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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9:35:03

한국 사극/클리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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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등장인물
1.1. 주인공
1.1.1. 선한 주인공1.1.2. 주인공의 고난
1.2. 적대 인물
1.2.1. 악한 적1.2.2. 입체적인 적
1.3. 아역
2. 고증무시·암묵의 룰
2.1. 각본 연출 관련
2.1.1. 전쟁2.1.2. 정치/외교
2.2. 소품 연출 관련
2.2.1. 복식2.2.2. 갑옷2.2.3. 무기2.2.4. 경제2.2.5. 기타2.2.6. 기타 연출 관련
3. 대사

1. 등장인물

1.1. 주인공

1.1.1. 선한 주인공

한국 고대사의 주인공은 완전무결의 선한 모습만 보이는 고결한 인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이러다 보니 시청자들이 오히려 주인공과 대립하는 악역을 더 매력적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태조 왕건》의 주인공은 왕건이지만, 시청자들에게 인기를 끈 캐릭터는 왕건이 아니라 견훤궁예였다. 이는 드라마가 방영될 당시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궁예나 견훤은 인터넷 밈으로 종종 쓰일 정도지만, 왕건은 밈으로 쓰이는 영상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인기가 매우 낮다.[1][2] 견훤은 출중한 영웅의 기질과 다혈질적인 성격의 장단점을 흥미롭게 묘사하면서 막장드라마 같은 가정사와 후계자를 두고 벌어진 내부 갈등 같이 입체적인 면으로, 궁예는 재해석을 통해 자신의 불우한 과거에 대한 보상을 스스로 얻어내겠다는 욕망을 내면에 감추고 억누르면서도 진심으로 백성들을 구하려고 노력하던 영민한 군주에서 권력의 단맛과 허황된 목적에 취해 내면의 어두운 부분을 드러내면서 서서히 광기에 찬 폭군으로 변해가는 모습이 설득력 있게 그려지며 시청자들의 인기를 얻었다. 반면 왕건은 그냥 선하고 고결하게 나오고, 후계자 문제는 짧게 지나가고 내부 갈등도 선의에서 나온 갈등으로만 그려졌다. 그나마 배신한 호족들의 가족들을 학살할 때는 냉혈한처럼 묘사되어 궁예와 겹쳐보인다 할 정도였지만 이때 뿐이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시청자들은 배우 김영철, 서인석의 열연까지 더해져 정말로 진짜 역사인물이 화면에 나와 움직이는 것 같으면서 카리스마와 성격적인 장단점을 여과없이 드러낸 궁예와 견훤을 매력적으로 본 것이다.

이러한 클리셰를 따라가지 않는 경우도 가끔 있는데, 《용의 눈물》, 《무인시대》, 《정도전》, 《황산벌》 등이 대표적이다. 《용의 눈물》의 전반기 주인공인 이성계는 불세출의 장군이자 호걸이지만, 조선 건국과 그 이후에 보여준 행보들을 미화 없이 그대로 보여줬으며, 최후를 다룰 때는 그 역시 자신의 야망을 위해 여러 사람을 희생시키고 원한을 산 인간이었음을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용의 눈물의 진 주인공이라 평가 받는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킬 때 반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객관적으로 묘사했으며, 그의 권력욕과 냉혹함, 호색함이 그대로 드러났다. 옥좌에 오른 뒤 외척들이나 공신들을 숙청하는 대목도 태종 스스로 사람 잡는 거라고 인정할 정도로 솔직하게 그려졌으며, 심지어 태조 실록을 편찬하고 고려사를 개수하는 장면에서는 역사왜곡을 지시하는 장면까지 있다.

《무인시대》는 아예 주인공 5인 중 4명은 권력에 의해 타락한 무인들이며,[3] 나머지 1명은 타락한 악인은 아니나 이상과 현실의 괴리와 한계에 부딪쳐 발버둥치다 비참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정도전》의 경우 주인공 정도전을 개혁가로 나타내면서도 한편으로 정도전의 독선적이고 비타협적인 부분들을 그려냈다.[4] 《황산벌》의 경우 한국 사극에 만연한 민족주의영웅사관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다. 또한 계백은 가족들이 당할 수모를 면하게 해주기 위해서라지만 직접 가족들을 죽였고,[5] 김유신은 병사들의 독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화랑들을 자살돌격을 시켜 죽음으로 내몰아 둘 다 선인과는 거리가 먼 냉정하고 현실적인 지휘관의 모습으로 나온다.[6] 후속작인 평양성에서도 주인공인 거시기는 선악의 구분 없이 살아남기 위해 애를 쓰는 평범한 병졸이며, 김유신도 전작보단 둥근 면이 있지만 여전히 냉정한 지휘관으로 나온다. 고구려 측 주인공인 연남건 또한 호탕한 애국자이긴 하지만 선인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것의 대표적인 예는 《주몽》의 소서노와 《천추태후》의 천추태후, 《근초고왕》의 근초고왕이 있다.

사실 주인공을 선인으로 묘사할 경우 정말로 역사적으로 선한 인물이었다면 선하게 묘사하되 인간적인 단점들도 보여주며, 그것을 극복하거나 성장해가는 모습을 미화나 왜곡 없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게 묘사해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주인공이 악인이라고 무조건 인기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그냥 악인이라서 그렇다는 식으로 얼버무리면 삼류 악역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결국은 캐릭터에 대한 해석과 묘사를 얼마나 입체적으로 만들어내느냐가 핵심이다.

1.1.2. 주인공의 고난

해신》에서 주인공의 노예 생활 파트가 묘사된 이후, 다른 사극에서도 주인공이 일시적으로 노예생활을 하게 되는 묘사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사실 장보고는 기록상으로도 매우 한미한 출신이었기 때문에 소싯적에 노예체험을 잠깐 시켜도 역사적으로도 그리 억지가 아니었는데, 이 클리셰가 일반화되면서 엄연히 금수저 물고 태어났을 사람들까지 자꾸 초반에 노예 체험을 필수요소마냥 겪게 된다. 천민의 설움 및 밑바닥 인생도 경험해봐서 아는 지도자라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한 설정이다. 정작 진짜로 어렸을 때 밑바닥으로 떨어져 고난을 겪다가, 훗날 대성한 미천왕, 고려 현종은 제대로 사극화가 된 적이 없다.

그 외에 《불멸의 이순신》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역적 가문이라는 고증에도 맞지 않는 고난을 덮어씌운 것이 대표적이다. 이순신의 가문인 덕수 이씨는 이순신과 이이의 등장 이전에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일반적인 양반 집안이었으나 이순신과 이이 이후로 명문가로 자리잡은 가문이다. 《광개토태왕》에서 있지도 않은 형 담망과의 왕위 계승 논란과 역시 지겹도록 우려먹는 국상 일당의 반란도 있다. 《선덕여왕》의 경우 선덕여왕이 자신을 죽이려는 칠숙을 피해 몽골 근처의 타클라마칸 사막까지 도망치며 온갖 고생을 하는가 하면 그 실크로드에서 로마인을 만나는 기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1.2. 적대 인물

1.2.1. 악한 적

적대인물의 역사적 의의는 무시되고, 무조건 극악무도한 나쁜 인물로 묘사된다. 게다가 그 방법이 지극히 유치해서 실소를 금치 못할 때가 있다. 특히 이병훈 사극이 그렇다.[7]

이를테면 정순왕후 김씨 같은 경우, 해당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실제론 딱히 악역이라 잘라 말할 수 없지만 정조를 배경으로 한 사극들을 보면 상당한 경우 100% 악역으로 등장한다.[8] 이렇다 보니 사극에서 매력적이고 이중적인 면모를 가진 악역을 찾기란 불가능하다. 처음에 나빠보이는 놈이면 그냥 나쁜 놈.

심지어 정통사극이라고 불리면서 흥행을 나름 거뒀던 불멸의 이순신도 적을 전부 악인으로만 묘사했고 천추태후, 근초고왕, 광개토태왕, 대왕의 꿈 등 한국 정통사극의 참패를 가져온 이 네 개의 드라마도 주인공을 미화하느라 적을 전부 악인으로 묘사했다. 고려 거란 전쟁 역시 입체적인 묘사로 호평받았던 초반부와 다르게 중~후반부에는 적을 전부 악인으로만 묘사했다.

이에 대한 몇 안 되는 예외가 김영현 작가인데, 선덕여왕미실 등 그가 맡은 대부분 드라마에서 악역을 입체적, 매력적으로 그리려는 성향이 강하다.

1.2.2. 입체적인 적

그리고 KBS 대하드라마 중에서도 이런 클리셰를 나름대로 벗어난 작품들이 있다. 대조영의 경우 설인귀, 이해고, 측천무후 등 적대 세력 주요 인물을 매력적으로 그려냈다. 특히 설인귀의 경우 전형적인 고결한 선인 주인공으로 그려진 대조영과 달리 입체적인 캐릭터성을 통해 도리어 주인공을 능가하는 인기를 누려 대조영도 없는 개별 문서가 작성됐을 정도고, 작중 설인귀의 충복이자 가상인물인 조연 홍패도 결코 미워할 수 없는 개그캐릭터로서 지금도 회자된다. 태조 왕건 역시도 선술했듯 궁예나 견훤이 왕건보다 인기가 좋았다.[9] 정도전에서도 이인임이 드라마 초반 인기에 기여할 정도로 매력적인 악역으로서 호평받았고, 그 외에도 정도전의 대업에 반대하던 정몽주 및 온건파 사대부들, 신권 중심 체제에 반대하던 이방원 등을 단순히 악인으로만 묘사하지 않고 꽤나 입체적인 인물들로 표현하였다. 징비록 같은 경우도 주인공인 류성룡이 남인임에도 반대세력인 서인들을 악인으로 묘사하지 않고 사상은 다르지만 나라를 생각하고 애국심이 있는 사람들로 묘사했다. 평가가 엇갈린 고려 거란 전쟁도 초반부는 입체적인 인물묘사를 선보였다.

그리고 과거 정통사극 같은 경우에는 선악 구분이 없는 작품들이 많았었다. 다만 정통사극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적을 전부 악인으로 만드는 작품들이 많아졌다.

1.3. 아역

2. 고증무시·암묵의 룰

2.1. 각본 연출 관련

2.1.1. 전쟁

2.1.2. 정치/외교

2.2. 소품 연출 관련

2.2.1. 복식

2.2.2. 갑옷

2.2.3. 무기

2.2.4. 경제

2.2.5. 기타

2.2.6. 기타 연출 관련

3. 대사


대체로 '정통 사극'의 전형적인 대사들인데 사극의 트렌디화로 최근에는 이런 대사 듣기가 오히려 힘들어졌다. 과거라는 분위기만을 내기 위해서 잠깐잠깐 사용하며, 주인공들의 말투와 억양은 거의 현대어와 다를 게 없다. 오히려 정통 사극 풍의 대사와 억양은 역사를 다룬 영화에서나 엿볼 수 있다 .


[1] 특히 궁예를 연기한 김영철의 경우, 태조 왕건을 제대로 본 적 없거나 인터넷 밈 등으로나 접해봤을 10~20대들에게 궁예로 매우 잘 알려져 있으며, 배우 본인도 이 밈을 즐기고 있다.[2] 실제로 최근 방영된 태조 왕건 유튜브 스트리밍을 본 사람들은 궁예 시절의 태봉이나 후백제 에피소드는 재미있지만, 왕건 즉위 이후 본격적인 고려시대 에피소드로 넘어가면 재미가 크게 줄어든다고 말한다. 주인공과 측근들이 인격적으로 무결하게 그려지다보니, 이야기가 단조로워진다는 것이 큰 이유다.[3] 실제 역사에서도 무신정권 집권자들은 권력을 잡기 전과 후가 확실히 달랐다.[4] 아예 주인공인 정도전이 자기 자신을 괴물이라고 칭하기도 하였고, 자신의 뜻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한해서 철저히 악당이 될 것이라고 선언한다. 특히 이숙번이 자신의 뜻에 반대할 때에 가차없이 응징하던 장면 등으로 이를 상기시킨다.[5] 아예 아내는 어떤 이유를 붙이던 결국 죽으면 뭔 소용이냐는 일침까지 날렸다. 계백이 이름이 남는다 했는데 이 생각을 정면으로 반박한 계백 아내의 대사가 바로 "호랑이는 가죽땜시 뒤지고 인간은 이름 땜시 뒤지는거여! 이 인간아!!!!!"다.[6] 이때 김유신의 대사가 "그래 미칬다. 자슥 죽으라고 보낸 니는 안 미칬나? 제 식구들 쳐 쥑이고 나온 계백이는 제정신이가! 다 미친 기야. 미쳐야 하는 기야. 전쟁은 미친 놈들 짓인 기야! 화랑들을 계속 보내! 꽃은 화려할 때 지는 기야![7] 다만 대장금의 경우에는 의외로 입체적인 묘사를 선보이기도 했다.[8] 노론 음모론을 말한다.[9] 왕건은 이렇다 할 인상적인 밈이 없는 반면 궁예와 견훤은 지금도 인기 밈들이 건재한데다 캐릭터 자체도 궁예는 고결한 영웅이 타락하여 악인이 된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그려냈고, 견훤은 악인보다는 라이벌 포지션으로서 황제로서 인간으로서 장, 단점을 가감없이 보여줬다..[10] 이 경우 분명히 결론을 내릴 수가 없으니 개연성 논쟁이 될 수밖에 없는데, 상식적으로 공주 대접 쪽이 그럴듯한가. 아니면 집에서 수천킬로 떨어진 곳에서 로마인을 만나는 것이 있을 법 한가?[11] 왕의 사랑놀음 때문에 반란군 수장이 군사들 죽이면서 와도 장군들이 손놓고 있었던 적도 있긴 하다.[12] 유럽의 역사를 예로 든다면 일단 신화이기는 하지만 여자 하나 때문에 트로이 전쟁이 일어났고, 모두 일곱 차례 벌어진 이탈리아 전쟁 가운데 4번이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한 프랑스의 라이벌 의식이 발단이 되었다.[13] 실제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이러다가 군단병들이 진짜로 해산되는 바람에 망한 적이 있다.[14] 물론 나아지고는 있으며 유튜브에서도 각종 컨텐츠들이 나오는 등 대중의 관심이 올라가고 있긴 하나, 이걸 방송사가 반영할지는 의문.[15] 고려거란전쟁이 이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려고 했으나, 중요한 대회전급 전투만 그렇게 묘사하고 야전은 모조리 조잡한 난전 개싸움으로 찍어서 시청자들의 큰 반발을 샀다. 특히 작가진이 선배들의 오류를 비난하며 기존 사극 전투신의 악습을 해결하겠다는 상당히 거만하고 패기있는 발언을 해놓고 그 조악한 악습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훨씬 크게 까였다.[16] 전투 상황에 따라 적시에 알맞은 지휘를 하기 위해서는 실시간으로 변하는 전황을 바로바로 파악해야 하는데, 통신 기술이 발전하기 전에는 전령이나 전서구를 보내는 것 외에는 지휘부와 최전선이 서로 연락을 주고받을 수단이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지휘관이 전선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을 경우 적절한 시기에 명령을 내리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옛날 전쟁터의 장군들은 꽤 최전선 가까이에 붙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17] 그리고 과거 전쟁터에서 장교를 할 정도면 징집된 말단 병사와는 달리 평소에도 병법과 무술을 연마하고 좋은 장비를 가진 엘리트 계층인 경우가 많은데, 이들은 졸병과의 전투력 차이가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전선에서 돌파구를 만들거나 망치와 모루 전술에서 망치 역할을 맡는 등 공세적인 행동을 취해야 할 때가 많았다. 그러다보니 고위급 장교라고 해도 상황에 따라서는 직접 칼 들고 뛰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황산대첩 당시의 기록을 보면 이성계가 왜장 아지발도의 투구를 화살로 맞춰 떨궜다느니, 왜장 중 하나가 창을 들고 이성계에게 달려오는 것을 보지 못하자 의형제 이지란이 소리쳐 알렸다느니 하는 말이 나오는데, 당시 이성계는 고려군의 최고 지휘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직접 활 쏘고 칼질하고 다 했다는 걸 의미하는 기록이다. 물론 이성계가 조선의 태조이니만큼 띄워주기 위해 약간의 과장이 들어갔을 수는 있으나, 신립이 여진족과 싸우던 시기에 신립 본인이 직접 화살을 쏘며 돌격했다는 기록이나 원균이 칠천량 해전 직전 장인어른에게 '멀리 있는 왜적은 활로 쏘고 가까이 있으면 철퇴로 죽이면 된다' 운운한 기록 등 최고 지휘관급의 장수들도 직접 싸움에 뛰어드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후대의 기록들도 있기 때문에, 장군이 직접 칼질했다는 기록들을 무조건 뻥이라고 치부하기는 힘들다. 사서에서 조조는 휘하 장졸들과 함께 관도대전에서 오소의 군량고를 지키는 순우경의 수비군을 상대로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치열하게 싸웠다. 그 외에도 서주에서 단양병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들을 수십명 베어가며 탈출했다.[18] 이 때문에 낙동강 전선에서 소대장들은 보통 하루나 이틀만에 전사했고, 사나흘 버티면 많이 버틴 것이며, 한달을 버티면 환갑잔치를 하기도 했다.[19] 실제론 두 양요에서 프랑스, 미군 전사자는 합쳐도 열 명도 채 안 된다.[20] 명량해전 당시 안위의 판옥선에서 백병전이 일어났지 대장선에서 백병전이 일어나진 않았다. 조선군이 도선 백병전을 꽤 자주하긴 했는데 화포로 한번 두들기고, 화전과 궁시로 재차 공격해 확실히 약화시켜 놓은 다음 왜선에 뛰어들었지 처음부터 냅다 백병전을 벌이진 않았다. 애초 영화에선 세키부네들이 너무 크다.[21] 난중일기에 나오는 명량해전에서 조선군 대장선 전사자는 두명이며 조총에 맞아 전사했다.[22] 이 점을 신경쓴다 해도 분명 숨어서 쏘는데 무조건 가슴이나 복부만 피격당한다.[23] 모 사극에선 피 터지는 장면을 촬영할 때 갑옷에 장치를 설치한 뒤 스태프가 몇 미터 거리에서 쏴 터뜨리는 방법을 썼는데, 팔뚝이나 머리에 이 장치를 한다면 단번에 티가 날 것이다. 물론 카메라에는 피격당하는 보조출연자만 나왔다.[24] 이러한 경향은 영화나 드라마 뿐이 아닌 비디오 게임에서도 심하다. 스타크래프트2의 경우 레이너, 타이커스, 워필드 역시 전투 시에는 내리는 걸 확인할 수 있으며, 마앤블이나 스카이림 같은 게임은 투구가 굉장히 중요하게 나타지만 사극이나 워해머, 위쳐등의 창작물이 투구를 안쓰는 이유는 단순히 캐릭터성 강조하기 위함이고 스타2 워필드 역시 블리자드가 절박함을 표현하기위해서 워필드가 히드라와 싸우는 구간에서 바이저를 올리는 부분을 확인 할 수 있다.[25] 고려거란전쟁의 경우 힘써서 만든 장면들에서는 요사 <병제> 등을 세세히 고증해 상당히 괜찮은 무기 고증을 보여주었다. 갑옷이 냉병기를 앞선 시대인 점을 충실히 반영해 거란 병사가 칼이 딜을 못 넣는 고려군의 중갑을 실제 사용했던 곤봉(골타)로 박살내는 장면도 나온다. 향후 사극의 무기 고증 개선이 기대되는 부분.[26] 이 클리셰에서 벗어난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용의 눈물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관료들의 국무회의가 대단히 상세하게 묘사된다. 특히나 태종이 주도하여 세종의 장인이었던 심온을 사사하는 숨가쁜 대목에서도 김종서, 이종무 등을 불러들여 국방 대책을 논의하는 장면을 넣은 것은 칭찬받아 마땅한 부분.[27] 사실 의자왕이나, 선조, 인조, 루이 14세, 하다 못해 네로처럼 일반인들에게 답도 없는 암군으로 알려진 왕들도 사실, 그들의 멍청한 실책으로 알려진 사건과 선택들도 한정된 정보 내에서 상당히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했으나 결과가 따르지 않은 결과물이든지, 의외로 지적인 면모가 있다든지, 나름 한계를 인식하고 상황을 타파하려고 노력했다든지, 무능함이 실제보다 과장됐다든지 하는 경우가 많다.[28] 실제 역사에서는 완전히 정반대다. 당태종이 여왕이라 나라가 어지럽다고 하자 신라 사신은 다만 "예"라고만 답하고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한다.[29] 선역은 아니지만, 같은 드라마의 미실도 당나라 사신이 자신을 모욕하는 말을 하자 반말로 네놈은 나와 대의를 나눌 자격이 없으니 대의를 나누고 싶다면 당 황제인 태종을, 그것도 이름인 이세민이라고 부르며 직접 데려오라고 말한다. 이에 사신이 당나라군에 신라가 짓밟히는 걸 보고 싶냐고 하자 이건 선전포고이니 사신의 목부터 자르면 되겠냐고 물음으로써 사신을 말빨로 완전히 털어 버린다.[30] 21세기를 기준으로 보면 대한민국 정부미국에게 단교통보를 한 거나 다름이 없다.[31] 일본 사극도 고증에 충실하긴 하지만 촌마게를 젊은 배우들이 싫어해서 고증에 철저하지 않는 매체에서 덥수룩한 산발의 낭인으로 설정이 애용된다.[32] 다만, 이 머리는 삼국시대에 한하여 고증오류가 아닐 수도 있다. 양직공도를 보면 신라 사신이 상투+장발로 추측되는 머리를 하고 있다. 머리의 반 가량은 위로 올라간 채 관모에 가려져 있는데, 그 아래로는 머리가 치렁치렁하고 부스스하게 늘어져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이 머리를 한다면 얄짤없이 해괴한 머리로 본다.[33] 귓바퀴에 거는 장신구.[34] 목걸이와 팔찌는 삼국시대에 성행했으나 조선시대에 많이 쇠퇴했다.[35] 사실 청나라를 배경으로 한 중화권 사극들도 고증을 철저히 하지 않는 작품들은 배경이 청나라 초중기인데 청나라 말기 복장이 나오는 오류를 범하는 경우가 많으며, 일본 사극들도 고증을 철저히 하지 않았던 과거의 작품들은 배경이 전국시대에도 시대 초기인데 에도 시대 중후기 복장이 나오는 오류를 범한 경우가 많다.[36] 조선 전기때의 경우에는 활동성을 중요시 여기는 몽골의 영향을 받은 소매 통이 비교적 작은 요선철릭이 많이 유행했다.[37] 이는 청나라를 배경으로 한 중화권 사극에서 만주족 캐릭터들이 취미삼아 한푸를 입는 모습이 나오지 않는 것과도 (완전히 동일선상에 놓을 수는 없지만) 다소 비슷하다. 한족 민족주의자들의 반만주족 성향과 별개로 만주족 전통의상은 한푸에 비해 입기 편하기 때문이다.[38] 주로 가슴 위로 끌어올려서 입는 형태의 치마인 제흉유군(齊胸襦裙)이 제일 많이 나온다. 뿐만 아니라 브이넥 카라티처럼 옷깃이 양쪽으로 열어젖혀있는 번령포(飜領袍)도 많이 나오는 편. 정작 이 번령포의 경우도 한푸가 아니라 돌궐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호복이다.[39] 완전히 다르게 생긴 갑옷을 입고 있음에도 포니테일이라는 이유로 표절을 주장하거나 앞서 말했듯 한국에서 이미 한참 전에 선보인 머리 스타일과 디자인인데 2017년의 중국 드라마 사진만 가져와 2020년의 한국 드라마가 베꼈다고 주장하는 등 상식적으로 황당한 비교가 많다.[40] 단발머리를 묶은 것. 묶은 다발을 위로 반전시키기도 했다.[41] 머리를 고리 모양으로 만들어 비녀로 고정하거나, 떠구지 모양의 둥근 테로 만들어 장식한 머리.[42] 머리 정수리 부근에 두 개의 상투를 솟게 한 것으로, 머리를 늘어뜨리거나, 땋거나, 머리를 두 갈래로 나눈 것을 구부려 얹거나, 둥근 뿔 모양으로 빗어올린 뒤 천으로 고정시키고 늘어뜨리거나, 땋은 머리를 하여 뒤로 늘어뜨리는 등 다양한 유형이 있었다고 한다.[43] 중앙을 높게 올리고 뒷머리를 늘어뜨린 머리.[44] 삼국시대의 얹은머리는 머리를 그대로 올리고 바싹 붙여 틀어올리거나, 땋아서 틀어올렸다.[45] 자연스럽게 늘어뜨린 머리.[46] 머리를 하나로 묶어 뒤로 늘어뜨리고, 일부를 빼내어 양 볼에 늘어뜨린 머리.[47] JTBC사극 나의 나라가 그나마 이걸 신경썼는데, 작중 인교진은 시커먼 치아에 숫검댕을 여기저기 바른 얼굴을 하고, 주변 인물들도 망건을 못쓰고 상투를 대충 틀어서 떡진머리로 나왔다. 근데 이것도 너무 더러워 보인다는 지적에 후기에는 양치질로 숱검댕을 칠한 치아가 하얗게 바뀌었다.[48] 하지만 이런 KBS마저도 붉은 단심에서는 결국 고증에 맞지 않은 끈으로 고정한 대수머리가 등장했다.[49] 하지만 칠적관 자체가 명나라에서 건너온 일종의 한푸의 소품인 것도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에 최근들어 중국의 한복공정에 자칫 빌미를 줄 수도 있다고 생각되었는지, KBS 대하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는 신덕왕후원경왕후가 왕비로 책봉될 때 칠적관을 착용하고 나오지 않았다. 다만 원경왕후의 경우 칠적관만 안 썼을 뿐 적의는 입고 나왔다. 주로 중국소분홍들이 "왜 중국의 소품이 한국 사극에 나오냐, 이건 한국이 우리 중국 껄 훔쳐갔다"라는 말도 안되는 주장을 하고 한국에서도 극단적인 민족주의 성향의 네티즌들이 왜 우리 고유의 한복이 안나오고 중국옷이 나오냐고 격앙하는 경우가 있다.[50] 여인천하왕과 나뿐만 아니라 8,90년대에 방영했던 조선왕조 오백년 시리즈나 한명회, 조광조 같은 사극에서도 고증에 맞지 않게 대수머리가 나왔는데 이 때는 아직 여말선초식 칠적관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을 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한국 사극에서 여말선초식 칠적관이 최초로 등장한 건 용의 눈물때부터였고, 이후 후속작 왕과 비에서도 용의 눈물에서 최초로 고증되어서 선보여진 칠적관과 적의가 재활용되어 나왔었다.[51] 그나마 취침 장면을 찍을 때는 일반 옷차림이긴 하다.[52] 다만 신하들의 경우에는 일과가 끝나면 평상복으로 있는 경우가 많다.[53]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는 왕의 미복차림이 꽤 자주 등장한다.[54] 사극도 아닌 시대 고증 예능 프로그램인 렛츠고 시간탐험대에서 출연자들이 진짜 당대에 신었던 짚신 같은 신발을 신은 바 있는 데, 연기에 집중하기 힘들 정도로 심한 고통을 호소했다.[55] 짚이나 부들같은 유기질 유물이 1500년이 넘는 세월동안 다수 보존된 것은 놀라운 일이다.[56] 다만 과거에는 수염을 그대로 고증한 경우가 많았다.[57] 대개 입욕문화가 없거나 낮은 수준의 문화권에서 이러한 모습을 보인다. 북유럽의 바이킹, 일본과 같이 입욕문화가 있는 문화권에서는 몸의 잔털, 머리카락, 손/발톱 등을 다듬는 문화가 발달되었다. 고대 입욕문화의 끝판왕인 로마는 더 말할 것도 없다.[58] 흔히 한복 하면 떠오르는 의상이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의 한복인 것처럼, 흔히 기모노 하면 떠오르는 의상 또한 에도 시대 중후기와 일본 제국 초기의 기모노다.[59] 다만 한손검으로 무장하고 방패를 든 병종은 삼국시대 (고구려군의 경우 벽화에서도 확인 가능#) 부터 확인이 가능하므로 그렇게 크게 틀린 사항은 아니다. 물론 고려 초기에 환두대도가 아닌 환도 형태의 칼을 든 팽배수가 나온다면 당연히 오류겠지만 말이다.[60] 다만 천추태후도 초반에는 투구를 좀 썼다.[61] 사실 이것도 연출이 게을러서 생긴 일이다. 일부 작품들은 이런 상황을 대비해 배우 머리보다 일부로 큰 투구를 써서 눈가와 콧대를 그림자로 가리게 한 다음 전투가 끝난 순간 투구를 벗으면서 긴 머리칼이 찰랑이며 곱상한 얼굴을 보이는 식의 연출도 많이 사용했는데, 요샌 그냥 귀찮은지 아예 투구없이 등장시키는 걸 보면...[62] 안악 3호분의 대행렬도를 보면 창병이 12명, 부월수가 10명, 창기병이 8명, 궁수가 8명, 검병이 4명이다.[63] 그나마 배경이 조선시대가 아닌 경우에는 당파가 나오지 않는 경우가 절대다수다. 다만 신돈의 경우 배경이 조선시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당파가 나왔다.[64] 1528년 출생, 1588년 사망. 그러니까 임진왜란 바로 전 시대의 사람이다.[65] 추노뿌리깊은 나무에서는 그래도 이 점에 대해 제대로 고증이 들어간 편인데, 뿌리깊은 나무의 경우에는 띠돈으로 허리에 차기도 하고 손으로 들기도 하는데 운검의 경우 손으로 칼을 잡는 경우도 흔했다. 다만 문제는 칼을 두 손으로 받쳐들어야 맞다는 것이지만... 일단 허리춤에 패용하는 것이 나오니 잘 고증했다고 볼 수 있다.[66] 아이러니하게도 일본 작품에 나오는 조선 도검류는 실제 조선시대에는 실전용이 아니라 의장용이었던 양날검 형태가 많다.[67] 다만, 주인공이 중도 수준의 짧은 칼 한자루를 들고 휘두르면 아무래도 모양이 잘 나지 않을테니 칼 길이는 멋을 위한 극적인 허용으로 보는 것이 옳다. 당장 일본 시대극이나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일본도의 경우에도 흔한 우치가타나라기보다는 오오타치에 근접할 정도로 큰 물건들도 자주 표현된다.[68] 이는 일제강점기에 한반도 전통 도검류를 접하기 힘들어지고 조선으로 이주해온 야쿠자들의 일본도나 조선에 주둔하던 일본군신군도를 많이 접하게 되면서 한국인들도 동아시아 도검류 하면 일본도를 떠올리게 된 것이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현존하는 환도 유물 중 일본도와 완전히 다르게 생긴 조선 전기 환도보다 일본도의 영향을 많이 받은 조선 후기 환도가 많은 것 또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69] 칼집이라는 건 유사시를 대비해 날을 항상 날카롭게 관리해야 하는 칼을 보호하기 위함도 있지만 반대로 날카로운 칼에 인명이 상하는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존재한다. 때문에 칼이 딱 들어맞도록 만들며 사극에서 흔히 들리는 철커덕 거리는 소리도 나지 않는다. 뽑을 때 역시 '스릉'따위의 날카로운 소리가 아닌 '스륵' 정도의 조용한 소리가 난다. 반대로 그런 소리가 날 정도로 헐렁하다면 애초에 칼집의 존재 의미가 사라진다. 사실, 칼집도 금속으로 만든 서양 군도나 고대 로마군의 검 같은 경우 뽑을 때 쇠와 쇠가 마찰을 하기 때문에 금속성 소리가 나긴 한다. 그러나 칼집의 소재가 다른 조선 환도나 일본도 같은 경우 정말 뽑을 때 거의 소리가 나지 않는다.[70] 다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반론의 여지가 있는 것이, 우리가 흔히 들을 수 있는 칼뽑는 소리나 칼끼리 맞부딪치는 소리들은 촬영 중에 나는 소리가 아닌 촬영 후 편집과정에서 '일부러 집어넣은 것'이다. 이유는 당연히 박력과 연출. 당장에 칼끼리 칭!챙!창! 하면서 싸우는 소리를 안 넣으면 그냥 쇳덩이 부딪히는 틱!택!탁! 정도의 맥빠지는 소리만 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사실과는 달라도 예술적 허용이라고 볼 수는 있을 것이다.[71] 화포에 발사되는 포탄은 무게와 중력가속도가 합쳐진 충격력으로 목표에 피해를 주는 무기지 목표에 맞아 폭발하여 피해를 고폭탄이 아니다. 물론 비격진천뢰 같이 폭발하는 포탄도 조선시대에 실존했지만 어디까지나 일부에 불과했고, 대부분의 조선시대 포탄, 특히 해상전이나 공성전에서 등장하는 포탄은 폭발하지 않는 평범한 쇠공이었다.[72] 명중한 부분이 예를 들어 성벽이어서 돌 파편으로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 포탄 자체가 터져서 피해를 주는 걸로 묘사된다. 불멸의 이순신에서 전투신을 잘 보자.[73] 그 이전에 명도전, 반량전을 비롯해서 중국돈이 쓰인 흔적은 보인다.[74]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화폐를 사용하려면 농업 생산량이 늘어나고 상업이랑 각종 산업이 발달해야 하는데 이때는 그렇지 못했다. 화폐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조선 후기는 이양법의 확대로 농업 생산량이 증대되어 상업을 비롯한 각종 산업이 발달되니까 화폐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75] 물론 이때도 완전히 활성화된게 아니라 개화기에나 가서야 정착이 되었다.[76] "주막이 등장한 것은 조선 후기(정확하게 말하자면 현종 이후 쯤으로 짐작된다.) 때부터일 것이다. 주막은 상공업의 발달을 전제로 해야 한다. 과연 임진왜란 이전에 지방 곳곳에 주막이 출현할 만큼 상품경제가 발달했을까?" ─ 《조선의 뒷골목 풍경》, 강명관[77] 술도 과음시 지장이 가는 건 맞기에 소량만 준비하거나 아예 물이나 음료수로 술을 대체한다.[78] 잔 다르크를 주인공으로 한 서양 사극에서 잔 다르크가 잔 다르크로 불리는 것도 고증오류인데, 실제로 잔 다르크는 살아생전에 주안 다르크로 불렸다. 현대 프랑스어권의 잔(Jeanne)에 해당하는 중세 프랑스어 이름이 주안(Jehanne)이었기 때문이다.[79] 다만 이계인은 SBS 홍길동에서 냉철한 활빈당 간부역을 했고 이희도는 공주의 남자에서 철저한 모략가인 한명회역을 멋지게 연기했다.[80] 당연히 요즘 나오는 담배인 궐련이 아니라 담뱃대다.[81] 가령 '돌격하라!'를 'かかれ!'가 아니라 '突撃(とつげき)!'라고 쓰면 2차 세계대전에나 쓰일 법한 현대어투가 되어버리는데, 이게 아주 꾸준히 사극에 나와서 왜군의 돌격을 일본군의 반자이 돌격으로 만들어버리고 있다.[82] 그 영향인지 한국에서 중화권 사극을 수입할 때도 전근대 중국에서 황실 여인을 부르는 호칭이었던 냥냥을 해당 호칭으로 불리는 사람이 황후든 후궁이든 간에 전부 마마로 번역한다.[83] 상감마노라, 대전마노라, 세제 마노라 등. 마누라 항목 참조.[84] 조선 후기에 마마가 더 높아지면서 세자빈은 '마마'와 '마노라'로 모두 불렸으며, 다른 왕녀와 왕자는 어릴 때 '아기씨', '자가' 모두 가능했다. 나이가 차면 왕녀는 '공주/옹주/현주/군주 자가', 왕자 및 적왕손은 '대군/군 자가'로 불렸다.[85] 그 영향인지 한국에서 중국이 배경인 중화권 사극을 수입할 때도 황족에 대한 호칭을 마마로 번역한다.[86] 춘향전이 대표적인 예인데 변학도는 서얼이긴 하나 양반의 피가 흐르는 기생 성춘향에게 매추부를 요구했다가 거절하자 감옥에 가뒀다.[87] 다만 예술가로서의 기생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들은 자신의 생업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서양의 르네상스 시대 예술가들처럼 높으신 분들의 경제적 후원이 있어야 가능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팔거나 의뢰를 통한 수고비로 생계를 꾸릴 수 있었지만 기생들은 자신의 작품활동이 경제적 이익으로 직결되진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기생들은 암암리에 매춘을 통한 생계와 재산축적을 하기도 하였다. 기생들의 매춘은 여성의 지위가 낮고 할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던 당시 사회상으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장자연 사건, 미투 운동처럼 여성의 지위가 개선된 오늘날에도 여성 연예인들 및 예술계 여성 종사자들이 성 관련 유혹에 시달리는 것을 본다면 과거엔 말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88] 왈자패, 하급 관리, 돈 많은 평민층.[89] 1970년대까지 제작된 초창기 사극 영화에서는 왕이 점잖은 일상대화투의 서울 방언으로 말하는 경우가 많다.[90] 고려 시대에는 어느 정도 여성의 권리가 인정되어 동등한 재산권 행사나 분방한 성생활이 가능했다. 고려거란전쟁에서 완전히 말아먹은 궐안전쟁 파트를 제외하고 강감찬의 부부관계나 천추태후의 캐릭터를 통해 비교적 적절하게 고증했다. 그러나 이것도 남성과 동등한 역할에서 가정 밖에서 사회 활동이나 권력 행사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91] 대표적으로 조선시대 크라운과 어금니 때운 흔적을 인증한 김명민조진웅, 용의 눈물에서 PEM 어금니에 씌운 걸 인증한 김영란 등이 있다.[92] 대표적으로 미스터 션샤인구동매가 일본어로 자신의 이름을 말할 때 “와타시와 구동매데스(私はグ.ドンメです)”라고 말하는 게 그 예다.[93] 아직 이 때는 창씨개명이 이루어지지 않고 조선인들이 조선식 이름을 갖고 있는 게 허용이 될 때였다.[94] 게다가 이 둘의 경우 올림픽 출전 당시 입고 나온 유니폼에 아예 대놓고 로마자로 각각 “Son Kitei”, “Nan Shoryu”라고까지 적혀 있었다.[95] 다만 중국어를 하는 배역도 간혹 어색한 중국어가 되는 경우가 있긴 하다.[96] 조선시대 이전과 대한제국 시기에는 황상 및 황상폐하로 나왔다. 그리고 '성은'은 '황은'으로 변경.[97] 단, 조선시대 이전(고려 말기 제외)과 대한제국 시기에는 폐하[98] 단, 조선시대 이전(고려 말기 제외)과 대한제국 시기에는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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