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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8 21:31:18

순우리말/지명/서울특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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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서울은 수도(首都)를 뜻하는 토박이말이다. 서울은 신라 서라벌에서 유래되었고, 어원은 '새 벌[新城]', '쇠벌[金城]', '새벌[東城]' 등 다양한 설이 존재한다.[1]

1. 강남구

2. 강동구

3. 강북구

4. 강서구

5. 관악구

6. 광진구

7. 구로구

8. 금천구

9. 노원구

10. 도봉구

11. 동대문구

12. 동작구

13. 마포구

14. 서대문구

15. 서초구

16. 성동구

17. 성북구

18. 송파구

19. 양천구

20. 영등포구

21. 용산구

22. 은평구

23. 종로구

24. 중구

25. 중랑구


[1] 백제 사비(소부리(소벌)), 고구려 졸본(솔빈)도 이와 연관이 있을 것이라 추정하기도 하며, 일각에서는 철원(鐵原), 송악(松岳) 또한 쇠벌, 솔벌로 읽어 같은 어원이라 보기도 한다.[2] 이 일대를 지나는 도로인 '밤고개로'도 여기에서 따와 명명하였다.[3] 이 일대를 '학여울'이라고도 했는데, 이 이름이 수도권 전철 3호선 학여울역에 역명으로 차용되었다.[4] 다만 동네의 위치가 굽은다리역과 꽤 떨어져 있는 곳에 있다.[5] 정확히 강일동 강일리버파크 2단지 아파트 주변[6] 남평 문씨의 집성촌이며, 1970년대만 해도 마을 앞 백사장이 유명해 피서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으나, 한강정비사업으로 인해 백사장은 사라졌고, 개발제한에 묶여 조금 을씨년스럽다.[7] 신대(新垈)라고도 하는데 택지정리가 된 곳에 새로 형성된 마을이므로 모양새가 네모반듯하였다.[8] 근처에 있는 '범머리길'에 차용된 지명이다.[9] 한자어로는 모진동으로 현재 화양동에 속한 행정동으로 지명이 사용되고 있다.[10] 1977년 서울 지하철 2호선 1차구간 계획 당시 구의역의 역명으로 차용되어 사용되었던 적이 있다.[11] 번외로, 구로구의 지명 유래 중에 아홉 노인(九老)이 이 지역에서 장수한 일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라는 유래도 있는데, 음가가 비슷하므로 아무래도 이 구루지라는 고유어에서 변형된 것으로 비정되고 있다.[12] 옛 강서로[13] 이름의 유래에 대해 다른 설이 존재하는데, '한골'에서 변형되었다는 설이다. '한'이 순 우리말로 '으뜸', '큰'과 같은 의미가 있는데, 이 마을의 규모가 꽤 컷고 역사가 오래되어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이다.[14] 개봉노인정과 개봉1동 새마을금고 주변[15] 관악구 신림동종로구 구기동에도 같은 지명이 있다.[16] '개화천' 또는 '개봉천'으로도 불렸다.[17] 풍수지리학적으로 이 고개는 수말의 지기이기 때문에 암말을 타고 지나면 떨어져 다쳤다고 하며, 1년에 한 번씩 암말 한 마리를 제물로 바치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실제로, 1980년대 초 시흥대로 확장공사 중 말뼈가 출토되기도 했다.[18] 그 밑에 있는 마을도 '성고개', '성고개말'이라고 불렀으며, 성과 같은 바위를 돌아간다는 뜻으로 '암회리', '회암리'라고도 하였다.[19] 매일 청소를 열심히 해서 깨끗한 동네로 꽤 유명했다고 한다.[20] 현재 동작구청 앞 주차장 일대[21] 또 하나의 설이 있는데, 조선 후기 이곳에 포방터(사격장)가 있어 여기서 훈련을 마친 뒤 나루를 건너기 전에 인원과 장비를 점검하였다고 하여 '점검마을'이라 한 것이 와전되었다고도 한다.[22] 2009년에 발간된 사전에 정말 등재되어 있다.#[23] 이 고개 이름 유래는 세 종류가 있다. 하나는, 남쪽의 만리재과 서북쪽의 대현이라는 두 큰 고개 중간에 있는 작은 고개이므로 ‘애고개’가 ‘애오개’ 또는 아현(兒峴)이 아현(阿峴) 등으로 변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옛날 도성에서 서소문을 통하여 시체를 나가게 하였는데 아이 시체는 이 고개를 지나서 묻게 하였는데, 이 고개가 아이 시체가 넘는 고개라 하여 애고개 등으로 부르다가 애오개로 변했다는 것이다. 마지막 설은 풍수지리설로, 이수광지봉유 등을 참고하면 도성의 진산이 부아악(삼각산)인데 그 아이가 달아날 의사가 있으므로 서쪽에 있는 산을 모악, 남쪽의 산을 벌아현(남산), 모악에서 서남쪽의 산을 병시현이라 이름 지어 아이가 달아나는 것을 막으려 하였다. 그중 벌아령은 아기를 못 나가게 막는 의미이고, 병시현은 떡으로 달래어 머무르게 하는 의미로 '떡전고개'라고도 하였는데, 곧 아기를 달래는 고개이므로 아현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24] 와우 아파트 붕괴사고의 그 와우산 맞다.[25] 또 하나의 설로는, 마을이 경성부로 편입되기 전 인근 일대가 모두 채소밭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인분을 비료 대신 사용했기 때문에 '똥통밭', 혹은 '분통밭'이라 부르던 것이 변해서 '똥골목'이 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26] 승정원일기에는 모화관석교(慕華館石橋), 대동지지동국여지비고에는 혁교(革橋)로 기록되어 있다.[27] 이 근처에 있던 산은 산 전체가 돌과 바위로 이뤄져 있다고 해서 '돌산'이라고 불렸다.[28] 이 근처에 모화관이 있었다.[29] 이 부근 마을 이름은 훗날 미정동이라고 이름이 바뀌었다가 미근동으로 바뀐다[30] 중구 의주로1가까지 포함되는 지명이다.[31] 다만 구반포역 문제에 대해서는 역사적인 맥락을 따져봐야 하는데, 현 구반포역이 위치한 반포본동(구반포) 지역은 조선시대에는 포촌리(浦村里)라 불리던 지역이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동작리로 합쳐져 이름이 동작동 등으로 변하다가 동작동의 일부가 떨어져나와 강남구(이후 서초구가 분구됨)에 편입되면서 반포동으로 이름이 붙게 된 지역인데 조선시대부터 이미 반포로 불리기 시작한 반포 1, 2, 4동과 분명한 차이가 있다. 조선 후기부터 이미 서릿개를 훈차한 蟠浦란 이름이 사라지고 훈이 변한 현재의 반포(盤浦)가 이름으로 굳은 것이 확인되기 때문에### 구반포역 문서에 있는대로 지역 주민들의 '서릿개란 이름이 이 지역에 쓰인 적이 없다'는 반발이 충분히 나올 수 있었다.[32] 또한 벌판 끝에 마을이 있어 '벌말'이라고도 하였고, 신원동의 근본이 되는 마을이라고 해서 '본촌'이라고도 하였다. 1978년 취락구조개선사업 때 대부분 성남시로 이사 가고 지금은 원주민이 반으로 줄었다고 한다.[33] 김해 김씨의 집성촌이었으며 한국 전쟁조선인민군이 크게 패한 격전지였다.[34] 현재 양재2동 주민센터 주변이다.[35] 구전에 따르면, 남태령과 성뒤마을 사이에 성의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36] 그 뒤 1935년경에는 정릉 일대의 아름다운 경치를 배경으로 고급요정 '청수관'이 들어서면서 ‘아리랑고개’라는 푯말을 이 고개 마루턱에 세우고 손님을 맞이했다고 한다.[37] 옛날에 마을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쓰는 물품을 보관하던 곳[38] 양재천, 탄천한강이 만나는 곳에 형성된 모래섬으로 '동잠실'이라고도 불렸다.[39] 일설에 의하면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의 군대가 이 곳 일대에 돌을 옮겨 진을 쌓아 붙여진 이름이라도고 한다.[40] 풍납토성의 순 우리말은 '바람드리성'이다. 이 이름이 성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전한다.[41] 고운(곰) 달빛의 내 - 곰달내 - 곰달래[42] 한자로는 곱다(고움: 古音)+달(月) = 고음월.[43] 말하자면, 음소라는 청년이 전쟁터에 나갔는데, 둥근 달이 뜨면 백제가 이긴 것이니 자신을 기다리고, 달이 지면 백제가 진 것이니 다른 사람을 찾아 떠나라고 했다. (...) 이에 음월이라는 여인이 달을 보앗을 때, 둥근 달이었다가 먹구름이 껴서, 칠흑같은 달을 보고, 목숨을 끊어 버렸다. 그러나 나중에 둥근 달이 뜨고, 음소라는 청년이 도착했을 때,여인을 보고 "음월의 목숨이 끝났구나" 하고 슬피 울었다는다는 이야기에서 고(古: 죽음/끝) + 음월(音月) = 고음월.[44] 간첩사건과는 아무 연관이 없다.[45] 계남근린공원[46] 신길동은 아니지만 가까운 곳에 이 이름을 차용한 어느 서울 지하철 9호선의 역이 있다.[47] 참고로 도야미 옆 동네인 원지막은 지금의 대림동. 지금의 대림동 일대까지 도야미로 지칭하는 경우가 많아서 이 주석을 참고용으로 붙임.[48] 만리창의 창고 규모는 진휼청에 소속된 창고가 35문, 해서 소속 3문, 호남 소속 20문 등 모두 58문이었다.[49] 1894년 동학농민운동일본군의 혼성여단이 만리창에 임시사령부를 설치하고 청일전쟁 수행의 주요거점으로 삼았다 한다.[50] 이곳에서 이름을 딴 법정동 신창동(新倉洞)이 있으며, 도로명으로도 새창로가 효창동에서 30여m 떨어진 곳에 있다. 다만 새창로는 신창동을 지나지 않는다.[51] 조선 시대 현종경릉창릉으로 성묘하러 갈 때 백성들이 길가에서 향을 피우고 임금을 맞이했다고 전하는 데서 유래된 '향현'이라는 이름도 있다.[52] 현재는 사직터널성산로로 이어진 도로가 뚫려있다.[53] 2002년 서울특별시 새주소부여사업에 따라 소로 이름을 제정할 때 '피마동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54] 한자로 '성제정'이라고 하였는데, 이게 변해서 '형제정'으로 불렸다고도 한다.[55] 1960년대 이후 '개미마을'이라고도 불렸다.[56] 남이 장군이 유자광의 모함을 받아 억울하게 죽은 후 원한 때문에 터가 세다하여 이곳이 폐가가 되어 순조 때까지 채소나 지어 먹는 빈터로 남아 있었는데, 하루는 이 집터 옆에 사는 사람의 꿈에 남이장군이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하자 그 사람이 장군을 위하여 원혼을 모시고 사당을 짓고 탑을 세웠다고 한다.[57] 영미다리는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군으로 귀양갈 때 그의 비인 정순왕후가 이곳까지 나와서 서로 영영 이별하였다 하여 '영이별다리' 혹은 '영영건넌다리'라고도 전해진다.[58] 이와는 약간 다르게, '도깨비고개' 입구에 배나무가 많아 붙은 이름이라는 설도 존재한다[59] 왕위에 오르기 전 봉림대군일 때 이야기이다.[60] 한자어로 홍덕전이라고도 하였다.[61] 승정원일기 영조때의 기록에 의하면 이 다리의 이름이 '파자석교'로 기록되어 있어 창덕궁이 법궁이 되면서부터 돌다리로 만든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62] 구주소 서울 종로구 옥인동 47번지 일대[63] 광무 10년(1906년)에 깊이 2.4m가량 파내어 높이를 낮추고 현대식 도로를 만들어서 높이 1.5m의 방추형태 하수도를 묻어 이 일대의 하수를 통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서울시내 하수구의 시초가 되었다.[64] 1885년 한양 내에 일본인의 거류가 허용되자 일본인들이 이곳 주변에 정착하면서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주둔한 적이 있다며 이 곳을 '왜장', '왜장터', '왜성대'라고 부르기도 했던 적이 있다.[65] 한자어로 '타락동'이라고 했는데, 이를 줄여서 '낙동'으로도 불렸다고 전한다.[66] 일설에는 인근 월계동 마을 가운데 있던 연못 모양이 벼루와 같아서 벼루말〔연촌(硯村)〕이라 하고, 하계동을 붓골〔필동(筆洞)〕이라 하고, 이 두 마을과 먹골을 연결하면 삼각형이 되므로 마을의 이름을 문방사우(文房四友)의 하나인 먹과 관련하여 지으면 이 삼각형 지역 안에서 학문이 발달하여 인재가 배출될 것이라는 예언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