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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00:14:03

혜경궁 홍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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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경궁 홍씨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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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자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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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장헌세자의 세자빈
헌경혜빈 홍씨 | 獻敬惠嬪 洪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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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궁호 · 시호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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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조 · 순조조 자궁(慈宮)
혜경궁 홍씨 | 惠慶宮 洪氏
조선 장종의 왕비
헌경왕후 | 獻敬王后
대한제국 장조의 황후
헌경의황후 | 獻敬懿皇后
}}}}}}}}} ||
파일:융릉.jpg
융릉 전경
출생 1735년 8월 6일(음력 6월 18일)[1]
한성부 서부 반송방 홍봉한 사저
(現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충정로 일대)
사망 1816년 1월 1일
(음력 1815년 12월 15일) (향년 80세)
한성부 창경궁 경춘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능묘 현륭원(顯隆園) → 융릉(隆陵)
재위기간 조선 왕세자빈(빈궁)
1744년 2월 10일 ~ 1762년 7월 4일
조선 왕세자빈 | 혜빈
1762년 7월 4일 ~ 1816년 1월 1일
조선 왕세자빈 | 혜경궁 (자궁)
1776년 4월 16일 ~ 1816년 1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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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1b0e64><colcolor=#ffd400> 본관 풍산 홍씨
부모 부친 - 영풍부원군 홍봉한
(永豊府院君 洪鳳漢, 1713 ~ 1778)
모친 - 한산부부인 한산 이씨
(韓山府夫人 韓山 李氏, 1713 ~ 1755)
형제자매 8남 3녀 중 차녀
배우자 장조 의황제
자녀
2남 2녀 [ 펼치기 · 접기 ]
장남 - 의소세자(懿昭世子, 1750 ~ 1752)
차남 - 정조 선황제(正祖 宣皇帝, 1752 ~ 1800)
장녀 - 청연공주(淸衍公主, 1754 ~ 1821)
차녀 - 청선공주(淸璿公主, 1756 ~ 1802)
봉작 왕세자빈(王世子嬪) → 혜빈(惠嬪)
궁호 혜경궁(惠慶宮), 자궁(慈宮), 자전(慈殿)
사당 경모전(景慕殿)
존호 효강자희정선휘목유정
(孝康慈禧貞宣徽穆裕靖)
휘호 인철계성(仁哲啓聖)
시호 조선: 헌경혜빈(獻敬惠嬪)
헌경왕후(獻敬王后)
대한제국: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
}}}}}}}}} ||
1. 개요2. 생애
2.1. 간택2.2. 출산2.3. 후궁 문제2.4. 부자간의 갈등2.5. 나경언 고변 사건2.6. 임오화변
2.6.1. 사도세자 사망 이후
2.7. 정조 시기2.8. 순조 시기2.9. 사후
3. 가계
3.1. 친가(풍산 홍씨)3.2. 외가(한산 이씨)3.3. 시가(전주 이씨)
3.3.1. 배우자 / 자녀
4. 여담5. 대중매체에서
5.1. 드라마
5.1.1. 안국동 아씨(1979)5.1.2. 하늘아 하늘아(1988)5.1.3. 조선왕조 오백년(1988)5.1.4. 왕도(1991)5.1.5. 대왕의 길(1998)5.1.6. 정조 암살 미스터리-8일(2007)5.1.7. 이산(2007)5.1.8. 한국사 傳(2008)5.1.9. 비밀의 문(2014)5.1.10. 붉은 달(2015)5.1.11. 옷소매 붉은 끝동(2021)5.1.12. 사관은 논한다(2024)
5.2. 영화5.3. 소설
5.3.1. 붉은 왕세자빈5.3.2. 옷소매 붉은 끝동5.3.3. 왕의 언약 / 사도세자
5.4. 게임5.5. 뮤지컬
5.5.1. 정조대왕(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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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KBS <한국사 傳> - 피눈물의 기록 한중록, 혜경궁 홍씨
사도세자의 정실 왕세자빈이며, 의소세손·정조·청연공주·청선공주의 어머니.

'혜경궁(惠慶宮)'은 아들이자 국왕인 정조에게서 받은 궁호에 해당한다. 당대에 궁호를 호칭으로 쓰긴 했지만(숙창궁, 가순궁 등), 후대에 궁호가 통칭으로 굳어진 건 '혜경궁' 뿐이다. 왕대비대왕대비가 된 경우에는 '생전에 받은 존호+대비'의 호칭으로 많이 불리는데(인수대비, 자순대비 등), 혜경궁은 대비가 되지는 못 했지만 대비에 준하는 대우를 받아 사실상 이 궁호존호의 기능을 대신하였기 때문인 듯하다.[2]

2. 생애

2.1. 간택

그녀는 영안위 홍주원의 5대손으로 홍주원의 부인이 선조의 딸 정명공주였기 때문에 그녀는 선조의 외6대손이기도 하다. 영풍부원군 홍봉한의 딸로 1744년(영조 20년), 10살의 어린 나이[3]세자빈에 책봉되어, 동갑내기 사도세자와 혼인하였다.

명목상 간택을 치르기는 했지만 초간택 때 이미 대왕대비 인원왕후, 왕비 정성왕후를 비롯한 왕실의 높으신 분들을 뵙고 궁인들이 홍씨가 괴로워할 정도로 그녀를 안으려 다툰 것을 보아 간택 전에 이미 그녀는 세자빈으로 낙점이 되었던 듯하다. 이때 그녀의 조상인 정명공주가 사용하던 물품들이 혼수로 들어와 기이하게 여겼다.[4][5] 특히 병풍에는 홍봉한이 꾼 그녀의 특별한 태몽에 나타난 흑룡(검은 용)과 똑같은 흑룡이 수놓아져 있었다고 한다.

2.2. 출산

1750년(영조 26년), 첫아이 의소세손을 낳았는데 이 때 꿈에 이미 죽은 시누이 화평옹주가 보여서 혹시 해산하다 죽은 화평옹주가 무슨 해코지를 하러 온 것은 아닌가 불안해했다. 처음에는 사랑하던 딸 화평옹주의 3주기 즈음에 태어난 아이라 탐탁지 않아 하던 영조가 갑자기 와서 아이를 살피는데, 화평옹주와 같은 곳에 점이 있어 화평옹주의 환생이라 여기고 귀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러나 의소세손은 불명의 사유로 3세(만 1세)의 어린 나이에 사망하였으며 같은 해정조를 낳는다.

그래도 결혼 초반에는 금슬이 좋아서 17살때부터 22살때까지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는 2남 2녀를 낳고 2명을 유산했다. 계산해보자면 매년 임신할 만큼 부부간 금슬이 좋았다는 얘기다.

2.3. 후궁 문제

1755년(영조 31년), 22세 때 청선군주[6]를 낳고 이후로는 임신하지 못했다. 이는 다음 해 연이어 (법적으로)시어머니인 중전 정성왕후와 시할머니인 대왕대비 인원왕후승하했기에 3년상을 마치기 전까지 세자빈이 임신하기는 어려웠을 상황이었고 이후로는 사도세자의 병증이 심각했기에 그녀가 더이상 자식을 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중록》에 의하면 사도세자는 숙빈 임씨가 임신하자 부왕 영조의 질책이 두려워, 때려서라도 낙태까지 시키려 했다고 한다. 오죽하면 세자빈 홍씨가 임씨를 불쌍히 여겨 도와줬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은언군이 태어나자 이 사실을 알게 된 부왕 영조는 1달 넘게 아들 사도세자를 꾸중했고 세자빈 홍씨까지 질책을 들었다고 한다.[7] 학문을 가까이 해야 할 20세의 젊은 세자궁녀에게서 자식을 일찍 본 것이 영조에게는 매우 못마땅했던 것.[8] 하지만 사도세자는 은언군 이후에도 임씨에게서 은신군, 또다른 궁녀였던 박씨에게서 청근현주은전군을 얻어 영조의 노여움을 크게 샀다. 경빈 박씨는 총애를 받았지만 결국 사도세자에게 맞아죽었다.[9] 사도세자는 자신의 후궁들을 제대로 대우하지 않았고 영조가 궁들과 그 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니 세자빈 홍씨는 남편의 후궁들을 못마땅하게 여기기는커녕 되레 동정심과 연민을 느꼈을 정도다.[10][11]

한중록》의 서술로는 궁들이 자식을 낳자 여자로서 자신도 기분이 좋았겠냐마는 영조가 가뜩이나 세자후궁들 문제로 펄펄 날뛰는 상황에서 자신마저 세자의 신경 바가지를 긁으면 세자가 더 스트레스를 받고 더 날뛸까봐 꾹 참고 많이 챙겨줬다고 한다. 또한 사도세자의 사후 혜경궁과 정조마저도 위태로운 판국에 자신들이 아니면 남은 후궁과 그 은 정말로 누구 하나 챙겨주는 사람 없이 죽을 판국이라 나름 나서서 신경을 써 주었다고.

2.4. 부자간의 갈등

국왕 영는 42세라는 늦은 나이에 얻은 유일한 후계자였던 사도세자에 대한 큰 기대와 두 부자간의 성격 차이 등 두 부자간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한때는 사도세자광증(狂症) 때문에 내시들과 궁녀들을 무차별적으로 마구 살해하자 시어머니 영빈 이씨에게 가서 같이 울면서 의논했는데 영빈 이씨가 "주상 전하께 이야기하는게 어떻냐"고 묻자 대경실색하면서 "에게 세자를 헐뜯은걸 세자가 알면 살아남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뜯어말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세자빈인 혜경궁 홍씨도 시아버지와의 갈등 때문에 점점 미쳐가는 남편을 말릴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조선왕조실록》에도 광증(狂症)을 나타내는 서술이 있다. 단, 광증이 기록된 시작점이 1761년(영조 37년)이며, 사도세자는 1년 후인 1762년(영조 38년)에 죽었고 대리청정을 무려 14년이나 한 사람이라는건 기억해두자. 내시궁녀등을 100여 명씩이나 죽여버리는 일을 저질렀고 그 설명은 조현병으로 보이는게 분명한 서술들이 나오는데 사도세자 본인도 장인 홍봉한과의 서신에서 본래 있던 화증(火症, 울울하고 답답하여 일어나는 병세)이라고 말했다.
천자(天資)가 탁월하여 임금이 매우 사랑하였는데, 10여 세 이후에는 점차 학문에 태만하게 되었고, 대리(代理)한 후부터 질병이 생겨 천성을 잃었다. 처음에는 대단치 않았기 때문에 신민(臣民)들이 낫기를 바랐었다. 정축년 ·무인년 이후부터 병의 증세가 더욱 심해져서 병이 발작할 때에는 궁비(宮婢)와 환시(宦侍)를 죽이고,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하였다. 임금이 매양 엄한 하교로 절실하게 책망하니, 세자가 의구심에서 질병이 더하게 되었다. 임금경희궁(慶熙宮)으로 이어하자 (兩宮) 사이에 서로 막히게 되고, 또 환관(宦官)·기녀(妓女)와 함께 절도 없이 유희(遊戲)하면서 하루 3차례의 문안(問安)을 모두 폐하였으니, 임금의 뜻에 맞지 않았으나 이미 다른 후사가 없었으므로 임금이 매양 종국(宗國)을 위해 근심하였다.
영조실록》 99권, 영조 38년(1762년, 청 건륭(乾隆) 27년) 윤5월 13일 [을해] 2번째기사
한참 후에 세자(笠)과 (袍) 차림으로 들어와 뜰에 엎드렸는데 임금이 문을 닫고 한참 동안 보지 않으므로, 승지가 문 밖에서 아뢰었다. 임금이 창문을 밀치고 크게 책망하기를,
"네가 왕손(王孫)의 어미를 때려 죽이고, 여승(女僧)[12]으로 들였으며, 서로(西路)에 행역(行役)하고, 북성(北城)으로 나가 유람했는데, 이것이 어찌 세자로서 행할 일이냐? 사모를 쓴 자들은 모두 나를 속였으니 나경언이 없었더라면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왕손의 어미를 네가 처음에 매우 사랑하여 우물에 빠진 듯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하여 마침내는 죽였느냐? 그 사람이 아주 강직하였으니, 반드시 네 행실과 일을 간(諫)하다가 이로 말미암아서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또 장래에 여승의 아들을 반드시 왕손이라고 일컬어 데리고 들어와 문안할 것이다. 이렇게 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겠는가?"
하니, 세자가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나경언과 면질(面質, 죄의 여부를 대질함)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책망하기를,
“이 역시 나라를 망칠 말이다. 대리(代理)하는 저군(儲君)이 어찌 죄인과 면질해야 하겠는가?”
하니, 세자가 울면서 대답하기를,
“이는 과연 의 본래 있었던 화증(火症)입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차라리 발광(發狂)을 하는 것이 어찌 낫지 않겠는가?”
하고, 물러가기를 명하니, 세자가 밖으로 나와 금천교(禁川橋) 위에서 대죄하였다.
영조실록》 99권, 영조 38년(1762년, 청 건륭(乾隆) 27년) 5월 22일 (을묘) 2번째기사
평양 사람 이갑(李甲)이 용력이 있었는데 환관을 통해서 동궁을 모시게 되었다. (그가) 일찍이 말하기를.
"동궁이 어떤 사람과 즐겁게 대화를 하다가 갑자기 심화가 치밀어 오르자, 철편(鐵鞭)을 휘둘러 그 옆에 있던 사람이 맞아 죽었다. 애증(隘症)을 분간하지 못한 것이 마치 날씨가 갠 날에 밝았다가 어두운 구름이 갑자기 가리는 것과 같았다"
《玄皐記(현고기)》[13]
세자내관, 내인, 하인을 죽인 것이 거의 100여 명이오며, 그들에게 불로 지지는 형벌을 가하는 등 차마 볼 수 없는 일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지난번 제가 창덕궁에 갔을 때 몇 번이나 저를 죽이려고 했는데 겨우 제 몸의 화는 면했습니다만, 지금 비록 제 몸이야 돌아보지 않더라도 우러러 임금의 몸(玉體)을 생각하면 어찌 감히 이 사실을 아뢰지 않겠습니까?
《廢世子頒敎(폐세자반교)》[14]

2.5. 나경언 고변 사건

1762년(영조 38년) 5월 22일, 나경언이란 자가 사도세자의 10가지 비행을 고변하자, 영조는 친히 국문을 하였다. 나경언은 액정별감 나상언의 형으로 사람됨이 불량하고 남을 잘 속였다. 가산이 탕진되어 자립하지 못하게 되자, 이에 세자를 제거할 계책을 내어 형조에 글을 올렸다.[15]
나경언(羅景彦)이 복주(伏誅)[16]되었다. 나경언이란 자는 액정 별감(掖庭別監) 나상언(羅尙彦)의 형이니, 사람됨이 불량하고 남을 잘 꾀어냈다.
가산(家産)이 탕패되어 자립(自立)하지 못하게 되자 이에 춘궁(春宮) 을 제거할 계책을 내어 형조에 글을 올려,
환시(宦侍)가 장차 불궤(不軌)한 모의를 한다고 고하였다.
참의 이해중(李海重)이 영의정 홍봉한에게 달려가 고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이는 청대(請對, 급한 일로 임금 뵙기를 청함)하여 계품(啓稟, 임금에게 아룀)하지 않을 수 없다."
(중략)
하매, 이해중이 이에 세 차례나 청대하였다. 임금의 마음이 놀라 이해중의 입시를 명하니, 이해중이 드디어 그 글을 아뢰었다.
임금이 상(床)을 치면서 크게 놀라 말하기를,
"변란이 주액(肘腋)에서 있게 되었으니, 마땅히 친국(親鞫)하겠다."
하였다.
경기 감사 홍계희(洪啓禧)가 마침 입시하고 있다가 임금에게 호위(護衛)하게 하기를 권하니,
임금이 이에 성문 및 아래 대궐의 여러 문을 닫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즉시 태복시(太僕寺)에 나아가 국청(鞫廳)을 설치하니,
시임 대신 홍봉한·윤동도와 원임 대신 신만(申晩) 등이 입시하였다.
남태제(南泰齊)를 지의금(知義禁)으로 삼아 판의금(判義禁) 한익모(韓翼謨)·동의금(同義禁) 윤득양(尹得養), 문랑(問郞) 홍낙순(洪樂純) 등 8인과 함께 죄인을 국문(鞫問)하였다.
나경언이 옷솔기에서 흉서(凶書, 고변서)를 내놓으면서 말하기를,
"이 글을 구중(九重, 구중궁궐)의 천폐(天陛, 궁전의 섬돌)에 올리고자 했으나 올릴 길이 없기 때문에 우선 형조에 원서(原書)를 올려 계제(階梯)[17]를 삼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다 읽지 못하고서 손으로 문미(門楣, 문얼굴 위에 가로 대는 나무)를 치면서 말하기를,
"이런 변이 있을 줄 염려하였었다."
(중략)
영조실록》 99권, 영조 38년(1762년, 청 건륭(乾隆) 27년) 5월 22일 (을묘) 2번째기사
임오화변의 원인으로 영조가 노론을 견제키 위해 키운 외척계 탕평당인 홍봉한 계열과 영조의 탕평에 반발하던 노론계의 대립으로
기행을 일삼던 사도세자 문제가 정치적으로 떠올랐는데 반 탕평파에서 홍봉한을 공격하기 위해 그의 약점이던 사도세자 문제를 정치 문제화시켰다는 주장도 있다.
홍봉한은 이를 덮기 위해 뇌물까지 제공하며 은폐하려 했지만 나경언의 고변까지 들어가고 더이상 어쩔 수 없는 상태까지 오자 영조가 종사(宗社)[18]를 위해 아들을 포기했고 손자를 지키기 위해 홍봉한에게 자신의 명을 따르도록 종용했다고 한다.
임오화변》 / 원인 분석 中
이후 상당한 상소에서도 세자의 비행을 은폐하는 홍봉한에 대한 공격이 여러 곳에서 나온다.

2.6. 임오화변

세자빈 홍씨는 사도세자가 대처분을 당한다는 것을 알고는 안절부절 못하다가 오후 3시에 창경궁 밧소주방의 뒤주를 가져가는 것을 보고서는 칼로 2차례나 자결하려 했으나 주위에서 칼을 빼앗아 실패했다. 세자빈 홍씨는 사도세자를 만나기 위해서 달려갔으나 들어가지는 못하고 사도세자가 울부짖는 소리만 들으면서 "그리 힘도 세신 분이 어째서 뒤주에 들어가란다고 그냥 들어가셨다는 말인가?"하고 남편을 원망 아닌 원망을 하며 울었다.[19] 이후 세자빈 홍씨는 내시를 시켜서 영조에게 "죄인의 아내가 어찌 궁에 있겠습니까"하고 친정으로 갈 것을 허락해달라는 편지를 보내면서 세손을 지켜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고 잠시 후에 세자빈의 오빠 홍낙인이 세자빈 홍씨를 부둥켜안고 통곡하면서 “동궁폐위하여 서인(庶人)으로 만드셨다 하니 빈궁(세자빈)도 더이상 대궐에 있지 못할 것이라. 주상께서 본가로 나가라 하시니 가마가 들어오면 나가시고 세손은 남여(藍輿)[20]를 들여오라 하였으니 그것을 타고 나가시리이다."라고 했고 세자빈 홍씨도 통곡했다.

2.6.1. 사도세자 사망 이후

영조는 사도세자가 죽은 당일에 세자빈 홍씨에게 '혜빈(惠嬪)'이라는 빈호(嬪號)를 내린다.[21] 영조의 명으로 친정으로 나가 있다가 다시 으로 돌아온 혜빈은 아들을 잘 키워 훌륭한 임금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유일한 희망 밖에 없었을 것이다. 친정아버지 홍봉한이 세도세자의 죽음과 관련해 영조에게 직접 바친 상소문에서 혜빈 홍씨는 왕세손 정조에게 "나는 아내로서 이런 경우를 당하고 는 자식으로 이런 경우를 만났으니 다만, 스스로 운명을 슬퍼할 뿐이다. 장차 누구를 원망하며 누구를 허물하겠느냐? 또 나와 네가 지금까지 보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상(聖上) 덕분이며 우러러 의지하고 목숨을 맡길 분도 오직 성상 뿐이다."라고 하며 성은(聖恩, 성스러운 은혜)에 보답해야 말했다고 한다. 물론 영조는 후회하지 않았고 "자신이 종사(宗社)[22]를 위해 의(義)로써 결단한 것"이라고 홍봉한에게 말했다. 영조 자신도 홍봉한이 상소문을 바치기 전에 이미 직접 혜빈을 찾아가 보았는데 "저희 모자(母子)가 살아있는건 다 성상의 은혜 덕분입니다."라고 영조의 처분을 긍정하는 뜻을 보이자 그녀가 효성스러웠다고 칭찬했다.

한편 혜빈 홍씨는 영조에게 세손경희궁에 머무르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당시 혜빈은 창덕궁에 있었으므로 자식과 생이별을 하는 셈이었지만 남편 사도세자가 죄인으로 몰려 죽은 상황에서 아들 세손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이었는데 당시 세손은 9세였다.[23] 한 번은 어린 세손이 혜빈에게 와서는 울면서 떨어지지 않자 영조가 "이렇게 어미를 그리워하니 놔두고 가는게 좋지 않겠느냐."고 말하자 "여기 있으면 주상을 그리워한다."며 매몰차게, 또 무정하게 떼어놓았다고 회고했다. 그렇게 대답한 이유는 두 가지인데, 정조가 자신이 아닌 혜경궁을 선택하면 영조가 매우 섭섭해 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또한 혜경궁은 사도세자가 죽게 된 결정적인 이유를 어린 시절 사도세자와 영조가 멀리 떨어져있어서 잘 만나지 못했고 그로 인해 영조와 사이가 멀어졌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영조의 정신나간 수준의 편집증과 그 결과로 일어났던 일들을 생각하면 혜경궁 홍씨의 이러한 걱정은 절대로 기우가 아니었다. 그래서 정조를 영조의 마음을 잃게 하지 않기 위해 가까이 지내게 하였다.

1769년(영조 45년), 세손 산은 흥은부위(興恩副尉) 정재화(鄭在和) 등과 함께 기방에 출입했다가 화완옹주, 홍국영 등이 각각 목격했다. 이는 화완옹주, 홍국영 등이 각각 혜경궁 홍씨에게 직접 알렸고, 혜경궁은 친정아버지 홍봉한을 찾아가 어린 세손이 사도세자와 같이 될까봐 염려된다며 사건 수습을 요청했다. 홍봉한은 개입하기를 거절했고, 혜경궁은 단식농성을 했다. 홍봉한이 나서서 세손을 보았던 기생들을 유배 보내고 세손에게 후보고를 한 후 사건을 수습했다. 이는 《조선왕조실록》에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 직접 언급되었다.[24]

1775년(영조 51년), 영조가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자 혜빈의 작은 아버지였던 홍인한은 극력 반대하였고, 이 문제로 정조의 미움을 사서 정조 즉위 이후 유배되어 사사된다. 홍봉한은 1770년(영조 46년) 경, 반대파 김귀주, 정후겸의 공격으로 정계에서 영원히 은퇴하고 봉조하의 직함으로 교외에 거주했으며 이후에도 이복동생이던 홍인한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을 배신했다고 정조가 말한적이 있다. 사도세자 생전부터 있었던 정순왕후 외척 가문과의 정쟁으로 관직에서 물러났고 이후에도 김귀주 정파의 홍봉한 탄핵이 여러 번 있었으며 정조 즉위 초에도, 정조의 승하 이후에도 이들이 홍봉한에 대한 공격을 주도했다. 사도세자추숭에 대해 당시 왕세손이던 정조와 사석에서 홍봉한이 나눈 이야기를 김귀주가 영조에게 고자질해서 홍봉한을 역적으로 몰기도 했었다.

2.7. 정조 시기

아들 정조가 즉위한 뒤에 '혜경궁(惠慶宮)'이라는 궁호를 받았으며 '자궁(慈宮)'이라 불리게 된다. 전통적으로 조선 왕실에서 국왕의 적모를 일컫는 칭호는 '자전(慈殿)'이었다. 그러나 혜경궁 홍씨는 의 어머니이자 왕실 내명부 여인 중 나이로 치면, 가장 연장자였지만 홍씨의 살아 생전에 사도세자가 국왕으로 추증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그녀는 왕대비가 되지 못했다. 또, 정조가 백부 효장세자의 아들로 양자 입적되면서 법적으로는 국왕의 어머니조차 아니었기 때문에 '자전(慈殿)'이라는 칭호 조차도 쓰지 못하고 그 지위도 공식적으로 확실하게 보장받지 못했다. 당시에 왕실의 내명부 서열 1위이자 최고어른은 혜경궁 홍씨의 시어머니이자 그녀보다 10살이 더 어린 왕대비 정순왕후 김씨였다. 만일 당시에 혜경궁 홍씨가 아들 정조 재위 시기에 남편이 국왕으로 추존되었다면 자신은 왕대비가 되고 정순왕후대왕대비가 되었을 것이다. 정조는 궁여지책으로 1단계 낮은 '자궁(慈宮)'이라는 칭호와 함께 실질적으로는 왕대비 정순왕후 김씨보다는 낮고 중전 효의왕후 김씨보다는 높은 대우를 하여 결과적으로 대비(大妃)에 준하는 대접을 해서 친어머니를 직접 위로했다.[25] 혜빈 홍씨가 궁호인 '혜경궁(惠慶宮)'으로 불리게 된 것도 이 때의 일이다.

아들의 즉위 초반 반대파들의 공격에 친정이 수난을 당했으나 정조는 끝까지 외가를 보호했고 즉위 중후반 이후로는 정조가 직접 외가에 대한 명예 회복에 나섰고 아들의 극진한 효도를 받으며 평온한 시절을 보낸다.[26] 1796년(정조 20년), 정조는 혜경궁 홍씨의 환갑 잔치를 위해 화성 행차를 했는데 혜경궁 홍씨는 무려 33년만에 처음으로 남편 사도세자무덤(현륭원)에 방문했다. 조차도 궁궐 밖 외출이 자유롭지는 않았는데 더구나 왕실 내명부의 여성이었던 혜경궁 홍씨는 당연히 남편의 무덤은 커녕 궁궐 밖에 외출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런 혜경궁 홍씨가 남편과 오랜만에 만나서 얼마나 절절한 생각을 했을지 충분히 짐작이 된다. 《한중록》에 따르면 '"임오화변 당시 앞날이 막막했으나 당시 11살이던 아들은 임금이 되었고 10살이 되지 않았던 은 현재 모두 장성하여 40세가 넘었다"며 마음 속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했다고 한다.

2.8. 순조 시기

하지만 1800년(정조 24년) 6월, 정조 사후 그녀의 일생에 있어서 큰 고난이 시작되었다.[27] 혜경궁 홍씨의 친정 풍산 홍씨정순왕후 김씨의 친정 경주 김씨가 크게 대립했기에 정조 사후 정순왕후가 혜경궁 홍씨의 남동생 홍낙임을 신유박해 계기으로 처벌하려고 했다. 이에 혜경궁 홍씨는 단식 투쟁을 벌여가면서까지 반대했고 며느리였던 수빈 박씨도 합세해 둘이서 손자 순조에게 기대어 정순왕후의 뜻을 일단 꺾었으나 결국 홍낙임은 유배를 보낸 후 사사되었다. 당시 궁중의 분위기가 어떠했는가 하면 혜경궁 홍씨에게 문후(問厚)를 오는 이가 아무도 없을 정도였다. 순조는 물론이고 왕대비효의왕후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마저도 대왕대비 정순왕후눈치를 봐 혜경궁 홍씨에게 올 수가 없었던 것. 혜경궁의 친손자인 순조순원왕후가례를 올릴 때도 혜경궁 홍씨는 폐백을 받지 못했다.[28][29]

1814년(순조 14년), 정적이자 명목상 시어머니였던 정순왕후가 죽은 뒤, 차례차례 혜경궁 홍씨의 친정이 차례로 신원, 복권되었다. 또한 홍봉한죽음 직전에 그를 비난했던 정이환, 이심도 등의 처벌을 순조에게 요구한다. 이심도는 결국 사형에 처해진다.

혜경궁 홍씨는 전에 1805년(순조 5년)부터 '담현증(痰昡症)'을 앓아 오래 병석에 누웠는데, 점차 병세가 깊어져 1815년(순조 15년) 12월 15일, 향년 81세의 일기를 끝으로 창경궁 경춘전(昌慶宮 景春殿)[30]에서 눈을 감았는데 손자 순조가 '헌경(獻敬)'이라는 시호를 올렸다.[31][32]
빈청에서 혜경궁의 시호를 다시 의논하여 올리다
빈청(賓廳)에서 혜경궁의 시호를 다시 의논하여 상계(上啓, 조정이나 윗 사람에게 여쭈어 봄)하였는데,
시호헌(獻) 【총명(聰明)하고 예지(睿知)함.】 경(敬) 【밤낮으로 경계(儆戒)함.】 이다.
순조실록》 18권, 순조 15년(1815년, 청 가경(嘉慶) 20년) 12월 25일 [을해] 2번째기사

2.9. 사후

1854년(철종 5년), ‘유정(裕靖)’존호가 추가되었다. 고종 대에 1899년(광무 3년) 8월 3일에 경연특진관 서상조(徐相祖)의 상소로 장헌세자를 왕으로 추존할 것을 청하였다. 고종황제가 승인하여 남편 사도세자가 '장종(莊宗)'으로 추존되자 혜경궁은 '헌경왕후(獻敬王后)'로 추존되었고 대한제국 성립 후 다시 한 번 장종이 '장조(莊祖)'로 대한제국 황제에 재추존되면서 함께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로 높여졌다. 시호는 ‘효강자희정선휘목유정인철계성헌경의황후(孝康慈禧貞宣徽穆裕靖仁哲啓聖獻敬懿皇后)’이다.

그러나 그녀는 손자 순조의 치세에도 왕비추존되지 못했는데 생전에 그리도 싫어하던 은신군양자손자에 의해 왕비를 뛰어넘어 황후로 추존되었음이 역사의 얄궂음이라 하겠다. 다만, 고종문조(文祖)의 양자로 입적되어 즉위하였으므로 법적으로는 효장세자가 고조할아버지이다. 나라를 세우거나 칭제를 했을 때 4대조까지 추존하는 관례를 따르면 사도세자까지 추존함이 맞다.

능은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33]에 위치한 융릉(隆陵)으로 남편인 장조와 함께 합장된 '합장릉의 형식'으로 묻혀 있으며, 인근에는 아들 정조와 며느리인 효의왕후의 능인 건릉(健陵)도 함께 나란히 위치하여 있다.

3. 가계

3.1. 친가(풍산 홍씨)

3.2. 외가(한산 이씨)

3.3. 시가(전주 이씨)

3.3.1. 배우자 / 자녀

4. 여담

4.1. 음모론

이덕일이나 그 일파인 이주한 같은 사람 때문에 '무고한 사도세자에게 누명을 씌운 여자'라는 이미지가 퍼졌었다. 이덕일이 활동하기 수십 년 전부터 혜경궁 홍씨가 악녀로 나온건 1980년대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에도 있지만 이덕일역사학 박사였다는게 문제로[45] 제대로 근거가 없거나 날조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덕일은 혜경궁 홍씨를 '남편죽음으로 몰고 간 악처'라면서 사도세자의 정신병 서술을 조작이라 설명하는데 사도세자정신병은 《한중록》 말고도 증거가 많다.[46] 또한 이덕일은 혜경궁 홍씨가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를 조작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며 다음을 증거로 하였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 사도세자가 22살이 되도록 영조가 능행할 때 1번도 수가(隨駕, 임금의 어가를 모시고 따라 다님)하지 못했다고 기록했지만 부자 간의 갈등을 표현하기 위해 혜경궁 홍씨가 의도적으로 꾸민 거짓말에 불과하다. 세자는 그 전에 여러차례 영조를 수가해 능행에 다녀왔는데 혜경궁 홍씨가 처음이라고 주장했던 해보다 4년 앞선 1752년(영조 28년) 7월, 태묘(太廟, 종묘)에 거동할 때 수가했으며 1752년(영조 28년) 12월, 태실에 나아갈 때와 1753년(영조 29년) 첫날, 태묘에 나아갈 때도 따라갔다. 이덕일은 '태묘'라는 단어에 '태조의 묘'라고 설명까지 달아놓았는데 태묘는 무덤이 아니며 '종묘의 정전(正殿)'을 말하는 것이다. 이건 굳이 정병설 같은 전문가까지 갈 필요도 없이 국어사전에서 해당 뜻만 보면 알 수 있는데 국어사전에 있는 단어도 명확히 확인하지 않고 1차 사료를 부정했다. 이에 대해 이덕일 본인은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 서문을 통해 이미 《이덕일의 여인열전》에서 '태묘'의 뜻을 바로 풀어썼다며 "사소한 실수 하나로 작가를 매장시키지 말라"고 반박했다. 이주한은 한 술 더 떠서 혜경궁 홍씨를 가해자로 기본 전제해서 논리를 전개한 적이 있다. 혜경궁 홍씨를 남편을 누명씌워 죽인 가해자로 전제해놓고 이덕일의 사료 왜곡에 반박했던 정병설은 중요한 살인 사건에 대해 가해자의 말을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반사실적 가정의 오류를 범했다.[47] 그러나 정작 정병설은 그러한 논거를 쓴 적 없고 "사도세자가 정신질환이 있다는건 <한중록>에만 있는 사실이 아니다. 영조가 사도세자 무덤(현륭원)에 두려고 직접 쓴 묘지 이름, 사도세자가 장인 홍봉한에게 보낸 간찰, 정조가 사돈 김조순에게 한말 등(후략)"라고 여러 사료와 교차검증하여 이덕일을 반박했다. 이건 관련 논거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오류를 써서 상대의 논거를 날조한 것이다. 일단 혜경궁 홍씨를 무조건 믿을 수는 없는데 혜경궁 홍씨가 거짓말을 했다는게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료는 저자의 주관에 따라 편향성이나 왜곡될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특히 <한중록>은 그 특성상 혜경궁 홍씨의 친정인 홍봉한 집안의 책임을 실제보다 작게 묘사했다는 의혹을 피하기 힘들며 정병설도 《한중록》을 완벽히 믿지 않는다.[48] 사료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는 모든 학자들이 가져야만 하는 기본적인 태도이다. 그러나 혜경궁 홍씨는 그 가능성을 넘어서 딱히 고의적인 날조를 했다는 정황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는데도 이덕일과 그 부류의 인물들은 제대로 증거도 없이 의심을 넘어 확신을 하며 유사역사학 방법을 동원하는게 문제이다. 모순적이게도 음모론자들은 정조가 즉위한 뒤 혜경궁 홍씨에게 극진한 효도를 다했음은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음모론대로라면 혜경궁 홍씨는 정조에게는 '훌륭한 아버지정신병자로 모함해 죽인 원수이자 정적'인데도 왜 정조는 친모에게 하소연조차 하지 않았는지 의문이다.[49]

5. 대중매체에서

2000년대 이전까지는 억울하게 남편을 잃은 비운의 여인이라는 이미지를 강조하는 경향이 컸으나, 이덕일을 필두로 한 노론 음모론이 제기된 이후로는 친정의 영달(榮達, 부귀영화)을 위해 남편자식을 버린 비정한 인물로 묘사되는 경우가 잦았다. 하지만 노론 음모론이 논파[50]2010년대 중반 이후로는 다시금 옛날의 비운의 세자빈 이미지를 재조명하는 경향이 커졌고, 서슬퍼런 정국 속에서도 아들 정조를 시아버지 영조로부터 지켜내려는 의외의 강인함이 부각되기도 한다.

5.1. 드라마

5.1.1. 안국동 아씨(1979)

1979년, MBC 드라마 《안국동 아씨》에서는 배우 김영란이 연기했다.

5.1.2. 하늘아 하늘아(1988)

1988년, KBS 드라마 〈하늘아 하늘아〉[51]에서는 배우 하희라[52]가 연기했다.[53] 고전적인 해석인 비운의 여인으로 나왔다.

5.1.3. 조선왕조 오백년(1988)

1988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한중록에서는 배우 최명길이 연기했다.[54]

5.1.4. 왕도(1991)

1001년, KBS 드라마 《왕도》에서는 배우 정영숙이 연기했다.

5.1.5. 대왕의 길(1998)

1998년, MBC 드라마 《대왕의 길》에서는 배우 홍리나가 연기했다. 이인혜가 연기한 정순왕후 김씨윤손하가 연기한 숙의 문씨가 표독스러운 캐릭터로 그려지는 반면 혜경궁 홍씨는 이에 대비되는 착하고 가련한 여인으로 그려진다. 극 중 내내 참거나 당하는 포지션.

5.1.6. 정조 암살 미스터리-8일(2007)

2007년, 채널CGV 드라마 《정조 암살 미스터리-8일》에서는 이덕일 식 (노론음모론)역사관을 참고했기 때문인지 혜경궁 홍씨를 친정을 위해 남편을 버렸고 이제는 아들까지 버리려 하는 냉혹한 이미지로 묘사했으며 배우 정애리가 연기했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아들 정조에게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려주고 남편아들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으로 극이 마무리되었다.[55]

5.1.7. 이산(2007)

2007년, MBC 드라마 《이산》에서는 배우 견미리가 연기했다. 임오화변 한참 후의 시기를 메인으로 삼았기 때문에 비운의 여인 이미지보다는 자애로운 어머니 이미지이다. 남편을 잃고 아들도 몇 번이나 잃을 위기를 맞은 것에는 당연히 한이 맺혀 있기에 노론 측에는 적대적인 태도를 취한다.[56] 정조 즉위 후에는 엄한 내명부의 주인 역할을 맡기도 한다. 히로인인 의빈 성씨와 정조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청나라에 보내버리기도 하는 등 무서운 시어머니 역할도 하였다.[57][58]

5.1.8. 한국사 傳(2008)

2008년, KBS 다큐멘터리 《한국사 傳》에서는 이선영 아나운서가 연기했다.

5.1.9. 비밀의 문(2014)

파일:비밀의문혜경궁.gif
2014년 SBS 월화 드라마 《비밀의 문》
배우: 박은빈
남편인 사도세자와 아들 이산을 지키기 위해 시아버지 영조를 비롯한 궁궐(왕실) 인물들과 대립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궐에서 홀로 가족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혜경궁 홍씨를 보면 탐정놀음이나 하는 주인공 사도세자가 더 짜증날 지경..

5.1.10. 붉은 달(2015)

2015년, KBS 드라마 스페셜 《붉은 달》에서는 배우 박하나가 연기했다.

5.1.11. 옷소매 붉은 끝동(2021)

파일:옷소매 붉은 끝동(드라마) 등장인물 혜빈홍씨.jpg
2021년 MBC 금토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
배우: 강말금
부군인 사도세자의 사후 그의 광증을 알면서도 제때 말리지 못한 걸 후회하며 처신 또한 상당히 조심하고 아들만을 바라보고 살아간다. 1화에서 이모비야(而母婢也)[59] 사건 때문에 아들폐세손될 위기에 처하자 넙죽 엎드려 영조의 역정을 듣기만 하다가, 문제의 구절이 찢어진 것[60]을 보고 영조가 화를 풀자 안도한다.

시누이 화완옹주가 워낙에 안하무인이라 그를 못마땅해하고 있으며, 화완옹주도 조카인 을 미워하기 때문에 그 어미인 혜경궁 또한 미워하여 둘의 관계는 이미 파탄나 있었다. 실제 역사에선 엄청난 불경일 행동도 화완옹주가 서슴지 않는데, 혜경궁에게 찻물을 뿌리며 '너는 절대 대비(大妃) 못 된다'고 욕하고 당장 세손대리청정을 물리라고 윽박지른다. 혜경궁은 이런 무례를 당하고도 큰소리 한 번 안 내고 조곤조곤히 '나는 대비가 될 수 없지만 세손은 자신을 낳아준 어미를 생각하여 극진한 봉호와 작위를 내려준다는데, 너는 옹주의 작위를 박탈당하고 정씨의 처로 불릴 것'이라고 조롱한다. 결국 화가 머리 끝까지 난 화완옹주가 혜경궁에게 달려들자 양자인 정백익이 극구 말리면서, 정백익이 '밖으로 나가시라'고 말하자 "여기가 내 처소인데 나더러 나가라니"라고 황당해하며 웃는다[61]

아들이 다음 국왕으로 즉위한 후에는 "온 세상이 주상더러 임금으로서 행동하라 할 뿐 행복하라곤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어미로서 아들의 행복을 빌 권리가 있다."고 말하고, "산아, 행복해지렴."이라며 아들의 사랑과 행복을 (한발짝)뒤에서 진심으로 응원한다.

5.1.12. 사관은 논한다(2024)

파일:사관은 논한다 등장인물 혜빈 홍씨.png
2024년 KBS 드라마 스페셜 《사관은 논한다》
배우: 최희진[62]

5.2. 영화

5.2.1. 역린

2014년, 개봉한 영화 《역린》에서는 배우 김성령이 연기했다. 정조 시대를 배경으로 했기 때문에 남편을 버린 비정한 면이 아니라 아들을 위해 어린 시어머니 정순왕후에게 굴욕을 당하고 인내하는 등 어머니로서의 모습이 부각되었다.

5.2.2. 사도(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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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사도》
배우: 문근영
2015년, 개봉한 영화 《사도》에서는 배우 문근영이 연기했다. 임오화변을 위주로 주변 배경을 다뤘다.
이윽고 장면은 어린 혜경궁이 갓 왕가에 시집을 온 시점으로 변경된다. 시가 어른들께 "주상께선 이런 분이시다."라는 진심어린 조언을 들은 후 영조를 어려워하는 혜경궁에게 사도세자는 "아바바마를 너무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지만, 세자가 나이가 들수록 영조의 정서적인 학대를 비롯한 핍박은 더욱 심해져 도리어 사도세자가 버티지를 못하고 정신병으로 점점 미쳐가고 만다. 혜경궁은 아무래도 어머니 된 입장으로서 세손을 중시하다보니 아내로서 남편인 세자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하여 세자로부터 "자네는 입만 열면 세손 타령"이라는 원망을 듣는다. 자신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아내가 세자에겐 큰 상처였던 듯, 아들 내외가 문안을 오자 '부부란 사소한 예법에 얽매이지 않으며 서로 끝없이 사랑하는 것'이라는 (슬픔에 잠식된)한탄 섞인 조언을 해 주기도 한다.

이후 세자가 더 이상 울화를 참지 못하고 하수구를 통해 부왕이 거처하는 경희궁에 그것도 남들 다 자는 야밤에 무단으로 침입하여 부왕을 시해하려 하자, 울며 말렸지만 밀쳐지고 만다. 혜경궁은 그 길로 시어머니 영빈에게 냅다 달려가 '이대로 가다간 세자세손까지 죽는다'고 고해 바치고, 충격을 받은 생모 영빈은 하나남은 세손만이라도 살리기 위해 다음날 영조에게 무릎꿇고 울면서 대처분을 청하게 된다. 하지만 세자가 뒤주에 갖힌지 8일 만에 사망한 이후, 영빈이 "내 아들 내가 죽인 거 아니지?"라며 절규하자 "이것이 어찌 어머니 탓이겠습니까"라며 영빈을 극진히 위로한다.

세자의 장례가 치러지고, 화완옹주는 빈전(殯殿)에서 세손을 끌어내며 세손의 상복을 벗겨 주상이 있는 경희궁에 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혜경궁 또한 이 의견에 동의하여 세손에게 상복을 벗을 것을 명하나 세손이 울면서 완강히 거부하자 혜경궁 또한 감정에 북받혀 세손에게 손찌검을 한 후, 이내 진정하고 '네가 보위(寶位)를 이어야 아버지의 복수를 할 수 있다.'[63]고 다독인다.

시간이 흘러 세손은 보위를 잇고, 노인이 된 혜경궁을 위해 회갑연이 열린다. 정조-혜경궁 모자는 사도세자가 묻힌 현륭원(顯隆園)을 직접 찾아가 참배를 드리고, 혜경궁은 남편에게 울면서 용서를 구한다.

5.3. 소설

5.3.1. 붉은 왕세자빈

영국인 작가 마가렛 드래블[64]이 혜경궁 홍씨의 그 이야기를 듣고 《붉은 왕세자빈》이라는 작품을 썼다.

5.3.2. 옷소매 붉은 끝동

강미강 작가의 소설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는 '효강혜빈(孝康惠嬪)'으로 등장한다.

5.3.3. 왕의 언약 / 사도세자

김경민 작가의 소설 《왕의 언약》과 《사도세자》에서 '혜경궁'으로 등장한다.

5.4. 게임

5.4.1. 도미네이션즈

혜경궁의 반지가 유물로 등장한다.

5.5. 뮤지컬

5.5.1. 정조대왕(2007)

2007년, 개봉한 뮤지컬 《정조대왕》에서는 뮤지컬 배우 조미정이 연기했다.

[1] 음력 생일이 손자 순조와 같은데, 당시 실록을 보면 이런 경우가 조선 왕조에서 유일했던 것 같다. 1791년(정조 15년) 6월 18일에는 혜경궁의 생일과 순조의 첫 돌을 맞아 잔치도 크게 열고 백성들에게까지 떡을 돌렸다고 한다.[2] 다만, 1778년(정조 2년)에 효강, 1783년(정조 7년)에 '자희(慈禧)', 1784년(정조 8년)에 '정선(貞宣)', 그리고 혜경궁의 회갑을 한 해 앞둔 해에는 '휘목(徽穆)'이라는 정식 존호를 올렸으며 혜경궁 사후 철종에 의해 '유정(裕靖)'이라는 최종적인 시호를 올렸다. 따라서 혜경궁 홍씨의 공식적인 호칭은 '효강자희정선휘목유정혜빈(孝康慈禧貞宣徽穆裕靖惠嬪)'이다. 또, 정조가 1778년(정조 2년) 3월에 그 경칭을 왕세자에 준하는 신분의 경칭인 저하라 하였으며, 혜경궁은 어디까지나 정조가 생모를 추앙(그 신분을 격상)하기 위한 비공식적인 경칭으로 보인다.[3] 정순왕후 김씨도 15세 소녀의 나이로 영조와 혼인했지만 혜경궁 홍씨는 더 어린 10세였다.[4] 할아버지 홍현보는 예조판서까지 역임했지만 《한중록》에 의하면 혜경궁 일가의 가계는 빈한(貧寒, 가난하고 쓸쓸함)하여 혜경궁과 그의 언니가 출가할 때 혼수품이 넉넉하지 않았고, 혜경궁이 사도세자와 가례를 올려 세자빈을 정식 배출하게 되자 얼굴도 모르고 난생 처음 보는 친척들이 나타나서 자신의 이름을 알아달라고 부탁했다고 할만큼 가세가 기울어 찢어질 정도로 가난했다.[5] 혜경궁 홍씨와 남편 사도세자13촌 먼 숙질로 엮이는데 혜경궁 홍씨의 5대조, 홍씨의 아버지 홍봉한의 고조부인 홍주원정명공주의 남편(영안위)이다. 사도세자선조인빈 김씨의 아들 정원군(추존 원종, 인조의 생부)의 후손(6대손)이고 혜경궁 홍씨는 선조인목왕후 김씨의 딸 정명공주의 후손(5대손)이니 '13촌 지간'이다.[6] 세자의 적녀를 '군주(郡主)', 서녀를 '현주(縣主)'라고 칭했다. 의 적녀와 서녀인 공주옹주는 무품이었지만 '군주'는 정2품으로 품계가 있었다고 한다.[7] 이 때 영조는 세자빈 홍씨에게 "넌 여자면서 투기도 안 하냐"며 엄책(嚴責)했는데 이 때가 혜경궁 홍씨가 시아버지에게 질책받은 유일한 일이었다고 한다. 조선여자의 질투를 금기시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질투를 조금도 안 하면 남편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서 부정적으로 여기기도 한다. 중종이 딸 효정옹주를 질책할 때에도 "부녀자의 투기가 없을 수 없다"고 이야기했을 정도.[8] 웃전인 대왕대비였던 인원왕후의 침방 궁녀였던 경빈 박씨와는 달리 숙빈 임씨는 어느 처소라고 알려진 바가 없었던 걸 봐서는 윗전이 아닌 궁녀로 추정되는데, 젊은 세자가 궁녀를 가까이하는 게 좋은 일은 아니지만 1달 내내 꾸중을 들을 정도는 아니었는데도, 영조는 집요하게 1달 내내 꾸중을 늘어놓았다[9] 나경언의 고변 사건에서 나온 내용이기도 하며 영조 역시도 사도세자를 불러서 "박씨(빙애)는 그토록 사랑해놓고는 왜 죽였느냐? 분명 그녀가 강직하여 너의 행동에 간언하다 죽은 것이다."라고 질타했다.[10] 세자의 아이를 임신했음에도 사도세자에게 박대받는 숙빈 임씨는 정말 안타까워 했고 사도세자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 경빈 박씨에게는 약간의 질투를 드러내는 모습을 보인다.[11] 심지어 생조모가 되는 영빈 이씨조차 세자가 얻은 후궁 소생 손주들(은언군, 은신군, 은전군 등)을 철저히 외면했다.[12] '가선(假仙)'이라는 이름여승. 사도세자평안도에 갔다가 여승이던 가선을 데려와 자신의 후궁으로 삼았다. 사도세자뒤주에 갇혀 죽은 후, 가선은 사도세자를 모시던 내시 박필수(朴弼秀) 및 5명의 기녀들과 함께 참형에 처해졌다.[13] 박종겸이 쓴 소론 준론계 당론서. 시종일관 사도세자에 우호적이고 노론에게 적대적이지만, 사도세자의 병 자체는 부인하지 않았다.[14] 정병설, http://cafe.naver.com/mhdn/29204에서 재인용.[15] 출처 : 《영조실록》 99권, 영조 38년(1762년, 청 건륭(乾隆) 27년) 5월 22일 [을묘\] 2번째기사.[16] 순순히 형벌을 받음. 즉, 나경언은 영조의 명에 의해 강상죄로 끔찍하게 참수되었다.[17] 사도세자를 제거할 음모, 계획을 의미한다.[18] 종묘사직.[19] 사도세자가 영조에게 애원하는 소리를 들으니 간장(肝腸, 간과 창자)이 마디마디 끊어지고 눈앞이 막막했다고 《한중록》에 기록했다.[20] 지붕이 없는 작은 가마.[21] 순빈 봉씨 이후로 조선의 세자빈들은 별도의 빈호를 쓰지 않았지만 남편인 세자가 죽은 경우에는 빈호를 썼다. 인수대비도 남편 의경세자가 죽자 '수빈(粹嬪)'이 되었고 혜경궁 홍씨의 손윗동서인 효순왕후도 남편 효장세자 사후에는 '현빈(賢嬪)'으로 불렸다.[22] 종묘사직.[23] 이후 정조는 국왕으로 즉위하는 1776년(영조 52년)까지 생(生)조모인 영빈 이씨의 처소 부근인 경희궁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24] 당시 궁중의 상황을 살펴보건대 세손과 세손빈의 부부 사이가 서로 얼굴을 상면하지 않으려 할 만큼 좋지가 못했다. 이것에 대해 혜경궁이 한중록에서 주장한대로 화완옹주가 개입한 것인지는 불명이다[25] 사실 당시 내명부 서열은 왕대비전(정순왕후), 내전(효의왕후), 자궁(혜경궁 홍씨), 가순궁(수빈 박씨) 순서로 효의왕후가 시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보다 공식적으로 높은 대우를 받기는 했다. 문안 순서도 내명부 위계를 그대로 따라 왕대비, 왕비를 거친 후에야 혜경궁에게 문안 인사가 돌아갔다. 4명 모두 내명부 무품이기는 하나, 정조의 친모이긴 해도, 혜경궁 홍씨는 어디까지나 공식적으로 왕세자빈신분이니 왕비에 우선할 수는 없던 것. 심지어 친손자 순조가 1800년(정조 24년), 왕위에 즉위하고 나서는 서열이 하나 더 밀려 대왕대비전(정순왕후), 왕대비전(효의왕후), 내전(순원왕후), 자궁(혜경궁 홍씨), 가순궁(수빈 박씨) 순서였다.[26] 외할아버지 홍봉한에게 '익정공(翼貞公)'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친히 제문을 지어 수시로 내리고 외가족보나 외가 친척들의 친목계인 화수회까지 정조가 직접 챙겨 주관하며 외조부의 생전의 상소들을 모아 외삼촌인 홍낙임과 함께 상소 문집까지 편찬에 관여하며 직접 서문까지 썼다.[27] 그녀는 아들 정조 사후에도 16년을 더 살았다.[28] 폐백은 신부혼례(婚禮)를 마치고 시댁에 와서 시부모(媤父母)를 비롯한 여러 시댁의 큰 어른들에게 드리는 첫인사를 말한다. 그러나 왕실 법도에 의하면 남편인 사도세자의 신분이 아니기 때문에 그의 빈이 되는 혜경궁 홍씨 또한 왕세자빈의 신분이고 법적으로 순조는 그녀의 손자가 아닌 윗동서 효순왕후의 손자이므로 폐백을 받지 않는 것이 맞다. 이 부분은 정순왕후의 고집이 아닌 처음부터 시아버지 영조의 뜻이었으니 오해하지 말자.[29] 당시 왕실 내명부 의례 서열은 예순대왕대비(영조 계비) - 왕대비 김씨(정조 비) - 혜경궁 홍씨(사도세자빈) - 가순궁 박씨(정조 무품 빈) 순차대로 올려지는것이 법도였다. 폐백 대신 별도로 인사를 나누는 것으로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이 논란을 잠재웠다.[30] 여담으로, 창경궁 경춘전은 자신이 첫아이 의소세손을 요절해 잃고, 몇년 만에 남편 사도세자와의 사이에서 아들인 정조를 낳았던 공간이었다.[31] '헌경(獻敬)'의 뜻은 총명하고 예지(睿知)함을 '헌(獻)'이라 하고 밤낮으로 경계함을 일러 '경(敬)'이라 하였다 한다.[32] 사료에서 '혜경궁'을 '헌경빈(獻敬嬪)'으로 부른 경우가 거의 없어서 헷갈리기 쉬운데 당시 혜경궁은 여기에 생전에 받은 빈호를 합친 '헌경혜빈(獻敬惠嬪)'이라고 불렀다.[33] 현재 쓰고 있는 한국의 도로명 주소로는 '경기도 화성시 효행로 481번길 21, 안녕동'이다.[34] 조선통신사로 파견 다녀와서 조선 최초로 우리나라에 고구마 종자를 전파한 인물로서,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부인이자 고종 때에 이르러 대왕대비였던 신정왕후 조씨의 증조부이기도 하다.[35] 홍낙인의 처인 부인 민씨는 인현왕후의 부친인 민유중의 증손녀이다.[36] 혜경궁 홍씨의 친정 풍산 홍씨정순왕후 김씨의 친정 경주 김씨가 크게 대립했기에 정조 사후에 정순왕후혜경궁 홍씨의 남동생 홍낙임을 처벌하려고 했다. 이에 혜경궁 홍씨단식 투쟁을 벌여가면서까지 격렬히 반대했고 며느리였던 수빈 박씨도 합세해 둘이서 손자 순조에게 기대어 정순왕후의 뜻을 일단 꺾었으나 결국 홍낙임은 유배를 보낸 후 사사되었다.[37] 정조의 친필 한글편지에 나오는 '돌아재'라는 표현이 홍낙륜을 지칭하는 말로, 항렬상 정조의 외삼촌이지만 정조와 2살 차이 밖에 나지 않아 또래 친구처럼 지냈다고 했다.[38] 정조의 정비 효의왕후와 사촌 관계라 효의왕후와도 무척 친했다고 한다.[39] 딸중 하나가 김조순의 친조모[40] #혜경궁이 죽기 전에 《한중록》을 맡겼다. 손자였던 순조가 친정인 풍산 홍씨 가문의 억울함을 풀어주기를 바랐던 것이다.[41] 선조조에 서인계로 정치 활동했던 유력인사 송강 정철의 '친(親) 직계 후손'이라고 한다.[42] 예시 2와 3, 4는 공공기관 홈페이지임에도 틀린 시호를 당당하게 적어놨다.(...)[43] 私贖, 궁녀가 개인적으로 부리는 하인, 무수리 등을 지칭함.[44] 責罰, 저지른 과오에 대하여 이를 뉘우치고 반성하고 반복하지 않도록 징계하기 위하여 벌을 줌.[45] 당쟁이 전혀 없었다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사도세자죽음은 아버지 영조와의 갈등과 정신질환으로 추측되는 사도세자의 기이한 행동에 당쟁을 포함한 여러가지 복합적인 문제 때문에 비극을 맞이했던 것이지 순전히 당쟁의 결과물인 것은 아니다.[46] 게다가 대중의 인식과는 달리 사도세자가 친소론이거나 노론에게 비판적이지는 않았고 사도세자죽음 역시 당쟁보다는 영조의 의중이 적용되었던 것이라는 증거들도 속속히 나오고 있다.[47] 이주한,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 2011년, pp.39~40 「3장 비판 아닌 비판을 비판하다」[48] 어디까지나 사도세자의 정신병 기록은 《한중록》에만 있지 않다고 이야기했을 뿐이다.[49] 물론, 당연히 생각해보면 정조에게 혜경궁 홍씨는 친어머니이기에 대놓고 박대(불효)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는 하다.[50] 論破, 학설이 논의 되어 근거가 된 사실이 의미가 없어지게 됨.[51] 혜경궁 홍씨가 주인공으로 〈한중록〉을 기초삼아 만들어졌으며 극본은 임충, 연출은 안영동 PD.[52] 본인의 남편은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시리즈의 사도세자 역.[53] 아역은 이재은.[54] 이 때 사도세자 역을 맡은 배우가 최수종이었다.[55] 2007년 KBS 드라마 《한성별곡》에서는 정애리정순왕후 김씨를 모티브로 한 대비로 등장하고 혜경궁 홍씨를 모티브로 한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 것을 생각하면 흥미롭다.[56] 이 때문에 같은 집안 사람이자 자신의 숙부이자 정조의 작은할아버지이면서 노론 측에 껴서는 정조를 몰아내려고한 홍인한한테도 마찬가지였다. 전중반부에 노론 세력이 전부 몰락할 위기에 처하자 홍인한이 이복형인 홍봉한에게 자신을 살려달라고하는 애원에 겨우겨우해서 혜경궁 홍씨를 만났지만 끝끝내 용서받지 못했고 마지막 발악을 하다가 끝내 사사되었다. 특히, 혜경궁 홍씨 입장에서는 더 용서가 안되는게 같은 가족이면서 자기 조카손자를 죽이려고한 무리에게 동참했으니 더 그럴 수 밖에 없었다.[57] 혜경궁 홍씨 입장에서도 의빈 성씨인 성송연 도움덕에 아들인 정조가 목숨을 건진 일이 있긴 했지만 당시 성송연은 뒷배없는 도화서 다모였기에 왕이 된 정조에게는 도움이 안될거다라는 판단도 있었다. 그래서 데리고 왔던 게 같은 풍산 홍씨 사람이자 홍국영의 여동생인 원빈 홍씨였고 그녀를 적극적으로 밀어주었고 원빈 홍씨가 임신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누구보다 기뻐했었다. 그러나 그 임신이 상싱임신이었다는 게 밝혀지면서 왕실을 능멸했다는 이유로 효의왕후에게 질책을 받게 되면서 사실상 내쳐지게 된다. 결국에는 의빈 성씨와 정조의 사이를 인정해주었고 문효세자가 태어났을 때도 기뻐했었다. 근데 이것도 마냥 좋은 과정이 아니었던 게 원빈 이후 혜경궁 홍씨가 밀어주던 게 화빈 윤씨라는 후궁이었는데 그녀가 의빈 성씨와 같은 날 아이를 낳았는데 의빈 성씨는 아들인 왕자인 문효세자를 낳고 화빈 윤씨는 딸인 옹주를 낳아서 의빈 쪽으로 기울은 것이다. 작중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혜경궁 홍씨는 의빈 성씨가 아니라 화빈 윤씨에게 먼저갔었고 이에 당시 의빈 성씨의 상궁이었던 양초비가 화를 냈었다.[58] 실제로는 드라마와 달리 혜경궁 홍씨는 정조의 정실인 효의왕후 못지않게 의빈 성씨를 극진히 아꼈었으며, 본인이 직접 의빈 성씨를 입궁시켜 친딸(수양딸)처럼 길렀다.[59] '너의 어머니는 천한 계집종이다.'라는 뜻으로,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 출전된 구절이다. 즉, 영조정통성 시시비비에 있어 가장 큰 컴플렉스이자, 왕위 계승을 둘러싼 자칫 큰 문제로 비화될 수 있는 것으로서, 국왕인 영조가 끔찍하게도 싫어하기에 읽지 말게 하는 '금서(禁書)'로 지정되었다.[60] 어릴 적의 동궁 생각시 신분이었던 덕임(의빈 성씨)이 일전에 제조상궁으로부터 그 구절이 문제된다고 읽지 말라는 것을 생각해 내어, 귀하디 귀한 '왕실 책'임에도 먼저 선수를 쳐서 그 구절이 담긴 부분을 멋대로 찢어버린 것이다.[61] 사실 혜경궁의 처소이니 나갈 사람은 화완옹주와 정백임이 맞긴 하지만, 정백임의 입장에서는 하도 화완옹주가 날뛰니 혜경궁이 해코지 당하기 전에 나가시는게 좋겠다는 의미였을 뿐이다[62] 1979년생 배우[63] 즉, 국왕인 영조 곁으로 보내면서 역설적이지만 자신의 아들이 아닌 먼저 죽은 백부 효장세자양자로 입적하면서 법적상 남남이 되었지만, 이는 당시 세손 신분인 11세의 어린 정조 입장에서 볼 땐 피눈물이 나고 비참하게 죽어간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당장 들겠지만, 보위를 잇는 것이 아버지진정한복수를 할 수 있다는 혜경궁과 화완옹주의 논리처럼 왕위를 먼저 잇는게 중요하다 생각한 것이라 볼 수 있겠다.[64] 마가렛 드래블은 A.S. 바이어트의 여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