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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2 19:32:51

예도

1. 예도(禮刀)2. 예도(銳刀)
2.1. 개요2.2. 역사2.3. 평가2.4. 여담2.5. 기원
2.5.1. 결론
2.6. 현대 중국 검술에 남긴 영향2.7. 검결가2.8. 초습2.9. 예도 28세
2.9.1. 예도에서 증보된 4세
2.10. 예도총도2.11. 복원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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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도(禮刀)

행사 때 양옆에 나란히 선 군인들이 서로 받들어 칼을 하여 입장객을 환영하는 것이다. 주로 결혼식 때 많이 볼 수 있다. 원래 군인들이 결혼할 때 하는 것으로 예도단 역시 군인들이 주로 하나 학생군사교육단, 부사관과 학생들이 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으며 요즘에는 결혼식장에서 다 알바생들 모집해서 한다. 결혼식신랑의 위신을 세워주는 역할로 특히 군사경찰, 해병대, 특전사 예도단이 들어오면 아주 멋있다.

국군의 예식도는 육군·해병대·공군의 것은 같지만 해군(해병대 제외)의 것만 조금 다른데, 더 길고 곧은 형태이다.

따로 옷은 정해져 있지 않고 각군 군복, 정복이나 학과 제복등을 착용한 상태에서 요대, 흰장갑, 어깨끈, 에 추가로 베레모자 등을 착용하면 된다. 서로 요대 높이 맞추면 처음 해도 대충 폼은 난다.

보통 행사 때는 받들어 칼만 하나 결혼식때는 예도단이 신랑신부 퇴장 시 앞을 칼로 가로막고 힘든 미션이나 짓궂은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이걸 다 통과 못하면 퇴장시키지 않는다. 미션은 보통 신랑에게 집중적으로 주어지나, 간혹 신부에게도 미션을 던지는 경우도 있다. 다만, 신부에게 주는 미션의 경우는 대체로 목청 테스트 정도의 가벼운 미션인 경우가 대부분이다.[1]

예도도 어디까지나 부부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기 때문에 너무 짓궂거나 창피한 미션을 줄 경우[2] 신랑/신부는 물론 참석한 하객들도 불편해질 수 있기 때문에 심한 미션들은 자제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열이 너무 길면 식이 필요 이상으로 길어지고 지루해지므로 보통은 5열 내외로 편성하며, 미션없이 그냥 통과시키는 열이 있을 수 있다.

2. 예도(銳刀)

무예도보통지
{{{#!folding [ 펼치기 · 접기 ] 1권 찌르는 무기 장창(長槍), 죽장창(竹長槍), 기창(旗槍), 당파(鐺鈀), 기창(騎槍), 낭선(狼先)
2권 베는 무기 쌍수도(雙手刀), 예도(銳刀), 왜검(倭劍), 교전(交戰)1
3권 제독검(提督劍), 본국검(本國劍), 쌍검(雙劍), 마상쌍검(馬上雙劍), 월도(月刀), 마상월도(馬上月刀), 협도(挾刀), 등패(藤牌)
4권 치는 무기 권법(拳法), 곤방(棍棒), 편곤(鞭棍), 마상편곤(馬上鞭棍), 격구(擊毬), 마상재(馬上才)
1:흔히들 왜검교전이라고 이야기하나 무예도보통지에는 '교전' 이라고만 되어 있다. }}}

2.1. 개요

무예도보통지 2권에 수록된 무예. 조선세법이라고도 부른다. 현재 기록을 통해 기법을 확인할 수 있는 한국 검술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중국 명나라 모원의가 천계 원년(1621)에 출판한 군사종합서적 무비지(武備志)에서 조선세법(朝鮮勢法)이라는 이름으로 24세[3]가 수록된 것이 기록상 가장 최초이다. 모원의는 원래 검은 실전에서 쓸 수 있었고 당태종에게는 1000명의 검사가 있었는데[4] 그러한 검술이 모두 실전됐지만 조선에서 되찾았다고 하면서 이를 무비지에 수록했다. 요컨대 조선에서 얻은 검술을 중국 무술서에 수록한 것. 그리고 조선에선 다시 이 무비지를 통해 조선세법을 익혔는데, 18세기에 이르러 무예도보통지를 만들 때 예도라는 이름으로 수록한 것이다. 따라서 이 검술은 조선세법, 예도 두 이름을 가지고 있다.[5]

무예도보통지에는 조선세법이 예도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그대로 수록됐는데, 이와 별개로 예도총도, 혹은 총보라는 투로 형식의 검보 역시 수록되어있다. 이 두 가지가 기술이나 구성 등이 꽤 다르다. 총도/총보는 18세기 중반에 고후점이란 인물에게서 비롯되어 군영에서 예도라는 이름으로 훈련되던 것이다. 자세한 것은 후술.

2.2. 역사

조선세법의 가장 오래된 기록은 상술한 것처럼 1621년 명나라에서 모원의가 어느 호사가가 조선에서 얻었다는 검보를 전해 받아 무비지에 기록한 것이다.

조선세법이 언제 명나라로 전해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시기를 고려하면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온 명군을 통해서 전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선조실록 31년(1598년) 4월 6일 기사에 임금과 대신들이 명군의 진법을 관람한 뒤 유격장군 진인에게 '우리나라의 칼 쓰는 법(我國用劍技)'과 마상재를 보여주어 호평을 받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 전래되었다는 설이 있다.[6]

조선 군용 서적에선 1790년 무예도보통지에 ‘예도’라는 이름으로 처음 조선세법이 수록되게 된다. 다만 조선세법이 '예도'라는 이름으로 수록된 것은 당시 군영에서 원래 수련되던 예도라는 검술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시에 고후점이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검술인 예도를 군영에서 훈련하고 있었는데, 무비지의 조선세법을 그 원류라 보고, 조선세법을 예도라는 이름으로, 고후점의 것은 예도총도, 혹은 총보로 수록한 것이다.

기록과 함께 자세히 설명하자면, 먼저 고후점의 예도에 관한 최초의 언급은 영조 10년(1734) 9월 29일 승정원일기의 기사에서 등장한다. 해당 기사에 따르면 훈련도감에서 말하기를 예도는 우리나라의 검술(本國劍藝)인데 전수자가 극히 드물어 관무재(왕이 친람하는 무술 훈련)의 과목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나 근년 이래 교사를 선발하며 군중에 계고하여 배우는 자가 조금 늘었다고 보고하고 있다.[7] 이 기사에 따르면 훈련도감에 예도가 나타나 도입된 것은 1734년이거나 빨라도 그 1년 전이라고 볼 수 있다. 이후 영조 10년(1734) 10월 8일 승정원일기의 기사에서 예도가 무관 고만흥(高萬興)의 아버지인 고후점(高厚點)[8]에게서 비롯된 검술이라는 언급이 등장한다. 어디에서 배웠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검술이 기이하여 훈련도감에서 80여명이 행하고 있다고 나온다. 이후로도 간간히 언급되었고 영조 35년(1759) 사도세자가 편찬한 무예신보(武藝新譜)에 수록된다.

상반된 출처를 가진 두 검술이 결합한 것은 정조 14년(1790) 무예도보통지 출판 당시였는데, 무비지를 참조하자 세법의 이름이 같은 것을 깨닫고 이를 수록하려 했지만 현재 하는 예도와 조선세법의 내용이 많이 달라서[9] 원전으로써 무비지 24세에 예도에서 하는 4세를 추가[10]해서 총 28세를 수록했고, 훈련도감에서 행하던 예도 훈련은 총도-총보의 형태로 수록했다.

즉, 무예도보통지에는 예도(조선세법)와 예도총도/총보(고후점의 예도), 이렇게 두 가지가 수록되어있다.

초창기에는 본국검이라는 단어는 무비지의 조선세법과 혼동해서 쓰인 듯 하다. 본국검과 제독검은 어영청사례에서 인조6년(1628년) 관무재 시험 과목으로 등장하는 것이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현종 14년(1673) 4월 1일자 승정원일기 기사를 보면 현종이 우리나라의 기예(本國技藝)를 시연하라고 하면서 먼저 본국검을 시연하라고 했다가, 어디서 나오냐고 무신 유혁연(柳赫然)에게 묻자 중국의 무비지에서 보았고 조선국도(朝鮮國刀)라고 쓰여 있었다고 대답하는 내용이 있다. 본국검은 단어와 초식을 보면 척계광의 기효신서, 한교의 무예제보에 수록된 장도와, 조선세법이 섞여 있으며 이 때문에 혼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세법이 공식적으로 조선의 무예서에 수록된 건 무예도보통지가 처음이지만, 그 이전에도 조선 군인들이 무비지를 보고 조선세법을 연구하거나 익히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위 문단에서 현종 때도 무비지에서 본 조선의 칼(조선세법)이라면서 조선세법을 시연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고, 예도, 본국검 등의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검술들에서 조선세법의 영향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2.3. 평가

조선세법을 기술적으로 평가하자면 다른 국가들의 일반적인 검술들에 비해 뛰어나지도, 떨어지지도 않은 무난한 양손검술이다. 물론 이는 딱히 조선세법이 무언가 떨어진다는 게 아니며, 다른 이름 있는 검술들도 비슷한 편이다. 무기술은 무기 자체가 기본적인 살상력을 제공하고, 무기에서 비롯되는 기술이나 동작의 차이가 크지 않으므로, 유사한 특성을 가진 무기를 사용하는 경우 무술 간의 차이가 그렇게 크진 않은 편이다.[11]

다만 여러 기술 중 허리치기(요격세)를 으뜸으로 삼으며 강조한다는 점이 조선세법 나름의 개성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세법이 허리 치기를 중시하게 된 이유를 당시 한반도에서 주로 사용하던 도검의 규격에서 찾는 시각도 있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한반도에선 전통적으로 활과 함께 운용하기 좋게 비교적 길지 않고 가벼운 칼이 선호되었다. 따라서 양손으로 쓸 수 있는 칼도 그렇게 규격이 크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12] 이로 인해 위력과 길이를 활용하는 전술보다는 아예 깊게 파고들어가 허리를 쳐서 상대를 1차적으로 제압 후 끝을 내는 전술이 중시됐을 것이란 추측이다. 이를 고려하면 조선세법이 허리치기를 중시하는 것은 한반도의 환경과 그에 따른 검리(劍理)가 반영된 결과라 볼 수 있다.

갑주를 입은 상태에서는 허리치기의 위력이 상당히 떨어지기 때문에 주로 평복을 대상으로 상정한 검술로 추정된다. 다만 그렇다고 군용으로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당장 조선세법의 첫 수록처가 군사서인 무비지이며, 조선 군인들 역시 이를 보고 익혔다.[13]

2.4. 여담

무비지에 수록된 원본 삽화에선 긴 양날검, 쌍수 장검을 사용하고 있지만, 무예도보통지에서는 일반적인 환도로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조선세법의 기술들은 외날검으로도 문제없이 검술을 구사할 수 있다. 참고로 조선세법이 성립되었을 시기는 검보에 사용된 용어들를 고려하면 대략 고려 중후기에서 조선 초 사이로 추정되는데, 사실 당시 동북아 국가의 군대에선 딱히 양날검을 사용하지 않았다. 다만 훈련 등에서는 양날검도 나름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후대인 숙종 대에 김체건이 만든 ‘교전’은 일본도 검술을 기반으로 만들었음에도 검보를 양날검으로 작성했고, 양날검으로 훈련했었다는 기록이 있다.[14] 아니면 그냥 평범하게 절대적인 주류는 외날검이긴 하나, 가끔 양날검도 썼을 가능성 역시 있다. 사실 개인 호신용으로는 종종 양날검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고 말이다.[15]

조선세법의 검이 양날인 이유로 무속인 사이에서 전해진 검술이라는 설도 있다. 무당들이 굿에 쓰는 신칼은 보통 짧은 외날곡도형 쌍도(雙刀)로 알려져 있지만 드물게 현대까지도 조선세법 규격의 양날검을 쓰기도 한다.* 군이나 민간에서는 버려진 기예를 종교인들이 보존하고 있는 경우는 흔한 편이긴 하다.

어쨌든 조선세법의 기술들이 외날검, 양날검 둘 다 무리 없이 구사할 수 있는 종류기 때문에 그렇게 중요한 부분은 아니다. 그리고 당시 무기체계의 특성상 조선세법을 사용한다고 해도 조선군이든 중국군이든 실전에선 그냥 외날검으로 구사했을 가능성이 높다.

무예도보통지에서 제시하는 예도를 사용할 때 칼의 규격은 날길이 3척3촌에 손잡이 1촌, 무게는 1근 8냥이다. 이 길이에 대해 과거에는 영조척으로 적용하여 날길이만 1m에 손잡이는 30cm의 큰 칼로 복원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 경우 무게 대비 지나치게 크기가 컸고, 유물이나 그림에서도 그정도 비율의 환도가 거의 없다는 문제가 있었다. 주척으로 환산할 경우 날길이 66~69cm에 자루길이 20~21cm 정도로 환산되며 이 정도의 규격은 그림이나 실제 환도 유물들 중에서도 자추 볼 수 있는 만큼 주척 기준의 규격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16]

사람 사는 곳이 다 비슷한 것인지, 언해본의 문장을 보면 현대 군대의 각개전투, 도수격투, 총검술이 담긴 전술학 교재 내지는 야전교범과 별 다를 바가 없다.(이 동작은 이러한 것이다. 먼저 A를 취하고 B 카운터가 들어오면 B'를 취하며 C로 마무리해라. 자세한 건 그림을 봐라.) 무예도보통지 역시 군사교범이었기에 당연한 수순이다.

2.5. 기원

조선세법이 조선에서 명나라로 건너간 것은 확실한 사실이지만, 자세의 명칭에 중국 무술식의 용어가 사용된 부분들이 꽤 있어 중국 무술과의 관계에 대한 가설들이 존재한다.

크게 세 가지 관점으로 나뉜다. 하나는 원래 중국에서 전해진 검술이라는 주장, 다른 하나는 중국 무술의 영향을 받은 한국 검술이라는 주장, 마지막으로 그냥 한국 검술인데, 기록된 검보의 용어와 설명만 중국식으로 되었을 뿐이란 주장이다.[17]
이화창과 소림곤법천종에서 발초심사는 무기를 낮게 두었다가 들어올리면서 옆으로 밀어내는 동작인데, 조선세법 점검세에서도 칼을 아래로 내린 그림에서 발초심사세를 거쳐 어거세로 전환하는 동작은 중국의 발초심사와 똑같다. 또 백사롱풍세는 봉두세에서 나타나는데, 이화창과 곤법천종에서 백사롱풍은 좌우로 섬잠화창하거나 아래로 내린 무기를 들어서 상대 무기를 옆으로 눌러 내리는 동작이고, 역시 봉두세가 위에서 아래로 쓸어내리는 기법임을 볼 때 조선세법의 백사롱풍세도 동작이 완전히 같다. 직부송서세는 중국 명나라 무술에서 주먹이나 무기를 찔러서 앞으로 뻗은 것을 말하는데, 조선세법에서도 똑같은 용례로 쓰인다. 조천세는 무기를 하늘로 들어올린 자세, 찬(鑽)은 찌르듯이 밀어 치는 것, 요(撩)나 략(掠)은 올려베기를 뜻하는 등 단어 몇개 수준이 아니라 전체적인 구성이 중국 명나라 무술과 똑같다.
따라서 단순히 단어만 영향받았다고 보기 어렵고, 몽골어모골어처럼 근연종 수준의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모원의가 이를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18] 어쨌든 중국의 검술을 상서, 등운에 비유하며 조선에서 되찾았다는 시각을 예전에는 그냥 중화사상 정도로 생각했지만 나름의 근거를 지니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후술할 여러 가지 반박 요소들 역시 조명되며 현재로선 조선세법이 중국에서 만들어진 검술이란 주장은 상당히 힘을 잃었고, 적어도 한국에선 이를 주장하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 현재는 아래의 두 주장으로 나뉘는 편이다.
일단 일부 자세의 단어가 일반적인 중국어 한문의 형식과 맞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 예를 들어 허리를 치는 자세인 요격세를 들 수 있는데, 중국 문법으로 따지면 요격세는 ‘허리로 친다’가 되어버리며, 허리를 친다는 의미로 쓸 때는 격요세가 맞다. 요컨대 요격세란 단어는 중국어 문법에 맞지 않으며 조선식 어순에 가깝다. 물론 중국에서도 강조 등을 이유로 가끔 어순을 바꾸는 경우가 있긴 있다. 하지만 세명은 그렇다 쳐도 자세를 풀어서 설명하는 부분에서까지 "요격세자, 즉요격야"라고 어순이 바뀌어 있는 것은 확실히 어색하게 느껴진다.
또 우수우각, 좌수우각 등의 주로 쓰이는 손발을 표현하는 단어는 기존의 중국무술 사료에서는 보이지 않는 특이한 서술법이며, 상살(上殺), 중살(中殺), 하살(下殺)의 살(殺) 표현은 이후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러한 조선세법 검보의 특징적인 서술 체계들은 조선세법의 형성이 중국 외의 국가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 조선세법은 중국 무술을 참고하여 만들어진 한국 검술 이라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 이전에도 중국의 군사서나 무예서 등이 한반도에 흘러들어올 여지는 없지 않은 만큼, 한국에서 검술을 만들 때 중국 무술의 용어나 요소가 어느 정도 차용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따라서 이 관점에서 본다면 조선세법은 중국 무예에 대한 지식이 있는 한국인이 새로운 검술을 만들어내면서 중국 무술의 용어나 자세 등을 일부 참고, 차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상술했듯이 조선세법이 허리치기를 중시하는 게 당시 한반도에서 사용된 환도의 비교적 짧은 규격[19]에서 탄생한 교리일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이를 고려하면 당시에 조선세법을 정립하면서 당시 한반도의 검술 풍조를 검술에 반영한 것이라 볼 수도 있다.
그 근거로 일단 당시 중국이나 한국에서도 타국의 무술을 자신들에게 익숙한 무술 용어로 설명하는 사례들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명나라에서 일본의 카게류를 토대로 만들어진 신유도법도 카게류의 용어가 아닌 척계광이 고안한 초식명과 용어로 서술되어 있으며 그 구성도 전형적인 명나라 무술식이다. 그리고 일본 검술을 조선군이 이미 익숙히 아는 신유도법 및 자체적으로 고안한 용어(ex: 용나호확세)로 서술한 무예제보번역속집의 왜검보 사례가 있는 만큼 중국 무술 식으로 기록되었다는 것만으로 조선세법을 중국 출처라 보기는 어렵다. 아울러 조선세법 복원자들은 명나라식 용어가 사용되었다는 근거로 다른 명대 무술서적을 참고하여 복원하는 경향이 있는데 명나라식을 따라했으니 결과물도 명나라식과 비슷하게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며 일종의 순화논증이라 비판하기도 한다.
여기에 더해 조선세법에서 가장 중시하는 허리치기(요격세)의 명칭과 설명이 상술했듯 전부 조선식 어순으로 되어 있는 점과 다른 초식명과 다르게 비유가 아닌 직접적인 묘사로 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검보 기록자는 따로 있고 세법을 전수한 조선인 검객은 한문을 모르는 까막눈이라는 주장도 있다. 백사롱풍(弄風)이 무슨 말인지만 알아도 요격(腰擊)과 같은 틀린 표현은 쓰지 않는데 그마저도 모르는 사람이 중국인과의 교습이나 중국 문헌을 통해 무술을 익히긴 어렵다는 것이다. 조선세법에서 사용된 표현이 특정 중국 무술에서만 사용하던 말이라면 해당 무술의 영향을 부정할 수 없겠지만, 백사롱풍과 발초심사, 직부송서 등은 이화창과 소림곤법천종 등 명대의 여러 중국 무술에서 공통으로 쓰일 만큼 널리 알려진 표현이다. 또한 중국식으로 분류되는 표현들이 짐승의 움직임이나 고사를 인용한 세련된 문장인 것과 달리 우수우각, 좌수우각 및 하살, 중살, 상살 등의 조선식 표현들은 대체로 한문 초보나 쓸 법한 단순한 표현인 것도 근거를 더한다.[20]
전근대에 무예는 통달했으나 문맹인 경우는 드물지 않고[21], 글 모르는 조선인이 주먹구구식으로 설명한 검리를 중국인 호사가가 중국인 독자를 위해 알아듣기 쉬운 중국식 용어로 옮겨 적었을 수도 있다. 즉, 조선인 검술가의 시범과 설명을 듣고, 중국인이 검보를 기록하는 과정에서 중국식 용어들이 다수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이야기다. 이를 종합하면, 검리는 한국의 고유한 것이되 용어와 설명만 중국식으로 기록된 검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원의가 쓴 잃어버린 검법을 '되찾았다'고 한 표현도 '중국의' 검법을 되찾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냥 쌍수검법 그 자체를 다시 도입했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 역시 가능하다. 조선세법을 접하기 전까지는 검법에 대해 무지했을 뿐더러 곤오검결이 한손검에 대한 내용인지도 모르고 같이 실어버린 사람이 조선세법의 서술이 명나라식인지 조선식인지 알았을 리도 만무하다.

2.5.1. 결론

지금까지 발견된 사료를 기반으로 해석했을 때, 조선세법은 한국 검술이라고 보는 시각이 강하다. 물론 중국 무술 용어들이 꽤 사용되긴 했지만, 전술했듯이 중국 검술이라고 보기 어려운 요소들이 확실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가장 중립적인 시각의 주장이라 볼 수 있는 '조선세법은 중국 무술을 참고해서 만들어졌을 것'이란 주장 역시 결국 조선세법이 한국에서 만들어진 한국 검술이란 것을 부정하진 않고 있다. 사료가 한정적이기에 어떤 식으로든 단언하는 것은 어렵긴 하지만 현재로선 중국에서 만들어진 검술일 가능성은 낮으며, 순수한 한국 검술인가, 혹은 중국 무술의 영향을 받은 한국 검술인가에 의견 차이가 있는 정도다.

무비지와 별개로 고후점으로부터 전한 예도는 거기에서 증보된 4세를 포함하여 검무의 형태[22]로 수련하는 등 많이 달라졌기 때문에 무예도보통지 예도는 조선세법의 출처와는 별개로 그냥 한국 검술이라고 할 수 있다.

2.6. 현대 중국 검술에 남긴 영향

의외로 명나라 말기부터 현대까지 이어지는 중국 검술의 계보에서 조선세법이 남긴 흔적은 상당하다. 신유도법을 제외하면 문헌상으로 초식과 투로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검법이 무비지의 조선세법이기 때문에 그렇다.[23]

명나라 멸망 이후 멸청복명을 추구한 무술가인 왕오공(王五公)이 창시한 왕오공태극연환십삼도(王五公太極連環十三刀)의 검보를 보면 체보(掣步), 흔기(掀器, 흔격세), 간수(看守, 간수세)처럼 조선세법에서만 보이는 용어가 나타난다. 또한 1908년에 작성된 『검법진전도해』를 보면 격자격세(擊刺格洗)를 근본으로 두는데 이 역시 조선세법 초습의 개념이다. 그리고 검법진전도해는 이후 1920년의 『검술기본교련법,』, 1923년의 송유일의 『무당검술』, 1927년 진미명의 『태극검』, 1929년 오지청의 『칠성검』, 1930년 강용초의 『곤오검』, 1930년 조연화의 『달마검』, 1931년 황원수의 『무당검법대요』등 현대 중국 검술의 근간이 된다. 카게류 왜검술에서 비롯된 신유도법이 단도법선 - 왕오공태극연환심삽도[24] - 묘도법으로 현대까지 이어진 걸 보면 중국 검술은 조선과 일본의 영향 모두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사실 검술의 국적을 따지게 된 것은 한족 민족주의가 심화된 21세기의 일이고 본래 중국인들은 외국 무술을 받아들이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넨류직심영류의 예에서 보이듯이 일본 검술도 중국과 한반도의 영향을 받았고 조선군은 무예도보통지로 익히 알려졌듯 명나라, 청나라, 일본 무술을 모두 배우려 애썼으니 동아시아 무술사에서 순혈주의적 접근은 무의미한 일일 뿐이다.

2.7. 검결가

劍訣歌(검결가)
電挈昆吾晃太陽.(전설곤오황태양)
一升一降把身藏,(일승일강파신장) [左右四顧四劍]
搖頭進步風雷嚮,(요두진보풍뢰향)
滾手連環上下防.(곤수연환상하방) [開右足一劍, 進左足一劍, 又左右各一劍, 收劍]
左進靑龍雙探爪,(좌진청룡쌍탐조) [縮退二步,開劍,用右手十字撩二劍,刺一劍]
右行單鳳獨朝陽,(우행단봉독조양) [用左手一刺, 跳進二步 右手各一挑,左右手各一蓋, 右手一門轉步 開劍作勢]
撒花蓋頂遮前後,(살화개정차전후) [右滾花六劍 開足]
馬步之中用此方,(마보지중용비방)
蝴蝶雙飛射太陽,(호접쌍비사태양) [右足進步 右手來去二劍, 左足進步 左手一刺一晃]
梨花舞袖把身藏,(이화무수파신장) [退二步 從上舞下四劍]
鳳凰浪翅乾坤少.(봉황낭시건곤소) [進右足, 轉身張兩手, 仍飜手, 左手一劍, 右手來去二劍, 左手又一劍, 開劍進右足]
掠膝連肩劈兩旁,(약슬련견벽양팽)
進步滿空飛白雪,(진보만공비백설) [從下舞上四劍 先右手]
回身野馬去思鄕.(회신야마거사향) [右手抹眉一劍, 右手抹脚一劍, 抹眉一劍, 左手抹腰一劍, 一刺, 右劍一手收劍]
검결가는 검술의 움직임과 검리를 기억술을 이용해 기억할 수 있도록 시로 정리한 것이나, 예도, 조선세법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다른 출전에서 나온 것으로 모원의는 단간잔편 즉 짧고 간단하게 남은 여러 문서들에서 찾았다고 언급했다. 실제로 검결가에 딸린 해설을 보면 右足進步 右手來去二劍, 左足進步 左手一刺一晃(오른발 내딛으며 오른손에 검이 두번 오고가며 왼발 내딛으며 왼손으로 한번 찌르고 한번 흔든다) 등 칼을 왼손에 쥐었다 오른손에 쥐었다 하는 것을 암시한다. 정체불명의 한손검술의 검결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 전혀 다른 검결가를 쌍수검법인 조선세법에 수록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사라진 검술을 다시 찾았다고 언급한 모원의의 언급을 보면 자신이 수집한 검술 관련 텍스트를 모두 수록하려고 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2.8. 초습

初習 - 眼法,擊法,洗法,刺法。
초습 - 안법, 격법, 세법, 자법.
擊法有五 - 豹頭擊,跨左擊,跨右擊,翼左擊,翼右擊。
격법유오 - 표두격(수직내려베기). 과좌격(왼쪽 올려베기), 과우격(오른쪽 올려베기), 익좌격(오른쪽 내려베기), 익우격(왼쪽 내려베기).
刺法有五 - 逆鱗刺,坦腹刺,雙明刺,左夾刺,右夾刺。
자법유오 – 역린자(목찌르기),탄복자(배찌르기),쌍명자(불확실함.[25]),좌협자(왼쪽에서 찌르기),우협자(오른쪽에서 찌르기)
格法有三 - 舉鼎格,旋風格,御車格。
격(막기)법유삼 - 거정격(상단수평막기), 선풍격(비스듬히막기, 받아흘리기?), 어거격(중간막기)
洗法有三 - 鳳頭洗,虎穴洗,騰蛟洗。
세(썰기)법유삼 - 봉두세(위에서 아래로 썰기), 호혈세, 등교세

초습은 예도-조선세법의 기본기를 정리한 것이나, 여기에 수록된 기술들이 24세+4세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아 그 실체가 불분명한 것들이 있다. 굳이 있다면 역린자, 탄복자, 어거격 정도이다.

뜻이 바로 와닿는 격법(擊法), 자법과는 달리 격법(格法), 세법은 어떤 개념인지 이해하려면 한중일을 아우르는 텍스트를 뒤져보고 그 맥락을 이해해야 해서 복잡하다.

대한검도회 조선세법에서는 세법을 베기 동작으로 해석을 하지만 이 때문에 베기 범주에 들어가는(치는 베기) 격법(擊法)과 일반인은 구분하기 힘들다.

다소 자유롭게 여타 무술과 대조해 정리하자면
안법-눈으로 동작을 읽는 무술 선구안
격법-칼끝에 기세 실어서 치기(검도의 그것처럼)
자법-찌르기
격(格)법-공방일체 자세 만들기(거정격은 내려베기로, 어거격은 그대로 탄복자로 찔러버리는 것으로 쉽게 이어짐)
세법-격처럼 멈추지 않고 칼끝이 통과하는 종류의 베기(나이프로 그어버리듯이 상대를 '씻어'버림)

정도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 역시 여타 무술의 사례들 및 검보의 흐름을 보고 대충 분류한 것이지, 조선시대 사람이 살아서 해설해주지 않는 한 명쾌히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찬)격법이 검도식 기세 살린 치기와 비슷하고 어거격이 서양의 플루크 비슷한 것 아닌가 추측했는데 조선 사람이 살아돌아와서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것이다.

아래의 언해본을 보면 알겠지만 몇몇 키워드(직부송서, 조천세 등)는 본국검에서도 쓰이는 말이다.

2.9. 예도 28세

한글 번역은 언해본을 가능한한 그대로 옯김. 계속 반복되는 '법을 보라'는 그림을 보라는 의미이다. 또한 발초심사, 직부송서 등은 본국검 페이지를 참고하는 것도 좋다.
거정세(擧鼎勢)
擧鼎勢者, 卽擧鼎格也. 法能鼎格上殺. 左脚右手平擡勢.向前掣擊中殺, 退步裙欄. 看法.
거정세는 솥 드는 격이라 법이 능히 솥드는 격으로 위로 살하고 좌각과 우수로 평대세로 앞을 향하여 버혀티고 가운데로 살하야 퇴보군란세를 하나니라 법을 보라
점검세(點劍勢)
點劒勢者, 卽點劒刺也. 法能偏閃奏進搶殺. 右脚右手撥草尋蛇勢, 向前掣步御車格. 看法.
점검세는 곧 칼을 점하여찌름이라 법이 능히 한편으로 번득이고 빠르게 나아가 훝어살하고 우각우수로 발초심세로 앞을 향하여 버혀걸어 어거격을 하니라 법을 보라
좌익세(左翼勢)
左翼勢者, 卽左翼擊也. 法能上挑下壓, 直殺虎口. 右脚右手直符送書勢, 向前掣步 逆鱗刺. 看法.
좌익세는 곧 왼편날개로치는것이라 법이 능히 위로 돋고 아래로눌러 바로 손아귀를 살하고 우각우수로 직부송서세로 앞을 향하여 버혀걸어 역린자를 하느니라 법을 보라
표두세(豹頭勢)
豹頭勢者, 卽豹頭擊也. 法能霹擊上殺. 左脚左手泰山壓頂勢, 向前掣步挑刺. 看法
표두세는 곧 표범의 머리로 치는 것이라 법이 능히 벽력치듯 위로 살하고 좌각좌수로 태산압정세로 앞을 향해 버혀걸어 돋아지르느니라 법을 보라
탄복세(坦腹勢)
坦腹勢者, 卽坦腹刺也. 法能?刺中殺. 進如崩山, 右脚右手蒼龍出水勢, 向前進步腰擊. 看法.
탄복세는 곧 배를 헤치고 찌름이라 법이 능히 다딜너 찌르고 가운데로 살하고 나아가기를 무너지는 산처럼 하고 우각우수로 창룡출수세롤 앞을 향하여 걸음을 나아가 허리를 치느니라 법을 보라
과우세(跨右勢)
跨右勢者, 卽跨右擊也. 法能掠剪下殺. 左脚右手綽衣勢, 向前進步橫擊 看法.
과우세는 곧 오른편을 걸쳐치는 것이라 법이 능히 돋아갈겨 아래로 살하고 좌각과 우수로 작의세로 앞을 향하여 걸음을 나아가 걸어치느니라 법을 보라
요략세(僚掠勢)
撩掠勢者, 卽撩掠格也. 法能遮駕下殺, 蔽左護右. 左脚左手長蛟分水勢, 向前掣步鑽擊 看法.
요략세는 곧 돋아훝는격이라 법이 능히 막고받아 아래로 살하야 왼편을 가리우며 오른편을 호위하고 좌각좌수로 장교분수세로 앞을 향하야 버혀걸어 비비어치느니라 법을 보라
어거세(御車勢)
御車勢者, 卽御車格也. 法能駕御中殺, 削殺雙手. 左脚右手冲鋒勢, 向前退步鳳頭洗. 看法.
어거세는 곧 수레를 어거하는 격이라 법이 능히 메워어거하야 가운데로 살하고 두손을 깎아 살하고 좌각과 우수로 충봉세로 앞을 향하고 물러걸어 봉두세를 하느니라 법을 보라
전기세(展旗勢)
展旗勢者, 卽展旗擊也. 法能剪磨上殺. 左脚左手托塔勢, 向前掣步點劍. 看法.
전기세는 곧 깃발펴듯 하여 치는 것이라 법이 능히 갈겨 마하여 위로 살하고 좌각좌수로 탁탑세로 앞을 향해 버혀걸어 칼을 점하느니라 법을 보라
간수세(看守勢)
看守勢者, 卽看守擊也. 法能看守諸器攻刺守定, 諸器難進相機隨勢滾殺. 左脚右手虎蹲勢, 向前進步腰擊 看法.
간수세는 곧 보고 지키어 치는 것이라 법이 능히 보며 지키며 모든 병기 치고 찌르거든 지키어 정하고 모든 병기 나아가기 어렵거든 기틀을 보아 형세를 돌아 굴려 살하고 좌각과 우수로 호준세로 앞을 향하여 걸음을 나아가 허리를 치느니라 법을 보라
은망세(銀莽勢)
銀蟒勢者, 卽銀蟒格也. 法能四顧周身, 又能掠殺四面. 向前則左手左脚, 向後則右手右脚, 動則左右旋風掣電殺. 看法.
은망세는 곧 구렁이격이라 법이 능히 네녁으로 돌아보아 몸을 두르고 또 능히 사면으로 노략하여 살하여 앞을 향한즉 좌수좌각이요 뒤를 향한즉 우수우각이요 움직인즉 좌우선풍하여 번개치듯이 살하느니라 법을 보라
찬격세(纘擊勢)
鑽擊勢, 卽鑽擊也. 法能鑽擊搶殺. 鵞形鴨步奔冲. 左脚左手白猿出洞勢, 向前掣步腰擊 看法.
찬격세는 곧 비비어치는 것이라 법이 능히 비비는 격으로 훝어 살하고 거위모양과 오리걸음으로 돌으며 질러 좌각좌수로 백원출동세로 앞을 향하여 버혀걸어 허리를 치느니라 법을 보라
요격세(腰擊勢)
腰擊勢者, 卽腰擊也. 法能橫冲中殺. 身步手劍疾若迅雷, 此一擊者, 劍中之首擊也. 右脚右手斬蛇勢, 向前進步逆鱗. 看法.
요격세는 곧 허리를 치는 것이라 법이 능히 빗겨질러 가운데로 살하여 몸과 걸음과 손과 칼이 빠르기가 급한 우레 같으니 이렇게 치는 것은 칼 가운데 으뜸치는 것이라 우각우수로 참사세로 앞을 향하여 걸음을 나아가 역린하느니라 법을 보라
전시세(展翅勢)
展翅勢者, 卽展翅擊也. 法能絞格上殺, 撩掠下殺. 右脚右手偏閃勢, 向前掣步擧鼎格. 看法.
전시세는 곧 날개를 펴 치는것이라 법이 능히 꼬는 격으로 위로 살하고 돋우며 훑어아래로 살하고 우각우수로 편섬세로 앞을 향하여 버혀걸어 거정격을 하느니라 법을 보라
우익세(右翼勢)
右翼勢者, 卽右翼擊也. 法能剪殺兩翼. 左脚右手鴈字勢, 向前掣步腰擊 看法.
우익세는 곧 오른편 날개로 치는 것이라 법이 능히 갈겨 양익을 살하고 좌각과 우수로 안자세로 앞을 향하여 버혀걸어 허리를 치느니라 법을 보라
게격세(揭擊勢)
揭擊勢者, 卽揭擊也. 法能剪格上殺, 步步套進, 左脚左手虎坐勢, 向前退步冲洗. 看法.
게격세는 곧 들어치는 것이라 법이 능히 갈기는 격으로 위로 살하고 걸음걸음투로나아가 좌각좌수로 호좌세로 앞을 향하여 물러걸어 질러씻느니라 법을 보라
좌협세(左挾勢)
左夾勢者, 卽左夾刺也. 法能左夾勢冲刺中殺. 右脚右手獸頭勢, 向前進步腰擊 看法.
좌협세는 곧 왼편으로 껴 찌르는 것이라 법이 능히 다딜러 지르고 가운대로 살하고 우각우수로 수두세로 앞을 향하여 걸음을 나아가 허리를 치느니라 법을 보라
과좌세(跨左勢)
跨左勢者, 卽跨左擊也. 法能掃掠下殺. 右脚右手提水勢, 向前進步雙剪. 看法.
과좌세는 곧 왼편으로 걸쳐치는 것이라 법이 능히 쓸어 노략하여 아래로 살하고 우각우수로 제수세로 앞을 향하여 걸음을 나아가 쌍으로 갈기느니라 법을 보라
흔격세(掀擊勢)
掀擊勢者, 卽掀擊也. 法能掀挑上殺, 搶步鑽殺. 左脚右手朝天勢, 向前退步坦腹刺. 看法.
흔격세는 곧 흔들어치는것이라 법이 능히 흔들어 돋아 위로 살하고 훝어걸어 비비어 살하여 좌각과 우수로 조천세로 앞을 향하고 물러걸어 탄복자를 하느니라 법을 보라
역린세(逆鱗勢)
逆鱗勢者, 卽逆鱗刺也. 法能直刺喉頸. 右脚右手探海勢, 向前掣步左翼擊 看法.
역린세는 곧 비늘을 거슬러 찌르는 것이라 법이 능히 바로 목구멍과 목을 질러 우각우수로 탐해세로 앞을 향하여 버혀걸어 좌익세를 하느니라 법을 보라
염시세(斂翅勢)
斂翅勢者, 卽斂翅擊也. 法能佯北誘賺. 左右手脚拔蛇勢, 倒退進步腰擊. 看法.
렴시세는 곧 날개를 거두고 치는 것이라 법이 능히 거짓 패하고 꾀어속여 좌우수각으로 발사세로 거꾸로 물러가고 걸음을 나아가 허리를 치느니라 법을 보라
우협세(右挾勢)
右夾勢者, 卽右夾刺也. 法能絞刺中殺. 左脚右手奔冲勢, 向前立步擧鼎格. 看法.
우협세는 곧 오른편으로 껴 지르는 것이라 법이 능히 꼬아찔러 가운데로 살하여 좌각과 우수로 분충세로 앞을 향하고서 걸어 거정격을 하느니라 법을 보라
봉두세(鳳頭勢)
鳳頭勢者, 卽鳳頭洗也. 法能洗刺剪殺. 右脚右手白蛇弄風勢, 向前掣步揭擊 看法.
봉두세는 곧 봉의 머리로 씻는 것이라 법이 능히 씻어질러갈겨 살하고 우각우수로 백사롱풍세로 앞을 향하고 버혀걸어 드러치느니라 법을 보라
횡충세(橫衝勢)
橫冲勢者, 卽橫冲擊也. 法能疾奔颡閃滾殺進退, 兩手兩脚隨勢, 冲進掣步撩掠. 看法.
횡충세는 곧 갈라질러치는것이라 법이 능히 빨리돌아 숨어 번뜩이고 굴러 살하여 진퇴하고 양수양각으로 형세를 따라 질러나아가 버혀걸어 돋아 노략하느니라 법을 보라

2.9.1. 예도에서 증보된 4세

이 4가지 자세는 실제로 공격, 방어를 하는 기술은 아니고, 일종의 준비운동 겸 퍼포먼스(...) 기술들에 가깝다. 조선에서만 한 건 아니고,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무술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중국에서도 검술 수련 시에 선보이던 기예들이다. 마상 무술 수련에 온갖 재주를 넘는 마상재가 들어간 것과 유사한 맥락으로 볼 수 있다. 기생들이 쌍검 칼춤과 함께, 아래의 여선참사세(칼 던지고 받기)를 해냈다는 기록도 있다.
태아도타세(太阿倒拖勢)
初入套中先以左手宇執刀腰次擧右手向天高托一呼又以右手輕打右膝以右足橫打左足因入擧鼎勢
태아도타세는 처음에 투 가운데 들며 먼저 좌수로써 칼허리를 굳이잡고 다음 우수를 들어 하늘을 향하여 높이들고 한번 부리고 또 우수로써 가벼이 오른편 무릎을 치고 우족으로써 좌족을 빗기치고 인하여 거정세로 드느니라
허리칼에서 오른손을 뻗어주고, 오른손에 칼을 바꿔잡으며 발을 털어주고 자연스럽게 거정세로 든다. 투로 시작 동작이다.
여선참사세(呂仙斬蛇勢)
呂仙斬蛇勢者以左手支腰右手橫捉刀腰向空高挪丈餘刃脊輪轉而墜稍進一步以手承之如是者三
여선참사세는 좌수로서 허리를 괴고 우수로 가로 칼허리를 잡아 공중을 향하여 높이 한길남짓 던져 날등이 돌아굴러떨어지거든 조금 한걸음 나아가 손으로서 받아 이같이 하기를 세번 하느니라
칼을 공중으로 한 길(약 2.4m~3m(!)) 던진 다음 받는다. 이걸 세 번이나 한다. 자세 이름은 '검선'으로 불린 '여동빈'이 뱀을 베는 자세라는 뜻이다.
양각적천세(羊角弔天勢)
章角弔天勢者自套中心退跪坐以右手執刀柄橫駕刀脊于左手第一指右手緊緊彈刀頭則繞指輪轉轉到次指至于無名小指閒而止堂之若銀甕
양각적천세는 투 가운데로부터 조금 물러꿇어앉아 우수로써 칼자루를 잡아 가로 칼등을 좌수제일지의 메우고 우수로 긴긴히 칼마리를 튕기면 손가락을 둘러돌아굴러 다음 손가락에 이르러 무명소지사이에 그치니 바람이 은독같으니라
칼등이 손바닥 방향으로 오도록 칼을 왼손 손가락 사이에 끼워, 볼펜 돌리기 하듯 돌린다.
금강보운세(金剛步雲勢)
金剛步雲勢者三次回身左右顧眄高擧刀刃繞上揮斤
금강보운세는 세번 몸을 돌려 좌우로 고면하고 높이 칼날을 들어 머리위로 둘러 휘척하니라
예도, 본국검 투로에도 세 번 몸을 좌우로 돌리는 절차가 있는데, 그것에 이름을 붙였다. 그림상으로는 하늘을 쳐다보고 있어 퍼포먼스성 동작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그림과 텍스트의 시선 묘사가 불일치하기에 그림은 잘못된 것이고 일본의 잔심(殘心)처럼 애프터 블로우를 경계하는 동작으로 보기도 한다. '구름 위를 굳건히 걷다'라는 명칭도 잔심과 통하는 구석이 있다.

2.10. 예도총도

파일:RvysFMQ.gif
[언해본] 태아도타세 - 견적출검세 - 봉두세 - 우회 - 향우방적 - 좌우방신 - 일자 - 백사롱풍세 - 좌회 - 향좌방적 - 좌우방신 - 일자 - 백사롱풍세 - 우회 - 내략 - 전일격 - 좌협세 - 좌우방신 - 일자 - 수두세 - 은망세 3회 - 태아도타세 - 여선참사세 - 전일격 - 역린세 - 좌우방신 - 일자 - 수두세 - 요략세 - 흔격세 - 좌방신 - 우방신 - 금강보운세 - 우익세 - 병풍세 - 표두세 - 전시세 - 좌우방신 - 일자 - 수두세 - 은망세 3회 - 양각적천세 - 전일격 - 후일격 - 역린세 - 좌우방신 - 후일자 - 탄복세 - 요략세 - 표두세 - 일자 - 좌익세 - 찬격세 - 전시세 - 일자 - 역린세 - 좌우방신 - 전일격 - 일자 - 수두세

2.11. 복원 현황

경당 예도총보
무예24기보존회 예도 24세중 8세 시연
싱가포르의 무술 연구가 Jack Chen의 시연
중국무술가 짠치밍의 무비지 24세 중 일부 시연
수류의 예도24세 시연
배국진의 예도총보
OldSwordplayer의 조선세법 24세
OldSwordplayer의 조선세법 초습
OldSwordplayer의 예도총보

한국에서는 일찍이 임동규가 세운 경당에서 해석을 시작했고, 경당에서 현 무예24기 보존회가 파생되는 등 한국의 무예도보통지 관련 단체에서 뿌리에 해당하는 단체였다. 하지만 임동규가 무술인이 아니었던 관계로 해석에서는 이견과 충돌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해동검도에서도 나름 복원하여 검법수련에 포함시키고 있다. 대한검도회에서도 본국검과 조선세법을 복원하긴 했으나 동작 하나 할때마다 불편해보일 정도로 일일이 발도와 납도를 할 정도로 아무런 역사적 근거가 없는 발도술 형태에 집착을 하고[26] 24세 전체를 복원하지도 않았으며 그림이나 동작 설명과도 전혀 맞지 않아 기존 복원 단체에게 비판받았고 검도인들도 검리에 맞지도 않는 걸 굳이 왜 하냐며 딱히 달가워하지 않는 분위기이다. 무예도보통지의 동작을 복원하는게 아니라 자기가 평소에 사용하는 동작을 가지고 무예도보통지의 동작 이름을 적당히 끼워맞춘것에 불과한 수준이다.

중국인들도 상당히 주목하는 무술이기도 하다. 현재의 중국 매체에 나오는 쌍수검술은 달마검을 기반으로 영화배우이자 무술인이었던 중국인 우승혜가 영화 황하대협에서 처음 선보인 것으로 엄연히 창작무술이며, 과거 전국시대-한나라 시대에 걸쳐 유행했고 명나라 때까지 근근히 살아남은 쌍수검술과는 관련이 없다. 명나라 장군 유대유가 민간무술가 이량흠에게 형초장검이라는 쌍수장검을 배웠다고 하나 그의 저서 검경은 봉술로 전환시킨 내용이 수록되어 현재 중국 전통 쌍수검술과 그나마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 사료가 무비지 조선세법뿐이기 때문에 옛 중국 쌍수검술을 연구하려는 무술인들이 가끔 다룬다.[27], 하지만 대봉에서 검경 연구와 마찬가지로, 지금 사용하는 중국무술용어와 명나라 시대의 용어가 미묘하게 다르기 때문에 각 고유단어가 구체적으로 어떤 움직임을 가리키는지 알기 어렵고, 대부분 자신이 하는 검술의 동작을 바탕으로 재구성하여 현대 창작무술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동작을 보여주는 한계가 있다.

다만 중화사상답게 중국 무술 용어가 사용되었다는 것만으로 중국 무술이라고 단정짓는 행태는 그대로다. 그러나 모원의가 조선 출처임을 명시해놓았고 명칭도 조선세법(朝鮮勢法)인 것이 껄끄러웠는지, 위의 Jack Chen 영상에서도 조선세법이란 말은 쏙 빼놓고 Chinese Straight-sword(중국 직검술)라고만 적어 놓았다. 무비지 원문을 들어 Korea에서 왔음을 지적하는 댓글이 달리자 반박 대신 삭제하는 치졸함도 보여준다. 물론 쿨하게 조선 기원을 인정하는 중국인들도 있고(중국어 원문)[28]] 오히려 한족 민족주의자 중에는 중국의 쌍수검법은 조선세법과 전혀 다르며 조선세법에서 유래한 것도 아니라며 역정을 내는 사람도 있다.(...)(중국어 원문)


[1] 아무래도 신부는 큰 드레스를 입고 있는데, 그런 신부에게 팔굽혀펴기를 하라든가 큰 몸동작을 요구하는 미션은 불가하기 때문이다.[2] 팔굽혀펴기를 통한 남편의 체력 테스트, 신부 이름을 부르며 사랑한다고 목청껏 외치는 성량 테스트나 신부를 향한 신랑의 가벼운 애교 정도가 가장 무난하고 일반적인 미션이다. 하지만 간혹 보기 민망한 춤을 추라는 미션, 듣기 거북한 말을 외치게 한다던가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는 심한 케이스에 해당된다. 지나치게 심한 미션은 자칫 행복한 결혼식의 분위기를 갑분싸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자제하는 것이 좋다.[3] 거정세, 점검세, 좌익세, 표두세, 탄복세, 과우세, 요략세, 어거세, 전기세, 간수세, 은망세, 찬격세, 요격세, 전시세, 우익세, 게격세, 좌협세, 과좌세, 흔격세, 역린세, 염시세, 우협세, 봉두세, 횡충세[4] 사실은 송태종 1000명의 검사의 일화를 잘못 기록한 것이다.[5] 다만 조선세법 자체도 모원의가 조선의 검술이란 의미로 붙인 거고, 예도 역시 무기에서 비롯된 명칭으로 보이는 점을 고려하면, 원래는 검술에 딱히 특별한 이름은 없었을 가능성도 있다.[6] 해당 검술의 명칭은 등장하지 않으나 진인의 평가("기법은 좋으나 죽음을 두려워 않는 담력이 있어야 쓸 수 있다.")를 보면 허리치기를 중시하여 적의 코앞까지 깊숙이 파고드는 조선세법과 통하는 면이 있다.[7] 이때 일찍이 왜검의 법은 통신사를 보낼 때 따로 장교를 보내어 이국에서 배웠다면서 왜검의 출처에 대한 언급도 나온다.[8] 승정원일기에서는 高後漸이라고 록되어 있다.[9] 예도(銳刀)는 이미 모씨(茅氏)의 세법(勢法)으로 도보를 만들었는데 지금 연습하는 도보와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부득불 금보(今譜)로 따로 총보(總譜)를 만들었다. 또 별도로 모(茅, 모원의)의 설해(說解)를 만들어서 이미 익힌 자로 하여금 배운 것을 폐하지 않게 하고, 익히지 못한 사람에게는 근본한 것이 있음을 알게 하였다. 무예도보통지 범례[10] 태아도타세, 여선참사세, 양각적천세, 금강보운세[11] 물론 스타일 등의 차이는 있었다.[12]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에서 출토된 양손으로 잡을 수 있는 환도 유물들의 칼날 길이는 65cm에서 70cm 정도였으며, 일본도처럼 두께가 두꺼운 편인 것도 아니었다.[13] 사실 특별한 대갑주 검술이 아니어도 적당히 갑옷이 가리지 않는 곳을 노려서 찌르고 베는 식으로 대응하는 게 가능하기도 했다. 본국검, 왜검, 쌍수도 등 조선의 다른 군용 검술들도 대갑주 기술이 따로 없는 것을 보면 그냥 요령껏 대응했을 확률이 높다. 씨름이나 수박, 택견 등의 무술도 많이 익혔으니 이를 응용해 넘기거나 발로 차 넘어뜨려 제압하기도 했을 것이다.[14] 자세히 설명하자면 교전은 왜검술을 익힌 김체건이 이를 기반으로 만든 검술 대련 체계인데, 원래는 양날검으로 검보의 삽화가 작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병사들이 양날검으로 훈련하다가 자주 다쳤고, 이후에는 교전보의 그림을 외날검으로 고친 후 가죽 씌운 목검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고려하면 훈련용으로는 양날검이 나름대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있긴 있다.[15] 조선의 경우 대표적으로 창포검을 예로 들 수 있다.[16] 이전에는 양손 검술을 제대로 구사하려면 두 손 사이에 어느정도의 간격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20cm 전후의 칼자루는 너무 짧아 주척 역시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적혀있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두 손을 밀착해서 칼을 다룬 사례는 역사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그림들을 보면 대부분 두 손을 밀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심지어 20cm보다 약간 더 짧아도 과거에는 칼을 잡을 때 고전적인 해머그립인 경우가 많았기에 양손 운용이 가능했다. 거기에 옛 사람들의 체격이 지금보다 평균 10cm 가량 작았던 것을 고려하면 20cm의 칼자루는 양 손으로 검을 다루기 충분한 크기라고 봐야 한다.[17] 후자의 두 주장은 일단 한국 검술이라는 것엔 동의하는 만큼, 그 근거가 조금씩 겹치는 면도 있다.[18] 사실 모원의가 검술을 되찾았다고 얘기한 기록을 보면 검술의 기원을 해명하고자 하는 의도보다는 그냥 당시 중국에선 쌍수장검을 사용하는 방법을 찾을 수 없는데, 조선에 쌍수장검 사용법이 남아있으니까 이를 다시 얻어왔다는 정도로도 해석할 수 있다. 애초에 모원의 본인도 검술 이름을 아예 조선의 칼 쓰는 법이란 의미로 조선세법이라 짓기도 했고.[19] 대략 전장 80~90cm 내외.[20] 살(殺)은 그 원색적인 어감도 그렇고 고작 초식의 일부로 상대를 살(殺)한다는 것이 굉장히 오만하게 들리기에 중국 무술에서는, 특히 투로의 서술용으로는 잘 쓰지 않는 표현이다.[21] 심지어 액션 배우로 유명한 성룡은 20세기 인물인데도 20대까지 문맹이어서 부인인 임봉교가 대본을 대신 읽어주기까지 했다.[22] 칼을 던지고 받는 것은 박제가의 정유각집 중 검무기에서도 묘사될 만큼 조선 검무 특유의 동작이었다.[23]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검보는 원말명초에 필곤(畢坤)이 쓴 혼원검경(渾元劍經)이지만 그림 없이 글로만 되어 있는데다 구체적인 투로 묘사는 없고 도교적으로 뜬구름잡는 내용뿐이라 검법을 복원할 수 있는 사료가 아니다.[24] 왕오공태극연환심삽도는 단도법선과 조선세법을 참고해 도법과 검법의 결합을 추구했다.[25] 심장을 찌르는 자세나 얼굴을 찌르는 자세로 해석된다.[26] 정작 무예도보통지에는 어떤 검술이든 시작하기 전에 미리 검을 빼놓고 시작할 정도로 발도와 납도에 의미를 두지 않았다.[27] 참고로 무협지에 익숙한 일반인들은 중국 검술이라고 하면 한손검을 떠올리지만, 청동기시대의 전통 면에서 한손검은 신분과시용이나 호신용에 가까웠고, 과나 모는 집단전 무기였던만큼 쌍수검술이야말로 중국사 최초의 본격적인 무기술이라고 할 수 있고 심지어 중국식 쌍수검은 아예 한검(漢劍)이라고 불릴 만큼 중국 무술계의 근본 무기이다.[28] 조선·일본의 영향을 받은 중국 검술 역사를 인용하면서 현재 중국 검술계의 현실을 비판하는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