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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5:31:15

존 F. 케네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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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AOL디스커버리 채널에서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투표한 ‘가장 위대한 미국인’ 명단이다.
1위 2위 3위 4위 5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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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위 7위 8위 9위 1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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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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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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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위키 참고.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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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c224>
미합중국 제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
John F. Kennedy
파일:존 F. 케네디_컬러 사진.jpg
<colbgcolor=#0d164a> 본명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
John Fitzgerald Kennedy
출생 1917년 5월 29일
매사추세츠 주 노퍽 카운티 브루클라인 빌즈 가 83
사망 1963년 11월 22일 (향년 46세)
텍사스 주 댈러스 파크랜드 메모리얼 병원
묘소 버지니아 주 알링턴 카운티 알링턴 국립묘지
재임기간 제35대 대통령
1961년 1월 20일 ~ 1963년 11월 22일
서명
파일:존 F. 케네디 서명.svg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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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부모 아버지 조셉 P. 케네디 시니어[1]
어머니 로즈 케네디[2]
형제자매 조셉 P. 케네디 주니어[3]
여동생 로즈 케네디[4]
여동생 하딩턴 후작부인 캐슬린 케네디[5]
여동생 유니스 케네디 슈라이버[6]
여동생 패트리샤 헬렌 케네디[7]
남동생 로버트 케네디[8]
여동생 진 케네디 스미스[9]
남동생 테드 케네디[10]
배우자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11]
자녀 장녀 아라벨라 케네디[12]
차녀 캐롤라인 케네디[13]
장남 존 F. 케네디 주니어[14]
차남 패트릭 케네디[15]
학력 초우트 로즈마리 홀 (졸업)
프린스턴 대학교 (중퇴)[16]
하버드 대학교 (정치학 / 학사)
스탠퍼드 대학교 경영대학원 (중퇴)
병역 미합중국 해군 대위 전역
종교 가톨릭 (세례명: 요한)
신체 185cm[17] / O형[18]
최종 당적

의원 선수 2 (상원)
3 (하원)
의원 대수 83, 86 (상원)
80, 81, 82 (하원)
}}}}}}}}}
파일:John_F_Kennedy_Official_Portrait.jpg
백악관 공식 초상화[19]

1. 개요2. 약력3. 생애4. 갑작스러운 죽음5. 평가6. 선거 이력7. 케네디와 닉슨8. 가족과 개인사9. 연설과 어록
9.1. 취임식 연설9.2. 우리는 달에 갈 것입니다9.3. 1963년 아메리칸 대학교 연설9.4.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
10. 한국과의 관계11. 기타12.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12.1. 영화/드라마
12.1.1. 정극12.1.2. 대체역사/sf/창작물
12.2. 게임12.3. 소설12.4. 만화/애니메이션12.5. 기타
13.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제35대 미국 대통령 취임 선서
미국의 제35대 대통령.

역대 최연소의 나이에 당선된 미국 대통령[20]이자, 최초의 가톨릭 신자 미국 대통령[21]이며, 미국 최초의 비 WASP 대통령이자,[22] 최초의 20세기 출생 대통령이기도 하다.[23]

본격적인 TV 이미지 정치의 개막을 알린 대통령이기도 하며, 8명[24]하버드 대학교 출신 미국 대통령 중 한 명이자, 민주당 소속 대통령 중 최초이자 유일하게 암살당한 인물이기도 하다.[25]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등과 함께 미국 민주당을 대표하는 존재이자 미국 진보층과 민주당 지지자들의 정신적 지주에 근접한 대통령이다.

대표적인 업적으로 3차 대전이 될 수 있었던 쿠바 위기를 해결했으며, 아폴로 계획을 출범시켜 우주 경쟁에서 미국이 절대우위를 갖게 했다. "국가가 당신에게 뭘 해줄지 묻지 말고, 여러분이 국가를 위해 뭘 할 수 있는지 물으라."는 뉴 프런티어(New Frontier) 정신을 주장해 미국 국민들에게 영감을 줬다. 진영을 초월한 인기를 누리는 2차 대전 이후의 대통령이다.

2. 약력

3. 생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존 F. 케네디/생애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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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존 F. 케네디 행정부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존 F. 케네디 행정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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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갑작스러운 죽음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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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1월 22일 현지 시각으로 오후 12시 30분 쯤, 케네디는 유세지인 텍사스댈러스 시 다운타운에서 컨버터블로 퍼레이드를 벌이다가, 갑작스런 총탄에 목과 머리를 저격당해 숨을 거두고 만다. 현직 대통령이 퍼레이드 중에 살해되는 장면이 텔레비전으로 전국에 방송되며[26] 세계인에게 또다른 의미로 큰 충격을 주었다. 11월 25일, 장례식이 워싱턴 국회의사당에서 거행되었고 케네디의 유해는 버지니아 주 알링턴 묘지에 안장되었다.

5. 평가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존 F. 케네디/평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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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선거 이력

<rowcolor=#ffc224>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선거인단 수) 당선 여부 비고
1946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매사추세츠 11구

69,093 (71.87%) 당선 (1위) 초선
1948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106,366 (100.00%) 당선 (1위) 재선
1950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87,699 (82.28%) 당선 (1위) 3선
1952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매사추세츠 1,211,984 (51.35%) 당선 (1위) 초선
1958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1,362,926 (73.20%) 당선 (1위) 재선
1960 미국 대통령 선거 미합중국 34,220,984 (49.72%, 303명) 당선 (1위) 초선[27]

7. 케네디와 닉슨

파일:케네디 닉슨.jpg
1960년 대선 토론회에서 맞붙은 케네디와 닉슨.
현대에 들어서 케네디는 양당의 정체성을 확립한 인물로서 로널드 레이건과 많이 비교되지만, 호사가들 사이에서는 레이건보다 닉슨을 케네디와 더 많이 비교하는 편이다.

케네디는 어마어마한 부자 가문인 케네디 가문 출신인 반면, 리처드 닉슨은 서민층의 자녀로 태어났다. 두명 다 하버드 대학교를 지망하였으며, 케네디는 재력있고 하버드 대학교의 총장과 친구 사이였던 아버지의 도움으로 입학한 반면 닉슨은 자신의 실력으로 하버드에 합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등록금을 낼 수 없어 결국 입학을 포기했던 과거가 있었다. 케네디는 2차 세계 대전 시절 해군에서의 활약을 통해 태평양전쟁의 영웅 이미지를 메이킹하였지만 닉슨은 비전투 병력으로 근무했기 때문에 "저도 2차 대전에 참전했었습니다"라는 초라한 슬로건을 내걸 수밖에 없었다. 또 닉슨은 자신과 달리 젊고, 잘생긴데다가 언변도 화려한 케네디에게 엄청난 열등감까지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결국 이런 닉슨의 열등감은 그가 대통령이 된 이후 워터게이트 사건을 비롯하여 여러가지 무리수를 저지르는데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세세히 파고 든다면 그야말로 운명의 장난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둘의 악연은 길다. 닉슨과 케네디는 같은 1946년 중간선거에서 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1947년 초선 의원끼리의 친목회에서 초선 의원들이 가벼운 정책 토론을 가질 기회가 있었는데, 하필이면 케네디의 상대로 맞붙은 사람이 닉슨이었다. 게다가 하원 의원 시절 닉슨의 의원 사무실은 361호실이었는데, 바로 옆방인 362호실은 케네디의 방이었다.

이 때문에 닉슨과 케네디는 처음에는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1953년 케네디의 결혼식에 닉슨이 하객으로 참석했을 정도. 둘은 점심까지 같이 먹을 정도로 친한 사이였고, 1959년에는 케네디가 만약 자신이 대선 후보로 나서지 않는다면 닉슨에 투표할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둘의 사이는 각별했다. 그러나 케네디는 경선에서 승리해 본선에 나서 닉슨과 붙게 되었다.

이렇듯 출신 성분부터 소속 정당, 생애, 정치 성향까지 모든 면에서 반대인 두 사람이었지만 정작 두명 다 대통령 임기를 제대로 끝내지 못했다는 점이 미국 현대사의 아이러니이자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8. 가족과 개인사

어릴 적 식탐이 장난 아니어서 식사 전 기도하는 시간에도 뭔가를 몰래 집어먹곤 했다고 한다. 형인 조셉의 음식까지 집어먹어서 조셉이 때리려 했는데, 입에 파이를 가득 물고 잘못했다고 빌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 또는 조셉의 파이를 낚아채서 달아났는데, 쫓아가 잡고 나니 얼굴이 파이 소로 범벅이 돼있었다고 한다. 달아나는 와중에도 파이를 입 안에 아귀아귀 쑤셔넣었는데 조준을 잘못했던 것. 어느 쪽이든 존의 꼬라지가 하도 웃겨서 조셉이 그냥 넘어갔다고 한다.

당시 신사정장에는 당연히 중절모, 실크 해트가 따라오는 것이 상식이었으나, 케네디는 맨머리로 대중 앞에 나섰다.[28] 그 후로 미국 대통령들은 대중에 나설 때 모자를 대부분 쓰지 않게 되었고, 그 풍조는 전 세계로 퍼져서 모자는 지금도 드레스 코드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또한 유난히 뛰어난 패션 감각으로 당시 케네디의 패션 코드는 전세계에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다. 아마도 정치가가 디자이너를 제치고 패션 아이콘이 된 사례는 에드워드 8세를 빼면 케네디밖에 없을 것이다. 다만 케네디도 전통을 완전히 단절시킨 건 아니고 실크 해트를 쓴 케네디 사진은 생각보다 꽤 많이 나온다. 이 전통의 종지부를 완전히 찍은 것은 후임인 린든 B. 존슨.

다만 사생활적 면에서는 부정적인 평가가 많은 편이다. 원앙 부부 같은 이미지와 달리 재클린 케네디(1929~1994)[29]와의 부부 사이는 사실 그리 좋지 않았다고 한다. 케네디가 바람둥이였다는 말도 있으며[30], 그 자신의 건강에 자신감이 없어 그 심리적 반동으로 성을 지나치게 탐닉했으며 아내 몰래 비밀 검열삭제 파티를 열었다는 주장도 있다. 마릴린 먼로와의 썸싱은 유명한 일화. 이 때문에 먼로와 이혼한 먼로의 전 남편인 조 디마지오는 케네디 일가가 마릴린 먼로를 죽게 한 배후 인물이라고 의심해서 평생을 증오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 디마지오는 마릴린 먼로를 상대로 매일 야구방망이를 사용해서 폭행을 일삼은 사람이라서(...)[31]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는 의문이다.[32] 그 밖에도 백악관에서 아내가 외출만 하면 수영장에서 여비서 2명[33]과 검열삭제를 하면서 놀았다고 한다. 다만 이런 묘사에 대해 케네디가나 케네디 행정부 당시 전직 관료들이 반발하기도 하는 걸 보면 루머나 부풀려진 측면도 어느정도는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했듯 대외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건강이 상당히 안 좋았다. 에디슨 증후군 등의 이야기는 선거 당시에도 논란이 된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러한 건강상의 문제는 당시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사실 건강 상태를 사실대로 이야기했다면 정계 은퇴까지도 갈 정도였고, 평생 두 번의 병자성사를 받은 적도 있었다.[34] 대학 시절 사고로 척추 수술을 받았고, 엄청난 재활 훈련을 받았지만 그 후유증이 평생 남아 있었던 듯 하다. 게다가 2차 세계대전 당시 어뢰정의 침몰 후 구사일생으로 귀환하는 과정에서 허리 부상이 크게 악화되었다고 한다. 선거 당시에는 하루 종일 유세를 뛰고 나면 등(허리)의 통증을 가라앉히기 위해 저녁에 한 시간씩 목욕탕에서 뜨거운 탕 안에 앉아 있어야 했다고 그의 전기에 소개되어 있다. 사후에 알려진 바에 따르면 백악관 집무실에서도 거의 흔들 의자에 앉아 국정을 보았던 듯 하다. 실제로 21세기 들어 케네디를 다룬 영화에서는 그가 각료들과 오벌 오피스에서 회의를 할 때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연출하기도 했다. 대통령 재직 중 크레인에 실려서 비행기를 타는 사진도 사후 공개된 바 있다. 하여튼 이런저런 건강상 문제로 케네디는 스테로이드제를 복용해서 체중을 불리려 했고 남성 호르몬도 투여했다고 한다.[35] 스테로이드 복용 때문에 얼굴색이 거무튀튀해졌는데, 대중들에게는 오히려 햇볕에 그을린 건강한 구리빛 피부로 인식되어 그의 인기를 더하는 요인이 되었다니 아이러니.

아내 재클린과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낳았다. 장남인 존 F. 케네디 주니어는 1963년 당시 3살의 나이로 아버지 장례식에서 경례하던 모습으로 세계를 울렸으나, 그 역시 커가면서 대릴 해나와의 관계 등으로 여러 루머에 시달려야 했고, 1999년 7월 타고 다니던 비행기가 추락하여 갑자기 아내와 함께 세상을 떠나면서 한동안 음모론에 시달리기도 했다.

차남인 패트릭 부비어 케네디는 미숙아로 태어났으며, 신생아 호흡곤란 증후군으로 아버지가 죽기 수 개월 전 1963년 생후 2일만에 사망했다. 당시에는 미숙아에 관한 의학 지식이 부족하여 의료진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으나, 대통령의 아들인 그의 죽음은 이후 신생아 호흡곤란 증후군과 각종 미숙아 관련 질환들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파일:Caroline_Kennedy_US_State_Dept_photo.jpg

케네디와 재클린의 아이 중 지금도 유일하게 살아있는 사람은 첫째인 딸 캐롤라인(1957년 생) 뿐이다. 캐롤라인은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숙부인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2009년 타계)과 함께 버락 후세인 오바마 후보를 공개 지지하여 그의 당선에 기여했다. 2013년 후반기부터 2017년 1월까진 주일 미국대사로 재직하기도 했다.

참고로 이런 가족사와는 달리 케네디의 어머니 로즈 피츠제럴드 케네디는 장수했는데, 1890년에 태어나서 무려 100세를 훌쩍 넘긴 1995년에 사망했다. 막내여동생 진 앤도 92세까지 장수하고 2020년에 사망했다.

본인은 이 세상에서 최고로 출세한 사람 중 한 명이 되었으나 그의 가문은 비극으로 점철되었다. 바로 밑의 여동생 로즈는 가문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전두엽 절제술을 받은 뒤 평생 병원에서 살아야만 했으며 형 조셉 주니어는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해서 전사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자녀들 중 현재까지 살아있는 사람은 장녀 캐롤라인 뿐이다. 아마도 가문의 모든 운이 존 혼자에게 몰빵된 모양이다.

또 다른 여동생 유니스 케네디 슈라이버(1921~2009)는 위와 같은 가정사 때문에 장애인 문제에 관심을 가져 1963년 메릴랜드에서 발달장애인을 위한 여름 캠프를 시작했고, 1968년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 첫 스페셜 올림픽을 개최했다.

다만 케네디 본인을 포함하여 몇몇 가문 일원들의 말년이나 개인사가 영 좋지 않다보니, 일명 케네디가의 저주라는 도시전설급의 이야기도 나올 정도인데, 여러 이야기들이 있지만 몇 가지만 적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1. 첫째 동생 로버트 F. 케네디1968년팔레스타인계 미국인인 시르한 비샤라 시르한{سرحان سرحان Sirhan Bishara Sirhan (Sirhan Sirhan)}의 총에 맞아 사망.
2. 둘째 동생 에드워드 케네디도 이런저런 불미스러운 일들로 영영 미국 대통령의 꿈을 이루기 어렵게 되었다. 그나마 형들과는 달리 장수했다는 것을 위안으로라도 삼아야 할까?
3. 아내 재클린은 케네디 암살 이후에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와 재혼하며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4. 아들 존 F. 케네디 주니어는 1999년 여름경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
2남이름존 피츠제럴드 케네디 (John Fitzgerald Kennedy)
1917년 5월 29일 ~ 1963년 11월 22일
결혼이름재클린 리 케네디 오나시스 (Jacqueline Lee Kennedy Onassis)
1929년 7월 28일 ~ 1994년 5월 19일
결혼1953년 9월 12일
자녀<colcolor=#373a3c,#212121><colbgcolor=#c2e68b> 1녀이름아라벨라 케네디 (Arabella Kennedy)
1956년 8월 ~ 1956년 8월
2녀이름캐롤라인 부비에 케네디 (Caroline Bouvier Kennedy)
1957년 11월 27일 ~ 현재
남편에드윈 아서 슐로스버그 (Edwin Arthur Schlossberg)
1945년 7월 19일 ~ 현재
자녀 1녀이름로즈 케네디 슐로스버그 (Rose Kennedy Schlossberg)
1988년 6월 25일 ~ 현재
2녀이름타티아나 셀리아 케네디 슐로스버그 (Tatiana Celia Kennedy Schlossberg)
1990년 ~ 현재
1남이름존 부비에 케네디 슐로스버그 (John Bouvier Kennedy Schlossberg)
1993년 1월 19일 ~ 현재
1남이름존 피츠제럴드 케네디 주니어 (John Fitzgerald Kennedy Jr.)
1960년 11월 25일 ~ 1999년 7월 16일
아내캐럴린 잔 버셋 (Carolyn Jeanne Bessette)
1966년 1월 7일 ~ 1999년 7월 16일
2남이름패트릭 부비에 케네디 (Patrick Bouvier Kennedy)
1963년 8월 7일 ~ 1963년 8월 9일

9. 연설과 어록

연설에도 상당히 능해서 유명한 연설이 많다. 연설 외에도 자유주의, 세계시민주의, 군축, 도전정신 등으로 알려진 그의 사상이 묻어나는 어록들이 상당히 많다.
"전쟁은 오늘날 군인들이 누리는 것과 같은 명성, 특권을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누릴 수 있을 때 끝나게 될 것이다."
1940년대에 케네디는 해군에서 복무[36]하며 편지를 통해 고향에서 온 많은 친구들과 서신을 주고받았다. 이 인용문은 그가 쓴 편지 중 하나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 후 1965년 케네디에 관한 회고록에 실렸다.
"세계에 많은 나라가 있는데 정부끼리는 잘 지내기 어렵더라도 사람들끼리는 친구가 될 수 있다. 여러분이 미래에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 미래의 희망이다. 우리가 서로 도움의 손길을 건넬 의지만 있다면 국경은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는다."[37]
"Those who make peaceful revolution impossible, make violent revolution inevitable."
평화적 혁명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사람이 폭력적 혁명을 불가피하게 만든다.
"Mankind must put an end to war, or war will put an end to mankind."
우리가 전쟁을 끝내지 않으면, 전쟁이 우리를 끝낼 것이다.
"Domestic policy can only defeat us; foreign policy can kill us."
내치에서의 실수는 선거에서 지면 그만이지만, 외교에서의 실수는 우리 모두에게 죽음을 가져올 수 있다.
"We choose to go to the moon. We choose to go to the moon. We choose to go to the moon in this decade and do the other things, not because they are easy, but because they are hard, ... Well, space is there, and we're going to climb it, and the moon and the planets are there, and new hopes for knowledge and peace are there. And, therefore, as we set sail we ask God's blessing on the most hazardous and dangerous and greatest adventure on which man has ever embarked. Thank you."
우리는 달에 가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달에 가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10년 안에 달에 갈 것이고, 다른 일들도 할 것입니다. 쉽기 때문이 아니라, 어렵기 때문입니다. (중략) 우주가 그곳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주에 오릅니다. 달과 행성들이 거기 있기 때문에, 지식과 평화에 대한 새로운 희망이 그곳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의 축복을 빌며 항해하기로 결정하였고 이는 지금껏 인류가 승선한 가장 불확실하고, 가장 위험한, 그리고 가장 위대한 모험이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Dante once said that) the hottest places in hell are reserved for those who in a period of moral crisis maintain their neutrality.”
"(단테가 언젠가 말하기를)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곳은 도덕적 위기의 시대에 중립을 지킨 자들을 위해 예약되어 있다."[38]

9.1. 취임식 연설


케네디의 대통령의 취임 영상. 잘 보면 이 동영상에는 전후 미국 대통령이 5명이나 등장한다. 해리 S. 트루먼,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린든 B. 존슨, 리처드 닉슨, 그리고 케네디 본인. 다만 대통령에 재직한 순서가 트루먼, 아이젠하워, 케네디, 존슨, 닉슨이라서 촬영된 시점 기준으로 따질 경우 이 영상에 등장하는 미국 대통령은 총 3명.[39] 이 5명의 재임 기간은 1945년부터 1973년까지 총 28년에 달한다.[40]
"And so, my fellow Americans, ask not what your country can do for you, ask what you can do for your country. My fellow citizens of the world, ask not what America will do for you, but what together we can do for the Freedom of Man."
자, 미국 국민 여러분. 국가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 묻지 말고, 여러분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자문해 보십시오.[41] 그리고 세계의 시민 여러분, 미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베풀어 줄 것인지를 묻지 말고 우리가 손잡고 인간의 자유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자문해 보십시오.[42][43]

9.2. 우리는 달에 갈 것입니다


We choose to go to the moon. We choose to go to the moon. We choose to go to the moon in this decade and do the other things, not because they are easy, but because they are hard."
우리는 달에 가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달에 가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10년 안에 달에 갈 것이고, 다른 일들도 할 것입니다. 쉽기 때문이 아니라, 어렵기 때문입니다.

1962년 휴스턴라이스 대학교에서의 연설. 아폴로 계획을 상징하는 연설로 자주 인용된다.

9.3. 1963년 아메리칸 대학교 연설

"our most basic common link is that we all inhabit this small planet. We all breathe the same air. We all cherish our children's future. And we are all mortal.”
"우리들(인류)의 가장 기본적인 연계고리는 이 작은 행성의 주민이며, 모두 똑같은 공기를 마시며, 모두 자손들의 미래를 소중히 여기며, 유한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1963년 6월 아메리칸 대학교에서 행한 평화에 관한 연설의 마지막 부분. 바로 전해 쿠바 미사일 위기가 있은지 약 반 년 정도 지난 시점에서 한 연설이다. 비핵화 또는 핵 감축, 핵실험 금지에 대한 첫 걸음을 뗄 수 있게 된 시초가 된 연설로 평가받는다.[44] 때문에 쿠바 미사일 위기를 다룬 영화 D-13(원제: Thirteen Days)의 마지막에 케네디 대통령의 실제 연설이 전문 중 일부가 편집된 상태로[45] 육성으로 삽입되었으며, 쿠바 미사일 위기와 비슷하게 러시아와의 가상의 핵전쟁 위기를 다룬 톰 클랜시의 동명의 소설 원작의 영화 썸 오브 올 피어스에서 마지막에 러시아 대통령이 미 대통령과 합동 연설을 하며 그대로 인용하는 장면이 나온다.

9.4.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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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한국과의 관계

케네디가 1961년 1월 취임한 후, 케네디 행정부 안에선 4.19 혁명의 여파로 1960년 6월 들어선 장면 내각이 '위기 대처 능력이 떨어져 민중 폭발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고, 또 이런 노력이 실패해 장면 정부가 무너지면 최악의 군사정변이 일어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케네디 행정부는 특사와 보좌관을 한국에 보내 경제권과 인사권을 장악하고, 장면 총리 뒤에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2차대전 직후 일본에서의 GHQ 방식을 연상시키는 사실상의 신탁 통치도 검토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5.16이 일어나면서 무산되었다.

이듬해 5.16 군사정변이 벌어진 후 이를 보고받은 케네디는 "절망적 상황(a hopeless situation)"이라며 좌절감을 드러냈다.#[46] 케네디는 박정희 정권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는데, 이는 취임사에서도 보이듯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신생국들이 독재 등 더 가혹한 환경에 놓여 망가지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한 그의 가치관 및 노선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케네디는 정치적 혼란, 빈곤에 허덕이던 한국에 대한 모든 지원을 중단하고, 결과가 어떻게 되든 그냥 내버려둘까 고민하기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렇지만 북한이 또 남침하기라도 하면, 냉전 당시 진영 싸움에서 밀릴까 우려한 케네디는 1963년 조기 대선을 치르겠다는 당시 군사정부의 타협책 등을 반영해서[47]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한국에 계속 원조를 제공한다.[48] 이보다 앞선 1961년 11월, 그러니까 5.16으로부터 불과 반년 만에 케네디는 당시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를 백악관에서 접견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당시 한국의 상황이 지긋지긋했는지, 1962년에 동아시아에서 오랜 기간 생활한 소설가 펄 벅을 만난 케네디는 아시아에 대한 견해를 물어보고는 펄 벅이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내 생각에는 미군이 한국에서 철수해야 할 것 같소.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가오. 우리는 빠져 나오고 대신에 옛날처럼 일본이 한국을 통제하게 해야 할 것 같소"라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다만 이에 대해 벅이 "그건 마치 우리 미국이 예전처럼 영국 지배로 돌아가라는 소리와 같지 않습니까?"라고 답변하자 그도 농담이라는 투로 물러났다고 한다. 카더라성 일화일 수도 있지만, 피터 콘이 저술한 펄 벅 평전에서도 나온다는 걸 보면 전혀 근거없는 이야기는 아닌 듯.

정치적인 인연과는 별도로 6.25 전쟁 직후 초토화됐던 남한의 서해 최북단 섬 백령도를 사람 살 만한 섬으로 탈바꿈 시킨 숨은 은인이기도 하다. 1959년 천주교 백령도 성당의 초대 주임신부로 미국인 신부 에드워드 모펫이 부임했는데 케네디가 바로 이 모펫 신부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죽마고우라고 한다. 모펫 신부의 집안은 엄청난 부잣집이었고 집안의 재력을 바탕으로 백령도 주민들을 위한 원조 사업에 직접 나섰다. 모펫 신부는 집안의 지원도 모자라서 아예 미국 정부에 원조를 요청했는데 운이 좋게도 그 당시 정부의 최고 실권자가 어린 시절 친구였던 케네디라서 화끈한 원조가 가능했다고 한다. 이 영향 덕분인지 서해5도의 다른 섬 중에서도 백령도는 전쟁 직후 빠르게 정상을 되찾을 수 있었고 1960년대 백령도 전체 주민 중 천주교 신자 비율이 무려 90%를 넘을 정도로 영향력이 막강했다고 한다.

11. 기타

미 역사상 최초의 해군 출신 대통령으로, 그 뒤를 이어 취임한 4명(존슨, 닉슨, 포드, 카터)의 대통령이 모두 해군 장교 출신이라는 재미있는 기록이 있다.

후임 대통령 5명 중 카터를 제외한 4명이 자신보다 나이가 많다.

키가 무려 185cm로 장신이다. 린든 존슨보다 작지만 로널드 레이건와 맞는 키이다.

미간이 좁은 편인데, 반대로 아내는 미간이 넓은 편이라 서로 유전자 정화하려고 만난거냐는 드립이 있다.

기일이 한국의 제14대 대통령 김영삼과 같다. 차이라면 '현직 도중'과 '전직'이라는 것이다. 또 신기하게 김영삼 대통령이 존경한 정치인이기도 하다.

역대 미국 대통령 중에 첫번째 천주교 신자인데다 아일랜드계 미국인이라는 점 때문에 정적들의 공격을 제법 받았다. 대통령제가 세계 최초로 시작되어 상당히 많은 수의 대통령을 배출한 미국에서도 천주교 신자 대통령은 이 사람과 조 바이든 단둘밖에 없을 정도로 그리 취급이 좋은 편이 아닌데 그는 처음이기까지 했으니 여러모로 고생이 많았을 것이다.

유머감각이 대단한 대통령이었다. 대통령 당선 후 "난 대통령이 되어야만 했어요. 아이들 받아주는 아파트 구하기가 얼마나 고역이었는지"란 농담을 한 일도 있고, 프랑스에 갔을 때 프랑스 언론들은 대통령인 케네디보다 그의 부인인 재클린에게 더 집중하여 취재를 벌였는데, 이를 본 케네디는 "저를 제대로 소개할 수 없을 것 같군요. 저는 재클린 케네디 여사를 프랑스로 모시고 온 남자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대선 당시엔 트루먼과 논쟁을 하다 불같은 성격의 트루먼에게 SOB란 말을 듣기도 했는데[49] 이후 트루먼에게 사과하며 남긴 “트루먼이 저를 SOB라고 부른 거에 대해 사과하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에게 제가 SOB인 것에 대해 사과할 것입니다.“라는 말도 나름 유명하다. 심지어 쿠바 미사일 위기의 한복판에서 각료들과 대책회의를 하는 와중에도, 여러분 전쟁이 나면 백악관 방공호에 우리 모두가 들어갈만한 공간이 없습니다라는 블랙유머를 날려서 살 떨리는 분위기를 조금은 누그러뜨리기도 했을 정도.

에이브러햄 링컨과 여러 면에서 연관이 있다고 호사가들 사이에서 거론되기도 한다. 링컨과 케네디의 공통점 항목 참조. 다만, 이 항목에서 보듯이 케네디는 태어날 때부터 비교적 순탄한 인생을 살아왔지만 링컨은 영 그랬지 못했기에, 즉 차이점도 꽤 있기에 그냥 이런 정도의 공통점이 있다 정도로만 알면 될듯. 그래도 둘 다 네임드 대통령들이다 보니 1991년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가장 위대한 대통령 조사에선 링컨과 함께 순위권에 오르기도 했다.

20세기 현대(여론조사가 본격적으로 실시된 20세기 중반 이후) 미국 대통령 중 평균 지지율이 가장 높은 대통령이기도 했다. 최고 79%, 최하 56%, 평균 71%.[50] 물론 이는 그의 집권기가 상대적으로 짧았던 영향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높은 수준이긴 했다.

이름은 존(John)이지만 재클린 여사를 비롯하여 그와 가까운 친우들에게는 잭(Jack)이라는 애칭으로도 불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그가 등장인물로 나오는 여러 미디어 작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잭이라는 애칭은 원래 존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에게 흔히 부여된다.

케네디 시점으로 당시 한국은 대한민국 제2공화국으로장면 내각, 국가재건최고회의 때였다. 윤보선 대통령~박정희 권한대행 및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재임기.[51] 그리고 북쪽최용건, 김일성.

케네디는 당시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도 인기가 꽤 좋아, 당시 백악관엔 대통령에게 보내는 어린이나 청소년들의 편지가 유난히 많았다고 한다. 케네디 역시 가능한 한 직접 이들의 편지에 답장을 써 주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그를 만난 세계적 유명인사가 2명 있다.
파일:external/img.khan.co.kr/20090314.01100115000006.01M.jpg
케네디와 악수하는 이 소년은 훗날 미국의 제42대 대통령이 된다.
파일:external/www.donga.com/200610040067.jpg
저 원 안에 있는 소년이 바로 반기문UN 사무총장.

항상 입에 시가를 물고 있을 정도로 상당한 시가 애호가였으며, 쿠바와 교역을 끊는 문서에 서명하기 직전에 H. 우프만사의 시가 1,200개비를 마지막으로 주문했다고 한다. 이것과 관련되어서 나온 이야기 중에 "케네디는 쿠바산 시가만을 사랑했지만 체 게바라는 쿠바까지 사랑했다."라고 비유한 말도 있었다. 케네디가 선호했던 시가는 2002년도에 단종된 H. 우프만사의 머신메이드 시가인 쁘띠 우프만이었다.

닉슨은 재임기 국세청을 동원해 정적들의 약점을 잡고 도감청을 하는 등 온갖 정치공작을 벌였는데, 본인만 욕을 바가지로 먹자 좀 억울했는지 "케네디도 했는데..." 라고 물타기성 주장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건 일부는 사실이라고 한다. 케네디는 극우단체를 후원하는 부유층들을 압박하려고 국세청에 세무조사를 시행하도록 지시, 극우단체의 돈줄을 끊어버렸다. 또한 철강업체들의 담합을 막기 위해 철강업체들 주요 임원들의 자산에 대한 세무조사로 철강업체들의 담합을 좌절시켰다고 한다. 또한 여러 경로로 정적들에 대한 도감청과 대화의 비밀 녹음도 했다고 한다.

마틴 루터 킹 목사에게 후버의 감시를 몰래 알려준 것도 케네디였다고 한다. 킹 목사가 백악관을 방문했을 때 단 둘이서 백악관 정원을 산책하면서 알려줬다고 한다.

전임 대통령대머리[52]라 묻히는 사실인데, 이 사람도 집안 내력으로 탈모가 좀 있었다. 당장 아버지인 조지프 케네디가 그렇고 존의 형제들 역시 모두 M자 탈모가 좀 심한 편이었다. 존 역시 마찬가지. 하지만 정계에 입문할 때 즈음부터 가르마를 2:8로 바꾸어 앞머리를 앞으로 내렸다가 올리는 스타일로 바꾸면서 앞머리를 이용해 탈모를 요령껏 가렸다. 꽤 먼 후임인 도널드 트럼프의 헤어스타일과 원리가 유사하다. 다만 트럼프의 경우 탈모가 없음에도 그런 스타일을 고수했다. 어쨌든 이런 요령있는 헤어스타일 덕분에 형 조지프나 동생 로버트, 에드워드보다 M자 탈모가 덜 심해보인다. 하지만 젊은 시절에 머리를 올린 사진을 보면 20대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존 탈모는 다른 형제들 못지 않았다. 다만 존과 그의 형제들은 M자가 심하긴 했지만 정수리 탈모 증상은 나타나지 않아서 전체적으로 탈모가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파일:$0.50 Kennedy.png

1964년부터 미국 하프 달러(50센트) 주화의 도안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리 알려지지 않는 사실이지만 JFK과 조지프 매카시는 굉장히 가까웠다. 아니 정확히는 케네디 가문과 매카시는 미국 비주류인 아일랜드계 천주교도라는 같은 포지션을 가지고 있었기에 서로 상부상조했으며 JFK도 매카시를 여러번 두둔 했다. 아예 매카시 경질 안건에 대해 민주당 의원 중 유일하게 기권표를 냈을 정도였다.[53]

12.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12.1. 영화/드라마

12.1.1. 정극


파일:external/cache.reelz.com/78152.jpg

12.1.2. 대체역사/sf/창작물

12.2. 게임

12.3. 소설

12.4. 만화/애니메이션

12.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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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0044C9> 일생 생애
가족 아버지 조지프 P. 케네디 · 배우자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 아들 존 F. 케네디 주니어 · 딸 캐롤라인 케네디 · 형 조지프 P. 케네디 주니어 · 남동생 로버트 F. 케네디 · 테드 케네디
역대 선거 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
관련 정치인 린든 B. 존슨 · 리처드 닉슨 · 로버트 맥나마라 · 피델 카스트로
어록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
사건사고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
평가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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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88년 출생, 1969년 사망. 위키백과[2] 1890년 출생, 1995년 사망. 위키백과[3] 1915년 출생, 1944년 사망. 미국 해군 대위로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 하였으며 도중 전사하였다.[4] 1918년 출생, 2005년 사망.[5] 1920년 출생, 1948년 사망.[6] 1921년 출생, 2009년 사망. 국무부와 법무부에서 근무했으며 지체 장애인 특수 올림픽인 스페셜 올림픽을 창설했다. 딸 마리아 슈라이버가 1986년 아놀드 슈워제네거와 결혼했으나 2011년에 이혼하였다.[7] 1924년 출생, 2006년 사망.[8] 1925년 출생, 1968년 사망.[9] 1928년 출생, 2020년 사망. 빌 클린턴 행정부 당시 아일랜드 주재 미국 대사로 재임하였다.[10] 1932년 출생, 2009년 사망.[11] 1929년 출생하여 1953년 케네디와 결혼했고 1994년 사망했다.[12] 1956년 출생, 유산[13] 1957년 출생.[14] 1960년 출생, 1999년 사망.[15] 1963년 출생, 1963년 사망.[16] 건강 문제로 휴학을 했지만 나중에 자퇴했다.[17] #[18] #[19] 미국의 화가 아론 쉬클러(Aaron Abraham Shikler 1922년 3월 18일 - 2015년 11월 12일)가 그린 초상화로 영부인인 재클린 케네디의 요청으로 케네디 사후인 1970년에 그려졌다. 재클린의 초상화와 낸시 레이건의 초상화도 그의 작품이다.[20] 당시 만 43세 6개월. 역대 최연소의 나이에 취임한 미국 대통령은 미국 부통령에서 대통령직을 승계한 당시 만 42세 11개월의 시어도어 루스벨트이다.[21] 케네디 이후 60년이 지나서야 두 번째 가톨릭 신자 대통령인 조 바이든이 등장했다.[22] 아일랜드 이민자의 후손이며 가톨릭이다.[23] 전임자들인 해리 S. 트루먼(1884년)과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1890년)보다 한 세대 가까이 젊었다. 아버지 조지프 케네디가 1888년생이다.[24] 8명 하버드 출신 미국 대통령 명단: 존 애덤스(2대), 존 퀸시 애덤스(6대), 러더포드 B. 헤이즈(19대), 시어도어 루즈벨트, 프랭클린 루즈벨트, 조지 W. 부시, 존 F. 케네디, 버락 오바마. 이 중 부시와 오바마는 각각 비지니스 스쿨과 로스쿨을 다녀 학부 출신은 아니다.[25] 그 이전에 암살당한 링컨, 가필드, 매킨리는 모두 공화당 소속이었다.[26] 유사한 사건으로는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 행사 중 발생한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에서 대통령 부인 육영수가 피격되는 장면이 전국에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된 것이 있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방송사고로 꼽힌다.[27] 1963.11.22 피살[28] 전임 대통령들 가운데도 대중들 앞에서 중절모를 쓰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언론 매체를 위한 부분적인 것이라 볼 수 있다. 1950년대까지 미국 정치인들에게 중절모는 보편적인 것이었다. 케네디의 대선 라이벌인 리처드 닉슨도 당시에는 중절모를 썼다.[29] 덧붙이자면 재클린은 나중에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와 재혼하면서 세계를 놀라게 했다.[30] 케네디의 아버지 조셉의 이중생활 영향을 받아 이런 성생활이 생겼다는 것이 중론이다. 한때 영화 제작자인 조셉은 할리우드의 여배우들과 염문을 일으키곤 하였다.[31] 다만 이런 폭력성과는 별개로, 조가 마를린을 진심으로 사랑한 건 사실이다. 먼로가 정신병원에 입원했을 때, 아무도 도우러 오지 않던 다른 남자들과 달리 조만 유일하게 병원으로 찾아와 의사와 실랑이를 벌여가며 마를린을 퇴원시켜주었다. 두 사람은 재결합 결정까지 내렸으나 얼마 안 가 마를린이 사망하면서 무산되었다.[32] 이 여성 편력 문제는 케네디가 형제들한테 공통적으로 나타난다.[33] 속칭 fiddle과 faddle.[34] 가톨릭 교도로서 병자성사 받는다는 건 죽을 날이 머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금은 그저 좀 심하게 아프면 받을 수 있는 게 병자성사지만, 저 시기 병자성사는 종부성사라는 이름으로 불려 그야말로 죽기 전에 받는 의식이었다. 그는 자기 수명이 45세를 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그런 그가 만 46세에 암살로 죽을 거라고 생각이나 했을까?[35] 이런 류의 소문이 신빙성 있게 돌기만 해도 치명적이었기 때문에 존 에드거 후버 FBI 국장에게 슬슬 기었다는 카더라도 있을 정도였다.[36] 많은 미국 젊은이들이 그랬듯이 케네디 또한 징병기준 미달(!)로 징집 탈락하였으나 본인의 강력한 의지로 전투병과로 배치되었다.[37] 세계 각국의 학생들이 백악관에 방문했을 때 한 얘기. 그리고 이 학생들 중엔 반기문도 있었는데, 그는 UN 사무총장이 된 후 이 얘기를 전하는 기고문을 쓰기도 했다.[38] 보통 잘못된 형태의 양비론이나 정치적 무관심을 비판할 때 자주 인용하는 발언이다. 케네디는 1960년 대통령 선거 때 인디애나 주 유세 도중 이 발언을 처음 하였다. 이후 1963년 평화봉사단(Peace Corps) 행사 때 다시 이 발언을 꺼냈다. 그런데, 이 발언을 케네디가 한 것은 맞지만 정작 단테는 이런 발언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보통 단테의 신곡지옥편에 있다고 알려져 있으나, 정작 지옥편에는 이런 구절이 없다.[39] 닉슨은 전직 부통령, 존슨은 현직 부통령 자격으로 참석한 것이다.[40] 이 영상에 등장하는 5명의 대통령 중 한 명을 제외하고는 다들 임기의 시작 또는 끝이 순탄치 않았다. 트루먼과 존슨은 전임 대통령의 급서로 인해 대통령직을 승계한 사례이며, 케네디는 첫 임기를 끝마치기도 전에 암살당했고, 닉슨은 재선까지는 성공했으나 2번째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불명예스럽게 퇴진했다. 그나마 예외였던 아이젠하워조차 예전 직장 문제인종 갈등으로 인해 여러 모로 골치를 앓았다.[41] 케네디의 가장 유명한 발언 중 하나로, 사실 이 말을 처음 쓴건 클리블랜드 대통령이라고 한다. 다만 이 문장의 경우 한국에서는 국가주의의 표본처럼 인용되는 경우도 많은데, 정작 뒷 문장을 보면 그야말로 문맥을 무시한 인용이다.[42] 결국 이 문장의 앞 내용은 '우리 세대는 최악의 위기 속에서 자유를 지킬 역할을 부여받았고, 우리는 그것을 책임지고 수행해야 한다는 내용이고, 생략된 이 문장의 뒷 내용은 "여러분들이 국가를 위해 희생하는 만큼 우리 정부에게도 요구하라. 우리 정부는 준비가 되어 있다."라는 내용이다. 즉, 핵심은 "미국 국민, 정부, 전세계인들 모두 실천하여 자유를 지키자."라는 내용이다.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라는 헌법을 전제로 실천하고 국가가 잘못된 길로 가지 않게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국민(주인)들을 국가가 얼마든지 뒷바라지 해주겠다는 내용을 정반대로 국가주의라고 이해하면 일종의 악마의 편집이라 볼 수 있다. 연설문 전문(한국어 번역).[43] 당시 미국이 시행하던 징병제와 시기상 가까운 베트남 전쟁에 본 연설을 끼워맞추며 비판하려는 해석도 존재하나, 이는 연도를 잘못 맞춘 억측이다. 케네디가 재임 중일 때 이미 베트남전쟁의 확전의 기운이 보이는 건 사실이었지만 케네디 본인은 본 항목에 나온 그대로 오히려 베트남 확전을 경계하고 발을 빼려고 했다는 증거가 많으며, 무엇보다 케네디 생전 베트남은 미국이 개입중인 여러 냉전기 분쟁지역 중 하나에 불과했고, 미군의 개입도 간접적 지원에 머물렀지 후임자 존슨, 닉슨 시절 처럼 대규모 지상군 파병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자연스럽게 따라서 베트남전 시기 흔히 생각하는 파월장병의 사회적 처우 문제도 아직 부각되지 않았던 시절이다.[44] 원문: "What kind of peace do I mean and what kind of a peace do we seek? Not a Pax Americana enforced on the world by American weapons of war. Not the peace of the grave or the security of the slave. I am talking about genuine peace, the kind of peace that makes life on earth worth living, and the kind that enables men and nations to grow, and to hope, and build a better life for their children -- not merely peace for Americans but peace for all men and women, not merely peace in our time but peace in all time...I speak of peace, therefore, as the necessary, rational end of rational men. I realize the pursuit of peace is not as dramatic as the pursuit of war, and frequently the words of the pursuers fall on deaf ears. But we have no more urgent task...Our problems are manmade; therefore, they can be solved by man. And man can be as big as he wants. No problem of human destiny is beyond human beings. Man's reason and spirit have often solved the seemingly unsolvable, and we believe they can do it again...And if we cannot end now our differences, at least we can help make the world safe for diversity. For in the final analysis, our most basic common link is that we all inhabit this small planet. We all breathe the same air. We all cherish our children's futures. And we are all mortal."[45] 생략된 부분은 5부분으로 다음과 같다. 'Not a Pax Americana enforced on the world by American weapons of war. Not the peace of the grave or the security of the slave.', ' and the kind that enables men and nations to grow, and to hope, and build a better life for their children', 'but peace for all men and women', 'I speak of peace, therefore, as the necessary, rational end of rational men. I realize the pursuit of peace is not as dramatic as the pursuit of war, and frequently the words of the pursuers fall on deaf ears. But we have no more urgent task...', 'And man can be as big as he wants. No problem of human destiny is beyond human beings. Man's reason and spirit have often solved the seemingly unsolvable, and we believe they can do it again...And if we cannot end now our differences, at least we can help make the world safe for diversity.'[46] 5.16 당시 카터 매그루더 주한미군 사령관이 쿠데타군을 진압하려 했으나, 당시 (장면과 사이가 좋지 않던) 윤보선 대통령은 오히려 이를 말리는 포지션을 취했고, 장면 총리와는 연락이 되지 않아서 포기한 사실이 있다.[47] 베트남 파병도 미국에 잘보이기 위해 이때 군사정부가 먼저 거론하는데, 케네디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후임인 린든 존슨이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한국군 파병이 결정된다.[48] 케네디 정부와 군사정부가 겹치던 시기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2~3%대로, 개도국 시절임을 감안해도 매우 저조했다. 이를 보면 미국의 지원이 당시 한국의 경제성장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는 것을 추론해볼 수 있다.[49] Son of a bitch로,영어로 개새라는 뜻이다. 그래도 트루먼은 존 케네디를 지지했다.[50] 출처: 위대한 대통령은 무엇이 다른가(2000).[51] 재밌게도 케네디는 박정희와 서로 동갑이었다. 그리고 둘 다 암살되었다. 한명은 리 하비 오즈월드, 한명은 김재규.[52] 그것도 아이젠하워 이후로 확실히 대머리라고 말할 수 있는 미국 대통령이 아직까지도 없다. 그나마 케네디의 후임자인 존슨이나 먼 훗날의 포드와 오바마도 대머리 아니냐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들은 갈수록 머리카락이 자라나서 완전 대머리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있게 되었다.[53] 당시 케네디는 입원 중이라 표를 행사하지 못했다고 주장했으나 케네디 가문과 매카시 의원이 워낙 가까운게 아니라...[54] 국내 자막에는 콜라라고 번역되었다. 영화 개봉 당시만 해도 국내에 닥터페퍼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55] 예컨대 케네디의 복잡한 여성 관계(마릴린 먼로도 등장한다), 부모인 조지프 1세와 로즈 여사의 불화, 심지어는 케네디와 재클린 부부 사이의 불편한 모습까지 나올 정도. 다만 케네디의 암살은 별다른 음모론 없이 오스왈드의 범행으로 묘사.[56] 마지막 부분의 대사 등을 보면 우리가 흔히 아는 케네디 암살 미스터리는 사실 이런 바꿔치기 때문에 벌어진 음모라는 설정이다.[57] 다른 멤버는 그를 보좌한 로버트 맥나마라, 피그스만 침공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JFK와 맞짱뜬 피델 카스트로, 그리고 대선에서 JFK한테 패배한 리처드 닉슨.[58] 특이하게도 쓰러졌을 때의 대사가 다른 3인방과 달리 없는데, 아마 실존인물이 암살당하는 사건이 있었다보니 게임에도 그대로 넣긴 좀 그랬던 모양.[59] 이 세계에서는 2차대전때 추축국이 승리한 세상이고, 미국은 2차대전때 패배 했지만 본토는 공격당하지 않았다. 그후 미국은 엄청난 사회적 혼란과 정치적 혼란을 겪는다. 그러다 민주당과 공화당이 선거연합을 구성해 '공화민주연합'을 창당한다.[60] 대통령은 리처드 닉슨[61] 무려 124세이다.[62] 소설의 배경이 미국 독립 전쟁이 조지 워싱턴과 조지왕의 화해로 끝나서 미국이 영연방에 통합된 후 200년이 지난 1980년대이다.[63] 사실 이 자연재해는 주인공이 시간 여행을 했고 과거를 바꾸는 바람에 벌어진 인재이다.[64] 원래 역사에서는 아프로디테 계획으로 인해 전쟁 중 사망했다.[65] 원래 역사에서는 하원 의원과 상원 의원을 거쳐 대통령이 되었으나 여기서는 형의 후광에 힘입어 하원 의원 재직 중에 대통령 후보까지 된다.[66] 실제로 케네디는 2차 대전 때 PT-109에서 지휘관으로 근무했다.[67] 엄밀히 말해 케네디가 실제로 저 대사를 말할 때는 2차 세계대전 시기가 아닌 냉전 시기였으므로, 2차대전 당시 "내가 바로 (미국의 적국) 나치 독일의 수도인 베를린 사람"이라고 당당히 말하면 미군에 맞아도 싸긴 하다. 즉 일종의 말장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