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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5px -10px; margin-top: -7px; margin-bottom: -7px" | <tablebordercolor=#ABDDED><tablebgcolor=#ABDDED> | 디에고 마라도나 관련 둘러보기 틀 | }}}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디에고 마라도나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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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 ||||
38대 | ||||
클럽 | ||||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 ||||
다니엘 파사레야 (1978~1986) | ▶ | 디에고 마라도나 (1986~1994) | ▶ | 오스카 루게리 (1994) |
SSC 나폴리 역대 주장 | ||||
주세페 브루스콜로티 (1983~1986) | ▶ | 디에고 마라도나 (1986~1991) | ▶ | 치로 페라라 (1991~1994) |
디에고 마라도나의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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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 ||||
| 1979 · 1980 | |||
| 1986 · 1987 | |||
| 1979 · 1986 | |||
| 1978 M · 1979 M · 1979 N · 1980 M · 1980 N | |||
1986 FIFA 월드컵 골든볼 | 1986 FIFA 월드컵 실버슈 [1] | | | |
1990 FIFA 월드컵 브론즈볼 | | | ||
베스트팀 | ||||
| 1984 · 1987 | |||
| 1980 · 1981 · 1982 · 1983 · 1986 | |||
| | |
Player of the Year 1985 | ||
수상 미셸 플라티니 | 2위 프레벤 엘케어 | 3위 디에고 마라도나 |
Player of the Year 1987 | ||
수상 루드 굴리트 | 2위 디에고 마라도나 | 3위 마르코 반 바스텐 |
Player of the Year 1990 | ||
수상 로타어 마테우스 | 2위 살바토레 스킬라치 | 3위 디에고 마라도나 |
1985 Onze d'Or | ||
Onze d'Or | Onze d'Argent | Onze de Bronze |
미셸 플라티니 | 프레벤 엘케어 | 디에고 마라도나 |
1988 Onze d'Or | ||
Onze d'Or | Onze d'Argent | Onze de Bronze |
마르코 반 바스텐 | 루드 굴리트 | 디에고 마라도나 |
Player of the Year 1980 | ||
수상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 2위 만프레트 칼츠 | 3위 디에고 마라도나 |
Player of the Year 1981 | ||
수상 지쿠 | 2위 디에고 마라도나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 3위 - |
Player of the Year 1984 | ||
수상 미셸 플라티니 | 2위 이안 러쉬 | 3위 디에고 마라도나 |
Player of the Year 1985 | ||
수상 미셸 플라티니 | 2위 디에고 마라도나 | 3위 엔조 프란체스콜리 |
1979 아르헨티나 올해의 축구 선수 | ||||
마리오 켐페스 (발렌시아 CF) | → | 디에고 마라도나 (AA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 → | 디에고 마라도나 (AA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
1980 아르헨티나 올해의 축구 선수 | ||||
디에고 마라도나 (AA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 → | 디에고 마라도나 (AA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 → | 디에고 마라도나 (CA 보카 주니어스) |
1981 아르헨티나 올해의 축구 선수 | ||||
디에고 마라도나 (AA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 → | 디에고 마라도나 (CA 보카 주니어스) | → | 우고 가티 (CA 보카 주니어스) |
1986 아르헨티나 올해의 축구 선수 | ||||
엔조 프란체스콜리 (CA 리버 플레이트) | → | 디에고 마라도나 (SSC 나폴리) | → | 네스토르 파브리 (라싱 클루브) |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
디에고 마라도나의 기네스 등재 세계 기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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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고 마라도나의 기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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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color=#001224> EL Grafico 선정 [2] 아르헨티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축구 선수 5인] | |||||||||||||||||||||||||||||||||||||||||||||||||||||||||||||||||||||||||||||||||||||||||||||||||||||||||||||||||||||||||||||||||||||||||||||||||||||||||||||||||||||||||||||||||||||||||||||||||||||||||||||||||||||||||||||||||||||||||||||||||||||||||||||
안토니오 사스트레 | 호세 마누엘 모레노 | 아돌포 페데르네라 |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 디에고 마라도나 |
SSC 나폴리 영구결번 |
No.10 |
IFFHS 선정 남자축구 레전드 | |||||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color:#fff; margin: -6px -1px -11px" | 펠레 | 디에고 마라도나 | 로테어 마테우스 | 페렌츠 푸스카스 | 바이충 부티아 |
알리 다에이 | 디노 조프 | 로베르토 바조 | 나카타 히데토시 | 차범근 | |
자셈 야쿱 | 조지 웨아 | 안토니오 카르바할 | 라바 마제르 | 우고 산체스 | |
요한 크루이프 | 마르코 반바스텐 | 루드 굴리트 | 윈턴 루퍼 |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 |
호나우두 | 라이언 긱스 | 루카스 라데베 | 랜던 도노번 | 후안 알베르토 스키아피노 | |
스탠리 매튜스 | 데이비드 베컴 | 바비 찰튼 | 올레흐 블로힌 | 탄주 촐라크 | |
프란시스코 헨토 | 마제드 압둘라 | 레프 야신 | 루이스 피구 | 에우제비우 | |
호세 루이스 칠라베르트 | 은완코 카누 | 미셸 플라티니 | 프란츠 베켄바워 | 게르트 뮐러 | |
모하메드 아부트리카 | 마흐무드 엘카팁 | 지네딘 지단 | 가린샤 | 지쿠 | |
로저 밀러 | 쑨지하이 | 하오하이둥 | 프랑코 바레시 |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 |
데니스 베르캄프 | 즈비그니에프 보니에크 | 호베르투 카를로스 | 페테르 체흐 | 안드리 셰브첸코 | |
케니 달글리시 | 에드가 다비즈 |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 | 디디에 드록바 | 사무엘 에투 | |
엔조 프란체스콜리 | 게오르게 하지 | 티에리 앙리 | 올리버 칸 | 카카 | |
케빈 키건 | 마리오 켐페스 | 미로슬라프 클로제 | 로날드 쿠만 | 필립 람 | |
미카엘 라우드루프 | 유니스 마흐무드 | 파울로 말디니 | 라파엘 마르케스 | 파벨 네드베드 | |
모하메드 누르 | 제이제이 오코차 | 아베디 펠레 | 장마리 파프 | 안드레아 피를로 | |
카를레스 푸욜 | 라울 곤잘레스 | 프랑크 레이카르트 | 히바우두 | 호마리우 | |
호나우지뉴 | 파올로 로시 |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 페테르 슈마이켈 |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 |
다보르 슈케르 | 프란체스코 토티 | 카를로스 발데라마 | 뤼트 판니스텔루이 | 로빈 반 페르시 | |
사비 에르난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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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르헨티나의 前 축구인 | ||||||||
<colbgcolor=#eee><colcolor=#000> 이름 | 디에고 마라도나 Diego Maradona | |||||||
본명 | 디에고 아르만도 마라도나 프랑코 Diego Armando Maradona Franco | |||||||
출생 | 1960년 10월 30일 | |||||||
부에노스 아이레스주 라누스 | ||||||||
사망 | 2020년 11월 25일 (향년 60세) | |||||||
부에노스 아이레스주 티그레 | ||||||||
국적 | [[아르헨티나| ]][[틀:국기| ]][[틀:국기| ]] | |||||||
신체 | 키 165cm[3] | |||||||
직업 | 축구 선수 (공격형 미드필더 / 은퇴) 축구 감독 은퇴 축구 행정가 은퇴 | |||||||
소속 | <colbgcolor=#eee><colcolor=#000> 선수 | 에스트레야 로하 (1968~1969 / 유스) 로스 세볼리타스 (1970~1974 / 유스)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1975~1976 / 유스)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1976~1981) CA 보카 주니어스 (1981~1982) FC 바르셀로나 (1982~1984) SSC 나폴리 (1984~1991) 세비야 FC (1992~1993) CA 뉴웰스 올드 보이스 (1993~1994) CA 보카 주니어스 (1995~1997) | ||||||
감독 | 만디유 데 코리엔테스 (1994) 라싱 클루브 (1995) 아르헨티나 대표팀 (2008~2010) 알 와슬 FC (2011~2012) 푸자이라 FC (2017~2018) 도라도스 데 시날로아 (2018~2019) 힘나시아 라플라타 (2019~2020) | |||||||
행정 | FC 디나모 브레스트 (2018 / 회장) | |||||||
국가대표 | 91경기 34골[4] (아르헨티나 / 1977~1994) | |||||||
정보 더 보기{{{#!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word-break: keep-all"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 <colbgcolor=#eee><colcolor=#000> 부모 | 아버지 돈 디에고 마라도나(1927년~2015년) 어머니 달마 살바도라 프랑코(1930년~2011년) | ||||||
형제 | 동생 우고 마라도나(1969년~2021년) | |||||||
배우자 | 클라우디아 비야파녜(1962년생) (1989년 결혼~2003년 이혼) | |||||||
자녀[5] | 아들 디에고 아르만도 마라도나 시나그라(1986년생) 디에고 페르난도 마라도나 오제다(2013년생) 딸 달마 네리아 마라도나(1987년생) 지안니나 디노라 마라도나(1989년생)[6] 자나 마라도나 사발레인(1996년생) | |||||||
서명 | ||||||||
주발 | 왼발 | |||||||
등번호 | 10번 | |||||||
후원사 | 푸마(킹 시리즈) | |||||||
종교 | 가톨릭 | |||||||
묘소 |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베야 비스타 베야 비스타 공원묘지[7] | |||||||
SNS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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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헨티나의 前 축구인. 선수 시절 아르헨티나의 1986 월드컵 우승과 1990 월드컵 준우승, 나폴리의 세리에 A 2회 우승과 UEFA컵 1회 우승을 주도했다. 또한 펠레와 함께 FIFA 세기의 선수를 공동 수상했고, 나폴리에서는 그의 등번호가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으며, 아르헨티나에서는 마라도나교라는 종교까지 탄생했을 정도로 그 위상이 대단한 인물이다.[8]2. 생애
2.1. 유년기
마라도나는 1960년 10월 30일, 부에노스 아이레스주 라누스에서 과라니족+스페인 바스크계 혈통의 아버지 디에고 마라도나 치토로와 이탈리아계+크로아티아계 혈통의 어머니 달마 살바도라 프랑코 사이에서 3남 5녀 중 다섯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9] 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는 3살때 사촌으로부터 축구공을 선물받았는데 어찌나 축구공을 좋아했는지 누가 자신의 축구공을 훔쳐갈까봐 선물 받은 후 6개월간 꼭 끌어안고 다녔을 정도였다.그의 부친 돈 디에고는 아르헨티나의 극북동 지역의 코리엔테스 파라냐 델타의 선원이었으며, 가사일을 도우며 돈을 벌던 부인 달마 프랑코와 합치기 위해 코리엔테스 주에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남부 외곽의 판자촌인 비야 피오리토(Villa fiorito)로 이주하였다. 돈 디에고는 빌라 피오리토 지역에 헐거운 벽돌과 금속 벽지로 자신의 집을 지었다.
그 슬럼가는 너무나 폭력적이고 위험해서 경찰들 조차도 상주하지 못하고 매일 버스를 타고 드나드는 지역이었다. 하루는 걸음마를 막 뗀 마라도나가 열려있던 오물통으로 떨어졌다. 그의 삼촌 시릴로는 그를 돕기 위해 "디에기토! 그 똥통에서 머리를 들어라"라고 소리쳤다. 그 표현은 마라도나가 그의 인생에서 힘든 순간일 때 주문과 같이 반복해서 쓰는 표현이 되었다. 이렇게 가난한 가정이었고 위험한 지역에서 돈 디에고는 가족을 위해 새벽 4시에 막노동을 하러 나간 뒤 밤늦게 돌아와 곯아 떨어지기 일쑤였다.
유년 시절의 마라도나 |
축구공을 튕기며 재주를 부리는 트래핑을 좋아했던 마라도나는 8살 때 지역 클럽 에스트레야 로하에 입단하였고 온종일 공만 갖고 논다는 빈민가 소년의 소문은 금세 주변으로 퍼져나가며 부에노스 아이레스 전역으로 퍼졌다. 아르헨티나 대표 일간지 중 하나인 <클라인>은 축구 천재의 탄생이라는 기사를 통해 마라도나를 보도했는데, 당시 기자가 실수로 이름을 카라도나로 보도하기도 했다. 이러던 중 그의 재능을 알아본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의 스카우트 프란시스코 코르네효에게 목격되었고,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는 11살에 불과했던 마라도나에게 과감한 투자를 하기로 결심하며 계약하게 된다.
입단 테스트에는 유독 뛰어난 선수들이 많았지만 그 중 마라도나는 유독 튀는 선수였다.
프란시스코 코르네효 (마라도나를 발굴한 아르헨티노스 유스 코치)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의 유소년팀인 로스 세볼리타스에서 뛰게 된 마라도나는 그곳에서 에이스가 되어 팀의 140경기 무패라는 난공불락의 기록을 세우며 주축이 되었고 1부 리그 경기에서 볼보이로 나와 하프타임 중간 휴식시간에 공으로 묘기를 부리는 마법의 모습을 보여주며 관중들을 즐겁게 했는데, 이런 워밍업은 마라도나의 전매특허가 된다. 훗날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되는 호세 페케르만은 이 시절 1군 선수들 모두가 일찌감치 훈련을 종료하고 유소년 팀에 놀러가 마라도나를 구경하던 일을 회상했다. 그야말로 사상 초유의 선수가 나타난 것이다. 프란시스코 코르네효 (마라도나를 발굴한 아르헨티노스 유스 코치)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는 이런 마라도나에게 경기장 근처인 비야 델 파르크의 작은 아파트를 선물하였고 판잣집에서 연명하던 소년과 소년의 가족들은 꿈처럼 믿기지 않는 현실에 눈물을 흘렸다. 그 광경을 본 마라도나는 축구로 꼭 성공해 가족들과 평생 부유하게 살겠노라고 다짐하게 된다. 그리고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는 마라도나라는 이름을 아르헨티나 전역에 알리는 발판이 되었고, 마라도나는 이후 역대 최고의 축구 선수 중 한 명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2.2. 선수 경력
2.2.1. 클럽 경력
자세한 내용은 디에고 마라도나/클럽 경력 문서 참고하십시오.2.2.2. 국가대표 경력
자세한 내용은 디에고 마라도나/국가대표 경력 문서 참고하십시오.2.3. 지도자 경력
자세한 내용은 디에고 마라도나/지도자 경력 문서 참고하십시오.2.4. 사망
"정말 슬픈 소식이다. 나는 위대한 친구를 잃었고 세상은 전설을 잃었다. 분명히 언젠가 하늘에서 우리가 함께 공을 차게 될 것이다."[10]
마라도나의 사망 소식을 들은 펠레의 추도사
2020년 10월 말 마라도나의 경호원이 코로나 19 증세를 보여서 본인 또한 자가격리 중이었는데, 현지 시간으로 11월 3일 두부 외상을 입은 후에 출혈이 생겨 뇌 경막 아래 피가 고이는 경막하혈종으로 수술을 받았다. 이후 11월 11일 부에노스 아이레스 근교 올리보스의 병원에서 퇴원하였지만, 2020년 11월 25일 심정지로 인해 자택에서 사망한 것이 확인되었다. 심정지로 쓰러져 응급 처치를 받았지만 회복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11] 향년 60세. 아르헨티나 언론 보도에 따르면, 마라도나의 사망하기 직전까지 살아 있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 사람은 마라도나의 조카인 조니 에스포시토라고 밝혔다. 마라도나는 아침식사를 먹으면서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라고 마지막 말을 남겼으며 식사 직후에 잠이 들었고 다시 깨어나지 못하였다고 한다.[12]마라도나의 사망 소식을 들은 펠레의 추도사
2004년, 마라도나는 이와 동일한 심정지가 한 번 발생한 적이 있었고[13] 이때 쿠바와 우루과이를 오가면서 대대적인 치료를 받은 끝에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다른 지병이 없었기에 대대적인 치료를 받고 살아날 수 있었지만, 두서없는 사생활과 나태한 건강관리 등으로 이후 그의 몸은 점점 망가지고 있었고 재발한 심정지에 뇌출혈도 같이 발생하는 바람에 의사들도 손을 쓰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것이다. 2004년에 스스로가 가장 어려운 라이벌이라고 언급한 코카인을 끊었지만 그 이후 스트레스성 폭식[14]으로 위 절제 수술을 받기도 하는 등 여러모로 몸 관리 문제를 겪었다.
마라도나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질 것이며 아르헨티나 정부는 26일부터 28일까지 3일간을 국가애도기간으로 지정하였고,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도 금요일까지 모든 공식일정을 취소하였고 공공기관은 조기를 게양하고 건물에는 아르헨티나의 국기 색깔인 하늘색 조명을 비출 예정이다. 선수 시절 전성기를 누렸던 나폴리에서도 관내 모든 학교들은 레전드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휴교에 들어간다. 시신은 대통령궁인 카사 로사다에 안치하고 국민들의 조문을 받겠다고 했다. 마라도나의 시신을 실은 영구차가 움직이자 국민들이 쏟아져나와 그의 마지막을 배웅해주었고, 일부는 대성통곡하며 영구차를 가로막기도 할 정도였다.[15][16]
세계 각국의 언론들은 마라도나의 죽음을 일제히 대서특필하였고 가제타 델로 스포르트는 56면으로 구성된 잡지에 무려 23면까지 마라도나 관련 내용을 실었으며 보카 주니어스는 홈구장 에스타디오 알베르토 J. 아르만도의 마라도나가 생전 사용했던 VIP룸의 불을 켜놓으면서 그를 추모했다.[17] 마라도나를 품었던 SSC 나폴리는 팀의 전설적인 대스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나폴리 시장과 홈구장 이름 변경에 대한 논의를 펼쳤고 기존 산 파올로에서 마라도나의 풀네임인 디에고 아르만도 마라도나로 바꾸는 것으로 최종 결정하였으며 그의 죽음을 기리며 산 파올로의 불이 켜졌다.[18] 또한 SSC 나폴리는 AS 로마와의 다음 세리에 A 경기에서 마라도나를 위한 특별한 킷을 입고 경기에 나선다. 축구계가 역대 가장 위대한 축구 아이콘 중 하나인 디에고 마라도나의 사망을 애도하는 가운데 FIFA는 211개 회원 협회에 모든 대회 주최측이 이번 주말 또는 다음 가능한 경우에 모든 축구 경기에서 1분의 묵념을 유지하도록 요청하였다. 아르헨티나 현지 생방송 뉴스에서는 자국의 국민적 영웅인 마라도나의 사망이라는 너무나 갑작스러운 긴급속보에 아나운서와 출연진들이 충격에 말을 잇지 못하거나 더듬기 시작했고, 사태를 인지하고 나서는 눈물을 참지못하고 대성통곡하기 시작하며 마라도나의 사망을 진심으로 슬퍼하였다.
대통령궁인 카사 로사다에서 마라도나를 추모하는 조문객들 |
마라도나의 죽음을 슬퍼하는 보카 주니어스와 리버 플레이트 서포터[20] |
마라도나의 시신은 당초 사흘간 대통령궁에 안치될 예정이었지만, 유족의 뜻에 따라 하루 만에 장례 절차가 마무리됐다. 조문 마감 시간이 공지되자 고인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지 못한 축구팬들이 무질서하게 한꺼번에 몰리며 경찰이 조문 인파의 진입을 통제하려하자 성난 팬들이 돌 등을 던졌고, 경찰은 최루탄과 고무탄 등을 동원해 해산을 시도하며 충돌이 빚어지기도 했다. 대통령궁은 팬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조문시간을 저녁 7시까지로 연장하겠다고 밝혔지만 혼란은 계속됐고, 마라도나의 관이 안전상의 이유로 카사 로사다 내부의 다른 장소로 옮겨지기도 했다. 결국 고인의 시신은 7시가 되기 전 운구됐고, 장지는 마라도나의 부모님이 안장된 부에노스 아이레스 근교의 베야 비스타 공원묘지이다.
2022년 11월 14일, 마라도나의 사망 2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친선경기가 펼쳐진다. 위치는 로마의 스타디오 올림피코이다.
이후 그의 사후 개최된 첫 월드컵에서 후배들이 36년 만에 월드컵 우승을 해내며 영전에 우승컵을 바쳤다. 후계자 리오넬 메시는 우승 세리머니에서 36년 전 마라도나의 우승 세리머니를 다시 재현했다.
또한 마라도나가 전성기를 보냈던 클럽인 SSC 나폴리도 리그에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33년 만에 세리에 A 우승을 달성하였다. 마라도나가 조금만 더 생존해 있었으면 조국 아르헨티나의 36년 만의 월드컵 우승과 이전 소속팀 나폴리의 33년 만의 세리에 A 우승을 모두 볼 수 있었기에 많은 축구팬들이 아쉬워하고 있다.[21] 게다가 향년이 60세인 만큼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났다는 반응이 많기도 하다.[22]
그리고 2022년 12월 30일, 브라질 현지 시간 29일에 펠레 역시 투병 중에 세상을 떠나면서 축구는 두 거인을 잃었다. 이로써 메시와 호날두의 라이벌리 이전, 전 세계인의 논쟁거리였던 펠레와의 라이벌리도 막을 내리며 축구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게 되었다.
3. 플레이 스타일
자세한 내용은 디에고 마라도나/플레이 스타일 문서 참고하십시오.4. 평가
마라도나는 그가 18세에 불과했던 1978년부터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바탕으로 당시 역대 최고의 선수들로 꼽히던 펠레, 요한 크루이프,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 비교되기 시작했으며, 당시 마라도나를 관찰한 바르사 스카우트는 마치 축구의 신을 본 느낌이라며 극찬 일색으로 보고서를 작성했다. 1년 후 마라도나는 19세의 나이로 1979년 발롱도르 수상자였던[23] 케빈 키건을 누르고 구에린 스포르티보 올해의 선수에 선정되며 세계 최고의 선수로 등극했고, 이후 1986 월드컵에서 월드컵 역사상 최고의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아르헨티나의 우승을 이끌었다.18세의 나이로 펠레, 크루이프, 디 스테파노와 비교된 마라도나 | |
19세의 나이로 구에린 스포르티보 올해의 선수에 선정된 마라도나 |
또한 마라도나가 활약하기 시작한 1980년대 초반은 카를로스 발데라마, 훌리오 세사르 로메로, 소크라치스, 지쿠, 리엄 브래디, 알랭 지레스, 미셸 플라티니, 얀 쾰레만스, 한지 뮐러, 베른트 슈스터, 엔조 프란체스콜리, 엔조 시포, 미카엘 라우드루프, 게오르게 하지 등 내로라하는 공격형 미드필더들이 시대를 풍미한 클래식 No.10의 전성기였는데, 마라도나는 그 수많은 10번 유형의 선수들 중 압도적인 1인자였으며, 마라도나는 여기서 그치치 않고 당대의 수비 시스템을 붕괴시킴으로서 당시 그를 막아야 했던 밀란의 감독 아리고 사키가 사키이즘을 고안하게 해 축구 전술사에까지 영향을 끼쳤다.[24] 때문에 198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공격형 미드필더들의 입지는 빠르게 사라지기 시작했는데, 마라도나만큼은 사키이즘에 딱히 고전하지 않아 1990년까지 정점의 위치를 지켰다. 이러한 선수 경력을 바탕으로 마라도나는 리오넬 메시, 펠레와 더불어 역대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25][26]
마라도나의 소속팀이었던 나폴리의 전력을 감안하면, 나폴리에서의 마라도나는 '선수 한 명이 팀을 얼마나 끌어올릴 수 있는가?'의 한계치를 보여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나폴리는 전 시즌 승점 1점 차이로 강등을 면한 팀이었는데, 마라도나는 이러한 팀을 본인 1명의 능력으로 세리에 A, UEFA컵에서 우승시켰다. 이러한 하드캐리 덕분에 당시 마라도나는 '축구는 혼자 하는 게 아니라는 상식에서 벗어났다'는, 팀 스포츠에서는 원론적으로 말이 안되는 수준의 찬사를 받았다.
이렇듯 마라도나는 한 명의 플레이어로서도 역대 최고 반열에 놓이는 선수였지만, 동료들을 잘 이용하면서도 이들을 잘 이끌어내는 강인한 리더십을 지닌 선수이기도 했다. 마라도나는 18살 때부터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주장을 역임했고, 대표팀에서는 메시 이전까지 월드컵 역사상 주장 완장을 가장 오래 착용한 선수였으며, 나폴리에서는 강등을 면할 생각만 하던 동료들을 바꿔내며 우승을 이뤄냈다.
마라도나보다 높은 성적을 거두었던 선수는 많고 마라도나보다 많은 우승을 차지했던 선수도 여럿 있다. 커리어에 트로피만 남는다고 가정하면 마라도나는 초라해 보일 수 있다.[27] 그럼에도 그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역대 최고 중 하나로 꼽히는 이유는, 그가 보여준 퍼포먼스 그 자체가 당대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줬기 때문이며, 또한 상술했듯 이러한 퍼포먼스를 통해 본인이 속한 팀을 단신으로 우승까지 이끌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축구라는 스포츠를 통해 개인 자신과 한 도시, 나아가 한 국가의 위상을 바꿔놓으며 축구 본연의 위대함을 실현했다. 당시 마라도나의 조국인 아르헨티나는 포클랜드 전쟁의 패배와 경제위기로 슬픔의 수렁에 빠져있었고 그가 속한 클럽팀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현재까지도 해소되지 않는 이탈리아 남부와 북부의 빈부격차는 당시에는 더욱 극심해서, 리그 우승은 늘 부유한 북부 클럽들의 차지였다. 이에 남부에 위치한 클럽은 늘 멸시와 천대를 받았으며 나폴리는 아예 '시궁쥐'라는 멸칭까지 붙어 무시 받던 팀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라도나는 국가대표팀에서는 월드컵을, 그것도 자국을 전쟁에서 패배시킨 잉글랜드를 만나 압도적인 개인 능력으로 무너뜨리고[28] 조국에 월드컵 트로피를 선사했으며, 클럽팀에서도 개인의 존재만으로 그 숱한 북부의 명문 클럽들을 꺾고 끝내 스쿠데토[29]를 쟁취해냈다.
따라서 마라도나는 그저 단순한 축구 레전드나 슈퍼스타가 아니었다. 그는 축구와 스포츠라는 영역을 초월해 아르헨티나라는 한 국가와 나폴리라는 한 도시의 상징이 된 존재이자 투쟁의 화신, 그리고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4.1. 펠레와의 비교
자세한 내용은 펠레 vs 디에고 마라도나 문서 참고하십시오.4.2. 메시와의 비교
자국 후배인 리오넬 메시와도 자주 비교된다. 마침 자국의 후배이기도 하고, 마라도나도 이 사실을 좋아하였다.아리엘 오르테가, 후안 로만 리켈메, 하비에르 사비올라, 파블로 아이마르, 카를로스 테베스, 세르히오 아구에로 등등 아르헨티나의 수많은 축구신동들은 '포스트 마라도나'라는 기대를 받았으나, 대부분은 마라도나와 축구 포지션 및 스타일도 달랐으며[30],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끝나버렸다.
이후 리오넬 메시가 등장해 '마라도나의 재림'이라는 칭호를 받는 등 당시까지의 아르헨티나 선수 중에서 포스트 마라도나가 될 수 있는 유일한 선수로 기대받았으며 현재는 마라도나의 후계자 이상의 위상을 얻었다. 마라도나 역시 "그 동안 새로운 마라도나가 나왔다는 이야기가 수십 번 반복되었다. 그러나 메시만이 내 수준에 도달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믿을 수 없는 재능을 가지고 있는 선수다"라며 메시를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었고 "나의 마라도나는 메시"라고 할 정도로 실제로도 메시를 무척 아꼈다. 감독을 역임했던 2010 월드컵 당시에도 팀의 에이스인 메시를 무척 싸고 돌았고 이후에도 계속 조언과 격려를 해줬다. 아르헨티나 현지에서 메시를 여러 이유로 혹독하게 까는 경향에 대해서도 일침을 놓곤 했고, 월드컵 우승이 없었던 메시에게 우승으로 증명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31]
메시는 이러한 비교에 대해 "펠레, 마라도나와 비교되는 것은 영광이나 그들을 뛰어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 않다. 그저 팀과 나의 발전을 위해 축구를 하고 있다"라고 말했으며 아르헨티나인답게 가장 존경하는 선수 역시 마라도나라며 존경심을 보였다. 그리고 마라도나는 "누군가 나를 능가하게 된다면, 그것은 아르헨티나인이기를 바란다. 그 인물이 메시라면 기꺼이 환영할 것"이라 말한 적이 있으며, "나의 커리어는 이미 끝났지만 메시는 현재진행형이다. 메시는 결국 펠레와 나의 반열에 오르게 될 것이고, 우리는 훗날 역대 최고의 자리를 놓고 비교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 적도 있다.
두 선수의 시대상을 비교하자면, 마라도나가 활약한 1980년대 축구는 반칙이 엄청나게 거칠었고, 당시에는 현대 첨단 의학과 관리기법도 없었다. 그렇기에 이 시대 미래 축구에 대한 예측은 기술보다는 피지컬에 집중했으며, 아프리카 출신 선수가 대두될 것이고 아프리카 대륙이 축구적으로 강해질 것이라는 의견이 대세였다. 즉, 몸으로 충돌하고 부딪히고 비비는 행위는 1980년대가 2010년대보다 훨씬 강도가 높았다.
한편 1980년대는 그 어느 시기보다 No.10의 역할이 두드러지던 시대였으며, 드리블, 연계, 탈압박, 플레이메이킹, 완급 조절, 골까지 모든 부분을 단 1명의 10번 선수가 책임지는 시대였다. 이후 전술의 발전으로 이러한 공격형 미드필더 시대는 종말을 맞았고, 1인이 모든 부분을 책임지는 전술은 성적을 내기 매우 어려워졌으며, 2010년대에 이르면 분업화된 시스템축구가 대세가 되었다. 즉 조직적인 압박의 강도는 1980년대보다 2010년대가 훨씬 강도가 높은데, 이러한 상황에서 전통적인 No.10 역할을 완벽히 수행해낸 선수는 메시가 유일하다 할 수 있다.
또한 영양상태 개선, 선수풀 확대는 선수들의 신체능력 향상으로 이어져 현대 선수들은 근력, 스피드, 지구력 등에서 이전 시대보다 강해졌고, 이는 특정 선수가 다른 선수들을 압도하는 플레이를 보여주기 어렵게 한다. 80년대까지는 스타선수 1, 2명의 기술에 경기운영을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2010년대에 그런 팀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상위 리그로 갈수록 더 그렇다. 전반적으로 수준이 낮았던 시대에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이는 것과 수준이 상향된 시대에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이는 것은 난이도 측면에서 동일하지 않다.
플레이 스타일로 비교하자면 마라도나가 메시에 비해 우위를 가져가는 분야는 피지컬, 지구력, 다채롭고 역동적인 무브먼트다. 마라도나의 플레이를 보면 마라도나는 공을 잡는 순간 드리블보다 패스를 먼저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볼을 잡자마자 아웃사이드, 힐, 발바닥, 어깨, 가슴 등 신체 부위를 가리지 않고 그야말로 온 몸을 이용해 원 터치로 동료에게 넘긴 후 다른 곳으로 비집고 들어가는 형식의, 일종의 '곡예', 혹은 프리스타일 트래핑 같은 느낌의 플레이메이킹을 했다.
반면 메시는 볼 컨트롤, 슈팅 능력, 양발 능력에서 우위를 점한다. 마라도나는 메시만큼 말도 안 되는 타이밍에 슛을 하지는 못하며, 왼발 편향으로 킥의 반경이 비교적 좁은 마라도나는 라스트 킥의 각도 활용 등에서 메시보다 부족하다. 또한 메시는 마라도나와 달리 본인의 압도적인 드리블 및 퍼스트 터치 능력을 바탕으로 탈압박을 이끌어낸 후 공간을 만든다. 물론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마라도나가 드리블을 통한 탈압박에 약하다거나 메시의 피지컬이 약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기본적으로 축구 실력에 있어서는 마라도나, 메시 모두 정점을 찍은 선수들로, 이 둘보다 더 볼을 잘 다룰 수 있었던 선수는 축구사 전체를 통틀어봐도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즉, 마라도나의 플레이는 상술한 1980년대 축구의 볼만 잡으면 개태클이 들어오는 폭력성과 절대적인 수준이었던 1인 플레이메이커에 대한 의존도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플레이 성향이라고 표현해야 할 것이다.
드리블 비교에서 서술했듯 마라도나의 신체 구조는 메시가 아니라 테베스와 유사하다. 덕분에 피지컬에 의존한 플레이도 가능했고 거기에 왕성한 활동량까지 보유했으니, 메시가 마라도나급의 하드웨어를 보유했다면 지금보다도 더 많은 트로피를 쓸어담았을 것이다. 특히 메시는 나이가 30대로 들어선 2010년대 후반부터 노쇠화로 인해 활동량이 경기당 7~8㎞ 정도까지 줄었고, 노쇠화 이전에도 일정이 빡빡해지는 메이저 대회 토너먼트에서는 대회 후반으로 갈수록 힘이 빠져 2014 월드컵 당시에는 4강 네덜란드전부터 지구력 부족 문제로 인해 그 이전의 경기들과는 달리 활약이 신통치 않았다.[32]
양자의 성격 역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메시가 주장으로서의 품격을 보여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나, 이는 팀을 묵묵히 짊어지는 모범적인 리더로서의 모습이었지 흔히 생각되는 캡틴으로서의 카리스마는 아니었다. 마라도나와 펠레가 마이크가 켜진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던 때 언급된 '착하지만 우리같지는 않다'의 뜻이 이것으로[33], 메시는 화가 나서 욱하는 일이 있어도 틀에서 벗어나는 돌출 행위가 거의 없다.
반면 마라도나는 기질적으로 매우 전투적이었으며, 자유분방함을 넘어 통제 불능에 가까운 방종함을 보였다. 포인트는 이러한 성향 차이가 경기 내적으로도 잘 나타났다는 것이다. 마라도나는 승부욕이 초월적으로 강한 편이었으며 이는 신의 손, 시뮬레이션 등 규칙에 대한 악용으로도 나타났다. 또 마라도나가 악질 파울을 수없이 당한 것도 사실이나, 마라도나 역시 상대에게 파울을 가하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 마라도나가 이렇게 전투적이었던 것은 거친 파울로부터 전혀 보호받지 못한 시대 때문이기도 하나,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개인적 성향이 작용했다는 점은 간과하기 어렵다. 요컨대 마라도나의 강한 성품과 메시의 내성적인 성품은 각각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으로 모두 작용한 양날의 검이었다고 할 수 있다.
종합적인 평가는 2010년대 중반부터 마라도나보다 월등한 누적과 득점력을 보유한 메시 쪽으로 기울어졌고, 메시의 2022 월드컵 우승 이후로는 거의 모든 랭킹이 메시를 마라도나보다 높게 랭크한다. 그러나 여전히 마라도나가 나폴리에서 선보인 하드캐리 및 1986년 월드컵에서 선보인 축구 역사상 최고의 단일대회 퍼포먼스, 그로 인해 얻은 상징성은 무시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니며, 때문에 아르헨티나 현지인들에게 메시와 마라도나 중 누가 더 뛰어난 선수냐고 물으면 바보같은 질문으로 여기며 비교하려 들지 않는다. 아르헨티나에 또다른 축구의 신이 강림했다며 둘 다 위대한 선수라고 추켜세우는 것이 보통이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 CA 보카 주니어스 (1981~1982, 1995~1998)
-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1981 M[34]
- FC 바르셀로나 (1982~1984)
- 코파 델 레이: 1982-83
- 코파 데 라리가[35]: 1982-83
-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1983
- SSC 나폴리 (1984~1991)
- 세리에 A: 1986-87, 1989-90
- 코파 이탈리아: 1986-87
-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1990
- UEFA컵: 1988-89
-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 FIFA 월드컵: 1986
- 아르테미오 프란키컵: 1993
- 아르헨티나 U-20 축구 국가대표팀
- FIFA 월드 유스 챔피언십: 1979
5.2. 개인 수상
- 발롱도르 명예상: 1996
- 발롱도르 드림팀: 2020[36]
- FIFA 세기의 선수: 2000[37]
- FIFA 세기의 골: 2002[38]
- FIFA 100: 2004
- FIFA 월드컵 골든볼: 1986
- FIFA 월드컵 브론즈볼: 1990
- FIFA 월드컵 실버슈: 1986
- FIFA 월드컵 도움왕: 1986
- FIFA 월드컵 올타임 XI: 1994
- FIFA 월드컵 올타임 드림팀: 2002
- FIFA 월드 유스 챔피언십 골든볼: 1979
- FIFA 월드 유스 챔피언십 실버슈: 1979
-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득점왕: 1978 M[39], 1979 M, 1979 N[40], 1980 M, 1980 N
- 세리에 A 득점왕: 1987-88
- 코파 이탈리아 득점왕: 1987-88
- 남아메리카 올해의 축구 선수: 1979, 1980
- 남아메리카 올해의 팀: 1993, 1995
- 아르헨티나 올해의 축구 선수: 1979, 1980, 1981, 1986
- 유니세프 유럽 올해의 축구 선수: 1989-90
-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 1986
- 월드 사커 올해의 팀: 1984, 1987
- 월드 사커 올타임 XI: 2013
- 옹즈도르: 1986, 1987
- 옹즈 드 옹즈: 1985, 1986, 1987, 1988, 1989
- 구에린도로: 1984-85
- 구에린 스포르티보 올해의 선수: 1979, 1986
- 구에린 스포르티보 베스트 XI: 1980, 1981, 1982, 1983, 1986
- 가제타 델로 스포르트 올해의 선수: 1986
- 가제타 델로 스포르트 올해의 축구 선수: 1987, 1988
- AFP 올해의 선수: 1986
- AP통신 올해의 선수: 1986
- 코리에레 델로 스포르트 올해의 선수: 1986
- 레키프 챔피언 중의 챔피언: 1986
- 아르헨티나 세기의 스포츠인: 1999
- 올림피아 데 오로: 1979, 1986
- 20세기 월드팀: 1998
- 20세기 남아메리카팀: 1998
- 골든풋: 2003
- 마르카 레전드: 1999
- IFFHS 레전드: 2016
- IFFHS 올타임 월드 드림팀: 2021
- IFFHS 올타임 남아메리카 드림팀: 2021
- IFFHS 올타임 아르헨티나 드림팀: 2021
-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 2014
- AFA 아르헨티나 올타임 XI: 2015
- 아스 올타임 XI: 2021[41]
5.3. 클럽 기록
시즌 | 클럽 | 리그 | 국내 컵 | 대륙 대회 | 기타 대회 | 총계 |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
1976 |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 11 | 2 | - | - | - | - | - | - | 11 | 2 |
1977 |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 49 | 19 | - | - | - | - | - | - | 49 | 19 |
1978 |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 35 | 26 | - | - | - | - | - | - | 35 | 26 |
1979 |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 26 | 26 | - | - | - | - | - | - | 26 | 26 |
1980 |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 45 | 43 | - | - | - | - | - | - | 45 | 43 |
5시즌 | 합계 | 166 | 116 | - | - | - | - | - | - | 166 | 116 |
시즌 | 클럽 | 리그 | 국내 컵 | 대륙 대회 | 기타 대회 | 총계 |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
1981 | 보카 주니어스 | 40 | 28 | - | - | - | - | - | - | 40 | 28 |
1시즌 | 합계 | 40 | 28 | - | - | - | - | - | - | 40 | 28 |
시즌 | 클럽 | 리그 | 국내 컵 | 대륙 대회 | 기타 대회 | 총계 |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
1982-83 | 바르셀로나 | 20 | 11 | 5 | 3 | 4 | 5 | 6 | 4 | 35 | 23 |
1983-84 | 바르셀로나 | 16 | 11 | 4 | 1 | 3 | 3 | - | - | 23 | 15 |
2시즌 | 합계 | 36 | 22 | 9 | 4 | 7 | 8 | 6 | 4 | 58 | 38 |
시즌 | 클럽 | 리그 | 국내 컵 | 대륙 대회 | 기타 대회 | 총계 |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
1984-85 | 나폴리 | 30 | 14 | 6 | 3 | - | - | - | - | 36 | 17 |
1985-86 | 나폴리 | 29 | 11 | 2 | 2 | - | - | - | - | 31 | 13 |
1986-87 | 나폴리 | 29 | 10 | 10 | 7 | 2 | - | - | - | 41 | 17 |
1987-88 | 나폴리 | 28 | 15 | 9 | 6 | 2 | - | - | - | 39 | 21 |
1988-89 | 나폴리 | 26 | 9 | 12 | 7 | 12 | 3 | - | - | 50 | 19 |
1989-90 | 나폴리 | 28 | 16 | 3 | 2 | 5 | - | - | - | 36 | 18 |
1990-91 | 나폴리 | 18 | 6 | 3 | 2 | 4 | 2 | 1 | - | 26 | 10 |
7시즌 | 합계 | 188 | 81 | 45 | 29 | 25 | 5 | 1 | - | 259 | 115 |
시즌 | 클럽 | 리그 | 국내 컵 | 대륙 대회 | 기타 대회 | 총계 |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
1992-93 | 세비야 | 26 | 5 | 3 | 1 | - | - | - | - | 29 | 6 |
1시즌 | 합계 | 26 | 5 | 3 | 1 | - | - | - | - | 29 | 6 |
시즌 | 클럽 | 리그 | 국내 컵 | 대륙 대회 | 기타 대회 | 총계 |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
1993-94 | 뉴웰스 올드 보이스 | 5 | - | - | - | - | - | - | - | 5 | - |
1시즌 | 합계 | 5 | - | - | - | - | - | - | - | 5 | - |
시즌 | 클럽 | 리그 | 국내 컵 | 대륙 대회 | 기타 대회 | 총계 |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
1995-96 | 보카 주니어스 | 24 | 5 | - | - | - | - | - | - | 24 | 5 |
1996-97 | 보카 주니어스 | 1 | - | - | - | - | - | 1 | - | 2 | - |
1997-98 | 보카 주니어스 | 5 | 2 | - | - | - | - | - | - | 5 | 2 |
3시즌 | 합계 | 30 | 7 | - | - | - | - | 1 | - | 31 | 7 |
20시즌 | 총 합계 | 491 | 259 | 57 | 34 | 32 | 13 | 8 | 4 | 588 | 310 |
5.4. 국가대표 기록
소속 | 연도 | 경기 | 득점 |
아르헨티나 | |||
1977 | 3 | 0 | |
1978 | 1 | 0 | |
1979 | 8 | 3 | |
1980 | 10 | 7 | |
1981 | 2 | 1 | |
1982 | 10 | 2 | |
1983 | - | - | |
1984 | - | - | |
1985 | 10 | 6 | |
1986 | 10 | 7 | |
1987 | 6 | 4 | |
1988 | 3 | 1 | |
1989 | 7 | 0 | |
1990 | 10 | 1 | |
1991 | - | - | |
1992 | - | - | |
1993 | 4 | 0 | |
1994 | 7 | 2 | |
통산 | 91 | 34 |
6. 라이벌
크루이프에게는 베켄바워, 호나우두에게는 지단, 메시에게는 호날두가 있었으나 마라도나에겐 그와 기량을 겨룰만한 선수가 부족했다. 동시대의 인물로 비교조차 어렵기에 호사가들이나 대다수 축구팬들이 꼽는 마라도나의 라이벌은 펠레다. 현역시절 마라도나의 라이벌로 꼽힌 선수는 잉글랜드의 케빈 키건, 서독의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프랑스의 미셸 플라티니, 브라질의 지쿠[42]와 파우캉, 네덜란드의 루드 굴리트와 마르코 반 바스텐[43]이 이끄는 밀란 제너레이션, 그리고 월드컵과 세리에 A[44]에서 경쟁했던 로타어 마테우스가 있다.[45] 이 중 본인이 최대 라이벌로 꼽았던 선수는 로타어 마테우스였다.사실 엄밀히 보면 루메니게, 플라티니, 지쿠는 마라도나보다 약간 전세대로서[46] 전성기가 겹치지 않아서 완전히 라이벌이라고 보긴 좀 어려운 면이 있다. 루메니게, 플라티니, 지쿠가 이미 세계 최고로 꼽히던 1980년대 초반에 마라도나는 아직 20대 초반이었다.[47] 반 바스텐, 굴리트, 마테우스는 동시대이지만 전형적인 센터포워드인 반 바스텐은 포지션이 달라서 직접적인 라이벌로는 비교되는 빈도가 낮았다.[48]
이래저래 동시대에서는 굴리트와 마테우스가 라이벌로 많이 논해졌으나, 굴리트는 라이벌 포지션은 전성기 2년 정도에 그쳤고, 마테우스는 마라도나보다 몇년 늦은 1980년대 후반에 전성기가 찾아왔지만 엇비슷한 나이인 마라도나와 전성기가 어느 정도 겹치고 2번의 월드컵 결승과 세리에의 우승길목에서 계속 마주쳤기에 라이벌 포지션으로 가장 적합하다는 강한 인상을 줬다. 물론 마라도나의 전성기인 1979년부터 1988년까지는 마테우스는 마라도나의 퍼포먼스에는 감히 비교되지는 못했지만. 그 뒤로 마테우스는 마라도나와 붙으면서 종종 맞대결에서 승리하고 1990 이탈리아 월드컵 결승전에서는 판정승하기도 하면서 29살에 세계 최고 선수에 등극한다. 반면 마라도나는 그때부터 마약 스캔들로 급속한 몰락이 시작된다.
7. 논란 및 사건 사고
자세한 내용은 디에고 마라도나/논란 및 사건 사고 문서 참고하십시오.8. 개인사 및 사생활
8.1. 가족
마라도나의 혈통은 이주민의 나라 아르헨티나답게 복잡하다. 그는 아르헨티나인이지만 조상은 크로아티아계 갈리시아인으로 알려져 있다.마라도나 집안 가계도 |
1989년 결혼식을 올리는 마라도나와 비야파녜 |
자신의 딸 달마와 함께 칸 영화제에서 |
나폴리에서 뛰던 1986년, 누이 마리아의 친구이던 이탈리아 가수 크리스티아나 시나그라와 깊은 관계를 맺고 아들 디에고 시나그라를 얻었다. 혼외자였고 이에 마라도나는 30년간이나 친자로 인정하지 않았으나 2016년 8월자로 친자임을 인정했다. 훗날 마라도나는 당시 첫번째 애인 클라우디아를 사랑했지만 자기는 한 여자만 바라보는 성자가 아니었고 그때 주변에 미녀들이 너무 많았다며 자신의 바람끼를 고백했다.
그리고 2013년 2월 13일 36살의 애인 베로니카 오헤다가 득남하여 늦둥이 아들이 하나 더 늘었다. 한마디로 아구에로의 아들이자 마라도나 외손주인 벵하민은 자기보다 4살이나 어린 외삼촌을 갖게 되었다. 이름은 디에고 페르난도 마라도나로 늦둥이 아들이 외손주 벵하민과 메시의 아들 티아고와 함께 대표팀에서 뛰기를 바라고 있다고 전했다. 메시의 아들인 티아고가 축구를 가장 잘 할 것 같고 벵하민이 스트라이커, 그 뒤를 티아고와 페르난도가 받쳐주면 좋을거라고 예상하기도 했다. 거기다가 1996년생 사생아 딸이 하나 더 있는데 이름은 자나 마라도나 사발레인. 그녀의 생모는 자나를 마라도나의 친딸로 인정받게 하기 위해 오래 법정 싸움을 했다고 한다.
더 선에 따르면 직계자녀 5명 외에도 쿠바에 있는 혼외자녀 3명(요아나, 루, 하비엘리토)과 최근까지 소송 중인 2명(라라, 길) 외에도 2명의 혼외자식이 더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마라도나의 자식'을 자청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자 마라도나의 딸 지안니나는 "아버지가 축구팀 하나를 만들 만큼 충분한 자손을 낳았다"며 "앞으로 3명만 더 있으면 11명이 된다"는 농담을 한 적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2021년 12월 28일, 마라도나의 남동생이자 전직 축구 선수였던 우고 마라도나가 형과 같은 사인인 심장마비로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5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마르카 보도
8.2. 대인 관계
마라도나는 정치적으로도 상당부분 엮인 인물이다. 1990년대 초중반에는 카를로스 메넴[49]과 상당한 연줄이 있었기 때문에 메넴의 지지자였다. 그러다가 2002년 이후로는 성향이 변했는데, 아르헨티나 정계가 경제위기로 인해 격변기를 맞았고 급진시민연합이 군소정당으로 전락하고 페론당이 여러개의 정당으로 분당되었는데 마라도나는 이중에서 네스토르 키르치네르가 창당한 승리를 위한 전선[50]을 지지하였고 그 이후로 부부 대통령인 네스토르 키르치네르와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를 지지하였다. 다만 2007년 수출세 인상문제로 시끄러울때 마라도나가 수출세 인상에 대해 네스토르와 크리스티나를 비판한 걸 보면 무조건적인 지지자라기 보다는 깔때는 까는 타입에 가깝기는 하다.피델 카스트로에게 선물받은 군모 |
우고 차베스와의 인연은 마두로 대에도 이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간 마두로 대통령이 유가폭락으로 인한 경제위기속에서 삽질을 많이 벌였고 마라도나도 이를 모르고 있을 정도로 머저리는 아니기 때문에 대놓고식으로 지지하는 스탠스를 보이지는 않았는데[51] 마두로가 정치적인 승부수로 내놓은 제헌의회 선거가 야권의 보이콧과 함께 여러 남미국가들과 유럽, 미국 등으로부터 사실상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고, 제헌의회 구성후에 군사기지가 습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내전 얘기까지 나오자 마두로를 강력하게 지지한다는 성명을 내기도 했다.[52] 이를 두고 마라도나가 CIA가 남미 정권교체를 유도하고 있다는 음모론에 과도하게 빠져서 맛이 간 것이 아닌가하는 뒷말이 나오고 있는 중이다.[53]
그러던 와중에 버락 오바마가 미국의 대통령이 되자 대놓고 쌍수를 들며 환영하면서 "나는 부시집안이 망쳐놓은 미국에 대해 오바마가 원상복구 시켜줄 것을 강력하게 확신한다."라고 말하며 오바마를 지지했다. 그렇지만 이후로 가족과 함께 디즈니랜드로 갈려다가 반미 시위 참여 및 우고 차베스와 피델 카스트로와의 관계로 인해 미국 이민관리국으로부터 출입금지를 먹은 경력이 있어서인지 지금은 어떻게 볼지 다소 미지수. 그리고 우파성향의 마크리와도 상당한 인연이 있는데 이건 마크리가 CA 보카 주니어스의 소유주인데다가 마라도나가 CA 보카 주니어스에서 좋은 성적을 내다보니 사이가 나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마크리가 대통령이 되고나서 정리해고와 공공요금 인상 등의 정책을 펴자 이에 적극적으로 반발하며 까기도 했다.
리오넬 메시와는 본래 덕담을 주고 받으며 서로 리스펙하는 관계였으나 요즘에는 그다지 좋은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라이벌인 펠레마냥 날이 갈수록 위상이 높아지는 메시를 견제하는 모양새다. 메시의 말로는 2010년 월드컵 이후로 서로간의 연락이나 대화가 완전히 끊겼다는 모양이고, 2017년 메시의 결혼식에도 마라도나는 초대받지 못했다. 이때 마라도나는 "메시가 깜빡하고 나한테만 청첩장을 안 보냈나 봐"라고 서운함을 드러냈다. 하지만 해외 네티즌들은 그동안 아르헨티나 대표팀이 우승에 실패할 때마다 마라도나가 남겼던 메시에 대한 엄격한 비판과 극딜 인터뷰를 생각하면 초대를 못 받은게 오히려 당연하다는 반응. 그 후 나댄다는 이유로 메시의 동료 선배 하비에르 사네티를 저격한 이후 얼마 안 돼 메시를 '경기 전에 화장실을 20번이나 가는 애'라고 또다시 저격해 메시의 사촌이 분노하기도 했다. 다만 메시가 자국 축구협회와 맞설 때 가장 적극적으로 메시를 변호해주는 등 편을 들어주어야 할 때는 확실히 들어주었다. 또한 메시가 출전한 2016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마라도나는 괜히 우승하지 못하면 돌아올 생각하지말라며 부담감을 잔뜩 주다가 결국 메시가 또 승부차기로 우승을 놓쳐 준우승을 한뒤 멘탈이 무너져 국대 은퇴를 선언하자 마라도나는 황급히 놀라 본인이 한 말을 다 주워담은 뒤 메시를 설득해보겠다며 그의 은퇴를 강력히 만류했다.[54]
메시 이전 아르헨티나의 에이스 후안 로만 리켈메와는 대놓고 사이가 좋지 않았다. 처음에는 리켈메를 찬밥 취급했던 바르셀로나를 세계 최악의 클럽이라 부르며 리켈메를 두둔할 정도로 사이가 좋았었는데 마라도나가 국가대표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 트러블이 생겨 리켈메가 2008년에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했었다. 이후 빡친 마라도나가 너따위 없이도 잘할 수 있다며 메시에게 등번호 10번을 주고 남아공 월드컵에 나섰으나 8강에서 독일에게 0:4 대패를 당하고 쓸쓸하게 탈락했다. 결국 마라도나가 심정지로 사망하면서 끝내 화해하지 못했으나 리켈메는 악감정은 잊고 고인이 된 전설에게 가슴 뭉클한 추모 편지를 남기는 것으로 늦게나마 화해의 제스처를 취했다.
9. 기타
- 아르헨티나와 이탈리아[55]에는 마라도나를 신으로 섬기는 종교도 있다고 한다.[56] 마라도나교(Iglesia Maradoniana)라고 하는데, 간단히 이야기 하면 하느님을 영(靈)의 아버지로, 마라도나를 육(肉)의 아버지로 섬기는 종교이다.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의 영화 '축구의 신: 마라도나(Maradona By Kusturica)'에서 그 전모를 감상할 수 있다. 진짜로. 이들은 자신들의 종교는 가톨릭이지만 마라도나를 성인으로 숭배한다고 한다.[57] 종교보단 가톨릭에서 파생된 이단 비슷한 개념으로 마라도나를 성인으로 숭배한다(!) 종교의 우두머리격인 인물들부터 전통적으로 믿는 신(神)은 하느님이지만, 마음의 신(神)은 마라도나라는 신앙고백을 할 정도이다. 참고로 이 종교는 마라도나의 생일을 성탄절로 기념하고 오순절(성령강림대축일)이라 여기는 날은 위에 나온 멕시코 월드컵 당시의 '신의 손' 사건이 있었던 날이다. 십계명도 있으며 현재 전세계에 약 20만명의 신도가 있다고 한다. 앞면에 DT(diego ten), 뒷면에 등번호 10이 새겨진 예복도 있다고 한다. 2022년 리오넬 메시가 아르헨티나를 월드컵 우승으로 이끌면서 메시가 성자, 즉 메시아의 위치에 올라섰다. 아르헨티나 축구협회에서도 이에 대한 헌정 영상을 올려버렸다.(!) AFA 인스타그램 영상[58] 정작 메시는 자신을 신과 비교하지 말아달라고 하였으나...
- 1979년 청소년 월드컵에서의 마라도나를 본 대한축구협회 송기룡 과장은 당시 마라도나의 모든 플레이에 눈을 뗄수 없었다고 한다.
- 2002 한일 월드컵 유치 과정에서 주앙 아벨란제와 펠레가 브라질의 우방국인 일본의 단독 개최를 지지하자 그에 반대로 대한민국을 지지했다. 마라도나는 2002년 월드컵 유치 활동의 일환으로 축구협회에서 추진한, 보카 주니어스와 한국 대표팀간의 경기(1995년, 잠실주경기장 개최)에 출전했다. 이 경기는 마라도나가 약물 복용으로 출전 정지 처분을 받은 것이 해제된 후 첫 공식 경기였기 때문에 '마라도나 공식 재기전'으로 셀링(selling) 포인트를 잡아서 홍보했었다.
- 2017년 3월, 2017 FIFA U-20 월드컵 조추첨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치로 페라라의 은퇴 경기에 방문한 마라도나 |
- 명성이 워낙 대단하다보니 '레몬이나 오렌지로 트래핑 연습'을 한다든가 '일부러 공을 차서 골대만 맞추면서 논다'는 등의 이야기가 널리 퍼져있는데 실제로 그렇게 연습을 했다. 농담이 아니라, 선수 시절의 마라도나는 식사시간을 빼면 늘상 미친 듯이 공만 차면서 노력하는 연습벌레로도 유명했다. 심지어는 지네딘 지단도 마라도나의 축구실력에 경의를 표했는데, 일설에는 지네딘 지단이 "나는 축구공으로 할 수 있는 볼 트래핑을 그는 레몬으로도 할 수 있다" 라고 극찬을 했다는 말이 있다. 이 설이 마라도나가 레몬을 가지고 자주 보여주기용 과시 차원의 경이로운 볼 트래핑을 했었던 실제 사실에 좀 더 가깝고 신빙성이 있다. 그래서, 마라도나는 골프공으로 리프팅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의 주포지션은 공격수가 아니라 미드필더다. 공격력이 매우 뛰어나서 스트라이커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그는 공격형 미드필더에 가까운 선수였다. 그의 골기록이 더욱 대단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Ballon d'Or(발롱도르)를 수여받은 마라도나 |
- 1995년까지 지속된 국적 제한 때문에 축구계 최고 권위의 개인상인 발롱도르를 받지 못한 선수들을 위해, 발롱도르 수여 주체인 프랑스 풋볼과 FIFA에서 자체적으로 발롱도르 명예상을 수여했는데 역대 수상자는 디에고 마라도나, 펠레가 전부이다. 디에고 마라도나는 1996년에 프랑스 풋볼로부터 발롱도르 명예상을 지급받았다.[59] 또한 2016년 발롱도르를 선정하는 프랑스 풋볼에서 발롱도르 60주년 기념으로 유럽인 이외 선수들이 발롱도르를 받을 수 없었던 1995년 이전 선수들의 수상에 대해 재평가를 했는데 1986, 1990년의 수상자로 이름을 올렸다.[60] 명성에 비해 다소 저조한데 당대에 플라티니, 굴리트, 반 바스텐, 마테우스 등 쟁쟁한 선수들이 많았고 그들보다 전력이 떨어지는 클럽에서 뛰었기 때문이다.
- 호마리우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세계 제일의 "악동" 선수로 명성이 자자했던지라 호마리우처럼 실력만 좋고 멘탈은 썩었다고 생각하는 젊은 세대들이 많은데, 실은 절대 그렇지 않았다. 기자들에게 새총을 쏘는 등의 기행이 있었긴 했어도[61] 선은 지켰고 나름대로 선행도 많이 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었다. 그리고 축구협회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마라도나는 언제나 선수들의 편이었고 절대 축구협회 회장에게 빌붙지 않았다. 나폴리에서 나폴리의 마피아인 카모라들과 사이가 나빴으며, 그들에게 대놓고 비난했던 유일한 인물이다. 당시 카모라들에게 대든다는 것은 정말 죽을 각오를 했어야 했다. 단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나폴리의 영웅이자 신적인 존재 마라도나였기에 해치지 못했을 뿐.[62]
- 서방 언론, 특히 미국계 언론과의 사이는 별로 좋지 않다. 일단 그 인생사, 물고 뜯을 게 많기 때문에 좋은 먹잇감이기도 하지만 남미인으로서 아르헨티나인으로서 주관이 뚜렷한 인물이다. 즉 미국을 몹시 싫어하고 신나게 깐다.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은 참지 않고 바로바로 내뱉는 성격이다.[63] 체 게바라랑 피델 카스트로를 좋아하는 것이 그 방증이다. 언론 역시 "네 그러세요?"하며 신나게 물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있다.
- 선수 시절에 마약과 관련 있다보니 카모라들이랑 한통속이라는 음모론도 있지만 완전 헛소리다. 당시 카모라의 아이들이랑 찍었다는 사진이 있는데 사실은 카모라들에게 부모를 잃은 아이들과 찍은 것을 카모라들이 그렇게 퍼뜨린 것이다. 그런 아이들을 위하여 재단을 만들어 기부한 것도 유명한 일이다. 괜히 나폴리에서 저렇게 떠받드는 게 아니다라고 기존에 알려져 있었으나, 2019년 국내에도 개봉한 영화 '디에고'가 마라도나의 사생활을 꼼꼼하게 취재해 영화에 반영하면서 카모라와 친분이 있었다는 건 확실한 사실임이 널리 알려졌다. 카모라와 함께한 사진, 영상이 수없이 많다. 이 영화는 마라도나를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면서도 옹호하지는 않는 태도를 잘 유지하고 있는데, 영화에 따르면 마라도나는 처음 카모라의 호의를 대충 받아넘겼고 깊은 친분으로 발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코카인에 빠져든 뒤 마약을 구하기 위해 카모라의 영향권에 들어가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흔한 중독자처럼 카모라의 말에 따르는 신세가 됐다. 오히려 마라도나의 마약 관련 수사에 카모라가 연루되면서 언론 노출을 철저히 막던 그들의 방침에 차질을 빚었을 정도다.
토트넘 유니폼을 입은 마라도나 |
- 1986년 대표팀 동료인 오스발도 아르딜레스의 초정을 받아 토트넘 유니폼을 입고 인테르와의 이벤트성 경기에 출전했다. 당시 마라도나를 볼려고 사람들이 몰려들어 경기가 15분 이상 지연되는 해프닝이 있었다.
- 1984년, 바르셀로나에서 나폴리로 이적한 후, 새 클럽과 FIFA에게 아픈 어린이를 위해 기금을 모으기 위한 친선 경기를 주선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양쪽 모두 그 요청을 거절당하자 마라도나는 그 문제를 자신의 손에 맡기고 모든 것을 스스로 마련하였는데 거대한 경기장에서 경기를 하는 대신, 디에고는 아이의 집으로 왔고 바로 뒷마당에서 축구를 했다. 4,000명의 사람들이 나폴리의 가장 가난한 교외 중 한곳에서 열린 경기를 보기 위해 왔다. 당시 세계 최고의 스타였지만 진흙탕에서 뒹굴며 축구를 하는 것을 보면 순수하게 축구를 사랑했던 사람은 맞는 듯 하다.
- 한 번은 친구의 딸이 병에 걸려서 비싼 수술비를 내기가 난감했는데, 그 막대한 수술비를 내준 적도 있다. 그리고 그 친구의 아들이 바로 디에고 포를란으로, 병에 걸렸던 여성은 포를란의 친누나인 알레한드라 포를란이다. 원래 테니스 선수였던 디에고 포를란은 마라도나의 극진한 애정에 감명받아 자신의 진로를 축구선수로 전향했다.
- 10대 때부터 펠레, 디 스테파노를 소환할 만큼 엄청난 재능을 지녔지만, 재능만 믿고 혼자서 다 하려드는 우를 범하지 않았고 항상 동료들과의 연계를 잘 활용하며 팀을 위한 플레이를 펼쳤다. 1994 미국 월드컵에서도 주장으로 뛰면서 그리스전과 나이지리아전에 맹활약했다. 마라도나의 주장 완장은 결코 실력만으로 얻어진 게 아니다. 참고로 마라도나는 월드컵 역사상 주장 완장을 가장 오래 착용한 선수로도 유명했지만, 지금은 리오넬 메시가 갱신했다.[64]
- 마라도나는 역으로 감독으로서는 동정심 때문에 문제가 있었다는 말도 있다. 빈민촌 출신인 카를로스 테베스를 자르지 못했는데 후임인 알레한드로 사베야는 테베스를 잘라내고 승승장구했다는 것이 그 근거. 그러나 사베야 재임기의 테베스는 맨체스터 시티 FC에서 트러블을 일으켜 경기도 못 뛰고 있었으니 잘라내는게 당연한 얘기이고, 마라도나 재임기의 테베스는 프리미어 리그 득점왕이며 공격전개, 돌파, 연계까지 완벽하게 수행해 당시 미드필더진[65]의 창의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맨시티를 이끌고 있었다.
- 파파라치에게는 아주 쿨하게 대응했다. 아무 소리 안 하고 그냥 공기총으로 위협사격을 했다. 이로서 가장 터프하게 파파라치를 상대한 유명인사가 되었다.[66] 이 때문에 파파라치들은 마라도나가 지병으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얼씬거리지 않았다.
- 자신과 같은 테크니션에게 들어오는 거친 견제와 파울을 매우 싫어했다. 친선전에서 상대 선수가 계속해서 거친 파울로 자신의 플레이를 끊어대자 경기 후 인터뷰에서 '이럴 거면 왜 나를 부른 것이냐'라고 불만을 토하기도 했었고, 허정무에게 걷어차인 것을 두고두고 기억하고 있는 것도 아마도 이 때문이다. 반면 전설의 드리블 5명 돌파 같은 경우는 "그건 상대 선수들의 페어플레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라며 잉글랜드 선수들을 추켜세우기도 했다.
-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이 비판받는 이유의 절반 이상을 마라도나 혼자서 차지하고 있다. 당장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지휘봉을 잡았으나 너무 엉망이었고 결국 지역예선에서 볼리비아에게 1-6으로 잡히고 그나마도 칠레가 에콰도르를 쳐잡아서야 겨우 턱걸이로 본선에 오르고 본선에 올라가서는 8강에서 독일한테 아예 0-4로 처발렸다. 더군다나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는 아르헨티나를 기껏 응원 나와서 한다는 짓거리라는 게... 사람들이 아르헨티나 팀을 싫어하는 이유의 대부분이 바로 이 인간의 처신 때문이다. 당장 2018 러시아 월드컵 문서에도 마라도나에 대한 논란을 서술한 문단이 따로 있을 정도다.
- 전처가 돈을 훔쳤다고 고소했는데, 액수가 137억원에 달한다.
- 은퇴한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전 세계 연간 유니폼 판매량에서 꼬박꼬박 10위권 안에 개근 중이다.
- 2010년 12월, 고작 22개월 된 외손주 벵하민 아구에로가 범상치 않은 포스를 발휘하며 킥을 하는 영상이 올라오면서 20년 후를 책임질 유망주로 떠오르고 있다. 외할아버지는 마라도나에 아버지는 아구에로여서 과연 마라도나와 아구에로를 있는 축구 천재가 탄생할지 설레발이 오가는 중이다. 풀 네임은 벵하민 레오넬 아구에로 마라도나.[67]
- 만 50살이 되던 2010년에 득남했다. 결국 벵하민 아구에로는 자기보다 어린 외삼촌을 두게 된 셈이다. 그리고 리오넬 메시의 아들 티아고 메시까지 해서 나중에 아르헨티나는 마라도나같은 괴물 3명이 동시에 뛰는 어마무시한 팀이 될 거라는 예측이 있으며 일각에서는 이 세 명의 아이들이 축구선수가 되는 2030 FIFA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가 우승할 것이라는 예측을 하고 있다.
- 앞의 일화들을 보면 마라도나는 나름의 의리는 있는 사람이다. 월드컵이 끝나고 아르헨티나 축구협회에서 마라도나는 그냥 연임시키고 코칭스텝만 경질한다고 하자 그 코칭스텝들의 편에 서서 그래도 안되니까 그들과 운명을 함께 했다. 마라도나는 체 게바라를 존경하며 그의 의지를 본받으려고 애쓰는 모습도 보인다. 정치적으로 반미 성향이 강하고 사생활이 좀 허술해서 그렇지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의리가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인정이 많은 사람이다. 당장 앞에 서술되어 있는 디에고 포를란의 누나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다.
- 2010 남아공 월드컵 때 아르헨티나 경기를 보면 알 수 있지만, 경기 시작 전에 선수들 한 명 한 명한테 볼에다 찐하게 뽀뽀를 해준다. 특히 국대의 에이스이자 본인 후계자인 메시에게 경기 후 격한 애정표현을 퍼붓는 사진들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문화권이 다른 우리가 보기엔 뜨악스럽지만 선수들은 굉장히 영광스럽게 여긴다나. 2010 년에도 현역 시절 발재간은 아직 살아있어서 공이 날아오자 발재간으로 가볍게 툭 받아서 경기장에 돌려주는 센스를 보여줘서 관중들의 박수를 받았다. 이외에 훈련 동영상이 공개된 적이 있는데, 스핀이 잘 안 들어가고 반발력이 심해서 유럽 일류선수들도 적응하는 데 애를 먹었던 남아공 월드컵 공인구 자블라니를 너무나 쉽게 가지고 놀면서 골대에 집어넣었다. 역시 명필은 붓을 탓하지 않는 법이다.
덕택에 2ch에서는 이런 유머까지 나돌았다.
연습장에서 훈련중인 아르헨티나 선수들.
마라도나: 자, 다음 경기를 준비해보자. 이렇게 공을 잡고 3명을 제치면 되는거야. 어때 참 쉽지? (묘기를 부리며 3명을 제친다.)
메시: 아, 정말이네. 쉽다-! (다른 선수들도 묘기를 부리며 3명을 제친다.)
마라도나: 그래, 그럼 준비 끝. 남은 시간은 수영장에서 놀자구-!
마라도나: 자, 다음 경기를 준비해보자. 이렇게 공을 잡고 3명을 제치면 되는거야. 어때 참 쉽지? (묘기를 부리며 3명을 제친다.)
메시: 아, 정말이네. 쉽다-! (다른 선수들도 묘기를 부리며 3명을 제친다.)
마라도나: 그래, 그럼 준비 끝. 남은 시간은 수영장에서 놀자구-!
- 2011 코파 아메리카 기간 동안 교통사고를 당했으나 다행히 무사했다.
- 2014년 2월 21일, 데일리 미러를 비롯한 영국 매체들은 마라도나가 54세에 아르헨티나 5부 리그 소속인 데포르티보 리에스트에서 현역 선수로 복귀한다고 전했다. 마라도나 또한 데포르티보 리에스트의 영입 제의에 동의했고, 아르헨티나 축구 협회에 선수 등록 신청서를 제출할 계획이고 신청서가 통과될 경우, 마라도나는 오는 3월 23일 산 로렌조와의 경기에 데뷔한다고 알려졌지만 측근에 의해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고 마라도나는 이 팀에 명예코치로 임명되면서 1주일간 선수들에게 투쟁심을 불어넣는 역할을 맡게 되면서 프리킥 차는 법 등을 선수들에게 알려주었다.
- 2015년에는 제프 블라터가 이런저런 비리로 FIFA 회장에서 물러날 조짐을 보이자 자기가 FIFA 회장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나섰다. 또 실제로 FIFA 부회장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세이부 컵 축구 모델로 나온 마라도나 |
- 실황 월드 사커 퍼펙트 일레븐에서는 선수로서의 황혼기였던 94년 국대 소속으로 나온다(이름은 가명). 만능에 가까운 무시무시한 능력치를 보유했지만 스태미너가 살짝 떨어진다. 시나리오 모드에서는 마라도나가 퇴장당한 상태에서 루마니아를 상대해야 하는데 이는 월드컵 기간 도중 도핑 적발로 퇴출된 것을 고증한 것.
- 프랑스 풋볼 일간지인 So Foot 에서 선정한 월드컵 역사상 최고의 선수 TOP30 에서 펠레를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또한 영국 매체 '기브미스포츠'는 '역대 최고 대표 선수 톱 10'을 선정하면서 이 부분 최고 선수 1위로 꼽았다.
- 마라도나가 나온 사진을 잘 보면 시계를 양손에 차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자국의 시간을 항상 알기 위해서 한쪽에는 아르헨티나의 시간을, 다른 한쪽에는 그가 현재 있는 곳의 시간을 맞춰 놓는 것이다.
펠레와 함께 뒷담화 하다가 걸린 마라도나 |
펠레: 메시 성격은 어때요? 착한가요?
마라도나: 정말 사람 좋죠. 하지만 리더가 될 만한 성격은 아니에요.
펠레: 아, 알겠어요. 예전의 우리 같지는 않군요.
마라도나: 딱 그래요.
마라도나: 정말 사람 좋죠. 하지만 리더가 될 만한 성격은 아니에요.
펠레: 아, 알겠어요. 예전의 우리 같지는 않군요.
마라도나: 딱 그래요.
- 밴드 오아시스와 한 번 마주친 적이 있다. 리암 갤러거의 말로는 오아시스가 콘서트 일정으로 아르헨티나에 방문해서는 바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갑자기 가게에 30명 정도가 왁자지껄 밀려 들어오길래 “뭐 하는 새X야?” 하면서 봤더니 마라도나였다고. 마라도나가 가게 2층으로 일행과 여자를 데리고 올라가길래 통역사를 통해 마라도나에게 한 번 만나볼 수 있는지 부탁했더니 돌아온 대답이 ‘갤러거 형제만 올라와라’. 남은 멤버들의 부러움을 뒤로 한 채 2층으로 올라갔더니 마라도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페트병 뚜껑으로 리프팅을 하고 있었고, 기이하면서도 어색한 분위기에 얼른 사진만 찍고 튀려고 했는데 마라도나가 통역에게 무언가를 말했다고 한다. 갤러거 형제가 통역에게 무슨 말을 한 건지 물어봤더니 “여기 있는 여자들 꼬시면 죽여버리겠어”였다.
- 2015년 성형 수술로 인해 얼굴이 바뀌었다. 주름 제거와 입술 보톡스, 턱 성형 등. 남자다운 강인한 이전의 얼굴에서 갑자기 중년 아줌마같은 얼굴이 된 탓에 이후 ‘마마도나’라는 별명이 붙었다. 갑작스러운 성형의 계기는 30살 어린 새 여자친구의 권유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 2018년 여름 무려 29세 연하로 자신의 딸 지안니나와 동갑인 아르헨티나의 여자 축구선수 로시오 올리바와 약혼했다. 마라도나가 로시오에게 결혼 반지를 내밀자 로시오의 어머니는 특이하게도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하지만 같은 해 12월에 결별 소식이 떴다. 동거하던 집에서 쫓겨나는 모양새로 헤어지게 됐는데, 심지어 그 집은 마라도나가 올리바에게 선물로 사준 집이었다.
- 대두다. 당장 위에 사진만 봐도 키에 비해 엄청난 머리통을 자랑하며 심지어 메시와 같이 선 사진에선 메시가 장신으로 느껴질 정도다.
1980년대 최고의 선수, 최고의 미드필더, 아르헨티나 최고의 선수에 선정된 마라도나 |
마약, 부패 근절 유니폼을 입은 두 선수 |
토리노 경매에 낙찰된 마라도나의 9번 유니폼 |
시날로아의 마라도나: 끝나지 않은 전설 오프닝 곡 | 영화 <디에고> 포스터 |
- 2020년 5월 19일(한국 시각) 영국 언론 더 선에서 '마라도나가 코로나19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줄 것을 호소했다. 그의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말했다'고 보도했다.[71] 또한 마라도나는 자신이 감독을 맡고 있는 힘나시아에 급여 삭감 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힘나시아의 가브리엘 페예그리노 회장은 라디오 현지 라디오 방송에서 "마라도나 감독이 급여를 삭감해야 한다면 기꺼이 하겠다는 뜻을 전했다"고 밝혔다.
- 김병지가 유튜브에서 밝히길 마라도나를 실제로 보고 가장 놀란 것은 가슴(흉부) 두께였다고 한다. 과장 없이 한국 선수들의 두 배였다고 한다.
- 2022년 더 체인스모커스의 컴백 앨범<So Far So Good>에 <Maradona>라는 제목의 곡이 수록 되었다. 노래 가사에서는 나폴리 시절에 마라도나를 언급하고 후렴구부분에는 그의 웃음소리로 마무리된다.https://m.youtube.com/watch?v=RE6vC9Tbc7w
- 2020년 11월에 심정지로 사망했는데, 그 조짐은 이미 2004년에 있었다. 이 때 마라도나는 심장마비로 한 번 쓰러졌다. 그 이후 응급치료를 받은 후 쿠바로 가서 심장수술을 받았다. 게다가 관절염이 너무 심해서 인공관절로 이식수술을 고려할 정도로 그의 몸은 2004년에 이미 엉망이었다. 2004년에 마라도나는 쿠바에서 재활 치료를 계속 받았고 2006 FIFA 월드컵에 독일로 가서 열렬히 응원을 할 정도로 건강이 회복되었다. 하지만 마라도나는 방심했고 그렇게 악화된 상태에도 불구하고 몸관리를 거의 하지 않고 방탕하게 살아온 결과 2020년에 뇌출혈 증세를 보였는데, 하필이면 이럴때 심장마비가 재발하는 바람에 두 개가 겹쳐서 사망했다.
- 영국 매체 메일 온라인판은 28일(한국시각) 마라도나의 측근이 주장한 바에 따르면 마라도나는 자신의 은행 계좌에 거의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채 떠났다고 보도했다. 이탈리아에서 세금 체납 소송을 대리했던 변호사도 이같은 주장을 뒷받침하며 "마라도나는 물질을 초월해 살았고 매우 관대했다. 그의 돈이 어디로 갔는지 알고 싶으면 그를 둘러싼 사람들에게 물어봐라. 그의 주머니에는 100유로가 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마라도나가 현금이 부족한 상태로 사망했지만 다른 부동산 등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또다른 분쟁이 임박하고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아르헨티나 언론들에 따르면 마라도나의 부동산과 보석, 고급자동차, 초상권 등을 모두 합치면 최대 1억 5000만 파운드(약 2200억원)의 가치가 있다며 유산 상속을 두고 분쟁을 벌일 게 확실시된다고 외신들은 전하고 있다. 영국 대중지 더 선은 자녀들뿐만 아니라 마라도나의 누이 5명 중에 4명도 유산을 차지하기 위해 상속 분쟁에 뛰어들 것으로 내다봤으며 마라도나의 유산을 얻기 위한 경쟁은 전쟁 수준이며 월드컵이 될 것이라 덧붙였다
- 마라도나가 사망한 후 장례를 담당한 상조업체의 외주 직원들이 아르헨티나 소셜 미디어에 관에 누워있는 마라도나의 시신과 찍은 사진을 공개하며 고인에 대한 직업의식과 예우를 지키지 않아 파문이 일고 있다. 이에 아르헨티나의 시민들이 사건의 당사자 페르난데스를 죽이겠다며 살해협박까지 하고 나섰고[72] 특히 유족과 변호사의 분노가 극심하다고 한다. 이 사실이 알려진 후 해당 업체는 해당 직원을 즉시 해고하였고 그는 공개사과를 하며 제발 용서해달라고 호소했다.
- 아르헨티나 수사당국이 마라도나가 심장마비로 사망한 데에 의료적 과실이 있었는지를 보기 위해 마라도나 주치의 레오폴도 루케의 집과 진료실을 압수 수색했다. 그리고 그를 치료했던 의료진이 과실치사 혐의로 기소됐다.#
마라도나가 연상된다며 한 팬이 올린 달밤 사진 |
발롱도르 드림팀에 선정된 마라도나 |
디에고 마라도나를 위한 헌정 영상 |
디에고 마라도나를 위해 마오리 하카를 추는 뉴질랜드 럭비 유니온 국가대표팀 |
- 마라도나 생가는 국가기념물로 지정되었다.#
- 마라도나 시계를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서 훔쳐 귀국한 인도인이 현지 경찰에 체포됐다. #
- 1996년 마라도나 방한 당시 김흥국과 같이 게임을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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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디에고 마라도나에 대한 헌사
자세한 내용은 디에고 마라도나/관련 언사 문서 참고하십시오.11. 어록
경기장에서 뛸 땐 삶도 사라져요. 문제들도 사라지고, 모든 게 잊히죠.
영화 <디에고>의 서두와 말미에 반복되는 대사.
영화 <디에고>의 서두와 말미에 반복되는 대사.
그날 나는 손으로 하늘을 만지는 느낌을 받았다.
15세의 나이로 첫 성인팀에 데뷔했을 때.
15세의 나이로 첫 성인팀에 데뷔했을 때.
축구는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스포츠다. 당신이 축구에 관련한 실수를 했다고 하더라도 축구에 대해 미안해 할 필요는 없다. 축구는 모든 것을 정화하는 스포츠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간 실수를 정말 많이 했다. 하지만 축구만큼은 더럽히지 않았다.
자신의 축구 선수 경력을 마무리하는 은퇴사에서.
자신의 축구 선수 경력을 마무리하는 은퇴사에서.
파란색이죠. 나폴리 시민을 위한 파란색. 나폴리에 살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가 어떤 취급을 당했는지 상상도 못할 거예요. 그랬기 때문에 시민들은 이번 승리를 누릴 자격이 있어요.
유벤투스전 승리 후 이번 골은 무슨 색이었냐는 기자의 질문에.
유벤투스전 승리 후 이번 골은 무슨 색이었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러면 감독님은 그것을 잘라야겠군요. 자위를 안 해봤을 리는 없었을 테니까요.
카를로스 빌라르도 대표팀 감독이 자꾸 머리를 만져서 연습을 못할거면 머리를 잘라라라고 이야기했을 때 되받아친 말.
카를로스 빌라르도 대표팀 감독이 자꾸 머리를 만져서 연습을 못할거면 머리를 잘라라라고 이야기했을 때 되받아친 말.
그 때 공을 강타한 것은 나의 손이 아니라 신의 손이었다.
1986 멕시코 월드컵 8강 잉글랜드전에서 손으로 슛을 넣은 직후.
1986 멕시코 월드컵 8강 잉글랜드전에서 손으로 슛을 넣은 직후.
나폴리에서 6년을 보냈어요. 이젠 사람들이 저를 잘 아니까 아르헨티나를 응원해주리라 믿어요. 갑자기 너무 많이 바라면 안 되겠지만 분명 제가 기뻐하길 바랄 거예요. 아르헨티나를 응원해주면 좋겠어요. 그 응원이 필요하기도 하고 저도 그분들이 절 필요로 할 때 늘 열심히 했으니까요.
1990 이탈리아 월드컵 4강 경기 전 인터뷰에서.
1990 이탈리아 월드컵 4강 경기 전 인터뷰에서.
나폴리의 국민들이여, 북녘의 주적[73]을 응원하지 말고 나폴리의 진정한 우방인 아르헨티나를 응원해다오.[74][75]
1990 이탈리아 월드컵 4강 이탈리아전에서 관중석에다 대고 외친 말.
1990 이탈리아 월드컵 4강 이탈리아전에서 관중석에다 대고 외친 말.
힘들었어요. 나폴리에 처음 갔을 땐 85,000명이 절 환영해줬는데 떠날 땐 완전히 혼자였죠. 조용히 떠났어요. 소란 떨지 않았죠.
영광을 함께한 나폴리를 떠나면서.
영광을 함께한 나폴리를 떠나면서.
2010년의 메시는 1986년의 마라도나보다 더 뛰어납니다. 그는 지금 예수와 공을 차고 있어요. 메시는 나와 펠레 간의 논쟁을 끝낼 수 있는 선수죠. 현재 그 누구도 메시와 비견될 수 없을 뿐더러, 그가 하는 것의 40%를 하는 선수조차 없습니다.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시절, 리오넬 메시를 극찬하며.[76]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시절, 리오넬 메시를 극찬하며.[76]
유럽 선수들은 대개 공을 제압하여 통제하는데 많은 공을 들인다. 하지만 나는 공을 친구로 대한다. 경기 중에 내 친구가 어디로 가든지 하고 싶은대로 하게 놔둔다.
우리 엄마는 내가 제일 뛰어나다고 하신다. 근데 펠레네 엄마는 펠레가 더 뛰어나다고 하시겠지?
기자라는 직업을 가진 XX놈들을 제외한 모든 분들께 이 영광을 돌립니다. 나와 대표팀을 믿지 못하는 기자와 언론 사람들은 X이나 XXX!
2010 남아공 월드컵 남미 예선을 힘겹게 통과한 후 기자회견 자리에서 했던 발언. 실제로 마라도나는 이 발언으로 인해 징계를 먹고 조추첨에 참가하지 못했다.
2010 남아공 월드컵 남미 예선을 힘겹게 통과한 후 기자회견 자리에서 했던 발언. 실제로 마라도나는 이 발언으로 인해 징계를 먹고 조추첨에 참가하지 못했다.
브라질은 별로다. 그렇다고 독일이 잘한 것도 아니다. 독일과 브라질의 경기에서 중반이란 없었으며, 다비드 루이스의 호흡도 전혀 안 맞았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브라질이 한 거라고는 롱슛밖에 못한 것이 전부라는 점이다.
미네이랑의 비극 직후 인터뷰에서.
미네이랑의 비극 직후 인터뷰에서.
가브리엘 바티스투타와 에르난 크레스포? 그 두놈 자식들은 골방에 가둔 뒤 한쪽이 사망할 때까지 서로에게 펀치를 날리게 해야 한다.
아르헨티나 국대에서 두 사람의 갈등에 대해 한마디.[79]
아르헨티나 국대에서 두 사람의 갈등에 대해 한마디.[79]
차기 회장선거는 블라터 회장을 내쫓을 좋은 기회라고 확신한다. 블라터는 축구에 큰 해악을 끼쳐왔다.
5선에 도전하는 제프 블라터 회장을 비난하면서.
5선에 도전하는 제프 블라터 회장을 비난하면서.
저는 25년간 FIFA의 블라터, 그라노다 회장과 싸워왔습니다. 말하라고 돈 받지 않았습니다. 저는 선수들을 방어해왔으며 마침내 오늘 괴물들에 대한 인식이 생겼습니다.
'Tyc Sports'와의 인터뷰에서.
'Tyc Sports'와의 인터뷰에서.
지난번에 디 마리아에게 꿈이 뭐냐고 물어 봤는데 챔피언스리그 우승이라고 대답했다. 국가를 대표하는 월드컵 우승이 아니라 말이다. 이딴게 얘들의 마인드다.
러시아 월드컵 전 인터뷰에서.
러시아 월드컵 전 인터뷰에서.
나는 아르헨티나 경기를 보지 않았다. 나는 호러 영화를 즐겨 보지 않는 사람이다. 지금 대표팀을 이끄는 무능력한 사람들은 경기 전 베네수엘라를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나? 이 팀은 늘 국민들을 배신하고 거짓말을 한다. 미안하지만 앞으로도 승리를 거두긴 힘든 팀. 대표팀 유니폼을 입을 자격도 없다. (상황이 나아질) 답이 보이지 않으며 이런 사기꾼들을 계속 믿어주는 팬들에게 내가 다 미안하다.
2019년 3월 23일 아르헨티나 대표팀이 베네수엘라와의 친선경기에서 1:3으로 패배한 직후 인터뷰에서.
2019년 3월 23일 아르헨티나 대표팀이 베네수엘라와의 친선경기에서 1:3으로 패배한 직후 인터뷰에서.
역대 최고 선수에 대한 논쟁에서 나를 고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분명 펠레의 플레이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가장 위대한 선수는 펠레이며, 마라도나는 마라도나일 뿐이다. 앞으로 메시가 은퇴한다면 어떻게 될까? 메시가 은퇴한 지 10년이 지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지금 젊은 사람들은 마라도나를 모른다. 젊은 사람들은 당연히 메시를 더 자주 보며, 그래서 메시를 위로 평가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확히 나와 펠레에게 일어났던 일과 같다. 나와 펠레는 함께 카타르에 방문했던 적이 있는데, 젊은 사람들이 대다수였으며, 사람들은 나를 알아보고 "디에고! 디에고!"하며 악수를 청하고 사진을 찍자고 했다. 펠레를 알아보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고, 펠레에 대한 호응은 나에 비해서 미적지근했다. 왜냐하면 내가 당시 현역 선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의 플레이만 봤다. 젊은 사람들은 항상 오늘날의 선수를 고평가한다. 그렇기에 시대가 다른 선수를 함부로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오늘날에 뛰는 선수와 과거의 선수를 비교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는 펠레이다. 나도, 메시도 역사상 최고는 아니다.
펠레를 깎아내리는 사람들에 대한 일침.
펠레를 깎아내리는 사람들에 대한 일침.
과거의 축구와 현대의 축구는 많이 다르지만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등번호 10번은 나의 것이다. 나는 아직도 국가대표 유니폼을 벗지 않았다.
2020년 5월 28일(한국시간) 자신의 SNS에 남긴 글.
2020년 5월 28일(한국시간) 자신의 SNS에 남긴 글.
만약 내가 하얀 옷을 입고 결혼식장에 서있는데, 흙 묻은 공이 날아온다면 단 1초의 고민없이 가슴으로 받을 것이다.
마라도나의 사후 파브리지오 로마노[80]가 SNS에 올린 그의 어록.
마라도나의 사후 파브리지오 로마노[80]가 SNS에 올린 그의 어록.
반월판이 산산조각이 나더라도 경기하고 싶다. 심장이 터질 때까지 뛰고 싶어. 항상 신중한 사람이 먼저 되는 건 아니야. 나는 경기하고 이기고 싶다. 광기? 문제없어. 내 인생의 마지막 날까지 미쳐 버릴거야.
12.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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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스 빌라르도 |
[1] 카레카, 에밀리오 부트라게뇨와 공동 수상.[2] 1980년 후반 선정[3] FIFA.com News[4] 대표팀 역대 득점 5위[5] 더 선에 따르면 직계자녀 5명 외에도 쿠바에 있는 혼외자녀 3명(요아나, 루, 하비엘리토)과 최근까지 소송 중인 2명(라라, 길) 외에도 2명의 혼외자식이 더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6] 세르히오 아구에로와 결혼하여 자식까지 두었으나 2012년 이혼했다.[7] 먼저 세상을 떠난 마라도나의 부모가 안장된 곳이기도 하다.[8] 마라도나 이후 나폴리는 2022-23 시즌 전까지 33년간 리그에서 우승하지 못하였고, 아르헨티나는 마라도나의 후계자가 등장하기 전까지 36년간 월드컵에서 우승하지 못하였다.[9] 4명의 누나와 2명의 남동생, 1명의 여동생이 있다. 남동생 2명은 둘 다 축구선수였다.[10] 2년 뒤 2022년 펠레는 마라도나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11] 관련 기사[12] 마라도나는 정신 건강이 별로 좋지 못했으며 어머니를 매우 보고 싶어하였다. 살아있었을 당시에 이미 2020년 크리스마스 계획으로 쿠바에 가려는 계획을 세웠으며, 쿠바에서 연휴를 즐기며 정신 건강을 회복하는데 집중할 예정이었다.[13] 그의 동생인 우고도 같은 이유로 2021년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 또한 2015년에 사망했는데 평소에 동맥과 호흡기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즉 선천적으로 심혈관쪽이 좋지 않은 듯. 단, 당시 그의 아버지는 여든을 넘긴 고령이었고 평균수명이 비교적 길지 않은 남미 태생인걸 감안하면 비교적 천수를 누렸다.[14] 마약중독자들이 마약을 끊고 스트레스성 폭식을 겪는 일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다못해 마약 중에서는 약한 편인 담배조차도 끊으면 식사량이 증가하거나 감소하는데 중독성이 엄청난 코카인은 말할 것도 없다.[15] 여기서 박수를 치거나 환호한다고 해서 잘 죽었다고 모욕하는 것은 아니다. 아르헨티나는 독특한 장례문화가 있는데 사람이 죽으면 신의 곁으로 가서 행복하게 지낼 것이라는 믿음 하에 장례식에서 박수를 치고 환호하는 것이 예의이다. 비유하자면 공연을 끝내고 무대에서 내려오는 배우, 연주자에게 청중들이 박수를 보내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16] MBC 뉴스1 MBC 뉴스2 SBS 뉴스1 SBS 뉴스2 KBS 뉴스 엠빅뉴스 스포츠머그[17] 관련 링크[18] 관련 링크[19] 펠레, 리오넬 메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데이비드 베컴, 파올로 말디니, 호나우두, 매직 존슨, 우사인 볼트,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프란체스코 토티,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가레스 베일, 카카, 네이마르, 메수트 외질, 루이스 수아레스, 디에고 포를란, 주제 무리뉴, 지아니 인판티노 FIFA 회장, 프란치스코 교황, 브루노 로드리게스 쿠바 외교장관, 킬리안 음바페, 파울로 디발라, 미랄렘 퍄니치, 스티븐 제라드, 필리페 쿠티뉴, 윌리안, 모하메드 살라, 해리 케인, 에릭 라멜라 등 수많은 유명인사들이 마라도나를 추모하고 있다. 한국 선수 중에서는 그를 우상으로 삼았던 이강인이 그를 추모하였고 86년 월드컵에서 신의 손을 당한 피터 쉴튼도 해당 사건에 대해 마라도나가 사과가 없었다면서 섭섭함을 표하면서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의 개인적 감정이지, 객관적으로 가장 위대한 축구선수였음이 분명하고 그런 사람이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며 애도를 표했다. 또한 마라도나의 소속팀이었던 SSC 나폴리, FC 바르셀로나와 몸담은 적이 없었던 레알 마드리드 CF, 파리 생제르맹 FC, 토트넘 홋스퍼 등 수많은 클럽들이 세계적인 축구 스타의 죽음에 그를 추모하였다. 그의 후원사였던 푸마도 그를 추모하였고 부르즈 할리파는 벽면에 마라도나를 비추며 그를 추모하였다.[20] 이 두 클럽은 엘 수페르클라시코라고 불리는 라이벌리인데, 소요 사태까지 여러 차례나 빚어졌을 정도로 엘 클라시코, 노스웨스트 더비 등 여타 세계구급 더비 매치들은 애들 장난으로 보이게 만드는 최악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라이벌리이다. 그런 이 두 팀의 팬들이, 더군다나 코로나19가 창궐하는 당시 상황 속에서도 서로를 안아주며 슬픔을 나누는 모습은 그만큼 마라도나가 아르헨티나 사람들에게 있어서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21] 한국 축구 팬들 중에서는 그가 김민재를 향해 어떤 평가를 내렸을지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있다.[22] 의료 기술의 발달로 기대 수명이 상향해 60대도 젊은 축이 되어버린 것도 있다. 물론 마라도나는 몸 건강이 상할대로 상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었다.[23] 1995년 이전까지 발롱도르는 '유럽 최우수 선수상'이었기에 당시 마라도나는 후보 대상자가 아니었다.[24] 실제로 사키는 "압박축구는 마라도나를 견제하기 위해 만든 전술이다"라는 발언을 했다.[25] 메이저 언론사들이 발표한 역대 축구 선수 순위를 보면 마라도나는 마르카 2위# · 5위#, 포포투 3위#, 부트발 2위#, 스포르트1 4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2위# 등이다. 이외 마라도나는 가제타가 무순위로 뽑은 역대 TOP 5에 메시, 펠레, 디 스테파노, 크루이프와 함께 이름을 올렸다.#[26] 2024년의 평가[27] 대표적으로 UCL, 컵위너스컵에서는 각각 최고 성적 16강, 8강이라는 아쉬운 성적을 기록했다.[28] 단 잉글랜드전은 엄연히 오심으로 이룬 승리이기도 하다. 다음 추가골이 워낙 아름다워서 묻혀버렸을뿐 판정이 제대로 이루어졌다면 마라도나는 승리는커녕 퇴장으로 8강 탈락의 원흉이 됐을 것이다.[29] 이는 사르데냐 섬이 연고지인 칼리아리 칼초의 우승을 제외하면 남부 이탈리아를 연고로 한 팀이 스쿠데토를 차지한 전무후무한 사례이며 클럽 최초의 리그 우승이었다. 마라도나가 떠난 후 나폴리가 다시 스쿠데토를 따내는 데는 무려 33년이란 세월이 걸렸다.[30] 이중 오르테가가 포지션이나 플레이 스타일 면에서 그나마 비슷했다고 평가받는다. 다만 메시 역시 마라도나와 포지션이 다른건 마찬가지다.[31] 그러나 결국 메시는 2022 월드컵에서 우승을 달성했다.[32] 다만 노쇠화가 진행될 대로 진행된 상태에서 참가한 2021 코파 아메리카, 2022 월드컵 등에서는 매 경기 8㎞ 이상, 많으면 12㎞ 이상을 뛰면서도 결승전까지 퍼포먼스를 유지했다.[33] 마라도나만큼의 잡음을 일으키지는 않았으나, 펠레도 경기 내적으로 전투적인 부분은 마라도나 못지 않았으며 파울을 당하면 주저없이 파울로 되갚아주는 경우도 많았다.[34] Metropolitano(메트로폴리타노)[35] 1982년부터 1986년까지 존재했던 스페인의 리그컵.[36] AM 2위[37] 펠레와 공동 수상.[38] 1986 멕시코 월드컵 8강 잉글랜드 전.[39] Metropolitano(메트로폴리타노)[40] Nacional(나시오날)[41] 링크[42] 공교롭게도 마라도나, 플라티니, 지쿠는 FIFA 회장선거에 출마했다.[43] 반 바스텐은 세계 최고 선수를 다툰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분명 마라도나의 라이벌이었겠지만, 현역 시절 마라도나의 라이벌로 더 자주 조명받았던 것은 굴리트였다. 아무래도 반 바스텐보다는 굴리트 쪽이 국가대표팀 주장이라서 상징적 이미지도 강하고, 포지션이나 역할 면에서 마라도나와 더 유사했기 때문이다.[44] 마라도나는 나폴리, 마테우스는 인터 밀란[45] 키건을 제외한 7명 모두 전성기 시절 세리에 A에서 뛰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지쿠, 플라티니, 루메니게, 파우캉은 1980년대 초중반의 세리에 A를 대표하는 선수들이었고, 굴리트, 마테우스, 반 바스텐은 1980년대 중후반의 세리에 A를 대표하는 선수들이었다. 마라도나의 최전성기였던 1980년대 중후반에는 굴리트와 마테우스가 단연 최고의 라이벌로 손꼽혔다.[46] 나이로 비교하면 루메니게와 플라티니는 5살, 지쿠는 7살 위이다.[47] 그러나 마라도나가 만 19세, 20세의 나이로 지쿠를 제치고 2년 연속 남미 올해의 축구 선수상을 수상하는 등, 축구인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그 당시의 마라도나가 이미 더 뛰어난 선수라고 보는 시각도 많았다.[48] 대단한건 당시 비교되던 선수 중 마테우스는 역대 최고의 중미, 굴리트는 역대 최고의 올라운더, 반 바스텐은 역대 스트라이커 세 손가락에 드는 초특급 선수로 아직까지도 최상위 반열에 있는 선수들이며, 이들 사이에서도 마라도나는 돋보이게 빛나는 선수였던 것이다.[49] 시리아 출신 아랍계 이주민으로 최고위직에 오른 인물이다. 아르헨티나에서 당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대처리즘적인 정책을 시행했었다.[50] 페론당의 분파로 2000년대 초반 페론당이 여러개의 정당으로 분리되는 과정에서 창당된 정당이다.[51] 다만 2013년 취임식에는 참석하기는 했다.[52] 사실 제헌의회 구성 자체는 일단 베네수엘라 헌법으로 규정되어있기는 하기는 하기때문에 불법은 아니고 대통령도 제헌의회에서 통과된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지못하는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권한이 막강하지만, 1년 반 넘게 여소야대인 의회와 거칠게 대립하고있는데다가 무엇보다도 1990년대 말에 처음 제헌의회를 구성했을때 1998년 대선을 한달 앞둔 시기에 선거를 치른 기존 국회를 무력화시킨 채로 개헌안을 통과시킨 전적이 있다보니, 임기보장이나 정권연장을 위한 면피책이 아닌가하는 의심을 사고있고 실제로도 제헌의회 구상발표 이후로 오히려 시위 사망자수가 불어나는 등 오히려 혼란상은 극심해졌다.[53] 다만 아주 음모론까지는 아닌게 미국 행정부나 주요 정당들 내에서 남미 좌파정권들을 손을 봐야한다는 의원들이나 공직자들이 꽤 있기도 한데다가, 20세기뿐만 아니라, 21세기에도 중남미에서 우파정당을 지원한다거나 하는 식의 행보를 보이고 있기도 하다.[54] 사실 마라도나 입장에선 대놓고 디스를 했다기보다는 걍 자국의 국대 선배로써 후배한테 장난에 가깝게 행동을 한거였다. 물론 그때 당시까진 국대 무관이라 심적인 부담감이 장난 아니었던 메시한테는 괜히 멘탈만 무너뜨리는데 일조했지만.[55] 주로 나폴리 주변의 남부 지방이다.[56] 정작 마라도나 본인은 가톨릭 신자이다.[57] 당연하지만 일반 가톨릭교에서는 성인이라는 개념은 있지만 공경을 하지 숭배를 하진 않는다.[58] 영상에서 읊는 것은 스페인어 사도신경으로, 예수의 고난-부활을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 메시의 고난-부활과 일치시켰다.[59] 펠레는 2013년에 수상했다.[60] 기존 수상자들의 수상이 취소되는 것은 아니다.[61] 그러나 이것 역시 파파라치나 기자들에게 자신을 보호하는 행동 중의 하나이다. 당장 영국의 다이애나 스펜서가 어떻게 죽었나를 보면 답은 뻔하다.[62] 특히나 그를 해치거나 했으면 아르헨티나인들이 절대로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63] 펠레는 저주로 유명해서 그렇지 인터뷰는 립서비스를 많이 곁들여서 신중하게 하는 편이다. 그리고 애당초 펠레의 저주 자체도 펠레의 엄청난 유명세와 립서비스가 결합되어 나온 만들어낸 속설이다.[64] 2010년 월드컵 당시에는 이미 2승을 거둬서 여유있게 조별 리그 3차전을 맞게 되자 감독이었던 마라도나는 메시를 주장으로 임명했다. 그건 마라도나가 메시에게 주는 생일 선물이기도 했다.[65] 나이젤 더용, 가레스 배리, 야야 투레[66] 유럽의 파파라치 문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심각하다. 대표적인 피해자 다이애나 스펜서 전 영국 왕세자비가 파파라치를 피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치명상을 입었던 사건이 있었다. 당시 파파라치들은 다이애나를 구조하지 않고 그녀의 죽어가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대기만 했으며 20분간 방치됐던 다이애나는 뒤늦게 현장을 발견한 시민의 신고로 응급실로 실려갔으나 결국 골든타임을 놓치고 사망하고 말았다. 만약 그들 중 단 한 명이라도 그녀를 위한 신고를 해줬다면 그녀의 목숨이 그렇게 허무하게 날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허나 그들은 모두 사진과 돈에 자신의 양심과 인간성을 팔았고 그들의 치부는 다이애나의 죽음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이러한 파파라치의 인식을 생각하면 마라도나만 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67] 스페인어 사용지역의 정식 이름은 1st name - 2nd name - 아버지쪽 성 - 어머니쪽 성 방식을 따른다.[68] 그 외에는 독일 청소년 대표팀의 칼 하인츠 슈나이더는 카를하인츠 루메니게를, 프랑스 청소년 대표팀의 엘 시드 피에르는 미셸 플라티니를 모티브로 했다.[69] 그런데 아르헨티나 철자가 하나 틀렸다. 즉, R이 아닌 L로 잘못 표기돼 있다.[70] 펩 과르디올라가 선수 생활 말년에 뛰었던 팀이다.[71] 판자촌 출신으로 어린 시절 빈곤을 경험했던 마라도나는 15살 때부터 여덟 식구의 가장 노릇을 했다.[72] 장례식들 중에서도 관을 열고 하는 장례식인 오픈 캐스킷 장례식이라는 게 있고, 실제로도 리버 피닉스, 주스 월드, 제임스 브라운 등이 이런 식으로 장례식을 하여 이 중 리버 피닉스와 제임스 브라운의 경우 시신의 사진까지 남아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마라도나는 이런 방식의 장례식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신 사진을 무단으로 찍어서 단순 기념으로 인증샷을 남겨 심각한 고인모독을 진행하였다는 점이다. 당장 오픈 캐스킷 장례식으로 진행한 리버 피닉스의 시신사진이 타블로이드지 기레기들에 의해 유출되었을 때, 그의 동생인 호아킨 피닉스는 그것에 염증을 느껴 한동안 연예계를 떠나 있었다.[73] 이탈리아는 남북간 갈등이 심하다. 참고로 이탈리아 북부는 남부에 비해 훨씬 부유하다.[74] 남부 이탈리아 사람들은 19~20세기 걸쳐 엄청나게 많은 수가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민갔고, 아르헨티나도 이런 이탈리아 이민자들의 주 이민국 중 하나였다. 아르헨티나 선수들이 워낙 이탈리아계 성씨가 많은 이유.[75] 이 말에 격분한 이탈리아 월드컵 조직위원회는 결승에 진출한 아르헨티나의 상대가 된 서독을 대놓고 응원하기로 결심하였고, 결국 편파판정 끝에 서독의 안드레아스 브레메가 페널티킥 결승골을 넣어 서독을 우승으로 이끌었다.[76] 메시가 데뷔할 무렵 제2의 마라도나라는 별명으로 주목 받기 시작했었고, 이때 마라도나 본인도 자신의 진정한 후계자는 메시라며 애지중지 했었다. 이런 그가 아르헨티나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해 이렇게 대놓고 메시를 치켜세우는 인터뷰도 남겼었다. 하지만 이후 메시가 계속 국제대회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역시 자신에겐 못 미친다고 실망감을 자주 내비치기도 했다.[77] 노망 이야기는 좀 심하지만 펠레의 발언이 개드립 수준의 망언임은 악성 호날두 팬들도 인정할 정도였다. 2019년 기준 현재의 네이마르라도 30대 초중반의 메시와 비견될 실력까지는 아니라는 것이 정론인데 저 당시 네이마르는 아직 유럽 리그에서 데뷔하지도 않은 브라질 리그 출신 유망주에 불과했는데다 그 시기 유럽에서 미친 활약을 보이던 현대 축구의 아이콘 리오넬 메시와 비교하는 것도 모자라 더 낫다고 할 정도이니 라이벌 국가 브라질 국민들도 혀를 내두를 지경이였고, 마라도나 발언의 의도 역시 이러한 입장을 대변한 것으로 볼 수 있다.[78] 그러나 정작 마라도나는 오히려 역사상 최악의 축구 감독으로 낙인찍혔다. 자세한 내용은 디에고 마라도나/감독 경력 문서를참고.[79] 다만 실제 두 사람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80] 이탈리아 축구 전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