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네디 가의 형제들 The Kennedys | |||
<rowcolor=black> 장남 조셉 P. 케네디 주니어 (1915~1944) | 차남 존 F. 케네디 (1917~1963) | 삼남 로버트 F. 케네디 (1925~1968) | 사남 테드 케네디 (1932~2009) |
케네디 가문 · 존 F. 케네디 · 로버트 F. 케네디 · 테드 케네디 |
조셉 패트릭 케네디 주니어 Joseph Patrick Kennedy Jr. | |||
<colbgcolor=#000><colcolor=#ffcc00> 출생 | 1915년 7월 25일 | ||
미국 매사추세츠 주 헐 | |||
사망 | 1944년 8월 12일 (향년 29세) | ||
영국 이스트서퍽 블라이스버러 상공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colcolor=#ffcc00> 부모 | 아버지 조셉 P. 케네디 (1888~1969) 어머니 로즈 피츠제럴드 케네디 (1890~1995) | |
형제자매 | 동생 존 F. 케네디 (1917~1963) 동생 로버트 F. 케네디 (1925~1968) 동생 테드 케네디 (1932~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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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 가족 | 외조부 존 F. 피츠제럴드 (1863~1950)[1] | ||
가문 | 케네디 가문 | ||
학력 | 하버드 대학교 (B.A.) 런던 정치경제대학교 (정치학 / 수료) 하버드 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입학 전 사망) | ||
신체 | 183cm, O형 | ||
종교 | 가톨릭 | ||
혈통 | 아일랜드계 미국인 잉글랜드계 미국인 스코틀랜드계 미국인 영국계 미국인 | ||
소속 정당 | |||
약력 | 1940년 민주당 전당대회 매사추세츠주 대의원 미국 해군 항공대 복무 (1941~1944 / 전사) | ||
군사 경력 | |||
복무 | 미합중국 해군 항공대 | ||
1941년 ~ 1944년 (전사) | |||
최종 계급 | 대위 | ||
소속 부대 | 제203초계대대 제110폭격대대 제1특수항공부대 | ||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 ||
수훈 | 항공메달 퍼플하트 해군십자장 수훈비행십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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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정치인. 케네디가의 저주의 첫번째 희생양이 된 것으로 유명하다. 조셉 P. 케네디의 장남으로, 존 F. 케네디의 형. 아버지와 케네디 가문의 큰 기대를 모았지만 1944년 불의의 비행기 사고로 요절하고 말았다.2. 생애
2.1. 유년기와 청년기
1915년 7월 25일 조셉 P. 케네디의 9남매 중 맏이로 매사추세츠에서 태어났다. 첫째 남동생 존 F. 케네디와는 2살 차이. 둘째 남동생인 로버트 F. 케네디와는 10살, 셋째 남동생인 테드 케네디와는 17살이나 나이 차이가 나다보디 로버트, 테드와는 약간 데면데면한 사이고 존과 자주 어울렸다고 한다.[2] 케네디 가문의 장남으로 주변 모든 사람들에게 기대를 받았는데, 그가 태어났을 때 당시 보스턴 시장이자 조셉의 외할아버지인 존 피츠제럴드[3]는 "이 아이는 장차 미국의 대통령이 될 아이요!"라고 기자들에게 자랑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아버지 역시 그가 미국의 첫번째 가톨릭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믿었고, 그의 교육, 향후 정치적 커리어를 위해 아낌 없는 지원을 했다.케네디 가문의 가족 사진 (1928)[4] |
공부를 못했지만 아빠 빽을 이용해 하버드에 입학한 동생들과 달리, [5] 공부를 꽤 잘해 자신의 능력으로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하였기에 더욱 아버지의 기대를 받았다. 또한, 잘생긴 얼굴과 성실한 태도로 학교에서 인기가 많은 흔히 말하는 인싸이자, 럭비부, 축구부, 조정부의 부장을 지냈고 학생회의 임원이었으며 여러 여자를 울렸다고 한다.
하버드를 졸업한 후, 주영대사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잠깐 영국에 머무르면서 런던 정치경제대학교를 1년간 다녔다. 이후 하버드 대학교 로스쿨에도 입학했다.[6] 그러나 진주만 공습 후 미군에 소집되었으므로 로스쿨에는 등록만 한 채 바로 2차대전에 참전해야했다.
2.2. 정치적 야심
동생인 JFK,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 |
불과 25세의 나이에 민주당 전당대회 매사추세츠 대의원으로 선출되면서 정계에 진출하였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3선 도전에 반대하고 출사표를 던진 체신국장 제임스 팔리[7]를 지지했다. 어떤 역사가들은 조 케네디 주니어가 1940년 대선 때 루스벨트가 아닌 팔리를 지지한 것이 루스벨트와 조셉 P. 케네디의 사이가 틀어진 하나의 이유라고 보기도 한다.[8]
조 케네디 주니어는 고등학교 때부터 전세계를 여행하며 견문을 쌓고, 미국의 자유민주주의 뿐 아니라 여러 정치 사상에 대해서도 배웠다. 정치적 야심과 합쳐져서 다소 위험할 수도 있는 사상에도 관심을 보였는데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즘에 한동안 푹 빠진 흑역사가 있다. 그는 편지에서 나치즘을 "열등한 자를 제거하고, 우수한 자만을 남길 수 있는 훌륭한 정치 체제"라고 찬양하기도 했다. 테드 케네디의 증언에 의하면 조 케네디 주니어는 마르크스주의에도 긍정적이었는데,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라는 소련의 원칙을 여러차례 칭찬해 아버지를 대노하게 만든적도 있다고 한다.[9] 외교적으로는 아버지와 비슷한 고립주의 성향이 강했다.
2차 대전이 끝나면 보스턴 북부 지역을 관할하는 매사추세츠 11번 하원의원 선거구에 출마할 예정이었고, 이후 상원의원으로, 그 이후에는 대통령에 출마할 예정이었다. 아버지가 정했다고도 알려져있지만, 케네디 가문의 일원들에 따르면 사실 그것은 조 케네디 주니어가 더 적극적으로 구상한 진로였다.
2.3. 2차대전 참전
존 F. 케네디(왼쪽)와 조셉 케네디 주니어(오른쪽) |
미국 해군 항공대[10] 제203초계대대, 제110폭격대대 소속의 폭격기 조종사로 복무하였다. 1944년부터 독일 본토에 대한 공습이 잦아지자 그는 B-24 폭격기 조종사로 25차례나 임무를 완수했고 퍼플하트(상이군인 훈장), 수훈 비행 십자장, 해군 십자상, 에어메달 등 각종 훈장을 휩쓸어 명예전역할 자격이 주어졌다. 하지만 동생 존 F. 케네디가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위험에 처한 상황에서 2명을 제외한 부하들 전원을 무사생환시킨 사건으로 유명해지자, 동생에 대한 자격지심 때문에 일부러 더 위험한 작전에 계속 자진 지원했다.
2.4. 비극적인 사망
1944년 8월 12일, 조셉 케네디는 아프로디테 계획에 자진해 참여했다. 이 계획은 폭탄이 가득 든 폭격기를 조종하다가 폭격 목표물로 비행기가 떨어지기 전에 탈출하고 무인 조종기는 뒤따르던 비행기에서 원격 조종하여 조종사의 목숨은 살리고 적군의 피해는 극대화하는 계획이었다. 즉 조종사가 폭발 직전에 탈출하는 카미카제 작전이었는데, 그 위력만큼 실패 확률과 위험성도 높아서, 10번의 작전 중 9번이 실패했다. 그럼에도 조셉 케네디는 전쟁영웅으로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에 자진하여 계획에 참여하고자 했다.조셉 케네디가 파괴할 대상은 파드칼레 지방의 요세인 미모예크(Mimoyecques) 요새[11]였는데, 이곳은 영국에 큰 피해를 주고 있던 V-1 폭탄의 생산 공장으로 의심되는 곳이었다. 조셉 케네디는 BQ-8(PB4Y)를 몰고 작전에 나섰다.
하지만 계기판의 설계 미스로 비행기 동체가 과열되면서 조셉 케네디가 탈출하기 몇분전에 폭탄에 불이 옮겨붙었고, 그대로 폭탄이 터지면서 조셉 케네디는 긴급탈출할 틈도 없이 비행기 동체와 함께 폭발하고 말았다. 그와 함께 탔던 부조종사도 함께 불덩이가 되었다. 너무 폭발이 커서 조셉 케네디의 시신조차 수습할 수 없을 정도였고, 주변 민가 59채가 크고 작은 피해를 입었다.[12] 더 비극적인 것은, 조 케네디가 폭격하려고 했던 미모예크 요새는 사실 노르망디 상륙 작전 직후 독일군이 버리고 도주해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빈 요새였다는 점이다.
후일 밝혀진 사실에 의하면 조셉 케네디가 타고가다 폭발한 비행기는 여러 결함이 있었으며 엔지니어가 알아내고 상관에게 보고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조셉 케네디는 이를 무시했고 결국 스스로 비극적인 죽음을 초래하고 말았다.
2.5. 사후
조셉 P. 케네디 주니어의 죽음은 가족에게 큰 충격이었으며, 조셉 P. 케네디는 눈물을 잘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장남의 죽음으로 그날은 자신의 서재에서 한참동안 울었다고 한다.기대를 모았던 장남이 죽자, 차남 존 F. 케네디가 그 유산을 온전히 이어받고자 했다. 존 F. 케네디는 정치에 관심이 많긴 했지만 사실 정치인이 되려는 생각은 없었고 신문기자나 작가를 하고 싶어했는데[13] 조 케네디 주니어가 급사하자 아버지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정치에 뛰어들었다. 조 케네디 주니어가 죽은지 불과 2년만인 1946년, 존 F. 케네디는 원래 형이 출마하려고 했던 매사추세츠 11구의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고, 1952년에는 상원의원으로, 1960년에는 대통령으로 당선되며 형의 진로 계획을 그대로 이어나갔다. 또 본래 형의 이미지였던 젊고 용감한 참전용사 출신 정치인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써먹었다.
존 F. 케네디는 처음에는 형의 진로를 밟는 것을 원치 않아했지만[14] 사실상 조셉 P. 케네디가 강요하다시피 했기에 존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었다. 이후 자의반 타의반으로 정치의 길을 걷긴 했지만, 대통령이 된 이후로도 "난 형의 그림자 속에서 사는 것일 뿐", "형이 죽지 않았다면 계속 법학을 공부했을텐데." 등의 혼잣말을 했다고 한다.
그의 비극적인 죽음을 기리기 위해 미군 함정 중 하나에는 "조셉 P. 케네디 주니어 함"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재밌게도 로버트 F. 케네디가 해군으로 복무하며 탄 함정이 바로 조셉 P. 케네디 주니어 함이라고 한다.
55년 후, 존 F. 케네디 주니어 역시 비행기 추락 사고로 숨졌다. 공교롭게도, 두 사고 모두 케네디 가문이 조종사였다.
3. 여담
- 사교적이고 활달했던 존 F. 케네디, 테드 케네디와는 달리 진중한 성격이었으며 로버트 F. 케네디와 비슷한 면이 있었다. 여러모로 아버지와 성격이 닮았다는듯. 존 F. 케네디는 어릴적 쓴 글에서 "형은 자상하고 멋진 남자이지만, 가끔은 아버지도 나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그는 외부세계와 자신을 구분짓는 일종의 장벽을 쌓는 것 같다"라고 표현했다.
- 존 F. 케네디와는 경쟁 관계였고 서로 운동, 공부, 시사, 글쓰기 등 여러 방면에서 경쟁했지만, 알려진 것과 달리 사적으로 사이는 아주 친밀했다고 한다. 존 F. 케네디 스스로 표현하길 "케네디 가문에 경쟁은 있어도 싸움은 없다"고. 두 형제가 경쟁적으로 뭔가를 한 것은 많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조 케네디 주니어는 정치적 야심이 매우 컸던 반면에 존 F. 케네디는 정치적 야심이 없었기 때문에 아주 큰 싸움은 벌이지 않았고, 대부분이 전형적인 10~20대 남자들끼리의 흔한 자존심 대결이자 선의의 경쟁 정도였다고 한다. 또 요트 경기 같은 취미 활동에서 두명이 서로 힘을 합치면 누구도 그들을 이길 수 없었다. 그러나 욱하는 성질이 있어서 체스나 낱말 맞추기 퀴즈에서 존에게 지면 화풀이로 몸싸움을 하기도 했다.
- 철도덕후였다. 자신의 방에 정교하게 만들어진 기차 모형 세트를 지어놓고 전기 기차 장난감을 운행시키는걸 즐겨했으며, 존 F. 케네디도 이 세트 만들기 놀이에 자주 참여했다고 한다. 테드 케네디의 증언에 의하면 조 케네디 주니어가 죽은 이후에도 존과 로버트 형제는 형을 기억하기 위해 세트를 남겨두었는데, 심지어 로버트 F. 케네디가 죽을때까지 이 세트가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어있었다고 한다.
- 케네디 가문의 일원답게 여러 여자를 후리고 다녔는데, 영국에서 미군으로 복무할 때는 현지의 유부녀를 NTR한적도 있다. 진지하게 결혼도 생각했지만 아버지가 절대 결혼을 허락하지 않을거라는 생각에 단념했다고. 불운하게도, 해당 유부녀는 자신의 남자친구를 잃은지 이틀만에 남편마저 2차대전에서 전사하는 것을 봐야했다.
4. 대중매체에서
- 검은머리 미군 대원수에서는 아프로디테 작전이 없었는지 살아남아 자신이 원하던대로 대통령직까지 오른다. 그러나 재임 2기 도중 암살당한다.
5. 둘러보기
[1] 보스턴 시장(1906~1908, 1910~1914)[2] 같은 이유로 어린 테드도 존, 조셉보다는 로버트와 자주 어울렸다.[3] 나중에 매사추세츠를 대표하는 상원의원으로도 출마하는데 현직 상원의원인 헨리 캐벗 로지 시니어에 밀려 낙선한다. 케네디 가문과 캐벗 로지 가문의 끈질긴 대결은 이후로도 50년 가까이 이어진다.[4] 오른쪽부터 조 케네디 주니어, 존 F. 케네디, 로즈마리 케네디, 캐슬린 케네디, 유니스 케네디, 패트리샤 케네디, 로버트 F. 케네디 그리고 진 케네디이다. 테드 케네디는 아직 태어나기 전.[5] 고등학교 성적을 보면 조셉 주니어>>>로버트>=존>>>테드 순으로 공부를 잘했다. 테드는 거의 낙제생 수준이었는데도 기부입학 전형으로 하버드에 입학.[6] 이 역시 나머지 3형제와 대비되는 일인데 존, 로버트, 테드 모두 하버드 로스쿨은 다니지 못했다. 존은 경영대학원으로 방향을 틀었고 로버트는 성적이 미진해서, 테드는 사생활 때문에 주변에서 평가가 안좋아서 하버드 로스쿨이 아닌 버지니아대 로스쿨로 진학했다.[7] 루스벨트의 가신이자 친구로, 마크 한나, 칼 로브, 리 애트워터 등과 더불어 미국사 최고의 선거전략가로 불린다. 리터러리 다이제스트 지가 1936년에 엄청나게 틀린 여론조사를 했을 때도 무시하고 공화당 후보 랜던이 버몬트와 메인 단 두개 주에서만 이길 것을 정확히 예측한 것으로 유명하다. 루스벨트의 3선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해 정치적으로는 그와 결별했으나, 사적인 친분은 유지했고 특히 우표광이었던 루스벨트의 우표수집 친구였다.[8] 그러나 루스벨트는 그 이전부터 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케네디를 그렇게 신뢰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9] 테드 케네디의 회상에 의하면 조셉 P. 케네디는 "그래, 네 소유의 자동차, 말, 요트를 모조리 국가 소유로 귀속시켜도 네가 여전히 공산주의를 찬양할 수 있나 보자!"라며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정작 그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가 후일 조셉 매카시 상원의원 산하 위원회에서 일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10] 이 당시에는 공군이 창설되기 전이었다. 배리 골드워터, 린든 B. 존슨, 밥 돌, 조지 맥거번 등 폭격기 혹은 전투기 조종사로 일한 참전용사 소속 정치인들도 그 당시에는 모두 공군이 아니라 육군 항공대나 해군 항공대에 속했다.[11] 독일어로는 바우포어하벤 711(Bauvorhaben 711)[12] 불행 중 다행으로, 파편에 맞아 다치거나 사망한 사람은 없었다.[13] 작가를 하기 위해 갈고 닦은 문장력은 후일 케네디가 웅변가 중의 웅변가가 되는데 크게 기여했다.[14] 정치적 야심은 존보다는 로버트가 더 강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