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on Monument.
1. 개요
사자는 자신의 갈기를 깎아지른 절벽 아래의 은신처에 드리웠다. 그는 절벽의 살아있는 돌에서 깎아낸 사자이기 때문이다. 사자의 크기는 웅장했고, 그 자세는 고귀했다. 그 어깨에는 부러진 창이 꽂혀 있는채, 사자는 고개를 숙이고서 그 앞발로 프랑스의 백합을 지키고 있었다. 절벽에 드리운 덩쿨은 바람을 따라 흔들리고, 절벽 위에서 맑은 샘물이 흐르다 저 아래 연못으로 떨어저내렸다. 수련이 핀 연못의 부드러운 표면 위로 사자의 모습이 비쳤다.
그 주변에는 녹음이 우거졌다. 이 곳은 소음과 복잡함과 혼란에서 떨어져 차분한 숲의 구석에서 보호받고 있다. 이 사자가 죽어갈 곳으로는 예쁘장한 철제 난간을 쳐둔 소란스러운 광장의 화강암 받침대가 아니라 이곳이 걸맞았다. 루체른의 사자는 어디에 있던 인상적일 것이다. 하지만 이곳만큼 그의 모습이 인상적일 곳도 없으리라.
- 마크 트웨인, 유럽 방랑기(A Tramp Abroad), 1880
그 주변에는 녹음이 우거졌다. 이 곳은 소음과 복잡함과 혼란에서 떨어져 차분한 숲의 구석에서 보호받고 있다. 이 사자가 죽어갈 곳으로는 예쁘장한 철제 난간을 쳐둔 소란스러운 광장의 화강암 받침대가 아니라 이곳이 걸맞았다. 루체른의 사자는 어디에 있던 인상적일 것이다. 하지만 이곳만큼 그의 모습이 인상적일 곳도 없으리라.
- 마크 트웨인, 유럽 방랑기(A Tramp Abroad), 1880
1821년 덴마크의 조각가 베르텔 토르발센(1770~1844)이 기획하고 루카스 아혼(1789~1856)이 1824년 완성한 작품으로 스위스 루체른에 세워졌으며 1792년 8월 10일 봉기 당시 튈르리 궁을 지키다가 단 한명도 남김없이 전사한 786명의 스위스 근위대를 기리는 조각이다. 사진으로 보면 그리 커 보이지 않지만 저래봬도 길이 10m, 높이 6m에 달하는 대형 조각.
실제 크기가 얼마나 큰지 실감할 수 있는 사진. 처음 사진과 함께 보면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1]
2. 배경
사자는 죽어간 스위스 용병들을 상징하며 심장이 찔렸음에도 부르봉 왕조의 백합 문양이 새겨진 방패를 지키고 있는 것은 왕실에 충성스러운 용병들의 모습을 찬양하는 것이라 한다. 사자상 위에는 "HELVETIORUM FIDEI AC VIRTUTI"라는 라틴어 명문을 새겼는데, '스위스인들의 신의와 용맹에 (바친다)'는 뜻이다.당시 분노한 수만의 파리 군중들이 튈르리 궁으로 진격하던 시점에서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를 지키던 프랑스군 근위대마저 몽땅 도망간 상황이었지만 루이 16세가 고용했던 스위스 용병들은 단 한 명도 이탈하지 않고 혁명군에 맞서 왕을 지키다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힌 상태에서 처형당했다.
고용주인 루이 16세가 "그대들은 이만 철수해도 좋다"고 해산을 명령하였으나 이 명령서는 전투가 한창인 중에야 뒤늦게 도착했다. 해산 명령을 확인한 후에도 방어가 무너지기 직전에 가서야 항복을 택했고, 사실상 패배의 순간까지 싸운 것이다. 해산 명령을 듣고도 싸웠다는 것은 과장이지만, 적어도 이미 시작된 전투에서 도망치지는 않았다
혁명 정부와 군중들도 굳이 외국인 용병인 이들을 죽일 의향은 없어서 조용히 떠나면 그냥 보내줄 생각이었기에 항복부터 권했고, 그렇지 않아도 루이 16세의 뜻대로 따랐으면 살 수 있었다. 아무리 분노한 군중들이라지만 이들이 엄연히 외국인이고, 단지 왕의 경호만 담당할 뿐 지배계급이 아니라 자기들과 같은 처지에서 가난을 벗어나려고, 혹은 굶주리는 가족을 보다 못해 용병이 됐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항복한 왕국군을 마구잡이로 처형하던 혁명군의 행각을 보아온 스위스 용병대는 이 안전 보장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해산 명령이 오기 전이었기에 이들이 명예를 저버리고 도망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항복해도 횟김에 처형당할 판이니...
전사자들 중 품 유서에, 만일 그들의 신의를 저버리고 도망친다면 자신은 물론 이후 그들의 후손들 역시 신의를 잃어 용병으로서 일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언급이 나온다. 하물며 혁명군의 항복 권유를 믿을 수도 없으니 이들이 항복을 택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루이 16세의 해산 명령이 하달된 후에도 용병대는 전투 중 도주할 생각이 없었기에 혁명군이 궁전 내로 쇄도할 정도로 방어가 무너진 후에야 뒤늦게 항복했다. 그러나, 용병대와의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어 분노한 혁명군은 그대로 항복한 포로들을 죽여버렸다.
스위스 용병의 신의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코 디 로마 때 전멸한 스위스 근위대의 이야기와 함께 자주 언급되는 일화인데, 당시 스위스인들은 용병업이나 알프스 산맥에서의 숙박업 외에 특별히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용병으로서 전장에서 돈을 벌어야만 가족을 부양할 수 있었다. 그들이 도망가고 신용을 잃어 더 이상 용병일을 할 수 없게 되는 순간 가족들의 삶이 어떻게 될지 생각한다면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루이 16세의 해산령은 너무 늦게 전달되었기 때문에 이들은 적어도 해당 명령이 하달되기 전까진 싸워야 했으며, 해산령이 전달된 후에도 민중들이 고용주에게 명백한 적의를 드러내고 있는 상황에서 갑자기 철수해버리는 것은 무리였다. 고용주가 죽기라도 하면 적전도주가 아니었다고 증명해줄 사람이 없을 뿐더러, 설령 다른 증인이 있다고 해도 '스위스 용병 역사상 처음으로 적과 싸우기를 포기하고 고용주를 죽게 내버려둔' 불명예는 여전히 남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귀국해도 당연히 단체로 업계 영구 퇴출감이니, 고용주가 어찌되든 말든 나몰라라 하고 떠나기에는 스위스 용병들에겐 잃을 명성이 너무 컸던 것이다. 하다못해 이 혁명군이 포로를 마구잡이로 죽이기로 악명이 자자했으니 목숨 부지하자고 항복하기도 곤란했다.
숫적으로 압도적인 데다 대포까지 끌고 온 군중들이 당연히 스위스 용병들을 이기고 루이 16세를 끌어냈지만, 이 과정에서 용병들은 해산령이 하달된 후에도 최후까지 방어를 각오했기에 혁명군도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그렇게 해산령이 하달되기 전 까지 루이 16세를 지키기 위해 정말 단 한 명도 항복하지 않고 싸웠으며 이 과정에서 군중들도 수백여 명이 죽어나갔기에 말 그대로 궁전 일대가 피로 물들었고, 스위스 용병대는 해산령 전달 이후 궁전이 풍비박산 날쯤에야 뒤늦게 항복했다.
워낙 큰 손실을 보았기 때문인지 혁명군은 항복한 용병들을 전부 처형했다. 게다가 분노한 죽은 군중의 유족들이 몰려와 죽은 용병의 시신을 난도질하고 옷을 벗겨 거리에 매달고 반토막내기도 하고 신체부위를 잘라내서 거리에 매달아둘 정도였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회고하길 당시 여자들이 스위스 근위대의 성기를 잘라 매달았기에 기분이 매우 불쾌했다고 한다. 귀족이나 왕의 정규 군인도 아니고, 민중학살에 가담한 자들도 아닌 외국인 용병들이 받을 대우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혁명의 광기들이 나폴레옹이 혁명에 질리게 만든 계기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추측도 있다. 나폴레옹은 국왕이 스위스 근위대를 제대로 지휘만 했다면 무도한 폭도들을 몰아낼 수 있었을 거라고 평하기도 했다. 실제로 나폴레옹은 평생 민중봉기를 두려워했고, 정권을 잡은 뒤에는 프랑스에서 최대한 혁명색을 빼내려 노력했다.
장 르누아르 감독이 제작한, 프랑스 혁명을 소재로 한 라 마르세예즈에서도 이를 다룬 장면이 나온다. 군중들이 튈르리 궁을 공격하려 하고 근위대도 도주하려 하지만, 정작 스위스 용병대는 의무를 다하겠다며 자리에 남는다. 한 근위대 장병이 '도망가라는 지휘관의 말 못들었나? 우리와 함께 몸을 피하자'라고 말하자 용병대 장병이 독일어 억양이 섞인 목소리로 '우리는 스위스 용병이다. 스위스 용병은 살아있는 한 무기를 버리지 않는다. 우리에겐 그런 치욕을 당할 여유가 없다. 우리에겐 도망도 항복도 있을 수 없다!'라고 단호하게 대꾸하는 모습도 나온다. 해당 장면
이후에도 스위스 용병들은 계약을 유지했다. 프랑스의 정부가 바뀌자 바로 그 정부에 용병을 보냈던 것이다. 뒤이어 나폴레옹과 계약을 갱신한 스위스 용병들은 러시아 원정에서 7천 명이 7백 명으로 줄어드는 순간까지도 전장을 이탈하지 않고, 나폴레옹이 철군한 뒤에야 함께 스위스로 돌아왔다. 나폴레옹을 배신하는 순간 받을 보복도 보복이지만, 전장을 이탈하는 순간 자손들은 용병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현실이 아닌 전설이 된 것은 스위스가 용병업 및 자국민의 타국 군대 입대를 아예 금지한 뒤의 일이다.[2]
3. 신화와 재확인
스위스 용병의 전문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로 알려졌으며, 후대에 여러 교차검증으로 그들의 전문성은 더욱 부여되었다.먼저 스위스 용병대는 말 그대로 돈으로 고용된 용병 관계이며, 정해진 계약은 철저하게 지켜야 하면서도 그 이외에는 지킬 의무도 필요도 없는 이들이었다. 그랬기에 그들은 루이 16세의 해산 명령을 정식으로 받기 전까지 끝까지 싸웠으며, 그들이 전투를 멈춘 것은 루이 16세의 서신을 받고 난 이후였다.
죽을 때까지 고용주를 위해 싸우지 않은 것을 두고, 스위스 용병대의 충성심은 거짓이었다느니, 과장된 것이었다느니 하는 것은 유럽 근대사를 전혀 모르고 하는 아마추어적인 관점에 불과하다. 아무리 옅게 잡아도 16세기부터 유럽의 용병단은 철저한 계약 관계만으로 움직였으며, 그 극적인 예로 1735년 7월 17일까지만 계약이 되어 있었는데 하필 계약 종료 다음 날인 18일 날 적군이 쳐들어오자 미련 없이 전장에서 이탈해버린 용병단이 있었지만 그 누구도 비난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 충성심이니 하는 것은 전혀 존재하지도 않는 개념이었으며, 마키아벨리가 용병단은 집어치우고 시민군을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최소한 근대 유럽까지 용병단은 "계약한 것만 지키면" 전혀 비난도 책임도 지지 않는 이들이었고, 스위스 용병단들은 그런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계약자인 루이 16세의 전투 중지 서신이 오기까지 기다린 것이다.
요컨대 말 그대로 고용주와 맺은 계약을 끝까지 지켰기에 높이 평가를 받는 것이다.
만약 이걸 두고 스위스 용병단의 '배신'이라고 한다면, 주변 국가는 물론이고 프랑스에서조차 스위스 용병단을 다시는 고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 프랑스가 부르봉 왕정의 복고 후 가장 먼저 한 것은 스위스 용병단들의 재고용이었다.
4. 관련 항목
[1] 사진에 있는 빨간색 얼룩은 2009년도 1월 말에 누군가 페인트 테러를 한 것으로, 지금은 깨끗하게 복구되었다고 한다.[2] 유일하게 바티칸에 있는 스위스 근위대는 법적으론 '군대'가 아니라 '경찰' 부대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