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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관 행정명령 90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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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1941년 이전3. 개전 직후4. 시행5. 수용소 생활6. 전후7. 미합중국 육군 제100대대8. 유사 사례9. 대중문화 속에서

1. 개요

Executive Order 9066

제2차 세계 대전미국이 공표한 일본 제국 및 나치 독일 등 적국 출신 미국인들에 대한 정책.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실상 주 타겟은 진주만 공습으로 인해 미국에서 폭발한 반일 감정의 희생자가 된 일본계 미국인들이었다. 이 사건은 미국의 오점들 중에서도 배째라를 자주 시전하는 미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잘못을 인정한 흔치 않은 사건 중 하나로 세월이 많이 흘렀기 때문에 인지도가 엄청 높진 않지만 그래도 미국에서 역사 교육 차원에서 거듭 강조되고 반성적으로 기억되는 사건이다.

이 조항으로 일본계 이주민뿐만 아니라 30만명 이상의 독일계 이주민과 70만명 이상의 이탈리아계 이주민에 대해서 지문, 사진을 등록하고 주소지를 조사해 이주를 제한하였고 자체적으로 판단한 위험 인물에 대해서는 수용소에 보내거나 추방 조치를 내렸는데 대략 11,000명 이상의 독일계 이주민이 수용소에 수감되었고 4,000명 이상이 남미로 추방되었다고 한다. 이탈리아계 주민도 3,000명 이상이 수용소에 강제 수감되었다. 같은 이유로 일본계가 많은 하와이에서도 일본계 이주민들의 격리가 진행되었다. 다만 하와이의 경우 본토보다 일본계 미국인이 엄청나게 많이 거주해서 섬에 같이 거주했던 백인층의 숫자를 가볍게 압도했기 때문에 본토처럼 제대로 격리시키진 못했고 대신 이들을 활용하는 정책을 펼쳤다고 한다.

당시와 이후의 일본계 미국인의 생활이 어땠는지에 대해서는 조지 타케이TED 쿄토 스피치를 참조해도 좋다.

2. 1941년 이전

19세기 중후반에 새로운 희망을 찾아 신대륙 미국으로 떠난 이민자 중에는 아시아계들도 상당했다. 서부개척지대의 건설현장 및 광산, 농장 등에 필요한 대규모 노동력을 필요로 했던 미국에게 아시아계 이민은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당시 중국인들의 대량 유입으로 쿨리라는 단어가 정착될 정도였다.

아시아계 노동력은 크게 중국계와 일본계로 나뉘었으며 물론 일본계의 비공인 집단인 한국계도 상당히 있었다. 이들은 주로 하와이캘리포니아, 워싱턴 주, 오리건 등 미국 서부 및 태평양 연안 지역에 주로 분포하여 정착하고 살았다. 이들의 이민은 이후 꾸준히 계속되어 현지 사회에서 자기들만의 사회를 조직하면서 동시에 미국 사회에 동화되고 기반을 쌓았다.

그러나 유럽계가 대부분인 명백한 백인 국가 미국으로서는 아시아계의 이러한 모습을 곱게 보지 않았다. 미국 주류사회는 아시아계를 미국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길 꺼렸고 크고 작은 차별이 잇달았다. 그나마 일본계에 대해서는 차별이 약간 덜했으나 1920년대 이후 지속된 미일관계의 악화로 일본계에 대한 차별은 더 심화되었다. 그래도 일본 이민사회는 이러한 편견에 맞서서 미국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였고 악화되던 미일관계 속에서도 별 일이 터지지만 않으면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진주만 공습이 터지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별 일이 터지지 않길 바랐는데 그야말로 너무나도 엄청나고 크게 터져 버린 것이다.

3. 개전 직후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국 사회의 일본에 대한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진주만을 기억하라! 12월 7일을 기억하라!"를 외쳐대고 집안에 보이는 MADE IN JAPAN은 모조리 버리거나 파괴해 버렸으며 일본에서 보내준 벚나무를 베어 버리는가 하면 일본계 미국인들은 모조리 직장에서 해고당했으며 일본계가 거주하는 집이나 상점들에 돌이 날아드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분노한 미국인들은 줄줄이 자원입대 신청서를 내고 입대하기 시작했다. 스타 운동선수들, 영화배우들, 변호사, 은행가 같은 엘리트 청년들에 현직 하원의원까지 죄다 눈이 뒤집혀서 군대로 달려갔을 정도다. 고위 정치가들의 아들들도 입대했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존 F. 케네디가 있다. 다만 이쪽은 전후에 참전 경력이 유력할 수 있다고 생각해 계획적으로 입대한 것이긴 하다. 심지어 입대를 못 했다고 자살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1] 반면 독일, 이탈리아에 대해서는 같은 백인인 것도 있지만 직접 맞은 것이 없어서 상대적으로 반감이 덜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개전 초기의 불리한 전황과 함께 더더욱 심화되어 일방적인 분노와 적대감의 표출, 이에 따른 공포감 조성으로 이어졌다. 진주만 공습 당시에도 현지 일본계 주민들에 의한 테러 우려로 전투기들을 활주로 가운데에 모아 두었듯이 미국인들은 일본계들이 사보타주테러 활동에 나서면서 일본에 동조할 거라고 불안해했다.

일부 일본계 이민 1세대는 고국에 대한 충성심이 남아 있어서 미국과 일본이 전쟁하던 와중에 고국인 일본의 승리를 기원하는 경우도 있었다. 2세대들도 1세대들 못지 않은 만행을 저질렀는데 대표적인 사건이 니하우 사건이다. 요약하자면 하와이에 불시착한 일본인 조종사를 지키려고 하와이에서 태어난 일본인 2세들이 조종사와 함께 원주민들과 대치해 원주민 1명이 총상을 입고 조종사를 포함한 일본인 2명이 죽었다. 조종사는 몸싸움 중에 살해됐고 조종사를 도와 준 일본인은 자살했다. 게다가 이들은 민간인인 원주민들을 살해하겠다고 협박하거나 도주하는 과정에서 16세 소년을 납치해 인질로 삼기도 했다. 이 사건이 본토로 알려지자 이미지는 더더욱 안 좋아졌다.

특히 당시 일본계 미국인 1만 명이 일본 군인연맹에 소속되어 일본 육군에게 기부금을 보내고 있었으며 5천 명이 제국 동지회에 가입하여 미군에 대한 협조를 거부하기로 결의했고 전시 일본군에 입대한 일본계 미국인은 최소 1648명에 달했다. 미국으로서는 당연히 일본인들의 이적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합중국 대통령은 1942년 2월 19일 행정명령 9066호에 서명했다. 이로서 미국은 적성국민들을 강제적으로 거주지에서 내쫓아 수용소에 강제 수용시키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당시 미국의 교전국은 일본 외에도 독일이탈리아, 헝가리가 있었지만 주 타겟이 일본계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다만 독일계 및 이탈리아계, 헝가리계들을 일본계와 동일하게 수용하려면 애로사항이 많았을 것이다. 독일계 미국인들을 일본계처럼 수용소에 수용하려면 당시 미국 인구의 20~30% 가량이 수용소에 들어가야 했는데 태평양 전쟁의 5성 지휘관 체스터 니미츠 제독, 허버트 후버 미국 대통령, 5성 지휘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 미국 최고 부자였던 록펠러 일가 등 주요 장성들과 정•재계 인사들도 줄줄이 수용소에 가야 하며 이탈리아계 미국인들은 마피아 비율이 높아 전부 수용소에 수용하려면 마피아들과 한바탕 크게 싸워야 했을 것이다. 하필이면 당시는 마피아들이 한창 날뛰던 시절이라 마피아들을 죄다 때려잡으려면 내전을 각오해야 할 수준이었다. 헝가리계 미국인 중에는 자국의 거듭되는 혼란을 피해 미국으로 온 유대인 혈통 및 혼혈 출신이 많았기 때문에 '파시즘에 동조하는 유대인을 잡아 가둔다'는 모순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독일계/이탈리아계/헝가리계 미국인들은 당시 조국을 점거한 파시즘 정권에 대한 충성도가 매우 얕거나 적었다. 독일계 미국인들과 헝가리계 미국인들의 기원은 1848년 혁명에서 출발한 '48년 세대'인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근 100년이 되어가는 독일계, 헝가리계 가문 출신들은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미국에 대한 애국심이 매우 강한 편이었다. 물론 몇몇 독일계 미국인 부모들은 자신들의 고향인 독일을 '조국'으로 생각하고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자신들의 자식들을 독일군에 입대시키는 경우도 있긴 했지만.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도 나온 오리건주 출신 독일군 포로가 그 예시.

또 이탈리아계 미국인들은 같은 지역 출신 친구나 가족 등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가장 컸지 남북전쟁 때만 해도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주도의 이탈리아 통일이 아직 이뤄지던 중이었기 때문에 중앙집권한 정부에 대한 충성은 매우 얕았다. 게다가 이탈리아계 미국인은 남부 출신이 많았는데 파시즘 정권의 지도자였던 베니토 무솔리니지역감정으로 사이가 나쁜 북부 출신이었고 집권 중 마피아의 본진인 남부 지역을 신나게 털었다.

4. 시행

행정명령 9066호에 따라 주로 미국 서부 지역과 애리조나 주 남부에서 약 12만 명의 일본계 미국인이 그저 일본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캘리포니아, 아리조나, 와이오밍, 콜로라도, 아이다호, 유타, 아칸소 등에 건설된 수용소로 강제 이주되었다. 그야말로 일본 출신이라면 무조건 끌고 갔다고 볼 수 있으며 강제 수용뿐만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던 재산들도 몰수했다. 몇 안 되는 예외가 바로 일본계 미국인 비중이 지나치게 높아서 전부 수용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던 하와이에 살던 사람들과 백인 남성과 결혼한 일본계 여성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당시 경제적, 정치적으로 모두 미국의 식민지나 다를 바 없던 쿠바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다만 여긴 미국과 달리공평하게 일본계 이민자 말고도 이탈리아계 및 독일계 이민자 수천여 명까지 임시 수용소에 수감했고 1년 정도 있다가 모두 석방되었으며 일부를 제외하고 재산도 찾을 수 있었기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일처리가 상당히 개념있게 진행되어서 이제는 현지인조차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한다. 이외에도 남미에 있던 일본계들도 모두 추려서 미국으로 보냈다. 다만 브라질에서는 일본계의 숫자가 수십만이 넘었기에 그들은 보내지지 않았으나 해안에서 가까운 곳의 거주는 금지되었다.

5. 수용소 생활

강제 수감된 이들은 빈약한 시설 속에서 자신이 일본인이 아닌 일본계 미국인임을 증명하기 위해, 즉 조국 미국에 대한 충성을 입증하기 위해 새로운 환경에서도 열심히 일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식료품 및 생필품 외에도 군이 요구하는 전시물자 생산에도 적극 협력했으며 미국 역시 이들을 잘 써먹으면서 어느 정도 자유로운 영내 행동을 보장하거나 학업 문제가 있다면 외박은 안 되더라도 외출을 허용해 주거나 의료 시설을 갖추는 등 기본적인 의식주 정도의 지원을 해 주었다. 그러나 수용소에 따라 마굿간 등에서 살아야 했던 곳도 있었다. 물론 엄연히 강제격리수용소다 보니까 주변에 철조망이 쳐지고 무장병력들이 경계를 서고 탈출 시도를 하다가 사살당하는 일도 벌어졌다.

국운을 건 총력전을 펼치던 유럽 국가에서야 진영을 가리지 않고 이 정도 조치는 일반적이었다. 영국에 거주하던 6만여 명의 독일계 주민들도 반나치 인사들을 제외하고 수용소 생활을 하거나 거주지 제한 조치를 당했고 7,500명 이상의 주민이 추방되었다. 당시 시설이 베리, 리버풀, 맨 섬에 건설되었고 지금도 일부 시설들이 남아 있다. 소련독소전쟁이 발발하자마자 볼가 강 하류에 거주하던 독일계 러시아인인 볼가 독일인들을 잠재적인 부역자들로 간주해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켰으며 전쟁 발발 이전부터 이루어지던 고려인 강제이주 역시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당시 본토가 전장이 된 적이 아예 없는 미국과는 사정이 다르기에 같은 조건으로 보기는 어렵다. 미국은 국가의 존폐가 걸린 급박한 상황에서 타국과 전쟁을 한 적이 없고 진주만 공습을 일으킨 일본조차도 미국이 전선을 확대하는 것을 꺼려서 자신들과 협상할 것이라고 생각해 벌인 일이지 미국을 점령하겠다는 생각은 한 적이 전혀 없다. 애초부터 그러기엔 양국 간의 덩치 차이도 너무 크다.

게다가 강제격리수용소임에도 노동수용소마냥 전시물자 생산 등에 동원했던 것도 전후 이들이 비판받는 이유 중 하나다. 그러나 소련굴라크 같은 강제노동수용소는 아니었고 나치 독일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트레블링카와 같은 절멸수용소는 더더욱 아니었으므로 상술된 수용소들과 같이 인간이 해서는 안 되는 짓이 자행된 생지옥은 아니었기 때문에 같이 비교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개전 이전에 일본계 사진작가들 중에는 미국 사진계에서 주목받던 이들도 있어서 수용된 후에도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카메라를 가지고 들어갈 수 없었으므로 수용소 안에서 구할 수 있는 물품들로 사제 카메라를 만들어 계속 사진을 찍었다. 그리하여 앤셀 애덤스, 도로테아 랭 등의 유명 사진작가들도 이곳에 찾아와서 작품을 남겼기 때문에 그들의 수용소 생활에 대한 자료는 많다.

6. 전후

전쟁이 끝을 보기 시작하던 1944년부터 수용소가 하나둘씩 폐쇄되기 시작했고 종전 후 수용돼 있던 일본계 미국인들은 모두 풀려나서 자유를 되찾았다. 그러나 전쟁 전 이들이 소유하고 있던 재산들은 대부분 이미 몰수되었거나 전쟁으로 다 파괴된 상태였고 잃어버린 기반을 되찾으려는 수많은 노력들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이들은 간신히 일구어 두었던 미국에서의 기반을 거의 잃고 말았다. 실제로 잃은 재산을 되찾은 사람은 별로 없다. 이들은 자신의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가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대부분은 미국에서 나고 자랐음에도 짧게는 3년, 길게는 4년간 강제로 격리수용을 당하고 정당하게 모은 재산을 모두 몰수당했고 다시 되찾지도 못했다.

종전 이후 미국 정부는 이러한 과거에 대해 간헐적으로 사과하기 시작했으며 최종적으로는 1988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이 사건에 대해 사과하면서 1인당 20,000 달러의 보상금이 지급되었다. 그러나 보상금은 80년대 후반 당시 생존자에게만 지급된 것으로, 이 부분은 아직도 문제가 되고 있다. 미국 정부의 사과를 이끌어낸 인물 중 하나가 위안부 문제를 알린 것으로 유명한 마이크 혼다 하원의원이다. # 이렇게 사과가 이루어진 것은 미국이 냉전으로 인해 공산주의 진영과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적국에서 동맹국이 된 일본, 독일 등의 협조가 필요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7. 미합중국 육군 제100대대

1941년 당시 하와이 주방위군 육군에는 일본계 병사들이 많이 있었는데 진주만 공습 이후 전원 지급된 소총을 반납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델로스 에먼스(Delos Emmons) 육군 소장은 일본계 젊은이들 중에도 미국에 대한 충성심이 있는 사람들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지원병을 모집했다. 이 과정에서 약 2,000명의 지원자가 모였지만 전쟁부(육군부)는 처음 이들을 군대에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미드웨이 해전이 끝난 이후 미 육군은 하와이 주방위군 출신들과 수용소에서 지원자들 1,400여명으로 구성된 100대대를 편성했다. 다시 말하면 이들은 미국인으로 인정받기 위해 스스로 군대에 지원한 지원병이지 미국이 강제로 군대에 몰아넣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전쟁부는 이 부대의 편성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다만 경술국치로 인해 한국계 미국인들도 일본계로 간주되어 같이 수용되었다는 이야기는 사실과 멀다. 한국계 미국인은 일본계 이민자의 비공인 집단이었기 때문에 법적으로 일본계가 아니었으므로 공식적으로는 당연히 사실이 아니다. 당시 미국에서는 현재 중국계 미국인대만계 미국인을 분리해서 다루는 것처럼 이미 한국계와 일본계를 분리해서 다루고 있었다. 2차대전 전쟁 영웅인 김영옥 육군 대령의 증언에서도 이 점이 드러난다.(#) 그리고 김영옥 대령 자신도 이 부대 출신이다.

한국계임에도 100대대에 들어간 건 미국 당국에서 그를 일본계로 취급했기 때문이 아니라 일선 실무자들이 동양계 민족들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었던 시절이기 때문이다. 그의 상관들도 그가 한국계인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보내려고 했으나 "우리는 일본인도 한국인도 아니다. 우린 미국인이다."라는 본인의 의사를 존중해서 남게 되었다고 한다. 이 일화가 부대 전체로 퍼지면서 100대대 인원들은 본 출신지에 상관없이 전우라는 생각을 당연히 하게 되었다. 대대 전체를 통틀어 한국계라곤 김영옥과 하와이 대학교 육군 ROTC 출신인 '고존'이란 사람까지 단 두 명뿐이었고 그나마 고존이 첫 전투에서 부상을 입어 부대를 떠나게 되면서 대대에 한국계는 김영옥 단 한 사람만 남게 되었다.

나중에 제442연대전투단으로 확대개편된 후에도 연대 전체를 통틀어 한국계는 김영옥 대령(종전 당시 대위) 한 사람뿐이었다고 하며 미국 상원 최다 선출 기록을 가진 대니얼 이노우에 의원도 이 부대, 정확히는 나중에 확대 개편된 제442연대전투단 출신이다. 이 사람에 대한 자세한 것은 명예 훈장 문서 참조.

군대에 입대한 100대대 대원들은 반쯤 인질로 잡힌 셈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인으로 인정받고 싶어했다. 그냥 순수 일본인이었으면 미국에서 배척받을때 생활기반이 있는 고향인 일본 땅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지만 100대대 대원들은 혈통만 일본계지 태어날 때부터 미국에서 지낸 사람들인지라 모든 생활기반이 미국에만 있기 때문에 미국에서 배척받으면 말 그대로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때문에 자신이 미국에 충성심이 있다는 걸 전공을 통해 증명해 보이고 싶어했기에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유럽 서부전선에 투입되었을 때 정말 용감하게 싸웠다고 한다. 이 100대대를 니세이 부대(2세 부대)라고 불렀는데 어찌나 잘 싸웠는지 나중에 100대대를 본딴 다른 니세이 부대를 창설했을 지경이다. 그것이 저 유명한 442 연대전투단. 원래 1, 2, 3대대와 552 야전포병대대, 232 공병대대와 기타 지원대로 구성됐는데 이후 100대대가 442의 1대대로 통합되었다(100대대라는 단대호는 유지). 442 연대전투단은 부대 모토가 "Go for Broke!(가서 죽어라!)"[2]일 정도로 가열차게 잘 싸운 것으로 유명하다.

그 일화 중 하나가 당시 김영옥 대령이 소대장으로 있을 적에 직접 수류탄을 들고 기관총좌에 돌격하다가 총에 맞아 부상을 입자 울컥한 100대대 부대원 전부가 "반자이~!"라고 소리지르면서 독일군 기관총좌에 반자이 돌격을 감행해서 독일군들을 충격과 공포에 몰아넣었고 김영옥 대령은 다행히 경미한 부상만 입었기에 쓰러진 자리에서 가지고 있는 수류탄을 독일군 총좌에 까 넣어 돌격하던 부대원들을 엄호하기도 했다고 한다.[3] 그러나 전후에도 다른 인종의 사람들은 그냥 'JAP'(일본인들에 대한 멸시 칭호)으로 취급했으나 대략 1960년대쯤부터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미국 정부에서 반성적인 태도를 취하고 미국인들도 이들을 자신들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8. 유사 사례

9066호와 다르게 비록 정부 차원에서 벌어지진 않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회사와 민간 차원에서는 독일어를 대체하는 운동을 벌이기도 했는데 당시 독일 이민자들이 쓰던 독일식 단어를 대체하는 것으로 자우어크라우트는 자유 양배추(Liberty Cabage), 닥스훈트는 자유 개(Liberty Hound), 햄버거는 리버티 스테이크(Liberty Steak)로 대체되었다. 이라크 전쟁 당시 미국 내 강경 보수층에서 프렌치 프라이를 '프리덤 프라이'로 바꾸자는 소리를 하던 것을 연상시킨다. 물론 전쟁이 끝난 뒤 이런 용어를 버리기도 했지만 이런 선례로 인해 훗날 독일 이민자들 중 일부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로 돌아가 독일 국방군으로 입대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9. 대중문화 속에서

미국의 암흑기이자 흑역사 중 하나라서 미디어화가 그리 많이 된 편은 아니다.

[1] 이 시기를 다룬 대체역사영화 캡틴 아메리카: 퍼스트 어벤저에서 슈퍼 솔저 강화 시술을 받기 이전, 약골에 비실이였던 캡틴 아메리카가 그 몸으로도 어떻게든 군대에 가고 싶다고 그 난리를 친 것이 아니다.[2] 원래는 하와이의 도박장 용어였다.[3] 다만 전후 연구에 따르면 당시에 그렇게 알려진 건 사실이었지만 실제로는 반자이 돌격은 아무 역할도 못 했으며 부대원들이 돌격한 대상은 나무 울타리에 불과했다고. 결국 대대원들이 삽질하는 동안 김영옥 혼자서 몰래 기어가서 수류탄을 까넣은 셈이니 김영옥 혼자 격파한 게 다소 과장되어 알려진 것이다.[4] 현재 이곳은 국립 기념물로 자리잡았다. #[5] 조지 타케이의 아버지도 질문이 모욕적이고 모순적이라고 여겨서 두 질문에 모두 NO라고 대답했고 온 가족이 툴 호수로 끌려갔다.[6] 여담이지만 실제 일본 본토의 일본인들도 같은 망상을 품고 있었다. 당시 일본을 통치하고 있던 군부기관인 대본영이 일반인들에게는 자신들의 실책은 절대 함구하고 전과는 엄청나게 부풀려서 발표하는 온갖 정보 조작들을 일삼아서 대본영의 발표만 놓고 보면 일본이 곧 있으면 미국을 식민지로 만들고도 남을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 그러다가 위대한 황군이 압도적인 힘과 강철의 의지와 우수한 전략으로 단 한 명의 생존자도 남기지 않고 싸그리 몰살시켜 버려서 모조리 전멸하고 없다는 미군의 폭격기가 자국의 수도를 불바다로 만들어 버리는 상황이 발생하자 그제서야 현실을 직시하게 된 일본인들은 멘붕에 빠졌고 이후 대본영의 거짓 발표들을 비꼬는 의미에서 만든 '믿을 수 없는 발표'라는 뜻의 대본영발표라는 신조어까지 생겼다.[7] 진주만 사건으로 시작한 원래 역사의 태평양 전쟁과 달리 여기서는 영국의 요청과 미국 군부의 독단으로 참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