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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昌慶苑
창경궁 자리에 1909년 11월 1일 개원한 유원지. 1983~1986년에 거쳐 다 철거하고 동물원 기능은 서울동물원으로 모두 이전했다. 폐쇄 전 운영 주체는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창경원관리사무소(現 국가유산청 창경궁관리소)였다.
1983년에 폐쇄되기 전되기 전까지 서울특별시에서 가장 큰 유원지로써 주말과 공휴일마다 가족 나들이객으로 붐비면서 각광받았던 곳이다. 1980년대 이전부터 서울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창경원에 가족들과 놀러가 바람을 쐤던 추억이 있을 것이며, 지방 거주 학생들의 수학여행 단골 코스이기도 했다. 1980년대 이전에는 서울의 유일한 유원지였고, 생활 수준도 급격히 향상되던 시절이라 폐쇄되기 전인 1980년대 초 무렵에는 주말과 공휴일마다 발디딜틈 없을 정도로 인파가 상당히 몰렸던 인기 관광지였다.
2. 역사
1909년(융희 3년)에 일본인들이 우울함과 걱정, 근심에 빠진 순종의 마음을 달랜다는 명목으로 궁궐에 동물을 들여왔는데 일제는 이에 그치지 않고 궁궐 안 전각 일부를 철거하고 서양식 정원과 건물을 세우자고 순종에게 건의. 순종은 이를 허가하고 창경궁을 '창경원(昌慶苑)'으로 개명. 이로 인해 창경궁은 왕족들만 출입하는 궁궐이 아닌 국민 누구나 방문 가능한 시민 공원으로 바뀌어 버린다. 한반도 최초의 시민공원이다. 개원식에 순종은 모닝코트에 중절모와 지팡이까지 짚은 서양 신사의 모습으로 참석했으나 정작 동물원 개원을 주도했던 이토 히로부미 초대 통감은 개원 닷새 전에 안중근 의사에게 암살당하여 참석하지 못했다.왕족의 거주 공간이었던 창경원은 개원과 동시에 일반인들에게 개방되면서 누구나 입장료만 지불하면 이용할 수 있는 공중을 위한 공간이 되었다. 배치를 살펴보면 중앙에는 박물관 영역, 북쪽에는 식물원 영역, 남쪽에는 동물원 영역으로 구성되었다. 식물원 지구에는 대온실을 중심으로 한 식물배양실 등 열대 식물의 전시 및 관리 기능이 집약되었으며, 동물원 영역의 연못은 수금방양소로 만들고, 이 주변으로 각종 동물사와 동물 온실을 신축했다. 박물관 시설은 본관 건물뿐만 아니라 기존의 전각들을 전시 시설로 흡수했으며, 전각 사이에는 서양식 정원을 조성해 꽃을 계획적으로 재배하기도 했다.
1939년의 창경원 안내용 팜플렛에 수록된 지도.
1930년대에 이르면 아동운동장이나 말운동장과 같이 어린이들을 위한 놀이 공간이 만들어졌다. 그 결과 첫째, 창경원은 동·식물원을 통해 희귀한 동물과 식물들을 대중적으로 접할 수 있는 낙원의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 이는 꽃관상이나 동물 구경과 같은 새로운 대중오락을 만들어냈다. 둘째, 창경원은 도시의 일상에서 탈출할 수 있는 ‘도시 안에서 도시 밖 자연을 간직한 낙원’을 상징하며, 도시민의 여가 공간이 되었다. 셋째, 벚꽃의 개화기에 야간 개방이 시작되면서 창경원에서는 조명 효과를 중심으로 ‘환상적인 밤 경관’이 연출되었다. 이러한 밤벚꽃놀이는 각종 공연, 음주 등과 결합되면서 선정적으로 변해 갔고, 그 결과 창경원은 일탈의 낙원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 창경원은 다양한 성격의 시설이 혼재되면서 유원지라는 새로운 유형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데 기여했으며, 사람들은 유원지에서의 경험을 통해 새로운 오락 문화를 수용했다.
1922년에는 창경원에 벚꽃을 심어서 벚꽃놀이를 즐기도록 하였으며, 특히 벚꽃이 만개한 봄의 일정 기간 동안은 야간에도 개장해서 조명과 함께 벚꽃놀이를 즐겼는데 이를 야앵(夜櫻)이라고 불렀다. 1924년에는 불꽃놀이도 열었다. 일본인들이 기틀을 닦아서인지 앵무새들은 해방 이후에도 일본어[1]를 따라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일제 군경에 의해 호랑이, 사자, 코끼리 등 21종 38마리의 동물들이 몰살되기도 했으며, 독살 말고도 여러가지 방법으로 수를 줄여 나갔다고 한다. 낙타는 사료를 주지 않고 굶겨 죽였고, 하마는 겨울에 일부러 난방을 하지 않아 얼어 죽게 했다. 심지어 초식동물들은 육식동물 우리에 그대로 풀어놓고 잡아먹히게 했다. 이렇게 동물들의 수를 줄인 이유는 태평양 전쟁이 패색이 짙어지면서 발생한 전쟁 물자 부족 때문이었는데 동물원 우리의 창살들이 무기를 만들기 위해 뜯겨 나갔다. 또 다른 이유는 폭탄이 동물원 근처에서 터져 맹수들이 탈출하면 피난민을 공격할 수도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2]
광복 이후 280마리 정도의 동물들이 살아남았지만 얼마 안 가 1950년 6.25 전쟁이 터졌고, 개전 3일만에 서울이 함락됨에 따라 사육사들과 동물들은 순식간에 인민군 치하에 놓였다. 근데 의외로 공산 치하의 서울에서도 동물들은 안전하게 보살핌을 받으며 살 수 있었다. 아마 이데올로기와 동물이 전혀 관계가 없었을 테니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나중에 대한민국이 동물원을 수복했을 때도 사육사와 동물은 무리 없이 인수됐지만 1951년 1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1.4 후퇴가 발생했을 때는 사육사들도 피란 행렬에 동참했다.[3] 2개월 뒤 서울을 재수복하고 사육사들이 창경원으로 돌아왔을 땐 말 그대로 처참하기 그지 없었다. 쌍봉낙타, 꽃사슴, 얼룩말 등은 피란민들에게 도살되어 잡아 먹힌 듯 머리만 남아 있었고, 붉은여우와 너구리, 아시아오소리, 삵 등은 굴 속에서 혹은 돌 틈에 끼어 죽어 있었다. 다른 동물들도 모두 굶어 죽거나 얼어 죽어서 열어 둔 동물사에 살아 움직이는 동물은 한 마리도 없었다.
1953년 휴전 협정이 체결된 후 창경원의 텅 빈 우리에 전방의 군인들이 야생에서 잡아서 보낸 반달곰과 산양, 노루, 삵 등이 다시 들어오자 전쟁 후 피폐한 삶을 살던 시민들의 큰 위안이 되었다. 얼마 뒤 동식물원 재건 위원회가 출범하여 정부 기관 및 기업체, 독지가들로부터 42만 2천 달러의 재건 기금을 모았다. 이런 노력 끝에 드디어 1954년 7월 15일 창경원의 동식물원이 다시 일반에 공개되었다.[4] 1955년 사자와 호랑이, 아시아코끼리, 북극곰, 물개, 하마, 쌍봉낙타 등 10여 종의 동물을 외국으로부터 수입하는 등 지속적인 노력으로 동물원 재건 2년 만에 100종 500마리를 전시하여 동물원다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동물원 외에도 놀이공원, 케이블 카 등의 시설이 운영되었다. 구경거리가 된다는 관용구로 "창경원 원숭이 꼴"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는 1960년대 초반생 이상의 연령대 사람들이 자주 쓰는 말이다. 1970년대 서울 강북 지역에 살았던 국민학생들은 여기로 소풍을 많이 갔다고 한다.
1976년 신문기사에 따르면 1년에 동물 구입에 쓸 수 있는 예산이 18,000달러밖에 되지 않는데 이 돈으로는 기린 1쌍밖에 살 수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짝을 잃은 동물의 대부분은 독수공방 신세가 되었다고 한다.
다만 실제로 기린이 처음 창경원에 들어온 것은 1971년으로, 화신산업의 박흥식이 기증한 1만 달러로 일본에서 한 쌍을 구입해서 9월에 들여왔는데 오는 도중에 태풍을 만나 배가 흔들리면서 암컷은 벽에 머리를 부딪쳐 죽고 수컷만 살아서 도착했다. 그런데 당시 창경원의 정문이던 홍화문보다 기린의 머리가 높아서 사육사들이 매달려 목을 숙이게 하고 통과해야 했다.
1년 뒤에 일본에서 암컷 한 마리를 다시 구입해서 수컷 기린의 독수공방 상태를 끝냈지만 이 암컷은 합사한 지 겨우 20일만에 목이 부러져 죽었다. 성질이 예민했던 수컷이 죽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수컷도 1974년 3월에 심장마비로 죽었다.
당시 창경원의 입장료는 성인 10전 / 어린이 5전이었다.
2.1. 철거와 창경궁으로의 복원
창경원은 설립된 이래 서울의 대표적인 유원지였지만 시설이 낡고 부지가 좁아 1977년 문화공보부와 서울특별시는 과천 일대에 규모가 더 큰 새로운 공원(오늘날 서울대공원)을 짓기로 하였다. 이듬해 10월부터 착공에 들어갔으며 기존에 창경원에 있던 동식물들은 모두 신공원으로 옮겼다. 서울대공원은 1984년 5월 1일 개장하였다.기존의 창경원은 1983년부터 창경궁으로의 복구작업이 시작되었으며 일본식 건물 및 정원 등을 없애고 역사적 고증에 따라 당시 존재해 있었던 전각과 편전을 복원한 끝에 1986년에 다시 일반 대중들에게 창경궁의 모습으로 공개되었다. 일부 전각과 편전 등은 복원하지 못한 채 소실된 것으로 처리됐다. 한편 1909년에 일제가 만든 대온실 건물은 2004년 등록문화재로 지정했고 보수 공사를 통해 다시 개방했다. 원래 쓰였던 타일이 1905년 영국에서 만든 제품이라는 것을 확인해 복구에 참고했다. 자세한 내용은 창경궁 대온실 문서 참고.
창경원 폐원 및 철거 당시 창경원에 놀러가던 추억을 간직한 사람들은 창경원 철거에 반대하기도 했으며 21세기에도 창경원이 철거된 것에 대해 매우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남아있다. 이렇게 창경원에 놀러가던 추억을 간직한 세대들은 창경궁 복원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뒷세대들과 갈등하기도 한다. 일본인들도 창경원 철거를 훗날의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와 더불어 한국 내 옛 식민지기의 흔적이 사라진 아쉬운 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역사적인 이유로 일본 제국의 자국 지배(대만일치시기/남양 군도)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관대한 대만과 팔라우에서도 한국의 창경원 폐원 및 철거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은 편이다.
3. 사건 사고
한국 동물원 역사의 산증인인 김정만 박사의 술회에 의하면 1958년에 그가 처음 들어왔을 때는 제대로 된 동물학 장서조차 없었고 의료 장비도 열악해서 동물이 아파도 원인을 못찾아서 장님 코끼리 만지듯 진료하다 맥없이 폐사하는 사례도 많았다고 한다. 따로 책을 찾아 공부하고 일본 동물원에 가서 어떤 장비로 어떤 진료를 하는지 배우고 도입하면서 차차 보완해 나갔다고 한다. 김 박사가 라디오에 출연해 밝힌 옛이야기 중엔 시대별 관람문화에 관한 것도 있었는데 모두가 못살던 60년대에는 싸온 주전부리를 관객들이 먹다 남아서 동물들에게 던져주는 일이 있을 수가 없었지만 경제사정이 다소 나아진 70년대에는 반쯤 먹다 던져주는 일이 많아졌는데 이 때문에 사람의 전염병(대표적으로 결핵)이 동물로 옮겨지는 부작용이 발생했다고 한다.이 사건 말고도 한국 최초의 동물원인 탓에 창경원 측의 관리부실과 관람객들의 인식 부족으로 인한 여러 부적절한 행동들 때문에 동물들이 병에 걸리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이러한 요소들이 겹쳐 개장 초장기엔 신문에 기사가 날 정도로 동물들이 죽어나갔다. 이때 죽은 동물 중엔 말레이맥, 인도코뿔소, 코디액곰 등 현재 한국에선 볼 수 없는 동물들도 있었다.
3.1. 표범 피습 사건
1979년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인 1935년 10월의 일이라고 한다.요시가와(吉川)라는 일본인 사육사가 아무르표범 우리를 청소하고 있었는데, 닫힌 줄 알았던 내실 문이 열려 있었다. 살그머니 기어나온 표범이 사육사를 정면에서 덮쳤고[5], 한데 엉킨 사육사와 표범은 한덩어리가 되어 우리에서 굴러나왔다. 이때 마침 동물원 경비를 맡고 있던 일본군 헌병 장교가 지나가다가 현장을 발견하고 군도를 뽑아 표범을 찔러 사육사를 구했고, 얼굴이 상처투성이가 되고 코와 귀를 잃은 사육사는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용감히 싸웠다 해서 훈장도 받았으나 창경원은 그만두고 일본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한편 표범은 몸에 칼을 꽂은 채 내실로 도망쳤고, 누구도 칼 맞은 표범이 있는 내실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헌병 장교는 빈 칼집만 차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표범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무도 모르는 가운데 보름이 지나자 표범은 멀쩡하게 내실 밖으로 걸어나왔고, 군도는 후에 녹슨 채로 내실 구석에서 굴러다니는 것을 꺼냈다고 한다.
3.2. 반달곰 사건
1956년 11월 13일 사육사 윤봉우가 곰 사육사에서 아침 청소를 하던 중 반달곰에게 엉덩이를 물어뜯겼다. 반달곰이 관광객들이 가져온 음식 냄새를 맡고 청소를 하기 위해 열어놓은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걸 보고 윤씨가 다급히 문을 닫자 화가 난 반달곰이 깔아뭉개고 엉덩이를 물어뜯은 것이었다. 당시 경비를 위해 나와있던 육군 헌병이 권총 3발을 발사해 반달곰은 사살되었고 윤씨는 목숨을 구했다.3.3. 녹두 사건
1961년 9월 30일 동양 철학을 연구한다는 백영주가 창경원에 들어와 사슴 한마리의 목을 잘라갔다. 외팔잡이인 백씨는 동양 철학에 관한 책을 읽다가 사슴을 활로 죽인 다음 녹두(鹿頭, 사슴의 머리)를 잘라서 백일 동안 먹으면 천하장사가 된다는 얘기를 보고 이런 일을 저질렀다고 한다. 이 사건은 4년 동안 해결되지 않아 미제사건으로 남았다가 백씨가 친구와 함께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대한민국 수사진은 엉터리다." 라는 말을 하는 것을 옆자리에 있던 형사가 듣고 조사한 결과 범인이라고 밝혀졌다.3.4. 비단뱀 탈출 사건
1965년 7월 29일 창경원 수조에 들어있던 비단뱀[6] 한 마리가 탈출했다. 길이 2.7m, 직경 15cm의 이 비단구렁이는 당시 베트남 전쟁에 파병된 국군 병사들이 현지에서 붙잡아 창경원에 기증한 것으로 수조를 받치고 있던 돌을 밀어내 그 틈으로 빠져나갔다. 당시 돈 3만원의 현상금을 걸고 찾았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 비단뱀의 수명은 30년에서 최대 40년이니 운이 좋아 야생에서 여생을 다하고 사망했거나 적응하지 못한 채 죽었을 확률이 높다.3.5. 호랑이 사건
1976년 11월 10일. 충청도에서 목수 일을 하다가 서울 구경 하러 온 서 모씨는 창경원에서 친척들과 소주 4병을 마신 뒤 호랑이 우리 앞에 와 "이 호랑이는 사람 말을 잘 듣게 생겼다"며 안전 펜스를 뛰어넘어 철책 사이에 오른팔을 밀어 넣어 호랑이에게 과자를 주려고 했다.그런데 그가 일을 저지른 3시에서 3시 반 사이는 사육사가 호랑이에게 먹이를 주는 시간이었고 먹이를 기다리던 '6호'라는 이름의 수컷 호랑이[7]가 3m 거리에 있던 서 씨에게 달려들었다. 서 씨는 주먹이 철창에 끼이는 바람에 팔을 빼내지 못했고 그대로 '6호'는 서 씨의 오른팔을 물어버렸다. 서 씨를 구하기 위해 주변 사람들이 팻말을 뽑아 '6호'를 찌르는 등 일대 소동이 벌어졌으나 6호는 서 씨의 팔을 놓지 않았고 도리어 같은 우리에 있던 '6호'의 남매 호랑이[8]도 '6호'에게 자극받아 같이 팔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근처 매점에 있던 종업원이 빗자루에 불을 붙여 위협한 끝에 장장 30분 만에 '6호' 남매는 서 씨의 팔을 놓았으나 이미 서 씨의 오른팔은 절단되어 호랑이 우리에 떨어져 있었고, 서 씨는 급히 서울대학교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오른쪽 팔꿈치 아래 5cm가 모두 소실되었으며 호랑이에게 물어뜯겨 절단된 오른팔은 끝내 회수하지 못했다. 서 씨는 병원으로 옮겨질 때도 술에 너무 취해 주변에서 플래시를 터뜨리는 기자들을 때리며 행패를 부리고 자신의 팔이 잘린 줄도 모르고 "그 호랑이 힘이 참 센데"라고 말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위 사건의 주범 '6호'는 1982년 12월 7일 자연사하였고 시체는 박제되어 대전광역시에 있는 국립중앙과학관에 전시 중이다. '6호'의 원 주인인 진야지는 1979년에 사육 중이던 호랑이 세 마리가 우리를 탈출한 진야지 호랑이 탈출 사건으로 대소동을 벌여 사건 발생 이후 동물원을 폐쇄했다.
3.6. 코끼리 사건
1981년 9월 27일 서울 상공을 지나던 제트기의 폭음에 놀란 코끼리 '자이언트'가 쓰러졌다. 몸무게 6.5톤, 키 3m 50인 이 코끼리는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쓰러져 급성 위식체 현상을 보이며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창경원 측은 긴급 상황에 묘방을 찾다 체인으로 들어올려 6시간 만에 코끼리를 살려냈다. "구출 작전이 조금만 늦었더라도 육중한 체구에 폐가 압박돼 폐 기능 마비로 숨졌을 것"이라고 당시 창경원 관계자는 밝혔다.해당 코끼리는 1955년에 삼성물산이 '태순이'[9]와 함께 태국에서 들여와 창경원에 기증했으며 1984년에 과천으로 이사간 뒤에도 건강하게 살아왔지만 까칠한 성격 탓에 사육사나 다른 코끼리들에겐 모진 태도를 취했다. 2009년 초 들어 노령에 따라 퇴행성관절염과 발톱 주변의 염증 악화로 자세가 안 좋아지고 식사조차 제대로 못하는 등의 건강 악화를 보이다가 동년 3월 8일 오후 3시 10분에 58살의 나이로 폐사했다. 서울대공원에서 살 때 자이언트의 짝으로 일본 동물원에서 데려온 사쿠라를 줬지만 둘은 서로에게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사쿠라는 옆 방사장의 아프리카코끼리랑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말았다. 참고로 2024년에 사쿠라는 59세의 나이로 폐사하며 자이언트로부터 국내 최고령 코끼리 타이틀을 가져갔다.
4. 기타
- 아기공룡 둘리 초반부에 둘리가 코끼리와 싸워서 이기고 역관광시키는[11] 장면이 나오는데 애니메이션판에서는 서울대공원 안에 있는 동물원이 배경이었지만 원작에서는 창경원이 배경이다. 해당 연재분이 투고될 당시에는 1983년 여름이라 겨울부터 이루어진 창경궁 복원 사업이 시행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이다.
- 영화 고래사냥은 창경원의 마지막 모습을 담은 영화다. 1983년 겨울에 촬영을 했는데, 초반 일부 장면을 창경원에서 촬영했다.
- 신문수 화백이 그린 신통방통이에서 어린이날에 술을 가지고 놀이동산 가자던 아빠에게 신통이와 방통이, 엄마가 결사반대하면서 작년 어린이날에 창경원가서 술마시고 취해서 대낮부터 술주정부렸던 거 잊었냐고 분노한다. 술은 가져가지 않으려고 했지만 회사 상사가 집으로 찾아와 바둑을 두자고 하는 통에 결국 저녁늦게까지 있어서 놀이동산 가지 못해 방통이가 울며 끝난다.
- 조대현과 김천정이 쓴 1988년작 동화집 '키작은 땅꼬마'에 실린 '고약한 겨울잠'은 창경원 곰이 주인공이다. 어느 눈 내리는 겨울 창경원 우리에 갇혀 있던 곰은 한번이라도 좋으니까 바깥에 나가서 창경원 안을 직접 둘러 보고 싶다는 소망을 갖고 있었고, 그걸 우리 앞에 있던 눈사람에게 이야기했는데, 그 눈사람이 정말 움직여서 우리를 열고 곰을 꺼내준다. 곰은 기뻐 춤추면서 눈사람과 함께 창경원 곳곳을 돌아다니는데, 곰이 탈출한 것을 보고 놀란 사육사가 자신을 찾고 있는 것을 보고 놀라서 어쩔 줄 모르고 눈밭 위를 구르다 눈을 온몸에 묻힌 채 눈사람 옆에 우두커니 서서 눈사람인 척 위장한다. 사육사는 네가 곰이지? 네가 곰이렷다? 이러고 눈사람과 곰을 번갈아가며 채찍으로 때리지만 곰은 들키지 않으려고 꾹 참고, 사육사는 어디 두고 보자면서 그 앞에 죽치고 앉았다. 곰은 눈사람 옆에서 끝까지 눈사람인 척 움직이지 않으려 했지만 어느 새 눈이 그치고 날이 풀리면서 햇살에 눈은 녹아 내렸고, 눈사람도 녹아 사라져 버렸다. 요놈! 그러면 그렇지 하는 소리와 함께 사육사는 곰에게 채찍을 때리는데, 순간 곰은 우리 안에서 잠에서 깬다. 눈사람이 움직이고 창경궁 안을 돌아다니고 사육사 앞에서 눈사람인 척하다 눈이 녹아 결국 들키고 마는 모든 과정들이 겨울잠 자면서 꾼 꿈이었던 것. 우리 앞에서 신기한 듯 곰을 쳐다 보는 아이 앞에서 막 잠에서 깬 곰이 아르릉 거리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참 고약한 겨울잠이었습니다."라는 마지막 문장에서 제목이 등장한다.
- 과거 창경원의 입장료는 당시로서는 결코 싼 가격이 아니었기 때문에 암표가 시중에 팔리거나 담벼락을 무단으로 창경원 안에 들어가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4.1. 벚나무와 벚꽃놀이
1986년의 복원 사업 당시 일각에서는 창경원 시절 일제가 심었다는 벚나무들을 모두 없애야 한다는 주장과 그냥 나무인 만큼 그대로 두자는 주장이 맞서기도 했지만 결국 벚나무 일부는 베여지거나 일부는 서울특별시 여의도 윤중로 등으로 자리를 옮겨서 심기도 하였다. 창경원 시절부터 사육해 온 동물들과 식물들은 경기도 과천시에 있는 서울대공원으로 옮겨졌다.창경궁은 창경원 시절까지만 해도 당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세대들에게는 궁궐이라기보다 어린이들의 놀이동산, 코끼리 먹이 주는 곳으로 인식되기도 했으며 휴일만 되면 창경원 입구가 많은 인파로 붐벼서 교통이 마비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암표상까지 기승을 부려 속앓이를 썩히기도 했다. 여기에 미아들까지 발생하여 어른들의 부주의까지 겹쳤고 화장실도 많은 인파 때문에 초만원이 되는 등 난장판이 되기도 하였다. 이 때의 기억이 꽤 남아 있는지 창경궁관리소 안내원들의 말에 따르면 아직까지도(2016년 6월 기준) 창경궁이 아닌 "창경원 벚꽃놀이가 언제인지 문의"하는 전화가 온다고 한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1973년 서울어린이대공원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1950~60년대 수도권의 유일한 동물원 및 놀이동산이었고 어린이 대공원과 에버랜드(당시에는 용인자연농원)가 개장한 이후로도 이전의 독보적인 지위는 잃을지 몰라도 어쨌거나 상당한 지위를 차지한 테마파크였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1970년대 일부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나체팅'[12]의 장소로도 알려져 당시 운동권 대학생들의 위상에 먹칠하기도 했다. 그 시절 서울에 살았던 국민학생들의 소풍 장소이기도 했다.[13]
4.2. 창경원 코끼리
창경원 시절 명물이자 마스코트격으로 떠올려지는 것이 바로 창경원 코끼리였는데 당시 창경원에 놀러왔던 중노년 세대들에게는 어린 시절 창경원에 서식하는 코끼리에게 먹이를 던져주거나 코끼리가 길다란 코로 먹이를 먹는 모습을 보고 신기해하거나 환호가 나올 정도로 인기가 높았었던 동물이었다. 김수정 화백의 만화 아기공룡 둘리[14]에서 둘리와 싸우다가 역관광 당하는 코끼리 이야기가 이 코끼리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에피소드다.
4.3. 구 이왕가박물관 - 장서각
이왕가박물관 시절의 모습.
장서각 시절의 모습.
한국 역사에 나타난 최초의 근대적 박물관으로, 1907년부터 제실박물관이란 명칭으로 추진되어 초기에는 황제의 관람을 목표로 했다가 1909년 개장 후 식물원, 동물원과 함께 창경원의 일부로서 대중들에게 공개되었다. 1910년 한일합방 후 명칭도 이왕가박물관으로 격하되었다. 초기에는 명정전, 통명전, 양화당 등 전통 목조건물 7개를 쓰다가 1911년 자경전 터에 위 사진과 같은 일본식 새 건물이 세워져 그곳으로 이전됐다. 1912년에 처음으로 <이왕가박물관 소장품 사진첩>을 내고 쓰에마츠 구마히코가 사무관으로서 강진 청자가마를 답사하고, 금동반가사유상이나 청자삼강 표주박모양 주전자 등을 수집하기도 했으나 학술적인 목적이 아니라 일본인 자신들의 판단에 따라 수집해 왔다.
어찌 됐든 한반도에 세워진 최초의 박물관이고 순종 황제의 의지로 지어졌다는 이야기도 있는 데다 소장품도 현 국립중앙박물관이 이어받은 터라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신으로 대우받고 있다. 물론 정말 순종 황제의 의지로 세워졌는지 아니면 창경궁 온실이 그렇듯이 순종 황제를 위해 짓는다는 명목으로 창경궁을 훼손하기 위한 일제의 수단 중 하나였는지는 알 수 없다.
1938년에 이왕가박물관이 덕수궁 석조전으로 이전하면서[15] 함인정 남쪽 4층짜리 일본식 건물에 있던 장서각이 위 건물로 이전되었으며, 해방 이후인 1948년에는 미군정에 의해 운영권이 구왕궁사무청으로 이전되었다. 그러나 1950년 6.25 전쟁이 터지자 장서각에 보관돼 있었던 조선왕조실록 적상산본 등 귀중한 고문서들이 소개도 못 한 채 북한군에 의해 일부 노획 / 반출되었다.
1955년 구왕궁사무청이 '구황실재산사무총국'으로 개편되면서 장서각 관리 소관업무가 창경원사무소로 이관되었고, 1961년 9월 13일부터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어 1969년부터 관리 소관 업무가 또다시 문화재관리국으로 이관되었다. 1981년에 보존 중이던 장서 전량이 한국정신문화연구원으로 옮겨진 후 빈 건물로 방치되었다가 1992년 11월 2일에 철거되었다. 현재 창경궁의 궁궐 권역이 그러하듯 나무가 심어져 공원처럼 꾸며진 공터다.
5. 관련 문헌
- 오창영 저, 『韓國動物園八十年史 昌慶苑編』(한국동물원 팔십년사 창경원편) 서울특별시, 1993년.
[1] 당시 얼마 안 되었던 조선인 사육사의 회고에 의하면 '고라 바까'가 말버릇이었다고 한다. 즉, '짜샤! 바보!'를 지나가던 관람객들에게 했다는 소리다.[2] 이렇게 동물원의 동물을 죽이는 조치는 일본 본토에서도 마찬가지로 이뤄져서 지금도 도쿄의 우에노동물원에는 당시 죽은 동물들의 넋을 기리는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전쟁 때문에 동물원의 동물들을 죽이는 사건을 다룬 에피소드가 도라에몽에 있는데 그 에피소드에서 '전쟁은 곧 끝나요, 일본이 지거든요' 라는 명짤이 만들어졌다.[3] 전년도 6월에는 공산 치하에서도 서울을 안 떠난 사람이 많았지만 녹음기만 틀어놓는 대국민 사기극으로 뒤통수 맞은 적이 있다 보니 1.4 때는 서울시민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전부 피란을 가 서울은 아예 텅 빈 유령도시가 되어 버렸고, 이 피란 와중에 이산가족이 많이 생겼다.[4] 당시 대한민국 재벌들을 불러 놓고 돈으로 내라고 하면 기분이 상할까봐 일부러 '동물원 만들게 동물 한쌍씩 기부좀 하슈.' 라고 돌려 말했다고 한다. 가격이 제일 비쌌던 코끼리 '자이언트'는 이병철 삼성물산 사장이 태국에서 사왔고, 가격이 비싸진 않지만 제일 간지나는 사자는 당시 대한민국 경제계의 왕이라고 불리던 한국은행에서 사왔다.[5] 먹이를 주러 들어갔는데 표범이 의도적으로 숨어 있다가 뎦쳤다는 이야기도 있다.[6] 그물무늬비단뱀 혹은 버마비단뱀으로 추정.[7] 이 호랑이는 1971년 11월 17일 일본 치바현에 있는 사찰 진야지(神野寺) 측에서 창경원에 기증한 호랑이로 1974년 3월 6일 번식을 위해 합사되던 '7호'라는 이름의 암컷 호랑이를 물어 죽이는 사고를 친 적 있다. 호랑이를 사찰에서 기증한 이유는 당시 진야지의 주지 야마구치 쇼도(山口照道)가 사찰 경내에 십이지원(十二支苑)이라는 이름의 동물원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8] 진야지에서 창경원에 기증한 '6호'와 같이 창경원에 온 암컷 호랑이이다.[9] 1975년에 동국제강이 사서 서울어린이대공원으로 기증한 코끼리 '태산이(1974~2011)'의 아내와는 다르며, 한동안 남편 자이언트와 옥신각신하다 1989년 웅덩이로 밀쳐지는 사고를 당해 숨졌다.[10] 두 동은 관할 행정동이 서로 다르다. 원서동은 가회동 산하에 있고 원남동은 종로동(종로1~4가동) 산하에 있다.[11] 구판과 신판 양쪽 다 방영되었다.[12] "나"이트 "체"리 블로썸 미"팅" 이다. 알몸으로 하는 게 아니라 밤 벚꽃 미팅.[13] 이런 이유로 1960년대생 이상 세대는 창경원 동물원을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14] 애니메이션에서는 서울대공원으로 바뀌었다.[15] 이 과정에서 이왕가미술관과 통합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