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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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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공화국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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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아르헨티나의 방송국 텔레페가 아르헨티나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아르헨티나인 100명'을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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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카르도 발빈 로베르토 알트 로베르토 비센조 로돌포 월시 로케 사엔스 페냐
<rowcolor=#ffffff>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살바도르 마사 산드로 데 아메리카 타토 보레스 티타 메레요 술 솔라르
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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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5aadb><colcolor=#fff> 아르헨티나 공화국 제29·39대 대통령
후안 도밍고 페론
Juan Domingo Perón
파일:Juan_Domingo_Perón.jpg
출생 1895년(1893년)[1] 10월 8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주 로보스
사망 1974년 7월 1일 (향년 78세)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주 올리보스
재임기간 제29대 대통령
1946년 6월 4일 ~ 1955년 9월 21일
제39대 대통령
1973년 10월 12일 ~ 1974년 7월 1일
사상 페론주의
최종 당적 [[정의당(아르헨티나)|
정의당
]]
배우자 아우렐리아 티손(1929년 결혼; 1938년 사별)
에바 페론(1945년 결혼; 1952년 사별)
이사벨 페론(1961년 결혼)
약력 아르헨티나 부통령
정의당 대표
아르헨티나 전쟁부장관
아르헨티나 노동사회복지부장관
최종계급 육군 대장
서명
1. 개요2. 생애3. 페론주의에 관한 평가4. 기타5. 창작물에서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아르헨티나의 제29·39대 대통령이다.

이른바 '페론주의'를 창시한 인물로 오늘날 아르헨티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후임인 카를로스 메넴[2]이나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 대통령도 페론당 출신이다.[3] 그의 사상이 파시즘사회주의 중 어느 쪽에 가까운지에 대해 현재도 논란이 있다.[4]

2. 생애

아버지는 이탈리아계 스페인인의 후손이었고, 어머니가 아메리카 원주민인 테우엘체 족 출신이었지만 그 당시 아르헨티나에선 원주민과 원주민-백인 간 혼혈인인 메스티소가 차별받았기에[5][6] 친가에선 후안 페론이 메스티소라는 사실을 숨겼다.[7] 1911년에 군사학교에 입학하면서 군인으로써의 생활을 시작했고, 이후에 승진 속도가 느리긴 했지만 착실하게 군인으로써의 길을 걷던 중에 이탈리아 주재 아르헨티나 대사관으로 발령이 나면서 파시스트가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을 지켜보았고 베니토 무솔리니에게 영감을 얻게 되었다. 이는 이후 페론의 행보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귀국 후에는 1943년 군사 쿠데타에 참여해서 13년간 통치했던 군부 독재 정권을 뒤엎는데 성공한다.

후안 페론은 군사 쿠데타에 참여한 공로로 노동사회복지장관을 역임했다. 그는 공산당 계열의 노조는 탄압했지만 노동조합 세력을 우대해 노동정책에서 그동안 사민주의 세력도 하지 못했던 공적을 남겼다는 호평을 들을 정도로 큰 성과를 내며 엄청난 인기를 누리게 되었고[8], 그 인기를 바탕으로 1945년 부통령직에 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호헌을 지지하는 쿠데타로 모든 직책을 잃고 야인이 될 위기에 처했으나 페론을 지지하는 노동자들의 시위와 아내 '에바 페론'의 노력으로 풀려나게 되었다. 시위로 풀려난 후안 페론은 1946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고, 노동사회복지장관 재임 당시의 업적을 내세워 약 53%의 득표율로 304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해 약 45%를 득표한 급진시민연합 후보에게 승리하게 된다.

대통령 취임에 성공한 페론은 노동자의 권리를 더욱 증진시키는 정책을 펼치면서도 동시에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고, 반대파에 대한 탄압을 가했다. 하지만 산업 발달 및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의 전후 복구로 인한 수요 상승, 임금 상승, 중산층 확충, 복지 확충으로 인한 내수 증진으로 아르헨티나의 경제는 호황을 누렸다. 여기에 아내 에바 페론의 헌신적인 내조와 여성 참정권 부여, 외국계 기업의 국영화 정책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1949년에 헌법을 개정했고, 1951년 대통령 선거에서 후안 페론은 63.5%의 득표율을 얻어 급진시민연합 후보에게 압승을 거두게 된다. 그러나 1950년대에 들어 미국과 캐나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소련 등 주요 강대국들이 전후 복구를 거치며 공업 생산량을 증대시키면서 아르헨티나산 제품의 수요가 크게 줄어들게 되었고, 아르헨티나의 경제도 덩달아 침체를 겪기 시작했다. 또한 후안 페론의 성향과는 별개로 나치 인사들의 망명을 받아들이면서 나치에게 극심한 피해를 입은 국가들과 마찰을 빚게 되었고, 이는 경기 침체를 더욱 심화시켰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지지율을 유지시킬수 있었지만 에비타(에바 페론)가 암으로 33세의 젊은 나이에 죽은 이후에 이혼과 매춘을 합법화하면서 가톨릭 교회와 척을 지어 독실한 신도들의 지지를 잃었으며 군부내에서도 반 페론파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1955년 9월, 후안 페론은 페드로 아람브루군사 쿠데타로 축출되었다. 이후 페론은 해외로 망명가는 신세가 되었고, 이후 새로히 들어선 군사정권은 후안 페론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며 페론주의자들의 출마를 금지시키고, 페론주의자에 대한 탄압을 자행했다. 물론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 페론주의자들은 군사정부에 대항하려 했지만 진압되었다.

후안 페론은 쿠데타 이후 베네수엘라, 파라과이, 이탈리아, 스페인 등 중남미와 유럽 여러 나라를 오가며 생활했고 자서전을 집필하면서 좌파 및 극우파와의 만남도 긴밀히 가지며 노조를 물밑 지원하는 방식으로 정치적인 재기를 노렸다. 또한 1961년 스페인에서 이사벨 페론과 재혼을 했다. 후안 페론은 아람부루 군사정권이 경제정책에 있어서 지극히 무능하다는 점 때문에[9] 오래가지 않아 복권의 기회를 잡게 되었다. 1958년 대통령 선거에서 후안 페론은 페론주의자들에게 그나마 반 페론주의적인 색채가 덜한 아르투로 프론디시에게 투표하라고 촉구했고, 실제 선거에서도 프론디시가 52.7%로 승리를 거두며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로써 아르헨티나 유권자들에게 남아있는 후안 페론의 영향력이 여전하다는 것이 입증되었고, 이후 페론은 프론디시 정권과 전략적인 제휴를 취하며 프론디시를 물밑에서 지원했다. 또한 1950년대에 혼란스러웠던 경제 상황이 1960년을 전후하여 정상화되기 시작하면서 페론주의자들의 입지가 굳어졌다. 이렇게 후안 페론의 와신상담이 성공하는 듯싶었지만 이는 입지가 좁아진 보수주의자와 가톨릭 교회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프론디시 대통령이 선거에서 페론주의자들의 출마 금지를 풀어버려 페론주의자들이 대거 선거에 당선되자, 위험을 느낀 군부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프론디시가 도중에 실각해버렸다. 또한 신임 정부는 군부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후안 페론이 아르헨티나 정계로 복귀하려는 꿈은 좌절되다시피 했다. 이렇게 되어버리자 후안 페론은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여러 후보들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기권을 주장하며[10] 희망을 버린 듯한 행보를 보였고, 1966년의 군부 쿠데타후안 카를로스 온가니아가 집권한 후에도 이러한 상황은 지속되었다.

그러나 온가니아를 비롯한 군부 정권은 경기 침체와 야당 탄압으로 인해서 지지율이 낮았고, 군사 독재에 반발하는 정치 테러가 횡행하는 등 혼란이 지속되었다. 후안 페론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페론주의자들을 후원하며 민주화 시위와 파업에 있어서 자신의 영향력을 동원했다. 결국 1972년에 알레한드로 아구스틴 라누세 대통령이 페론주의파 및 급진시민연합, 사회당 등과 협상을 하여 민주화 조치를 취함과 동시에 페론주의자들의 출마 금지를 풀었고, 그 동안의 정치 혼란과 군사 독재에 지친 아르헨티나인들은 후안 페론을 환영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결국 1973년에 걸쳐 치러진 총선에서 친 페론파가 압승을 거두었다. 친 페론파가 집권한 아르헨티나 정부에선 페론의 귀국을 허용했다. 오랜 망명 생활에서 벗어난 페론은 노동자 권리 증진과 정치 혼란의 종식을 공약으로 내걸고 그 해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61.5%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었지만 이미 고령이었던 페론의 건강 상태는 이미 상당히 나빴다. 그래서 부인인 이사벨 페론이 대통령직을 대행하는 경우가 많은 반쪽짜리 대통령 신세였고, 결국 대통령에 당선된 지 채 1년도 못 된 1974년 7월 1일 노환으로 향년 79세의 일기로 눈을 감았다.

3. 페론주의에 관한 평가

흔히 페론주의에 대해, 과도한 임금 인상과 사회보장정책 등 대중영합정책으로 인기를 끌었지만 결국엔 아르헨티나 경제를 허약하게 만들었다는 일각의 비판이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선 논쟁의 여지가 있는 것이, 후안 페론이 실행했던 경제정책이 당대의 기준에서 특별히 이상했던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트렌드를 충실히 따른 것이었다. 당시 미국에서도 케인즈주의 경제학을 반영해 경제정책을 짰고, 소련의 계획경제 체제 역시 성공적으로 잘 돌아가던 시절이었기에 서구 선진국이든 갓 독립한 제3세계 국가든 부분적이나마 계획경제 제도를 반영하거나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후안 페론도 그런 경우였고, 이건 지금도 정도의 차이일 뿐 마찬가지긴 하다.

또한 후안 페론이 포퓰리즘으로 나라를 말아먹었다고 주로 보수 언론에서 일방적인 비난을 하는 것에 비해 의외로 1980년대까지 페론주의계 정당은 집권 기간이 짧았다. 195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는(1973년부터 1976년까지의 공백기를 빼면) 급진시민연합과 반 페론파 성향의 군부가 집권했고, 그나마도 1955년 쿠데타 이후로 페론주의자들의 선거 출마가 금지되어 있었던 상황이었으며, 이후 선거 출마 금지 조치가 풀려서 페론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은 것도 1973년부터 1976년까지 단 3년 정도에 불과했다.

민주화 직후에는 급진시민연합(라디칼당) 소속의 라울 알폰신이 집권했고, 페론당 소속으로 집권한 카를로스 메넴도 대통령 당선 당시에는 페론주의적 공약을 내세우기는 했지만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는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을 적극적으로 도입했고, 민영화도 대대적으로 단행하여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아르헨티나가 경제 위기에 빠졌을 때 더 이상 팔아치울 공기업이 남아있지 않다고 표현될 정도로 철저하게 감행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경제 위기를 극복한 건 페론주의의 계승을 표방한 후임자인 네스토르 키르치네르였다.[11]

후안 페론의 업적을 재평가하는 쪽에선 1949년부터 1976년까지 그가 통치하던 시대[12]에 아르헨티나의 국민 총생산은 127%의 성장을 기록했고, 개인소득은 230%의 성장을 기록했으며 농업형 국가에서 공업형 국가로의 발전을 도모했다는 측면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1945년에 4,000달러 정도이던 아르헨티나의 1인당 GDP는 1975년에 이르면 8,000달러를 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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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시기에 아르헨티나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GDP가 상승한 나라들도 있다. 예를 들어 후안 페론이 집권한 1946년 아르헨티나의 1인당 GDP는 브라질과 일본(제2차 세계대전 직후라서)의 세 배가 넘었지만 1975년에는 브라질의 두 배로 격차가 줄어들었고 일본과는 비교할 수 없이 벌어졌다. 1946년까지만 해도 아르헨티나의 1인당 GDP는 OECD 평균에 근접했으나 1975년 무렵엔 OECD 평균의 70% 정도까지 떨어졌다. 물론 당대 일본은 아르헨티나 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랑 비교해도 높은 성장을 보였기에 직접적인 비교 대상이 되기 어렵고, 브라질은 인구나 자원 면에서 사실 아르헨티나보다 잠재력이 높다고 평가받을 뿐더러, OECD 드립은 1946년이 제2차 세계대전으로 다수의 OECD 가입국이 폭망했다가 다시 전후 복구를 하던 시절임을 감안하면 말장난에 불과하다. 실제 평균적인 지표로 보면 당시 아르헨티나 경제가 엄청 암울했다고 보긴 어렵다.

또 빈민 구제를 경제 개발보다 우선시했기 때문에 겉으로 보이는 경제 성장은 좀 더뎠어도 후안 페론의 치세 기간의 아르헨티나는 적어도 빈민율만은 계속 줄어들고 있었다. 후안 페론은 우선 빈부 격차부터 줄이고, 차후 성장에 집중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후안 페론이 죽은 지 2년 후 호르헤 비델라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직후부터 페론 정책을 뒤집겠답시고 우파 정책을 대책없이 남발한 결과, 자국의 알짜배기 기업들은 헐값에 처분되었고 국채는 계속 쌓이는 등 아르헨티나 경제는 성장과 빈부 격차 양쪽에서 모두 몰락하기 시작했다.[13]

그렇기 때문에 후안 페론의 업적을 긍정적으로 보든 부정적으로 보든 아르헨티나의 경제 부진이나 파탄의 책임을 페론에게만 전가하기는 어렵다. 아르헨티나는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경제력이 절정에 달해 프랑스 및 독일과도 비슷한 수준이었으나[14] 1929년 미국발 경제 대공황의 직격탄을 맞게 된 이후에는 주욱 내리막길이었다. 후안 페론의 영향이 남아 있었던 1950년대라면 몰라도 1960년대와 1970년대까지의 아르헨티나의 성장 부진을 온전히 페론의 영향이라고 하는 것은 페론의 인지도 빨에 기댄 확대 해석에 가깝다. 상기했듯 아르헨티나의 경제 부진이나 파탄의 책임은 군부 쿠데타로 많은 인명 희생을 치르고 페론의 정책을 뒤집어보려다 경제까지 망가뜨린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에게 더 많은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완전한 자유시장경제를 도입하려 했지만 오히려 부작용만 키워버리면서 차라리 안 건드린 것만 못한 수준이 되어버렸다.[15]

실제 페론주의에 긍정적이거나 또는 중립적으로 생각하는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후안 페론보다는 오히려 페론 실권/사후에 집권한 아르투로 프론디시와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레오폴도 갈티에리, 라울 알폰신, 카를로스 메넴, 페르난도 델라루아 같은 후임 아르헨티나 대통령들의 경제 정책이 오히려 아르헨티나의 경제 악화에 더 악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도입하고 실행했던 신자유주의적 정책이 천문학적인 외채와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경제 파탄이라는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또한 1966년부터 1973년까지 7년밖에 안되는 기간에 쿠데타가 무려 세 번이나 일어날 정도로 정치적으로 혼란한 상황이었으니 국가적인 차원에서 경제 성장에 에너지를 쏟아붓기가 어려웠고, 1976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호르헤 비델라 정권부터 외자 도입을 위해 공기업에 외채를 떠안게 하는 조치를 취하면서 본격적인 외채 위기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오히려 후안 페론의 정권은 외채에 의존하는 경제 발전을 경계했으며, 외채 제로를 선언하며 집권하자마자 바로 영국 은행에 지고 있었던 10억 달러의 외채를 갚는 등 임기 동안 외채를 꾸준히 줄이려고 노력했다.[16] 적어도 후안 페론의 기조가 유지됐다면 막대한 외채로 인한 외환 위기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아르헨티나의 공업이 농업에 비해 낙후된것도[17] 사실이라 후임 대통령들의 무능과는 별개로 페론주의에 대한 평가는 갑론을박이 꾸준히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4. 기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상당수의 나치 인사들이 아르헨티나로 도망쳐 오자 그들한테 보호비(?) 명목으로 돈을 받고 그들을 숨겨주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가톨릭과 커넥션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음모론도 존재하지만 페론은 가톨릭과도 마찰이 있었기 때문에 설득력은 낮다. 첨언으로 아르헨티나가 나치들을 많이 받아주긴 했지만 또 그게 사상적으로 후안 페론 정권 시절 극우에 기울었다는 증거는 못 된다. 왜냐하면 비슷한 시절, 스페인 내전에서 패배한 스페인 제2공화국의 난민들을 비롯한 유럽 각지의 좌파쪽에 더 가까운 난민 및 망명객, 그리고 홀로코스트를 피해 유럽에서 남아메리카로 도망친 유대인과 집시들도 거리낌없이 곧잘 받아 주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스페인의 공화파 망명객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얼마 안 된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이미 몇년 전에 정착해, 젊은 시절의 에르네스토 게바라 같은 아르헨티나 청년들에게 사상적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했고, 한편으론 바로 몇년 전만 해도 저런 좌파 성향의 세력들을 가혹하게 탄압하다가 전범 재판을 피하려고 꽁무니 빠지게 도망친 나치의 전직 SS 친위대원들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었다. 즉, 당시 아르헨티나는 굉장히 이념적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살던 곳이었다.

후안 페론은 10대 소녀와 염문에 휩싸인 적이 있었다. 정확히는 아내 에바 페론의 사후인 1953년부터 2년간 넬리 리바스(Nelly Rivas, 1939~2012)라는 페론주의 학생조직의 회원과 서로 사랑에 빠져 정서적인 관계를 넘어 심지어는 성적 관계까지 맺은 적이 있었는데, 이 소식은 당대 아르헨티나의 가십거리가 되었다. 후안 페론이 군사 쿠데타로 쫓겨난 이후 넬리는 미성년자를 위한 교정 정신병원으로 이송되었으며, 이후 그녀가 후안 페론과 주고받은 편지가 1957년에 미국 언론에 공개되었다. 이 때문에 후안 페론은 1971년에 미성년자 의제강간 혐의로 기소되기도 했다.[18] 이후 넬리 리바스는 1958년에 결혼을 하고 두 자녀를 두며 평범하게 살다가 후안 페론이 1973년에 재선되었을 때 재회했고, 이후 그녀는 2012년 8월 28일에 7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페론주의는 항목에도 있지만 혼합정치를 대표하는 이념 중 하나로, 사회주의부터 가부장적 보수주의, 좌익대중주의, 경제적/사회적 진보주의, 파시즘(제3의 위치) 등 매우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다. 학자간에도 견해가 엇갈려, 정치학자인 폴 H. 루이스는 페론주의의 경우 제3의 위치적인 노선에서 권위와 민족적인 이상향을 강조한 점이 이탈리아의 파시즘과 유사하며, 페론주의가 이탈리아의 보통 파시즘만큼 급진화되지 못했던 것은 권력을 취했던 기간이 베니토 무솔리니보다[19] 짧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20]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후안 페론의 1기 집권 당시 제1야당(급진시민연합)은 오히려 당시 기준 기득권/지식인층의 지지를 받는 자유주의 성향이었고, 페론당이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들의 지지를 받는 파시즘 세력이였다고 볼 여지도 있다. 다만 이 당시 페론이 취한 정책을 보면, 상기했듯 난민들도 좌우 안가리고 받았고, 각종 노동자 우대, 복지 정책, 여성 참정권 부여, 원주민 차별 해소, 가톨릭 교권 파시즘에 맞서 세속주의 추구라는 리버럴한 정책들도 대거 수용했기 때문에 마냥 파시즘이라고 몰기도 어려운 측면이 있다.

오늘날 정의주의자당은 2000년대 초에 재집권한 후 2003년 대선을 앞두고 페론당과 급진시민연합이 핵분열하여 좌파 블록과 중도파 블록, 우파 블록이 죄다 따로 후보를 낼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이 대통령 선거에서 놀랍게도 메넴이 1위를 차지했지만 결선 투표에서 참패할 위기에 처하자 사퇴하여 네스토르 키르치네르가 당선되고 아르헨티나 경제도 예상을 깨고 회복세에 접어들면서 좌파 페론주의 정당인 '승리를 위한 전선'이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2003년 대선을 앞두고 따로 창당된 우파 페론주의 정당들이 승리를 위한 전선에 합류한 것도 아니었다. 2015년 비 페론주의 우파로의 정권 교체 이후에도 제1야당인 승리를 위한 전선(중도좌파)과 제2야당인 연방 페론주의당(중도우파)[21]이 모두 페론주의 성향의 정당으로 남아있었다.

정리하자면 후안 페론이 아르헨티나 근대사에 남긴 족적이 너무 커서 좌파, 우파 양쪽으로 전부 다 페론주의를 주창하는 정당이 있고, 또 같은 좌익이나 우익이라도 페론주의 성향이냐, 비페론주의냐에 따라 성향이 확 갈린다. 아르헨티나 공산당도 페론주의 성향의 사민주의자 및 중도좌파들과 이를 박박 갈았던 경우가 있었다. 게다가 또 상술했듯이 후안 페론이 권위주의적이고 개인숭배적인 성향이 강했다 한들 어쨋든 선거로 당선된 민주 정치인이었던 반면 페론을 쫒아내고 해먹은 군부는 노골적으로 전국적인 테러를 자행하며 경찰 국가를 만들려 했던 독재자들이었기 때문에 군사 독재를 겪으며 페론주의 세력은 역설적으로 야권 민주화 세력 중 하나로 변모했다. 당장 현대의 집권당인 정의당의 청년 조직인 '페론주의 청년단'(Juventud Peronista)만 하더라도 주요 사업 중 하나가 군사정권의 희생자 신원 확인과 명예 복권일 정도이니, 현대 아르헨티나 정치판에서 페론주의는 정말 딱히 정의를 내리기 힘들면서도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정치적 유산인 것은 분명하다.

5. 창작물에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뮤지컬 <에비타>에서 주인공인 아내 에바 페론과 함께 주요 캐릭터로 등장한다. 영화판에서는 조너선 프라이스가 후안 페론을 연기했다.

<트로피코 3>의 플레이 가능한 실존 아바타 중 하나인데, 방구쟁이저능아라는 비하식의 엄청난 단점을 가지고 있다.

히틀러가 되었다에서는 아내 에바 페론과 함께 독일에 방문해 포클랜드 제도를 탈환하기 위한 도움을 요청하지만, 히틀러가 사실상 거절하며 포기하라고 충고했는데도 야심을 버리지 못해 기어코 포클랜드 전쟁을 일으킨다. 하지만 히틀러가 충고한 대로 연합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패전을 목전에 두고 쿠데타가 일어나자 독일로 망명한다.

6. 관련 문서



[1] 바레이로 박사에 의해 밝혀짐. 페론의 출생비밀[2] 메넴은 시기상 후안 페론과 직접 만남을 가졌고, 1973년 라 리오하 주지사 선거에서도 페론의 후광에 힘입어 당선되기도 했다. 다만 훗날 대통령에 당선된 후에는 페론과 대비되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펼쳤다.[3] 물론 성향 자체는 후안 페론과 완전히 같진 않다.[4] 국내 보수언론에서는 단순히 좌파 포퓰리스트 정도로 취급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딱 잘라 평가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는 인물이다. 물론 크로아티아의 안테 파벨리치 등 나치 인사를 받아들이고, 독재자들과 교류하는 등 파시즘적인 면모도 보였지만, 반대쪽 인사들도 잘 받아들이면서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내치에서도 세속주의, 소수자 배려 등 사회적 차별 해소나 빈민 구제에 제법 힘쓴 것도 사실이다. 후안 페론의 정책을 부정하며 등장한 군사정권이 아르헨티나의 경제를 오히려 악화시켰기 때문에 재평가받는 측면도 있다.[5] 아르헨티나는 현재도 전체 인구의 95%가 백인계인 나라이다. 즉, 아르헨티나에서 메스티소나 원주민들은 사회•경제적인 지위 뿐만 아니라 수적으로도 철저한 약자인 것이다. 유전적인 검사 자료에 의하면 유전적인 형태의 메스티소 인구가 상당수 존재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유럽계 백인과의 통혼으로 외형적으로 더욱 백인에 가까운 형태가 된 데다가 원주민을 탄압하면서 원주민의 피를 지닌 메스티소들도 백인의 정체성을 지니게 된 것이다.[6] 볼리비아와 국경을 접한 후후이 주와 살타 주 등 아르헨티나 북부 지역에서는 아메리카 원주민과 메스티소가 더러 보이기는 한다.[7] 다른 남미의 백인계 국가였던 칠레가 백인과 원주민 간 혼혈인인 메스티소를 홀대하지 않았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래서인지 멕시코나 과테말라처럼 혼혈인 메스티소도 적지 않은 편이다. 다만 칠레 역시 남부 개척 과정에서 칠레로의 복속을 거부하던 마푸체족 및 알라카루페족 같은 남미 원주민들을 잔인하게 학살한 흑역사가 있었다.[8] 페론 시대 그의 최대이자 일관된 지지층은 노동조합 세력이었다. 이후 에바 페론 등이 지지한 여성 참정권 부여를 통해 여성 지지층도 확보하게 된다.[9] 아르헨티나의 고질적인 문제점인 디폴트와 모라토리엄도 사실상 아람부루 정권때 시작되었다. 후안 페론 정권의 잔재를 청산한다고 경제정책을 변경했으나 되려 경상수지 적자가 급속히 커지게 되었고, 이를 외채 돌려막기로 일관하면서 망해버린 것이다. 물가가 급속히 상승한 것은 덤이었다.(...)[10] 그 덕분에 1963년 대선에서 기권표의 비율은 20%에 근접할 수준이었다.[11] 페론주의의 이상은 추구하지만 시대의 흐름과 변화에 순응해 내수 시장뿐만 아니라 수출 시장 확보와 해외 투자 유치에도 전력하는 등의 모습으로 21세기형 신페론주의라 평가받기도 한다.[12] 정확하게 말해서 후안 페론은 1946년부터 1955년까지, 1973년부터 1974년까지 통치했고, 그 사이에는 정권을 잃고 해외 망명중이었다.[13] 더욱 악질적인 것은 그러한 기업들을 매각하여 획득한 외화가 호르헤 비델라의 개인 비자금으로 쓰였다는 것이다.[14] 이 시기에는 이탈리아, 스페인, 동유럽 국가들을 중심으로 높은 임금을 바라보며 아르헨티나로 이민 온 사람들이 많았다.[15] 이 부작용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며 아르헨티나의 역대 대통령들은 다 이 부작용에 시달리고 있다.[16] 반대로 군사정권인 호르헤 비델라의 치세때는 그렇게 줄여놓은 외채가 폭증하여 단 5년 만에 GDP당 외채 비율이 3배나 늘었다.[17] 제조업 등 제2차 산업 기반이 존재하는 브라질과는 다른 양상이다.[18] 참고로 아르헨티나에서는 15세가 미성년자 의제강간의 상한선이다.[19] 다만 그 무솔리니도 파시즘의 창시자로 평가받으면서도 막상 국내 정치에선 동시대 다른 파시스트들에 비해 매우 온건하긴 했다.[20] Lewis, P. H. (1980). 《Was Perón a Fascist? An Inquiry into the Nature of Fascism. The Journal of Politics》, 42(1), 242–256. doi:10.2307/2130025[21] 다만 여긴 전통적 관점에서 봐도 현대적 관점에서 봐도 이념적으로 페론주의와 딱 들어맞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