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년월일 | 1910년 8월 5일 |
사망년월일 | 1956년 9월 11일 (향년 46세) |
국적 | 아르헨티나 |
출신지 | 부에노스 아이레스주 엔세나다 |
포지션 | 센터 포워드 |
신체조건 | 188cm | 83kg |
소속팀 | CA 우라칸 (1931-1943) 데펜소르 (1943) CA 반필드 (1944) CA 우라칸 (1945) |
국가대표 | 19경기 / 21골 (1935-19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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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헨티나의 전 축구 선수.2. 생애[1]
2.1. 어린 시절
마산토니오는 1910년 엔세나다(Ensenada)에서 태어났다.유소년 시절에는 비야 알비노 스포르티보(Villa Albino Sportivo)를 시작으로 여러 클럽을 돌아다녔고 득점 관련 기술로 주목을 받았다.
2.2. 선수 생활
2.2.1. 클럽
1931년, CA 우라칸의 관계자 토마스 두코(Tomás Ducó)[2]의 설득에 마산토니오는 우라칸으로 이적했고 시기 적절하게 아르헨티나 리그도 프로화가 되었다.마산토니오의 1부 리그 데뷔전의 상대는 킬메스. 마산토니오는 2골을 넣으며 우라칸의 5대1 승리를 이끌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강력한 골을 넣었던 경기는 우라칸에서의 데뷔전이었다. 필드 중앙에서 공을 잡아 상대팀의 레프트 하프, 센터 하프, 두명의 풀백을 제치고 슈팅을 때렸는데 골키퍼조차 공의 궤적을 보지 못했다. 단지 관중들만이 골포스트를 강하게 때리는 소리를 들었을 뿐이었다.
에르미니오 마산토니오(데뷔전을 회상하면서)
에르미니오 마산토니오(데뷔전을 회상하면서)
데뷔 시즌에 23골을 기록한 마산토니오는 1937년, 1939년, 1940년에 각각 28골씩을 넣어 개인 최다 득점 기록을 남기기도 했고 1941년에는 리그 득점 랭킹 2위에 올랐다. 하지만 우라칸의 코칭스태프는 그를 종종 수비적인 포지션에 배치해 보드진에게 징계를 받기도 했다. 보드진은 징계의 이유를 "골 넣으라고 데리고 있는 선수를 그렇게 쓰냐?"라고 밝혔다.
마산토니오는 우라칸에서 1943년까지 머물렀고 자유계약으로 풀린 후엔 우루과이의 데펜소르와 아르헨티나의 CA 반필드를 거쳐 친정팀 우라칸에서 1945년에 은퇴했다. 마지막 시즌의 성적은 5경기 5골이었다.
2.2.2. 국가대표
마산토니오의 알비셀레스테 데뷔전은 페루에서 열린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이었다.대회 개막전이자 첫 상대인 칠레를 상대로 이르헨티나는 8분 만에 아르투로 카르모나에게 선제골을 얻어맞았지만 4대1로 역전승을 거뒀다. 마산토니오는 이 경기에서 4번째 골이자 쐐기골을 넣었다.
마산토니오는 다음 상대인 페루에게는 해트 트릭을 기록하며 4대1 승리를 이끌었지만 숙명의 라이벌 우루과이전에서는 침묵, 0대3 패배를 당했다. 아르헨티나는 우루과이이에 이어 준우승을 차지했지만 마산토니오는 4골로 대회 득점왕에 올랐다.
마산토니오는 이후 여러 국가대표팀 친선 대회에 참가했지만 FIFA 월드컵은 물론 남아메리카 챔피언십과도 한동안 인연이 없었다.
마산토니오의 마지막 국가대표 무대는 1942년의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이 대회에서도 마산토니오는 7골로 득점왕[3]을 차지했는데 에콰도르전에서 4골을 터뜨린 경기가 백미였다. 아르헨티나는 에콰도르를 이 경기에서 12대0으로 난도질했다.[4] 하지만 아르헨티나는 마산토니오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또 우루과이에 밀려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마산토니오는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 19경기를 뛰었고 21골을 넣었다.
2.3. 사망
마산토니오는 1956년, 향년 46세로 사망했다. 사인은 암.우라칸은 그의 장례식을 맡아 치렀다. 그리고 이후에 기념비와 거리에 그의 이름을 헌정하는 등 여러 방식으로 그를 기리고 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볼호그의 기질이 있긴 했지만 노련한 중앙 공격수였다. 한 언론인은 마산토니오를 골대 40미터 안에선 베르나베 페레이라[5], 골대 앞 3미터에선 놀로 페레이라라는 평을 내렸다.4. 뒷이야기
- 마산토니오가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에서 기록한 253골은 리그 통산 득점 역대 3위 기록이다. 그럼에도 마산토니오는 리그 득점왕에 단 한번도 오르지 못했다. 그리고 소속팀 CA 우라칸 역시 그가 소속되었을 시기에는 우승 기록이 없다.
- 마산토니오는 권투광이기도 했다.
5. 수상
5.1. 선수
5.1.1. 클럽
-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준우승 1회: 1936 Copa de Honor(CA 우라칸)
5.1.2. 국가대표
-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준우승 2회: 1935, 1942
5.1.3. 개인
-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득점왕 2회: 1935, 1942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2] 나중에 두코는 우라칸의 회장에까지 취임한다.[3] 팀 후배 호세 마누엘 모레노와 공동 득점왕이 되었다.[4] 바로 이 경기가 에콰도르 축구 대표팀 역사상 최다 점수차로 패한 경기이다.[5] 루피노의 박격포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강력한 슈팅 파워를 가진 공격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