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마르코의 복음서에 나오는 악마 군대(Λεγιών)에 대한 내용은 군대(성경) 문서
, 여타 동음이의어에 대한 내용은 레기온(동음이의어) 문서
참고하십시오.1. 개요
레기온(라틴어: Legio, 그리스어: Λεγιών)은 로마군의 가장 큰 편제 단위이다.초기에는 고대 그리스의 전통적인 팔랑크스와 다를바 없었으나, 긴 역사 동안 다양한 전술을 습득함으로써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보병집단이 되었다.
2. 어원
라틴어로는 단수 주격이 레기오(Legio), 복수 주격이 레기오네스(Legiones)이다. 흔히 알려진 발음 '레기온'은 라틴어에서 '레기오'의 어근[1]을 따온 것이다. 라틴어 사전 등에서는 명사의 단수 주격을 으뜸꼴로 삼지만, 영어에서는 어근을 받아들여 사용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리스어 표현 또한 라틴어의 어근을 외래어로 받아들인 것이다.한국어와 일본어에서는 군단으로 번역된다. 번역상 군단이라 하지만 편제 인원수[2]나 여러 상황으로 봤을 때 일대일 대응은 무리이다. 인원수만 따지면 현대의 군대의 사단쯤 된다고 해야겠지만 성격이나 위치로는 군단에 가깝다.[3]
레기오에 소속된 병사들을 통틀어서 레기오나리우스(Legionarius), 복수형으로 레기오나리(Legionarii)라고 했다. 어간인 레기오나리(Legionari) 부분이 와전된 것이 영어의 리저너리(Legionary)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군단병으로 번역하는데, 로마 '군단'이라는 번역어는 현대의 군단과 혼동의 여지가 있지만, 군단병이라는 명칭은 현대에 사용되지 않으므로[4][5] 혼동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군단병이라는 명칭은 보다 널리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6]
3. 왕정부터 공화정 중기까지
카밀루스는 로마군의 중핵인 중장보병대를 3개 대열(Hastati, Principes, Triarii)로 편성하였다. 각 대열은 마니풀루스(Manipulus)로 나뉘어 편성되었다. 하스타티와 프린키페스는 120명 단위로 총 1200명씩, 최후미이자 예비대인 트리아리는 60명 단위로 총 600명을 편제하여 1개 군단병력을 3000명 선에서 유지하였고, 양익에는 기병대 300명을 나누어 배치했다. 군단총원으로 세지않는 벨리테스(Velites)들은 대열 중간에 나뉘어 배치된다.'하스타티(Hastati)'는 주로 전투 경험이 부족한 젋은 신참병, '프린키페스(Principes)'는 전투 경험이 적당히 있고 나이도 장년층인 남자, '트리아리(Triarii)'는 나이가 있고 전투 경험이 많은 남자들로 구성되었다. 신체적으로나 경험을 고려한다면 로마군의 중핵은 프린키페스였다. 이러한 마니풀루스 시스템은 카밀루스가 창안했다고는 하나[7] 삼니움 전쟁 때 발전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러한 병사들의 구분은 주로 무장의 질의 차이가 결정하였으며 이는 그들의 소득수준과 비례하였다. 당시 병사들은 무장을 지급받는 게 아니라 따로 구매해서 써야 했기 때문.[8] 그러나 로마가 팽창할수록 자영농민층이 붕괴하자 중산층이 소멸[9]되기 시작하였고 따라서 적절한 무장을 갖출 수 있는 병사들의 수가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즉 나라가 팽창해 인구는 많아졌지만 프린키페스나 트리아리를 구성할 돈좀 있고 병사 노릇까지 할만한 성인 남자의 수는 오히려 줄었다. 또한 로마의 영토가 거대해지자 장기간 원정을 꾸릴 필요가 생겼다. 하지만 중산층에 해당되는 로마 중보병 구성원들은 장기 원정을 격렬하게 반발했는데, 당연히 원정을 나간 동안 자기 집안의 재산을 관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기와 질이 점점 하락하며 기원전 105년 아루시오 전투에서는 군단병 8만 명이 전멸하는, 로마 역사를 통틀어 사상자 숫자가 최악에 달하는 굴욕적인 대패를 당했다. 이는 5만 명 남짓 전사한 칸나이 전투의 기록을 가볍게 넘었다. 결국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군제개혁의 칼을 빼들었다.
4. 마리우스의 군제개혁 이후
아루시오 전투 당시 이미 유구르타 전쟁으로 유능한 장군으로 명성 높았던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집정관에 또 다시 선출되어 군제개혁에 착수했다. 아루시오 전투가 남하하는 게르만족에게 패배한 것이었고 또한 게르만 족이 그 여세를 타고 이탈리아로 침공할 것이 확실하였으므로 마리우스로서는 군제개혁을 할 명분이 있었다. 마리우스는 군제 개혁에서 기존에 무장을 조달할 수 있었던 중산층에게서 징집하지 않고 시민권자 전원을 대상으로 모병하는 모병제로 전환했다.다만 지원자들 대부분이 무산자 혹은 그에 준하는 빈곤층이라 자신들의 무장을 조달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10] 국가가 지원해야 했고, 따라서 기존의 하스타티, 프린키페스, 트리아리의 구분은 없어졌다. 이후 로마 정규군은 대부분이 종전 프린키페스에서 이어지는 무장을 하며 우리가 흔히 아는 '레기오'에 가까운 모습이 됐다.
다만, 마리우스의 군제개혁은 로마군을 대격변 수준으로 바꿔놓은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파르살루스 전투 당시 카이사르의 군대에는 '벨리테스'에 해당하는 경무장 보병이나, '트리아리'에 해당하는 베테랑 보병대가 있다는 증거가 확실히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카이사르는 이 벨리테스+트리아리를 기병대와 합쳐 폼페이우스와의 기병 격차를 줄이기도 했다. 오히려 로마군을 우리가 아는 '로마 제국 레기오'로 바꾸는데 크게 일조한건 카이사르의 후임이자 최초의 황제로 등극했던 아우구스투스의 영향력이 더 컸다. 실제로 우리가 아는 근위대인 프라이토리아니나 군단병에 대한 근무연수 및 보상 등이 모두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확립됐다.
5. 아우구스투스의 집권 이후
카이사르의 내전과 이후 벌어진 2차 삼두정의 내전이 종료되고 집권한 아우구스투스는 본격적으로 로마 제정을 확립시키기 시작했고, 그 결과 자연스레 군단병에도 변화가 찾아왔다.가장 대표적인 변화는 바로 보조병의 편입과 군단병의 근속년수 및 퇴직금 본격화로, 기존 군단병의 절반에 달하는 부대를 '보조병(Auxiliarius)'로 편성하고, 군단병은 20년 근무(보조병은 25년)에 퇴임 시 퇴직금과 로마 시민권(비시민권자에 해당)을 얻는 방안을 추진했다.[11] 또한, 상설 군단을 25개 군단 300,000명(이 중 정규 군단원은 150,000명이고 나머지는 보조병이다.)으로 제한시키며 로마에 가해지던 군비 부담을 줄였다.
또한, 우리가 흔히 아는 근위대인 프라이토리아니를 창설하며 황제 개인 친위대를 만들었다. 이전까진 고정적인 친위대가 있는게 아니라, 임페라토르가 모집한 군단병 중에서 친위대를 뽑아서 쓰는 개념에 가까웠고, 군제 개혁 이전엔 집정관의 경우는 동맹국에서 차출된 호위부대를 거느렸고, 법무관의 경우 프레아토리아니를 거느리긴 했으나, 법무관이 군 지휘권을 가지는 경우가 흔한게 아니라[12] 상설직이 아닌 일종의 임시직이었는데, 이를 아우구스투스가 확립한 셈이다. 또한, 로마군 총사령관을 뜻하는 '임페라토르'의 권한을 자기 자신에게만 부여함으로써, 로마군을 지휘하는 총괄자를 1인으로 한정시키게 됐다.
이후 후대 황제들은 아우구스투스가 마련한 이 규정을 조금씩 가다듬으며, 우리가 흔히 아는 '로마식 군단'이 정립되는 계기가 됐다. 이후 군인 황제 시대를 거치며 다시금 로마가 혼란기에 접어들어 새로이 군제 개편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로마의 군단병은 이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과 아우구스투스의 군제 개혁을 기반으로 유지됐다.
6. 편제
마리우스는 4천에서 5천 사이를 왔다 갔다 했던 기존의 군단의 총원을 6000명으로 규격화했다. 또한 군단을 편성하면 그에 맞먹는 수의 보조병(Auxiliarius)도 구성하였다.[13]제1대대 소속 160명으로 타 대대는 80명 백인대(Centuria; 켄투리아)로 구성되며, 6개 백인대가 모여서 만들어진 전술단위인 대대(Cohort; 코호트), 그리고 10개의 대대로 형성되는 전략단위인 군단(Legion; 레기온)이 중심이 되며, 보조병 및 기병은 동맹국의 파견병력으로 편성하게 되었다.
백인대장(Centurion)은 병사들과 같은 출신의 노련한 소부대 지휘관으로, 군단장의 참모이자 명목상 대대지휘관인 트리부누스 밀리툼(Tribunus Militum)은 선출된 시민 중에서, 군단장인 레가투스는 노련한 정치가(전직 집정관 또는 전직 법무관급)가 맡았다.[14] 군단의 중핵인 중장보병은 로리카 하마타 갑옷을 입고 필룸 투창(Pilum)과 스쿠툼 방패(Scutum), 히스파니아에서 도입된 근접전에서 사용하는 글라디우스 검(Gladius)으로 무장하였으며 기병, 투석병, 공성병은 보조병으로 편성되었다.
로마의 많은 장군 중 전술적으로 유능했으며, 로마 군단을 가장 잘 활용한 인물로는 그 유명한 율리우스 카이사르(CAIVS IVLIVS CAESAR)를 들 수 있다.[15][16] 카이사르는 로마 군단병의 유기적인 진영 구축 능력과 뛰어난 무장 능력을 십분 활용해 압도적인 숫자의 야만인 부족들을 정벌하고 다녔으며, 이외에도 로마 군단병의 토목 능력을 활용한 야전 진지 및 포위망 구축 능력도 뛰어났다. 이게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 바로 갈리아 전쟁을 사실상 끝냈던 알레시아 공방전과 카이사르의 내전을 사실상 끝냈던 파르살루스 전투라 볼 수 있다.
하지만, 로마 군단의 가장 큰 단점은 기병대의 부족이었다. 로마가 위치한 이탈리아는 산지가 많은 특성상 기병을 대량으로 양성하기엔 무리였고, 그 때문에 병종도 기병이 아닌 보병 중심의 체제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로마는 기사 계급이나 동맹시 기병대를 제외하고도 갈리아족이나 게르만족, 누비디아족, 훈족과 같은 유목민들을 기병 용병으로 고용하는 방식으로 이를 해결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이런 유연한 용병 고용은 이후 동로마 제국에도 자리잡으며 1453년 동로마 멸망 때까지 유지됐다.
로마 군단은 그 유기적 체제(백인대 - 대대 - 군단으로 이어지는)를 이용하여, 다양한 전술적 국면에서 적절한 전투상황을 유도할 수 있었다. 중장보병과 맞먹는 수효의 보조병을 운용함으로써 이러한 능력은 극대화되었으며, 공성전이나 방어전에서도 우수한 공병대를 이용하여 많은 전과를 얻을 수 있었다. 또한 예비대(초기, 이후 기병대 또는 후방 보병대)를 체계적으로 운용함으로써 패배할 때도 참패를 당하는 일이 적었고 승리할 때에도 충분 이상으로 전과를 얻어낼 수 있었다.
또한 마리우스의 군제개혁은 병사들에게 급료와 퇴역 후 퇴직금을 주지만 장비는 돈을 내게 했다. 군장이 일체화되기는 했지만 지급이 아닌 공동 구매. 그래서 로마 병사들은 투창 던기지를 매우 싫어했다. 왜냐하면 던진 투창 값이 월급에서 까이니까. 게다가 마리우스는 로마군이 던진 투창을 적이 주워서 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던져진 투창은 쉽게 부러지도록 설계했기 때문에 재활용하기도 더 힘들어졌다.
이후 원수정 시기와 전제정 시기를 거쳐 476년에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는 시기의 레기오에 대한 서술은 평화에 안주하며 사치와 안일에 빠진 나머지 게르만족 용병들을 대거 받아들인 탓에 자멸했다.....라고 보통의 대중교양 서적에서는 아직도 서술하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로마의 멸망은 사치와 향락이 아니라, 군인 황제 시대로 대표되는 정치적 혼란과 훈족으로 대표되는 적의 다변화로 인한 굉장히 복합적인 요소가 뒤섞인 상황에서 이제껏 정복을 통한 영토와 재산 탈취로 비대하게 세를 불리던 로마 제국이 정복에서 수세로 전환하며 제국을 이끌 원동력을 상실한 상황에서 고대 농법의 한계로 제국의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한계까지 다다르는, 로마 제국 자체의 근본적인 모순이 한꺼번에 터져나왔고, 이를 수습해야할 정치세력의 혼란이 겹치며 결국 수습할 때를 놓치고 멸망한 것에 가깝다. 실제로 그 사치와 향락에 빠졌다는 로마의 분파인 비잔티움 제국은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에 의해 함락되기 전까지 약 1000년간 유지됐었다.
7. 3세기 이후
레기오의 무장과 전술 개념은 3세기 초반 들어 카라칼라의 레기오와 아욱실리움의 지원 자격 구분 철폐 및 기동부대(vexillatio) 편성 등으로 전환기를 맞으며[17] 디오클레티아누스 시기에 대대적인 편제 개편을 거친다.5천 명 정도로 규모를 헤아리던 레기오는 1천 명 단위 부대로 세분되었으며, 레기오들 중 정예들은 정제(正帝)와 부제(副帝)를 직접 따라다니는 친위대인 코미타텐세스에 배속되었다. 즉 이전에는 백인대 - 대대 - 레기오에서 레기오의 규모가 여단급에서 연대급으로 줄어드는 대신 정제와 부제는 여러 레기오들 위의 상위 단위인 코미타텐세스[18]를 이끌고 다니는 모양새가 되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의 시대가 되면 코미타텐세스란 명칭은 편제 단위가 아니라 기동 야전군을 뜻하는 일종의 병종 용어 비슷하게 되며, 레기오 위에는 야전군 혹은 둑스 관할[19]이란 편제가 나타나게 된다. 물론 황제 직속 친위대인, 즉 종전 군단 단위 부대고 해체한 프라이토리아니를 대신한 팔라티나이 코미타텐세스는 스콜라이와 함께 여전히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와 같은 역할을 수행했지만 이 부대는 아드리아노플 전투의 충격 이후로 건제가 붕괴해서 사라지기에 이 항목에선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이 편제는 이후 큰 변화없이 동로마의 유스티니아누스 때까지도 이어지며, 레기오는 어떤 의미에선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부터 본격적인 활약의 장에서 퇴장하고 후배들에게 자리를 내준 셈이지만 적어도 연대급 편제로서는 그 명맥을 유지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은 7세기 이슬람 제국의 맹진 앞에서 큰 위기를 겪었다. 리미타네이로서 둑스 관할 편제 하에 있던 부대들은 이때 전원 궤멸했고 코미타텐세스로 야전군 편제로 있던 부대들은 남은 영토로 물러나 생존했지만, 레기오 편제 자체는 다른 이름으로 존재를 이어갔다.
2~3세기에 등장했던 기병 연대나 대대들은 이후의 편제 개편에서도 간단히 등장하고, 심지어 어떤 부대는 9세기 문헌에도 나오지만, 보병 연대나 대대들은 이 부분이 확실치가 않다. 7~8세기에 정신을 못차릴 정도의 이슬람 제국의 맹공 앞에서 종전의 야전군은 테마 단위로 변한다. 이때 테마 단위는 데카키아 - 켄타키아 - 드룽고스 - 테마로 편성되는데 이 시기부터 레기오란 말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즉 종전 레기오들이 테마로 명칭이 바뀌어 각 지역에 황실 영지를 받고 둔전병으로 배치된 것이다. 다만 유명한 켄투리오, 즉 백인대장의 칭호와 백인대 편제만은 아예 명칭도 그닥 바뀌지 않은채 최소한 9세기까지는 계승되었다. 백인대는 켄투리오가 아니라 켄타키아로 불렸고 백인대장은 켄투리오가 아닌 에카톤다키스로 불렸다지만, 이들은 3세기부터도 로마 제국 동부에서는 그 명칭으로 통하고 있었다.
로마 레기오들의 직계 후예인 테마 부대들은 이슬람 제국과 불가리아 제국, 게르만족의 맹공도 버텨내며 생존했지만, 11세기 각기 디라키움 전투와 만지케르트 전투를 거치며 노르만족과 투르크족의 맹공에 최종적으로 궤멸했다.
다른 자세한 내용들은 로마군의 후기 로마군 부분 및 동로마 제국 항목 참조.
8. 레기온 목록
8.1. 공화정 후기
단대호 | 상징물 | 군단 주둔지 | 비고 |
제1게르마니카 군단 | |||
제2사비나 군단 | 제2아우구스타 군단으로 명칭 변경 | ||
제3키레나이카 군단 | |||
제3갈리카 군단 | 황소 | ||
제4마케도니카 군단 | |||
제4스키티카 군단 | |||
제5알라우다에 군단 | 코끼리 | 종달새 군단, 카이사르가 속주에서 징집한 사병 | |
제6페라타 군단 | 암늑대[20] | ||
제7클라우디아 피아 피델리스 군단 | |||
제8아우구스타 군단 | 황소 | 서로마 제국 멸망까지 존속 | |
제9히스파니아 군단 | 황소 | 2세기에 기록에서 사라져 여러가지 추측이 오간다. | |
제10에퀴스트리스 군단 | 카이사르의 최정예 10군단으로 알려진 그 10군단이다. | ||
제11군단 | 넵튠 | ||
제12빅트릭스 군단 | |||
제13게미나 군단 | 사자 | 카이사르와 함께 루비콘 강을 건너 카이사르 내전의 시작을 알린 군단이다. | |
14군단 | 암비오릭스의 난 시기에 파괴됨. | ||
제18리비카 군단 | |||
제30클라시카 군단 |
8.2. 제정
단대호 | 상징물 | 군단 주둔지 | 비고 |
제1아디우트릭스 군단 | 염소 | 판노니아 | |
제1게르마니카 군단 | 황소 | 저지 게르마니아 | |
제1이탈리카 군단 | 멧돼지 | 저지 모이시아 | |
제1마크리아나 리베라트릭스 군단 | 아프리카 | ||
제1미네르바 군단 | 미네르바 | 저지 게르마니아 | |
제1파르티카 군단 | 켄타우로스 | 시리아 | |
제2아디우트릭스 군단 | 염소 | 판노니아 | |
제2아우구스타 군단 | 염소 | 브리타니아 | 前제2사비나 군단 |
제2이탈리카 군단 | 암늑대 | 노리쿰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창설. 코미타텐세스 보병 연대로서 아프리카 야전군 및 일리리쿰 야전군에 들어감. |
제2파르티카 군단 | 켄타우로스 | 시리아 | 4세기의 편제 개편 때 리미타네이 보병 연대가 되어 메소포타미아 둑스 관할구에 들어감. |
제2트라이아나 포르티스 군단 | 헤라클레스 | 아이귑토스 | |
제3아우구스타 군단 | 페가수스 | 마우레타니아 | 고르디아누스 3세 즉위 직후 강제 해산. 영화 글래디에이터 II에서 마르쿠스 아카시우스가 지휘하는 군단의 모티브가 된 군단[21] |
제3키레나이카 군단 | 아라비아 페트라이아 | ||
제3갈리카 군단 | 두마리 황소 | 시리아 | |
제3이탈리카 군단 | 황새 | 라이티아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창설. 4세기의 편제 개편 때 11개 연대로 분할되어 다섯 연대는 라이티아 변경군에, 여섯 연대는 코미타텐세스로서 일리리쿰 야전군에 배속됨. |
제3파르티카 군단 | 황소 | 시리아 | |
제4플라비아 펠릭스 군단 | 사자 | 고지 모이시아 |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막시무스가 지휘하는 펠릭스 군단의 모티브가 된 군단 |
제4마케도니카 군단 | 황소 | 고지 게르마니아 | |
제4스키티카 군단 | 염소 | 시리아 | |
제5알라우다에 군단 | 코끼리 | 저지 게르마니아 | |
제5마케도니카 군단 | 독수리 | 다키아 | 4세기의 편제 개편 때 코미타텐세스 보병연대로서 오리엔툼 야전군에 들어감. |
제6페라타 군단 | 암늑대 | 유다이아 | |
제6히스파나 군단 | |||
제6빅트릭스 군단 | 황소 | 브리타니아 | |
제7클라우디아 군단 | 황소 | 고지 모이시아 | |
제7게미나 군단 | 히스파니아 | 4세기의 편제 개편 때 코미타텐세스 보병연대로서 오리엔툼 야전군에 들어감. | |
제8아우구스타 군단 | 황소 | 고지 게르마니아 | 서로마 제국 멸망까지 존속 |
제9히스파나 군단 | 황소 | 브리타니아 | 120년 이후 기록 실종[22] |
제10프레텐시스 군단 | 멧돼지[23] | 유다이아 | 4세기의 편제 개편 때 리미타네이 보병 연대로서 팔레스타인 둑스 관할구에 들어감. |
제10게미나 군단 | 황소 | 판노니아 | 레피두스가 창설. 4세기의 편제 개편 때 일부는 코미타텐세스 보병 연대로서 오리엔툼 야전군에 들어갔고, 다른 일부는 리미타네이 연대가 되어 판노니아 둑스 관할구에 들어감. |
제11클라우디아 군단 | 넵튠 | 저지 모이시아 | 서기 135년 유대인 지도자 바르 코크바의 반란을 진압하는 베탈(Betar) 요새의 포위전에 참가하여 바르 코크바를 죽게 하고[24] 반란을 진압함.# |
제12풀미나타 군단 | 번개 | 카파도키아 | 유대전쟁 중 군단기 상실 |
제13게미나 군단 | 사자 | 저지 모이시아 | 카이사르가 로마 진군때 지휘. 4세기의 편제 개편 때 일부는 리미타네이로서 시리아 변경군에 들어갔고, 다른 일부는 코미타텐세스 보병 연대가 되어 트라키아 야전군에 들어감. |
제14게미나 마르티아 빅트릭스 군단 | 염소 | 판노니아 | 아우구스투스가 창설. 4세기의 편제 개편 때 코미타텐세스 보병연대로서 트라키아 야전군에 들어감. |
제15아폴리나리스 군단 | 아폴로 | 카파도키아 | 카이사르가 창설. 4세기의 편제 개편 때 리미타네이 보병 연대로서 오스로에네 둑스 관할구에 들어감. |
제15프리미게니아 군단 | 포르투나 | 저지 게르마니아 | |
제16플라비아 피르마 군단 | 사자 | 시리아 | |
제16갈리카 군단 | 사자 | 저지 게르마니아 | |
제17군단 | 저지 게르마니아 |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전멸 | |
제18군단 | 저지 게르마니아 |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전멸 | |
제19군단 | 저지 게르마니아 |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전멸 | |
제20발레리아 빅트릭스 군단 | 멧돼지 | 브리타니아 | 하드리아누스 방벽 건설 |
제21라팍스 군단 | 염소 | 판노니아 | |
제22데이오타리아나 군단 | 아이귑토스 | 서기 132년 유대인 반란군 지도자인 바르 코크바의 반란 때,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던 도중 유대 반란군의 매복에 걸려 부대가 해체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 | |
제22프리미게니아 군단 | 헤라클레스 | 고지 게르마니아 | |
제30울피아 빅트릭스 군단 | 유피테르 | 저지 게르마니아 |
[1] 라틴어 명사 제3변화가 원래 주격을 취할 때 어근의 맨 마지막 음절을 떼는 경우가 많다.[2] 인원수에 대한 부분은 재고해볼 만하다. 고대와 현대는 인구수가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기에 당연히 인원 편제도 비례해서 고대가 현대보다 적다. 대표적인 예시로, 그당시 세계 최강국이자 어마어마한 국토와 인구수를 자랑하던 고대 로마나 한나라의 총인구수가 약 5천만 ~ 6천만 명 사이로, 현대 대한민국보다 조금 더 많다.[3] 사실 무척 애매한 것이 로마의 군단은 군단 자체로도 독자적인 작전이 가능하므로 현대적인 사단과 비슷하나 전선을 유지하고 때로 원정도 하는 성격으로 보면 사단보단 군단에 가깝다.[4] 군단에 소속된 장병을 따로 일컫는 말은 없다. 그냥 ~군단 소속이라고 밝히면 되고, 병과 이름인 레기오나리와는 달리 소총수 등 보직명이 사용되기 때문이다.[5] 영어/프랑스어인 Legionary/Legionnaire는 프랑스군 외인부대(Foreign Legion)원을 일컬을 때 사용되기도 한다.[6] 로마 선호가였던 무솔리니는 이탈리아군의 사단을 군단으로 고쳐 부르기까지 하였다.[7] 카밀루스(Marcus Furius Camillus)는 기원전 5세기 말-기원전 4세기 초 로마 병사이자 정치인. 기원전 390년 갈리아인들이 로마를 점령했을 때 크게 활약하였다.[8] 모순이라는 고사성어의 유래를 잘 생각해보면 알 수 있듯, 이는 당시 세계에서는 보통이았다고 한다.[9] 이는 복합적인 이유인데 복무중에는 농지를 관리할 수 없었고 전쟁이 끝나 고향으로 돌아오면 황폐화된 경우가 많았다. 어떻게 멀쩡히 유지하더라도 정복지에서 들어온 값싼 농산물에 밀려 제값을 받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복무 중 사망이라도 한다면 남은 가족들이 벌어서 살아야 되는데, 성인 남성이 없는 가정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현대 군인들이 제대 후 겪는 어려움을 이때도 똑같이 겪은 것이다. 로마 자영농은 목돈 벌어 지주가 되든가, 남의 땅 소작농이 되든가로 분할되었다.[10] 이는 억측이라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이후로 이어지는 폼페이우스나 카이사르는 물론, 아우구스투스 이후까지도 나름 재산이 있는 계급 역시 모병된 흔적이 널려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로마군은 퇴임 후엔 땅을 나눠받는 케이스가 흔했는데, 농사 자체가 수많은 약품의 축복이 있는 현대시대에서도 관련 지식이 전무하면 망치기 십상임을 고려하면, 그러한 약품의 은총이 없었을 고대 시대에 퇴임 후 분산 정착에 성공했단 측면에서 나름 재산이 얼추 있거나, 자기 농지를 가져본 적이 있는 계층도 모병했을 가능성이 꽤 높다. 물론, 이와 별개로 무장 자체는 이때부터 국가가 맞춰준 것으로 추측되고 있는데, 이것도 다 군인들의 월급에서 공제했다(...). 즉, 완전 공짜는 아니었던 셈.[11] 단, 시민권 발행 자체는 아우구스투스가 아닌, 티베리우스 1세 시대에 정착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12] 2차 포에니 전쟁까지만 해도 군단의 총 지휘권은 오롯이 2인의 집정관이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후 로마의 영토와 군단이 급격히 불어나면서 집정관과 법무관이 임기 종료 후 '속주'로 부임하는 총독직이 신설됐고, 이 총독 역시 군사를 모집하는 권한이 부여됐다. 이전까진 집정관 2인이 2개 군단씩, 총 4개 군단을 지휘했으나, 여의치 않다면 법무관이나 전직 집정관 및 법무관에게 임시로 군 지휘권을 부여하여 2개 군단을 지휘할 권한을 주는 경우가 전부였다.[13] 단, 보조병을 정식으로 군단에 편입시킨건 후대인 아우구스투스 시기에 이루어졌다.[14] 그리스 나 로마 쪽에선 정치가와 군인이 같은 테크를 밟는다. 이쪽 사상에선 참정권을 피를 흘린 대가라고 할 정도다. 그리스의 영향을 받기 전 로마에서도 전통적으로 집정관이 군대 최고 통수권자를 겸했다.[15] 물론 단순 전공만 따지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Publius Cornelius Scipio Africanus)나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Gnaeus Pompeius Magnus)처럼 비슷하거나 더 뛰어난 자들도 있다. 다만, 폼페이우스의 경우 결국 카이사르에게 패배했고, 스키피오는 애초에 살던 시대는 물론, 군의 편제나 상대한 적이 달라서 직접적인 비교는 불가능하다. 다만, 후술하듯 군단병을 활용한 능력만 따지면 카이사르가 무려 10여년이 넘게 자기 휘하 군단들을 써먹었던지라(...) 이 분야에선 스키피오보다 훨씬 더 군단병을 알차게 써먹은건 맞다.[16] 이는 스키피오 이후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을 전후로 로마 군단병이 과거와 달리 장군의 사병화가 가속된 측면이 크다. 후술하듯 군제 개혁이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지만, 이를 시행한 마리우스부터 후임인 술라 및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등 온갖 임페라토르(총사령관)들이 로마 군단병을 개인을 위해 서슴없이 활용했기 때문. 이는 최종적으로 내전에서 승리한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군단병의 지휘권을 프린캡스 1인에게 집중되게 함으로써 얼추 소강됐으나, 이를 완벽하게 해소하지 못하여 끝내 군인 황제 시대라는 로마 제국 최악의 정치적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원흉이 됐다.[17] 시오노 나나미는 이것 자체가 로마군의 약체화와 퇴폐를 초래한 투로 말하는데 이것도 실상과 다르다. 군대 체제를 떠받쳐주는 체제 역량, 즉 경제력이 감퇴되어가고 인력도 줄어드는 판국에 이전 시기의 시대와 맞지 않는 전술과 편제를 고수하는 것은 제국 방어에 하등의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그 전 세기에 내내 입증되고 있었다.[18] 결국 종전 레기오급의 규모거나 혹은 그 두세 배 정도가 된다. 반란 억제가 주요 이유라서 이렇게 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시기 4황제들의 친위대 명칭은 사실 엑세르키투스 코미타텐세스였지만 당대에도 그랬고 지금도 앞부분은 대부분 생략한다.[19] 리미타네이 병종은 종전 레기오와 같이 국경을 방어하는게 주임무였기에 분명 어떤 의미에선 종전 레기오와 더 가깝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보수를 제대로 받는 우수한 자원들은 코미타텐세스로 많이 빠졌기에 이런 구분은 무의미하다.[20] 로물루스와 레무스를 젖먹이는 건국설화의 늑대이다.[21] 출처(2번째 캐릭터 스틸)[22] 트라야누스 황제 말기 이 부대는 브리타니아 원주민들의 연이은 침략에 대응하여 원정에 투입되었으나 매복에 걸려 부대원들 전원이 몰살 당하고 군단기까지 빼앗겼으며 다시 편성되지 않았다는 가설이 있다. 영화 센츄리온, 이글, 소설 독수리 군기를 찾아의 배경이 바로 이 가설이다. 하지만 트라야누스 시대 이후로 네덜란드로 재배치되었다는 증거도 있어 확실한 결론을 낼 수는 없다.[23] 신약성서에서 '군대'라고 하는 거라사 지역의 귀신들린 사람이 예수를 보고 안에 있던 귀신이 빠져나와 돼지 떼들에게 들어가 돼지들이 스스로 물에 빠져 죽은 부분이 이를 가리킨다.[24] 바르 코크바 본인은 결사적으로 저항했으나 결국 베탈 요새가 로마군에게 함락당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거나 뱀에게 물려 죽었다고 한다. 바르 코크바의 머리는 잘려져 하드리아누스 황제한테 바쳐졌다고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