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11:05:43

마지막 생존자

최후의 생존자에서 넘어옴
1. 개요2. 현실
2.1. ㄱ2.2. ㄴ2.3. ㄷ2.4. ㄹ2.5. ㅁ2.6. ㅂ2.7. ㅅ2.8. ㅇ2.9. ㅈ2.10. ㅊ2.11. ㅋ2.12. ㅌ2.13. ㅍ2.14. ㅎ
3. 픽션4. 관련 문서

1. 개요

마지막 생존자(The Sole Survivor). 큰 재난이나 목숨이 오가는 상황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 또는 무리를 말한다.

2. 현실

역사적 사건의 마지막 생존자들(위키피디아)
위키피디아의 마지막 생존자 문서 모음

2.1.

2.2.

2.3.

2.4.

2.5.

2.6.

2.7.

2.8.

2.9.

2.10.

2.11.

2.12.

2.13.

2.14.

3. 픽션

가상 매체에서는 작품의 주제를 강조하거나, 캐릭터의 비장미를 더하기 위해 마지막 생존자라는 설정을 붙이는 경우가 많다. 마지막 생존자 캐릭터는 트라우마 때문에 대체적으로 고독하며, 타인과의 교감을 거부하고 사건의 주모자가 있다면 복수를 생각하기도 한다.

희생자들은 대체로 가족 단위인 경우가 많고, 스케일이 커지면 종족 단위의 마지막 생존자가 되기도 하는데, 이 경우는 해당 캐릭터가 약소 문명의 이종족일 때 많이 보인다. 만약 세계 최강 전투 종족인간종의 마지막 생존자라면 문명의 선구자로 취급받는 인간의 특성상 세계 단위의 문명붕괴가 일어났다는 소리고 자칫하다간 작품의 장르가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작품에서는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혹은 등장하더라도 다른 데 생존자가 있다는 것이 밝혀지는 경우도 있고, 프롤로그에서 이렇다면 그냥 회귀시켜버리기도 한다.

세계정복을 다룬 소재에서는 신에 버금갈 정도로 비범하거나 엄청난 능력의 소유자로 나와서 일당백처럼 그려지기도 한다.

간혹 마지막 생존자로만 남지 않고 후손을 두거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가치와 문화 등을 다른 자들에게 전달하여 후대까지 이어지게 만들어 자기 자신이 혈연적 혹은 정신적인 의미에서 새로운 시조가 되기도 한다.

4. 관련 문서



[1] 나머지 두 명은 범행 직후 사살되거나 부상당한 상태로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사형이 집행되었다.[2]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의 피해자 중 마지막 생존자는 최재욱이다.[3] 김대중은 2009년, 김영삼은 2015년에 서거했으며 마지막 남은 김종필은 2018년 사망하였다.[4] 木村次郎右衛門, 1897~2013[5] 사실 개발도상국들은 과거 통계 체계가 미비했기에 음바 고토처럼 자신이 주장한 생년이 실제인지 알 수 없어 장수 기록을 경신하지 못한 경우가 수두룩하다.[6] 한국으로 따지면 갑오개혁 때 태어나서 방탄소년단 데뷔년도까지 산 것이다.[7] 중장 계급 국군참모총장 중 마지막 생존자는 육군참모총장은 2020년에 7월에 사망한 백선엽 예비역 육군대장이었으며, 해군참모총장은 2019년에 사망한 이성호 예비역 해군중장이었다.[8] 일본 대본영의 총옥쇄 명령과 선동으로 인해 99% 이상의 병력이 사망한 전쟁사 역사상 가장 비참한 전투들 중 하나였다. 약 1만여 명 정도 됐던 일본군 수비대원들 중 살아남아서 일본땅을 밟을 수 있었던 일본군 병사는 단 54명(전투 직후 포로가 된 일본군 19명-{육군 7, 해군 12명}+1947년에 항복한 나가이 케이지 포함 34명+50년대에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자란 채 짐승의 몰골을 하고 생포돼 일본으로 송환된 어느 일본군 1명)뿐이었다. 이외 포로들은 일본, 조선 등에서 온 노무자들. 그런데 그 생존한 노무자들 숫자도 수백에 불과했다.[9] 이 과정에서 항복하자고 의견을 낸 동료가 있었는데, 처형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쓰치다 기요카즈(土田喜代一) 라는 일본 해군 수병(계급은 상병)이 탈주를 감행, 어차피 탈주한 이상 돌아가도 동료들한테 살해당할 게 뻔하기에 미군 지프를 세워서 미군에 항복, 일본이 졌다는 사실을 알고 동료들을 설득시켜서 투항시켰다. 이후 츠치다 상병은 수십 년 후 손녀와 옛 전우와 펠렐리우를 재방문하여 한때 적이었던 미 해병대원들과 화해의 악수를 하기도 했으며(처형당한 동료를 묻었던 곳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2018년 10월 타계한다.[10] 막사이사이 대통령의 시신은 유품인 손목시계와 시신의 치아를 치과 진료 기록과 대조하여 확인되었다.[11] 시신은 이브리쉬르센 지역에 있는 가족묘지에 안장되었다.[12] 스코틀랜드 선수단의 마지막 생존자는 빌리 맥키넌.[13] 다운폴에서 로후스 미슈 역 을 맡은 배우 하인리히 슈미더는 2010년에 40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실존인물인 로후스 미슈 보다 먼저 사망했다.[14] 로후스 미슈는 2005년 인터뷰를 통해서 다운폴 시청 후기를 남겼는데 영화에서 묘사된 장면과 실제 일어난 일을 비교하면서 중요한 사실을 정확하게 묘사했지만 영화의 몇몇 장면을 극적인 효과를 위해 과장 시켜 표현했다고 밝혔다.[15] 나머지 1명은 애리조나함의 수상기 인양용 크레인 기사 켄 포츠. 공습 당시 육지에 외출했던 포츠는 공습이 시작되자 애리조나함으로 급히 복귀하였고 다행히 폭발 속에서도 살아남았다. 공습이 끝난 후 폭침당한 애리조나함의 승조원 시신 수습에 참여하였고 행정상의 문제였는지 포츠의 어머니에게 실종 및 전사통보가 오발송되기도 했다. 이후에 포츠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육상에서 근무했으며 1945년 제대 후 중고차 사업을 하다가 1990년에 은퇴했다. 2023년 4월 22일 향년 102세로 사망했다.[16] 마지막 장교 생존자는 조지프 랭들 소령이었으며, 2015년에 100세로 사망했다.[17] 잉글랜드 선수단의 마지막 생존자는 초대 FA컵 우승팀인 원더러스 FC의 선발로 출전한 레지널드 C. 웰치.[18] 콜 오브 듀티: 월드 앳 워 첫번째 미션의 그 마킨 섬 전투다.[19] 그러나 포로가 되는것을 대죄로 여겼던 일본군 상부는 그의 존재 자체를 말소시켜 버렸고, 이나가키 병조와 특공대장 이와사 나오지(岩佐直治) 대위, 후루노 시게미(古野繁実) 중위, 요코야마 마사하루(横山正治) 중위, 히로오 아키라(広尾彰) 소위, 사사키 나오키치(佐々木直吉) 일등병조, 가미타 사다무(上田定) 이등병조, 요코야마 시게노리(横山薫範) 일등병조, 가타야마 요시오(片山義雄) 이등병조 등 사카마키 소위를 제외한 9명의 대원들을 전원 2계급 특진시키고 "9군신"으로 추대했다. 죽으면 영웅, 살아남으면 천하에 죽일놈[20] 한자만 清에서 潔로 다르다고 한다.[21] 현재 야인시대 등장인물 중 생존한 인물은 전부 정치인들 뿐이다. 이찬오, 김수한, 채원기, 신기범, 김을동 등.[22] 최장수 노인이였던 후안 빈센테 페레즈가 2024년 4월 2일 사망한 이후로 88일동안 세계 최장수 남성이였다[23] BC 221년 진의 중국 통일 ~ 1912년 청나라 멸망[24] 비공식적 마지막 전투원 생존자는 2021년에 사망한 레온 코펠만이다.[25] 로템이 살아 남을수 있었던 이유는 독일군에게 게토가 함락 되기 전에 하수구를 통해서 게토를 탈출했기 때문이다. 위에 각주에 서술한 레온 코펠만의 경우 포로로 잡혀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탈출하여 이후 벌어진 바르샤바 봉기에도 합류했다.[26] 당시 15~17세의 해군 견습생이 100여명 정도 승선해 있었는데 침몰 당시 많은 견습생들이 사망하였고, 침몰 이후에 18세 미만은 군함에 탑승하지 못하도록 법이 생겼다.[27] 모세의 경우 16세에 남군에 지원했지만 북군에 패퇴해 도주하다 북군에 합류한 뒤 남군의 주요 시설을 파괴하는 데 도움을 준 공로가 있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제대군인부로부터 평생 동안 연금을 수령했었다.[28] 재혼 당시 아내와 나이 차이가 무려 46세나 차이가 났다.[29] 어머니 또한 정신장애가 있었다.[30] 당시 참전했던 이지 중대 전체에서 마지막 참전용사 출신으로는 위의 브래드포드 C. 프리맨이 유일한 생존자였고, 그도 2022년 7월 3일 세상을 떠났다.[31] I-26은 원래는 같이 퇴각하던 기함 USS 샌프란시스코를 노렸다고 한다. 하지만 발사했던 어뢰는 샌프란시스코를 빚나갔고 하필 빚나간 어뢰가 주노에 명중해서 침몰했다.[32] 전투 중 조선군의 조총 공격에 가랑이를 맞아 사망했다. 단 기록이 정확하지 않아 창에 찔려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맥키를 쏜 조선군은 루크와 동료들에게 사격을 당해 전사했다고 한다.[33] 1900년생이나 사망 당시에 생일이 지나지 않았다.[34] 사고의 영향인지 선임인 2등 항해사 라이톨러와 함께 선장이 되진 못했다. 대신 라이톨러의 경우 1차대전당시 같이 소집되어 구축함 함장으로 재직했으며, U보트를 격침시킨 전과로 훈장을 받았고 박스홀 또한 전쟁당시 어뢰정 정장으로 활동하긴 했다.[35] 이들 15명은 태평양 전쟁 당시 첫 명예훈장 수여자이기도 하다. 10명은 사후 추서, 5명은 생존 수훈을 했지만 생존 수훈자인 캐신 영 대령은 과달카날 해전에서 전사했다.[36] 1970년작 영화 도라 도라 도라 에서 해군항공대 기지가 공습을 받는 와중에 일본 전투기를 향해 기관총을 난사하는 군인이 묘사되는데 해당 군인이 존 핀이다.[37] 유럽전선은 4월에 나치 독일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났지만, 태평양 전선에서는 일본 제국과의 전투가 한창이었다. 그러므로 공식적인 제2차 세계 대전 종전은 옥음방송이 나온 1945년 8월 15일로 기준을 삼는다. 아래에 서술한 허셜 우드로 윌리엄스는 전쟁이 끝난 뒤인 1945년 10월에 명예 훈장을 수여받았다.[38] 여담으로 아들인 찰스 H. 쿨리지 주니어미국공군사관학교에 진학하여 1968년에 졸업 후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으며, 미합중국 공군물자사령부 부사령관을 역임하고 중장으로 전역했다.[39] 지금은 진보적 성향의 매체로 탈바꿈했지만 1980년대에는 전두환 정부와 가까운 성향의 관영 매체였다. 이진희정구호가 이 시기에 임명됐던 대표적 친정부 성향의 경향신문 사장들.[40] 보수 정당과 보수 정권에서 몸담았던 그가 국민의 정부에서 관료로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정부가 새정치국민회의자유민주연합연립정부 체제였기 때문이다. 관료로 일할 당시 그는 자민련 소속이었다.[41] 윌리엄 던다스 소위(1965년 사망), 로버트 틸먼 장포수병(1995년 사망)[42] 원래는 침몰 직후 생존자가 더 있었으나, 시간이 지나자 저체온증으로 대부분 사망하여 최종 생존자는 3명에 불과했다. 남은 3명의 생존자들도 부유물에 올라타서 서로를 잡으면서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당시 유행하던 노래를 부르며 버티다가 2시간 뒤, 현장에 도착한 구축함 일렉트라에 의해 구조되었다.[43] 2대 회장은 같은 후드의 생존자였던 로버트 틸먼이 회장을 역임했다가, 1995년에 틸먼이 사망하자 3대 회장으로 회장직을 다시 역임했다.[44] 이때 일본군은 항모 4척을 전부 잃었기 때문에 하라다를 포함한 일본군 파일럿들은 바다에 불시착한 뒤 주변의 일본 군함에 구조됐다. 군함은 팔다리가 없거나, 얼굴이 식별 불가능할 정도로 훼손된 중환자들 천지였고, 당시 하라다는 딱히 부상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중환자를 먼저 돌봐달라고 군의관에게 얘기했지만, 오히려 군의관은 '"전쟁에서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무기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환자는 우선순위에서 맨 뒤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45] 인터뷰에서 그는 "제 인생 초기에 저는 무자비한 살인마였습니다. 저는 아직도 제가 죽인 사람들에 대한 죄의식을 갖고 살고 있습니다. 저는 그들을 쫓아가서 격추했죠. 참 끔찍한 짓이었습니다. 이제 저는 아이들과 소통하기 위해 매일 유치원에 갑니다. 저는 그 아이들의 마음속에 친절함과 배려심을 심어주고 싶습니다" 라고 말했다.[46] 98세였을때, 고령의 나이에 불구하고 오랫동안 서서 강연을 하다가 강연 종료 후 쓰러져서 병원으로 이송되기도 했다.[47] 실제로 하판락은 2002년 2월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에서 친일파 708인 명단을 발표할 때 명단에 든 대상자 중 유일하게 생존한 인물이었다.[48] 생전 히스토리(텔레비전 채널)에서 방영한 1차 대전 다큐멘터리에서 본인이 직접 등장하여 증언을 했었는데 부상을 당하여 후송되었을때 마취제가 없어서 무마취 상태에서 파편을 제거 했을때 수술을 담당하던 군의관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날 정도로 생애 최고의 고통을 느꼈다고 증언했다.[49] 슈퍼볼 LII에 참석하여 자신을 포함한 15명의 명예 훈장 수여자들을 대표하여 심판·선수들 앞에서 코인 토스를 하기도 했고, 자신의 이름이 붙은 원정이동기지선 USS 허셜 "우디" 윌리엄스 호의 취역식에 참석해 수병들 앞에서 연설을 하기도 했다.[50] 자녀는 베티, 진 두 딸이 있었으며, 진은 2001년에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하였고, 베티는 1970년 어머니(헨리 앨링엄의 아내)의 사망 이후, 아버지와 불화로 인해 40년동안 연락을 끊고 살았다가, 2009년 아버지의 장례식 때 모습을 드러냈다. 여담으로 헨리 앨링엄은 자신이 사망하기 전까지 큰딸 베티가 죽은 줄 알았다고 한다.[51] 타카하시 유키히로는 2023년 1월 11일에, 사카모토 류이치는 2023년 3월 28일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