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se des Tuileries
Prise du Palais des Tuileries 1792 Jean Duplessis-Bertaux(1747-1819)가 1793년에 그린 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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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혁명의 중요 분기점이 된 사건. 이 사건으로 프랑스 혁명은 영국의 명예 혁명과 같은 입헌군주혁명의 길에서 공화혁명으로 방향을 틀게 된다.2. 전개
1792년 4월 프랑스 혁명의 전파를 우려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연합군을 결성하여 프랑스로 침공하면서 프랑스 혁명 전쟁이 발발했다. 라파예트 등이 지휘하는 국민군은 괴멸 직전의 상황에까지 몰렸고, 입법의회는 국민들의 애국심에 호소하여 의용군을 모집했다. 그러나 자코뱅주의자 등의 왕정폐지론자들과 과격 혁명가들은 이것을 기회로 삼아 시민봉기를 일으키려는 생각을 하게 된다.그런 가운데 파리 시민들 사이에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군이 프랑스를 점령하면 혁명의 성과가 모두 수포로 돌아갈 것이라는 위기감이 돌았고, 국왕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외국군에 정보를 누설하고 있다는 소문도 나돌아 파리의 민심은 점점 흉흉해지고 있었다. 특히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친정이 다름아닌 오스트리아라서 시민들이 그렇게 의심하는 건 당연했고, 그러잖아도 봉기 1년전인 1791년 국왕 일가의 탈출사건(바렌 사건)탓에 국왕과 시민 사이의 불신의 골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2.1. 발발
1792년 8월 9일, 파리의 과격 혁명가들이 파리 시청을 급습해 장악하고 코뮌 결성을 선언했다. 이어 그들은 파리 전 지구의 시민들에게 전면봉기를 촉구하면서 다음날 8월 10일 봉기가 시작되었다. 수만의 파리 시민들은 루이 16세 일가가 머무르고 있는 튈르리 궁으로 쳐들어가는 한편, 파리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던 국민군 사령관 망다를 살해하는 등 혼란한 상황이 이어졌다.루이 16세의 직속 근위대조차 모두 도주했지만, 스위스 용병 786명은 끝까지 남아 튈르리 궁을 지켰다. 루이 16세가 "그대들은 이미 임무를 다했으니 이제 가도 좋다"라고 명했고, 혁명군도 처음엔 어디까지나 외국인 용병인 스위스 용병에게 원한이 없어서 용병대원들이 단순히 도주하면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스위스 용병들은 모두 전멸하고 만다(이것을 기리기 위해 "빈사의 사자상"이 만들어졌다). 당연히 혁명군 역시 엄청난 피해를 입었기에 이후 용병들의 시신은 매우 심한 사체훼손을 당했다고 한다. 여성들이 그들 시체에서 성기를 잘라서 흔들어댔다는 기록도 있을 만큼 스위스 용병들은 죽은 후 매우 수치스러운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이 사건을 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민중운동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인 인상을 받았고 혁명에 대한 회의를 갖게 된 계기라고 한다. 루이 16세가 그자리에서 스위스 용병들을 지휘했다면 오히려 역으로 폭도들을 몰아냈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장 르누아르 감독이 제작한, 프랑스 혁명을 소재로 한 라 마르세예즈에서도 이를 다룬 장면이 나온다. 군중들이 튈르리 궁을 공격하려 하고 근위대도 도주하려 하지만, 정작 스위스 용병대는 의무를 다하겠다며 자리에 남는다. 한 근위대 장병이 "도망가라는 지휘관의 말 못들었나? 우리와 함께 몸을 피하자."라고 말하자 용병대 장병이 독일어 억양이 섞인 목소리로 "우리는 스위스 용병대다. 스위스 용병은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결코 무기를 버리지 않아. 우리는 절대 도망치거나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단호하게 다짐하는 모습도 나온다. 해당 장면
2.2. 결과
결국 루이 16세 일가는 튈르리 궁을 탈출해 의회에 신변보호를 요청하지만, 국왕 일가가 의회에 있다는 사실을 안 시민들은 의회로 몰려가 국왕 일가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의회는 결국 시민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루이 16세 일가를 시민들에게 넘겨주고 만다. 결국 왕권은 정지되었고 시민들은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탕플 탑에 유폐시킴으로서 봉기가 마무리되었다.1792년 8월 10일 봉기는 프랑스 혁명이 과격화되는 중대 분수령으로 평가받는다. 이 사건 이후, 입헌군주제를 지향하던 입법의회는 붕괴되고 왕정폐지와 공화정 수립을 주장하던 자코뱅주의자들이 집권하는 국민공회 시대를 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