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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9 13:37:53

베네딕토 1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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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교황 문장.svg 가톨릭 교회의 교황
파일:265_benedetto_XVI.png
제264대 성 요한 바오로 2세 제265대 베네딕토 16세 제266대 프란치스코
<colbgcolor=#ffe100><colcolor=#670000>
제265대 교황
베네딕토 16세
Benedictus XVI
Pope Benedict XVI
파일:제265대 교황 베네딕토 16세.jpg
출생 1927년 4월 16일
바이마르 공화국 바이에른주 마르크틀암인
(現 독일 바이에른주 마르크틀암인)
사망 2022년 12월 31일 (향년 95세)
바티칸 시국 교회의 어머니 수도원
재위기간 제265대 교황
2005년 4월 19일 ~ 2013년 2월 28일
서명
파일:베네딕토 16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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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ffe100><colcolor=#670000> 본명 요제프 알로이지우스 라칭거
(Joseph Aloisius Ratzinger)
가족 아버지 요제프 라칭거
어머니 마리아 라칭거
형 게오르크 라칭거
학력 뮌헨 대학교 (신학 / 박사)
신체 175cm
문장 파일:교황 베네딕토 16세 문장.svg[1] }}}}}}}}}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2.2. 진보에서 보수 신학자로2.3. 신앙교리성 장관 시절2.4. 취미 및 특기2.5. 신학적 성향2.6. 교황 후보 경쟁자들2.7. 교황으로서의 삶
2.7.1. 강의 연설 및 발언 사고2.7.2. 여러 가지 면모2.7.3. 교황 측근의 스캔들
2.8. 퇴위
2.8.1. 퇴위(사임) 발표2.8.2. 논란2.8.3. 퇴위2.8.4. 2013년 콘클라베2.8.5. 퇴위 후
2.9. 사망
3. 가족 관계4. 인터넷 밈
4.1. 교황청의 대처
5. 대중매체에서6. 기타

[clearfix]

1. 개요

교황 선출 직후 첫 강복을 하는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는) 허영이나 교만은 전혀 없이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분이다. 스스로 교회를 위해 진정 어린 시중을 들려 했고, 자신의 입을 통해 성령의 말씀을 신자들과 함께 들일 수 있기를 충심으로 바라는 분이다.

페터 제발트[2]

제265대 교황으로, 교황 빅토르 2세 이후 950년 만에 선출된 독일인 교황[3]이자 그레고리오 12세 이후 598년 만에 생전 퇴위한 교황이며, 95세까지 살아 역대 최장수 교황이기도 하다.

신학자 출신 교황으로,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가톨릭 신학자 그룹에[4] 꼽힐 정도의 걸출한 석학으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재위 기간에 오랫동안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직을 맡았고 평생 정통 가톨릭 신앙 수호에 매진해 왔다.

8년간 재위하다가 건강상의 이유로 2013년 자진 퇴위하였는데, 교황은 종신직이기에 당시만 해도 생전 퇴위를 상상하지 못했으므로 베네딕토 16세의 자진 퇴위 발표 시 그 충격은 상당히 컸다. 퇴위 이후에는 '명예교황'이라는 뜻의 'Pope Emeritus'[5]로 불렸으나 2022년 사망하기 전까지 집필과 기도 등으로 소일하며 조용히 지내면서 후임자의 권한 행사에 일절 개입하지 않았다.

비록 일반 대중 사이의 인기는 전임자후임자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의 신앙과 믿음, 학문적 깊이와 성품, 신조를 아는 많은 신자들로부터 퇴위한 이후까지도 상당한 존경을 받고 있다.[6]

명칭 베네딕토는 1차대전 시기에 교회의 중립을 지키고 평화를 위해 노력한 베네딕토 15세, 그리고 베네딕도회의 창립자이자 유럽의 수호성인인 성 베네딕토에게서 따왔다.

2. 생애

2.1. 유년기

1927년 4월 16일, 바이마르 공화국바이에른[7] 지방의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질서경찰이었고, 티롤 출신의 어머니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살아갔는데, 이런 집안 분위기를 따라 어린 라칭거도 가톨릭적 분위기 속에서 자라났다.

1932년 이웃 동네 뮌헨교구의 대주교가 고향마을에 찾아왔을때, 5살의 어린 소년 라칭거는 대주교에게 꽃을 선사하는 화동으로 선발되었다. 이때 고급 승용차를 타고 마을 사람들의 환영을 받는 것을 보고 이를 동경하면서 어린 소년 라칭거도 성직자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이때 친구들에게 "나는 커서 대주교가 될 거야"라고 이야기했다가 "차라리 교황을 하지 그러냐?"는 놀림만 받았다고. 1936년에는 첫영성체를 했는데, 먼 훗날 교황이 되어서도 이 두 가지 경험을 평생 잊지 못하는 순간으로 회고하기도 했다.[8]

파일:external/i30.photobucket.com/YoungJoseph21.jpg
9살 무렵의 요제프 라칭거

파일:_65187712_65187711.jpg
히틀러 유겐트 시절의 증명사진.

흑역사이기는 하지만 어릴 적에 나치 독일히틀러 유겐트 출신이라고 영국의 황색언론 더 선이 폭로한 적이 있고, 실제로 1941년에 가입해 유겐트 대원으로 활동하면서 1943년에는 대공포대에서 복무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는 당시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나치 독일에서 청소년들의 히틀러 소년단 가입은 자유 의사에 관계없는 필수이자 강제였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징병제였기 때문에 소년 요제프 알로이지우스 라칭거에게는 선택의 여지 따위 없었다.[9]

아돌프 히틀러는 미래의 SS를 위한 인재 양성 및 예비 군인을 키우기 위한 청소년 교육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그러한 목적을 위해 창설한 것이 바로 히틀러 유겐트였다. 전쟁 직전이었던 1938년에는 모든 청소년 단체를 해산시키고 히틀러 소년단에 가입시켰다. 게다가 라칭거의 가족들은 아버지가 경찰에 근무한 것을 빼고는 나치에 그리 접점이 없었고, 아버지 역시 공무원이라는 직업적 특성상 어쩔수 없이 정부의 지시를 따를 뿐 나치에 대해서는 "신앙 교리와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그닥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로 인해 상부와 많은 마찰을 빚어 좌천도 잦았다. 가까운 친척형이 T4 작전에 휘말려 살해당했으며, 다른 친척들도 반나치 성향 때문에 다하우 수용소에 끌려가 처형당한 사람도 있다고 한다.

전쟁이 점차 막장이 되어가던 1943년에는, 연합군 폭격기들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독일을 맹폭격했다. 이 때문에 피해가 극심해지자 독일 국방군은 대도시에 대공포대를 증설하는데, 문제는 인력 부족이었다. 남자라곤 1명도 남기지 않고 박박 긁어다가 죄다 전쟁터로 보내고 나니 대공포반 운용 요원이 부족했던 것인데, 때문에 여자, 히틀러유겐트[10], 심지어는 소련군 포로까지 대공포반 인력으로 동원했던 것이다. 유머로 "신사(예비역이던 남자들), 숙녀(여자), 어린이(소년단), 동무(소련군 포로) 여러분~" 이라고 할 정도였다는 말도 있다. 앞서 알려진 가족 사정 외에도 애초에 미성숙한 나이에 강제적으로 복무한 것이기 때문에, 이 경력이 언론에서 크게 논란거리로 지적받지는 않았다.[11]

대공포반에서 라칭거는 초반에는 대공포 사수 역할을 하다가, 이후로는 각 포반별 연락을 맡는 통신병이 되었다. 이후 나치 독일의 패망이 임박하자 히틀러 유겐트 등 나치 조직도 흐지부지 되면서 라칭거 역시 조직을 이탈해 집으로 돌아가다 독일군 패잔병 색출을 나선 미군에 붙잡혀 수용소 생활을 하기도 했다. 미성년자임이 참작되어 귀가조치 된 후로는 여느 청소년 가톨릭 신자들처럼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2.2. 진보에서 보수 신학자로

파일:external/www.papsthaus.eu/mann_der_kirche_h.jpg

바이에른 지방은 16세기 종교개혁 독일에서 가톨릭 신앙을 고수한 지방이었다. 튀빙겐대학 교수 시절 제자였던 마이클 파헤이 신부(예수회)는 "베네딕토 16세는 정신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바이에른 사람이며, 이는 곧 그가 완전한 가톨릭 배경을 가장 선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이 배경에는 의외로 반 나치적인 성향 역시 포함되는데, "나치당의 고향"이었던 바이에른에서 가톨릭 신자들은 의외로 반 나치적인 성향을 가진 인구였기 때문이다.[12]



형 게오르크 라칭거와 함께 사제 서품을 받은 후 1년여 간 고향 본당의 보좌신부로 사목한 것을 제외하면 신학자로서 가장 오랜 시간을 살았는데, 뮌헨 대학과 프라이징 대학을 거쳐 본대학에서 당대 독일 신학계의 위대한 인물들과 교류하며 학문적 탐구에 빠져들었다. 20여 년간 대학교수로 활동하면서, 그는 뛰어난 강연과 저술 등을 쏟아내며 당대 정상급 신학자로 활동했다. 스스로도 신학교수는 자신에게 딱 맞는 자리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당시 나이는 32살에 불과했다.

그의 신학적 사상은 히포의 주교 성 아우구스티노와 성 보나벤투라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다. 그는 "모든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온다"는, 즉 하느님의 은총을 받지 않은 인간 지성에 대해 더욱 부정적인 아우구스티노의 사상을 적극 받아들였다. 자신을 가리켜 '결연한 아우구스티노주의자'라고 칭하기도 하고, 어쩔 수 없이 무인도에 가야 한다면 성경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 2권의 책을 가져갈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후 대학교수 자격 논문을 쓰면서는 보나벤투라의 역사신학을 연구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또 그가 가장 좋아한 현대 신학자는 나치에 강력히 저항했던 로마노 과르디니 신부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아무것도 없다'고 강조해온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 신부도 그가 빠져든 대표적인 신학자였다.

라칭거는 원래는 진보적 성향의 가톨릭 신학자였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가톨릭 교회의 개혁 작업에 참여한 대표적인 개혁적 신학자였다. 얼마나 진보적이었느냐면 "교황은 의사 결정을 하기 전에 교회 안의 다른 목소리도 들어야 한다"고 할 정도였고, 종교재판소의 후신인 성무성성(聖務聖省)의 폐지를 요구하는 연설문의 초안 작성을 한스 큉 신부와 함께 했으며, 대놓고 성무성성 장관인 오타비아니[13] 추기경에게 삿대질까지 하기도 했다.[14]

그러다 프랑스 68운동에 영향을 받아 일어난 독일 대학생들의 시위로 큰 충격을 받고 보수 쪽으로 변화했다. 당시 신마르크스주의적 성향의 급진적인 학생들이 진보적 성향의 교수들까지도 수업을 방해하고 마이크를 빼앗았다고 했는데, 이것이 결정적인 충격이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성경은 대중을 기만하는 비인간적 문헌", "예수에게 저주를!" 등의 전단과 구호가 교정에 난무했던 시절이었다. 그는 회고록에서 "(당시) 나는 무신론적 열정에 사로잡힌 흉한 얼굴, 심리적 불안, 모든 도덕적 성찰을 부르주아의 썩은 냄새라고 내던져 버리는 열등의식, 이런 것들이 베일을 벗는 장면을 목도했다"고 말했다. 교회 내적으로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혁 정신에 열광한 나머지 전체 교회에 대한 인식을 상실했다"고 비판했다.



이후 1977년 주교 서품과 함께 독일 뮌헨-프라이징 대교구 대구장에 임명되어 1982년까지 재직했으며, 사목표어를 'Cooperatores Veritatis(진리의 협력자)'로 정했다.[15] 그리고 같은 해에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사제급 추기경에 서임됐다.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 독일에서 학생신부로 공부하던 시절 인연을 맺은 적이 있다. 당시 독일 뮌스터 대학에 교수로 발령을 받아 교회 쇄신에 관한 강의를 개설해 후배들을 가르쳤는데, 김수환 학생신부가 수강생 중 하나였던 것. 이런저런 질문을 해오는 김 신부와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는데,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이 바티칸을 국빈 방문했을때 베네딕토 16세가 김 추기경의 안부를 물으며 "뮌스터 대학 시절 그가 독일어를 매우 잘해서 많은 대화를 나눈 사이."라고 인증했다. 교수와 학생 사이지만 나이는 김수환 신부가 1922년생으로서 오히려 5살이 더 많았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뮌스터 대학에서 유학 중이던 김종인 전 비대위원장의 자서전에선 이 부분을 조금 다르게 이야기하고 있다. 김 신부의 학사학위 지도를 맡았던 요제프 회프너 교수신부가 독일 뮌스터교구 주교로 수품되어 학교를 떠나게 되어 요제프 라칭거 교수신부가 새롭게 지도를 하게 되었는데, 당시 독일에선 지도교수가 바뀌면 논문을 처음부터 다시 작성해야 하는데다 라칭거 신부가 엄청나게 깐깐하게 굴어서 김 신부가 학업을 포기했다고. 김 추기경의 공식전기에선 "요제프 회프너 교수신부가 떠난 뒤 1년이 넘도록 새로운 교수신부가 배정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포기했다"고 언급된다.

훗날 김수환 추기경은 베네딕토 16세 교황 즉위미사 중에 사제급 추기경들 중 최선임자로서 베네딕토 16세에게 순명 서약을 하게 된다.
즉위미사에서 교황 베네딕토 16세에게 순명 서약을 하는 김수환 추기경

2.3. 신앙교리성 장관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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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6세와 라칭거 추기경, 1977년 6월 27일 요한 바오로 1세와 라칭거 추기경 요한 바오로 2세와 라칭거 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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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신앙교리성 장관으로 발탁돼 바티칸에 입성했다. 그때부터 현대 사회의 무신론, 세속주의와 상대주의, 프리메이슨가톨릭 교회의 근본을 훼손할 우려가 있는 반교회적 주장 및 단체들과 힘겨운 싸움을 벌였다. 남아메리카해방신학 열풍을 잠재우고, 교황무류성에 대한 의혹과 맞서 싸운 게 대표적 예다. 또한 1983년 프리메이슨 단체들에 관한 선언을 통해 프리메이슨에 대한 교회의 단죄를 재확인했다. 그는 훗날 "(신앙교리성에 들어올 때) 로마의 직무 가운데 유쾌하지 않은 임무들은 상당 부분 내가 떠맡아야 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명백했다"고 털어놓았다.

남아메리카에서는 적지 않은 진보 성향의 사제들 및 신학자들이 해방신학을 지지했지만, 교황청에서는 "마르크스주의의 분석도구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고, 복음이 계급투쟁의 이데올로기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며 훈령 자유의 전갈자유의 자각을 통해 거듭 경고했다. 특히 라칭거 추기경은 일부 사제들이 반정부군에 합류하거나 교도권에 정면 도전하는 것을 보고, 이를 "마르크스 혁명의 시초"라고 판단했다. 라칭거는 유명한 해방신학자들을 바티칸으로 소환하여 논쟁을 벌이며 "교회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하지 말라"고 다그쳤던 전력도 있었다.[16] 게다가 교황에 대한 비판은 절대 용납하지 않은 탓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때 함께 했던 진보 신학자인 한스 큉교황무류성 교의를 정면으로 비판하자, 그의 수업 및 저서 출판 금지를 결정하는 데도 관여했다. '전차 추기경' 이란 별명도 이러한 전력 때문에 생긴 것이다.

여성 사제 서품 문제만 하더라도, 교황청은 「논 포수무스(Non Possumus) 등 교령과 사목서한을 통해 여러 차례 불가 입장을 밝혔다. 여성 차별이라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 그는
"여성 사제서품은 우리가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교회의 틀을 (모두 남성인) 12사도로 하셨고, 그 후계자로는 주교와 사제가 있습니다. 교회의 이 틀은 우리가 만든 게 아니라 예수님이 세우신 것입니다. 그에 따르는 것이 순명이며, 오늘날 상황에서는 매우 힘든 순명의 행위입니다."(대담집 「세상의 빛」 230쪽)
라고 말했다. 그리고 신앙교리성 장관시절 교황청 신앙교리성, 경신성사성, 성직자성과 함께 여성 부제서품에 관한 공지를 발표해 "교회의 규율에는 여성 부제서품 가능성이 없으므로, 어느 모로든 부제서품을 위하여 여성 후보자를 준비시키는 교육 계획의 착수는 합법적이지 못하다"고 공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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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1960년대 성혁명이 일어나는 시대적 문화적 조류를 타고 일부 성직자들이 타락하여 아동 성추행이 급증하기 시작했는데, 위 도표에서 주목할 것은 성직자의 아동 성추행 건수와 기소 건수가 급격히 감소하기 시작한 해이다. 바로 1981년도이다. 그 해는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으로 선출된 지 2년째 되는 해이자, 라칭거 추기경이 신앙교리성 장관으로 임명된 해이다. 라칭거 추기경이 신앙교리성 장관직을 맡아 일을 처리하면서 타락한 성직자들의 아동 성추행 건수가 급격히 줄어, 1995년 이후에는 대부분의 쥐구멍이 차단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신학적 오류와 싸우고, 교설(巧說)을 배격, 교회의 부패에 맞서 싸우는 동안, 그에게 중세시대 이단심문관 이미지가 씌워지면서 적지 않은 비난도 쏟아졌다. 그럴 때마다 그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지, 신학자들의 실험장이 아닙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을 올바르게 계승해야 합니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대내외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는 요한 바오로 2세의 재위기간 동안 20년이 넘게 신앙교리성 장관직을 수행하여 신임을 굳게 인정받았다. 일부에서는 이를 빗대어 라칭거를 '요한 바오로 3세'라고 부르기도 했다.

교황청 표준 교리서인 가톨릭 교회 교리서(1992년)와 교리 공식 요약서(2005년)의 편찬을 총괄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교리 공식 요약서는 그가 교황에 즉위한 직후인 2005년에 반포되었다.

추기경 시절에 작성된 각종 서신 등의 영문판에는 RSV 영어성경이 표준 성경으로 인용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NRSV 영어성경과 NAB 영어성경 시편 개정판이 미국 가톨릭에서 전례용으로 승인받은 것을 철회시킨 데 기여한 인물이기도 하다. 참고 영어의 성 중립적 표현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다고 한다. Liturgiam authenticam을 참조할 것. 그나마 NRSV, NAB, NJB 성경의 개인통독, 연구용으로의 인가까지도 철회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의 극보수 성향은 아닌 듯. 사실 NRSV 같은 성경은 개인통독, 연구용으로는 별 문제가 없다는 덧말도 한 바 있다. 다만, 전례용으로서는 다소 문제가 있다는 입장일 뿐.

2.4. 취미 및 특기

개인적으로는 상당한 애묘가. 추기경 시절 길냥이들에게 먹이를 주고 상처를 치료하고 보살폈으며, 고양이에 대한 책까지 쓰려고 했으나(…) 교황으로 선출되어 계획이 무산되었다는 이야기까지 있다. 그의 교황 취임 당시 로스앤젤레스의 한 추기경은 "그분이 고양이를 좋아한다(love)는 소문은 틀렸습니다. 그분은 고양이를 흠모(adore)합니다."라고 증언했다. 진정한 cat-holic.

또한 공부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거의 없었다고 한다. 일례로 독일 뮌스터대학교에 출강하던 시절에 하루는 자전거를 타고 출근했는데, 바지가 자전거 체인에 끼었다고 한다. 그런데 자전거 체인에 낀 바지를 어떻게 빼야 하는지를 몰라서 다리 한 쪽을 자전거에 걸치고 한 발과 두 바퀴로 그대로 학교까지 가서 지나가던 학생에게 바지 좀 빼 달라고 했다고. 학생이 페달을 뒤로 쓱 돌려서 바지를 빼 주었다고 한다. 그래선지 신앙교리성 장관을 맡고 있었던 1997년에는 당시 바티칸 도서관장이었던 라파엘레 파리나 추기경에게 "바티칸 비밀고문서보관소에서 학술 연구에 평생을 바치고 싶다"고 했고, 당시 교황이었던 요한 바오로 2세에게 신앙교리성 장관직 사직서를 제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수준급의 실력을 갖춘 피아니스트이기도 하다.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종종 피아노를 연주하며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조반니 피에를루이지 다 팔레스트리나의 곡들을 좋아한다고 한다. 소싯적에 다소 큰 소리로 쳐서 이웃 주민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고. 교황 선출 다음 날에도 피아노를 치기 위해 옛 거처를 깜짝 방문해 여러 시간 연주할 정도로 피아노에 깊은 애착을 갖고 있다.
피아노로 슈베르트 즉흥곡을 치는 베네딕토 16세

2.5. 신학적 성향

흔히 베네딕토 16세의 신학적 성향이 '보수'라 표현되고 어느정도는 맞는 말이지만, 그의 신학적 성향을 '보수' 두 글자만으로는 압축할 수 없다. 그는 가톨릭은 물론이고 개신교와 정교회, 유대교와 무신론적 입장의 신학자와 철학자들의 의견을 폭넓게 읽고 이를 종합하여 평가한다. 가톨릭 신학의 역사적 변화를 인정하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업적을 충실히 계승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모습은 그의 미지막 저작인 <나자렛 예수>에 잘 드러난다.

다음은 역사비평적 성서주석학에 대한 입장이다.
다시 한 번 반복하지만, 역사비평적 방법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구조상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
-베네딕토 16세, 《나자렛 예수》1권, 바오로딸 출판사, 14쪽

다음은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 대한 입장이다.
그리스도인 독자가 구약의 내적 역동성의 종착점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인식할 때, 이것은 소급적인 인식이며 그 출발점은 본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의 설교를 통해 선포된 신약의 사건들에 있다. 그러므로 유다인들이 본문 안에서 선포된 내용을 보지 못한다고 말해서는 안 되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에 비추어, 그리고 성령 안에서 본문 안에 숨겨져 있던 잉여 의미(surplus de sens)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교황청 성서위원회(위원장: 요제프 라칭거), 《그리스도교 성경 안의 유다 민족과 그 성서》Le peuple juif et ses Saintes Écritures dans la Bible chrétienne, 제2부 가.6.[17]

이 두 가지에서 볼 수 있듯 베네딕토 16세의 신학적 성향은 교도권 내 전통주의 가톨릭 성향 신자들과는 거리가 있으며, 현대 가톨릭 신학의[18] 교과서적 입장에 훨씬 가깝다.

신학자들에 대한 평가도 읽어볼만하다.
Q: 교황님은 어떤 신학자를 최고로 여기나요?
A: 저는 개인적으로 뤼박 추기경님과[19] 발타자르 추기경님을[20] 꼽고 싶습니다.
Q: 교황님은 박사학위 과정에 있는 제자들과의 대화를 항상 미사성제로 시작했습니다. 튀빙겐에서는 상당히 낯선 것이었지요. 또한 교황님은 제자들과 함께 스위스의 개신교 신학자 칼 바르트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관계가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A: 저는 비록 바르트 교수님을 비판하기도 했지만, 쇤겐 신부님에 의해서 이미 그분의 팬이었습니다. 그분은 저를 성장하게 한 신학의 스승 가운데 한 명입니다. 바르트 교수님과의 만남은 그분의 절친한 친구였던 발타자르 추기경님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여행도 했습니다. 그분이 매우 연로해서 깊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그분을 만난 것은 매우 유익했습니다.

Q: 교황님은 그를 매우 존경했나요?
A: 네, 존경합니다. 그리고 그분도 저를 좋아했습니다. 2011년 독일 여행 때 학장인 슈나이더 신부님이 말하기를, 바르트 교수님이 항상 학생들에게 "라칭거의 책을 읽어라!"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마지막 이야기(베네딕토 16세 교황의)》, 페타 제발트 대담 및 정리, 김선태 사도 요한 주교 옮김

종합적으로 말해서, 베네딕토 16세의 신학적 성향이 보수적이라고 할 때 '보수'의 의미는, 수구적이라는 의미보다는 교과서적이라는 의미로 파악해야 한다. 제도권 내 전통주의 가톨릭 성향(19세기~20세기 초 신학)과는 거리가 있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후 현대 가톨릭 신학의 교과서적 입장에 충실한 인물이다.
다만 그 어떠한 정치사회적 입장도 하느님을 넘을 수 없으며, 하느님의 의로움을 좇을 때 사회적 정의도 이루어 진다고 강조하는 점을 보면 해방신학에 대한 그의 태도를 짐작할 수 있다.

2.6. 교황 후보 경쟁자들

다른 그리스도교 종파나 다른 종교에 유화적이었으나 교회 내적으로는 보수적이었던 요한 바오로 2세에 비하면, 비교적 진보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다.

사실 이 사람은 희대의 먼치킨 대전에서 승리한 사람이다. 당시 콘클라베에서 교황 유력 후보로 거론되던 다른 추기경들의 면면을 보자.

이외에도 당대의 내로라하는 능력자들이 나온 그야말로 바티칸 올스타전. 즉, 베네딕토 16세는 이 올스타전의 승리자라는 거다. 물론 따지고 보면 교황이나 추기경쯤 되면 능력자 아닌 사람을 더 찾기 힘들다. 전임자인 요한 바오로 2세, 그리고 후임인 프란치스코 교황도 마찬가지. 전 세계에서 오직 1명만 선발되는 자리이고, 대통령제처럼 임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일반적으로 종신직이니만큼 당연히 능력자 중의 능력자여야 될 수 있는 자리다.[25]

2.7. 교황으로서의 삶

교황 베네딕토 16세를 한마디로 평하면 그의 사목 표어이기도 한 '진리의 수호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신앙교리성 장관 시절부터 가톨릭 교의와 전통적 가르침에 위배되는 사상과 신학적 조류에 한 치의 양보 없이 맞서 싸웠기 때문이다. 교황 재임 8년 동안에는 교회가 세속주의와 상대주의의 풍랑에 흔들리는 것을 막기 위해 애를 썼다. 전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공산주의와 싸웠다면, 베네딕토 16세는 세속주의 및 도덕적 상대주의와 싸웠다고 할 수 있다. 베네딕토 16세의 무기는 뛰어난 지적 능력과 도덕적 강인함, 그리고 날카로운 논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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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언론인 베르나르도 르콩드는 「마지막 유럽인 교황 베네딕토 16세」[26]에서 "교황은 유럽사회가 하느님 때문에 불편해지는 걸 싫어한다면, 이는 세속주의ㆍ냉소주의ㆍ소비만능주의, 그리고 무엇보다 상대주의에 물들어 쇠약해졌다는 뜻이라고 여긴다. 그에게 상대주의는 종교의 가장 큰 적이었다."고 말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언젠가 "교황으로 선출됐을 당시 단두대 도끼날이 내 목에 떨어진 것 같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교황직의 중압감을 허공에서 툭 떨어지는 '도끼날'에 비유할 만도 했다. 그는 콘클라베가 열리기 며칠 전 78번째 생일을 맞았을 때만 해도, 설레는 표정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은퇴계획을 늘어놓았다. 은퇴 나이도 한참 지난 터였다. 그런 마당에 12억 가톨릭 교회의 수장(首長)이라는 중책이 떨어졌으니, 도끼날은 아니더라도 '마른하늘에 날벼락'임에는 틀림없었을 것이다.

그의 평전을 쓴 미국 가톨릭 내셔널지의 바티칸 통신원 존 알렌은 "그를 만날 때마다 수줍음과 넘치는 기지를 가진 매력적인 사람이란 사실을 깨닫는다"고 말했다. 교황 자신도 한 인터뷰에서 "(교황이) 끊임없이 군중 앞에 모습을 보이고 마치 스타처럼 사람들 시선을 받는 것이 정말로 옳은 일인가?"하고 기자에게 반문한 적이 있다. 외모에서 풍기는 인상만 봐도, 그는 군중 앞에서 손을 흔들어 환호에 답하는 스타형이라기보다는 책에 파묻혀 진지한 눈빛으로 뭔가를 연구하는 학자풍이다. 실제 그는 교황 선출 직후 다른 건 몰라도 수십 년 손때 묻은 책과 책장으로 가득한 서재만은 통째로 교황청으로 옮겼다.

한편 베네딕토 16세는 교회의 미래를 결코 장밋빛으로 전망하지 않았다. 이미 추기경 시절부터 그리스도교는 다시 소수 종교가 될 것이라고 말해왔다.
"교회는 가까운 미래에 더 이상 단순히 사회 전체에 해당하는 삶의 형식이라는 지위를 잃을 것이다. 교회는 앞으로 다른 모습을 갖게 될 것이다. 거대 사회와 관계하는 일이 줄어들 것이고, 소수인의 교회가 될 것이다. 신앙에 따라 사는 진짜 독실한 신자들로 이뤄진, 작지만 생명력이 있는 모임의 형태를 띠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교회는 성경 말씀대로, 다시 세상의 소금이 될 것이다."(대담집 「이 땅의 소금」 197ㆍ260 쪽)[27]

일부 타락한 성직자들의 성추문에 대해서도 그는 엄정한 조치를 취했다. 2011년과 2012년에는 아동 성추행을 저지른 성직자가 각각 135명, 67명이 자발적 환속을 했고, 각각 125명, 57명이 사제의 자격을 박탈당하는 처벌을 받았다. 베네딕토 16세의 교황직 말년인 2011년과 2012년 두 해에만, 거의 400명의 사제가 면직된 셈이다. 교황 베네딕토 16세, 아동 성추행 사제 400명 성직 박탈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저서 「전례의 정신」에 비춰보면 오늘날 한국 가톨릭을 포함한 여러 나라의 가톨릭 교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교회의 전례 행위에도 몇 가지 생각해볼 만한 대목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미사 중 전례 무용 공연이나 퍼포먼스식 예물 봉헌, 제대에서 없어지는 십자가, 무릎 꿇는 데에 인색하거나 입으로 받는 영성체가 금지된 줄로 아는 등의 문제다.[28]

최근 들어 큰 행사나 미사에서 전례 무용을 행하는 사례가 빈번해진다. 전례를 준비한 사제나 봉사자들이 무용수들의 아름다운 몸짓기도는 행사의 기쁨이나 미사 은총을 더욱 풍성하게 해준다고 여긴 결과이다. 그러나 교황은 "전례를 매력적으로 구성하려고 댄스 팬터마임을 끼워 넣는다면 박수갈채로 이어지는 일은 있겠지만, 그 전례는 더 이상 전례가 아니다"며 미사전례 중에 춤이 등장하는 데 이견을 보인다.
"어떤 경우든 전례에서 인간의 행위에 대한 박수갈채가 터진다면 그것은 전례의 본질을 상실한, 일종의 종교적 색채가 가미된 오락이라는 증거다. 그런 식의 매력은 오래가지 않는다."

교황은 "미사전례의 핵심, 또는 진정한 행위는 '성찬 기도(oratio)'이며 독서ㆍ성가ㆍ예물준비 같은 외적 행위들은 부차적"이라고 말한다. 전례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라는 말이 이런 외적 행위들을 부각시키라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교황은 "외적 행위들은 본래 많지 않았는데 인위적으로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지적한다.
"(특히 예물준비 과정에서) 연극무대에 등장하는 듯한 행동이나 그 행위자는 전례의 본질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외적 행위들이 본질이 되면 그 본연의 모습인 테오-드라마(Theo-Drama), 즉 하느님의 드라마는 일어나지 않고 일개 패러디로 변형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요즈음 지어지고 있는 성당에서는 십자고상사제와 신자 사이 시야를 가로막는다고 생각하는지 제대 위나 뒤가 아니라 옆으로 비켜 세워둔 경우가 있다. 교황은 이에 대해 "십자고상이 미사를 드리는 동안 방해가 된다는 말인가? 사제가 주님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라며 이의를 제기한다.
십자고상이 제대 한가운데 자리해 사제와 공동체 모두가 함께 바라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공동체는 '주님을 향하여'라는 말에 따르게 된다. 주님은 우리의 구심점이다.
2008년 1월 13일 베네딕토 16세가 시스티나 경당에서 집전한 미사 장면. 사제와 신자들이 서로 마주보는 오늘날 보편적인 모습의 미사와는 달리, 사제와 신자들이 모두 제대 위 십자고상(Ad Orientem; 전례적 동쪽)을 바라보며 미사를 드리는 것이 특징이다. 동쪽을 바라보지 않는 미사에서도 교황은 대부분 제대 가운데 십자고상에 시선을 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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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와 관련하여, 베네딕토 16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전례 개혁을 통해 사제와 신자가 마주보게 되면서 사제(주재자)가 전체의 실질적 구심점이 되고 말았다"는 비판도 하였다. 미사의 방향성을 중요시한 그는 예수 그리스도부활을 상징하는 태양이 뜨는 (우주적 의미를 지닌) 전례적 동쪽을 지향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렇지 못한 경우에도 제대 가운데 십자고상을 배치하여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한국 천주교의 대다수 구성원들은 기존의 무릎 꿇는 동작(이른바 '장궤')이 한국 교구들에서는 손을 합장하고 허리를 깊이 굽히는 동작으로 대체된 줄로 여긴다. 이에 장궤틀도 사라져가고 있다. 몸을 똑바로 세운 채 오른쪽, 혹은 두 무릎을 꿇는 자세가 한국인에게 어색하다는 논리를 근거로 제시한다. 물론 이는 아래의 교황의 견해와 더불어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에도 어긋난다.(자세한 내용은 미사/성찬 전례 문서의 무릎 꿇는 행위를 보존해야 참조.)

무릎을 꿇는 행위에 인색한 위와 같은 세태에 대해 교황은 "신약성경에 무릎꿇기(proskynein)라는 말이 자그마치 59번이나 나온다. 무릎꿇기는 그리스도교적 자세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론적 자세인 셈이다"고 말한다. 또 "현대 문화에 무릎꿇기가 친숙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다시 노력하고 배워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또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한동안 교황이 주례하는 미사에서 교황에게 성체를 받는 이들은 일어선 상태에서 손이나 입으로 성체를 받아 모시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전통적인 방식을 더 선호하는 베네딕토 16세는 신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으로 영성체하는 것을 허락하였다.(「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의 규정에 기반한 자세한 내용은 미사/성찬 전례 문서의 올바른 영성체 규정 문단 참조.) 그 이유에 대해 교황 전례예식을 관장하는 귀도 마리니 몬시뇰은 <로세르바토레로마노>와의 인터뷰에서 "무릎을 꿇어 성체를 영하는 방식은, 성체 안에 현존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더욱 드러낸다"고 밝혔다.
"우리가 미사 전례를 개혁하는데 있어서 제 생각으로는 잘못된 경향이 있습니다. 즉 미사의 전례를 현대 세계에 완전히 맞추려는 '토착화'의 경향입니다. 그러니까 '미사의 전례를 더 짧아져야 한다. 이른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가능한 한 전례에서 빼버려야 한다. 근본적으로 더 단순한 언어로 수준을 낮추어야 한다'고 하는 경향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미사 전례와 미사 전례에 있는 성찬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미사 전례는 내가 어떤 강연을 듣고 이해하는 것과 같이 단순히 이성적인 방식으로 깨닫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의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성찬에 몰입됨으로써만이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성찬은 여느 위원회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말하자면 수천 년의 깊이로부터 그리고 필경 영원으로부터 나에게로 온 그런 성찬입니다."(「이 땅의 소금」 P.208)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오해와는 달리, 트리엔트 미사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도 한 번도 폐지된 적이 없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도 자의교서를 통해 트리엔트 미사의 유효성을 새롭게 확인하였다. 사실 트리엔트 전례 전면 허용 당시 우려의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례 개혁 정신과 개신교와의 교회 일치에 큰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 대표적이었다. 하지만 교황은 "바오로 6세 전례를 '일반 양식'이라고 한다면 트리엔트 전례는 '특별 양식'이라고 봐야 한다"며 "특별 양식을 허용하는 것은 일치를 촉진하고, 교회의 풍부한 전통을 보존하려는 노력"이라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2.7.1. 강의 연설 및 발언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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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바오로 2세 사망 후 교황에 피선될 당시 진보적 신자들은 그의 교황 등극을 못마땅해 했다고 한다. 교황 즉위 후에도 여러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 되었는데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동로마 제국 황제 마누일 2세의 편지를 인용해 이슬람과의 갈등을 일으킨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거기에 적힌 내용은 "무함마드가 가져온 것 중에 선한 것이 어디 있느냐?". 후에 이를 불식시키려고 터키를 방문했는데, 터키 국민들의 시선이 매우 싸늘했다. 정교분리가 철저하다는 터키 국민들도 그럴 정도니. 그런 여론을 의식했는지 베네딕토 16세는 모스크를 방문해서는 무슬림들이 기도할 때 하는 식으로 손을 모으는 모습을 보여줬고, 덕분에 여론이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파이어아벤트가 "갈릴레오 갈릴레이 재판은 문제가 없었다"고 한 말을 인용한 발언 때문에 이탈리아 모 대학에서 강의를 하려던 것이 학생들의 격렬한 항의로 결국 강연을 취소하는 사태도 일어났었다.

사실 이러한 문제들은 언론들의 편협적인 편집 때문에 생긴 경우가 대다수다. 본래 베네딕토 16세가 말하려는 의도는 그게 아니고, 문제가 된 발언들은 단순히 어떤 이야기를 인용한 것인데 이를 언론[29]에서 곡해하여 받아들인 것이다. 위에서 언급된 마누일 2세의 편지 인용 역시 강연 원문은 정확히는 이렇다. #
황제는 '경전 보유자'와 '불신자'를 차별하는 것에 관한 개별 사안을 논의하지 않고, 우리가 받아들이기 힘든, 놀라울 정도로 단도직입적으로 종교와 폭력의 관계에 관하여 매우 간명한 다음과 같은 핵심적인 질문을 하였습니다. “무함마드가 가져온 새로운 것이 무엇인지 보여 달라. 그러면 그가 설파하는 신앙을 칼로 전파하라는 명령과 같은 사악하고 비인간적인 것만 보게 될 것이다.”[30] 황제는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한 다음, 폭력을 통한 신앙의 전파가 왜 비이성적인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폭력은 하느님의 본질과 영혼의 본질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맥락을 매우 주의해서 봐야한다. 즉, "신앙이 폭력으로 전파되어서는 안 된다"라는 맥락에서의 인용이다. "우리가 받아들이기 힘든"이란 표현과 세심한 각주에도 불구하고, 교황은 이 인용을 통해 이슬람가톨릭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물론 "폭력선교 절대불가"는 종교적으로는 매우 양보할 수 없을 만큼 중대하고 주장 자체도 매우 바른 주장이지만, 굳이 이런 소지가 있는 대목을 인용할 필요가 있었는가의 문제에서 비판도 가능하다.[31]

한 대목을 더 보자. 역시 이슬람과 이성적 신학인 가톨릭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는 대목이다. 베네딕토 16세의 오랜 고찰과 학문적 성취, 그리고 신앙에서 우러나온 문장이지만 역시 다른 종교 신자에게는 불편할 수 있는 차이를 강조하고 있는 대목으로, 교황이 이런 '차이'에 대하여 매우 민감했음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해석은 각자 알아서 하자.
무슬림의 가르침에서 하느님께서는 절대적으로 초월적인 존재이십니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어떤 범주에도 얽매이지 않고, 이성의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쿠리 교수는 이와 연관하여 프랑스의 유명한 이슬람 학자인 로제 아르날데의 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이븐 하즘은 하느님께서 당신께서 하신 말씀을 지키지 않으셔도 되고, 인간에게 진리를 계시하실 의무도 없다고 주장하는 데까지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신다면 인간은 우상숭배를 해도 좋다는 것입니다.[32] 바로 이 점에서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은 하느님에 대한 이해 그리고 이에 따른 구체적인 신앙 활동에서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됩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는 말이 있듯, 애초에 연설이 지루한 편이고 일반인이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지식을 많이 인용하는 편이기 때문에 오해가 생길 여지가 큰 편이긴 하다. 그의 강연이나 책을 직접 참고하고 판단하도록 하자. 특히 역대 교황의 강연문들은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 번역을 해 두었다.

실제 정책 전반은 전 교황인 요한 바오로 2세보다 오히려 진보적인 면을 보인다. 사회교리의 측면에서는 시장주의에 대한 반대와 신앙과 양심의 자유 문제를 매우 강조하고 있다. 게다가 무신론를 비판할 때에는 종교 근본주의까지 항상 세트로 비판한다. 어쨌거나 가톨릭은 그 속성상 전부 보수성향이란 점을 염두에 두자.

하지만 위의 전적과 더불어 전임자에 비해 과격한 편이었고, 수시로 치는 발언 사고들로 이미지가 이미 잡혀 있어서 어떻게든 왜곡되는 편. 예를 들어 미국이라크전에 대해 계속 반대 의견을 내왔지만 2008년 미국 방문에서 언급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까이거나, 또는 이라크 전쟁 찬성으로 오인하는 사람들까지 속출했다. 교황청에서 외계인의 존재 가능성을 인정했다는 것 등을 보아도 상당히 개혁적인 면모를 볼 수 있다.

2.7.2. 여러 가지 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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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도 다소 딱딱하고 엄격한 인상을 받는다는 우려를 불식시키려는 듯, 자주 수수한 면모를 드러내며 인간적인 모습을 부각시키고 있다. 로마 시내에서는 지붕 없는 무개차[33]를 직접 운전하고 다니며 시민들에게 손을 흔드는 베네딕토 16세의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또한 성 베드로 광장에서 한 신자가 통화 중이던 휴대전화를 건네주자 교황이 전화기를 받아들고 상대방과 인사말을 나누기도 했으며, 또 다른 신자가 장난삼아 소방관 헬멧을 씌워 주자 헬멧을 벗기려는 경호원들을 제지하며 오히려 환하게 웃자 신자들 사이에서 환호성과 함께 박수가 터져 나왔다.

다른 비판 점으로 콘돔 사용이 있다. 일례로 카메룬을 방문해서 "콘돔을 사용하는 것은 에이즈 예방에 도움이 안 될 뿐 아니라 상황을 오히려 악화시킬 것"이라며 "섹스에 대한 책임감 있고 도덕적인 태도가 에이즈와 싸우는 최선의 방안"이라는 발언을 했는데, 이 발언을 놓고 일각에서는 현실인식 부족이라느니 질내사정 권장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더불어 추기경 시절에는 페미니즘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고 한다. 특히 여성 사제 반대를 명시했었다.

구마 전적도 있다. 2009년 5월 가브리엘 아모스 신부가 악마에 빙의된 마르코와 조반니라는 이름의 남성들을 성 베드로 광장으로 데리고 가서 교황으로부터 강복을 받게끔 하였는데, 교황이 지나치자 갑자기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이를 딱딱 부딪치며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마르코와 조반니는 이후 쓰러져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큰소리로 울부짖었다. 이같은 소동에 교황이 돌아보며 손을 들고 강복하자, 곧바로 악마들이 물러가면서 이들은 이내 정신을 차렸다고 전해진다.

2009년 12월 24일 미사 집전을 위해 이동하던 중 달려든 한 여성 신자에 떠밀려 넘어지는 일이 벌어졌다. 이 여성은 작년에도 달려들다가 제지당한 바 있다고 한다.

2010년에는 영국을 방문했다가, 마침 터진 가톨릭 사제의 아동 성추행 사건 덕분에 리처드 도킨스, 크리스토퍼 히친스, 스티븐 프라이 등 영국 지식인들에게 비판받았다.[34]

2012년에는 교황의 암살 위협을 시사하는 바티칸의 기밀문서가 유출되었다. 2012년 3월 26일부터 28일까지 쿠바를 국빈방문한 자리에서 쿠바 정부에 추가적인 정치개혁을, 구체적으로는 공산독재를 포기하고 민주화할 것을 권고했지만 쿠바 정부는 일언지하에 거부해 버렸다. 그래도 1998년 이후 첫 교황 방문인 데다 제2의 도시산티아고데쿠바의 혁명광장에서 미사를 집전하고 피델 카스트로-라울 카스트로 형제를 모두 친견하는 등 나름의 성과는 있었다.

2012년 4월 8일, 주님 부활 대축일 미사를 전날부터 철야로 집전했기 때문인지 다 쉰 목소리로 미사를 집전하는 등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고 보도되었다. 즉위 7년째에 만 85세의 고령인 데다 지팡이를 짚고 다녀야 할 정도라 건강이 악화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나왔다.[35] 즉위 초기부터 다크서클도 생기고 얼굴은 웃고 있는데 안색 등은 굉장히 피곤해보이던 것을 통해, "고령에 너무 무리한 것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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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역대 교황들이 와인을 즐겨 마신 것과는 달리[36], 베네딕토 16세는 역시 독일인답게 맥주를 좋아한다고 한다. 가장 좋아하는 맥주는 바이에른 전통 밀맥주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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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에 베네딕토 16세의 고향에서는 교황의 사진을 넣은 맥주를 출시하기도 했다. 2015년 이례적으로 자신의 88세 생일에 교황전용 휴양지인 카스텔 간돌포 정원으로 지인들을 초청해 맥주를 대접했다.기사

또한, 독일인답게 축구광으로 유명한데, 고향팀인 바이에른 뮌헨의 열성팬으로 알려져 있다. 2014 브라질 월드컵 결승전에서 독일아르헨티나[37]가 맞붙자 역시나 열성 축구팬으로 유명한 아르헨티나 출신의 프란치스코 교황과의 교황전쟁(?)으로 주목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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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39]

그러나 교황청의 보고에 의하면 프란치스코 교황은 중립을 지키기 위해 경기를 관전하지 않고 결과만 보고받았다고 하며, 베네딕토 16세 교황 역시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어 숙면을 취했다고 한다.[40]

2.7.3. 교황 측근의 스캔들

2012년 5월에는 교황청 내부의 암투와 비리를 폭로한 〈성하(Sua Santita)〉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여기에 제공된 비밀문서를 유출했다는 혐의로 교황의 최측근 집사 파블로 가브리엘이 기소되고, 교황이 임명했던 바티칸 은행장 에토르 토티 고데시가 석연치 않은 이유로 이사회에 의해 해임되는 등 이른바 '바티리크스'가 확산되면서 교황의 리더십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 퍼졌다. 일각에서는 추기경들이 권력투쟁과 부정비리를 저지르면서 교황이 고립되었거나 측근들이 교황을 배신했을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있으며, 최악의 경우 700년 만에 퇴위하는 사태가 벌어질 지도 모른다는 분석까지 나오기도 했다.

이 문제에 대해 2012년 5월 30일 베네딕토 16세는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주례 일반 알현을 마치고 "교황청과 나를 돕는 사람들에 관련된 최근 며칠 간의 사건은 나의 마음에 슬픔을 줬다"고 말했다. 교황은 그러나 "가장 가까이서 나를 도와주는 동료와 내가 성직을 수행하는 데 성실과 희생으로 묵묵히 도와주는 이들에 대해 갖고 있는 신뢰와 격려의 마음을 다시 강조하고 싶다"고 말했다. 교황은 문서 유출 사건을 보도한 언론에 대해서는 "과장되고 불필요한 소문이 교황청에 관한 그릇된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고 비판했다. 교황청 국무차관 안젤로 베치우 대주교는 "교황청 문서를 훔친 일은 단순히 교황청 내부 일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말하는 것으로 믿고 교황에게 글을 쓴 사람들의 양심을 모독한 것"이라 했다. 교황청은 가브리엘레를 비롯한 수십 명을 대상으로 문서 유출 사건을 조사했으며, 수사 대상에 추기경은 없다고 공식 발표하였다.

2012년 12월 3일, 교황이 동월 12일부터 트위터 계정 '@pontifex'를 개설한다는 발표가 나온 지 하루만에 팔로워가 50만 명을 돌파했고, 첫 글을 통해 "친애하는 친구들이여, 트위터를 통해 여러분과 소통하게 되어 기쁩니다. 관대한 반응에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모두를 축복합니다.(Dear friends, I am pleased to get in touch with you through Twitter. Thank you for your generous response. I bless all of you from my heart.)"고 말했다.

2.8. 퇴위

2.8.1. 퇴위(사임) 발표

2013년 2월 11일 오전 11시(바티칸 시간), 교황청 대변인 성명으로 베네딕토 16세가 오는 2월 28일자로 건강문제로 퇴위한다고 발표하여 세계적으로 파문이 확산되었다. 이 날 오전 8시(바티칸 시간)에 교황은 자신의 결정을 교황청 추기경단 회의에서 라틴어로 통보했다.

역대 교황 중에서 퇴위한 예는 1294년 즉위했다가 5개월 만에 추기경들과의 논의 끝에 퇴위한 성 첼레스티노 5세 정도라서, 가톨릭계는 충격에 빠졌다. 물론 가톨릭의 교회법상 교황도 퇴위가 가능하긴 하지만, 교황 측근의 스캔들과 위키리크스의 폭로로 인해 교황의 지도력에 문제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는 와중에 벌어진 상황이다.

기록상으로, 베네딕토 16세는 그레고리오 12세 이후 598년 만에 나온 퇴위 교황이자 역대 3번째 퇴위 교황이 되었다.[41]

<퇴위 조서 전문>
친애하는 형제 여러분, 저는 세 분의 시성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교회 삶에 매우 중대한 결심을 여러분에게 전하고자 이 추기경 회의를 소집하였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거듭거듭 제 양심을 성찰하면서, 저는 고령으로 더 이상 베드로 직무를 수행하기에 맞는 체력이 없다는 확신에 이르렀습니다. 이 직무는 그 영적인 본질에 따라, 말과 행동만이 아니라 그에 못지않게 기도와 고통으로 수행하여야 한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급변하는 세상에서, 신앙생활의 중대한 문제들이 흔들리는 세상에서, 베드로 성인의 배를 이끌고 복음을 선포하려면, 몸과 마음의 힘도 필요합니다. 지난 몇 달 사이에, 저에게 맡겨진 직무를 제대로 수행할 힘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여야 할 정도로 제 자신이 너무 약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행위의 중대성을 잘 의식하고 온전한 자유로, 2005년 4월 19일에 추기경님들의 손으로 저에게 맡겨진 베드로 성인의 후계자인 교황의 직무를 사퇴하며, 이에 따라 2013년 2월 28일 20시부터 로마 주교좌, 성 베드로 좌는 공석이 되고, 관할권자들은 새 교황 선출을 위하여 콘클라베를 소집해야 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친애하는 형제 여러분, 저의 무거운 직무를 저와 함께 져 주신 여러분의 모든 사랑과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제 모든 허물에 대하여 용서를 청합니다. 이제 최고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하느님의 거룩한 교회를 맡겨 드리며, 성모 마리아께서 추기경 교부들이 새 교황을 선출할 때 어머니의 어지심으로 그들을 도와주시도록 간청합니다. 저는 앞으로 기도에 전념하며 하느님의 거룩한 교회를 온 마음으로 섬기고자 합니다. - 바티칸에서 2013년 2월 10일, 교황 베네딕토 16세.

"베네딕토 16세가 퇴위한 후 막후에서 신임 교황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우려가 퍼지자, 교황의 양립으로 미증유의 혼란을 경험했던 교황청에서는 이를 진화하려 노력했다. 또한 교황의 퇴위 발표 직후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에 벼락이 치는 장면이 촬영되어 화제가 되었다.

2.8.2. 논란

베네딕토 16세가 자신을 과도기의 교황이라고 말하면서 몇 년만 재임하고 퇴위하겠다고 발언했다는 이야기도 있어서, 이미 오래 전부터 생각해온 퇴위라는 이야기도 있다. 교황의 나이 역시 음모론이 나오기엔 이미 자진퇴위가 설득력 있는 고령으로, 2012년 초 이미 500년만에 최고령의 나이였다.[42] 2013년 2월 20일에는 교황청 내부 소식통을 통해 교황이 왼눈 시력을 거의 잃었다는 발표도 나왔다.

하지만 워싱턴 포스트는 "베네딕토 16세의 퇴위가 단순히 건강 문제만이 원인은 아닐 것"이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워싱턴 포스트>에 의하면 교황청내의 일부 고위 성직자들의 부정부패와 정실인사를 비판하고 개혁하자는 개혁파의 대표적 인물인 카를로 마리아 비가노 대주교를 베네딕토 16세가 중용해서 개혁을 시도했으나 결국 일부 고위 성직자들이 개혁에 반대했고, 비가노 대주교는 교황청에서 밀려나 미국 주재 교황청 대사로 쫓겨났다는 것이다.

비가노 대주교를 쫓아내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한 인물이 타르치시오 베르토네 교황청 국무원장으로 알려졌으며, 일련의 사태가 결국 베네딕토 16세에게 퇴위를 결심하게 만들었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요컨대, 국무원장과 궁무처장을 겸임한 반개혁파 타르치시오 베르토네가 이탈리아 출신들을 대거 요직에 앉혀 사실상 최고실력자로 군림했으며, 그를 중심으로 하는 이탈리아 출신-교황청 관료-반개혁세력이 온갖 부패와 전횡을 저지름에도 불구하고 교황은 바티칸 내부에서 사실상 고립되어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바티리크스는, 이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교황과 비밀편지를 주고받던 비가노 대주교와, 교황의 집사 파올로 가브리엘레가 조직적으로 비밀편지를 유출한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이는 바티리크스의 배후로 알려진 파올로 가브리엘레 집사가 사상 초유의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8년의 징역형까지 가능했으나 18개월의 징역형만을 선고받고 그나마 2개월 후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사면됐다는 정황에 의해서도 방증됐다. 그리고 사면으로부터 불과 2개월 후 베네딕토 16세가 자진 퇴위 의사를 밝혔다는 것도 단순한 건강문제로 인한 퇴위는 아닐 것이라는 유력한 정황[43]. 한편 베네딕토 16세는 2월 17일 정오 축성식에서 "가톨릭교회의 자정을 위해 영적 싸움이 필요하다"는 언급을 하기도 했다.

이 문제는 베네딕토 16세가 일절 잘못한 게 없다. 전통적으로 이탈리아 출신들이 다수인 교황청에서 혼자 독일 출신인 게 엄청난 핸디캡일 뿐이었다. 굳이 교황청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 정부나 회사의 임원단 등 특정 조직의 수뇌부는 어떤 형태로든 파벌이 존재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베네딕토 16세는 이런 점에서 무지하게 불리했을 뿐이었다. 교황청이나 나토군은 여러 나라의 국적을 보유한 사람들이 상주하는 곳이기에 자신들의 출신국이 곧 자동으로 파벌이 되는 그런 집단인데, 교황청의 경우는 이탈리아 출신이 가장 큰 파벌이다. 그런데 베네딕토 16세는 가톨릭에서 비주류 국가에 해당되는 독일 출신이니, 이런 점에서 한없이 불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설상가상 이탈리아 일간지 《라 레푸블리카》[44]의 보도에 의하면 베네딕토 16세가 교황청 내의 추문에 큰 충격을 받고 퇴위를 결심했다는 이야기가 나와 논란이 되고 있다. <라 레푸블리카>에 의하면 바티리스크 사태 이후 베네딕토 16세는 스페인 출신의 훌리안 에란스 등 3명의 추기경에게 바티리스크 사태에 대한 진상조사를 지시했으며, 이들 추기경들이 베네딕토 16세에게 비밀 보고서를 올려 이것을 읽고 난 베네딕토 16세가 퇴위를 결심했다는 것.

보고서의 내용은 심히 충공깽스러운데, 교황청 내에 동성애로 뭉친 분파들이 존재하며 이들은 여기저기서 밀회를 가졌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이들이 십계명의 제6계명과 7계명을 어겼다고 지적하고 있는데, 6계명은 간음하지 말라는 것이므로 이들의 동성애를, 제7계명은 도둑질하지 말라는 것이므로 이들이 바티칸 은행에서 벌인 수상한 금융거래를 가리킨다는 것. 이 기사가 사실이라면 베네딕토 16세는 매우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기사에는 보고서가 베네딕토 16세의 사택에 보관중이며 후임 교황에게 전달되어 적절한 조치를 취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바티칸은 이 기사에 대해 무대응으로 일관했으나 베네딕토 16세가 재의 수요일 미사에서 "교회 자정을 위한 영적 싸움이 필요하다"는 언급을 한 것이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2011년에 《YOUCAT》이란 이름으로 발간된 청소년·청년용 교리서에서 베네딕토 16세는 다음과 같은 말로 바티칸 내부의 스캔들에 대해 교황이 은유적으로 거론하기도 했다.
최근에 악마의 공격으로 죄가 교회의 내부, 교회의 심장에까지 스며들어 교회 공동체가 깊은 상처를 입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겁니다. 이를 핑계 삼아 하느님의 눈길을 피하려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이요, 교회입니다!
ㅡ 베네딕토 16세, 《YOUCAT》, 최용호 역, 가톨릭출판사, 2012, p.12
하지만 이런 여러 떡밥들도 사퇴의 결정적 이유를 설명하기엔 분명치 않았기에, 이 퇴위 이후에도 여러 얘기가 나돌았다.

2.8.3. 퇴위

차기 교황 선출과 관련해, 콘클라베는 교황직이 공석이 된 후에 15일에서 20일 이후에 개최하는 것이 관례라서 3월 15일에서 19일 사이에 열릴 것이라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베네딕토 16세는 사망이 아닌 퇴위이기 때문에 콘클라베가 빨리 열릴 수 있다는 관측이 나왔다. 가톨릭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인 성주간이 3월 25일부터 시작된다. 교황직이 공석인 상태에서 파스카 성삼일을 지낼 수 없으므로 되도록 빨리 교황을 선출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교황청 내부에서 역시 법률 개정을 확정짓진 않아도 교황 선출관련 현행 교회법을 고쳐서 돌아오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전에 후임자가 선정되길 바라는 목소리가 높았고 2월 23일 교회법을 개정한다는 베네딕토 16세의 공식확인이 있었다. 개정의 명분은 해당 법률이 '교황이 죽을 경우에 치중되어 있다'는 것과 교황위의 권력 공백상태를 최소화하기 위한 베네딕토 16세의 의사가 반영됐다고 한다. 시스티나 성당에서 선거에 참여하지 못하는 추기경들은 각자 체재하는 장소에서 현지 투표를 할 것이고 이들의 표는 성당 내 표결에서 2/3가 개표되기 전까지는 비밀에 붙이는 방식이다.

2013년 2월 27일 바티칸 광장에서 마지막 알현을 진행했다. 본래 겨울에는 실내인 바티칸 홀에서 하지만 베네딕토 16세의 마지막 알현이라는 점 때문에 5만 장의 입장권이 동나버리고 최종적으로 무려 20만 명이 운집해서 이례적으로 성 베드로 대성당 앞 광장으로 옮겨서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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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현을 마치고 떠나는 베네딕토 16세의 뒷모습.

퇴위 당일인 2월 28일, 추기경단과의 마지막 모임에서 "여러분들 가운데 다음 교황이 나올 것입니다. 나는 그분께 조건없는 존경, 순명을 바칠 것임을 이 자리를 빌어 약속드립니다."라고 밝혔다. 세간에서 제기된 막후 조종설을 불식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같은 날 오후 5시(한국 시간으로 3월 1일 새벽 1시)에 헬기로 교황의 여름별장인 카스텔 간돌포로 이동했다. 또한 오후 8시(한국 시간으로 3월 1일 새벽 4시)에 교황을 경호하는 스위스 근위대가 철수하고, 어부의 반지와 납봉 인장을 파기하는 것으로 베네딕토 16세의 재위는 공식적으로 끝났다.

별장에 들어가기 전 마중 나온 신자들에게 교황으로서 한 마지막 인사말은 "나는 이제 순례자로서 마지막 인생 여정을 시작하려 한다"였다. 퇴임 후의 호칭은 '명예 교황(Pope Emeritus)'이며, '성하'라는 존칭도 계속 받을 수 있다. 옷도 현직 교황이 입는 흰색 수단을 입는다.##
CPBC 뉴스 2023년 1월 30일
베네딕토 16세 장례 후, 독일 매체를 통해 베네딕토 16세 사임의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교황직 수행 중에 생긴 불면증이었다고 보도되었다.[45] 이를 해결하려 강력한 수면제를 복용했으나, 그에 따른 부작용으로 기절하고는 직무 수행에 문제가 있음을 절실히 느꼈다고.

2.8.4. 2013년 콘클라베

후임 교황으로 누가 선출될지 여부에 대해 세간의 관심은 최초의 흑인 교황이나 최초의 남아메리카 출신 교황의 선출 여부에 쏠렸다. 사실 베네딕토 16세가 선출될 당시에도 비유럽권 교황에 대한 강한 여론이 있었기 때문에 비유럽권 교황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관측도 있었다. 또 베네딕토 16세가 선출 당시부터 이미 고령이었고 결국 악화된 건강문제로 퇴위한다는 점에서 고령 후보는 기피하고 상대적으로 연소한 60~70대 후보가 각광을 받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흑인 출신 교황 유력 후보로는 피터 코드워 아피아 턱슨(65세)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과 프랜시스 아린제(80세) 추기경이 거론되었지만, 추기경단의 지지여부가 변수이며 아린제 추기경은 여든이라는 고령이 걸림돌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비유럽권 교황 후보로는 캐나다 퀘벡 출신의 마르크 웰레(68세) 교황성 주교성 장관이 거론되었다.

2013년 3월 4일, 바티칸에서 추기경단 전체회의가 시작되었다. 안젤로 소다노 추기경단 수석 추기경이 주재하는 이 회의에서 콘클라베 일정이 결정될 예정인데, 소다노 추기경은 "투표권을 가진 추기경들이 모두 모이기 전까지는 콘클라베 일정을 정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현지 언론들에서는 3월 11일 정도에 콘클라베가 시작될 것으로 전망했다.

그런데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모두 있는 115명의 추기경 전원이 참석한 추기경단 전체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보수파와 개혁파 사이의 갈등과 불화가 심해졌다. 개혁성향이 강한 미국 추기경단과 35년 만에 이탈리아인 교황의 등장을 바라는 이탈리아 추기경들의 갈등이 표면화 된 것. 특히 차기 교황을 유럽인으로 할 것인지 비유럽인으로 할 것인지를 놓고도 파벌이 갈려[46] 콘클라베 시작일이 밀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전임 교황께서는 이런 꼴을 보기 싫어서 퇴임한 걸지도. 미국 추기경단들은 가톨릭 교회의 발목을 잡고 있는 미성년자 성폭행 문제에 대해서 "새 교황은 성폭행을 한 사제들을 가톨릭교회에서 추방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폈다.

새 교황이 어떤 이름을 선택할지의 여부에도 관심이 쏠렸다. 전임 교황과의 연계라는 차원에서는 베네딕토 17세, 진보와 개혁성향의 교황이라는 차원에서 요한 24세, 사회정의 차원의 교황이라면 레오 14세, 가톨릭 교회의 전통을 수호하는 차원의 교황이라면 비오 13세, 서민적 풍모의 교황이라면 요한 바오로 3세 등등의 가능성이 나왔다. 대체로 베네딕토 17세나 요한 바오로 3세가 제일 유력할 것으로 관측되었지만 오히려 차별성을 두기 위해 바오로 6세가 그랬듯이 수백 년 동안[47] 채택되지 않았던 이름을 택할지도 모른다는 등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콘클라베는 3월 12일부터 시작되었다. 당초 15일에서 19일까지 밀릴 수도 있다는 우려가 있었으나, 주님수난 성지주일을 코앞에 두고 콘클라베를 하기가 부담스럽다는 데 추기경들의 의견이 일치한 듯했다. 당시 유력한 후보로 유럽권에서는 밀라노 대주교를 겸한 안젤로 스콜라 추기경[48], 비유럽권에서는 브라질 출신으로 미국 갤버스톤-휴스턴 대주교를 겸한 오딜로 페드로 스체레르 추기경이 거론되었다. 스콜라 추기경은 이탈리아 출신이지만 개혁적 성향을 지닌 인물로 알려져 미국독일권 추기경들의 지지를 받고 있지만, 교황청과의 교류가 제한적이라는 점에서 교황청의 주류 추기경들의 지지를 받을지 불투명한 약점이 있었다. 반면 스체레르 추기경은 교황청 주류 추기경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장점이 있었으며, 중간 이름이 페드로(베드로)라 말라키의 환시를 믿는 오컬트 마니아들은 그가 교황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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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토 16세와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 추기경, 2007년 1월 13일 2013년 3월 13일 오후 7시 6분

그런데 막상 교황으로 뽑힌 이는 전혀 유력 후보로 거론되지 않았던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 추기경(프란치스코 교황)이었다. 그래도 예수회 출신으로 교리면에서는 원칙주의자이며 교황청 내의 비기득권층인 비 이탈리아인이라는 점, 교황명으로 청빈한 삶을 산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이름을 딴 점 등으로 보아 개혁파의 입지가 강해지리라는 전망이 있었으며, 실제로도 화려했던 전통을 중시했던 베네딕토 16세와 차별화된 소박한 행보로 눈길을 끌었다.

2.8.5. 퇴위 후


프란치스코 교황교황으로 선출된 후 2013년 3월, 카스텔 간돌포에 있는 교황 별장을 방문해 베네딕토 16세 전임 교황과 만났다. 현임 교황과 전임 교황의 만남은 거의 600년 만이다. 개인 경당에서 베네딕토 16세는 신임 교황인 프란치스코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고자 상석인 제대 바로 앞자리를 권했지만, 프란치스코는 "우리는 형제다"라고 말하며 베네딕토 16세와 함께 나란히 기도했다.

두 교황은 미사를 마친 뒤 전임 교황의 도서실에서 40~45분간 단둘이 대화를 나눴다. 대화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두 교황의 비밀 대화의 내용은 세계적으로 일고 있는 세속주의, 성소 급감, 오순절주의 운동으로 인한 중남미아프리카 가톨릭 교회의 어려움 등 교황청이 직면한 현안에 관련된 것이라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이날 프란치스코는 베네딕토 16세에게 성모상을 선물했다. 프란치스코는 "(제가 보기에) 당신은 교황으로서 겸손과 온유에 관련된 많은 메시지를 남겼습니다"라고 칭송했고, 베네딕토 16세는 이탈리아어로 연방 고맙다고 화답했다.

2013년 5월 2일, 퇴위 직후 카스텔 간돌포에서 머물던 베네딕토 16세가 바티칸으로 돌아와 마테 에클레시아 수도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같은 해 7월 5일에는 후임 프란치스코 교황과 함께 바티칸 정원에서 열린 성 미카엘 대천사상ㆍ나자렛의 성 요셉상 제막식에 나란히 참석해 축복식을 거행했다. 이날 두 교황은 바티칸을 수호하며 교회에 평화가 올 수 있게 미카엘 대천사와 나자렛의 성 요셉에게 전구를 청하였다.

2014년 4월 27일, 요한 23세요한 바오로 2세시성식에 공동집전으로 참석하였다. 한 자리에 4명의 교황이 모인 역사적인 순간으로 화제가 되었다. 3명만 더 모이면 이제 킹덤하츠가 열린다 그 후 9월 28일 주일에 노인들을 위한 미사에 다시 모습을 보였다. 이날 프란치스코 교황은 베네딕토 16세의 존재를 '집안에 큰 어르신이 계시는 것 같다.'고 언급했다. 이윽고 10월 19일 바오로 6세 교황의 시복식에 다시 공동집전으로 참석했다. 이번에도 3명의 교황이 모인 역사적인 순간이 되었다.

퇴위 후 주어진 '명예교황'이라는 호칭에 부담감이 컸는지 '베네딕토 신부'로 불리기를 바랐지만,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지는 못했다고 한다. 기사 동양식으로 하면 태상교황?

베네딕토 16세는 현재 독서와 손님 접대, 피아노 연주 등 소소한 일상을 누리고 있으며, 새로운 책을 더 이상 집필하지는 않는다고 전해진다.

2016년 7월 1일, 독일 저널리스트 페터 제발트와의 인터뷰 형식으로 기술된 회고록 『마지막 이야기』의 9월 출간을 앞두고, 교황청 내부에 동성애 로비 집단이 존재했으며 이들이 교황청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고 밝혔다.

2017년 4월 16일 만 90세 생일 때는 건강이 보행 보조기에 의지해 걷는 등 신체는 점점 쇠약해지고 있으나 전과 다름 없이 책을 읽고, 사유하는 등 정신은 여전히 명료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생일 다음날인 17일에는 고향인 바이에른주에서 친형 및 지인들과 함께 맥주를 마시며 생일을 축하했다.

2020년에 <마음 깊은 곳에서: 사제, 독신주의 그리고 천주교의 위기>라는 책을 출간하며, 독신제를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 주장에 대한 논란이 일자 승낙 없이 책의 공저자로 기재됐다며 이름을 빼달라고 요청했다고 밝혔다. #

2020년 9월 2일부로 생몰년으로 레오 13세를 제치고 최장수 교황이 되었다.#

2021년 1월, 프란치스코 교황과 함께 코로나19 백신을 접종받았다.

인터뷰에서 자신의 퇴위는 이성적인 결정으로 내려진 것이었으며, 잘한 일이라고 자평했다.#

2021년 1월 8일부로 재위 기간보다 퇴위 기간이 더 긴 교황이라는 진기록을 세웠다.

10월 말에는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1달 전 사망한 동료 사제에게 애도를 표하며 "내세에서 곧 친구들과 합류하기를 기대한다"는 뜻을 전했다. 이를 두고 사망이 머지않은 상태가 아니냐는 추측도 나왔다.

2022년 1월, 그가 과거 관할했던 독일 뮌헨교구에서 수십년 동안 성직자들의 성학대가 저질러졌으며, 당시 교구장이었던 그가 보고를 받고도 이를 묵인하고 대처를 적절히 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나왔다. 베네딕토 16세 측은 보고서 내용을 검토를 못했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반응은 싸늘한 편. JTBC,국내 보도[49]

2022년 12월 28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베네딕토 16세의 건강이 매우 위중한 상태라고 밝히면서, 신자들의 기도를 당부했다.#

2.9. 사망


BBC 뉴욕 타임스 가톨릭 평화방송(cpbc)뉴스

결국 2023년을 하루 앞둔 현지시간 2022년 12월 31일 오전 9시 34분[50], 향년 9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자신의 퇴위 10주년을 불과 두 달 정도 남긴 시기였다. 베네딕토 16세의 사망으로 현재 생존하는 전현직 교황은 프란치스코 교황 1명만이 남았다.

베네딕토 16세의 시신은 1월 2일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운구되었고, 장례 미사 전날인 1월 4일까지 사흘 동안 공개되어 순례자들의 조문을 받았다.[51]

현직이 아닌 전직 교황의 장례이기에 시신에는 팔리움이 놓이지 않았고 옆에 교황의 십자가를 놓지도 않았다. 그러나 현직 교황의 장례의 절차에 준하여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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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토 16세의 시신 장례미사

장례 미사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주례로, 2023년 1월 5일 9시 30분[52] 성 베드로 광장에서 거행되었다.# 이탈리아독일대통령, 총리, 상하원의장, 헌법재판소장 등이 참석했으며, 벨기에 국왕 부부와 헝가리, 리투아니아, 폴란드, 포르투갈, 슬로베니아 대통령 그리고 소피아 왕대비 등이 개인자격으로 참석했다.

가톨릭평화방송은 2023년 1월 1일 오후 4시부터 베네딕토 16세 관련 방송을 틀어주기 시작했다.

사망 후 유언이 공개되었는데, 사망 직전에 남긴 것은 아니고 교황에 즉위한 지 1년 뒤인 2006년 8월 29일 독일어로 작성한 것으로 2페이지 분량이다. 바티칸에서 제공한 영문 번역본 실제 사망하기 직전 남긴 말은 이탈리아어로 "주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Signore, ti amo!)."라고 한다.#[53]

묘소는 과거 요한 23세요한 바오로 2세가 묻혔던 자리다.[54]

베네딕토 16세가 사망한 후, 그가 교회학자로 선포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현대 천주교회를 대표하는 신학자로서 그의 학문적 업적, 명성을 반영한 주장이다. 하지만 현재까지 바티칸에서 교회학자로 선포한 37명(교황 출신 2명 포함)은 모두 성인들이며, 때문에 추후의 시복, 시성 여부에 따라 결정될 전망이다.[55]

3.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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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토 16세에게는 3살 위의 형 게오르크 라칭거 몬시뇰(Georg Ratzinger, 1924년 1월 15일 ~ 2020년 7월 1일)이 있다. 남다른 우애를 자랑하는 이들 형제는 나치 독일 치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뒤 함께 사제서품을 받고 성직자의 길로 들어섰으니 교감의 폭이 남달랐을 것이다. 오오 얼짱사제형제. 사제가 된 뒤 형은 교회음악가로, 동생은 신학교수로 다른 길을 걸었지만, 전화와 편지로 안부를 묻고 매년 서너 차례 고향을 찾아 우애를 다졌다고 한다.

동생이 1969년 레겐스부르크대학 교수로 부임했을 때, 형은 이미 1964년부터 레겐스부르크 성당 성가대(Regensburger Domspatzen)의 지휘자로 명성을 날리던 교회음악가여서, 1977년 뮌헨 대주교로 발탁될 때까지 '게오르크의 동생'으로 알려졌다. 동생은 4개월 뒤 추기경이 되어서야 비로소 형의 그늘에서 벗어났다.

형 게오르크 신부는 당초 동생이 교황에 선출되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고, 교황 선출소식을 듣고는 "동생의 나이와 건강 때문에 추기경들이 다른 사람을 선택하길 기대했으나 뜻밖의 결과에 충격을 받았습니다."라고 털어놓았다. 고령을 염려하는 소리가 나오자 "교황직이 동생에게 짐이 될 지 모릅니다."라고 동감을 표하면서도 언론들이 교황의 보수성에 너무 초점을 맞추는 데 유감을 표했다. 사고의 명료함과 함께 인내심, 사람은 서로 돕는 존재라는 인식 등 동생의 장점을 전하면서 건망증이란 약점도 함께 털어놨다. 곳곳에 동생에 대한 형의 사랑이 묻어난다.

형은 교황이 된 동생을 자랑스러워 하면서도, 말년을 함께 보내지 못하게 된 것을 아쉬워하는 것이 역력했다. 동생이 바티칸에서 돌아오면 고향에서 함께 여생을 보내려고 했던 형은 "인생 황혼기의 동반자를 잃었습니다."라며 아픔을 솔직히 드러냈다. 다행히 본인이 장수하고 있는 덕분에 동생이 퇴위한 2013년 3월부터는 바티칸에서 함께 여생을 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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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베네딕토 16세가 교황이 된 이후, 게오르크가 성가대 지휘자로 재직(1964년 부터 1994년) 하던 당시 취입한 레겐스부르크 성당 성가대의 음반들 중 몇 가지가 2006년도이체 그라모폰에서 재발매되었다. 물론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형이 지휘한…' 같은 캐치프레이즈가 적힌 스티커가 붙어 있고, 바흐의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전곡 음반 같은 경우 이 때 처음으로 CD 발매가 이루어지는 혜택을 입기도 했다.

게오르크 몬시뇰은 2020년 7월 1일 사망했다. 향년 96세. 형제가 마지막으로 만난 지 불과 열흘만의 일이었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애도의 뜻을 표했다. 평화방송 기사

4. 인터넷 밈

서브컬쳐, 밈 바닥에서 교황이라는 인물은 일반적으로는 언급될 계기가 없지만, 베네딕토 16세가 특히 주목받는 이유는 첫 인상이 너무나도 강렬하기 때문이다.

원채 안와가 깊어 눈에 그늘이 지는데다, 과로로 인한 짙은 다크서클에 얼굴의 주름 등이 누가봐도 최종 보스(…)스러운 포스를 뿜어내기 때문. 특히 스타워즈시스 로드 다스 시디어스와 닮았다. 특히 검은 로브를 합성한 사진을 보면 영락없는 황제다. 이 때문에 이 바닥에서 나도는 교황의 사진을 보면 거의 포스 라이트닝을 시전 중이거나 빨간색 라이트세이버를 손에 들고 있다. 당장 구글에 Darth Benedict라고 쳐보자.

몇몇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 짤과 대사를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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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바티칸의 어두운 면을 알아야만 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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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어둠에 눈을 뜨게나, 어린 사제여.[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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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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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리미티드 빠와~!!!" 죽어라, 이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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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이런 패러디도 나왔다. Hail the maker[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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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여 멈추어라…… 더 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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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옷자락이 날릴 때는 그야말로… 간지폭풍. 특히 어깨의 케이프가 휘날리는 것을 보면 피콜로큐베레이가 연상되기도 한다. 실제로 큐베레이에 교황을 패러디하기도 했으니 말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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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에 있는 바오로 6세 알현실에서 일반인을 상대로 알현하는 모습[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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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악함을 노리고 만든[60] 종이 인형도 나왔다.
심지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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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세력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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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마술이 교차할 때 이야기는 시작된다

사실 베네딕토 16세의 외모 자체는 제법 간지나는 미노년 축에 들어가는 준수한 외모이다. 인자해보이는 전임자 및 후임자에 비해 인상이 상대적으로 너무 강렬해서 다소 사악해 보이는지라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가톨릭 신부의 이미지와 괴리감이 좀 심하다는 게 문제일 뿐.[61] 만약 그의 직책이 로마 교황이 아니라 국가원수나 고위 장성, 정보기관 총책임자 같이 뭔가 포스있는 인상이 어울리는 직책이었다면 멋있다는 평이 대다수를 차지했을 것이다. 저분이 CIA 국장이나 KGB/FSB 지휘관으로 양복을 입고 서 있었다 생각해보라. 당장 위의 푸틴과 함께 있는 사진만 봐도 알 수 있다. 교황에 선출되었을 당시에는 그래도 저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워낙 격무에 시달려 피곤에 절은 바람에 몇 개월 지나고 나니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짙게 생기면서, 덩달아 다크 포스가 더 막강해 보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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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베네딕토 16세. 지금과 같은 다크서클이 없기 때문에 한눈에 봐도 상당한 미남이다.

추기경 시절과 교황 선출 이후 각각 2번 뇌졸중으로 쓰러졌음에도 불구하고 활동은 상당히 왕성했다. 실제로 교황의 업무는 일반인들의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의 격무이다. 오죽하면 "교황이란 직책은 천국으로 갈 수 있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교황 일을 하다간 절대로 오래 못 사니까." 라는 악담이 있을 정도. 일단 기본이 하루에 최소 14시간, 1주일에 7일을 일해야 한다. 교황은 가톨릭의 최고 수장으로서 주일이 쉬는 날이 아니라 가장 일이 많은 날이기 때문이다.[62]

구 리그베다 위키의 이 항목에서도 교황을 시스로드의 한 사람으로 단정하고 장난성 서술이 너무 느는 통에 토론을 거쳐 이러한 현상이 있다고 소개하는 수준으로 바뀌었다. 전 버전을 확인하면 알수 있지만 그 전에는 아무리 장난이라 해도, 베네딕토 16세를 포스의 어두운 힘에 타락한 시스로드로 소개할 정도였다.

물론 건강을 문제로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교황 자리를 물려주고 퇴임한 후에는 소소하게 살았기에 과거에 베네딕토 16세를 다스 시디어스라고 부르던 인터넷 누리꾼들은 현재는 베네딕토 16세를 다시 제다이로 전향한 시스 지도자제다이의 귀환이라고 하기도 한다. 사망한 현재는 고인드립의 논란이 일어날수도 있기에 사실상 사장될것으로 보인다...

4.1. 교황청의 대처

외모 때문에 이 바닥에 퍼진 인물인 만큼, 그를 판단하는 데 그의 외모는 큰 편견(?)을 주는 편이다. 심지어는 외모지상주의의 최대 피해자라는 말까지 나오기도. 그래서 인터넷 상에서 도는 외모에 대한 여론을 지켜 보다 못한 바티칸 시국이 2008년 여름 전속 메이크업팀을 구성하고 의료 전문가들에게 수면시간과 식단을 지정받아 외모 관리를 시작했다고 한다. 또한 인터넷에 올리는 이미지들은 포토샵으로 보정을 거쳤다. 덕분에 2008년 여름 이후 올라오는 이미지들은 꽤 정상적인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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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2월말 경에는 노안으로 인해 안경을 착용한 사진이 올라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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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동으로 도리어 귀여운 이미지의 사진이 나돌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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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다크한 이미지의 사진도 여전히 나도는 편.지금은 제다이로 전향했는데? 회색의 제다이

5. 대중매체에서

2019년 11월, 그와 후임자 프란치스코 현 교황의 관계를 다룬 영화 <두 교황>(Two Popes)이 개봉했다. 베네딕토 16세 역으로는 아카데미상에 빛나는 안소니 홉킨스가 출연해 대단한 싱크로율을 보여준다. 교황 한니발 1세 그의 상대역인 조나단 프라이스도 프란치스코 현 교황과 닮아서 화제를 모으고 있다. 예고편 영상을 보고서는 "다큐인 줄 알았다"는 평이 있을 정도.

작중에서는 진보적인 추기경인 호르헤 베르고글리오와 대비시키기 위해서 보수적인 인물로 묘사되지만[63] 오스트리아 수사물 드라마를 보고 소소한 농담도 날리는 등,[64] 본인도 교회에 개혁이 필요하다는걸 인지하는 등 꽉막힌 사람은 아닌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위의 나치 전력 때문인지 본인은 나치와 정반대의 선한사람인데도 진보적인 신도들에게 나치라고 까인다. 정치적 견해가 정반대인 호르헤 베르고글리오도 안타까워 할 정도로 말이다.

6. 기타

베네딕토 16세의 선출 당시 독일 언론의 관심은 그가 몇 번째 독일인 교황인지부터 비롯되었다. 996년 5월 138대 교황으로 즉위한 첫 독일인 교황으로 알려진 그레고리오 5세는 본명이 브루노 폰 케른텐으로 오스트리아 케른텐 출신이다.[65] 문제는 가장 최근의 독일인 교황은 누구인가가 문제였다.

가장 최근의 인물로 알려진 것은 1522년 1월에 218대 교황에 즉위했던 하드리아노 6세이다. 그런데 그의 고향 위트레흐트는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였으나, 현재는 네덜란드 영토라는 것 때문에 문제가 불거졌다. 하지만 그의 본명은 또 아드리안 플로렌츠 데달로서 독일식이다. 만일 그가 독일인이 아닐 경우, 1057년 8월에 154대 교황 스테파노 10세가 가장 최근의 독일인 교황인 셈이 된다. 하지만 1000년에 태어난 그의 출생지 역시 신성 로마 제국령이었던 프랑스의 로렌 지방이며, 이름도 프랑스식인 프레데리크 드 로렌이다.

이렇게 여기저기에서 이의들이 제기되면서, 따지고 들어가다 보면 결국 1055년 4월에 선출된 153대 교황 빅토르 2세까지 올라가야 한다. 그는 슈바벤의 귀족 프란코니아 가문 출신이고, 본명도 게브하르트 그라프 폰 돌른슈타인-히어슈베르크이다. 독일 언론들은 진정한 독일인 교황을 찾는데 심혈을 기울였고, 결국 베네딕토 16세는 이들을 다 합쳐 8번째 독일인 교황이자, 반대로 빅토르 2세 이후 950여 년만의 독일인 교황도 되는 셈이 되었다.

베네딕토 16세는 추기경 시절 오스트리아 국영방송사인 ORF가 제작한 다큐멘터리에 직접 출연해 바티칸의 내부 조직과 운영방식을 직접 소개하며 성 베드로 대성당바티칸 박물관 등도 보여주었다. 베네딕토 16세는 이 다큐멘터리에서 교황청에 대한 음모론에 반박하며 "일반인들의 생각처럼 바티칸이 비밀 문서보관소를 운영하거나 하지 않는다"며 "다른 정치·행정조직과 크게 다르지 않고 은밀한 것도 없는 조직이 바로 교황청"이라고 말했다.

바티칸 기적 조사관 1~2권에서는 교황명이 직접 언급되지 않았지만 3권부터 베네딕토 16세의 교황명이 등장한다. 사건 전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고, 전례를 집전하는 모습이 묘사된다.

국내에서 EBS가 베네딕토 16세 선출 2부작 특집 다큐멘터리 <바티칸>을 방영하면서 이 오스트리아 방영분을 1부 <베네딕토 16세의 바티칸>으로, 영국 공영방송 BBC요한 바오로 2세의 사망부터 베네딕토 16세의 선출까지의 과정을 차례로 담은 다큐멘터리를 2부 <21세기 바티칸의 선택-베네딕토 16세의 탄생>으로 방영하기도 하였다. 1부, 2부

베네딕토 16세가 재임 시절 직접 등장한 영화도 있다. 2011년 다큐멘터리 영화 <프란체스코와 교황>이다. 이 영화에서 교황은 프란체스코라는 어린이의 시점에서 보여진다. 교황이 직접 거주하는 공간인 시스티나 경당에는 초등학교 수준의 교육기관이 있는데, 프란체스코는 초등학교 3학년생으로 성가대 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교황 앞에서 솔로를 부르기 위해 열심히 연습한다. 베네딕토 16세는 아프리카와 중동 방문을 마치고 바티칸으로 돌아오고, 마침내 프란체스코는 교황 앞에 선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밋밋하지만 교황의 전용기 옆에 전투기가 따라다니고 바티칸 통제실에 3천여 개의 CCTV가 설치돼 있는 것 등 그동안 바티칸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10세기부터 전해진 성 말라키의 예언에 따르면, 다음 대의 교황이 마지막 교황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이 예언 자체가 하나같이 끼워맞추기 식으로 쓰인 거라서 신빙성이 아예 없다. 당장 베네딕토 16세에 관한 예언도 '올리브의 영광'인데 이건 교황의 새 이름인 '베네딕토'와 똑같은 이름의 수도회베네딕토회의 상징이 올리브라서 그렇게 된 것이라는 식으로 꿰어 맞췄다. 정작 교황은 베네딕토회와는 관련이 없으며, 더욱이 올리브에 꿰어 맞추려고 호사가들이 난리친 추기경들이 산더미 같이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 말라키 본인은 이런 예언을 한 적이 전혀 없으며, 16세기경 성 말라키의 이름을 차용한 위조문서라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결국 차기 교황에 이르러서 예언은 사실상 박살나 버렸다.

사임으로 인해 원로사목사제 최종보스가 되었다. 원로사목사제 중 가장 고위직에 있었던 인물이다.

사임 후 일각에서 흑인 교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지만, 결국 2013년 콘클라베를 통해 뽑힌 교황은 흑인이 아닌 첫 남미권 출신의 교황 프란치스코가 되었다.

2010년 작 영화 <우리에겐 교황이 있다>와 비슷한 끝을 맞이하여서 해당 영화의 픽션이 현실이 되었다 소리를 듣고 있다. 큰 변화를 이끌어야 하는데 지도력이 부족하다고 작중에서 교황이 고백하는 모습은 베네딕토 16세의 뒷이야기와 직결되고 있다. 유난히 영화에 브라질 국기가 자주 나오는 등, 보면 볼수록 2010년 작품인데도 미래 상황을 그대로 그려낸 모습이 경이롭다.

젊었을 적 오토 프레밍거 감독에 리온 샴로이와 로미 슈나이더가 주연을 맡은 프랜시스 스펠먼 추기경의 전기 영화인 추기경 제작에 참여한 바 있다. 당시 바티칸 교황청과 영화 제작진을 연결하는 연락 담당관을 두었는데 담당관이 베네딕토 16세였다고.

재위기간 7년 동안 130회의 시복식을 거행해 869위의 복자를 시복했고, 11회의 시성식을 거행해 45위의 성인시성했다. 전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시복식과 시성식을 모두 집전한 반면, 베네딕토 16세 때부터는 시복식에 한해서 교황을 대리한 추기경이 이를 집전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베네딕토 16세 때 시복된 복자의 목록은 시복식/목록/베네딕토 16세 문서를, 시성된 성인의 목록은 시성식/목록/베네딕토 16세 문서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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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의 인연으로는 즉위 이듬해인 2006년 정진석 니콜라오 대주교를 한국 천주교회의 2번째 추기경으로 서임한 바 있으며, 같은 해 바티칸에서 거행된 추기경 서임식에서 비레타를 하사했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한국에서 재임한 두 대통령과도 면담을 가졌다. 먼저 2007년에는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교황청을 방문해 교황 베네딕토 16세를 단독 면담하고 한반도 평화 문제, 북한의 인도적 지원 등 한반도 문제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노 대통령이 교황청을 방문한 것은 지난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이 방문한 이래 한국 국가원수로서는 두번째였다고 한다. 2009년에는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교황청을 방문하여 방한을 초청하기도 했다.

교황으로서 대한민국을 방한한 적은 없으나 추기경 시절 1989년 세계 성체대회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다른 추기경들, 가톨릭 지도자들과 함께 잠시 한국에 왔었다. 당시 한국에 있던 독일 교민들과 함께 성체대회에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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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중관을 3개의 줄무늬가 들어간 주교관으로 교체한 것이 특징이며, 성 아우구스티노를 상징하는 조개, 프라이징 교구장 시절을 나타내는 무어인과 등에 짐을 진 곰이 그려져 있다.[2] 과거 마르크스주의자로 활동하며 오랫동안 가톨릭 교회를 떠났지만, 나이를 먹고 삶과 영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고 베네딕토 16세(당시에는 추기경 시절)와의 깊은 대화를 통해 자신의 지난날을 회개하고 가톨릭 교회로 돌아온 인물이다. 이후에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살아가며 한국에도 번역된 <가톨릭에 관한 상식사전>을 비롯한 유명한 가톨릭 관련 신앙저서도 많이 냈다.[3] 하드리아노 6세는 당시 현재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출신이다. 베네딕토 16세는 정말 오랜만에 선출된 독일인 교황임에도, "유럽인"이란 딱지로 주목받지 못한 감이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신자 국적의 변화 등에서 요한 바오로 2세의 20여년 동안 가톨릭 세계의 변화가 급격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4] 그 외의 중요한 가톨릭 신학자로 앙리 드 뤼박(Henri de Lubac, S.J., 1896~1991),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Hans Urs von Balthasar, 1905~1988), 카를 라너(Karl Rahner, S.J., 1904-1984), 이브 콩가르(Yves Congar, O.P., 1904-1995) 등을 꼽을 수 있다. 참고로 앞의 둘은 베네딕토 16세가 직접 최고로 여긴 신학자들이다.(아래 인터뷰 참조)[5] 전통시대 동아시아 용어를 적용한다면 '태상교황'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지만 한국 천주교에서는 간소하게 '전임교황'으로 번역했다.[6] 이는 전임자와 후임자가 교황이 되기 전부터 사목자로서 정치, 사회적으로 주목받는 활동을 많이 펼쳤던 반면, 베네딕토 16세는 신학자 라칭거로서 활동해온 관계로 대중적 주목을 덜 받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신앙교리성 장관이라는 라칭거 추기경의 포지션상 '누군가는 해야 하는데 수구적이라고 음해 받기 딱 쉬운 언행'을 도맡아 이미지 훼손이 심한 것도 한 몫을 했다. 결정적으로 교황 재위 시절 베네딕토 16세의 스타일도, '인기 떨어질 언행'을 추기경들 대신 본인이 직접 부담하는 걸 선호했다.[7] 남부 독일은 루터교보다 가톨릭 교세가 강하다.[8] 이때 찾아온 뮌헨 대주교는 훗날 나치독일에 맞서는 미하일 파울하버 추기경이었다.[9] 김수환 추기경이 학창시절에 일제에 의해 학병으로 강제 징집된 것과 같은 맥락인 셈이다.[10] 이는 영화 다운폴에서도 나오는 부분이다.[11] 대한민국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역시 일제강점기학도 특별지원병 제도로 강제 징집당해 일본군 으로 징집되어서 병사로 복무한 경력이 있지만, 강제이기에 친일인명사전에는 수록되지 않았다.[12] 특히 가톨릭 성향이 강한 농촌과 소도시가 그러했다. 도시 권역인 뮌헨이나 뉘른베르크와는 달랐다.[13] 당시 바티칸 내부의 대표적 전통주의 인사로 요한 23세와 여러모로 이견을 나타냈다. 이후 추기경단의 단장이 되어 바오로 6세의 즉위 때 교황관을 씌워주었다.[14]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훗날에 성무성성의 후신인 신앙교리성의 장관에 앉는다.[15] 신약성경 사도 요한의 3번째 서간 중 제1장 8절에서 유래한 말이다.[16] 실제로 해방신학 자체가 남미의 불평등한 사회 환경에서 태동하여 신학적으로 다소 논리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라, 진보적인 신학자들이라고 해서 무조건 해방신학을 지지하지는 않는 편이다.[17] 다음 링크에서 각 언어 번역을 볼 수 있다: # 원문은 프랑스어이다.[18]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전통주의 가톨릭 성향 신자들 중 많은 이들은 현대 신학의 교과서적 입장에 비판적이다.[19] 앙리 드 뤼박(Henri de Lubac)[20]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Hans Urs von Balthasar)[21] 1986년에서 1991년까지 주한바티칸대사를 역임하였다. 이반 디아스 추기경은 당시 한국 가톨릭의 사회참여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며, 1990년에 “한국의 민주주의는 유치원생 수준이고, 데모크라시가 아니라 데모크레이지(데모만 하는 미치광이들)”라고 했다가, 성당에서 청년 신자들로부터 달걀세례를 받은 바 있다.[22] 이 사람은 다음 교황인 프란치스코 교황에게도 영향을 끼쳤는데,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출된 직후 교황에게 "가난한 사람을 잊지 마십시오."라고 충고했고 이에 교황은 반사적으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를 떠올려 교황명을 정했다고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첫 강복 영상에서 교황 왼편에 선 안경을 낀 추기경이 바로 우메스 추기경.[23] NRSV 영어성경 편찬 위원장[24] 1차 투표에서 3위. 이때 2위는 후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된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25] 이 점은 한국 최초의 추기경 김수환 스테파노도 마찬가지다. 독일어, 라틴어, 이탈리아어에 능통했으며 영어일본어(일제강점기에 교육을 받았다)도 수준급이었다. 게다가 신학자로서의 업적도 상당한 수준이라고. 그는 추기경 서임 당시 최연소 추기경 서임 기록을 세운 사람이다. 당시에는 지금 보다 알게 모르게 유색인 사제에 대한 은근한 차별이 더 심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대단한 업적임에 분명하다.[26] 이 제목은 상징성이 있다. 실제로 가톨릭 신자 중에 유럽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교황 탄생 즈음인 20세기 초의 2/3(60%)에서 2010년에는 15%로 크게 낮아졌다. 유럽 내의 신자 비중은 그대로지만, 비 유럽 지역의 선교와 인구 증가 탓이 매우 크다. 특히 남미를 중심으로 한 남북아메리카의 성장세가 뚜렷한 편. (물론 남미 역시 오순절교회 신자가 크게 늘었긴 했지만.) 2013년 콘클라베에서 추기경의 비율은 115명 중 유럽 출신 추기경이 60명으로 이젠 과반이 간당간당하다. 여전히 이탈리아 출신이 28명이라 과다 비중이긴 하지만.[27] 그러나 서구 선진국 교회의 현재 추세에 한정해서 말한다면 이런 주장은 옳으나, 전 세계적으로 본다면 사실 가톨릭 교회와 전체 그리스도교 인구, 세력은 미래에도 소수종교화되거나 줄지 않고 서서히, 지속적으로 늘어날 것이라는 게 종교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20세기 이후로 선진국 교회의 신자 이탈과 손실을 지속적으로 보충해주는 제3세계에서의 폭발적인 그리스도교 성장 때문.[28] 물론 이 책은 베네딕토 16세가 2002년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요제프 라칭거 추기경) 재직 시절에 신학자 입장에서 보편 교회가 지녀야 할 전례의 근본정신을 피력한 것이다. 따라서 지역 교회의 특정 전례행위를 문제삼는 것이 아니며, 어떤 교도권적 구속력을 띠는 것도 아니다.[29] 한국에서는 특히 좌파 언론임을 자임하는 레디앙에서 우파 학자인 사무엘 헌딩턴문명의 충돌을 인용한 원색적인 비난 기사가 있었다.[30] 교황 개인의 주석: "이 인용이 이슬람 세계에서는 유감스럽게도 본인(베네딕토 16세)의 개인적 입장인 것으로 받아들여 충분히 납득할 만한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독자들은 이 문장이 쿠란에 맞서는 교황의 개인적 태도를 나타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주기 바란다. 본인은 이 세계적인 종교의 경전에 외경심을 가지고 있다. 마누엘 2세 황제의 글을 인용한 이유는 오직 신앙과 이성의 본질 관계를 밝히고자 한 것일 뿐이다. 본인은 이 점에서는 마누엘 황제에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주장을 따르는 것은 아니다."[31] 바로 앞에서 베네딕토 16세는 쿠란의 구절을 대놓고 비판적으로 언급하고 있다.("황제는 쿠란의 2수라, 256절에 나오는 “신앙의 문제에 강제를 동원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전문가에 따르면, 이 말은 무함마드 자신이 아직 권력이 없어 주변의 위협 아래에 놓여 있던 때에 작성된 초기 수라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황제는 나중에 쿠란에 정리된 성전(지하드)에 관한 규정도 당연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판단은 각자 알아서 하자.[32] 앞 문단에서 이어지는 맥락 상, 이슬람이 바로 전술한 이븐 하즘의 맥락으로 성전을 주장한다는 의미다. 다만 교황은 여기에서 "중세 후기 신학에서도 유사한 입장이 있었다는 사실이 아래에서 논의될 것이다."라고 각주를 달고 실제 본문에서도 솔직하게 아우구스티노토마스 아퀴나스 신학의 충돌점, 그리고 중세 후기 신학의 비로고스(이성)적, 비그리스(헬레니즘)적인 변화를 뒤에 설명하고 있다. 역시 판단은 알아서.[33] 세디아 제스타토리아를 대신해 제작된 교황 전용 자동차를 파파모빌(papamobile)이라고 한다.[34] 1985년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비판받은 이유는, 그가 성추행 사건을 덮으려는 의혹도 있었기 때문이다.[35] 선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사망 당시 만 85세 직전이었다.[36] 역대 교황들 대부분이 와인의 명산지로 유명한 남유럽 출신인 탓이 크다.[37] 정작 축구 최강국이자 홈팀인 브라질은 이 해에 결승전에 못 올라가고 브라질 전 국민에게 폐급 취급을 받고 있었다. 미네이랑의 비극 문서를 열람해보면 그 전말을 알 수 있다.[38] 본 경기는 해외에서는 세계 최강의 선수 vs 세계 최강의 대표팀 이라고 선전되었다.[39] 어찌 되었든 둘 다 우승은 이루었다. 베네딕토 16세의 조국은 2014년 우승, 프란치스코의 조국은 2022년 우승이다.[40]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두 교황에서는 프란치스코 교황과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만나 함께 방에서 월드컵 결승전을 관전하는 가상의 장면을 넣었다. 파울이나 오프사이드, 아쉬운 장면에 대해 서로 가벼운 도발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게 재미 포인트. 다만, 여기서는 베네딕토 16세가 프란치스코와 달리 축구에는 무관심했다는 설정.[41] 그레고리오 12세의 퇴위는 교회의 대분열이 마무리된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 하에 '강제적'으로 된 것에 가까웠기에, 그레고리오 12세가 동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퇴위를 인정해야 하는지 명백하지 않다. 비오 7세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황제 대관식에 대관하려고 참석하면서 나폴레옹이 자신을 프랑스에 감금할 것을 대비해서 교황 퇴위서를 미리 써두고 갔던 일화가 있다. 요한 바오로 2세2000년에 건강이 악화되면서 퇴위설이 나돌았고, 실제로 교황 퇴위 위한 과정을 밟기도 했지만 곧 철회했다고 전해진다.[42] 최고령 교황은 72세에 즉위해 95세에 사망한 하드리아노 1세이다.[43] 이후에도 바티리크스의 처리과정에서도 타르치시오 베르토네가 도청을 지시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44] 3류 찌라시가 아니라 이탈리아 유수의 중도좌파 시사 일간지이다. 그것도 이탈리아 양대 일간지. 움베르토 에코가 장기간 칼럼을 연재한 신문이기도 하다.[45] 문서 서두에 인용한 인터뷰어 '페터 제발트'가 직접 밝힌 내용이라 신빙성이 높다.[46] 공식적으로 밝혀진 이야기는 아니지만 베네딕토 16세가 선출될 당시에도 유럽권의 베네딕토 16세(당시 라칭거 추기경)와 비유럽권 후보를 두고 계속 표가 갈리다가 베네딕토 16세가 신승했다는 이야기까지 전해졌다. 그 비유럽권 후보가 프랜시스 아린제 추기경으로 알려졌는데, 2013년 콘클라베와 관련해서 영국 가디언지는 그 비유럽권 후보가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이라고 보도했다.[47] 바오로 6세 즉위 당시 바오로의 이름은 300년 이상이나 묻혀 있었다.[48] 재미있게 역사와 전통의 교황 배출지 베네치아 총대주교를 10년 동안 지냈다.[49] 다른 천주교 관련 매체들보다 진보 성향이 강한 곳임을 염두에 두고 읽을 것.[50] 한국 시각 오후 5시 34분[51] 천주교에서는 주교급 이상의 고위 사제가 사망하면 입관 전까지 신자들에게 시신이 공개되어 조문을 받는다. 한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사례는 2009년 2월 사망한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의 장례다.[52] 한국 시각 오후 5시 30분[53] 이 말은 예수가 부활 후에 사도 베드로를 만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질문한 것에 답한 내용이기도 하다. 베드로가 초대 교황임을 생각하면, 나름 의미있는 말인 셈이다.[54] 해당 공간은 요한 23세와 요한 바오로 2세가 시복, 시성되어 이장되면서 비어있었다. 베네딕토 16세는 요한 23세가 주최한 2차 바티칸 공의회에 신진 신학자로 참여했고,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신앙교리성 장관직을 역임했던 인연이 있다.[55] 비록 교회학자 선포 조건으로 시성 여부가 교회법 등의 규정으로 명시된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의 전례를 무시하기 어려운 점도 사실이다.[56] 2006년 성탄 전야 미사 당시 어린이들을 축복하는 모습이다. 이날 강론에서 베네딕토 16세는 "고통받는 아이들을 사람들이 잊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하였다.[57] 너 고소 짤의 패러디다. 옆에 있는 사제는 베네딕토 16세 재임 당시 바티칸 국무원장이었던 타르치시오 베르토네 추기경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즉위한 이후 교회법 제354조에 따라 국무원장과 궁무처장직을 내려놓고 은퇴하였다. 재밌게도 베네딕토 16세는 실제로 이단을 판별하는 신앙교리성 장관을, 타르치시오 베르토네 추기경은 신앙교리성 차관을 지낸 적이 있었다.[58] 교황의 모자에는 영어로 교황을 뜻하는 pope+팰퍼틴이 써있다.[59] 뒤의 조각품은 페리클레 파치니라는 조각가가 조각한 <그리스도의 부활(La Resurrezione)>이다. 조각품이 표현하는 것은 핵의 불길에서 부활하는 예수 그리스도. 조각품이 워낙 크고 무시무시해 보여서 주로 일웹에서 “최종보스 로마 교황”이라는 제목으로 짤이 돌아다닌다.[60] 당장 요한 바오로 2세 종이 인형과 비교해 보자.[61] 반면 동양권 창작물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카리스마 전투종족 신부 캐릭터의 이미지에는 아주 완벽하게 부합하는, 그야말로 스테레오타입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외모이다. 그래서 더욱 유명세를 탄 것일지도.[62] 그래도 건강한 사람을 선출해선지, 아니면 진짜로 주님이 교황의 수명을 늘려준 건지는 몰라도 현대처럼 평균수명이 늘어나기 전에도 교황들 중에선 장수한 사람이 많았다.[63] 두 교황이 실제 가톨릭 신자들에게 많이 까이는 점이기도 하다.[64] 교황이 둘일수 없다는 호르헤의 말에 1978년에는 교황이 셋이었다는 말로 호르헤를 기겁시키고는 독일 농담이오. 독일 농담은 다른사람을 웃길 필요가 없소라는 명언을 남긴다.[65] 오스트리아독일어권으로 독일과 역사를 공유하고 있으므로, 오스트리아 출신이라고 해서 문제될 것이 없다. 요즘도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위인을 꼽는 설문에서 오스트리아 출신인 모차르트가 항상 순위권 안에 들어간다. 당장 독일 국가를 작곡한 사람도 오스트리아 출신의 요제프 하이든.그리고 나치 독일퓌러를 지낸 누군가도 오스트리아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