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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제도/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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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문과
2.1. 소과2.2. 대과
2.2.1. 초시2.2.2. 복시2.2.3. 전시
3. 무과
3.1. 초시3.2. 복시3.3. 전시
4. 잡과
4.1. 이과4.2. 이문과4.3. 역과4.4. 의과4.5. 음양과4.6. 율과4.7. 부정기과
5. 취재6. 음서7. 별시의 경우8. 시험 문제의 예

1. 개요

과거 제도의 분과에 관한 문서이다. 주로 조선에서의 상황을 다루며, 고려 시대의 모습에 대해서는 과거 제도/고려 문서를 참고할 수 있다.

과거제도는 크게 2가지로 나뉘는데 바로 '정과(正科)'와 '잡과(雜科)'이다. 정과는 오직 '문과(文科)'와 '무과(武科)'만을 지칭하는 말로, 그 외의 분과는 전부 잡과이다.

2. 문과

말 그대로 현대의 행정공무원에 해당되는 문관을 뽑는 시험이다.

다만 경국대전에 따르면 문과는 문관 관료 선발 시험인 대과만을 지칭하였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자면 유교 지식인으로서 능력을 시험하고 성균관 입학 자격을 부여하는 생원시와 진사시, 즉 소과는 문과에 해당되지 않는다. 하지만 대체로 문과를 치르는 사람이 소과를 치르는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여기에서 함께 묶어서 설명한다.

문과 대과에는 3년마다 치르는 정기시인 식년시와, 비정기시인 증광시, 별시, 알성시 등이 있었다. 문과는 초시, 복시, 전시 순으로 초시에서 각 도의 인구 비례를 고려하여 240명(성균관 50명, 한성시 40명, 향시 150명)을 1차로 선발하고, 복시에서 그 중 33인을 선발하였고, 전시에서는 등수를 결정해서 관직의 품계를 결정하였다.

이론적으론 양인 이상이면 응시가 가능하였으나, 양인은 대체로 농사를 지었기에 과거에 열중할 시간이나 체력도 없었는데다 자금도 없었다. 그래서 집안이 부유한 양인이나 양반이 주로 응시를 했다.

사실 조선시대의 책은 엄청 비쌌는데, 그 당시 인쇄기술도 변변치 않아서[1] 생산기간이 상대적으로 길었고, 그렇기에 대체로 관청 등지에 소규모로 보관되는 경우가 많았기에 구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책을 구하기 위해선 시간을 들여서 필사를 하거나 아니면 민간에서 비싸게 사야될 수 밖에 없는데 두 경우 모두 시간이 막대하게 소모되거나 아니면 돈을 막대하게 소모되거나 그랬기에 위에 언급된 부유한 양인이나 양반만이 이를 감당하면서 책을 구할 수 있었고, 이들만이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의 과거 제도
소과 초시 복시
소과 복시 합격자 200명은 성균관 입학 자격 부여
대과 초시 복시 전시
대과 초시: 성균관 유생으로 300일이상 출석한 자는 관시 응시 자격 부여(초시 합격 정원 240명 중 50명 배정), 소과 비합격자나 자격 미달 유생 등은 한성부시향시에 응시(나머지 190명 한성부 및 각 도별 할당)
대과 복시: 합격자 33관직 등용(가능)
대과 전시: 대과 복시 합격자 33명의 등수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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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소과

소과는 사서오경 등의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 능력과 지식을 시험하는 생원시와, 나 부로 문예창작 능력을 시험하는 진사시로 나뉘었고, 이들을 각각 통과하면 생원 혹은 진사라는 칭호를 받는다. 고려시대 명경과의 후신이 생원시고, 제술과의 후신이 진사시다. 현대로 치자면 9급 공개경쟁채용시험의 필기시험(1차)이나 7급 공개경쟁채용시험/5급 공개경쟁채용시험공직적격성평가(1차)+필기시험(2차)에 해당된다.[2]

법제적으로 생원과 진사는 동일하나 시대에 따라 더 우선시되는 시험이 달랐는데, 고려 후기까지만 해도 귀족들이 사장을 중시하던 문화가 있어 제술과(진사시)를 더 높이 쳤다. 하지만 조선이 건국되면서[3] 사대부들이 이러한 풍조를 없애려고 했고, 이후로는 생원시가 더 높게 평가 받으며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또한 소과 합격자들이 대다수를 이루는 성균관 유생의 자리 배치에서도 이러한 양상을 확인할 수 있는데,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300일 동안 앉는 자리의 순서가 생원이 진사보다 상석에 배치되었기 때문이다.[4] 결국 신분제였던 조선 시대에는 두 시험을 보는 계층에서 우열이 가려졌기 때문에 초기에는 생원시 쪽에 더 유능한 인재들과 명문가 출신의 자제들이 많이 몰려 더 어려운 시험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내려오면서 다시 경전에 대한 이해력과 지식보다는 사장(詞章)이 더욱 중시되었고 이때부터는 다시 생원보다 진사가 존경받게 되었다.

진사와 생원별로 1차시험인 초시는 한성시에서 200명, 지방의 향시에서 500명을 뽑아 각각 700명을 선발했으며 각 지방별로 인구비율에 따라 합격자 수를 분배했다. 현대의 지역인재전형으로 볼 수도 있다. 초시 합격자를 모아 2차시험인 복시를 통해 다시 각각 100명을 선발해 그 진사와 생원 합 200명을 소과 합격자라 불렀다. 2차 복시 합격은 당연히 지역 안배 없이 실력으로 200명을 선발했다.

합격자들은 길일을 택하여 생원은 동쪽에, 진사는 서쪽에 서서 국왕에게 절을 올린 뒤에 합격증서로서 백패와 주과(酒果)를 받았다.

초시에 합격하면 종9품을 받고 하급 관리가 될 기회가 주어지거나 성균관에 입학할 기회가 주어지는데, 하급 관리로 시작하면 디메리트가 엄청 컸기에[5] 대부분 성균관에 입학했다. 그래야 한양에서만 치러지는 비정기 과거 시험이나 성균관 유생들만을 위한 특별시험에 응시가 가능해서 쉽게 정계에 올라갈 수 있었기 때문.

다만 현재로 치자면 고위공무원에 해당되는 당상관은 과거 응시가 금지되었다. 당상관은 대부(大夫) 반열에 들었기 때문에 사족(士族) 지식인을 위한 시험을 칠 이유가 없다는게 공식적인 명분이었고, 실질적으로는 별도의 직급체계를 가져 품계가 상당히 높게 잡히는 종친·외척·부마 등을 겨냥한 것이다. 사실 현재도 고위공무원이 굳이 응시하지 않는 것처럼, 굳이 당상관이 과거 제도에 응시할 명분이 없기도 한다.

2.2. 대과

대과의 시험 과정
초시 관시
(50명)

(240명)
복시
(33명)
전시 갑과
(1위 장원, 2위 아원, 3위 탐화랑)
장원: 종6품[6]
2등, 3등: 정7품
한성시
(40명)
을과(차순위 7명, 4~10위) 정8품
향시
(150명)
병과(하위 23명, 11~33위) 정9품

유교경전 실력, 문예창작 능력, 대책 같은 논술 능력을 시험하였다. 원래는 정도전, 조준 등이 성균관에서 공부한 사람(관시 합격자)만 대과 복시를 칠 수 있도록 했지만, 세조조부터는 한성시나 향시 합격생도 응시가 가능해졌다.

2.2.1. 초시

1차시험인 초시는 총 240명을 선발했으며 관시, 한성시, 향시로 나뉘어졌다. 관시는 성균관 유생 중 우수한 사람만이 응시하여 50명을 선발했으며, 한성시는 서울에서 40명, 향시는 지방에서 150명을 선발하였다. 참고로 향시는 지역배당이 있었는데 각각 경기도 20명, 강원도 15명, 황해도 10명, 충청도 25명, 경상도 30명, 전라도 25명, 평안도 15명, 함경도 10명이었다.

2.2.2. 복시

2차 시험인 복시는 여기서 최종합격자 33명을 선발했으며, 이 명단에 들어가면 사실상 문과 합격 확정이었다. 3차 시험인 전시에서는 그 33명 사이에 등수를 결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몇몇 케이스에서는 복시와 전시를 따로 보지 않고, 한번에 치르는 형태의 시험도 있었다. 이를 별시라고 하는데, 생각보다 종류가 매우 다양하고, 각 왕의 시대별로 별시 체계를 수정하는 작업도 많이 해서 하나로 설명하기 어렵다. 별시 중에서도 일반적으로 증광시나 정시나 외방시, 혹은 왕실의 경사가 있을때만 하는 별시 등 종류가 엄청나게 많다. 이 항목의 과거시험은 식년시(3년마다 한번씩하는 정통 공채 과거시험)를 기준으로 하고 있기에 대과가 3단계지만, 별시에서는 초시와 전시만 하는 2단계가 많았고, 시험방식도 식년시의 복시와 묘하게 다른 부분이 있었다.

2.2.3. 전시

왕이 직접 나와서 문제를 내는 전시에서는 대과 복시 합격자들이 대책에 대해 써 올렸는데, 그것은 현실의 정책이나 문제되는 사안에 대한 국왕의 질문에 답하는 것이었다. 이를 책문이라고 한다. 왕의 심중을 제대로 헤아리면 장원이 될 확률이 높은 것이다. 현대로 따지면 5급 공개경쟁채용시험/7급 공개경쟁채용시험에서의 3차 시험(면접) 혹은 9급 공개경쟁채용시험에서의 2차 시험(면접)에 해당된다.

3차 시험인 전시는 합격자의 순위를 정하는 시험으로 왕이 직접 주관했으며 성적순으로 갑과에 3명, 을과에 7명, 병과에 23명을 배정했다.
다만 장원이 얻는 종6품과 병과가 얻는 정9품 사이엔 5계단 정도였고(정9-종8-정8-종7-정7-종6), 이 사이의 시간 간격이 7년 정도로 꽤 컸다. 지금으로 치자면 5/7/9급 공무원 시험을 같이 쳐서, 갑과에겐 5급(사무관)을, 을과에겐 7급(주사보), 병과에겐 9급(서기보)을 줬다고 보면 된다.[7] 특히 조선 초기는 몰라도 중기엔 과거 합격자가 과잉공급 되어서 적체되었는 바람에, 갑과만 임용이 확정되고 을과와 병과는 이조의 관직 임용을 받을 기회만 주어진 일종의 후보자 신분으로 임용대기 상태였다. 이때는 갑과와 조상 4대조 중 관리가 있는 사람이 우선적으로 임용되었기에, 만약 권율처럼 명문가 태생이라면 병과라도 임용이 확정되었지만, 한미한 가문이라면 늙을 때까지 관직에 못 올라가는 경우도 꽤 있었다. 괜히 장원을 원하는 게 아닌 것.

이이의 경우 과거시험에서 9번 모두 장원급제를 하여 구도장원공이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로 과거시험에서 전설적인 업적을 남겼다. 여기서 9번은 정말 과거시험 자체를 9번 본 게 아니라 2번 치러지는 과거시험의 여러 예비시험과 본시험을 아울러 9회 장원을 했다는 말이다. 물론 이것도 대단한 능력인 건 맞다.

당연히 과거 합격자가 많은 가문은 명문가로 칭송받았다. 전주 이씨가 가장 많은 문과 합격자(870명)를 냈고, 그 다음으로 안동 권씨(368명), 파평 윤씨(346명), 남양 홍씨(당홍계)(292명), 청주 한씨(292명) 순서다.# 덕수 이씨인 이순신의 후손들은 단 한 명만 문과에 합격했지만, 무과에서는 267명의 합격자를 배출했다. 이순신 항목에도 나오는 말이지만, 정확히는 직계인 '충무공파'에 국한된 얘기. 율곡 이이의 후손들이어서 문과 쪽인 문성공파의 경우에는 정반대다.

야샤에서는 왕이 암행을 나갔다가 어떤 유생한테 좋은 이미지를 얻어서 돌아온 다음 갑자기 별과를 실시해 그 유생의 맞춤형 문제를 줘서 급제시켰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많다. 예를 들어 숙종에 관한 야사 중 암행 나갔을 때 어떤 곤궁한 집에서 머리를 가린 며느리과 아들이 시어머니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고 시어머니는 그들을 보며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아들에게 까닭을 물어보자 아들이 집이 가난해서 며느리가 머리카락을 잘라 시어머니의 생신상을 차렸는데 그걸 알게 된 시어머니가 며느리에 대한 안쓰러움에 생신상을 받고도 울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숙종은 나중에 과거시험에서 "한 노파는 울고, 젊은 여중은 춤을 추고, 사내는 장구치며 노래한다"라는 주제를 내놓았는데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은 제대로 된 답을 쓰지 못했으나 아들은 정확한 답을 적어 급제했다는 이야기다.

3. 무과


말 그대로 현대의 직업군인(부사관/장교)에 해당되는 무관이 되려는 시험이다.

한국사에서 처음으로 무과가 시행된 것은 고려예종(고려) 때인 1109년. 그러나 1133년 고려 인종(고려) 때 무과가 폐지되고 공양왕 시기인 1390년에 무과 시험이 열리기 전까지 무과가 열리지 않았다.[8]

고려가 멸망하고 들어선 조선에서 고려와는 달리 태종(조선) 2년(1402) 첫 무과가 치러진 후 계속 무과가 유지되었다.#

다만 같은 급수면 직업군인과 일반 행정공무원의 대우가 유사한 21세기와 달리 문을 더 중시했던 조선이니만큼 문반에 비해 대우가 좋지 않았다. 무관의 최상급 관직인 도총관(都摠管)은 정2품으로 정1품까지도 관직이 존재하는 문관보다 낮은데다가 그런 자리조차 대부분 문관에게 맡기는 경우가 많았고 순수하게 무과에 급제한 무관의 경우 관직으로는 정3품 당상관 절충장군이 한계였다. 이순신 장군이 받은 삼도수군통제사조차 종2품에 불과했다.[9] 다만 그렇다고 이들을 무시한 건 아니었는데 고려시대 중기에 이미 한 번 무시했다가 난리난 일이 있었던데다, 조선의 태조인 이성계도 신흥 무인 세력이었기에 무반을 무시하는 건 사실상 태조를 낮잡아 보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는 관직과 품계가 다른 경우도 많았는데 관직상으로 순수 무반의 관직은 정3품까지였다. 하지만, 무과 급제자가 그 이상 승진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었는데 이 때는 문관의 품계(문산계)를 받았다. 즉, 품계만 문관의 품계를 받을 뿐이지 무과 출신자도 고위직으로 승진이 가능했으며 이런 경우는 당연히 품계에 맞는 대우를 받았다. 이순신 장군도 관직은 종2품 삼도수군통제사였지만 품계는 문관의 품계인 정2품 정헌대부를 받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정2품에 해당하는 대우를 받았다.[10] 무과 급제자 중 최고위직에 오른 사람들 중에서 정승까지 오른 사람은 역대 7명 뿐이라 적었으나[11], 현대로 치면 국방부 장관이라 할 수 있는 병조판서(정2품) 중에는 무과출신자들이 여럿 있었다.[12] 또한 김성응처럼 판의금부사(종1품-의금부의 수장)에 오른 경우도 있었으며, 이징옥처럼 갑사 제직중에 무과에 급제한 뒤 종1품 숭정대부 겸 판중추원사(중추원의 수장)까지 출세한 경우도 있었다. 포도대장과 훈련대장[13] 역시 상당수가 무과 급제자 출신이었다. 그 밖에도 도원수, 순변사, 도총관(모두 정2품) 등 무반 출신이 자주 임명되는 직책도 많았다. 물론 문과 급제자들과 비교하면 무과 급제자들이 최고위직으로 승진하는 것이 드물었긴 하지만, 애초에 무과 출신이 전문성을 갖는 공직은 군사 분야에 한정되어있는만큼 심하게 차별대우 받았다고 하기는 힘들 것이다.

또한 무과가 사실상 없고 무관을 수시채용 형태로만 뽑은 고려시대에 비해 정기적으로 실시한 무과가 존재한다는 점은 꽤 발전된 모습이었다. 다만 실무 중심이던 군사분야를 유학적 지식이 요구되는 '무과'를 통해 유학자들이 몸쓰는 일까지 집어먹었다는 평도 있다.[14] 또한 문과보단 낮게 봐도 잡과보단 높게 봤는지라, 양반가 자제들이 의외로 많이 응시했으며, 이쪽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명문가의 비율은 매우 낮았고, 대신 양인이나 중인의 비율이 높았다.

특히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외세의 침입이 있던 이후 조선후기에 무과로 뽑는 인원이 크게 늘어났고, 이 때문에 시험의 난도가 상대적으로 낮아지면서 몰락 양반은 물론이요, 문과를 볼 수 없었던 서얼 등 중인들은 물론, 기존 양반 사대부들도 양반신분을 유지하는데 수월한 무과에 몰리고, 또한 전란시에는 광취무과라고 해서 면천된 천민에게도 응시자격을 부여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이괄의 난에서 공을 세웠던 정충신이다.

또한 나중에 와서는 면천이 안된 천민들도 불법적으로 응시하는 경우도 성행하며 무과 위상도 많이 떨어지게 된다. 어찌보면 양인들의 등용문이 된 격. 다만 무과는 초시라 해도 말을 다루는 능력이 필요했고, 격구와 마상육기는 고도의 몸놀림과 순발력이 필요한데다가 아차하면 낙마 사고의 위험성도 있었기에 마냥 보기 쉬운 시험은 아니었다. 또한 조선군 자체가 징병제를 채택했기 때문에 그 만큼 군대에서 무예 실력을 쌓은 경력자들도 덩달아 많았던데다가, 이들 경력자들이 명예를 얻기 위해서라도 무과에 도전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문과에 비해 덜했을뿐, 고인물들이 많아 만만한 시험은 결코 아니었다. 물론 군대에 다녀왔다고 해도 당연히 군인들이 죄다 말타는 기술을 배웠던 것은 아니라서 별도의 교육이 필요한 경우가 많았지만,그래도 명문가 자제들도 합격하기 어려운 문과나 기술을 몇년씩 익혀야 응시할 수 있던 잡과에 비해서 군대에서 익힌 무예실력과 요령을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글 좀 아는 평민들이 도전하기 쉬웠던 것이었다.

무과는 문과와 달리 소과가 없다는 점, 대과의 초시와 복시 선발인원이 50, 5명씩 감소한다는 점, 무과급제자는 종7품의 관직, 을과 출신에게는 종8품의 품계, 병과 출신은 종9품의 품계에 각각 제수하도록 규정되었다는 점, 전시에서 장원을 뽑지 않는다는 점 등이 달랐다. 다만 초시, 복시, 전시 3단계의 대과, 대과 합격자에게 홍패를 준다는 점은 문과와 같았다.

원래는 초시에서는 원시(훈련원시) 70명, 향시 120명 등 190명을 뽑았고, 복시에서 28명을 선발하였지만 전란이 일어난 이후로는 몇 백 명은 기본에 만명 이상을 뽑는 경우도 있었다. 실제로 명종때는 을묘왜변의 여파로 200명을 추가 선발하였고, 정묘호란이 일어난 인조 15년 별시(1637)때는 수천 명을 뽑았으며, 1676년에는 18,251인을 뽑았다. 이 때문에 만과라는 별명까지 붙었고, 조선후기에 무과의 위상이 쇠퇴한 원인이 되었다.

조선 초중기에는 합격하면 주로 종사관이나 변방의 만호 또는 부장 정도의 보직을 바로 받았으며 포교를 받는 일은 없었다. 종사관, 만호, 부장 등의 관직에서 어느 정도 복무한 후 능력에 따라 첨사나 부사 등으로 진급시켰다. 문제는 위에도 적은 것처럼 조선 후기로 갈 수록 인사적체로 발령이 날 지 모른다는 것. 수천명이나 만 명을 뽑았는데, 그 사람들이 전원 만호나 부장으로 발령날 리가 없다. 또한 문과하고 마찬가지로 관직에 오르더라도 임용적체로 인해 대다수가 말단직이나 떠돌다가 은퇴하기 일쑤였고 고위직으로 출세한 사람은 전란이 아닌 이상 손에 꼽는 수준이니 출세를 바라기에는 부적합한 시험이었다는 얘기이다. 그러나 아무리 무과의 위상이 쇠퇴하여 고위 관료가 되기는 힘들어도, 어쨌든 신분상승은 되는것이기에 홍패(합격증)을 받는것만으로도 만족해하는 경우도 많았기에 무과 응시자가 늘었다.

3.1. 초시

목전(나무로 만든 화살로 240보 거리에서 3발 채점)·철전(육량전, 아량전, 장전등을 쏘기)·편전·기사(말타며 활쏘기)·기창(말타며 창 다루기)·격구(말을 타거나 직접 뛰면서 막대기로 공을 치는 경기)가 시험과목이었다. 말을 타고 하는 기마 격구는 전투적인 성향이 강하고 경기를 하면서 말을 자유자재로 다루기에 나중에 마상 무예를 배우는데 유용하여 시험과목에 포함되었다. 지금으로 치자면 일부 직렬의 공무원[15] 시험에 존재하는 체력검정에 해당된다.

속대전 편찬 이후에는 목전·철전·편전·기사·유엽전(버드나무 모양 화살촉을 단 실전용 화살)·조총·편곤으로 시험과목이 바뀌었다.

3.2. 복시

병법서, 유교 경전, 무예가 시험과목이다. 무과 복시는 초장(주로 궁술), 중장(기사, 기창, 격구. 후기에는 격구가 빠지고 조총, 편추가 추가), 종장(병법, 유교경전), 세 시험점수를 합산하여 28인을 선발하였다. 식년 무과 기준이다. 별시는 상황여하에 따라 더 많은 인원을 선발한다. 무예와 관련성이 적은 유교 경전이 들어간 이유는 원래 무신들도 최소한의 교양은 있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들어간 것이며, 당연히 문과에 비해 난도가 크게 낮았다. 하지만 무과에 급제해도 어찌되었든 합격을 한 셈이니 양반자리가 유지된다는 점을 알아챈 양반들이 너무 무과로 몰리는 폐단이 발생해서 유교 경전의 비중이 점점 커졌다. 고려 중후반기까지 무신들 중 상장군, 대장군 같은 고위직들조차 대다수가 자기 이름 석자나 겨우 쓰면 다행일 일자무식들이었음을 생각하면 꽤 진보한 부분이긴 하다. 지금으로 치자면 공무원 시험의 지력시험에 해당된다.

병법으로는 손자, 오자, 육도삼략, 삼십육계 등 무경칠서 중 1권, 유교 경전으로는 사서(대학, 중용, 논어, 맹자) 오경 중 1권, 통감 ,역대병요, 장감박의, 소학 무경 중 1권을 선택해 주관식으로 시행되었다고 하며 경국대전도 시험과목이었다. 사실 현재도 장교나 부사관이 되기 위해선 어느정도 문무겸비가 되어야 하고, 경찰공무원이나 소방공무원 등 일부 특정직 행정공무원이나 교정직 공무원 등 공안직 공무원도 행정학을 본다는 점을 감안하면 현대에도 이어지는 셈.

윤승운 화백 만화 맹꽁이 서당에서 공부를 싫어하는 맹꽁이 서당 학동들이 우리는 돌머리이니 차라리 무과를 택하겠다하여 칼싸움하고 이러는데 무과는 공부 안해도 무술을 잘하면 급제한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물론 작중에서는 천자문도 다 안뗀 주제에 과거시험을 보러가기도 했던 아해들이기는 했다만. 요즘 무과와 비슷한 사관학교 입학시험이나 장교시험도 기본 교양이나 군사학에 대한 지식도 있어야 하고 입시 시험도 빡세다. 그리고 맹꽁이 서당 학동들이 글을 게을리 하는데 만약 저렇게 글공부를 게을리하여 최소한 진사시에 붙지 않으면 양반 계급이 날아가고 글공부보다 더 힘든 군역이나 부역을 짊어지는데 다치거나 죽을 위험이 있다.

비교적 설명이 적은 무예 역시 현대인 기준으로는 괴악한데, 기마술이 얼마나 아크로바틱한지는 마상재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현대의 마장마술과 비슷하지만 아예 말과 혼연일체되어 안장에서 덤블링(!)을 넘는 수준이다. 말을 그렇게 타면서 활을 쏘아서 명중을 내고(기사) 장병기를 다루거나(기창) 구기종목을 한 것(격구)이다. 활쏘기 역시 현대에 전래된 국궁과는 파운드 수가 달랐으며, 조선에서 비교적 비중이 적었던 검법에도 칼을 하늘 높이 던졌다 받는 것이 있는 등 전근대 직업군인들에게 요구된 무예 소양은 만만하지 않았다.

3.3. 전시

기격구와 보격구, 즉 마상 격구랑 보행 격구가 시험과목이다.

왕 앞에서 치르는 시험으로 복시에 합격한 이들을 따로 모아 치르며 합격 여부를 결정하는 시험은 아니었고 1등부터 마지막 등수까지 순서를 정해 인사를 배치하는 시스템이었다. 전시에서 상위권 성적을 받으면 보통 금군이나 장용영 등 국왕 직속부대로 배치가 되었고 그다음으로는 오위&오군영 - 지방 - 국경 or 수군으로 배치가 되었다고 한다. 금군이나 장용영 등 국왕 직속부대는 당연히 국왕과 가깝고 서울에 주둔했기에 진급이 빠르고 급여도 높은 편이었다.[16]

4. 잡과

잡과(雜科)는 궁중과 6조, 지방관청에 속한 아문과 속사(屬司)의 관리를 선발하는 분야이다. 오늘날로 치자면 통번역사, 외교관, 연구원, 의사, 약사 같은 전문직 시험이나 조리, 시설관리 등 기술직렬 공무원이나 자료를 기록하거나 연구하는 연구직공무원을 뽑는 시험에 해당된다.

지금이야 기술직렬이나 전문직렬이 동일한 급수의 행정직렬과 같은 대우를 받지만 그 당시는 성리학 기반의 국가인 조선시대이기에 문과보다 낮게 봤다. 다만 향리의 자손이나 서얼, 혹은 이들의 자손 같은 중인은 문과를 치지 못하기에 무과와 같이 가장 많이 노리는 시험이기도 하며, 실제로 이것으로 먹고 사는 경우도 꽤 있었다.

잡과에는 고정적으로 시험이 실시되는 분과와 그렇지 않은 분과(일명 부정기과)가 있었는데, 일단 고정적으로 실시되는 분과는 1392년 제정된 입관보리법(入官補吏法)에서 처음 규정되었다. 이 당시에는 이과(吏科), 역과(譯科), 의과(醫科), 음양과(陰陽科)가 고정적으로 실시되었다. 이후 제정된 경국대전에서 이과 대신 율과(律科)가 들어가며, 역과, 의과, 음양과, 율과가 고정적으로 실시되었다. 하지만 이 네 가지 분과만으로는 수십개의 아문과 속사에서 필요한 전문 기술 관원을 확보할 수 없었다. 때문에 관원이 필요한 속사에서는 잡과가 실시될 때 꼽사리끼는 방식으로 관원을 선발, 확보하였다.

다만, 여기서 고정적으로 실시된다는 것은 일정한 시기마다 실시된다는 것이 아니라, 4개 분과 시험의 제도와 실시가 법제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현대 대한민국에서 기술직 공무원이나 연구직공무원을 뽑을 때도 행정공무원이나 부사관/장교처럼 상시적으로 모집하는 게 아니라 소수만 그것도 상시적으로 뽑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과 마찬가지로 보면 된다.그래서 문과 정도는 아니었지만 경쟁률이 매우 높았다.

참고로 문과와 무과와 다른 잡과만의 특이한 체계가 있었는데, 바로 부분점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참고로 아래에 나온 모든 시험엔 통(通)·약(略)·조(粗) 등 등급이 있었으며, 통은 2분(分), 약은 1분, 조는 반분으로 계산하는데 지금으로 치자면 문제에 대한 대답을 잘했냐에 따라 배점 4점 만점에 4점,2점,1점,0점으로 나눠서 매겼다고 보면 된다. 최종 성적에 따라 1등은 종8품계, 2등은 정9품계, 3등은 종9품계를 주어 임시 관직인 권지(權知)로 임명하였다.

잡과는 당연히 문과와 무과와는 차별을 받았으며, 시험 제도와 관직 제수에서 그 차이를 보인다. 문과와 무과는 예비시험을 거치고, 대과에서도 전시를 거쳐 왕이 직접 순위를 정해주는 형식을 취했으나, 잡과는 예비시험이 없고, 본시험도 초시와 복시로만 이뤄져 있었다. 부정기과는 초시와 복시로 나누지 않고 단 한 번의 시험만으로 합격자를 뽑기도 했다. 또한, 합격 증서인 백패(白牌)에도 문과와 무과에는 어보(御寶)를 찍어줬으나, 잡과에는 예조인(禮曹印)만 찍어주었다. [17]

잡과 내에서도 어느 정도 서열이 있었다. 역과가 으뜸이었고, 음양과, 율과, 잡과가 그 다음, 부정기과가 말단이었다. 이는 성적에 의한 품계 서평에서 드러난다. 역과의 1등은 사역원의 종7품을, 2등은 종8품을, 3등은 종9품을 받았다. 다른 잡과의 1등은 종8품, 2등은 정9품, 3등은 종9품을 받았다. 부정기과는 정9품 혹은 종 9품을 받았다. 애초에 부정기과는 최종 선발 인원이 1~2명에 불과했기 때문에 최말단의 품계를 받았다.

조선 중기 이후 잡과의 경쟁이 치열해지자, 바로 잡과에 응시하기보다는, 후술할 취재에 들어 녹봉도 받고 기술 실무를 쌓으며 공부해 잡과에 응시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또한, 조선 후기의 잡과에서는 세습의 경향이 짙어지는데, 마땅한 기술 교육기관이 전무하던 당시엔 선대로부터의 도제 교육이 유용한 잡과 준비 수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4.1. 이과

경국대전 편찬 이전에 잠시 치렀으며 원래는 취재로 뽑았던 중앙에서 일하는 하급관리인 서리와 중간관리직인 녹사를 뽑기위해 치렀던 시험으로, 지금으로 치자면 말단/중간관리직 공무원을 뽑는 9급 공개경쟁채용시험, 7급 공개경쟁채용시험과 비교가 가능했다. 아래에 언급된 율과는 원래 이과에 속했다. 1등에겐 가객고승동정(架閣庫丞同正), 2등에는 부승동정(副丞同正), 3등에는 녹사동정(錄事同正)을 줬으며, 나머지에겐 그냥 백패만 줬다. 그리고 여기에서 뽑힌 사람은 일명 거관이란 제도를 통해 수령으로 특채될 기회가 주어졌다.

다만 아전 항목에서 보듯이 녹사나 서리로 선발된 사람은, 문과/무과 등으로 정식으로 선발된 사람보다 승진 등이 느린 등 많은 불이익이 있었으며, 설령 거관을 하더라도 경쟁자가 너무 많아서 수령이 되기 힘들었다.

경국대전 편찬 이후 이과에서 율과가 독립해 나갔고, 이들은 다시 녹사취재/서리취재로 선발방식이 바뀌면서 소멸되었다.

4.2. 이문과

외교 문서를 관리하는 관리를 뽑는 시험으로, 지금으로 치자면 역과와 같이 외교관후보자 선발시험과 비교가 가능했다. 다만 이과와 같이 조선시대 초반 약 40여년간만 시행되었으며, 지금의 외교부에 해당되는 외교문서를 담당하는 승문원 (承文院)이 탄생한 이후엔 그냥 문과의 선택과목으로 해서 모집하는 것으로 바뀜으로써 소멸되었다.

4.3. 역과

역과는 통역사외교관역관을 선발하는 시험으로, 사역원(司譯院)에서 주관하였다. 지금으로 치자면 통역사 & 번역사 시험에 가까웠다.

시험 과목은 중국어(한학), 일본어(왜학), 몽골어(몽학), 만주어(여진학)가 있었는데, 한학은 초시에서 45명(한성시: 23명, 해주시: 7명, 평양시: 15명)을 선발하고, 복시에서 13명을 선발했다. 왜학, 몽학, 여진학은 각각 초시에서 4명, 복시에서 2명을 선발했다.[18]

사역원에 입사하는 조건은 매우 까다로웠다. 현직 역관의 추천이 있어야 되며 심사위원에 해당되는 사역원 관리 15명 중 13명의 동의를 받아야 입사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세종조에는 한학부가 사실상 차이나타운(...)이 된 적 있었다. 한학부에서 중국어를 안 쓰고 한국어를 쓰다가 걸리면 군대로 내쫓아버렸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있었다.

특히 조선 중기 이후 주변 외국과의 교류가 증가하면서, 통번역 수요가 증가하고, 이 과정에서 역관의 지위가 상승하게 된다. 또한, 통번역 업무를 수행하면서 비공식적인 수입을 창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인기가 높았다. 실제로, 초시 합격 자격만으로도 품계는 받을 수 없지만 변경 지역의 관청에서 통번역 품을 팔거나 개시(開市)와 후시(後市)에서 무역을 하며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말기엔 특정 역관 가문이 차지하는 세습직이 되었다

4.4. 의과

의과는 의원(의사)을 선발하는 시험으로, 내의원이 아닌 전의감에서 주관하였다. 초시에서 18명을 선발하고, 복시에서 9명을 선발했다.

드라마에서는 의과에 합격하면 내의원에서 바로 근무하는 것처럼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매우 어려웠다. 내의원 정원 자체가 20명이 채 되지 않았고, 그 중에서도 순수 잡직은 10명 내외였기 때문에, 대부분 혜민서나 활인서에서 근무했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지방 감영에서 근무하는 경우도 많았다. 지금으로 치자면 국립 보건소에 근무하는 의료직 공무원에 가깝다고 보면 된다.

4.5. 음양과

음양과는 관상감에서 주관했는데, 천문학, 지리학, 명과학(命課學)으로 나뉜다. 천문학은 초시에서 10명을, 복시에서 5명을 선발했고, 지리학과 명과학은 각각 초시에서 4명, 복시에서 2명을 선발했다. 음양과에 합격하면 지관(地官)으로 일했다.[19] 지금으로 치자면 기상직 공무원이나 지적직 공무원에 가깝다고 보면 된다.

4.6. 율과

원래는 선술한 이과에 속했지만, 경국대전 시행 시기에 독자적인 과로 독립하였다. 율과는 형조에서 실시했고, 초시에서 18명을, 복시에서 9명을 선발했다. 그리고 복시에서 선발된 인재는 법원 실무를 담당하는 율관이 되었다. 지금으로 치자면 법원에서 실무를 담당하는 법원공무원과 같다고 보면 된다.[20]

시험 과목은 명나라의 법전인 대명률경국대전, 당률소의,무원록,율학해이,율학변의 등 법학 관련 과목들이었으며. 영조 이후엔 대명률, 무원록, 경국대전으로 축소되었다. 참고로 율관은 상한선이 있었는데, 바로 종6품이었다. 즉 아무리 잘해도 참하관이 끝이었던 것.

4.7. 부정기과

이 밖에도 요리, 미술, 음악, 수학, 도서 관리 등 여러가지 기술 관련으로 전문직 관리를 선출한 기록도 있었다. 즉 현대의 연구직공무원이나 타 직렬의 기술직 공무원을 선출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5. 취재[21]

일명 특별시험으로 분류가 되며, 중앙의 하급관리인 서리와 녹사, 그리고 양반의 자손, 친척에게 관직을 주기 위해 치른 시험이다. 아래의 음서와 마찬가지로 품계의 상한이 있었다.

참고로 아전 항목에서 보듯이 녹사와 서리도 처음엔 취재로 모집을 했었지만, 이후 이과로 모집을 했으며, 그 뒤엔 다시 취재로 모집방식을 바꿨다.

참고로 취재 출신자는 녹봉은 받을지라도 문·무반의 품계를 받을 수 없었다.[22] 잡과 출신자는 문과와 무과에 비해 차별은 받았을지라도 과거라는 정규 시험의 합격자이기 때문에 취재 출신자는 잡과 출신자보다도 안 좋은 대우를 받았다. 잡과 출신자는 자신의 임용 성적과 근무 여하에 따라 당상관의 지위를 얻어 반상의 지위에 들 기회[23]를 얻어볼 수라도 있었지만, 취재 출신자는 과거 전시에 합격하지 않는 이상 꿈도 꿀 수 없었다.[24], 그래서 취재로 들어와서 잡과를 도전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

6. 음서

고려시대까지는 반드시 과거에 합격하지 않더라도 문벌귀족의 초필살기 음서를 통해 바로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고위 공무원이면 그 빽으로 관리가 되는 것. 그야말로 합법적 혈연 낙하산인데, 오히려 뭐하러 힘들게 과거 봐서 관직에 오르냐는 말이 돌 정도로 음서를 통해 관리가 되는 것을 부끄러워 하기는 커녕, 음서 출신이 과거를 합격해 실력으로 들어온 관리들을 제치고 재상 반열에 오르는 일도 있었다. 딱히 과거 급제를 안 해도 명시적인 진급 상한선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과거 급제자 출신에 대한 명예와 예우는 분명히 있었다. 후대인 조선시대보다는 못하다곤 해도 고려시대에도 음서로 관직에 진출하는 것을 떳떳치 못하게 생각하는 인식이 있었고, 권세 있는 문벌귀족, 권문세족 가문에서도 능력만 되면 자식들이 과거로 입신하길 원했고 또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음서로 일단 관직에 진출한 후에도 과거 공부를 계속하여 과거에 합격하는 사람도 꽤 있었고 과거 급제를 했다는 것은 충분히 능력이 있다고 볼 수 있어서인지 과거 제도 시행 이후 최고위 관직 재임자 상당수가 음서 출신인 과거 급제자였다. 단순히 가문이 좋다고 올라온 게 아니라 개중에서 실력이 확실히 있으니까 올라온 것이다. 또한 시험 감독관인 지공거 같은 일부 관직은 과거 급제자만 맡을 수 있기도 했으므로 과거 급제는 명백히 내세울만한 것이다.

거기다 과거 급제자는 오늘날의 공무원 시험의 합격자처럼 일정 품계 이상 관직부터 출발한 반면 음서는 과거급제자보다 훨씬 낮은 말단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고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당연히 과거 급제자가 승진이 빨랐다. 단 음서는 일반적인 과거 급제자의 급제 시 연령보다 더 빨리 받을 수 있어 음서로 말단이나마 관료 경력과 경험을 쌓고 보는 것은 확실히 이득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음서를 받았다는 것은 본인이 잘하고 말고 이전에 음서도 받을 정도로 위세가 좋은 가문이라는 말이기도 하므로 나중에 과거 급제를 해서 충분히 능력을 보이면 딱히 타 급제자에 비해 꿀릴 것도 없는데다 가문의 후광까지 받을 수도 있다.

조선 초 명정승으로 유명한 황희도 원래 고려말 음서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는데, 그 당시에 처음 받은 것은 품계도 없는 말단 하급직이었다. 이후 관직 생활 도중 과거에 급제하여 개경의 중앙 공직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고려시대에 이름을 날린 인물 중에서는 이렇게 음서로 관직을 시작했다가 이후 과거에 급제한 경우가 상당수 있다. 고려 후기 대표적인 권문세족 가문 출신인 이인복, 이인임 형제를 보면 이 집안은 상당한 권문세족 가문이었지만 이들 형제 역시 음서가 아닌 과거로 공직에 나가기 위해 노력했고 이인복은 과거에 합격했으나 이인임은 실패하여 음서로 관직에 진출했다. 당연히 과거급제자 출신인 이인복의 출세가 초기에 훨씬 빨랐다. 이인임은 나중에 출세했지만, 초기에 그의 승진은 더뎠고 이후 공민왕기를 거치며 정치9단 이인임 특유의 처세술로 성공하게 된 것이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 관료제가 보다 세련되게 발전했고, 과거 제도 또한 체계적으로 발전하면서 음서를 통해 관료가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게 되었다. 당장 음서 출신 관료들을 문음이라고 칭하며 명칭도 바뀌었을 뿐더러, 조선시대에는 2품 이상 관료의 아들만 음서가 가능했으며, 거기에 음서를 통해 관직을 얻으려고 해도 문음취재란 시험을 봐서 합격해야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다. 당연히 고려와 마찬가지로 음서로 처음에 받을 수 있는 품계도 제한적이었다. 처음 받을 수 있는 가장 높은 품계가 이론상 과거 급제자와 마찬가지로 6품 밑이긴 한데 일반적으로는 급여조차 없는 말단직밖에 못 받았다. 과거 급제자에 비하면 승진이 상당히 어려웠던 것은 두말 할 것도 없고 청요직은 완전 봉쇄에 정3품 당상관 이상 진출하지 못한다는 진급 상한선까지 생겼으며, 더군다나 고려시대와 달리 과거로 들어온 사람보다 낮게 대우하는걸 거의 당연시 여기는 풍조가 팽배했다. 따라서 문음으로 관직에 들어오더라도 다시 공부해서 과거를 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제약이 훨씬 널널한 고려시대조차 음서로 관리가 된 사람이 과거 급제를 하는 사례가 꽤 있었고 음서 출신 고위 관료도 대부분 나중에 과거를 다시 쳐서 합격한 사람들임을 생각하면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

심지어 금수저 오브 금수저라 할 만한 어지간히도 권세를 누리는 사람마저 이걸 피해갈 수가 없었고 과거 급제를 해야 제대로 대접받았다. 대표적으로 그 유명한 한명회는 할아버지가 명나라에서 조선 국호를 받아온 한상질이며 작은 할아버지는 개국 3등공신인 명문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음서로 등용되자 개성에서 경덕궁직이라는 말단관직을 전전했고 같은 관료들 사이에서도 왕따를 당했다. 한양 출신으로 개성에서 근무하는 관료들이 '송도계(松都契)'라는 친목계를 만들었는데, 한명회도 한양 출신이라 가입하려고 했지만 경덕궁직도 벼슬 축에 드냐며 끼워주지 않았다.

예외적인 사례가 바로 정약용의 아버지 정재원이다. 8대 옥당이라 하여 8대가 내리 홍문관 관원을 지냈던 후덜덜한 문벌의 덕을 받아 음서로 관직에 올랐는데, 영조가 과거에 다시 응시하여 고관으로 나아가기를 여러번 권유했지만 '이미 은혜를 입어 음서로 출사했는데 높은 관직을 구하여 다시 과거에 응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이유로 끝까지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그래도 과거 급제도 안 했는데 정3품인 광주목사까지 역임했으니 상당한 고위직까지 진출했다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예외로 영조시대의 화가인 겸재 정선이 있는데, 이 쪽은 음직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해서 과거급제 없이 종2품까지 오르게 된다. 왕도 정치를 표방했던 조선시대엔 당연하리만큼 왕과 세자의 스승이 매우 좋은 대우를 받았고, 정선이 왕의 스승이었기에 가능했던 사례라 보면 된다.

이렇게 된 이유는 고려 시대부터 음서 출신은 외교문서 작성 업무, 대간직, 지공거 등 높은 학문이 필요한 분야에는 임명을 받을 수 없는 제한이 있었는데, 음서 출신은 과거 출신 만큼 공부를 많이 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조선시대에는 이런 제한이 한층 강화되어 청요직에 나가는 것이 근본적으로 막혔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청요직을 통과하지 않으면 고위직으로 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 음서의 가치가 낮아진 것이다. 그래서 과거를 통과한 이들만이 당당하게 관료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조선 말기에 이르면 다시 분위기가 역행하여 고관대작들의 자제들이 음서로 관직에 나가려는 경향이 서서히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이 시기에조차 고위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방법은 어디까지나 과거였으며, 바로 이것이 조선 말엽에 과거제의 폐단이 대두되며 과거 시험이 막장이 된 주요한 원인 중 하나다. (과거가 중시되지 않는다면 음서 카르텔이 과거를 무시하며 자기네들끼리 관직을 물려주면 되는데, 그걸 못 했다는 이야기다.) 그 김좌근조차 순조 때 김조순의 회갑 선물로 6품직에 제수되었으나 이후로 별다른 관직생활을 못하다가 헌종 때 과거 급제를 하고 나서야 폭풍승진을 거듭했다.

7. 별시의 경우

위 내용들은 정통 공채 과거시험인, 3년에 한번만 치러지는 식년시[25]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과거 제도에서는 공채시험에 해당하는 식년시가 아닌, 특채공무원 시험에 해당하는 과거시험(별시)의 종류가 다양했으며 조선후기로 갈수록 별시 비중이 높아졌다. 특히 임진왜란 직후에는 별시가 매우 많이 치러졌다. 애초에 공채가 3년마다 있다는 것 자체가 좀 비효율적인 면이 있다.[26]

별시를 치르는 게 그렇게 부담일 것도 없는 게, 현 대한민국의 수능처럼 출제에 큰 노력이 드는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소과의 출제범위나 패턴은 항상 한정적인데다가 대과의 최종과정인 전시라는건 왕이 직접 내야 하는 논술 문제[27]이기 때문에 현재의 공무원시험이나 수능시험처럼 출제위원이 필요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대과 초시만 집중적으로 빨리 출제 준비를 제대로 시키면[28] 단기에 과거시험을 하나 치르는게 가능했다.

8. 시험 문제의 예

위 서술한 과 중 전시의 문제의 예는 대략 다음과 같았다.

물론 진지한 문제만이 나왔던 것은 아니다.
조선 시대에서는 시, 글짓기 같은 문학적 소양 역시 관리의 능력이라고 평가했기 때문에 이런 것들도 영 이상한 질문이라고 볼 수는 없다. 조선 시대에서 격이 높은 문학이란 단순히 가사가 아름답고 운율이 아름다운 것을 넘어 과거의 다양한 고사에 담긴 내용을 적절하게 인용하고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표현해야 했기 때문에 시를 쓰는 사람의 교양과 지식 수준을 판단할 수 있었다. 정조의 뜬금없어 보이는 담배 찬양도, 실제로는 당시엔 상품 작물로서 수익이 매우 큰 담배 농사의 증가 때문에 정작 등 식용 작물의 비중이 줄어들자 이에 대한 찬반이 매우 거세지는 상황이라 이 담배 농사를 지지하면서 이를 해결할 방안을 찾아보자는 의도가 담겨 있다. 정조 본인이 애연가라는 점도 어느 정도 있었겠지만.

이명한의 <백주집>(白洲集) 중 '잡저'에 따르면, 광해군의 '세월이 흘러감을 탄식'에 대해선 당대의 문인인 이명한이 '사람이 세월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이지 세월이 사람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지 않습니다.(然則人能傷歲 歲不傷人)라는 답안을 제출했다. 이명한의 이 답안은 비록 장원은 못했지만 아원(亞元, 과거 급제자 중 차석)이라는 고득점을 받았다.
그 외에도 성리학적 이치에 관련된 대책도 출제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명종 13년(1558년)에 출제된 대책으로, "해와 달이 떴다 지는데 어떤 때는 낮이 길고 어떤 땐 밤이 긴데 왜 그런가? 일식과 월식은 왜 생기나? 밤하늘의 보통 별과 행성들의 움직임을 상세히 설명할 수 있는가?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별이나 혜성은 어떤 때에 보이는가?" 라는 무슨 과학 퀴즈 같은(...) 문제에 답변하는 과정에서 이이의 그 유명한 '천도책'이 나왔다. 당시 천도책을 본 시험관들은 '여러 날 밤을 새워 가며 문제를 만든 우리도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쓰지는 못한다.'라고 평했으며, 시험 답안지를 뛰어넘어 대학 교수의 연구 논문까지 초월하고 나아가 조선의 성리학계를 뒤흔들어 버린 수준에 유학자들을 놀라게 한 것은 물론 저 멀리 명나라에도 전해져서 조선으로 온 명나라 사신들도 이이를 찾았을 정도였다. 지금까지도 성리학 연구의 정수로 전해질 정도이니 말 다했다. 참고로 천도책은 세 시간 만에 작성되었으며 당시 이이의 나이는 만 21세로 지금으로 치면 대학생 혹은 군인 정도였다.


[1] 물론 직지심체요절이 구텐베르크이 인쇄기를 발명하기 전에 만들어졌지만, 대량생산기술은 아녔다.[2] 실제로 공직적격성평가는 사고력과 언어 능력을 보며, 필기시험인 경우는 해당 직렬에 필요한 지식 보유 여부를 평가한다.[3] 초기에는 진사시가 잠시 폐지되기까지 했다.[4] 1439년(세종 21년) 1월 11일자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예조에서 아뢰는 말 중에 "임금의 지시에 의거 진사를 생원의 아래에 앉게 하였습니다"라는 기록이 있다.[5] 일단 병과로 합격한다고 해도 정9품이 주어지는데, 이 두 계급의 차이는 2년이나 되었기에 경쟁에 불리했다. 게다가 중앙인 경우는 과거로 선발한 사람을 우선적으로 채용했기에 이 루트로 시작한 사람은 지방의 말단에서만 계속 왔다갔다하다가 은퇴하는 결말이 오는 경우가 많았다. 쉽게 말해 시도청이나 중앙행정기관에 못 들어가고 구청, 행정복지센터 등만 전전하면서 7~8급으로 은퇴하는 격이라고 봐도 무방했던 셈.[6] 문관 외관직 종6품 현감(縣監)이 이에 해당한다. 사또 항목 참고[7] 실제로 9급에서 5급으로 승진하려면 21-25년 정도 걸린다.[8] 공민왕 시기 무과 부활건의가 있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9] 다만 현대 대한민국도 군인은 총리, 장관까지 올라가지 못하고 기껏해야 국방부장관 정도가 전부다. 그나마 그 국방부장관도 하려면 군복 벗어야 된다. 어떻게 보면 '정상적인 국가'라면 원래 그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2.12 때 전두환이 현역 군인 신분으로 부총리급인 중앙정보부장을 맡은 적이 있긴 하지만 이때는 정상적인 국가 꼴이 아니라 막나가는 상태여서 생긴 예외였다. 그렇지만서도 조선시대 무인은 단순한 군인이 아니라 행정공무원의 면모도 있기 때문에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다.[10] 정2품 이상을 '대감', 정3품과 종2품을 '영감'이라고 불렀기 대문에 이순신 장군도 대감이라 불렸다. 이순신 장군의 품계는 옥포 해전적진포 해전으로 종2품 가선대부로 승진, 당항포 해전 이후 정2품 하계 자헌대부로 승진, 한산도 대첩 이후 정2품 상계 자헌대부로 승진했다. 다만, 정유재란 당시 선조백의종군 하던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임명했는데, 이 때 문관의 품계인 정헌대부는 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졸렬하다고 비판받고 있다.[11] 대표적으로 박원종, 신경진이 무과 출신으로 영의정을 역임했다.[12] 대표적으로 남이, 신헌, 김사우 등이 무과 출신으로 병조판서를 역임했다. 물론, 문과 급제자 중에도 병조판서를 맡은 사람이 많았으므로 무과 급제자만 병조판서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13] 포도청의 총책임자, 훈련도감의 실질적 최고 책임자. 둘 다 종2품. 대표적으로 무의공 이순신이 포도대장과 훈련대장을 모두 역임했다.[14] 사실 현대에도 부사관/장교 모집 과정에서 임기제부사관을 제외하면 단순히 체력이나 군사 능력 뿐만 아니라 국어/한국사 등 지식도 본다는 걸 감안하면 이런 경우는 조선시대에도 있었던 것이다. 또한 유학은 조선의 생활 전반을 지배하는 사상이었기 때문에 공직자의 윤리관을 평가하는 시험이었다고 볼 수 있다.[15] 경찰공무원, 소방공무원, 직업군인 등 체력을 요하는 특정직 행정공무원 혹은 교정직 공무원 등 공안직군[16] 오늘날에도 제1경비단 같은 대통령경호처 지원부대들은 군내에서 상당히 요직으로 알려져 있고, 국군기무사령부는 한때 사령관이 참모총장과 국방장관을 제끼고 대통령을 독대할 수 있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권력기관으로 꼽힐 정도였다. 그 비대함 때문에 문재인 정부에서 개혁 대상이 되어 군사안보지원사령부로 축소되었으나 윤석열 정부에서 국군방첩사령부로 다시 이름이 바뀌어 방첩 기능이 부활하였다.[17] 현재도 전문직 자격·면허증은 그 시험을 주관하는 주무부처 장관의 직인만 찍히는 것과 같다.[18] 즉, 역과는 왕 앞에서 시험을 보는 전시가 없었다.[19] 고려시대에는 일관(日官)이라고 불렀다.[20] 당시 판검사 역할을 하던 형조(대법원,고등법원) 관리나 아전(지방법원)는 문과, 이과(후엔 서리취재/녹사취재) 시험으로 뽑았다.[21] 取才, 참고로 뉴스 보도를 위해 정보를 수집한다는 뜻의 그 취재와 한자가 같다.[22] 사실 이들도 품계를 줬다. 잡직계라 하여 문·무반의 품계와는 명칭부터 달랐고 종9품에서 정6품을 끝으로 더이상 올라갈 수 없었으며 이들이 문·문반의 정직을 제수받으면 1품을 강등하는 차별이 있었다. 잡직계의 품계별 명칭은 산계 문서에서 다루고 있으니 참조바람.[23] 잡과 출신이어도 종5품 이상의 품계를 받는 경우 양반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다만, 이런 경우는 흔치 않았으며 그마저도 양반 가문 출신으로 잡과에 합격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적어도 양반 가문에서 서자는 돼야 기대를 해볼 수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허준이다.[24] 이 점에 대해서는 동반 잡직보다 서반 잡직의 형편이 더 나았다. 서반 잡직은 실력이 좋으면 무과 전시의 기회를 줬지만 동반 잡직은 국왕의 눈에 들지 않는 이상 꿈도 꿀수 없었다.[25] 12지의 자(쥐), 묘(토끼), 오(말), 유(닭)로 끝나는 해에만 치렀다. 이는 고려때부터 생긴 기준인데, 막상 고려때는 시기를 제대로 안 지킨 적이 많았고, 조선을 세운 태조가 정도전의 영향으로 정확히 정해서 잘 지키기 시작했다.[26] 공채의 주기가 길어지면 공무원 수가 급격히 줄어드는 일이 생길때의 변수에 대응하기가 어려워진다. 주기가 짧으면 바로 다음 시험에서 합격자 인원 수를 늘리면 되는데, 길면 중간에 특채를 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식년의 해에 변고가 나서 못 치르면 그대로 6년이 날아가버린다.[27] 주로 당시 시사 현안에 대한 자기 고민을 문제로 내는 왕이 많았다. 근데 이건 중국도 송나라 황제들 때부터 다 그 패턴으로 해오던 것이어서 조선만의 특징은 아니다.[28] 상당수의 별시에서 이 부분의 약점인, 급하게 준비된 대과 초시 문제가 평균보다 쉽게 나오는 상황을 보완하기 위해 별시 대과 초시 합격자들을 거를 목적으로, 합격자들에게 전시 전에 사서삼경 배독 시험을 치르게 한 경우가 많았다. 배독은 시험감독관이 무작위로 특정 책의 특정 부분(예를 들어 논어의 학이편)을 외우라고 시키면 그 부분의 한자들을 눈감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 글자도 안 틀리고 말하는 것이다. 4서 중 무작위 1권이 1차 시험이었고, 이걸 합격하면 2차 시험은 3경 중 응시자 본인이 하나의 책을 고를 수 있었다. 4서3경은 그래도 무려 대과를 보겠다는 사람이면 어느 정도는 다 외우기 때문에 난이도가 그렇게 높은건 아닌데, 한글자라도 틀리면 끝장이니, 긴장해서 틀리는 경우들이 있어서 정신력 테스트에 가까웠다.[29] 당연히 이 시점에서 말하는 것은 관학이다. 사학만 판을 쳐서 관학을 진흥시킬 방법은 과거 제도가 존재했던 모든 동아시아권 국가들에게 있어서 중대한 관심사였지만, 단 한 곳도 제대로 성공한 곳이 없다.그리고 이것은 수백 년이 지나고서도 성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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