 청이 되는 것이고, 게다가 청류라는 것은 갑족의 의미가 아니라 교양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무제의 귀족주의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상의 귀족제도가 아니라 귀족제도의 정신이다. 곧 그 존중할 만한 것은 귀족적인 교양에 있지 현실의 문지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문지가 낮아도 귀족적 교양을 몸에 지닌 자는 계속 등용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무제의 이런 새로운 정책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다음에 서술하는 학관시경(學館試經)제도의 장려이다. 이것은 후세 과거의 유력한 연원 가운데 하나가 된다.

8.8. 학관과 시경제도

제나라 말에 화제에게 상서하여 갑족이 20세에 기가하고, 후문이 30세가 넘어 임관하는 것을 불합리하다고 했던 양나라 무제는 즉위 뒤 일률적으로 30세에 기가하는 원칙을 세웠다. 단, 예외를 두어 1경에 통달한 자는 기가의 나이에 도달하지 않아도 기가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1경에 통달하는 편의를 주기 위해서 오경박사를 두고 학관을 열게 하였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기가의 나이를 단축시키는 것을 미끼로 사인에게 학문을 장려한 것이다.

그런데 무제의 학교는 단순히 강학의 장소가 아니라 시험, 곧 사책을 행하여 기가 연한을 단축시키는 임무를 지닌다. 바꿔 말하면 관원 양성소이기도 하다. 또한, 양대의 국학을 중심으로 한 시경(試經)제도의 형식은 이미 한 대부터 있었고, 진, 남조에 이어지며, 특히 남제로부터 부활되어 실시된 제도인데, 그것이 무제의 장려에 의해 한층 성대해졌다. 그러나 아직 후세와 같이 확실히 법제화되지 않고 매우 임의적으로 행해졌다.

당시의 시험제도에는 매우 미비한 점도 있고, 특히 한사에 대하여 차별 대우를 한 점은 비난받을 만하다. 그러나 명류 귀족에 대하여 단순히 문지에 의거하고 있으면서도 기가시키지 않고 나아가 학업을 닦고 시험을 통과하여 기가하는 것을 명예라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은 이 정책이 거둔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귀족은 문지에 의해 귀한 것이 아니라 귀족적 교양이 있기 때문에 귀한 것이라는 무제의 신념이 점점 귀족 사회로부터도 추종자를 만들어 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과거제도의 정신과 완전히 동일한 바탕에 서는 것이다.

8.9. 양대의 수재, 효렴 및 중정제도

수재, 효렴제도는 송, 제 이래 그럭저럭 계속되고 있었다. 다만 수재 급제로 비서랑에서 기가한 자가 없는 것을 보면 이것은 그다지 명문이 아닌 자제가 응해야 하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게다가 제대에는 수재가 되어도 역시 한년제(限年制)를 단축하는 특례가 열려 있지 않았다고 보인다. 효렴의 기사는 매우 적으며, 중정은 송, 제 이래 귀족제도의 확립과 함께 그 직무를 잃고 영향력이 희박한 존재로 전락하였지만, 여전히 지방 인사(人事)에 고문으로 종사하여 때로는 거부권을 발동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양대에도 중정이 엄존하였고, 특히 관료의 임관에 최후의 거부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부의 선용(選用) 때에는 반드시 중정에게 내려 그 거주지 및 선조의 관명을 조사하는 진대(晉代)의 제도가 형식적이지만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주망, 군종, 향호는 이 중정의 일을 돕는 자로서 전대의 방문(訪問), 청정(淸定)의 역할을 대신했을 것이다.

8.10. 진대의 임자제

양나라의 장군 후경이 양나라 무제를 굶겨 죽이고, 이어 즉위한 간문제를 죽이는 포학을 일삼는 일이 벌어졌으며, 이후 왕승변이 양나라 군대의 장수로서 후경을 무너뜨리고 수도인 건강을 회복했다. 왕승변은 진패선과 패권을 다투어 패배하고, 진패선의 진 왕조가 성립했다. 후경의 난에 의해 강남은 와해되고 각지에 호족의 독립 정권이 할거했는데, 이들을 회유하거나 토벌하여 어떻든 일단 질서를 회복한 것은 진 왕조의 공적이었다. 이 전란 사이에 필연적으로 군벌 세력이 신장되었기 때문에 진 왕조는 귀족제도를 단념하고 군벌적 관료 국가를 형성했는가 하면 그렇지 않고, 여전히 양나라의 후계자로서 귀족제도를 온존시키고 왕실 스스로도 귀족화하는 경향을 밟아 갔다. 그러나 이 전란 동안에 옛 귀족은 큰 타격을 입었다. 더욱이 조정은 군공을 세운 무장에 대해 관료군 안에 지위를 주어야 하고, 이 일은 필연적으로 귀족제도를 관료제도로 이행시키는 경향을 초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나라 정부에는 후진, 후안도, 장소달, 오명철 등 무장이 교대로 삼공이 되어 내외에 중시되었으므로 그들의 지위를 보증해 주고 환심을 살 필요가 있어서 종전과 같은 귀족제도만으로는 어렵게 되었다. 여기에서 귀족제도와 관료제도의 중간이라 할 만한 임자제도가 법규화되었다. 대개 임자제도는 문지가 낮아서 1대 동안에 고관에 오른 자에 대하여 그 자제에게 관을 주는 제도이기 때문에 관료의 지위를 존중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관료제에 부수된 제도라 할 수 있다.

임자제도를 법제화한 점은 확실히 새로운 경향이다. 왜냐하면 귀족이라는 자는 긴 역사의 퇴적에 의해 생긴 것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비로소 비서랑 기가라고 하는 권리를 획득했기 때문에 한 가문 안에서도 관계유영(官界遊泳) 경쟁에서 패배한 대부분의 집안은 결코 이 은전을 받을 수가 없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풍운을 타고 고관이 된 벼락 출세자도 고위 관리라는 지위에 의해 그 자식을 비서랑으로 기가시킬 수 있는 것이다. 분명이 이것은 귀족주의의 정신과는 서로 용납되지 않는 이질적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국학의 시경제도도 또한 엄밀한 의미에서 귀족제도는 아니다. 귀족은 태어나면서 귀족이고, 귀족이기 때문에 그 문지에 맞는 관으로 기가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귀족 문벌의 상하는 정확히 기가관 위에 투영된다. 그 뒤 관위의 승진은 수명이나 운ㆍ불운이나 우연한 사건에 의해 영향을 받으므로 그다지 큰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기가는 선천적인 조건으로 결정되고 영달은 후천적인 조건에 좌우된다고 하는 것이 당시 귀족 사회의 통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귀족 자제도 기가를 위해서 면학에 의해 획득할 수 있는 학업 성적을 시험하는 시경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은 이것 역시 명확하게 귀족주의와는 서로 용납되지 않는 이질적인 것이다. 남조도 말기가 되면 귀족제도 안에서 새로운 이질물을 창출하게 된 것이다. 이상하게도 북조에서도 그 출발점을 달리 하면서도 수ㆍ당시대에는 이 남조가 걸었던 것과 동일한 결론에 도달하였다. 당대의 선거는 결국 과거와 임자제도의 병용이다. 다만 시대가 바뀌면 같은 임자제도도 그 사회적인 역할을 달리한다. 과거가 관료제도를 대표한다면, 임자는 귀족제도를 대표해서 서로 다투었다. 물론 당나라의 귀족은 남조의 귀족과 동일하지는 않지만, 요컨대 임자제는 보수주의의 대표인 듯한 모습을 드러내였다. 진나라의 치세도 만약 영원히 계속되었다면 이 임자제가 어떤 역할을 했을지 모르지만, 진나라는 얼마 되지 않아 멸망하고 현실의 역사로서 임자제는 오히려 귀족제도 파괴의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아도 지장이 없을 것이다.

9. 북조의 관제와 선거제도

9.1. 북위의 화북 통일

서진 말 영가(永嘉)의 대란은 중국을 남북으로 분열시켰고, 그 이후 관제제도도 남북으로 나뉘어 각기 다른 발달의 길을 걷게 되었다. 다만 북방에서는 오호의 쟁패전이 그 이후도 오랫동안 계속되어, 패자(覇者)가 바뀔 때마다 그 제도도 새롭게 바뀌었기 때문에 계통적인 발전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만약 있었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을 증명할 수가 없다. 기록에 나타난 관명으로 추측한다면, 그것은 대체로 삼공(三公)중심의 정치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민족 왕조 아래에서는 삼공 이외의 중국식 관명을 사용해도 그 직무가 중국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잘라 말할 수는 없다.

오호 정권 아래 있던 한족이 현저히 그 자유를 구속당했을 것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상류 귀족이나 호족이 이것 때문에 큰 타격을 받았다고는 속단할 수 없다. 그들은 주권자의 부름에 응하여 보좌회의의 대표로서 벼슬길에 나아갔다. 항상 전시 체제 아래에 놓인 화북 중원에서 그들은 오히려 아래를 향해서는 마음대로 특권을 휘두를 수 있었던 듯하다.

오호의 쟁패전에서 최후에 살아 남은 것이 생번(生蕃)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선비 탁발씨(拓拔氏)의 북위 왕조였다. 참합피의 승리로 북위는 병주(幷州)라는 광대한 한인 거주지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후 남방에 대한 침략이 진행되면서 북위는 한인의 경제력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고, 사방으로 정복의 손길을 뻗쳤다. 이것과 동시에 한인 관리의 조정 진출이 시작되었고, 황제의 권력이 한인 관료의 지지를 얻어 현저히 강화되었다. 이것에 대한 북족 특권 계급의 불만이 폭발하여 황시 2년 하란부를 중심으로 큰 반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 반란은 북위 왕조에게 비 온 뒤 땅이 굳어지는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이로써 북족에 대한 중앙 정부의 지배력은 한층 강화되었다.

명원제를 거쳐 그 아들 태무제(太武帝)는 북족과 한인의 융화를 꾀하였고, 강고한 기초 위에서 사방에 대한 경략(經略)을 재개하였다. 앞서 북위에 의해 타격을 받았던 철불부는 오르도스 남부의 통만(統萬)에 의거하여 혁련부(赫連部)란 이름으로 재기한 뒤 북하(北夏)을 건설하여 다시 강성해졌다. 그러나 태무제는 몸소 징벌에 나서 북하를 명망시켰다. 5호의 잔존 세력인 요서의 북연이나 양주의 북량까지 평정되었고, 고차(高車)를 대신하여 외몽골에 세력을 떨치고 있던 유연(柔然)도 태무제에게 큰 타격을 받아 북쪽으로 도망하고 그 수십 만 부락이 북위에 항복하였다. 이리하여 영가의 난 이래 혼돈에 빠져 있던 화북 중원은 그 뒤 130년이 지나 비로소 다시 통일되었던 것이다.

9.2. 선비와 한인

북위는 태조 도무제 무렵까지 북방 민족에 공통하는 씨족제도를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씨족제가 해체되면서 관료제, 봉건제, 귀족제로 나아가게 된다.

도무제는 황시 2년 하란부의 대반란을 평정한 뒤 부족의 해산이라는 과감한 조치를 취했다. 부족 해산은 북위 사회의 일대 전환이었다. 지금까지 부족장에게 속해 있던 부민은 부족장의 곁을 떠나 천자에게 직속하게 되었던 것이다. 부족장에게서 부민을 빼앗았던 북위는 이것을 8부(部)로 재편성하고 또 이것을 8국(國)이라 부르고, 황성의 4방(方) 4유(維)에 두고 팔부대부(八部大夫)를 두어 통솔시켰다. 북위가 평성으로 천도한 것은 천흥 원년인데, 부족 해산과 팔부수(八部帥)의 임명은 아마 천도와 동시에 이뤄졌을 것이다. 천사 원년에는 8국의 국마다 대사(大師)ㆍ소사(小師)를 두고 그 종당을 나누어 인재를 품거(品擧)시켰는데, 이것은 마치 중정과 같은 직책이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이것은 부인(部人)에 대한 취직 담당자였던 것이다. 부민에게도 작을 내렸다. 물론 산작(散爵)이고 아무런 실익을 수반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와는 달리 황실 측근이 되어 전락(顚落)을 면한 유력자들은 스스로 일단의 특수 세력을 형성했다. 그들은 작위를 가지고 그것을 세습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관료의 지위도 갖는다. 그리고 그들의 자제는 내삼랑(內三郞)ㆍ엽랑(獵郞)ㆍ중산(中散)ㆍ내시(內侍) 등이 되어 천자의 시종이 되고, 그 재능이나 공로에 의해 발탁되어 관료가 된다. 또한 새로 작위를 받을 기회도 있고, 획득한 장군호도 작의 일종으로 간주되어 세습할 수 있었다.

바꾸어 한인의 동향을 보면, 북위 개국 초부터 이미 소수의 한인이 조정에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말하자면 유입된 한인일 뿐이고, 군성(郡姓)이 대거 북위 조정에 출사(出仕)함은 참합파의 전투 이후 북위가 병주를 점령하고 나서의 일이다. 동족인 선비에게 매우 가혹한 조치를 취했던 것과는 달리 한인에게는 매우 관대했다. 한족의 자제는 선비인처럼 중산 등에 의해 천자의 측근에 벼슬하여 출세의 단서를 마련할 편의를 좀처럼 얻지 못하였고, 또 그러한 방법을 떳떳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대부분 주군의 속료가 되는 길을 택했다. 태무제가 신가 원년에는 지방에 도독부(都督府)가 설치되었고, 이로써 한인은 더욱 넓은 임관 분야를 찾았다. 또한 학교라는 것은 한인에게는 입신의 기회를 주고, 선비에게는 이들을 한화하는 작용을 하였다. 이리하여 한인의 세력은 계속 성장하였고, 북위 조정도 중국 통치의 필요상 그들의 비위를 맞출 필요가 있었다. 특히 명원제는 선비와 한인을 병용하는 정책을 취하여 한인을 관대하게 대우했다. 한편 한인 관료들은 빛이 비치지 않는 장소에서 남모르게, 남조를 모방한 귀족제도를 만들어냈다.

9.3. 효문제의 새로운 관제

북위 효문제가 즉위한 것은 그의 나이 5세 때이지만, 당시는 아버지 현조 헌문제가 태상황으로서 실무를 총람하였고, 그 위에 다시 현조의 어머니 풍태후가 이것을 감독하고 있었다. 북위 정치의 특색이라 할 수 있는 균전법이나 삼장제는 무릇 할머니 풍태후와의 공동 정치 동안에 시행되고 있다.

풍태후가 죽은 이듬해인 태화 15년에 효문제는 서둘러 율령의 개정을 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일찌감치 이듬해에 완성되었던 듯하다. 다만 「직원령(職員令)」21권은 태화 17년 6월에 반포되었다. 그 「직원령」은 갑자기 만들어졌기 때문에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하여 반포하고 있다. 왕숙의 신지식 보급에 의해 자극받았음인지, 효문제는 이윽고 태화 19년 새로 지은 낙양궁에서 제2차 「직품령」을 반포했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날 소실되어 그 내용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자료가 없다. 효문제는 3차에 걸쳐 관품표의 개정을 꾀하여, 그것이 완성된 것은 그가 죽은 태화 23년이라고도 하고 혹은 그 전 해라고도 한다. 이 직령은 앞전의 것보다 북위적ㆍ이족적인 색채가 사라진 것이었다.

이 후령에 의한 9품관제를 가지고 전령 및 남조의 그것과 비교하면 약간의 특수성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는 전령에서 거의 무시된 청탁의 구별이 새로 출현한 점이다. 이 청탁과 관련해 북위 시대는 일반적으로 환관의 품급이 매우 높다. 환관의 지위가 높은 것은 그 실제 세력이 강한 증거이고, 나아가 그것은 후궁의 세력이 강했음을 의미한다.

다음에 후령에서는 많은 지방 관명이 열거되어있다. 이것도 효문제가 양나라 무제보다 앞서는 점이다. 또, 주의할 것은 전령ㆍ후령을 통틀어 적지 않은 산관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는 점이다. 한ㆍ위시대부터 이미 정원이 없는 관이라고 하여, 정원이 정해져 있지 않은 삼서랑(三署郞) 혹은 봉조청 같은 관이 있었다. 북위에는 중앙에 특히 정원이 없는 관과 원외관이 많고, 이 양자를 합쳐 산관이라 불렀다. 이것은 당대 문산관의 직접적인 연원을 이루는 것이다.

요컨대 효문제의 전령은 위ㆍ진의 관제에 북위 고유의 체제를 더하여 합체한 것이지만, 후령은 남조 송ㆍ제의 제도를 모방하여 양나라 무제보다 한 발 앞서 새로운 관제를 만들어 냈다.

9.4. 유외 훈품과 입류(入流)의 문제

고조 효문제의 관제에 중령 및 후령에 이르러 9품 아래에 유외 훈품이 출현했다는 것은 앞서 서술했다. 남조에서는 유외에 한사(寒士)의 7반과 서인의 온위ㆍ훈위가 있었지만, 효문제의 제도에서는 유외는 곧 훈품이었다. 이 유외 훈품 안에는 어떤 관이 포함되어 있었는지는 거의 알 수 없다. 다만, 효문제의 전령에 7품 이하의 관으로 기재되고, 후령에서 소멸된 것들은 대개 유외 훈품에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외에서 유내로 승진하는 것을 입류 또는 출신(出身)이라 불렀다. 유외는 어떤 기한을 근무하면 출신할 자격이 주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 달리 훈공이나 입속(入粟)에 따라 출신하는 경우도 있었다.

9.5. 무관의 입선(入選)

무관은 장군호를 띠지만, 이 장군은 대부분 허호로서 이부의 전선(銓選)과는 거의 관계가 없다. 이부의 전선은 결원을 보충하고 공로자의 관직을 올리는 것으로 매년 4번 계절의 마지막 달에 시행된다. 북위의 주군에는 모두 중정이 있어 선거를 담당하였는데, 매계절의 마지막 달에 이부와 함께 전형하여 가부를 가렸다. 당시 지방 장관의 임기는 6년으로서 기한이 되면 자리를 떠나야 했다. 이것을 하대(下代)ㆍ경만(更滿)ㆍ대환(代還) 등으로 불렀다.

상무(尙武)를 건국의 방침으로 삼은 북위의 제도에는 원래 문무관의 구별이 없고, 오히려 모든 관리는 무관이었음에 틀림없다. 외호장군이라는 것이 만들어져 그것이 환전히 다른 계통의 허호가 된 것은 아마 효문제 중기 이후의 현상일 것이다. 효명제시대 영태후의 개혁은 북위의 옛 제도로 돌아갔기 때문에, 여기에 북조와 남조와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9.6. 북위의 중정

효문제는 9품관제를 제정함과 동시에 이것을 바르게 운영하기 위해서 중정제도를 정비했다. 하지만 북위의 중정제도의 기원은 매우 오래되었다. 다만 이 시대 중정이 어떤 직권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고, 아마 당시 강남이 그러하였듯이 오로지 주군 요속의 인사를 관장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최호의 주살로 중앙 정부에서 한인 세력이 일시 후퇴했지만, 지방에서는 중정이 중심이 되어 주의 관리의 인선을 단행했다. 이 일은 필연적으로 문벌의 평가가 행해지기 때문에 그 지위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효문제가 관제 개혁을 시행함과 동시에 이 중정이 갑자기 각광을 받고 중앙 정부에 등장한다. 대개 중정의 직무는 위, 진의 그것과 같았음을 알 수 있다.

중정의 직책에는 중앙의 인사에 참여하는 일 이외에 지방 요속의 인선이 있다. 또한 중정은 전임이 아니라 겸관(兼官)이고, 대부분 중앙의 경관(京官)이 겸령하였다. 따라서 중정에는 관품이 없고 또 녹휼(祿恤)도 없었다.

9.7. 성족(姓族)의 상정(詳定)

효문제가 친정하게 되자 성족을 상정하려 하였다. 이것을 귀족 사회의 논쟁에 맡겨 두면 큰 분쟁을 일으켜 당쟁으로 발전될 소지도 없지 않기 때문에, 천자 스스로 이 문제에 개임하여 귀족 사이의 분분한 논의를 조정하고 동시에 천자도 스스로 귀족화해서 그 가문을 귀족들의 정점에 두려는 의도가 함축되어 있었다.
곧 각 가문의 선조의 관력 및 혼인 관계에 의해서 문지를 정하고, 문지에 따라 임관의 상하 선후를 정하려고 하였다. 만약 실수로 한족(寒族)과 통혼하게 되면 아무리 명가라도 갑자기 문벌이 떨어진다. 이런 조치의 책임자는 중앙에서는 사도부이고, 지방에서는 중정이었다.

군성(郡姓)이라는 것은 중국 사인의 문벌을 차례 지어 이것이 제도를 이룬 것이다. 무릇 3대에 삼공을 역임한 집안을 고량(膏粱)으로 하고, 상서령과 상서복야(令僕)를 역임한 자가 있으면 화유(華腴)로 하고, 상서(尙書)·영군(領軍)·호군(護軍)을 지낸 집안이면 갑성(甲姓)으로 하고, 구경 또는 방백(方伯)이면 을성(乙姓)으로 하고, 산기상시·태중대부는 병성(丙姓)으로 하고, 이부정원랑(吏部定員郞)은 정성(丁姓)으로 하였다. 그리고 고량으로 청하최씨·태원왕씨·형양정씨(滎陽鄭氏)·농서이씨를 꼽았다.

노성의 성족 상정은 군성에 준해서 행해졌다. 우선 종실인 하남원씨(河南元氏)와 부계혈연이 같은 열 겨레를 제실십성(帝室十姓) 또는 십주(十胄)라 부르고 이들은 뿌리가 같아서 하남원씨와 더불어 혼인을 금지한다.[16] 다음에 선비 및 이에 준하는 여러 종족은 대략 110성(姓) 정도가 알려져 있는데, 이 가운데 최고의 지위를 차지한 겨레가 북위 개국공신 집안으로 모두 여덟 겨레라서 훈신팔성(勳臣八姓) 또는 팔씨(八氏)라 부르는데 이들이 노성에서 으뜸 귀족이고 제실십성은 버금 귀족으로 삼으며, 종실이 성을 탁발에서 원씨(元氏)로 바꿈과 동시에 8성도 복성을 고쳐 중국식 단성을 취했다. 이들은 한인의 4성과 같이 종실과 통혼해도 부끄럽지 않는 명가다.

9.8. 북위의 수재, 효렴제도

효문제로서도 원리적으로는 귀족주의가 불합리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고 보인다. 거기서 이 불합리를 시정할 방법으로 채용된 것이 한위 이래의 수재, 효렴제도였다. 수재와 효렴은 그 책문에 구별이 있었는데, 수재에는 논의(論議)를, 효렴에는 경의(經義)를 묻는 규정은 위, 진의 제도를 따른 것이다. 논의를 책문하는 수재 쪽을 경서의 뜻을 책문하는 효렴보다 상위에 두었다.

9.9. 북위의 봉건제도

효문제의 관품표에는 봉건 제후의 작이 그 속에 배열되어 있다. 이 작위는 그 자손의 기가 관품과 관계가 있다. 그런데 북위의 봉작은 국리(國吏)를 지급하는 것과 자손의 기가에 편의가 있는 것 이외에는 거의 실익이 없는 빈 이름이었기 때문에 마구 하사되었다. 효문제는 친정 이후 이 봉건제를 개혁하여 명목과 실질을 종합하여 밝히고자 생각하였는데, 이것을 위해서는 종래 마구 내린 봉작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태화 16년에 종래의 봉작을 모두 1등 내지 2등 내릴 것을 명령하였다. 이것을 개혁(開革) 또는 예강(例降)이라 불렀다.

왕은 천자의 종실에게만 봉해지고 이성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 공작 이하는 이성의 신하에게 주어졌다.

9.10. 기가제도

도무제시대부터 명문 자제는 우선 천자의 근시(近侍)가 되어 무예나 정치를 배우고 기회를 얻어 한 사람의 몫의 직무를 받았다. 5품관 이상에서 기가할 수 있는 것은 종실이나 이에 준하는 왕실 측근자에 한정되고, 보통의 신하는 6품 이하 특히 7품 이하가 많았던 것이다. 한편, 명문의 자제에게 어린 나이에 기가할 기회를 주는 것으로 만랑(挽郞)제도가 있다.

수재는 모두 비교적 높은 관품에서 기가한 듯 보인다. 그러나 효문제의 중령, 후령에 의한 관품표 개정의 결과, 수재의 기가는 저작좌랑을 비롯한 정 7상의 관 이하로 정해진 듯하다. 수재는 다섯 가지의 책문이 보통이었던 듯하고, 성적은 상중하의 3등으로 나누어져 있었던 듯하다. 효렴은 전기에는 수재와 비교하여 특별히 단계가 떨어지지 않았던 듯한데, 후기가 되면 한사가 응시하는 것으로 가치가 정해져서 기가관은 매우 낮다.

9.11. 고과의 여행(勵行)

북조는 남조를 모방하면서도 끝내 남조와 같은 귀족제도를 만들어 낼 수 없었던 까닭은 소박한 북족 사이에 일종의 정의감 또는 공평을 존중하는 의지력이 유효하게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라 보인다. 그 하나로 볼 수 있는 것이 고과의 여행이다.

북위에서는 국초부터 고과를 중시하였다. 이미 명원제 태상 2년부터 사자를 보내 순찰케 하였으며, 해인 태연 3년에는 천하의 이민(吏民)에게 군수, 현령 중 법을 지키지 않는 자를 고소케 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9.12. 북제 치하의 새로운 경향

동위는 이윽고 북제에 찬탈되지만, 효문제 이후의 북위 정치를 비교적 충실하게 계승한 것은 북제이다. 따라서 북제의 제도는 대체로 북위의 제도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 다만 북제는 북위의 귀족제도를 더 한층 추진시킨 면이 있는 동시에 그것과는 전혀 다른 사정이 일어나서 일찍 귀족제도 붕괴의 단서를 나타낸 점도 주의해야 한다.

북제는 군뿐만 아니라 현에도 중정을 두었다. 중정은 전대와 같이 주군 혹은 현 속료의 인선에 참여하는 동시에 본지 출신 관료의 임관에 대하여 최종적으로 인정을 부여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북제의 관품은 북위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다. 또한 북제는 북위 말년의 제도를 이어받아 지방 학교의 확충을 단행하였다.

북위 이래 귀족제도를 정비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그것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정신 위에 선 시험제도가 점차 엄중하게 되고, 객관적인 자료에 의해 인사의 진퇴를 단행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것은 주의해야 한다. 《북제서》권 45 번손전에, 중서, 문하 두 성의 관리를 채용하기 위해 시험을 치렀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은 시험제도가 발달해 가면서 옛 귀족제도가 붕괴되어 가는 것이다. 또한, 북제시대에는 이때까지 중국사에서 볼 수 없었던 서역인이나 상인의 매관(賣官)이라는 특이한 상황이 출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귀족은 이러한 새로운 사태에 즉각 응할 수 없다. 그들은 아마 황금의 횡행이나 정치적 상인의 암약(暗躍)에 직면하여 혼란스러워 하였다. 이에 비해 서민 출신 한인은 훨씬 잘 적응했다. 이로 인한 신흥 세력의 출현으로 옛 귀족의 정치적 기반은 점차 잠식되어, 일진일퇴를 되풀이하면서 수, 당시대로 이어졌다.

9.13. 북주의 복고주의

북제에 뒤지지 않은 중대하고 새로운 정세가 서방의 북주에서도 발달하고 있었다. 북주는 전면적인 귀족제도를 부정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우문태의 모신으로 소칙의 9세손인 소작(蘇綽)을 중심으로 주나라의 제도로 복귀하려는 안이 계획되었다. 이에 공제 3년 반포되었던 것이 《주례》를 흉내낸 육관제(六官制)이다. 그 취지는 유내관을 9등으로 나누고 이것을 구명(九命)이라 명명한다. 각 명이 다시 2등으로 나누어져 결국은 종래의 정종9품과 마찬가지이지만, 수의 순서가 반대로서 정 1품을 정 9명으로, 종 1품을 9명으로, 정 2품을 정 8명으로, 종 2품을 8명으로 일컫고, 이하 마지막의 종 9품을 1명이라 이른다. 이 구명 아래에 유외 훈품이 9등으로 나뉘어 구질(九秩)로서 존재했다.

그 관명 속에는 새로이 크게 변화한 것과 종전의 명칭을 거의 그대로 사용한 것 두 종류가 있다. 변화한 것은 중앙 정부의 실직이 있는 관으로, 완전히 《주례》처럼 천,지,춘,하,추,동의 육관으로 나누어지고, 대부,상사,하사의 등급이 붙여졌다.

북주의 방침은 귀족제도를 배제하고 관에 청탁을 두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결국 공적에 따라 인사를 진퇴하여야 하고, 당시에는 가장 눈에 띄기 쉬운 것이 무훈이다. 중앙도 지방도 장관은 거의 무장에 의해 점유되었고, 이는 필연적으로 한인 귀족세력의 후퇴를 낳았다. 그러나 한인이라도 무공을 세우면 그에 따라 등용되었다. 서위 말에 8주국, 12대장군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한인이 섞여 있다. 당나라 황실은 이 8주국의 하나인 이호의 자손이다.

북주는 관에 청탁을 두지 않고 인재의 등용이 자유로웠다고 해도 역시 사와 서민의 계급 차별은 인정되었기 때문에 아마 사족은 상사 내지 하사에서 기가하였고, 서민은 분명히 그 아래의 구질에서 출사했을 것이다.

복고적인 방침을 견지하는 우문씨 정권이 서위, 북주를 통하여 50년 정도 지속되자, 역시 하나의 전통이 성립한다. 이 전통을 성립시키고 유지해 가는 기반은 8주국, 12대장군을 중심으로 하는 군벌 세력이다.

9.14. 수대의 새로운 제도

수나라 문제는 약간 선비화는 되었을지라도 계통은 한인이었다. 북위의 건국 정신으로 되돌아가려는 시시한 복고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자 주대의 관료제도를 채용하는 대복고주의도 필요 없게 된다. 30년 남짓 계속된 육관제도도 문제가 즉위하자 바로 폐지되고, 관명은 한, 위의 옛 것에 따랐다고 하지만, 실은 북제의 제도를 다분히 채용한 것이다. 따라서 구명도 정종 9품으로 개정되었고, 구질은 유외 훈품으로 바뀌었다.

수대에는 공로를 표창하는 제도로 산관과 산실관(散實官)이라는 제도가 발달했다. 이는 실직이 있는 문무관이 가지게 되면 직함을 더하게 되고, 실직이 없는 자라도 가지게 되면 관리 대우를 받는 성질로 변화해 갔다.

수나라는 북제의 옛 영토를 어떻게 통치 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새로운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그 지역의 인재를 등용해야만 한다. 수나라는 산동의 인재를 등용한다는 정책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개황 3년에는 중국 지방제도 면에서 획기적인 변혁이 실시되었다. 즉 군을 폐지하고 주가 직접 현을 통치한다는 제도가 시작된 것이다. 또한 주현 요속의 상층부인 품관에 해당하는 자를 모두 중앙에서 파견한 자로 바꾸었다. 이 개혁의 이면에는 두 가지 큰 목적이 있었다고 보여지는데, 하나는 용원(冗員)의 정리이고, 또 하나는 귀족제도에 대한 탄압이다. 문제의 최후의 목적은 주현에서 봉건적 세력을 타파하고 중앙의 명령이 그대로 말단까지 직통하는 체제를 만드는 데 있다. 문제는 동시에 고과도 엄중히 했다.

지방관에 타 지방의 사람을 기용하는 등과 같이 너무 급격한 지방제도의 개혁 때문에 수나라는 멸망을 재촉했다고 할 수 있지만, 이 개혁 때문에 귀족 집단의 손해는 심각했다. 이후 귀족은 점차 쇠운을 맞이한다.

9.15. 중정의 종언과 과거의 성립

주군의 요속에 그 지역 사람을 기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세워지자, 중정도 물론 그러한 원칙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중정도 북주 이래 이미 그 임무의 태반이 소멸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북주는 관에 청탁을 인정하지 않고 귀족의 특권을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중앙의 임관에 즈음하여 본적지의 중정에게 자신의 신원을 보증하는 것이 필요없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정이 그때 거부권을 발동하는 일도 없어졌다. 다만 중정에는 지방 요속의 인선에 관여하는 일만 남아 있었다. 그런데 수대에 들어가 주현관이 중앙으로부터 파견이 되면 중정은 전혀 일이 없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중정은 주현의 요속이었기 때문에 다른 요속과 함께 배제되었다기보다도 그 직무가 없어졌기 때문에 그 관도 함께 소멸했다고 하는 편이 적당하다. 이렇게 해서 조조의 위나라 초에 두어진 중정은 360여 년의 명맥을 유지하고 소멸했다.

수나라 문제의 지방제도 개혁은 필연적으로 수재, 효렴제도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인선에 중앙이 책임을 져야 된다고 하면 어떤 형태로든 자격 심사를 해야만 한다. 하물며 중앙의 방침이 종래 귀족제도의 타파에 있고, 문지가 관료가 되는 조건에 포함되지 않으므로 오로지 개인의 재능 본위로 자격을 인정해야 한다. 여기에 필연적으로 종전에도 시행되고 있던 시험제도의 확대가 일어난다.

과거, 곧 과목에 의한 선거는 수나라 개황 연간에 성립했다고 할 수 있다. 당대의 중요한 과목인 수재, 명경, 진사의 3과목이 이미 갖추어져 있었다고 하면 실질적으로는 이것을 과거라고 보는 것이 옳다. 과거는 상거(常擧)라고도 말해지듯이 정기적으로 반복되는 선거이다. 이와는 달리 임시의 인재 선거가 있고, 후세에는 이것을 제거(制擧)라고 부르는데, 상거와 제거의 구별도 수대가 되어 확실해 졌다.

이렇게 보면, 수나라의 개황이라는 시기는 중국의 선거제도 상에서 중대한 변혁이 일어난 때이다. 구품관인법과 중정제도가 폐지되고 대신 과거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여 만약 구품관인법이 단지 9품관제에 의해 사람을 등용하는 것을 의미하고, 달리 중정의 향품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이해하면, 그 의미에서 구품관인법은 더욱 후세까지 진실로 9품관제가 계속되는 한 지속했다고 해야 한다. 또 과거도 단순히 과목에 따라 시험하는 제도라고 이해하면 수재도 효렴도 어떤 의미에서 과목이고, 그것은 한 대부터 이미 시작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10. 구품관인법에 대한 평가

10.1. 비판

구품관인법의 도입은 호족이나 명문가가 독점적으로 고위 관직에 오르는 길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해당 호족과 명문가들이 대대손손 고위관직에 오르면서 생겨난 문벌귀족이라는 계층을 계속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구품관인법이 성공적으로 시행되면 필연적으로 중앙정부의 고위 관직은 지역사회의 유력자들이 차지하게 된다는데, 중앙정부의 관료들과 지역사회의 유력자들이 같은 집단이 된다면 그야말로 동한 시기 이래로부터 내려오는 문제점이 완전 해결되는 거였지만 그렇게 되지가 않았다. 지역사회의 유력 집단과 중앙 귀족 집단이 점차 분리되는 현상이 나타났고, 이것의 위험성을 알아차린 황제나 심지어 중앙 귀족 집단 중 유능한 엘리트층은 이것을 제어하려고 노력했지만 완전히 막기는 역시 불가능했다.

개인의 재덕에 따라 향품을 주고, 그 향품에 근거해 관리에 등용한다는 지극히 관료적인 정신을 가지고 실시하게 된 구품관인법은 시행 초반부터 이미 귀족적 색채를 지니고 있었다. 고관의 자제는 재덕의 여하에 상관없이 높은 향품을 받고, 높은 향품에 따라 고관에 오를 수 있었다. 시험성적에 따라 중정의 승인을 받아 향품을 받았던 수재·효렴은 대개 우수한 성적을 받지 못하고 향품 4품을 받았던 것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세력가의 자제들은 청담으로 사교계에서 활약하여 향품 2품을 받는 방법으로 등용되었고, 수재, 효렴의 지위는 상실되어갔다. 이리하여 구품관인법은 귀족 중심으로 운영되었고, 지극히 이미 형성되어 있던 귀족 계급에게만 유리한 제도가 되어버렸다.

평가 기준에서 효, 덕, 인품 같은 요소가 차지하는 비율이 매우 높은데, 이런 요소들을 공정하게 측정할 기준 자체가 없었고 이는 향거리선제의 문제점과 비슷했지만 이걸 비난의 대상으로 삼는 건 관료제 운용의 기본을 모르는 주장이다. 공공연한 어떤 여론을 완전 무시하긴 어려웠고, 물론 최대한 공정하게 진행한다 해도 명성만 높고 실력이 바닥인 허풍선이들이 고위직에 오를 가능성이 높았지만 그렇다고 그런 요소를 배격하면 그야말로 공직 생활에서 최소한의 어떤 소신이나 기준점도 없이 살다 영달을 위해 권신에게 생각 없이 우루루 몸과 마음을 던지는 자들이 속출하는, 서한이나 조위 말기 같은 참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의 가장 큰 수혜자기도 한 사마씨 정권이 이 부작용을 가장 경계했고, 마찬가지로 북조도 남조도 때문에 이런 부작용을 알면서도 구품중정제를 포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대상자를 분류하는 과정에서 불효나 부덕, 불충 등의 사유를 파악할 때, 사소한 위반사항이 엄청난 문제가 되는 꼬투리 잡기식으로 진행되었던 병폐가 있었던 건 부정할 수 없다. 유능하고 명성 높은 인재가 어쩌다 3년상 치르던 중 병이 나서 여종에게 간호받았다는 사소한 이유로 불효 항목에 걸려 하품을 받는 어이 없는 사태가 일어나는 등.(향거리선제의 문제점과 일치) 문벌귀족에 속하는 사람들이 하품의 판정이라도 받았다간 가문의 힘으로 중정에게 항의를 하거나 중정을 실각시키려 할 테니 자연스럽게 높은 가문의 자제들은 엄청난 결격사유가 없는 한 상품을 주게 된다.[17]

거기에 대부분의 중정은 그 지방의 유력 문벌이 장악하게 되었으므로 실질적으로는 가문의 고하가 추천등급의 기준이 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상위 3품은 대부분은 문벌 출신이 차지했다. 이 때문에 중앙정부는 선발된 자들에게 각종 고시를 실시하여 공정을 기하려 했으나[18] 추천 자체가 이미 문벌 위주로 이루어진 이상 한계가 명확했다. 이 입법의 취지는 아주 좋은 것이었고, 적어도 서진 초기에는 귀족사회가 완결되기 전이었으므로 주로 평가 기준은 대상자의 부친이었지 가문 자체로 고착화된 건 아니었다.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구품관인법 연구에 따르면 부친과 아들이 좋은 향품을 받아 3품관까지도 승진했지만 본인 자신은 극도로 무능해서 관직 생활이 7품에서 끝난 문벌 귀족의 사례도 서진 시기에 발견되는데, 이는 이 경우 해당인의 아들은 즉 부친이 무능해서 승진이 막히면 향품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었음을 뜻한다. 다만 이것이 문벌 단위로 영향을 발휘하게 되는 건 남조 때 일이다.[19]

이 과정에서 일부 가문이 고위 관품을 독점하여 귀족이 출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나 이는 거대 차원에서 벌어지는 일이었고 수백 년에 걸쳐 일어나는 일을 한 줄로 요약한 것임은 역시 유념해야 한다. 다시 설명을 시작하자면, 순욱 등과는 달리 조조에 대한 저항을 포기하고 협력을 선택한 명사들은 이렇듯 사회적 시스템 차원의 보답을 받았고, 인사에 관하여 정부와 사족의 갈등이 발생할 여지는 그럭저럭 줄어들었다, 이후 사마의는 서기 249년 쿠데타를 일으켜 수도를 장악, 조상 일파를 공격하여 승리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이 사건을 전후로 하여 구품관인법을 보다 심화시킨 주대중정(州大中正)을 새로이 설치했는데, 이에 관해 이공범 교수의 《위진남북조사》에서 설명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사마의가 발상한 주대중정 신설은 자기 일파를 지방의 대중정에 임명하여 관계에 자기 세력을 부식하고 또 지방호족을 포섭하려는 계략이 숨어 있었다. 대중정을 주도(州都)라고도 칭한다. 여기에서 주대중정→군 중정의 상하 기구가 생기게 되어 이제까지 군 중정의 독립적인 품정권이 상위 기구인 주대중정의 규제를 받게 되고 이것은 군내의 명족보다도 주내의 명족 내지 중앙 관서의 고위에 있는 자가 선거에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을 뜻한다.
《위진남북조사》

따라서 사마의가 발의한 주대중정의 정수는 그것이 기존 명사들의 지지와 연대를 더욱 공고히 하는 것에 있었던 셈이다. 고평릉 사변 당시 위나라 조정은 일제히 사마의를 지지했고, 조상의 숙청과 사마씨에 대한 권력 집중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권리를 침해하려 한 하안과 하후현의 주장을 거부하는 것이 당연했다. 명사는 학문과 명성을 존립 기반으로 하지만 그 명성의 근저에는 결국 향리 사회의 지배자인 사족의 지지가 깔려 있다. 궁중에서 자란 하안은 유교에 노장사상을 끌어들임으로써 현학을 만들어냈고, 또 그 실효성을 인정받아 대신이 되었지만 결국 그 자신의 바깥에서 지지 세력을 얻지는 못했다. 와타나베 요시히로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기댈 곳 없는 부평초였다.
지방의 중정은 자신도 귀족이었으므로 귀족의 자제에 대해서는 2품 이상의 높은 평가를 주었으며, 곧 이 2품이 그 가문의 기득권으로 변해서 가격(家格), 즉 가문의 자격을 표시하는 부첩(符牒)이 되었다.[20] 이것으로는 아무리 우수한 인재라도 가격에 의해 초임관이 정해지고, 그 초임관이 낮으면 출세할 수 있는 전망은 사라진다. 거기에 실제로는 지방의 역학관계가 그대로 향품에 반영된다. 향품으로 이품을 갖고 있는 집안은 문벌 이품 혹은 갑종 등으로 불리며 최고의 가문으로 알려졌다. 향품 이품 이상이 되면 중정의 선임에 의견을 말할 수 있게 되어, 사실상 관료의 임명권은 이들 귀족의 손에 맡겨지는 일이 됐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향품은 9품으로 분류되지만 1품은 허명에 지나지 않아 사실상 2품이 최고품에 해당하였다. 3품은 서진 초까지만 하더라도 상품에 위치하나 존중을 받지 못했고 3품 이하의 품은 비품(卑品)으로 간주되었다. 주대중정의 설치 이후 구품관인법(구품중정제)은 귀족주의적 운영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면서 고관의 후손과 자제는 높은 향품을 받아 이에 상응하는 고위관직에 임명되어 결과적으로 출신가문에 따라서 향품이 고정화되고 향품의 고정화로 가문 사이의 상하의 격차 즉 가격(家格)이 생기게 되었다.[21]
동진 이후에는 명문 출신은 향품 2품으로 고정되었다. 특히 낭야의 왕씨나 진군의 사씨는 '문지이품(門地二品)'이라 불리면서 이 집안 출신자는 입법, 행정에 관한 최고 요직(2품 관직과 3품 가운데 필두)을 점했다. 또 초임관인 6~7품일 경우라도 최고 관직으로 승진하는 출세 코스가 결정되고 그 코스에 해당하는 관직은 '청관(淸官)'으로 간주되어 문지이품 가문 등 명문 귀족 가문들에게 독점되었다. 가령 6품인 비서랑(祕書郞)과 저작랑(著作郞) 등의 관직은 명문 귀족 자제들이 주로 임명되었다.

등급이 나누어지면 차별이 등장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 귀족들 등급에 따라 혼인할 수 있는 가문에 차별이 생기는 내혼(內婚)제는 물론이고, 관직에도 차별이 생겼다. 예를 들어 여기 6품 관리들이 있다고 하자. 이 6품 관리들 중에는 관품 9품을 받고 오랜 시간동안 경력을 쌓아온 연륜있는 한문(寒門) 출신 관리도 있을 것이고, 향품 2품을 받고 갓 관직경력을 시작한 세족(世族)의 도련님도 있을 것이다. 높은 집안의 귀족들은 여러모로 낮은 집안의 관리들과 있는 것이 불편했고, 때문에 고급 귀족들은 자신들과 한문(寒門) 집안 출신들이 역임하는 관직을 나누었다. 이를 한문(寒門) 귀족들이 역임하는 탁직(濁職)과 구별하기 위해 청직(淸職)이라고 하는데, 대개는 실무와 거리가 멀고 할 일이 없는 관직들이었다. 상설업무가 적고 숙직을 하면서 천자의 질문에 대답하는 가벼운 업무인 낭관(郞官) 같은 것이 주로 청요직으로 대접받았고, 그 밖에 상설업무로 일이 바쁜 벼슬은 탁직으로 여겨져 꺼려졌다. 쓸데없이 실무가 많은 관직을 맡았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 때 처벌을 받거나 관직이 강등되면 가문의 품위를 유지하기 어려우니까. 단, 탁직중에서도 요직이 있었는데, 무시하는 거야 자유지만 인사권과 감사권을 틀어쥔 한문 출신 탁요직한테 권력 투쟁에서 당하는 청요직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문벌 귀족 중에도 이런 구조를 잘 알아 권력욕이 강한 자는 청요직을 마다하고 탁요직을 자청하는 사례도 있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청요직이 아니면 고위직 승진은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물건너간 셈이므로 고위급 관료라도 탁직을 담당하게 되면 업무가 많아지고 승진이 사실상 멈추는 것과 다름없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고,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황제에게 간접적으로라도 항의하거나, 황제의 바지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리는 한이 있더라도 청요직으로 바꾸려고 노력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애초에 점점 실권 있는 지위들 자체가 관료 체제와 괴리되어갔고 그 상황에서 이런 탁직 출신들의 활약이 여기서 말하는 현상에 제동을 걸었던 건 분명하다. 정말로 이렇게만 돌아가는데 제대로 유지될 수 있는 관료 체계가 어디에 있겠는가?

실무 능력이 낮은 인물들이 고위직으로 올라가면서 관료들의 업무 능력이 전반적으로 하락하게 된다면, 황제 입장에선 주변 친위 체제를 가동하면서 하위직들을 주로 활용하게 된다.
다만 초기에 중정제를 도입한 의도한 것과는 달리 후기의 중정제는 주대중정제의 생긴 이후 가격(가문의 격차)이 고정되고 향품이 고정화되면서 중정의 품정은 외형만 남아 단순한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게 된 건 오히려 이런저런 이유로 중정을 견제하고자 마련한 장치들이 중정 자체를 무력화하면서 벌어지게 된 일이다. 높은 향품을 받는 귀족(고문, 갑족)들은 국가의 고위 관직 특히 청요직(淸要職)을 독점 세습하여 문벌귀족사회를 형성했고 남조시대에는 이것이 더욱 고정화되었다지만, 이것이 모든 시대에 모든 상황에서 적용된 일반적 현상은 아니었음을 유념해야 한다. 중앙 이부에서 뇌물 받아 먹은 고관들이 무능력자를 무리하게 높은 자리에 쑤셔박는 일이 벌어졌다지만, 그런 자리에 있는 자가 제대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됨이 황제에게 지나치게 자주 포착된다면 해당 고관은 정치적 입장이 매우 곤란하게 된다.

북위 말기 선비족 군인 출신들 위로한다고 한인(漢人) 중정들의 평가를 많은 부분 무시하고 행정적 자질도 도덕적 수준도 미달하는 이들을 마구 하급 품관에 밀어넣은 부작용이 톡톡히 한몫한 건 중앙 이부의 이러한 부패와는 무관하게, 오히려 구품중정제에서 그나마 기능하는 중정을 밑으로부터의 여론으로 마구 무력화하면서 벌어지게 되는 일이다.

10.1.1. 결과

시간이 지나면서 경력과 전공을 바탕으로 실무직책인 탁직(濁職)의 관직을 부여밭은 한문(寒門) 출신들의 권력이 강해지게 되었다. 가끔씩 별볼일 없는 가문 출신이 전공을 바탕으로 황제가 되면서 한문(寒門)이 황족(皇族)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22] 이에 귀족들은 자신들을 차별화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썼다. 몸 치장은 기본이고, 온갖 허례허식이 생기기도 했다. 여기에 당시 유행하던 청담사상까지 결합하니, 말기쯤 가면 고급귀족들이 마치 신선처럼 보이게 치장하고 살면서 실무가 뭔지도 모르는 생활을 영위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23][24] 절정에 달했던 남조의 귀족문화는 후경(侯景)의 난(548~552)을 계기로 종말을 맞았다. 이때 양나라가 멸망하고 많은 귀족들이 몰락했다. 양나라의 멸망과 함께 그들을 지탱해주던 권력과 부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혼란의 와중에 고풍스럽게 시를 짓는 귀족들은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25]

이 제도를 폐지할 수 없던 황제들이 궁여지책으로 상급 직책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하급 직책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도록 만든다던지, 측근들끼리만 정책을 결정한다던지 하는 대책을 내놓았지만 관료체제에 혼란이 발생하고, 부패가 가중되는 사태가 발생해서 오히려 결과는 더 안좋아졌고 안 그래도 혼란한 정국이 더 혼란해졌다. 이러한 양상을 제대로 된 관료제로 개편하려 시도한 인물이 위에서 언급한 양무제 소연인데 말년에 지치고 개혁에 필요한 냉혹함이 부족했던데다가 경제개혁에 실패했고 설상가상으로 후경의 난까지 겹치면서 무산되었다. 하지만 그의 아이디어는 후일 수문제의 과거제에 큰 영향을 주었다.

10.2. 옹호

10.2.1. 문제점과 보완책

제도 자체에는 여러 단점이 있었으나 초기 구품관인법을 운용했던 조위, 서진이나 남조의 동진, 유송 조정까지만 해도 생각보다 바보가 아니었기에 이 모든 단점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현지에서 인품이 좋고 여론도 좋은 인물이라 해도 중정에게 잘못 보이면 아예 기록이 안 되거나 하품의 상신서가 올라가게 되는데, 그러면 중앙정부에 아예 채용이 안 되거나 되더라도 평생 하급 직책만 전전하다 퇴임하게 된다는 지적은 구품관인제가 초창기일 때 조위의 하후현이 했던 말이었고 그 이후에도 서진에서 그런 지적이 있었으나, 분명 그런 현상은 있었으되 나름의 보완장치는 있었다. 한 번 중정에게 찍히면 나중에 출세해서 편파적인 중정을 갈아버린다는 선택지 자체가 있었다. 중정 자체는 주대중정-군대중정-군소중정 삼단계를 거쳤으며, 물론 주대중정의 견해가 가장 영향력이 강했겠지만 주대중정이 지나친 억지를 부린다 싶으면 소대중정이나 군대중정이 중앙정부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례도 있었다.

또한 중정은 교체되는 관직이었는데, 전임자가 했던 중정을 후임자가 바꾸는 사례가 많았고 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대놓고 중정을 편파적으로 하는 자는 귀족사회에서 자기 파벌 강화한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웠고 이 경우 관직 생활 자체가 끝나는 사례도 있었다. 문벌 귀족들도 바보가 아니었던지라 오히려 자기 아들의 관품을 한 단계 낮추거나 아예 출사시키지 않는 사례도 빈번했다. 혹은 황제나 이부상서에서 지나치게 높다 싶은 중정의 향품을 한 단계 깎거나 올리거나 하는 사례도 왕왕 있었다. 이렇게 중정이 문제를 일으킨다고 나중 가면 남조의 제나라 시대부터 중정이 무력화되고 북조에서도 대강 북제 시기 전후쯤 해서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데, 오히려 중정을 무력화하자 중앙 이부에서 뇌물 받아 먹은 고관들이 무능력자를 무리하게 높은 자리에 쑤셔박는 일이 자주 벌어졌으며, 북위 말기 대란도 선비족 군인 출신들 위로한다고 한인(漢人) 중정들의 평가를 많은 부분 무시하고 행정적 자질도 도덕적 수준도 미달하는 이들을 마구 하급 품관에 밀어넣은 부작용이 톡톡히 한몫 했었다.[26]

중정은 말 그대로 중립을 지켜야 하지만 진짜로 완벽한 중립을 지키는 인사는 예나 지금이나 찾아보기 힘들었던 건 사실이었다. 때문에 각 중정들끼리 담합해서 자신들과 관련을 가진 사람들에게 상품의 상신서를 올리거나 서로를 중정으로 추천함으로써 자신들을 지지하는 파벌을 만들 수 있다. 사마의 일당이 바로 이런 식으로 조위의 기반을 허물었던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래서였는지 사마씨 정권은 똑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게 상당한 주의를 기울였었다. 물론 조위 시절의 사마씨가 기존의 군중정 위에 '주대중정(州大中正)'을 설치함으로써 완전히 높으신 분들끼리 관직을 나눠먹는 사태를 만들었지만, 일단 그 장점을 활용한 뒤에는 이부상서의 견제권을 키웠고, 주대중정 자체의 권한도 대폭 줄이면서 군대중정, 군소중정한테도 중앙 관직을 겸직시켰다. 때문에 진을 찬탈한 유송과 유송을 찬탈한 남제는 군사력이란 수단을 더욱 직접적인 수단으로 운용해야 했고, 남제 이후에 가면 나중 가면 정권에 별 도움도 안 되는 중정 따위는 오히려 유명무실화되고 마는데 오히려 이 시기부터 구품관인법의 단점이 심화되기에 이른다.

평가 기준에서 효, 덕, 인품 같은 요소가 차지하는 비율이 매우 높은데, 이런 요소들을 공정하게 측정할 기준 자체가 없다고 후세인은 오해하겠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공공연한 어떤 여론을 완전 무시하긴 어려웠고, 물론 최대한 공정하게 진행한다 해도 명성만 높고 실력이 바닥인 허풍선이들이 고위직에 오를 가능성이 높았지만 그렇다고 그런 요소를 배격하면 그야말로 공직 생활에서 최소한의 어떤 소신이나 기준점도 없이 살다가 영달을 위해 권신에게 생각 없이 우루루 몸과 마음을 던지는 자들이 속출하는 서한 말기와 조위 말기 같은 참상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었다. 다름아닌 가장 큰 수혜자기도 한 사마씨 정권이 이 부작용을 가장 경계했고, 마찬가지로 북조도 남조도 때문에 이런 부작용을 알면서도 구품중정제를 포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몇 가지 장치도 있었다. 아무리 점수를 후하게 줘도 그 혜택을 받은 자가 취임할 수 있는 관품은 어디까지나 6품이 한계였고, 5품부터 출사할 수 있는 자는 극소수 왕족이나 외척에 한정되었으며 나중 가면 외척이라고 해도 5품 출사는 꿈도 못꾸게 된다. 당연히 황제라고 해도 자기가 총애하는 자를 그보다 위 관품에 취임시킬 수가 없었으며 사실 중정이 줄 수 있는 가장 높은 향품이란 것도 대부분은 7품에서 시작시키는 향품 3품이 한계로 자리잡게 된다. 전임 중정이 일반적 평판에 비해 지나치게 좋은 향품을 주면 후임 중정이 향품 자체를 고쳐버리는 사태도 있었고 그런 일을 통해 기존에 출사한 자도 갑자기 강등 크리 먹어 전임 중정과 스스로의 위명이 훼손되는 일도 있었다. 부친과 아들이 좋은 향품을 받아 3품관까지도 승진했지만 본인 자신은 극도로 무능해서 관직 생활이 7품에서 끝난 문벌 귀족의 사례도 서진 시기에 발견된다.[27]

대상자를 분류하는 과정부터 불효나 부덕, 불충 등의 사유를 파악하게 되는데, 대부분 이런 분야에 대해서는 사소한 위반사항이 엄청난 문제가 되는 꼬투리 잡기식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유능하고 명성 높은 인재가 어쩌다 3년상 치르던 중 병이 나서 여종에게 간호받았다는 사소한 이유로 불효 항목에 걸려 하품을 받는 어이 없는 사태가 일어나고,[28] 문벌귀족에 속하는 사람들이 하품의 판정이라도 받았다간 가문의 힘으로 중정에게 항의를 하거나 중정을 실각시키려 할 테니 자연스럽게 높은 가문의 자제들은 엄청난 결격사유가 없는 한 상품을 주게 된다. 사실상 출신가문이 어디냐에 따라 판정이 결정나는 것이다. 그런데 기껏 상품 받아서 높은 품계에서 시작해봐야 무능함이 입증되면 그 다음 승진에는 애로사항이 꽃피었다. 또한 그 후엔 그걸로 그냥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중정을 누가 행했는지까지 추궁되는 경우도 있었다.

* 지방 민심이 무시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각 지역의 여론인 향론이 강력하면 그나마 제대로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삼국시대의 대혼란 속에서 향론은 각 지역이 황폐화되고 지역민들이 유랑하면서 붕괴된 지 오래였다. 역설적이게도 애초에 향론들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었다면 구품관인법을 만들 이유가 없다. 따라서 향론이라 해도 사실상 중앙정부의 중정이 생각한 향론이 되어버리므로 중앙정부에서 생각한 인물이 추천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즉, 형식적으로만 지역민심을 감안하는 제도가 되.....지는 않았다. 물론 사마의 일당은 조위를 찬탈할 때 바로 저렇게 운용했지만 바보가 아니었던 지라 일단 찬탈을 이루고 나서는 경험이 있어서였는지 중정들의 농간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었고, 오히려 나중 가면 이런 일이 벌어진다고 해서 훗날의 유송-남제, 그리고 북조에서는 북위 말기와 북제 말기 시절 중정들을 무력화시키고 이부의 판단을 절대화하자 그야말로 지방 민심이 무시되는 빈도나 사태가 잦아지게 된다.

결국 제도가 시행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서진 시대에 이미 상품(上品)에 한미한 가문 출신이 없고 하품(下品)에 세도가 집안이 없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명문가 출신인지 아닌지만 따져서 관직을 주는 제도가 될 위험이 있었다. 명문가에 태어나지 않고서는 절대로 고위 관료가 될 수 없다는 한탄이 있었으나, 이건 하후현과 서진 시기의 산도가 했던 그 지적인데,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런 일을 막는 운영을 한 게 서진의 산도였고 그걸 뒷받침한게 사마염이었다. 이런 부작용은 분명 있었지만 그걸 막는 나름의 평가 제도나 인사 고과 제도는 기능하고 있었으며, 동진의 사마예는 갑자기 불시에 모든 관료의 능력 평가를 시행해서 부적격자는 귀족이든 개국공신이든 뭐든 탈락자는 자격을 박탈하기도 했었다. 귀족이라고 해도 무능이 극에 달한 자는 승진에 어려움이 있었고, 군벌의 막료로 들어갔다가 그 군벌의 권력장악이나 찬탈을 돕는 자는 실력으로 상품을 얻어내는 사례도 잦았다.

상기했듯 처음에는 낮은 품계를 주기 때문에 명문가에 태어나 고위 품계로 올라가는 하급 직책은 청요직이라고 해서 대접받고 나머지는 멸시받는 사태가 일어났다. 황당하게도 상설업무가 적고 숙직을 하면서 천자의 질문에 대답하는 가벼운 업무인 낭관(郞官) 같은 것이 주로 청요직으로 대접받았고, 그 밖에 상설업무로 일이 바쁜 벼슬은 탁직으로 여겨져 꺼려졌다. 이렇게 된 이유도 가관인데 높으신 분들이 될 사람들이 잘 알지도 못 하는 실무를 담당하다 실수나 사고라도 치면 경력에 금이 갈 테니 나중을 위해 좋은 대우와 평판을 받으면서도 위험성이 적고 한가한 업무에 종사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실무 능력이 낮은 인물들이 고위직으로 올라가면서 관료들의 업무 능력이 전반적으로 하락하게 된다. 한 마디로 말해 놀고 먹는 놈이 더 대접받는 세상이었다. 이러면 청요직에 있는 사람은 그냥 대기순번 탄 셈이니 다른 사람들을 깔보면서 업무를 등한시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이런 더러운 꼴을 보면서도 승급의 희망도 없으니 부패의 길로 나서게 된다.[29] 그런데 이건 그냥 위험성이지 늘상 벌어졌던 일은 아니었다. 예컨대 탁직이라고 해도 요직이 있었는데, 무시하는 거야 자유지만 인사권과 감사권을 틀어쥔 한문 출신 탁요직한테 권력 투쟁에서 당하는 청요직들이 없는 게 아니었고, 문벌 귀족 중에도 이런 구조를 잘 알아 권력욕이 강한 자는 청요직을 마다하고 탁요직을 자청하는 사례도 있었다.

10.2.2. 결론

구품관인법에 대해 지나친 폄하가 횡행하지만, 그렇게까지 나쁜 제도였다면 수백 년 동안 여러 왕조가 채택하지 않았을리 없다. 여러 좋은 제도를 섞어 잘 만들었던 건 사실이다. 또한 각 왕조마다 운용했던 구품관인법의 내용이나 운용 방법은 차이가 있으며, 물론 조위 말기에 사마씨 정권이 운용했던 구품중정제는 그야말로 부정적인 이미지에 어느 정도는 걸맞았던지라 인상이 강렬하지만 서진은 바보가 아니었기에 찬탈을 이룩하자마자 여러 제어 장치를 둬서 구품중정제의 진보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북위가 초기에 본격적 개혁을 위해 채택했던 제도는 후대에 망가진 남조의 구품중정제가 아닌 서진의 구품중정제였으며, 복고주의를 외쳤던 북주의 제도도 그 실상은 서진의 구품중정제에 한나라 제도를 약간 가미한 것에 그쳤다. 구품중정제와 가장 거리가 먼 제도를 운영했던 건 의외로 남조의 마지막 왕조 진나라였지만 기대와는 달리(?) 수나라에게 허망하게 망했다.

부작용이 많았지만 제대로 돌아간 기간이 극히 적다는 것도 때문에 편견에 불과하다. 주-군에 이르기까지 조직적인 인사제도를 만들고, 지방분권화 경향이 강했던 위진남북조의 추세에서 지방세력을 중앙에 끌어들여 정국을 그나마 안정시킨 것, 강성했던 지방을 누르고 중앙을 강화하는 강간약지 중앙집권화에 공헌한 것, 관직을 9단계로 세세하게 구분함으로써 관료제를 체계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정말 큰 장점으로, 이런 제도적 배려가 미비했거나 아예 무시했던 5호16국들이 그렇게도 빨리 망하고 내부 권력 다툼이 격렬했던 건 무시하지 못할 점이다.

조위 초기에 잘 돌아갈 때는 본래 목동 출신으로 하급 관리였던 등애 같은 인재가 추천되는 등 긍정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같은 시기에 이미 종회가 등애의 출신이 낮다고 무시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 귀족화 경향이 매우 빠르게 나타났다. 구품중정제의 문제점은 이미 조위 시대 말에 하후현이나 두예가 폐지를 건의할 정도로 익히 잘 알려진 상태였으나 당대 시대 한계상 이 제도보다 좋은 제도를 고안학기는 무리였다. 물론 이 제도가 기득권을 강화한다는 점을 알아차린 귀족 계층들이 사수하려 한 적도 있었으나, 그것이 이유의 다는 아니었다.

사실 구품관인법은 정책의도는 성공적으로 달성했다고 할 수 있다. 구품관인법은 기본적으로 향거리선제의 지역사회의 여론에 의한 천거라는 방식 및 인품이라는 기준을 유지하면서 지역사회의 여론 판단 과정을 중앙정부의 관료체제 내부로 흡수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중앙정부가 지역사회의 실제 여론을 사실상 무시한다는 반발을 받지 않도록 지역사회에서 낮은 평가를 받은 사람이 중앙정부에서 높은 지위를 얻는 것을 막았다. 향거리선제의 천거 과정은 지역사회의 인재들을 중앙정부에 효과적으로 안착시키기가 상대적으로 어려운 반면 구품관인법은 향거리선제보다 이들을 중앙정부의 관료제에 더 체계적으로 흡수할 수 있기 때문에 높은 평가를 받았다. 실제로 향거리선제와는 달리 구품관인법에서는 지방의 유력자들로 이루어진 귀족들의 대두에 외척이나 환관들이 거의 저항하지 못했다. 구품관인법은 외척과 환관의 발호를 원천부터 차단한다는 조위부터 시작한 제도답게 외척과 환관의 전횡을 억제하는 데 그 효용을 입증했으며, 남조와는 달리 이 부분에서 철저하지 못했던 북조의 관료 체제는 수문제의 개혁을 거친 뒤에도 그 단점을 극복하지 못해 결국 당나라가 환관과 외척에 휘둘리게 되는 단서를 제공하고 만다. 당장에 당나라만 해도 권력을 쥔 환관들이나 그들의 횡포가 많이 나오지만 위진남북조시대에는 그런 이들은 눈에 띄지 않는다.

남북조시대쯤 가면 쿠데타로 인해 국가가 교체되고 황실이 바뀌더라도 귀족 계층은 그대로 유지될 뿐 아니라 귀족이 되고 안 되고는 귀족들만 결정이 가능한 사태가 발생했다지만 이는 과장된 사례로, 그게 가능했던 귀족은 그야말로 향품 1품을 받는 초엘리트 집단이었지 나머지는 그렇지가 않았다. 물론 유송 이래 남조의 창업군주들은 하나같이 한미한 무장 출신이라 권위를 인정받고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 귀족 세력을 포용해야 했지만, 정도가 지나치게 으스대는 귀족은 그 시대 기준으로 봐도 한심한 부류였고 나름 교양 쌓은 귀족층은 그런 짓 하지 않게 집안단속도 했다. 귀족들과 별개로 한미한 인사들이 제대로 된 관직에 나서지 않은채 임시직이나 측근직에서 문제를 일으킨 건 오히려 제양 시대 일부터로, 그전에는 한미한 인사들이라고 해도 나름 정해진 루트를 밟아서 관직에 임용되었다. 물론 제양 시대에 어그러진 상황을 제대로 된 관료제로 개편한 인물은 다름아닌 양무제 소연이었고, 그의 아이디어는 훗날 수문제가 적극적으로 채택했을 정도로 훌륭했다. 차이가 있다면 양무제는 경제 개혁에 실패했고 개혁에 필요한 독한 추진력과 냉혹함이 없었다 뿐이지, 제도 자체가 개판이어서는 아니었다. 황제라도 귀족들에게 우리보다 한미한 가문 운운하는 뒷담화도 정도껏 해야 했고, 황제가 추천한 인물이라도 귀족들 마음에 안 들면 귀족이 못 되며 고위 관직에도 오를 수 없었다는 건 과장이 크다. 오히려 이러한 나름의 규칙은 서한과 동한 시기에 무자격자가 갑자기 고관이 되는 사태를 막는 순기능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구품관인법은 어쨌거나 세습제, 천거제, 엽관제, 임자제, 향거리선제, 유재시거보다 체계적이며 합리적이고 선진적인 인사제도인 건 사실이었다. 다름아닌 서진 정권을 포함한 당대인들이라고 구품관인법이 문제가 있다는 걸 모르지는 않았던 것이다. 북조가 이 제도를 수입한 건 단순히 보기에만 멋져보이는 제도여서가 아니다. 위 서술들 중 단점을 논하는 부분은 크게 깎아서 봐야 한다. 그것들은 수백 년 동안 이어진 구품관인법을 극도로 단순화시켜 단점만 부각시켜서 다소 주의가 필요하며, 중정을 맡는 관리들이 늘상 쓰레기 같은 귀족주의자였던 것도 아니고 또 설령 스스로는 귀족주의자라고 해도 나름대로 책임감을 갖고 평가에 임한 관리도 없지 않았다. 또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누가 봐도 무능력한 자를 고위직에 앉혀놓았다가 황제까지 눈치챌 정도로 큰 일이 나면 그 책임은 전적으로 중정을 맡은 자와 인사 업무를 맡은 중앙 이부에서 져야 했던터라, 나름대로는 선을 지키려고들 했다. 다름아닌 서진만 해도 죽림7현 중 하나인 산도는 구품중정제를 올바른 취지대로 운영하려고 노력해서 당대에 나름의 명성을 얻었고, 귀족이 아니더라도 대단한 학문적 성취를 보이거나 뛰어난 자는 구품중정제의 바늘구멍을 뚫고 출세하는 사례가 있었다. 또한 귀족이더라도 무능한 자는 이러한 사정으로 출세에 한계가 있었다.

또한 주-군에 이르기까지 조직적인 인사제도를 만들고, 지방분권화 경향이 강했던 위진남북조의 추세에서 지방세력을 중앙에 끌어들여 정국을 그나마 안정시킨 것, 강간약지[30]에 공헌한 것, 관직을 9단계로 세세하게 구분함으로써 관료제를 체계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정말 큰 장점으로, 이런 제도적 배려가 미비했거나 아예 무시했던 오호십육국들이 그렇게도 빨리 망하고 내부 권력 다툼이 격렬했던 건 무시하지 못할 점이다.

황제들 중에서도 양무제처럼 국정에 책임감이 대단한 군주들은 문벌귀족들의 농간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제어하려고 주도면밀한 감시를 아끼지 않았으며, 북조가 이 제도를 취한 것도 단순히 보이게만 아름다워서는 아니었다. 육진의 난 자체는 구품중정제보다는 호한합작을 이루려는 방식이 일방적인 상층의 한화 및 상층끼리의 융합이 부작용을 이룬 것으로, 장기간 나라가 두 쪽으로 갈려 벌인 내전의 원인을 제공하였다고 하지만 이전 동위-북제는 사실상 그전 북위의 제도대로 돌아갔는데도 한동안은 북주를 압도했고 북주는 북제를 병합한 후에는 결국 북위와 양나라를 참조한 제도개혁을 통해 수당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11. 구품관인법과 과거제의 관계

시대가 지나면서 구품관인법의 혜택을 받는 문벌귀족층에서 구품중정제를 완강히 고수했다지만, 때문에 수나라 시절에 확실한 대체재인 과거 제도가 도입되자 과거제를 어느 정도 저해했어도 그 작용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수나라의 과거 제도도 완벽하게 독창적인 발명은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구품중정제의 틀 안에서 실시된 수재와 효렴 제도의 연장이었다. 수재와 효렴을 확대해서 수나라 시대 과거 제도의 기틀을 마련한 사람은 수문제가 아닌 양무제였고, 청직과 탁직 구분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개편을 시도했던 군주도 다름아닌 양무제였다. 양무제는 수문제만큼 반대파를 가차없이 숙청하는 결단력과 냉혹함이 없어 근본적인 개혁은 실패했지만, 양무제의 실패 사례를 제로 베이스부터 면밀히 검토하고 남북조의 구품관인제의 장점도 과감하게 수용한 수문제 덕택에 과거 제도는 그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수나라 멸망 이후 당나라 2대 황제 당태종 때부터 수문제의 '선거'를 '과거'로 이름을 바꿔서 본격적으로 과거를 시행하기 시작하였다.

다만 수나라와 남조의 마지막 왕조 진나라 시대를 거치면서 구품관인법의 정수인 중정이 완전히 무력화되어 사라지고 최소한의 견제장치를 완전히 상실하여 붕괴되여 서한시대 임자제로 퇴보한 영향으로 수나라 시절에 확실한 대체제인 과거제도가 도입되었어도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고, 당나라 후기 안사의 난부터 시작하여 황소의 난까지의 전란으로 문벌귀족들의 지역 기반이 초토화되고 주전충이 문벌귀족을 대량으로 숙청한 후에야 비로소 과거제가 제대로 실시된다.

흔히 당나라 시기에 한국에서 상상하는 완벽한 선발 관료제가 정착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실제로는 전혀 아니었다. 일례로 당나라의 과거시험에서 655년 한해 동안 꼴랑 44명만 합격했으며, 이후 측천무후가 실권을 잡기 이전인 7년 동안 연간 평균은 매년 58명 정도 밖에 안 되었다. 물론 측천무후 이후부터 활성화되어서 매년 수백, 수천명의 과거 합격자가 나왔으나 거의 대부분은 진사 자격만 받고 지역에서 명사로 대접받는 걸로 끝이었다. 실제 관료로 임명되는 것은 1~2%에 불과했다. 잘못 적은게 아니다.[31] 측천무후 사후의 평균 과거제 관료 발탁은 연평균 23명에 불과했다.출처 특히 황소의 난 이후 절도사의 흥기로 정부가 마비되면서 과거제가 유명무실해진 시기까지 합해서 측천무후 시기 이전보다 합격자가 적어졌다. 하지만 당나라는 정상적으로 정부가 기능할 때도 몇십명 중반대 수준의 발탁에 그쳤다.그래서 당나라 시절의 과거 제도는 어디까지나 귀찮은 인재 발탁을 보조하기 위한 것이었지, 실제로 관직에 임명시키는 것은 과거 시험과 완전히 별개로 황제 개인의 호오와 높으신 문벌귀족들이 잡일을 처리할 사람을 찾을 때에 전적으로 달려 있었다.

수-당시대 과거는 당나라가 망하고 고려시대에 쌍기가 들여온 과거의 형태와 매우 다르다. 과거 왕조의 구품중정제와 북송시기에 정착된 일반적인 과거시험의 과도기의 제도였다. 왜냐하면 첫째 정기적이지 않으며, 둘째 시험 관직임용이 성적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며[32], 셋째 후대 명경과와 진사과처럼 명확한 기준이 아닌 시류에 맞춘 즉흥적인 기준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당나라 때 본격적으로 시작 되었으나 과거 과도기적 성격이 강하고, 급제자가 한번에 십수명에 불과한데다가 등용도 잘 되지 않았다. 중당시기 백거이의 진사시험 동기는 16명이었다. 성당시기 천보 연간엔 응시자 모두 탈락시킬 사례가 있을 정도로 보편적으로 자리잡지 못 했다. 한편 당나라에서는 빈공과라는 외국인 전형도 운영했다. 전시 제도는 송나라 때 생기지만 황제 앞에서 최종 순위 결정전을 치르는 전시의 원형은 당현종 때 생겨난다. 그러나 당나라 때 순위 결정전인 전시는 제한적으로만 실시했다. 전시 횟수도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몇 번 안 된다.

애초에 수당 귀족제는 구품관인법이 완전히 붕괴한 임자제라 명목상의 중정관도 없이 아비의 관품으로 자식 관품이 정해진다. 임자제는 후경의 난으로 남조 귀족사회가 붕괴하고 원래 사회적 평가가 낮은 남진의 신흥귀족이 평가에 의존하지 않으려고 도입한 제도로 수당의 관롱집단육진의 난 이후로 출세한 신진세력이니 그런 점을 마음에 들어했기에 최소한의 명분도 집어던진 진정한 귀족사회였다. 임자제는 아비가 1품이면 아들은 정7품상, 아비가 2품이면 아들은 정7품하, 아비가 3품이면 아들은 종7품상이며 아비가 종5품에서 국공이면 아들은 종8품하였는데 과거급재 수재과는 상상등 정8품상, 상중등 정8품하였고 명경과는 상상등 종8품상, 상중등 종8품하였고 진사, 명법 등의 제과목은 종9품상이었다. 다시 말하면 설령 과거에 합격했더라도 이부의 시험을 거쳐야 했는데 이부는 인사권을 다루는 대표적인 청요직으로 귀족들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과거 합격을 출세를 보장해주지 않았다.

즉 과거를 아무리 잘 봐도 정8품상이 한계고 이는 정4품 자식이 임자제로 등용되는 경우의 품계와 같았다. 결국 당나라 말 주전충이 문벌귀족을 싹 쓸어 버린 백마의 화까지 귀족들이 고위관직을 사실상 독점했었다. 결국 과거제는 수당시기에 하급 관리를 뽑는 수단으로 밖에 기능하지 못했으며 위진 시기에 왕창이 구품관인법의 보완으로 관료를 시험쳐서 뽑자고 한 것보다 후퇴한 것이다.

이런 폐단은 일단 기존의 문벌귀족들이 모두 숙청된 송나라(북송) 건국 이후 과거 합격자들을 복시(재시험)하고, "지난번 과거 합격자의 차례에서, 많은 것을 세력 있는 가문(勢家)에서 취했으니, 변방의 외롭고 가난한 자들은 고달프다. 지금 짐이 친림해 시험을 치니, 진퇴의 가부로, 이전의 폐단을 전부 고치겠다."(속자치통감)라고 권세가 눈치보고 채점하는 행태를 송태조가 직접 나서 개혁하고 전시를 도입하면서야 해결된다. 송대부터 황제의 앞에 나서서 시험을 치르는 전시(殿試)가 도입되면서 이 때부터 초시 - 복시 - 전시 3시 상설 시스템이 확립되었고 확고한 관료공급 체계로서 과거제도가 완전히 정착되었다. 이런 당나라 시대의 과거제와 송나라 시대의 선발 관료제는 사실상 완전히 별개의 것이었고, 일반적으로 시험 합격자가 관직을 얻도록 정착시킨 것은 엄청난 혁명이자 급진적인 사회 발달이었다. 이러한 혁명의 결과 수•당 시기에 지속적으로 약화되어온 관롱집단 귀족층 계급을 사실상 와해시켰으며, 중국 정부를 귀족과두정에서 황제가 직접 통솔하는 관료제 정부로 바꾸었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중국의 지배층을 기존의 문벌귀족에서 중국의 부르주아라고 할 수 있는 신사층으로 대체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즉, 과거 제도는 자신이 장원급제를 해도 자손이 과거에서 떨어지면 엿을 먹는 격이 되므로 대대손손 해먹기가 힘들기 때문에 실력 위주로 인재를 선발한다는 중요한 장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기존 구품관인법이 수당시대에 완전히 붕괴되어 사실상 서한 초기의 임자제로 후퇴함에 따라 장기간에 걸처 하급 관료만 선발하는 제도로만 운영된 셈이며, 이들의 지역 기반이 초토화되고 과거 급제자에 대한 인식이 상향된 후에야 본래 취지대로 운용되었다 할 수 있다. 또한 과거 제도도 역시 당대 시각에선 좋은 제도였고 위진남북조의 구품중정제보다는 진보한 제도긴 해도,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실무적인 부분에 대한 평가는 아직 미약했기 때문에 역시 많은 부분 결함이 있었던 제도임은 부정할 수 없다.[33]

12. 매체

삼국시대에서 역사적으로 몇 안되는 중요한 제도이나 정작 창작물에서는 중요하게 다뤄진 적이 드물다.

그나마 다뤄진 것이 중국에서 제작하여 사마의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 대군사 사마의. 극중 사마의가 중요한 개혁과제로서 구품관인법을 크게 미는 모습을 보이며 심지어는 이 것 때문에 조씨 가문과 티격태격하기 까지 한다. 심지어 하후돈이 죽기 직전에 직접 나서서 개혁 속도를 늦춰달라며 구품관인법을 막으려 사마의를 설득하는 모습까지 나온다. 미래에 구품관인법을 하후현 등 사마씨 반대파들이 막았다는 역사적 사실과 더해지면 사마의가 간신처럼 보일 지경. 사마의가 주인공이니 만큼 구품관인법에 대해선 우호적으로 나오지만, 사실 잘 살펴보면 드라마 내에서도 등애가 좋은 의견을 가졌음에도 말더듬이에 미천하다고 제대로 쓰여지지 않거나, 백령균이 구품관인법의 문제를 핵심적으로 지적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사마씨가 구품중정제의 허점을 파고들어 조위를 빼앗았던 건 사실이기에 이 드라마의 관점은 어느 정도 사실에 부합하긴 하다.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장수제인 몇몇 시리즈에서 관리의 레벨과 비슷한 개념으로 적용되어 있다. 실제와 달리 황건적의 난 시절부터 나오는데 이는 게임으로서의 편의성을 위해서인 듯. 삼국지 8에서부터 처음도입되었다. 삼국지7에서는 구품관이 너무 길다고 해석한 탓인지, 스케일이 적은 오품관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나온다. 이후, 삼국지 10, 삼국지 13에서 장수제로 플레이 할 경우, 무조건 도입되는 구조로 바뀌었다.

초기작과 후대작의 차이가 있다면, 태수 자격 여건이 갖추어 지느냐에 따른 차이가 있는데, 삼국지 7과 8에서는 품계가 낮아도 태수는 아무나 할 수 있지만, 후속작인 삼국지 10부터는 오품관 미만은 도시를 통치 할 수 없게끔 되어 있으며, 이는 군주에게 일일이 허가를 받아야 할 정도로 까다로워진다.

더군다나 시스템 특성상 태수가 배반하여 타세력으로 넘어가면 지배하던 도시까지 모두 적국으로 넘어가는 특성상, 게임 밸런스를 망치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이 때문에 보급로가 끊겨서 명령을 하달받지 못하는 도시는 자연스럽게 전선이 무너지고 퇴로가 끊어져서, 유리하던 전개가 한순간에 확 뒤집히게 된다. 후속작부터는 태수가 배반하더라도 도시는 넘어가지 않게끔 안전장치를 깔아뒀기 때문에, 고통받는 일이 적어졌으나, 상급자와 친밀하지 않으면 지금은 그럴 시기가 아니오. 라는 말만 듣는다. 결국은 인맥빨 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또한 품계에 따라서 봉록과 병력 상한선이 존재하는데, 말단의 품계에서는 아무리 능력치가 좋다 하더라도 무명일 경우에는. 얄짤없이 말단에서 구른다. 이 또한 불합리한게, 태수하던 놈들은 군단장/도독으로 승진시 더욱 빡세게 굴리며, 아랫사람을 미친듯이 갈궈대는 특징이 있다. 상관 명령을 무시하고 멋대로 행동하면 강등까지 당하고, 여기에 불만을 품은 말단은 하야하거나 타세력으로 이적까지 할 정도니 말 다했다.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에서 진군이 도구를 사용하거나, 레벨이 상승하거나, 승리 자세를 취할 시 들고 있는 목간에 구품관인법이 적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 훗날 조선에서 현량과 실시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졌을 때 반대파의 주장이 "한나라도 그거 했다가 거하게 말아먹은거 아닙니까?" 였다.[2] 요컨대 일단은 평론을 반영하여 채용을 하지만 한편으로는 평론만 좋고 실력은 없는 사람일 수 있으니 평론보다는 다소 낮은 자리르 준 뒤 실력을 드러내면 승진시킨 것이다.[3] 다만 이것은 삼국지연의에 있는 내용이고 실제로 이들이 등용된 경위나 시점은 제각기 다르다.[4] 즉 다른 말로 하면 공평하고 보편적인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5] 이 구품관인법 하나로 진군은 삼국시대의 역사적 인물로 평가받으며, 한 예로 코에이 삼국지 게임 시리즈에서 언제나 90 이상의 높은 정치력을 가진 문관으로 등장한다.[6] 후한 말만 해도 수천만에 달하는 중국의 인구가 삼국시대에 접어들어 고작 수백만으로 줄어든다. 하지만 전근대 특성상 질병이나 기근이 아닌 이상 인구가 그렇게까지 줄어들 방법이 없고 적어도 그정도로 인구가 줄어들 팬데믹이나 대기근은 없었다. 결국은 이유는 단 하나, 인구를 파악할 행정력이 약해졌다는 것이 된다. 문제는 위나라가 위오촉 셋중에 그나마 행정력은 강한 편이었다.[7] 조조의 양할아버지만 해도 환관이었다.[8] 홍승현, 사대부와 중국 고대 사회:사대부의 등장과 정치적 각성에 대한 연구.[9] 만일 이런 장치가 없게 되면 사대부들은 중앙에서 건질 것이 없으니 각자의 고향에서 지방 호족화 될 것이고 이게 진행이 되면 특별히 중앙정부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어진다. 이와 관련하여 좀 극단적인 예시를 들자면 프랑스 카페 왕조의 시조인 위그 카페카롤루스 왕조가 단절된 후 귀족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는데 이 사례에서 보듯 프랑스 아니, 당시 유럽은 귀족들의 힘이 강하게 왕의 힘이 약했으며 귀족들의 힘의 원천은 지방에 있는 영지, 즉 영주라는 것에서 나왔다. 이러다 보니 위그 카페는 한 백작과 말다툼이 벌어져서 "누가 네놈을 백작으로 만들어 줬더냐!" 라고 호통을 쳤지만 그 백작은 되려 "그렇다면 누가 당신을 왕위에 앉혔소?" 라고 말했다. 이는 중국 같으면 왕조 말엽 황제가 꼭두각시가 되고 실권을 쥔 사람은 따로 있는 상태에서 그 사람이 개망나니 수준이 아닌 이상은 보기도 어려운 일이다.[10] 청년이 처음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기가(起家)라고 부른다.[11] 아무리 현지에서 인품이 좋고 여론도 좋은 인물이라 해도 중정에게 잘못 보이면 아예 기록이 안 되거나 하품의 상신서가 올라가게 되는데, 그러면 중앙정부에 아예 채용이 안 되거나 되더라도 평생 하급 직책만 전전하다 퇴임하게 된다. 이런 지적은 구품관인제가 초창기일 때 조위의 하후현이 했던 말이었고 그 이후에도 서진에서 지적이 있었다.[12] 이런 시대적 발달을 문자 한두 줄로 축약한 서술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걸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13] 당나라가 통일하고도 본관으로 돌아간 교성은 거의 없다.[14] 본래 본관은 군 단위로 따졌기 때문에 군망(郡望)이라고도 한다.[15] 한국도 인구의 절대다수가 자신의 본관과 다른 곳에서 살지만 본관을 살던 곳으로 안 바꿈을 생각하면 쉽다.[16] 옛날에 한국에 있었던 동성동본 혼인금지를 생각하면 된다.[17] 하지만 그렇다고 이념적인 배려를 무시하면 안 되는 건 이해해야 한다. 동시대 로마 제국은 기독교 윤리를 지키지 않는지가 그나마 평가 기준으로 작용했고, 도덕적인 기준을 심하게 어기는 관료는 교회의 강력한 비난 대상이 되었으나 중원 제국엔 이런 역할을 하는 교회가 없었던 걸 감안해야 한다.[18] 동진의 사마예는 갑자기 불시에 모든 관료의 능력 평가를 시행해서 부적격자는 귀족이든 개국공신이든 뭐든 탈락자는 자격을 박탈하기도 했었다.[19] 때문에 이 설명만으로는 비판거리가 못된다. 후대의 과거제 역시도 일단 이론상 아빠는 똑똑해서 고위직을 했지만 나는 멍청해서 공부를 못해가지고 과거에 급제하지 못해 벼슬을 못해도 내 아들은 똑똑해서 내 아빠처럼 고위직에 도전할 수 있는 상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있다. 구품관인법에서는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내가 무능해서 출세를 못해도 내 아들은 어느정도 출세하는 것이 보장되어 있지만 과거제에서는 내가 무능해서 출세를 못했다면 내 아들이라도 유능해서 출세하게 해야 한다. 아니면 같은 신세가 되는게 거의 확정이다.[20] 그러나 이건 서진 시기에 갑자기 고착화된 일이 아니라, 적어도 동진-유송 시대 일어나는 발전까지 간추린 것이다.[21] 흥미롭게도 일본에서 이와 비슷한 현상이 일어난다. 심지어 여긴 구품관인법조차 없어서 아예 외척의 전횡으로 조정이 후지와라노아소미(藤原朝臣)의 종친회가 되더니 이 겨레가 여러 집안으로 갈라져서 오로지 가문에 따라 자리에 앉았고 그래서 상대적으로 한미한 집안 출신임에도 우대신까지 오른 스기와라노 미치자네가 특이 케이스 취급받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관백에 앉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쇼군에 오른 것 역시도 이것과 관련이 깊은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대로 관백을 역임한 후지와라 가에 양자로 들어갔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대대로 쇼군을 배출한 겐지의 후손을 자처했기 때문이다.[22] 유송이래 남조의 창업군주들이 전부 이러한 한미한 무장 출신이다보니 권위를 인정받고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라도 이 귀족세력을 포용해야했다. 귀족들과 별개로 한미한 가문 인사들을 임용하지 않았던건 아니지만 제대로 된 관료제가 아니라 측근정치 형태가 되다보니 이들은 이들대로 문제를 일으켰다.[23] 그들은 누구나 옷에 향내가 스며들게 하고, 면도를 하며, 붉은 분으로 화장을 하고, 덮개가 앞으로 길게 나온 안락한 수레를 타며, 굽 높은 나막신을 신는다. 바둑돌 무늬의 넓은 보료에 앉아 잡색 실로 장식한 팔베개에 기대고, 좌우에는 노리개를 늘어놓는다. 들고 나는 모습이 느긋하여 멀리서 바라보면 신선 같았다. - (『안씨가훈』 《면학勉學》)[24] 양나라 때의 사대부들은 모두 옷자락이 넓은 옷에 넓은 띠, 큰 관과 굽이 높은 신발 차림을 좋아했으며, 외출할 때는 수레나 가마를 타고, 귀가해서는 시중을 받았다. - (『안씨가훈』 《섭무涉務》)[25] 안지추(顔之推, 531~591?)의 안씨가훈(顔氏家訓).[26] 다만 북위의 경우 그럴 수 밖에 없기도 했는데 남조와는 달리 군정 성격이 강한 국가에서 급속한 한화정책을 펴다 보니 기존의 권력층인 군대의 불만이 커졌기 때문이다. 특히나 그나마 이렇게라도 선비족 군인 출신들이 이런 제도권 내로 들어온 것은 중앙군 얘기고 지방군으로 가면 별반 나아진 것이 없었으며 이로 인해 지방군, 특히 옛 수도인 평성 인근의 지방군들의 불만이 크게 높아져 결국 육진의 난이 일어나게 된다.[27]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구품관인법 연구 참조[28] 이는 향거리선제의 문제점과 일치[29] 조선시대에도 청요직이라 하여 정승 되기 아주 좋은 코스가 있었지만 그래도 이꼴과 비교하면 차라리 나았다. 삼사나 육조의 주요 자리가 청요직이었는데 전자는 왕에게 충언을 올려야 하는 때에 따라선 목날아가기 1순위가 될 수 있는 자리이고 후자는 실무직이다. 낭관 따위와 비교할게 못된다.[30] 强幹弱枝. 줄기를 강하게 하고 가지를 약하게 한다는 뜻으로 여기서 줄기를 중앙, 가지를 지방으로 비유하면 중앙집권의 의미와 맞아 떨어진다.[31] 다만 이것만으로는 근거로 제시하기에 어렵다. 그렇게 따지면 조선도 과거제가 이상하게 돌아간 나라로 여기에서도 과거에 합격해봤자 진사나 생원 칭호만 받고 끝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의 경우는 워낙 과거급제자가 많아서, 수용한계를 넘어섰기에 명예만 주고 돌려보낸것으로, 당나라처럼 대부분의 관직을 관롱집단 귀족층의 세습으로 내주느라, 남은 짜투리 하급직이나 실속없는 계륵을 과거급제자에게 던져준것과는 완전히 다르다.[32] 당나라 시대에는 이미 명사들이 자신의 문집을 여러 고관들에게 바쳐서 인정을 받으면 과거를 응시하고 응시에서 대구로 아무 내용이나 써제껴도 유명하면 합격이었으며 신언서판으로 표현하는 문벌귀족들의 심사로 등용을 정했다.[33] 유학 운운은 이 대목과 때문에 관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