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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웨아의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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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 ||||
| 1989 · 1994 · 199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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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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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FIFA 올해의 선수 | ||
수상 호나우두 | 2위 조지 웨아 | 3위 앨런 시어러 |
1996 Onze d'Or | ||
Onze d'Or | Onze d'Argent | Onze de Bronze |
에릭 칸토나 | 조지 웨아 | 마티아스 자머 |
Player of the Year 1996 | ||
수상 호나우두 | 2위 앨런 시어러 | 3위 조지 웨아 |
이름 | <colbgcolor=#fff,#1f2023>조지 타울론 마네 오퐁 오스만 웨아 George Tawlon Manneh Oppong Ousman Weah | |||||
출생 | 1966년 10월 1일 ([age(1966-10-01)]세) | |||||
몽세라도주 몬로비아 클라라타운 | ||||||
국적 | [[라이베리아| ]][[틀:국기| ]][[틀:국기| ]] |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1] | |||||
신체 | 키 185cm | |||||
직업 | 축구 선수 (공격수 / 은퇴) 정치인 | |||||
경력 | 선수 | 영 서바이버스 클래리턴 (1981~1984) 봉레인지 컴퍼니 (1984~1985) 마이티 바롤 (1985~1986) 인비서블 일레븐 (1986~1987) 아프리카 스포츠 내셔널 (1987) 토네르 야운데 (1987~1988) AS 모나코 FC (1988~1992) 파리 생제르맹 FC (1992~1995) AC 밀란 (1995~2000) → 첼시 FC (2000 / 임대) 맨체스터 시티 FC (2000)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2000~2001) 알 자지라 클럽 (2001~2003) | ||||
정치 | 민주적 변화를 위한 회의 (2005~ ) 라이베리아 하원의원 (몽세라도 주) 제25대 라이베리아 대통령 (2018년 1월 22일 ~ 2024년 1월 21일) | |||||
국가대표 | 75경기[2] 18골[3] (라이베리아 / 1987~2018) | |||||
정보 더 보기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학력 | <colbgcolor=#fff,#1f2023>디브라이 대학교 (경영학 / 석사[4]) | ||||
종교 | 개신교 (라이베리아 연합감리교회)[5] | |||||
배우자 | 클레어 웨아 | |||||
자녀 | 조지 웨아 주니어, 티모시 웨아 등 슬하 4명[6] |
[clearfix]
1. 개요
라이베리아의 제25대 대통령, 전 축구 선수.
선수 시절에는 AS 모나코, 파리 생제르맹, AC 밀란 등 유명 팀들을 두루 거치며 전무후무한 아프리카인으로 발롱도르와 FIFA 올해의 선수를 수상한 선수였다.[7] 2017년에 치러진 제25대 라이베리아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며, 2018년 1월 22일에 취임했다. 2023년 재선에 도전하였으나 통일당 후보에게 밀려 낙선했으며 2024년 1월 21일 대통령으로서의 6년 임기를 마쳤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그의 부모님은 라이베리아의 소수 민족 크루족으로 낙후된 지역인 그랜드크루 주에서 수도 몬로비아로 이주해 빈민가인 클라라타운에 정착하였다.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으며 가족관계에도 문제가 있어 웨아는 할머니 손에 자랐다. 1981년 15세 때 3부 리그 소속 지역 축구 클럽인 영 서바이버스 클래리턴과 계약하며 골키퍼로 축구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골을 넣는 것에 대한 즐거움을 느끼게 되면서 공격수로 전향하였다. 1984년 봉레인지 컴퍼니 유스팀으로 이적하였다가 1985년 마이티 배럴에서 프로선수로 데뷔하였다. 마이티 배럴에서 10경기에 출전해 7골을 기록하며 활약하였고, 1986년 라이베리아 최고의 팀이었던 인빈시블 일레븐으로 이적하였다. 이 클럽에서 주장을 맡고 23경기에 출전해 24골을 기록하며 리그 득점왕에 올랐다. 이 활약으로 카메룬 스카우트의 눈에 띄어 1987년 코트디부아르 리그 소속의 아프리카 스포츠 내셔널로 이적하였다가 카메룬 리그의 토네르 야운데로 이적하였다. 토네르 야운데에서 18경기 15골을 기록하며 활약을 이어갔다.아프리카에서는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지만, 사실상 무명인 상태의 조지 웨아를 발탁하여 국제무대로 데려와서 성장시킨 인물은 아르센 벵거였다. 벵거는 아프리카로 직접 가서 조지 웨아의 모습을 수 차례 지켜보았고, 1988년 아르센 벵거 감독이 이끄는 AS 모나코로 이적하였다. 열악한 아프리카 리그에서 쥐꼬리만한 연봉을 받으며 가족을 부양했던 웨아는 당시 여러모로 열악한 상태였다. 사인을 하러 모나코에 왔을 때 당장 쓸 용돈이 한 푼도 없었기에 벵거 감독이 용돈으로 500프랑을 줄 정도였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팔이 골절된 상태였다. 구단에서도 의문을 표시했으나 벵거는 웨아를 전적으로 신임하며 "열심히하면 너는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다"라고 격려했다. 그리고 진짜 그렇게 되었다.[8] 웨아는 모나코에서 잠재력을 폭발시키며 1991년 쿠프 드 프랑스에서 우승하였고, 이듬해에는 팀을 UEFA 컵위너스컵 결승전으로 이끌었다. 모나코에서 4시즌 동안 102경기에 출장해 47골을 기록하였다. 1992년 파리 생제르맹으로 이적하였다. 이적한 뒤 첫시즌인 1992-93 시즌에 쿠프 드 프랑스에서 우승하였고, 1993-94 시즌에는 리그 앙 우승을 거머쥐었다. 1994-95 시즌은 조지 웨아의 선수 커리어 중 가장 영광스러운 시즌이었다. 쿠프 드 프랑스와 쿠프 드 라 리그에서 우승하여 도메스틱 컵 더블을 달성하였고 7골을 넣으며 UEFA 챔피언스 리그 득점왕을 달성하면서 바이에른과 바르사를 꺾고 클럽 역사상 처음으로 챔피언스리그 준결승까지 진출하는데 기여하였다. 웨아는 파리 생제르맹에서 3시즌 동안 96경기에 출장해 32골을 기록하였다.
1994-95 시즌의 활약을 바탕으로 1995년 유럽과 남미 출신이 아닌 아프리카 대륙 출신으로서 처음으로 발롱도르를 수상하였으며, 같은해 FIFA 올해의 선수도 수상하였다. 그리고 3번째(1989년, 1994년, 1995년)로 아프리카 올해의 축구 선수를 수상하는 등, 개인 타이틀을 휩쓸었다. 지금까지도 유럽과 남미를 제외한 대륙 출신으로 발롱도르와 FIFA 올해의 선수를 받은 선수는 조지 웨아 뿐이다. 동시에 그는 FIFA 올해의 선수 수상자 중 유일하게 월드컵 무대를 단 한 번도 참가하지 못한 선수이기도 하다.
1995년 여름 AC 밀란으로 이적하였다. 경이적인 신체 능력을 보여주며 "블랙 다이아몬드"이라고 불렀다. 1996년 9월 8일 베로나 전에서 80m를 질주하여 넣은 골은 그의 클래스를 보여준다. 이 골은 현재까지 영상자료가 존재하는 개인이 드리블로 돌파해 넣은 골 중 역대 최장거리 기록으로 알려져있으며[9][10] 지금까지도 치달의 상징이자 축구 역사상 최고의 골 중 하나로 여겨진다.
AC 밀란에서의 골 |
밀란에서 2회 리그 우승을 이끌며 5시즌 동안 114경기에 출장해 46골을 기록하였다. 2000년 첼시로 임대되어 11경기에 출장해 3골을 기록하며 팀의 FA컵 우승을 이끌었다. 이후 2000년 여름 맨체스터 시티로 이적하여 7경기에 출장하였고, 이후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로 이적해 19경기 5골을 기록하였다. 2001년 아랍에미리트의 알 자지라 클럽으로 이적해 8경기 13골을 기록하였고, 2003년 선수 생활을 마감하였다.
로저 밀러, 디디에 드록바, 사디오 마네, 야야 투레, 피에르에메릭 오바메양 등 걸출한 아프리카인 축구 선수들이 있지만 그들을 넘어 사무엘 에투, 모하메드 살라와 함께 아프리카 역대 최고의 축구 선수로 평가된다.
2.2. 국가대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11], 조지 베스트, 라이언 긱스 등과 더불어 선수로서의 명성에 대비되는 저조한 국대 커리어를 가진 선수로 자주 거론되는 선수로 허약한 그의 조국 대표팀을 이끌고 고군분투했으나, 팀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채 국가대표 무대에서는 두각을 드러낼 기회조차 없었던 선수로 요약될 수 있다. 라이베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은 월드컵은 물론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조차 예선 탈락이 다반사로 아프리카 내에서도 약체로 분류되는 선수단이었다. 2020년대 시점에서 원맨 대표팀 하면 흔히 떠올리는 레반도프스키의 폴란드, 살라의 이집트보다 훨씬 심했었던 셈.1987년 1월 30일 서아프리카 네이션스컵 나이지리아 전에서 데뷔하였고, 그 경기에서 데뷔골도 기록하였다. 라이베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은 정치권의 부정부패 때문에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해 웨아는 국가대항전 본선이 있을 때마다 사비를 털어야 했다. 라이베리아 팀의 주장으로 월드컵 본선 진출을 위해 도전했으나 꿈을 이루진 못하였다. 심지어 2002 한일 월드컵 때에는 35세의 노장이었던 그는 선수 겸 감독을 맡았지만 같은 조의 나이지리아에 승점 단 1점 차로 밀려 아깝게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대신 2002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서 본선에 진출했고 말리와의 경기에서 골을 기록하였다.[12]
2018년, 라이베리아 현지시각 9월 11일에 현직 대통령 신분으로 주장 완장을 차고 나이지리아와의 A매치 친선전에 나서며 뒤늦은 국가대표 은퇴 경기를 소화했다. 현역시절 자신의 등번호였던 14번을 달고 뛰었는데, 라이베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14번을 영구결번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경기라고 한다. 조지 웨아는 79분간 경기를 뛰고 교체되었고, 라이베리아는 나이지리아에 아쉽게 2대1로 패하였다.
2.3. 플레이 스타일
만능 완성형 포워드. 폭발적인 스피드를 낼 수 있으면서도 강인한 힘으로 상대 수비를 이겨낼 수 있는 탄력적이면서도 강인한 신체를 가졌다. 이 신체 능력을 십분 활용하며 상대 수비를 박살내고 골을 집어넣던 선수였다. 거기에 더해진 좋은 퍼스트 터치와 준수한 드리블, 패스, 크로스 능력이 합쳐지고, 그 위에 더해진 오프 더 볼 능력이 웨아를 당대 발롱도르 수상자로 만들었다.3. 정치인 경력
정치인으로 활동 중인 모습 |
내전으로 상처받은 조국 라이베리아를 위해 조지 웨아 기금을 설립하는 등 라이베리아 유니세프 친선 대사로 활동하였다. 이후 정치인으로 변신해 2005년 라이베리아 대통령 선거에 일종의 제3지대격 포퓰리즘 빅텐트 우익 정당인 민주적 변화를 위한 회의(CDC) 후보로 출마하였다. 그러나 투표 결과 327,046표를 획득하며 478,526표를 획득한 유엔 개발 프로그램의 아프리카 담당 재정국장으로 "철의 여인"이라고 불린 중도 자유주의 성향인 통일당(Unity Party) 소속의 엘런 존슨 설리프(Ellen Johnson-Sirleaf)[13]에 151,480표 차이로 패하였다. 엘런 존슨-설리프(Ellen Johnson-Sirleaf) 는 2번 연임하며 12년 임기를 모두 채웠다.
2017년 10월 10일 치러진 대선에 출마했는데, 1차 투표에서 39.0%를 받아 결선 투표에 진출했다. 결국 결선 투표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2018년 1월 22일에 취임했다.#
그런데 러닝메이트인 부통령 후보로 독재자 짓하다 감옥에 간 찰스 테일러의 전 부인을 선택하고 옥중의 본인과도 통화해서 논란이 되었다.# 또 선거에서 찰스 테일러의 정당이었던 극우 국민애국당과 연합을 해서 이겼는데, 이게 보통 일이 아닌 것이 찰스 테일러는 평범한 독재자가 아닌 아프리카 독재자들 중에서도 최악의 악질중의 악질로, 라이베리아 내전의 주범이자 아프리카에서도 손꼽히는 대량학살자이며 현재 국제전범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14] 심지어 조지 웨아는 상기되어 있듯이 이 내전 당시 평화운동가로 활동한 적이 있다.
취임 후 1년이 넘은 2019년 5월 기준으로 달러 대비 라이베리아 달러 화폐 가치가 확 떨어지고 물가가 30% 가까이 상승[15]하여 경제적 불확실성에 시달리고 있다. 경제 성장률은 1.2%에서 0.4%로 추락하고, 먹고 살기 어려워진 시민 10,000여명이 인플레이션과 부패에 항의하여 거리시위를 하고 있다. 이에 조지 웨아 대통령은 현지시간 6월 6일에 연설에서 자신을 비난하는 시위자들에게 '국가를 위협한다'라며 용납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 이후, 2023년 대선에서 결선 투표 결과로 낙선하였다.#
4. 기록
4.1. 대회 기록
- 마이티 배럴 (1985~1986)
- 라이베리아 프리미어 리그: 1985-86
- 라이베리아컵: 1985-86
- 인비서블 일레븐 (1986~1987)
- 라이베리아 프리미어 리그: 1986-87
- 파리 생제르맹 FC (1992~1995)
4.2. 개인 수상
- 발롱도르: 1995
- FIFA 올해의 선수: 1995
- 아프리카 올해의 축구 선수: 1989, 1994, 1995
- 디비지옹 1 올해의 외국인 선수: 1990-91
- UEFA 챔피언스 리그 득점왕: 1994-95
- BBC 아프리카 올해의 축구 선수: 1995
- 옹즈도르: 1995
- 옹즈 드 옹즈: 1995, 1996
- ESM 올해의 팀: 1995-96
- FIFA XI: 1991, 1996 (리저브), 1997, 1998
- FIFA 페어플레이상: 1996
- 엘 파이스 유럽 축구의 왕: 1995
- RSSSF 올해의 선수: 1995
- IFFHS 세기의 아프리카 선수: 1996
- IFFHS 레전드: 2016
- IFFHS 올타임 아프리카 드림팀: 2016
- FIFA 100: 2004
- Arthur Ashe 용기상: 2004
- 골든풋: 2005
- AC 밀란 명예의 전당: 2015
- 발롱도르 드림팀 후보: 2020 (CF 7위)
5. 웨아에 대한 헌사
웨아는 놀라운 선수다. 나는 웨아만큼 피치에서 폭발력을 지닌 선수를 본 적이 없다.
- 아르센 벵거
- 아르센 벵거
6. 여담
- 조지 웨아 본인과는 아무 상관이 없지만, 본인의 이름이 팔려 의문의 1패를 당한 황당한 과거가 있다. 그레이엄 수네스 문서 참조.
- 집안의 거의 모든 구성원이 사실상 축구선수인데, 사촌인 크리스토퍼 웨아와 스티븐 웨아를 시작으로 장남인 조지 웨아 주니어[17],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차남 티모시 웨아[18], 친조카 패트릭 웨아, 그리고 처조카 카일 던컨이 축구선수이다.
- 조지 웨아 이전에도 축구선수 출신 대통령이 있었다. 1954년부터 1955년까지 재임한 카페 필류 전 브라질 대통령이 최초의 축구선수 출신 대통령이고, 두번째도 브라질 대통령을 지낸 주앙 굴라르이며, 세번째는 튀르키예의 에르도안이다. 아직까지는 발롱도르까지 수상한 가장 유명한 프로 축구선수 출신 대통령이다.
[1] 파리 생제르맹 FC에서 뛸 때 프랑스 시민권을 취득했다. 라이베리아 대선에 출마할 당시 이중국적 때문에 대선 출마가 좌절될 뻔했으나 라이베리아 법원에서 대선 출마에 문제가 없다고 판결을 내려 웨아는 라이베리아 대선에 출마·대통령에 취임할 수 있었다.[2] 2018년에 만 51세의 나이로 자신의 마지막 A매치 경기를 치렀다.[3] 라이베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최다득점자[4] 2013년 졸업[5] 본래부터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기독교인이었다가 이슬람으로 개종한 후 다시 기독교로 개종했다. #UM News 꽤나 논란이 있는 나이지리아 라고스의 초교파 카리스마주의(오순절교회와 은사주의가 카리스마주의 계열이다) 대형 교회인 만국회당 교회(Synagogue Church of All Nations)에서 프린스 존슨과 함께 목격되기도 하였다.[6] 막내딸은 클레어 웨아에게서 태어나지 않은 이복자녀이며 2016년생이다[7] 이후 아프리카 국적 선수의 포디움 수상은 조지 웨아 자신의 1996년 FIFA 올해의 선수 2위, 사무엘 에투의 2005년 FIFA 올해의 선수 3위, 모하메드 살라의 2018년과 2021년 FIFA 올해의 선수 3위, 사디오 마네의 2022년 발롱도르 2위가 전부였다.[8] 웨아는 밀란에서 발롱도르를 수상한 뒤 벵거에게 공을 돌렸다. 벵거는 자신이 발탁한 선수 중 가장 대단한 선수로 아직도 웨아를 꼽는다.[9] 기록으로만 남아있는 역대 최장거리 골은 펠레의 골이다. 무려 자기 팀 골대 앞에서부터 상대 팀 골대 바로 앞까지 100m를 혼자서 뚫어버리고 넣은 골로, 이는 현재 라디오 중계자료만 남아있어 제대로 된 세계기록으로는 인정받지는 못한다.[10] 참고로 2번째로 긴 드리블 돌파 후 골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손흥민이다. 바로 그 유명한 2019-20 시즌 번리전의 75m 돌파 후 골.[11] 조지 웨아, 라이언 긱스 등과는 달리 국대를 하필 그 국대가 가장 약했던 시기만 골라 옮겨다녔기 때문이다. 스페인 축구팀과 아르헨티나 축구팀에서 뛴 바 있기 때문에 월드컵 커리어는 매우 부실하지만 소속 국가대표만은 매우 화려하다.[12] 2무1패로 탈락하였다. 1경기 말리전, 2경기 알제리전 모두 1점차로 앞서다가 경기종료를 얼마 안 남겨두고 동점골을 내주었고, 나이지리아 전은 지면서 아쉽게 탈락하였다.[13] 2011년 노벨 평화상 수상.[14] 이는 스포츠 선수가 정치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이다. 독재자에 대한 반감마저 덮어버릴 정도로 영웅 취급을 받았다는 소리다. 물론 조지 웨아도 찰스 테일러 지지층이 아직 살아있으니 이걸 이용한 것이었다.[15] 물가가 상승하기 직전에 1억 2,600 라이베리아 달러를 새로 찍어냈다고 한다.[16] 조지 웨아의 AS 모나코 시절부터 그의 팬이었다고 한다.[17] 1987년생으로, AC 밀란 유스 출신이며 2004년 미국 청소년 대표팀에 출장했으나 대성하지 못한 채 2018년 커리어를 마감했다.[18] 성인 대표팀은 자신이 태어난 곳인 미국을 선택했다.
분류
- 1966년 출생
- 1981년 데뷔
- 2003년 은퇴
- 2018년 은퇴
- 라이베리아 대통령
- 라이베리아의 남자 축구 선수
- 공격수
- AS 모나코/은퇴, 이적
- 파리 생제르맹 FC/은퇴, 이적
- AC 밀란/은퇴, 이적
- 첼시 FC/은퇴, 이적
- 맨체스터 시티 FC/은퇴, 이적
-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은퇴, 이적
- 알 자지라 클럽/은퇴, 이적
- 라이베리아의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참가 선수
- 1996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남아프리카공화국 참가 선수
- 2002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말리 참가 선수
- 발롱도르 수상자
- FIFA 올해의 선수 수상자
- 옹즈도르 수상자
- 운동선수 출신 정치인
- 몬로비아 출신 인물
- 복수국적자
- 축구 국가대표팀 최다 득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