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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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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6세
Louis XVI
파일:Antoine-François_Callet_-_Louis_XVI,_roi_de_France_et_de_Navarre_(1754-1793),_revêtu_du_grand_costume_royal_en_1779_-_Google_Art_Project.jpg
출생 1754년 8월 23일
프랑스 왕국 베르사유 궁전
사망 1793년 1월 21일 (향년 38세)
프랑스 파리 혁명 광장
묘소 생 드니 대성당
재위기간 프랑스 국왕
1774년 5월 10일 ~ 1792년 9월 21일
서명 파일:루이 16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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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002395> 가문 부르봉 가문
이름 루이오귀스트 드 프랑스
(Louis-Auguste de France)
루이 카페
(Louis Capet)
[1]
아버지 프랑스의 도팽 루이
어머니 작센의 마리아 요제파
형제자매 마리 제피린, 루이 18세, 샤를 10세, 마리 클로틸드, 엘리자베트
배우자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토니아[2] (1770년 결혼)
자녀 마리 테레즈, 루이 조제프, 루이 17세, 소피
종교 가톨릭
신체 193cm }}}}}}}}}

1. 개요2. 생애
2.1. 위태로운 재위기간2.2. 혁명 발발2.3. 폐위와 처형2.4. 참형으로 인한 여파
3. 평가
3.1. 가정적인 남편3.2. 무능한 군주는 아니었지만3.3. 문제는 부족한 리더십과 줏대없는 성격3.4. 종합
4. 가족관계
4.1. 조상4.2. 자녀
5. 대중매체에서6. 여담7.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국왕.

프랑스의 도팽 루이 페르디낭과 작센의 마리아 요제파[3]의 삼남으로[4] 루이 15세의 손자다.[5] 아버지가 36세라는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사망한 후 할아버지 루이 15세의 후계자가 되어 그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프랑스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단두대에서 처형당한 비운의 왕으로 유명하다.[6] 처형되었다는 점과 개인적 성품과 군주로서의 평가가 극과 극이라는 점에서 영국 찰스 1세의 후배격이고, 러시아 니콜라이 2세의 선배격이다.[7]

2. 생애

2.1. 위태로운 재위기간

왕 본인이 무능하더라도 시스템이 안정되어 있거나 뛰어난 인재의 보좌를 받아 나라를 이끌어 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루이 16세는 '루이 14세에게 있어서의 콜베르' 같은 인재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더불어 당시 프랑스는 큰 문제를 가지고 있었는데, 루이 14세 때부터 심각하게 불균형화 된 프랑스의 경제구조가 백여 년의 시간을 보내면서 더욱 고치기 힘들게 된 것이다.

특히 루이 14세루이 15세가 강국 프랑스를 유지하기 위해 국가의 지불능력 이상의 돈을 여기저기서 빌려다 썼기 때문에 이 당시 프랑스는 엄청난 부채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당시의 재무장관들은 더 많은 돈을 빌려 리볼빙에 가까운 방식으로 이 부채를 충당했다. 그나마 루이 14세 치하는 식민지 개척과 중상주의, 수출 위주의 경제 정책으로 프랑스의 국부가 절정에 달한 시기였기에 국력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그 국부는 루이 15세 시절에 완전히 바닥난다. 루이 14세가 죽은 1715년쯤에 프랑스가 진 부채는 무려 20억 리브르에 달했다. 반면 프랑스의 한해 세입은 1755년 500만 리브르, 1756년 1,000만 리브르였다. 이걸 때워야 할 후계자 루이 15세는 800만 리브르가 필요한데 돈이 없어서 결국 채권자들에게 이자 갚을 돈 등을 포함한 3,000만 리브르를 또 빌려야 했다. 루이 15세는 정확히 59년이나 되는 긴 재위기간 중 친정을 펼친 것이 대략 11년 정도밖에 안 되고 치세 동안 또 전쟁이나 했다.

그렇게 쌓여온 부채는 루이 16세 치세에 와서는 심각한 상황에 이르러 국가 예산의 60% 이상이 100년 동안 루이 14세와 15세가 빌린 돈의 원금도 아닌 이자를 갚는 데에 쓰이고 있었다. 이 상태로는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리 없었기에, 루이 16세의 즉위와 함께 재정총감이 된 론 남작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Anne Robert Jacques Turgot, baron de l'Aulne, 1727년 5월 10일 ~ 1781년 3월 18일)가 개혁을 시작한다.

뛰어난 경제학자이자 계몽주의자인 튀르고는 우선 모든 부서의 지출을 재정총감의 권한으로 일일이 검사하여 정부의 재정 적자 폭을 줄이고, 미국 독립 전쟁에의 개입을 반대하며 위기에 빠진 프랑스를 살려낼 대대적 개혁을 준비한다. 1776년 1월에 왕실에 제출한 6개 포고령이 그것인데, 부역에 대한 귀족적 특권을 폐지하여 공평한 과세를 매기면서 길드의 독점권을 금지하여 백성들에게 경제적 자유를 주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런 튀르고의 노력 덕분에, 그해에 프랑스 정부는 네덜란드의 은행으로부터 4%라는 낮은 이자율로 돈을 빌릴 수 있게 될 정도로 국가 신임도가 높아졌다.

그러나 기득권을 침해받게 된 귀족들이 반발하였고, 자신은 물론 왕실의 지출을 일일이 검사받게 된[8][9]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까지 튀르고를 싫어하게 되면서, 결국 바로 그해 5월, 튀르고는 왕실의 미움까지 사버리니 가망 없다 여기고 사임하면서 개혁은 중단되었다. 또한 튀르고가 국가재정에 큰 독이 될 것이라며 그토록 반대하던 미국 독립 전쟁에서 영국을 엿 먹이기 위해 전쟁까지 손을 대기 시작, 지원과 개입이 시작하면서 프랑스의 재정문제는 끝장나버린다.[10]

결국 시간이 꽤 지나서야 루이 16세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전까지 면세특권을 누리고 있던 귀족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려고 했다. 사실 당시 프랑스 귀족들의 재산이라는 것은 정말로 어마어마해서, 그들이 조금만 양보해서 세금을 낸다면 국가의 빚을 한번에 갚고도 남았다.[11] 당시 프랑스에서 면세특권을 누리는 귀족의 대부분은 루이 14세와 15세 시절 왕의 허가 아래 관직을 구입한 부르주아 계층[12]으로서, 인구의 3%라는, 동시기 0.5% 남짓에 불과했던 영국 등과 비교했을 때[13] 무지막지하게 많은 수에 달했다. 거기다 일부 지방의 귀족들은 납부되는 세금을 자신들이 착복해 사재를 모으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 부채 문제는 루이 16세가 절약-증세라는 정상적인 방법을 썼다고 해도 단기간에 해결할 수 있었다고 확신하기는 어렵다. 이미 프랑스 왕국은 루이 15세의 실정과 부패해버린 귀족 때문에 해결이 불가능한 상태였고 특히 이 막대한 부채가 프랑스 혁명정부에게도 상속되어 혁명정부의 재정을 압박하는 요인이 되었기 때문었으며 급기야는 교회 재산을 털어버리거나, 훗날 나폴레옹디폴트를 선언하고 배째버리는 바람에 처리되었다. 사실 전통적으로 프랑스 왕실은 재정도 풍부하지 않은데 빚을 내면서까지 무리하게 써대는통에 재정 상태가 꾸준히 안 좋았고, 역대 프랑스 왕들은 이 부채 문제를 마찬가지로 그냥 배째거나 성전기사단이나 교회 같은 만만한 놈들을 걸고 넘어져 그놈들을 삥뜯는 방식으로 해결했었다.[14]

하지만 당시의 왕은 기가 약해서 배째라 식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신앙심이 깊어서 교회를 털어먹지도 못하는 루이 16세였고, 귀족들에게 세금 내라고 하려니 왕을 우습게 보는 귀족들을 통제할 능력이 없었다. 왜냐면 프랑스의 귀족은 루이 13세와 루이 14세 치하에서는 기가 꺾였으나 무능한 루이 15세가 즉위한 뒤부터는 서서히 세를 불려나가, 당시에는 국왕의 명을 거부할 정도로까지 성장해 있었던 것이다.[15] 실은 루이 14세가 그렇게 군대를 강화하고[16] 대외활동에 올인하며 사치를 부린 것은 전부 귀족을 제압하고 중앙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즉 후대의 프랑스 국왕들은 그로부터 '강력한 왕권'과 '파탄난 재정'이라는 유산과 부채를 동시에 물려받은 것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유산은 다 까먹고 부채는 불려나갔던 것이다. 참고로 루이 15세는 위에서 언급했듯 친정 자체를 10여 년 정도만 했고 그것도 애첩인 퐁파두르가 죽은 뒤에야 했다. 문제는 애첩에게 정치를 맡겼다가 노년에 들어서야 나라를 통치한다고 온 국왕이 정치를 못하니 실권을 얻어가던 귀족들이 지지할 리가 없었다.[17] 결국 왕의 권력은 실추에 귀족들의 실권만 높아지고 빚더미만 잔뜩 생긴 꼴이 되었다.

특히 프랑스의 절대왕정 자체는 국왕 스스로 강력한 군사력과 뛰어난 능력으로 이루거나 명시된 법으로 왕권의 강화를 꾀하는 것이 아니라 성직자나 길드, 귀족 등의 긴밀한 협력체제에 의하여 성립되는 것이었는데, 하물며 세력을 회복해가던 당시의 귀족들은 루이 16세에게는 버거운 상대였다. 다만 그렇다고는 해도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왕의 권위가 매우 강력한 절대왕정 국가였으며, 부르주아 계층 역시 강력하게 성장해 있었으므로 왕이 그들의 지지를 확보하면서 관료들이 제시하는 정책을 강력하게 밀어준다면 충분히 능력을 발휘하여 개혁에 도달할 수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군대도 부르주아 출신 장교들이 많아지면서[18] 사실상 부르주아들이 군대를 장악한 거나 다름없는 상황인지라 부르주아들을 지지세력으로 끌어들이면 귀족은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다.[19]

하지만 튀르고 같이 우수한 인재가 무슨 정책을 내더라도 보수파 귀족들이 반발하면 루이 16세는 그들을 달래거나 제압할 생각은 안 하고 튀르고 뒤로 물러서기 일쑤였으니, 개혁 시도→반발→퇴보가 반복되면서 도무지 개혁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개혁파들에게는 왕에 대한 실망감만 커지게 되었다. 튀르고의 후임으로 재무총감이 된 자크 네케르도 유사한 개혁안을 제출했다가 1781년에 파면되었고, 후임으로 온 샤를 알렉상드르 드칼론(Charles Alexandre de Calonne) 역시 개혁과 증세를 통해서 적자를 해소하려 했고 루이 16세도 적극 지지했으나, 귀족들과 가톨릭 교회 측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개혁안은 좌초되고 드칼론 역시 사임해 버린다. 그리고 1788년에 다시 복귀한 자크 네케르는 드칼론의 개혁안대로 하려고 했으나, 또다시 반발에 부딪치는 바람에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렇듯 루이 16세의 이런 우유부단한 성격과 답없는 현실에 진절머리가 난 네케르는 당시 프랑스 연간 국가예산안을 공개하고는 1790년에 장관직으로 물러난 뒤 아예 은퇴를 선언한다. 우리가 당시 프랑스의 경제상황을 자세히 알 수 있는 건 이 네케르의 덕이었다.

1789년 5월 5일, 삼부회가 175년 만에 소집되었다. 그러나 제3계급인 부르주아 계급이 머릿수에 따른 표결권을 주장하면서 폐회되고, 6월에 제3계급들의 국민의회가 세워졌다. 그리고 그해 7월, 혁명이 일어났다.

2.2. 혁명 발발

이렇게 모순점들을 계속하여 해결하지 못하고 뒤로 미루기만 하니, 쌓이고 쌓이다가 결국 터진 것이 프랑스 혁명이었다. 항간엔 루이 16세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는 식으로 말했다는 루머도 도는데, 혁명 당일(1789년 7월 14일) 루이 16세의 일기장에는 "사냥감을 잡지 못했다. 특별한 일 없음."이라고 써 있었다.

그 외 바스티유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시종장이 가져오자 "반란인가?"라고 물었는데, 시종장은 "아닙니다 폐하. 혁명입니다!"라고 답했다는 일화도 있다. 다만 이것도 실체 여부에 논란이 많은 편인데, 우선 혁명이 지금의 의미가 된 것은 프랑스 혁명이 처음이다. 본문에도 언급되지만, 원래 혁명은 점성술이나 천문학에서 별의 순환을 의미했다. 단적으로 Revolution이란 표현을 최초로 사용한 것으로 언급되는 인물은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프랑스 혁명 이전에 사용된 것은 잉글랜드의 명예혁명이나 올리버 크롬웰 사후 왕정복고되는 상황 등이다. 때문에 우선 저 문건 자체가 의심스럽고, 실제로 사용되었더라도 지금의 혁명이란 표현과는 전혀 다른 의미일 것이다.[20]

사실 혁명 초반만 해도 오히려 루이 16세는 파리에 삼색 모표를 달고 오면서 혁명에 대한 지지를 천명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프랑스의 분위기는 잉글랜드명예혁명 같은 입헌군주제 혁명의 분위기였다.[21] 허나 결말은 청교도 혁명 하지만 상황은 점점 악화되었는데, 루이 16세가 혁명의 원인은 비교적 정확히 판단했던 반면, 국민의회가 주장한 입헌군주제를 싫어했기 때문이다.[22] 그는 전제군주제를 추구했고 외국의 지원을 받으면 혁명세력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여 헌법을 잘 준수하려고 하지 않았고, 정확히는 혁명 이후 극심한 우울증과 무기력증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않고 대부분의 일을 아내에게 의지했다. 이러던 중 돌아온 네케르를 해임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국민의회는 반발하며 국왕한테 헌법을 지키지 않으면 가만 안 둔다고 경고했다. 이에 분노한 루이 16세는 군대에 동원령을 내려 국민의회를 전복시키려 했지만 파리 시민들이 전부 의회 편을 드는데다 이미 군대조차 혁명의 분위기가 널리 퍼져서 왕명을 거부하는 바람에 실패하여 충격을 받는다.

그러자 루이 16세는 전제 왕권을 회복하려고, 1791년 6월, 처가인 오스트리아와 가까운 곳으로 탈출을 시도하다가 실패하면서 신뢰성은 결정적으로 추락했다. 한마디로 국왕이 나라를 버리고 달아나려 했다는 말인데, 내셔널리즘이 형성되기 시작한 프랑스에서 이는 치명적이었다. 게다가 하필이면 오스트리아로 망명해 오스트리아 군대를 이끌고 돌아올 계획이었기 때문에 급속하게 악화된 여론은 되돌릴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23] 그때까지만 해도 프랑스 국민 중 다수가 국왕을 옹호하고 있었으나, 이후로는 급진파가 득세하게 된다. 더불어 오스트리아의 공주 출신인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야말로 국가의 적이 되었다. 사실 루이 16세도 처음에는 도망갈 생각이 없었으나 혁명이 진행되면서 의회가 왕을 쥐고 흔들다 보니 권위와 신변에 위기를 느꼈고, 결국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 될 왕비의 친정을 향해 파리를 떠나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지대[24]도망갈 계획을 짜게 되었으나 실패로 돌아가면서 루이 16세의 입지가 위태로워진다.

2.3. 폐위와 처형

짐의 피가 프랑스 백성의 축복을 위해 흐르게 하소서!
처형되기 직전에 남긴 유언
보통 민법에서 다른 방법으로 교정할 수 있는 일반적인 죄를 사형으로 다스리는 건 용납할수 없는 일이오. 그러나 폐위당한 군주, 그것도 여전히 법이 다져지지 않은 혁명 와중에 폐위된 군주, 그 이름만으로 이미 고통받고 있는 국가에게 더 많은 전쟁을 가지고 오는 군주는 다르오. 감옥이나 추방으론 그의 존재가 더이상 공익에게 위해가 되지 않게 만들 수 없소. 이 자(피고인 루이 카페)의 형벌은 그의 죄 그 자체뿐만 아니라 이런 형법에서 잔인한 예외적 상황 또한 고려해야 하는 것이오.
그리고 여기서 내가 치명적인 진실을 말해드리겠소; 국가가 살기 위해선 루이가 죽어야 하오. 평화롭고 자유로운 나라에서 국가 대내외적으로 존중받는 인민들이라면 당신들(사형에 반발하는 배심원들)이 말하는 대로 관대한 자비를 베풀 수 있겠지. 그러나 이만큼 참혹한 전투와 희생을 치르고 여전히 자유를 위해 투쟁 중인 인민, 법이 완성되지 않은 인민, 폭정이란 죄를 어찌 처리할지 여전히 논란 중인 인민, 이러한 인민은 복수를 부르짖고 있소. 이러한 인민들에게 당신들이 가진 미덕이라 자부하는 관대함을 인민에게 요구한다는 건 마적단이 약탈물을 분배할 때나 보여주는 관대함에 불과하오.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 루이 16세의 재판 중
국왕을 '시민'으로서 단죄하다니, 후대의 사람들은 놀랄 겁니다. 그러나 단죄한다는 건 법을 적용한다는 것이고, 법이란 건 공공이 공유하는 정의에 기반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인류와 군주란 자들이 공유하는 정의가 도대체 어디 있습니까? 도대체 프랑스 인민이 그가 배신을 저지른 다음에도 그를 좋게 대해주어야 할 루이와 공유하는 정의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후대에 위대한 정신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왕은 그의 정부가 실정을 저질러서가 아니라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찬탈인 왕이라는 사실 그 자체란 죄목으로 고소당해야 한다고. 왕정이란 체제가 무슨 환상, 인습으로 그 모습을 숨기든간에, 그 기관 자체가 만민이 무기를 들고 자신을 지켜 마땅한 영원한 범죄란 말입니다. 인민 모두가 눈이 멀었어도 왕정이란 기관은 용서 못할 범죄적 기관이고, 자연 앞에서 죄악이며, 따라서 모든 인민은 자연으로서부터 이 기관이 어디에 있든간에 이를 찾아 파괴할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고한 군주란 결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모든 군주는 역도이자 찬탈자입니다.
생쥐스트
프랑스 역사상 왕좌에 오른 군주들 중 가장 부드러운 왕이 마치 세상에서 가장 악독한 폭군이었던 양 단죄되어야 한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아무래도 내 생각에 국민공회는 불만에 가득찬 민중의 분노를 일부러 이 불행한 군주에게 돌리며 그(루이 16세)를 처형할 것 같은데, 바로 그를 왕좌에 끌어내리고 공화국 헌정 체제 도입을 기정사실로 만들어버리기 위해서이다.
당시 재불미국대사 거버너 모리스의 일기 중

결국 1792년 4월, 혁명군에 위협을 느낀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이 시작되었고, 그와 왕비가 오스트리아와 내통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사태는 벼랑 끝으로 달려갔다. 입법의회와 시민들은 궁전을 점거한 다음 국왕 부부를 감금하고 왕정을 정지시켰고, 나중에는 루이 16세를 폐위하고 왕정을 종식시키면서 프랑스에선 9월 21일에 혁명정부의 제1공화국이 출범했다. 그리고 11월에 루이 16세가 오스트리아와 내통했다는 결정적 증거가 드러나면서 '시민 루이 카페(Citizen Louis Capet)'신분으로 재판을 받는다.

참고로 카페(Capet)는 부르봉 왕조의 본가인 카페 왕조의 시조인 위그 카페의 성씨이자 그의 부계 후손의 본성이다. 유럽의 귀족들은 자신의 영지명을 성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본래의 성을 부를 일이 없었다. 따라서 루이 16세의 경우 굳이 따지자면 '루이 드 프랑스'가 이름이라고 볼 수 있었다. 즉, 루이 16세를 '루이 카페'로 지칭한 것 그 자체로 루이 16세가 더이상 프랑스의 왕이 아니라는 것을 천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해인 1793년 1월 16일 루이 카페의 반역죄 유무죄 여부를 묻는 국민공회 투표에서 708명 중 기권 35명을 제외하면 유죄 673명 만장일치로 유죄가 확정되었다. 그러나 18일에 있는 루이의 처벌수준을 묻는 투표는 의견이 갈렸는데 726명의 투표자 중 즉시 처형 361명 마일헤가 주장한 사형 일자 조정이 26명 구금 및 추방이 290명 집행유예 44명 기권 5명으로 직전 유죄투표와 달리 국민공회 의원들의 의견이 상당히 갈린것을 볼 수 있다.

그이유를 두고는 1차적으로 루이 16세는 프랑스 국민에게 인기가 폭망한 군주까진 아니었기에,[25] 유죄는 이미 나온 증거로 피할수 없었지만 몇년전까지 왕으로 모시던 루이를 죽이는거 까지는 껄끄러운 부분이 있었으며 거기에 프랑스 혁명전쟁으로 유럽국가들과 전쟁이 닥친 상황에서 다른 유럽왕들과 친인척으로 엮인 프랑스 왕을 죽이는것은 외교적으로 큰 부담이 되는 부분이었다.

허나 이를 이용해 루이 16세의 사형에 찬성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형식적인 사형 선고 이후의 집행유예를 지지했고, 아예 국왕 폐하를 재판하는 것 자체가 무엄해서 투표할 수도 없다는 식으로 기권표를 던진 사람들도 상당수였다는 식으로 팩트를 곡해하는 사람도 있는데, 정확하게 따져보면 국민 공회에서 루이 16세에 대한 투표는 총 721명 중 즉시 처형 361표, 사형 판결에는 찬성하되 집행유예[26] 23표, 처형 반대-종신 금고형 319표, 기권 18표였다.[27] 과격파 생쥐스트가 주장한 즉시처형[28]이 361표로 아슬아슬하게 과반수가 되면서 루이 16세는 처형되고 만다. 즉시 처형 361표 중에서 단 1표만 집행유예나 종신금고형으로 바뀌었으면 루이 16세는 단두대에서 처형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참고로 프랑스 좌우파 구분의 시발점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는데[29], 동서양 어디든 시민이 왕의 목 자르겠다고 하는 것 자체가 어지간히 부담스런 판단일 수밖에 없었다. 당장 물건너 잉글랜드에서 찰스 1세를 처형하자 당시 프랑스는 왕 모가지 치는 과격한 놈들이라고 디스했던 과거가 있었고, 그 잉글랜드마저도 올리버 크롬웰이 찰스 1세를 처형한 후 독재정치를 시행하자 그가 죽고 난 이후 다시 왕정을 복고하였다. 그리고 크롬웰은 부관참시되었으며 그의 아들은 외국으로 망명하고 찰스 1세를 처형하는데 앞장섰던 크롬웰 정부 시대의 정치인들이 처형되거나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이후에 사면되었다. 그러다 보니 온건한 사람들은 왕을 죽이는 대신에 살려서 입헌군주제로 가자고 했고, 급진적인 사람들은 시민과 대의, 루소 사상 같은 것들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왕의 목을 잘라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 바로 이 점에서 왕을 죽이자고 하는, 한 체제의 완전한 단절에 준하는 결정에 찬성표를 던진 사람들이 대체로 좌파, 그래도 어떻게 왕을 죽이냐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바로 온건파, 우파가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30] 좀 더 정확히는 당시 의회에서 처형 주장하던 자코뱅 파의 의석 위치가 왼쪽이었고, 온건책 주장하던 지롱드 파 자리가 오른쪽이었다고 한다.

사실 혁명파는 루이 16세를 죽이지 않는 한 프랑스의 왕정은 언제든지 복고될 수 있다고 봤기에 없는 죄라도 만들어서 루이 16세를 처형시켜야 국민국가제를 이룩할 수 있다고 여기는 판국이었는데[31], 이러다보니 혁명세력들 중에서도 급진파의 한명이었던 생쥐스트는 "왕이 받은 혐의 중 무죄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혁명이 유죄일 수는 없는 게 아닌가. 왕에게 죄가 없다면, 혁명이 죄가 된다." 라고 할 정도였다.[32] 심지어 자코뱅 강경파들은 재판도 필요없이 그냥 죽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지롱드 당원들의 강력한 반발로 마지못한 정치적 재판을 거행했다.

물론 상기했듯 루이 16세는 프랑스 특히 혁명파 입장에선 아예 죄가 없는 건 아니라, 루이 16세가 기소된 가장 핵심적인 죄목은 '오스트리아와의 내통' 혐의였고, 이는 루이 16세 자신이 오스트리아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탈출하려다 붙잡혔으니 사실관계 자체는 명확하다. 반대로, 루이 16세와 왕당파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정당한 왕권을 혁명파(반란세력)에게 빼앗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혼인동맹국인 오스트리아의 도움을 요청하려던 시도였으니 범죄라고 할 수 없다. 결국 생쥐스트의 발언은 구체제-왕권신수설의 논리와 신체제-국민국가의 논리가 충돌하는 지점을 짚어낸 것이다. 생쥐스트나 마라도 인정한 것처럼 루이 16세 자신은 꽤 도덕적 품성을 갖춘 인물이었고, 자의로 범죄를 저지른 인물도 아니었다. 하지만 루이 16세는 구체제-왕권신수설의 논리에 따라 정당하게 행동했지만, 이 행동은 혁명의 사상적 기반이던 국민국가의 논리에 따라 보면 '반역행위'라는 것. 말하자면, '어떤 논리에 따라 보면 왕의 행동은 분명 무죄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논리에 따르면 (설령 왕을 존중하며 입헌군주제를 지향한다 하더라도) 왕의 권력과 권위를 침해한 혁명세력의 행동은 유죄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인 것. 이 부분은 루이 16세 스스로 혁명세력 내에서 왕에게 우호적인 세력의 정당성을 파괴한 것으로, 정치적 패착에 가깝다.

결국 재판정에 선 루이 16세는 겸손한 태도로 자신에게 선고된 50여 가지 혐의에 대해 항변했으며, 최대한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애썼다고 한다. 여담으로 루이 16세는 '국민의 피에 미친 폭군'이란 죄목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하는데[33] 그는 재판정에서 자신의 모든 행동은 국민을 위한 일이라고 조용히 항변했다. 이 모습을 본 자코뱅파 내의 과격파 리더인 장폴 마라조차도 "저 사람이 유죄만 아니었다면[34] 정말로 존경스러운 사람이다."라는 평을 내릴 정도였다고 한다. 하여튼 루이 16세의 변호인들은 열심히 변호했음에도 애초부터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나아가려는 시대적 한계가 있었기에 국민공회는 즉각 표결에 들어가 처형이 가결되고[35] 사형이 선고되면서 루이 16세의 사형이 집행된다. 여담으로 그를 변호했던 변호사, 유리하게 적용될 수 있는 증언을 한 증인들도 이후 반혁명파로 몰려 단두대로 끌려갔다는 설이 있다.

위의 재판이 끝난 다음 날, 루이 16세는 감옥을 나서면서 자식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죽더라도 복수는 절대 생각지도 말거라!"

반역죄로 사형이 선고되어 1793년 1월 21일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처형되는 날 루이 16세는 아침 일찍 일어났고 식사를 한 다음 성직자를 만나 고해성사를 하며 가족들과 마지막 만남을 가진 다음 이별을 한다. 단두대 앞에서, 그는 예의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수갑도 차지 않고 코트도 벗지 않으려고 했으나 절차이므로 어쩔 수 없다는 말에 받아들였다. 다만 가장 좋은 의례용 옷을 입고 왕만이 타는 금장 마차를 타고 단두대로 실려갔다. 유언"짐의 피가 프랑스 국민의 행복을 강화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36]였다. 혁명 정부는 그가 죽기 싫어서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는 등 추한 모습을 보였다고 선전했다고 하나, 루이 16세를 처형한 장본인인 샤를 앙리 상송은 '루이 카페'는 스스로 코트를 벗고 묶으라고 자신의 손을 내밀며 입시해 있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흔들릴 정도로 의연하고 지엄한 태도로 죽었다고 했다.[37] 물론 상송이 루이 16세를 좋아한 것도 있긴 했는데, "루이 16세만큼이나 가톨릭 신앙의 원칙을 따를 수 있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라고 그를 칭송했다고 한다.[38] 혁명 초기 파리의 시민들이 왕궁으로 난입했을 때나(1792년 8월 10일 봉기), 죽기 직전 등에서 나름대로 위엄을 보여주었지만 그것이 그의 운명을 바꿀 순 없었다.

이런 모습에 마리 앙투아네트의 전기소설을 쓴 슈테판 츠바이크는 루이 16세를 "품위 있게 죽는 방법만 알았다"고 상당히 냉소적으로 평했다. <상송가 회고록>이나 <왕의 목을 친 남자>란 책을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상송은 처형 직전까지 그를 살리려 했고 그가 사형된 이후에는 위험을 감수하고 그를 추모하는 미사를 드리기도 했다.[39] 처형 당시 루이 16세의 나이는 아직 한창 나이인 38세였다.
파일:Graves of Marie Antoinette and Loius XVI.jpg 파일:Tomb of Louis XVI and Marie Antoinette.jpg
루이 18세 때 석곽묘로 조성된 무덤(왼쪽)과 기념물(오른쪽)
처형 직후 마들렌 성당에 잠시 매장되었던 루이 16세의 유해는 동생 루이 18세에 의해 1815년 1월 18일에 발굴되어 사흘 뒤인 1월 21일 프랑스의 역대 국왕과 왕비들이 잠든 생 드니 대성당으로 아내와 함께 이장되었다. 그리고 2004년 6월 8일 루이 17세의 심장이 부모의 곁에 안장되어 사후 200년이 넘게 흐른 뒤에야 일가가 영면에 들었다.

2.4. 참형으로 인한 여파

유럽의 군주들이 감히 우리에게 맞서겠단 말인가? 그들의 발 밑에 군주의 모가지를 대신 던져주겠다!
조르주 당통

귀족이나 다른 왕족의 반란, 또는 외세의 침략도 아닌 자국 민중들이 봉기로 몰아낸 것도 모자라 왕의 목을 자른 이 전대미문의 사건은 다른 유럽 지역의 군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이후 많은 유럽의 군주들이 프랑스 혁명에 적대하거나 경계, 우려하는 태도로 나오게 된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러시아예카테리나 2세인데, 그녀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몇 년 전에 푸가초프의 반란을 겪은 경험 때문에 프랑스 혁명에 적대적이었으며, 주변국의 군주들에게 "프랑스의 폭도들을 진압하고 루이 16세를 다시 옹립하자"는 국서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다가 루이 16세가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아 쓰러져 시름시름 앓다가 얼마 안 되어 사망하고 만다.

프랑스 혁명 이전에도 동서양 할 것 없이 군주가 반란으로 폐위되고 시해당한 예는 무수히 많았으나[40] 루이 16세의 처형이 주변 유럽 국가들의 군주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준 이유는, 지배층도 아닌 하찮은 평민들이 그들 스스로 재판관인양 법을 집행해서 군주를 무슨 형사사건의 죄인 취급하고 재판하여 처형했으며, 이후에 새 군주를 옹립하거나 새 왕조를 개창한 게 아니라 아예 군주제를 폐지하고 군주가 다스리지 않는 공화국을 유럽 대륙에 수립했기 때문이었다.

군주가 반란으로 축출된 이전 사례들에서도 주동자는 권세가 매우 높은 귀족이나 다른 왕족이었으며 폐위된 군주가 형사법을 적용받은 예도 없었다. 귀족 또는 군부, 사대부 계층의 반란이나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서 폐위되었고 백성들이 직접 나서서 폐위된 군주를 죽인 예는 없었다. 비록 폐위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한때는 엄연한 군주였기 때문에 백성이 직접 죽이는 건 옳지 못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41] 게다가 다른 군주를 즉위시키거나 아예 역성혁명을 일으켜 본인 스스로 찬탈하여 새로운 왕조를 건국하고 군주가 되어 군주제를 유지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례는 다르지만 현대의 네팔도 2008년에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전 국왕이었던 갸넨드라와 그의 일가족들을 죽이지 않고 국왕과 왕족 지위를 박탈하여 폐위 후 일반 국민으로 신분을 격하시키는 선에서 처분했다.[42] 예외가 있다면 올리버 크롬웰찰스 1세를 처형한 경우인데 청교도 혁명을 주도했던 크롬웰과 그의 지지/추종 세력들은 프랑스 혁명 당시 프랑스 내 혁명 세력들처럼 평등주의자도 아니었고 그가 왕정 폐지 이후에 만들려던 공화정 체제는 시민이 직접 이끄는 나라가 아닌 크롬웰 가문이 통치하는 개신교 근본주의 신정 독재국가였다.

반면에 프랑스 혁명은 이전과는 달리 역성혁명으로 새 왕조를 개창한 게 아니라 아예 왕정 자체를 없애버렸다. 프랑스 혁명 이전에도 고대 아테네로마에서 왕정이 폐지된 예는 있어도 까마득한 고대인 데다가[43] 프랑스 혁명과는 그 성질이나 배경이 되게 달랐다. 게다가 영국은 청교도 혁명으로 혁명 지도자였던 올리버 크롬웰에 의해 잠깐 왕정이 폐지되었지만 올리버 크롬웰 사망 후 크롬웰파 세력들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비크롬웰파 세력들에 의해 참형당한 찰스 1세 전 국왕의 장남인 찰스 2세 전 왕세자[44]를 새 국왕으로 옹립시키면서 다시 왕정이 복고되었다. 프랑스 혁명 직전 벌어진 미국의 독립도 그것 자체가 세계사에 남을 만한 대사건이긴 했지만, 애초에 유럽에서 멀리 떨어진 북아메리카에서 벌어진 일이었고 심지어 영국에 적대적인 나라 입장에선 영국의 주요 식민지 중 하나가 떨어져나가는 거라 쌤통이라는 반응까지 나올 정도였다.[45]

하지만 프랑스 혁명은 미국 독립과는 달리 왕의 직접통치에서 멀리 떨어진 식민지에서 일어난 게 아니라 왕이 직접 다스리는 군주국인 유럽의 프랑스 본토 한복판에서 일어난 사건이며, 이는 당연히 프랑스 왕정의 폐지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게다가 미국인들은 영국으로부터의 식민지 독립을 원했을 뿐, 영국 본토로 쳐들어가 조지 3세를 죽이겠다는 수고는 할 생각도 할 능력도 없었지만, 프랑스 민중들은 자신들의 군주를 자신들의 손으로 사형시킨다. 게다가 더 충격적이게도 군주가 없는 새로운 국가를 유럽 한복판에 건국했다.[46] 미국 독립에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당시 유럽의 절대 군주들이 프랑스 혁명에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인 이유도 이 때문이다. 군주가 하극상으로 폐위된 예는 고대부터 무수히 많았지만 군주가 없는 새로운 정치체제의 출현은 주변 군주들 입장에서는 군주의 처형보다 더 큰 위협으로 비쳐졌으며 자신들도 그 꼴이 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프랑스 혁명에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루이 16세의 처형은 필연적으로 유럽 군주들의 대불(대프랑스)동맹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3. 평가

3.1. 가정적인 남편

마리 앙투아네트와 결혼한 이후, 그때까지의 프랑스 왕국의 관례와는 달리 애인을 들이지 않고 아내와만 금슬 좋게 살았다. 결혼하고 나서 왕위에 올라서도 7년 동안이나 부부관계가 없었는데, 이에 대해서 무수한 소문[47]이 돌았다. 이런 소문에 걱정한 루이 15세가 자신이 직접 저명한 의사를 데려다가 진찰했던 기록이 나중에 공개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성적 능력에는 문제가 없었다. 또한 당시 스페인 대사의 보고에서도 성적 불구는 아닌 것 같다는 내용이 확인된다. 즉, 결혼 초기에 자식이 없었던 것은 본인이 부부관계를 피했기 때문이다.[48]

이 때문에 즉위하고 난 뒤에도 이 소문을 걱정한 요제프 2세가 여동생과 루이 16세를 만나러 직접 프랑스로 온 적도 있다. 하지만 나중에는 마리 앙투아네트와의 사이에서 다산하여 2남 2녀를 보았다. 단 장남과 차녀는 일찍 죽었다. 차남 루이 17세는 혁명 시기에 열악한 환경 속에서 학대받다시피 하다 요절했고 장녀 마리 테레즈만이 평탄한 인생은 못 살았어도 천수를 누렸다.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아름다운 애인을 탐닉하고 무수한 여자들을 농락하길 즐기던 루이 14세, 루이 15세와 비교해보면 루이 16세의 성생활은 대단히 왕 답지 않은 것이라, 당시 프랑스에서는 루이 16세의 성적인 능력을 의심하는 루머가 많이 퍼져 있었다. 당시 사회 분위기는 남자가 마초적인 성향이 짙은 분위기였다. 게다가 당시 프랑스는 그러한 기질이 더욱 심했다. 심지어 루이 15세가 젊은 시절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 참전했을 때 전쟁터에서 여자와 뒹굴다 병들었을 때도 백성이 왕에게 빨리 나으시라고 기도하여 인기가 올라갔을 정도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 루이 16세의 성향은 국민에게 비호감을 살 만했다. 그리고 이는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백성의 반감으로도 이어졌으며 마침 마리 앙투아네트는 조용히 안방 내조만 하던 전통적인 프랑스 왕비들과는 달리 대단히 활동적이었고 각종 연회, 무도회 등의 사교계 행사를 직접 주최하고 전면에 나서길 좋아했다.

그리고 이 점은 '마리 앙투아네트는 사치스러운 여자'라는 루머를 더욱 악화시키는 요인도 되었다. 본래 이런 사교계 행사의 주최는 왕의 정부가 맡는 게 보통이었다. 당연히 이 연회를 보고 백성들이 가지는 반감 또한 정부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루이 16세는 정부를 두지 않았으니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직접 행사 주최를 맡아야 했다. 즉 앙투아네트 본인이 이런 행사를 맡는 걸 즐기지 않았다고 해도 의무적으로 행해야 하는 상황인데 앙투아네트가 이 주최 자체를 매우 즐기기까지 했으니 더더욱 반감이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집중된 것. 궁중에서 아예 이런 행사들을 하지 않았다면 재정도 아끼고 반감도 줄일 수 있었겠지만, 당시 궁정 사회에서 이런 행사는 높으신 분들이 모여서 비공식적인 회담을 나누는 중요한 정치 행사의 성격도 있어서 그만두는 게 불가능했다. 물론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런 행사 자체를 열더라도 말도 안 되는 수준의 사치를 부리거나 하지는 않았고 당대 평균 수준이거나 오히려 조금 더 검소하게 치르는 편이었다. 하지만, 행사 자체로 인한 여론의 반감 문제는 둘째치고, 당시 프랑스의 경제 사정은 왕실에서 약간 검소하게 돈을 쓴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도 직접 프랑스에까지 온 큰처남 요제프 2세의 특훈을 받아가며 결혼 7년 만에야 부부 관계를 제대로 갖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임신한 앙투아네트는 결혼 8년 만에 첫 딸을 출산했다. 앙투아네트의 이미지가 좋지 않은 데다 공교롭게도 첫 임신 무렵에 페르센 백작을 알게 됐기에 항간에는 공주의 생부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루이는 첫 딸에게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듬뿍 주며 소문을 불식시켰다. 뿐만 아니라 난산을 겪은 아내에게 "자연 속에서 편히 쉬어라"라는 뜻으로 별장인 프티 트리아농 궁전을 선물했다고 한다.

물론 신혼 때 앙투아네트는 사내 구실을 제대로 못 하는 남편 때문에 답답해하며 친정으로 보내는 편지에도 그 부분을 언급했지만 딱히 큰 불화는 빚어지지 않았고, 전술했듯 부부관계가 제대로 시작되고 나서 아이들이 연달아 넷이나 태어나며[49] 단란한 가정을 꾸렸다. 자녀들에게 엄격하게 예절 교육을 시킨 아내와는 달리, 아이들의 청을 모두 들어주는 자상한 아버지였다고 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어머니보다는 아버지를 더 따랐다고 하며 이렇게 자녀들에게 다정했던 것은 루이의 조부인 루이 15세나 5대조인 루이 14세도 보여준 면모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그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함께 아이를 4명 입양했다.

3.2. 무능한 군주는 아니었지만

프랑스 혁명을 막지 못한 만큼, 무능하고 어리석은 인물로 흔히 평가되고 있다. 사실 무능한 군주란 이미지도 어찌보면 재평가받은 것이, 90년대 학습만화 같은 것을 보면 단순히 무능한 왕이 아니라, 군대와 비밀경찰을 동원해서 국민들을 탄압하는 사악하고 영리한 폭군으로 등장했다. 당연하지만 루이 16세가 이런 군주였다면 단두대 갈 거 없이 분노한 군중들한테 사로잡혀 혁명 당일에 맞아죽었을 것이다. 애시당초 단두대가 개발된 이유가 사형수의 인권과 평등을 위해서 발명이 되었건만 '군대와 비밀경찰을 동원해서 국민들을 탄압하는 사악하고 영리한 폭군'한테 그런 자비를 베풀 리가 없었다.

그러나 2010년대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사실 이미지처럼 정말 무능한 인물은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폭군도 아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으며 또 정설이 되었다. 프랑스 최초로 전기를 일으키는 기계를 들여왔고 라틴어를 비롯한 여러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했으며, 지리, 철학, 수학은 물론 시계나 가구를 만드는 시시한 취미라고 평가된 것도 과학에 대한 그의 조예를 보여주는 증거로 보인다. 오늘날에야 시계는 흔하디 흔한 걸로 평가받지만, 쿼츠 시계가 없던 당시에 시계는 고도의 기술력이 총동원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특히 기계공학적인 면에서 높은 수준의 기술력이 시계를 통해 나타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루이 16세의 시계 제작에 대한 관심은 달리 말하면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이라고도 볼 수 있다.[50]
단두대의 칼날 문제를 지적하는 루이 16세[51]

근데 이게 재평가되면서 또 생각해 봐야 되는 지점이, 이 시계·자물쇠 취미가 그렇게 시시한 것이 아닌 만큼 요즘 부자들이 하는 어마무시한 규모의 덕질과 유사하게 거대한 취미였다는 점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책상 위에서 꼼지락거리는 게 아니라, 궁전 안에 꽤 대규모의 대장간을 마련해놓고 즐기는 본격적인 취미였다. 흔히 '자물쇠가 취미'라고만 들으면 생각나는, 왕실에 걸맞은 사치를 부리지 않았다는 느낌과는 거리가 있다. 게다가 위에 언급했듯이 당시로선 첨단 기술을 동원하는 작업이어서 비용 자체도 상당히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21세기로 치면 왕이나 대통령의 취미가 로봇이나 스마트폰 개발 과정에 직접 참여하는 것인 상황과 비슷하다. 차라리 로봇이나 스마트폰은 차라리 국가 기술 발전에 우리 왕/대통령이 이만큼이나 관심을 갖고 있다는 홍보거리나 되지 자물쇠는...

프랑스 왕실 일화 또는 야사에 따르면 현존하는 단두대 칼날도 루이 16세가 새로이 디자인한 것이었다. 원래 단두대의 칼날은 반월형이었는데, 루이 16세가 그 모델을 보고는 "반월형의 칼날은 목뼈에 걸려서 사람이 쉽게 죽지 못하고 고통스럽게 죽을 것이다. 그러니까 칼날을 직선형에 대각선으로 세워야 고통 없이 보낼 수 있다."며 칼날을 수정할 것을 명령했다고 한다. 그러나 후술하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그는 자기가 개량한 단두대에서 참수당한다.[52] 그래도 그 덕분에 죽음은 조금 덜 고통스러웠을지도.

그 외에도 영국의 역사가 데이비드 흄과 만난 경험으로 역사에 관심이 많았으며,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를 손수 번역하기도 하였던 만큼 상당한 지식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지리학 등의 학문에도 능통했으며, 가족을 사랑하는 자상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또한 그의 치세 때 도량형을 개혁하기 위해 새로운 단위를 논의하고 제정하는 작업을 착수했는데, 이게 바로 SI 단위, 즉 미터법이 제정되는 계기가 된다. 그래서 현대에는 이 미터법 제정이 루이 16세의 치적으로 꼽히기도 한다. 아이러니한 게, 이 미터법이 프랑스를 넘어서 전세계로 퍼져서 공식 도량형으로 자리잡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프랑스 혁명 그 자체였다.

3.3. 문제는 부족한 리더십과 줏대없는 성격

허나 그는 좋은 '사람'이었을 뿐, 좋은 '군주'가 되진 못했다. 군주로서 제일 중요한 덕목이 크게 결여되어 있었다는 것인데, 리더십과 카리스마, 결단력이 부족했고, 그가 바보가 아니라 지성인이라는 건 주변에서 인내심을 갖고 이해하고 배려해줘야만 발견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냥 일반인으로 살아도 이런 사람은 바보 취급받는데, 군주였으니 설명이 필요없다.

지독한 근시였기 때문에 눈앞에 있는 사람도 제대로 구분할 수 없었다. 이 근시 때문에 안경을 썼지만 당시의 안경은 기술력 등의 문제로 그렇게까지 세밀하게 시력 보완이 되는 도구가 아니었고, 시야가 좁아진만큼 사람이 위축되었다. 운동을 즐겨 건장한 체구를 가졌기에 외형적으로 딱히 하자는 없었으나 주변을 잘 살피지 못하니 평소 자세와 걸음걸이가 매우 초라했던데다, 좁은 시야에서 비롯한 잦은 실수들, 또 그러한 실수 하나하나가 조롱과 뒷담화로 돌아오는 베르사유의 궁정 문화까지 더해지니 자연히 사람을 대하는 데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는 대인기피증과 사회공포증으로 이어져 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말 한마디도 제대로 할 수 없었으니 국정 운영은커녕 의사 소통마저도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는 국민들과 신하들에게 천치, 머저리 등의 인식이 생겨나게 된다.

이러한 사정을 잘 아는 아내인 마리 앙투아네트마저도 친정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보낸 편지에서 루이 16세를 "그 딱한 사람"이라고 언급하며 동정할 정도였다.[53] 직접 루이 16세를 만나본 처남 요제프 2세도, 매제에 대해 "인내심이 필요하지만, 이야기를 해 보면 의외로 뛰어난 지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직 그에게 '빛이 있으라'는 말이 전해지지 않고 있을 뿐이다."고 평했다. 그 말인즉, 인내심을 발휘해서 오래 이야기한 후에야 의외로 뛰어난 지성인임을 발견할 수 있는 거지 평소엔 맹해보인다는 말이다. 인간 루이 16세는 흙 속의 진주 같은 인물이지만, 당시 귀족들이나 군주들을 평가하는 기준은 교양이 아니었다. 속 빈 강정도 카리스마만 있다면 큰 실패를 저지르기 전까진 존경받는 지도자로 남을 수 있었지만,[54] 이 경우는 아예 자신의 특기와 강점을 본인이 감추고 다니니 답이 없다.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 1세와도 비슷한 구석이 많다.

왕권을 강화시킬 후계자 생산에 대해서도 결혼하고 거의 10년이 되도록 부부관계를 기피해서 성불구자라거나 진성포경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나중에는 이 소문이 거의 사실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그러나 조부인 루이 15세가 저명한 의사들을 불러 진찰한 결과 "성적 능력에는 문제가 없다"고 진단했고, 훗날 방문한 처남 요제프 2세도 어머니에게 '매제가 고자는 아닌듯 함'이라는 보고를 한 걸 보면 아마 신체적 결함과 그로 인한 스트레스를 자식이 똑같이 겪을까봐 성적능력이 있음에도 자의로 성관계를 거부한 것으로 보인다. 이 상황을 보다 못한 장모 마리아 테레지아가 장남인 요제프 2세[55]를 파견해서 설득한 후에야 자식을 보았다.

이렇게 후계자 생산이 늦어지는 바람에 결국 남동생들인 프로방스 백작아르투아 백작, 또 부르봉 왕조의 분가인 오를레앙 가문 등이 왕위에 대한 야심을 가지게 되었고, 우유부단한 국왕 아래에서 세력확장이 통제되지도 않아 왕실이 분열되었고, 이들은 혁명이 일어나자 루이 16세의 가장 큰 적이 되고 말았다. 예컨대 오를레앙 공은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처형하는 데 가장 적극적이었으며, 프로방스 백작 루이는 루이 16세가 처형되자마자 스스로 섭정을 자처했다. 아르투아 백작 샤를 또한 장인인 사르데냐-피에몬테 국왕을 등에 업고 자신의 왕위계승권을 주장했다.

루이 16세의 가장 큰 문제는 우유부단하고 주변의 분위기에 잘 흔들리는 주관없는 성격을 가졌다는 것이었다. 혁명기에는 혁명파들에게 둘러싸이면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거나 혁명 기념 행사에 함께 참가하기도 하는 등 유화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상황이 진정되고 귀족을 포함한 보수파들에게 둘러싸이고 그들이 자기들 특권 타령만 하면 줏대없이 자신의 결정을 번복하고 귀족편으로 반동적으로 회귀하는 행동을 보여주었다. 평범한 사람이였다면 그저 '줏대 없는 박쥐' 정도의 평가였겠지만 국왕인 루이 16세의 이러한 분별력 없는 태도는 귀족과 서민들에겐 지극히 기만적인 행동으로 보였기 때문에 서민들은 서민들대로 국왕은 항상 귀족들만 편들고 거짓 약속만 한다면서 분노하게 되고 귀족들은 귀족들대로 왕께서 언제 다시 서민층을 지지할지 모르니 믿을 수 없다며 왕을 지지하지 않았다. 차라리 한쪽으로 치우쳤다면 지지층을 확보할 수라도 있었겠지만 오락가락하는 행보로 양측의 지지를 모두 잃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루이 16세가 아무리 호구, 바보, 천치 취급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진짜 지능이 낮은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지적장애나 이상이 딱 보이는 자폐성 장애는 인권개념이 막장이던 이 시기에도 사형을 면해주는 것이 오히려 상식이었으며, 엄연한 정상인이던 그의 호구 행각은 주변에는 오히려 호구의 가면을 쓰고 신뢰를 무시하는 위선자로 여겨지게 했다. 즉 어설프게 상식인이고 어설프게 호구인 것도 문제였다. 차라리 상식인이면 제대로 상식인이든가 호구라도 제대로 호구라면 전자의 경우 일을 이렇게까지 만들지 않았을 테고 후자라면 동정론 때문에라도 사형은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56] 암만 국왕이 미워도 진짜 바보면 "그래도 저 왕은 못나고 싶어 못난 게 아니라 날 때부터 못난 놈인데[57] 어떻게 사형까지 시키냐. 멍청한 왕을 부추긴 악질 귀족들이나 사형시키자." 라며 사형만은 면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루이 16세는 분별력 없이 이랬다 저랬다 하기만 하는 주관없는 미련한 성격 때문에 그 대가로 목숨을 잃게 된다. 애초에 혁명이 일어난 후에도 몇년간 살아 있었던 걸 보면, 혁명군과 타협해 헌법 준수 잘하고 중산층과 서민들을 결단력 있게 돌보려고 노력하는 모습만 보였어도 목숨 보존은 물론이고 실권은 약해졌겠지만 왕위도 수호했을 가능성이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가 물질적 탐욕은 크게 없었지만 전제 군주의 권력에 극도로 집착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가 하필이면 다른 나라도 아닌 유럽의 강대국인 프랑스의. 그것도 입헌군주가 아니라 전제군주였다는 점도 루이 16세의 군주로서 결함을 생각해보면 더 큰 불행이었다. 유럽의 왕실 궁중 문화가 큰 틀은 비슷해도 사실 나라와 종교별로 꽤 차이가 있는지라 당장 전시대 17세기에는 서로 서유럽 패권을 두고 으르렁거리던 라이벌이었던 압스부르고 왕조 스페인 제국만 하더라도 오히려 전성기에 해당하는 펠리페 3세, 펠리페 4세 모두 루이 16세와 비슷하게 내성적이고, 국왕으로서 요구되는 쇼맨십 중 하나인 배짱이 없었던 인물들이라 레르마 공작, 올리바레스 공작 같은 대신들에게 국정을 위임했다. 프랑스 안에서도 그 이전시대에는 루이 13세 같이 강력한 군주적 카리스마하곤 영 거리가 먼 전례들도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루이 16세가 다스리던 후기 부르봉 왕정 프랑스는 전전임자인 당장 별명부터 개쩌는 태양왕이었던 루이 14세의 치세를 겪으며 유럽 고급 궁중문화를 주도하는 프랑스 귀족단의 최정점이자 슬슬 형성되기 시작하는 초기 내셔널리즘적 이념도 섞인 왕실의 영광을 과시적인 사치로 보여주는 왕실 문화가 자리 잡은 상황이었다. 사실 이건 전임자 루이 15세도 똑같이 할 수는 없어서 퐁파두르 부인 같은 왕의 정부가 왕 대신 국민 욕받이가 되는 희한한 정치문화로 이어졌는데, 루이 16세는 이런 상황에서 루이 14세처럼 욕을 먹을 수 없는 왕이 직접 나선 것도 아니고 루이 15세처럼 욕받이로 대신 내세울 애인도 만든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마리 앙투아네트가 온갖 욕을 다 뒤집어쓰는 결과로 이어졌다.

결국 이러한 군주로서의 단점들이, 가장 최악의 시기에 가장 최악의 장소에서 가장 최악의 형태로 터지며 루이 16세 내외가 단두대에 목이 잘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만약 루이 16세가 왕이 될 운명으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냥 '성격은 괜찮은데 좀 답답한 왕족' 정도로 살다 갔을 것이고, 아니면 주변 상황만이라도 태평성대였거나 입헌군주제를 따랐더라면 그럭저럭 평범한 왕 노릇 정도는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필이면 프랑스라는 국가가 썩어문드러지는 시점에 국가적 위기를 해소하기는커녕 개인의 삶을 추스르기도 벅찼을 인물이 절대군주 자리에 앉아 있었으니 루이 16세 개인에게도 프랑스에게도 매우 불운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3.4. 종합

오늘날 루이 16세는 프랑스 대혁명의 뜻에 반해 단두대에서 처형된 군주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렇기 때문에 한편으론 동정심에 의한 올려치기와 그래봤자 전제군주일 뿐이라는 식의 내려치기가 동시에 이뤄지는 인물이기도 하다.

물론 루이 16세는 다정한 성격이나 오랜 기간 교분을 가지면 알 수 있는 의외의 지성 따위의 면모로 볼 때 폭군은 아니었다. 그런 측면에서 루이 16세는 구시대가 남긴 숙제를 풀지 못해 희생된 측면도 있지만, 결국 봉건신분제라는 시대적 한계 속에서 대대적인 사회적 개혁의 욕구가 분출되자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외세의 힘을 빌려서라도 군주제를 고수하려 하다 처형당했기에 이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실책이다.

물론 루이 16세가 처형당한 것이 정당한지에 대한 의견 차이는 근본적으로 국가를 어떻게 이끌어 가야 하는가에 대한 가치관의 차이에 기인한다. "군주제적 가치관"에서 혁명파는 왕권을 제약하는 역적이고, 루이 16세가 외국(오스트리아)의 힘을 빌려서라도 왕권을 회복하는 것은 정당하다. 게다가 오스트리아는 루이 16세의 처가집이다. 유럽에서 군주끼리 서로 힘을 빌려주는 일은 흔했다. 처가집의 힘을 빌려서 반란을 진압하고 왕권을 회복하는 것은 국가의 주권이 군주에게서 나온다는 절대군주제의 입장에서는 정당한 것이었지만,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국민주권 입장에서 보면 반역죄였다.

사실 이 시기 유럽의 군주들은 자국의 평민보다는 다른 나라의 군주와 더 가까운 사이였다. 서로서로 결혼으로 맺어지거나, 형제 자매끼리 왕위를 나누면서 상당히 가까운 친척 지간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친척이다보니 서로 연락도 자주 하고 지내는 사이니까 당연히 더 친밀할 수밖에 없고, 신분과 입장이 완전히 다른 평민과는 달리 '같은 군주'라는 점에서 입장과 신분이 동일하기 때문에 '인간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는 여지'도 많았다. 물론 때때로 전쟁을 벌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이 전쟁조차도 '친척들 간의 재산 다툼'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국민주권적 가치관"에서 이 시도는 시민과 그 대표들을 역적으로 몰아서 외국 군대의 힘을 빌려서 죽이려 하는 사악한 적대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루이 16세가 명분을 부여해서 끌고 온 오스트리아 군대가 파리에 입성하면 무수한 사람들이 역적으로서 살육당할 것이 분명했다. 정치적 가치관과 권력 투쟁을 논하기 전에, 혁명을 지지하는 프랑스 시민들에게는 생존이 걸린 문제가 되었다. 사형 판결이 굉장히 신속하게 결정된 진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실제 이들도 루이 16세가 외국 군대를 끌이들이려 하기 전까진 루이 16세를 죽이자고 주장하진 않았다.

혁명 직후에도 프랑스 백성들은 아직 전통적인 권위와 관습의 영향으로 루이 16세를 "우리들의 왕"으로 여기고 있었다. 루이 16세가 선대 국왕인 루이 15세만큼 개막장도 아니었고,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해 앙숙인 영국에도 한 방 먹인 터였으며, 가난한 인민들에게 그렇게 가혹하지 않았으며, 아내가 영국 다음으로 앙숙인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이지만 어쨌든 그리 폭군도 아니고 성격은 착한 왕이니까 자코뱅부터 말단 시민까지 그래도 살려두자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강경한 혁명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왕을 폐위시키고 공화정을 시작하는 것은 무리수이니 그냥 헌법만 받아들이게 하고 계속 왕 시켜주자는 입장이 대세였다. 하지만 루이 16세는 그들의 신뢰를 배신하고 탄압을 시도하려다가 걸린 셈이니 학살 목표로 지정되었던 시민들과 대표의 감정이 폭발할 수밖에 없고, 생쥐스트는 "국왕이 무죄라면 혁명이 유죄"라 주장했다. 말하자면 '어떤 논리(군주제, 왕권신수설의 논리)에 따르면 왕이 무죄일 수도 있지만 그 논리에 따르면 혁명은 반역이다. 반면 혁명이 정당하다면 같은 논리에 따라 왕은 유죄다'라는 논리이며, 생쥐스트는 왕이 오스트리아군의 힘을 빌리려 시도한 것 때문에 왕의 정당성과 혁명의 정당성이 양립할 수 없다는 이유로 루이 16세를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우유부단하고 줏대없는 성격인 루이 16세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의미를 제대로 인지하고 있었는지는 사실 의문스럽지만, 당시 시민들은 "왕의 배신"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물론 루이 16세에게는 파리 시민들보다는 차라리 처남[58]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더 친근하고 믿음직한 사람이었겠지만 말이다. 그런고로 억울한 죽음까지는 아니더라도 안타까운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진짜 큰 문제는 루이 16세의 실제 행동 자체도 구시대의 문제 해결은커녕, 문제를 심화시키는 짓만 했다는 거다. 예를 들어 국가 실익은 영 시원찮은데 쓸데없이 전쟁에 끼어든 걸 그대로 따라했다. 사실 프랑스는 미국 독립전쟁에 참가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59] 이걸 끼어들면서 그렇잖아도 적자였던 재정을 더 말아먹었고, 그 망한 재정을 개혁하려고 재무총감인 튀르고나 네케르와 같은 인물이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녔지만 기득권의 저항에 번번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물러나는 모습을 보였다. 똑같이 선대에서 있는대로 말아먹은 숭정제가 크게 비판받지 않는 이유는 실책이 있긴 했어도 망해가던 명나라를 되살리기 위해 눈물나게 노력했고 실제 성과도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원숭환을 처형시키는 등 뻘짓이 많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라를 살리려고 뭐라도 했다.
루이 16세는 과세 문제에서 몇 가지 시도는 했었지만 그놈의 우유뷰단한 성격 때문에 개혁을 이어나가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성과를 보인 것은 전혀 없었다.

이 부분에서 생각해야 할 점은, 현대인의 관점에서 건전한 재정, 즉 <수입의 규모에 맞추어 적절한 수준에서 지출을 조절하는 것>은 중세 후반~근세 유럽의 귀족, 특히 절대왕정기의 국왕에게는 미덕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런 규모있는 재정 관리와 지출은 시민, 부르주아 계급의 덕목이었고 국왕이나 대귀족에게는 과시적인 소비를 통해 스스로의 권위를 입증하고 과시해 보일 것이 요구되었던 것. 특히 절대왕정기의 국왕에게는 더욱 그러했던 것이,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왕권신수설이나 절대왕정으로 유명한 근세 유럽의 왕권은 실제로는 그리 공고한 것이 아니었기에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과시적인 소비나 대외군사활동 등을 통해 끊임없이 권위를 과시해 보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런 재정 규모로 감당하기 힘든 과시적인 소비를 계속할 경우 필연적으로 국가(및 왕실) 재정이 파탄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지만 이 문제는 과시적 소비를 통해 강화된 왕권으로 해결하는 것이 당대의 일반적인 해결책이었다.
일단 돈이 필요하면 금융업자에게 돈을 빌리든, 징세청부업자에게 징세권을 팔아치워서 일단 땡겨오든 돈을 마련해서 일단 쓰고, 이렇게 진 빚이 위험한 수준까지 쌓이면 돈 갚으라는 금융업자에게 "안 갚을 건데 니가 어쩔 거냐? 왕 배 한번 째 볼 테냐?" 하든지, 교회 재산을 탈탈 털고[61] "교황님한테 일러서 저 왕 파문시켜 달라고 해보든지 ㅋㅋㅋ 아 그리고 일를 때 아직도 아비뇽 대성당 튼튼하게 잘 있다는 것도 같이 알려주고"[62] 하든지 만만한 귀족을 족쳐서 재산을 몰수하는 등의 방법으로 땜빵하여 해결해왔던 것이다.

이 점에서, 종종 '겉보기에만 화려했을 뿐, 실상은 프랑스(왕실)의 내실을 좀먹고 있었다'는 나쁜 평가까지 받는 루이 14세와 루이 15세의 과시적인 사치 역시 정치적으로 의미없는 행위는 아니었다. 루이 14세나 루이 15세가 돈 계산도 못하는 바보라서 국고를 탕진해가며 베르사유 궁전을 짓고 대외전쟁에 골몰했던 것이 아니라, 호화로운 건축과 과시적인 대외원정을 반복함으로써 국왕의 권위를 과시하고, 그를 통해 왕권을 강화했던 것이다. 루이 14세의 경우 이 수법으로 귀족들의 세력까지 제대로 찍어눌렀고, 루이 15세의 경우는 루이 14세보다 정국 통제력이 좀 약한 편이라 귀족들의 세력 확장을 막지는 못했지만 왕권 강화의 끈 자체는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루이 16세의 차례는 말하자면 선대 2대에 강화된 왕권으로 그 부산물인 재정난을 처리할 턴이었던 셈이다.

물론 이런 짓을 무한정 반복할 수는 없다. 프랑스라는 나라 자체의 역량이 그러한 임시방편적 해법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느냐의 문제에서도 그렇고, 변화하는 시대가 그런 방식을 한 번 더 허용할 것인가의 문제에서도 그렇다. 당시 프랑스의 체제가 어떤 한계에 봉착했던 것은 사실이고, 루이 16세에게 주어진 미션이 단순히 '선왕들이 하던 거 한 번 더 해라'보다는 훨씬 어려웠던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요점은 루이 16세가 그것을 맨몸으로 해야 하는 것도 아니었고 아무런 선례 없이 해야 했던 것도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에게 주어진 왕권과 체제는 한계도 명백하지만 충분히 강력하고 활용성 있는 도구였다.

결국 루이 16세의 경우 선대로부터 재정난+빚이라는 막대한 부담을 물려받은 처지였기는 하지만, 강화된 왕권이라는 형태로 그동안의 오랜 문제들을 해결할 기회도 함께 물려받았던 셈이다. 문제는 루이 16세의 성격이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개혁적인 지도력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에서 시작됐다. 세력이 강해진 대귀족들이 왕의 권위를 무시하기 시작했다곤 하지만, 2대 백 년간 양성된 왕권(특히 군사력)이 어디 간 것도 아니니 정말 작정하고 찍어누른 채 세금을 물리거나 재산을 몰수한다면 정말 군사적으로 반란을 일으킬 정도의 세력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교회에 세금을 부과하려다 먼나라 이웃나라 프랑스편에도 나온 "하느님도 세금을 내시나?"는 성직자들의 조롱을 들었다고 하지만, 그 이전 시대에서 서유럽의 절대군주들은 돈이 모자라면 교회에 세금을 부여하는 수준을 넘어 교회 재산까지 잘만 몰수했다.[63][64] 따라서 루이 16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중요한 요인 중 하나였던 <국민국가 개념의 형성>은, 그가 조금만 더 결단력과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오히려 유용한 무기가 될 수도 있었다. 교회의 범국가적 영향력이 강력했던 중세 초중기였다면 교회에 세금을 부과하거나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다가 교황과 사이가 틀어지고, 그래서 교황이 쏜 파문빔 한방 맞을 경우 설령 국왕이라도 상당한 정치적 위험에 처하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65]

그래도 국민국가 개념이 어느 정도 형성된 근세 절대왕정기의 프랑스 국왕이라면 설령 파문을 당하더라도 데미지 컨트롤이 훨씬 용이했다. 당장 또한 탈기독교(특히 탈가톨릭)적 경향이 강한 계몽주의 지식인들을 끌어들여 그 영향력을 이용했다면 교회나 대귀족과 척지게 되더라도 정국 장악력을 유지하기가 훨씬 유리했을 것이다[66]. 헨리 8세영국 국교회 창설만 보더라도 권력을 장악한 국왕이 충분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자국 교회를 로마로부터 독립시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고, 헨리 8세에게 영국 국교회 창설을 뒷받침해줄 종교개혁 세력이 있었다면 루이 16세에게도 계몽주의 지식인들과 갈리아교회주의[67]가 있었다.

물론 이쪽으로 따지면 프랑스의 경우 영국이나 북유럽보다 가톨릭의 교세가 크고 영향력도 강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하지만, 영국처럼 멀리 외국의 경우까지 갈 것도 없이 당장 루이 16세의 내조부인 루이 13세[68] 시절 프랑스가 중세 내내 '가톨릭교회의 장녀' 운운하던 시절은 하루아침에 갔다버렸던양 지극히 세속적인 지정학적 논리에 따라 30년 전쟁 당시 범개신교편에 서며, 신학적으로도 왕실이 장 보댕 같은 교권위 왕권 우위론을 설파한 정치학자, 얀센주의 같은 '이단'시비까지 있는 신학적 트렌드를 밀어준 전례까지 있다. 이 전시대인 16~17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유럽의 왕실 권력의 독점적인 성장에 여전히 생생히 반발하는 귀족, 성직 권력들도 힘을 합쳐 위그노 반란, 프롱드의 난 같은 정치적인 도전할 힘이라도 있었지만 18세기 프랑스는 그런거 이미 다 때려잡은지 오래였다. 가톨릭교회 역시 종교개혁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상실하면서 오히려 프랑스, 스페인 같은 강력한 세속 왕실 권력에 더 의존적으로 변했다는 시대적 상황까지 고려하면 교회 전체 입장에선 핵심 가톨릭 국가 중 하나인 프랑스를 잃는 것까지는 도저히 감수할 수 없었고,[69] 따라서 루이 16세가 교회 과세 정책을 강경하게 밀어붙였다면 끝까지 저항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루이 16세는 대귀족과 교회의 반항을 제압하지 못하여(=세금을 물리지 못하여) 재정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시민+지식인 세력[70]이 주축이 된 혁명으로 인해 몰락했다. 연 세입의 60%가 이자 갚는데 들어갔다는 것 역시 당시 프랑스 국왕이 빛 못갚겠다고 디폴트를 선언해 버리면 변제를 강요할 무슨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루이 16세 특유의 선량하고 온화, 또는 우유부단한 성격상 저런 강경책을 쓰지 못했기에 확실한 돈줄을 내버려두고 과세 문제 정도나 만지작거릴 수 밖에 없었으며, 그나마도 재정상황을 확실히 개선할만큼 강력한 개선책은 대상 집단의 반발때문에 쓰지도 못하고 흐지부지 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루이 16세는 분명 선대로부터 크나큰 난관을 물려받은 처지이기는 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그 난관을 극복할 수 없는 처지였기에 안타깝다기보다는 하려면 어떻게든 할 수는 있겠지만 본인의 성격이나 적성에는 영 걸맞지 않은 입장을 요구받았고, 이 때문에 몰락했다는 점에선 안타까운 인물인 셈이다.

그래도 인간적인 면만 보면 동정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루이는 왕위 계승 순위에서 멀었으나 왕세자였던 아버지와 맏형인 왕세손이 결핵으로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인 루이 15세보다 일찍 죽자 왕세자가 된 것이었고, 본인 스스로도 왕이 되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71] 할아버지가 죽고 자신이 왕이 된 것을 알았을 때는 두려움과 중압감에 아내와 껴안고 울었다고 한다. 어떻게 본다면 이쪽도 전제군주제의 엄연한 피해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자신이 군주제를 증오하던 시민들에게 처형되었지만 국왕의 지위는 시대상 그에게 너무나 과분하였다. 차라리 평범한 왕족이나 귀족으로 태어났다면 학식이 깊고 기술자에다가 검소하고 소박한 사람으로 존경받았을 것이다.

4. 가족관계

4.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루이 16세
(Louis XVI)
<colbgcolor=#fff3e4,#331c00> 프랑스의 왕세자 루이
(Louis, Dauphin of France)
<colbgcolor=#ffffe4,#323300> 루이 15세
(Louis XV)
부르고뉴 공작 루이
(Louis, Duke of Burgundy)
사보이아의 마리아 아델라이데[72]
(Maria Adelaide of Savoy)
마리아 레슈친스카
(Maria Leszczyńska)
스타니스와프 1세
(Stanisław I)
카타지나 오팔린스카
(Katarzyna Opalińska)
작센의 마리아 요제파
(Maria Josepha of Saxony)
아우구스트 3세
(August III)
아우구스트 2세
(August II)
브란덴부르크-바이로이트의
크리스티아네 에버하르디네
(Christiane Eberhardine of Brandenburg-Bayreuth)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요제파
(Maria Josepha of Austria)
요제프 1세
(Joseph I)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
빌헬미네 아말리

(Wilhelmine Amalie of Brunswick-Lüneburg)

4.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녀 앙굴렘 공작부인 마리 테레즈
(Marie-Thérèse, Duchess of Angoulême)
1778년 12월 19일 1851년 10월 19일 앙굴렘 공작 루이 앙투안[73]
1남 프랑스의 왕세자 루이 조제프[74]
(Louis Joseph, Dauphin of France)
1781년 10월 22일 1789년 6월 4일
2남 루이 17세
(Louis XVII)
1785년 3월 27일 1795년 6월 8일
2녀 소피 엘렌 베아트리스
(Sophie Hélène Béatrix)
1786년 7월 9일 1787년 6월 19일

5. 대중매체에서

첫 만남 때 아내 마리에게 한눈에 반했지만 수줍음을 무지 타고 아름답고 매력적인 아내에 비해 자신은 볼품없다고 여겨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마리는 남편이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실망과 동시에 페르젠이 떠난 마음의 빈자리를 도박과 사치, 파티에 집중하고 루이 16세는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애정으로 이를 다 들어주었다. 이런 루이 16세의 우유부단한 행동과 방임은 결국 아내와 자신을 포함한 프랑스 왕실에 대한 불신과 실망으로 이어지고 결국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으로 그 불만은 제대로 터지고 만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루이 16세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수습하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겨우 기회를 마련한 삼부회도 본인의 무능함과 시대착오적 사고관으로 다 날려버리고 만다. 이후 프랑스 혁명이 터지고 목숨조차 보장 못하는 살얼음판 같은 현실이 두려워서 아내, , 여동생과 함께 프랑스를 버리고 오스트리아로 도주하려고 하지만 실패하고, 국왕의 몸으로 조국을 버리고 도망치려고 한 자신에게 분노한 시민들에게 온갖 욕설과 위협을 당하며[75] 파리로 끌려가고 가족들과 함께 폐위되어 탕플 탑에 유폐된다. 바렌 사건의 실패로 그나마 존재했던 소수의 지지세력마저 몰살당하거나 등을 돌리면서 사실상 자신과 아내의 최후는 이때 결정되자[76], 모든 걸 체념하고 끝까지 충성을 바치며 도와주려는 페르젠에게 최후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며 사양하고 그의 우정에 감사를 표한다.
결국 국민투표에서 찬성 361 대 반대 360으로 단 1표 차이에 의해 1793년 1월 21일 처형이 결정된다. 사형 전날에 다시 만난 가족들이 절규하자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고, 아들 루이 샤를에게 아비가 죽더라도 복수하려는 생각은 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이후 단두대 앞에 서서 자신의 피가 프랑스의 미래에 기틀이 되길 바란다는 유언을 남기고 의연하게 처형당한다. 감옥 안에서 처형 소리를 들은 아내 마리 앙투아네트와 여동생 엘리자베트는 절규한다. 마리는 불타는 사랑은 아니었으나 루이와의 사이에 분명히 부부의 애정은 존재했다며 그를 위해 기도를 올리면서 남편의 죽음을 슬퍼한다. 원판 성우는 야스하라 요시토. 가장 먼저 나온 비디오판은 박상일, KBS판은 홍승섭, EBS판은 홍범기.

* <존 애덤스>(HBO 사극)
애덤스가 특사 자격으로 프랑스 파리를 방문했을 때 잠깐 등장했다. 애덤스에게 말을 건넸는데 프랑스어를 모르는 애덤스가 못 알아듣고 멀뚱히 있자, 영어로 "Don't speak french(프랑스어를 모르나)?"라고 물어본다. 영어에 능통했다는 설정을 반영한 듯. 가만 보면 살짝 촐싹대는 이미지로 등장한다. 이후 프랑스 혁명정부에서 파견한 대사가 조지 워싱턴을 만나러 미국에 왔을 때 단두대에서 루이 16세의 인형을 목 자르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어 처형당했음을 암시한다.

6. 여담

7. 관련 문서


[1] 프랑스 혁명 당시 혁명군 측에서 루이 16세를 거추장스러운 존칭 다 빼고 저렇게 불렀다. 카페 왕조의 그 카페가 맞다.[2] 프랑스식인 마리 앙투아네트로 더 잘 알려져 있다.[3] 작센 선제후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아우구스트 3세요제프 1세의 장녀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요제파의 딸이다. 큰며느리인 마리 앙투아네트와는 6촌간이다.[4] 왕세손이었던 큰형 부르고뉴 공작 루이(1751 ~ 1761)는 어린 나이에 사고로 인한 결핵으로 사망했고, 작은형은 태어난 지 1년도 안 돼서 사망했다.[5] 마치 조선에서 영조 다음 임금이 정조인 것처럼 아버지가 일찍 죽은 탓에 손자가 할아버지의 제위를 이었다.[6] 루이 16세 이후의 프랑스 군주들은 감옥에서 요절한 아들 루이 17세, 그나마 왕으로서 천수를 다한 동생 루이 18세, 줄줄이 쫓겨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샤를 10세, 루이필리프 1세, 나폴레옹 3세 등 격변기 속에 다양한 운명을 맞았지만 적어도 단두대에 오르지는 않았다.[7] 다만 맨 윗세대인 찰스 1세는 그나마 본인만 처형되고 처자식들은 해외로 떠나 무사했으며, 11년만에 다시 왕정복고되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 천수를 누렸지만, 루이 16세는 본인은 물론 아내도 처형되고 아들은 탕플 탑에서 옥사, 왕조 또한 왕정복고혁명, 또 왕정복고혁명을 반복하다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가장 후배뻘인 니콜라이 2세는 본인과 처자식 모두 총살당한 후, 로마노프 황조 자체도 다시는 복고되지 못했다.[8] 사실 대중적인 인식과는 다르게 왕실의 사치가 재정파탄의 주 원인은 아니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도 왕비 치고는 매우 검소한 편이었고 오히려 누가누가 사치스럽냐를 겨루는 베르사유 궁정의 분위기와 잘 맞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만의 거처를 따로 마련했을 때 물론 고급 도자기를 놓는 등 사치를 하지 않은건 아니지만 정작 그녀는 거기서 가축을 기르고 우유를 짜며 자급자족을 하는 등 왕비 치고 소박하고 투박한 일을 했다.[9] 그럼에도 예산의 5% 정도로 알려진 프랑스 왕실의 품위유지비용은 분명 무시할 수 있을만한 푼돈은 아니었고, 상술한대로 어마어마한 빚을 진 상태라면 설령 푼돈일지라도 절감하려는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튀르고의 조치는 왕실의 사치가 심각했다기보단, 그만큼 왕실이 진 빚이 엄청나서 온갖 수단을 써야만 했다는 맥락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10] 튀르고는 중상주의자인 콜베르보다 더 진보된 경제관을 갖춘 인물로서 최소한 재정 부문에서는 콜베르보다 더 나은 성과를 거둘 수도 있는 인물이었다. 중상주의 이후 근대적인 경제학자들은 한결같이 중상주의의 모순을 지적하며 더 나은 대안을 모색했기 때문이다. 튀르고를 포기한 것은 루이 16세가 스스로 목을 친 격이었다.[11] 하지만 그때 당시 성직자(당시엔 이들도 귀족)(정확히 말하면 성직자도 계급별로 신분이 달라서 하급 성직자는 대개 하급 귀족, 평민 등이었던 반면 주교 등은 귀족이었다.)들은 "하느님도 세금을 내시나?"라는 말로 넘어갔다. 그리고 그들은 프랑스 혁명 당시에 대부분 목이 달아나면서 본인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댓가를 목숨으로 치렀다.[12] 법복 귀족이라고 부른다. 구 봉건 귀족은 대검 귀족.[13] 심지어 영국의 귀족들은 프랑스와 달리 세금을 이미 내고 있었기에 프랑스와 달리 대중의 분노를 크게 사지 않았다.[14] 물론, 프랑스 왕들이 전부 이러지는 않았다. 저질 금화를 발행한 선왕들과는 달리 양질의 금화를 발행하여 재정 문제를 해결하려 한 샤를 5세 같은 경우도 있다.[15] 위에서 나온 귀족의 면세특권 해제의 건이 그렇다.[16] 프랑스는 루이 14세 때 상비군이 40만으로 증가하여 유럽에서 가장 많고 강력한 군대를 보유했다.[17] 게다가 루이 15세는 못말리는 호색한이라서 귀족들에게도 평판이 나빴다.[18] 사실 이건 부르주아 집안 자제분들이 돈으로 계급을 산 경우가 많았었다. 이 때문에 귀족들이 불편해져서 1781년 부터는 4대 이상 귀족인 집안의 아들이거나 생 루이 훈장(루이 14세가 만든 무공 훈장) 수여자의 아들만 장교로 임용될 수 있게 법이 만들어진다.[19] 실제로 프랑스 군대는 혁명 이후 귀족들이 아닌 부르주아들 편을 들었다.[20] 루이 16세가 언급한 것이 Revolt인데, 이건 한국어로 제대로 된 의미 전달을 하자면 대충 상위 권력에 대한 저항 혹은 반란 등으로 해석된다. Riot은 닥치고 때려부수는 걸 의미하는 것이고, Revolt는 아래에서 뭔가 요구를 하면서 저항하는 것에 가깝다. 가장 그럴 듯한 번역은 "폭동인가?"란 물음에 "혁명입니다"라고 해석하는 것이다.[21] 사실 이때 당시 혁명군 또한 왕보다 프랑스 귀족 세력에 대한 불만이 더 극심한 상황이었다. 즉, 혁명군을 뒤에서 선동한 주동자들인 부르주아(평민 자본가, 지식인 계층) 계급이 귀족 계급을 권력층에서 몰아내려는 성격이 강했던 것.[22] 3권분립 원칙으로 국왕은 행정부의 수장으로 격하되었고 뭘 하든지 간에 의회의 승인이 있어야 할 수 있었다.[23] 당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친 마리아 테레지아의 정략 결혼 정책 때문에 사돈 관계가 되었지만 국민 감정은 굉장히 좋지 않았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별 잘못이 없음에도 그렇게 욕을 먹은 것도 그녀가 오스트리아 공주라서 그런 것이다.[24] 이곳 군사령관인 부이예 후작 프랑수아 클로드 아무르(François Claude Amour, marquis de Bouillé) 장군이 왕당파였기 때문에 여기서 군대를 모아 왕권을 되찾을 속셈이었다.[25] 루이 16세가 150년 만에 삼부회를 소집한 덕에 프랑스 일부에선 루이 16세를 자유를 회복해주신 임금님이라고 칭송하는 세력도 있었다. 왕에 대한 비난은 익히 알다시피 마리 앙투아네트가 왕을 현혹하는 외국년이라며 거의 모두 뒤집어썼고, 그마저도 마리 앙투아네트는 실상은 괜찮은 일도 제법 한 왕비였기에 상당 부분은 억울한 점도 있었다.[26] 당시 프랑스 형법상 사형 집행유예가 선고된 이후 10년이 지나면 무기징역으로 감하고, 만 60세가 되는 해 부활절가석방하도록 했다.[27] 먼나라 이웃나라 프랑스 편에선 반대 334표, 찬성 387표라고 나왔었다.[28]로베스피에르당통조차 처음에는 사형에는 찬성하지만 집행유예를 하자고 제안했는데 생쥐스트가 "군림하는 것 자체가 유죄다. 루이 16세를 처형하지 않으면 혁명이 유죄가 될 것"이라고 연설한 게 분위기를 즉시 처형으로 바꿔버렸다.[29] 사실 루이 16세가 처형당한 이면엔 자꾸 왕권을 회복하려고 하는 왕실과 왕당파의 씨를 말리려는 공화파의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것도 있었다.[30] 물론 오늘날엔 좌파 내에도 강경, 온건파가 있고 우파 내에도 강경, 온건파들이 있기 때문에 강경, 온건 이런 식으로 좌우를 나누는건 어불성설이긴 하다. 애초에 이 좌우파란 것 자체가 영국 의회에서 비롯된 것이다.[31] 쉽게 말해서 신분제가 다시 탄생하고 자기들은 노예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현대인들이라면 이걸 두고 보겠는가? 그나마 입헌군주제 정도라도 받아들였으면 모를까, 루이 16세는 그것도 거부하고 혁명파 입장에선 오스트리아와 내통한(왕당파 입장에선 혁명 반란군을 쓸어내려 원조를 요청한) 상황이었다.[32] 일설에 의하면 생쥐스트를 루이 18세가 매수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이건 가능성이 낮은 것이 진짜 매수당했으면 무조건 죽이라고 하면서 최소한의 정당성도 없는 폭군으로 몰아붙이지, 혁명을 위해 어쩔 수 없다는 식의, 어떻게 보면 루이 16세에 대한 옹호가 될 수 있는 발언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33] 혁명파 입장에선 외국 군대를 끌어들여 자국민인 혁명세력을 진압하려고 했으니 어찌보면 맞는 말일 수도 있다. 단지 루이 16세의 평소 행실이나 성품을 볼 때 자신의 행동이 자국민에 대한 학살이 될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행한 일은 아닐 것이라 애써 짐작하는 것뿐이다.[34] 이미 탈출하다가 현행범으로 잡힌 터라 무죄 가능성은 희박했다.[35] 혁명 과격파와 합세하여 루이 16세 이후의 왕위를 노린 일부 군주정 지지자들의 반란표도 있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입헌군주제를 지지한 왕의 먼 동생도 사형에 찬성하는 표를 던졌고 순간 공회장 안에서는 신음소리가 울렸다고 한다.[36] 혹은 "내가 처형되어 프랑스 백성들이 행복할 수 있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는 설도 있고 "프랑스 인들이여, 짐은 무고하게 죽는다."라는 설도 있다.[37] 애당초 죽기 싫어서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는 겁쟁이였다면 그냥 혁명 당일에 몰래 재산과 가족들 데리고 몰래 해외로 도망 쳤을 것이다.[38] 사실 당시 사형을 깔끔하게 끝내주는 단두대는 사형자뿐만 아니라 사형 집행인의 고통을 덜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고 한다. 당연히 사형 집행인들은 현대에도 육체적 스트레스 뿐만 아니라 정신적 스트레스도 상당한 3D 직종으로 분류된다. 그리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반대 진영 인사들을 처형하면서 자리를 지킨 사형 집행인도 적지 않았다. 당연한 게 말 그대로 사형 집행인들은 선고 나오면 그냥 하라는 대로 처형 집행만 할 뿐이고, 가뜩이나 안 하려고 기피하는 사형 집행인인데 마음에 안 든다고 함부로 죽여봐야 좋을 게 없다.[39] 그땐 혁명정부에 충성을 선언한 이른바 선서사제들만이 합법적 활동이 가능했는데, 이들은 혁명정부에 의해 처형된 루이 16세의 추모미사를 집전할 리가 없었다. 때문에 혁명정부에 대한 충성선언을 거부하고 은둔생활 중인 신부들, 이른바 비선서사제들을 직접 찾아갔다.[40] 프랑스 혁명에 매우 강하게 반발했던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도 남편 표트르 3세를 폐위하고 차르가 된 케이스다.[41] 루이 16세만 해도 처형 여부를 정하는 투표에 “감히 평민 따위가 어디 왕의 목숨을 이런 투표 따위에 올려 논할 수 있나”라며 기권표를 던지는 사람이 나올 정도였다.[42] 그러나 갸넨드라는 왕정이 폐지되고 왕위에서 폐위되어 물러난 이후에도 왕정 복고와 구 왕실 재산 반환 등을 주장하는 등 현 네팔 정부에게 반항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어 네팔 내부에서도 각종 비판과 논란을 야기하고 있다. 오죽하면 네팔의 일부 공화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아예 왕정 폐지 이후에 왕족들을 국외로 추방시키고 구 왕가에 대한 입국금지 조치를 내렸던 이탈리아, 그리스,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 유럽 국가들처럼 갸넨드라와 그 직계 일가족들도 국외로 추방시키고 입국금지 조치를 내렸어야 했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하지만 이탈리아, 그리스, 불가리아, 루마니아도 현재는 왕정 폐지 이후 국외로 추방당했던 구 왕실 일가들이 현재는 귀국 허가를 받고 원래 모국으로 되돌아와서 이는 옛날 이야기이다.[43] 게다가 그 고대 로마도 기원전 27년 제정으로 정치체제가 바뀌면서 다시 군주정이 수립되었다.[44] 찰스 2세는 사실 위에 형이 있던 차남이었으나, 형이 어린 나이에 사망하여 사실상 장남의 위치에 있었다.[45] 당장 프랑스만 해도 이때 미국에 어마어마한 지원을 해줬다. 때문에 재정이 악화되어 왕정이 무너졌다는게 웃픈 포인트지만. (사실 사상적으로도 프랑스 혁명이 미국 독립에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나폴레옹 대엔 이 재정을 메꾸기 위한 일환으로 루이지애나 땅도 미국에 헐값에 넘기게 된다.[46] 사실 당시 유럽에도 공화국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제노바 공화국이나 베네치아 공화국은 예전의 명성을 모두 잃고 평범한 도시국가로 전락한지 오래였으며,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왕이 있는 공화국'으로 불릴 만큼 사실상 공화국이었고 당대 주민들도 그렇게 불렀지만 국가원수의 명칭 자체는 왕이었고, 공식 명칭도 왕국이었다. 게다가 폴란드-리투아니아도 대홍수로 예전의 패권을 모두 잃은지 오래였고, 프랑스 혁명 직후엔 아예 해체 수순을 밟고 있었다.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루이 16세 처형 2년 후 완전히 멸망한다.[47] 고자라거나, 자연포경이 아니라는 소문이 돌았다. 사실 역대 부르봉 왕조의 왕들 가운데 아이를 갖지 못하면 이런 소문이 자주 돌았는데, 대표적으로 루이 14세의 아버지 루이 13세가 오랫동안 아이를 갖지 못하자 이와 같은 소문이 돌았다. 이 소문은 그의 왕비 안 도트리슈가 루이 14세를 낳고도 사라지지 않았으며, 안 도트리슈가 리슐리외 추기경과 외도해 루이 14세를 낳았다는 괴소문이 돌기도 했다.[48] 성교육이 안 돼서 성관계를 할 줄 몰랐다는 말이 인터넷에 간혹 돌기도 하는데 후사 생산이 의무였던 당시 왕족들은 성교육을 필수적으로 받았다. 특히나 손이 귀한 프랑스 왕실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아내 마리 앙투아네트는 매일 밤 동침에 실패한 이유를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모후에게 보고하기도 했다.[49] 출산은 네 차례 이뤄졌으나 임신은 다섯 번 했다. 첫 딸을 낳고 한 두 번째 임신은 마차 문을 닫는 과정에서 문에 배를 부딪히는 바람에 유산 됐다고 한다.[50] 실제로 여전히 기계식 시계 형식을 따르는 고가의 무브먼트 손목시계들은 무진장 비싸고 엄청난 기술력이 들어간다.[51] 프랑스 혁명 200주년 기념으로 제작된 1989년 영화 <프랑스 혁명>의 한 장면[52] 단두대를 개발하자고 법안을 제출한 기요탱 의학박사가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다는 낭설이 있었고(먼나라 이웃나라 프랑스편에도 이 설이 잘못 인용되어 있을 정도로 나름 유명한 낭설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제안한 단두대에 자신이 죽었다는 말이 있지만 사실 기요탱 박사는 천수를 누리고 자연사했다. (애초에 기요탱 박사는 사형제 폐지론자로, 그래도 사형제가 유지되어야 한다면 당시 기준으로 그나마 죄수들이 덜 고통스럽게 죽게 하자고 단두대를 고안하게 되었다고 한다.) 단두대의 발명자는 단두대에서 사형당했다'는 말의 주인공은 사실 루이 16세일 수도 있는 것. 참고로 아무리 사형수라도 좀 곱게 죽여 주자 혹은 명예롭게 죽게 해 주자는 생각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있었다. 현대에도 사형 집행을 하는 나라 중 인권이 아무리 시궁창인 나라라 해도 적어도 사형수만큼은 북한 정도 빼고는 일반적으로는 수면제나 마취제 투여 등 최대한 덜 고통스럽게 죽을 권리는 준다.[53] 마리아 테레지아는 그런 딸에게 “왕비가 왕을 존경하지 않으면 백성이 왕을 존경할 수 있겠니? 왕에게 그런 태도 보이지 마라.”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54] 2차 대전이라는 전쟁을 일으키기 전 히틀러가 저지른 타인종 차별과 유대인에 대한 증오범죄라는 분열 농간질은 의외로 당대에 그렇게 비난이 크지는 않았고, 반유대주의 정서는 독일만 유별났던 게 아니라 구미권에 거의 공통되게 퍼져 있는 감정이었다. 가시적이고 제도적인 차별은 많이 줄었다 한들 로마 제국의 기독교 국교화 이래로 천 년을 이어져 온 정서가 하루 아침에 쉽게 사라지지는 않았던 것. 뉴욕타임즈 같은 경우는 "히틀러의 성격이 조금만 느긋했어도 (유대인 차별의 악명은) 프랑스가 다 받았을 것"이라는 사설이 기고되기도 했다.[55] 이 당시 요제프는 이미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으나 공식적으로는 자기 작위 중에 하나인 팔켄슈타인 백작이 방문한 것으로 처리했다. 수상할 정도로 프랑스 국왕 부부를 자주 알현하는 팔켄슈타인 백작이 누군지는 어차피 금방 알려질테니까 정체를 숨기려는 의도는 아니었을 것으로 보이고, 번거로운 의전 문제 등을 피하려는 목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56] 다른 나라 다른 시대의 사례지만 옆나라 스페인카를로스 2세가 딱 이랬다. 최전성기는 끝났어도 여전히 강대국이었던 스페인 제국을 순식간에 열강들의 장기말 신세로 전락시킨 차원이 다른 규모의 암군이었지만 누구나 딱 봐도 금치산자급 장애인이란 게 티가 났기 때문에 동시대나 후대에나 딱히 왕을 탓하진 않았다. 또 카를로스 2세는 정신 장애보다는 신체 장애의 비중이 더 컸기 때문에 그나마 정사를 돌볼 수는 있었다.[57] 딱 17세기 조선에서 명나라 천계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이랬다. 실록에는 "사리에 어두운 임금은 원망하지 않는 법이니, 천계(天啓) 황제는 '원망할 수 없는 임금'에 해당되지만, 만력(萬曆) 황제는 초년에 영매하고 호걸스럽던 임금으로 사십 년 동안이나 왕위에 있었으나 신료들을 인접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경계로 삼아야 할 일입니다."라고 했는데, "만력제 그건 처음에는 좀 잘하더니 얼마 안 가서 신하들도 안 만나고 40년 넘게 틀어박혔으니까 암군이 맞는데, 천계제 저건 일부러 암군 짓만 한 것도 아니고 원래 저능아 같은 놈인데 그런 놈 붙들고 원망해 봐야 뭐하겠냐."라는 의미다.[58] 아내 마리 앙투아네트의 오빠 레오폴트 2세[59] 영국 엿먹이는 거 자체가 목적이 될 순 없겠냐 반문할 수 있겠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그리 받아들였지만 정치학적으로 보면 라이벌이 개쪽당하는 건 기분은 좋겠지만 라이벌의 손해가 우리 편의 실익, 득점으로 이어져야지 그게 아니면 그냥 기분만 좋을 뿐이다. 프랑스 입장에서 미국 독립전쟁 개입은 바로 이렇게 기분 좋아지고 막상 실익으로 연결된 건 하나도 없었다.[60] 당시 유럽에서 이러한 왕권문제를 유일하게 해결한건 영국이었는데 영국은 정복왕조인 노르만왕조로 성립했기 때문에 왕권이 중세치고는 매우 강했으며 근대에 와서는 성장한 부르주아 세력과 타협, 왕이 자본의 이권을 조정하고 보장해주는 존재로 변신하였다.[61] 헌금이나 기부금 등으로 재산이 계속 유입되는 데 비해 성직자들이 결혼하여 자손을 만들지는 못하므로, 상속 등으로 유출되지는 않는 특성상 가톨릭교회에는 필연적으로 재산이 축적된다. 프랑스 대혁명의 '흑역사'로 평가되는 방데 전쟁 역시 그 원인을 따져 보면 프랑스 혁명정부가 교회 재산과 관련해서 취한 정책들의 실패도 한몫했다는 지적이 있다.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뀐 뒤에도 고질적 재정 부족을 감당할 길이 없기도 했고 종교 권력 역시 구체제(앙시앵 레짐)의 상위를 구성하는 집단이었느니만큼 그에 대해 손보려고 한 것인데 그게 부작용을 일으킨 것. 항목 참조.[62] 여전히 근대적 중앙집권 권력 자체가 없었던 중세, 특히 교황권의 전성기였던 중세 성기에 이런 일을 벌였다면 "오냐 ㅅㅂ것아 성하한테 꼰질러서 너 파문먹이고 니 휘하 봉신(봉건제후)들 전부 다 너랑 손절하라고 방송보낼 테니 모가지 씻으면서 대기타고 있든지, 싫으면 알아서 빤스만 입고 대가리 박아라!"라는 대답이 나왔을 것이다. 왜냐하면 봉건제도에서 국왕의 지배력은 제후들의 충성을 받아야 유지 가능한 것이었기에 파문에 의한 통치명분의 상실은 그만큼 국왕에게 치명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국왕도 대가리 박고 똥꼬쑈하게 만들 수 있는 봉건귀족, 교회 같은 다른 권력집단을 박살내며 성장한 게 17-18세기 유럽의 소위 '절대왕정'이란 체제고, 이 과정의 중심엔 다른 나라 군주도 아니고 바로 루이 16세의 전임자들인 앙리 4세, 루이 13세, 루이 14세 같은 프랑스의 왕들이 있었다. 원랜 유럽 기준에서도 가장 중앙집권화된 왕실 권력이 일찍 출현했고 그 위세도 강력했던 프랑스에서 대혁명과 국왕을 죄인으로서 국가의 이름 아래 모가지 자르고 최초의 근대적 국민주권을 법적으로 공표한 공화국이 출현했다는 우연 아닌 우연은 이런 장기적인 역사적 배경을 살펴봐야 한다. 그리고 교황이라고 무소불위는 아니라서 왕이나 황제가 힘만 있으면 교황도 무릎 꿇게 만들 수 있었다. 아비뇽 유수가 대표적인 사례로 이런 배경을 가지고 프랑스는 신성 로마 제국과 더불어 가톨릭 입장에서 슈퍼을로 군림할 수 있었다.[63] 성전 기사단이 악마 숭배집단으로 몰려 해산된 것도 기사단이 축적한 재산을 당시 국왕인 필리프 4세가 노렸기 때문이다.[64] 사실 성전 기사단의 가장 큰 수입원은 바로 유럽 각국에 돈을 빌려주었던 금융업이었고 이로 인해 성전 기사단은 어마어마한 부를 쌓을 수 있었다.[65] 이에 대한 반론으로 <중세 초중기에는 오히려 교황의 권위는 형편없었다. 예시로 카노사의 굴욕의 주인공 하인리히 4세의 아버지, 하인리히 3세는 10년의 재위기간동안 3명의 교황을 갈아치웠다. 하인리히 4세도 저 사건을 겪인 했지만 끝내 복수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보름스 협약으로 교도권이 강해지지만 이건 하인리히 4세의 아들인 하인리히 5세 대의 일이다.> 와 같은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는데, 이는 논지를 잘못 파악한 것이다. 소위 교황권의 전성기라 하는 중세 성기, 서유럽권에서 교도권과 (군주와 영주들이 가진) 세속권력은 서로 협력적이면서도 동시에 견제하며 주도권 다툼을 벌이는 관계였던 것이다. 당장 반론 내용에서도 보듯, 하인리히 3세 시절에는 황제에 의해 교황이 연달아 갈아치워질 정도로 세속권력의 우위가 확실했지만 4세 시절에는 서로 한방씩 먹이는데 성공할 정도로 교황권의 성장이 만만찮아졌고, 5세 시기에 이르러서는 숙원하던 사제 서임권을 얻어냄으로써 교황권의 절정으로 한발짝 다가가게 된 것이 중세 성기의 정치적 상황인 것이다. 말하자면 교황은 군주라 해도 상당한 정치적 위험에 빠트릴 수 있을만큼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지만, 반대로 이를 잘못 행사할 경우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세속 군주에게 보복당할 수도 있는 경쟁관계에 있던 것이 중세 교권 전성기의 상황인 것. 이에 비해 루이 16세 시절과 같은 근세 후기에 교회(교황)의 범국가적 영향력이 실추되었다는 것은, 후술된 바와 같이 중앙집권화된 권력을 가진 군주들로써는 교황이 뭐라 하든 그 영향을 이전에 비해 훨씬 덜 받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제왕들은 더이상 교황의 영향력을 신경쓰고 경쟁할 필요가 크게 줄어든 것이다. 애초에 해당 '반론' 자체가 '중세 교황권 전성기에는 왕이건 황제건 모두 교황 앞에서는 벌벌 떨었다'식의 잘못된 이해에 대해서나 유효한 반론이지, 중세에 비해서도 더 실추된 근세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에 대한 반론으로는 부적절하다.[66] 말하자면, 교회 과세에 대해 교황에게 압박당할 경우 "교황이 뭔데 프랑스 국내 문제에 참견해서 프랑스 왕을 협박하냐!"는 국내 여론을 이끌어내어 교황의 압박을 버티기 쉬웠을 것이다.[67] Gallicanism. 쉽게 말해서 프랑스의 세속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왕권이 교권보다 우선한다는 사고 방식이다.[68] 루이 16세의 현조부인 루이 14세의 아버지다. 루이 14세는 증손자에게 왕위를 물려줄 정도로 오래 산 걸로 유명하고 루이 15세도 당시 기준으론 상당히 장수해서 그런지, 루이 14세와 루이 16세 사이의 왕은 루이 15세 단 한명 뿐인데 항렬은 5세대를 넘어간다.[69] 18세기 후반에는 심지어 이전까진 거의 전적으로 스페인, 포르투갈, 이베리아 세력들 전담 특기였던 유럽 외 세계선교마저도 슬슬 하나둘씩 프랑스발 선교회, 선교사들이 꿰차기 시작하던 시점이다[70] 유럽의 많은 절대왕정기 군주들은 시민+지식인 세력을 양성하여 대귀족과 교회의 세력을 억제했다.[71] 따지고 보면 루이 15세 역시 왕이 될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즉위했고, 리더십 부족이 심각한 문제점으로 지적받았다는 점에서 16세와 비슷한 케이스이기는 하다. 이 점에서 보면 상기된 내용에서는 <루이 16세의 치세는 이전 2대동안 강화된 왕권으로 그 부산물인 재정문제를 처리할 턴>이었다고 서술되어 있지만, 실상은 루이 15세 시기가 재정문제를 처리할 최적의 턴이었다고 볼 여지도 크다. 루이 14세 시기에 강화된 왕권으로 15세 시기에 재정문제를 처리해 버렸으면 16세의 치세는 훨씬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루이 15세 역시 재정문제를 처리하기에는 영 걸맞지 않은 성격이었고, 이 때문에 자기 턴에 부여받은 필수 미션을 처리하지 않고 내버려둔 상태에서 턴 종료를 눌러버린 것이다. 결국 이 필수 달성과제는 루이 16세의 턴으로 그대로 넘어왔고, 따라서 루이 16세는 15세 당시보다 훨씬 어려운 조건(14세 시대에 이미 파탄에 이른 재정이 15세 시대에 더 망가졌으며, 14세 시대에 확 찍어눌러두었던 귀족들의 세력은 15세 시기에 어느 정도 다시 확대되었다.)에서 이 필수미션을 수행하지 못하여 게임 오버에 이르렀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72]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의 장녀.[73] 숙부 샤를 10세의 장남으로 친사촌이다.[74] 요절한 루이 16세의 형 루이 조제프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리고 이 루이 16세의 아들 루이 조제프도 척추성 결핵에 걸려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75] 이런 인식은 비단 일반 시민들에게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루이 16세가 파리로 돌아오자 한 의원이 인권 선언을 인정한다던 당신이 혁명을 배신하고 프랑스 국민을 배반하냐고 비아냥거릴 정도. 혁명정부편에 선 알랭 드 수아송도 이때 파리로 끌려온 국왕 일가의 행렬을 보고 어떻게 이런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르냐며 경악했다.[76] 애초에 국왕의 몸으로 직접 맹세한 인권 선언마저 저버리고 외국으로 도망치려던 시점부터 혁명정부와의 공존 가능성을 완전히 내다버린 셈이고 현행범으로 붙잡히기까지 했으니 내통 혐의도 확실했다. 여기서 루이가 무죄라면 혁명정부가 유죄라는 소린데 결국 혁명을 지지하는 사람 모두가 죽어 마땅한 대역죄인이 될 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이걸 혁명정부측이 두고 볼 리가 없었다.[77] 잘 알려져있지만 크리스토퍼 리 본인은 프랑스에서 집행된 마지막 단두대 공개처형을 직접 보았다[78] 보병을 2열로 배치시킨 후, 전의 1열이 사격하고 재장전하는 시간적 공백 사이에 후의 1열이 사격. 이것을 반복하면 그 당시에는 생각하기 힘들었던 연사가 가능해진다. 사실 활이나 석궁 등에서 활용되었던 전술이며, 정확한 제식이 필요하다.[79] 자유주의, 민주주의, 공화주의,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속화였다.[80] 중국의 역사에서도 비슷하게 짐승의 발 요리때문에 죽게 된 왕의 이야기가 절묘하게 비슷한 사례가 있는데 춘추시대의 초성왕의 사례이다,태자를 교체하려다가 아들이 선수를 치는 바람에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었는데 죽기전에 마지막 소원이라고 한 말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곰 발바닥 요리를 먹고 죽고 싶구나."라는 말을 했는데 사실은 성왕의 속내는 며칠씩 삶아야 하는 웅장의 특성을 이용해서 지방의 진압군이 달려올 때까지 시간을 벌려는 것이었는데, 태자가 바보도 아니고서야 바로 그 뜻을 알아챘고, "곰 발바닥은 익히기가 힘들지 않소!"라는 말로 반박하고 이를 거절했으며 시간을 끌 도리가 없게 된 성왕은 흰 비단으로 목을 매어 자살했다는 이야기,이 이야기도 비슷하게 발 요리가 시간이 많이 걸리는것과 관련이 있는데 다만 이쪽은 먹기 위해서 시간을 허비한게 아니라 먹고싶진 않은데 일부러 시간을 끌기위한 수단으로 언급했다가 실패한 케이스.[81] 정작 비슷한 시기의 사람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다른 여러 외국어에 능했음에도 오직 영어만 몰라서, 세인트헬레나 섬에서의 귀양 생활 중에 틀린 영어 문법으로 정신승리하기도 했다.[82] 이모 마리아 아말리아의 아들들.[83] 고모 루이즈 엘리자베트파르마 공작 필리포 1세의 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