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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0-02 15:40:38

정의당(아르헨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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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미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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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신인 '모두의 전선' 시절 단일 명부로 선거에 참여, 현재 원내에서 단일 교섭단체로 활동.
2. FORJA : 'Fuerza de Orientación Radical de la Joven Argentina(젊은 아르헨티나의 급진적 지향의 힘).
3. ARI : 'Afirmación para una República Igualitaria(평등 공화국을 위한 선언).
4. UNIR : 'Unión para la Integración y el Resurgimiento(통합과 부흥 연합).
5. 페론주의 우파 이념으로 카를로스 메넴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하는 메넴주의에서 유래.
6. '전진 자유'는 우파 성향의 3~4개 정당이 모인 연합이나, 유일한 의원인 호세 루이스 에스페르트는 공식적으로 무소속.
7. 2023년 2월 22일 집권 정의당이 주도하는 '조국을 위한 연합'에서 갈라져 나온 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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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의사회주의당 로고.png
Partido Justicialista
심볼 파일:정의사회주의당 심볼.png
약칭 PJ
한국어 명칭 정의주의당
페론(주의)당
상징색
하늘색

하얀색
창당일 1946년 11월 21일
이념 페론주의
포퓰리즘
지도주의
아르헨티나 내셔널리즘
내부계파:
키르치네르주의[1]
메넴주의
정통 페론주의
혁명 페론주의
스펙트럼 빅 텐트
중도좌파 ~ 좌익 (키르치네르주의)
중도우파 ~ 우익 (메넴주의)
극우 (정통 페론주의)
좌익 ~ 극좌 (혁명 페론주의)
주소 130 Matheu Street
부에노스아이레스
당대표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
청년 조직 페론주의자 청년
소속 정당연합 해방정의주의전선 (1973~1976)
민중단결정의주의전선 (1989~1995)
변화를 위한 정의주의협의체 (1999)
승리를 위한 전선 (2003~2019)
시민연합 (2017~2019)
실현정의주의전선 (2017~2019)
모두의 전선 (2019~2023)
조국을 위한 연합 (2023~현재)
당원 수 3,204,329명 (2022년 기준)
상원 의석 수
36석 / 72석
하원 의석 수
91석 / 257석
당가 페론주의 행진곡
웹사이트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2. 명칭3. 역사
3.1. 페론의 시대 (1945년~1989년)3.2. 메넴과 우경화 (1989년~2003년)3.3. 키르치네르 부부 시대 (2003년~2015년)3.4. 재집권과 실패 (2015년~2023년)3.5. 밀레이 정권의 제1야당 (2023년~현재)
4. 이념과 성향5. 정당연합6. 기타

1. 개요

아르헨티나의 대표적인 페론주의 성향의 빅 텐트 정당으로, 아르헨티나 정치를 양분하는 두 거대 세력 가운데 한 축을 이루며 페론주의 정당연합을 이끌고 있다.

정세 변화에 따라 정당연합의 이름을 바꾸어 왔는데, 2003년부터 2017년까지는 승리를 위한 전선(FPV), 2017년부터 2019년까지는 시민단결(CU), 2019년부터 2023년까지는 모두의 전선(FdT)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으며, 현재는 조국을 위한 연합(UP)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2. 명칭

현지 공용어인 스페인어로 당명은 Partido Justicialista[2]이며, 영어로는 Justicialist Party[3]라고 번역된다. 이를 직역하면 Justicialismo[4]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가 된다.

여기서 Justicialista(=Justicialist)라는 말은 원래 스페인어에도 영어에도 존재하지 않는 단어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합성어다. 이 표현을 만든 사람은 다름 아닌 후안 페론 전 대통령으로, 페론 자신은 본인의의 이름을 딴 페론주의라는 용어 대신, 새로운 이념을 강조하기 위해 Justicialismo라는 신조어를 더 자주 사용했다.

Justicialismo는 정의(justicia[5])와 ~주의(ismo[6])를 결합한 말로, 직역하면 정의주의에 해당한다. 따라서 당명을 정확히 옮기면 정의주의자당이 된다. 다만 이 개념과 용어 자체가 국제적으로 널리 통용되지 않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단순히 정의당으로 번역하거나, justicialismo가 사실상 페론주의와 동의어임을 감안해 페론당으로 부르기도 한다.

3. 역사

3.1. 페론의 시대 (1945년~1989년)

1945년, 권력 기반을 다지기 위해 노동당을 창당한 후안 페론 대통령은 당내 갈등으로 창당 2년만인 1947년에 이를 해산하고, 자신의 사당(私黨) 성격을 띤 정의당을 새로 창당했다. 페론의 높은 인기 덕분에 창당 직후 곧바로 집권 여당이 되었으며, 이후 집권기에 압도적인 우위 정당 체제를 구축하면서 페론주의의 기틀을 다지는 다양한 경제·사회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페론의 정치 행보는 좌우를 넘나드는 포퓰리즘적 성향을 드러내면서 노동자 권익 확대와 사회복지 제도 정착 같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언론 탄압과 나치 전범 수용 등 일관성 없는 정책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 참정권 도입, 노동자 사회권 강화 등 개혁으로 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얻었으나, 국민적 인기를 누리던 영부인 에바 페론의 사망과 이혼 합법화 정책 강행으로 가톨릭 교회의 지지를 잃으며 정치적 기반이 약화되었다. 결국 1955년 군사 쿠데타로 정권이 무너지고 당은 불법화되었다. 이후 민중을 중심으로 합법화 여론이 형성되면서 다시 제도권에 복귀했으나, 1966년 또다시 쿠데타가 발생하며 불법 정당으로 전락했다.

이 시기 군사독재정권에 대항하는 게릴라 투쟁이 격화되자 정의당은 정권 측과 협상을 시도했고, 1973년에 합의안을 통해 합법 지위를 회복했다. 그 해 페론의 측근인 엑토르 호세 캄포라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페론을 복귀시키기 위해 부통령과 함께 곧바로 사임했다. 망명 중이던 페론은 귀국 후 대선에서 압승하며 10여 년 만에 정권에 복귀했다. 그러나 취임 10개월 만에 사망했고, 부통령이던 세 번째 아내 이사벨 페론이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이사벨은 석유 파동으로 인한 경기 침체와 당내 분열을 수습하지 못하고 우유부단한 대응으로 혼란을 키웠으며, 결국 1976년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가 주도한 또 한번의 군사 쿠데타로 정권이 붕괴했다.

비델라 군사정권의 집권은 곧 더러운 전쟁으로 이어져 수많은 민중과 당원이 희생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정의당은 반군부 민주화 운동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군사정권은 포클랜드 전쟁 패배 이후 큰 타격을 입고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면서 당은 다시 합법화되었고, 민주화된 아르헨티나에서 급진시민연합과 양대 정당 체제를 형성했다. 다만 1983년 대선에서는 급진시민연합의 라울 알폰신 후보가 승리하면서 야당으로 밀려났다.

하지만 알폰신 정부가 경제 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자 정권심판론을 앞세워 1987년 중간선거에서 승리했다. 이어 알폰신 대통령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조기 사퇴하면서 1989년 대선이 앞당겨졌고, 시리아 아랍계 인사인 카를로스 메넴을 후보로 내세워 승리하며 여당으로 복귀했다.

3.2. 메넴과 우경화 (1989년~2003년)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은 선거 유세에서 산업 국유화와 임금 인상으로 경제를 살리겠다고 약속하며 좌파적 색채를 드러냈다. 그러나 집권 후에는 신자유주의 노선을 채택해 자국 화폐 페소화를 미국 달러에 고정하는 페그제를 도입하고, 대대적인 민영화 정책을 추진하며 당을 우경화시켰다. 이 과정에서 당내 좌파의 반발이 있었으나, 만성적인 인플레이션이 진정세로 돌아서고 중산층의 구매력이 회복되면서 경제가 안정세를 보였다. 그 결과 메넴은 국민의 높은 지지를 등에 업고 1995년 대선에서 압승을 거두며 재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2기 정부에 들어서면서 신자유주의 정책의 부작용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실업률이 급등했고,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의 여파가 아르헨티나를 강타하면서 경제난이 심화되었다. 여기에 정권을 둘러싼 부패 스캔들까지 불거지자 지지율은 급격히 하락했다. 결국 1999년 대선에서 정의당은 에두아르도 두알데를 후보로 내세웠지만, 급진시민연합페르난도 데 라 루아에게 패하며 정권을 내주고 야당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경제 위기는 좀처럼 해결되지 않았다. 데 라 루아 정부는 악화된 경제를 수습하기 위해 2000년 12월 397억 달러 규모의 구제 금융을 요청했으나, 2001년 말 결국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선언하고 대통령직에서 사퇴했다. 부통령까지 함께 사퇴하면서 정국은 혼란에 빠졌고, 의회는 라몬 푸에르타 상원의장, 아돌포 로드리게스 사아 산루이즈 주지사, 에두아르도 카마노 하원의장을 차례로 임시 대통령에 지명했지만, 세 사람 모두 열흘도 채우지 못하고 물러났다. 결국 양원 합동회의에서 에두아르도 두알데가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데 라 루아의 잔여 임기를 채우게 되었다.

이 시기 임시 대통령 4명 모두 정의당 소속이었기 때문에 당은 비공식적으로 집권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급진시민연합의 치명적인 실패 덕분에 얻은 일시적 기회였을 뿐, 당 지지율 자체는 여전히 기존과 달리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경제 위기와 정치적 불안정이 이어지는 가운데 여러 정치인들이 독자적으로 대선 출마를 선언했고, 이때부터 정당 내부가 여러 정파로 분열되며 이후 선거 때마다 새로운 인물 중심의 정파 연합을 결성하는 관행이 굳어지게 되었다.

3.3. 키르치네르 부부 시대 (2003년~2015년)

2003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내에서 카를로스 메넴 전 대통령, 네스토르 카를로스 키르치네르 산타크루즈 주지사, 아돌포 로드리게스 사아 전 임시 대통령 3명의 후보가 독자 출마를 선언했다. 이 셋은 실제로 각각 다른 선거연합을 꾸려 대선에 출마하였다. 메넴은 '충성을 위한 전선'이라는 선거연합에 더해 중도우파 보수정당인 민주중도연합의 지지를 받아 출마했고, 키르치네르는 '승리를 위한 전선'이라는 선거연합의 후보로 출마하였으며, 사아는 '인민운동전선' 선거연합에 더해 연합자유당의 지지를 받아 출마했다. 공식적인 분당은 아니었지만, 이로 인해 세 개의 정파로 당이 갈라지게 되었다.

세 후보를 포함해 총 5명의 후보가 맞붙은 1차 투표에서 놀랍게도 집권 시절 경제 위기를 극복하지 못해 낮은 지지율 속에 퇴임했던 카를로스 메넴 전 대통령이 24.45%를 득표하여 1위를 차지하는 이변을 연출하였다. 2위는 22.25%를 득표한 네스토르 카를로스 키르치네르였다. 이에 같은 당 소속인 메넴과 키르치네르 두 사람이 나란히 결선투표에 진출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그러나 결선투표는 진행되지도 않고 당선자가 결정되며 선거는 종료되었다. 에두아르도 두알데 전 임시 대통령의 강력한 지지를 받은 키르치네르가 여론조사에서 상승세를 타기 시작하더니 지지율 70%를 넘어섰고, 이에 결선투표 경쟁자인 메넴이 중도 사퇴해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단독으로 남은 키르치네르가 2차 투표 실시 없이 자동으로 당선되었다. 다만 메넴과의 대결에서 약 70%를 득표하여 얻은 당선이 아닌, 고작 22.25%만으로 싱겁게 얻어버린 당선이라는 점은 그의 콤플렉스가 되었다.

2003년 3월 대통령으로 취임한 네스토르 키르치네르는 망가질 대로 망가져 어디서부터 손봐야 할지 모를 정도라는 혹평을 들어온 아르헨티나 경제를 단 4년 만에 깔끔하게 되살리는 놀라운 성과를 달성하였다. 전임 정부들의 페소화 평가절하 조치에 따른 효과가 재임기에 나타나기 시작했고, 외채를 조정하는 한편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신흥 공업국들을 상대로 수출 붐을 일으켜 경제난을 해소하는데 성공한 것. 그가 집권하는 동안 아르헨티나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두 배 가까이 급증했고, 4년간의 경제성장률은 평균 8%로 고성장 시대를 맞이했다.

다만 복지 지출 지속 확대를 중심으로 하는 좌파 포퓰리즘 성향은 여전히 두드러졌으며, 메넴 정부 시기에 도입했던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비판하며 사회민주주의 이념을 페론주의와 결합하였다. 또 성소수자 인권 증진과 낙태 허용 등 진보적인 사회 정책을 거침없이 추진했다. 세부적으로 들여다보면 자잘한 흠결도 더러 있었지만 어쨌든 망해가던 경제를 되살려낸 것만으로도 키르치네르 대통령은 국민의 열성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재임 중 치러진 총선에서도 압승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이로 인해 당내에선 메넴 정권의 신자유주의 기조를 옹호하는 중도우파 메넴주의 세력이 힘을 잃고, 점차 진보 좌파 성향이 짙은 이른바 키르치네르주의가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당내 좌파인 이들 키르치네르주의자들은 현재도 당의 주류 세력이다.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대통령은 경제 위기를 극복한 실력파 정치인이라는 호평을 받고, 재임 내내 과반의 국정지지율을 기록하였다. 그는 재선 불출마를 선언한 뒤 국민의 환송을 받으며 2007년 퇴임했다. 대신 2007년 대통령 선거에는 그의 아내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가 후보로 지명받아 출마하였는데, 남편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가 높았기에 정책 계승을 내건 그녀는 45.28%를 득표하여 무난히 당선되었다. 이 당선으로 키르치네르 부부는 역사상 최초의 '민주적 선거로 탄생한 부부 대통령'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는 전임자인 남편에 비해 국정 운영 면에서 여러 허점을 노출하였고, 2008~2009년 글로벌 금융 위기의 여파로 경기 침체가 불어닥치면서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하며 정치적 위기를 맞는 듯했다. 다행히 경제가 2010년 들어 되살아나기 시작하면서 경제성장률이 고공행진을 기록했는데, 이 와중에 정치적 후견인이었던 남편 네스토르가 심장병으로 사망하는 아픔을 겪었다. 경기 회복과 남편에 대한 전국적 추모 분위기 속에 크리스티나는 2011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 1차 투표에서 54.11%라는 과반 득표로 결선 없이 당선을 확정지으며 재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집권 2기에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정부는 1기 초반의 경제 위기보다 더한 경기 침체를 겪었다. 남편의 정책 기조를 계승하면서 페론주의 좌파 성향에 해당하는 정책들을 쏟아냈으나 지나친 포퓰리즘과 언론 통제로 여러 번 구설수에 올랐으며, 독재를 꿈꾸며 권위주의 행보를 보이려 한다는 지적도 받았다. 경제난 속에 2014년 결국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선언한 뒤 상황은 악화일로를 걸었다. 국제 원자재 가격이 하락하며 수출업계에 불황이 닥치면서 경제성장률은 0%대로 추락했고, 인플레이션이 점점 심해지면서 고물가에 서민 경제가 신음하기 시작했다. 지지율은 다시 급락했고 레임덕에 빠졌다. 그럼에도 남편 네스토르에 대한 국민의 향수가 여전한데다 아르헨티나 정치권에서 키르치네르주의를 필두로 한 페론주의 진영의 영향력이 무시 못할 수준으로 광범위해진 상황이라 차기 선거에서 정권 재창출을 할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시절부터 그를 중심으로 하는 좌익 정파 '승리를 위한 전선'이 당내 우익 정파와 마찰을 빚으며 제대로 결집하지 못했고, 페론주의 우파 인사인 세르히오 마사 전 경제부 장관과의 관계 회복에도 실패하는 등 분열과 갈등을 수습하지 못한 채로 대선에 임하게 됐다. 2015년 대통령 선거에서 다니엘 시올리를 후보로 내세웠으나, 페론주의를 비판해온 중도우파 공화주의제안당마우리시오 마크리 후보가 당선되어 정권 교체를 달성하면서 2001년 이래로 15년 가까이 유지해온 집권당 지위를 내려놓았다.

3.4. 재집권과 실패 (2015년~2023년)

2003년 대선을 앞두고 정의주의당에서는 카를로스 메넴 전 대통령,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산타크루스 주지사, 아돌포 로드리게스 사아 전 임시 대통령이 각각 다른 선거연합을 꾸려 독자 출마를 선언했다. 메넴은 충성을 위한 전선과 민주중도연합의 지지를, 키르치네르는 승리를 위한 전선을, 사아는 인민운동전선과 연합자유당의 지지를 받았다. 공식적인 분당이 이루어진건 아니었지만 당은 사실상 세 개의 정파로 갈라져 대선이 정의당 내전이 된 셈이다.

1차 투표에서는 의외로 메넴이 24.45%로 1위를 차지했고, 키르치네르가 22.25%로 2위를 기록했다. 두 사람이 같은 당 소속으로 결선에 오르는 진풍경이 벌어졌으나, 여론조사에서 키르치네르가 70%가 넘는 지지를 얻자 메넴이 사퇴했다. 결국 키르치네르는 2차 투표 없이 22.25% 득표만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는데, 이는 훗날까지 키르치네르 대통령의 정치적 콤플렉스로 남았다.

2003년 5월 취임한 네스토르 키르치네르는 파탄 직전이던 경제를 불과 4년 만에 되살렸다. 외채 조정과 환율 정책의 효과가 나타났고, 중국을 비롯한 신흥 공업국으로의 수출이 급증하면서 경제난을 해소했다. 그의 재임기 동안 1인당 GDP는 거의 두 배로 뛰었고, 평균 8%에 달하는 고성장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복지 지출 확대, 성소수자 권리 증진, 낙태 합법화 등 진보적 사회정책도 추진했다. 성공적인 경제 회복과 진보적 개혁으로 네스토르는 국민적 지지를 얻었고, 집권 여당은 총선에서도 압승했다. 당내에서는 메넴 세력이 몰락하고 진보 좌파 성향의 키르치네르주의가 아르헨티나 정계의 주류로 부상했다.

네스토르는 재선을 포기하고 2007년 퇴임했으며, 그해 대선에서는 부인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가 후보로 나서 45.28%를 득표해 당선되었다. 이로써 키르치네르 부부는 세계 최초로 민주적 선거로 선출된 부부 대통령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초기에는 기대와 달리 남편만큼 안정적 국정 운영을 보여주지 못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지지율은 20%대로 추락했지만, 2010년부터 경제가 회복세를 보이면서 반등했다. 같은 해 남편 네스토르가 심장병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으나, 전국적인 추모 분위기 속에서 크리스티나는 그 훈풍을 타고 2011년 대선에서 54.11%라는 과반 득표로 재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2기 집권기에는 경제난이 다시 심각해졌다. 그와중에 포퓰리즘적 정책과 언론 통제로 권위주의 비판을 받았고, 2014년에는 디폴트를 선언하면서 국가 신용이 추락했다. 국제 원자재 가격 하락으로 수출업계가 타격을 입으면서 성장률은 0%대로 떨어졌고, 인플레이션이 심화되며 민생은 어려워졌다. 지지율은 급락했고 레임덕이 가속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에 대한 국민적 향수와 당내 키르치네르주의의 영향력 덕분에 정권 재창출 가능성은 남아 있었다. 하지만 당내 분열이 심각했다. 키르치네르주의 세력과 우파 성향 인사들이 갈등을 빚었고, 세르히오 마사 전 경제장관과의 관계 회복에도 실패했다. 결국 2015년 대선에서 다니엘 시올리를 후보로 내세웠으나, 공화주의제안당마우리시오 마크리가 당선되면서 거진 15년 가까이 이어온 집권이 막을 내렸다.

마크리 대통령은 키르치네르주의의 부작용을 극복하고 아르헨티나 경제의 고질병인 과도한 정부 지출·초인플레이션·페소화 가치 하락을 해결하겠다며 집권했으나, 실제 4년간의 성적표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전기·가스 요금 등 공공요금을 급격히 인상해 물가 상승을 자극했고, 미국의 금리 인상에도 불구하고 자국 금리를 내리면서 자본 유출을 심화시켰다. 연금 개혁과 노동시장 규제 완화도 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결국 지지율이 추락하자 재정 긴축 노선을 포기하고 확장 재정으로 선회했지만, 이미 초인플레이션과 환율 불안이 심화된 상황에서는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했다.

야당으로 있던 정의당을 비롯한 페론주의 세력은 이러한 실정을 맹렬히 비판하며 정비에 나섰다. 기존 승리를 위한 전선을 개편해 모두의 전선을 결성했고, 2019년 대선에서 알베르토 페르난데스를 후보로 내세워 재선에 도전한 마크리를 꺾고 결선 투표 없이 1차 투표만에 꺾고 정권을 되찾았다. 이 선거에서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 전 대통령은 부통령 후보로 함께 출마해 당선되며 다시 권력의 핵심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페르난데스 정부 역시 경제를 살리겠다는 약속과 달리 더 깊은 위기에 빠졌다. 인플레이션은 해마다 100%를 넘어서는 초인플레이션이 일상이 되었고, 중앙은행은 물가를 잡겠다며 금리를 100% 안팎으로 끌어올리는 극단적 조치를 반복했다. 페소화 가치는 사실상 붕괴되어 달러가 사실상의 거래 기준이 되었다. 정의당이 이끄는 정부가 이 난국을 돌파할 역량이 없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국정 지지도는 바닥을 쳤고, 결국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재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부통령 크리스티나의 출마 가능성도 거론되었으나 현실화되지 않았다.

대선을 앞둔 2023년, 기존 모두의 전선(Frente de Todos)을 조국을 위한 연합(UP)으로 재편하고, 후보로 비정의당 출신의 세르히오 마사 경제장관을 선출했다. 그러나 8월 13일 치러진 개방형 국민경선(PASO)에서는 자유전진(PL), 변화를 위해 함께(JxC) 등 주요 경쟁 정당연합에 밀려 3위에 그치며 어려운 선거가 예상되었다. 그럼에도 10월 22일 1차 투표에서 마사가 36.69%를 득표하며 1위를 차지해 페론주의 지지층의 저력을 입증했다.

하지만 그 한계는 뚜렷햇고, 변화를 위해 함께(JxC)가 결선에 진출한 하비에르 밀레이를 지지하기로 하면서 11월 19일 결선투표에서는 마사가 44.3%에 그쳐 55.7%를 얻은 밀레이에게 패배했다. 이에 따라 12월 10일 밀레이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정의당은 다시 야당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3.5. 밀레이 정권의 제1야당 (2023년~현재)

정권 상실 이후에도 의회 내 의석을 기반으로 여전히 최대 야당의 지위를 유지하며 신정부의 개혁 드라이브를 견제하는 데 주력했다. 밀레이 정부가 출범 직후 내놓은 경제 재건 기본 법안과 이른바 옴니버스 법(Ley ómnibus)에 대해 공공요금 인상, 보조금 축소, 노동 규제 완화 등의 조치가 서민 생활을 악화시킨다고 비판하며 강하게 반대했다. 특히 상원에서는 정의당 소속 의원들의 반대로 정부의 주요 법안이 좌절되거나 대폭 수정되는 경우가 발생해, 입법 과정에서 실질적인 제동을 걸고 있다.[7]

또한 같은 해인 2023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 선거에서 악셀 키실로프가 재선에 성공하면서 당의 전국적 조직력이 여전히 건재함을 보여주었다. 그외 전국 각지의 지방선거에서도 정의당 혹은 연합 소속 후보들이 승리하거나 선전하며, 중앙 권력에서는 밀렸지만 풀뿌리 지지층은 여전히 강력하다는 점을 입증했다.

한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의 복귀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2024년 12월 11일, 크리스티나가 당수직을 다시 맡으면서 분열된 당내 계파를 수습하고 야권 재편의 상징으로 나섰다.# 하지만 2025년 6월, 아르헨티나 대법원은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 대표가 집권 시절 주도한 도로 공사 비리 사건에 대해 징역 6년형과 공직 영구 박탈을 선고한 하급심 판결을 최종 확정했다.#

이 판결로 인해 키르치네르는 향후 선출직이나 임명직 등 어떤 공직에도 나설 수 없게 되었고, 실형 또한 면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다만 고령과 건강 문제를 이유로 감옥 수감이 아니라 가택연금 조치가 일부 허용되었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판결 직후, 지지자들은 이를 정치적 탄압이라 규정하며 거리로 나서 시위를 벌였고, 일부 노동조합과 사회단체가 합류하면서 도로 봉쇄 등 항의 행동이 확산되었다.#

2025년 9월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의회 선거에서 정의당이 이끄는 조국을 위한 연합(UP)이 압승을 거두며 악셀 키실로프가 정의당 내 새로운 대권 후보로 부상하고 있다. 선거 전략을 주도하며, 키르치네르주의의 전통적 요소 외에 새로운 전략과 이미지를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감지되었다는 분석이다.#

4. 이념과 성향

페론주의포퓰리즘을 바탕으로 좌우를 말 그대로 모두 포괄하는 빅 텐트 정당이다. 페론주의로 대동단결 다만 현재는 좌파 정당에 가깝긴 하다. 후술되어 있지만 2003년 이후 신페론주의라고 불리기도 하는 키르치네르주의자들이 당 주류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당의 이념과 성향, 노선은 하나로 규정하기 매우 어렵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당의 중심 가치인 페론주의를 창시한 후안 페론부터가 좌우를 오락가락하는 정치적 행보와 결단을 반복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그의 정치적 후계자들이 좌우 어느 쪽에 해당하는 정책을 추진해도 "이건 페론 각하의 이러저러한 신념과 정책을 계승하는 것이다!", "페론도 생전에 이러저러한 정책을 한 적이 있다!"라고 합리화하기에 아주 좋은 빌미를 제공해버렸다.[8]

이러다보니 페론주의를 큰 틀에서 동의하기만 하면 당원이 되다보니 여러 이념을 가진 인물들이 뒤섞여있는게 현실인데, 21세기 들어 네스토르와 크리스티나 키르치네르 대통령 부부의 12년 집권 동안 대두된 키르치네르주의는 중도좌파 성향이며, 그 이전에 집권한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의 집권기에 대두된 메넴주의는 중도우파 신자유주의 성향을 띤다. 게다가 지금은 철저한 비주류가 되었지만 후안 페론이 살아있을 시기 초창기 형태의 정통 페론주의 세력은 파시즘에 비유될 정도의 우익~극우 성향을 띄었다. 1970년대 군부를 몰아내고 페론이 재집권하던 시기에 몬토네로스와 같은 극좌 성향의 혁명 페론주의 세력과, 호세 로페스 레가와 같이 반공주의 성향을 띄는 극우주의자도 페론주의자임을 표방했다. 한편 한 마디로 페론주의라는 말만 갖다붙여놓고 실질 내용은 극좌에서 극우까지 모두 아우르고 있는 것이다.

페론 시절에는 페론주의 문서에도 있지만 페론 스스로가 복지 제도에 우호적이거나 세속주의, 원주민 배려 등 좌파적인 정책도 제법 도입했지만 정작 공산당은 탄압하고 일부 나치 망명자들을 받아들이는 이중적인 면모도 보였다.[9] 허나 스페인 내전 시절 좌파 망명객들이나 나치에 탄압받던 유대인, 집시들도 잘 받아들였으며,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의 우파 군사정권 시절엔 되레 이쪽이 탄압받은 역사도 있기 때문에 우파 정당이라고 보기도 뭐하다.

때문에 일종의 빅 텐트 정당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특히 1997년부터 2003년까지 이어진 아르헨티나 경제위기 속에서 페론당은 여러 개의 정당으로 분당되었고[10], 이후 좌파 성향의 페론당 당원과 우파 성향의 당원이 따로 당을 차렸기 때문에, 지금 와선 페론주의 정당을 총괄해서 좌파니 우파니 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얘기나 다름없다. 단지 오늘날 들어선 좌파 성향의 정당이 세가 세다보니까 좌파로 분류되는 것이다.

특히 2천년대 네스토르 카를로스 키르치네르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 대통령 시기 각종 반신자유주의, 좌파 정책을 내걸면서 성과를 보고 높은 지지를 얻었기 때문에 오늘날엔 좌파 페론주의자들이 당의 주도권을 잡고 가는 경향이 있다. 다만 중도파와 우파 페론주의자들이 따로 정당을 차려서 출마하는 것은 여전했기 때문에 2019년 선거에서도 두 개의 정파로 따로 출마했다. 걍 이쯤되면 분당하는게 맞지 않나 싶다

5. 정당연합

아르헨티나 정치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페론주의의 본류로서 가장 큰 페론주의 정당이기 때문에, 페론주의 정당들의 우두머리 격으로 이와 관련한 정당연합을 항상 주도해왔다. 1973년 후안 페론의 귀국과 세 번째 대선 도전 때는 '정의자유전선'이라는 정당연합을 이끌었고, 이후 20세기 들어 카를로스 메넴네스토르 카를로스 키르치네르의 독자 출마를 계기로 여러 개의 선거연합으로 분열되었다. 이는 현재까지 이어져, 지금도 당내에서 자신을 중심으로 뭉친 계파를 기반으로 독자적인 선거연합을 결성해 따로 출마하는 후보들이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2003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정권을 잡은 뒤 12년간 재임한 키르치네르 부부의 영향으로 당내 좌파 이념인 키르치네르주의와 이들 부부의 선거연합 정파인 '승리를 위한 전선'이 당의 전면에 대두되었으며, 이는 2017년 총선을 앞두고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 대통령의 주도로 '시민의 통합'으로, 다시 2019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대통령 후보와 크리스티나 키르치네르 부통령 후보의 주도로 '모두의 전선'으로 계승되었다.

2023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모두의 전선'은 '조국을 위한 연합'으로 개칭되었다. 당내 주류 계파인 키르치네르주의 세력이 주도하는 연합인 만큼 페론주의 좌파 성향이다.

6. 기타

페론주의가 워낙 아르헨티나 정치에 광범위한 영향을 주었기에, 페론주의자들 중에는 좌파도 있고 우파도 있다. 다음은 본 문서의 정의당과 이 당이 주도하는 '조국을 위한 연합' 외에 페론주의를 표방하는 정당들이다. 다만 어디까지나 페론주의를 표방한다는 점만 같지 각 정당들의 성향은 천차만별이라는 점에서 유의하자.
[1] 현재 당내 주류 계파.[2] 파르티도 후스티시알리스타[3] 저스티셜리스트 파티[4] 후스티시알리스모, 영어로는 justicialism[11][5] 후스티시아[6] ~이스모[7] 밀레이가 대선에서 승리했음에도 의회에서 세력이 여전히 작은 편이기 때문에 JxC의 신임 공급을 받더라도 법안 통과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8] 후안 페론 외 그의 아내인 에바 페론도 페론주의계에선 제법 내세우는 인물이다.[9] 페론은 항목에도 있듯 노동당을 창당하였지만 소싯적엔 베니토 무솔리니의 영향도 같이 받았던데다가 쿠데타로 실각당한 이후로는 독재자 프랑코 체제하의 스페인에서 망명생활을 하는 등 극우 인사들과도 연줄이 제법 있었다. 웃긴건 이 시절 체 게바라랑도 교류하면서 서로를 동정하기도 했다.[10] 사실 90년대 페론당은 성향적으로는 좌우 당원들이 골고루 섞여있었지만, 당시 대통령인 카를로스 메넴이 신자유주의 정책을 대대적으로 도입하다보니 이때 한정으론 우파정당이라고 해도 큰 손색이 없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