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한국 사극
1. 등장인물
1.1. 주인공
1.1.1. 선한 주인공
한국 고대사의 주인공은 완전무결의 선한 모습만 보이는 고결한 인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이러다 보니 시청자들이 오히려 주인공과 대립하는 악역을 더 매력적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태조 왕건》의 주인공은 왕건이지만, 시청자들에게 인기를 끈 캐릭터는 왕건이 아니라 견훤과 궁예였다. 이는 드라마가 방영될 당시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궁예나 견훤은 인터넷 밈으로 종종 쓰일 정도지만, 왕건은 밈으로 쓰이는 영상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인기가 매우 낮다.[1][2] 견훤은 출중한 영웅의 기질과 다혈질적인 성격의 장단점을 흥미롭게 묘사하면서 막장드라마 같은 가정사와 후계자를 두고 벌어진 내부 갈등 같이 입체적인 면으로, 궁예는 재해석을 통해 자신의 불우한 과거에 대한 보상을 스스로 얻어내겠다는 욕망을 내면에 감추고 억누르면서도 진심으로 백성들을 구하려고 노력하던 영민한 군주에서 권력의 단맛과 허황된 목적에 취해 내면의 어두운 부분을 드러내면서 서서히 광기에 찬 폭군으로 변해가는 모습이 설득력 있게 그려지며 시청자들의 인기를 얻었다. 반면 왕건은 그냥 선하고 고결하게 나오고, 후계자 문제는 짧게 지나가고 내부 갈등도 선의에서 나온 갈등으로만 그려졌다. 그나마 배신한 호족들의 가족들을 학살할 때는 냉혈한처럼 묘사되어 궁예와 겹쳐보인다 할 정도였지만 이때 뿐이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시청자들은 배우 김영철, 서인석의 열연까지 더해져 정말로 진짜 역사인물이 화면에 나와 움직이는 것 같으면서 카리스마와 성격적인 장단점을 여과없이 드러낸 궁예와 견훤을 매력적으로 본 것이다.이러한 클리셰를 따라가지 않는 경우도 가끔 있는데, 《용의 눈물》, 《무인시대》, 《정도전》, 《황산벌》 등이 대표적이다. 《용의 눈물》의 전반기 주인공인 이성계는 불세출의 장군이자 호걸이지만, 조선 건국과 그 이후에 보여준 행보들을 미화 없이 그대로 보여줬으며, 최후를 다룰 때는 그 역시 자신의 야망을 위해 여러 사람을 희생시키고 원한을 산 인간이었음을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용의 눈물의 진 주인공이라 평가 받는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킬 때 반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객관적으로 묘사했으며, 그의 권력욕과 냉혹함, 호색함이 그대로 드러났다. 옥좌에 오른 뒤 외척들이나 공신들을 숙청하는 대목도 태종 스스로 사람 잡는 거라고 인정할 정도로 솔직하게 그려졌으며, 심지어 태조 실록을 편찬하고 고려사를 개수하는 장면에서는 역사왜곡을 지시하는 장면까지 있다.
《무인시대》는 아예 주인공 5인 중 4명은 권력에 의해 타락한 무인들이며,[3] 나머지 1명은 타락한 악인은 아니나 이상과 현실의 괴리와 한계에 부딪쳐 발버둥치다 비참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정도전》의 경우 주인공 정도전을 개혁가로 나타내면서도 한편으로 정도전의 독선적이고 비타협적인 부분들을 그려냈다.[4] 《황산벌》의 경우 한국 사극에 만연한 민족주의와 영웅사관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다. 또한 계백은 가족들이 당할 수모를 면하게 해주기 위해서라지만 직접 가족들을 죽였고,[5] 김유신은 병사들의 독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화랑들을 자살돌격을 시켜 죽음으로 내몰아 둘 다 선인과는 거리가 먼 냉정하고 현실적인 지휘관의 모습으로 나온다.[6] 후속작인 평양성에서도 주인공인 거시기는 선악의 구분 없이 살아남기 위해 애를 쓰는 평범한 병졸이며, 김유신도 전작보단 둥근 면이 있지만 여전히 냉정한 지휘관으로 나온다. 고구려 측 주인공인 연남건 또한 호탕한 애국자이긴 하지만 선인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것의 대표적인 예는 《주몽》의 소서노와 《천추태후》의 천추태후, 《근초고왕》의 근초고왕이 있다.
사실 주인공을 선인으로 묘사할 경우 정말로 역사적으로 선한 인물이었다면 선하게 묘사하되 인간적인 단점들도 보여주며, 그것을 극복하거나 성장해가는 모습을 미화나 왜곡 없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게 묘사해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주인공이 악인이라고 무조건 인기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그냥 악인이라서 그렇다는 식으로 얼버무리면 삼류 악역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결국은 캐릭터에 대한 해석과 묘사를 얼마나 입체적으로 만들어내느냐가 핵심이다.
1.1.2. 주인공의 고난
《해신》에서 주인공의 노예 생활 파트가 묘사된 이후, 다른 사극에서도 주인공이 일시적으로 노예생활을 하게 되는 묘사가 등장하기 시작했다.사실 장보고는 기록상으로도 매우 한미한 출신이었기 때문에 소싯적에 노예체험을 잠깐 시켜도 역사적으로도 그리 억지가 아니었는데, 이 클리셰가 일반화되면서 엄연히 금수저 물고 태어났을 사람들까지 자꾸 초반에 노예 체험을 필수요소마냥 겪게 된다. 천민의 설움 및 밑바닥 인생도 경험해봐서 아는 지도자라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한 설정이다. 정작 진짜로 어렸을 때 밑바닥으로 떨어져 고난을 겪다가, 훗날 대성한 미천왕, 고려 현종은 제대로 사극화가 된 적이 없다.
그 외에 《불멸의 이순신》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역적 가문이라는 고증에도 맞지 않는 고난을 덮어씌운 것이 대표적이다. 이순신의 가문인 덕수 이씨는 이순신과 이이의 등장 이전에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일반적인 양반 집안이었으나 이순신과 이이 이후로 명문가로 자리잡은 가문이다. 《광개토태왕》에서 있지도 않은 형 담망과의 왕위 계승 논란과 역시 지겹도록 우려먹는 국상 일당의 반란도 있다. 《선덕여왕》의 경우 선덕여왕이 자신을 죽이려는 칠숙을 피해 몽골 근처의 타클라마칸 사막까지 도망치며 온갖 고생을 하는가 하면 그 실크로드에서 로마인을 만나는 기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1.2. 적대 인물
1.2.1. 악한 적
적대인물의 역사적 의의는 무시되고, 무조건 극악무도한 나쁜 인물로 묘사된다. 게다가 그 방법이 지극히 유치해서 실소를 금치 못할 때가 있다. 특히 이병훈 사극이 그렇다.[7]이를테면 정순왕후 김씨 같은 경우, 해당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실제론 딱히 악역이라 잘라 말할 수 없지만 정조를 배경으로 한 사극들을 보면 상당한 경우 100% 악역으로 등장한다.[8] 이렇다 보니 사극에서 매력적이고 이중적인 면모를 가진 악역을 찾기란 불가능하다. 처음에 나빠보이는 놈이면 그냥 나쁜 놈.
심지어 정통사극이라고 불리면서 흥행을 나름 거뒀던 불멸의 이순신도 적을 전부 악인으로만 묘사했고 천추태후, 근초고왕, 광개토태왕, 대왕의 꿈 등 한국 정통사극의 참패를 가져온 이 네 개의 드라마도 주인공을 미화하느라 적을 전부 악인으로 묘사했다. 고려 거란 전쟁 역시 입체적인 묘사로 호평받았던 초반부와 다르게 중~후반부에는 적을 전부 악인으로만 묘사했다.
이에 대한 몇 안 되는 예외가 김영현 작가인데, 선덕여왕의 미실 등 그가 맡은 대부분 드라마에서 악역을 입체적, 매력적으로 그리려는 성향이 강하다.
1.2.2. 입체적인 적
그리고 KBS 대하드라마 중에서도 이런 클리셰를 나름대로 벗어난 작품들이 있다. 대조영의 경우 설인귀, 이해고, 측천무후 등 적대 세력 주요 인물을 매력적으로 그려냈다. 특히 설인귀의 경우 전형적인 고결한 선인 주인공으로 그려진 대조영과 달리 입체적인 캐릭터성을 통해 도리어 주인공을 능가하는 인기를 누려 대조영도 없는 개별 문서가 작성됐을 정도고, 작중 설인귀의 충복이자 가상인물인 조연 홍패도 결코 미워할 수 없는 개그캐릭터로서 지금도 회자된다. 태조 왕건 역시도 선술했듯 궁예나 견훤이 왕건보다 인기가 좋았다.[9] 정도전에서도 이인임이 드라마 초반 인기에 기여할 정도로 매력적인 악역으로서 호평받았고, 그 외에도 정도전의 대업에 반대하던 정몽주 및 온건파 사대부들, 신권 중심 체제에 반대하던 이방원 등을 단순히 악인으로만 묘사하지 않고 꽤나 입체적인 인물들로 표현하였다. 징비록 같은 경우도 주인공인 류성룡이 남인임에도 반대세력인 서인들을 악인으로 묘사하지 않고 사상은 다르지만 나라를 생각하고 애국심이 있는 사람들로 묘사했다. 평가가 엇갈린 고려 거란 전쟁도 초반부는 입체적인 인물묘사를 선보였다.그리고 과거 정통사극 같은 경우에는 선악 구분이 없는 작품들이 많았었다. 다만 정통사극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적을 전부 악인으로 만드는 작품들이 많아졌다.
1.3. 아역
- 역사적 기록이 부족하기 짝이 없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다루면서도 어린시절부터 다루는데, 본래는 그들의 역사적 행동에 개연성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이지만 어느새 주객전도가 되어서 개연성 따위는 눈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고 단지 아역배우를 통해서 인기를 끌거나 실제로는 없는 드라마를 창조하기 위해서인 목적이 대부분이다. 특히 멜로라인을 어린 시절에 다 만들어버리는데, 특출나게 기록이 남아있는 조선시대 이후의 몇몇 인물들이나 기록이 상대적으로 많은 군주급 인물들 제외하면 어린 시절에 뭐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알 수 없기 때문에 신라의 공주가 예언 때문에 버려져서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자라며 로마 사람까지 만나는 기행을 선보이며 "그럼 궁에서 공주대접 받으면서 편하게 살았다고 쓰인 책이라도 있냐?"고 우기는 식으로 나오기도 하는데, 이런 기록이 없는 건 사실이지만 사막에서 먼 이국 사람을 만났다는 기록도 없다[10]. 게다가 이게 로맨스 RPG가 되어버리는 경우도 대부분이다.
- 출생의 비밀은 기본 클리셰. 위의 '주인공의 고난'과 엮여서 어린 시절에 밑바닥 인생으로 굴러떨어지는 연출은 널리고 널렸다. 《선덕여왕》에서는 주인공이 아예 서역의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자라기도 한다.
2. 고증무시·암묵의 룰
2.1. 각본 연출 관련
2.1.1. 전쟁
- 개인이 수천 단위로 죽어나가는 것은 물론이고, 나라까지도 손쉽게 멸망당할 전쟁이 사극에서는 높으신 분들의 서바이벌 게임이다.[11] 이런 경향은 특히 고대사 사극에서 심한 편인데, 단순히 조연들의 분노나 라이벌 의식으로 가볍게 전쟁이 벌어지는 일도 다반사이다. 물론 인류 역사상 라이벌 의식이 발단이 된 전쟁이 없는 건 아니지만 다른 중요한 요인이 있었음에도 쏙 빼놓는건 비판받아 마땅하다.[12]
- 전쟁이 중심이 되는 사극에서는 시기적 문제를 넘어서 그림이 되는 전쟁 장면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이를 위해서 기록은 무시하고 역사서를 새로 쓰는 한이 있더라도 전투장면은 넣고 본다. 가령 비슷한 시기에 방영한 두 드라마인 《연개소문》의 살수대첩과 《대조영》에서의 안시성 전투는 나올 이유가 없었지만 극 초반에 시청자들을 끌어모으기 위한 수단으로 집어넣었다. 《광개토태왕》의 서막을 장식한 요동성 전투의 경우는 시대 배경, 공간 배경, 등장인물을 싸그리 씹어먹은 대표적인 경우인데, 아예 공격측과 수비측의 자리를 바꾸었다.
- 주인공이 어려운 싸움에 출전하기 전에 연설할 때는 "가기 싫으면 안 가도 좋다"고 외치지만 휘하 장졸들 중 단 한명도 이탈하는 사람은 없다. 한술 더 떠서 사지로 간다고 알려주면서 가기 싫으면 즉시 집으로 돌아가라거나 아예 나를 따르려거든 유지를 남겨라고 엄포를 놓아도 변함이 없다. 충성심을 확인하는 차원이라지만 직속 부장이나 개인 사병들은 몰라도 일반 병사들에게 이러면 죄다 이탈한다.[13] 물론 그 싸움은 90%의 확률로 대승을 거둔다.
- 전투는 무조건 백병전. 진법 전술 그딴거 없다. 정말로 가뭄에 콩 나듯 한두번 나오기는 하지만 그래봤자 보여주기식으로 방진짜서 한번 충돌한 다음 곧바로 적군 아군 할거없이 뒤엉켜서 패싸움을 벌인다. 활이랑 총, 화포 등등이 나와도 역시 몇 번 쏜 다음 바로 우당탕. 보통 공격측이 돌격하고 수비측은 적당히 쏘다가 맞 돌격하는 형식으로 달려가다 화살에 맞건 말건 상대한테 먼저 붙는 게 중요하다. 한국 사극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 제작비 및 인원 부족을 변명으로 할 수도 없는 게 비슷한 조건에서도 제대로 된 전투를 보여준 사극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과거에는 나름대로 제대로 된 전투씬들도 꽤 있었지만 최근 들어서서는 이 마저도 없어졌다. 그리고 한국의 전쟁사 관련 저변이 아직까지도 좋지 않아서 이게 나아질 가능성은 요원하다.[14] 이러한 한국 사극의 잘못된 전투 묘사를 봐온 한국인들이 현대전 이전에도 현대전 마냥 대열없이 산개하여 전투를 벌인줄 아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토탈워 시리즈를 하는 순간 "토탈워에선 왜 앞열만 싸워요?" 라는 질문을 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해당 게임으로 실체를 알게 되는 우스운 일이 발생한다.[15]
- 전쟁터에서 장수들이 타고 다니는 말들은 시대가 어떻든 갑옷 없이 그냥 맨몸으로 나오며, 갑옷 하나 안 걸침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보정이라도 추가된 건지 전장에서 날아드는 수백, 수천개의 화살들을 한 발도 안 맞고 오히려 말을 탄 장수들이 화살에 맞아 전사한다. 주인공급 장수가 탄 말의 경우 적군들을 상대로 온갖 무쌍을 찍는 주인을 타고 달리다가 적군들이 쏜 화살과 던진 창을 겨우 한 개를 맞고 쓰러져 무력화되거나 그냥 아예 죽는다. 게다다 실제 역사에서는 군마로 한라마나 제주마를 사용했지만 사극에 등장하는 말들은 전부 경주에서 은퇴한 서러브레드 품종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어느 정도 참작해야 할 부분이, 사극 촬영용 말들은 당시의 군마와 다른 경주마라 갑옷을 입히고 사람까지 태울 수 있는 품종이 아니고, 죄다 은퇴마다보니 건강을 고려하면 가볍게 제작한 가짜 갑주조차 입히기가 위험하다고 한다.
- 특정 맹수나 비기 등이 사기적으로 나온다. 일례로 천추태후 1화에서는 거란군이 초원에 전투용으로 훈련시킨 곰들을 몇 마리 풀었더니 고려 기병 전체가 우왕좌왕하다가 거의 일방적으로 학살당하는 모습을 보였다. 심심하면 군사 훈련으로 사냥을 하던 시절에 엘리트 부대라고 할 수 있는 기병대가 이런다면 군대라기보단 마적 떼에 가깝다.
- 장군은 항상 앞장선다. 행군 시에는 무조건 선두에 서서 병력들을 직접 인솔하는데, 왕명을 받고 출정식을 할 때면 몰라도 언제 적이 나타날지 모르는 전장에서까지 이 짓을 한다. 의외로 '장군은 뒤에서 지휘봉만 잡고 있는다'는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옛날의 전쟁터에서는 장군들이 최전선과 꽤 가까이에 있었고, 직접 싸움을 해야 하는 경우도 간혹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16][17], 문제는 한국 사극의 경우 장군이 제일 먼저 칼 뽑고 뛰어드는 경우가 많다는 것. 사기 증진을 위해서 그랬다 쳐도 말단 장교가 아닌 지휘관이 직접 저 짓을 한다는 건 아주 급박한 상황이거나, 지휘관 본인부터가 신립같은 돌격대장 출신이거나, 지휘관이 병사들을 이끌지 않으면 도저히 싸울 수 없는 상황이다.[18]
- 그래서인지 장수는 공격력도 맷집도 일반병과는 다르다. 졸병 하나를 잡는 데는 칼질 한번이나 화살 하나로 충분하지만 장군을 잡을 때에는 칼빵이나 화살빵을 최소 열 번은 넣어야 한다. 그냥 검 하나만 든 장수가 창 든 병사 여럿을 순식간에 쓸어버리는데, 일일이 칼 부딪히며 싸우는 것은 장수가 아니다. 그냥 한 번에 몇 명씩 베어야 한다. 괜히 몸을 한 바퀴 돌리면서 상대방을 베고 상대방 역시 몸을 돌리면서 쓰러지는 것이 포인트. 철갑옷을 입었건 가죽 갑옷을 입었건 주인공의 횡베기에는 자비가 없다.
- 주인공 및 주연급은 일당백이다. 사극을 보다보면 장수나 왕은 적진에서 무쌍난무하고, 졸개들은 그냥 칼이나 창만 들고 있다가 죽는 역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거기에다 폼생폼사라서 투구나 방패같은 거추장스러운 건 집어치우고 칼 한자루만 꼬나쥐었는데도 수십명이 넘는 중무장한 적병들을 상처 하나없이 썰어넘기는 신기를 보인다. 적병들이 주인공에 대한 예우를 어찌나 철저히 해주는지, 어떤 상황에서든 비겁하게 한꺼번에 덤비지 않고 1:1로 덤벼주는 것은 덤이다. 단, 주인공의 힘을 부각하기 위해서나 장수가 죽을 때의 연출은 일대 다수이다.
- 전투신 찍을 때 전사자 수를 너무 과장해서 늘린다. 한 예로 찬란한 여명의 신미양요, 병인양요 장면에서 조선군이 미군, 프랑스군과 대등하게 싸운 것처럼 묘사해 역사적으로 막강했던 두 나라 군대가 화력으로 열세였던 조선군의 화승총과 대포에 수십 명씩 쓰러지는 모습을 보여준다.[19] 2014년 최대 흥행작 《명량》에선 무리하게 백병전을 넣어서[20] 조선군 대장선의 희생자가 많았던 것으로 묘사해 이순신장군의 명량해전 전공을 왜곡해버렸다.[21] 특히 《징비록》에선 탄금대 전투의 실제 왜군 사상자는 150여 명 밖에 되지 않았지만, 왜군이 병력의 반을 잃었다고 설명한다.
- 검이든 화살이든 복부만 피격 당한다. 근접 무술의 경우 자기가 다른 사람의 복부를 공격한다는 것은 동시에 자기의 복부도 공격 당할 수 있는 상황에 노출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공격 당하지 않을 상황에서만 상대의 복부를 노리는 게 정상이다. 자신의 방어를 위해서 상대의 몸체에서 돌출된 팔을 우선적으로 공격하는 것이 병기술의 기본인데 한국 사극에서는 팔을 피격 당하는 일도 없고 팔이 잘리는 일도 없다. 화살이나 총을 쓰는 사수들의 경우 가급적 몸을 낮추거나 벽, 방패 등 엄폐물에 숨기고 얼굴과 팔만 약간 드러내서 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사수들은 복부에 투사체를 맞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부분 안구, 얼굴, 팔, 손, 목에 관통 당했지만 한국 사극에서는 찾기 어려운 장면이다.[22] 연출을 위해서는 엑스트라들이 칼빵을 맞을 때 최대한 요란하게 쓰러져야 하는데, 겨우 팔 스쳤다고 몸이 360도 돌아가진 않을 것이니 가급적 몸통이 피격당해야 어울릴 것이다. 화살 맞는 장면은 화살을 미리 꽂아놓고 카메라만 돌리거나 카메라 바로 뒤에서 초근접샷을 날려 촬영한 뒤 적당히 편집하는데, 이 역시 자연스럽게 보이려면 복부나 가슴이 적절할 것이다.
진짜 화살 맞으면 아프잖아[23]
- 예산 문제로 인해 수만의 대군이 부딪히는 장엄한 전투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화면 상에는 수십 명 정도가 패싸움하는 수준으로 연출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이 부분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지만 비슷한 수의 출연자들을 데려다 놨는데 어디 방송사는 뒷배경에 깃발을 채우고 CG를 덧붙이는 식으로 그럴듯하게 연출하지만 모 방송사는 몇천 군사가 있는 이쪽팀이나 대군을 끌고왔다는 저쪽팀이 꼴랑 몇십명만 데리고 허허벌판에 서 있어서 다 뽀록나는 걸 보면 그냥 제작진의 역량 문제다. 극단적으로는 2만 군사의 보급 부대가 수레 4대랑 병사 7명으로 구성된 촌극도 일어난다. 여기서 나온 게 유명한 식권 2만장 드립.
- 야간 전투가 많다. 배경이 어두우면 적은 인원인 게 티가 덜 나며 소품 몇 개 태워먹으면 아무리 발로 찍어도 화면이 꽉 찬다. 당연히 화살은 불화살. 이 야간 전투 불화살 문제를 거의 최초로 개혁한 사극이 고려거란전쟁인데, 밤중에 화살이 날아들어 어디서 얼마나 되는 병력이 쏘는지 모르고 속절없이 당하는 상황까지 잘 고증했다.
- 상당수의 장수들이 화살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투구를 잘 쓰지 않는다. 주연급은 그냥 안 쓴다고 봐도 무방한데 해당 배우를 캐스팅하는데 얼마를 들였는지를 생각해보면 투구는 주인공 얼굴을 가리는 장애물일 뿐이다.[24] 반대로 졸병들은 동네 농민군이 아니고서야 100% 풀세트 착용. 최근 들어서는 주연급 장수들도 투구를 쓰고 전투에 임하는 것이 연출되는 작품이 등장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KBS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에서는 주인공인 강감찬, 양규를 비롯한 주연급 장수들도 투구를 쓰고 전투를 임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 무장이 과거 군제에 맞지 않다. 빈말 아니고 거의 대부분의 장수와 병사들이 칼만 들고 싸운다. 로마제국같은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검은 전쟁터의 주요 무기가 아니었다. 설령 사용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난전 상황이며, 진형을 갖추고 싸울 때에는 방패를 같이 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잡졸들까지도 검을 들고 싸우는 것과 달리 칼과 방패를 든 병사는 상당한 정예병에 속하며, 대부분의 병사들은 창을 쥐어주는 것이 보통이다. 임용한 교수는 아예 "옛날 싸움에서 누가 칼로 싸워? 다 도끼, 창들고 싸우지!"라며 일축해버렸다. 한국 사극은 이게 너무 심해서 창은 거의 장식품에 가깝고 대부분의 전투씬을 칼싸움으로 만들어버린다. 멀쩡하게 창들고 있던 병사가 갑자기 교전이 벌어지자 창은 사라지고 칼들고 싸우고 있다.[25]
2.1.2. 정치/외교
- 왕의 견해가 마음에 안 들면 논리적 설득 없이 일단 "아니되옵니다"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를 시전한다. 또한 신하의 잘못이 드러나 왕이 꾸짖으면 "소신을 죽여 주십시오"가 자동으로 나온다. 물론 죽고 싶어하는 신하는 한 명도 없다. 여기서 더 나가면 왕이 펄펄 뛰면서 죽여달래서 죽여준다고 하고 신하는 5초만에 생각이 바뀌었는지 "고정하십시오" 멘트를 친다. 또한 왕이 무슨 말을 하든 간에 답변으로는 만병통치약급에 해당하는 답변인 "망극하옵니다."를 남발한다. 왕이 자기 말대로 안 따라주면 지들끼리 모여서 주상이 제정신이 아니라든가 말세라는 등 왕의 뒷담화를 깐다.[26]
- 적은 무조건 악하고, 주인공은 어쩔 수 없이 적을 베지만 아주아주 자비롭고 선량한 인물로만 그리는 '1차원식 묘사'가 너무 많다. 또한 암군이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거나, 성군이 사실은 겉만 번지르르한 막장 군주였다는 이론을 펼친다(근거는 별로 없다). 그런 걸 새로운 해석이라고 포장할 여지도 있겠지만,[27] 새로운 해석이라는 걸 하려면 기본 사료를 바탕으로 논리적이고 치밀한 주장을 해야 하는데 이런 경우는 없다고 해도 좋다.
- 근대적인 기준으로 선역은 자주적이다. 강대한 군사력, 대외적인 확장, 혹은 배째라 외교. 세종대왕이 명나라와 대립한다거나 선덕여왕이 신라는 여인을 왕으로 삼았기 때문에 나라가 어지럽다고 한 당나라 사신을 잡아 가두기도 한다.[28][29][30]
2.2. 소품 연출 관련
2.2.1. 복식
- 조연들은 그런대로 상투를 제대로 틀고 있지만, 주인공은 장발에 봉두난발이다. 봉두난발은 천민들이나 하고 다니는 머리스타일이었고, 더욱이 사극에 나오는 것처럼 윤기가 흐르는 생머리는 없었다.(물론 저 윤기는 가발을 쓴 거라 그렇다는 변명은 되지만) 혼인을 안 하면 상투를 틀지 않는다고도 하지만, 정작 미혼 남성이 트는 총각머리나 떠꺼머리는 물론이고 젊은 사람들이 많이 한 쌍상투는 아예 나오지도 않는다.[31]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상투에 장발이라는 해괴한 스타일도 나온다. 이건 머리숱이 아무리 많아도 모자란다.[32]
- 극 중 남성들의 상투머리 뒤통수를 보면 머리카락이 삐져나와있는 걸 자주 확인할 수 있는데, 원래는 머리카락 한 톨도 남기지 않고 목덜미가 다 드러나보일 정도로 머리를 올려야 한다. 하지만 이를 제대로 재현해내려면 배우들 본인이 어느 정도 머리를 길러야 하는데, 문제는 평소 스타일링때문에 그렇지 못하다는 점. 게다가 어차피 갓 같은 모자로 가리는 경우가 많아 평소 촬영할 때 제대로 상투 분장을 하지 않고 망건만 두르고 갓을 쓰는 걸로 대충 땜빵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다만 2000년대 중반까지는 상투머리를 잘 고증한 경우도 많았지만 2000년대 후반부터는 상투머리를 잘 고증하지 않는 경우가 더러 나타나고 있다.
- 조선시대 내시는 항상 초록 단령에 뿔 없는 사모라는 해괴한 차림으로 나온다. 구한말 사진이나 남아있는 초상화 등을 보면 내시의 관복과 일반 관리의 관복은 다르지 않았다. 다만 이것은 미디어의 한계상 어쩔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는데, 원래 한국 사극에서는 용의 눈물때부터 단령에 뿔달린 사모를 썼다. 즉,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사극에서 내시는 뿔 달린 사모를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흉배가 없는 조선초기에 단령+뿔달린 사모의 조합으로 고증에 맞았지만, 이게 주, 조연들을 묘사할 하급 관리들하고 구분이 안가서였다. 이후 대왕 세종에서 이걸 구분하겠다고 하급관리들이 후기에나 입을 흑색단령+뿔사모를 입고 다니는데, 녹색단령+뿔사모인 내시들하고 구분은 되지만, 결국은 비주얼 문제로 흉배단령+뿔사모=일반관리, 녹색단령+일반사모=내시로 아예 옷차림을 다르게 구분한 거다.
- 조선시대 사극에서 지방관의 복장은 전부다 구군복으로 통일했다. 이 고증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건데 두만강과 압록강 근처의 사또들만 이렇게 입고, 나머지 사또들은 보통 갓과 두루마기 차림이거나 간지나는 걸 좋아하는 사또는 사모와 자신의 원래 품계에 맞는 단령을 입었는데 송상현이 단령 차림으로 동래 부사의 업무를 수행했다. 다만 이건 일반 선비와 사또를 구분하기 위해서 이렇게 입힌 것이다. 그나마 최근에는 배경이 조선 말기가 아니면 구군복이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아졌다.
- 조선시대 사극에서 귀고리를 착용하지 않는다. 원래 한복은 저고리, 바지, 귀고리, 건이나 갓 등의 모자류가 기본 구성이다. 남자의 귀고리 착용이 금지된 건 조선 선조 때다. 남자의 귀고리 착용이 금지되는 (음력)1572년 9월 28일 이전까지는 남녀 불문하고 기본적으로 귀고리를 착용해야 한다. 귀걸이[33]는 등장하지도 않는다. 미약하지만 목걸이와 팔찌도 있기는 했다고 한다.[34]
- 한복도 시대를 뛰어넘어 조선시대 후기의 복장이 가장 보편적이다.[35] 그나마 조선 초기 느낌을 살리더라도 문라건만 나오고 후술할 대나무 흑립은 안 나오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대다수의 사극이 사용하는 말총으로 만든 흑립은 성종 즈음에서야 나온 것이고, 그 이전까지는 가늘게 쪼갠 대나무를 바구니처럼 엮어서 만든 흑립을 써야 맞다. 시대에 따른 옷깃 형태 변화나 저고리 길이 변화도 전혀 고증되지 않는다. 허리 위로 올라가는 저고리는 임란 이후에야 등장하는 것이고, 조선 전기의 저고리는 허리 아래로 내려올 정도로 길었다. 그나마 대체로 용의 눈물과 대왕 세종 이후로는 조선 전기를 다루는 창작물에서는 대나무 흑립이나 긴 저고리 등 시기에 맞는 고증을 하고 있는 긍정적인 변화가 생겼다. 치마 역시 어깨에 걸쳐 입는 디자인은 구한말에 이화학당의 교장이었던 미국인 저넷 월터에 의해 보급된 것이며, 본래는 치마말기로 허리에 두른다. 짧은 저고리와 어깨허리가 있는 치마가 조합된 포대자루 같은 펑퍼짐한 치마저고리 디자인은 근현대에 들어 만들어진 모습이지만 조선시대 배경인 사극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모두 펑퍼짐한 한복을 입는다.
- 그렇다고 조선 후기 복식 고증도 썩 좋은 건 아니다. 여자들의 경우 누구나 아는 그 모습이라 별 문제가 없지만, 남자들의 경우 팔 소매 길이와 넓이가 너무 팔에 딱 맞을 정도로만 입고 나오는데 실제 조선 후기에는 전기때와 다르게 소매 통과 길이가 팔과 손을 다 뒤덮을 정도로 매우 크고 길어 바닥에 질질 끌려 다닐 정도였다. 흔히 사극에서 보는 소매 통이 작고 길이가 짧은 의상은 1884년 고종 때 추진된 갑신의제개혁 시행 이후 나타나는 형태의 의상이다.[36]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이 의상 소매길이와 통에 대해 인조, 효종, 정조를 비롯한 많은 조선의 임금들이 지적을 하면서 개혁을 하라고 명령을 내리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다는 기록도 나온다. 하지만 실제 고증대로 소매 통과 길이를 크고 길게 제작하면 의상의 무게도 무거워지고 바닥에 질질 끌려다녀 배우들이 연기하는데 불편하다고 여겨져서 잘 지키지 않는 듯 하다.[37] 반면 영화 남한산성은 소매 통과 길이가 넓은 조선 중후기 의상고증을 잘해낸 편이다.
- 삼국시대 복식은 더욱 심각하다. 높은 확률로 국적과 시대를 알 수 없는 의상이 등장한다. 대놓고 동양풍 게임 판타지 디자인이라든가 심지어 고려시대 이후에 생긴 동정과 옷고름을 달아놓고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에나 유행했을 당나라 복식[38]을 원삼국~삼국시대를 다룬 사극에서 사용하는 등, 국적과 시대를 초월한 고증을 선보인다. 이러한 문제점은 특히 MBC의 삼국시대 배경 사극에서 더더욱 심각하다. 결국 2020년대 들어 중국, 대만 네티즌들 사이에서 한국 사극은 허구한 날 중국 고장극의 의상을 베낀다고 조롱하는 반응이 많이 나오고 있다. 다만 상술한 예시 역시 2000년대 중반의 작품이듯 이런 근본 없는 스타일의 고착화는 퓨전 사극의 등장과 함께 같이 따라오기 시작한 묵은 문제이며, 2010년대 후반부터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고장극을 보고 베꼈다는 건 황당한 소리다.
원래 이 모양이었다니까?비교 자료랍시고 퍼뜨리는 것 역시 2020년대부터 불거진 중국의 한복공정 때문에 중국인들이 눈에 불을 켜고 명분을 찾기 위해 억지로 갖다 붙이는 것이 많다.[39] 그나마 백제인들이 주역으로 나오는 사극의 백제인 여성 복식은 방송사를 막론하고 대체로 당나라 한푸와 거리가 먼 실제 백제인 여성 복식에 가깝게 나오는 편.
- 삼국시대 두식도 복식 못지않은 수준이다. 베게를 연상케하는 정체모를 거대한 머리나 중국 두식에 가까운 머리가 자주 등장할 뿐, 고구려 벽화를 통해 알 수 있는 머리만 해도 묶은 중발머리[40], 환계[41], 쌍계[42], 후계[43], 얹은머리[44], 채머리[45], 푼기명머리[46] 등 다양한 양식이 있으나 사극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사실 조선시대도 양호하지는 않은데, 미혼녀의 머리는 귀밑머리만 주야장천 나올 뿐, 새앙머리나 낭자쌍계는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 새앙머리는 실제로 그 머리를 하지도 않았던 궁중 나인들이 주야장천 하고 나오며, 어린 아이의 바둑판머리, 기혼자의 조짐머리, 또야머리, 개수머리, 코머리, 민상투나 쌍상투는 찾아보기도 힘들다. 기와집 한 채 값에 맞먹었다던 가체를 누구나 올리고 등장한다.
- 백성들의 위생상태도 심하게 좋다. 당장 20세기 초 대한제국 시절 사진들만 봐도 현대와 비교해보면 백성들의 위생상태가 좋지 않다는걸 한 눈에 알 수 있는데 사극에서는 노비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옷도 멀쩡히 입고 전쟁때도 숯으로 보이는 듯한 검은 재를 얼굴과 옷에 묻힌 게 다다. 일제강점기 시절 경성(서울)에서 사용한 무려 약 70% 이상의 지출이 똥치우기에서 발생했다. 심지어 기원전을 배경으로 하는 주몽에서조차 깨끗한 거리와 깔끔한 백성들이 지나다닌다. 귀족문화는커녕 나라라고 하기도 뭣한 부족국가 시대인데도 왕족들은 먼 미래인 조선시대 왕족보다 훨씬 화려하게 치장하기도 한다. 서양의 고대나 중세를 다룬 역사물들이 일반인들의 처참한 위생상태나 어찌어찌 가리기만한 복장을 입히는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다.[47]
- 3~5세가 아닌 여자가 배씨댕기를 착용한다. 원래 배씨댕기는 서너 살 가량의 어린 여자아이가 숱이 적은 머리를 꾸미기 위해 착용한 것인데, 사극에서는 청소년에서 성인까지 죄다 착용하고 나온다.
- 대수머리를 할 때 목 아래에서 끈으로 고정한다. 원래 대수머리는 모자가 아니라 가체이기 때문에 얹기만 하지, 끈으로 고정시키지 않는다. 물론 조선시대 배경 사극에서 다 그런 건 아닌데 작품별로 끈이 안 달린 대수머리가 나오기도 하고 끈이 달린 대수머리가 나오기도 하여 모든 사극의 문제점은 아니다. 지상파 3사 중 사극 제작 노하우가 가장 뛰어난 KBS에서 방영한 사극들의 경우 대체적으로 고증에 알맞은 대수머리를 선보이는 경우가 많다.[48] 그 밖에 KBS 아트비전에서 제작된 소품들을 대여해서 재활용하는 JTBC 사극에서도 종종 고증에 알맞은 대수머리가 나오는 편이다. 그리고 병자호란 이후에 명나라로부터 칠적관을 받지 못하게 되면서 칠적관을 대신하여 생겨난 대수머리가 병자호란 이전 배경 사극에 나오는 오류가 간혹 존재하는데, 대체로 KBS와 JTBC는 그런 오류가 없는 반면[49] SBS는 여인천하와 왕과 나에서 그런 오류를 범했다.[50] 그나마 여말선초가 배경인 대풍수와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고증에 맞게 칠적관이 나왔다.
- 조선시대 사극에서 성균관이 등장하면, 유생들이 입는 청금복은 십중팔구 청색 옷에 검은 금을 단 유복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태종 대에 처음 제정된 후로 수시로 바뀌었다. 시대에 따라 청금난삼, 흑령+유건, 청금단령, 청색 옷에 검은 금을 단 유복, 벽색 옷 등으로 변했으며, 영조 이후에는 상황에 따라 홍단령과 청단령, 흑단령을 구분하여 입어야 한다.
- 조선을 배경으로 하는 사극에서 심청색 적의가 등장한다. 조선의 치적의가 나오더라도 세자빈이 대홍색 적의를 입고 있다. 심청색 적의는 황제국을 자청한 중국의 것으로, 대한제국 이후에나 등장해야 하며, 치적의는 왕비는 원적문 51개를 배치한 대홍색 치적의를, 대비는 구성이 왕비와 같은 자적색 치적의를, 세자빈은 원적문 36개를 배치한 아청색 치적의를 입었다.
- 여말선초를 제외한 조선시대 사극에서 왕비, 상궁, 후궁, 공주를 비롯한 왕실여성들이 죄다 당의를 입고 나온다. 하지만 당의는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 재위 시기때부터 입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이 되며, 그 전에는 장삼, 장저고리, 단령 등을 입었다. 게다가 당의에 항상 용 모양이 수놓아진 보가 달린 것을 볼 수가 있는데, 이 보가 당의에 달리기 시작한 건 거의 구한말 조선 말기고 그 전에는 주로 당의의 어깨 부분 문양으로 신분을 구별하는 경우가 많았다.
- 궁중 여인들이 배씨댕기와 첩지, 가체가 융합된 정체불명의 장신구를 착용한다. 본래 족두리와 화관을 고정하는데 쓰이는 첩지가 점점 화려한 장식같은것이 붙어 배씨댕기처럼 거대해지더니 아예 고증이 전혀 안 된 정체불명의 장신구가 되었다.
- 조선시대 사극에서 나인이 새앙머리를 한다. 원래 새앙머리는 왕가나 민간을 가리지 않고 결혼하지 않은 여자들이 하는 머리였다. 다만 궁녀에게는 쉽게 허락되지 않았는데, 어린 견습나인 중에서도 지밀, 침방, 수방 소속의 견습나인만이 할 수 있는 머리였다. 사극에서 견습나인을 생각시라 싸잡아 이르는 경우가 많은데, 이 역시 지밀, 침방, 수방의 견습나인만이 불릴 수 있는 호칭이다. 이들은 새앙머리를 한다 하여 생각시로 불렸다. 궁녀는 관례를 치르면 나인이라 해도 머리를 올렸다.
- 조선시대 사극에서 견습나인이 다홍치마와 노랑저고리를 입는다. 원래는 검정, 하양, 엷은 옥색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제한이 없었다. 고종 이후에나 궁인들이 노랑저고리와 다홍치마를 많이 입으면서, 견습나인은 연두색이나 남색 저고리와 진분홍 치마, 분홍 저고리와 남색 치마 조합만 입게 된다. 이마저도 노랑저고리와 다홍치마는 아니다.
- 왕이 공식적인 일과 후에도 곤룡포 차림이다. 원래 왕족들은 공식적인 일과가 끝나면 일반 한복을 입었다.[51][52] 이는 조선 이전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다른 나라 전근대 군주들도 공식적인 일과가 끝나면 군주 전용 의상에서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래도 2000년대 중반 이후로는 사극에서 왕이 평상시에도 일반 한복을 입는 경우도 적잖아 볼 수 있다.[53]
- 신분이 높든 낮든 색깔이 있는 옷을 입는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백의민족이라고 불릴 정도로 흰색 옷을 자주 입었다. 백성들이 너무 흰옷만 입자 일부러 색이 있는 옷을 입도록 했는데도 백성들이 흰옷을 고집해서 실패한 경우도 있을 정도다. 그나마 최근 시대인 일제강점기의 사진만 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흰옷을 입고 있는 걸 알 수 있다.
- 재탕이 많다. 문제는 이전 시대를 다룬 사극의 복식을 조선시대에도 재탕한다는 점. 심지어 삼국시대가 배경이라면 복식 고증이 조선시대 이상으로 심각한 수준이다. 아예 판타지 한푸나 RPG 게임 갑옷에 가까운 의상이 등장하는데, 그걸 이 사극, 저 사극에 재탕 삼탕을 한다. 선덕여왕에서 사량부 부원의 복식이 동이에서는 모자만 덧붙여서 포졸복으로 재활용되었는데, 동이의 경우 같은 PD의 전작에 나온 포졸복을 재활용하면 되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선덕여왕에 나온 사량부 부원의 복식을 재활용한 것이다.
- 고구려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에서 연지화장이 등장하지 않는다. 고구려 고분벽화를 보면 여자들은 양 볼에 연지를 찍는 화장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댕기를 드릴 때 세 번 접어 고무줄로 묶는다. 원래는 다른 끈을 사용하지 않고 댕기만으로 묶어야 한다. 머리를 땋다가 적당한 위치에서 댕기를 대고 합쳐 땋는다. 그러다 고를 만든 뒤 남은 가닥을 머리와 합쳐 땋다가 묶어 늘어뜨렸다.
- 신발 고증의 경우 목화 소품으로 고무 밑창을 단 물건을 신고 있는데, 우수한 고증으로 유명한 뿌리깊은 나무에서도 사용된다.# 이 덕분에 조선의 막강한 과학 기술력 등의 농담이 종종 나온다. 물론 현대인의 발은 당시의 신발을 그대로 신기에는 부적절하므로[54] 이 부분은 연기자의 발을 보호하는 측면이 크다보니 시청자들도 크게 비판하지는 않는다. 사실 리인액트먼트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양덕후들도 신발 고증은 대충 넘기는 경우가 대부분이기도 하고. 비슷한 맥락으로 고대 오리엔트 문명,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를 배경으로 한 서양 사극에서도 기병들이 등자를 착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등자 없이 말을 타긴 위험하기 때문.
-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도 짚신은 조선시대의 것으로 통일된다. 신라나 가야의 짚신은 실 유물은 거의 전해지는 게 없으나 짚신모양 토기에서 짚신의 형태와 결까지 거의 완벽에 가까운 형태로 표현하고 있고, 백제 짚신은 실제로 발굴된 유물만 무려 60점이 넘는다.[55] 그렇지만 한국 사극 중 가장 우수한 고증을 선보인 근초고왕에서도 변함없이 앞총이 빽빽한 조선시대 짚신을 신고 있다. 물론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 신발을 고증하기 위해 굳이 연기자들의 안전을 희생할 이유가 없으니 이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 주인공을 포함한 남성 주요 등장인물들은 내시도 아닌데 매끈매끈하게 면도를 하고 다닌다. 최근 로맨스 중심의 퓨전사극이 늘어나면서 생겨난 문제.[56] 우리나라는 옛부터 수염을 남성의 상징이자 멋으로 여겼고 조선에는 유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내관이 아닌 이상 면도 자체를 거의 하지 않았고, 설령 면도를 하려고 했다 하더라도 현대와 같이 성능좋은 면도날은 존재하지도 않았기에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털 하나 없이 매끈한 피부를 자랑하는 남자는 매우 드물었을 것이다. 로맨스 중심의 퓨전 사극은 주요 타겟 시청자층이 젊거나 어린 여성들이기에 주연 배우도 당연히 잘생긴 미남배우가 맡는 것이 보통이고, 그런 배우들의 미모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수염이 없는 것이 좋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수염을 배제하는 경우가 많다.[57]
- 전근대 일본인 남성의 촌마게는 한때 에도 시대 중후기 스타일로 통일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다가 2000년대 이후를 기점으로 임진왜란을 다룬 사극에서는 고증에 맞게 전국시대~에도 시대 초기 형태로 나오는 경우가 많아지게 되었다. 다만 MBC 사극에서는 에도 시대 중후기 촌마게로 통일되는 경향이 더 늦게까지 남아있었다.
- 전근대 일본인 여성의 기모노는 고대 일본이 나오는 삼국시대 배경 사극을 제외하면 죄다 에도 시대 중후기~일본 제국 초기 스타일로 통일된다.[58] 임진왜란을 다룬 사극이 대표적이다. 일본 사극을 봐도 여성용 기모노는 전국시대~에도 시대 초기 형태와 에도 시대 중후기~일본 제국 초기 형태가 다른데, 전자가 오비가 좁은 것과 달리 후자는 흔히 기모노 하면 떠오르는 넓은 오비가 특징이다. 기존의 임진왜란 배경 사극에 비해 촌마게 고증과 일본 갑옷 고증을 잘한 편인 징비록과 임진왜란 1592조차 후자에 해당하는 기모노가 나왔다.
2.2.2. 갑옷
- 한국 사극의 한국 갑옷 고증은 대부분 상상 이상으로 매우 심각하다. 하나같이 시대불명의 전신갑옷으로 중무장하고 있는데, 그런 갑옷은 동양적인 느낌은 들지 않고 서양 판타지를 방불케 한다. 주연의 경우에는 중국 갑옷인 명광개를 입는 웃지 못할 상황도 벌어지는 것이 다반사이다. 차라리 명광개 정도면 다행일까, 대부분의 고려시대 이전을 다룬 사극에는 어디 특촬물에나 나올법한 전신슈트가 튀어나온다. 채색도 상당히 조악해서 재질도 철제라기보단 싸구려 EVA폼이나 플라스틱 느낌이 들 정도이다. 그나마 근초고왕/대왕의 꿈처럼 당대의 찰갑/판갑을 재현하려 애쓴 작품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냥 리니지 갑옷. 자료가 풍부한 조선시대의 경우에는 이런 문제가 적지만, 당장 고려시대 이전으로 올라가면 그냥 판타지 영화 하나 따로 찍어도 될 정도로 웃지 못할 갑옷 디자인이 나온다. 흔히 갑옷을 비판할 때 반지의 제왕 찍냐는 이야기를 하곤 하는데, 그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각종 갑옷들은 각계의 전문가들이 총출동해서 중세 스타일을 재현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반지의 제왕에서 판타지를 배제하고 갑옷만 봐도 매우 훌륭한 고증을 선보인다. 사실 고대의 갑옷도 고구려 벽화나 동시대 중국/일본 유물 등을 통해 어느 정도 재현이 가능하지만 드라마 제작진들은 대개 고증에 관심이 없다보니 비판을 받는다. 가장 극단적인 것은 주몽과 태왕사신기다. 고려시대 배경 사극의 경우 한반도에 경번갑이 들어오기 전인 고려 전중기 배경 사극에서 고려군 갑옷이 경번갑으로 묘사되는데(무인시대, 천추태후, 무신 등), 고려 전중기 갑옷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구체적인 자료가 전무해서 어떤 디자인이든 고증 오류라고 단정짓기 어렵지만 대체로 송나라풍 갑옷에 가까웠을 거라는 추측이 많은 편이다. 그리고 갑옷 제작 기술 수준이 조선시대는 되어야 제작 가능할 것 같은 갑옷들도 시대를 거슬러 등장한다. 특이한 경우로 명량의 도도 다카토라의 갑옷은 고증을 충실히 하면 개그캐릭터가 되어버리기에 원형을 적절히 변형하며 고증을 포기한 경우가 있다. 조선시대 갑옷의 경우 한때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을 다룬 조선 중기 배경 사극에서 고위 장수들이 무조건 조선 후기의 두석린갑을 입는 문제점이 있었는데, 실제 두석린갑은 진짜로 해당 갑옷이 존재했던 조선 후기 기준으로도 의장용에 불과해서 실전에서 입을 일이 없었기 때문에 배경이 조선 후기라도 고위 장수들이 군사훈련 같이 실전이 아닌 장면에서만 두석린갑을 입고 실제 전투 장면에서는 두정갑을 입고 나오는 게 고증에 맞는다. 그래서인지 KBS 사극은 징비록을 기점으로 배경이 조선 중기일 경우 더 이상 두석린갑이 나오지 않고 있다. 다만 MBC 사극 및 교양 프로그램의 재연에서는 여전히 배경이 조선 중기임에도 불구하고 두석린갑이 나오는 경우가 존재한다. 그나마 조선 초기 배경 사극들은 작품 및 방송사를 막론하고 두석린갑이 나오지 않는데, 대신 이쪽은 KBS 정도를 제외하면 판타지 갑옷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 중국 갑옷 고증의 경우 작품에 따라 맞는 고증이 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고대 한국 갑옷 고증처럼 엉망이 되어 판타지 갑옷으로 나오기도 한다.
- 일본 갑옷 고증의 경우 한때 임진왜란이 배경임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장수들의 갑옷이 오오요로이, 도오마루, 마루도요로이 등 임진왜란 시점의 일본에서 더 이상 실전용이 아닌 구형이자 의장용이었던 갑옷들로 나오는 오류가 많았다. 그러다가 훗날 징비록을 기점으로 실제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장수들의 실전용 갑옷이었던 도세이구소쿠가 나오기 시작했으며, 현 시점에서는 적어도 KBS 사극 및 영화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장수들의 갑옷이 도세이구소쿠로 나오고 있다. 아시가루 갑옷의 경우 한때 에도 시대의 다타미구소쿠로 나오는 오류가 많았으나, 불멸의 이순신을 기점으로 고증에 맞게 오카시구소쿠로 나오게 되었다. 사실 해당 오류는 엄밀히 말하자면 옛 일본 사극의 오류를 한국 사극에서 답습한 것에 가깝다.
- 북방 유목민족 갑옷 고증의 경우 한때 야만인 느낌이 나는 가죽갑옷 일색인 경우가 보편적이었다. 그나마 최근 들어서는 한국 사극의 북방 유목민족 캐릭터들이 금속 갑옷도 많이 입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
- KBS에서만 일어나는 고증오류인데, 고려시절에 사병들이 조선 중후기 스타일의 두정갑을 전군 착용하고, 조선군이 포졸복만 달랑 입고 다니는 촌극이 자주 일어난다. 용의 눈물시절부터 제작한 고려말 사병용 두정갑을 대량 제작한 이후로, 무인시대, 정도전에서도 이 고려군 두정갑은 꼭 나왔는데, 이 사극들이 여말선초를 다루면 조선 때부터 사라진다. 거기에 조선 초에 등장한 팽배수가 고려시기에 나온다.[59]
- 장군들은 일상생활에서도 갑옷을 입는다. 밥 먹을 때도 입는다. 조정에서 회의할 때도 입는다. 실제로 이랬다가는 곧장 반역죄로 엮어서 목을 치는 게 가능했는데도 말이다. 실제 무관들은 훈련이나 비상사태, 전시에만 갑주를 입었지, 평상시에는 궁궐에서 상복을(평상시 입는 관복) 입고 다녔다. 궁궐 안에서 갑옷을 입었다는 것 자체가 상대방을 해할 목적이 있다고 판단되는 것이고, 그 상대방이란 당연히 왕이다. 오늘날로 따지면 국방부장관이 국무회의에 단독군장을 하고 K5 권총을 휴대한 채 들어가는 셈이다. 중국사에 등장한 독재자들을 묘사한 부분중에 빠지지 않는 것이 궁에서도 갑옷을 입고 칼을 차고 다닌다는 표현이다. 그만큼 비정상적인 행동이고 상식 밖인 행동이라는 뜻이다. 삼국지를 주제로 한 드라마에서도 궁 안에서 갑옷입고 칼 차고 다니는 인물은 동탁이나 조조 뿐이다. 하지만 동탁과 조조는 한(漢) 황제로부터 구석(九錫)이란 9가지 특혜를 부여받았고 9가지 특혜 중 '납폐(納陛)' 즉, 황제 앞에서 자유롭게 신을 신고 칼을 찬 채로 알현할 수 있는 권리가 포함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다만 구석이란 특혜 자체가 대부분 중국 역사에서 조정 실권자의 압박에 의해 황제가 원치 않게 내린 특혜였기 때문에 독재자의 상징으로 인식된 부분이 있다. 이 모든 걸 다 제치고서라도 문제가 있는데, 갑옷은 무겁고 통풍이 안 되므로 일상생활 하기 불편하다. 무인 중심이었던 고려 무신정권, 중국의 유목민계 정복왕조들, 가마쿠라 시대 이후의 일본조차도 무인 지배세력들이 평소에는 갑옷을 입지 않았는데 문인 중심이었던 한민족 국가들과 중국 한족 왕조 그리고 헤이안 시대까지의 일본이라면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그나마 한국 사극에서 이런 문제점은 조선시대 배경 사극에서는 덜한 편인데, 고대나 고려시대가 배경인 사극들과 달리 평상시에는 철릭이나 구군복을 입고 훈련이나 비상사태, 전시에만 갑주를 입는 것으로 나오는 경우가 절대다수이기 때문이다.
- 주연급 장수는 투구를 안 쓴다. 천추태후나 선덕여왕 등의 드라마에서 장수들이 죄다 투구를 쓰지 않고 등장한다.[60] 광개토태왕, 대왕의 꿈 역시 주연급 장수가 투구를 쓰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엑스트라가 아닌 이상 절대로 투구를 쓰지 않는다. 실제 강선식 라이플이 등장하기까지는 투구는 원거리 병기에 대한 효과적인 방어수단이었고, 일본의 전국시대에는 원거리 병기에 의한 사상이 절대 다수였는데도 말이다. 투구로도 모자라서 금속으로 만들어진 면갑까지 쓰는 판이었고, 이렇게 투구를 쓰고 면갑으로 얼굴까지 보호하는 장수는 사실상 화살로는 죽일수가 없었다. 이것은 배우의 얼굴을 보여주기 위해 고증을 포기한 경우라 할 수 있다.[61] 투구 때문에 배우들의 얼굴이 가려 잘 안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고려말 활의 달인으로 이름을 날린 이성계도 온몸을 철갑으로 감싼 왜구 적장 아기발도를 그냥은 죽일 수가 없어서 부장과 함께 화살로 면갑줄을 맞춰서 벗긴 후에 맨얼굴을 쏴서 잡았다. 최근 중국 사극인 신삼국에서도 여포와 조운이 적과 대결하던 중 무기를 맞아 투구가 떨어진 상황이 나온 바 있는데 만약 투구를 안 썼다면 그야말로 죽을 상황이었다. 물론 절대로 투구를 쓰지 않은 장수도 실제로 있긴 있었다. 바로 손견인데, 그래서 손견은 뒤통수에 화살 맞고 전사했다. 하지만 사실 투구 안 쓰는 걸로 유명한 장수가 같은 시대에 한 명 더 있었으니, 바로 원소. 이 자는 심지어 자기 병사들한테조차 투구를 쓰지 않고 싸우게 했다.
2.2.3. 무기
- 가장 강력하고 익숙하고 쓸모 많고 대중적인 도끼는 아웃 오브 안중이다. 백병전에서 무기는 대부분 칼 아니면 창이다. 물론 기술이 발전하면서 강도가 높아진 검과 기마술이 확산되면서 필요가 커진 창이 도끼의 수요를 밀어내긴 했지만, 당장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무기의 비중을 살펴보자.[62] 검을 지닌 하급 병졸들은 그 살벌한 전장에서 방패하나 없이 검 한자루만 들고 나대다가 전사한다. 그나마 태조 왕건에서 일부 병사들이 도끼를 무장했고, 사극에서 도끼로 유명했던 캐릭터가 무인시대의 금강야차와 안시성의 활보한이다. 다만 이건 배우들의 체력 문제 때문에 고의로 이렇게 한 것이다. 도끼는 칼과는 비교도 안 되게 무겁기 때문에 NG 한 번 낼때마다 배우들이 곤죽이 된다. 금강야차의 경우 배우가 워낙 베테랑 배우이다 보니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 그마저도 창은 장식용 또는 포졸용 무기로 쓰이고, 실제 전투 장면에서 주로 쓰이는 것은 칼이다. 굳이 멋있다는 점 이외에 특별한 이유를 찾자면 크고 무거운 무기일수록 다루기 어렵고 부상으로 이어지기 쉽기 때문이다. 창은 단순한 찌르기만으로도 위력적이긴 하지만 그것만으론 멋진 장면을 만들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럴하고 해도 보통 장교급들에게 지급되는 무기인 칼을 말단 병사들까지 휘두르고 있는 걸 보고 있으면 이게 제대로 된 전쟁씬인가 싶다. 이 부분은 분명히 개선해야 할 필요가 있다. 다만, 기마전의 경우에도 칼을 쓴다고 까는 의견이 보이는데 이는 잘못된 비판이다. 대열을 갖추고 정면에서 돌진해야만 위력이 나오는 기병창에 비해 곡도로 구성된 기병도는 적은 훈련량으로도 꽤 쓸모가 있었으며, 기병이 보조로 물러난 근대의 기병 후사르는 죄다 기병도를 들고 싸웠다. 흔히 검병이 창병에 비해 훈련이 더 필요해서 당연히 말 위에서도 그러겠거니 생각하겠지만 대열이 갖춰져야 쓸모있는 창을 말타고 쓰기 위해선 훨씬 많은 훈련이 필요하다. 물론 마상에서 칼 못쓸 것도 없긴 하지만 마상에서 다루기엔 애매한 검의 길이 때문에 마상검술을 제대로 해먹으려면 사용자가 월등히 실력이 좋아야 한다. 문제는 그렇게 애먹으며 마상에서 칼질하느니 차라리 창 같은 장병기 드는 게 훨씬 효율이 좋다는 것이다. 다만 이건 진짜 실전 이야기고 거창돌격이나 말위에서 고삐를 놓은 상태로 양손무기를 쓰는 것 등은 제작비(CG, 인건비 등)나 배우들의 안전문제 때문으로 너무 현실성에 치중해서 과도하게 비판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사실 이 부분은 한국사극계가 이런 노하우가 전혀 없어서 발생하는 문제인데 예전부터 중화권이나 일본 사극들의 경우엔 멀쩡하게 장수들이나 병사들이 말 위에서 창, 언월도, 모 같은 장병기를 사용하는 장면들이 그대로 나오고 서양사극계도 마찬가지다. 즉 한국사극계는 이런 기술을 재현할 능력이나 노하우 자체가 없기 때문에 이런 걸 넣었다간 제작비와 CG 문제, 배우들의 안전문제가 심각해져 안 넣는다고 봐야 타당하다. 다만 한국 사극도 2000년대 이후로는 창을 든 장수들을 꽤 다루고 있다.
- 조선시대를 다루는 사극의 창은 당파로 통일된다.[63] 물론 당파는 적군의 공격을 창날로 막아내기 수월하다는 이점이 있었지만 창보다 짧고, 만들기도 어려우며, 무게도 더 나가기 때문에 결코 주력으로 쓰일만한 무기는 아니었다. 게다가 정작 당파라는 것 자체가 명나라 후기 척계광[64]이 왜구를 토벌하면서 새로 개발한 신무기로, 조선에서는 임진왜란 때에서야 명군이 들어오면서 도입된다. 고로 임진왜란 때 조선군의 주력병기는 당파가 아니라 일반 창이었다. 그리고 당파는 삼지창과는 다르다. 그래도 2000년대 후반부터는 조선시대 사극에서도 일반 창을 꽤 사용하는 추세다.
- 이미 조총이 보편화된 조선 후기에도 포졸들이 당파 들고 어리버리하게 따라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쓰는 조총도 무조건 심지에 불 붙여서 발사, 장전하는 장면이 없다. 다만 이 점에 대해서는 2010년에 추노라는 걸출한 고증이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분명히 비무장한 범죄자에게도 포졸은 육모방망이는커녕 창부터 들이댄다.
- 활 쏘는데 검지로 시위를 당기는 서양식 활쏘기, 정확히는 '지중해 사법'을 구사한다. 검지를 포함한 네 개의 손가락으로 활시위를 당기는 이 사법은 엄연히 정식으로 있는 사법이긴 하지만 동아시아의 사법은 결코 아니다. 몽골이 원류이며 중국과 한국에서 주로 쓰인 활쏘기 기법인 '몽골리안 사법'에 의하면 엄지로 당겨야 한다. 게다가 엄지에 끼는 깍지는 어디로 갖다 버렸는지 보이지 않는다. 이러면 엄지손가락이 너덜너덜해지기 십상. 이 몽골리안 사법은 최종병기 활에 매우 자세히 나온다. 그나마 이 부분은 추노와 최종병기 활 이후로 많이 지적되어서 그 후로 상당히 개선되었고, 고려 거란 전쟁에선 몽골리안 사법과 깍지가 제대로 묘사되었다.
- 산적이나 왈패들이나 사대부나 정규군이나 궁중별감이나 전부 칼을 손에 들고 다닌다. 가끔 다른 손을 사용해야 할 일이 있으면 칼을 든 손을 바꿔서 연기한다. 동개일습과 환도 띠돈매기는 어따 갖다버리고 등장인물 전원이 손에 칼을 들고 서서 뻘쭘하게 이야기할 때도 있다. 소품이라도 칼이 꽤 거추장스러울 텐데 연기자들도 힘들 듯.[65] KBS 제작진들 왈 사극 속 환도패용 고증이 어긋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으나 환도 띠돈 매기를 하면 극 중 인물들이 걷거나 뛸 때 덜렁거려서 카메라에 그 모습이 이상하게 찍히기 때문에 연출진들이 싫어해서라고 한다. 실제로 그나마 띠돈을 잘 재현한 뿌리깊은 나무에서도 액션신에서는 무조건 칼집을 버리고 촬영했고 비교적 정적인 장면에서만 띠돈 패용을 재현했다. 상기한 이유와 마찬가지 이유일듯 하다. 이는 바래 아래 서술 내용과도 바로 연결되는데 어디까지나 보조무기인 환도의 길이가 너무 길어서 생긴 문제다. 환도 항목을 참고하면 알 수 있는데 임진왜란 당시나 직후에 잠깐 길이가 길어졌을 뿐 대개 1m가 안되는 크기다. 이후 고려 거란 전쟁에선 병사들이 도검을 패용함으로써 패용 문제가 점차 개선되고 있다.
- 궁수들이 활과 화살이 든 활집을 맬 때 동개일습의 형식인 허리에 매는 게 아니라 등에 매는 전통을 사용하고 있다. 심지어 전투 때도 그렇게 한다. 심지어 활과 화살이 동시에 들었다. 병사들 같은 경우는 무조건 등에 활과 화살이 동시에 든 활집을 패용하는 경우가 많고, 뿐만 아니라 군관들 또한 등에 활과 화살이 동시에 든 활집을 패용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으며, 심지어 하급 장수들도 활과 화살이 동시에 든 활집을 패용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의외로 상급 장수들이나 지휘관들이나 왕자, 황자나 태자, 세자 또는 황제나 왕의 경우에는 활집과 화살집을 분리해서 착용하는 경우를 볼 수 있으며 이들의 경우는 병사나 군관, 하급장수랑 다르게 허리춤에 활집과 화살집을 매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 조선시대 배경 사극에 등장하는 칼은 모조리 일본도다.[66] 정확히는 칼자루나 칼날, 코등이 등의 부품이 전형적인 일본도인데, 칼자루에 X자로 감는 끈인 츠카이토(つかいと)부터 칼날에는 요코테와 하몬까지 정성들여 재현한데다, 코등이도 칼날 양쪽에 일본도 코등이 특유의 구멍인 소병궤혈과 궤계혈이 나 있는 물건들이 쓰인다. 길이가 환도치고 너무 길다는 것을 지적하는 의견도 있다.[67] 물론, 임진왜란 이후에는 일본도 형태의 칼이 유행하기도 했고, 한국 장인들이 환도를 일본도 형태로 만들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환도의 본래 형태와는 많은 거리가 있는 물건들이다. 적어도 조선 초중기 배경 사극에서 조선인들이 일본도를 많이 사용하는 건 빼도박도 못하는 고증오류다. 이는 예산 문제로서 국내 도검사에서 주로 취급하는 물건이 일본도이기 때문이다.[68] 소품용 가검의 경우에도 환도를 고증에 알맞게 제작할 경우 예산 문제가 만만치 않기 때문에 미리 구해놓은 일본도 가검들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나마 추노와 뿌리깊은 나무 이후 제대로 된 환도를 소품으로 사용한 예가 많아지고 있으나, 2015년 이후에도 상당수의 사극에서 인물들이 일본도를 썼다. 2006년과 2007년에 방영된 드라마의 사례이긴 하지만, 심지어 원삼국시대가 배경인 주몽에서조차 일본도와 비슷하게 생긴 도검류가 나왔다.
- 원삼국시대, 삼국시대, 남북국시대, 후삼국시대, 고려시대 배경 사극에 등장하는 칼은 양날검인 경우가 많다. 물론 고증에 맞게 환두대도도 많이 나오지만, 한국보다는 중국(정확히는 송나라 때까지)에서 더 많이 실전용으로 쓰인 양날검이 한국 사극에서 한민족 국가의 도검류로 많이 나오는 건 바람직한 묘사가 아니다. 사실 한국의 양날검 자체는 조선시대에도 있었지만 애초에 조선시대에도 양날검은 주로 의장용이었고 실전용 도검류는 환두대도의 후신격인 환도였다.
- 칼을 들고 조금만 움직여도 금속성의 소리가 난다. 검을 뽑을 때는 기본이고[69], 심지어 그냥 들어올렸는데도 '채앵!'하면서 금속성의 소리가 난다. 진검을 만져본 사람은 알겠지만, 실제 칼은 그렇게 쉽게 금속성 소리를 내지 않는다. 하지만 이건 실제 진검이 아닌 조잡하기 그지없는 소품을 사용하면서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 것 보단 효과음을 추가하는 게 더 박력(?)있어 보이기 때문일지도. 때문에 효과음 자체를 없앤다기 보단 조금 더 고증에 맞는 효과음을 사용하는 게 좋을 것이다.[70]
- 칼싸움을 하다가 칼을 서로 맞대고 힘겨루기하는 장면이 꼭 나온다. 실제로 이런 짓 하다간 유술에 걸리기 딱좋다. 군사들이 씨름이나 레슬링을 배우는 것도 바로 이런 난전상황에서 상대를 메치고 완전히 쓰러뜨리기 위함이다. 검사는 칼만 가지고 싸우지 않는다. 주먹질도, 발길질도 모두 검사의 무기다. 일단 살고 봐야 하지 않는가. 사실 이런 것보다 더 큰 문제는 방패를 안들고 다닌다는 것이다.
- 야습하는데 장비에 잿물 바르기 같은 간단한 준비도 안해가서 조명에 날붙이가 반짝거린다. 실제로 이러다간 당연히 적에게 들킨다. 보초병은 괜히 세워두는 게 아니다. 다만 이건 굳이 한국 사극 뿐만 아니라 일본이나 중국 사극에서도 많이 쓰이는 오류이다. 그리고 오히려 그것을 주인공이 활약하는 장치로 쓰는데 주연이 풀숲에서 번득이는 빛을 보고 칼을 든 매복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먼저 공격하는 케이스 등이 있다. 달빛에 번득이는 칼을 발견하는 것이 주인공의 눈썰미를 보이는 연출로 쓰이는 편.
2.2.4. 경제
- 계산은 무조건 화폐로. 삼국시대나 통일신라 때도 화폐를 사용한다. 한국 역사에서 한국의 정부에 의해 유통된 최초의 화폐는 고려 성종 때 만들어진 건원중보이며[73], 이것도 사용이 잘 안 돼서 목종 때는 관영 상점에서만 겨우 사용되었을 뿐이다.[74] 고려 후기에는 원나라의 영향으로 지폐의 일종인 저화가 쓰이기도 했지만 어음 수준이었고, 조선에 들어서는 태종, 세종대왕, 이후 효종조의 김육에 이르기까지 경제에 대해 지식이 있는 재상들이 화폐를 유통시키려고 갖은 힘을 썼으나 모두 실패했고, 숙종조에 가서나 겨우 화폐경제가 정착할 수 있었다. 다만 주몽에서는 중국 화폐인 명도전을 사용하므로 아주 틀린 고증이라고 할 수는 없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군대가 조선을 도와주러 올 때 군량은 사다 먹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거의 챙기지 않고 그 대신 돈으로 챙겨왔는데, 조선에서 그 명나라 돈이 씨알도 안 먹혔다. 정상적인 상거래가 불가능하자 명나라 군대는 약탈로 이를 충당했다. 다만 이는 일부러 어기는 측면이 강한데, 일일이 비단이나 쌀을 건네주는 장면을 보여주기에는 너무 번거롭고, 무엇보다 사극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상업작품이기 때문에 시청자들에게 어느 정도 잘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17세기~18세기에나 돼서야 화폐경제가 활성화되는데[75] 이는 부족국가가 아닌 정상적인 국가의 형태를 가진 나라중에서는 매우 늦게 화폐가 자리잡은 나라다. 비록 조선이라는 나라가 농업중심의 사회였고 상업의 발달이 미비해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거지만, 전문적인 역사 지식이 없는 시청자들에게는 매우 미개하게 보일 수밖에 없어 암묵적으로 고증을 어기는 현실이다. 특히 사극의 해외수출이 빈번해지는 지금은 외국 시청자들의 시선을 고려해서라도 화폐 고증은 전혀 기대 할 수 없다. 사실 화폐 문제는 중국의 사극도 문제가 많아서 무협과 관련한 작품은 죄다 주요 화폐로 은자를 사용한다. 은자를 말 그대로 주요화폐로서 널리 사용하게 된 것은 거의 청나라 시대에서부터이다. 일본 사극도 이러한 문제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한데, 일본 사극에서의 묘사와 달리 전근대 일본에서 화폐 발달이 정점에 달한 시기는 에도 시대다.
- 조선시대 사극 중 언제 어디서든 주막, 술집같은 시설이 있다.[76] 다만 고려시대에는 객관, 다점 등의 상업 시설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이것도 수도를 비롯한 몇몇 대도시에나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2.2.5. 기타
- 술을 마시면 안주를 절대 먹지 않고, 잔치가 열리면 밥을 절대 먹지 않는다. 그리고 사실 소품 음식은 맛보다 화면에 나오는 연출을 위해 종종 가짜를 만들기도 한다. 소품이 진짜 음식일 경우엔 장시간 촬영을 하다 보면 식거나 굳으며 맛이 떨어지며 맛은 둘째 치더라도, 소품 음식을 먹는 신이 나올 경우엔 NG낼 때마다 다시 찍으면서 배우가 계속 먹다보면 연기에 지장이 가는데다가 소품이 너무 줄면 촬영에 지장이 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개 술만 마시거나[77], 안주나 밥 등을 먹더라도 먹는 척만 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하정우의 먹방이나 대장금처럼 먹는 것이 중요한 내용의 경우 배우들이 진짜로 먹는다.
- 김치가 현대식 김치인 경우가 많다. 현대에는 채소 자체를 개량된 품종을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현대에 먹는 노랗고 통통한 배추가 사극에 등장하면 안된다. 김치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과일이나 채소, 음식 고증 자체가 암담한 수준이다. 현대의 한식은 전통음식과 거리가 꽤 멀다.
- 조선시대 사극에서, 견습나인은 무조건 생각시다. 원래 생각시는 새앙머리를 할 수 있는 지밀, 침방, 수방의 견습나인만을 말한다. 원래 새앙머리는 일반 미혼녀의 머리였다. 그러나 궁녀에게는 왕족을 바로 곁에서 보필하거나, 옷과 침구의 바느질을 하거나, 옷에 들어가는 자수를 놓는 등 왕족과 밀접하게 연관된 세 부서의 견습나인에게만 허락되었다.
- 건물들이 조선 후기 양식이다. 다층 건물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한국 건축 문서 참고. 조선 이전으로 갈수록 건물 규모가 거대하고 화려했으며, 2층 건물도 많았다. 삼국시대에는 지붕장식인 치미 높이가 180cm일 정도였다. 교과서에 숱하게 언급되는 목탑부터가 다층 건물이다. 가야의 고상식 가옥은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남은 게 조선 시대 건물 뿐이니까.
- 의원이 높으신 분들을 상대로 진맥을 할 때 실을 매어서 실 끝에 느껴지는 진동으로 진맥을 한다. 호기심 천국에서 실제 한의사가 사극에 연출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실을 매어서 실험하는 장면을 보였는데 불가능하다는 게 밝혀졌다. 지체 높은 여인들을 진맥할 때 손목에 얇은 천을 감고 진맥을 했다고 하는데 이게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1995년에 출간된 민담집인 '보배쌈지'(황구연 저)의 가장 마지막 에피소드인 삼계탕에 거의 비슷한 방법의 진맥법이 나오기는 한다. 문제는 해당 저서가 '민담집'이란 이름답게 거의 야사에 가까운 이야기들을 모아둔 책이라는 점. 게다가 해당 에피소드 내에서도 등장인물의 뛰어난 면모를 두드러져보이게 하기 위해 사용한 장치로, 실타래 진맥이 '일반적인 방법이 아닌' 점을 이미 보이고 있기 때문에.
- 여러 사람이 식사를 할 때 독상이 아닌 겸상을 한다. 그러나 전통적으로는 각자 상을 받는 독상문화였고, 겸상 문화는 해방 이후에나 생겼다.
- 삼국시대 이전의 사극에서 등장인물이 한자식 이름을 쓴다. 한자식 이름이 왕족과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한 건 남북국 시대 이후이며 삼국시대 이전의 모든 사람은 순우리말 이름을 썼다. 사서에 기록된 삼국시대 이전 사람들의 인명은 원래 순우리말 이름인 것을 뜻에 맞추어 중원식 이름으로 바꾸어 기록한 것이다. 즉, 천명 공주니 덕만 공주니 하는 거 다 고증오류다. 다만 이 경우 원래의 순우리말 이름을 알 길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는 하다. 삼국시절에 어떤 이름을 썼는지 대략적인 정황을 알고 싶으면 이광수의 이차돈의 사를 읽으면 된다. 어느 나라 사극이든 간에 전근대의 언어를 완전히 고증하는 건 어렵고 고증하더라도 현대인인 시청자(드라마)나 관객(영화)이 알아듣지 못하니 편의상 현대 언어에 대충 옛날 느낌을 가미할 수 밖에 없다.[78] 한국의 사극 말투가 딱 그런 케이스.
- 여자들이 죄다 겨드랑이 털을 밀고 있다. 한국에서 여자들의 겨드랑이 털이 터부시되는 시기가 언제부터였는지 알면 명백한 고증오류이나, 배우의 이미지라던가 작품 분위기를 해치는 문제가 있어 거의 지켜지지 않는편이다.
- 조선시대 명나라로부터 수입된 주리틀기가 시대를 불문하고 등장한다. 삼국시대, 고려시대 배경임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역행하여 나오는데 고증오류다. 대표적으로 KBS 드라마 태조 왕건, 제국의 아침, 무인시대를 보면 전부 고려시대인데도 불구하고, 국문장을 열면 일단 주리부터 틀고 본다. 그리고 죄인들이 관복을 입은 채로 국문을 받는다.
2.2.6. 기타 연출 관련
- 초반에는 화려한 싸움 장면이나 중국 등, 해외 로케이션으로 찍은 웅장한 풍광이나 무희들이 대규모로 화려하게 춤추는 장면이 들어가서 시청자들을 끌어들인다. 물론 그 뒤로는 그저 줄곧 골방에서 등장인물 클로즈업 하는 장면.
- 효과음은 '두둥!'이 60%를 차지하며, 왠지 방에 있는 사람 얼굴을 클로즈업 하는 장면이 방영분의 40%는 차지한다.
- 제작비가 부족하면 화면에는 20명인데 100명이라고 우기기 식의 숫자 불리기도 많으며, 또는 CG를 동원해 숫자를 불리기도 한다. 다만 이것조차도 어설프게 나온 작품이 있긴 했다.
- 가끔 전국이 일일생활권으로 통합되기도 한다. 물론 가끔 실제 가능했다는 인물도 있긴 하지만, 당연히 극소수인 데다가 전설 같은 이야기다. 역참제를 이용한 파발에게도 불가능.
- 이따금 일본 닌자의 영향을 받은 특수요원 같은 부하가 있다. 좋은 예가 불멸의 이순신의 날발이와 대조영의 금란.
- 조선시대 이전인데도 감자를 먹거나 담배[80]를 피운다. 남미가 원산지인 이들 물자가 한반도에 유입된 것은 조선 후기이다. 들어오는 과정 역시 브라질 → 포르투갈 → 포르투갈령 마카오 → 일본 → 조선 순이다.
- 현대에 생긴 어휘나 표현, 일본이나 중국식 한자어가 사극에서 등장한다. 하소서체나 하오체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81] 그러나 최소한 왈도체급의 수준 낮은 번역기 일본어를 사극에 쓰는 일은 어느 정도 없어진 편. 최근의 사극들은 사극투 일본어는 기본 이상 구사하고 있다. 또한 일부 일본식 한자어를 한국식 한자어로 쓰는 (번역가로서는) 매우 초보적인 찐빠는 좀처럼 고치지 못하고 있다. 어째서인지 중국어의 경우 일본어보다 사정이 훨씬 나은 편인데, 역사적 지식이나 한자어를 더 많이 공유하고 있고 중국사가 기본교양에 속하는 점도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 후궁이 자기 자식에게 어머니라 자청한다. 또는 후궁 소생의 군이나 옹주가 생모인 후궁에게 '어마마마'라 한다. 후궁은 자기 자식이라 해도 말을 함부로 할 수가 없다. 왕의 자식들은 적서 불문하고 공식적으로 왕비의 자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궁중에서 '어마마마'라 불릴 수 있는 이는 왕비, 대비, 세자빈 등의 정실 뿐이다. 굳이 후궁의 자식이 자신의 친어머니인 후궁을 대놓고 어머니로 부르는 것으로 묘사할 거면 사적인 자리에서만 그렇게 나오고 공적인 자리에서는 빈, 숙원, 소의 등 자신의 모친인 후궁의 작위+마마님 등 후궁에 대한 호칭으로 부르는 것으로 묘사되어야 한다.
- 조선시대 사극에서 왕족에게 무조건 마마를 붙인다.[82] 마마는 조선 후기까지 궁중 내 '손위여성'들에게 주로 바쳐졌으며 남성 왕족에겐 '마노라'라 하였다.[83] 조선 말기에 들어서나 남녀공통으로 왕과 왕비, 상왕과 대비, 세자와 세자빈 모두 마마라고 불렀다. 그 전엔 왕과 대비, 세자와 세자빈, 상왕과 대비 모두 '마노라' 라고 불러야 맞는다.[84] 다른 왕족에게 마노라/마마라고 했다가는 목이 날아가도 할 말 없다.
- 왕자가 성인인데도 길례를 치르지 않는 사극도 있다. 조선시대 왕족들은 대부분 10세를 전후하여 혼사를 치렀다. 대군 - 사랑을 그리다의 경우 모티브 인물들이 벌써 애 낳고 손자 본다고 했을 시기에 솔로로 왕자들끼리 이 여자랑 결혼할 거라 하고 있다...
- 삼국시대 사극에서도 왕족에게 마마라 한다.[85] 마마가 조선 중기 이후에 중국에서 들어온 말임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것이다. 나으리, 기하, 어라하 같은 표현을 구현 못하겠다면, 차라리 폐하나 전하 등의 호칭을 사용하는 것이 낫다.
- 기생이 매춘부처럼 묘사되며, 사창가가 있는 것처럼 묘사된다. 사창가는 일본의 요시와라에 가까운 체계이며, 기생은 예술가지 창녀가 아니었다.[86] 조선 후기의 삼패기생조차 최소한의 예술적 소양은 갖추고 있었다.
일단 할 수 있는게 급에 따라 제한되기는 했지만실제 매춘부 역할을 한 이들은 들병이, 화랑유녀, 작부, 사당패 등으로 따로 있었다.[87]
- 왕이나 양반이 기방에 간다. 높으신 분들은 수준 높은 기생을 자기 집 후원이나 경치 좋은 곳에 따로 불렀지, 기방에 직접 가지 않았다. 기방에 가는 이들은 하급 관리나 왈자패, 돈 많은 평민층이었다. 뿐만 아니라 기생이라고 무조건 기방에 있는 건 아니었다.
- 기생집에서 한 방에 여러 명의 기생이 들어간다. 어지간히 돈이 많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조선 말기의 기록에는 여러 무리가 좌정한 방에 한 명의 기생이 투입되었다고 하며, 같이 있는 이들에게 동의를 얻고 기생에게 부탁하여 가무를 감상하는 형식이었다. 이런데도 돈 꽤나 많지 않고서는 기방 출입이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기방에 가는 이들은 돈이나 힘만 있지, 교양을 기대하기 어려운 부류[88]였던지라 어린 기생의 경우 여러 사람 앞에서 옷을 벗겨 희롱하는 등 성폭행에 가까운 일을 관례처럼 당해야 했다. 이는 기생의 기둥서방인 기생서방이 손님들에게 따로 부탁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유는 기생이 기방에 빨리 적응하고 순응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 왕이나 장군은 보이스를 엄청나게 깔고 중후하게 말한다. 실제로는 그러지 않았다. 사극에 왕으로 출연했던 배우에 따르면 목소리를 깔고 말하는게 사실성은 떨어지지만 뭔가 현대극과 다른 느낌을 시청자들에게 주려고 일부러 목소리를 깔고 대사를 친다고 한다.[89]
- 조선시대에 과거시험을 보자마자 급제하면 곧바로 당상관이나 암행어사 같은 높은 관직을 받는다. 사극에서 젊은 미남이 잘 임명되곤 하지만 암행어사는 닳고 닳은 경험자에게 주는 임무이다. 그리고 실제 과거 제도는 시험 한 번 보고 장원을 했다 하더라도 문과는 소과-성균관-대과의 테크트리가 있고 무과는 종사관-만호-첨사의 테크트리가 있다. 오늘날로 따지자면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고 소령으로 임관하거나 공시 갓 패스한 인사를 바로 고위공무원으로 들이는 셈이다. 조선은 인사시스템도 철저히 짜여져 있고 뭣보다 말이 많은 나라여서 정해진 원칙을 어긴 특진이나 관직 수여가 행해지면 삼사가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왕을 달달 볶았다. 과거 같은 정식 경로라면 당연히 하위 관직부터 착실히 승진해야 고위 코스를 바라볼 수 있었고, 심지어 임진왜란 직전에 선조가 전쟁 대비용으로 밀어주기로 작정한 이순신조차 강고한 반대에 부딪혀 단번에 여러 계급을 올려주지는 못했다.
- 조선시대인데도 불구하고 여성 캐릭터가 사회적 활동을 아무 제약 없이 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회적으로 상위계층에 있는 남성 캐릭터에게 반항하거나 남성 캐릭터가 그런 여성 캐릭터에게 쩔쩔매며 감정선에 맞춰주는 등 대놓고 여성 시청자나 여성 작가들의 구미에 맞는 역사왜곡이 일어난다. 조선 시대에는 여성의 사회적 위치가 낮고 가정 밖에서는 사회 활동을 거의 할 수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페미니즘의 발호나 여성 위주의 방송가 창작 풍토로 인해 갈수록 여성인권에 대한 고증이 무시되다 보니 벌어지는 일.[90]
여성인권 기준이 다른 고려나 삼국시대 여성 사극 만들면 되는데 자료조사에 게으른 작가들이 이를 악물고 안하려 든다
- 삼국시대부터 조선까지 왕실 직속의 비밀 정보조직을 두고, 권신들과 민심의 동향을 파악하는 기무사나 경호실등이 있는데, 이건 중국 사극의 동창을 참고한 경우가 많다. 실제로 왕이 정치싸움을 위해 저랬다가는 신하들이 들고 일어나 업무거부를 할 일이다.
- 배우들의 안좋은 치아 상태가 사극을 찍으면 그대로 드러나는 경향이 있다. 이건 사극을 찍는 연출의 문제인데, 꼭 배우가 우렁찬 발성으로 쩌렁쩌렁한 소리를 내며 입을 벌릴때 그 안에 크라운이나, 임플란트, 아말감 때운 치과 치료 흔적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PD들이 꼭 사극 전문 배우들에게 원하는 연기가 그렇게 포효하거나 절규하는 장면을 많이 요구해서 공교롭게 입벌리는 장면이 많이 나와 치아 상태가 그대로 드러난다.[91]
-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사극에서 주로 한국인들이 일본어로 자신의 이름을 말하거나,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의 이름을 부를 때 지금 일본에서 통용되는 방식인 한국어 발음을 가타카나에 맞춰서 부르는 걸로 묘사되지만[92] 이는 시대적으로 틀린 고증이다. 일제강점기 때만 하더라도 지금과 달리 조선인들의 이름을 철저히 일본식 한자발음에 기초해서 불렀던 경우가 많았는데[93], 가장 대표적인 예로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인 손기정의 이름을 ‘손키테이(孫基禎、そんきてい)’리고 부른 사례가 있고, 동메달리스트였던 남승룡 또한 그 당시 아나운서의 중계방송을 들으면 ‘난쇼류(南昇龍、なんしょうりゅう)’라고 부르는 걸 알 수 있다.[94] 사실 이 때의 영향 때문에 지금도 일본에서는 손기정을 ‘손키테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을 정도. 그리고 의외로 일본 식민지시대가 배경인 대만의 시대극들은 이러한 통성명 고증을 잘 지키면서 제작을 하고 있다. 그나마 한국 드라마에서 일본식 한자음으로 유명한 것으로는 야인시대의 긴또깡이 있다.
- 중국어를 하는 배역은 대부분 현지인이나 그에 준하는 원어민급 스피커를 캐스팅하면서[95] 꼭 일본어는 일어에 문외한인 한국 배우를 캐스팅해 말하게 하는 못된 풍조가 있다. 일본어가 어순이 한국어와 흡사해서 그런지, 하루이틀 흉내만 내면 발음할 수 있는 양 깔보는 듯한데 이순신 3부작 같이 배우들이 상당히 훈련을 거치고 촬영한 영화도 발음이 어색하기 그지 없고, 그럴 여유조차 없는 사극들은 숫제 귀갱 수준이다.
- 구한말이나 일제강점기가 배경인 사극에 나오는 욱일기는 일본 제국 해군의 것으로 통일된다. 고증에 맞게 하려면 일본 제국 육군과 관련해서는 일본 제국 육군 욱일기가 나와야 한다.
- 일제강점기가 배경인 사극에 나오는 일본군 군가는 해군가인 군함행진곡으로 통일된다. 일본 제국 시절에 군함행진곡을 포함한 일본군 군가가 대중가요처럼 매우 대중적인 노래였다고 하지만 일본 제국 육군이 나오는 장면에서조차 군함행진곡이 나오는 건 올바른 연출이 아니다.
3. 대사
- 네 이놈!!
- 이런 괘씸한 자를 봤나!
- 물렀거라!
- 뭣들 하느냐! 당장 이 ○○을 끌어내지 않고!
- 들라 하라.
- 밖에 아무도 없느냐. / 게 아무도 없느냐.
- 이리오너라
- 주상!
- 주상전하 납시오~[96]
- 전하[97]!
- 나를 따르라
- 천세[98]
- 주리를 틀어라!
- 풍악을 울려라!
- 죄인은 나와서 오라를 받으라!
-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 성은이 하해와 같사옵나이다.
- 황송하옵니다.
- 죽여주시옵소서.
-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 송구하옵니다.
-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 억울하옵니다!
- 저 놈의 목을 쳐라!
- 저 놈을 매우 쳐라!
- 네 죄를 네가 알렷다!
-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 뭐라?
뭬야? - 지가 똑똑히 봤슈
대체로 '정통 사극'의 전형적인 대사들인데 사극의 트렌디화로 최근에는 이런 대사 듣기가 오히려 힘들어졌다. 과거라는 분위기만을 내기 위해서 잠깐잠깐 사용하며, 주인공들의 말투와 억양은 거의 현대어와 다를 게 없다. 오히려 정통 사극 풍의 대사와 억양은 역사를 다룬 영화에서나 엿볼 수 있다 .
[1] 특히 궁예를 연기한 김영철의 경우, 태조 왕건을 제대로 본 적 없거나 인터넷 밈 등으로나 접해봤을 10~20대들에게 궁예로 매우 잘 알려져 있으며, 배우 본인도 이 밈을 즐기고 있다.[2] 실제로 최근 방영된 태조 왕건 유튜브 스트리밍을 본 사람들은 궁예 시절의 태봉이나 후백제 에피소드는 재미있지만, 왕건 즉위 이후 본격적인 고려시대 에피소드로 넘어가면 재미가 크게 줄어든다고 말한다. 주인공과 측근들이 인격적으로 무결하게 그려지다보니, 이야기가 단조로워진다는 것이 큰 이유다.[3] 실제 역사에서도 무신정권 집권자들은 권력을 잡기 전과 후가 확실히 달랐다.[4] 아예 주인공인 정도전이 자기 자신을 괴물이라고 칭하기도 하였고, 자신의 뜻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한해서 철저히 악당이 될 것이라고 선언한다. 특히 이숙번이 자신의 뜻에 반대할 때에 가차없이 응징하던 장면 등으로 이를 상기시킨다.[5] 아예 아내는 어떤 이유를 붙이던 결국 죽으면 뭔 소용이냐는 일침까지 날렸다. 계백이 이름이 남는다 했는데 이 생각을 정면으로 반박한 계백 아내의 대사가 바로 "호랑이는 가죽땜시 뒤지고 인간은 이름 땜시 뒤지는거여! 이 인간아!!!!!"다.[6] 이때 김유신의 대사가 "그래 미칬다. 자슥 죽으라고 보낸 니는 안 미칬나? 제 식구들 쳐 쥑이고 나온 계백이는 제정신이가! 다 미친 기야. 미쳐야 하는 기야. 전쟁은 미친 놈들 짓인 기야! 화랑들을 계속 보내! 꽃은 화려할 때 지는 기야![7] 다만 대장금의 경우에는 의외로 입체적인 묘사를 선보이기도 했다.[8] 노론 음모론을 말한다.[9] 왕건은 이렇다 할 인상적인 밈이 없는 반면 궁예와 견훤은 지금도 인기 밈들이 건재한데다 캐릭터 자체도 궁예는 고결한 영웅이 타락하여 악인이 된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그려냈고, 견훤은 악인보다는 라이벌 포지션으로서 황제로서 인간으로서 장, 단점을 가감없이 보여줬다..[10] 이 경우 분명히 결론을 내릴 수가 없으니 개연성 논쟁이 될 수밖에 없는데, 상식적으로 공주 대접 쪽이 그럴듯한가. 아니면 집에서 수천킬로 떨어진 곳에서 로마인을 만나는 것이 있을 법 한가?[11] 왕의 사랑놀음 때문에 반란군 수장이 군사들 죽이면서 와도 장군들이 손놓고 있었던 적도 있긴 하다.[12] 유럽의 역사를 예로 든다면 일단 신화이기는 하지만 여자 하나 때문에 트로이 전쟁이 일어났고, 모두 일곱 차례 벌어진 이탈리아 전쟁 가운데 4번이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한 프랑스의 라이벌 의식이 발단이 되었다.[13] 실제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이러다가 군단병들이 진짜로 해산되는 바람에 망한 적이 있다.[14] 물론 나아지고는 있으며 유튜브에서도 각종 컨텐츠들이 나오는 등 대중의 관심이 올라가고 있긴 하나, 이걸 방송사가 반영할지는 의문.[15] 고려거란전쟁이 이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려고 했으나, 중요한 대회전급 전투만 그렇게 묘사하고 야전은 모조리 조잡한 난전 개싸움으로 찍어서 시청자들의 큰 반발을 샀다. 특히 작가진이 선배들의 오류를 비난하며 기존 사극 전투신의 악습을 해결하겠다는 상당히 거만하고 패기있는 발언을 해놓고 그 조악한 악습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훨씬 크게 까였다.[16] 전투 상황에 따라 적시에 알맞은 지휘를 하기 위해서는 실시간으로 변하는 전황을 바로바로 파악해야 하는데, 통신 기술이 발전하기 전에는 전령이나 전서구를 보내는 것 외에는 지휘부와 최전선이 서로 연락을 주고받을 수단이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지휘관이 전선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을 경우 적절한 시기에 명령을 내리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옛날 전쟁터의 장군들은 꽤 최전선 가까이에 붙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17] 그리고 과거 전쟁터에서 장교를 할 정도면 징집된 말단 병사와는 달리 평소에도 병법과 무술을 연마하고 좋은 장비를 가진 엘리트 계층인 경우가 많은데, 이들은 졸병과의 전투력 차이가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전선에서 돌파구를 만들거나 망치와 모루 전술에서 망치 역할을 맡는 등 공세적인 행동을 취해야 할 때가 많았다. 그러다보니 고위급 장교라고 해도 상황에 따라서는 직접 칼 들고 뛰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황산대첩 당시의 기록을 보면 이성계가 왜장 아지발도의 투구를 화살로 맞춰 떨궜다느니, 왜장 중 하나가 창을 들고 이성계에게 달려오는 것을 보지 못하자 의형제 이지란이 소리쳐 알렸다느니 하는 말이 나오는데, 당시 이성계는 고려군의 최고 지휘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직접 활 쏘고 칼질하고 다 했다는 걸 의미하는 기록이다. 물론 이성계가 조선의 태조이니만큼 띄워주기 위해 약간의 과장이 들어갔을 수는 있으나, 신립이 여진족과 싸우던 시기에 신립 본인이 직접 화살을 쏘며 돌격했다는 기록이나 원균이 칠천량 해전 직전 장인어른에게 '멀리 있는 왜적은 활로 쏘고 가까이 있으면 철퇴로 죽이면 된다' 운운한 기록 등 최고 지휘관급의 장수들도 직접 싸움에 뛰어드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후대의 기록들도 있기 때문에, 장군이 직접 칼질했다는 기록들을 무조건 뻥이라고 치부하기는 힘들다. 사서에서 조조는 휘하 장졸들과 함께 관도대전에서 오소의 군량고를 지키는 순우경의 수비군을 상대로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치열하게 싸웠다. 그 외에도 서주에서 단양병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들을 수십명 베어가며 탈출했다.[18] 이 때문에 낙동강 전선에서 소대장들은 보통 하루나 이틀만에 전사했고, 사나흘 버티면 많이 버틴 것이며, 한달을 버티면 환갑잔치를 하기도 했다.[19] 실제론 두 양요에서 프랑스, 미군 전사자는 합쳐도 열 명도 채 안 된다.[20] 명량해전 당시 안위의 판옥선에서 백병전이 일어났지 대장선에서 백병전이 일어나진 않았다. 조선군이 도선 백병전을 꽤 자주하긴 했는데 화포로 한번 두들기고, 화전과 궁시로 재차 공격해 확실히 약화시켜 놓은 다음 왜선에 뛰어들었지 처음부터 냅다 백병전을 벌이진 않았다. 애초 영화에선 세키부네들이 너무 크다.[21] 난중일기에 나오는 명량해전에서 조선군 대장선 전사자는 두명이며 조총에 맞아 전사했다.[22] 이 점을 신경쓴다 해도 분명 숨어서 쏘는데 무조건 가슴이나 복부만 피격당한다.[23] 모 사극에선 피 터지는 장면을 촬영할 때 갑옷에 장치를 설치한 뒤 스태프가 몇 미터 거리에서 쏴 터뜨리는 방법을 썼는데, 팔뚝이나 머리에 이 장치를 한다면 단번에 티가 날 것이다. 물론 카메라에는 피격당하는 보조출연자만 나왔다.[24] 이러한 경향은 영화나 드라마 뿐이 아닌 비디오 게임에서도 심하다. 스타크래프트2의 경우 레이너, 타이커스, 워필드 역시 전투 시에는 내리는 걸 확인할 수 있으며, 마앤블이나 스카이림 같은 게임은 투구가 굉장히 중요하게 나타지만 사극이나 워해머, 위쳐등의 창작물이 투구를 안쓰는 이유는 단순히 캐릭터성 강조하기 위함이고 스타2 워필드 역시 블리자드가 절박함을 표현하기위해서 워필드가 히드라와 싸우는 구간에서 바이저를 올리는 부분을 확인 할 수 있다.[25] 고려거란전쟁의 경우 힘써서 만든 장면들에서는 요사 <병제> 등을 세세히 고증해 상당히 괜찮은 무기 고증을 보여주었다. 갑옷이 냉병기를 앞선 시대인 점을 충실히 반영해 거란 병사가 칼이 딜을 못 넣는 고려군의 중갑을 실제 사용했던 곤봉(골타)로 박살내는 장면도 나온다. 향후 사극의 무기 고증 개선이 기대되는 부분.[26] 이 클리셰에서 벗어난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용의 눈물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관료들의 국무회의가 대단히 상세하게 묘사된다. 특히나 태종이 주도하여 세종의 장인이었던 심온을 사사하는 숨가쁜 대목에서도 김종서, 이종무 등을 불러들여 국방 대책을 논의하는 장면을 넣은 것은 칭찬받아 마땅한 부분.[27] 사실 의자왕이나, 선조, 인조, 루이 14세, 하다 못해 네로처럼 일반인들에게 답도 없는 암군으로 알려진 왕들도 사실, 그들의 멍청한 실책으로 알려진 사건과 선택들도 한정된 정보 내에서 상당히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했으나 결과가 따르지 않은 결과물이든지, 의외로 지적인 면모가 있다든지, 나름 한계를 인식하고 상황을 타파하려고 노력했다든지, 무능함이 실제보다 과장됐다든지 하는 경우가 많다.[28] 실제 역사에서는 완전히 정반대다. 당태종이 여왕이라 나라가 어지럽다고 하자 신라 사신은 다만 "예"라고만 답하고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한다.[29] 선역은 아니지만, 같은 드라마의 미실도 당나라 사신이 자신을 모욕하는 말을 하자 반말로 네놈은 나와 대의를 나눌 자격이 없으니 대의를 나누고 싶다면 당 황제인 태종을, 그것도 이름인 이세민이라고 부르며 직접 데려오라고 말한다. 이에 사신이 당나라군에 신라가 짓밟히는 걸 보고 싶냐고 하자 이건 선전포고이니 사신의 목부터 자르면 되겠냐고 물음으로써 사신을 말빨로 완전히 털어 버린다.[30] 21세기를 기준으로 보면 대한민국 정부가 미국에게 단교통보를 한 거나 다름이 없다.[31] 일본 사극도 고증에 충실하긴 하지만 촌마게를 젊은 배우들이 싫어해서 고증에 철저하지 않는 매체에서 덥수룩한 산발의 낭인으로 설정이 애용된다.[32] 다만, 이 머리는 삼국시대에 한하여 고증오류가 아닐 수도 있다. 양직공도를 보면 신라 사신이 상투+장발로 추측되는 머리를 하고 있다. 머리의 반 가량은 위로 올라간 채 관모에 가려져 있는데, 그 아래로는 머리가 치렁치렁하고 부스스하게 늘어져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이 머리를 한다면 얄짤없이 해괴한 머리로 본다.[33] 귓바퀴에 거는 장신구.[34] 목걸이와 팔찌는 삼국시대에 성행했으나 조선시대에 많이 쇠퇴했다.[35] 사실 청나라를 배경으로 한 중화권 사극들도 고증을 철저히 하지 않는 작품들은 배경이 청나라 초중기인데 청나라 말기 복장이 나오는 오류를 범하는 경우가 많으며, 일본 사극들도 고증을 철저히 하지 않았던 과거의 작품들은 배경이 전국시대나 에도 시대 초기인데 에도 시대 중후기 복장이 나오는 오류를 범한 경우가 많다.[36] 조선 전기때의 경우에는 활동성을 중요시 여기는 몽골의 영향을 받은 소매 통이 비교적 작은 요선철릭이 많이 유행했다.[37] 이는 청나라를 배경으로 한 중화권 사극에서 만주족 캐릭터들이 취미삼아 한푸를 입는 모습이 나오지 않는 것과도 (완전히 동일선상에 놓을 수는 없지만) 다소 비슷하다. 한족 민족주의자들의 반만주족 성향과 별개로 만주족 전통의상은 한푸에 비해 입기 편하기 때문이다.[38] 주로 가슴 위로 끌어올려서 입는 형태의 치마인 제흉유군(齊胸襦裙)이 제일 많이 나온다. 뿐만 아니라 브이넥 카라티처럼 옷깃이 양쪽으로 열어젖혀있는 번령포(飜領袍)도 많이 나오는 편. 정작 이 번령포의 경우도 한푸가 아니라 돌궐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호복이다.[39] 완전히 다르게 생긴 갑옷을 입고 있음에도 포니테일이라는 이유로 표절을 주장하거나 앞서 말했듯 한국에서 이미 한참 전에 선보인 머리 스타일과 디자인인데 2017년의 중국 드라마 사진만 가져와 2020년의 한국 드라마가 베꼈다고 주장하는 등 상식적으로 황당한 비교가 많다.[40] 단발머리를 묶은 것. 묶은 다발을 위로 반전시키기도 했다.[41] 머리를 고리 모양으로 만들어 비녀로 고정하거나, 떠구지 모양의 둥근 테로 만들어 장식한 머리.[42] 머리 정수리 부근에 두 개의 상투를 솟게 한 것으로, 머리를 늘어뜨리거나, 땋거나, 머리를 두 갈래로 나눈 것을 구부려 얹거나, 둥근 뿔 모양으로 빗어올린 뒤 천으로 고정시키고 늘어뜨리거나, 땋은 머리를 하여 뒤로 늘어뜨리는 등 다양한 유형이 있었다고 한다.[43] 중앙을 높게 올리고 뒷머리를 늘어뜨린 머리.[44] 삼국시대의 얹은머리는 머리를 그대로 올리고 바싹 붙여 틀어올리거나, 땋아서 틀어올렸다.[45] 자연스럽게 늘어뜨린 머리.[46] 머리를 하나로 묶어 뒤로 늘어뜨리고, 일부를 빼내어 양 볼에 늘어뜨린 머리.[47] JTBC사극 나의 나라가 그나마 이걸 신경썼는데, 작중 인교진은 시커먼 치아에 숫검댕을 여기저기 바른 얼굴을 하고, 주변 인물들도 망건을 못쓰고 상투를 대충 틀어서 떡진머리로 나왔다. 근데 이것도 너무 더러워 보인다는 지적에 후기에는 양치질로 숱검댕을 칠한 치아가 하얗게 바뀌었다.[48] 하지만 이런 KBS마저도 붉은 단심에서는 결국 고증에 맞지 않은 끈으로 고정한 대수머리가 등장했다.[49] 하지만 칠적관 자체가 명나라에서 건너온 일종의 한푸의 소품인 것도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에 최근들어 중국의 한복공정에 자칫 빌미를 줄 수도 있다고 생각되었는지, KBS 대하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는 신덕왕후와 원경왕후가 왕비로 책봉될 때 칠적관을 착용하고 나오지 않았다. 다만 원경왕후의 경우 칠적관만 안 썼을 뿐 적의는 입고 나왔다. 주로 중국의 소분홍들이 "왜 중국의 소품이 한국 사극에 나오냐, 이건 한국이 우리 중국 껄 훔쳐갔다"라는 말도 안되는 주장을 하고 한국에서도 극단적인 민족주의 성향의 네티즌들이 왜 우리 고유의 한복이 안나오고 중국옷이 나오냐고 격앙하는 경우가 있다.[50] 여인천하와 왕과 나뿐만 아니라 8,90년대에 방영했던 조선왕조 오백년 시리즈나 한명회, 조광조 같은 사극에서도 고증에 맞지 않게 대수머리가 나왔는데 이 때는 아직 여말선초식 칠적관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을 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한국 사극에서 여말선초식 칠적관이 최초로 등장한 건 용의 눈물때부터였고, 이후 후속작 왕과 비에서도 용의 눈물에서 최초로 고증되어서 선보여진 칠적관과 적의가 재활용되어 나왔었다.[51] 그나마 취침 장면을 찍을 때는 일반 옷차림이긴 하다.[52] 다만 신하들의 경우에는 일과가 끝나면 평상복으로 있는 경우가 많다.[53]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는 왕의 미복차림이 꽤 자주 등장한다.[54] 사극도 아닌 시대 고증 예능 프로그램인 렛츠고 시간탐험대에서 출연자들이 진짜 당대에 신었던 짚신 같은 신발을 신은 바 있는 데, 연기에 집중하기 힘들 정도로 심한 고통을 호소했다.[55] 짚이나 부들같은 유기질 유물이 1500년이 넘는 세월동안 다수 보존된 것은 놀라운 일이다.[56] 다만 과거에는 수염을 그대로 고증한 경우가 많았다.[57] 대개 입욕문화가 없거나 낮은 수준의 문화권에서 이러한 모습을 보인다. 북유럽의 바이킹, 일본과 같이 입욕문화가 있는 문화권에서는 몸의 잔털, 머리카락, 손/발톱 등을 다듬는 문화가 발달되었다. 고대 입욕문화의 끝판왕인 로마는 더 말할 것도 없다.[58] 흔히 한복 하면 떠오르는 의상이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의 한복인 것처럼, 흔히 기모노 하면 떠오르는 의상 또한 에도 시대 중후기와 일본 제국 초기의 기모노다.[59] 다만 한손검으로 무장하고 방패를 든 병종은 삼국시대 (고구려군의 경우 벽화에서도 확인 가능#) 부터 확인이 가능하므로 그렇게 크게 틀린 사항은 아니다. 물론 고려 초기에 환두대도가 아닌 환도 형태의 칼을 든 팽배수가 나온다면 당연히 오류겠지만 말이다.[60] 다만 천추태후도 초반에는 투구를 좀 썼다.[61] 사실 이것도 연출이 게을러서 생긴 일이다. 일부 작품들은 이런 상황을 대비해 배우 머리보다 일부로 큰 투구를 써서 눈가와 콧대를 그림자로 가리게 한 다음 전투가 끝난 순간 투구를 벗으면서 긴 머리칼이 찰랑이며 곱상한 얼굴을 보이는 식의 연출도 많이 사용했는데, 요샌 그냥 귀찮은지 아예 투구없이 등장시키는 걸 보면...[62] 안악 3호분의 대행렬도를 보면 창병이 12명, 부월수가 10명, 창기병이 8명, 궁수가 8명, 검병이 4명이다.[63] 그나마 배경이 조선시대가 아닌 경우에는 당파가 나오지 않는 경우가 절대다수다. 다만 신돈의 경우 배경이 조선시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당파가 나왔다.[64] 1528년 출생, 1588년 사망. 그러니까 임진왜란 바로 전 시대의 사람이다.[65] 추노나 뿌리깊은 나무에서는 그래도 이 점에 대해 제대로 고증이 들어간 편인데, 뿌리깊은 나무의 경우에는 띠돈으로 허리에 차기도 하고 손으로 들기도 하는데 운검의 경우 손으로 칼을 잡는 경우도 흔했다. 다만 문제는 칼을 두 손으로 받쳐들어야 맞다는 것이지만... 일단 허리춤에 패용하는 것이 나오니 잘 고증했다고 볼 수 있다.[66] 아이러니하게도 일본 작품에 나오는 조선 도검류는 실제 조선시대에는 실전용이 아니라 의장용이었던 양날검 형태가 많다.[67] 다만, 주인공이 중도 수준의 짧은 칼 한자루를 들고 휘두르면 아무래도 모양이 잘 나지 않을테니 칼 길이는 멋을 위한 극적인 허용으로 보는 것이 옳다. 당장 일본 시대극이나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일본도의 경우에도 흔한 우치가타나라기보다는 오오타치에 근접할 정도로 큰 물건들도 자주 표현된다.[68] 이는 일제강점기에 한반도 전통 도검류를 접하기 힘들어지고 조선으로 이주해온 야쿠자들의 일본도나 조선에 주둔하던 일본군의 신군도를 많이 접하게 되면서 한국인들도 동아시아 도검류 하면 일본도를 떠올리게 된 것이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현존하는 환도 유물 중 일본도와 완전히 다르게 생긴 조선 전기 환도보다 일본도의 영향을 많이 받은 조선 후기 환도가 많은 것 또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69] 칼집이라는 건 유사시를 대비해 날을 항상 날카롭게 관리해야 하는 칼을 보호하기 위함도 있지만 반대로 날카로운 칼에 인명이 상하는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존재한다. 때문에 칼이 딱 들어맞도록 만들며 사극에서 흔히 들리는 철커덕 거리는 소리도 나지 않는다. 뽑을 때 역시 '스릉'따위의 날카로운 소리가 아닌 '스륵' 정도의 조용한 소리가 난다. 반대로 그런 소리가 날 정도로 헐렁하다면 애초에 칼집의 존재 의미가 사라진다. 사실, 칼집도 금속으로 만든 서양 군도나 고대 로마군의 검 같은 경우 뽑을 때 쇠와 쇠가 마찰을 하기 때문에 금속성 소리가 나긴 한다. 그러나 칼집의 소재가 다른 조선 환도나 일본도 같은 경우 정말 뽑을 때 거의 소리가 나지 않는다.[70] 다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반론의 여지가 있는 것이, 우리가 흔히 들을 수 있는 칼뽑는 소리나 칼끼리 맞부딪치는 소리들은 촬영 중에 나는 소리가 아닌 촬영 후 편집과정에서 '일부러 집어넣은 것'이다. 이유는 당연히 박력과 연출. 당장에 칼끼리 칭!챙!창! 하면서 싸우는 소리를 안 넣으면 그냥 쇳덩이 부딪히는 틱!택!탁! 정도의 맥빠지는 소리만 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사실과는 달라도 예술적 허용이라고 볼 수는 있을 것이다.[71] 화포에 발사되는 포탄은 무게와 중력가속도가 합쳐진 충격력으로 목표에 피해를 주는 무기지 목표에 맞아 폭발하여 피해를 고폭탄이 아니다. 물론 비격진천뢰 같이 폭발하는 포탄도 조선시대에 실존했지만 어디까지나 일부에 불과했고, 대부분의 조선시대 포탄, 특히 해상전이나 공성전에서 등장하는 포탄은 폭발하지 않는 평범한 쇠공이었다.[72] 명중한 부분이 예를 들어 성벽이어서 돌 파편으로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 포탄 자체가 터져서 피해를 주는 걸로 묘사된다. 불멸의 이순신에서 전투신을 잘 보자.[73] 그 이전에 명도전, 반량전을 비롯해서 중국돈이 쓰인 흔적은 보인다.[74]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화폐를 사용하려면 농업 생산량이 늘어나고 상업이랑 각종 산업이 발달해야 하는데 이때는 그렇지 못했다. 화폐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조선 후기는 이양법의 확대로 농업 생산량이 증대되어 상업을 비롯한 각종 산업이 발달되니까 화폐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75] 물론 이때도 완전히 활성화된게 아니라 개화기에나 가서야 정착이 되었다.[76] "주막이 등장한 것은 조선 후기(정확하게 말하자면 현종 이후 쯤으로 짐작된다.) 때부터일 것이다. 주막은 상공업의 발달을 전제로 해야 한다. 과연 임진왜란 이전에 지방 곳곳에 주막이 출현할 만큼 상품경제가 발달했을까?" ─ 《조선의 뒷골목 풍경》, 강명관[77] 술도 과음시 지장이 가는 건 맞기에 소량만 준비하거나 아예 물이나 음료수로 술을 대체한다.[78] 잔 다르크를 주인공으로 한 서양 사극에서 잔 다르크가 잔 다르크로 불리는 것도 고증오류인데, 실제로 잔 다르크는 살아생전에 주안 다르크로 불렸다. 현대 프랑스어권의 잔(Jeanne)에 해당하는 중세 프랑스어 이름이 주안(Jehanne)이었기 때문이다.[79] 다만 이계인은 SBS 홍길동에서 냉철한 활빈당 간부역을 했고 이희도는 공주의 남자에서 철저한 모략가인 한명회역을 멋지게 연기했다.[80] 당연히 요즘 나오는 담배인 궐련이 아니라 담뱃대다.[81] 가령 '돌격하라!'를 'かかれ!'가 아니라 '突撃(とつげき)!'라고 쓰면 2차 세계대전에나 쓰일 법한 현대어투가 되어버리는데, 이게 아주 꾸준히 사극에 나와서 왜군의 돌격을 일본군의 반자이 돌격으로 만들어버리고 있다.[82] 그 영향인지 한국에서 중화권 사극을 수입할 때도 전근대 중국에서 황실 여인을 부르는 호칭이었던 냥냥을 해당 호칭으로 불리는 사람이 황후든 후궁이든 간에 전부 마마로 번역한다.[83] 상감마노라, 대전마노라, 세제 마노라 등. 마누라 항목 참조.[84] 조선 후기에 마마가 더 높아지면서 세자빈은 '마마'와 '마노라'로 모두 불렸으며, 다른 왕녀와 왕자는 어릴 때 '아기씨', '자가' 모두 가능했다. 나이가 차면 왕녀는 '공주/옹주/현주/군주 자가', 왕자 및 적왕손은 '대군/군 자가'로 불렸다.[85] 그 영향인지 한국에서 중국이 배경인 중화권 사극을 수입할 때도 황족에 대한 호칭을 마마로 번역한다.[86] 춘향전이 대표적인 예인데 변학도는 서얼이긴 하나 양반의 피가 흐르는 기생 성춘향에게 매추부를 요구했다가 거절하자 감옥에 가뒀다.[87] 다만 예술가로서의 기생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들은 자신의 생업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서양의 르네상스 시대 예술가들처럼 높으신 분들의 경제적 후원이 있어야 가능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팔거나 의뢰를 통한 수고비로 생계를 꾸릴 수 있었지만 기생들은 자신의 작품활동이 경제적 이익으로 직결되진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기생들은 암암리에 매춘을 통한 생계와 재산축적을 하기도 하였다. 기생들의 매춘은 여성의 지위가 낮고 할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던 당시 사회상으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장자연 사건, 미투 운동처럼 여성의 지위가 개선된 오늘날에도 여성 연예인들 및 예술계 여성 종사자들이 성 관련 유혹에 시달리는 것을 본다면 과거엔 말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88] 왈자패, 하급 관리, 돈 많은 평민층.[89] 1970년대까지 제작된 초창기 사극 영화에서는 왕이 점잖은 일상대화투의 서울 방언으로 말하는 경우가 많다.[90] 고려 시대에는 어느 정도 여성의 권리가 인정되어 동등한 재산권 행사나 분방한 성생활이 가능했다. 고려거란전쟁에서 완전히 말아먹은 궐안전쟁 파트를 제외하고 강감찬의 부부관계나 천추태후의 캐릭터를 통해 비교적 적절하게 고증했다. 그러나 이것도 남성과 동등한 역할에서 가정 밖에서 사회 활동이나 권력 행사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91] 대표적으로 조선시대 크라운과 어금니 때운 흔적을 인증한 김명민과 조진웅, 용의 눈물에서 PEM 어금니에 씌운 걸 인증한 김영란 등이 있다.[92] 대표적으로 미스터 션샤인의 구동매가 일본어로 자신의 이름을 말할 때 “와타시와 구동매데스(私はグ.ドンメです)”라고 말하는 게 그 예다.[93] 아직 이 때는 창씨개명이 이루어지지 않고 조선인들이 조선식 이름을 갖고 있는 게 허용이 될 때였다.[94] 게다가 이 둘의 경우 올림픽 출전 당시 입고 나온 유니폼에 아예 대놓고 로마자로 각각 “Son Kitei”, “Nan Shoryu”라고까지 적혀 있었다.[95] 다만 중국어를 하는 배역도 간혹 어색한 중국어가 되는 경우가 있긴 하다.[96] 조선시대 이전과 대한제국 시기에는 황상 및 황상폐하로 나왔다. 그리고 '성은'은 '황은'으로 변경.[97] 단, 조선시대 이전(고려 말기 제외)과 대한제국 시기에는 폐하[98] 단, 조선시대 이전(고려 말기 제외)과 대한제국 시기에는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