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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Wilhelm Furtwängler | |
본명 | 구스타프 하인리히 에른스트 마르틴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Gustav Heinrich Ernst Martin Wilhelm Furtwängler |
출생 | 1886년 1월 25일 |
독일 제국 베를린 | |
사망 | 1954년 11월 30일 (향년 68세) |
서독 바덴바덴 | |
국적 | [[독일|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지휘자, 작곡가, 피아니스트 |
활동 | 1906년 ~ 1954년 |
레이블 | EMI, 도이치 그라모폰 |
신장 | 190cm |
링크 | 프랑스 푸르트벵글러 협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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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가 지휘하면 음악이 악보에서 살아 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맥박치는 광대한 공간의 인상에 가장 압도당했어요.
예후디 메뉴인
예후디 메뉴인
1944년 1월 12일에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녹음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가정 교향곡 실황.[1] 거대한 에너지가 요동치며 모든 것을 휩쓰는 듯한 피날레의 후반부가 인상적이다.[2] |
독일의 지휘자, 작곡가.
1922년부터 1954년까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이끈 지휘자로, 생동감과 표현력이 넘치면서 극적인 연주로 인해 선배인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후배인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과 함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휘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작곡가로서는 인지도가 매우 낮긴 하나 후기 낭만주의의 마지막 적통으로 평가받을 만한 작품들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2. 생애
2.1. 젊은 시절
1886년 1월 25일 베를린의 쇠네베르크 자치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아돌프 푸르트벵글러(Adolf Furtwängler, 1853~1907)는 미케네 문명을 위시한 그리스 문명 도자기 양식 연구에 있어서 중대한 업적을 남긴 저명한 고고학자였으며, 어머니 아델하이트 푸르트벵글러(Adelheid Furtwängler, 1863~1944)는 화가였다. 거기다 그의 할아버지의 형, 즉 종조부였던 필리프 푸르트벵글러(Philipp Furtwängler, 1800~1867)는 파이프오르간 제작 회사까지 창립했을 정도로 명망 높은 오르간 제작자였으며, 그 손자이자 푸르트벵글러의 6촌이던 필리프 푸르트벵글러(Philipp Furtwängler, 1869~1940)는 다비트 힐베르트의 제자이자 힐베르트가 존재를 추측한 '힐베르트 유체'의 존재를 증명하는 등으로 유체론(類體論)에 기여한 명망 높은 수학 교수였다.이렇게 명사들이 많던 집안에서 자란 어린 빌헬름은 집안에서는 '빌리(Willy)' 라는 애칭으로 불렸는데, 빌리는 일찍부터 교양인의 기본 소양 격으로 피아노와 바이올린 연주법을 비롯한 기초적인 음악 이론 교육을 받았고, 일곱 살 때 '동물 이야기' 라는 동요를 처음 작곡했고, 9살에는 피아노 소나타, 12살에는 칸타타를 작곡하는 등 푸르트벵글러는 작곡가로서도 신동에 속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권위적이고 체벌이 만연했던 프로이센 특유의 제도권 학교 교육에는 좀처럼 적응하지 못했고, 결국 아버지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당대의 명사들을 초빙한 가정 교육을 시키게 되었다. 당시 상류층에서 자녀를 학교에 보내지 않고 가정교사로 양육하는 것은 어느 정도는 흔한 일이었다. 푸르트벵글러를 가르쳤던 당사 학교 교사들의 회상은 '건방진 아이' 였다는데, 물론 당시 독일 교육이 다소 권위적인 면도 있었지만 푸르트벵글러가 선생님들에게 도전적으로 군 것도 사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술한 것처럼 빌리가 목표한 것은 작곡가였으나, 자신의 작품을 지휘하고 싶다는 욕망 하에 지휘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10대 시절에는 자작곡의 사적인 비공개 연주를 비롯해 몇 차례 지휘대에 서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푸르트벵글러의 공식적인 지휘자 데뷔 공연은 1906년에 있었는데, 집안의 재력과 명성을 이용해 재정난에 빠져 있던 뮌헨의 카임 관현악단(현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을 사실상 임대해서 치른 공연이었다. 참고로 이 때 공연 프로그램은 베토벤의 서곡 '헌당식' 과 자작 교향곡 b단조의 1악장, 그리고 브루크너의 교향곡 제9번[3]이었는데, 20살밖에 안 된 신인 지휘자의 데뷔 연주회 선곡이라 하기에는 자부심이 넘치다 못해 자만심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이 당시 푸르트벵글러는 작곡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불면증에까지 시달릴 정도였는데, 정작 푸르트벵글러의 작품은 물론, 지휘도 처음에는 그다지 좋은 평을 얻지 못했다. 그러던 중 1907년에 아버지가 그리스에서 유적 발굴 도중 열병에 걸려 객사하자 졸지에 가장의 임무를 떠맡게 되었고, 결국 돈벌이가 그럭저럭 수월한 편인 지휘 활동 위주로 진로를 바꿨다. 이후 취리히와 뮌헨, 스트라스부르 등지에서 제3지휘자나 보조 지휘자, 연습 지휘자 등의 연습 기간을 거친 끝에 1911년에 뤼베크의 시립 음악 협회에서 처음으로 음악 감독을 맡았다.
뤼베크 시절에는 자신의 관현악 연주곡 영역을 크게 확장하는 한편, 당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이라는 독일의 두 특급 악단들에서 음악 감독을 맡고 있던 아르투르 니키슈를 만나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1915년에는 만하임의 오페라극장으로 이임했고, 여기서는 오페라 레퍼토리의 확장과 충실도를 높였다.
1919년에는 오스트리아의 빈에서도 빈 톤퀸스틀러 관현악단의 지휘자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1920년부터는 선배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후임으로 베를린 국립가극장의 교향악 연주회를 지휘하거나 빈 악우협회 관현악단을 모체로 새로 조직된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지휘를 맡는 등 점차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2.2.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로
1922년에 선배인 니키슈가 라이프치히에서 타계한 뒤, 니키슈가 이끌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직을 동시에 거머쥐면서 36세라는 젊은 나이에 독일 지휘계의 정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취임했을 당시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과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한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기 때문에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는 하이퍼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며 경제는 파탄에 이르고 있었다. 심지어 베를린 필 단원들은 오페라 반주도 겸하던 빈 필이나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와 달리 오로지 정기 연주회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심각한 경제적인 궁핍에 시달렸다.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푸르트벵글러와 베를린 필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 니키슈가 그랬던 것처럼 적성국인 영국에 이어 프랑스에서 해외 순회공연을 했다. 다행히 우려는 기우에 그쳤고 영국과 프랑스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고, 프랑스 독일 간의 관계를 개선한 공로로 훈장을 받기도 했다. 영국 순회공연은 연례화되었고, 이어 이탈리아 등 유럽 각지에서 연주 여행을 하며 본인과 베를린 필의 명성을 국제화했다. 1920년대 후반에는 미국에서 초청을 받아 뉴욕 필 등을 지휘하기도 했다. 하지만 푸르트벵글러는 자신이 음악적으로 낮게 평가하던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미국에서 열광적인 찬사를 받는 것을 목도하고 미국 청중들에게 크게 실망했다.
이 무렵에 푸르트벵글러는 독일 음반사인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음반 취입도 시작했고, 1927년부터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에 취임했다. 하지만 정상급 오케스트라의 포스트를 세 개나 동시에 맡는 것은 버거운 일이어서 1928년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의 직책을 그만두었고, 1930년에는 빈필 상임 지휘자의 직위도 사임하여 베를린 필에 집중했다.[4] 1931년에는 바그너 오페라의 상연으로 유명한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의 예술 감독으로 임명되는 등 인기와 명성이 절정에 달했다.
2.3. 나치와의 공존
1942년 2월 26일에 리하르트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의 제1막 전주곡을 지휘하는 모습. [5] |
동년 4월 19일에 베토벤 교향곡 제9번을 지휘하는 모습.[6] |
그러나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주도하는 나치가 집권하면서 독일 음악계에도 반유대주의 등의 사조가 득세하기 시작했고, 푸르트벵글러도 나치의 선전물로서 이용 가치를 시험받기 시작했다. 실제로 푸르트벵글러는 헤르만 괴링에 의해 프로이센 추밀원 고문으로 임명되었고, 요제프 괴벨스 휘하의 제국음악협회에서도 부회장 직위를 얻어 독일 음악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하지만 푸르트벵글러는 나치에 우호적이지 않았고 이 때문에 나치와 긴장 관계를 형성했다. 사실 이는 푸르트벵글러의 상관 격이었던 제국음악협회 회장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비롯한 많은 음악인들에게도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문제였다.[7] 결국 괴벨스는 이들을 차례대로 물갈이한 뒤, 제국음악협회를 나치 당원이나 골수 나치 추종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어용 단체로 완전히 개악했다. 어쨌든 푸르트벵글러는 재능이 있는 음악인이라면 아리아인이건 유대인이건 가리지 않고 구제해야 한다고 주장해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등 골수 나치 인종주의자들의 비난 대상이 되었고, 순수 아리아인임에도 유대인 음악가들과 활동하면서 나치로부터 찍힌 작곡가 파울 힌데미트의 최신작인 교향곡 '화가 마티스' 를 초연하고 그 직후 그를 변호하는 논설을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이라는 보수일간지에 싣기도 했다.[8]
결국 힌데미트 사건의 여파로 나치 상층부의 이런저런 압력으로 베를린 필 음악 감독을 비롯한 모든 직책을 사임하고 은거에 들어갔다가 1935년에 자신의 명예 회복과 처우 개선 등을 괴벨스와 협의한 뒤 음악계에 복귀했다. 은거 중에는 미국에서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후임으로 뉴욕 필하모닉의 상임 지휘자 직책을 맡기기 위한 물밑 작업도 있었지만, 이것을 알아챈 나치가 역관광을 보내기 시작했고 푸르트벵글러 자신도 미국 청중들의 음악적 수준을 매우 낮게 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인들은 결코 자신의 음악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 말하며 미국행을 주저하다가 결국 독일에 남기로 결심했다.[9] 사실 푸르트벵글러는 미국 공연에서 꽤 성공을 거두었지만, 토스카니니를 비롯한 선배나 동료 라이벌들의 인기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어쨌든 뉴욕 필 초빙 계획이 무산된 뒤로 미국에서 푸르트벵글러는 '친나치 지휘자'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하지만 미국에서 활동하던 유대인 지휘자 브루노 발터는 비록 푸르트벵글러와 개인적으로 관계가 별로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푸르트벵글러를 비난하는 미국 음악가들의 행태를 비판했다. 푸르트벵글러가 친나치적 인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미국 음악인들이 푸르트벵글러를 매도하는 것은 푸르트벵글러의 존재로 인해 자신의 음악적 영향력과 밥그릇이 줄어들 것을 우려한 속물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한편 푸르트벵글러는 은거 기간 중에 작곡가로서 자신을 나타낼 기회도 얻게 되었고, 두 곡의 바이올린 소나타와 대규모 피아노 협주곡을 완성한 뒤 각각 피아니스트와 지휘자 역할로 초연하기도 했다. 나치 역시 푸르트벵글러를 은퇴시키려는 의도는 아니었기에 곧 나치와 푸르트벵글러는 타협하고 푸르트벵글러는 음악계에 복귀했다. 푸르트벵글러는 베를린 필 연주회를 계속 지휘했지만 공식적으로 상임지휘자 자리에 복귀한 것은 아니었다. 덕분에 푸르트벵글러는 나치의 선전 음악회 출연 요구가 있을 때마다 자신이 베를린 필의 공식적인 수장이 아니라는 이를 거절할 수 있는 명분이 되었다.[10]
1938년에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합병 이후 강제 위기에 처했던 빈 필의 존립에도 적극적으로 기여했다. 푸르트벵글러는 4월 22~23일에 빈 필을 이끌고 베를린에서 히틀러와 괴벨스가 관람하는 가운데 특별 연주회를 열었고, 좋은 반응을 얻어 해산 계획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11]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면서 독일의 음악 활동도 점차 군국주의 지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푸르트벵글러는 나치의 선전 음악회를 여러 번 거절했지만 모든 음악회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몸이 아프다는 핑계 등으로 푸르트벵글러를 대리하여 독일의 여러 젊은 지휘자들이 베를린 필을 이끌고 순회 연주를 지휘하기도 했다. 그러나 푸르트벵글러 본인도 점령지들인 체코나 덴마크 등에서 공연하거나 기쁨을 통한 힘 같은 나치 관제 단체에서 주최하는 자선 공연에 참가해야 했다. 이러한 활동은 베를린 필의 징집 면제 등 특권을 유지하기 위한 조처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전후 '친나치' 라는 의혹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드는 족쇄이기도 했다.
일단 푸르트벵글러는 1942년까지는 매우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1942년 스웨덴 등지에서 연주를 하고 돌아온 푸르트벵글러는 다소간의 심경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스웨덴에서 젊은이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 전장을 체험한 푸르트벵글러는 일종의 뜨거운 애국심 같은 것을 느끼게 되고 이후 전보다 적극적으로 연주활동에 임하게 된다. 소위 푸르트벵글러의 전시 녹음으로 알려진 전설적인 연주들이 대부분 1942년 이후 연주인 것도 이와 궤를 같이 한다.
1943년에 들어서면서 독일 본토도 연합군 폭격기들의 공습으로 털리기 시작했고, 연주회나 오페라 공연도 공습 경보로 자주 중단되기 시작했다. 1943년의 전시 녹음들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오케스트라나 청중들이나 목숨을 걸고 연주한 것들이었다.이 무렵에 자신이 직접 작곡한 교향곡 1번도 초연하려고 했으나, 리허설을 한 번 해보고는 연주를 취소해버렸다. 그러나 1944년 이후 패색이 짙어지자 푸르트벵글러도 1순위 레이드 대상이 된 베를린을 자주 비우게 되었고, 특히 중립국인 스위스에서 객원으로 자주 출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44년 1월 12일에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문서 최상단 영상에 있는 슈트라우스의 가정 교향곡을 연주한 것을 끝으로 1944년 1월 30일에는 구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홀이 연합군의 폭격으로 잿더미가 되어버린다.
1944년에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이 벌어진 뒤에는 그 배후 세력으로 엉뚱하게 의심받기 시작했고, 게슈타포의 비밀 사찰이 시작되면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결국 당시 군수장관이었던 알베르트 슈페어를 비롯한 지인들의 경고와 권고를 받고 1945년 1월에 베를린 필과 빈 필의 연주회에 차례로 출연한 뒤, 1945년 1월 28일에 빈에서 빈 필과 연 연주회[12]를 마친 직후 게슈타포를 피해 2월에 스위스로 피신하는데 성공했다. 만약 푸르트벵글러가 한시라도 늦게 스위스로 도피했더라면 푸르트벵글러는 게슈타포에게 체포될 예정이었다고 한다.
2.4. 종전 후
그러나 패전 후에는 나치 부역자라는 이유로 독일과 오스트리아 입국이 제한되었고, 스위스 내에서도 좌파 정치인들을 비롯한 반나치 성향 인사들의 비난을 받았다. 이러한 곤경 속에서 1945년 10월 18일에 푸르트벵글러는 친구에게 '내 영혼의 유서'라고 말한 교향곡 2번을 완성한다. 이후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 차례로 연합국 군정 당국의 비나치화(또는 탈나치화. denazification) 심사를 통과해 1946년부터 이탈리아에서 지휘 활동을 재개했고, 1947년에는 5월 25일 마침내 베를린 시민들의 열광적인 성원 속에 역사적인 베를린 필과 복귀 연주회를 가졌다.하지만 푸르트벵글러는 전쟁과 종전 후 연주 금지 등을 거치며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고 때문에 복귀 후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등 남미에도 몇 차례나 객원 지휘를 가야 했다. 음반 녹음에도 적극적으로 임했다. 영국의 음반사 데카와 계약하기도 했지만 데카 레코딩 엔지니어들의 작업 방식에 크게 불편한 기색을 보이더니 결국 단발성 녹음으로 끝나고 말았고[13] 이후 EMI와 계약하여 여러 음반을 남겼다. 다만 EMI는 베를린 봉쇄가 발생하는 등 정세가 불안정한 베를린 대신 빈 필과의 세션을[14]추진했기 때문에 전후 푸르트벵글러의 녹음은 주로 빈 필과 이루어졌다.
전후 푸르트벵글러는 친정인 베를린 필과는 의외로 제한된 연주 활동만을 소화했다. 당시 동독의 한복판에 월경지로 있던 서베를린의 정세는 상당히 불안했고, 언제 소련이 서베를린을 점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존재했다. 실제로 1948년부터 1949년까지 베를린 봉쇄가 발생하기도 했다. 한편 1948년 2월 22일에는 스위스에서 망명하던 시절에 작곡한 교향곡 2번을 베를린 필과 함께 초연해서 성공적인 반응을 얻기도 했다.
1949년에는 미국의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에서 파격적인 조건으로 푸르트벵글러에게 상임 지휘자직을 제의했다. 베를린 필의 4배에 달하는 연봉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카고에는 일년에 단 몇주만 체류하면 되는 조건이었다. 이 소식이 미국 음악계에 전해지자 미국에서 활동하던 여러 음악가들이 반나치를 명분으로 대대적인 반대 운동에 들어갔다. 여기에는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나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등의 거물급 음악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태는 시카코 인근 음악계를 넘어서서 전미국 음악계로 확산었는데, 결국 푸르트벵글러 스스로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제의를 거절했고, 미국에서 곤경에 처하게 된 시카고 심포니 측도 푸르트벵글러에 대한 더이상의 구애를 접고 라파엘 쿠벨릭을 후임 지휘자로 내정하면서 사태는 진정되었다. 당시 미국에 체재하던 유대인 음악가들 중 지휘자 브루노 발터와 바이올리니스트 예후디 메뉴인 정도만이 이 반대운동에 참가하지 않았다. 메뉴인은 푸르트벵글러야말로 나치에 저항한 인물이었다면서 그를 적극 옹호했다. 당시 미국에서 가장 명망 높은 유대인 음악가였던 브루노 발터 또한 동료 유대인 음악가들로부터 푸르트벵글러 반대운동 참여를 지속적으로 권유받았지만 끝내 참여를 거부했다.[15]
한편 푸르트벵글러가 제한된 일정만 소화하자 베를린 필 단원들은 푸르트벵글러에게 좀 더 자주 지휘해달라고 부탁하다 못해 반협박조로 탄원하기까지 했다. 거듭된 요청에 심경 변화를 일으켰는지 푸르트벵글러는 1952년에 베를린 필의 음악 감독으로 공식 복귀했다. 아울러 베를린 필 전용 홀 건립 계획에 참여하는 등 다시 의욕적으로 베를린 필에서 활동을 이어갈 듯 했다. 하지만 이 시점부터 자주 폐렴에 걸리고, 거기에 지나친 항생제 남용으로 건강 상태가 더욱 악화되었다.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는 리허설 도중 고열로 공연을 취소해야 했고, 1953년 1월 23일에는 빈 필과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을 지휘하던 중 지휘대 위에서 실신하기도 했다.[16] 거기에 베를린 필에 정식으로 복귀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술한 건강 문제로 여전히 자주 지휘할 수 없게 되자 단원들의 불만도 계속되었다. 게다가 항생제 남용의 부작용 등으로 청력까지 악화되면서 지휘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결국 1954년 9월 19~20일에 베를린 필을 지휘한 베를린 예술 주간의 개막 공연[17] 이 마지막 공식 무대가 되었다. 이후 10월 초까지 빈에서 생애 마지막 음악 작업인 바그너의 오페라 '발퀴레' 의 녹음 작업을 한 뒤 바덴바덴 근교의 에버슈타인부르크 요양소에 입원하다가 동해 11월 30일에 폐렴으로 타계했고, 유해는 하이델베르크의 베르크 묘지(Bergfriedhof)에 있는 어머니의 묘소 옆에 안치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지휘자 칼 뵘은 푸르트벵글러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이제 누가 브람스 교향곡의 파사칼리아를, 누가 브루크너의 아다지오를, 누가 베토벤의 교향곡을 연주할 것인가?'라고 했다.
3. 지휘자로서의 푸르트벵글러
베토벤, 교향곡 5번 (rec. 1947) | 바그너, 성 금요일의 음악 (rec. 1951) | 브루크너, 교향곡 8번 (rec. 1949) |
푸르트벵글러가 지휘하는 모습은 오늘날 관점에서 볼때 독특하다 못해 요상하게 보이는데, 양손을 벌벌 떨듯이 움직이고 상체를 이리저리 휘청이며 박자를 젓는 모습을 보고 '풍선인형 지휘'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이는 '지휘의 모범'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하고 이해하기 쉬운 지휘 동작을 보여줬던 선배 토스카니니와 근엄하면서 스케일이 큰 동작을 보여준 후배 카라얀과는 완벽하게 대비되며, 푸르트벵글러가 장신인데다가 탈모가 있고 지휘 영상이 주로 흑백이어서 이런 모습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이러한 푸르트벵글러의 지휘는 '정확도' 면에서 상당히 위태로워 보이는데, 그래서인지 처음 마주하는 악단들과 연습할 때에는 오히려 악단원들이 더 걱정스럽게 쳐다보거나 의아해하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특히 시작할 때 애매한 동작을 취해서, '단원들이 지휘자를 보고 연주를 하는 것이 아니라 악장을 보고 연주를 했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돌 정도였다고 한다.[18] 이는 어쩌면 푸르트벵글러가 음악원이나 음대 등 정규 과정을 거치지 않고 사교육과 독학에 의지한 덕에 고정된 지휘 기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푸르트벵글러는 정석으로 여겨지는 지휘 스타일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는데, 복잡한 리듬의 곡이나 단원들의 호흡이 딱 맞아 떨어져야 하는 부분에서 절충해 지휘했다고 한다. 푸르트벵글러는 베를린 필이나 빈 필에서 거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았던 지휘자였지만 빈 필의 의장을 지냈던 명바순주자 후고 부르크하우저(Hugo Burghauser, 1896~1982)는 푸르트벵글러의 애매한 지휘와 해석을 매우 싫어했고 대신 정확한 비팅으로 유명했던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에 열광했었다.
그러나 이런 지휘 기법이 푸르트벵글러 음악의 핵심이라고 보는 이들이 많다. 실제로 푸르트벵글러는 어느 지휘자보다도 연습 벌레로 유명했고, 칼같이 맞아 떨어지는 정확성 보다는 음악의 흐름과 여러 악상들이 맞물리는 경과구에서 자연스러움을 나타내기 위해 고심했다고 한다.[19]
그의 지휘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소위 '아고긱(Agogic)'이라고 부르는 템포의 미묘한 변화로 표현력을 풍부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1942년에 녹음한 베토벤 교향곡 9번 실황의 4악장 코다[20]와 1943년 녹음한 브루크너 교향곡 6번 실황[21] 피날레 후반부, 상술한 슈트라우스 가정 교향곡 실황의 4악장 코다를 들어보면 미묘하고 유동적인 속도 조절로 얻어내는 가감속으로 인한 폭풍우가 몰아치는 듯한 효과에 압도당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남아있는 녹음들 중에서는 베토벤이나 브람스, 바그너의 작품에서 이러한 방향이 꽤 효과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단, 바흐나 헨델 류의 바로크 음악과 하이든, 모차르트 류의 고전 음악에서는 다소 호불호가 엇갈리는 편이다. 낭만 시대 작곡가지만 꽤 이질적인 성향의 브루크너에서도 요즘은 '너무 내달리고 거칠다' 는 비판 여론이 많다.
고전적인 독일/오스트리아 계통의 작품 외에도 '현대음악'의 소개를 적극적으로 행한 지휘자이기도 했는데, 녹음으로 남아있지 않을 뿐이지 공연 기록을 살펴보면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나 버르토크 벨러, 모리스 라벨,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파울 힌데미트, 아르놀트 쇤베르크 등 당대에 이름을 날린 중요한 이들의 작품 상당수를 세계 초연 혹은 독일 초연하는 등 꽤 맹활약했다. 이 때문에 보수적인 음악인들이 '현대음악 공연 횟수 안줄이면 알아서 해라' 고 비난하기도 했다고 한다.[22]
다만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현대음악을 올리는 횟수가 많이 줄었다. 일례로 구스타프 말러 같은 경우에는 1920년대까지만 해도 교향곡 1~4번을 연주한 적이 있지만 나치가 정권을 잡은 이후에는 말러의 곡들이 모두 금지곡이 되면서 말러를 지휘하지 못하게 되었고,[23] 전쟁 이후에는 가곡집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24] 와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 딱 두 곡만 가끔 지휘했을 뿐이었다.[25][26]
3.1. 푸르트벵글러와 녹음
녹음 작업을 그리 좋아하지 않은 지휘자로도 알려져 있지만, 이는 사실과는 다르다. 사실 한스 크나퍼츠부슈나 세르주 첼리비다케 등 당대의 다른 지휘자들을 보아도 녹음 작업 자체를 즐기는 지휘자는 많지 않았다.[27] 푸르트벵글러의 경우 종전 후 지휘를 금지당하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경제적인 이유에서 녹음 활동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다만 녹음에 있어서는 상당히 까다로운 지휘자 중 한 명이었다.SP 시대에는 4분 혹은 4분 30초마다 판을 가느라 연주를 중단해야 하는 것에 굉장히 짜증을 많이 냈다고 한다. 이 때문에 1926~27년에 도이체 그라모폰에 취입한 베토벤의 교향곡 5번을 제외하면, 1930년대 중반 까지의 녹음들은 대부분 이런 시간 제한에 크게 구애받지 않아도 되는 관현악 소품들이었다. 하지만 1937년에 HMV(이후 EMI) 독일 지사인 엘렉트롤라와 계약을 맺은 뒤에는 1920년대 중반에 녹음했던 베토벤 교향곡 5번의 재녹음을 비롯해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제6번을 처음 취입하는 등 다시 대곡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데카의 프로듀서였던 존 컬쇼에 따르면 푸르트벵글러는 여러대의 마이크 설치하는 것에 대해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여 한 대 빼곤 모두 치워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런던에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녹음할 때도 매우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어서 중간에 자리를 박차고 나가서 런던 거리를 배회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2차대전 후 독일이 개발/개량했던 오픈릴 테이프와 마그네토폰(테이프 레코더)이 상업용 녹음에도 쓰이기 시작하면서 EMI와 도이체 그라모폰 등에 꽤 많은 양의 녹음을 남겼고, 이들 중에는 지금도 명반으로 손꼽히는 음반들이 많다. 사실 이 음반 작업은 푸르트벵글러에게 끊임없는 짜증을 안겨주었다지만, 일단 수입이 짭짤했기 때문에 이혼한 전처에게 지급하던 생활비나 집세, 사생아와 의붓자식들을 포함한 자녀들의 양육비 등이 절실했던 터라 전쟁 전보다는 녹음에 훨씬 적극적으로 임했다.
공식적인 스튜디오 녹음 외에는 방송국들에서 중계/녹음한 이런저런 실황 음원들도 많은데, 특히 1942~45년에 독일 제국 방송이 테이프로 녹음한 것들은 '전시 녹음(Wartime Recordings)' 이라고 해서 중요하게 취급된다.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연주회의 녹음인 만큼 대부분의 연주에서 극에 달한 텐션과 몰입감을 느낄 수 있고, '푸르트벵글러와 나치와의 관계'라는 논쟁과도 긴밀히 연관되는 물건들이다.
4. 작곡가로서의 푸르트벵글러
원래 작곡가 지망생이었던 만큼 푸르트벵글러는 자신을 '지휘하는 작곡가'로 여겼지만,[28] 비슷한 케이스였던 구스타프 말러와는 달리 푸르트벵글러 작품의 대중적인 인기는 오늘날에도 없다시피하다. 1940~1950년대에도 후기 낭만주의 어법을 고수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안톤 브루크너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의 선배 작곡가들의 작곡 스타일과 상당히 유사해서 독창성이 매우 떨어진다는 평가가 많기 때문이다.푸르트벵글러가 작곡한 작품들의 자필보나 필경에게 의뢰해 만든 필사보 등의 중요 자료는 대다수가 푸르트벵글러 유고로 묶여 취리히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하지만 생전에 출판된 작품은 별로 없고, 1990년대에 와서야 베를린의 음악출판사인 리스 운트 에얼러에서 해당 도서관과 유고 소유권자였던 미망인 엘리자베트의 협력과 승낙을 얻어 공식적인 출판 작업을 시작했으며 푸르트벵글러 작품의 전곡 출판은 2011년에야 완료되었다.
원래 젊었을 적의 푸르트벵글러는 작곡가를 목표로 음악가 생활을 하려고 했으나, 초기 작품들(특히 '테 데움')이 연주에서 그다지 좋은 평을 받지 못한 데다가 생계 문제까지 겹치자 지휘자로 전향하고는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단 한 작품도 만들지 못했고, 1935년에 1시간 20분짜리 피아노 5중주를 만들며 다시 작곡을 시작했으나, 후에 쓴 곡들도 만만치 않은 규모였던 데다가 이미 작곡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큰 명성을 얻게 된 지휘 활동도 병행해야 했기에 피아노 5중주 이후 20여년간 푸르트벵글러가 완성한 곡은 바이올린 소나타 2곡, 피아노 협주곡 1곡, 교향곡 3곡, 이렇게 단 6곡밖에 없을 정도로 극단적인 과작을 했다.[29]
1930년대 이후 작품들은 엄청나게 확대된 규모[30]와 서사 비극을 연상시키는 묵직하고 어두운 성향을 띄고 있는데, 그 때문에 후기 낭만파 음악 애호가들이 종종 찾기도 하는 편이며 특히 교향곡 2번에 대해서는 일부 마니아들 사이에서 '기대 이상의 걸작'이라며 재조명 여론도 활발한 편이다.
상술한 것과 같이 대중적인 인지도는 상당히 떨어지지만, 지휘자로 쌓은 업적을 기리는 목적으로 푸르트벵글러의 자작곡을 연주하는 경우도 종종 있고[31]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푸르트벵글러 팬들이 득시글대는 일본 등지에서는 리바이벌 움직임도 꽤 활발한 편이다.
푸르트벵글러를 존경하는 지휘자들이 푸르트벵글러의 작품을 녹음하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대표적으로 아사히나 다카시[32], 라파엘 쿠벨릭, 로린 마젤, 주빈 메타, 다니엘 바렌보임[33]이 있다. 레너드 번스타인처럼 작곡가로서도 인지도가 높은 경우를 논외로 하면 푸르트벵글러의 작품들은 작곡가로서 유명세가 낮은 지휘자의 작품들치고는 꽤나 좋게 대접받고 있는 셈이다.[34]
4.1. 주요 작품
4.1.1. 교향곡
교향곡 제2번 e단조[35] |
교향곡 D장조 (1903)[미완성]
교향곡 b단조 (1905~08)[미완성]
교향곡 제1번 b단조 (1905~41)[38][39]
교향곡 제2번 e단조 (1944~45)[40]
교향곡 제3번 c#단조 (1946~54) [41][42]
4.1.2. 관현악곡
서곡 Eb장조 (1899)축전 서곡 (1904)
4.1.3. 협주곡
교향적 협주곡 b단조[43] |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교향적 협주곡 b단조 (1924~36)[44]
4.1.4. 실내악
바이올린 소나타 a단조 (1899)피아노 4중주 c단조 (1899)
피아노 3중주 E장조 (1900)
피아노 5중주 C장조 (1912~35)[45]
바이올린 소나타 제1번 d단조 (1935~37)
바이올린 소나타 제2번 D장조 (1938~40)
4.1.5. 피아노곡
피아노 독주를 위한 세 개의 소품 (1902)4.1.6. 합창곡
합창과 관현악 '사라져라, 그대의 어두운 전당이여' (1902)독창, 합창과 관현악 '종교적 찬가' (1903)
독창, 합창과 관현악 '테 데움' (1902~09)
5. 정치적 문제
푸르트벵글러 하면 단골로 제기되는 논쟁 거리로 토스카니니와의 라이벌 관계, 나치 부역 문제다. 전자의 경우 양측 주변인들 사이에서 너무 억측이나 넘겨짚기 등으로 그다지 공감하지 않는 이들도 많지만, 후자는 지금도 여전히 화제 거리로 오르내린다. 푸르트벵글러는 나치 당원이 아니었지만, 어느 나치 당원 음악가들보다도 독일의 음악적 자존심을 상징하는 존재였기 때문에 좀처럼 쉽게 결론이 나기 어려운 흥미로운 논쟁의 대상이다.푸르트벵글러는 나치에 대해 반감을 가졌지만 미국으로 망명하지 않은데는 미국 음악계에 대한 깊은 불신과 실망감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푸르트벵글러는 지휘에 있어 주관적인 해석을 강조하는 대표적인 지휘자로 꼽힌다. 그는 지휘는 제2의 창조작업이며, 악보 이면에 있는 작곡가의 정신을 읽어야한다고 이야기하면서 적극적인 템포 루바토를 구사했다. 푸르트벵글러의 주관적인 지휘의 대척점에 있던 인물이 토스카니니였는데, 푸르트벵글러는 사석에서 지인들에게 토스카니니의 칼박자 지휘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여러차례 보였다. 푸르트벵글러는 또 그런 토스카니니에 열광하는 미국인들을 몹시 경멸했다. 우유부단했던 푸르트벵글러는 지인들에게 미국 망명에 대한 생각을 꺼내기도 했는데, 자신이 미국에 가도 미국인들은 자신의 음악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결국 자신의 음악을 이해할 수 있고, 자신의 지휘를 필요하는 것은 독일뿐이라고 말했다.[46]
푸르트벵글러는 힌데미트 사건 등으로 나치와 대립각을 세우다가 나치에 항의하는 의미로 1935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를 사임했다. 그후 푸르트벵글러는 1942년까지 지휘활동을 자제하는 등 나치와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다. 실제로 푸르트벵글러는 나치를 매우 혐오하여 나치식 경례와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는 물론이고, 아돌프 히틀러에게 보내는 편지에 하일 히틀러라고 서명하는 것도 거절했으며, 히틀러에게 유대인 음악가와 '퇴폐적' 음악가를 보호해달라는 편지까지 보냈다고 한다. 심지어 상단의 히틀러 생일 기념 연주회 기록 영상의 4:37~4:40 부분에서는 요제프 괴벨스와 악수를 하고는 얼마 안 가 악수한 손을 손수건으로 닦는 모습까지 담겨 있다!
그러나 푸르벵글러가 생각을 바꿔서 다소 적극적으로 지휘활동에 복귀한 것은 1942년경부터다. 괴벨스에 따르면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푸르트벵글러는 이때부터 다시 지휘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는 것. 아마도 미국의 참전 등으로 전세가 급격히 기울자, 그래도 망해가는 나라에 대한 애국심이 작용한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 있다. 이때부터 푸르트벵글러는 베를린 필의 정기연주회 뿐만 아니라 전선에서의 위문공연 형식의 콘서트나 이후 크게 문제가 된 히틀러의 생일 콘서트 등에 나서기도 했다. 어쨌든 이 덕분에 오늘날 귀중한 푸르트벵글러의 전시실황 녹음이 남아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푸르트벵글러는 나치의 요주의 인물이었으며, 나치가 푸르트벵글러를 체포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던 1945년 1월 28일, 푸르트벵글러는 빈 필하모닉과의 콘서트를 마친 직후 숙소로 돌아가는 척 하면서 나치 친위대 요원들을 따돌리고 알프스산을 넘어 스위스로 망명했다.
전후 비나치화 심사에서도 가장 쟁점이 되었던 문제였는데, 푸르트벵글러는 자신이 많은 유대인 혹은 유대 혈통의 음악가들을 나치의 마수에서 구해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10대 시절부터 친구였던 작곡가 발터 브라운펠스나 바이올리니스트 칼 플레슈, 베를린 필의 '1/2 유대인 혈통' 단원들을 비롯한 많은 유대인 음악가들이 그의 노력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47] 그러나 이것도 그대로 받아들이기 뭐한 것이, 푸르트벵글러가 '음악에 재능이 있다면 누구든 구원해야 한다' 는 원칙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푸르트벵글러가 후원한 음악가들 중에는 대놓고 골수 나치 당원 혹은 나치 찬동자들이었던 막스 트라프, 칼 횔러, 고트프리트 뮐러, 게르하르트 프로멜, 쿠르트 헤센베르크 같은 작곡가들도 있었다.
또 독일 점령지에서 연주회를 개최한 것도 논란이 되었는데, 푸르트벵글러 자신은 '독일 전차들의 뒤를 쫓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면서 가능한한 이런 기회를 피하기 위해 애썼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체코와 덴마크 공연은 이미 기록상으로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점령지 공연은 아니지만 독일 뿐 아니라 전세계로 방송된 1942년의 히틀러 생일 전야제 기념 공연은 그야말로 크리티컬 히트였다. 푸르트벵글러 사후 50주년이 되었던 2004년에 아치펠(Archipel)이라는 음반사에서 나온 CD가 그 당시 녹음된 디스크를 복각한 물건이라면서 출반되어 이런 논쟁에 다시 불을 붙였는데, 다만 녹음의 진위 여부 등도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푸르트벵글러의 나치 시대 행각은, 절충적으로 보자면 대대로 내려오던 독일 민족주의라는 요소와 '예술가들은 정치에 손을 대서는 안된다' 는 예술지상주의가 푸르트벵글러 자신의 공명심이나 경쟁자들에 대한 시기심과 더해져 빚어낸 일종의 실수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이는 장르를 불문하고 혼란스러운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의 음악인들에게도 공통적으로 제시될 수 있는 문제고, 그런 점에서 반면교사로 볼 수도 있다.
6. 사생활
푸르트벵글러는 1923년에 덴마크 여성인 치틀라 룬트(Zitla Lund, 1886~?)와 결혼했는데, 룬트는 푸르트벵글러와 결혼하기 위해 부유한 남편과 이혼까지 했을 정도로 푸르트벵글러와의 결혼에 열성적이었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관계가 좋았지만, 아내가 불임이라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던 데다가 남편이 하도 사생아를 많이 만들었기 때문에 부부 관계는 점차 악화되어 갔고, 결국 푸르트벵글러는 1931년에 별거를 시작한 뒤 1943년 공식 이혼했다.사실 푸르트벵글러는 결혼 이전에도 이러저러한 여성들과 관계를 가진 바 있었는데, 이는 대부분 여성들 쪽에서 푸르트벵글러의 아이를 갖기 원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 호사가들은 푸르트벵글러의 사생아들이 열 명은 넘을 거라고 수군대기도 했는데, 일단 공식적으로 확인된 사생아들은 빌헬름(1916년. 생모 율리에. 가족성 불명), 다크마르(1920년. 생모 아우구스테 벨라), 프리데리케(1921년. 생모 엘리자베트 후흐), 이바(1923년. 생모 엘제 허친슨), 알무트(1934년. 생모 이르메 슈바프) 다섯 명이었다. 룬트 자신도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평생 콤플렉스로 여겼고, 남편이 다른 여자들과 낳은 사생아들을 대신 키우려고 하기도 했지만 생모들이 모두 거절하면서 무위로 돌아갔다.
두 번째 결혼은 전쟁 막바지였던 1944년에 엘리자베트 아커만(Elisabeth Ackermann, 1910~2013)[48]과 했는데, 아커만도 전 부인이었던 룬트와 마찬가지로 법률가 한스 아커만과 결혼한 기혼자였다. 하지만 엘리자베트의 남편이 1940년 프랑스 침공 때 장교로 참전했다가 오를레앙에서 전사한 뒤, 푸르트벵글러는 본격적으로 그녀에게 프로포즈하기 시작해 결국 결혼에 성공했다. 엘리자베트는 재혼하면서 전 남편과 낳은 자식들도 데려왔고, 푸르트벵글러도 이들의 계부 자격을 수락했다. 결혼 직후 엘리자베트는 아들을 임신했고, 먼저 스위스로 피해 있으라는 남편의 충고에 따라 1944년에 취리히에서 안드레아스라는 아들을 출산했다. 안드레아스가 푸르트벵글러의 유일한 적자이며, 훗날 할아버지처럼 고고학 교수를 지냈다.
이외에 적자가 아닌 사생아들 중에는 딸인 다크마르 벨라가 피아니스트로 활동했고,[49] 엘리자베트가 데려온 아이들 중에는 딸인 카트린 아커만이 배우로 명성을 얻었다. 카트린의 딸인 마리아 푸르트벵글러도 현재 의사 겸 배우로 활동 중이다.
어릴 적부터 혼자놀기 스킬에 충실해서였는지 사교적인 면에서 대단히 서투른 인물이었지만, 하지만 등산이나 하이킹, 테니스, 항해, 수영, 스키 등의 운동을 좋아했던 탓에 체력은 상당히 강했고, 특히 목 근육이 매우 두터웠다.[50] 승부욕도 상당했다고 하는데, 가족들이랑 간단한 게임을 하다가도 지면 화내서 소리를 지르거나 물건을 집어던지기도 했다고 한다. 다만 이런 승부 의식이 병적으로 비뚤게 나간 경우가 꽤 되는데, 카라얀과 빚어진 구질구질한 에피소드[51] 뿐 아니라 브루노 발터나 프리츠 부슈, 클레멘스 크라우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한스 피츠너 등 당대의 다른 유명 지휘자/작곡가들과 관련해서도 이런저런 뒷담화나 바람직하지 않은 막후 경쟁 등의 흑역사가 연출되는 원인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한없는 명예욕과 시기심과는 달리 금전적인 문제가 늘 따라다녔는데, 첫 부인과 별거/이혼하면서 빠져나간 수많은 관련 비용도 있었고 자신이 돌봐야 할 가족이나 사생아들, 구명을 위해 힘쓴 음악인들을 위해 내놓은 지원금도 상당한 액수였다고 한다. 특히 2차 대전 종전 후에 연주 금지까지 당해서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전후 그렇게 싫어했던 녹음 활동을 꽤 자주 하고 남미까지 가서 지휘대에 올랐던 것도 이런 문제가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유력 지식인의 아들이자 대지휘자로 존경을 받던 위치였던 만큼 주변의 지원도 늘 풍부한 상태였고, 나치를 피해 스위스에서 도피 생활을 할 때도 거물급 사업가에게 돈과 집을 후원받는 등의 행운도 누렸다.
아버지의 영향 탓이었는지 육류나 어패류보다는 곡류나 채소, 과일 같이 담백한 음식을 좋아하는 채식주의 성향이었다는데, 다만 유제품이나 달걀은 먹는 락토-오보 비건 성향이었다고 한다. 식사량도 그리 많지 않은 편이었고, 특히 공연이 있는 날이면 날달걀이나 과일, 빵 몇 쪽 등으로 간단하게 때우고 무대에 오르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7. 수상 경력
- 하이델베르크 루프레히트-칼스 대학교 명예 박사 학위 (1927)
- 만하임 명예 시민 (1929)
- 푸르 르 메리트(Pour le Mérite) 문화예술훈장 (1929)
- 프로이센 추밀원 고문 (1933) - 괴링에 의해 수여된 직책. 1935년의 베를린 필 사임 파동 때도 이 직책만은 법에 따라 버리지 못했다.
- 이탈리아 공로훈장 대십자장 (1934) - 베니토 무솔리니가 국왕 대신 수여.
-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코망되르(3급) (1939)[52]
- 독일연방공화국 공로훈장 대십자성장 (1952)
- 빈 모차르트 협회 모차르트 메달 (1952)
8. 저서
푸르트벵글러는 생전에 음악과 관련한 꽤 많은 양의 논설과 수필을 남겼는데, 이것과 관련한 책도 독일에서 몇 권 출판되었다.- 음과 언어(Ton und Wort): 푸르트벵글러가 각 방면의 잡지에 투고한 논문이나 강연에 쓴 대본 32편을 정리한 음악 에세이집. 단순히 음악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에 대해 다룬 글들도 담겨 있다. 사후인 1956년에 출판되었으며, 한국에서는 1987년에 바리톤 가수인 황병덕(黃炳德, 1920~2012)이 번역한 판본이 '음악의 생명력' 이라는 제목으로 삼성미술문화재단에서 문고판으로 출간되었다. 그런데 한국어 번역본 초판은 독일어 원판이 아닌 일본어 번역판을 중역한 것이라 곳곳에 오류가 눈에 띈다.[53] 그리고 책 자체도 푸르트벵글러의 자만심이나, 유대인에 대한 선별적 구제론, 전쟁 책임은 나치에만 있고 독일 국민들은 잘못이 없다는 등의 부적절한 발언 등 시대착오적인 모습들이 종종 나타나는 탓에, 현 시점에서는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54] 그리고 중역본이 나온 지 30년이 넘은 뒤인 2019년에 PHONO 출판사에서 간행하는 '음악의 글' 시리즈의 8번째 작품으로 한국어 완역판이 출판되었다. 번역판 제목은 <음과 말>로 바뀌었고, 번역은 전술한 하프너의 푸르트벵글러 전기를 위시한 다수의 독일 인문서를 번역한 이기숙 번역가가 담당하였다.
- 음악 노트(유고집)(Vermächtnis): 푸르트벵글러가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태로 남겨진 미완성 유고들을 정리해서 1956년에 출판한 책. 전술한 '음과 언어'에는 수록되지 않은 푸르트벵글러의 지휘관에 다룬 논고도 담겨 있다.
- 《음과 말》(이기숙 역, 포노, 2019). 한국어판 《Ton und Wort: Aufsätze und Vorträge 1918-1954》(1954)를 한국어로 번역한 책.
9. 기타
- 우연히도 생몰년이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지휘 활동 기간과 완전히 겹친다. 태어난 해가 토스카니니가 지휘자로 데뷔한 해이고, 사망한 해는 토스카니니가 지휘자를 은퇴한 해이기 때문. 그리고 토스카니니는 자기보다 19년 늦게 태어난 이 독일인 후배보다 3년을 더 살고 1957년에 죽었다.
- 푸르트벵글러는 자신을 '후기 낭만주의자'라 불리는 것을 매우 싫어했고, "나는 낭만주의자도 고전주의자도 아니다."라는 말까지 남겼다.
[1] 썸네일의 1944년 1월 9일 녹음이라는 표기는 오식이다. 참고로 이 녹음은 1944년 1월 30일에 구(舊)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홀이 연합군의 폭격으로 파괴되기 전에 열린 마지막 연주회의 실황 녹음이다.[2] 37:31부터 듣는 것을 추천한다.[3] 사족으로 당시 푸르트벵글러가 연주한 판본은 브루크너가 작곡한 원본이 아니라, 제자인 페르디난드 뢰베가 개악 수준으로 무단 개정한 판본이었다. 물론 이는 브루크너 9번의 원본이 푸르트벵글러가 베를린 필하모닉의 상임 지휘자가 된 후인 1932년 처음으로 공개 연주되고 1934년 출판되었기 때문이다.[4] 빈 필은 애인이고 베를린 필은 아내라는 말을 남겼다.[5] 베를린의 AEG 공장에서 나치 관제 노동 단체인 '기쁨을 통한 힘(Kraft durch Freude)' 의 주최로 열린 베를린 필 노동자 위문 공연 때 독일 주간뉴스가 녹화한 영상이다.[6] 이 연주회는 아돌프 히틀러의 생일 기념 연주회였기 때문에 후술할 '푸르트벵글러와 나치'라는 논쟁에 불을 붙인 격이 되었다.[7]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경우 며느리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손자, 손녀들의 피에 유대인의 피가 섞여 있었고, 이런 '문제'로 손주들이 등교 중에 동급생들에게 구타까지 당하는 상황 속에서 슈트라우스는 손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나치의 의도대로 행동했다. 물론 뒤에서는 가족들의 보호에 앞장서서, 테레진 강제 수용소에 구금된 며느리의 할머니의 석방을 위해 테레진 강제 수용소로 직접 차를 끌고 간 적까지 있었다고 한다.[8] 힌데미트는 이후 계속되는 나치의 탄압을 피해 터키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9] 푸르트벵글러는 미국 청중들의 음악적 수준을 매우 낮게 평가했다. 자신이 미국에서 공연했을 때 공연장의 분위기에 실망했던 것 같고 청중들이 자신의 음악을 제대로 이해 못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던 것 같다. 그리고 자신이 혐오했던 토스카니니가 미국에서 큰 인기를 얻는 것에 대해서도 크게 실망을 했다. 그는 미국인들보다 독일인들이 자신의 음악을 훨씬 잘 이해한다고 믿었고 이것은 그가 끝까지 미국으로 가지 않고 독일에 머물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다.[10] 많은 문헌들에서 1935년의 '복귀' 를 공식 직책의 회복이라고 간주하고 있지만, 공식적인 서류나 문건을 살펴보면 그런 사실에 대한 언급 자체가 없다. 실제로 전쟁 후기에 괴벨스가 베를린 필을 다룬 영화 '필하모니커' 를 찍을 때 푸르트벵글러를 섭외하려고 했지만, 푸르트벵글러는 자신이 악단의 공식적 수장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했다.[11] 이렇게 은혜를 입은 탓인지, 빈 필은 전후 푸르트벵글러와 후배인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사이의 아귀다툼 속에서 푸르트벵글러를 밀어주기도 했다.[12] 레퍼토리는 세자르 프랑크의 교향곡 d단조였으며, 이 연주 역시 당시 녹음이 전해진다.[13] 이 때 데카에서 런던 필과 브람스 교향곡 2번을 녹음하여 음반으로 발매되었다. 하지만 푸르트벵글러 특유의 정적과도 같은 휴지부를 가차없이 자르는 등 푸르트벵글러의 해석을 몰이해한 채 편집한 음반을 출시했다.[14] 빈도 베를린처럼 분단되고 소련 점령지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소련은 베를린 처럼 빈을 봉쇄하거나 하는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중립국으로 남으며 독일과 다시는 통일을 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1955년 통일된다.[15] 훗날에 한 인터뷰에서 브루노 발터가 밝힌 바에 따르면, 비록 자신과 푸르트벵글러는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당시 푸르트벵글러를 반대했던 운동은 반나치라는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미국 음악인들의 자기 밥그릇 지키기에 불과한 싸움이었기 때문에 참여를 거절했다고 한다.[16] 사실 그 연주회 직전, 정확히는 (1953년 1월 15~20일에는 베를린 필이랑 자신의 교향곡 2번과 베토벤의 교향곡 1번을 독일 전역을 순회하며 6일간, 그것도 하루도 빠짐없이 연주하는 엄청난 강행군을 겪었던 상황이었고, 심지어 베토벤 9번은 빈에서 이 연주회 후에도 2번 더 연주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푸르트벵글러 2번과 베토벤 9번의 규모를 생각하면 이 강행군 도중 지치지 않는 게 더 이상하다.[17] 레퍼토리는 자신의 교향곡 2번과 베토벤의 교향곡 1번이었고, 19일자 연주회의 베토벤 1번 녹음이 전해지고 있다. 사실 19일의 연주회는 전체가 녹음되었지만, 푸르트벵글러가 연주가 마음에 안 든다고 자신의 교향곡 녹음 파기를 요구해서 푸르트벵글러 2번의 마지막 자작자연 녹음은 소실되었다.[18] 베를린 필의 경우 푸르트벵글러의 손이 세번째 단추를 지날때 시작했다고도 한다.[19] 실제로 푸르트벵글러는 전후 베를린 필을 이끌었던 세르주 첼리비다케가 베를린 필에 지나치게 정확성을 요구하자 베를린 필을 미국 오케스트라처럼 만들려고 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20] 1:11:36에서 시작. 마지막 15초 동안은 더 이상 빨라질 수 없을 정도로 연주한다.[21] 2~4악장은 전해지나 1악장은 유실된 상태다. 정황상 베를린 함락 후 소련군이 푸르트벵글러의 전시 실황 녹음 테이프를 소련으로 들고 갈 때 운 나쁘게(?) 두고 갔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22] 사실 현대음악을 자주 다룬 것은 자신이 '지휘하는 작곡가' 라고 생각하는 관점에서도 자연스러운 결과였는데, 다만 푸르트벵글러가 다룬 '현대음악'은 쇤베르크의 작품 일부 외에는 무조 계열은 거의 없었고, 대체로 조성음악 등 후기 낭만파 시대까지의 어법에서 벗어나지 않는 보수적인 성향이었다.[23] 말러는 유대인이었다.[24] 녹음 당시에는 신인이었던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와 연주한 말러의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는 당당하게 최고의 명연 중 하나로 꼽힌다. 보통 안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작곡가와 지휘자가 연주한 명연의 대표적인 예.[25] 공교롭게도(?) 말러도 푸르트벵글러처럼 원래 작곡가 지망생이었다가 생계 문제로 지휘자로 전향한 케이스이며, 둘 다 자신을 '지휘도 하는 작곡가'로 여겼지만 생전에 전설적인 지휘자로 찬양받은 것과 작곡가로서는 그다지 인정을 받지 못했단 것도 똑같다. 다만 푸르트벵글러와 달리 말러는 오늘날에는 대중적인 작곡가로 자리잡은 상태이며, 무엇보다 말러는 대중들에게 인기가 부족한 거였지 음악가들에게는 인기가 많았다.[26] 사실 푸르트벵글러는 말러를 교향곡 작곡가로서는 결코 높이 평가하지 않았는데, 만년에 체코 출신의 후배 지휘자인 라파엘 쿠벨릭이 네덜란드의 왕립 콘서트허바우 관현악단을 객원 지휘해 교향곡 제5번을 무대에 올렸을 때도 청중석에서 연주를 들은 뒤 대기실로 찾아가 쿠벨릭에게 "연주는 참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공들여서 연주할 만한 곡인지 모르겠군요." 라고 말하기도 했다.[27] 프로듀서의 차가운 마이크 음성에 따라 반복적으로 연주하는 작업이 썩 즐겁게 느껴지진 않았을 것이다.[28] 독일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푸르트벵글러는 지휘를 '작곡가로서 죽을 위기에 처한 내 삶의 지붕 아래 피난처'로 여겼다고 한다.[29] 이는 말러가 지휘자로 활동하면서 휴가 때에만 틈틈이 작곡을 할 수 있어 자신을 '여름 작곡가'라고 불렀던 것과 비슷하다. 말러도 지휘자로 활동하는 동안 교향곡과 가곡만 작곡했으나 푸르트벵글러에 비해서는 다작한 편이다.[30] 피아노 협주곡과 교향곡 3번은 1시간이 넘어가며, 교향곡 1번과 2번, 피아노 5중주는 1시간 20분 가까이 연주된다.[31] 특히 교향곡 2번이 비교적 잘 알려진 편이다. 그야 푸르트벵글러 2번의 DG 스튜디오 녹음은 전설적인 슈만 교향곡 4번 녹음과 같이 커플링된 상태로 CD가 발매되어 있으니 다만 슈만 4번 녹음이 너무 큰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푸르트벵글러 2번 녹음은 언급도 잘 안된다.[32] 1984년 4월 24일에 오사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교향곡 2번을 일본에서 초연했다.[33] 어릴 적에 푸르트벵글러를 직접 만나 피아노를 연주한 후 푸르트벵글러에게 신동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1971년에 교향적 협주곡을 피아니스트로서 녹음한 적이 있고, 2001년에는 교향곡 2번을 미국에서 초연한 후 당시 실황을 녹음해서 음반으로 냈다.[34] 대지휘자가 작곡한 작품이라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높게 평가받는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구스타프 말러가 그의 작품에 대한 대중적 인지도가 낮던 1950년대까지만 해도 자작 교향곡들이 꾸준히 무대에 올랐다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35] 1948년 10월 18일 실황으로, 특히 4악장의 종결부는 푸르트벵글러 지휘 예술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압도적이다.[미완성] 1악장만 완성되었다.[미완성] 1악장만 완성되었다.[38] 전술한 미완성작인 교향곡 b단조의 1악장을 대폭 개정해서 이 곡의 1악장으로 만들었다.[39] 전술하듯 생전에는 연주되지 못했고, 공개 초연도 1991년에야 이루어졌다. 후대의 평가는 '푸르트벵글러가 버릴 만했다'는 것이 대세.[40] 1951년에 개정되었다.[41] 마지막 4악장이 미완성된 작품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명백히 완성된 곡이다. 다만, 푸르트벵글러 자신은 4악장을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고(4악장을 합창이 들어간 곡으로 대체하려는 생각까지 했지만, 작곡자가 이 곡을 완성한지 3개월 뒤에 사망하면서 이 아이디어는 실현되지는 못했다.), 1956년에 초연될 때부터 한동안은 3악장까지만 연주되었으며, 전곡 초연은 예후디 메뉴인에 의해 1986년에야 성사되었다.[42] 네 악장에 작곡자가 붙인 표제가 있다. 각각 '숙명', '삶', '피안', '투쟁은 계속될 것'.[43] 1939년 1월 19일 실황으로, 특히 1악장의 코다는 작곡자의 초연 후 소감처럼 '커다랗고 충격적인 비극에 대한 전망을 전하는' 듯한 듯한 분위기에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다. 참고로 이 녹음은 이 협주곡의 초고의 현존하는 유일한 전곡 녹음이다.[44] 1954년 개정되었고, 현재는 개정판만 연주된다.[45] 1980년에 초연되었고, 러닝타임이 무려 1시간 20분이나 된다.[46] 이 주제를 놓고서 소설가 토마스 만과 편지로 논쟁을 주고받기도 했는데, 토마스 만은 어느 곳에 가든 나 자신이 바로 독일 문화의 정수 그 자체라고 주장했던 반면, 푸르트벵글러는 독일 문화권 내에 머무를 때에만 독일 문화의 온전한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주장했었다. 문학과 음악 각 분야에 있어 20세기 독일 최고봉으로 평가받는 두 거장들의 차이를 엿볼수 있는 흥미로운 대목이다.[47] 푸르트벵글러의 탈나치화 재판에 참여한 푸르트벵글러측 변호사에 따르면, 푸르트벵글러가 직간접적으로 도와준 유대인 혹은 비유대인 음악가들이 80명이 넘었다고 한다.[48] 워낙 장수했던 덕분에 말년에는 일본 푸르트벵글러 협회의 명예 회장직을 맡았다.[49] 1943년 8월 18일에 개최된 베를린 필의 여름 특별 음악회 때 안익태(당시에는 일본식으로 에키타이 안(Ekitai Ahn)이라고 표기되었다.)와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제20번을 협연하기도 했고, 1949년경에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아버지가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을 다른 지휘자의 반주로 연주한 적이 있다고 한다.[50] 이 덕에 1941년에 스키를 타다가 사고로 중상을 입었을 때도 간신히 목뼈 골절을 피할 수 있었다.[51] 푸르트벵글러는 공적인 자리의 발언이나 서신 교환을 제외하고는 카라얀을 늘 'k' 라고 칭할 정도로 편협함의 극치를 달린 바 있다.[52] 참고로 히틀러는 이 수상 소식을 언짢아했고, 괴벨스도 독일 언론에 공표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수상을 허락했다.[53] 가령 티롤이라는 지명을 가타카나 음역인 치로루라고 그대로 써놓고 있으며, 심지어 저자명에서 빌헬름은 날려먹고 '푸르트 벵글러'라고 적어놨다.[54] 푸르트벵글러에 대한 방대한 평전을 집필한 독일의 평론가 헤르베르트 하프너(Herbert Haffner, 1946~)도 이러한 푸르트벵글러의 모순에 대해서는 냉소적 혹은 비판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참고로 하프너가 저술한 푸르트벵글러 전기는 한국에서는 2007년 마티 출판사에서 한국어로 번역, 출판되었다.[55] 1908년 사진[56] 1912년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