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트로 아르카리의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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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피에트로 산테 아르카리 3 (Pietro Sante Arcari Ⅲ[1]) |
생년월일 | 1909년 12월 2일 |
사망년월일 | 1988년 2월 8일 |
국적 | 이탈리아 |
출신지 | 카살푸스테를렝고[2] |
포지션[3] | 아웃사이드 라이트, 센터 포워드 |
신체조건 | 175cm / 70kg |
등번호 | -[4] |
소속팀 | 코도뇨 (1927~1930) AC 밀란 (1930~1936) 제노바 1893 (1936~1939) US 크레모네세 (1939~1942) SSC 나폴리 (1942~1943) 바스테세 (1944) 코도뇨 (1945~1946) |
감독 | 코도뇨 (1947~1949) |
국가대표 | 0경기 0골 (1934) |
1. 개요
이탈리아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1947년부터 1949년까지 코도뇨 감독을 맡았다.별명은 '늑대(di Lupo)'이다.
2. 특징
- 산테가 원래 퍼스트 네임이지만 피에트로로 더 유명하다.[5]
- 형제들 모두 국가대표팀과는 큰 인연을 맺지 못했지만, 막내 브루노는 형제 중 유일하게 국가대표 경기 출전 경력이 있다.
- 아르카리가 제노바에 있을 때 기묘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ACF 피오렌티나와의 시합에서 아르카리는 저지르지도 않은 오프사이드 오심을 당했고, 주심은 주저 없이 그의 동료를 퇴장시켜버렸다.[6]
- 피에트로 아르카리는 AC 밀란 소속 첫 월드컵 챔피언 팀 멤버였다. 그 이후 밀란에서 다시 월드컵 챔피언이 나오는 데에는 48년이 걸렸고, 주인공은 프랑코 바레시와 풀비오 콜로바티였다.
3. 생애
3.1. 클럽
피에트로 아르카리의 커리어는 고향팀 코도뇨에서 시작되었다.1930년 AC 밀란으로 팀을 옮긴 아르카리는 10월 12일 데뷔전을 치렀는데 팀은 알렉산드리아에게 3대0으로 완패했다.
1936-37 시즌에 제노바 1893로 옮겨서 유일한 클럽에서의 우승컵을 들어올렸고, 그 이후에는 크레모네세, SSC 나폴리[7] 등 세리에 B나 C팀에서 주로 활약하였다.
3.2. 국가대표팀
1933-34 시즌에 아르카리는 16골을 넣으며 AC 밀란에서 꽤 좋은 활약을 펼쳤다. 그에 당시 대표팀 감독 포초가 아르카리를 월드컵 대표팀에 선발했지만 아르카리는 과이타에 밀려 단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후에도 아르카리는 대표팀 경기에는 뛰지 못했다.3.3. 감독
자신이 데뷔한 팀 코도뇨에서 2년간 감독 생활을 했다.4.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스피드와 공중볼 다툼 능력이 좋았다. 득점능력도 제법 뛰어나서 256경기의 세리에 A 출전 동안 넣은 골이 80여 골에 달한다. AC 밀란에서 활약하면서 꾸준히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했고 그래서 늑대라는 별명으로 불렸다.1930년대 AC 밀란과 제노아에서 중요한 선수였다.
5. 수상
5.1. 클럽
5.2. 국가대표
- FIFA 월드컵 우승 1회: 1934
[1] 아르카리의 4형제는 모두 축구 선수들이었고 피에트로는 그 중 3번째였다. 형제들을 구분하기 위해서 이름 뒤에 로마숫자로 표기했는데 피에트로는 3번째라 Ⅲ이 붙은 것이다.[2] 롬바르디아 주 내의 도시로 밀라노에서 남동쪽 50km에 위치해있다.[3] 영문 위키백과에서는 아웃사이드 라이트, 독일어 위키백과에서는 센터 포워드로 기록되어 있다.[4]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5] 출처: 1988년 2월 10일의 크레모나 지방 신문 기사로 아르카리의 부고 특집이었다.[6] 출처: 영어 위키백과[7] 아르카리가 뛸 때 나폴리는 세리에 B에 소속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