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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데르-나이세 선

오데르 나이세 선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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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 Oder-Neiße-Grenze
폴란드어 Granica na Odrze i Nysie Łużyckiej
영어 Oder–Neisse Line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Oder-Neisse_line_between_Germany_and_Poland.jpg
진한 파란색이 오데르강이며 연한 파란색이 나이세 강, 정확하게는 라우지처 나이세 강이다.[1] 이 두 강을 연결한 선을 따라 국경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오데르-나이세 선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1. 개요2. 역사
2.1. 이전의 역사2.2. 형성2.3. 결과2.4. 오늘날
3. 입장
3.1. 폴란드3.2. 타 승전국3.3. 독일
4. 실향민5. 기타 계획6. 도시 분할7. 여담8. 둘러보기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 이후 새로이 형성된 독일폴란드 사이의 국경선. 폴란드어로는 오드라(Odra) 및 니사 우지츠카(Nysa Łużycka) 선이라 불린다.

동프로이센슐레지엔, 포메른 등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의 구 독일 영토는 종전 후 분할되어 폴란드와 소련(소련 해체 이후에 러시아)에 할양, 병합되었다.

2. 역사

2.1. 이전의 역사

게르만족의 대이동기 때 상당수의 게르만족이 구 로마제국의 영토에 잇따라 정착했고 게르만족 대이동의 여파로 중동부유럽의 인구가 격감하게되자 본래 러시아 일대에 주거하던 슬라브족들이 빈땅이 된 독일 동부와 서폴란드, 체코 등으로 서진을 하여 정착하며 살게 되었고, 이는 신성 로마 제국 창건 시기까지도 변하지 않았다. 폴란드 일대를 통일시켜서 폴란드라는 국가적 정체성을 만든 피아스트 왕조도 오데르-나이세선 이서지역까지도 통치하였으며, 서폴란드 일대는 12세기까지 폴란드 왕국의 영토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1138년 폴란드가 분열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포모제, 실롱스크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점차 잃어갔다. 12세기 말 포모제는 그라이펜 가문의 포메른 공국이 되면서 독일화되었고, 실롱스크 공국은 보헤미아 왕국의 속국이 되었다가 1335년 결국 합병되면서 이 지역들은 보헤미아,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배를 거쳐 17~18세기 사이 모두 프로이센 왕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프로이센은 1795년 마지막 폴란드 분할을 통해 이 지역의 영토를 추가로 확보했다.

이후 폴란드 독립운동 시기와 폴란드 제2공화국 시대에는 일부 강경파 민족주의자들 사이에서 피아스트 왕조 시절의 오데르-나이세강 동쪽 영토, 심지어는 폴란드 왕국 건국 이전의 엘베강 동쪽 영토까지 되찾자는 얘기도 나왔지만, 대부분의 폴란드인들은 힌터포메른과 동프로이센, 슐레지엔 지역은 독일인들이 대다수를 차지한 지 오래고 폴란드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폴란드-리투아니아 때도 폴란드 영토가 아니었던 지역이 대부분인데 어떻게 그 땅을 차지하냐면서 헛소리 취급했다.

2.2. 형성

폴란드 침공으로 폴란드가 나치 독일에 점령당한 뒤 런던에 수립된 폴란드 망명 정부에서는 종전 후 독일과의 국경선 재설정을 진지하게 검토하기 시작했다. 폴란드 망명 정부 측이 원했던 영토는 동프로이센단치히, 오버슐레지엔, 라우엔부르크(Lauenburg in Pommern, 현 폴란드 렝보르크·Lębork)를 위시로 한 힌터포메른 일부 지역 등이었다. 동프로이센과 단치히는 전쟁의 결정적 계기가 된 폴란드 회랑 문제를 일으킨 원인으로 영토 분쟁의 단초를 없애버리겠다는 의도였고, 오버슐레지엔은 독일화되었던 니더슐레지엔과 달리 폴란드인이 상당수 있는 지역이었으므로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폴란드 영토가 되어야 하며, 포메른 동부는 해안선이 짧은 폴란드가 바다로 나갈 출구를 최대한 확보하기 위한 의도였다.

그러나 망명 정부가 가질 수 있는 정치적 영향력은 정말 눈물나게 미미했고,[2] 이 국경선의 형성을 실제로 주도한 것은 이오시프 스탈린윈스턴 처칠이었다.

폴란드 침공을 통해 빼앗은, 당시 폴란드 동부 영토(소비에트-폴란드 전쟁 당시 폴란드가 얻은, 현재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서부)를 돌려주기 싫었던 스탈린은 독소전쟁이 발발한 이후인 1941년 10월 '동프로이센을 슬라브인들의 품에 되돌릴 것'을 주장했다. 여기에는 독일의 동부 영토를 폴란드에 넘겨주면 당연히 독일과 폴란드 사이의 충돌이 생길 것이니 소련이 외교적인 이득을 취할 수 있다는 계산도 다분히 깔려 있었다. 같은 해 12월 처칠의 특사로 파견된 영국 외무장관 앤서니 이든 역시 스탈린과의 만남에서 스탈린이 제안한 새로운 국경선에 얼추 동의하면서 서서히 오데르-나이세 선의 윤곽이 드러났다.

이후 한동안 전쟁이 격화되면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국경 문제는 연합군이 본격적으로 승기를 잡은 1943년 무렵부터 다시 논의되기 시작했다. 테헤란 회담에서 스탈린은 폴란드의 국경을 오데르 강 근처까지 서진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독일을 견제할 수 있는 강한 폴란드를 원했던 처칠과 루즈벨트 역시 이에 동의를 표했다. 전쟁이 사실상 연합국의 승리로 굳어진 후 1945년 2월에 개최된 얄타 회담에서 연합군은 다시 한 번 폴란드의 국경선 문제를 놓고 논의를 전개했다. 이 시기는 서서히 냉전의 기미가 보이던 시기였고 소련이 동유럽에 세력을 뻗치고 폴란드가 공산화하여 소련의 꼭두각시가 될 것임이 명백해지자, 서방 입장에서 공산 폴란드에 영토를 지나치게 줄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3]

종전 후 유럽에서 최대한 서로의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영미와 소련 양측은 치열한 머리싸움을 벌였고, 독일과 폴란드의 국경선을 둘러싸고도 충돌이 빚어진다. 대표적인 쟁점으로는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포메른의 주도(州都) 슈테틴을 어느 나라의 영토로 할 것이냐의 문제, 다른 하나는 코트부스를 위시로 한 라우지츠 일대의 나이세 강 서안까지도 폴란드에 넘겨줄 것이냐 마느냐의 문제였다. 슈테틴은 1720년 이래 베를린의 외항으로 간주되었으며 도시 건설 초기와 17세기 스웨덴 시대를 제외하면 역사 시대 내내 독일령이었기 때문에 이를 폴란드에 넘기면 독일의 반발이 격렬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나이세 강 서안 지역은 서슬라브 계통의 소르브인들이 주로 거주하던 지역이다. 당초 미국과 영국은 오데르-나이세 선이긴 한데 동쪽에 있는 글라처 나이세 강(Glatzer Neiße. 폴란드어로는 니사 크워즈카 강(Nysa Kłodzka))을 새 국경으로 만들려고 했으나, 소련의 반대로 실패했다. 이 시나리오에 따르면 주도(州都) 브레슬라우를 비롯한 하 슐레지엔의 절반은 독일이 건질 수 있었다.

파일:Polska_hydrografia2_Bóbr_River2.jpg
마지막으로 연합군은 오데르 - 부브르 강(Oder-Bober-Line)[4] 으로 하려고 했으나, 이마저도 스탈린은 거부했고, 최종적으로 오데르 - 나이세 선으로 결정되었다.

오데르 - 나이세 라인 동부지방에 살던 독일인들이 모두 소련군을 피해 서쪽으로 피난갔다는 것은 소련의 프로파간다였다. 종전 직후에도 최소한 수백만 명의 독일인들이 여전히 이 일대에 거주하고 있었다. 결국 소련은 끝까지 남아있던 독일인들을 모두 추방했다.

파일:M644.jpg
미국의 국경선 제안을 그린 지도이다.
선의 색깔 시나리오별 독일의 면적 독일에 잔류하는 주요 동부 도시 상실 영토 면적
미국의 제안 405,141㎢[5] 브레슬라우, 리그니츠, 슈테틴 63,646㎢
제1대안 399,306㎢ 69,481㎢
제2대안 378,016㎢[6] 브레슬라우, 리그니츠 90,771㎢
(독일의 현 국경) 357,022㎢ - 111,765㎢

2.3. 결과

전쟁은 독일의 패배로 끝났고 결국 최종적인 합의는 1945년 8월의 포츠담 회담에서야 이루어졌다. 포츠담 회담을 통해 양국의 국경선이 최종적으로 확정됐고, 연합국 사이의 합의에 따라 전후 독일과 폴란드 사이의 국경이 오데르 강과 나이세 강으로 정해짐에 따라서 이 국경선 외부에 위치했던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 동프로이센 전역과 포메른, 슐레지엔의 대부분 및 브란덴부르크의 동부 지역이 고스란히 폴란드와 소련에 넘어갔다.

덤으로 오데르-나이세 선보다 더 서부에 위치한 항구도시 슈테틴도 폴란드에 할양되었다.[7] 이는 폴란드가 줄기차게 요구했던 동프로이센 북부 및 서프로이센 일부 지역을 소련이 칼리닌그라드주로 합병하고 그러다보니 폴란드에 주요 항구가 그단스크 밖에 없어서 스탈린이 떼어준 것이다. 그래서 독일-폴란드 국경은 대체로 오데르강을 지나지만 바다와 접하는 하구에서는 독폴 국경이 오데르 강에서 벗어나서 육지를 지난다.

폴란드 영토로 새로이 편입될 구 독일 영토에 거주하던 독일계 주민들은 이미 전쟁 말기에 피난을 떠난 사람을 합쳐 거의 8백만 명에 육박했다. 또한 독일 내에서도 나치에 의해 강제로 노예노동을 하러 끌려온 폴란드인들이 꽤나 많았다. 그 때까지 남아있던 독일계 주민들을 선 서쪽으로 추방시키거나 죽였는데, 이는 세계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강제 집단 이주였다. 또한 커즌 선 이동의 구 폴란드 영토에서 추방된 폴란드인을 신 폴란드 영토로 이주시켜 채웠다. 칼리닌그라드(쾨니히스베르크)를 비롯한 동프로이센 북쪽 영토는 소련(러시아, 리투아니아[8])에 병합되었다.

더 나아가서 스탈린은 동프로이센 전체나 동프로이센 북부 3분의 2를 소련이 차지하는 안까지 고려했지만, 이제 소련의 위성국가라 어쨌든 사이좋게 지내야 하는 폴란드에 동프로이센 남부 3분의 2를 할양했다. 그렇지만 주도이자 고도인 쾨니히스베르크나 부동항인 필라우 등 구 동프로이센의 지정학적 요충지는 상당수 소련이 차지했다. 폴란드는 오데르-나이세 선 이동의 포메른, 슐레지엔, 브란덴부르크 및 동프로이센 남부를 할양받음으로써 커즌 선 동쪽의 영토를 소련에게 내주는 대신 현 폴란드의 서부 영토 및 동프로이센 남부의 곡창지대 및 수원지의 신규 합병으로 만족해야 했다.

독일과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사이의 국경선이 짧아지면서,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입장에서는 독일의 재침공에 대한 부담을 덜 수 있게 되었다. 세 나라가 모두 유럽연합 회원국이 된 지금에야 별 의미 없는 이야기지만, 동서독 통일 당시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가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은 것에는 이 이유가 상당히 작용했다.

한편 스탈린은 1952년 미영불 3개국 정부에게 여러차례 서한을 보내 독일의 중립화 재통일안을 제안했으나 여기에는 오데르-나이세 선 승인이 조건으로 있었고 미영불 3개국과 당시 서독 총리 콘라트 아데나워는 이를 거절했다.

2.4. 오늘날

1990년도를 즈음하여 동유럽 혁명, 독일 재통일, 소련 붕괴 등의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면서 철의 장막은 무너졌고 폴란드가 2004년에는 유럽연합에, 이윽고 2007년에는 솅겐 협정에 서명하면서 독일-폴란드의 국경 왕래는 자유로워졌다. 그 결과 후술할 분단도시들도 통행이 자유로워졌다.[9]

3. 입장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독일-폴란드 영토 논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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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폴란드

제2차 세계 대전독일에 대해서 거의 노이로제에 걸려있던 폴란드 입장에서야 당연히 두 팔 벌려 환영했다. 폴란드에서는 인과응보라는 반응이 절대다수였다. 폴란드인들은 이 국경선에 의거해 추방된 독일인들에 대해서도 전반적으로 냉담했다. #

물론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독일-폴란드 영토 논란에서 보듯 폴란드의 동부 영토는 소련이 강탈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이 안에 썩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소련은 결코 땅을 돌려줄 생각도 없었고 위성국 신세로 전락한 폴란드가 저항할 수도 없었으니 그나마 자국에 이득이 있는 이 안에 찬성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서부에서 얻은 영토가 동부에서 소련에 잃은 영토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하는 여론도 상당했다.

3.2. 타 승전국

다른 승전국들의 경우 이 국경선에 대한 반응이 제각각이었다.

이 국경선의 가장 큰 수혜자였던 소련은 당연히 대찬성했고, 아예 '독일이 통일하고 싶으면 이 국경선부터 인정해라.'라고 못을 박았다. 다만 폴란드가 완전히 반러 진영이 된 오늘날엔 러시아의 극우민족주의자들한테서 "우리가 소련 시절에 폴란드에 너무 많은 영토를 떼 줬다!" 라는 불만이 나오기도 한다. 사실 냉전 이전에도 폴란드는 러시아와 사이가 나빴기에 당시에도 충분히 제기될 수 있는 우려였다.

알자스-로렌의 영유권을 두고 독일과 오랫동안 대립하였던 프랑스뿐만 아니라 나치 독일에 피해를 입었거나 나치 독일과 동맹관계에 손을 잡은 이력이 있었던 전 유럽 국가들 역시 냉전 상황과 상관없이 당시에 전반적으로 오데르-나이세 선을 지지하거나 암묵적으로 인정했다. 프랑스의 경우 냉전 초기에야 미국의 눈치를 봐야 했으니 오데르-나이세 선의 승인을 거부했지만 제4공화국 정부가 무너지고 들어선 샤를 드 골 대통령제5공화국 정부가 1959년 오데르-나이세 선을 승인해버려 서독과 외교적으로 마찰을 빚었다. 미국영국의 경우에는 오데르-나이세 선을 수정할 '최종 협상'을 한동안 주장했지만 점차 시간이 흐르며 국경이 굳어지고 냉전도 진정되면서 오데르-나이세 선을 인정했다.

영국의 경우 공산주의 국가로 거듭난 폴란드에 너무 많은 영토를 떼 준 것을 후회하는 목소리가 보수당 내부에서 컸다. 폴란드 제3공화국 출범 이후에는 폴란드에 많은 영토를 떼 준 것이 영국 보수당 내에서 긍정적으로 재평가되었다.

3.3. 독일

파일:3geteilt.jpg
"3등분? 절대 안 돼!"
당시 서독 거리에 붙어 있던 전단지이다.[10]
전후 동서독은 당연히 이 국경선을 인정하는 것을 모두 거부했으나, 동독스탈린의 무지막지한 압박을 버티지 못하고 결국 1950년 이 국경선을 공식 승인했다.

서독에서는 강경 반공주의로 유명했던 초대 연방총리 콘라트 아데나워독일 기독교민주연합은 말할 것도 없고,[11] 독일 사회민주당도 오랫동안 오데르-나이세 선을 인정하지 않았다. 동독 지역과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 영토 또한 대놓고 미수복 지역으로 취급하였다. 독일의 오랜 본토였던데다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에서 쫓겨난 독일인은 머릿수로 서독 정치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했으므로 서독 역시 그 영향을 받아 영토 문제에 강경했다.

1965년경 독일 사회과부도에 그려진 인구밀도, 교통망 등.
1955년 서독의 지리 서적과 1954년 동독의 지리서적 비교. 동독 쪽만 오데르- 나이세 선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가 집권한 후 1970년 동방 정책의 일환으로 폴란드와 외교 관계를 수립하는 바르샤바 조약[12]을 체결하면서, 서독 정부는 오데르-나이세 선을 잠정적인 국경으로 승인했다. 이로 인해 브란트는 하마터면 의회에서 불신임될 뻔했으나 아슬아슬하게(2표 차)로 불신임을 면했다. 불신임을 면하는 조건으로 총선이 시행되었는데, 사민당과 자민당 등 연립여당이 승리해 오데르-나이세 선 승인은 취소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럼에도 서독 정부는 포츠담 회담의 최종 선언이 문제의 동부 영토를 폴란드나 ​​소련에 양도하지 않았으며, 모든 조항은 포츠담 협정에 규정된 대로 독일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전한 연합국 간의 최종 평화 조약에 의해 변경될 수 있다는 입장을 1990년 9월 12일, 독일 문제에 관한 최종 해결 조약[13]에 서명하기 전까지 계속 유지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아데나워의 정치적 양자였던 헬무트 콜이 집권한 이후에도 독일은 동방 정책을 견지해 나갔으며, 1990년 통일 과정에서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폴란드와 구 소련에 합병된 옛 영토를 영구히 포기할 것을 선언하여 통일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14] 이에 따라 옛 영토의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법적 근거였던 기본법 23조를 개정하면서 오데르-나이세 선은 독일과 폴란드의 국경선으로 완전히 고착되었다.

4. 실향민

오데르-나이세 선 이동 지역에서 추방된 실향민들은 거의 1,500만에 가까운 수였으며 '추방민 연합회(Bund der Vertriebenen)'[15]라는 이익단체를 조직해 1970년대까지 서독 정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독일의 옛 영토수복을 언급하지 않으며, 현재의 국경선을 지지한다.# 대신 동구권 지역 독일 문화유산의 보존 및 복원, 추방 및 피난 과정에서 발생한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 #, 그리고 실향민 1세대 노인들에 대한 생활 지원 등에 주력하고 있다.[16]

5. 기타 계획

최종 확정된 국경은 원안보다는 영토 변화가 적었다. 위키백과 서슬라브계 소수민족인 소르브인이 거주하는 현 독일 동부 지역을 폴란드 영토에 포함하자는 제안이 나온 적도 있었으며, 더 나아가서 12세기 이전 국경인 엘베 강을 독일-폴란드 간 국경으로 삼는 것까지도 고려했다.[17] 실제로 엘베 강이 독일-폴란드 간 국경이 되었다면 독일의 영토는 동방식민운동 이전으로 축소되고 수도인 베를린브란덴부르크, 오버포메른 같은 오데르강 이서 지역의 독일 동부 영토들 역시 동서독 분단 대신 폴란드에 합병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독일계 공산권 국가를 가지고 싶어했던 스탈린은 이 지역에 동독 정권을 세웠고 불행 중 다행으로 독일은 분단국으로 전락하긴 했지만 수도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주, 오버포메른 등 옛 프로이센 왕국 시기의 중심지들을 사수할 수 있었다.[18]

그리고 오데르 강 반대편에서는 네덜란드벨기에도 프랑스가 자르를 합병하려 했던 것처럼 니더작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의 서부 지역 등 상당수 영토를 합병하려 했고, 특히 당시 네덜란드 국왕이었던 빌헬미나 여왕이 의욕적으로 추진했으나, 미국이 이를 거부하여 무산되었다. 이는 난민 문제 때문이었다.# 이를 제창자의 이름을 따서 Bakker-Schut Plan이라 부른다. 이 방안에 따르면 동프리슬란트 일대와 뮌스터, 오스나브뤼크, 올덴부르크, 아헨, 쾰른까지 모조리 네덜란드로 넘어간다. 다만 이러한 합병은 무산되었으나 1949년에 네덜란드는 독일의 엘텐 마을을 무력 점령하였으며 14년 뒤인 1963년에야 반환하였다. 참고로 구글에 the Greater Netherland 등 대 네덜란드를 뜻하는 말을 검색하면 독일 서부가 합병된 형태의 네덜란드 지도를 볼 수도 있다.

또한 영토 할양 이외에도 여러가지 독일 분할 계획이 고려되었다. 다만 이들은 모두 미국이 도저히 들어줄 수 없었다. 만약 독일을 영원히 약소국가, 2류국가, 농업국가로 만들어 버린다면 소련을 견제하기 어려워져서 당장 냉전을 준비하는데 좋을 것이 하나도 없는 데다가, 베르사유 조약 이후로 히틀러와 나치 정권이 등장한 것처럼 제2, 제3의 나치나 나치의 뒤를 잇는 극단주의적 반서방 세력들이 집권하여 다시금 독일이 반서방 국가로 돌변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점령국 중 하나인 미국은 모겐소 계획의 실현을 위해 독일의 공업을 해체하고 농업국가로 바꾸려는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당시 동유럽을 적화시키며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소련미국은 경계하기 시작했고, 소련 견제 겸 전쟁으로 피폐해진 유럽 지역을 재건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1947년부터 미국은 자신들의 정책을 180도 선회하여 독일 지역, 나아가 유럽을 재건시키기 위한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독일을 약화시키려는 정책들이 어느정도는 반영이 되어 자를란트는 프랑스 보호국 자르 보호령이 되고 루르 공업 지대는 국제 기구 산하 루르 국제 통치령이 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하였다. 또한 동서독의 분할을 시행했고 오데르-나이세 선 이동의 구 독일령을 아예 독일의 판도에서 지우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산업 시설을 차지하거나 지리적인 이유로 미국·영국령과 소련령 영토 교환이 일어나기도 했다. 물론 독일 정부 같은 건 없었을 때였기 때문에 주민들의 의사는 대부분 반영되지 않았고, 이 시기의 영토 교환은 극히 드문 예외를 제외하면 독일 통일 이후에도 유효하다.

현재 독일을 보면 알겠지만, 위 제안 중 뭐가 채택되더라도 현재 독일 영토보단 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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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도시 분할

오데르 강이나 나이세 강변을 끼고 발전한 독일 도시들은 서안과 동안이 분할되어 동안은 폴란드로 넘어갔다.

7. 여담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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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이세 강이라는 이름은 글라처 나이세 강을 비롯해 오데르 강의 지류 여러 곳에 붙어 있다.[2] 스탈린은 폴란드 망명 정부가 동프로이센, 오버슐레지엔, 힌터포메른 일부를 합병하기를 원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비웃었다고 전해진다.[3] 사실 미래를 아는 입장에서는 어차피 폴란드에 주지 않아도 동독 땅이 되는 것이니 그게 그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독일의 처우를 놓고 중립국화를 포함해 여러 가지 방안들이 논의되던 시점이였고, 독일 영토(의 일부)가 반드시 소련 세력권으로 들어간다고 확신하기는 어려운 때였다. 한편 폴란드는 그 당시에 보더라도 소련의 위성국 1호가 되리라는 것이 너무나 뻔했다. 역사적으로 폴란드 분할 이래 러시아 제국이 폴란드를 지배한 적도 있었다.[4] 폴란드어 Bóbr, 독일어 - 보버(Bober)[5] 이렇게 되면 동독의 면적이 156,462㎢로, 서독(248,577㎢) 면적의 63%가 된다. 실제 역사에서 동독 면적은 108,333㎢로 서독의 44%도 안 됐다. 인구 대비로는 여전히 밀리겠지만(전쟁 전 동프로이센과 포메른 동부는 독일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희박한 지역이었다)[6] 이 정도만 돼도 현재 일본(377,975㎢)보다 넓어진다.[7] 사실 1945년 4월부터 7월까지 스탈린은 소련은 슈테틴에서 폴란드계, 독일계 지방정부를 교체하며 슈테틴의 귀속 문제를 끝까지 저울질했으며 7월 5일에 가서야 슈테틴을 동독이 아닌 폴란드에 귀속하기로 결정했다. 그만큼 스탈린에게도 슈테틴 문제는 나름 힘든 결정이었다. 참고로 이 결정에 대해 트루먼과 처칠은 오데르-나이세 선을 충실히 따른다는 기존의 약속과 다르다며 항의했지만 동유럽 판도 문제는 전적으로 스탈린에게 달려 있었기 때문에 결국 이를 승인했다.[8] 리투아니아에 넘겨진 지역은 전간기에 독립국이었던 리투아니아 영토였다가 제2차 세계 대전 개전 직전 히틀러의 강압에 강제로 양도했던 지역이다. 원래는 나머지 지역도 모두 리투아니아의 관할로 할 계획이 있었으나, 리투아니아가 원하지 않아서 그 밖의 지역은 러시아의 관할이 되었다.[9] 다만 그것이 이들 도시에게 꼭 이득만 준 것은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국경이 통제되어있던 시절에는 거점으로서의 이득이 있었지만 통행 자유화 이후로는 그냥 지나가는 곳이 되어버려 손해가 크다고 한다.[10] 비슷한 내용으로 헝가리에서는 트리아농 조약으로 잃은 영토에 대한 성토를 담은 우표가 있다.[11] 다만, 콘라트 아데나워는 생전에 개인적으로 프로이센을 매우 싫어했기 때문에, 프로이센을 공중분해한 오데르-나이세 선을 개인적으로는 지지했다.[12]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바르샤바 조약과는 다른 조약이다.[13] 이른바 2+4조약[14] 사실 헬무트 콜도 원래는 실향민들을 의식하여 다시 옛 영토를 찾아야 된다고 하면서 이를 위해 무력까지도 사용할 수 있다고 발언했으나, 전세계에 걸쳐 뭇매를 맞자 깨깽하며 결국 정식으로 포기하였다. 다만 이는 독일 통일에 반대했던 마가렛 대처 영국 수상의 일방적인 증언이며 오히려 콜 총리는 본인이 이런 발언을 하지 않았다며 부인하기도 했다.[15] 한국에서는 '독일 실향민 연합'으로 알려져 있으며, 단체의 총재인 베른트 파브리티우스 박사가 2019년 2월 한국에 방문하여 연설하였다.#[16]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러시아 제국 치하에 있던 지금의 폴란드(러시아 제국령이었던 지역 한정)와 발트 3국독일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점령당했을 때 폴란드나 발트 3국에서 러시아 본토로 도망친 러시아인 실향민의 후손들, 소련 해체 이후 발트 3국을 떠나 러시아 본토로 돌아간 러시아인들 또한 폴란드와 발트 3국에 남아있는 러시아 문화유산의 보존 및 복원에 기여하는 경우가 많다.[17] 정확히는 12세기 이전까지 엘베 강과 오데르-나이세 선 사이에는 상술한 소르브인을 비롯한 슬라브계 일파가 살았으며 이들은 독일에도, 폴란드에도 소속되지 않았다. 따라서 루사티아 정도를 제외하면 이 지역에 대한 폴란드의 역사적 클레임이 전혀 없었다. 연합국의 의도인지 우연인지 확인하기 어렵지만 독일과 폴란드 간의 신국경으로 자리잡은 오데르-나이세 선 일대가 폴란드가 역사적 연고를 제기할 수 있는 마지노선이다.[18] 만약 엘베 강을 경계로 오데르 강 이서의 독일령 지역이 폴란드에 합병되었다면 현재 그리스와 튀르키예가 과거 동로마의 강역권이었다가 오스만 제국에게 정복, 편입되면서 현재 튀르키예의 영토가 된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과 현재 튀르키예 소아시아 반도 서부 지역을 두고 미묘하게 대립하고 있는 것처럼 폴란드와 독일 사이에 이 일대의 역사적 연고권을 두고 대립하는 상황이 일어났을 가능성도 있다.[19] 특히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영방국가로 쪼개진 17~18세기의 신성 로마 제국은 따라 그리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