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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15:13:25

벚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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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좋아하는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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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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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한국갤럽이 창립 30주년을 맞이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인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알아보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조사 시리즈를 기획해 2004년부터 5년 주기로 발표하고 있다.
2004년
※ 2004년 한국갤럽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나무'을 선정.
1위 2위 3위 4위 5위
소나무 은행나무 단풍나무 벚나무 느티나무
6위 7위 8위 9위 10위
아카시아나무 향나무 대나무# 동백나무 감나무
2019년
※ 2019년 한국갤럽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나무'을 선정.
1위 2위 3위 4위 5위
소나무 벚나무 느티나무 단풍나무 편백나무
6위 7위 8위 9위 10위
은행나무 동백나무 아카시아나무 대나무# 잣나무
11위 12위 13위
전나무 향나무 버드나무
# 대나무는 풀이지만, 통계 분류상 나무로 포함.
같이 보기: 한국인이 좋아하는 꽃, 한국인이 좋아하는 나무, 좋아하는 산, 좋아하는 한식 }}}}}}}}}
벚나무
| Cherry blossom
파일:20170407_110624.jpg
학명 Prunus sect. Cerasus
(Mill.) Pers. (1806)
분류
<colbgcolor=#d7ffce,#093300> 식물계
분류군 속씨식물군(Angiosperms)
진정쌍떡잎식물군(Eudicots)
장미군(Rosids)
장미목(Rosales)
장미과(Rosaceae)
벚나무속(Prunus)
아속 벚나무아속(P. subg. Cerasus)
벚나무절(P. sect. Cerasus)
파일:석조전 수양벚나무.jpg
덕수궁 석조전 앞에 있는 올벚나무.

1. 개요2. 특징3. 명칭 관련4. 종류5. 왕벚나무 원산지 관련 논란6. 벚나무와 한국7. 여의도 벚나무 벌목사건8. 벚나무 빗자루병9. 여담10.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동아시아 지역에 분포하는 높이 약 20 m로 자라는 나무로 4~5월에 벚꽃을 피우고 6~7월에 열매(버찌)가 열린다. 넓은 의미로는 벚나무아속 벚나무절에 속한 나무들을 통틀어서 이르지만, 좁은 의미로는 벚나무절에 속한 종 중 '벚나무(Prunus jamasakura)'를 가리킨다.

2. 특징

자생력이 아주 뛰어나다. 팔만대장경판의 반 이상이 벚나무 재질임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껍질도 매우 질겨서 조선 시대에는 주력 무기인 각궁을 만들 때 벚나무 껍질로 겉면을 감아 마무리를 했고, 또한 김구백범일지에도 "함경도에선 초가 대신 벚나무 껍질로 지붕을 만드는데, 한 번 뿌리를 내리면 여간해선 벗겨지지 않는 탁월한 응집력에 김구가 감탄했다"는 일화가 있다.

공해에도 강하여 자동차의 매연 등 공해가 심한 도심의 가로수로 심기도 한다. 위에 썼듯이 목재로서 아주 우수하다. 결이 아름답고 매우 단단하여 가구나 식기로 만들어 썼다. 잘 마른 상태에서는 웬만한 가정용 톱으로는 잘 잘리지 않고, 옹이에 걸리면 대패 이가 빠질 만큼 단단하다.

목재의 향이 좋아서 바비큐 훈연 목재로 최상이다. 다른 장미나무속이나 벚나무속 과실나무들도 마찬가지이나, 훈연재로 쓰면 아주 고급스럽고 우아한 향기가 나며 쇠고기, 돼지고기, 새고기에 다 잘 어울린다. 더불어 한반도의 웬만한 산에서 자생하고, 가로수로 많이 쓰는 나무라서, 자연히 꺾인 가지라든지 봄철 지자체에서 가로수 가지치기할 때 손쉽게 얻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수명이 짧은 것으로 오해하곤 하지만, 화엄사 올벚나무는 400년을 살았고, 일본에는 천 년이 넘는 올벚나무가 여러 그루 있는 등 종류에 따라 다르다.

나무 자체는 튼튼하고 상처를 입히기도 어렵지만 한번 상처가 나면 취약하다. 가지를 꺾으면 노출된 단면부터 썩어들어간다. 가지치기를 할 때에도 정말 최소한의 가지만 잘라야 한다.

봄철에 피는 벚꽃이 풍성하고 아름다워 봄 계절의 상징으로 꼽힌다. 가을에도 단풍이 풍성하게 들어서 가을 길거리 정취를 만드는 주요 역할을 한다.

3. 명칭 관련

<colbgcolor=#f5f5f5,#2d2f34>언어별 명칭
영어 Cherry blossom tree
한국어 벚나무
중국어 [ruby(樱树, ruby=yīngshù)]
일본어 [ruby(桜木, ruby=さくらぎ)]

벚나무를 한자로 (앵)이라고 쓰는데 이 한자는 앵두나무를 지칭하기도 한다. 앵두나무와 벚나무가 같은 것은 아니지만 서로 비슷하다. 생물학적으로 같은 벚나무속에 속해서 서로 사촌 관계다. 즉, 한자 櫻자는 '벚나무속'의 나무인 벚나무와 앵두나무를 통틀어서 뜻하는 한자이다.

벚꽃과 벚나무, 벚꽃나무라는 용어가 혼용해서 쓰이지만 벚꽃나무는 비표준어이며 벚꽃과 벚나무도 구별하여 사용해야 한다. 요약하자면, 벚나무에 피는 꽃이 벚꽃이고, 벚꽃이 피는 나무는 벚나무이다. 현재 나무위키 문서부터가 벚'나무'를 쓸 자리에 벚'꽃'을 사용하는 등[1] 문제가 많다. 올바르게 사용하도록 하자.

4. 종류

벚나무아속 벚나무절에 속한 나무의 종류는 이곳에서 볼 수 있다. # #

벚나무도 여러 아종이 있는데, 이중 가장 독특한 종은 맨 위의 사진과 같은 수양벚나무이다. 보통 벚나무는 가지가 위로 뻗는 경향을 가진 보통의 나무 모양인 것에 비해 수양벚나무는 버드나무처럼 긴 가지가 축축 처져서 자란다. 잘 자란 수양벚나무는 사람 키보다 더 가지 끝이 내려가기 때문에 개화기에 얼굴 가까이서 벚꽃을 즐길 수 있다는 게 매력이다. 그래서인지 일본에서는 한국보다 수양벚나무를 더 흔하게 볼 수 있다. 서울에서는 국립서울현충원이 수양벚나무로 유명하고, 선유도공원덕수궁에 가면 군데군데 볼 수 있다. 대구광역시에 있는 욱수천 상류에서는 흐르는 하천과 어우러지는 수양벚나무를 감상할 수 있다.

5. 왕벚나무 원산지 관련 논란

한국, 중국, 인도, 일본, 네팔, 부탄 등. 여러 나라에 원산지야 한두 군데가 아니다.

벚나무 중 왕벚나무로 번역되는 소메이요시노(ソメイヨシノ)는 원산지 논란이 있다. '한국 왕벚나무[2]'가 일본 왕벚나무(소메이요시노)의 교잡원종(Prunus yedoensis)[3]이라는 것인데 결론적으로 제주도전라남도 왕벚나무가 일본 왕벚나무(소메이요시노)와 동일종은 아니다. 제주 및 전남 왕벚나무가 일본 왕벚나무(소메이요시노)의 교잡원종 중 하나인지는 논쟁 중이었다가 최근의 국내외 연구에서 서로 연관 없는 별개의 종으로 결론이 났다.

일본 왕벚나무 소메이요시노(ソメイヨシノ)는 1901년 마쓰무라 진조에 의해 Prunus × yadoensis Matsumura 학명이 붙여진다. 한편 1908년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프랑스인 에밀 타케(Emile Taquet) 신부가 제주도에서 제주 왕벚나무 표본을 채집하여 1912년 독일 베를린 대학교 교수 쾨네가 제주왕벚나무(Prunus yedoensis var. nudiflora Koehne)를 분류했다. 이 때, 쾨네 교수는 소메이요시노와 제주왕벚나무의 차이점을 함께 발표했다. 그런데 1916년 한반도의 식물분류학 기초를 다진 나카이 다케노신이 그가 발간한 조선삼림식물편 5편에서 이를 Prunus × yadoensis 원종으로, 즉 타케 신부의 변종명을 이명처리 해 버린다.

이후 1933년 일본 식물학자 고이즈미 겐이치(小泉源一)[4]는 일본 왕벚나무인 소메이요시노가 제주도에서 기원했다는 논문을 발표한다.[5] 왕벚나무의 한국 원산지 설의 시발점이자 한 때는 정설이었다. 이후 일본 왕벚나무의 기원에 대하여 인위 교배설, 일본의 자연 잡종설, 한국 제주도 기원설이 제기되었으며 일본 내 야생 집단이 없어 자연 잡종설은 부정되고 주류 학설은 인위 교배설이고 한국 제주도 기원설이 제기되는 상황이었다.

1990년대 이후 과거의 형태학적인 분류만이 아닌 DNA 분석과 같은 유전학적인 연구가 이루어졌다. 1995년 일본 학자들의 연구[6]에서 일본 왕벚나무(소메이요시노)가 올벚나무(Prunus pendula)와 일본 이즈반도에 고유한 자생종인 오시마벚나무(Prunus lannesiana)의 교배종이라는 결론을 내렸으며 이후 두 수종의 인위적 교배, 엽록체 유전자, 그리고 핵 내 유전자인 ‘PolA1’의 염기서열 분석 결과에서 뒷받침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5년 한국의 엽록체 DNA 분석을 통해 제주 왕벚나무와 일본 왕벚나무(소메이요시노)가 별개의 종이라는 연구[7]가 발표되었다.

기존의 일본 쪽 연구는 일본 나무만을, 한국 쪽 연구는 한국 나무만을 대상으로 했었는데 2007년 미국 농무부(UDCA) [8]에서 비교적 폭넓은 시료 채취를 했으며 제주 왕벚나무가 제주도 토착종이며 일본 왕벚나무와는 유전적으로 구별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해당 연구에서 핵내의 ISSR(inter-simple sequence repeat) 염기서열과 2개의 엽록체 유전자를 이용한 계통 관계를 규명했다. 엽록체 유전자인 rbl16의 핵형(haplotype)이 113번과 206번 염기에서 AA형과 TA형을 가지는데 도쿄와 워싱턴 일본 왕벚나무는 AA형을 가지며 미국내 같이 재배하는 일부 품종은 TA 형의 핵형을 나타내고 제주 왕벚나무는 AA형과 TA형 모두 나타낸다.

즉, 제주 왕벚나무가 일본 왕벚나무와 같은 동일종은 아니다. 그러나 일본 왕벚나무(소메이요시노)에 대한 원산 논란도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제주 왕벚나무는 일본 왕벚나무와 같은 동일종이 아닌 제주 토착종이며, 일본 왕벚나무(소메이요시노)는 올벚나무(Prunus pendula)가 포함된 원산종에서 기원한 인위 교배종인 것은 한일 학계 모두 일치한다. 다만 한국의 엽록체 유전자와 핵상 유전자 ITS와 ETS 등을 활용한 유전학적 연구에서 자생종인 제주벚나무의 유전적 다양성(형태와 유전자 변이 폭)이 더 크고 소메이요시노의 유전자 변이를 포괄하기 때문에 원산종에 제주벚나무가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9][10] 일본 측에서는 이것은 야생의 교잡종이라면 당연한 일이고 일본의 소메이요시노는 재배종이며 단일클론이므로 이 결과는 더욱더 '제주 왕벚나무'와 소메이요시노가 별종이라는 증거로 판단하고 있다.

일본 측의 학설에 따르면 소메이요시노의 아버지는 오시마자쿠라, 어머니는 에도히간이다. 오시마자쿠라(大島桜) Prunus speciosa 는 일본의 고유종이며, 일본에서는 이즈 제도, 이즈반도 남부에만 극히 제한적으로 자생하는 종이다. 제주도에는 오시마자쿠라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소메이요시노가 제주도에서 기원했다는 설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게다가 벚나무는 자가불화합성(self-incompatibility)이 있어서 다른 벚나무와 쉽게 교잡하는 식물이다. 따라서 소메이요시노를 대규모로 심으면 '제주 왕벚나무'와 소메이요시노가 교잡될 가능성이 확 늘어난다.

심지어는 소수 학설로 병행진화(parallel evolution)를 타진하는 주장도 있다. 한국의 제주 왕벚나무와 일본 왕벚나무(소메이요시노)는 각자 독립적으로 잡종이 되었는데 우연히 형질이 같은 자손형이 나왔을 수 있다는 것이다. 벚나무 종류는 쉽게 종간 잡종이 일어나기 때문에, 왕벚나무의 계통을 밝히기는 유전학적 연구를 동원하더라도 쉽지 않다.

각각 일본 측 학설한국 측 학설로 이동할 것.

이러한 상황 속에 제주벚나무에 대하여 따로 분류하여 별개의 학명을 부여해야 하는지도 논란이다. 우선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의 국가표준식물목록에서는 왕벚나무(Prunus yedoensis mastum)제주 왕벚나무(Prunus yedoensis var. nudiflora Koehne rehder)를 별개로 구분한다.

자연사 연구에서의 분류 계통 논란과는 별개로 원산지 논란은 민족감정에 따른 소모적인 양상을 띤다. 제주 왕벚나무가 소메이요시노와 별종임을 밝히는 기사가 존재하지만 대부분 (제주 왕벚나무=소메이요시노)을 전달하는 ## #들이 넘쳐난다.

애초에 벚나무는 히말라야 산록이 기원이라는 것이 국제학계의 중론이고, 설사 소메이요시노의 인위 교배의 원산종에 제주 왕벚나무가 포함되었더라도 무의미한 논란이다. 가령 비슷한 맥락으로 중국이 태권도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중국 무술이 태권도의 원류에 영향을 주었다고 태권도가 중국 것이라고 주장하는 논리로 국제적인 비웃음만 살 뿐이다.

중국까지 가세해 벚꽂의 원산지를 자국이라 주장하면서 이 논쟁이 한층 가열될 전망. 중국 '한일 양측은 벚꽂 원산지를 논할 자격이 없다. 우리가 원산지. 애초에 히말라야가 원산지이므로 그렇다는 논리인데 엄밀히 따지면 벚나무는 히말라야 남쪽 네팔 부근이 원산지다. 티베트에서는 벚나무가 자라지 못한다. 중국 측은 특히 한국의 주장에 대해서 벚나무는 히말라야산맥에서 기원하여 북반구 전체에 폭넓게 퍼졌으되 일본에서 특히 발전하여 일본의 꽃으로 자리 잡았을 뿐, 한국과는 특별한 관계가 없다고 일축했다.

이에 대한 일본 측의 정리된 기사가 있다.

2016년 일본의 연구자들이 제주의 왕벚나무에 대하여 별개의 학명인 'Cerasus × nudiflora (Koehne) T.Katsuki & Iketani'을 명명[11][12]하였으며 영어 위키백과에서도 왕벚나무를 직역한 king cherry를 문서명으로 작성되었다. 사실 본 문서에서도 혼동을 피하고자 '제주 왕벚나무' 혹은 '제주 및 전남 왕벚나무'라는 명칭이 사용되고 있으나 제주 이외에 전남 대둔산에도 왕벚나무 자생지가 있으며 본래 명칭이 '제주 왕벚나무'가 아닌 '왕벚나무'가 옳다. 다만 일본 왕벚나무(소메이요시노)도 그동안 왕벚나무로 칭했기에 한동안 국문 명칭은 상당한 혼란이 있을 것이다.

2018년 9월 13일 발표된 산림청 국립수목원의 연구에서 제주도에 자생하는 왕벚나무 유전체(게놈)를 완전히 해독한 결과가 저널에 게재되었으며, 제주도의 왕벚나무와 일본의 소메이요시노는 완전히 서로 다른 종이며 제주의 왕벚나무는 올벚나무를 모계(母系)로 하고, 벚나무 또는 산벚나무를 부계(父系)로 해서 탄생한 1세대(F1) 자연 잡종으로 판단했다.#

대구시에 엉뚱하게 제주왕벚나무 3그루가 있다. 제주왕벚나무 군락을 세계에 알린 파리외방전교회 에밀 타케(Emile Taquet 한국명 엄택기 1873~1952) 신부가 천주교 대구대교구청에 심은 것이다. 이후 DNA 검사 결과도 제주왕벚나무임이 입증되었다.

6. 벚나무와 한국

6.1. 고려, 조선시대

한반도에 벚나무가 언제부터 있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분명하지 않다. 고문헌과 「동국이상국집」ㆍ「파한집(破閑集)」처럼 많이 알려진 시가에도 매화ㆍ살구ㆍ복숭아ㆍ자두 등 다양한 화목이 등장하지만 벚나무는 없었다

다만, 삼국유사 제1권 기이(紀異)진한(辰韓)편에 서른다섯 개 금입택(金入宅)중 상앵택(上櫻宅)ㆍ하앵택(下櫻宅)이 나오고,제2권 기이(紀異第二)경덕왕(景德王)충담사(忠談師)표훈대덕조(票訓大德條)에 앵통(櫻筒)이 등장한다. 그러나 ‘앵(櫻)’이라는 명칭은 앵두나무와 벚꽃을 의미하기 때문에 문헌과 기록의 ‘앵’을 벚나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다만 앵두나무는 관목이므로, 목재로써의 '앵'은 벚나무일 가능성이 높다.
팔만대장경의 반절이 벚나무 재질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우리민족이 조선시대까지 벚나무를 심은 이유는 대부분 벚나무의 목재를 활용하는 실용적인 용도때문이었으며 특히 벚나무의 껍질인 화피(樺皮)는 을 만드는데 중요한 재료라서 국가적으로도 함부로 유통을 하지 못하게 막았다. 일제강점기 시절 벚꽃축제가 최초로 개최된 서울 우이동의 벚나무 숲 역시 활을 만들기 위한 재료 수급용으로 조선시대 중후반에 만들어졌다는 설이 유력하다.

반면 오늘날처럼 집단적으로 벚꽃을 감상하였다는 풍습, 기록, 서화 등은 남겨져 있지 않다.

6.2.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부터 한반도에는 벚나무가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한다.

경성일보 1933년 4월 27일의 ‘경성의 벚꽃내역(京城の櫻の來歷)’에 따르면 경성에 벚나무가 처음으로 유입된 공간은 1907년 남산의 왜성대 공원이며,도입 품종은 소메이요시노(染井吉野櫻)라고 하였다
경성의 벚꽃 내역(京城の櫻の來歷)’
경성에 사쿠라가 이식된 최초는 1907년 도쿄에서 3년생 묘목 1,500본을 가져와 남산 왜성대 공원에 500본을,나머지는 각지에 나누어 심게 된 때부터이다.다음 해인 1908년과 1909년에 걸쳐 오사카 부근의 소메이요시노 2년생을 창경원에 300수 심었다.왜성대의 사쿠라는 1914년에 가장 번성하여 하루에 10만에달하는 인파가 몰려든 적이 있을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으나 그 후 점차 나무들이 고사하여 그 명성이 창경원으로 옮겨갔다
경성일보 1933년 4월 27일자 기사

일단 한반도에서 벚꽃축제가 개최된 것은 1910년대 초반, 서울 우이동 지역이 최초였다. 우이동의 벚나무 숲은 본래 조선시대에 을 만들기 위한 재료로 심어진 것이며 조선시대에 우이동 벚나무 숲에서 집단적으로 꽃놀이가 수행된 적은 없다. 그러던 것이 『매일신보』 1915년 5월 7일자에는 우이동 벚꽃 명소에 대해 “우이동의 사쿠라는 3년 전 일본인이 처음 발견한 이후부터 앵화의 명승지로 경성 내외에 이름이 널리 났다.”고 소개한 것으로 보아 일본인들에 의하여 대략 일제강점기인 1912년 정도부터 최초로 벚꽃놀이가 개시된 것이다.

당시 매일신보에 따르면 도심에서 떨어진 자연적으로 벚꽃이 군집한 곳에 다수의 사람들이 여러 교통수단을 통해 운집해 특별한 인공설비 없이 주로 벚꽃을 중심으로 주간에 음악과 술과 놀이를 곁들여 봄을 즐겼다고 한다.

한일병탄 이후 일제는 지배의 안정을 위해 조선 주민의 정치적 요구를 압살한 대신에 관제문화를 조성해 순응시키려 했으며 벚꽃축제는 그 수단 중 하나였다. 조선총독부는 기관지인 매일신보를 통하여 벚꽃축제에 참여할 것을 장려하였고 이를 위하여 임시 관앵(觀櫻)열차를 운행하는 등 정책적으로 적극 협조하였다. 당시 경성의 벚꽃 명소로는 우이동 외에도 가오리(오늘날의 수유동, 가오리역 참조)도 있었다.

하지만 우이동은 도심에서 너무 멀리떨어진 외곽이었고 그 규모도 당시 폭증하던 벚꽃놀이 수요를 충족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또한 당시 조선으로 이주하던 일본인(재조일본인)은 벚꽃을 일본의 상징으로 간주하여 조선에서도 하나미를 즐기면서 향수병을 달래려 했으나 막상 조선에는 벚꽃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하나미를 위한 일본산 벚나무의 식재를 꾸준히 관계당국에 요구하였다.
벚꽃은 일본인에 대해서 일종의 인상을 주고 벚꽃이 있는 곳은 반드시 일본인의 용기를 북돋아 벚꽃의 번식은 곧 일본인의 번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원래 한반도에는 벚나무가 적어 우리들은 재주 방인의 증가와 함께 벚나무를 이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花見の季節」, 京城新報. 1909년 4월 25일, 2면
1911년 조선에 건너와 충청남도 등지에서 15년간 주로 지방행정 실무를 담당했던 한 일본인 관리의 말
"벚꽃은 일본의 대표 꽃이다 … 신주(神州)를 표상한다. 무사도를 생각하고 요시노(吉野)를 연상하며 불의명분에 맞서는 바로 국화(國華)로 보아야 한다 … 고향을 멀리 두고 조선에서 일하고 있는 모국인의 향수를 누그러뜨리고 그 땅에 친밀함을 갖게 하고 내지 연장의 싹을 키워서 안주(安住)할 생각을 굳히는 데 벚꽃은 없어서는 안 되는 국화이어야 한다"
豊田鉄騎, 星霧十五年, 帝國地方行政學會, 1926年, 238~239쪽.

30여년 전(1908~1909) 구한국(대한제국)에 머물던 내지인(일본인)들이 일본 국화(國花)인 사쿠라(벚꽃)를 그리워했다. 이때 창경원, 창덕궁, 경복궁 등에 5~6년 된 사쿠라나무를 내지(일본)에서 갖다가 심은 것이 조선 사쿠라의 시초다.
매일신보 1939년 4월 16일#

이에 따라 일제는 과거 창경궁이었던 창경원벚꽃축제를 개최하여 그 규모를 확대하게 된다.

창경원에 벚나무가 처음 심어진 것은 1908년부터 1909년에 걸쳐 일본으로부터 이식된 소메이요시노(染井吉野) 벚나무 300그루 정도였는데 이는 순종대부터였다. 이 무렵 순종은 덕수궁에서 나와 창경궁으로 거처를 옮겼는데(1908년 11월) 부친(고종)과 떨어져 살게 되어 매우 우울해 했다고 한다. 당시 대한제국에는 ‘정미7조약’에 따라 각 부처에 일본인 차관을 두고 있었고 궁내부 차관으로는 고미야 미호마쓰(小宮三保松·1859~1935)가 임명되어 있었는데 이완용, 이윤용 형제로부터 순종의 근황을 들은 고미야 미호마쓰는 창경궁에 동물원과 식물원, 박물관을 조성하여 소일거리를 하면서 우울감을 달래라고 권하였던 것이 시초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 벚나무가 창경궁에 식재되었고 이후 창경궁창경원으로 바뀌었다#.

다른 자료에 따르면 궁궐에 벚나무가 식재된 것은 창경궁이 동ㆍ식물원으로 조성되어 창경원으로 격하된 1909년 개원 이후라고 한다. 벚나무 식재과정은 개원부터 폐원까지 창경원의 원장을 지냈던 시모코리야마 세이이치(下群山誠一)가 1938년 조선일보와의 인터뷰(1938년 3월 26일) 내용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창경원 개원 당시 일본 내지(內地)에서 온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내지식 정원을 만들자고 제안하여 벚나무 2백주를 심었다고 하였다.그 후 해마다 종류와 수량을 늘려서 1938년 현재 창경원 벚나무 2천주는 30년 수령이 대부분이라고 하였다.

일제는 1918년부터 창경원에서 벚꽃놀이를 개시하였고 일부 특권층과 일본인들이 한적한 야간에 창경원에서 음주를 즐기며 밤벚꽃놀이를 즐기다가 문제가 되자 이를 일반에도 개방하자는 여론이 일어 1924년에는 야간 개원을 하여 밤벚꽃놀이까지 시작되었다.

이 외에도 다수의 장소에 벚나무가 식재되어 벚꽃놀이 명소가 생겼다.
봄을 대표하고 봄을 가치 있게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꽂이며 … 벚꽃이야말로 실로 봄이 갖는 최대의 자랑이며 꽃 중의 왕이다. 그러나 우리조선에는 내지처럼 많은 벚꽃의 명소가 없다. 거기에는 예부터 이 나라 사람들이 벚꽃에 대한 감상의 생각이 부족했던 원인도 있다. 벚나무는 겨우 군궁용(軍弓用)으로 썼기 때문에 경성 교외 가오리나 우이동에 식재된 이 외에는 별로 밀식된 곳도 없는 것이다 … 그런데 병합 이래 내지인의 이주가 점차 증가함에 따라 그들은 거의 그 국민성이라고도 할 만큼 벚꽃의 동경을 버리지 못하니 고국의 봄을 생각할 때도 조선에 벚꽃이 없음을 얼마나 쓸쓸하게 느꼈을까. 그 결과 백 그루 이백 그루라는 식으로 시험적으로 요시노자쿠라(吉野桜)의 이식을 시도하는 자가 나와 그 성적이 좋음이 실증되자 각지에서 다투어 이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점차 벚꽃 명소가 곳곳에 생겨 봄에 더 많은 번창과 광명을 가져온 것이다

함경도에 들어가면 원산, 함흥, 성진, 주을 등에도 꽤 벚꽃이 심어져 북진(北鎭)의 중관(重關), 회령(會寧)에 이르기까지 거의 벚꽃이 재배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성황이다. 벚꽃과 함께 국력이 신장하여 야마토(大和) 민족의 발전을 보는 것은 기쁜 일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 앞으로 10년이 지나면 조선의 봄도 내지에 뒤지지 않는 벚꽃을 보게 될 것이다. 특히 질서 있게 심어진 점에 산벚나무의 복잡함보다도 한층 경치를 좋게 하는 것이다.
亀岡栄吉(조선에 13년 이상 거주한 일본인 기자), 四季の朝鮮, 朝鮮拓殖資料調査会, 1926年, 5~6쪽.

일본인 거주 지역을 비롯하여 사직단과 효창묘(孝昌墓)처럼 조선왕조와 관련된 공간, 신규 조성된 근대공원, 신사 주변에도 대량으로 식재되어 경성의 벚나무는 빠른 속도로 증가하였다. 1910년에는 남산공원의 성격을 부각시키는 목적으로 식재하였고, 1919년에는 장충단, 1926년에는 사직단에 100여 주를 심었다.
이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는데, 1911년 3월에는 목포 송도의 신사 경내에 벚나무 100주를 식재하였으며,1915년 이천신사의 사전 개축시 아까시 숲을 벌목하고 벚나무를 대량 식재했다. 이처럼 1907년 일본에서 묘목으로 도입된 벚나무는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경성의 각 공간과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동아일보 1931년 12월 2일 기사에는 경성식림묘포(京城植林苗圃)에서 생산하는 조선 산앵(山櫻)은 정원용으로 매우 적당하여 희망하는 사람은 경성부 권업계(勸業係)에 신청하라고 하였다.벚나무 규격은 간장(幹長)오척 이상(약 1.5m)으로 100본을 삼원칠십전으로 판매하는 것으로 보아 벚나무를 양육한 후 보급하였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경성의 벚나무 확산에는 조선총독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많은 수의 벚나무 명소가 탄생했는데 가장 유명한 장소는 위의 창경원이었지만 남산 왜성대․장충단․삼청동도 벚꽃놀이 명소였으며 우이동도 전통의 명소였다(별건곤 1929년 4월호). 또한 인천 월미도,경상도 대구 달성공원ㆍ동래 온천장ㆍ신마산,충청도 청주의 앵마장(櫻馬場)ㆍ공주 금강가도(錦江街道),전라도의 광주공원ㆍ나주-순천가로,황해도 평양의 부벽루(浮碧樓)ㆍ경의선 사리원(沙里院), 강원도 춘천가도(春川街道) 등이 일제에 의해 생성된 벚꽃축제 명소였다.

이들 명소는 조선내 일본인의 집단 거주지역을 포함하여 조선의 전통 공간(서울 광화문, 평양 부벽루 등)ㆍ근대 공원ㆍ신작로ㆍ진입가로가 대부분이다. 이처럼 벚나무는 일본인이 주로 거주 및 활동하거나 오락, 관광을 즐기는 공간에 집중적으로 식재되었다.


일제강점기의 남산은 일본인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던 거류지로서 관폐대사[13] 조선신궁조선총독부 초대 청사와 관저. 호국신사 등이 위치해 있었던 등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지배의 심장이자 일종의 '식민지 속의 식민지'였다. 일제는 이곳에 왜성대 공원(오늘날 숭의여자대학교 터)이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여기서 왜성대공원(倭城大公園)은 1897년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거주지에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한 선조들이 왜성을 쌓았다고 주장하면서 만든 공원이자 통감부가 위치한 곳으로, 청일전쟁의 승리를 기념하고 전쟁에서 죽은 이를 기념하기 위한 갑오기념비가 설치되었다. 또한 1909년에는 한양공원(남산 분수대 부근과 케이블카 승강장 150미터 남측 지점)을 조성해서 산길을 닦아 일본 벚꽃나무를 대거 옮겨 심었다.(왜성대공원은 해방후 한양공원과 통합되어 오늘날 남산공원이 되었다)#

또한 을미사변에서 시해된 명성황후와 호위 군사 등 조선의 순국열사를 추모하던 장충단에 대해서는 이토 히로부미폭탄 3용사 등의 일본 전몰군인을 추도하는 장충단공원으로 개조하였는데 일제는 이 왜성대공원과 한양공원, 장충단공원에 벚나무를 대규모 식재하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남산은 벚꽃놀이의 명소가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왜성대(倭城臺) 앵계(櫻溪)의 벚꽃이 요사이 난만(爛漫)하게 되므로 연례에 의하여 총독부에서는 앵계 일대에 흑축꽃 모양의 전수 수십 개를 세우고 어제 23일부터 5월 1일까지 불을 켜서 매일 오전 7시부터 오후 12시까지 일반에게 공개하여 관람케 한다더라.
조선일보 1923년 4월 24일(근대뉴스)


일본 제국주의 확대와 군사기지 건립과정에서도 대규모의 벚나무가 식재되었다. 예를 들어 오늘날 벚나무로 유명한 진해시는 그 자체로 일본에게 특별한 지역이었는데 러일전쟁 승전에 큰 기여를 하였기 때문이다. 일본은 1904년 러일 전쟁을 일으키면서 대규모의 군대를 한국에 진주시켜 창원·마산·거제 등 진해만 일대를 중심으로 한 주요 지역을 사실상 강점하고 여기에 거제도 송진포의 해군 방비대 등 여러 군사 기지를 설치하였다. 일본군은 이들 기지에서 함포 사격과 해상 훈련 등 장차 러시아군과의 전투에 대비한 모든 준비를 마쳤기 때문에 오랜 항해를 거친 러시아 발틱 함대를 1905년 5월 쓰시마와 울릉도 근해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격파할 수 있었다. 이후 일제는 전쟁에 대비하는 군항 예정지로 진해 지역을 선정하고 1910년부터 군항 건설 공사를 시작하여 1922년 완료하였다. 군항 건설 공사의 진척에 맞춰 1912년 4월에는 거제도 송진포에 있던 해군 방비대가 이전해 왔고, 1916년 3월에는 진해 요항부(鎭海要港部)가 설치됨으로써 진해는 군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진해시 자체가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계획도시다 보니 초기 진해의 벚꽃은 군항과 시가지의 경관이나 토지 보전을 위한 식수계획에 의해 이뤄졌던 것으로 나타난다. 1910년 3월 진해만방어부대 사령관의 문서에 보면 삼목 5만그루, 적흑송 5만그루 등 7종 23만3천그루를 심으면서 이때 벚나무 2만그루도 함께 심은 것으로 보고돼 있다.

그리고 이후에는 벚꽃이 일본 제국 해군 휘장이기도 해 일제강점기동안 벚나무심기가 활발해졌다. 1913년 5만그루, 1916년 3만그루 등 모두 15만그루의 묘목을 심었던 것으로 나타났다.(산림청 임업연구소 자료) 특히 해군부지내 「벚꽃의 마장」과 웅동수원지의 대규모 벚꽃단지가 유명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진해벚꽃 이야기 (경남신문, 2003년 4월 3일)
한편으로 일본이 ‘해군의 휘장’을 상징하고자 진해에 벚꽃을 심은게 1911년부터였다는 자료도 발견되었다[14].

신토의 주요 거점인 신사가 한반도에 설립되는 과정에서도 벚나무가 대량으로 식재되었다. 예를 들어 국폐소사(國弊小社)였던 전주신사가 위치한 산는 본래의 이름이었던 '화산' 대신 '길야산(吉野山)'으로 개명되고 대규모의 벚나무가 심겨졌는데# 여기서 길야산(吉野山)은 일본에 실재하는 요시노산에서 따온 지명으로서 벚꽃의 명산지이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역대 최대규모의 벚꽃축제를 즐긴 산으로 유명하다.

일제는 역사적 명소 곳곳에도 벚나무를 심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케이스라면 임진왜란 당시 벽제관 전투로 유명한 벽제관(오늘날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이 있다. 일본인에게 벽제관 일대는 임진왜란 당시 그들을 추격하던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직속부대를 맞이하여 치명적인 반격을 가했던 일본군의 전승지였으므로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닌 곳으로 치부되었기때문에 일제는 일제강점기 초기부터 백제관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으며 조선총독부의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1912년 4월 28일 벚나무를 이곳에 기념 식수하는 것으로 관리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후에도 이곳에 녹화사업의 명분으로 벚나무(櫻木) 5천 그루를 식재하는 등의 행사를 거행하게 된다 #
「녹화운동(綠化運動)의 선구(先驅), 본사기념식수(本社紀念植樹), 작(昨) 3일(日) 기념일(紀念日)을 복(卜)하여, 벽제관(碧蹄館)에 앵풍 만주(櫻楓 萬株)
본사(本社)에서는 기념식수일(紀念植樹日)에 순응(順應)하여 3일 벽제관에서 기념식수를 하였는데 수년 전 본사에서는 한강반(漢江畔) 급(及) 이번에 기념식수를 한 벽제관에 앵화(櫻花)의 식수를 행하여 지금에는 직경 척여(直徑 尺餘)의 대목(大木)이 되어 과거 본사공적(本社功績)을 영구히 전하게 되었다. 이에 감(鑑)하여 본사는 작추(昨秋)에 거행된 소화대제(昭和大帝)의 어대전(御大典)을 광고(曠古)에 전하려고 종종(種種) 기념사업을 연구한 결과 조선에 재(在)한 민간녹화운동(民間綠化運動)의 선구(先驅)로서 식수(植樹)는 가장 적당한 사업이므로 이번에 벽제관 뒤의 국유지(國有地) 수십정보(數十町步)에 앵목(櫻木) 5천 주(株), 풍(楓) 5천 주 합계(合計) 1만 주(株)를 식재하였다. 당일은 본사원(本社員)은 물론 경성부내(京城府內)에서 다수의 내빈을 초대하고, 벽제관 부근 주민도 봉사적(奉仕的)으로 참가하여 기념식수를 하였다.
<매일신보> 1929년 4월 4일자 기사

조선인 스스로 벚나무를 식재하는 경우도 있었다. 울주군 삼남면에 있는 작천정(酌川亭)벚꽃길 또는 수남마을 벚꽃길이 그 대표적인 예시다. 해당 벚꽃길은 언양 4.2만세운동을 주도한 천도교인 곽해진 면장을 주축으로 신작로를 조성하면서 성립되었는데 1937년 봄에 이 도로가 생겼고 3년~ 5년생의 벚나무 묘목이 식재되었다. 천도교인이었던 곽해진 삼남면장을 주축으로 상북면장 김석한과 언양면장 박영한이 합의해 상북과 삼남에서 각 200명, 언양면에서 300명이 노역해 이 길을 만들었다. 벚나무 묘목 자금은 당시 울산군 교육위원 언양면 입후보자였던 하봉철이 선거운동비조로 냈다는 이야기가 있다.#
지역사회에서는 수남마을 벚꽃길에 대해서는 독립운동세력이 일제 당국을 속이고자 자발적으로 조성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는 아무런 근거가 없는 말이고 1937년 당시 울주군에 독립운동세력이 존재했다는 근거도 없다. 사실 1930년대의 천도교는 자치론과 일선동조론을 받아들이며 친일적인 종교단체로 변모하고 있었고 당시 울주군 내 천도교 세력도 독립운동같은 대의보다는 지역 발전 같은 이익을 위하여 이 도로를 조성하였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당시 도로가 신설되면 가로수로 벚나무를 식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기 때문에 벚나무도 여기에 심겼다. 작천정 벚나무길 조성과정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역은 울산대학교 역사.문화학과 정계향 객원교수의 강의를 참고하라 #오디오클립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축성한 울산왜성서생포왜성 인근의 벚나무 역시 일제당국과의 호의적인 관계를 구축하기 위하여 현지인들이 자발적으로 심었다고 한다.


물론 이런 흐름에 조선인의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소설가 염상섭은 조선 곳곳에 퍼진 벚나무(사쿠라)와 벚꽃놀이 풍습에 대해 이렇게 한탄하였다.##
“… 요사이 조선에서도 벚꽃놀이가 풍성풍성한 모양이다.… 조선색과 사꾸라색이 어울릴지 나는 명언(明言)할 수 없다.… 벚꽃은 조선의 하늘같이 청명한 자연색에서는 제 빛을 제 빛대로 내지 못할 것이다.… 조선의 유착한 기와집 용마름 위로나 오막살이 초가집 울타리 이로 벚꽃을 바라본다면 그것은 암만해도 ‘식민 사꾸라’라는 것이다….”

이외에도 식민지 조선인들이 벚나무를 일본의 상징으로 본 기록은 상당수 남겨져 있다. 그리고 벚나무와 벚꽃축제의 당대 높은 인기에 불구하고 식민지 조선인과의 관계에서는 정서적 간극이 분명히 존재했기에 친일 작품을 제외하고는 벚나무나 벚꽃을 긍정적으로 묘사한 문학이나 예술 작품이 희소한 편이다. 반면 친일 지식인이나 문학가에게 벚꽃과 벚나무는 좋은 소재가 되었다.[15]
조선 사람으로 외국에 가서 봄을 만날 때에는 먼저 진달래가 보고 싶고 또 진달래를 본다면 몸은 비록 외국에 있어도 마치 고국에 돌아온 것과 같이 반가운 생각이 난다. 그것은 다만 추상적 말이 아니라 누구나 실제로 체험하여 보는 일이다. 조선 사람의 진달래에 대한 애착심은 결코 일본 사람의 사쿠라에 대한 애착심 못지않다. 그것은 여러 가지로 설명치 않고 예로부터 모든 사람의 많은 시와 노래를 가지고도 족히 증명할 수 있다
청오, 「조선 각지 꽃 품평회: 요새에 피는 팔도의 꽂 이야기」, 별건곤(別乾坤) 제20호, 1929년 4월호, 146쪽

일제시대 벚나무를 모티브로 한 김정한의 소설 '회나뭇골 사람들’도 눈여겨 볼만하다. 이 소설의 내용은 김정한이 일제의 검속을 피해 남해공립보통학교 교원으로 생활할 당시 직접 듣고 겪은 일 중 서문 밖 회나뭇골에 살았던 백정 집안의 이야기를 소재로 썼다.

박선봉 노인은 기미년 만세운동(3.1 운동)으로 큰아들을 잃었다. 작은아들도 고문으로 바보천치가 되고 말았고, 부인은 음부에 서까래만한 통나무가 처박히는 망측한 고문을 당했다. 박 노인은 너무 분한 나머지 경찰이 보는 앞에서 소 잡는 칼로 자신의 성기를 싹둑 잘라버렸다. “독립하겠다고 끝까지 버틴기 그렇게도 나뿐 일이겠소?” 핏자국으로 벌겋게 물든 마당에 서서 박 노인은 이렇게 울부짖었다. 불행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박 노인의 손자 명달은 일본 신사 앞에서 몰래 버찌를 따 먹다가 붙잡혀 벚나무에 동여매이는 벌을 받는다. 어미가 이빨로 밧줄을 물어뜯으며 피를 흘리는 장면에서 소설은 마무리된다.#


참고자료

6.3. 현대

광복 이후에도 벚나무는 많이 심었다. 대표적으로 개발도시인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성산구만 돌아도 벚나무 일색. 특히 상남동은 꽃놀이를 집 앞에서 할 정도. 그 지역의 카더라에 따르면 처음 가로수를 심을 때 창원이 고향이었던 재일교포가 벚나무 묘목을 기증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파일:attachment/벚꽃/jinhae.jpg
창원시 진해구군항제

진해에는 일제강점기부터 심어져 있던 곳으로 광복 이후 벚나무를 거의 베어냈다가 자생지가 제주도라는 말이 나오자 한반도 자생종인 벚나무를 다시 심어 벚꽃의 고장[16]으로 꾸미기로 하여놓곤 정작 제주왕벚나무등의 한국산 품종이 아닌 일본의 개량종인 소메이요시노 묘목 2천여 그루를 1차로 1962년에 시와 해군이 공동으로 구입하여 벚꽃장 일대와 통제부 영내 그리고 제황산 공원과 시가지에 심었다. 통합창원시로 바뀐 지금에 와서도 대대적으로 진해 군항제를 벌여 관광자원으로 잘 써먹고 있다. 1960년대 당시로서는 자생하는 제주벚나무 서식지를 보호한다고 이런 일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위에 언급한 벚나무 원산지의 소모적인 논쟁도 이러한 민족 감정 문제와 연관된 편이다. 그런데 소메이요시노가 일본산이란 게 다시 밝혀진 지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벚꽃축제를 포기할 생각은 없는 듯하다. 대한민국 해군 군사도시인 진해가 매년 군항제로 엄청난 이미지 제고와 관광 수입을 벌어들이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포기할 수가 없는 것이다. 벚꽃축제의 원조인 일본에선 벚꽃의 북상 경로를 함께 따라가며 여행하는 코스도 관광상품으로 개발되었을 만큼 상품화가 잘 되었다. 심지어 벚꽃의 원산지라 주장(?)하며 양국 간 사이가 좋지 않은 중국 역시 벚꽃축제가 열리는 시기가 되면 웨이보를 비롯한 SNS로 벚꽃축제 관련 포스팅이 줄을 잇는 등 관광상품으로서 효자 노릇을 하고 있다. 진해구재정의 약 1/4가량이 군항제에서 나온다는 말도 있다고 할 정도로 군항제의 관광 수입은 정말 어마어마하다. 결국 돈이 문제다. 벚꽃놀이와 벚꽃의 정취를 즐기는 문화는 한국인에게 완전히 정착되었고, 단순히 돈을 떠나서도 이제 한국인의 봄놀이에 빼놓을 수 없는 문화가 되었다. 오히려 이런 부분에서 상단의 왕벚나무 원조 논란은 일본의 문화를 즐기고 있다는 한국인의 민족감정에서 발현한 죄의식을 덜어내는데 사용되기도 했다.

현재 전국토에 심어진 벚나무는 대부분 일본 품종이라고 보면 된다. 2022년 사단법인 왕벚프로젝트2050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국회에 식재된 벚나무류 218그루 중 197그루(90.4%)가 소메이요시노 벚나무였고, 여의서로는 418그루 중 403그루(96.4%)가 소메이요시노 벚나무였다고 한다. 나머지 나무들도 한국 특산이 아닌 잔털벚나무, 겹벚나무, 올벚나무였으며 한국 특산 벚나무인 왕벚나무는 한 그루도 없었다는 것이 조사 결과.#
심지어 2018년 기준으로 제주 왕벚나무의 원산지인 제주도에서조차 제주 왕벚나무는 한라산 자생지에서 보호받고 있는 235그루와 국립산림과학원 난대아열대산림연구소 입구에 식재된 일부 가로수에 불과할 정도며, 1만1000여그루에 달하는 제주도 벚나무 가로수는 전부 일본산 왕벚나무라고 한다.#

이에 국립산림과학원제주벚나무를 어미나무로 하는 가로수 보급을 위해 2015년부터 보급기지를 조성 중이며 1만 그루 이상의 제주 왕벚나무가 증식에 투입되어 2022년부터 제주도를 시범지역으로 공급하기 시작해 전국에 확대 공급할 예정이다. 해당 사업과 연관하여 서서히 교체한다면 진해 제주 벚꽃축제로 거듭날 수 있을 듯하다.

7. 여의도 벚나무 벌목사건

2014년 2월 20일 서울 여의도 윤중로에서 60대 노인이 전기톱으로 벚나무 6그루를 베어내었다가 경찰에 의해서 불구속 입건된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 노인은 "일본의 국화[17]인 벚꽃 배경으로 축제 따위나 여는 모습을 더는 두고 볼 수가 없다", "독도 망언이나 일본의 우경화를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일본의 상징인 벚나무를 모조리 베어내고 그 자리에 무궁화를 심으려 하였다"고 경찰서 진술에서 밝혔다.

이 노인은 시장에서 채소 장사를 하는 것으로 전해졌으며, 혐일 성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여의도에 심어진 일본 벚나무를 베어내고 그 자리에 무궁화를 심으려고 무궁화 묘목까지 가져왔고, 유인물까지 살포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일본꽃을 주제로 한 벚꽃축제를 폐지하고 대신 한국적인 무궁화 축제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과거에도 국내에서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계란이나 오물 등을 투척하는 등 행동이 실제로 있었으나, 벚나무나 벚꽃을 벌목하는 사례는 이번이 처음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 노인의 벚나무 벌목 행위는 그 당시 영등포구 윤중로 관리 공무원이 이를 발견하여 관할 영등포경찰서에 신고하였으며 경찰이 출동하여 노인의 벚나무 벌목을 제지하고 검거를 한 후에야 끝나게 되었다.

실제로 이 노인이 베어냈던 벚나무 일부는 밑동이 날아가 나이테를 드러내었거나 가지 및 줄기가 잘렸거나 전기톱으로 벌목을 가했던 흔적이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무궁화는 주로 3~4m 정도 자라는 소교목이기 때문에 20m까지도 자라는 벚나무를 같은 용도로 절대 대체할 수가 없다. 물론 높이 7.5m 짜리 무궁화 나무도 발견되었지만 수십 년 이상 된 고목으로 예외적인 경우다.

8. 벚나무 빗자루병

벚나무 관련 유명 병충해로는 벚나무 빗자루병#(witche's broom, 天狗巢病)이 있다. 벚나무 빗자루병은 '타프리나 비에스네리' 라는 자낭균에 의해 발생하며[18] 대표적 증상으로 엽화현상(葉化現象, phyllody)이 있다.[19]

벚나무에 빗자루병이 발병하면 엽화현상으로 인해 개화철에 꽃은 안 나고 잔가지와 아주 작은 잎만 무성히 나는 광경을 볼 수 있다.[20] 벚나무에서 빗자루병 증상이 진행되다보면 나뭇가지들이 빗자루처럼 모이는걸 발견할 수 있다. 빗자루병에 걸린 벚나무 잎 뒷면에서도 병든 부위의 잎 뒷면에 자낭이 나타난다.[21] 병든 잎은 흑갈색으로 변하고 얼마 안 가 시든다. 병든 가지에서 난 잎들은 기공이 충분히 열리지 않아 증산이나 광합성 작용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할 수 있다.

벚나무가 한 번 빗자루병에 걸리면 몇 년간 개화철마다 엽화현상만 보이다가 결국 그 현상이 일어난 가지가 죽어버리게 된다. 이런 증상은 결국 나무 전체로 퍼져나가 종국엔 나무도 죽게 된다. 빗자루병은 벚나무 자체도 해치고 개화철 벚나무 경관조성에도 불이익을 주기 때문에[22] 벚꽃축제철마다 관계자들이 예의주시하는 병이다.

벚나무 빗자루병 방제는 겨울철에 병든 가지를 부푼 아랫부분까지 잘라내고 티오파네이트메틸 도포제를 바른다.[23] 벚나무 가지의 모양을 잘 보면 병든 가지 쪽이 정상 가지보다 훨씬 가늘고 잔가지를 지나치게 많이 달고 있어서 병든 가지인지 아닌지 구별 가능하다. 겨울철에 정상 가지와 병든 가지의 구분이 어렵다면 봄철에 잎만 트는 가지들을 제대로 가지치기하고 티오파네이트메틸 도포제를 바른다.

벚나무 빗자루병은 포자를 통해 전염된다. 벚나무 빗자루병이 발생하면 병든 잎을 통해 발산된 포자가 주변의 다른 벚나무로 이동되어 빗자루병 증상이 발생하는 상황을 연쇄적으로 일으킨다. 벚나무는 특히 가로수로 쓰여서 나무당 간격이 그리 넓지도 않다. 그래서 한 벚나무가 빗자루병이 발생했을 때 빨리 잡지 않았다면 그 나무를 시작으로 주변 벚나무들까지 빗자루병이 전염될 수 있다.

9. 여담

최근들어 벚꽃향을 첨가한 디저트류가 봄 시즌에 자주 출시된다. 일본에서는 벚나무잎을 소금에 절여 팥소가 든 떡[24]에 감아 만든 사쿠라모찌라는 떡도 있다.

북한에서는 벚나무를 보기 매우 힘들다. 북한이 한국 전쟁으로 초토화된 도시를 재건할 때 김일성이 벚나무 대신 살구나무를 가로수로 심으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벚꽃을 북한에서는 '사꾸라꽃'이라고 해서 일제의 잔재라고 주장하며 있는 것도 다 제거했고, 또 살구나무는 여름에 먹을만한 살구 열매가 맺히는 것도 벚나무에 비해 장점[25]이라고 내세웠다.#1, #2 사실 벚나무와 살구나무는 같은 속이라서 봄에 꽃이 만개하면 비슷한 분위기가 난다.

매화나무, 복숭아나무, 살구나무, 앵두나무는 모두 벚나무속이다. 꽃도 다들 비슷비슷하게 생겼고, 열매들의 크기는 다르지만 모두 공통적으로 특유의 세로줄, 즉 엉덩이 모양(…)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에 커다란 씨가 있는 것과 맛도 새콤달콤한 것이 비슷하다.

북한산 일대의 벚나무는 한반도 자생종도 있으나 일본에서 들여와 심었다는 기록도 있는데, 조선조 영정조 간의 학자 이계 홍량호(洪良浩)가 영조 39년(1763년)에 일본에 가는 조선 통신사 일행(정사 조엄, 부사 이인배, 종사관 김상익)에게 부탁해 다음해인 1764년 7월 이들이 귀국할 때 벚나무 묘목 수백 본을 가져오게 했고, 우이동 일대에 심었다고 그의 저서 "이계집"에 기록으로 남겼다.

일제강점기 당시 경성부, 그러니까 서울에는 많은 수의 벚나무들이 심어졌고, 그 결과 1930년대에 가서는 흐드러지게 멋진 벚꽃을 감상할 수 있었다고 스웨덴 생물학자 겸 밀렵꾼 슈텐 베리만은 말했다. 한민족의 얼을 꺾기 위해서 벚나무를 심었다 운운은 일본의 Korea 표기 조작설처럼 말도 안 되는 소리. 당시 집주인인 일본인들이 자신들 취향에 맞게 자기 집을 꾸몄을 뿐이다.

일본에는 시체가 묻힌 곳에 벚나무가 자라면 더 붉은 꽃이 핀다는 도시전설이 있다. 이에 대해 자세한 건 벚나무 아래에는 문서로.

버찌를 많이 뿌리는데다 생각보다 발아가 제법 잘 되어, 벚나무 근처에서 어린 벚나무를 찾아볼 수 있다. 키우고 싶다면 잘 찾아보자.[26]

봄의 꽃이 벚나무 감상의 대부분이기는 하지만, 사실 가을에 단풍이 물들 때에도 꽤나 존재감을 발휘한다.

판타지 배경일 경우 목재가 분홍색이 되기도 한다. 마인크래프트 1.20에 등장한 벚나무가 그 예시. 실제 벚나무의 목재는 한국에서는 체리몰딩으로 익숙한(...) 암적색이다.

10. 관련 문서



[1] 벚'나무'의 자생지가 아니라 벚'꽃'의 자생지라고 하는 등[2] 제주도전라남도 자생 왕벚나무[3] 첫머리 단어에 보이는 'Yedo' 란 말처럼 '에도(도쿄)에서 발견된 것'의 원산이라는 의미이다.[4] 일본의 식물 분류학의 기초를 세운 사람이다.[5] Koidzumi G (1932). "Prunus yedoensis Matsum. is a native of Quelpaert". Acta Phytotaxonomica et Geobotanica 1: 177.[6] H. Innan, R.Terauchi, NT Miyashita, K Tsunewaki (1995). "DNA fingerprinting study on the intraspecific variation and the origin of Prunus yedoensis (Someiyoshino).". Japanese Journal of Genetics 70 (2): 185–196.[7] Jung, Y. H. and M. Y. Oh. 2005. Phylogenetic relationships of Prunus (Rosaceae) in Korea and Japan inferred from chloroplast DNA sequences. Korean J. Genetics 27, 279-288.[8] Roh MS, Cheong EJ, Choi IY, Joung YH (2007) Characterization of wild Prunus yedoensis analyzed by inter-simple sequence repeat and chloroplast DNA. Scientia Horticulturae 114: 121–128.[9] 김찬수, 1997. 왕벚나무의 분포 및 분류학적 연구. 제주대학교 대학원[10] 조명숙, 2012. 제주도에 분포하는 벚나무속 (장미과) 식물둘의 계통발생학적 분석 왕벚나무와 근연종을 중심으로 -. 성균관대학교 생명과학과[11] Katsuki, Toshio; et al. (December 2016). "Nomenclature of Tokyo cherry (Cerasus × yedoensis 'Somei-yoshino', Rosaceae) and allied interspecific hybrids based on recent advances in population genetics". Taxon. International Association for Plant Taxonomy. 65 (6): 1415–1419. doi:10.12705/656.13.[12] 속명이 Cerasus인 이유는 일본학계는 양벚류(Prunus subg. Cerasus)가 Prunus속에 통합된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13] 메이지 유신 이후 재편된 일본의 근대사격제도 중 가장 사격이 높은 신사[14] 출처 : 진해의 벚꽃 - 한일역사여행/다케쿠니 도모야스 지음/이애옥 옮김/논형, 2019년[15] 예를 들어 주요한은 1944년에 발표한 산문 '구단(九段)의 꽃'에서 조선의 지원병, 학병, 여자 정신대가 구단(九段), 즉 야스쿠니 신사의 벚꽃(사쿠라)가 될 것이라고 찬양하였다[16] 그래서 마스코트도 벚꽃이 모티브.[17] 그러나 사실 일본은 공식적인 국화(國花)가 없으며, 일본 황실은 상징으로 국화(菊花)를 사용하고 일본 총리일본 정부는 오동잎을 상징으로 사용한다.[18] 해당 병원균은 벚나무의 눈과 가지의 조직 내에서 균사 상태로, 포자는 눈과 가지에 붙어 월동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병원균 매개충으로는 매미충류 중 몇몇 종류가 꼽힌다. 이 곰팡이가 대표적인 벚나무 빗자루병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혹응애, 유전문제 등의 다른 원인들도 있다. 벚나무라면 빗자루병은 종류 안 가리고 발생한다. 대추에도 빗자루병이 발생하고 증상도 유사하다. 그러나 두 나무의 빗자루병은 병원체가 달라 서로 같은 항생제로 치료할 순 없다.[19] 엽화현상은 꽃눈이 잎으로 변해 나오는 현상으로 엽화현상이 진행된 식물은 열매도 열리지 않게 된다. 이런 증상 외에도 엽화현상이 일어난 식물은 꽃 중앙에 잎이 난다던가 열매에 잎이 다발적으로 난다던가 하는 증상을 보인다. 벚나무의 엽화현상은 보통 개화철에 꽃눈 대신 잎눈만 나버리는 것이다.[20] 정상적인 벚나무의 꽃과 잎이 맺히는 가지는 빗자루병에 걸린 가지보다 훨씬 굵다. 정상적인 벚나무의 잎눈도 빗자루병에 걸려 나는 가지의 잎눈보다 더 굵고 크며 모양이 뚜렷하다. 벚꽃 개화철에 길을 가다 아무리봐도 벚나무로 보이는 나무가 꽃 없이 잔가지랑 작은 잎들만 달린게 보인다면 그 나무는 빗자루병에 걸린 벗나무임을 의심해볼 수 있다.[21] 자낭이 나타나는 시기는 4~5월.[22] 벚나무가 빗자루병이 많이 진행될 경우 모든 가지에서 잔가지와 작은 잎만 나게 된다. 반대로 벚나무의 빗자루병 증상이 덜 진행되었다면 남은 가지에선 다 꽃이 나있으나 한 가지에서만 꽃이 아닌 잔가지와 아주 작은 잎만 달려서 이질적인 모습이 된다.[23] 줄기마름병균이나 재질썩음병균 침입 방지용.[24] 주로 벚꽃을 연상하도록 붉은 색소를 첨가하여 분홍빛을 띤다.[25] 벚나무의 열매 버찌는 그리 먹을만한 크기나 맛이 아니고, 실제로 한국 가로수 벚나무의 버찌 절대다수는 그냥 버려진다.[26] 다만 생육이 힘든 축에 속해서 크기 키우는 건 정말로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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