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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톨로메 미트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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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공화국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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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dd,#000><colcolor=#000,#ddd> 바르톨로메 미트레 마르티네즈
Bartolomé Mitre Martínez
파일:Bartolomé_Mitre_01.jpg
출생 1821년 6월 26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망 1906년 1월 19일 (향년 84세)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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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델피나 베디아
정당 콜로라도
단일당
자유당
국민당
시민연합
국가 시민연합
1. 개요2. 생애

1. 개요

아르헨티나의 전 정치인, 대통령이자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오래된 신문 중 하나인 라 나시온의 창립자이기도 하다.

2. 생애

바르톨로메 미트레는 1821년 6월 26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나 산니콜라스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아버지 암브로시오 미트레는 베네치아 출신 그리스계 가문 후손으로, 가족은 어린 미트레와 함께 카르멘 데 파타고네스로 이주했고 아버지는 요새의 회계관으로 근무했다. 1829년 그는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의 형 헤르바시오 로사스의 농장에서 지냈으나 독서에만 몰두하자 “이 아이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며 집으로 돌려보냈다. 1831년 가족과 함께 몬테비데오로 이주한 그는 1836년 몬테비데오 군사학교에 입학해 포병을 전공하고 1839년 소위로 진급했으며, 《엘 이니시아도르》 등 여러 신문에 시와 글을 발표하며 언론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프룩투오소 리베라가 이끄는 콜로라도당에 가입해 1839년 카간차 전투에 참전했고, 이후 카넬로네스로 이주해 아버지가 우루과이 임시정부의 재무총장으로 임명되었다. 1842년 대위로서 아로요 그란데 전투에서 패배하고 몬테비데오 포위전 동안 주세페 가리발디를 만나 깊은 인상을 받았다. 1846년 리베라와의 불화로 몬테비데오를 떠나 볼리비아로 가서 대통령 호세 발리비안의 참모장으로 복무하며 포병을 조직해 공을 세워 ‘공화국의 영웅적 공신’ 칭호를 받았으나 정권이 무너지자 추방되었다. 이후 1847년 다시 볼리비아로 돌아갔으나 1848년 마누엘 이시도로 벨수에게 추방되어 페루로, 다시 칠레로 옮겼다. 칠레에서는 후안 바우티스타 알베르디와 함께 발파라이소의 《엘 코메르시오》 공동 편집을 맡고, 산티아고에서는 도밍고 파우스티노 사르미엔토의 《엘 프로그레소》 편집자로 활동하며 남미 영토의 통합과 외국인의 사상 자유, 민주주의와 사회·경제 개혁을 옹호했다. 이후 신문을 인수해 정치 논쟁에 참여했으나 1851년 대통령 당선자 마누엘 몬트에 반대하는 자유주의 혁명을 지지해 칠레에서 추방되었다.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가 축출된 후 바르톨로메 미트레는 1853년 아르헨티나 헌법 제정 방식을 정한 산니콜라스 협정에 반대하는 부에노스아이레스파의 지도자로 활동했으며, 그 결과 우르키사에게 추방되었지만 곧 돌아와 9월 11일 혁명에 참여해 연방주의에 반대했다. 1852~1853년 연방군의 부에노스아이레스 포위전에서 그는 용감히 방어하다 머리에 중상을 입었고, 부인 델피나가 달아준 장식이 총알을 막아 생명을 건졌다.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의회 의원과 전쟁·내무·외교부 장관을 지냈으며, 1855년 남부 지역 원주민 정벌에 나섰다가 패배해 많은 인명 피해를 냈다. 1856년에는 우르키사 지지 세력을 추격해 산타페 주를 침입하며 연방과의 갈등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1859년 전쟁장관으로서 산타페 주를 침공하며 세페다 전투에서 우르키사의 연방군과 맞섰지만 패배했고, 군을 질서정연하게 철수시킨 뒤 산호세 데 플로레스 협정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가 헌법 개정 조건부로 연방에 재가입하게 되었다. 1860년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로 선출되어 주의 헌법 편입 절차를 마무리하며 대통령 산티아고 데르키에게 압력을 가해 관세권을 일정 기간 유지하는 조건을 얻었고, 1861년 산후안 주에서 발생한 내전으로 갈등이 심화되자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중앙정부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데르키 정부가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표단의 의회 입성을 거부하자 미트레는 새로운 선거를 거부하고 전쟁을 준비했다. 1861년 9월 17일 파본 전투에서 미트레는 우르키사와 다시 맞붙었고, 초기에는 불리했으나 우르키사가 예비대를 투입하지 않고 전장을 떠나면서 결과적으로 미트레가 승리했다. 이후 데르키는 몬테비데오로 도망하고, 미트레의 군대는 로사리오와 산타페를 점령했으며, 연방군 잔당은 카냐다 데 고메스에서 섬멸되었다. 미트레의 세력은 코르도바와 코리엔테스로 확장되었고, 그곳의 자유주의 세력을 지원해 연방주의 정부를 전복시켰다.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전국으로 퍼져 특히 코리엔테스에서 강하게 나타났으며, 그는 자유주의 혁명을 공개적으로 축하했다. 일부 극단적 포르테뇨들은 미트레에게 새로운 단일국가 헌법을 제정하라고 요구했지만, 그는 현실적인 노선을 택해 1853년 헌법을 재가동하고 지방의 연방 정부를 무너뜨려 자신에게 권한을 위임하게 했다. 결국 1861년 12월, 연방 부통령 페데르네라는 대부분의 의원이 떠난 파라나에서 연방정부의 정지 상태를 선언했고, 사실상 미트레가 국가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1862년 10월 12일 바르톨로메 미트레는 만장일치로 대통령에 선출되어 부통령 마르코스 파스와 함께 취임했으며, 그의 정부는 아르헨티나 근대국가의 기틀을 다진 ‘역사적 3대 대통령’ 시대의 첫 번째를 장식했다. 그는 1863년 관세법을 제정해 유럽과의 무역을 장려하고, 1866년 헌법 개정으로 국가가 수입세를 징수할 권한을 되찾았다. 또한 대통령 취임 다음 날 사법조직법을 공포해 1863년 1월 대법원을 설치하고 각 지방에 연방법원을 세웠으며, 부에노스아이레스 상법전을 전국적으로 통일시켰다. 교육정책으로는 자유주의 확산을 목표로 중등교육을 확대해 살타·투쿠만·멘도사·산후안·카타마르카 등에 국립학교를 세우고 부에노스아이레스 국립학교를 국유화했다. 재임 중 영국 자본으로 철도 건설을 추진하여 로사리오-코르도바 간 중앙철도와 부에노스아이레스 북부선·엔세나다항선·남부철도 등이 착공되었으며, 1867년에는 국가 최초의 공영철도인 안디노 철도가 창설되어 내륙과 로사리오를 연결했다. 1863년 리오하의 연방주의 지도자 ‘차초’ 페냐로사가 다시 봉기하자 미트레는 반란 진압을 명령하고 포로 처형까지 허용하는 강경한 ‘경찰전’을 선포했으며, 사르미엔토와 타보아다가 이끄는 정부군이 그를 추격해 같은 해 11월 페냐로사를 살해했다. 이후 리오하와 산루이스의 잔여 연방군도 소탕되었다. 외교적으로는 미국 대사 임명을 지연시켜 사르미엔토가 3년 후에야 사임했고, 스페인과의 조약에서 아르헨티나 태생의 스페인 후손 시민권 문제를 수정했다. 라틴아메리카 국가들과의 연대에는 무관심해 1862년 리마에서 열린 범아메리카 회의 초청을 거부하며 ‘아메리카 독립국들은 하나의 정치적 실체로 존재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칠레·페루와의 외교사절을 파견했지만 실질적 성과는 없었으며, 칠레가 파타고니아 영유권을 주장하자 루이스 피에드라부에나의 남극 탐험과 초입 식민지 건설을 지원해 영유권을 강화했다. 또한 1865년경 웨일스인들이 추부트 지역에 정착하며 아르헨티나 정부의 보호를 요청하면서 해당 지역이 공식적으로 아르헨티나 영토임을 인정받았다.

바르톨로메 미트레는 자유주의 확산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겨 이를 국내뿐 아니라 우루과이와 파라과이에도 강요하려 했다. 1863년 그는 우루과이 내 자유주의 세력인 콜로라도당을 지원하여 브라질과 함께 정부 전복에 개입했고, 이에 반발한 파라과이 대통령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 전쟁을 선포하면서 파라과이 전쟁이 발발했다. 1865년 아르헨티나, 브라질, 우루과이는 ‘삼국동맹’을 체결했고, 미트레는 연합군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군은 준비가 부족했고 징병과 전비 부담으로 내륙 지방의 불만이 폭발해 반란과 탈영이 잇따랐다. 전쟁 중 언론 탄압과 계엄령이 시행되었으며, 콜레라로 수천 명이 사망했다. 전쟁이 장기화되자 내륙에서는 1866년 ‘로스 콜로라도스 혁명’이라 불린 연방주의 반란이 일어났으나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미트레는 1868년 임기를 마치며 중앙집권 반대 봉기와 전쟁으로 47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남겼고, 그의 정당은 전쟁의 불인기로 국민의 지지를 잃었다. 재임 중 화폐 안정과 공공부채 정리, 미터법 도입 등은 성과로 평가되었다. 퇴임 후 1870년 신문 라 나시온을 창간했고 상원의원으로 활동했으며, 이후 외교 사절로 브라질과 파라과이를 방문했다. 1874년 대선 패배 후 부정선거를 주장하며 무장 봉기를 일으켰지만 패배 후 투옥되었다. 1876년 사면된 그는 역사 저술에 몰두해 《벨그라노의 생애》와 《산마르틴과 남미 해방사》를 집필했다. 이후 1880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연방화 협상에 중재자로 참여했고, 말년에는 라 나시온을 경영하며 《신곡》을 번역했다. 그는 온화한 성격과 검은 챔버고 모자,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는 습관으로 유명했으며, 1906년 1월 19일 장염으로 사망해 레콜레타 묘지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