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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정희 정부가 추진한 한일기본조약에 대한 비판 문서이다.우선 이 조약은 한미일 삼국의 외교·경제적 필요성에 의해 체결되었다. 특히 한국으로서는 박정희가 계획적인 경제개발을 위해 급하게 돈이 필요하였기에 피해 당사자인 국민의 의견을 묵살한 채 얼렁뚱땅 합의하였고, 그 결과 여전히 배상 문제가 종료되지 않았다고 생각할만한 불씨를 남겼다.[1] 특히 위안부 문제와 같이 추후에 떠오른 대규모 인권 문제까지 발목을 잡는 조약으로 남게 되었는데, 과거사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않고 체결된 한일기본조약의 영향으로 인해 일본 입장에서는 오히려 한국이 이후에도 과거사를 빌미로 억지를 부리고 돈을 갈취하고 있음을 주장할 만한 구실이 생겨나게 되었다.
물론, 위에서 설명했듯 이와 별개로 해당 조약은 법리적 하자 없이 맺어졌다. 대한민국 헌법 제6조에 따라 정식으로 체결된 조약은 국회에서 제정한 법률과 같은 효력을 지니며 입법권[2], 사법권을 구속한다. 또한 해당 조약은 조약으로 성립하는 데 문제되는 그 어떠한 법리적 하자도 없는 상황이므로, 당연히 국제 사회에서는 이 조약이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맺어진 조약으로 인식될 뿐 한국 내의 사정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갖지 않는다.[3] 따라서 당시 정권이 제 3공화국이었으며 이들이 청구권 문제를 해소하는 과정에서 해당 조약으로 정당한 배상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데 그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면 한국 내부에서 해결해야 한다. 왜냐하면 피해자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조약을 체결한 제 3공화국에 책임이 있으며 이를 계승한 제 6공화국이 책임을 질 의무가 있다.[4] 이렇기에 더더욱 해당 조약과 관련해서 박정희 정부에 대한 비판이 끊이질 않는 것이다.
한편, 박정희 정부가 피해자들과 상의도 없이 받은 이 돈을 유용했다는 비판이 계속해서 제기됐다.
게다가 지금까지도 박정희 지지자들은 대(大)를 위한 소(小)의 희생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당시 피해자 및 독립유공자들에 대한 직접 지원은 큰 효과가 어차피 없었으니 현실처럼 사용하는게 경제 발전을 위해 더 나은 방법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치적 지향을 떠나 객관적으로 분명한 것은 경제가 발전한 이후에도 한국 정부는 자국민에게 그러한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그에 따른 보상도 하지 않았으며 피해자 조사 등도 하지 않고 묻어버렸다. 피해자와 독립운동가를 소외시켜버렸다는 역사적 사실은 정부가 아닌 민간단체의 노력에 의해 발굴되었고 결국 현대에 와서 정치와 이념 갈등 문제로 발전하였다.
청구권 자금을 투입해 세운 포스코는 초대 회장인 박태준이 조상의 핏값으로 세운 회사라고 스스로 말했으면서도 정작 2000년대에 피해자들이 이제 기업도 성공했으니 배상금을 좀 해결해달라고 직접 찾아가자 만남을 거부했다.# 기업의 주식이라도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좀 제공했다면 비난 받을 이유가 덜할 테지만, 그런 것도 없이 국영기업의 주식은 국가가 보유하고 있다가 민영화 한다면서 일부를 팔았다.
다만 법원에서 지속적으로 포스코가 배상해야 할 의무가 없다는 판결을 내는 이유는 이미 포스코를 창립할 당시 정부를 통해 유용한 자금 총 1억 1,948만 달러를 포스코의 민영화 완료 후 3조 8,899억원이라는 액수로 정부에 반환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4조에 가까운 거액이 정부에 반환된 이후에 정부에서 어디에 얼마를 썼는지 사용처는 불분명하다.[5] 그리고 2021년 현재까지도 대일 청구권 자금을 유용한 기업, 은행, 공공기관 중 도의적으로 기금을 출연한 곳도 포스코가 유일하다.
또한 일본이 다른 피해국에 비해 한국한테 많은 보상금을 많이 주었다며 은근슬쩍 물타기를 하려는 사람도 있는데, 절대 사실이 아니다. 필리핀, 인도네시아, 미얀마 등은 한국보다 더 많은 보상금을 받았다. 이 국가들이 침탈당한 기간은 한국과는 비교 할수도 없이 짧은데도 말이다. 다만 필리핀과 인도네시아는 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기간에 침공당한것이고 2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인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연합국의 지위로 인정되어 형식상으로나마 패전국인 일본에 대해 승전국의 지위였지만, 한국은 특별상태국의 지위로서 2차 세계대전 당사국이 아닌 식민제국과 식민지 관계였다는 점은 고려해야 한다.
한국은 대대적인 고부가 가치 산업 발전에 크게 성공하여 일본에 시장과 기술이 완전히 종속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6] 비슷한 시기에 일본으로부터 보상금을 받고 교역을 시작한 동남아·태평양 국가들은 철저하게 시장과 기술이 종속되었다. 페로두아, 프로톤 등 동남아의 자동차 산업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이 두 회사는 동남아에서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자동차 회사이지만, 자체 기술력이 전무하고 일본 기업에 종속되어 있는 회사들이다. 일본제 자동차를 앰블럼만 바꿔서 출시하는 수준이다. 사실상 일본이 이들 회사에게 하는 기술 '협력'은 협력이 아니라 '장악을 위한 투자'이다. 일본 회사가 로열티를 챙기는 건 덤. 만약 '협력 관계 회사'가 자체 기술력을 확보하려고 한다면 일본 기업은 온갖 제재와 압박을 가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동남아에 자생하는 자동차 브랜드는 사실상 일본의 하청 회사로서 영향력 아래에 두어 유명무실하게 만들고 일본산 자동차(도요타, 닛산, 혼다 등)가 점점 시장을 장악해나갔다. 이 전략이 제대로 먹혀들어가서 동남아 시장은 일본 기업의 꿀단지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현대자동차가 자체 엔진을 개발하려고 했을 때 미쓰비시는 온갖 제재와 압박을 가했다.# 아예 개발 중단을 위해 경영 일선에 개입하여 내부적으로 방해를 시도하였던 정황도 보였다. 결국 현대자동차는 시장과 기술력을 확보하는데 성공했고, 현재는 미쓰비시와의 관계가 완전히 역전되어 시장 확보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현대자동차가 압도적 우위이고, 미쓰비시 자동차는 현대자동차가 개발한 엔진을 사용하고 있다.
2. 한일기본조약의 근본적 비판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교섭(한일 회담)은 본래 식민지 지배의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이 대등한 관계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어야 했다. 하지만 한일 양국 모두 안보와 경제에 치우친 정치적 타결에 몰두한 나머지, 정작 해결해야 할 식민지 지배의 아픈 과거사를 어떻게 청산하고 극복할 것인지는 전혀 다루지 않았다. 그렇게 과거 청산은 뒤로 묻히고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는 족쇄만이 남게 되었다.
일본은 한일 회담에서 과거 한국을 식민 지배했다는 것에 대한 어떤 사죄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정부는 돈을 줄 테니 과거 식민 지배 보상 청구권을 포기하라는 일본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자 일본은 독립 축하금, 경제 협력 발전 자금이란 명목으로 박정희에게 돈을 건네주었다. 그 결과 일제강점기 시절 입은 피해로 한국이 일본에 요구해오던 과거사 사죄, 배상금 지불 등 모든 것이 박정희 정권에서 추진한 한일 회담으로 청구권이 존재하는지도 불분명한, 혹은 청구권이 존재하더라도 청구권 문제가 해결됨[7]에 따라 영구 포기되었다. 이로 인해 일본 제국에 의한 식민지배 피해를 받은 일본군 위안부, 강제 징용 피해자들은 지금까지도 법적 구제를 받지 못하고 있다.
양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년 9월 8일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 제4조 (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
본조의 규정은 다음의 것(본 협정의 서명일까지 각기 체약국이 취한 특별조치의 대상이 된 것을 제외한다)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a) 일방체약국의 국민으로서 1947년 8월 15일부터 본 협정의 서명일까지 사이에 타방체약국에 거주한 일이 있는 사람의 재산, 권리 및 이익
(b) 일방체약국 및 그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으로서 1945년 8월 15일 이후에 있어서의 통상의 접촉의 과정에 있어 취득되었고 또는 타방체약국의 관할하에 들어오게 된 것.
제2조의 규정에 따르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일방체약국 및 그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으로서 본 협정의 서명일에 타방체약국의 관할하에 있는 것에 대한 조치와 일방체약국 및 그 국민의 타방체약국 및 그 국민에 대한 모든 청구권으로서 동일자 이전에 발생한 사유에 기인하는 것에 관하여는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 -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협정, 1965년 한일협정 내용
구체적으로 영구포기된 청구권에는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다.[8] 이 때문에 배상금을 받기는 커녕 받아야 할 돈조차 못받고 오히려 한일 수교 대가로 돈을 일본에 주었다는 평이다.본조의 규정은 다음의 것(본 협정의 서명일까지 각기 체약국이 취한 특별조치의 대상이 된 것을 제외한다)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a) 일방체약국의 국민으로서 1947년 8월 15일부터 본 협정의 서명일까지 사이에 타방체약국에 거주한 일이 있는 사람의 재산, 권리 및 이익
(b) 일방체약국 및 그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으로서 1945년 8월 15일 이후에 있어서의 통상의 접촉의 과정에 있어 취득되었고 또는 타방체약국의 관할하에 들어오게 된 것.
제2조의 규정에 따르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일방체약국 및 그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으로서 본 협정의 서명일에 타방체약국의 관할하에 있는 것에 대한 조치와 일방체약국 및 그 국민의 타방체약국 및 그 국민에 대한 모든 청구권으로서 동일자 이전에 발생한 사유에 기인하는 것에 관하여는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 -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협정, 1965년 한일협정 내용
1. 일본이 조선은행을 통해 반출해간 금 249,633kg과 은 67,514kg의 반환
2. 1945년 8월 9일 현재 일본 정부의 조선총독부 채무 반제(일체 상환)
3. 1945년 8월 9일 이후 송출해 간 일체의 금품 반환
4. 1945년 8월 9일 현재 한국에 본사(점) 또는 주된 사무소가 있던 법인의 재일 재사 반환
5. 한국인 소유의 일본 국채, 공채, 채권, 피징용자의 미수금 및 보상금 등의 반제(일체 상환)
6. 한국인의 일본 정부 및 일본인에 대한 개별적인 권리 행사
7. 이상의 재산 및 청구권에 따른 과실
8. 이상의 반환 및 결재의 개시 및 종료 시기에 관하여.
2. 1945년 8월 9일 현재 일본 정부의 조선총독부 채무 반제(일체 상환)
3. 1945년 8월 9일 이후 송출해 간 일체의 금품 반환
4. 1945년 8월 9일 현재 한국에 본사(점) 또는 주된 사무소가 있던 법인의 재일 재사 반환
5. 한국인 소유의 일본 국채, 공채, 채권, 피징용자의 미수금 및 보상금 등의 반제(일체 상환)
6. 한국인의 일본 정부 및 일본인에 대한 개별적인 권리 행사
7. 이상의 재산 및 청구권에 따른 과실
8. 이상의 반환 및 결재의 개시 및 종료 시기에 관하여.
박정희 정부가 일본으로부터 받은 유무상 배상은 달러나 엔화가 아니라 현물이었으며 일본산 중고품, 재고품들이 대다수였다. 그마저도 1945년 8월 15일 기준으로 고작 1억 3,800만 달러 가치밖에 안 되었다. 그런데, 위 8개항 중에서 제1항에서만 요구하고 있는 지금과 지은의 가액만 따져 보더라도 1945년 8월 15일 기준으로 1억 4,600만 달러에 이른다는 추산이 있다.[9]. 그에 비해 무상 배상금은 고작 8,300만 달러에 불과한 것이다. 조약의 내용이 무상 자금 3억 달러를 현물로서 10년간 균등 분할하는 것이므로 연리 5%라면 실질적으로는 2억 2,000만 달러이고 이를 1945년 8월 가격으로 환산할 시 8,300만 달러이기 때문이다.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배상은커녕 정당 제2항~제8항에 관해서도 완전히 포기해버렸고 제1항조차 온전히 받아오지 못한 그야말로 굴욕적 협상의 결과물과 다름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 대가로 오늘날 2조 원에 이르는 6,600만 달러를 사비로 꿀꺽했다. 나아가 한일 회담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강제 징용 문제에 대한 일본의 공식적인 사과와 보상에 대한 내용이 결여되어 있고 이에 대한 논의가 이 회담을 이후로 더 이상 없을 것임을 명시하였기 때문에 오늘날 일본의 정치인들과 전범 기업들이 죽어라 물고 늘어지는 "한국의 강제 징용과 다른 문제에 대한 논의는 이미 종결되었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었다.[10] 당시에 중앙정보부장 김종필과 일본 외상 오히라 마사요시 간에 교환되었던 비밀 메모가 대중에 공개되면서 이는 엄청난 반발을 불러왔다(6.3 항쟁). 자세한 건 한일기본조약 항목 참고.
식민통치로 비롯된 반일감정은 별론으로 한다 쳐도 불만을 품고 벌떼같이 일어난 항쟁을 계엄령을 내려 무력으로 강제 진압하고, 일본 정부로부터 받은 식민 지배 배상금을 피해자들에게 지급하지 않은 탓에 상술했듯이 오늘날까지 한일간 역사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근본적 원인을 제공했다. 당시 일본은 대한민국에게 경제 개발 자금을 독립축하금이란 이름으로 제공한 뒤 과거사 문제를 일단락시켰다.[11] 이 돈은 고스란히 국고에 편입되었으며, 일본군 위안부, 정신대 피해자가 일본 정부에게서 배상을 못 받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12]
식민지배와 관련한 모든 청구권을 포기했기 때문에 최근 들어 이탈리아, 영국, 네덜란드 등이 과거 식민지였던 국가들과 피해자들에게 각종 배상을 하는 것과 달리 일본은 한국과 한국인에게 그런 것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처지다.
설상가상 회담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64년은 조선 통신사 조엄[13]이 일본을 방문한 지 2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전세계 다른 어떤 나라도 가지지 못한 성신(誠信) 외교 200주년을 박정희 정부가 일관성 없는 협상 과정에서 말아 먹었으니 그 점도 엄청난 실책이다.
다른 부속 협정인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일본에 거주하는 대한민국 국민의 법적 지위와 대우에 관한 협정 내용은 다음과 같으며, 재일동포의 법적지위 및 영주권 문제 등을 일본 정부가 임의적으로 처벌할 수 있게 해줌으로써 재일동포 관리를 포기한 것이라는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14]
1. 협정영주권 부여(1966.1.17∼71.1.17까지 신청)문제에 관해서 1945년 8월 15일 이전 거주자 및 그 직계비속에 대해 영주권을 부여하고 소위 3세에 대해서는 1991년 1월까지 협의하기로 합의하였다.
2. 퇴거강제 요건에 관해서는 일반범죄 8년 이상의 수형자 등으로 규정하였다.
3. 처우문제에 관해서 최혜국민대우를 보장하고 교육, 생활보험, 국민건강보험에 타당한 고려를 할 것에 합의하였다.
4. 귀국자 재산반출, 송금에 관해서는 일본측은 타당하게 고려할 것에 합의하였다.
2. 퇴거강제 요건에 관해서는 일반범죄 8년 이상의 수형자 등으로 규정하였다.
3. 처우문제에 관해서 최혜국민대우를 보장하고 교육, 생활보험, 국민건강보험에 타당한 고려를 할 것에 합의하였다.
4. 귀국자 재산반출, 송금에 관해서는 일본측은 타당하게 고려할 것에 합의하였다.
또 다른 부속협정인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에서는 약탈 문화재에 대한 반환이 아니라 인도란 표현이 쓰였고, 그나마 돌려받은 문화재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나머지 문화재는 "소유자의 자발적 의지"란 표현이 삽입돼 사실상 포기 선언을 한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일본 정부가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권리인 사유재산에 대해 이런저런 구속을 가하는 것은 헌법상 불가능하다.”(일본 측)
“잘 알고 있다.”(한국 측)
“그렇다면 여기에 적혀있는 ‘권장할 것’이라는 문구는 일본 정부에는 좋을 대로 생각하라는 의미일 뿐이다. 이 문구에 의해 일본 정부가 어떤 조치를 취할 일은 없을 것이고, 또 취할 수도 없다.”(일본 측)
“그래도 괜찮다. 한국 측도 ‘기증되길 희망한다’고 말하고 있으므로 그것을 꼭 받지 않으면 안 된다고 요구하지는 않을 것이다.”(한국 측)
-1965년 6월 18일, 한일협정의 조인을 4일 앞두고 마쓰나가 노부오 외무성 조약과장과 방희 주일대표부 공사 간 대화
“잘 알고 있다.”(한국 측)
“그렇다면 여기에 적혀있는 ‘권장할 것’이라는 문구는 일본 정부에는 좋을 대로 생각하라는 의미일 뿐이다. 이 문구에 의해 일본 정부가 어떤 조치를 취할 일은 없을 것이고, 또 취할 수도 없다.”(일본 측)
“그래도 괜찮다. 한국 측도 ‘기증되길 희망한다’고 말하고 있으므로 그것을 꼭 받지 않으면 안 된다고 요구하지는 않을 것이다.”(한국 측)
-1965년 6월 18일, 한일협정의 조인을 4일 앞두고 마쓰나가 노부오 외무성 조약과장과 방희 주일대표부 공사 간 대화
부속협정 중 하나인 한일어업협정 역시 독도 인근을 공동어로구역으로 설정하여 이후 독도를 둘러싼 여러 갈등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때문에 한일기본조약이 일본에 대한 굴욕외교라는 비판의 근거가 됐다.
더불어 가장 문제시되는 점은 한일 회담과 배상액 그 자체이기보다는 그 돈을 피해자에게 겨우 5%만 주고 나머지는 경제개발이라는 명목하에 정부가 날름 챙겼다는 것이다. 피해자의 상당수가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음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부당한 조치이며, 실제로 배상액이 어떻게 쓰였는지도 확인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 돈이 전부 경제발전에 쓰였는지도 의문이다. 사실 배상액 자체도 문제가 있다.
당시 일본은 3년간 점령했던 필리핀에게도 무상 6억 달러 배상을 하고 국교를 재개했는데, 한국의 경우 35년간 강점 당해 온갖 고초를 당했음에도 무상 3억 달러를 '배상'이 아닌 ‘경제협력자금’이라는 명목으로 받았기 때문에 비교가 되었다. 거기다 한일 회담의 성과액인 무상 3억 달러와 차관 2억 달러 등 5억 달러는 1966년부터 현금으로 들어온 게 아니라 10년 분할로 10년에 걸쳐 물자로 들어왔다. 이때 일본 공장도 몇 개 들어왔는데, 부속품을 일제 사용 조건으로 했기 때문에 한국 경제의 일본 시장으로의 개편 출발이 시작된 것이다. 이래저래 굴욕적인 외교가 아닐 수 없다.
특히 2004년 8월 15일자 <KBS일요스페셜>에서 한일협정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기업에게서 독재정치에 필요한 거액의 자금을 수수했다는 미국 중앙정보국의 보고서를 다뤄 한때 엄청난 파장을 가져왔다.
중앙정보국은 당시 한국 민주공화당이 1961~1965년의 약 4년간 일본의 6개 재벌로부터 6,600만 달러의 정치자금을 제공 받았는데, 이는 4년 간의 민주공화당 총 예산의 3분의 2에 해당했다고 보고하였다. 당시 6,600만 달러는 현재 가치로 백억 단위에 해당하는 거금이다. 이 문건은 1965년 한일 회담 체결을 전후해 전개된 한미일 삼국간의 비밀 협상 과정과 불법 정치자금 수수, 독도 문제 등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것을 독도 밀약이라고 한다.
한일 회담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쪽은 이 회담이 경제개발의 종자돈이 되었다는 논리를 펼치지만, 일제 지배를 겨우 3년 받은 필리핀보다 배상액이 적었다는 점, 배상액이 전액 경제발전 자금으로 쓰였는지 불투명하단 점, 과거사와 정치자금 지원을 대가로 일본 기업에 유리한 조건으로 조약을 체결했다는 점에서 어불성설이다.
日 전후배상 필리핀엔 8억달러…한국 6억달러와 대조
일본에 그렇게 당하고도 동남아에 밀린 한국, 왜?
일본의 전후 보상과 우리의 진로
필리핀의 경우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전쟁 피해국으로 인정됐기 때문에 일본이 군말 없이 줬다는 반박이 있으나, 일본이 아시아 5개국과 제2차 세계 대전 배상 문제를 협상할 때 필리핀 대표단이 본국과 협의도 없이 8억 달러를 요구했는데도 이를 전격 수용했던 것으로 밝혀졌으며 필리핀은 배상금 수령 이후(1956년 5월) 해당 조약을 비준했기 때문에(7월 16일) 별 관련이 없다.
양측은 합의 후 1년 만에 협정 문서에 공식 서명했으므로 굴욕감만 더해줬다. 필리핀 협상단 수석 대표가 제시한 배상금 액수는 총 8억 달러. 한편 해당 내용을 보도한 KBS 일요스페셜은 방송위 '이 달의 좋은 프로그램'으로 선정되었다.# 유튜브
그리고 박정희 정권의 한일기본조약은 총수 일가의 배만 불리고 피해자는 보상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정확히는 피해자를 제외한 소수의 기업에 집중되고, 낙수 효과로 일부가 골고루 혜택으로 주어진 것에 가깝다.
3. 비밀주의와 졸속 추진
박정희 정부는 한일 회담을 일제 35년간의 식민 통치에 대한 보상이라고 선전했지만, 그 협상 내용은 철저히 비밀에 숨겨 피해자들의 항의를 받았다. 한일 협정 문서 공개는 그로부터 약 반 세기가 더 지난 2005년 1월 17일에 이루어졌다. 박정희 정부는 한일 협정 때 강제노동·강제징용된 조선인 피해자들의 개인 청구권이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국민들에게 밝히지 않았다. ##22005년에 공개된 한일 협정 문제는 예상한 대로 개인청구권 문제가 매우 소홀히 취급돼 있었다. 박정희는 정치적 타결에 전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개인청구권 문제를 신경 쓰지 않았다. 개인의 권리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독재권력자의 철학이 작용한 셈이었다. 협상 최종 단계인 1965년 6월 1일부터 6월 22일까지의 회의록도 누락됐다. 즉, 어떤 논의 끝에 한일 양국이 결론에 도달하였고 어떤 법률적 검토가 이루어졌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박정희 정부는 협상 당시에 강제 동원 피해자들의 인적피해보상액으로 3억 6,400만 달러를 요구하였다. # 그런데 협상 결과 피해 보상액은 최종적으로 3억 달러로 책정되었다. 다른 모든 피해 보상 금액을 계산에 넣지 않더라도 어처구니가 없는 결과였다. 배상금이 아닌 독립축하금 명목으로 주어진 일제 35년간 수탈의 대가가 무상 3억 달러였다.
1963년의 '제6차 한일회담 청구권 관계자료'에서 한국정부의 주장에 따르면, 군인과 군속으로 조선인 24만 2,341명, 노동자로 66만 7,648명이 강제 동원되었다고 밝혔다. 피해의 정도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은 액수였다. #2#3
그뿐만이 아니다. 한국 정부의 대일배상요구조서와 민족문제연구소의 조사를 근거로 일본의 무상 3억 달러 지원이 식민지 수탈에 비해서 터무니 없는 작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한국 정부의 대일배상요구조서에 따르면 금융부문에서 일제의 자금 수탈액은 17,429,362,000엔이며 물자수탈액은 9,290,212,685엔이었다. ##2
자금과 물자 수탈액의 각 부문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다음과 같다.
일제의 자금 수탈 > 금융 부문
일본계 유가증권액 : 7,435,103
대출금 : 847,433
대일 환거래 잔고 : 3,020,660
보험금 : 467,336
기타 미수금 : 893,245
체신관계 유출액 : 1,868,660
총계 : 17,429,362(단위 : 천 엔)
일본계 유가증권액 : 7,435,103
대출금 : 847,433
대일 환거래 잔고 : 3,020,660
보험금 : 467,336
기타 미수금 : 893,245
체신관계 유출액 : 1,868,660
총계 : 17,429,362(단위 : 천 엔)
일제의 물자수탈
농산물 > 면화 공출액 : 984,027
축산물 > 우피 공출액 : 33,659,920
축산물 > 축우 공출액 : 203,544,760
축산물 > 군수용 건초 공출액 : 39,145,701
임산물 : 493,057,029
기타 > 전쟁으로 인한 물적 피해액 : 8,430,136,612
기타 > 유기 공출액 : 89,684,635
합계 : 9,290,212,685
농산물 > 면화 공출액 : 984,027
축산물 > 우피 공출액 : 33,659,920
축산물 > 축우 공출액 : 203,544,760
축산물 > 군수용 건초 공출액 : 39,145,701
임산물 : 493,057,029
기타 > 전쟁으로 인한 물적 피해액 : 8,430,136,612
기타 > 유기 공출액 : 89,684,635
합계 : 9,290,212,685
즉, 일제가 국내 착취를 위해 들여온 공채, 보충금, 일본인 민간자본 등을 포함한 총 70억 엔을 합쳐도 일제의 조선 수탈액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며, 나아가 1965년 한일협정으로 받은 무상 3억 달러, 유상과 기타 지원을 합쳐서 7억 달러 정도의 지원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식민 지배로 인해 재정과 금융 부문에서 각각 48억 엔과 303억 엔이 유출되었고, 물자 수탈액 148억 엔의 손실을 보았으므로 한국 입장에서는 타당하지 못한 배상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국제 무대는 엄연한 강대국의 힘의 논리에 따르므로, 그 정도라도 받아낸 것이 어디냐는 주장은 국제연합의 세계 인권 선언과 인도주의적 평화 실현의 기치를 무시하는 주장일 뿐이다.
식민 지배 피해액은 총 599억 엔을 1945년 1달러 당 15엔으로 환산하면 33억 달러가 되고, 1965년 청구권자금으로 받은 무상 3억 달러는 1/10도 안 되는 금액인 것이다. 1962년 당시 환율은 달러 당 360엔이었기 때문에, 3억 달러란 액수를 식민 지배의 배상으로 잘 받았다고 하는 것은 아주 문제가 있는 주장이다.[15]
그밖에 일본인에 의한 한국인 인명 살상 문제도 한일기본조약에서는 다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 남한 대토벌 작전 때 피살자는 최소 17,000여명에 달했으며[16], 3.1 운동 때 사상자 22,000명 이상, 간도 대학살 당시 3,106명 이상[17], 관동대지진 대학살 때는 1,500~2,700명이 죽었다. 제대로 된 국가라면 당연히 일본정부와 협상할 때 추궁했어야 할 내용들이다.
4. 부상자와 생존자 미보상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협상 이후의 박정희 정부의 태도였다. 박정희 정부는 식민 지배 피해자들에게 일본에게서 받은 자금의 일부만 1970년대에 이르러서 겨우 지급했는데[18], 보상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사망자 1인당 30만원의 충격적인 계산이었다. 게다가 생존자와 부상자에게는 주지도 않았다. #5. 조선인 살상자와 강제 동원 피해자에 대한 사죄·배상·진상규명 외면
일제는 남한 대토벌 작전, 3.1 운동, 간도, 간토 대지진 당시 조선인 대학살을 벌였고 일제 치하에서는 치안유지법과 군형법, 소요죄 등 정치형법으로 연행, 구속, 구금, 학대, 고문, 사형된 조선인 피해자들이 수두룩했다. 어디 그 뿐인가. 전시하에 이루어진 강제 연행, 강제 노동, 병력 동원의 진상 조사는 물론이고 희생자와 유족들에게의 사과와 배상조차 없었다. #
많은 조선인 여성을 성노예로 전쟁에 끌고 가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짓밟는 범죄를 저질렀다. 한국인 원폭피해자와 도쿄대공습 당시 한국인 사망자, 사할린 조선인 포로, 군속(군무원)으로 끌려간 조선인들이 전범으로 몰려 사형을 비롯한 중형을 받아 처형되거나 복역된 문제도 있다. 식민지 시기에 일본에서 약탈해서 국내로 가져간 문화재도 있고, 침략전쟁에 동원돼 사망한 조선인들의 유골은 유족에게 반환되지 않고 생사불명으로 처리돼 있다. ##2
박정희 정권은 이 모든 과거사 문제에 대해서 한일 협정 과정에서 진지하게 다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문제를 무시해버리고 일사천리로 협상을 진행시켰다. 이후 일본은 위안부, 강제 동원 피해자들의 소송에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전부 끝났다는 답변만 되풀이하고 있고, 한국 정부는 속수무책이다. #2#3
6. 식민지배 사죄 회피
돈도 문제지만 협정의 성격도 문제였다. 한일 협정은 상술하였듯이 한일기본조약 이외에 청구권 협정 등 4개의 부속 협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협정의 성격은 바로 기본 조약에 담겨 있는데, 한국 국민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히 기본 조약에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 지배에 대한 사죄가 담겨 있어야 했다. 그런데 그런 내용은 전혀 포함되지 않았다. #박정희 정부와 일본 정부는 한일 협정을 그저 한 나라가 두 나라로 분리된 뒤에 서로 국교를 정상화한다는 식으로 처리하였다. 그러니 일본에서는 청구권의 성격(무상 3억달러의 성격)을 독립축하금으로 우겼던 것이다. #2#3
7. 정부 차원의 배상금 횡령
"어제의 원수라 해도 오늘과 내일을 위해 필요하다면 일본 사람과도 손을 잡아야 하는 것이 국민 복리를 도모하는 현명한 대처이다."
박정희, 1965년 6월 23일 대국민 특별담화[19]
박정희, 1965년 6월 23일 대국민 특별담화[19]
거기다 박정희 정부는 일본으로부터 받은 3억 달러를 피해자들에게 주지 않고 횡령하였다.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권은 6.3 항쟁 등 한일협정에 대한 전 국민적 저항을 계엄령을 선포하면서까지 탄압하였다. 그 결과 한국 국민의 자존심과 이익은 철저히 외면당했다. 그 내막은 박정희 정권이 절실하게 돈, 다시 말해서 정치자금이 필요할 정도로 정권이 위기에 내몰렸기 때문이었다. #2
모두가 알다시피 박정희 정권은 한국을 부흥시키기 위한다면서 경제 성장을 제1과제로 내걸었다. 그러면서 굴욕적인 한일 회담 추진을 경제 자금 확보를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라고 합리화하였다. 하지만 그 경제 발전 자금은 상술하였듯이 박정희의 여당인 민주공화당으로 흘러들어갔다. 2005년 공개된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의 문서들이 지적한 것처럼[20] 국민 경제 발전이 아니라 정치 자금 확보를 위한 더러운 협상이었던 것이다.
당시 미국은 소련과의 대결에서 극동아시아 방어선을 시급히 구축하기 위하여 박정희 정권에 배상의 의미가 담긴 청구권을 강조하지 말고 배상총액도 축소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은 미국의 요구를 그대로 이행하였다. 새뮤얼 버거 전 주한미국대사의 미 국무성 전문 보고에 의하면, 박정희 정부는 배상 요구보다 원조를 포함한 일괄 처리에 관심이 있었고, 증거 자료가 없는 일부 청구권의 포기를 먼저 일본에 제안하였다고 한다. ##2#3
문제의 문건 중 가장 주목받은 문건은 '한일관계의 미래'란 제목의 상기된 1966년 3월 18일자 CIA 특별보고서로, 이 보고서를 재인용하면 민주공화당의 불법 정치자금 수수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2#
"일본 기업들이 1961~1965년 사이 민주공화당 총 예산의 2/3을 제공한 바, 각 개별 기업의 지원 금액이 각각 100만 달러에서 2,000만 달러에 이르며 6개의 기업이 총 6,600만 달러를 지원하였다. 민정당은 또한 일본에서 사업을 벌이는 한국 기업에게서도 지불을 받았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정부 방출미 6만 톤을 일본에 수출하는 과정에 개입한 8개의 한국회사가 민정당에 11만 5,000만 달러를 지불하였다."
미 중앙정보국의 보고서 내용은 충격 그 자체였다. 박정희 정부는 군사정변 직후 아직 정식 외교 관계도 수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 기업의 자금을 받아 정부를 수립한 것이나 다름없었다.[21] 이런 검은 돈의 수수에 대한 보상은 굴욕적인 한일 협정 체결을 서두르는 것으로 이어졌다. 일본 정부의 사주를 받은 일본 기업들은 1961년부터 1965년까지 민정당에 지속적으로 정치자금을 제공하였다.
6,600만 달러는 3억 달러의 1/5가 넘는 거액의 불법 자금으로, 이것은 협정 체결 이전에 박정희가 받은 것이다. 따라서, 한일 협정이 굴욕적인 협상이 아니라 '한국의 대표단이 최선을 다한 결과'라거나 한국 정부가 다소 양보하더라도 '경제적 실리란 전략적 선택'을 했다는 일부 평가는 전혀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 정부는 일본으로부터 받은 돈의 일부를 개인 보상에 썼다. 1975년부터 1977년까지, 부상자는 아예 보상에서 제외됐고 징병 사망자 역시 근거 자료를 제출한 사망자에 한해서만 1인당 30만 원씩 총 8,552명에게 25억 7,000만 원을, 재산 피해 7만 4,967건에 대해 66억 2,000만 원을 보상했다. 5%만이 보상금으로 쓰인 것이다. #
경제적 실리를 선택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누구의 실리인가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정권의 실리인지, 국민의 실리인지 말이다. 그 과정에서 국내 반대 여론을 무시하고 계엄령하에서 비준을 강행한 점을 보면 한일 협정의 태생적 한계가 명확히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8. 원폭피해자 문제 미해결
한일협정의 문제는 끝이 없었다.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로 피폭된 조선인은 7만여 명으로, 조선인 피해자 수는 전체 피폭자의 10%에 해당할 정도로 많았다.[22] 조선인 7만여 명 중 4만여 명이 원폭 현장에서 죽었고 2만 3천여 명 정도가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귀국한 2만여 명의 원폭피해자들은 가난과 병고의 악순환에 빠져, 아무런 조치도 받지 못하고 원폭후유증으로 먹고 살기도 힘든 형편에 치료 받을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죽어갔다. #2#3
이 피해자들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을 통해 피폭 치료와 보상의 길이 열리기를 기대했다. 그런데 한일 양국이 맺은 한일 협정에는 원폭피해자에 관한 내용이 단 한 줄도 적혀 있지 않았다. 이에 원폭피해자들은 배상촉구운동을 시작했다. 1967년 서울에서 한국원폭피해자협회를 결성했고, 부산과 경기 평택, 경북 대구, 경남 합천과 마산, 전북 전주에서 지부가 결성됐다. 1967년 11월 4일 회원 20여 명이 일본대사관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이고 행동에 나서지만 일본 정부는 한일협정으로 완전히 해결됐다는 말밖에 되풀이하지 않았다. 박정희 정부는 아예 이들을 무시했다. #
1971년 치료를 받기 위해 일본을 방문한 원폭피해자 손진두의 밀항 사건이 일어나고, 1972년 히로시마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지부 결성, 1978년 3월 일본최고재판소 승소 과정에서 박정희 정부는 원폭 피해자들에 대한 어떠한 구제 조치에도 나서지 않았다. 그 동안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원폭피해자들을 지원한 곳은 한국교회여성연합회가 유일했다. 사할린으로 끌려간 조선인들도 역시 한일청구권협정 보상대상에서 제외됐다. ##2
9. 일본군 위안부 문제 미해결
박정희 정부는 한국이 일본에게 식민지배를 받은 문제를 한일기본조약과 함께 보상을 통해 모두 해결된 것으로 합의하였다. 이 보상은 무상 공여 3억 달러, 장기 저리의 차관 2억 달러, 이외 민간 상업 차관 1억 달러까지 총 6억 달러의 규모였다.그런데 당시 조약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포함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당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사회적으로 이슈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23] 사이트를 보면 그 당시 '위안부'라는 단어의 인식부터 현재와 차이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의 위안부는 현재의 매춘부와 비슷한 뜻으로 주로 미군 위안부를 나타내었으나 1990년대에 본격적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이슈화되면서 위안부라는 단어의 인식이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보상을 받지 못한 관계로 일본이 고노 담화와 아시아여성기금 등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고 박근혜 정부에서도 한일 위안부 합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으나 국민적 공감대를 얻지 못하고 문재인 정부에 들어서 합의는 폐기되었다. 현재까지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한일 양국 간 갈등의 요소로 자리잡고 있다.
10. 사할린 억류자 외면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사할린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게 되고,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하기 전까지 일부 지역을 일본의 영토로 편입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동안 조선인들을 강제로, 혹은 '취업' 명분으로 사할린에 이주시켜 사할린에 매장된 석탄을 캐도록 했다.탄광에서 목숨을 건 힘겨운 노동이 계속되었지만, 일본은 이들에게 약속한 임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거나 강제 저축의 형태로 빼앗기도 했다. 주권을 빼앗긴 나라의 국민들은 '일본인'의 이름으로 징용되었으나, 사할린 땅에 도착해서도 '조선인'에 대한 차별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에게 나라를 잃은 고통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
2차 대전의 패전 이후 일본 정부는 배를 보내 사할린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을 귀국시켰다. 그러나 사할린의 조선인들을 책임져 주는 나라는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냉전이 찾아왔고, 남한 정부는 사할린 동포를 '적국'의 외국인으로 간주했다. 이들은 모든 이의 무관심 속에서 잊힌 존재가 됐다. #
그런데 일본과의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진 1965년 한일 협정에서 박정희 정부는 사할린에 억류된 조선인들을 외면했다. 화태귀환 재일한국인회의 간곡한 요청도 무시했다. 그 결과 일본은 사할린에서 벌인 강제 이주 만행에 대해서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았다. 당연히 사할린 억류자들의 송환·배상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에도 한국 정부가 국가 차원의 보상 요구를 하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할 때, 박정희 정부가 책임져야 할 몫이 적지 않다. ##2#3#4
10.1. 관련 문서
자세한 내용은 일본령 가라후토 문서 참고하십시오.11. 재일조선인 차별문제
패전 당시 일본에는 200만 명 이상의 한국인이 있었다. 당시 한국 인구의 약 10%였다. 이들 대부분은 식민지 시대에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이었다. 일본이 패전한 다음 해에 3/4는 스스로의 힘으로 귀국했다. 그러나 귀국을 원해도 일본에서 재산을 가지고 나가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거나 한반도의 남북분단에 따른 혼란으로 조국에서 살아갈 길이 막막했기 때문에 약 65만 명이 일본에 남았다. 이들과 그 자손이 현재의 재일 한국인이 되었다.한국 정부는 1951년 한일 예비 회담에서 "재일한국인이 일본에 정착하게 된 특수한 역사적 배경을 고려하여 다른 외국인과는 다르게 특수한 법적 지위와 처우가 부여되어야 한다", "이들이 일본에 영주하게 되면 교육, 사회보장, 재산권 등의 수익 및 권리 행사에 있어서 일본 국민과 동일한 처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정부는 재일한국인의 특수한 사정을 인정하는 것은 과거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는 결과가 된다고 생각하여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일한국인들은 일본인과 똑같이 세금을 내면서도 영주권 문제, 강제퇴거문제 등의 사안이 생길 때마다 차별 대우를 받았으며, 취업, 진학, 영업 등에서도 심한 민족적 차별과 불이익을 받아왔다.
한일기본조약의 부속 협정인 재일교포법적지위협정에서 박정희 정부는 이 문제에 대해 일본정부 마음대로 처리하도록 맡겨 버리는 협정을 체결하였다. 그 결과 현재까지 재일조선인들은 여전히 일본사회에서 소외되고 차별받고 있다. ##2
12. 야스쿠니 신사 조선인 합사 문제
국가총동원체제에서 징집, 징용되어 일본 내지와 국외로 끌려간 수십만의 조선인들은 현지에서 죽어서 유골조차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일본 정부가 1951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독립하고 1959년 전사자 유골 송환 작업을 펼치기 시작하자, 일본군으로 끌려가 죽게 된 조선인들의 유골도 일본으로 송환되고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는데, 천황을 위해 죽어서 신이 된 영혼으로 숭배받는 일이 일어났다.통념과 다르게 야스쿠니에 유골 유해는 없다.
하지만 박정희 정부는 한일 회담에서 조선인 전사자 유골 수습, 송환 문제를 무시했고, 그 결과, 전쟁터로 끌려간 사람의 가족들은 그들의 생사도 모른 채 고국에서 애타게 기다리고 찾다가 끝내 만나지 못하고 세월이 흘러 죽고 말았다.
12.1. 관련 문서
자세한 내용은 야스쿠니 신사/논란 문서 참고하십시오.13. 한일기본조약의 실상
13.1. 한일수교회담 문서공개 후속대책 관련 민관공동위원회 의견표명
2005년 8월 26일 노무현 정부는 한일 협정 관련 문서가 공개됨에 따라서 정부의 입장을 명확히 했다. 정부 입장 표명문에는 1965년에 이루어진 한일 회담의 한일청구권협정 대상에서 사할린(시베리아) 억류자와 조선인 원폭 피해자가 포함되지 않았으며, 한국 정부가 수령한 무상 자금 중 상당 금액을 강제 동원 피해자의 구제에 사용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판단된다고 밝혔다. 그 밖에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도 한일청구권협정에 의하여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으며 1965년 한일 회담의 성격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했다. 그리고 강제 동원과 강제 노동 등의 불법 행위에 대한 책임은 여전히 일본 정부와 기업에 있다고 명시하였다.주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한일청구권협정은 기본적으로 일본의 식민지 지배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게 아니었고,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4조에 근거하여 한일 양국 간 재정적, 민사적 채권 및 채무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일청구권협정이 기본적으로 일본의 식민지 지배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4조에 근거해 양국의 채권 및 채무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밝히면서 배상의 성격이 아님을 명확히 했다.
2.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일본정부, 군 등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청구권협정에 의하여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고,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 있다.
국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박정희 정부가 협정을 강행하면서 내부적으로는 '배상'받았다고 주장한 논리를 법적으로 부정한 것이다.
3. 사할린 동포, 원폭피해자 문제가 한일청구권협정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박정희 정부의 한일청구권협정 대상에 식민지배 피해자들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음을 지적했다.
6 청구권협정은 청구권 각 항목별 금액 결정이 아니라 정치협상을 통한 총액 결정 방식으로 타결됐기 때문에, 각 항목별 수령금액을 추정하기 곤란하지만, 한국정부는 수령한 무상자금 중 상당 금액을 강제동원 피해자 구제에 사용해야 할 도의적 책임이 있다고 판단되다.
즉, 일본에게서 무상 자금을 수령한 박정희 정부는 상당 부분을 피해자들에게 제공해야 했지만 그렇지 않고 5%에 달하는 금액만을 지급하면서 국가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것을 지적한다.
14. 야쿠자 개입
15. 비판에 대한 반론
국내의 반대 여론을 수렴하고 설득하는 절차가 결여되어 과정에서 수많은 반대에 부딪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렇게 된 것은 일본 정계의 의사결정 방식과 관련이 있었던 것을 주목해야 한다. 의원내각제의 일본에서는 당시 정계 실력자들의 합의에 따라 중요한 의사결정이 내려지는 경우가 많은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한일 국교정상화 과정은 회담 개최와 결렬 다시 개최하는 과정이 반복되어 세계 외교사를 통틀어 유례가 없을 정도로 줄다리기 협상이었다. 누누히 강조하듯이 일본에게서 받은 막대한 자금은 미국덕분에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당시 반대 여론에 경청하고 수렴해 설득해가는 과정을 거쳤다면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않고 시간만 끌어가는 도움이 되지 않는 동맹으로 판단하여 우리나라가 손해만 보는 상황으로 전개되도록 만드는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반대 여론에는 기술과 자본을 가진 일본에 다시 경제적으로 예속당하는 종속이론에 입각한 공포에 입각한 "반대만을 위한 반대"였다는 측면이 강했다.장면정부 또한 개인 배상 위주로 쓰지 않으려 했다는 정황이 있다. 일본 외무성이 공개한 협상 회의록에 따르면 1961년 5월 10일 협상에서 일본 대표가 "개인(징용노동자)에게 (돈을) 내라고 하는 것인가? 묻자 한국 측이 "국가로 청구하면서 국내에 대한 지불은 국내 조치로 필요한 범위 안에서 다룬다"고 했다고 쓰여 있다.日,외교문서까지 공개 "배상끝나"…"논거 안된다" 반박도(종합)
무엇보다 박정희는 어떻게 대일청구권 자금을 활용하였고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 어떠하였는지 비교해봐야 한다. 유.무상 및 차관을 유용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상상을 하지만 청구권자금을 어떻게 활용하였는지 자금 내역은 아래와 같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청구권자금백서
국가별 대일 청구권 자금 규모와 사용 내역 |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소속으로서 "대일 청구권 자금 활용 사례 연구"보고서를 작성한 연세대 경제학과 김정식 교수는 일본의 청구권자금을 받은 5개국 중에서 한국이 청구권 자금을 가장 최고로 잘 사용하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對日청구권자금의활용사례연구
게다가 당시 정부는 일제에 의한 피해가 입증된 이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하였다.청구권 자금 백서에 의하면 1976년까지 민간인 청구권 보상 금액은 약 86억 7,000만 원으로 청구권자금 중 5.9%이며 이중 징용으로 인한 사망사례 약 9 500여건에 대한 보상액이 약 28억 6,000만 원이다. https://m.bobaedream.co.kr/board/bbs_view/politic/305764/1/1[24]
전현수 경북대 교수는 "나도 한때 한일협정이 굴욕 회담이라는 생각을 가진 때가 있었다"며 "이번에 30,000 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검토하면서 정부가 국익을 대변하기 위해 상당히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평가했다. "협상은 상대가 있는 것인데, 우리 대표단이 액수를 끌어올렸고 국익을 옹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원덕 국민대 교수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1951년) 4조에서 한·일은 양자협상을 통해 미해결 재산 청구권 문제를 교섭하라고 돼있다며 "당시 우리는 일본의 식민 지배에 대해 도의적 배상금을 요구했지만, 국제법적으로는 청구권 협상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한국이 요구하는 보상이나 배상에 대해 일본은 전혀 보상할 의무가 없다고 선을 그었다"며 "당시 일본은 한반도의 식민 지배 35년을 전혀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한일협정 3만5354페이지 전격 공개 '굴욕외교' 논쟁 40년만에 다시 점화
비판자들은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다를 주장하는 것이라는데, 이는 역사적 맥락을 전혀 살펴보지 않은 말에 불과하다. 당시 경제적 상황은 공장이라고는 이른바 삼백산업이라 하는 제분, 제당, 면방직 회사들과 같은 경공업뿐이었고, 기계공업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손톱깎이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공업의 강도와 정밀도를 규정하는 스펙이 존재하지도 않았다.
우리가 받은 것은 정확히 얼마인가?
비판자들은 8억 달러[25]를 전부로 생각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헤아릴 수 없는 액수가 밀려오게 된다. 바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일자리 창출이 시작되던 때에 선진 일본의 자본과 기술이 몰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인 기술자들이 건너와 자국에서 한물 간 많은 기술들을 전수해주고 제품을 만드는 원료나 원료를 가공하는 필요한 것들을 수입하기 시작하고, 기술자들이 전수해준 것을 바탕으로 품질이 날로 향상되는 조립품을 만들어 미국이라는 광대한 시장에 내다 파는 것이 한국의 경제발전 과정이다. 일본과 미국의 자본과 기술을 비교해보면 7:3으로 일본이 앞섰다. 한일 국교정상화 효과는 즉시 나타나 1965년 경제성장률은 7.2%였는데, 1966년 12%로 뛰어올랐다.
이리하여 일본이 만든 부품 소재를 수입해 이를 가공한 제품을 미국에 파는 "태평양 삼각 경제구조"가 성립되었다.[26] 1965년 이래 30년이상 연평균 9.5%가 넘는 경제성장을 달성하여 한세대만에 라디오 보급 사회에서 한집에 자동차 한대씩 보유하는 사회로 변모하는 것을 넘어 3만 달러로 시대로 진입하였다. 일본의 기술이 없었다면 있을 수 없는 성취이다. 오히려 이 성취에 일본이 놀라워한다.
박정희 정부가 받은 청구권 자금에 대한 문제는 무엇인가?
한일수교 불과 몇년전의 국가재건최고회의가 가장 먼저 시행한 것은 공무원 추방이었다. 이때 공무원의 상당수는 촉탁(일을 부탁받은 사람)이었는데 이전 정부의 18%에 해당하는 4만여 명을 추방하였다. 이때까지 현대적인 관료제는 성립되지 않았기에, 일본 정부가 지급한 돈이 일제 피해자들에게 돌아가게 하는 체계적인 행정능력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 정부가 선뜻 보상금을 지급하여 모든 피해자에게 지급하도록 하는 신원 파악 및 집계를 할 수 있는 행정능력이 있을리 없었다. 참고로 현재 대한민국 정부도 베트남 참전자의 신원을 100% 파악할 수 없다. 개인이 보관한 사진이나 전우나 지휘관들의 증언 같은 것들을 이용해 본인 스스로 증명하는 경우도 있다.
제1차 경제개발계획을 발표한 1962년 당시에 인구의 60% 가량이 거주하는 농촌에선 마을의 온 가정이 굶주리는 보릿고개가 일상적인 상황이었고 사정이 나은 도시에만 집계한 공식실업률이 30%였다. 이런 극빈층이 많아 세금이 안 걷혀 원조 농산물을 시장에 판 돈이 국가예산의 절반이었다. 심지어 1965년 한국은 1인당 GDP가 109달러, 2024년 환율로도 고작 1074달러도 되지 않는, 오늘날의 기니비사우, 토고 같은 나라랑 동급 수준인 최빈국이었다. 설령 일제 피해자들에 대한 완벽한 집계가 가능했고 유.무상자금을 일일이 나누어 주었다고 가정해보자.
구매력 없는 매우 가난한 농부들이 가득해 당시 대기업이라봤자 지금 기준으론 구멍가게 수준이이었던 꾀죄죄한 낙후된 시장을 지닌 후진국 사정으로선 개인에게 묵돈을 나누어준들, 근미래에 다시 거지꼴로 내려앉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총수 일가의 배만 불리고 피해자는 보상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전혀 일리에 맞지 않는 않는 주장이다. 재벌들이 첨단사업에 진출해 몸집을 불리게 하고 투자활성화와 일자리 증가라는 국민 모두에게 고도성장이라는 혜택이 골고루 뿌려졌다.[27] 그러니 전 국민 모두가 혜택을 보고 있는 것이며 직간접적으로 보상받은 것이다,
1960년대에 일본에 비하면 5개국은 고만고만한 후진국이었다.[28] 하지만 2020년대 기준으로 1인당 국민소득은 베트남 2,546 달러, 필리핀 3,280 달러, 미얀마 1,490 달러, 인도네시아 4,116 달러로 여전히 후진국 내지는 개발도상국인 반면 대한민국만이 유일하게 30,000 달러를 넘었을 뿐만 아니라 산업면에서 일본과 경쟁하는 선진국으로 발돋움했다. 똑같이 일본에 자금을 받았지만 국가 경영의 차이가 있었기에 이러한 결과를 낳았다고 해도 무방하다.[29] 게다가 타 동남아 국가들에 비해서도 배상금을 적게 받았다는 점을 비판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역으로 해석하면 타 동남아 국가들은 뭘 했길래 그 돈을 적게 받은 한국만도 못한 경제성장을 이루어냈는지 전혀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8억 달러도 결코 적을 수가 없는 돈인게, 1965년 한국은 총 GDP가 31.21억 달러였으니 그 금액은 당시 한국 GDP의 25% 를 뛰어넘는 수준인 어마어마한 거액이다. 덤으로 8억 달러는 2024년 환율로 환산하면 79억 달러에 육박하는 수준이다. 최소치인 5억 달러만 따져도 각각 GDP의 16%/49억 달러 수준이다.
[1] 이때 청년층을 주도로 박정희 정부를 친일파라고 내세우며 시위가 일어났다.[2] 일반적으로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제간의 합의이기에 특별법으로서 효력이 다른 법보다 우선적으로 적용된다.[3] 2015년 한일 위안부 문제 협상 합의의 경우 명문화된 문서가 존재하지 않기에 해당 협약이 법률적 효력을 지닐 수 없음은 한국의 일방적 주장이 아니라 제 3자의 해석으로도 동일하다. 하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한일기본조약이 무효라는 일각의 주장은 일각의 주장이며 제 3자에게 이해와 공감을 구하기 어렵다.[4] 과거에 체결된 조약이라는 이유로 정권의 연속성을 부정하면 애시당초 일본도 일제 제국주의 시절, 즉 과거에 저지른 과오를 일본국이 된 뒤에 배상을 할 이유 자체가 없다. 연속성이 없다면 애초에 일제와 일본국은 별개이기 때문이다.[5] 2006년 시민연대에서 대일청구권 자금을 전용한 모든 기업 및 공공기관에 답변요구서를 제출했는데 이때 포스코, 한국도로공사, 코레일, 수자원 공사는 반환 완료라는 답을 했고 다른 기관, 기업들에는 답을 받지 못하였다.[6] 한국은 단 한번도 일본에게 무역 흑자를 본적이 없이 적자만을 보았다. 그리고 핵심기술들이 일본에 종속되어 있다. 이점을 파고들은 일본 정부 때문에 한일 무역 분쟁이 일어났다.[7] 법리적으로는 청구권 자체는 존재하나 일본 정부와 일본의 법인들을 포함한 일본의 국민들은 그러한 청구권에 응할 법적인 의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석할 수 있다. 결국 끝났다는 점은 같다.[8] 청구권자금백서, 경제기획원, 1976, 7~8면[9] 반성 없는 배상, 이열모, 사상계 1965년 6월호, 82면[10] 그래서 정부의 전략은 국가 차원이 아닌 민간 기업 차원에서의 미지불 임금 지급이나 일본 정부의 강제 노동 인정 쪽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그러나 한일 협정에 의하면 민간 기업 차원에서 미지불 임금 문제도 끝났다.[11] 다만 안타깝게도 예전 한국의 국력으로는 제대로 된 사죄와 배상을 기대하기 힘든 형편이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이승만 정권 당시에도 배상을 요구했지만 무시 당한 일이 있었고, 한국에서 일본에 비해 개념 국가라고 칭찬을 듣는 독일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치 독일로서 2차 대전기에 저질렀던 전쟁 범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반성했지만 독일 제국으로서 폴란드와 동아프리카 식민지에서 저질렀던 제국주의적 만행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한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냉혹하지만 결국 국제사회는 힘 있는 놈이 옳다. 그나마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식민 지배에 관한 법적 배상까지 받아낸 한국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여지가 있다. 단지 정부가 배상금을 피해자들에게 지급하지 않고 경제개발에 투입했던 것만 빼면 말이다.[12] 일본 정부는 독립축하금으로 땡쳤는데 피해자들이 배상을 받을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물음이 있는데, 사실 '독립축하금'이라는 이름은 명목상이었고 이 협정에는 분명히 '모든 청구권 문제의 해결'이 명시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모든 청구권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하는 중대한 배상금을 피해자들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정부가 가져가버린 것이다.[13] 고구마를 들고 오신 분이기도 하다.[14] 국가기록원[15]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민족문제연구소, 김민철 외[16] 조선주차군사령부, 조선폭도토벌지, 1913년[17]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1920년[18] 1971년~1972년 3월에 신청을 받았고, 1975년 7월부터 1977년 6월 동안 8만 3519건에 대해서만 인정하여 91억 8,769만 3천원을 보상하였다.[19] 6월 23일은 한일 협정 체결 다음 날이다.[20] 관련 문서들은 1965년 한일 협정 체결을 전후하여 전개된 한미일 3국 간의 비밀 협상 과정과 불법 정치자금 수수, 독도 폭파 문제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21] 8.15 해방 이후 한국과 일본은 국교 단절 상태였다.[22] 한국원폭피해자협회, 1985년[23] 링크된 내용을 보려면 네이버 로그인을 한 뒤 검색 기간을 1920년부터 1965년까지로 설정하고 오른쪽 위 검색창에 '위안부'라고 검색해야 한다.[24] 훗날 참여정부는 보다 많은 피해자들에게 훨씬 증액된 금액으로 보상하였다.[25] 무상 3억 달러+유상 5억 달러[26] K-stat: 한국의 10대 무역국 수출국/수입국 버튼을 누르면 1988년까지 이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27] 재벌을 포함한 전체 기업을 포함한 1인당 기업 자산 증가율은 1968년~82년 평균 39.6%, 1983년~96년 평균 17.5%이며 1997년~2015년에는 2.85%이다.http://www.jayoo.co.kr/news/articleView.html?idxno=4252.[28] 다만 당시 필리핀은 상대적으로 부유했다.[29] 사실 풍부한 원조를 받아온 국가들이 내부의 부정부패 때문에 후진국, 최빈국으로 전락한 경우는 발에 채일 정도로 흔해빠졌다. 가장 극단적인 사례가 모부투 세세 세코의 콩고민주공화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