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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프 야신

레프 야신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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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2003년 수상 당시 국명[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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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前 축구 선수
파일:레프 야신.jpg
이름 레프 야신
Лев Яшин | Lev Yashin
본명 레프 이바노비치 야신
Лев Иванович Яшин
Lev Ivanovich Yashin
출생 1929년 10월 22일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사망 1990년 3월 20일 (향년 60세)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국적
[[소련|]][[틀:국기|]][[틀:국기|]]
신체 189㎝ | 체중 82㎏[1]
직업 축구 선수 (골키퍼 / 은퇴)
소속 구단 FC 디나모 모스크바 (1949~1971)
국가대표 78경기 (소련 / 1954~1970)
통산 클린시트 470회

1. 개요2. 유년기3. 선수 경력
3.1. 클럽 경력3.2. 국가대표 경력
4. 은퇴 이후5. 플레이 스타일6. 평가7. 기록
7.1. 대회 기록7.2. 개인 수상7.3. 수훈7.4. 개인 기록
8. 야신에 대한 언사9. 어록10. 여담11.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소련의 전 축구 선수. 현역 시절 포지션은 골키퍼였다. 별명은 '검은 거미'.

디나모 모스크바원클럽맨으로, 소련 대표팀에서 유로 초대 우승1956 멜버른 올림픽 금메달을 이끌었다. 또한, 현재까지 골키퍼 포지션에서 유일한 발롱도르 수상자이며, 발롱도르 유효 표 획득만 10차례[2]나 된다.

2. 유년기

1929년 소련 모스크바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독소전쟁이 한창이던 12세 무렵 군수공장에 다니면서 축구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그가 골키퍼를 맡게 된 이유는 그가 키가 컸기 때문이다.

3. 선수 경력

3.1. 클럽 경력

1949년 20세의 나이로 입단했는데 당시 디나모 모스크바에는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뛰어난 골키퍼 알렉세이 호미치(Алексей Хомич)가 있었기 때문에 처음 3년 동안은 후보 선수에 머물렀다. 그는 부업으로 같은 디나모 모스크바의 아이스하키 팀 골키퍼를 맡기도 했는데, 이때 그의 팀은 소련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1953년 호미치가 부상을 당하면서 야신에게 기회가 생겼다. 야신은 데뷔전에서 매우 실망스러운 경기력 때문에 고위급 관계자에게 썩 꺼지라는 독설을 듣기도 했지만 금방 폼을 끌어올리며 주전 골키퍼 자리를 굳혔다. 이후 디나모 모스크바에서 326경기 출장이라는 대기록을 세웠으며 소비에트 톱 리그 우승 5회, 소비에트컵 우승 3회라는 업적을 달성했다. 특히 심각한 부진에서 재기하여 발롱도르를 수상하던 1963년에는 소비에트 톱 리그에서 27경기 동안 불과 6실점 밖에 하지 않는 우주방어를 펼쳤다.

41세가 되던 1971년, 디나모 모스크바 vs 유럽 올스타 팀의 친선 경기를 끝으로 은퇴했다. 당시 이 경기에는 소련이 폐쇄적인 공산권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에서 10만 명이 운집했으며 바비 찰튼, 에우제비우, 게르트 뮐러 등 현재까지도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는 축구계의 전설적인 인물들도 참여해 야신의 은퇴를 축하해주었다.

3.2. 국가대표 경력

야신은 1954년에 소련 축구 국가대표팀에 데뷔했다. 당시 소련은 이고르 네토 (1930~1999), 발렌틴 이바노프 (1934~2011), 발레리 보로닌 (1939~1984), 알베르트 셰스테르네프 (1941~1994) 등 월드 클래스 선수들이 다수 포진해 있었는데 1956 멜버른 올림픽에서 야신은 소련이 금메달을 따는 데 큰 공헌을 한다. 현재 올림픽 축구가 U-23 팀이 출전하며 그 위상이 FIFA 월드컵에 한참 못 미치는 것과는 달리 당시에는 국가대표팀이 출전해 현재보다 위상이 매우 높았다.

이후 1958 스웨덴 월드컵에도 출전했는데 잉글랜드와는 2:2로 비기고,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2:0 승리를 거두었으며 펠레브라질을 만났는데 바바에게 2골을 허용해 패했다. 이후 4조 순위 결정전에서 잉글랜드를 1:0으로 꺾고 8강에 진출했으나 닐스 리드홀름, 군나르 그렌이 이끄는 스웨덴에게 2:0으로 패해 탈락하고 만다.

유러피언 네이션스컵 1960에서 야신은 대활약을 하는데 체코슬로바키아유고슬라비아를 연파하며 소련의 우승을 이끌어 소련을 유로 초대 챔피언으로 만들었다. 이 대회에서 야신은 당연히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3]

1962 칠레 월드컵에서는 콜롬비아와의 경기에서 18분 만에 3골[4]을 실점했는데 골키퍼라면 당연히 막아야 할 평범한 슛을 막지 못해 실점을 하는 등 최악의 모습을 보이며 당시 손꼽히는 강호였던 소련이 8강에서 탈락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야신은 이때의 심각한 슬럼프로 축구 선수 은퇴를 심각하게 고려하기도 했지만 심기일전하여 다시 뛰어난 활약을 펼쳐서 1963년에는 발롱도르를 수상했고, 그 이후로 은퇴할 때까지 세계 최고의 골키퍼로서 군림했다. 사실 칠레 월드컵 때는 대회 기간 동안 두 차례나 뇌진탕을 겪어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는 것이 나중에야 알려졌다.

1963년에 부활한 야신은 유러피언 네이션스컵 1964에서 다시 한번 소련을 유로 결승으로 이끄나 개최국 스페인에게 패해 준우승에 그치게 되었지만 이 대회에서도 베스트 11에 선정되었다.

이후 1966 잉글랜드 월드컵에서는 이때 8강 돌풍을 일으키는 북한을 상대로 3:0 승리, 이탈리아에게 1:0으로 승리, 칠레를 상대로 2:1 승리를 거두고 헝가리를 2:1로 격파하며 4강까지 이끄나 결국 우베 젤러가 이끄는 서독과의 경기에서 헬무트 할러와 프란츠 베켄바워에게 골을 내줘 1:2로 패배해 월드컵 결승 진출은 좌절되었다. 이어진 3·4위전에서는 흑표범 에우제비우가 이끄는 포르투갈과 대결하는데 전반 12분에 에우제비우에게 페널티킥 선제골을 내주고 이후 에두아르두 말로페예프가 동점골을 넣었으나 후반 89분에 통한의 결승골을 내줘 최종 4위로 마치게 되었다.

1970 멕시코 월드컵에도 국가대표로 뽑히긴 했으나 후보에 그치면서 출전은 하지 못했고 이후 국가대표를 은퇴했다.

4. 은퇴 이후

이후 코치로 활동하다가 선수 시절 입었던 무릎 부상이 악화되어 1986년도에 한쪽 다리를 절단하게 되었고,[5] 말년에는 위암으로 투병하다가 1990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조국이었던 소련이 바로 다음 해인 1991년 해체되면서 야신은 소련 시절 러시아 축구의 영광 그 자체로 남게 되었다.
파일:external/3.bp.blogspot.com/42-17253725.jpg
작고한 해에 남긴 사진
이후 1994 미국 월드컵부터 그를 기려 대회에서 가장 크게 활약한 골키퍼에게 야신상[6]을 수여하게 되었다.

이후 2019년부터 프랑스 풋볼에서 한 해 최고의 골키퍼에게 트로페 야신을 수여하며 다시 한번 골키퍼라는 포지션에서 그의 위상을 보여주었다.

5. 플레이 스타일


189cm의 신장[7]과 힘, 그리고 엄청난 반사신경을 바탕으로 모든 골키퍼를 통틀어서 가히 근접할 수 없는 동체시력과 선방 능력을 가졌으며 페널티킥, 다이빙, 땅볼, 볼 경합 등의 상황에서 높은 성공 확률을 보였다. 흔히 실력 있는 골키퍼에게 '거미손' 내지는 '문어발' 등의 별명이 붙곤 하는데, 이러한 별명들의 시초가 바로 레프 야신이다.

현역 시절에 차림새도 검은 천 모자, 검은 옷, 검은 장갑 등 검정 의상을 착용하고 나와서 공격수들에게 위압감을 주고, 들어갈 법한 슈팅도 막아내는 신들린 모습을 보여주며 명성을 떨쳤다. 웬만한 공은 그 자리에 서서 팔만 뻗어 잡아내기도 했다는 말도 있다.[8] 이렇게 얻은 별명이 흑거미 혹은 검은 문어. 이 때문에 이후 이름을 좀 날린 골키퍼들은 검은 옷을 입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또한, 축구 골대의 좌우 상단 구석 위치는 골키퍼가 막기 매우 어려운 사각지대라서 일명 '야신 존(Yashin Zone)'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레프 야신은 사각지대로 날아오는 슈팅조차도 매우 잘 막았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축구 팬들이 골대 상단 구석의 사각지대를 '야신 존'이라고 부르는데, 다른 골키퍼들은 골대의 사각지대를 쉽게 못 막았지만, 오직 레프 야신만 잘 막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야신이 아닌 이상 못 막는 곳'이라는 의미다.

야신은 A매치 78경기 출장에 실점이 불과 70골(경기당 평균 실점 0.89)이었다. 21세기의 전설적인 골키퍼인 잔루이지 부폰은 2014년 11월 기준 평균 실점 0.81골을, 이케르 카시야스는 0.55골을 기록 중이지만 수비수들의 실력 차이를 감안해야 한다. 전통적으로 수비가 강점이었던 이탈리아 대표팀 소속의 부폰에게는 파비오 칸나바로, 알레산드로 네스타, 파올로 말디니, 마르코 마테라치 등이 있었고 스페인 대표팀 소속의 카시야스에게는 페르난도 이에로, 카를레스 푸욜, 세르히오 라모스, 제라르 피케 등의 최상위 클래스의 수비수들이 있었다. 그러나 야신과 함께 뛰던 수비수들은 당시 소련의 축구 수준이 상당히 높았다곤 하지만, 부폰과 카시야스와 함께 뛰던 수비수들에 비해선 한 수 아래였다.
파일:fifa-gols.png

당시의 축구는 지금보다 경기당 평균 실점률이 2배 가량 높았다. 그 이유는 당시 포메이션에는 현대의 전술과 상당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WM 포메이션으로 일컬어지는 3-2-5 형태의 포메이션이 가장 널리 사용됐으며, 이는 근대 축구 태동기에 쓰이던 2-3-5 같은 공격 일변도의 포메이션보다는 낫지만, 현대 축구만큼 정교한 수비를 구사할 수 있는 전술은 아니었다. 쉽게 말하자면 당시 축구는 우리 팀이나 상대 팀이나 공격 위주의 축구를 구사했으며, 많이 넣고 많이 실점하는 메타 속에서 상대보다 더 많이 득점하는 것을 추구하는 게 일반적인 방향성이었다. 야신의 실점률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섰다고 평가받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심각한 부진에서 재기하여 발롱도르를 수상하던 1963년에는 소련 리그에서 27경기 동안 불과 6실점밖에 하지 않는 우주방어를 펼쳤다. 야신이 출전하지 않은 나머지 11경기에서의 실점 수가 8실점으로 오히려 더 많다!

발롱도르 투표에서 유효 표를 받은 횟수도 골키퍼로서는 역대 최다인 10회나 된다.[9]

FIFA 월드컵에 총 4번 출전[10]하여 13경기 중 4경기를 무실점으로 막아냈으며, 전체 출장 경기 812경기 중 무실점으로 막아낸 경기가 절반 이상인 480경기[11]나 된다.
파일:야신 던지기.gif

레프 야신은 손이 큰 것과 동시에 힘도 매우 좋았는데, 몸도 근육질의 탄탄한 체형에다 어깨힘과 팔힘도 매우 강하여 허리를 제대로 쓰지 않아도 충분히 공을 센터 서클까지 던질 수가 있었다. 거기에 야신은 현대의 스위퍼 키퍼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 그 시대에 드물게 수비진을 모두 통솔하고 자신이 직접 에어리어 밖으로 나가서 공을 쳐내거나 좋은 킥력으로 팀의 공격 방향을 정해주는 '스위퍼 키퍼'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오늘날 바이에른 뮌헨의 레전드 골키퍼로 유명한 마누엘 노이어가 자주 선보였던 기술을 레프 야신이 먼저 보여준 셈이다.[12][13] 또 커맨드 능력도 뛰어난데, 그의 활약상을 담은 영상을 보면 필드 수비수들에게 쉴새 없이 소리를 지르며 지시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이 역시 당대 골키퍼들은 하지 않았던 선구적인 플레이였다.[14]

이런 모든 기록들을 제치고 그가 과연 인간인지에 대해 의심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통계는 바로 페널티킥 방어율이다. 그는 선수 시절 총 153번의 페널티킥을 막아냈다고 전해진다. 일반적으로 프로축구 선수들의 페널티킥 평균 성공률은 대략 79%라고 하지만, 야신의 페널티킥 방어율은 무려 50%가 넘었다. 즉, 야신을 상대로 페널티킥을 차서 골을 넣으려면 차는 입장에서는 사실상 동전 던지기와 다름 없는 에 기대서 슛을 했다는 의미가 된다. 이게 어느 정도냐 하면, 최고의 페널티킥 선방 능력을 자랑하던 지에구 아우베스가 발렌시아에서 뛰던 동안 페널티킥을 45개 중 22개를 선방해내며 약 50%의 선방률을 보였는데, 야신은 무려 아우베스의 7배에 가까운 페널티킥을 막아냈다는 점이다.

현재 시점보다도 수비도 과격하고 쉴새 없이 몰아치는 공격 위주의 축구인만큼 득점률과 실점률이 더욱 높아 골키퍼가 활약하기에는 너무 까다로운 조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인간이 맞는지 의심하게 하는 선방을 수없이 실현시켰다는 점에서 레프 야신이라는 골키퍼의 위상을 실감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야신은 사기적인 동체시력과 선방 능력은 말할 것도 없고, 뛰어난 근력으로 손발 가릴 것 없이 높은 패스 성공률로 팀의 공격에 가담할 정도로 영향력이 지대하기까지 했던, 현존했던 골키퍼 중에서도 가장 정점에 도달한 인물로 설명할 수 있다.

6. 평가

파일:지단/월드사커.jpg
파일:프랑스 풋볼 발롱도르 드림팀.jpg

축구사를 통틀어 가장 압도적인 선방 능력, 시대를 앞서나간 플레이 스타일 등 명실상부한 축구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로 평가받으며, 레프 야신이라는 이름 자체가 아예 축구 경기에서 좋은 기량을 선보이는 골키퍼를 지칭하는 대명사처럼 거론될 정도로 유명하다. 유일한 골키퍼 발롱도르 수상자이며, 발롱도르 이외에도 그의 위상을 뒷받침하는 각종 대회 기록, 개인 수상 등[15] 종합적으로 골키퍼계의 GOAT로 여겨지는 인물.

일단 러시아 출신 선수들 중에서는 가히 최고 레벨 수준의 클럽과 국가대표 경력을 쌓았다. 특히 놀라운 것은 이 모든 기록을 러시아의 한 클럽에서만 뛰면서 이룩한 업적이라는 것. 비록 당대 이적이 현재에 비해 훨씬 원활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해도 어마어마한 기록이며, 오로지 본인의 인생 동안 디나모 모스크바에서만 뛰며 5번의 소비에트 톱 리그 우승과 3번의 소비에트컵 우승을 이끌었으며, 이 문서에서도 여러 번 언급된 27경기 6실점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또한 현재는 축구계에서 월드컵 16강 정도급의 전력으로 평가받는 소련을 당대에 홀로 이끌며 유러피언 네이션스컵 1960 우승, 유러피언 네이션스컵 1964 준우승, 1966 월드컵 4위로 이끄는 등의 엄청난 커리어를 쌓아올렸다. 이러한 점으로 인해 역대 최고의 골키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소련과 러시아 역사상 최고의 축구 선수, 더 나아가 최고의 스포츠인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무엇보다 골키퍼라는 포지션의 대명사이자 전 세계 골키퍼들의 우상으로 존경받고 있는 것에서 야신이 얼마나 명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오죽하면 FIFA 월드컵에서 최고의 플레이를 펼친 골키퍼에게 수여하는 상을 야신상이라고까지 했을까… FIFA에서 푸스카스상과 함께 정말 몇 안되는 선수의 이름을 딴 상을 만들었을만큼 위상이 확고하다.[16]

수비수 포지션에서의 프란츠 베켄바워처럼 골키퍼라는 포지션에서 절대적인 위상을 가지고 있고, 월드 사커 올타임 XI, 발롱도르 드림팀 등 각종 역대 베스트 11에서 십중팔구는 골키퍼 포지션을 차지한다.

보통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혹은 포지션별 역대 최고의 선수를 뽑을 때는 크고 작은 논쟁들이 생기는 반면, 역대 최고의 수비수 베켄바워처럼 '축구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를 뽑으라고 하면 이견의 여지가 없이 가장 먼저 레프 야신이 거론된다.[17]

7. 기록

7.1. 대회 기록

7.2. 개인 수상

7.3. 수훈

7.4. 개인 기록[20]

8. 야신에 대한 언사

직접 플레이하는 모습을 보진 못했으나, 이 선수는 꼭 언급해야겠다. 야신은 역대 최고의 골키퍼 명단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 손님이다. 나는 영상을 통해 그가 곡예사처럼 폴짝 뛰어 한 손으로 환상적인 세이브를 하는 모습을 보았다. 야신은 아이스하키 골키퍼도 했다고 들었다. 그는 유일한 골키퍼 발롱도르 수상자이다. 검은 거미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던 그는 존재 그 자체로 상대 팀에게 위협이었다. 킥오프 전부터 상대 선수들에게 심리적 우위를 점하는 것은 정말 큰 이점이다.
이케르 카시야스
야신은 나보다 축구를 잘한다.
산드로 마촐라
내가 유일하게 무서워했던 골키퍼.
펠레

9. 어록

세상에 그 어느 골키퍼가 실점하는 것이 괴롭지 않을까? 골키퍼라면 실점하는 것이 괴로워야 한다! 만약 실점하는 것이 괴롭지 않은 골키퍼가 있다면, 그가 과거에 어떤 존재였든간에 그에게는 아무런 미래가 없다.
사각지대는 어떤 골키퍼도 막을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막을 수 있다.
우주를 나는 한 비행사를 보는 즐거움만이 페널티 킥을 막을 때의 기쁨에 비할 수 있는 기분이다.
난 세계 최고의 골키퍼가 아니다. 그건 블라디미르 베아라가 들어야 할 말이다.
세계에 월드클래스 골키퍼는 단 두 명이 있다. 하나는 나고, 하나는 맨체스터에 있는 독일인 청년이다.

10.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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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관련 문서



[1] 레프 야신 아카데미 공식 사이트 프로필[2] 1956, 1957, 1958, 1959, 1960, 1961, 1963, 1964, 1965, 1966[3] 이 대회에서 보여준 야신의 압도적인 퍼포먼스는 1966 잉글랜드 월드컵고든 뱅크스, 유로 1976이보 빅토르, 유로 1992피터 슈마이켈, 2002 한일 월드컵올리버 칸, 2006 독일 월드컵잔루이지 부폰, 2014 브라질 월드컵마누엘 노이어, 유로 2020잔루이지 돈나룸마와 함께 단일 메이저 대회 역대 최고의 골키퍼 퍼포먼스로 평가받는다.[4] 심지어 이 3골 중 1골은 월드컵 역사상 유일한 코너킥 골이다.#[5] 야신의 선수 시절 사진들을 보면 알겠지만 오른쪽 다리에 항상 붕대를 감고 있다. 다만 다리 절단의 직접적인 원인은 혈관 문제였다.[6] 이후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상의 이름이 월드컵 공식 스폰서 아디다스의 명칭을 빌려 아디다스 골든글러브로 공식 변경되었다. 이때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축구 선수의 이름을 딴 상을 돈으로 갈아버렸다는 비판이 많았다.[7] 현대에도 189cm는 매우 큰 키인데, 그 시절에는 거의 2m급 거인이나 다름없었다.[8] 어느 정도 과장은 있겠으나 꽤나 사실적인 일화로 볼 수 있는게, 야신은 당대 기준으로 압도적인 체격을 지니고 있었기에 긴 윙스팬으로 말미암아 잡을 수 있는 리치가 길었다. 여기에 골키퍼로서의 위치선정 능력도 훌륭했으니 공을 잡아내기 좋은 위치에 자리했을 것으로도 유추할 수 있다.[9] 2위는 총 9회 유효 표를 받은 잔루이지 부폰이며, 3위는 7회 유효 표를 받은 소련의 리나트 다사예프다.[10] 1958, 1962, 1966, 1970(1970년 대회에서는 후보 골키퍼로 대회에 참가)[11] 407경기라고도 한다.[12] 출처: 베스트 일레븐[13] 그렇다고 해서 최초의 스위퍼 키퍼는 아니다. 야신 이전에 스위퍼 키퍼의 모습을 보여준 매직 마자르줄러 그로시치가 있었다.[14] 다만, 이런 관여가 당시 선수들이나 관중들에게 좋게 여겨지지 않았는데 그 이유로는 야신의 성량은 엄청나 귀가 따가웠기 때문이다. 동료들은 그에게 수다쟁이라는 별명을 붙였고, 경기를 보러 온 야신의 아내조차도 경기 후에 "그만 좀 소리쳐요!" 라고 바가지를 긁었다고 한다.[15] 옛날 선수지만 영상으로 남겨졌기 때문에 플레이 스타일이 고스란히 남아있다.[16] 그리고 발롱도르 주관사인 프랑스 풋볼에서 한 해 동안 최고의 활약을 펼친 골키퍼에게 수여하는 상인 트로페 야신을 만들었다.[17] 한편 야신 다음으로 뛰어난 골키퍼가 누구인가에 대한 논쟁은 매우 치열한데, 보통 잔루이지 부폰, 마누엘 노이어, 이케르 카시야스, 디노 조프, 고든 뱅크스 등이 거론된다.[18] 골키퍼로는 최초이자 유일한 수상자다. 그 후 디노 조프, 잔루이지 부폰이 2위, 이보 빅토르, 올리버 칸, 마누엘 노이어가 3위를 했을 뿐 아직까지도 골키퍼 발롱도르 수상자는 등장하지 않고 있다.[19] GK 1위[20] 공식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만 적는다.[21] 북한에서 발간된 '세계 축구계의 별들'(2001)에서 발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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