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 안노바치의 감독직 및 역임 직책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주장 | ||||
리카르도 카라펠레세 (1949~1950) | → | 카를로 안노바치 (1951~1952) | → | 잠피에로 보니페르티 (1952~1960) |
AC 밀란 주장 | ||||
안드레아 보노미 (1948~1952) | ▶ | 카를로 안노바치 (1952~1953) | ▶ | 오메로 토뇬 (1953~1954) |
이름 | 카를로 안노바치 (Carlo Annovazzi) |
생년월일 | 1925년 5월 24일 |
사망년월일 | 1980년 10월 10일 (향년 55세) |
국적 | 이탈리아 |
출신지 | 이탈리아 왕국 밀라노 |
포지션 | 라이트 풀백, 라이트 윙 하프 |
신체조건 | 182cm | 79kg |
소속팀 | AC 밀란 (1944-1953) 아탈란타 BC (1953-1958) 안코니티나 (1958-1959) 갈라라테 칼초 (1959-1960) 치타 디카스텔로 (1960-1961) |
국가대표 | 17경기 (1947-1952) |
감독 | FS 세스트레세 칼초 1919 (1970-1971) 손드리오 칼초 (1972-19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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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의 전 축구 감독.2. 생애[1]
2.1. 선수 생활
2.1.1. 클럽
AC 밀란에서 1944년에 데뷔한 안노바치는 9시즌을 밀란에서 뛰면서 1950-51 시즌에 밀란이 44년 만에 다시 스쿠데토를 차지하는 것에 기여했다. 이 시즌에 안노바치는 16골을 넣었는데 이는 군나르 노르달에 이은 팀 내 득점 2위이자 리그 득점 11위의 기록이었다.안노바치는 1952년에 팀의 주장으로 임명되었지만 1년 만에 밀란을 떠나 아탈란타 BC로 이적하게 되었고 그곳에서도 최고의 선수로 활약했다.
2.1.2. 국가대표
안노바치는 그란데 토리노 선수들이 주축이었던 1940년대 후반의 이탈리아 대표팀에서 몇 안되는 토리노 이외의 팀 소속 선수였다. 그러나 수페르가의 비극으로 인해 그란데 토리노 멤버들이 거의 다 사망했고 안노바치는 계속 이탈리아 대표팀을 지켰다.안노바치는 1950년 월드컵에서 스웨덴과의 첫 경기에 출전했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스웨덴에 2:3으로 패했고 이것이 발목을 잡아 결국 결선 리그 진출에 실패했다.
2.2. 이후
축구 선수 경력을 끝낸 안토바치는 바를 운영하다 정리하고 한동안 아버지가 경영하던 액자 가게를 이어받아 홀어머니를 부양했다.그러나 감독으로 안노바치는 큰 경력을 만들지는 못했고 친정팀 AC 밀란에서 코치로 일했다. 그러다 1977년, 안노바치는 새로 입단한 키작은 수비수를 맡아 훈련시켜 역대급 센터백으로 키워냈는데 그가 바로 프랑코 바레시였다.
안노바치는 1980년, 난치병으로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향년 55세.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안노바치는 수비수임에도 득점 감각이 있었으며 그 득점 감각은 공격 개입과 능숙하면서도 빠른 결정을 내리는 방향으로 표출되었다. 또한 안노바치는 공중볼 경합에 강점을 보였고 페널티 킥을 잘 찼는데 AC 밀란에서 활약할 때 8개의 페널티 킥을 시도했고 모두 성공했다.4. 사생활
안노바치는 1949년, 미나 밀리아바카(Mina Migliavacca)와 결혼해 슬하에 3명의 자녀를 뒀다.5. 뒷이야기
- 안노바치는 피부가 검은 편이라 별명도 피부색과 연관지어져 붙었다.
- 어린 시절 안노바치는 인테르 밀란의 팬이었고 실제로 인테르의 입단 테스트에도 지원했지만 떨어졌다.
6. 수상
6.1. 선수
6.1.1. 클럽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