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9월 아르헨티나 대통령 선거 Elecciones presidenciales de Argentina de septiembre de 1973 | |||||||||
지역별 결과 | |||||||||
{{{#!wiki style="margin: -7px -12px" | 1973 3월 대선 | → | 1973 9월 대선 | → | 1983 대선 | }}} | |||
선거 일시 | 1973년 9월 23일 | ||||||||
투표율 | 84.44% ▼0.84%p | ||||||||
선거 결과 | |||||||||
후보 | [[정의당(아르헨티나)| 정의당 ]]후안 페론 | [[급진시민연합| 급진시민연합 ]]리카르도 발빈 | |||||||
결과 | |||||||||
61.86% 7,359,252표 | 24.42% 2,905,719표 | ||||||||
당선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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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당 후안 페론 |
1. 개요
1973년 9월 아르헨티나에서 치러진 대선.2. 배경
1973년 5월 25일 엑토르 호세 캄포라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아르헨티나가 6년 반의 군사통치를 끝내고 민주주의로 복귀했지만, 곧바로 정치적 혼란에 빠졌다. 헥토르 캄포라 대통령은 취임 직후 정치범들에 대한 전면 사면을 선언했다. 또한 로돌포 푸이그로스를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 총장으로, 에스테반 리기를 내무장관으로 임명하는 등 몬토네로스와 연관된 페론주의 좌파 성향 인사들을 내각에 배치하면서 변화를 꾀했다.이들의 페론주의 우파와 군부 중심의 극우세력의 격렬한 반발을 동시에 불러왔다. 특히 페론의 측근인 호세 로페스 레가가 사회복지장관으로 입각한 상황에서 암약하며 상황이 더 복잡해졌다. 로페스 레가는 국가예산의 30%를 통제하며 아르헨티나 반공동맹(Alianza Anticomunista Argentina, Triple A)이라는 준군사조직을 만들어 좌파 세력과 대립하며 타협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결정적 사건은 1973년 6월 20일 페론의 망명 귀국 당시 발생했다는데 에세이사 공항에서 귀국한 후안 페론 전 대통령이 연설할 무대를 두고 좌우파 세력이 충돌하면서 100여 명이 사망하는 대규모 유혈사태가 벌어졌다.(에세이사 학살(Masacre de Ezeiza)) 이 사건 이후 페론은 공개적으로 캄포라의 사임을 시사했고, 로페스 레가는 이 기회를 이용해 부통령과 상원의장까지 사임시켜 헌법적 공백 상황을 만들었다. 결국 하원의장이자 로페스 레가의 사위인 라울 라스티리가 임시 대통령이 되었다.
당초 로페스 레가는 페론 당선 전까지 라스티리를 통해 정통 페론주의 세력이 정권을 완전히 장악해놓길 바랐으나 라스티리는 로페스 레가의 기대와 달리 에스테반 리히 내무장관을 교체하는 정도 외에는 점점 더 위협적으로 변해가는 페론주의 청년단체와 새로 활동을 시작한 인민혁명군(ERP)의 증가하는 위협을 의식해 캄포라의 사회경제적 자유화 정책을 일단 이어가는 길을 택했다.
7월 20일 국무회의를 열어 9월 23일 조기 대선 실시를 공포했으며, 이는 4월부터 보류되어 있던 산티아고 델 에스테로 주지사 선거 2차 투표와 동시에 치러지게 됐다. 이로써, 지난 3월 대선에서 출마자격 조항[1]으로 인해 출마가 좌절되었던 후안 페론 전 대통령의 대선 출마가 다시 가능해졌다.
3. 주요 후보
- 해방정의주의전선(Frente Justicialista de Liberación, FREJULI)
- 대통령 후보 후안 페론 / 부통령 후보 이사벨 페론
- 에세이사 학살을 계기로 폭력 사태가 격화되자 군부와 반(反) 페론 진영조차도 페론만이 극좌 게릴라들을 설득해 무장 투쟁을 멈추게 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다만, 페론의 건강이 고령(77세)으로 이미 좋지 않은 상황이었고, 당선되더라도 임기를 마치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가 널리 퍼져 있었다. 게다가 1973년 칠레와 우루과이가 연이어 군사 쿠데타로 무너져 남미의 민주주의 정권은 아르헨티나 외에는 별로 남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페론 사후 정권 안정을 위한 부통령 카드가 중대 사안이 되었다.
- 문제는 페론주의가 우익적·반공 성향의 정통 페론주의와 좌익·극좌 성향의 혁명 페론주의로 극명하게 갈라져 있었던 것이다. 페론은 처음에는 급진시민연합(UCR)의 리카르도 발빈과 중도 성향의 페론–발빈 연합을 모색했으나 무산되었고, 에바 페론 서거 21주기 행사에서 페론의 대선 출마는 공식화되었으나 부통령은 확정되지 않았다. 결국 독자적인 부통령 후보를 찾아야 했다. 결국 로페스 레가의 권유로 이사벨 페론이 지명되어, 8월 5일 콜론 극장에서 페론–페론(Perón - Perón) 공식 후보 등록이 이뤄졌다.
- 한편 1973년 7월, 페론주의 좌파 성향의 청년 페론주의 조직(JP, 몬토네로스, FAR 등)들이 대규모로 페론 지지를 선언했지만, 이후 이들을 부담스러워한 페론이 직접 소통 약속을 어기고 로페스 레가를 통한 간접적인 소통으로 방식을 바꾸자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 급진시민연합(Unión Cívica Radical, UCR)
- 대통령 후보 리카르도 발빈 / 부통령 후보 페르난도 데 라 루아
- 7월 29일, 전당대회를 열고 발빈이 이끄는 온건-타협적 국민 노선(Línea Nacional)을 추인하고 페론과의 연합을 거부한 뒤 대선 독자 출마를 확정지었다. 이때 후일 대통령이 되는 라울 알폰신이 주도한 진보적·개혁적 갱신운동(Movimiento de Renovación y Cambio)은 반대 세력으로 있었지만 세력이 작아 크게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4. 선거 과정
사실상 어차피 대통령은 후안 페론 구도로 예정된 선거였기 때문에 8월 5일 콜론 극장에서 페론–페론 조합, 즉 페론과 그의 아내 이사벨 페론이 대통령·부통령 후보로 공식 지명되자, 선거전은 이미 승부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부부가 동시에 국가 최고직 후보로 나선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고, 언론과 야당은 사실상 이를 배우자로 후계자 지명한 행태라고 강하게 비판했지만, 페론의 압도적인 카리스마와 권위 앞에서 다른 세력은 힘을 쓰지 못했다.야당 역시 반격의 동력을 찾지 못했다. 급진시민연합(UCR)의 발빈–데 라 루아 조합은 내부적으로 국민노선과 갱신운동 간 갈등이 깊었고, 페론과의 연정 시도마저 무산되면서 존재감이 크게 약화됐다. 그외 프란시스코 만리케가 이끄는 연방인민동맹(Alianza Popular Federalista, APF)은 3월 선거에서 나름대로 성과를 거뒀던바 있지만 이번에는 페론 복귀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는 대안 세력으로 자리 잡지 못했다. 결국 야당의 선거운동은 패배를 최소화하려는 수준에 머물렀다.
이 대선에서 도드라진 것은 오히려 페론주의 내부 갈등이었다. 청년 페론주의 조직과 무장단체들은 페론과의 직접 소통을 요구하며 대규모 집회를 조직했으나, 호세 로페스 레가가 중재자로 나서면서 갈등이 격화되었다. 로페스 레가는 페론과 대중 사이에 자신을 끼워 넣으며 청년 세력을 견제했지만, 이는 강한 반발을 불러왔다. 겉으로는 봉합된 듯했지만, 이미 이 시점에 페론주의 진영의 균열이 드러난 셈이었다. 이러한 갈등은 곧 정권 출범 직후의 분열과 몬토네로스를 비롯한 혁명 페론주의를 포함한 페론주의 좌파를 향한 배제와 탄압, 나아가 1970년대 중반 정치 불안으로 이어지게 된다.
결국 실제 투표일을 앞두고는 정책 논쟁보다 폭력 사태 방지와 질서 유지가 더 큰 과제가 되었고, 베니토 얀비 내무장관이 모든 세력은 이제 투표를 통해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그러니 투표 외 다른 폭력적인 방식을 고려하지 말아라.).고 공개적으로 경고할 정도였다.
5. 개표 결과
1973년 9월 아르헨티나 대통령 선거 1차 투표 (1973. 9. 23.) | ||||||
순위 | 후보명 | 정당(정당연합) | 성향 | 득표수 | 득표율 | 당선 여부 |
1위 | 후안 페론 | 정의당 (해방정의주의전선) | 페론주의 우파 | 7,359,252 | 61.86% | 당선 |
2위 | 리카르도 발빈 | 급진시민연합 (인민급진시민연합) | 급진적 자유주의 | 2,905,719 | 24.42% | 낙선 |
3위 | 프란시스코 만리케 | 연방당 (연방인민동맹) | 보수주의 | 1,450,996 | 12.20% | 낙선 |
4위 | 후안 카를로스 코랄 | 노동자사회당 (없음) | 트로츠키주의 | 181,474 | 1.53% | 낙선 |
<rowcolor=#000> 선거인수 | 14,276,977명 | 투표수 | 12,055,092표 | - | ||
<rowcolor=#000> 무효표수 (백지표 + 무효표) | 157,651표 | 투표율 | 84.44% | - |
후안 페론이 61.86%의 득표율로 1차 투표에서 압승을 거두며 당선을 확정지었다. 2위에 그친 발빈은 개표가 90% 진행되었을 때 패배를 인정했고, 만리케도 최종 개표가 끝난 뒤 패배를 시인했다.
페론은 24개주 가운데 23개주에서 50% 넘게 득표했으며, 부에노스아이레스(수도 연방구)에서는 과반엔 실패했지만(49.33%) 1위를 차지했다. 3위인 만리케는 멘도사, 후후이, 산타페에서 각각 발빈을 제치고 2위를 기록했다. 한편, 코랄은 카타마르카, 후후이, 라리오하, 산타크루스 4개 주에서는 단 한 표도 얻지 못했으며, 티에라델푸에고에서는 아예 PST 후보용 투표용지가 배부되지 않아 투표가 불가능했다.
이 결과로 페론은 그간 1위와 2위 후보 간 격차 기록을 갈아치웠는데, 발빈을 무려 37.43%p 차이로 앞서며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은 대기록을 세웠다. 또한 한 인물이 세 번째 대통령으로 선출된 것은 이번이 유일한 사례였다. 페론은 10월 12일 세 번째이자 마지막 임기에 취임 선서를 했다.
[1] 군부가 1972년 8월 25일까지 아르헨티나에 거주해야 한다는 조항을 삽입했다. 당시 망명중이었던 페론은 이 조항 때문에 3월 대선에 출마하지 못했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