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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요제프 괴벨스/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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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기 생애
1.1. 출신 배경1.2. 성장 과정1.3. 청년 괴벨스1.4. 박사 실업자
2. 나치당에서 활약하다
2.1. 라인란트 나치즘의 선구자2.2. 이 남자는 누구인가2.3. '붉은 베를린'으로 가다2.4. 나치당 베를린 관구장
2.4.1. '공격(Der Angriff)' 지2.4.2. 고소왕, 고발왕2.4.3. 면책특권자, 무임승차자 - 의원 당선2.4.4. 호르스트 베셀
2.5. 급성장과 위기2.6. 나치당 선전국장
2.6.1. 카게무샤2.6.2. 합법 투쟁?2.6.3. 첫 선거 승리2.6.4. 히틀러의 대통령 출마(1932년 대선)
2.7. 선거, 선거... 그리고 혼란2.8. 승리
3. 국민계몽선전부 장관
3.1. 베를린의 정복자3.2. 취임3.3. 부처 관할권 확대 병림픽3.4. 유대인 탄압3.5. 제2차 세계 대전 당시3.6. 최후

1. 초기 생애

1.1. 출신 배경

파울 요제프 괴벨스1897년 라인란트 지방의 라이트(Rheydt) 시(현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묀헨글라트바흐시)에서 태어났다(히틀러보다 8세 연하). 할아버지는 농촌 출신으로 도시로 상경한 단순 노동자였고 아버지는 심지 공장 급사에서 성실성을 인정받아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태어날 때쯤엔 회계 책임자로 승진한 노동자 출신 사무원이었다. 그의 전기에 따르면, 파울의 아버지가 어릴 적에 작업복만 입다 승진한 이후 출근을 위해 정장과 실크햇을 사게 됐다고 언급한 것을 보면, 나름대로 자수성가에 성공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어머니는 가난한 살림에 다른 집에서 하녀로 일하다 노동자였던 아버지와 만나 결혼했고 외할머니도 역시 하녀로 일했고 외할아버지는 편자 대장장이였다고 한다. 파울은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으며 형제자매로는 형 콘라트, 한스와 누나 엘리자베트, 여동생 마리아와 엘리자베트가 있었으나 누나 엘리자베트와 여동생 마리아는 태어나자마자 요절했고 어릴 때는 형들 및 여동생 엘리자베트와 자랐다.

나치 독일의 고위직 중에서 박사 학위를 가진 과벨스는 상당히 교육을 받은 인물이지만 뚜렷하게 특별한 사회적 배경은 없었다.[1] 이런 이유로 노동계층이라는 출신 배경을 잊지 않았고 히틀러에게 충성을 바치면서도 반자본주의적 성향을 계속 추구했다. 실제로 괴벨스는 나치 집권 전까지 계급타파적 언동을 지속적으로 쏟아냈으며 반자본주의적 성향으로 나치당 내에서 '좌파'로 분류되었다.

하지만 출세 후엔 귀족 출신 선전부 직원에게서 사교계의 밥상머리 예절을 배우는 등 주류로 편입되는 데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괴벨스의 추종 대상인 히틀러 또한 나치당 초기에는 디트리히 에카르트, 그 후 나치당 해외공보실장을 지낸 하버드대 출신 사업가 한프슈탱글 부부에게서 사교계 예절을 배웠다. 이러한 모순은 전쟁 말기 총력전을 외치며 높으신 분들을 비난했던 것과 달리 정작 자신의 조직인 나치와 자기 자신이 특권 계급이 된 것은 애써 무시했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1.2. 성장 과정

어른들의 모욕적이고 동정 어린 시선과 친구들의 놀림 때문에 괴벨스는 신체적 장애가 모든 것에 그늘을 드리운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신을 열등하다고 생각하고 집 밖으로 나가기를 꺼리게 되었다. 그는 달렌 거리의 작은 집 2층에 있는 좁은 자기 방에 틀어박히는 일이 점점 잦아졌다. 22살 때 괴벨스는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보면서, 그때는 늘 이렇게 생각했다고 썼다. 친구들이 그를 창피해하는 이유는 "그가 그들처럼 달리고 뛰어오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때때로 외로움은 괴로움이 되었다. (...) 다른 아이들이 자신과 함께 놀려 하지 않는다는 생각, 그가 혼자 있는 것이 스스로 원해서가 아니라는 생각이 그를 고독하게 만들었다. 고독은 그를 자포자기 상태에 빠뜨렸다. 다른 아이들이 달리고 마구 설치고 뛰어다니는 것을 보면, 그는 자신을 그렇게 만든 하느님에게 불평을 하였다. 그리고 자신과 같지 않은 다른 사람들을 증오하게 되었고, 자신과 같은 병신을 여전히 좋아하는 어머니를 비웃게 되었다."
...
"하느님은 왜 경멸과 조롱을 받도록 그를 만들었는가? 왜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과 삶을 그 자체로 사랑할 수 없는가? 왜 사랑하고 싶고 사랑해야 할 때, 그러지 못하고 증오해야 하는가?" 그래서 그는 신을 원망했다. "때때로 그는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믿을 수 없었다."
- 괴벨스의 반(半) 자전적 소설 <미하엘>에서[2]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23p, 27p

태어난 지 얼마 안 돼서 폐병을 앓아 죽을 뻔했다가 겨우 살아났지만 몸이 허약하게 된 데다 골수염(骨髓炎)에 걸려 오른쪽 발이 굽었다. 또 발육부진으로 오른쪽 발이 왼쪽 발보다 3cm가 덜 자라서[3] 10세 무렵에는 없는 살림에도 불구하고 큰 돈을 들여 수술을 해보지만 실패했다. 결국 괴벨스는 평생 보행용 의족을 끼고 다녀야 했다. 그렇게 굽어진 다리 때문에 또래 아이들은 그를 놀렸고, 이에 괴벨스는 자기 자신을 열등한 사람으로 생각하게 되었으며 내성적 성격으로 변했다.

이렇게 어려서부터 남들과 다른 모습이 컴플렉스가 되어 늘 우울해했다고 한다. 선천적인 장애가 지금보다 더 손가락질 받던 시절, 괴벨스와 그의 어머니는 다리의 장애를 불의의 사고라고 둘러대고 다녀야 했다. 괴벨스의 이런 변명은 나치당에 들어가고 선전장관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열등감 때문에 괴벨스는 학교에 다니면서도 남들과 똑같이 뛰어다니지 못하는 좌절감에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고 나아가서 인간 자체를 증오했다. 훗날의 열정적인 연설과 달리 인간으로서의 괴벨스는 사람들에게 무서울 정도로 차갑고 계산적이었다는 의견이 많다.

파일:attachment/파울 요제프 괴벨스/goebbels_early.jpg

어린 시절 모습. 오른쪽이 괴벨스다.

장애를 잊고 남들보다 돋보일 수 있었던 재능은 허약한 체구나 굽은 다리와는 상관없이 잘할 수 있는 공부였다. 괴벨스는 좋은 머리로 태어났고 무엇보다 건강한 몸을 가진 다른 사람들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죽기살기로 공부를 해서 일찌감치 수재로 평가받았다. 또 여기에는 자식이 장애를 입은 것을 가련해 하는 부모의 지원이 뒤따랐는데 파울 요제프 괴벨스의 부모는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없는 살림에도 아껴서 그를 지원했다. 파울의 두 형은 실업학교만 졸업했던 반면 괴벨스는 실업학교를 졸업한 후 인문계 김나지움에 진학했던 것.[4] 넉넉하지 못한 살림 때문에 아버지가 일하는 심지공장 일을 집에서 가져와 부업으로 가족들이 램프 심지를 만드는 잔업을 밤에도 했다고도 한다.

학창시절에 괴벨스의 부모는 그가 가톨릭 사제 교육을 받길 바랐다. 왜냐하면 사제 공부를 하면 상급학교에 다녀도 학비가 면제되었기 때문이기도 했고,[5] 괴벨스의 부모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데다가 부모로서 자신의 자식의 신체장애도 고려했기 때문이었다. 파울 요제프 괴벨스는 잠시 사제가 되는 것을 고민했지만 결국 부모의 뜻에 따르지는 않았다. 여기엔 마침 아버지가 심지공장에서 승진해 관리직이 되어 급여가 많이 오르면서 경제사정이 조금 풀려 부모가 파울의 학업을 지원할 여건이 된 데다, 괴벨스 본인도 수재였던 덕에 장학금과 과외 수입, 후원금 등을 받아 학비 부담을 많이 줄였던 점이 가미되어, 학업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1.3. 청년 괴벨스

인문계 김나지움에서도 뛰어난 성적으로 두각을 나타냈지만, 용기를 내서 고백한 첫사랑이 하필 친형이 좋아하는 여자라 형이 알고 나서 칼 들고 쫓아오는 바람에 장학금이 일시적으로 취소되기도 한다. 단, 그 때만을 제외하면 형과 크게 사이가 나쁘진 않았는데, 도리어 이 형은 나중에 파울이 자살한 이후 그의 장례를 치러준 사람이며, 사후 네오나치의 창당자로 의심될 정도로 동생을 많이 도와줬다.[6]

다만 위 사건 탓에 파울의 양친은 없는 살림을 더 졸라매야 했다. 학창 시절 때 독일어 과목 스승은 괴벨스의 독일어를 다루는 놀라운 능력을 발견하고는 이 쪽으로 진학할 것을 적극 추천했다. 괴벨스 본인도 이걸 인정했고, 수학이나 과학 재능은 없다고 스스로 생각했지만 다른 과목 성적들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학교를 졸업하면서 독일어 작문 성적이 학년 수석이라서 성적으로 뽑혀 졸업사를 낭독할 기회를 얻었다. 당시는 제1차 세계 대전 기간이었기 때문에 괴벨스는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내용의 졸업사를 낭독했다. 허나 당시까지는 포텐이 터지지 않았던 건지 훗날 드러내는 모습과 달리 "그저 그런" 연설을 하는 수준에 그쳤기에 졸업사가 끝나고 나서 학교 교장이 좋은 내용이지만 뛰어난 연설가는 아니군이라는 혹평을 내렸다고 한다.
파일:요제프_괴벨스.jpg
10대 후반 김나지움 시절

본 대학교로 진학했다가 같은 대학 선배이자 법대생이었던 카를 쾰슈라는 사람의 빠가 되면서 그러잖아도 집에서 보내주는 돈도 얼마 없던 차에 선배 집에 들락날락하는 사정으로 그 집안과 친해져서 거의 제 집처럼 드나들게 되었다. 거기서 선배의 여동생 아그네슈와 친해진다. 아그네슈가 대학에 진학할 때 아그네슈를 따라서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전학을 간다. 그러나 여자를 따라간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선 정작 또다른 부자집 집안 아가씨 안카 슈탈헬름이란 여자와도 친해지면서 아그네슈는 차버린다. 다만 부자집 따님과의 연애는 여느 드라마처럼 수준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고 결국에는 이뤄지지 못한다. 안카는 괴벨스를 경제적으로 도와주고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해 주었지만 과한 경제적 의존은 괴벨스에게 더 열등감을 주었고, 이 때문에 자연스레 멀어졌다고...
1919~1920년 사이의 겨울, 괴벨스는 불과 며칠 지나지 않아 돈이 다 떨어졌다. 그저 안카에게 기대어 사는 처지를 벗어나보려고 그는 양복들을 경매에 내놓고 싸구려 손목시계를 헐값에 팔아치웠다. 크리스마스 때 안카가 유복한 친구들과 함께 등산 여행을 떠날 때, 괴벨스는 자존심 때문에 함께 가지 않았다. 그는 성탄 전야에 정처없이 뮌헨을 헤매면서, 자신이 안카 슈탈헤름과 관계에서 "비참한 정신적 물질적 예속 관계로" 점점 깊이 빠져들고 있다고 씁쓸하게 곱씹었다. 그를 괴롭히는 상황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안카 슈탈헤름의 어머니가 딸의 교제를 중단시키려고 새롭게 모략을 꾸몄던 것이다. 그는 "단지 너를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로, 다른 사람들이 나를 멸시하고 모욕감과 자괴감을 느끼도록 할 권리가 있단 말인가" 라면서 자신의 운명을 원망했다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68~69p
두 연인의 출신의 차이는 다툼을 가져오고 그 다툼은 종종 지나치게 열광적인 화해를 가져오기도 했지만, 두 사람의 틈은 괴벨스의 사회주의적 사상 때문에 다시 복구되기 어려웠다. 부르주아의 딸은 독일을 뒤흔든 혁명적인 혼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르주아의 딸이었다. 그녀의 출신 배경은 그녀에게 온갖 특권을 부여했다. 그녀는, 적색 혁명에 열광하는 애인, 온실 속에서 보호받아 온 부르주아들이 마침내 공포를 알게 된 것을 기뻐하는 애인을 점점 더 낯설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4월 중순 괴벨스는 안카에게 편지를 써서, 이 사회의 비참함을 고발하면서 자신도 그 희생자라 하였고, 나아가 이러한 상황에 책임이 있는 자들과 그들의 '국제적 합작'을 밝혔다.
수억의 인류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전대미문의 특권 계급, 수백만 명의 생명을 마음대로 결정할 권한을 손에 넣은 특권 계급에게 지배당한다는 사실은 썩어 빠진 일이고 비참한 일이 아닐 수 없다(프랑스의 제국주의, 영국과 북미의 자본주의, 그리고 아마도 독일의 자본주의를 관찰해보라). 이 특권 계급은 전 세계에 마수를 뻗치고 있다. 자본주의에는 국적이 없다(독일의 전시 자본주의에서 나타난, 하늘에 대고 절규할 만한 경악할 상황을 보라. 자본주의의 국제성이란, 전쟁 당시 독일인 포로들이 마르세유에서 독일 기업 마크가 달린 독일제 대포를 하역하고-이에 대한 증거도 댈 수 있다.-그 대포가 독일인의 생명을 빼앗는 상황까지 연출해냈다).
자본주의는 새로운 시대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고 배우려 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의 이익을 다른 수백만 명의 이익보다 우선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찾으려고,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하여 나선다고 해서, 이것을 나쁘다 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 썩어빠진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국제적 조직을 만들려 한다고 해서 이를 나쁘다 할 수 있겠는가? 교양을 갖춘 격정적인 청년들의 대다수가, 능력 있는 사람에게 교육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 오로지 돈으로 이루어지는 상황에 이의를 제기한다고 해서, 그들이 유죄인가? 번뜩이는 지적 재능을 지닌 사람들이 돈이 없어 궁핍하고 몰락해 가는데, 다른 자들은 돈을 흥청망청 낭비하고 유흥에 탕진해버리는 것은 끔찍한 일이 아닌가?
유산 계급이 과거에 힘겨운 노동을 해서 그 부를 획득했다고 너는 말한다. 많은 경우에 그것이 사실임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너는 자본주의가 그 부를 '획득'했을 당시에 노동자들은 어떻게 살고 있었는지도 알고 있는지.
-1920년 괴벨스가 연인 안카 슈탈헤름에게 쓴 편지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74~76p
결국 괴벨스와 안카의 사이는 멀어지고, 안카 슈탈헤름은 '게오르크 뭄베'라는 변호사와 만나게 되고 청혼까지 받는다. 그러자 괴벨스는 안카에게 약혼을 제안하며 정면돌파를 시도했으나 거절당했다. 연인에게 차여버린 괴벨스는 자살을 통보하고 유서도 작성하였다. 물론 자살을 실행하진 않았지만 신경쇠약에 걸린 괴벨스는 친구 리하르트 플리스게스에게 부탁하여 안카 슈탈헤름의 소식을 묻고 안카를 찾아간 친구는 안카가 "금 단추와 금 핀이 수두룩하게 달린 양복을 입은 졸부"인 뭄베 변호사와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고 전하며 빨리 오라고 전했다. 소식을 들은 괴벨스는 급하게 안카의 집에 찾아갔으나 안카가 신랑과 함께 프라이부르크로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안카를 빼앗기면서 부르주아들에 대한 괴벨스의 적개심은 더 심해진다. 10년 후 둘은 재회하는데 괴벨스는 뒤에 아내가 되는 마그다와 만나던 때였다. 한때의 연인이던 안카는 남편과 이혼하고 생활 형편이 어려워져서 괴벨스를 찾아왔고, 가난뱅이에서 선전장관으로 출세해서 성공한 괴벨스는 나치당 산하 여성 잡지에 그녀의 일자리를 마련해 준다. 만남은 줄타기를 하며 잠시 지속되었지만 마그다와의 결혼으로 인연이 다하게 된다.

한편 제1차 세계 대전은 독일의 패전으로 끝났다. 전쟁터에 나갔던 형들은 다행히 살아서 돌아왔지만 패전 이전의 경제봉쇄 여파에다가 베르사유 조약 크리까지 당한 독일 경제는 적자 신세를 도통 면치 못하고 있었다. 전국에서 허구헌 날 산발적으로 공산당 폭동이 벌어졌으며 그걸 막으려는 자유군단(퇴역 군인들의 무장조직)의 폭동도 이어졌으며 또 그 폭동들을 진압하려는 공화국의 행보가 이어졌다. 한편 괴벨스의 고향 라인란트 지방은 승전국 프랑스벨기에 군대에 점령당한다.

괴벨스는 이 시기쯤에 집안 내력인 가톨릭 신앙도 완전히 버렸지만 비참한 현실을 타개해줄 메시아 같은 존재는 더욱 갈망했다. 이 시기는 오스발트 슈펭글러[7]의 <서구의 몰락>이 유행하던 시기였다. 괴벨스 본인도 그 책을 진지하게 읽었다. 결국 가톨릭 장학금을 받는 주제에 학부 시절 반기독교적 작품을 발표했다가 한때 라이트 시 김나지움 시절 고교 은사였으며 당시 괴벨스가 속한 해당 지역 교구의 부교구장였던 사제에게 엄청난 항의를 받았지만, 부친과 다른 은사들이 힘 써줘서 어찌어찌 넘어갈 수 있었다. 이렇게 이 시기는 타고난 신체 장애를 갖춘 괴벨스에게 경제적 궁핍+나라 망함+애인에게 차임+진로 문제 등등이 겹친 그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암울한 시기였다.
1921년은 괴벨스처럼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초년생에게는 최악의 시기였다. 전쟁 배상금 때문에 독일의 경제성장은 기대할 수도 없었다. -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8]

1.4. 박사 실업자

괴벨스는 독일 사회에서 성공하기에 필수적인 군대 경력도 없고 신체적 장애를 가진 데다가 미래도 불투명한 가운데 경제적으로 고통받는 처지였다. 장래를 위해서 괴벨스는 결단을 내린다. 박사 학위를 취득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애초에 원하던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군돌프 교수는 독일 문학계의 권위자라 수업이 면제된 사람이어서, 자기 대신 지도해줄 담당 교수로 친절하게 막스 폰 발트베르크 교수를 소개해준다. 괴벨스는 이 당시엔 아직 반유대 감정이 없었는데, 군돌프 교수는 유대인이었고 발트베르크 교수는 혈통으론 절반이 유대인이었다.

논문 주제는 19세기 독일 문학가 빌헬름 쉬츠의 희곡에 대한 평론이었고 논문 내용은 당시 통설을 충실하게 따랐다고 한다.[9] 몇 달 동안 방 안에 틀어박혀 책을 읽고 열심히 논문을 쓴 보람으로 지도교수 발트베르크의 괴벨스 박사 학위 논문 평가는 탁월함이었고 구술 시험에서도 이견 없이 만장일치로 통과했다. 그렇게 괴벨스는 문헌학 박사가 되었다. 이후에 그는 모든 서명에 '박사 괴벨스'로 서명했고 나치당 입당 후에도 괴벨스가 유일한 박사는 아니었지만 '박사'하면 당연히 괴벨스였다. 히틀러도 8세나 연하인 괴벨스를 존중해서 박사로 불렀다.

하나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박사 이름으로 과외를 하거나 언론사에 가끔씩 기고나 논문을 올리면서 푼돈을 받는 게 전부였다. 몇 푼 받아봤자 당시 독일의 인플레이션 상황에선 받으나마나였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여자친구 엘제 얀케에게 경제적으로 빌붙어 먹고 살았고 원하던 언론사 취직자리는 죄다 헛물이었다. 출판계와 언론계를 꽉 잡고 있던 '유대인 자본'[10]에 대한 적개심이 차츰 생겨난다. 여자친구의 도움으로 드레스덴 은행[11] 쾰른 지점에 취직하지만 동료들이 내부 정보와 초인플레이션 상황을 이용해서 '장사질'을 하는 걸 목격했고 돈이 없어서 고생을 많이 한 서민들을 문전박대하고 오직 대자본에게만 굽실거리는 은행 일에 극도의 혐오감을 느꼈다고 자신의 일기에 적었다.
"너희들은 자본 투자라고 말하지. 그러나 그런 그럴 듯한 말 뒤에는 더 많은 돈을 모으려는 짐승 같은 허기만이 있을 뿐이다. '짐승 같은' 이라고 말했지만 이 표현은 짐승에 대한 모욕이다. 왜냐하면 짐승은 배가 부르면 먹기를 그치기 때문이다." - 괴벨스, 1923년. (괴벨스의 일기 中)

결국엔 몇 달 안 가 병을 핑계로 휴직을 한다. 휴직 중에 진짜로 아파서 드러눕게 되었고, 결국 은행에선 잘린다.

사실 처음에는 괴벨스도 나치당이 등장할 때에는 나치당을 비웃거나 미친놈 취급을 했다. 1921년 11월에 형 콘라트가 결혼하자 괴벨스는 결혼식에 참가한 히틀러 추종자들을 조롱하면서 결혼 기념 문집에 이런 글을 실었다. "그는 요강 위에 앉은 아이를 그려넣고 아래에 2행시를 적었다. <하켄크로이츠를 보면 거기다 똥 싸고 싶어져.>"[12] 그러다가 두 달 정도 지난 1922년 초부터는 일기에 나치당에 긍정적인 내용들이 나오기 시작한다(같은 출처). 이미 앞서 1920년 카프 폭동 때에도 역시나 긍정적이었다. 물론 이 때에도 패전 후 독일인들처럼 극우 쿠데타에 대해서 나쁘지 않은 반응이었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인 지지도 아니었다.

괴벨스가 은행에서 해고당할 무렵인 1923년 바이마르 공화국은 초인플레이션으로 경제가 막장테크를 타는 데다가 베르사유 조약으로 상환하던 전쟁배상금에 대한 채무불이행으로[13] 프랑스벨기에 군대가 라인란트 지방과 루르 공업지대를 점령하고 철도, 광산 등 주요시설을 장악한다(생산수단 볼모 정책). 독일인들은 태업과 파업 등 소극적으로 저항했는데 적극적으로 외국 군대가 돈 안 갚는다고 쳐들어와서 석탄과 철도 시설을 장악하고,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사람은 민간인이며 평시인데도 군사 재판으로 총살하는 초대형 사고가 터졌다. 이 사건으로 영국, 미국 등 같은 연합국은 물론 프랑스 내에서도 비난 여론이 거세게 일어나 군대는 결국 철수하기는 했지만, 이 사건은 괴벨스에게 더 이상 이 무능하고 매국적이고 혐오스런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론 안된다는 생각을 굳히게 만든다.

하지만 괴벨스가 당시까지 심각하게 나치에 동조적인 상황이었던 건 아니었다. 아직 애인이던 엘제 얀케의 어머니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지만 그래도 헤어지지 않았고, 자신과 이름이 비슷한 유대인 변호사 요세프 요제프 박사와도 독일 문학을 주제로 토론(!)을 즐기는 생활을 하는 등 이때까지도 반유대 감정과는 아직 거리가 있었다. 혐오스런 '유대 자본'과[14] 지인들, 즉 '인간' 유대인들과 반유대 감정을 아직 연관짓지 않던 시절이다.
괴벨스 집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편견이 다른 가톨릭 소시민 가정보다 특별히 심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이 매우 영리하고 돈을 잘 다룬다고 여겼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들을 보통 독일인으로 생각했다. 이는 유대인들도 황제와 조국을 위해 1차 세계대전에서 싸웠고 전사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버지 프리츠 괴벨스가 출세한 후에 가족은 한 유대인 변호사 가족과 친근한 관계를 맺었다. 이 친분이 괴벨스 가족의 평판을 높여주었기 때문에 은근히 자랑스러워하기까지 하였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요제프 괴벨스는 그 저명한 변호사 요제프(Josef Joseph) 박사를 가끔 방문하여 문학 토론을 하기도 했고, 괴벨스가 대학에 다닐 때도 문학 애호가인 그와 자주 대화를 나누곤 했다.
그 당시 괴벨스는 아돌프 바르텔의 문학사와 관련해서 안카 슈탈헤름에게 이렇게 불평을 늘어놓았다. "내가 이렇게 과장된 반유대주의를 싫어한다는 것을 너도 알 거야. (...) 유대인이 내게 절친한 친구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욕설이나 편 가르기, 아니면 심지어 박해를 해서 그들을 없앨 수는 없다는 말이야. 만일 이런 식으로 그들을 없앨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아주 천박하고 비인간적인 일이야" 이때까지만 해도 괴벨스는 이른바 유대인의 지배력에 대항하는 최선의 수단은 스스로 일을 더 잘하는 것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존경하던 유대인 독문학 교수 군돌프에게서 공부하면서 이를 시도했다. 또 그는 마찬가지로 존경하던 '절반 유대인(부모 중 한쪽이 유대인인 사람)' 발트베르크에게서 박사 학위를 받고 나서, 이웃 친구인 요제프 박사의 충고를 따랏다. 하이델베르크의 유대인 교수에게서 배운 대학 공부를 활용하여 웅변가나 작가가 되기로 한 것이다.
1922년에 이르러서야 유대인을 보는 그의 태도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약혼녀 엘제 얀케는 그의 다리 장애 때문에 일어난 다툼중에 자신의 어머니는 유대인이고 아버지는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했다. 처음에 괴벨스는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최초의 마법'은 사라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에게 '유대인 문제'가 이미 존재했음에도 그녀에 대한 태도를 바꾸지는 았았다. '유대인 문제'와 관련된 괴벨스의 생각은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을 읽으면서 나타났던 것으로 보인다. 괴벨스는 1922년 10월의 강연 중에 군돌프 교수에게 여전히 찬사를 보냈지만, 이와 동시에 슈펭글러의 유대인 사상을 '대단한 중요성'을 지니는 것으로 평가했다. 괴벨스는 "여기서 유대인 문제를 그 뿌리부터 파악하고 있다. 이 부분은 유대인 문제의 지적 해결을 가져올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괴벨스가 이 문제를 자신의 사고에서 중심에 높기 시작한 것은 은행에서 겪은 '체험'과 '통찰'에 따른 것이었다. 그 결과, '인종 문제' 때문에 엘제 얀케와 관계가 점차 어두워졌다.
...
그의 <비망록>에 나타나는 것처럼 괴벨스는 당시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의 <19세기의 기초>도 읽었다. 그 영국인은 프랑스인 고비뉴가 <인종 불평등론>이라는 논문에서 내세운 인종 이론을 '발전'시켰고, 아리안 종족이 '문화의 정수'이며, 순수한 인종은 아리안 종족과 유대 종족 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리스의 예술과 철학, 로마 법, 기독교라는 고대의 유산을 계승한 아리안 종족은 '지배 인종'이며, 현재 지배적인 물질주의적 시대 정신을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종족으로 선택 받았다. 그러려면 먼저 인종의 '순화'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는 "고귀한 인종이 물질주의라는 유대적 도그마 때문에 영원히 영혼을 잃고 '밝음을 추구하는 종족'으로부터 추방되기 때문이다. 이때 이러한 물질주의 도그마는 기독교와 달리 그 어떤 아리안적 영향도 받지 않은 채 유지되는 것이다." 괴벨스는 훗날 바이로이트에서 체임벌린 만나고 나서 그가 '선구자'이자 '예비자', 그리고 '우리 정신의 아버지' 라고 일기에 열광적으로 썻다. 체임벌린의 사상은 당시 26살이던 괴벨스의 세계관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제 괴벨스는 유대인을 물질주의의 화신, 악, '적그리스도'의 화신, 나아가 이 세상의 악덕에 구체적으로 책임이 있는 존재로 보기 시작했다. 물질주의적이고 타락한 공산주의뿐 아니라 물질주의적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질서의 주창자들도 실은 유대인이 아니었던가? 마르크스, 트로츠키, 로자 룩셈부르크, 그리고 전 외무장관 라테나우와 바이마르 헌법을 만든 후고 프로이스도 유대인이었다. 괴벨스는 이로부터 "마르크스주의는 유대인들의 속임수이고, 인종적 자각을 지닌 민족들을 거세하고 도덕을 타락시키려는 것" 이라고 결론 내렸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혹은 괴벨스가 나중에 말하는 것처럼 '마르크스주의와 증권거래소'는 공통의 목표를 따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그 모든 민족적 지배를 완벽하게 쓸어내고, 모든 경제를 오직 하나의 지배에, 즉 유대인 증권 자본의 손아귀에 넣는것!" 이라는 것이다. 그는 1차 세계대전과 '바이마르 체제' 시기를 그 증거로 생각했다.
괴벨스는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가는 길은 우선 '국제 유대주의'의 헤게모니에 대항하여 싸우는 데 있다고 믿었다. 슈펭글러는 '문화'의 속된 물질주의적 종말의 시기인 '문명'으로 넘어가면서 서구의 몰락이 다가온다고 예언했지만, 괴벨스의 생각으로는 유대인의 '제거'로 그러한 몰락을 막을 수 있었다.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117~120p

2. 나치당에서 활약하다

"괴벨스는 의심할 바 없이 나치주의자들 중에서 가장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선전의 천재였다. 난 히틀러가 그를 만들었듯이 그가 히틀러를 만들었다고 확신한다" - 알베르트 슈페어

2.1. 라인란트 나치즘의 선구자

1924년 뮌헨에서 벌어진 나치당의 맥주홀 폭동이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지면서 괴벨스는 나치당과 히틀러에 대한 호감이 높아졌다. 전국구 전설급 재판에서의 웅변으로 메시아 가능성을 보여준 히틀러 때문이었다.[15] 결국 고교 동창이자 친구이며 후원자의 아들인 프리츠 프랑이 폭동으로 불법화된 나치당에서 일을 하던 인연으로 나치당에 빠져들었다.
[navertv(56014966)]
[다큐] 영상의 세기 PREMIUM 제18부 - 나치스(Nazis) · 광기의 집단中[16][17]

괴벨스는 초기엔 라인란트 지방에서 나치당 좌파의 우두머리 격이며 히틀러가 감방에 간 후 당의 행정일을 도맡던 그레고어 슈트라서 쪽으로 선이 닿는다. 당시 나치당 히틀러가 폭동을 계기로 얻은 유명세를 발판삼아 본거지인 뮌헨에서 북독일로 확장을 시도하고 있었는데, 당 내 행정가이던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이러한 배경으로 북독일의 도시 노동자 계층을 공략 중이었다. 괴벨스는 고향인 라인란트 지방 엘베펠트 관구에서 정당 일을 시작했고, 그 당시 많은 정당이 그러했듯 길거리 정치 연설 또는 선동은 시내 한복판에 연단을 차려놓고 올라가서 했다. 친구이자 나치당으로 괴벨스를 끌어들인 프리츠 프랑은 당시 괴벨스의 천부적인 첫 연설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첫 연설 무대에서 그는 쭈뼛쭈뼛 망설이며 올라섰다. 군중들도 많지 않았고 쳐다보는 사람 수는 더 적었다. (하지만) 막상 연설을 시작하자 지나가던 공산주의자 하나가 '닥쳐라, 이 자본가 놈아'라고 소리치며 방해했다. 그러자 괴벨스는 웃으며 그 사람을 크게 부르더니 지갑을 꺼내 "자~ 이리 와서 누가 더 돈이 많나 세봅시다" 하면서 자신의 낡은 지갑을 털어 쨍그랑 동전 몇 개가 전부인 걸 청중들에게 확인시켜주며 군중들을 휘어잡았다.

이외에도 북부 라인란트 지방 엘베펠트 관구[18]에서 본래 본업이던 언론계에 종사하여 글도 쓰기 시작한다. 나치당 초기 상황상 별다른 사상도 없이 승전국보다 더 미운 유대마르크스주의 하수인 놈들과 전쟁 틈에 돈을 번 벼락부자, 캐비아샴페인을 처드시는 높으신 나으리들, 그리고 혐오스런 유대인 공화국 체제를 공격하는 데만 급급한 괴벨스의 글은 다른 많고 많은 불평분자들의 것과 그리 차별성은 없는 내용이었지만, 타고난 독일어를 구사하는 능력과 박사라는 학력 때문에 좋게나 나쁘게나 튀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시대가 평온했다면 이러한 재능을 '진짜' 신문이나 잡지에서 시를 쓰거나 문학평론을 하면서 썼겠지만... 어쨌든 곧 지역 당 기관지의 거의 모든 글은 괴벨스에게서 나오게 되었으며 머지않아 그는 또한 편집장이 되었다. 보수는 듣보잡 군소정당 기관지답게 형편없었지만 뜻밖의 자아실현으로 괴벨스는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하지만 봉급이 너무 적어서 부모를 비롯한 지인들에게 여기저기 돈을 꾸러 다니는 신세였고, 명성이 높아지며 나치 중앙당 대회에 초청받았지만 나치당의 당대회에 갈 땐 기차표를 살 돈이 없어서 갈까말까 고민할 정도로 어려운 형편이었다고 한다. 막상 나치당의 소굴인 뮌헨은 폭동 실패로 일망타진된 데다가 당이 불법화까지 되었고, 남아있는 인물들도 구심점도 없고 괴벨스가 구역질 나게 싫어하는 부르주아나 높으신 분들이 아니면 듣보잡이라 체포를 면한 돌격대 떨거지들 뿐이었다.[19]

뮌헨의 나치중앙당에서 괴벨스를 수행하던 사람은 초기 당원들과 대면하는 괴벨스를 가리켜 '라인란트 나치즘의 선구자'라고 소개했다.[20]

2.2. 이 남자는 누구인가

괴벨스가 당 활동을 시작할 즈음인 1924년 12월 총선에서 나치당이 참여한 연합정당[21]은 듣보잡 지지율을 찍었다. 괴벨스는 당이 불법화되어 강제해산된 터라 입당하지 못한 상태였고 1924년 말 히틀러가 출소하고 1925년 초에 나치당이 재건되어서야 비로소 정식으로 입당한다.

괴벨스는 이해 3월 북부 라인란트 지방 엘베펠트 관구의 '사무장' 으로 취임한다. 괴벨스는 노동자 계층이 많은 북독일 공업지대에서도 과격한 선동으로 팬덤(...)을 늘려나가는 한편 당 내 과격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폭력이 난무하는 공산당 집회 깽판에도 직접 참가했다.

그레고어 슈트라서 패거리에선 '좌파' 성향으로 분류했던지 같이 일하라고 카를 카우프만이라는 당직자를 괴벨스에게 붙여주었고, 그래서 괴벨스는 당 내 두 분파주의 중 '민족주의, 사회주의 중 무엇이 우선이냐'의 논쟁에서 후자 편에 섰다.[22]

괴벨스는 나치즘과 독일의 적은 증권 자본주의라고 생각했다. 나치당 내 민족주의 우파 계열에선 노동자를 비롯한 모든 계층에 대해 마르크스주의를 제거하여 민족주의자로 만들고 그런 다음 사회주의를 하자라고 주장했던 반면, 괴벨스를 비롯한 사회주의 계열은 '그건 말도 안 된다. 노동자를 어떻게 갑자기 민족주의자가 되라고 설득하느냐? 먼저 부르주아들을 쳐 없애버리고 사회주의를 완성한 다음 초계급적 민족국가로 가야 된다'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런 사상은 엘베펠트 관구장 성향과 충돌을 빚었고 당에서 쫓겨날 위기에까지 몰렸다. 당 관구 내 괴벨스 반대자들은 괴벨스를 과격하다 하여 로베스피에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슈트라서의 비호로 반대파였던 관구장을 몰아냈고 괴벨스는 나치당 내 좌파 주요 인물로 떠올랐다. 하지만 곧 그는 히틀러를 만나게 된다.[23]
이 남자는 누구인가? 반은 인간이요 반은 신이다. 진정 그리스도인가? 아니면 세례 요한?
이 사람은 왕이 될 모든 덕목을 갖추었다. 타고난 민중의 보호자(호민관)요, 미래의 독재자[24]이다.
애초에 입당 전부터 히틀러 빠였다. 다만 히틀러의 저서인 나의 투쟁을 읽으면서 총통의 예지에 감탄했음에도 100% 히틀러의 주장에는 공감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나 인종론과 소련[25]에 대해선 이견이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믿기로 한 인류 역사상 최고의 천재 앞에서 그런 사소한 차이는 무시하기로 했다.

1925년 말과 1926년 초 두 번에 걸쳐 당강령이 지나치게 우편향이라는 의견을 모은 당 내 좌파들이 히틀러에게 노선 조정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고[26] 독일 제2제국 시절 군주와 영주들에 대한 토지보상에 반대하는 좌파들과 달리 '사유재산을 존중해야지'라고 말하는 입장이었다. 이에 괴벨스는 약간 실망을 표현했지만[27] 히틀러에 대한 충성심엔 변함이 없었다.[28]

당 내 행정가였던 그레고어 슈트라서도 히틀러에게 숙청돼서 특이하게 높은 평가를 받는 사람인데, 애초에 슈트라서도 당 초창기부터 히틀러의 당 내 최고 권위에는 훨씬 나중에 숙청 당하기 직전까지는 이견이 없었고 히틀러와 자신 사이의 주종관계를 자랑스러워 하는 사람이었다. 나치당 내 히틀러 반대세력이라는 것은 1920년대 초반에 히틀러가 완전히 당권을 장악하고 난 뒤로는 존재한 적이 없으며, '주류가 아닌 편'의 대표격이 그레고어 슈트라서라고 볼 수 있지만 그래봤자 애초에 주류와 히틀러의 총애를 두고 다투는 정도에 불과했다.[29]

외부에서 보기에 나치의 2인자라고도 불린 괴링이고 슈트라서고 간에 히틀러 앞에선 개장수 앞의 똥개마냥 아무 말도 못했다. 애초에 나치당은 2인자가 존재하지 않는 히틀러의 절대명령에 불만이 있으면 나가거나 쫓겨나거나 둘 중 하나였다. 거기다 당 내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전형적인 나치의 생각으론 토론이나 다수결은 유대인들이나 하는 것이었으므로 서로 자기들이 그분의 뜻과 가깝다고 정신승리하기 바빴고 당 내에서 피 터지게 싸워도 히틀러는 자기 권위만 침해하지 않으면 방관했다.

결국 당시 괴벨스도 일단 권력을 잡고 튀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실업자 시절 아무것도 못하는 처지보단 나았으며 자신의 자전적 소설 <미하엘>에서 표현한 대로 무엇을 믿느냐보다는 무엇인가를 믿는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했다. 하지만 본래 가진 사회주의 성향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다. 총통에 대한 믿음, 새로운 시대에 대한 열망으로 덮었을 뿐... 어쨌든 당강령 회의를 두고 뒤통수 맞았다고 생각한 슈트라서 패거리는 이때부터 괴벨스와 나치당 내에서 원수가 된다.
"괴벨스는 이제 히틀러의 사람이었다. 괴벨스는 히틀러가 벙커에서 숨을 거두는 그날까지 히틀러를 '아버지처럼' 모시면서 변치 않고 충성을 바쳤다. - 이언 커쇼

2.3. '붉은 베를린'으로 가다

히틀러와의 몇 번의 식사로 열렬한 추종자임을 각인시켜 충성심과 능력을 인정받은 괴벨스는 1926년 10월 말, 나치당의 새로운 거점지인 베를린-브란덴부르크 관구장으로 발령이 난다. 사상적 전향으로 본래 있던 고향인 엘베펠트 관구에선 찍힌 데다가, 인구 400만의 수도 베를린을 맡게 된 점이 괴벨스의 흥미를 돋웠다. 나치당은 바이에른 출신 지역구 듣보잡 군소정당에 불과했기 때문에 아직까지 '붉은 베를린'[30]에서는 당세가 미약했다. 베를린 관구장으로의 승진은 한편으로는 도전이었다.

사실 베를린 나치당에선 당원이 500명에 돌격대(SA) 병력[31]은 280명에 불과했다. 반면 역사와 전통의 정당 독일 사회민주당(SPD)은 베를린 시의회에서 제1당이었고 공산당은 제3당이었으므로 둘을 합친 좌파진영은 과반이었다. 물론 공산당은 사민당을 박멸대상으로 보았고, 사민당도 공산당을 폭도들이라고 멸시했기에[32] 두 당의 사이는 개차반이었고, 이 점만큼은 나치에게 유리했다. 즉 공산당은 '사민당 한 놈만 패'였고 나치당은 공산당을 잡고 물고 늘어지는 구도였다.

베를린과 북독일에서 세력이 컸던[33] 공산당 입장에선 나치당이 워낙에 듣보잡이라 그냥 무시하는 와중이었다. 그들은 나치가 성장하고 나서도 극우 폭력배들은 독점자본의 앞잡이(강철군화)이지 진짜 은 아니라는 이론에 바탕한 교조적인 판단을 했다. 오히려 공산당 정치깡패는 화끈하게 길거리에서 붙을 때는 붙는 거고 같이 혁명드립치는 나치당 돌격대에 오히려 다른 정당의 높으신 분들과 달리 친근함을 느꼈다. 이는 두 조직 다 인적 구성이 이념 성향보다는 사회가 불우하던 시절 밑바닥 계층이 유입된 데서 비롯한다. 실제로 상부의 이념적 성향은 극과 극이나 하층 조직의 인적 교류나 스카웃은 서로 활발했으며 이후 여러 사건을 두고 공산당과 나치당에서 인적 이동이 이뤄지기도 했다.

여하튼 당시 베를린 뒷골목을 장악한 건 공산당 깡패들이었고 나치당 베를린 관구는 용감하고 주제넘게 공산당을 흡수할 전략을 세우긴 했어도 돈도 없고 사람도 없어 그야말로 답이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서먹해진 슈트라서 패거리가 버티고 있는 상황[34]에서 히틀러의 신임을 받고 있다지만 낙하산으로 다리나 절고 29살이나 된 장애인이 들어왔으니 누가 보더라도 괴벨스의 앞날은 밝아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괴벨스가 훗날에 악명을 떨치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히틀러에게서 받은 전권을 활용해 오자마자 슈트라서 패거리의 견제를 위해서 베를린 돌격대(SA)장을 부관구장으로 임명하고 돌격대 조직을 정비한다. 타고난 연설 실력을 바탕으로 젊고 불만 많은 패거리들을 끌어들였는데, 그 중에는 훗날 유명해지는 호르스트 베셀도 있었다.

당시 독일 내 최대 정치 깡패 조직은 50만에 달하는 우익 계열의 철모단[35]이었고, 무슨무슨 결사대니 의용대니 하는 다른 우익 무장집단들에 하다못해 온건좌파 사민당 계열 '흑적금 국기단'[36]도 있었지만 참전자 출신 아저씨들이 주축이어서 전투력이 떨어졌다. 그래서 젊은 패거리들이 많은 공산당의 전투력이 가장 막강했는데 이 공산당보다 나이가 더 젊은 조직 깡패가 나치당 돌격대였다. 훗날 제3제국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애국 청년' 호르스트 베셀이 괴벨스의 연설에 감격해 입당할 때의 나이가 19세였을 정도다.

천하의 괴벨스도 돌격대 패거리 관리엔 애로사항이 많았는데, 공산당과 싸우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들끼리도 툭하면 싸웠다. 무엇보다 이념 성향이 희박해서 나치당이나 당 밖에서나 자타가 인정하는 '주정뱅이 난봉꾼' 집단이었다. 하지만 괴벨스는 돌격대 집단을 정비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교육과 정치 성향을 주입시켰다. 깡패집단에게 주먹질, 쇠파이프 난동을 애국 행위로 포장하고 곧 다가올 제3제국의 '귀족'이 될 거라고 희망을 주었다.

공산당 집회에 나가서 깽판을 치거나 소수 모임을 덮쳐서 두들겨 패거나 하는 식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나치당 세가 워낙 비교도 안되게 밀렸기에 한계가 있었다. 괴벨스는 집회시에도 히틀러가 뮌헨에서 썼던 수법으로 빨간 문구나 상징으로 낚아서 공산당 성향 불평분자들을 꼬셔와 강제로 참석시키고 경찰이 가까운 데서 집회를 열었고 이후 대대적으로 도발하거나 소수의 돌격대를 집중시켜서 시가행진할 때 공산당 조직의 행동 반경을 노리거나 파악해서 전투에 유리한 국면을 만들었다. 정치깡패들 규모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나치당의 세가 약할 때라 공산당 패거리에 역관광 당할 때도 많았는데 단상에 올라서 연설할 때 돌멩이가 날아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노려보는 괴벨스에게 '키 작고 머리 큰 박사가 용감하다\'라는 평이 돌기 시작했다.

2.4. 나치당 베를린 관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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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시절 초기.

1926년 말 베를린-브란덴부르크 관구장으로 임명된 괴벨스는 그 뒤 관구가 베를린 관구와 브란덴부르크 관구로 둘로 갈라진 뒤에도 계속 베를린 관구장으로 남아, 후에 나치당이 정권을 잡으면서 출세하고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 자살할 때까지 계속 그 직책을 맡았다. 베를린 시절 활약상은 괴벨스의 나치당 활약 가운데서도 가장 빛나고 공이 큰 사항이다.[37] 이 시기 이미 괴벨스는 히틀러에 이어 나치당 내 최고 연설가였다. 그리고 나치당의 세가 미미했던 북독일 지역과 베를린에서 나치당이 차츰 성장할 수 있었던 데에 괴벨스의 공이 큰 것은 명백했다.

처음에는 듣보잡 인지도와 당 지지도를 띄워보는 데에 집중했고, 그게 효과를 보면서 한 달에 100명씩 새로 당원이 입당해, 몇 달 사이에 당원 수가 두 배가 될 정도로 당이 성장했다. 어차피 이 정도로는 여전히 세가 부족했기 때문에 괴벨스는 히틀러에게 요청해서 베를린에 자체 신문을 내기로 결정한다. 이는 그레고어 슈트라서가 베를린의 캄프 출판사에서 베를리너 아르바이터차이퉁(Berliner Arbeiterzeitung/베를린인 노동자 신문)이라는 지역 당 기관지를 이미 만들고 있었는데다가 베를린에선 당시 130여 개의 신문들이 난립하던 상황이라 무모해보일 수도 있었지만, 괴벨스는 히틀러의 빽을 믿고 한번 저질러본다.

2.4.1. '공격(Der Angriff)' 지

때마침 신문이 아니면 다른 활동도 못할 처지도 되었다. 사건의 원인은 1927년 5월, 재향군인회관에서 집회하던 도중에 괴벨스의 인종드립에 비아냥거리던 중년 남성을 돌격대 깡패들이 두들겨 패는 일이 발생한 것이었다. 알고 보니 군인회관에서 나왔던 이 사람이 1차대전 때 군종 목사로 복무해서 높으신 분들과 인맥이 있는 '목사님'이었던 것. 백주대낮에 공공기관 앞에서 하던 집회라 정치경찰[38]이 깔려서 은폐는 불가능했고 이를 빌미로 베를린 경찰청에서는 나치당과 나치당 조직(돌격대, 친위대 등)의 활동을 금지했으며, 괴벨스가 연설하는 것까지 금지한다.

괴벨스는 여기서 새로운 선전 기법을 선보였는데, 자신이 처음 시도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공격(Der Angriff) 지'의 발행 전에 티저(Teaser) 광고를 썼다. 발행을 앞두고 7월 1일부터 광고를 뿌렸는데 붉은색 바탕에 큰 물음표를 그리고 하단 문구에 '공격은 7월 4일 시작된다\'라고 쓴 광고물과 광고판을 제작해서 시내에 뿌리고 들고 다녔다. 사람들은 막상 7월 4일에 되어서 히틀러 유겐트 꼬맹이들이 신문을 팔고 다니기 시작해서야 이게 나치당 신문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참신한 광고 수법과 달리, 초기 '공격' 의 내용이나 판매는 영 시원찮았지만 괴벨스는 판매 부수를 끌어들이고 영향력을 키울 떡밥을 마련했다. 20년간 괴벨스를 먹여살린 유대인 드립이다. 당시 수도 베를린의 부경찰청장[39]은 베른하르트 바이스(Bernhard Weiß)로, 그는 법학 박사이며 유대계 자본가 집안 출신으로 좌파도 아닌 우파 부르주아 정당 당원이었다. 하지만 얼굴이 당시 유대인들 외모의 고정관념대로 작은 키, 뿔테 안경에 작은 눈, 검은 머리, 매부리코 생김새로 인종 드립으로 공격하기엔 안성맞춤의 외모였다. 바이스를 공격하는 단어는 당시 동유럽계 유대인들이 많이 쓰던 이름인 '이지도르(Isidore)'였는데 공산당 신문 '적기'에서[40] 바이스를 공격할 때 먼저 쓴 단어로 괴벨스가 원조는 아니었지만 화력을 바이스에게만 집중하면서 '공격' 지 내용 대부분이 이지도르 바이스를 공격하는 데 할애되었다.
"우리는 부패한 베를린이나 마르크스주의에 물든 바이마르 체제를 말하지 않는다. 아니다! 우리는 단지 '이지도르 바이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1929년 <공격>

여기에 외모만 보고도 조상 중에 유대인이 있는지 없는지 척척 알아본다고 자부하는 반유대주의자 한스 슈바이처가 바이스의 캐리커쳐를 그리면서 인기를 끌었으며, 당시 출간된 만평과 그림을 모은 '이지도르에 관한 책(한 해 뒤 출간)'과 두 해 뒤 나온 속편 '이지도르에 관한 새 책'이 발간될 지경이었다. 입에 착착 달라붙는 이지도르 드립은 당시 대자본으로 유대인 기업으로 선언된 어느 한 대기업을 '이지도르 파벤'으로 공격하는 데도 쓰였다.[41]

2.4.2. 고소왕, 고발왕

당연히 괴벨스는 베른하르트 바이스에게 고소를 먹었다. 이후 1932년 말까지 바이스에게서만 17건의 민·형사상 고소고발을 당했다. 바이스뿐만 아니라 연설에서 여러 정관계 높으신 분들을 씹어댄 대가로 수십 건의 고소, 고발 크리가 이어졌다. 죄목으로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계급적·인종적 증오선동, 상해선동, 폭력교사, 모욕, 명예훼손, 허위사실 유포 등으로 다양했다. 더군다나 베를린 경찰 부총수를 씹어대서 베를린 경찰들은 괴벨스의 허물을 찾으려고 갖은 노력을 다 했고 그 결과 다음과 같은 기소 내용도 있었다.

한편 괴벨스는 다른 기소된 내용에 대해서 자신과 나치의 인지도를 올리고 체제 자체를 욕보이려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등으로 대응했으며 다른 정치인들을 씹어댄 내용은 별 근거 없이 '프로이센 주지사 오토 브라운은 폴란드 유태인 랍비 누구한테 뇌물 받아먹었네', '철모단 뒤스터베르크는 알고 보니 조상이 유대인이라 카더라' 식이었다. 한번은 밤베르크 지역에서 남자아이가 실종된 사건에 대해 '어느 종교단체[42]를 조사하면 범인을 쉽게 찾을 것'이란 논평을 냈다가도 유대인 단체에 또 고소를 당했다.

이렇게 베를린 관구장 초기 시절부터 나치가 집권하기 전까지 연루된 각종 민사, 형사(!) 재판이 끊일 날이 없었다. 그나마 대부분의 재판은 무죄나 경미한 벌금형이 나왔다. 물론 괴벨스는 유대인 판사가 아니었으면 죄다 무죄였을 거라고 정신승리했으며, 그나마도 선고받은 벌금은 최소한의 금액을 할부로 납부하는 꼼수로 바이마르 사법 체제를 조롱했고 이를 정치적으로도 자랑스레 선전했다. 이렇게 고발당하면 정신승리와 사법모독으로 일관했으며 혼란스런 정국에 남발되는 정치적 사면으로 벌금을 납부한 실적도 드물었지만, 이런 연속된 소송 과정은 괴벨스를 시간적이나 금전적으로 지치게 하기엔 충분했다.

그러나 1928년 5월의 총선거를 앞두고 괴벨스의 연설과 나치당, 돌격대에 대해 내려진 금지령이 해제된 것이 전환점이 되었다.

2.4.3. 면책특권자, 무임승차자 - 의원 당선

우리는 의회 따위와는 관계가 없다.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이를 거부한다. 그리고 당당하게 표현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나는 독일의회 구성원이 아니다. 면책특권 보유자이자 무임승차권 보유자이다.
면책특권 보유자는 '바이마르 체제' 를 모욕하고 공화국은 월 750마르크의 봉급으로 답례한다.
- 1929년 <공격>

1928년 5월 20일에 시행된 전국 총선거 결과, 괴벨스는 독일의회 의원이 되었다. 의원이 된 것보다 의원 면책 특권으로 재판과 고소크리에서 벗어나고[43] 이전과 비교되지 않는 높은 사회적 지위와 안정된 수입이 괴벨스를 기쁘게 한 것 같다. 이로서 '유대인 언론'과 정관계 높으신 분들을 상대할 무기가 하나 더 생겨났으며, 여기저기서 돈을 빌리고 부모에게 손 벌리던 것이 불과 몇 년 전이었던 걸 감안하면 내심 개인적으로도 출세가 반갑지 않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때 나치당 득표율은 최악이어서, 1928년에 당의 득표는 1924년 12월 총선의 3% 득표율보다 더 떨어진 2.6%였다. 더불어 괴벨스의 관할인 베를린 선거구에서는 1.5% 득표율를 찍는 처참한 지지도였다. 다만 군소정당에 지나치게 유리하게 잘 보장된 바이마르 체제의 비례대표제 선거법 덕에 당당히 원내 제9당인 나치당도 12석(전체의석의 2.44%)을 건질 수는 있었다.[44] 12명 중에서 뮌헨 맥주집 폭동 멤버들인 이른바 '노전사'가 아닌 사람은 괴벨스가 유일했다. (다른 의원들의 면모는 헤르만 괴링, 그레고어 슈트라서, 빌헬름 프리크 등 나치당의 거물들이었다.)

나치당은 전국에서 선거를 말아먹었지만 괴벨스의 관할인 베를린의 한심한 득표율을 두고 슈트라서 패거리들의 공격이 이어진다. '뛰어난 두뇌' 운운하면서 구체적으로 이름을 말하진 않았지만 '그 때문에 망했다'고 지역 당 기관지에서 신랄하게 비판을 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근소하게 괴벨스의 손을 들어준다. 나치당 선전국장 직을 괴벨스에게 주고 선전국장이던 그레고어 슈트라서를 조직국장으로 이임시켰던 것. 대신 슈트라서파를 달래기 위해 베를린에서 브란덴부르크 관구를 분리하여 후자에 슈트라서의 수하를 임명한다. 이 조치는 괴벨스에게 나쁘지 않았다. 이로써 베를린에서 슈트라서의 '방해'를 더 이상 받지 않게 된 데다가, 선전국장으로 중앙당 내에서도 지위를 굳히고 몇 안 되는 나치당의 독일의회 의원까지 되면서 당의 거물로 떠오른 것. 선거 결과는 실망스러웠지만 괴벨스가 정비한 조직과 열성분자들의 수는 점점 늘어났고 몇 년 후 갑자기 나치당의 세가 늘어날 때 이 조직의 힘은 크게 발휘되었다.

괴벨스는 이때 따로 분리된 나치당 베를린 관구의 관구장 지위를 1945년 자살할 때까지 계속 유지한다.

2.4.4. 호르스트 베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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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의원이 되었지만 괴벨스가 하는 일은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나치당 의원들이 죄다 그러하듯이 괴벨스는 의정활동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45] 그의 본 무대인 거리 선동과 <공격>지의 발행은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신문이야 관구 사무장에게 일임한 후 간간히 논평이나 냈고, 괴벨스는 주 전공인 선동으로 공산당 이론가 선동가들과 힙합 래퍼들처럼 길거리에서 청중들 앞에서 공개 랩배틀을 벌이거나 코에이 삼국지서 설전하듯이 맞불 집회와 공개 토론으로 깔아뭉개는 아가리 배틀 능력을 과시했다. 정적들이 자신에게 붙인 '베를린 최고 악당' 이란 별명은 오히려 자랑스레 홍보용으로 쓰고 다녔다.

한편 이 시기 쯤에는 바이마르 공화국도 슬슬 막장테크를 타기 시작하는데, 직접적인 원인은 세계 대공황이었다. 1929년 10월의 미국 증시 붕괴 이전인 1928년 말부터 사실 전세계 실물 경기 지표는 꼴아박고 있었고, 독일도 거기서 예외가 아니었다. 경제난으로 인해 실업과 노사분규가 증가하여 마찰은 잦아졌고, 결국 1929년 5월 1일 노동절에는 공산당 폭동이 발생한다. 괴벨스는 이 폭동을 두고 이슈 선점에서 뒤쳐졌다며 처음에는 매우 안타까워했지만, 결과적으론 나치당에 매우 유리하게 상황이 전개됐다. 수도 베를린과 괴벨스의 고향 쪽 서부 독일 노이쾰른 지역에서 폭동 진압 시도에 대해 공산당 깡패들이 권총질을 하면서 저항했고, 이에 경찰들과 시가전이 발생해서 프로이센 경찰은 장갑차와 기관총까지 동원해서 진압해야 했던 것. 그 결과 공산당 폭도, 민간인과 경찰을 포함해 40여 명이 사망했고 수백 명이 부상당했으며, 공산당 깡패들 1,200명이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공산당 조직은 불법화되었고, 그 결과 조직을 잃은 공산당 깡패 중 상당수가 돌격대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미미하던 나치당 깡패 숫자가 이 일로 크게 보강되었고 공산당 금지령으로 길거리에서 나치당의 활약이 눈에 띄게 늘어나게 된다.

호르스트 베셀은 앞서 19세 때 괴벨스의 애국적 연설에 감격해서 나치당과 돌격대에 가입한 '전사'로 3년이 지난 후 돌격대 '소위'로 베를린 돌격대에서 일개 중대[46]를 이끌 정도로 성장했다. 일반적으로 사회 하층민 출신인 다른 돌격대원들과 달리 베셀의 출신 성분은 이질적이었다. '목사'의 아들에다가[47] 아비투어(대학입학 자격 시험)에 합격하고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48] 법과대학'에 입학한 인재로 나치당에서도 차기 지도자가 될 유망주로 일찌감치 선발, 중앙당에서 마련한 나치당 지도자 양성 캠프에도 보낼 정도였다.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공산당 깡패들을 박멸하는 데 앞장섰던 인물이었는데, 살해되기 며칠 전에도 소속 부대를 이끌고 공산당 깡패들을 습격해서 4명을 병원 실려갈 정도로 두들겨 팼었다. 그 결과 공산당 무장 깡패조직 '붉은전사동맹'의 척살 리스트 순위에 올라가게 된다.

때마침 베셀은 기거하던 집의 주인과 월세 문제로 갈등이 있었고, 죽은 남편이 공산당원이었던 집주인 여자는 공산당 패거리에게 손 좀 봐달라고 부탁했다. 의뢰를 받은 공산당원들은 노파의 남편이 비록 공산당원이었지만 그가 사망했을 때 교회 의식으로 장례를 치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아 처음에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나중에 손 봐줄 대상이 호르스트 베셀이라는 소리를 듣고는 얼씨구나하고 수락했다. 창녀 출신 애인과 방 안에 있던 베셀은 갑자기 쳐들어온 공산당 깡패들에게 머리에 총을 맞았고 공산당에선 이를 '나치당원 포주기둥서방 사이의 싸움'으로 위장, 폄하했지만 괴벨스는 이 사건을 기회로 삼는다.

호르스트 베셀 사건 몇 달 전에 젊은 나치당원이 죽은 상태로 발견된 적이 있었고, 당시 괴벨스는 이를 '공산주의자의 테러'로 지지자들을 선동하는 데 이용했지만 베를린 경찰의 조사 후 발표 사인은 '자살'이었고 따라서 선동은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 이때 괴벨스는 유대인 언론들의 모략 드립을 치면서 정신승리나 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공산당 조직에서는 범인들을 숨겨주려 했지만 공범 중 한 명이 도피 도중에 경찰에 체포되자 사건의 전모를 자백했으며, 그 결과 체포된 공산당원 겸 사창가 포주였던 알브레흐트 횔러[49]를 베셀의 애인이 남자친구를 쏜 범인이 맞다고 지목한 것. 어쨌든 백주대낮에 총기를 이용한 정치적 테러가 일어났고 나치당이 이 사건의 피해자였기 때문에 괴벨스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선동을 시작했고, 괴벨스가 유대인 언론이라 질타했던 주류 언론들도 이 사건을 비중 있게 다루기 시작했다.

호르스트 베셀은 긴 시간에 걸쳐 고통스럽게 죽어갔는데, 괴벨스는 <공격>지에서 베셀의 사투 과정을 생중계했다. 소뇌에 박힌 총알 때문에 얼굴이 일그러지고 고통스러워하는 장면을 괴벨스의 뛰어난 독일어 작문 실력으로 눈물콧물 쏟아내게 포장하고 공산당 살인마들을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패야 된다고 규탄했다. 한때 범인들을 실드쳤던 공산당 신문은 엄청난 역관광을 당해 여론의 질타까지 받아야 했고, 주류 언론에서도 사건을 비중 있게 다루었기 때문에 베셀을 '애국 청년'으로 포장하는 것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결국 베셀은 한 달 반의 사투 끝에 사망했고 장례식이 치러졌다. 이때 장례식엔 괴링과 괴벨스는 물론이고 독일의 전 황제 빌헬름 2세의 넷째 아들 아우구스트 빌헬름 황자까지 참가했다.[50] 장례식을 거의 국장급으로 치르려던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장례 행렬을 통해 공산당이 깽판을 칠 걸 예상하고 언론의 주목을 받은 김에 피해자 코스프레까지 저질렀다. 괴벨스는 베셀을 마치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 나올 만한 백치, 노동자, 창녀들 사이로 '스스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에 임한 그리스도와 같은 사회주의자요 이상주의적 공상가'라고 포장했다. 또한 순교자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가 전 독일에 10년 안에 울려 퍼질 것이라고 '예언'했다.

2.5. 급성장과 위기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의 망조는 확연했다. 1929년 베를린 시의회 선거에서는 바로 전해 총선보다 체제 절멸을 부르짖는 나치당 득표율이 4배 가까이 상승했고(1.5%→5.8%), 체제 전복을 노리는 공산당도 베를린 일부 구역에선 40%가 넘게 득표했다.[51] 또한 지방에서는 드디어 나치당이 듣보잡 수준을 탈피, 튀링겐 주에선 최초로 지방정부에서 장관을 내고 연정에도 참여하게 된다. 전국적으로도 지지도가 몇 배씩 껑충 뛰었다.

불과 2년 전 총선에서 듣보잡이었던 지지율 2.6% 정당에서 갑자기 이런 약진이 일어난 건 역시 경제위기 때문이었다. 실업자 수는 1930년에 300만 명을 돌파했고 나치 집권 전해인 1932년에는 600만을 넘어섰다. 그런데 이런 예상치 못한 급속도의 대중적 인기 팽창 와중에서 정작 나치당 내부 조직과 괴벨스 개인은 위기를 겪고 있었다.

당내 '좌파' 슈트라서 형제 패거리 중 동생인 오토가 '사회주의의 배신자' 괴벨스를 응징하려고 벼르고 있었고, 괴벨스 역시 히틀러가 합법 노선에 따라 세력을 확장하면서 괴링과 샤흐트의 중개로 구제국 기득권층이나 자본가들과 식사를 하러 다니는 것도 무력하게 지켜보아야 했다. 하지만 이전에도 경험이 있듯이 괴벨스는 이번에도 히틀러보다는 괴링이나 샤흐트를 비롯한 뮌헨의 높으신 분들이 당수를 잘못 보필한 거라고 비난했고 결합은 일시적일 거라고 정신승리했다.[52]

사회주의 노선 차이를 둔 오토 슈트라서의 반란은 쉽게 진압되었다. 히틀러한테 대들었다가 유대인식 사고에 물든 지식인 판정을 받으며 공개적으로 비난을 바가지로 퍼먹은 것. 오토는 평소의 장담과는 달리 '사회주의 동지'들을 규합하지 못했고, 오토 슈트라서의 형인 그레고어 슈트라서[53]는 힘없이 히틀러에게 변함없는 충성을 맹세했다. 결국 오토는 고립돼서 자기 패거리 수십 명만 이끌고 탈당하는 선에서 갈등은 매듭지어졌다. 이로써 나치당 내의 지루한 이념 논쟁은 끝났고 지도자 원리에 토를 달 사람은 더 이상 남지 않게 되었다. 나치당은 본래 당헌, 당규 따위보다 히틀러가 우선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완전히 히틀러의 '의지' 만이 나치당을 좌우할 수 있게 되었다.

이보다 괴벨스에게 더 현실적인 위협은 나치당 내 노선 변경에 따른 베를린 돌격대의 반발이었다. 나치당은 대중적인 인기가 더해지고 조직이 커짐에 따라 관료제적 조직화가 불가피했고, 그 동안 베르사유 체제와 유대인 공화국을 끝장낼 사회 혁명용으로 양병하던 돌격대는 약간씩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되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1930년 히틀러가 합법 노선을 선언하자 돌격대 내에서는 불만이 공공연히 터져나왔다. 괴벨스도 '합법성 만세! 구역질 난다!' 라고 일기에 적었지만 곧 순응한다. 하지만 괴벨스 혼자만의 능력으로는 주먹이 앞서는 깡패들의 과격함을 수습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사실 당시 나치당이 현실적으로 합법 노선을 펼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있었다. 나치당이 듣보잡 상태에서 벗어나자 프로이센 자유주 정부나 중앙정부 검찰은 라이프치히 연방(라이히) 법정에 나치당, 돌격대 조직과 그 지도부를 반란죄로 기소할 기회를 벼르고 있었다. 돌격대 외의 통제되지 못한 나치당 일부 조직의 탈선도 구실이 될 수 있을 만큼 위기였기 때문에 나치당은 합법성과 듣보잡 신세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괴벨스는 이런 흐름에 민감하게 적응한 반면, 시류에 뒤처진 나치당 내 '노전사'들은 차츰 숙청당하거나 힘없는 들러리 신세로 밀리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베를린 돌격대는 과거의 타도 대상이던 높으신 분들과 '반동 놈들'이 권력 냄새를 맡고 자꾸 나치당에 들어오면서 그동안 뒷골목에서 죽어라고 싸웠던 자신들은 당내 보조금이 밀리고, 국회의원 공천에서 밀리는 등 자칫 똥 치운 작대기 신세가 될까봐 우려했고, 결국 당과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폭동을 일으킬 준비까지 하게 된다. 특히 베를린을 비롯한 동부관구 돌격대 부지도자 발터 슈테네스는 아예 공공연히 중앙당에 반기를 들었다. 나치당 사무실을 습격하고 당원들을 감금하는 것도 모자라, 베를린을 비롯한 동북부 지역의 나치당 운영권을 아예 자신한테 전부 달라고 요구했다.

처음에 괴벨스는 돌격대원들에게 지원금을 더 퍼주고 좋게좋게 어물쩡 넘어가려고 했지만 사태는 계속 커졌다. 결국 당 내 분열에 대해 히스테리적인 발작까지 일으킬 정도로 격노한 히틀러의 엄명이 떨어지자 괴벨스는 이를 가차없이 진압한다. 돌격대의 불만은 노선 차이를 핑계로 댔지만 사실은 먹고사니즘이었는데, 높으신 분들의 영입으로 지갑이 두둑해진 중앙당이 좀 먹고 살 만해져서 뮌헨에 궁전을 매입하고 호화당사를 차려먹는 반면 돌격대의 하부조직 나부랭이들의 형편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던 현실적인 이유가 컸다. 히틀러는 돌격대를 개편하기로 한다. 먼저 돌아다니면서 목이 터져라 무조건적인 충성과 단결을 호소하는 한편 돌격대 대원의 나치당 가입을 의무화하고, 당비를 받아먹어서 원성이 자자했던 기존 돌격대장 페퍼 폰 잘로몬을 돌격대 대장에서 해임하고 스스로 돌격대의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이렇게 돌격대를 자신의 직속으로 만든 다음 히틀러는 돌격대의 실질적인 지휘권은 돌격대 참모장 에른스트 룀에게 위임한다.

여하간 이런 나치당의 위기와 상반되게, 1928년에 당원의 수는 10만 명을 돌파하고 1930년엔 2년 만에 그 두 배인 20만 명을 돌파한다. 1930년 초반에 나치당은 기존의 사회불만 세력들만 모인 당이 아닌, 일반 소시민들이 주류인 당이 되어서 '공무원 당(특히 교사[54] 출신이 많았다)' 소리를 듣게 될 정도였다.[55]

시대가 변하고 있었다. 베를린 뒷골목에서 목이 터져라 선동하고 나무곤봉, 쇠파이프를 휘둘러도 관심이 없던 대중들이 나치당에 시선을 보내왔다. 이러한 변화는 괴벨스도 예상치 못한 뜻밖의 결과였다. 괴벨스가 존경해 마지않는 불세출의 위대하신 천재께서는 이때 허풍으로 '2년이나 늦어도 3년 안에 정권을 잡을 것이다'고 제법 작두 타는 듯한 큰 소리를 쳤다.

2.6. 나치당 선전국장

앞서 히틀러의 신임 덕에 베를린 관구장에 이어 나치당 중앙 선전국장 직위도 차지한 괴벨스는[56] 집권 과정에서, 특히 선거에서 유감없이 선전 선동 능력을 과시한다. 선전국은 나치당 다른 조직과 달리 돌격대처럼 히틀러 직속이었다. 덕분에 괴벨스는 나치당 내 어느 누구의 간섭 없이 돈을 펑펑 써대고 자신이 구상한 선전 기법과 아이디어를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었다. 타고난 두뇌와 말빨과 깡으로 무장한 데다가 히틀러가 완장까지 채워주니 괴벨스에겐 이제 거칠 것이 없었다.

2.6.1. 카게무샤

나치당 중앙 선전국장 직위에 오른 괴벨스는 자신의 목소리를 담당할 사람을 하나 징발했다. 그가 '한스 프리체'로 단지 괴벨스와 목소리가 같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치당 중앙 선전국의 성우로 채용되었다. 괴벨스는 연설문을 프리체에게 써줬고 프리체는 이를 읽는 일을 담당했다. 그냥 읽는 것이 아니라 마치 괴벨스가 직접 말하는 것처럼 괴벨스의 말투까지 똑같이 해서 읽어야 했는데 진짜 성우와 똑같은 일을 한 것이다.

2.6.2. 합법 투쟁?

인간 폐물은 쫓아내자! 그들의 낯짝에서 가면을 벗겨내라! 그들의 모가지를 붙잡아라!
9월 14일에 그들의 기름 낀 배때기를 밟아주자! 그리고 영광의 빗자루로 쓸어서 그들의 사원으로 쫓아보내자!
- 1930년 나치당 선거 구호 -

이렇게 매우 저렴하신 문구에도 불구하고 때가 때인 만큼 오히려 가려운 데를 긁어준 것처럼 나치와 히틀러의 인기는 점점 올라갔다. 그 동안 경쟁자인 공산당이 도시 노동자들 상대로 계급이니 투쟁이니 자본이니 마르크스주의니 하던 너무 어려운 소리보다 나치당처럼 짧지만 강렬한, 욕설처럼 시원한 문구가 더 큰 효과를 발휘했던 것.

기존 지지층은 물론이고 경제불황으로 알거지가 된 소시민, 연금생활자, 외교적으로 나약한 정부에 질려있던 지식인들까지도 나치가 가진 단순함에 이끌렸다. 특히 당시 지식인 중에서도 대학생들조차 나치즘이 대세였다. 어린 시절 제2제국의 화려함을 보았던 세대가 대학에 들어가면서, 대학 나와도 실업자 테크 당첨인 시대가 되니 과격함에 물드는 건 어쩔 수 없기도 했다.

한편 정치 성향이 쉽게 변하지 않는 보수적인 농촌 사람들은 선동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이해하긴 어려웠지만 '정부에서 세금만 왕창 뜯어가고 지들끼리 돈을 흥청망청 써댄다'는 소리에는 누구나 고개를 끄덕끄덕했고 '도시 사람들 빵값을 싸게 만들려고 농산물값 똥값 만들었다'는 일부 사실에 부합하는 선동에는 분개했다. 무엇보다 나치는 실업과 전근대적 농장의 농업 생산성의 두 문제를 동시에 타개하기 위해 실업자들을 생산성 떨어지는 농장들에 보내면서 이 농장들을 통폐합하거나 불하한다는 정부의 구상에 대해 '농촌에 볼셰비즘을 몰고 온다' 라는 선동으로 맞섰고, 전세계 어디서든 땅 뺏어간단 말 나도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내 땅!' 하며 게거품을 물 농민들에겐 이런 선동이 제법 약발이 먹혔다.[57] 도시지역 노동자 계층에 집중적으로 투자해서 이들을 먼저 지지층으로 만든다는 괴벨스의 초기 구상과 달리, 북독일 농촌 지역이 나치당의 표밭이 되었다.

물론 패전국으로 영국, 프랑스 등 승전국들을 상대로 배상금이나 물어대는 굴욕외교에 대해 '유대인과 손 잡고 나라를 팔아먹었다, 국제유대인 자본의 항구적 노예전락...'이라고 하는 드립은 나치당이 아닌 다른 극우 정당들도 입 아프게 하던 말이었지만, 비슷한 말을 한다고 해도 정리되고 규율 잡히고 제복을 갖춰 입는 나치당은 혼란한 시기일수록 그 인기가 높아졌다. 기존의 듣보잡 시절에도 했던 선전이지만 북 치고 나팔 불고 행진하는 돌격대와 나치당의 행렬이 제법 규모가 불어나면서 사람들은 약장수서커스단을 보는 것처럼 '뭔진 잘 몰라도' 신기한 구경거리인 양 자꾸 나치당에 몰려들었다.

2.6.3. 첫 선거 승리

1930년에 의회가 해산된 후 벌어진 총선에서 괴벨스의 실력은 드디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괴벨스는 전국 방방곡곡을 돌면서 한밤중에 차를 타고 열차를 타고 또는 전용 특별기를 타고 이동하고 먹고 자며 하루에 여러 번의 대중 집회를 '목이 터져라' 해댔다. 이전에는 베를린 뒷골목에서 노동자와 빈민들 사이에서 선동질을 주로 했지만 선전국장이 되고 나서는 품위있고 고귀하신 부르주아 청중들 앞에서도 연설을 하게 되었다. 이 당시 괴벨스는 나치당에서 히틀러에 버금가는 연설가로 이곳저곳에서 서로 모셔가려고 요청이 많았다. 바쁜 와중에도 의회가 해산 중이란 점을 잊지 않고 몇 번이고 재판 불출석을 이유로 체포당하는 것을 면하러 재판장에 홍길동처럼 신출귀몰하는 건 덤이었다.

총선 결과, 원내 제9당, 의석수 12석에 불과했던 나치당은 무려 107석(득표율 18.25%)을 얻으며 일약 원내 제2당으로 올라선다.[58] 희망적으로 예측해서 7%로 40여 석, 잘하면 9%로 50석을 얻을 것으로 내다봤던 수치를 크게 넘어섰던 것. 시대는 괴벨스의 편이었다.
당에서는 선거 결과에 모두 경악했고 히틀러는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 괴벨스의 일기
감옥에서 나온 히틀러는 나치당을 재건하고 당권을 굳건히 했지만 나치당은 집권 가능성이 거의 없는 작은 정당에 불과했다. 1928년 5월에 치러진 제국의회 선거에서도 나치당은 2.6퍼센트의 득표율로 참패했다. 하지만 대공황이라는 위기가 찾아왔다. 경제가 바닥으로 내려앉으면서 민주주의에 불만을 품은 국민들은 가장 급진적인 주장을 하는 나치당에 호감을 품게 되었다. 1930년 9월에 치러진 총선거에서 나치당은 18.3퍼센트라는 놀라운 득표율로 제2당으로 부상했다.

당시의 정치 체제를 뒤집어엎으려는 유권자의 의지도 작용했지만 무엇보다도 경제난에 대한 불만이 폭발했다는 점에서〈프랑크푸르터 차이퉁〉이 “울분의 선거”라고 부르기도 한 그 선거는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 어디까지나 들러리였고 정치 협상에서는 고려 대상도 아니었던 나치당이 어느새 태풍의 핵으로 떠올랐다. 선거 전에는 나치당 하면 대뜸 정신병원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았다고 블랑크는 씁쓸하게 말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 히틀러에 대해서 사람들은 중립적이거나 초연한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드물었다. 하지만 히틀러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이제 히틀러는 모든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는 고려해야 할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더는 무시할 수가 없었다.
- 히틀러 1권 9장 권력 의지(485~486쪽)

행운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07명으로 불어난 면책특권자들이 의회에서 돌격대 제복을 입고 개판을 쳐대니 안 그래도 개판 5분전인 국정은 마비되다시피 했다.[59] 원내1당 사회민주당과 제3당 공산당은 자유주의 우파 하인리히 브뤼닝 정부에 적대적이었기에 브뤼닝 정부에서는 반대급부로 나치당에 상대적으로 유화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러면서 브뤼닝의 중앙정부와 프로이센 주 정부의 사이는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 버프로 온갖 고소고발 재판에선 '국회의원 괴벨스 박사께서는 국사로 바쁘시기 때문에 정적들이 제기한 하찮은 재판 따위에는 참석할 시간이 없다!', '재판부에 유대인이 있기 때문에 유죄를 확신한다!' 이런 식의 법정모독성 개드립을 치고도 대부분의 고발 사건들은 무죄나 가벼운 벌금형으로 끝나버렸다. '이지도르' 드립으로 기소된 재판에서는 질질 끌다가 결국에 징역 2개월을 선고받았지만 이마저 차일피일 미루다 나중에 사면받는 바람에 실제로 형을 살지도 않았다. 이후 아내가 되는 마그다는 이 시기부터 만나기 시작한다.

실업자가 길거리 투쟁가로, 다시 국회의원이자 원내 제2당의 당직으로 출세하였지만, 행동은 좀처럼 상스러운 짓에서 벗어나지 못한 괴벨스였다. 특히 때마침 할리우드판 '서부 전선 이상 없다'[60]를 자칭 애국보수 알프레트 후겐베르크 소유의 우파(UFA 우니베르줌 필름 주식회사) 영화사에서 수입하여 상영했을 땐 돌격대를 이끌고 를 풀고 악취탄을 터뜨리면서 깽판을 쳤다. 유대인으로 의심되는 관객들은 두들겨팼다.

한편 돌격대와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이에 괴벨스는 1931년 3월 폭죽, 화약가루, 성냥 등이 약간 들은 테러 편지를 받은 후 특유의 선동력으로 이를 대서특필, 위기 상황인 양 선전하며 돌격대의 불만을 무마하였다.

1931년 여름이 되면서 경제위기는 괴벨스의 바람대로 점점 심화되어 시중 은행이 몇 개가 지급불능을 선언했고, 모든 증권시장, 은행, 저축금고들이 잠정적으로 폐쇄되었다. 이에 편승해 마침 철모단(당시 최대 우익 용병단. 후겐베르크가 후원)이 바이마르 체제와 민주제를 끝장내려고 프로이센주 의회 해산을 요구했는데 체제를 끝장낸다는 소리에 나치당과 공산당이 함께 참여했다.[61]

이런 위기 속에 프로이센 주 총리인 사민당 출신의 오토 브라운[62]은 비교적 정확하게 정세를 인식했다. 공산당과 나치당에 쌍으로 금지령 철퇴를 내리고 모든 신문에 사회민주당 정부의 이러한 정책을 담은 포고령을 강제로 게재시켰다. 안 할 경우 정간이나 폐간크리로 대응하겠다고 위협했다. 여기서 괴벨스는 '금전적 이유로' <공격>지의 정간을 막기 위해 바이마르 체제에 굴복하는 굴욕을 맛보게 된다. 이와 반대로 공산당은 이러한 조치에 반발하며 경찰 간부들을 권총으로 살해하고 민간인들 사이에서 테러를 벌였고, 결국 점차 여론은 공산당에게는 적대적으로, 나치당에게는 호의적으로 변한다. 사회민주당 수뇌부까지 '공화국의 가장 심각한 위협은 공산당'이라고 여길 정도였다. '길거리에서 공산깡패들의 패악질을 막을 수 있는 건 나치당밖에 없다'라는 인식이 퍼지게 되었고, 공산당은 이전처럼 나치당을 듣보잡으로 더 이상 보지 않고 자신들의 투쟁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기 때문에 베를린을 비롯한 바이마르 전역에서 정치적 폭력은 날로 심해졌다.

11월에 나치당은 하르츠부르크 전선이라고 범우파 계열이 뭉쳐서 '영 안(Young Plan)'[63]에 반대하는 국민투쟁에 참가했다. 이 전선은 철모단과 구 제국 기득권층이 중심이 되고 여기에 배상금에 반대하는 신흥 자본가들까지 참여했는데, 믿었던 '그분' 히틀러가 꼴통 반동 세력들과 손을 잡은 것은 괴벨스를 당황스럽게 했다. 괴벨스에게 이들은 평소에 자신이 신랄하게 비난했던 '빌어처먹게 고귀하신 귀족 나으리, 비곗덩어리 자유주의자, 증권시장 하이에나, 돈 자루 독재 금권정치인'들로 괴벨스가 발행해 만든 나치당 전단지에서 '머리통이 모래 위를 구르게 될 것' 이라고 위협한 타도 대상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괴벨스는 이번에도 지도자의 예지를 믿고 반동들과의 동맹은 일시적일 거라고 스스로 '히뽕'을 듬뿍 먹었다.

연말에는 마그다와 결혼했다. 평소의 괴벨스의 인종 드립과 심히 상반되는 괴벨스의 외모를 비꼬아서 정적들은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그의 부인은 '순수한 아리아인 혈통'임에 의심할 바 없지만 이지도르 괴벨스 씨가 도대체 여기에 적절한 짝인지 모르겠다' 라며 비아냥거렸다. 한편 마그다는 괴벨스보다 더 열렬한 히틀러 추종자였다. 히틀러가 중앙정계로 뛰어들며 베를린 체류 횟수가 많아지자 그녀는 그를 괴벨스의 집에 자주 '모시면서' 눈도장을 받는다. 이런 내조 덕에 괴벨스는 히틀러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으며 나치당 내에서 그의 입지는 더욱 확고해진다.

2.6.4. 히틀러의 대통령 출마(1932년 대선)

히틀러와 나치당이 '반동'들과의 협상과 연합이 가능했던 건 어디까지나 선거 결과 때문이었다. 1930년 일약 듣보잡에서 원내 제2당으로 뛰어올랐고 나치 집권도 멀어보이지 않았기 때문. 때마침 1932년은 선거의 해였다. 대통령 선거와 프로이센주를 비롯한 지방선거가 예정되었던 것.

여기서 괴벨스의 눈부신 활약이 이어진다. 먼저 3월의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라고 히틀러를 부추긴 건 괴벨스였다. 그동안 하찮은 바이마르 체제를 위해 일하기 싫어서 출마 자체를 안 하던 히틀러를 부추겼고[64], 히틀러도 괴벨스의 꼬임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심사숙고한 끝에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로 결정한다. 대통령 선거의 상대는 독일의 '영웅' 파울 폰 힌덴부르크로 네임밸류 차이가 심하게 났다. 힌덴부르크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프리드리히 대왕처럼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이었는데다가 연배도 여든이 넘었고 제국이 몰락하고 얼마 되지 않은 보수적인 사회에서 선출된 '황제' 역할을 하는 대통령이었다. 물론 괴벨스는 그런 걸 따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직접적으로 힌덴부르크를 씹어대기 시작한다.
그대를 떠받는 자가 누구인지 알려주고 그대가 누구인지 말해주겠다!
힌덴부르크는 베를린의 유대인 신문들의 지지를 받고 탈영병의 정당의 칭송을 받는다.

하지만 말이 나오자마자 괴벨스는 국가원수 모독으로 연설을 중단당하고, 나치당 의원들의 기립박수를 받으면서도 의사당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선거전에서 히틀러는 보수층 지지자들을 의식해서
우리는 예전에 충성과 복종으로 육군 원수(힌덴부르크) 밑에서 복무했다. 이제 우리는 그에게 말하려 한다.
그대 뒤에 우리가 절멸시키려는 자들이 숨어있습니다. 이를 그대로 용인하기엔 그대는 너무 위대합니다. 이제 그대는 물러나야 합니다.

라고 다소 품위있게 디스를 했지만. '방구석 군인(군 면제자)' 출신 괴벨스는 육군원수 출신 현직 대통령을 상대로 거침없이 '노쇠하고 무능력한 허약자', '전쟁에서 패배한 자', '마르크스주의와 예수회[65] 교도의 하수인' 드립을 치는 원색적 비난을 퍼부었다[66]. 유대인 하수인 드립치면서 노인네 물러나라고 막말한 것.

물론 선거전에서 디스질만 하면서 다닌 건 아니었다. 이전까지 노동자 계층을 상대로 베를린 뒷골목에서 공산당과 누가 더 뻘짓 잘하나로 지지받으며 자웅을 가리던 시절은 지났다고 보고 힌덴부르크의 원래 지지층인 부르주아들을 새로운 표밭으로 삼은 것. 가톨릭 교도들은 중앙당에 묻지마 몰빵 투표하는 성향이 있는 콘크리트 지지층인데다가 나치당이 반가톨릭 성향을 가졌으니 나치당을 지지해줄 리가 없었고, 계급적 투표 성향을 보이는 노동자 계층 좌파 지지자들은 괴벨스가 열변을 토해봐야 별 효력이 없었다.

괴벨스는 1930년 총선처럼 전국 각지를 비행기와 열차를 타고 다니면서 하루종일 연설에 연설을 거듭했다. 또 지금의 선거에서야 당연하지만 '전단지를 뿌린 만큼 표가 된다'라는 지론으로 돈을 아끼지 않고 50만 부씩 삐라를 찍어서 뿌리고 다녔다. 연설 내용을 레코드판으로 만들어서 다닌 건 전에 사민당이 먼저 했던 방법이지만 그걸 배워서 가장 잘 활용한 건 괴벨스였다. 레코드판을 편지봉투에 넣을 정도로 작게 만들어서 여러 곳에 뿌리고 10분 정도짜리 유성영화를 만들어서 전국 각지 극장에 뿌렸다. 영화 시작 전이나 중간중간에 히틀러가 나와서 연설하는 장면이 방송되었고 이러한 효과로 '전국 어디에서라도 히틀러가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었다.

이런 노력에도 아직 역부족이라, 3월 13일의 1차 투표는 49.6% 대 30.1%로 큰 차이로 졌지만 4월 10일의 2차 결선 투표에선 53.4% 대 36.8%으로 선전한다. 1차 투표에서 13.2%를 득표했던 공산당 에른스트 텔만의 득표율은 2차 투표는 10.2%로 줄어들었고 1차투표에서 8%를 얻은 뒤스터베르크(철모단, 후겐베르크 후원)는 2차에서 출마를 포기했는데[67] 뒤스터베르크의 표는 절반 이상, 텔만의 이탈표 3%P는 대부분 히틀러에게 가는(!) 성공을 거두었다.[68] 실제로 후겐베르크의 후원을 받던 뒤스터베르크의 선거에서의 몰락에는 괴벨스가 상당한 역할을 했다. 뒤스터베르크의 철모단은 나치당과 유사하게 반유대주의로 무장한 준군사조직 출신 정당이었는데, 나치당은 뒤스터베르크의 가계를 캐내어서 뒤스터베르크의 조부가 유대인이었던 사실을 밝혀냈고[69], 괴벨스가 이를 마구 까발려댔던 것이다. 이 때문에 히틀러와 비슷한 득표 수준을 보일 것이라 예상되었던 뒤스터베르크의 지지율은 폭락했고 철모단의 전통 지지층인 극우 세력은 히틀러와 나치당 주위에 결집하는 결과가 일어났고, 뒤스터베르크는 참담한 1차 투표 결과를 받아든 뒤 출마를 포기한 것이다.

힌덴부르크를 이기긴 어려운 싸움이었지만 히틀러가 대선에서 양자 대결로 만들면서 이제 누구도 히틀러나 나치가 독일의 가장 유력한 정치인[70]임을 부인하지 못하게 되었다. 물론 괴벨스가 가장 큰 공신인 건 말할 것도 없고...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2주 만에 프로이센 주를 비롯한 여러 지방선거에서 또 압승(프로이센에서 36.3%를 득표하며 제 1당)했고, 그 중 조그만 지방이긴 하지만 올덴부르크 주 지방 선거에서는 처음으로 단독 과반수를 확보하는 데도 성공한다. 그리고...

2.7. 선거, 선거... 그리고 혼란

적들은 하찮은 벌레들이다.
- 1932년 히틀러
나치는 선전 활동에 최대한의 역량을 쏟아 부었다. 1932년에는 다섯 번의 선거를 치렀는데, 그 중 첫 번째가 독일 대통령 선거였다. 나치는 독일 전역에서 현란하고 화려하게 꾸민 집회, 행진, 대회를 동시다발적으로 열면서 파상 공세를 퍼부었다. 히틀러도 독일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니면서 평소처럼 연설에 온 정열을 쏟아 부었다. 열하루 동안 모두 열두 곳 도시를 돌면서 수많은 군중 앞에서 연설을 했다.

나치는 새로운 선전술을 동원했다. 히틀러는 미국에서 하는 것처럼 비행기 한 대를 빌려서 "독일을 굽어 살피는 지도자"라는 구호를 매달고서 첫 번째 ‘독일 비행’에 나섰다. 부활절 동안에는 정쟁을 멈추기로 합의했기 때문에 선거 운동을 할 수 있는 기간이 확 줄어들어 일 주일도 채 못 되었지만 도시와 도시를 비행기로 이동하면서 히틀러는 스무 군데도 넘는 곳에서 수많은 군중을 모아놓고 연설을 할 수 있었다. 히틀러의 연설을 들은 청중은 100만 명에 육박했다. 돋보이는 선거 운동이 아닐 수 없었다. 독일에서 이제까지 그런 식으로 선거 운동을 한 후보는 없었다. 이번에는 나치 진영도 실망하지 않았다. 힌덴부르크가 53퍼센트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히틀러는 37퍼센트로 지지율을 끌어올렸다. 그저 낯 부끄럽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기대 이상의 성적을 낸 것이다. 1차 선거보다 무려 2백만 명이나 많은 1천3백만 명이 히틀러를 찍었다. 나치가 선동을 통해 만들어낸 상품이라고 볼 수 있는 지도자 숭배는 한때는 소수 광신도의 전유물이었지만 이제는 독일 국민의 3분의 1에게 먹혀들었다.
- 히틀러 1권 9장 권력 의지(524~525)

이제부터 복잡한 정치상황이 펼쳐지는데 선거에서 나치당의 힘을 확인한 높으신 분들 사이에서 분열이 시작된다. 앞서 브뤼닝 정부가 나치당이 건설적인 야당 역할을 할 것을 기대했으나 물 건너 간 적이 있었고 선거가 끝나자마자 사회민주당 프로이센 주 정부 경찰[71]과 국방부장관 겸 내무장관 대리 빌헬름 그뢰너 장군이 합심하여 나치당과 돌격대의 폭력적인 활동을 금지하자 그동안 나치당을 무솔리니 흉내나 내는 똘마니 쯤으로 여기던 집권 보수층이 크게 반발했다.

그뢰너는 국방장관의 금지령에 탁월한 인적 자원의 제거에 반대하는[72] 민족주의 우파 그룹에게 신나게 까이기 시작했다. 더불어 나치당 의원들에게 날이면 날마다 국회에 끌려나가 아무런 실드도 못 받고 하루종일 욕설과 호통 비아냥을 받아가며 가루가 되도록 까인다. 원래 있던 지병인 당뇨병까지 겹쳐서 직무수행이 어려울 정도였다.

이때 쿠르트 폰 슐라이허라는 정치군인이 본격적으로 나선다. 슐라이허 장군은 당시 국방부 장관 직속의 정무국장[73]으로 상관인 그뢰너 장관을 아버지처럼 모시며 라인을 타서 승승장구, 국방부에서 바이마르 공화국 기간동안 군부와 정ㆍ관계의 실력자로 떠올랐던 인물이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과도 젊은 시절 연대장과 첫 임관 소위로 배치될 때부터 인연이 있었고 힌덴부르크의 아들 오스카르 대령과도 절친 사이였다. 음모와 책략에 능해서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강한 영향력을 끼쳤으며 1930년 사민당 뮐러 내각이 무너지고 대통령 비상대권으로 브뤼닝 총리를 추천한 것도 슐라이허였다. 슐라이허 장군은 전형적인 군국주의자로 힌덴부르크 노인처럼 황제에게 충성한 것도 아니었고 프로이센 군부 전통의 '정치적으로 나서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의 꽉 막힌 사람도 아니었다. 제2제국이 몰락하고 나서 '군부가 나라에 수동적으로 충성하기보단 여느 정파나 정치체제에도 불구하고 군의 기능은 국가가 쓰러지지 않도록 균형추 역할을 하면서 민족과 국익을 수호해야 한다' 라고 생각하는 순수한 군국주의자였다.[74] 그런 그가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먼저 부르주아 언론에서는 나치당이 브뤼닝 총리의 가톨릭중앙당과 연정이 임박했다는 추측 보도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괴벨스의 숙적 그레고어 슈트라서가 국회 연설에서 브뤼닝의 경제정책에 화답하는 내용의 경기부양책을 연설하고 브뤼닝도 긍정적으로 검토한다는 보도가 이미 나왔기 때문이었다. 괴벨스는 반동들과의 연정이라는 더러운 협잡질을 절대 거부해야 된다고 생각했고 돌격대도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다만 이 떡밥이 풀릴 만도 한 게 히틀러는 아무런 시인과 부인도 하지 않은 채 낚시질이나 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당시 인기가 떨어진 브뤼닝 내각의 똥을 치워줄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정권에 참여할 생각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정권을 자기 위주로 잡아야 된다고 생각했을 뿐.

마침 슐라이허 장군은 은밀히 나치에 접근해와서 군부의 생각은 내각과 국방장관과 다르다며 새로운 내각이 들어선다면 지지할 수 있는지를 물어봤다. 히틀러는 '돌격대 금지령 해제와 의회 해산 후 새로운 총선' 을 요구했고 두 가지 조건은 힌덴부르크에 받아들여진다. 이를 확인한 슐라이허는 상관인 그뢰너 장군에게 군부는 더 이상 그뢰너 장군의 노선을 지지하지 않는다며 뒤통수를 치고 힌덴부르크에게 직접 내각 총리와 국방장관의 해임 건의를 했다.[75] 그리하여 슐라이허가 직접 국방장관으로 나서며 내각을 조각한다. 자신의 베프인 프란츠 폰 파펜이라는 듣보잡을 비롯해 각료 11명 중 7명이 Von 자가 들어가는 대통령 친위내각 성격의 이른바 '남작님 내각' 이 들어선 것.(7명을 제외한 2명은 재벌 회장에 한 명은 현역 군인인 슐라이허 장군 자신이었다)

유감스럽게도 괴벨스는 '반동'들과의 협상에서 높으신 분들과 서로가 껄끄럽고 혐오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나설 기회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협상 중에 걸림돌이나 안되면 다행이었다.

슐라이허 장군과 신임 파펜 총리는 약속대로 새로운 총선을 7월 말로 잡고 의회를 해산시켜 버린다. 돌격대 금지령 해제로 기가 오른 돌격대들이 난리를 치고 다니고[76] 선거 달인 7월에는 하루 수십 건씩 정치적 테러와 살인이 벌어졌고 이것을 구실로 프로이센 주 정부를 강제로 해산하고 중앙정부 직속으로 돌린다. 이 과정에서 '이지도르' 모욕 사건으로 원수 사이였던 베를린 경찰청 부청장 베른하르트 바이스도 룬트슈테트 장군에게 체포당하며 괴벨스를 환호하게 만들었다.
"서로 두들겨 패고 총을 쏘고 있다. 이 정권의 마지막 구경거리." -괴벨스의 일기

선거 결과는 대성공이라 608석 중 230석을 나치당이 차지하며(37.3%) 당당히 원내 제1당으로 등극, 1920년 이후 바이마르 시대 정당 중 역대 최대 득표율을 기록한다. 하지만 상승세는 대통령선거와 지방선거와 비교해 현격히 둔화되고 있었고 몇 달 전 지방선거에서 50% 가까이 득표한 지방이 나왔던 것과 달리 전국 단위의 단독 과반수 확보는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거듭되는 선거로 나치당 조직의 여력이나 자금은 물론 지지자들의 인내심도 바닥나고 있었다. 괴벨스는 선거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정권 확보는 시급하다! 상승세가 꺾이기 시작하면 지지자들은 급속도로 무너질 것이라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우리는 쥐꼬리만큼 이겼을 뿐이다. 이제는 권력을 잡고 어떤 식으로든 마르크스주의를 끝장내야 한다. 이대로는 안된다." -괴벨스의 일기

8월에 의회가 개원하고 협상이 열렸는데 히틀러는 앞서의 약속을 번복하고 총리와 여러 핵심 장관직을 요구하며 사실상 전권을 달라고 요구했고, 파펜과 슐라이허는 히틀러를 달래보려 했지만 히틀러에게 총리직 요구는 이미 여러번 시도해서 이제는 단순한 협상 조건이 아닌 명예의 문제였기 때문에 괴벨스의 바람대로 타협은 없었다. 히틀러는 8월 13일 슐라이허와 파펜과 만난 마지막 담판에서 또다시 전권 요구를 했고 이어서 힌덴부르크의 면담까지 거쳤다. '보헤미안 상병(히틀러)'에 대한 판단은 2년 전의 체신부(우체국) 장관 정도에서 '부총리'로 올라갔지만 부총리는 헌법상 아무 권한도 없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바지 직책으로 이를 알고 있는 히틀러가 거부하여 별다른 소득 없이 물러난다.

같은 날 슐레지엔 지방에서 '포템파 사건'이라 불리는 정치적 테러가 일어났는데 돌격대원 5명이 폴란드 공산주의자 청년의 집으로 쳐들어가 가족이 보는 앞에서 말 그대로 '밟아 죽였다'. 이 사건은 정치적 폭력 사태가 터져나오는 가운데 파펜 총리가 정치적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하고 신속한 재판과 사형을 선고한다고 방송한 지 몇 시간 만에 터진 사건이라 5명 모두에게 사형이 선고되었고 반면 포고령에 해당 안되는 사회민주당 계열 정치깡패 국기단의 테러는 솜방망이로 처벌을 받았다. 나치당은 이에 들고 일어난다. 살인자를 공개적으로 비호하는 히틀러나 나치들보다 한 술 더 떠서 괴벨스는 유대적이고 마르크스주의적인, 이 세상의 적 자체를 공격하려는 의도로 <공격>지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유대인이 유죄다.

마치 몇 달 후 시작되는 제3제국 내내 벌어질 사건들을 예고하는 말이었다.[77]

또한 의회에선 정권 타도를 외치며 국회의장 괴링[78]이 공산당과 손잡고 파펜 내각을 압도적인 표차로 내각 불신임해버리고 막장이 된 정치 상황 속에 의회는 해산한다. 사실 파펜이 먼저 해산권을 준비하고 혼자 다해먹으려다가 선수를 친 괴링에게 당한 것이다. 그래서 절차상 문제의 하자로 잠시 내각은 유지되었지만 사실상 사형 선고를 받았다.

2.8. 승리

우리는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정치인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길 것이다. 혹은 가장 악랄한 범죄자로.
-괴벨스의 일기에서-
선거전을 앞두고 괴벨스는 사고를 터뜨린다. 11월 베를린 시에서 예산 부족으로 시에서 운영하는 운송회사의 임금을 내리는 조치에 노조가 반발하여 파업을 시작하자 베를린 돌격대와 공산당이 손을 잡고 동맹파업에 참가한다.

히틀러는 웬일로 괴벨스와 오랜 시간 동안 통화한 끝에 '우리가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면 사회주의도 노동자정당(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도 아닐 것이다' 라며 지지했다. 돌격대원들과 붉은 전사동맹 깡패들은 나란히 완장을 차고 파업에 참여하지 않는 반동들을 때려잡고 버스와 전차를 때려부쉈다. 돌격대원은 유대인으로 의심되는 승객들까지 두들겨 팼다. 얼마 전까지 유럽 문명의 파괴자요 모스크바발 붉은 역병을 절멸시키자던 나치들이 벌인 이런 꼴 사나운 행태에 많은 시민들이 발길을 돌렸으며 주요 언론에서도 '볼셰비즘이 우파 진영에도 깊이 잠입했다' 며 깊이 탄식할 지경이었다.[79]
"이제는 히틀러가 연설을 해도 유세장이 꽉 차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히틀러가 아무리 유세를 다녀도 나치 지지도의 급락을 막지 못하리라 예상했다, 괴벨스도 선거 전날 나치의 패배를 점쳤다" -이언 커쇼

결국 11월 재선거는 말아먹었다. 괴벨스는 노동자 계층에서 지지도가 올랐다며 '몇 천표 정도 잃는 것은 괜찮다'라며 정신승리했지만 실제 선거 결과는 200만 표를 까먹으며 지지도는 33%로 4% 이상 깎이고 의석수도 34석이나 줄었다. 선거가 너무 자주 열리자 질린 탓도 있고 '나치당에게 바이마르 체제를 '절멸'시키라고 표를 줬더니 기존 정치인들과 똑같이 자리다툼이나 한다'라는 실망스런 의견도 많았다. 어쨌든 정권을 코 앞에 두고 나치당은 몰락 위기에 봉착했다. 거듭된 선거로 돈은 빠져나가고 상승세는 꺾이고 정권 탈취는 요원했다. 40만 돌격대를 먹여 살리려면 한 주에 나치당서 250만 마르크씩 빠져나가는데 돈이 없어서 돌격대 대원들이 앵벌이를 하고 다니는 지경이었다. 상황이 이러니 지지자, 당원들, 돌격대 모두가 내린 결론은 '이제 더 이상의 선거는 안 된다' 는 것이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나치당의 고위 5인 모임이 열린다. 히틀러, 괴링, 괴벨스, 프리크, 슈트라서가 모였다. 그러나 정권 장악에 대해서 이견이 생기는데 나치당 내 의원 원로인 프리크는 '정권에 참여하지 않으면 의회가 또 해산되고 또 한 번 선거해야 되는데 의원들이 자기 의원직이 날아갈까봐 걱정한다'는 현실론을, 슈트라서는 '7월 선거 결과가 좋았는데 가장 유리할 때 참여할 기회를 놓쳤다. 이제라도 정권에 참여해야 한다'라는 유화론을 보인 반면 괴벨스는 여전히 '정권은 정복의 대상이지 협잡질로 발만 담궜다간 반동에 거부감 있는 나치 지지 세력들이 실망할 것이고 국정 책임을 나치가 지게 된다면 지지세도 사그라들 것' 이란 의견을 냈다. 괴링도 괴벨스와 비슷한 입장이었다. 결국 히틀러도 인생 자체가 도박질로 매번 판돈을 올리며 벼락 출세한 인간이라 그런지 역시 다소 불리해진 상황에서도 '모 아니면 도' 입장을 고수한다.

파펜 내각은 사퇴했지만 힌덴부르크를 조종하여 이번엔 음모가 슐라이허가 총리 겸 국방장관 겸 프로이센 경찰청장직으로 1932년 12월 2일 취임하여 직접 내각을 운영했다. 그러나 역시 현직 육군 중장 출신 총리는 의회 내에서 지지세력으로 의원 한 명도 없었다. 그나마 파펜은 후겐베르크라도 있었지만 진짜 군인이 일선에 나선 비정상적인 내각은 아무것도 없었다. 역시나 의회 개원하면 또 불신임을 면하기 어려웠다. 음모가 신임 총리 슐라이허 장군은 승부수를 던지는데, 나치당에 지지 요청 훼이크를 보내며 나치 지도부 중 정권에 참여하도록 설득이 가능하다고 판단한 슈트라서와 뜻을 같이 하자고 몰래 제안한다. 슐라이허는 부총리직과 노동부 장관직을 슈트라서에게 제시하면 대략 나치당 의원 중에 60석은 슈트라서를 따라서 나와 자신을 지지해 줄 것으로 예상했지만...

히틀러의 격노를 슈트라서가 버틸 수가 없었다.

슐라이허의 바람과는 달리 그레고어 슈트라서 딴에는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나간 나치당이 깨지는 것까지는 원치 않았고 히틀러와의 오래된 '주종관계'를 청산하는 대신 몇 년 동안 쌓인 불만들을 적어 히틀러에 보내며 '독일을 한 번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정권을 탈취한다는 발상에는 도저히 찬성할 수가 없다' 라고 소신을 밝힌 뒤 '근본 없이 막돼먹은 놈(괴벨스), 암퇘지(에른스트 룀동성애자란 걸 비꼼), 독일이야 어찌되건 자기 잇속만 채우는 이기주의자(괴링)' 들을 성토하고 모든 당직과 의원직을 사퇴한 채 이탈리아로 훌쩍 떠나버렸는데 이를 슈트라서 사태라고 한다. 슈트라서 사태가 일어나자 나치당은 내분이 일어나기도 했고, 나치당의 최대의 위기라는 표현까지 나오는 수준이었다, 그러자 히틀러는 당 간부들 앞에서 "만약 당이 깨진다면 나는 3분 안에 죽어버릴 것이다."라면서 자살쇼를 벌였다. 그러자 당 간부들을 깜짝 놀랐고 히틀러 앞에서 당을 분열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게 된다, 이 멜로드라마와 같은 행동이 나치당 간부들 사이에서 슈트라서가 불러일으켰을지도 모르는 동요들을 잠재웠고, 그들 모두는 이구동성으로 히틀러에 대한 충성을 다시 한번 맹세하게 되었다.[80]

그렇게 급한 불은 일단 껐지만 상황은 갈수록 나치당에 불리하게 돌아갔고, 나치당이 망하는 것은 시간 문제라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이러한 시각은 동시대의 영국의 지식인 해럴드 래스키가 한 말에서 잘 드러난다. "만약 나치당이 지금처럼만 간다면, 늙은 히틀러가 바이에른의 시골 촌구석에 처박혀서 저녁이면 저녁마다 맥줏집에서 한때는 내가 독일을 뒤집어엎을 뻔했다라는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들려주면서 생을 마감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할 정도였다. 이렇게 나치당의 위기로 몰아넣은 슈트라서에 화가 난 괴벨스는 당 내에 심각한 내분을 일으킨 슈트라서를 그냥 아예 쫒아가서 파묻어 버리자고 히틀러를 충동질하지만 당 내 분란이 알려지길 원치 않던 히틀러는 일단 덮어놓는다.[81] 몇 년 동안 나치 내에서 물고 뜯던 숙적이 몰락하고 나자 괴벨스에게 당 내 방송 업무라는 전리품이 떨어진다.[82] 물론 몇 달 후엔 더 큰 선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과거 음모의 대가 슐라이허 총리는 막상 멍석 깔아놓으니 형편없는 솜씨로 쓸데없이 그레고어 슈트라서를 날려버렸고 인기를 높이고자 찾아간 노동조합, 농민단체, 기업인단체에 돌아가며 볶인 탓에 상충되는 약속을 카드 돌려막기 식으로 일단 지르고 보았다.[83] 노조 쪽에선 역시 사민당이 꽉 잡고 있어서 비협조적이었고 농민단체와 군부 등에는 나치들이 깊숙히 침투해서 슐라이허가 뻘짓하는 것을 손바닥 보듯 다 알고 있었으며 나치당이 일부러 더 들볶으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한편 부르주아 신문에서는 이미 마무리된 '반란' 사건을 두고 나치당이 내분이 일어났다고 뒤늦게야 뒷북이나 치고 있었다.

슐라이허가 한때 친구인 파펜이 나치와 접촉하며 자신을 구원한다고 착각하는 사이 슐라이허의 획책에 총리직을 잃었기 때문에 앙심을 품은 파펜과 나치당의 사이는 점점 가까워져서 힌덴부르크는 히틀러 총리, 파펜 부총리라는 안에 합의를 해버렸고, 결국 바이마르의 마지막 내각인 슐라이허 내각은 취임 57일만에 날아갔다.[84] 기타 자세한 권력 내막은 프란츠 폰 파펜, 파울 폰 힌덴부르크 문서 참조.

결국 1933년 1월 30일, 나치 정권이 탄생한다.

3. 국민계몽선전부 장관

3.1. 베를린의 정복자

나치 정권의 탄생과 함께 괴벨스는 베를린의 정복자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높으신 분들이 보기엔 천박하게 딴따라질이나 하고 주정뱅이 난봉꾼들과 어울리던 자였기에 내각에 참여하는 건 그들의 거센 반대로 무산되었다. 괴벨스는 용감하게도 힌덴부르크를 하도 욕하고 다녀서 본의 아니게 정권 탄생을 늦춘 공이 있었다. 결국 새로운 정권에서 괴벨스가 언제쯤 공식 직위를 가지고 활약할 수 있을지 그 여부는 불투명해 보였다.

1월 30일에 히틀러가 수상으로 취임하자마자 공화국 체제를 합법적이며 최종적으로 절멸하기 위한 수권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새로운 총선거가 벌어졌고 물론 이 마지막 선거에서도 괴벨스의 활약이 이어진다. 현 정부에서 각료도 아니고 직책도 없는 괴벨스가 제멋대로 선거일인 3월 4일을 민족 각성의 날로 선포한 가운데, 때마침 2월 27일에 마리뉘스 판데르뤼버라는 정신병자의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이 터졌다.[85] 이 사건 직후 '공산 혁명이 임박했다'는 구실로 괴링이 프로이센 경찰을 동원해 공산주의자들을 때려잡기 시작했고 정부에선 별다른 조사 없이 '볼셰비즘이 저지른 역사상 가장 극악한 테러'라는 발표로 힘을 실어준 데다가 히틀러와 대통령 힌덴부르크를 한 배에 탄 것처럼 같이 묶어서 선거 운동까지 했기 때문에 선거는 순조로웠다.

3.2. 취임

자, 트럼펫 연주자도 이제 무엇인가 돼야겠지!
-1933년 3월 14일,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괴벨스의 장관 임명 서류에 서명을 하며-

1933년 총선 선거유세에서 괴벨스는 힌덴부르크를 '탁월하고 영웅적 인물!', '존경스럽고 지칠 줄 모르는 민족의 지도자', '백전백승의 독일군 원수' 라고 아첨을 떨어댔고 이에 안 그래도 날이 갈수록 히틀러의 정국 운영에 매우 만족한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옛 원한을 잊고 선심을 쓴다. 물론 자칭 전직 화가 북치기 선동꾼 보헤미안 상병[86]에 비하면 나팔수 '박사님'이야 자격이 넘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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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병과 원수의 악수.

장관 감투에 대한 화답으로 괴벨스는 선거 후 3월 21일을 '민족 봉기의 날'로 선포하고 원래 나치당 행사로 꾸미려던 데서 계획을 변경, 힌덴부르크와 히틀러의 역사적인 악수 사진이 나온 행사를 만들어버렸다. 포츠담 상수시 궁전에서의 엄숙한 의식은 나치당 돌격대원 장례식으로 다져진 행사 전문가인 괴벨스에게는 주 전공이나 다름없었다. 이 행사는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을 화해로 마무리짓고, 새로운 독일의 출발이라는 민족적인 감동을 일으켰다'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꽤 호평을 받는다.

히틀러 정권에서 새로 만든 국민계몽선전부(Reichsministerium für Volksaufklärung und Propaganda) 조직은 베를린과 나치당 선전부에서 고대로 인원을 Ctrl+C, Ctrl+V한 조직이었고 괴벨스도 이를 부인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하게 "이 부서는 정부에서 월급을 받아먹는 나치당의 조직이다!"라고 선언했다. 나치당의 깡패 이미지와는 별개로 초기 350여 명의 선전부 조직은 대졸자들이 절반이 넘었고 박사 학위자들도 상당했다. 100여 명은 황금당원 뱃지[87] 보유자로 열성분자에 대부분이 30세 이하로 나치당의 다른 조직보다도 훨씬 젊었다. 괴벨스의 오른팔이자 차관인 전직 교사 출신 카를 한케는 29살에 불과했을 정도.

괴벨스는 부서 명칭에 대해서 불만이 많았는데, 선전(propaganda)은 누가 보더라도 오해할 소지가 넘쳐났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선전'이란 단어에서 풍기는 세뇌의 거부감과 선전 수단의 '천박함'이 원인이었다. 괴벨스가 원한 부서의 이름은 선전 대신 문화나 교육이었다[88]. 하지만 문화나 교육을 몽땅 통째로 괴벨스에게 맡기는 건 안 그래도 나치당 내 완장 차고 싶어 줄 선 많은 사람들의 반발도 거셌고, 히틀러도 1인에게 권력을 몰빵하는 걸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괴벨스는 지금까지도 악명을 떨치는 나치의 국민계몽선전부 장관이 되었다.

어쨌든, 부모에게 손 벌리던 '가련한 아이'가 10년 만에 장관이 되었다. 괴벨스의 나이가 불과 35세일 때였다.

3.3. 부처 관할권 확대 병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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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탄생한 국민계몽선전부는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부서 설치 법령에서 '관할권은 총리에게 위임한다'라고 되어 있었고 정작 총리인 히틀러는 자신의 추종자들이 충성만 다하면 다른 건 아무 관심이 없었다. 이런 상황은 그 동안 베를린 뒷골목에서 길바닥 정치 투쟁이나 하던 괴벨스의 권력욕을 자극했고, 더구나 계몽이나 선전이니 하는 것은 어디 어느 분야에건 밥숟가락을 쑤셔넣기 편리한 용어였다. 다른 나치당 권력 경쟁자[89]들도 마찬가지였다. 조직 키우기 레이스에서 '질 수 없었던' 괴벨스와 다른 행정 부처와의 엄청난 마찰은 불가피했다.

괴벨스는 정책 홍보와 공공기관 관할을 두곤 빌헬름 프리크의 내무부와 가장 크게 충돌했고, 결국 발터 풍크[90]의 도움으로 제국 내무부의 '문화국'을 통째로 탈취하는 데 성공한다. 방송 분야는 비나치 관료인 체신부 장관이 알아서 기는 바람에 기술 쪽을 제외하고 가져가는 데 성공했다. 제국문화원 설치를 두고는 원래 나치당에서 '문화'를 담당하던 알프레드 로젠베르크와 충돌했고 특히 언론 분야에선 히틀러의 군대 시절 고참이자 나치 중앙당의 에어 출판사장을 맡던 막스 아만, 히틀러의 신임을 받던 오토 디트리히와 충돌했다. 괴벨스가 애초에 눈독을 들이던 분야인 제국학술교육국민교양부의 장관 베른하르트 루스트와의 충돌은 당연시되었으며, 해외 홍보를 두고는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 남작의 외무부와 나치당 해외공보국장인 한프슈탱글과도 충돌했고, 농업정책 홍보를 두고 식량농업부 장관 발터 다레와도 충돌했다. 노동 분야를 두곤 독일노동전선의 수장인 로베르트 라이와 권력다툼을 벌였고, 나중엔 전시 점령지 선전을 두고 육군 최고사령부(OKH)와도 충돌했다.

괴벨스의 권력욕을 억제했던 건 괴벨스의 표현대로라면 제복 입고 우쭐거리는 돼지놈이었는데, 그는 나치당에서 괴벨스보다 한 끝발 쎈 감투수집욕의 대가였는데다가 히틀러에 이어서 서열이나 권력이 괴벨스보다 위였기 때문에 자신의 관할 프로이센 주에서는 자신이 애용하던 국립극장과 극단의 양도를 거부하며 괴벨스의 체통에 금이 가게 만들었다. 괴벨스는 문화 부서의 일원화를 주장하며 괴링을 압박했지만 괴링은 콧방귀 뀌면서 이를 무시했고 히틀러는 그런 사소한 문제에 끼어들지 않았기에 괴벨스의 계획은 일부 좌절되었다. 한편 괴벨스에 제동을 건 다른 인물로 비나치관료 재무장관 슈베린 폰 크로지크 백작이 있었는데, 그는 나치 집권 초기 재무장을 앞두고 인력 예산 확보가 어렵다며 영화사의 국영화를 반대했지만 그나마도 얼마 안 가서 괴벨스에게 굴복해야 했다.

3.4. 유대인 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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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증오의 눈빛"(Eye of hatred)라고 불리는 사진. 1933년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 15차 총회에서 찍힌 사진이다.
국내와 해외를 막론하고 사진사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전해 들은 뒤 사진사를 노려보는 모습을 절묘하게 찍은 사진이라고 알려져 있지만[91] 그에 대한 근거는 없으며 괴벨스의 악명과 엮여 퍼진 거짓말로 추측된다.[92][93]

유대인 탄압은 나치 집권 후 비단 문화계 전반뿐만 아니라 각 사회 전체로 파급되어, 뉘른베르크 법이 제정되는 1935년도 되기 전인 1933년 집권 직후부터 시행되었다. 정책으로 시행되지 않아도 돌격대 깡패들이 족보를 어떻게 입수했는지 유대인 공무원이나 교수, 판사의 사무실에 몰려가서 '유대인 꺼져라' 소리지르며 난동을 부리고 개판을 쳐대면서 유대인 출신들은 독일 사회에서 점차 강제로 밀려나게 되었고, 탈(脫)유대화의 조치로 유대인 자본의 회사들에 대해 강제매각 명령이 떨어졌다. 문화계 또한 그 동안 총통 각하를 비롯한 나치 예술인들이 바이마르 시대 예술에 혐오감을 진작부터 드러내고 있었기에 총통 각하의 열렬할 추종자인 괴벨스가 문화계에 손을 대지 않을 리가 없었다.

새로운 '숙적' 알프레드 로젠베르크는 행동력도 없고 나치당 내에서 괴벨스에게 영향력도 밀리는 데다가 반기독교적 무신론자라서, 정권을 잡고 난 후 지지율이 떨어질 걸 우려한 히틀러가 멀리하기 시작한 인물이다. 공상주의적 이론가였던 로젠베르크가 나설수록 교회 세력의 반발과 함께 인기가 깎였기 때문에...[94]

괴벨스가 문화 쪽에 손을 대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제국문화원(저술, 언론, 방송, 연극, 음악, 영화, 미술 분과로 나뉘었다)이 설립되면서 문화계에서 활동하려면 문화원에 가입해야 되었는데, 물론 '아리아인'만 가능했다.

괴벨스의 전공 분야인 저술이나 언론, 방송은 그러려니하고 넘어가도 '전직 화가' 히틀러의 취향은 맞추기 어려워서 골수 나치당원인 화가들도 화풍이 유대적으로 물들었다고 판정되면 가입이 거부되었다.

파일:attachment/파울 요제프 괴벨스/photo2.jpg

한 번은 선전장관님의 저택이 공사를 마무리히고 개관식 겸 집들이 겸사겸사로 나치당 고위 인물들과 히틀러까지 초청해서 문을 열었는데, 히틀러가 집안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욕을 퍼붓고 황급히 차를 타고 돌아가버렸다. 다른 초대 인물들도 벙쪄서 밥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돌아가면서 선전장관 저택에서의 파티는 나가리가 되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히틀러가 화난 이유는 선전장관님의 저택이 공금을 빼돌려 사치스럽게 지었기 때문은 아니었고 제멋대로 국립미술관의 그림을 집안에 번듯히 걸어놓은 월권행위 때문도 아니었으며, 단지 선전장관 저택 건물 입구에 걸린 '에밀 놀데' 작품의 수채화가 천박해서였다니 괴벨스의 고충을 알 만하다. 괴벨스는 처음에 대학 시절 예술 쪽 강의를 몇 개 들은 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안목이 쓸 만하다고 여겼는데 히틀러의 기준으로 보나 '진짜' 미술 전문가의 기준으로 보나 영 수준 미달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유대인 화풍에 물든 작가들이 하루아침에 화풍이 바뀌었을 리가없지만 나치당 내 높으신 분들의 취향이 총통 각하의 취향으로 모두 바뀌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후에 다른 나치 관료였던 알베르트 슈페어는 회고록에서 자신은 그 당시 현대 미술은 괜찮게 봤지만 히틀러에게 호되게 혼날까봐 전향했다고도 진술했고... 괴링은 2차대전 때 무엄하게도 총통 각하와 미술품 약탈 경쟁까지 할 정도로 그림 덕후질을 하며 아리아 화풍에 물든 열렬한 문화인 인증을 했다.

괴벨스는 총통 각하의 고귀한 취향에 충성하기 위해서 '퇴폐미술 전시회'를 열었는데, 현대미술 작품 사이사이에 정신병원에서 병자들이 그린 그림을 그럴 듯하게 집어넣어서 누가 그렸는지 알아맞추기로 웃음거리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이 웃음거리로 전락한 그림들의 정체는 앞서 총통 각하를 격분시킨 에밀 놀데를 포함하여 페히슈타인[95], 프란츠 마르크, 모더-존베커, 바를라흐, 피카소, 칸딘스키, 키르히너, 코코슈카, 파이닝어, 로틀루프, 샤갈, 헤켈, 막스 베크만 등의 저작이 포함된 이른바 문화 볼셰비즘 작품들이었다. 전시회가 끝난 후 괴벨스는 이 중 1,000여 점은 외국에 팔아먹었고 나머지 5천여 점은 전쟁을 앞두고 베를린 소방서 앞에서 홀랑 태워먹는 반달리즘을 지휘했다.

음악 분야에서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를 독일 내에 눌러앉히느라 괴벨스가 고생 깨나 했다. 이 분야에서도 전문가급 되시는 총통 각하의 음악 취향은 매우 까다로워서 '바그너는 좋은데 브람스는 별로... 베토벤은 괜찮은데 슈트라우스는 별로...' 이런 식이라 총통 각하께서 군말 안하고 넘어가는 지휘자는 푸르트벵글러가 거의 유일했다. 푸르트벵글러를 비롯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파울 힌데미트 등을 무리하게 잡으려는 괴벨스와 이를 디스하는 새로운 앙숙 로젠베르크와 상호 디스와 열폭질이 고귀한 아리아인 문화와 대비되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괴벨스는 자신의 진짜 주 전공인 저술 분야에선 의외로 곤란한 처지에 처했는데, 그의 은사인 군돌프 교수와 발트베르크 교수가 유대인이라 괴벨스가 나서면 나설수록 셀프 패드립이 되는데다가 이러한 모순적인 모습에서 로젠베르크를 비롯한 정적들도 괴벨스에게 한 방 먹이려고 벼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 한 대학에서 유대인 혹은 유대적 작가와 유대주의에 물든 책들을 불태울 때 괴벨스의 연설을 요청했는데, 그는 일부러 확답을 질질 끌다가 행사 예정일 당일에야 연락을 취하고 연설을 수락한다. 나치에 의해 유대적으로 물든 작가로 선언된 문호 노벨상 수상자 토마스 만의 아들은 당시 행사에서 직접 괴벨스의 연설을 들었는데 의외로 차분하며 오히려 사람들을 진정시키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표현했다. 다른 분야면 몰라도 타들어가는 책 앞에서 자신의 생의 일부인 암울했던 젊은 시절을 부정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을 것이었다.
Als das Regime befahl,
Bücher mit schädlichem Wissen Öffentlich zu verbrennen,
und allenthalben Ochsen gezwungen wurden,
Karren mit Büchern Zu den Scheiterhaufen zu ziehen,
entdeckte Ein verjagter Dichter,
einer der besten,
die Liste der Verbrannten studierend, entsetzt,
daß seine Bücher vergessen waren.
Er eilte zum Schreibtisch Zornbeflügelt,
und schrieb einen Brief an die Machthaber.

Verbrennt mich!
schrieb er mit fliegender Feder,
verbrennt mich!
Tut mir das nicht an!
Laßt mich nicht übrig!
Habe ich nicht Immer die Wahrheit berichtet in meinen Büchern?
Und jetzt Werd ich von euch wie ein Lügner behandelt!
Ich befehle euch,
Verbrennt mich!
정권은 명령했다.
해로운 지식을 담고 있는 책들을 불사르라고,
사방에서 황소들이 책으로 뒤덮인 짐수레를 끌고 온다.
화톳불을 태우기 위해.
추방된 작가 한 사람이,
최고의 작가 중 한 사람이
불탄 책의 목록을 훑어보다가 충격을 받는다.
자기 책이 빠진 것을 알고 말이다.
작가는 분노의 날개로 황급히 책상으로 날아가.
권좌에 있는 이에게 편지를 썼다.

나를 태워라!
작가는 휘날리는 펜으로 썼다.
나를 태워라!
내 책은 언제나 진실을 전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해 다오!
나의 책을 남겨 놓지 말아다오!
나의 책들 속에서 언제나 나는 진실을 말하지 않았느냐?
헌데 이제 와서 너희들이 나를 거짓말쟁이처럼 취급한단 말이냐!
나는 너희들에게 명령한다.
나의 책을 불태워다오!
<분서(Die Buecherverbrennung)>, 베르톨트 브레히트, 1937년 8월[96]

한편 브레히트의 시 내용대로 브레히트의 작품은 전면 금지당하지 않았는데, 나치 이념이나 인종드립에 적절해서는 절대 아니었고 브레히트의 작품 배경이 대부분 독일이 아닌 데다가 대표작 <서 푼짜리 오페라(Die Dreigroschenoper)> 같은 작품은 근대 영국이 배경으로[97] 부르주아 금권정치 사회현실의 폐해를 잘 나타낸다는 의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극 분야에는 어느 분야보다 유대인 작가나 배우 비중이 높은 데다가 히틀러는 '연극이란 건 남의 흉내내기 급급한 유대인의 습성과 닮았다'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분야보다 타격이 컸다.

괴벨스가 악명을 드높이며 심혈을 기울인 언론 분야는 그가 직접 솜씨를 부렸는데, 괴벨스가 글쟁이 출신이라 잘 알듯이 '닭 모가지 하나 비틀 힘도 없는 작가'들이라도 그들의 글을 직접 건드리면 앞뒤 물불 안 가리고 반발할 것을 애초에 예상하고 검열 대신 세련된 보도지침을 내렸다. 이 당시 보도지침은 특정 사안을 아예 다루는 것을 금지하기보다는 특정 단어에 대해서 사용 자제를 권고하는 수준에서 시작되어 언론의 자유 드립을 치는 기자들의 반발이 생각보다 매우 적었으며, 경제적 이유를 생각해야 하는 언론사 사주들 입장에서도 단비 같은 조치였다. 이후 점점 다락방에 물이 차오르듯이 지침들이 세세해지고 특정 사항에 엠바고(돌격대 숙청 당시 도주자들의 성명을 보도하는 것을 체포에 방해된다는 이유 등으로 통제)나 국익을 위한 외교정책 또는 군축이나 재무장 같은 사항에선 기자들도 국민 감정상 협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공산당이나 사회민주당이 운영하던 곳이나 괴벨스가 실업자 시절 취직을 '거부'당했던 유대 자본 출판사는 폐간을 면치 못했지만 체코덴마크, 프랑스 등지에서 지하 조직을 펴서 발행한 신문들을 꾸준히 반입하고 있었고 당시 지식인이라면 불어나 영어 신문을 입수하거나 보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에 무턱대고 정부 쪽 이야기로 통제만 했다간 오히려 비웃음을 동반한 역효과만 불러올 뿐이라는 계산도 있었다.

이런 식으로, 현재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적어도 2차대전 전 나치시대 언론의 자유는 말 한 마디 잘못했다고 수용소에 끌려가는 정도는 아니었다. 순수 아리아인 출신 기자가 보도지침을 어기면 처음에는 경고를 당하고, 그 후에는 감시를 하다가 더 말을 안 들으면 밥줄을 끊었다. 물론 적극적으로 나치 정권에 저항했으면 해외로 망명하거나 수용소에 끌려가겠지만. 괴벨스의 솜씨 덕에 현재에도 독일에서 저명한 보수일간지인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 FAZ)은 2차대전이 말기에 접어든 1943년에야 폐간되었다. 이는 괴벨스의 술책으로, 외국에서 볼 때 외견상 제3제국의 언론의 자유는 보장이 된 것처럼 보여야 했기 때문이다.

괴벨스는 1920년대에 라디오를 처음 접한 뒤 이것을 본질적으로 권위적인 수단으로 생각했고, 라디오는 모든 이들이 악명 높게 기억하는 제3제국의 효율적인 통제 수단의 시작이었다. 독일에서 처음으로 라디오 상업방송이 시작된 것은 1923년으로 괴벨스가 방송 분야의 정치적 중요성에 눈 뜬 계기는 1930년 총선이었는데, 당시 집권 내각 브뤼닝 정부가 대놓고 권력을 이용해 자신의 정당과 정부에 유리한 시간대를 배정하는 횡포[98]를 저질러 괴벨스의 분통을 터지게 했고 1932년 대통령 선거와 총선 때는 이미 괴벨스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중요한 수단으로 여길 정도로 방송의 영향력이 커졌다. 그래서 그레고어 슈트라서를 숙청하기 전부터 괴벨스는 방송 분야에 대해 침을 삼키고 있었다. 정당을 대표하는 정치인의 방송 연설이 이 즈음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괴벨스는 첫 방송 당시 대중이 없는 낯선 장소에서의 경험 미숙 때문에 유감스럽게도 평소 연설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어버버(...)하는 굴욕을 맛보기도 했다.

당시 라디오 방송은 TV가 나오기 전 일상 생활에 일대 혁신적인 수단으로, 일방적으로 방송한 내용을 청자들은 듣기만 하고 반박할 수 없었기에 본질적으로 권위적일 수밖에 없었다. 라디오 방송의 시작부터가 국영방송이자 선전수단으로 도입된 조선과는 다르게 독일은 1920년대부터 지역을 기반으로 여러 방송사가 난립하고 있었고 꼭 괴벨스의 희망 때문이 아니더라도 한정된 주파수 문제와 여러 다른 기술적 문제, 상업방송에 대한 규제 미비 등으로 정부에서 개입해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괴벨스는 이번에는 신문이나 출판사를 대할 때와 달리 관대하지 않았는데, 정부 개입에 반대하는 방송사들은 강압적으로 통폐합되었으며 높으신 분들을 믿고 뻗대는 '이놈의 방송 남작님들(진짜 남작이란 게 아니고 계급선동적 언어를 사용하는 괴벨스의 혐오유발적인 표현이다)' 몇몇은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3.5.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Wollt Ihr den totalen Krieg? Wollt Ihr ihn, wenn nötig, totaler und radikaler, als wir ihn uns heute überhaupt erst vorstellen können?
여러분은 총력전을 원합니까? 역사상 가장 총력적이고 급진적인 전쟁이 되기를 원합니까?
-괴벨스, 1943년 2월 18일 베를린 체육궁전에서 연설할 때[99]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이후에도 괴벨스는 끊임없이 국민에게 선전을 해댔고 독소전쟁 직전에는 마치 영국 상륙작전을 시도할 것처럼 선전을 해대면서 스탈린이 독일이 침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오판하게 만들게도 했다. 그리고 독일의 패색이 깊어진 가운데에 폭탄에 의해 부상한 국민을 구출하기 위한 구원대를 조직했으며, 중년 남성이나 소년들을 끌어모아 국민방위대 베어울프를 설립하며 독일 국민들의 인기를 얻기도 했다.

또한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색이 짙어지면서 점점 히틀러의 연설이 줄어들었고, 대신 괴벨스가 거의 모든 연설을 도맡아 하며 연합군에 대해 최후까지 항전하라고 국민들에게 선전을 했다. 특히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패배 이후 베를린의 스포르트팔라스트(체육궁전 혹은 스포츠궁전)에서 한 총력전 포고연설이 매우 유명하다. 하지만 괴벨스가 자신이 선전을 했던 장소가 폭격으로 파괴되었을 때 꽤 충격을 받았다는 기록이 자신의 일기에 남아 있다.

1944년 7월 20일에 일어난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때에 괴벨스는 베를린에 남아있던 유일한 나치당 최고간부로, 반란 진압에 큰 역할을 했다. 그 결과 1944년 7월 25일에 히틀러로부터 총력전 전국지도자로 임명된 괴벨스는 내정 전반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1945년 1월 30일에는 베를린 방위총감을 겸임해 수도방위의 최고책임자가 되었지만,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으로 인해서 괴벨스는 독일 군부를 신용하지 않았고, 그래서 수도방위의 대부분을 정규군이 아닌 장비와 훈련이 뒤떨어지는 국민돌격대에 맡겨서 큰 희생을 치러야 했다.

결국 소련군에 의해 베를린의 포위가 임박하자 많은 고위간부와 나치 지도자들은 베를린을 탈출하기 시작했지만 괴벨스는 끝까지 히틀러의 곁에 남아서 히틀러와 함께 베를린에 잔류했다. 베를린 전투에서 독일의 패배가 눈앞으로 다가오자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히틀러의 총통 지하벙커로 주거를 옮긴 괴벨스는 1945년 4월 29일에 마르틴 보어만과 함께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의 결혼 입회인으로 참석하였으며, 나중에 자살한 히틀러 부부의 시신을 보게 되었다.

3.6. 최후

괴벨스는 독일이 패주하던 1945년 4월 30일, 히틀러가 자살 직전 남긴 유언으로 총통직에서 분리되어 나온 총리직[100]에 임명되었다. 괴벨스는 총리로서 수행한 유일한 업무로 소련에게 항복문서를 작성해 한스 크렙스 장군을 통해 전달하는 일밖에 하지 못했다. 그러나 다음날 소련에게 제시한 항복 조건이 수용되지 않고 오히려 소련이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자 "죽음까지도 무조건적으로 그와 함께 할 사람이 적어도 하나는 있어야 한다"라 말하며 죽지 말라는 히틀러의 명령을 저버리고는 여섯 아이들에게 모르핀을 투여하고 시안화칼륨으로 살해한 뒤 자신의 아내와 함께 독약으로 음독자살했다.[101]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자신과 아내의 시체를 불태워 달라고 미리 부관에게 유언을 남겼지만 휘발유가 부족해[102] 대충 탄 채로 형체가 남은 시신이 소련군에게 발견되었다. 이때 찍힌 불에 탄 괴벨스 부부의 시체 사진은 웹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다만 혐짤이니 주의할 것. 괴벨스 가족의 시체는 소련군에 의해서 매장되었지만 1970년에 KGB 주석이었던 유리 안드로포프의 지시로 다시 화장되어서 독일의 엘베 강에 뿌려졌다고 한다.

[1] 나치당의 무장조직이자 정치깡패 돌격대(SA) 하부는 사회 밑바닥층이 많은 편이지만, 알려진 것과는 달리 나치당 고위직과 당원들, 심지어는 돌격대 지휘부까지도 포함하여 죄다 번듯한 집안 출신이며 히틀러를 제외하면 학력도 평균 이상이었다. 쉽게 말해 구 제국 기득권층이지만 주류가 아니거나 신분 상승을 노리는 신흥 계층이 많았다. 특히 나치당 주류는 제국 시절 프로이센에 밀렸던 남독일 바이에른 출신이 많다. 중앙당사도 뮌헨.[2] 미하엘은 어려운 삶을 살았던 친구를 모델로 쓴 글이라고 알려져 있다.[3] 브레히트는 "거짓말은 발이 짧다."라는 서양속담을 인용하여 괴벨스의 이러한 짧은 발과 그가 보여준 능수능란한 거짓말 스킬을 엮어 풍자하기도 했다.[4] 당시 독일의 학제에 따르면, 초등학교 4년과 레알슐레(실업학교) 6년을 거치면 취업 전선에 뛰어들거나 실용 과목을 다루는 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학에 가서 순수학문을 전공하려면 인문계 김나지움 3년 과정을 추가로 이수하고 대입시험(아비투어)를 통과해야 했다. 학자금 대출도 없던 시절 김나지움과 대학 학비는 괴벨스네 같은 중류층 이하의 집안에게는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했다.[5] 이오시프 스탈린이 같은 이유로 정교회 신학교를 다녔다.[6] 후술하겠지만, 콘라트 괴벨스의 결혼식에 나치 지지자들이 하객으로 많이 왔고 당시에는 아직 나치에 비판적이었던 괴벨스가 나치를 까는 일기를 남겼었다.[7] 슈펭글러는 서구의 몰락과 다른 저서에서 총통 사상과 초계급적 국가사회주의를 주장했다.[8] 괴벨스가 남긴 일기를 편집하고 괴벨스 전기를 서술한 독일의 작가.[9] 지금이나 예전이나 논문이 당시 통설을 따랐다고 해서 새로운 것을 주장한 것에 비해 가치가 낮아지는 건 아니다.[10] 대표적인 출판사 모세, 울슈타인은 유대인이 설립자다. 후에 괴벨스가 출세하고 나서 정리된다.[11] 한국으로 치면 한국은행 격. 당시에는 중앙은행이 일반 상업은행의 업무를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12]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 김태희 역,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교양인, 2006, p.85.[13] 패전 후에 독일의 배상금 지불은 거의 현물로 치렀다. 월 200만 톤의 석탄벨기에프랑스에 갖다 바쳤는데 연합국과 독일 정부 사이에서 현물의 금액 가치 평가에 이견이 컸다.[14] 지금 기준에선 상반된 두 진영이 반유대주의 드립으로 같이 엮이는 게 이해하기 어렵지만, 당시 독일 민족의 것이 아닌 영미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패전국 독일인들에게 전통적으로 천민 취급받던 유대인과 엮여 '독일을 망하게 하려는 유대인 음모의 하수인' 취급을 받았다. 당시 독일을 포함한 유럽과 영미, 프랑스에서조차 반유대감정은 보편적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도 반유대주의자들의 떡밥으로 남은 유대 자본과 경제계 유대인 영향력은 과장된 부분이 많다. 나치나 반유대주의자들의 전쟁획책 음모론과는 달리 로스차일드 가문의 경우 1차 세계대전을 막으려고 노력했고 전쟁이 터지자 큰 손해를 보았다. 이들은 평화 시대의 광범위한 무역과 세계적 금융시장의 이점으로 돈을 벌고 있던 입장이었다. 그런데 전쟁으로 모든 금융과 채무 관계가 동결되어 버린다면 당연히 이득이 아닌 막대한 손해를 본다. - 니얼 퍼거슨의 <로스차일드>, <증오의 세기>,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 등 참고.[15] 당시 히틀러의 '나의 투쟁' 드립과 달리 옥중투쟁은 훼이크였다. 히틀러는 란츠베르크 요새에서 초호화 수감 생활을(...) 하던 중이라서 아직 만날 수 없었다. 괴벨스가 오랫동안 기다리던 히틀러와의 만남은 기다린 만큼 극적이었다. 후술함.[16] 2020년 12월 12일 방송[17] 20세기 영상 매체 발명 후 기록된 영상들을 수집하여 히틀러에게 인생을 바친 엘리트 괴벨스힘러, 괴링, 헤스 등을 통해 나치의 탄생과 파멸에 관해 시간 순으로 다룬 다큐멘터리[18] Gau. 나치당 행정 조직으로 괴벨스는 후에 베를린 대관구장(Gauleiter)이 된다.[19] 나치당서 최고 네임드급인 독일의 '영웅' 루덴도르프 장군은 만났지만 괴벨스는 그를 구시대 인물로 생각해 별 감명은 받지 못한 듯하다.[20] 이 소개는 괴벨스의 이론가적 면모를 높이 산 소개인데, 실제로는 관구 내에서도 극심한 이념 갈등을 겪었고 괴벨스의 북독일과 나치당 주류의 남독일 뮌헨의 성향도 달랐다. 이 소개는 역설적으로 나치당의 사상적 콘텐츠가 매우 빈약하다는 걸 보여준다. 나치당에서도 이것을 당당하게 인정하며 '히틀러가 곧 콘텐츠다'라며 인물 우위를 주장한다. 사상적 논쟁은 유대인들의 음모라는 것이다.[21] 국가사회주의 자유운동(Nationalsozialistische Freiheitsbewegung; NSFB). 뮌헨 폭동으로 나치당은 불법화되었던 탓에 단독이 아닌 연합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으며 바이마르(라이히) 의회의 연합의석 14석(3.0%) 가운데 나치당 몫은 고작 2석이었다. 사실 5월 총선에서는 6.5%로 32석(제6당)을 벌었는데 의회가 몇 달 만에 해산하고 재선거를 해서 도루묵.[22] 나치당 내 사회주의 계열이라고 공산주의나 사회민주당과 사이가 가까운 건 아니었다. 나치당 내 사회주의 계파는 독일 공산당독일 사회민주당의 노선을 조국과 민족이 없는 국제유대인들의 사회주의라고 비난했고 독일 민족의 마르크스주의에 물들지 않은 우리식 사회주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나치 좌파도 노동계급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지지층이 겹치는 공산당을 공격해야 했다. 물론 당 내 우파에서도 당연히 주적이라 공산당을 때려잡는 데 적극 나섰다.[23] <괴벨스> 저자 랄프 게오르그 로이트의 주석에 따르면 사실 두번째 만남이다. 나치당 회의로 몇 달 전에 첫 만남을 가진 적이 있었지만 일기에는 묘사되지 않음. 실제로 회의에 같이 참가를 했다는 것이지 대화를 나눴다거나 하는 여부는 분명치 않다.[24] 히틀러 추종자들은 바그너 오페라 '리엔치'의 주인공 호민관 역할 리엔치를 종종 히틀러와 비교했다. 따라서 독재자도 로마시대 관직 독재관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25] 괴벨스는 레닌에 대해서 긍정적이었다. 독일 공산당처럼 유대인이 나라를 팔아먹는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레닌이 마르크스주의를 버리고 러시아 민중에 자유를 주었다'라고 생각했다.[26] '강령은 바꾸지 않는다. 성경은 오류로 가득 차있지만 기독교 확산을 막지 못했다'라고 거절했다. 나중에 어른의 사정으로 조금 바꾸긴 했다.[27] 약간의 실망이라고 하지만 히틀러를 프티부르주아라고 부르며 규탄했던 적까지 있었다.[28] 히틀러의 좌우 성향이라는것은 별 의미가 없는 게 가방끈이 짧아서 인종론을 제외하면 그냥 좋은 게 좋은 거(...)였고 1920년대 초반 연설에서는 유대인들과 더불어 '전쟁 틈에 벼락부자와 부당이득자는 목을 매달아야 한다!!\'라는 좌파적 발언도 나왔지만 뮌헨의 높으신 어른들과 어울리면서 조금씩 변했고 계급투쟁에 연상되는 발언을 들으면 '그딴 건 볼셰비즘이야!!' 하며 반대를 분명히 한다. 나중에는 당 내의 노선에 대해서 지도자 원리를 강조하며 '내가 곧 이데올로기다\'라고 메시아 선언을 해버린다. 권력에는 장사 없다. 애초에 나치당의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주의에 반대하는 민족(국가)사회주의로 지금의 사회주의라 보기도 어렵고, 민족주의도 인종론 기반이라 지금의 민족주의와도 거리가 있다. 21세기 한국 기준 용어를 가지고 히틀러가 좌파니 우파니 하는 건 별 의미 없는 논쟁이다.[29] 심지어 1926년 실제로 대들었다는 그 사건 직후에도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낯 간지러운 히틀러 찬양사를 썼다.[30] 도시 노동자 빈민층이 많아서 베를린은 공산당 지지세가 강했다. 나치당이 좋아라하는 유대인 거주 비율도 높았고 인텔리 계층과 자유 직업인들의 당인 사회민주당의 지지세도 높았다. 나치, 특히 당본부가 있는 뮌헨에서는 베를린을 좌빨과 유대인들이 장악한 바이마르 체제의 혐오스런 소굴로 생각했다.[31] 돌격대라고 해서 모두 나치당원은 아니다. 상층부는 물론 나치당원이지만 나치당 당직과 돌격대 보직의 겸직이 금지되었다. 나치당은 당비로 운영되었고 깡패들이 당에 돈을 낼 리가 없었다. 주로 나치당에서 제복을 받고 활동비를 받아가며 체력단련 등을 하는 조직이었다.[32] 1차대전시기 찬전/반전(로자 룩셈부르크)을 두고 갈라졌고 1919년의 공산당 폭동시 사민당 연립정권이 군부와 우익 민병대와 손을 잡고 공산당을 진압했다. 이후 코민테른에서 내린 지령도 '파시스트의 앞잡이'인 사민당을 먼저 때려잡으라는 쪽이라서 나치당이 성장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33] 1920년 루르지방에서 독일 공산당의 '적군(Red Army)' 폭동에서만 5만 명이 참가했다. 작센지방에서는 공산당과 사민당의 합작으로 지방정부가 전복된 적도 있고 하노버에서도 대규모 공산 폭동이 있었다.[34] 나치당 주류의 본거지인 바이에른 지방(주도 뮌헨)에 반해 슈트라서의 영향력은 좌파 성향이 강하고 도시 노동자 계층이 밀집한 베를린과 라인 지방에서 가장 강했다.[35] Stahlhelm. 독일의 1차세계대전 패전 이후 퇴역 장병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대표적인 우익 준군사조직/민병대 집단이었다. 이후 세력을 더 키워서 뒤스터베르크의 지도 하에 정당 수준으로까지 성장한다. 이후 나치가 집권하자 1934년에 자발적으로 나치당에 흡수된다.[36] 우익 계열의 이름만 유사한 '흑백적(제2제국 국기) 국기단'은 공화국 타도를 주장하는 왕당파 세력이었다.[37] 나치 독일 선전장관으로서의 악명은 베를린 관구장 시절을 이어나간 것이다.[38] 프로이센 경찰 중 정치분야를 다루는 경찰로 나치당과 공산당을 감시하는 게 주 임무였다. 나치 집권 후 게슈타포 조직으로 이어진다.[39] 독일은 지방자치 전통으로 치안권력은 지방정부에 있다. 베를린이 속한 프로이센 주 정부는 온건 좌파 사회민주당과 자유주의 우파 정당의 대연립정권이었다.[40] 좌파라고 해서 반유대주의가 없는 건 아니었다. 나치와 공산당은 서로 유대인은 '니네' 편이라고 주장했다. 나중에 유대인 혈통으로 공격받았지만 살아생전 스스로는 유대인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카를 마르크스도 다른 사회주의자(페르디난트 라살)를 유대인 드립으로 디스한 적이 있을 정도다. 카를 마르크스는 인종적으로 분류하는 후대 나치 구분상 빼도박도 못하게 유대인이지만 유대인 커뮤니티나 당시 19세기 중반 독일 지역 유대인 판별로는 종교가 요건이었다.[41] 이 회사는 바로 이게파르벤(IG Farben)으로 진짜 유대인 소유 회사는 아니었고, 오히려 나치 집권 후에 나치빠 전범기업으로 변모하여 홀로코스트에 쓰인 그 유명한 독가스 치클론 B를 개발한다. 전후인 1951년에 해체, 여러 회사로 분리되었으며, 그 회사들 중에는 바스프(BASF), 바이엘(Bayer), 훽스트(Hoechst) 등 화학 및 제약 업계의 여러 굴지의 회사들이 있다.[42] 중세부터 이어져 온, 유대인들이 유월절 빵에 기독교 아이들의 피를 발라 먹는다는 도시괴담에서 유래. 피의 중상 참조.[43] 그러나 이후 의회 개원시기가 아니라면 공화국 의원의 면책특권이 제한되는 법안이 통과되자 괴벨스는 또 고소고발에 시달린다.[44] 당시 독일의회 총 의석은 유동적이었다. 바이마르 전기엔 400~500석이었으나 중후기에는 570~610석 정도. 현재 독일연방공화국 하원 의석은 현재도 마찬가지로 유동적이다. 하지만 군소정당의 난립을 막기 위해 득표율 5% 미만의 정당은 의석수 없이 퇴출한다.[45] 의원직과는 별도로 프로이센 주의회 의원으로도 당선되었는데, 단 한 번도 의회 연설을 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국회에선 공산당 의원 발터 울브리히트배틀을 몇 번 벌인 적은 있었다.[46] 물론 돌격대 중대라봤자 규모는 총 열네댓 명이었다.[47] 나중에 장례식 규모를 두고 유족들이 힌덴부르크 대통령과 인맥이 있어 면담을 시도할 정도로 명망있는 목사였다.[48] 현재 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Rheinische Friedrich-Wilhelms-Universität Bonn).[49] 이 살인죄로 결국 감옥에 수감된다. 이후 1933년, 나치당이 집권에 성공하자 돌격대 대원들이 불법으로 감옥에서 끌어내 무참하게 살해한다.[50] 히틀러는 괴벨스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베르크호프 별장으로 놀러가기로 선약이 되어 있어서 참석을 단칼에 거절했다. 여담으로 빌헬름 2세는 아들들이 나치빠인 걸 대단히 안 좋아했다고.[51] 도시 지역에서도 나치당 지지세가 늘었지만 공산당에는 미치지 못했다. 나치당이 중점적으로 투자한 베를린 빈민가 '베딩' 지역에서 득표수가 많이 늘었다고 정신승리한 괴벨스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나치당 지지율보다 공산당 지지율이 10배에 달했다. 집권 직전, 집권 후 열린 총선에서도 베를린과 괴벨스의 고향 노이쾰른 지역은 전국에서 나치당의 지지율이 가장 낮았다. 베를린과 서부 독일 공업지역의 노동자 계층은 사회민주당과 공산당 지지자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나치의 발원지인 바이에른 지역도 나치당의 전국 평균 득표율보다 항상 낮게 득표했는데, 이는 맥주홀 폭동 실패 후유증과 더불어 이 지역에서 가톨릭 중앙당과 바이에른 인민당의 지지세가 강했기 때문이다. 나치가 선풍적 인기를 끈 곳은 북독일의 개신교를 믿는 농촌 지역.[52] 히틀러도 이름만 빌려주고 듣보잡에서 탈출해서 중앙정계로 진출하는 데만 이용했지 실제로 하는 건 없었다.[53] 바이에른 출신 약사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사회주의자면서도 히틀러에 대한 주종 관계와 비슷한 충성심 때문에 그 성격의 벽을 뛰어넘지 못했다. 결정적인 순간에 항상 물러났고 숙청당할 때도 변함없었다. 조직가이며 이론가, 행정가로는 뛰어났지만 선동가나 연설가는 될 수 없는 한계가 뚜렷한 사람이었던 것. 심지어 정권을 얻는 방법론도 돌격대와 정반대였으며 히틀러보다도 온건해서 우파 계열 연정에 참여하자고 주장했다(실제로 이뤄지긴 했지만). 결국 뒷접촉하다 발각돼서 일선에서 쫓겨났으며 장검의 밤SA 지도부와 국방군 내 나치 반대파인 폰 슐라이허 장군과 패키지로 살해당하게 된다.[54] 제국 시절에는 기독교인이 아니면 군장교나 국가 공무원직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에 이 계층에선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 성향이 높기도 했다.[55] <히틀러 국가> -마르틴 브로샤트-[56] 베를린 관구장과 마찬가지로 죽을 때까지 이 자리를 유지한다.[57] 특히 농촌의 농장 개혁안에 대해서는 나치당뿐만 아니라 다른 정파나 농민단체 등에서도 크게 반발했다.[58] 1930년 총선 총 577석. 원내 제1당은 143석을 차지한 사회민주당, 제3당은 77석을 차지한 공산당. 사민당 지지율은 29.8%에서 24.5%로 폭락했다. 반면 공산당은 10.6%에서 역시 성장한 13.1%를 득표해 지지율이 반토막난 우파 국가인민당과 카톨릭중앙당을 밀어내고 제3당이 되었다. 좌파 양당을 더하면 그래도 40% 가까이는 좌파를 지지하고 있었던 것이지만 분열되어 있었다는 게 중요하다. 주요 정당들은 73%를 차지했고 나머지 27%는 인민당, 농민당, 중간계급당, 국가당, 바이에른 인민당, 전도사운동당 등이 나눠먹고 있었다. 이 27% 중에 바이에른 인민당을 제외한 20%는 다음 1932년 선거에서 모두 나치로 몰리게 된다.[59] 돌격대 제복은 금지 복장이라 베를린에서 입으면 체포당했지만 의원들은 면책특권 때문에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정작 괴벨스는 양복만 입고 다녔다.[60] 레마르크의 반전주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이다. 독일 의용병들이 벌이는 (실상대로의) '비겁한' 모습(PTSD)에 돌격대 뿐만 아니라 전시 복무했던 많은 사람들이 격분하긴 했다.[61] 공산당의 참여는 스탈린이 '혁명적 사태추이에 뒤처지고 있다' 라고 독일공산당 지도부를 '질타'하며 '파시즘에 길을 열어주는 것은 브뤼닝 정부이며 그 정부의 대들보는 사회주의 파시스트들이며 그들이 장악한 '프로이센 주 정부'다' 라고 주장했다(프로이센 사민당 연립정권에 우파인 가톨릭중앙당이 참여하긴 했고 중앙정부 브뤼닝은 가톨릭중앙당 출신이면서 반공 성향이 강했다). 그러므로 정부 전복에 나서라는 것. 물론 진짜 연대라기보다는 누가 내 위주로 먼저 하냐의 병림픽이었다. 한편 스탈린과 코민테른의 지령은 삽질이 아닌 것이 드물었는데 몇 천 km 떨어진 모스크바에서 원격 조종을 하는 데다가 교조적인 행태와 소련의 '국익'에 더 충실했지 현실적으로 도움이 안되는 일을 자주 시켰다. 이는 스페인 내전서도 마찬가지였다.[62] 독일 출신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중국공산당에 파견된 군사고문 오토 브라운과는 동명이인이다.[63] 베르사유 조약 수정안으로 미국이 독일에 유리하게 상환기간을 늘리고 총액도 꽤 줄여준 배상금 지불안. '59년 할부로 갚으라고 해서 지금까지 뜯긴 것도 억울한데 60년 동안 노예짓 하란 거냐' 하면서 반발이 거셌다.[64] 이 때까지도 히틀러가 독일 국적을 갖고 있지 않았던 영향도 있다(오스트리아 국적은 1925년에 포기했기 때문에 무국적 상태였다). 하지만 1932년에 나치당이 연정으로 참여한 브라운슈바이크 지방정부의 '공무원'으로 취직하는 꼼수로 독일 국적을 취득한다. 당시 국적법에서는 독일의 공무원이 되면 독일로 귀화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법이 있었는데 이를 이용했다. 독일 슈피겔지 기사[65] 세계 선교를 중점으로 하는 가톨릭예수회는 나치의 반가톨릭적 성향과 프리메이슨과 더불어서 국제유대인 조직 음모론의 필수요소였다. 정작 프리메이슨과 예수교는 가장 사이가 안 좋았고 싸운 전력도 있었다.[66] 정작 프로이센 장교단은 제국이 몰락할 때까지 반유대주의로 유대인에게 문호가 개방되지 않을 정도로 폐쇄적이고 권위적이었다. 히틀러와 그의 상관이던 유대인 출신 후고 구트만(Hugo Gutmann) 중위가 복무한 부대는 바이에른 왕국군이다.[67] 참고로 당시 독일의 대통령 선거 제도는 현재의 프랑스처럼 2차에서 1, 2위가 맞붙는 식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1차 투표에선 과반수여야 당선. 2차에선 두 명만의 결선이 아니라 남은 모든 후보 중에 단순 다수득표자가 당선된다.[68] 온건 좌파 사회민주당 지지층이 보수반동 성향 힌덴부르크를 지지한 건 사실이지만 힌덴부르크 지지층이 '좌파' 중심인 건 아니었다. 공산당은 독자 후보를 냈고 자유주의 우파 성향이나 전통 보수 군부 교회층 지지자가 더 많았다. 바이마르 시절 후기 사민당 지지층은 20% 초반 대에 불과했다.[69] 심지어 뒤스터베르크 자신도 이 사실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나중에 사실이 까발려졌을 때 엄청나게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70] 힌덴부르크는 노령에 무소속이며 정치인이라기보단 국가를 상징하는 인물로 여겨졌다.[71] 프로이센 주 선거는 나치당이 1당이지만 어느 당과도 연립정권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계속 사민당이 과도내각으로 눌러 앉았다. 제2당이 사민당, 제3당이 공산당.[72] 다름아닌 제2제국 빌헬름 2세의 장자 빌헬름 황태자의 고견이다. 황태자는 아버지를 따라 경박한 언행과 난잡한 행동으로 번듯한 동생들과 달리 전혀 인기가 없었다. 내심 제정 복귀를 원하던 힌덴부르크도 제정 복귀시 '빌헬름 2세면 몰라도 황태자는 좀...'이라 할 정도로 박하게 평가했고 사민당에서도 군주제로 복귀하더라도 빌헬름 2세와 황태자는 결사반대고 다른 인물이라도 일단 영국식으로 입헌주의로 뜯어고친 다음에야 논의할 일이라 보았다. 또 승전국에선 '전범으로 처리 못한 것도 억울한데 제정복고 했다간 가만있나 봐라' 하고 역시 부정적이었다. 이 밖에 제국시대 왕족 중에는 빌헬름 2세의 넷째 아들 아우구스트 빌헬름 황자도 나치 지지자였고 이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사위 헤센의 필리프 왕자까지 나치 지지자였으며 이쪽은 아예 돌격대 고위직까지 했다.[73] 정치가 군에 간섭할 수 없다는 독일의 군국주의 전통과 문민통제 개념이 없던 시대의 영향으로 대놓고 국방부 내 정무부서를 만들고 민간인과 정치인들 사이에서 군의 이익을 변호하고 감시하는 부서였다.[74] Henry Ashby Turner, Jr.(1932 – 2008) 예일대 교수 역임 <히틀러의 30일>에서.[75] 의회 권력이 작동하는 평상시에는 대통령 비상대권이 가동될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의회 권력이 공백이면 이렇게 황제급으로 막강했던 대통령의 권한이 가능했고 이는 바이마르 체제가 망하는 큰 근거가 된다. 이런 시대착오적인 귀족 내각이 들어선 건 1930년부터 의회 내 다수가 아닌 대통령 비상대권에 임명된 대통령 내각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76] 공산당에선 자기들만 금지령이고 돌격대만 해제된 건 공개적으로 살인면허를 준 거나 다름없다고 강변했지만 애초에 금지령 따윈 이전부터 서로 아랑곳 안하고 총 쏘고 칼부림질을 해댔다. 추산하기로 1932년에 정치적 테러로 130여 명이 사망했는데 나치당이 55명, 공산당이 50명 정도였다.[77] 아이러니하게도 이 말은 독일 내 유대인들이 '유대인으로 태어난 게 죄다' 라는 뜻으로 신세 타령으로 쓰던 말이기도 했다. 독일에서 태어난 운명을 받아들여 독일이란 나라에 충성하거나 공헌을 하면 '유대인 치곤', '유대인이 무슨 일로' 라는 소리를 듣고 인종적인 편견이나 오해받을 일들이 터지면 '역시 유대인!' 이란 소리를 듣는다며 독일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난 불행한 운명을 한탄했던 것. 그런데 이제 그 말이 유대인 탄압의 근거가 된 것.[78] 가톨릭중앙당의 협조로 괴링이 국회의장이 되었다. 이 덕에 부르주아 신문에서는 또 중앙당과 나치당의 연정 떡밥이 잠시 흘러나오기도 했다.[79] 이 사건의 배후에는 괴벨스의 노동자 계층의 지지를 얻으려는 속셈도 있었고 그동안 불만이 쌓인 돌격대의 사기를 올려줄 용도도 있었으며, 히틀러가 찬성한 건 정권 협상용 실력행사로 파펜과 슐라이허, 힌덴부르크에 대한 무력시위성이 강했다.[80] 헨리 애슈비 터너 2세가 한 말.[81] 이때 괴벨스, 괴링, 그리고 힘러 등 나치 실세들에게 미운 털이 단단히 박힌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결국 1934년, 장검의 밤 때 슐라이허 총리 등과 같이 살해당했다. 동생 오토 슈트라서는 해외 탈출에 성공하고 살아남아 전후에 복귀하여 정치 활동을 하나 성공하지는 못한다. 현재 네오나치들 노선에 '슈트라서주의'가 남아있다.[82] 슈트라서가 맡았던 나치당 조직국장은 돌격대, 재정부, 선전부 등 히틀러 직속 조직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업무를 총괄하는 최주요 당직이었다.[83] 사회민주당은 저질 선동꾼 히틀러 씨는 밑천이 드러나서 곧 몰락할 것이기 때문에 과거 독일제국을 쥐고 흔들었던 군부를 등에 업고 권위적 통치를 할 것 같은 슐라이허를 공화국의 가장 큰 적으로 보았다. 공산당도 마찬가지로 나치 폭력배들은 기존 보수세력의 앞잡이에 불과하다는 공산주의 이론에 기반한 교조적 판단을 하고 있었다. 물론 현실은 나치당 득표율이 오르면서 우익 지지율은 모두 잠식당한 상태였다. 중앙당만 온전하고(12%) 후겐베르크의 독일국가인민당마저 리즈 시절(20%)과 1928년 선거(14%)에서 토막이 난 7%의 지지율을 보였으며 나머지 제도권 우익정당들은 거의 나치에 잠식되어 사라졌다. 공화국에 끝까지 우호적이었던 것은 바이마르 후반에 20% 초반지지율에서 정체된 사회민주당이 유일했고 1930년 이후 '대통령내각' 시대와 1932년 두 번의 총선에서 체제절멸, 전복 드립을 치는 나치당과 공산당의 의석수가 과반수를 넘어 모든 정부를 불신임한 탓에 다른 정당의 정치적 의미가 약해지고 있었다.[84] 슐라이허는 프랑스 대사 퐁셰 앞에서 회고하길 '더 이상 독일인의 충성심을 믿지 않는다' 며 '총리직에 있는 57일동안 57번의 배신을 당했다'고 울분을 토한다. 의회 지지 세력도 없고 오로지 군부의 지지만 앞세워서 통치하려고 했던 발상부터가 비현실적이었다. 나치가 정권을 잡는 걸 가장 늦춘 요인은 오히려 천박한 보헤미안 상병에게 총리직을 주는 게 꺼림칙했던 힌덴부르크였다(힌덴부르크 대통령은 '보헤미안 상병'을 총리로 임명하는 게 헌법에 대한 맹세와 본인의 양심상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일갈한 적도 있다). 결국 막상 군부도 슐라이허의 편이 아니었던 것이다.[85] 이 사건은 1960년대까지는 나치당에 유리한 사건이어서 당시 공산당 발표 등을 고려한 조작설이나 나치의 셀프 방화설이 다수였지만, 현재의 연구에선 당시 사건 기록과 재판 기록을 참고로 판단하여 개인의 단독 방화로 보는 설이 우세하다. 외신까지 참여한 언론이 지켜본 법정에서 판데르뤼버는 범행 동기가 '노동자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라 주장했다. 함께 기소된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등의 불가리아 출신 공산주의자 4명은 아직 나치화가 덜 진행된 독일 사법부에서 무죄 판결을 받는다. 물론 히틀러는 판데르뤼버 혼자 유죄라는 재판 결과를 듣고 격노 크리...[86] 히틀러는 나치당 초기 듣보잡이던 시절 아직 메시아적인 확신을 못 느꼈을 때 자신을 북 치는 사람이라고 겸손하게 표현했다. 자기보다 나을 사람이 올 것이라며.[87] 나치당에서 특별한 공적을 세우거나 당원번호가 10만번 이하인 당원. 마그다 괴벨스는 히틀러가 죽기 직전에야 황금당원 뱃지를 받는다.[88] 선전부의 선전 활동은 문화정책을 관장하면서 이루어졌는데, 비슷한 사례로 한국의 구 문화공보부가 있다.[89] 대표적으로 괴링이 있다. 그는 항공부, 프로이센 내무부, 게슈타포(머지않아 이건 힘러에게 넘기지만), 공군, 4개년 경제장관도 모자라 제국 수렵협회장까지 지냈다.[90] 언론인 출신이며 선전부에서 일하다가 2차대전 때는 경제부서로 이동한다.[91] 높은 확률로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몰랐을 때"라는 제목이 붙은 사진과 같이 쌍으로 묶인다. 이 사진도 "증오의 눈빛"과 같이 1933년 제네바 국제연맹 총회에서 찍힌 사진이다. 단 두 사진 중 어느 사진이 먼저 찍힌 사진인지는 불명.[92] 굳이 따지자면 회의 중 갑자기 끼어든 사진사에게 순간 짜증을 내는 모습이거나, 어쩌다 얼굴을 찌푸렸는데 그게 하필 프레임에 잡혔다고 추측할 수 있다.[93] 사진사의 이름은 알프레트 아이젠슈태트(Alfred Eisenstaedt, 1898-1995)로 실제 유대인은 맞았고, 다행히 1935년 일가족과 미국으로 망명하여 홀로코스트는 피했다. 여담으로 그 유명한 수병의 키스(V-J Day kiss image) 사진을 찍은 사람이기도 하다.[94] 훨씬 후이긴 하지만 로젠베르크의 충실한 추종자이자 나치당 바이에른 관구장 겸 바이에른주 문화장관이던 아돌프 바그너가 학교에서 십자가를 전부 치웠다가 기독교계가 엄청나게 반발하여 히틀러가 직접 나서서 짤라야 했던 적도 있다.[95] 에밀 놀데와 페히슈타인은 나치 지지자에 아들이 돌격대원이었는데도 총통 각하에게 그딴 건 전혀 중요치 않았다.[96] 브레히트 자신의 작품은 아니다. 1933년 5월 베를린에서의 대대적인 분서 이후 독일의 작가 오스카 마리아 그라프는 분서 목록에 자신의 책이 빠져있는 것을 확인하고 빈 노동자 신문에 '나를 태우라(Verbrennt Mich)'는 내용의 글을 기고한다. 브레히트는 이를 그대로 가지고 왔다.[97] 18세기 말 영국이 배경으로 100여 년 전 잊혀진 작품을 발견해서 브레히트가 개작한 것이다.[98] 브뤼닝 내각 인사들은 정상적인 인물이다. 시대착오적 긴축 정책을 시행해서 현대에는 부정적인 평가가 대세지만 1933년 나치 정권 후 망명해서 하버드 교수를 지낼 정도.[99] 당시 상황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배한 직후 상황이었다.[100] 나머지인 대통령직은 카를 되니츠 제독에게 돌아갔다.[101] 영화 몰락에서는 아이들에게 수면제를 먹인 후 시안화칼륨을 먹이고 자신은 부인과 권총 자살하는 것으로 그려졌다. 실제로 시신 발견 당시 시체 위에 제1호 발터 권총 두 정이 놓여있었는데 부검 결과 치명상은 없고 시안화칼륨 중독이었다.[102]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의 시체를 화장하기 위해 이미 대부분을 써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