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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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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 약 2억 5천만 명 이상

1. 개요2. 교회명과 조직3. 성향과 분포4. 정교회의 독립 교회
4.1. 초대 교회로부터 이어진 총대교구4.2. 독립 총대교구4.3. 독립 대관구4.4. 독립 대교구4.5. 자치 교회4.6. 일치를 이루지 않은 교회
5. 한국의 정교회
5.1. 콘스탄티노폴리스 한국정교회 대교구5.2. 모스크바 정교회 대한교구
5.2.1. 한국의 해외 러시아정교회5.2.2. 북한의 정교회
6. 역사
6.1. 고대6.2. 중세
6.2.1. Caesaropapism(황제교황주의)
6.3. 근세·근대
6.3.1. 고의식파(古儀式派) 분열
6.4. 현대
7. 타 종파·종교 간의 관계
7.1. 가톨릭과의 관계
7.1.1. 화해7.1.2. 상호 분열7.1.3. 교황의 실질적 수위권 논쟁7.1.4. 성상 논쟁7.1.5. 삼위일체론7.1.6. 성사 교류
7.2. 개신교와의 관계
7.2.1. 성공회와의 관계
7.3. 이슬람과의 관계
8. 가톨릭과의 비교9. 창작물에서의 정교회
9.1. 크루세이더 킹즈 시리즈9.2. Europa Universalis 시리즈
10.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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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교회()는 동로마 제국의 국교였으며, 가톨릭과 함께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오래된 두 종파 중 하나다. 동서 대분열 전까지 가톨릭과 함께 로마 국교회를 이루었던 종교이다.[2]

오늘날에는 동유럽발칸반도에서 가장 강한 교세를 지닌 종교다. 정교회는 세계 각 지역의 독립·자치 교회들로 이루어져 있다.

2. 교회명과 조직

그러므로 참종교를 찾으려면, 이교도들의 (사상적) 혼동 속에서도 찾지 말고 이단자들의 쓰레기 더미에서도 찾지 말고 ... 오직 가톨릭catholici 또는 정교도orthodoxi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서, 다시 말해서 전일성(全一性)을 보존하고 정도(正道)를 따르는 사람들에게서 찾아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 《참된 종교》De vera religione 5.9, 최원오 역주, 분도출판사, 22011[3]

그리스어 orthodoxos[4]는 어원상으로 '바른', '옳은' 정도의 의미이므로 Ορθόδοξη Εκκλησία, 곧 정교회(正敎會)는 '바른 교회', '옳은 교회'라는 뜻이다. 서방교회에 대비해서 동쪽에 있다는 뜻에서 동방 정교회(東方正敎會, Ανατολική Ορθόδοξη Εκκλησία, Eastern Orthodox Church)라고도 한다. 그리스어 표현 'Οικουμενική Εκκλησία'의 번역어인 'Ecumenical Church'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본래 orthodoxos라는 말은 katholikos[5]와 함께, 이교(離敎) 및 이단(異端)과 구분되는 정통하고 보편적인 교회를 수식하기 위해 동서대분열 전부터 사용되던 단어이다. 그래서 상기한 발췌문에서 보듯, 동서대분열 전에는 이 두 단어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곧, 동서대분열 전 프랑크에는 '프랑크 정교회'가 있었고 루스에는 '루스 가톨릭'이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11세기동서 대분열 후, '정교회'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와의 친교를 이루는 교회에, '가톨릭'은 교황과 친교를 이루는 교회에 관습적으로 용어가 통용된 것이다.[6]

한편 orthodoxos 외에 정교회에서 스스로를 일컬을 때 쓰는 말로 Οικουμενική Εκκλησία(오이쿠메니코스 교회, Ecumenical Church)가 있다. oikoumenikos[7](명사형: oikoumenē[8])는 '거주지'[9]를 어원으로 하는 단어인데 본래 그리스인들이 화이론(華夷論)적 뉘앙스에서 오랑캐Barbaroi와 구분되는 '문명인 거주 구역'을, 곧 '그리스어권'을 일컫는 말이었고, 때로는 그냥 '온 세상'을 의미하기도 하며, 로마 제국 시대에는 '로마 제국'의 의미로 쓰인 복합 뉘앙스의 단어이다. 한자어로 말하자면 천하 개념에 가장 가깝다. 즉 '오이쿠메니코스 교회'(Οικουμενική Εκκλησία)는 세계 교회로도, 로마 제국 교회로도 읽힐 수 있는 매우 절묘한 말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동로마 제국이 붕괴된 지 한참 지난 오늘날에는, '세계 교회'라는 의미이다.

정교회(Eastern Orthodox Church)와 오리엔트 정교회(Oriental Orthodox Church)는 서로 별개의 종파이다. 즉, 콥트 정교회,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 시리아 정교회,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등은 '정교회'가 아니다.

정교회는 가톨릭과 달리 '독립교회(獨立敎會, Αυτοκεφαλία, Autocephaly)' 구조를 가지고 있다. 정교회는 이 여러 교회들의 집합체이고, 어느 정도 규모가 커진 교회는 각 나라별로 "독립"된 교회로 위치가 승격하게 되어 있다. 이는 옛날 초대 교회의 구조를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지금은 문화권을 따라서 독립교회들이 있는 경향이 크지만, 옛날에는 아예 나라마다 교회가 따로따로 있었다. 따라서 각 지역들이 가톨릭에 비하면 훨씬 적은 통제하에 알아서 교회를 꾸려 나가기 때문에 각 지역의 문화 그 자체가 되어온 것이다. 러시아 정교회는 러시아 문화 그 자체이며, 그리스 정교회도 그리스 문화 그 자체이다. 이는 오리엔트 정교회에서도 나타나는 특징이다.

정교회는 각 독립교회의 수장인 총대주교(總大主敎)들로 운영된다. 총대주교는 그리스어로는 파트리아르히스(Πατριάρχης)라고 하며 '아버지와 같은 지도자' 혹은 '파트로누스'의 뜻을 지닌다. 가톨릭의 교황(敎皇, 라틴어로는 Papa[10])과 마찬가지로 '아버지'란 뜻이며, 고대 로마에 있었던 파트로누스 개념을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총대주교란 표현은 원어와 좀 많이 동떨어졌다. 가톨릭의 주교와는 달리, 정교회는 초대교회에서 생성된 개념을 그대로 달아 두었기 때문에 한국어로 번역하면 뜻이 좀 많이 빠져 버린다. 마찬가지로 세계 총대주교도 에큐메니컬의 다소 모호한 뜻이 빠져 버리기 때문에 완전하게 번역할 수는 없다. 세계 총대주교는 대략 세상 만국에서 불러모인 신자들의 아버지(겸 파트로누스[11])인 것이다.

정교회가 각 국가별로 독립교회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동서 대분열 당시의 정치적 문제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온 유럽이 그리스도교화되기 시작한 로마 제국 시기에 제국의 수도는 로마였고 이 때문에 수도의 총대주교인 로마 총대주교(후일의 교황)이 주교단의 수위를 차지했다. 문제는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현재의 이스탄불)로 천도하고 나서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여 로마 시를 상실하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가 '제국 수도의 총대주교'가 되고, 주교단의 수위인 로마 총대주교좌가 위치한 로마 시는 제국의 영향력 바깥으로 이탈했다. 이 상황에서 로마 총대주교는 자신이 주교단의 수장이므로 다른 총대주교들보다 절대적 우위에 있음을 주장하며 다른 총대주교들은 자신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의회를 통해 결정된 수석 주교가 로마의 총대주교임은 사실이었으나 다른 총대주교들은 '주교단의 서열은 동등한 총대주교 간의 명예적 서열이지 상하 관계가 아니다'라는 입장을 취했다. 그리고 이런 입장을 취한 이상 다른 각 국가별 교회의 대주교에게 '내 서열이 더 위니까 넌 내 밑에 있는 거야'라는 입장을 취하기는 힘들었던 것이다. 서로마 상실 이전의 로마 제국에서 그리스도교의 교세는 제국의 동부에서 훨씬 더 컸고, 이 때문에 동부 지역에 4개의 총대주교좌가 설치된 데 비해 상대적으로 교세가 작았던 서유럽 지역은 그냥 로마 총대교구 하나에서 모두 관리하게 되었는데, 이후 서로마가 멸망하고 교회의 동서 대분열이 일어나면서 로마 총대교구가 서유럽 그리스도교화의 사령탑 역할을 하게 됐다...

여기까지가 정교회의 대략적인 관점인 반면 가톨릭 쪽에서는 애초에 '로마 총대주교'라는 호칭은 역사적으로 사용된 적도 없고 굳이 따지자면 '서방 총대주교'라고 대응할 순 있으나 이마저도 꽤나 근본 없다고 여기기 때문에(...) 전술한 정교회적 사관과는 차이가 있다.
'''교황에 대한 "서방의 총대주교" 명칭 폐지에 관한 공지

2006년 「교황청 연감」에는 교황의 명칭을 열거할 때 "서방의 총대주교"라는 명칭이 빠져 있다. 이렇게 빠진 것에 대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명이 되었고 요구되었다.
총대주교의 명칭에 관한 복잡한 역사적 문제를 모든 면에서 고려하는 요구 없이,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381년)와 칼케돈 공의회(451년)에서 확정된 옛 동방 교회의 총대주교직들이 상당히 명백히 한정된 영역과 연관되어 있는 반면, 로마 주교좌의 영역은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을 역사적 관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동방에서는, 유스티니아누스(527-565년)의 제국 교회적 제도 환경에서 네 개의 동방 총대주교직(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이외에 교황은 서방의 총대주교로 이해되었다. 반대로 로마는 베드로가 세운 세 개의 주교좌(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의 사상을 선호하였다.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869-70년)와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1215년)와 피렌체 공의회(1439년)는 "서방의 총대주교"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교황을 당시 다섯 총대주교의 첫째로 거명하였다.

"서방의 총대주교"라는 명칭은 642년 교황 테오도로 1세에 의하여 사용되었다. 그 결과 그 명칭은 아주 조금 반복되어 나왔을 뿐 명백한 의미를 갖지 않았다. 그 명칭은 16세기와 17세기 교황의 칭호가 늘어나는 환경에서 융성한 시기를 맞이하였다. 「교황청 연감」에 그 명칭은 1863년에 처음 나타났다.

현재 "서방"이란 개념의 의미는 서유럽과 연관될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부터 호주와 뉴질랜드까지 미치는 문화적인 연관 관계를 가리키고 있다. 그토록 이 개념은 다른 문화적인 연관 관계와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물론 "서방"이라는 개념의 이 의미는 교회 영토를 표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며, 총대주교직에 속하는 영토의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다. "서방"이라는 개념에 교회법적인 언어 관용에 사용될 수 있는 의미를 부여하기를 원한다면, 라틴 교회와의 관계에서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서방의 총대주교"라는 명칭이 라틴 교회에 대한 교황과의 특별한 관계를 표현할 것이고, 라틴 교회에 대한 교황의 특별한 재치권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처음부터 별로 명백하지 않았던 "서방의 총대주교"라는 명칭은 역사가 흘러가면서 시대에 뒤져 버렸고, 실행적으로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명칭을 계속해서 이용하기를 고집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인다. 더군다나 가톨릭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함께 라틴 교회를 위해서 주교회의와 국제 주교회의의 형태로 오늘의 요구에 맞는 적절한 교회법적인 질서를 찾았기 때문이다.

"서방의 총대주교"라는 명칭을 중지하더라도 물론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장엄하게 선언한 옛 총대주교좌 교회들의 승인에 고칠 것은 없다(교회헌장 23항). 이러한 폐지는 그것이 새로운 요구를 암시한다는 것을 말하려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언급한 명칭을 포기한다는 것은 역사적이며 신학적인 실제주의를 표현하려고 하는 것이며, 동시에 요구를 포기한다는 것은 교회 일치를 위한 대화에서 도움이 될 수 있는 포기이기를 원하는 것이다.
-교황청 그리스도인일치촉진평의회: 교황에 대한 "서방의 총대주교" 명칭 폐지에 관한 공지, 2006년 3월 22일[12]
그밖의 교황에 대한 가톨릭의 관점은 교황수위권 문서와 아래의 교황의 실질적 수위권 논쟁 항목에 서술되어 있다.

가톨릭의 단일성에 비해 정교회의 독립성 강조가 드러나는 예를 들자면 가톨릭에서는 주교를 교황이 임명하지만 정교회에서는 시노도스(Σύνοδος, 대의원회의)에서 선출한다. 반면 지도자의 선출에서는 로마, 즉 교황청콘스탄티노폴리스에 비해 세계의 지역 교회들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 정교회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선출은 엔디무사 시노도스(Ενδημούσα Σύνοδος, 영구 대의원회의)에서 이루어지고 해당 시노도스는 튀르키예 교구들을 이끌거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섬기는 고위 성직자들로 구성되지만 가톨릭의 교황 선출(콘클라베)은 세계 교회의 추기경들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즉 상대적으로 가톨릭은 로마 지역 교회와 세계의 지역 교회들이 서로 긴밀하게 영향을 주고 받는 단일성과 통합성이 드러나는 반면[13] 정교회는 지역 교회들의 독립성이 더 강조되어 있다.

정교회를 그리스 정교회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정교회의 중심지가 그리스 지역이라 과거에 '그리스인'이라는 명칭이 정교회의 신자와 사실상 동의어로 쓰였기 때문이다. 가톨릭의 옛 문서에서도 정교회 신자를 '그리스인'이라고 칭했다.[14] 때문에 그리스 정교회라는 말이 좁게는 정교회 소속의 그리스 지역 교회의 명칭으로 쓰이고 넓게는 정교회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이 된 것이다. 따라서 로마 가톨릭이 가톨릭의 로마 지역 교회를 넘어 가톨릭교회 전체를 지칭하는 데 쓰이듯 그리스 정교회라는 명칭도 크게 오류 있는 이름은 아니다. 비슷한 원리로 '동방 정교회'라는 명칭도 쓰인다.

정교회 내부에서는 스스로를 그냥 교회 혹은 정교회라는 명칭을 선호한다. 같은 원리로 가톨릭도 (반드시는 아니지만) 내부적으로는 그냥 교회 혹은 가톨릭교회라는 명칭을 선호하며 '로마 가톨릭교회'라는 명칭은 외부의 타 교파와 대화할 때 등에서 주로 쓰인다. 아무래도 로마나 그리스라는 지역명이 붙지 않는 것이 보편적인 어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로마 가톨릭', '한국 그리스 정교회' 등의 명칭은 (반드시는 아니지만) 생각보다 안 쓰인다.

정교회란 정확히는 각 지역들의 독립된 교회들을 세계만민의 하나된 공동체로 묶어 둔 것이며, 이러한 구조를 개별 교회(Autocephaly)라고 한다. 그리스 정교회나 러시아 정교회처럼 독립교회별로 교회가 분리되어 있으며, 이 모든 교회들을 묶은 에큐메니컬 교회(Ecumenical Church)가 바로 정교회이다. 각 교회들은 기본적으로 스스로 교회를 꾸려 나가야 한다. 그리고 옛날엔 각 나라마다 총대주교를 두고, 5개의 옛 교회들을 제외하면 각국이 알아서 총대주교를 선출해야 했으며 군주가 해야 할 일이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정교회들은 그냥 Ecumenical Church라고 하지만, 개별 정교회에 소속된 신자들을 위해 해외에 설립된 교회는 지역명을 정교회 앞에 붙여서 표현하기도 한다. 주로 이민자들이 중심이 된 미국이나 캐나다의 정교회들이 이렇게 하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미국, 캐나다의 정교회의 경우 이민자들의 출신 지역의 정교회에서 파견된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각각의 독립교회들과 총대교구들은 신앙의 큰 틀에서는 같지만 전례나 의식 등에서 다소의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15] 각각의 독립교회들의 해외 신자들을 위한 교회를 설립하게 되어 이러한 형식이 된 것이다. 위의 한국 러시아정교회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미국과 캐나다에 지어진 교회들도 그냥 Ecumenical Church라고 하고 딱히 독립교회 이름을 안 붙이는 일도 많다. 이게 더 에큐메니컬하기도 하다.

정교회 수도원의 중심지는 아토스인데 그리스의 영토이면서도 수도자들이 자체적으로 통치하는 신정 체제이며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청 관할에 속한다. 아토스에는 수도원이 20개 있는데 그리스인 수도원 외에도 러시아, 세르비아, 불가리아, 조지아 출신 수도자들의 수도원이 있다.

3. 성향과 분포

정교회 비잔티움 예법에서 사용하는 요한 크리소스토모스 전례는 이름 그대로 동방 교회의 요한 크리소스토모스 성인에게서 유래한다.[16] 다만 제국 양식의 화려한 전례는 오스만 제국 시절에 더 이상 유지할 수가 없어 사멸하였고, 수도원에서 이루어지던 상대적으로 간소한 전례만이 남았다.[17] 그 외에 달라진 게 있다면 주교관이 매우 화려하게 바뀌었다는 점 정도. 현재의 주교관인 미트라는 원래 동로마 후기 황제가 쓰던 왕관이었다.[18]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된 이후부터 쓰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쓰고 있다. 예전에는 엄연히 정교회 세계의 수호자인 (동)로마 황제가 있는데 감히 왕관스러운 주교관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정교회 신자들은 자신들이 서구의 가톨릭이나 개신교보다 이슬람과 맞서 싸우거나 이슬람 지배 아래에 있었으면서도 신앙을 지켰다는 자부심이 있고 서방교회는 동방교회가 자신들을 이슬람의 칼날로부터 막아 준 것을 인정한다.[19] 옛 교회의 본산인 콘스탄티노폴리스(현재의 이스탄불)나 다른 총대교구들은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 멸망하면서 전부 이슬람권에 넘어갔다.

정교회의 총 신자 수는 약 2억 5천만명으로 그리스도교의 가장 많은 인구를 차지하는 가톨릭의 1/5 가량이며, 2위인 개신교의 한 교파에 비해서는 더 큰 편에 속한다. 개신교 교단을 모두 합치면 정교회보다 신자 수는 압도적으로 많으나 교단이 여러 개여서 분리되어 있는 반면 가톨릭과 마찬가지로 정교회의 종교적 동질성이 훨씬 더 강하게 느껴진다. 개신교는 서로 다른 교파들끼리 일반적으로 사이가 안 좋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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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동방 정교회 분포 지도

정교회 신자들은 주로 동유럽의 정교회 문화권 지역에 많이 분포해 있다. 근대 이후 서방 지역에서 지성의 발전에 따라 실시간으로 도전을 받아 온 가톨릭이나 개신교와 다르게 정교회는 근현대 서구 문명의 핵심 지역인 서유럽의 영향권을 비교적 벗어난 위치에 있기 때문에, 저 두 종교에 비하면 해당 사회 내에서는 종교적 영향력이 더 강하다.

정교회가 이토록 사회에 대한 영향력이 강한 이유는 가톨릭교회를 비판하며 떨어져 나간 개신교와의 분쟁 등 서방의 가톨릭에 비하여 정교회권에선 교회에 대한 비판이 적고, 정치적으로 세속 군주와 다툴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20] 정교회 역사의 상당한 기간을 차지하는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아예 세속 군주가 이교도였고, 밀레트 제도를 도입해 정교회에 대해서 "너희 신자들 딴 맘 품지 못하게 잘 감시하고, 세금 꼬박꼬박 걷어서 보내줘. 그리고 너네 법이랑 너네 권리 모두 존중해 줄 테니까 알아서 살고, 근데 기어오르면 알지?" 수준으로 견제한 정도라 교회와 세속 군주가 다툴 일이 없었다. 오히려 발칸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거나 무슨 사단이 벌어지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에게 책임을 물어 경질하거나 죽이기까지 했다. 참고로 동시대 러시아 제국의 경우 압도적으로 강해진 황제에 의해 아예 총대주교가 공석이었던 시절도 있었다. 이 '시절'이 무슨 일시적이고 예외적인 기간도 아니고 표트르 대제 시절부터 제정 러시아 망할 때까지 무려 200년 넘게 이어졌다[21]

오리엔트 정교회네스토리우스파 교회들도 정교회와 같이 동방에 있어서 서방의 가톨릭보다는 동방의 정교회와 모습이 유사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두 교회와 정교회는 서로 별개이다. 오리엔트 정교회와 네스토리우스파는 공의회에서 의견차로 갈려 나갔기 때문에 정교회라는 명칭을 쓸 수 없지만, 자신들이 정통이라는 논지로 자칭으로 정교회를 자처한다.

최근 들어서는 동유럽탈공산화 이후 종교 탄압이 사라지고 사회 혼란으로 급감했던 출산율이 회복되어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정교회 인구수도 급진적이지는 않지만 조금씩 상승하는 추세다.

4. 정교회의 독립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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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의 정교회 관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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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정교회 관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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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그리스의 정교회 관구
아테네 대교구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교구
아토스 자치주
크레타 대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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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달리 완전한 중앙 통제가 아니라 그리스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등 지역별로 분산되어 있다는 특징이 있다. 초대 교회 시절의 독립 교구는 서열상으로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의 다섯 총대교구 뿐이었으나 이후 다른 교구들이 독립적인 위치를 획득하면서 몇몇 교구가 총대교구로 격상되었다. 이 중 대표적인 경우가 모스크바 총대교구이다.

현재 정교회의 각 나라별 독립적 위치는 동로마 제국 시대에서 유래하였다. 슬라브족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는 과정에서 동로마 정부가 불가리아, 세르비아 등의 슬라브족 교구들에 독립적인 지위를 보장해 준 것이 독립 교구의 시초이다. 이후 구심점이던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정교회 각 교구들은 각각 독자적인 행보를 걷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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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교구 목록들은 모두 정교회에서 공인받는 교회들로 전례 중 이 순서대로[22] 주교들에 대한 축복을 기원하는 '딥티호(Δίπτυχο)'라는 기도문을 읊을 때 나온다. 하지만 첫 타자인 로마 교회1054년동서 대분열 이후 삭제되어 버렸다.

4.1. 초대 교회로부터 이어진 총대교구


주의해야 할 점은, 칼케돈 공의회에 따른 비칼케돈파(합성론파, 현재의 오리엔트 정교회) 교회가 분열되어 나갔을 때, 비칼케돈파가 우세했던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24]의 대다수 교회 공동체들은 비칼케돈파 교계제도를 계속 유지했다는 점이다. 예컨대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좌는 이집트 그리스도인들의 다수를 차지하는 콥트 정교회(비칼케돈파)의 총대주교좌와, 극소수인 정교회(칼케돈파)의 총대주교좌가 따로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설명하고 있는 정교회(칼케돈파)의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는 엄밀히 말하면 비칼케돈파 성직자들이 해임된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후임으로 임명한 주교들의 후계인 것이다. 즉, 이 두 총대주교좌는 해당 지역의 그리스도인 중에서도 소수인 정교회(칼케돈파)만의 총대주교좌이다.

예루살렘도 예전에는 비칼케돈파가 다수였으나, 칼케돈 공의회 당시 예루살렘 총대주교였던 유베날리오스(Ιουβενάλιος)가 칼케돈파였기 때문에 해임되지 않아서[25] 정교회의 예루살렘 총대주교좌는 초대 주교 예수의 형제 야고보(Ιάκωβος ο αδελφόθεος)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예루살렘이 교파를 막론하고 그리스도교 전체의 성지인지라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총대주교좌, 가톨릭 라틴 총대주교좌가 후에 따로 자리잡긴 했다.

교파별 총대주교좌에 대해 알고 싶다면 총대주교 문서 참조.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좌는 그리스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 실패로 여전히 제대로 회복되지 못했고,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는 칼케돈파와 비칼케돈파로 분열되어 역시 멀쩡한 상태라고 보기 어렵다. 예루살렘은 그냥 성지 관리용. 사실상 정교회의 4대 총대교구 중 멀쩡한 곳이 없는 상태.

현대에 들어서 아프리카에서의 선교를 통해 알렉산드리아 총대교구좌의 교세가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었으나, 우크라이나 독립 정교회를 알렉산드리아 총대교구청이 승인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모스크바 총대교구청이 한국과 마찬가지로 따로 교회를 설립하거나, 사제를 빼가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4.2. 독립 총대교구

이하는 따로 서열이 존재하지 않는다.

4.3. 독립 대관구

이하는 총대주교에 비하면 급이 낮지만 권한은 대등한 관구대주교들이 이끄는 독립 교회이다. 독립 대교구의 수도대주교와도 대등한 관계에 있다.

4.4. 독립 대교구

이하는 총대주교에 비하면 급이 낮지만 권한은 대등한 수도대주교들이 이끄는 독립 교회이다. 독립 대관구의 관구대주교와도 대등한 관계에 있다.

미국을 비롯한 북아메리카에서는 각 민족들의 이민으로 인해 각 국가별로 별개의 정교회 교파가 형성되었다. 러시아계인 미국 정교회 외에도, 별개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산하의 미국 교구,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산하의 교구, 세르비아나 우크라이나 정교회 계열의 교회 들도 있다. 이들은 '북중미 정교회 주교회의'를 공동으로 개최하고 있다.

4.5. 자치 교회

이하는 엄밀히 말하면 독립 교회가 아니라 다른 독립 교회에 종속된 교회지만, 내부 운영에 있어서 자치권을 인정받은 교회이다.

4.6. 일치를 이루지 않은 교회

정교회에도 가톨릭처럼 범정교회적 일치를 이루지 않은 교회들이 존재한다.

이하에 서술하는 교회는 각 정교회와의 신학적인 일치를 주장하면서도, 교회의 근대화나 에큐메니즘 운동에 반대하는 의미에서 다른 정교회와의 성사 교류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다.[35]
에큐메니즘과 Sergianism을 반대한다.

이하의 정교회는 다른 정교회와의 성사 교류를 실시하지 않고, 또한 상호간 승인할 의사 또한 없는, 말하자면 자발적으로 타 교회와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한 교회다.
이 밖에도 정교회의 특징을 유지하면서도 어느 정교회 조직으로부터도 승인을 받지 못한 교회 조직도 존재한다.

5. 한국의 정교회

참고로 한국 정교회라는 명칭은 편의상 부르는 명칭이지, 공식 명칭은 아니다. 한국의 정교회는 어느 쪽도 아직 자치교회가 아니기 때문에 엄밀하게는 러시아 정교회는 "모스크바 정교회 대한교구"(통칭 대한정교회)로, 그리스 정교회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정교회 한국대교구"(통칭 한국정교회)라고 부르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한국에 정교회 선교가 시작된 이래로 개화기부터 해방 후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교구로 넘어가기 전까지 한국에 세워진 정교회를 "대한 정교회" 또는 "대한 그리스도 정교회"라고 불렀으나 그리스 정교회로 넘어간 이후 한국 정교회로 통칭되게 되었다. 그러다 2018년 정교회 분열로 인해 한국에 러시아 정교회가 들어오면서 택한 이름이 "대한 정교회"인 것.

기록에 의하면 정교회와 한민족의 만남은 고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중세 원나라에 파견되었던 교황의 사절이 남긴 기록을 보면, 약 800년 전 원나라 황실은 비교적 그리스도교에 호의적이어서 러시아에서 온 대공(大公)을 후하게 대접했으며 그때 고려의 왕자들과도 접촉하게 했다고 한다.

하지만 보다 직접적인 관계로 보면, 260년 전 조선 영조 시대로 소급된다. 청나라 북경 사신 길에 올랐던 이윤신이 문견사건(聞見事件)을 쓰면서 대비달자(大鼻獺子, '코 큰 오랑캐'란 뜻)를 만났다고 기록했는데, 청나라에 파견된 '코 큰' 러시아 정교회 선교사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조선 사신단은 그들과 교분을 이루며 공어포와 인삼을 선물하였고, 러시아 정교회 선교사들은 조선 사신들에게 거울과 주화를 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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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본격적인 정교회 역사는 1900년 2월에 입국한 러시아 정교회 소속 흐리산프 솃콥스키(Хрисанф Щетковский) 신부의 주도로 시작되었다. 당시 러시아 공사관 인근 부지(지금의 경향신문 자리)를 구매하고, 1903년에는 성당을 건립했으나, 러일전쟁으로 선교사가 모두 추방되는 바람에 1906년 재입국이 허용될 때까지 제동이 걸렸다. 게다가 1910년에는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래도 1912년에는 첫 한국인 사제로서 이오안 강탁(Иоанн 姜倬) 보제가 신부로 서품됐고 이어서 자체 교육기관인 보정학교를 세우기도 했지만, 러시아 본국에서 1917년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공산화되면서 외국 선교부가 폐쇄되는 등 복잡한 사정으로 인해 한국을 신경쓸 수가 없게 되었다. 1924년에는 루카 김희준(Лука 金熙俊) 보제가 사제로 서품됐으며 1936년에는 수도사제 폴리카르프 프리마크(Поликарп Приймак)가 관구장주교 세르기 티호미로프(Сергий Тихомиров)에 의해 제9차 한국선교회장으로 임명되었다. 폴리카르프 신부는 17개 도시에 퍼져 살던 약 150명의 신도들을 사목하였다. 1940년 일본 정교회는 정치적 이유로 모스크바 총대교구와의 친교를 단절하였는데, 1941년 10월 8일 일본 당국의 압력 아래 세르기 관구장주교는 폴리카르프 신부를 대수도사제로 승품하였고, 선교회의 전권을 맡겼다. 1945년 8월 11일 세르기 관구장주교가 안식한 후, 선교회는 모스크바 및 전 루스 총대주교 알렉시 1세(Алексий I)의 교령에 따라 신설된 동아시아 총대주교대리구의 관할권에 편입되었으며, 같은 해 12월 27일부터 모스크바 총대교구청에 소속된 상태로 폴리카르프 신부의 관리하 '임시 자치'가 공인되었다. Russia Beyond - 러시아 정교회의 일제 치하 서울 생존사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일본남한미국 통제 아래, 만주북한소련 통제 아래 들어가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된 와중에 소련 치하의 모스크바 총대교구와의 관계를 복구한 폴리카르프 신부의 행동은 미군정, 대한민국 정부, 그리고 몇몇 백군파 러시아인 이민자들과 그들에게 추동받은 한국인 신도들의 불만을 야기하였다. 소련에 대한 반감이 심했던 한국 신도들은 모스크바 총대교구로부터의 이탈을 주장하였고, 모스크바 총대교구와 대립 중이던 러시아 정교회 북아메리카 관구(현 아메리카 정교회)의 러시아계 미국인 일본 주교 베니아민 바살리가(Вениамин Басалыга)에게 한국 교회의 후견을 맡아줄 것을 청원하였다.

이에 베니아민 주교는 1948년 10월, 알렉시 김의한(Алексий 金義漢) 보제를 도쿄로 불러 사제로 서품하고 한국선교회장으로 임명하였다. 같은 해 12월 12일, 성찬예배 후 알렉시 김의한 신부를 필두로 한 한국인 신도들은 폴리카르프 신부에게 북아메리카 관구로 선교회를 넘길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폴리카르프 신부가 거부하자 그를 강제로 성당에서 끌어내었고 그 과정에서 폭력사태가 발발하여 폴리카르프 신부가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후 폴리카르프 신부는 투옥되어 간첩으로 기소되었고 고문까지 당하다가 홀어머니와 함께 북한으로 추방당하였다. 물론 폴리카르프 신부는 소련의 간첩이 아니었다. 또한 이후 알렉시 김의한 신부마저 한국 전쟁 중 납북되어 처형되고 전쟁 중에 날아든 포탄에 성 니콜라스 성당은 파괴되었다. 신도들은 모두 피난길에 뿔뿔이 흩어졌고 한국의 정교회 공동체는 와해되었다. 그리하여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는 중단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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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교회 공동체의 핵이 되어야 할 성직자의 부재로 인해 맥이 끊어질 위기에 처했던 한국정교회는 6.25 전쟁 당시 그리스군군종 신부로 입국했던 안드레아스 할키오풀로스(Ανδρέας Χαλκιόπουλος) 신부가 선교에 힘쓰고 이듬해 1954년 평신도 보리스 문이춘(Борис 文履春)이 안드레아스 신부에 의해 일본 정교회로 파송되어, 북아메리카 관구 일본 주교 이리네이 베키시(Ириней Бекиш)에 의해 사제로 서품되었다. 한국인 보리스 문이춘 신부가 일본에서 신부 서품을 받도록 도와주면서 점점 교세가 확장되었다. 6.25 전쟁 당시 참전한 그리스군 병사들이 월급에서 1달러씩 각출하여 성당 재건 기금으로 보태기도 했다. 현재 성당에 걸려 있는 5개 중 2개는 러시아 정교회가 전파되던 시절부터 남아 있는 종이고 3개는 한국전쟁 후에 제작한 것인데, 이 종 제작에도 그리스 참전 군인들의 성금이 들어갔다고 한다. 그런데 1955년 12월 25일, 보리스 문이춘 신부와 한국의 정교회 신도들은 북아메리카 관구 일본 교구로부터 이탈하여, 한국의 정교회 공동체의 관할권을 '그리스 정교회'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교구로 옮기는 안건을 발의하였다. 한국인들의 뿌리 깊은 반일 감정이 일본 정교회에 소속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해당 안건은 신도총회의 투표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40][41] 결국 1956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아티나고라스의 결정에 따라 한국 정교회는 콘스탄티노플 총대교구로 편입되었고, 이리하여 한국의 정교회 역사상 러시아 정교회 시대가 막을 내리고 그리스 정교회 시대가 시작되었다.

한국의 정교회 규모가 작은[42] 근본적인 이유도 이와 연관되어 있다. 다른 그리스도교 교파인 가톨릭과 개신교는 이 교파가 주류를 이루는 서유럽 및 북미 국가들과 한국의 교류가 매우 활발했다. 이 과정에서 성직자 및 신자들의 교류도 빈번하게 이뤄질 수 있었고 이는 교세 확장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반면 정교회가 주류를 이루는 국가들은 그리스러시아동유럽 국가들인데 그리스를 제외하면 냉전 시절 모두 공산권에 속해서 한국과의 교류가 사실상 전무했다. 그리고 한국과 그리스의 교류는[43] 다른 가톨릭 및 개신교 성향 국가들과의 교류에 비해 큰 차이가 났다.[44] 이러한 규모의 격차는 냉전 종식 후 러시아 및 동유럽 국가들과 공식 수교한 뒤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때문에 한국 내 정교회의 교세는 가톨릭개신교에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현재 한국 정교회의 한국인 신도들 중 상당수는 개신교에서 개종한 경우이며,[45] 정교회로 그리스도교에 입문한 케이스는 유아세례거나 정교회권 출신의 외국인 신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5.1. 콘스탄티노폴리스 한국정교회 대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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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모스크바 정교회 대한교구

니콜라이 2세 황제에 의해 20세기에 모스크바 총대교구 관할로 세워졌던 한국의 정교회는 해방 이후 1955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교구 관할로 넘어갔다.

1994년 부활절에 해외 러시아 정교회[46] 소속의 강태용 신부에 의해 한국의 러시아 정교회 선교가 재개[47]되었으나 인력난과 자금난으로 인해 녹록치 않은 상황이었고, 2007년 5월 17일 본토 러시아 정교회와 해외 러시아 정교회의 일치 이후에도 지원 등을 받지 못해 큰 확장은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2018년 연말에 정교회 분열로 모스크바 총대주교청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청과 성사 교류를 단절하고[48] 재한 러시아 정교회 신도들과 기타 명분들을 위해서 성당 설립 및 러시아 정교회의 성직자 파견을 결정하였다. 2018년 12월에 올레크 넬린(Олег Нелин) 대사제, 바울로 강영광 대사제[49] 등 러시아 정교회 소속의 성직자들이 서울 용산에 자리를 잡고 첫 성찬예배를 거행했다. 여러 러시아인, 한국인 신도들이 옮겨와 같이 예배를 드렸다.

2019년 2월 26일, 모스크바 총대주교청 산하의 동남아시아 총대주교 대리구 소속으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관할하는 ‘러시아 정교회 대한대교구’가 설정되었다.[50] 또한, 4월 4일에는 러시아 정교회 대한대교구의 첫 정식 관할 주교로 고려인 출신의 크즐과 투바의 주교 테오판 김 대주교를 임명하였다.

모스크바 정교회 대한대교구에 속한 성당들은 다음과 같다.
지역 명칭
서울특별시 그리스도 부활 성당
부산광역시 성모 탄생 성당
인천광역시 성 대 안토니오스 수도원 소성당[51]
모든 성인들 성당[52]
경주시 성 니콜라이 수난자 황가 성당[53]
평양시 정백사원(성삼위 성당)

5.2.1. 한국의 해외 러시아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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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러시아정교회의 수좌대주교 일라리온이 축성한 성당이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용화리에 '한국 러시아정교회 명상의 집'이란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다.

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대교구의 주장에 따르면 천주교 수사 출신이었던 강태용[54]이 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대교구 소속 신부가 되었다가 1993년 2월 12일 교회법 위반으로 면직 처분되었다. 면직으로 성직자 신분이 박탈된 강태용은 성직 박탈 사실을 숨기고 러시아 정교회 신학교에 무단으로 입학했으나, 면직 사실이 들통나서 출학 처분되었다.[55] 그럼에도 강태용은 1994년 '해외 러시아정교회'[56]의 주교 한 명을 접촉하였고 교회법 위반 상태로 강태용을 임의 서품했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세워진 한국 해외 러시아 정교회 본부는 본래 서울 종로구 통의동에 있던 선교센터(성 요한 성당)였으나 1997년 강원도 삼척시로 옮겨갔다.

참고로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슬라브권 정교회에서 '러시아 정교회'와 '해외 러시아 정교회'를 구분하는 것인데, 전자는 러시아 본토의 정교회이고 후자는 소비에트 당시 순교성직자 성 티혼 총대주교에 의해 시노드에서 설립된 기구로 티혼의 순교 이후 공산당 정권이 압력을 가해 시노드를 통해 해제를 선언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고 주교들과 신부들이 유럽 및 미국에서 유지한 기구다. 이 두 교회는 소련 붕괴 후인 2007년 통합되었으나 운영은 해외 러시아 정교회가 자치 형식으로 따로 하고 있다.

2006년에 유스티노스 강태용 신부가 안식한 이후, 그의 아들인 바울로 강영광 대사제가 그의 뒤를 이어 해외러시아정교회 한국 선교회를 주관하고 있다. 강영광 대사제는 '한국 내 유일한 해외 러시아 정교회 사제'로 활동하다가, 상술된 2018년 정교회 분열로 인해 모스크바 총대교구에서 한국에 신설한 성당에서 "방문자"의 신분으로 봉직하다가, 이후 해외 러시아 정교회 수좌대죽교의 축복을 받아 다른 성당을 설립하고 독립하여 나갔다.

5.2.2. 북한의 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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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8월과 2002년 8월 김정일이 러시아 방문 중 러시아 정교회 성당에 방문했던 것이 계기가 되어 평양 낙랑구역 정백동에 정백사원이 건립됐다. 자세한 사안은 정백사원 참조.

6. 역사

6.1. 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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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초대 교회에는 로마 주교좌, 알렉산드리아 주교좌, 안티오키아 주교좌 이 세 주교좌가 있었는데, 칼케돈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좌와 예루살렘 주교좌를 추가해 5대 총대주교좌가 탄생하였다. 그중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로마 다음 가는 서열 2위로 승격되었는데, 이는 알렉산드리아의 반발을 샀고 로마가 사도 베드로에 연결되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의 질서를 옹호하였다. 따라서 동방에서 새로 부상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동방의 기존 1위인 로마 및 알렉산드리아와는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교황은 서열 1위에 전 서방을 모두 관할하는 만큼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서로마 제국의 몰락 이후 제국의 범위 밖에 있게 되었다. 반면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동로마 제국하에 권위를 유지할 수 있었고, 지중해 세계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인 동방에서 꾸준히 세력을 늘려나갔다.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예루살렘 총대주교는 현지에서 성행하는 합성론파 교회들의 강세로 실권이 거의 없었다. 이렇게 해서 권력이 있었던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서로 경쟁하는 양대 교회가 되었다. 두 교회는 중세 초의 혼란기에는 서로 협력하고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시대가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그리스-오리엔트적인 동방과 라틴-게르만적 서방의 이질적인 정체성과 국제 정치 알력 등으로 점점 사이가 멀어졌다.

6.2. 중세

이슬람이 대두되고 나서는 알렉산드리아 교회, 안티오키아 교회, 예루살렘 교회가 이슬람의 영역에 들어가[57] 로마콘스탄티노폴리스 두 교회만 남게 되었고, 경쟁은 가속화되었다. 그 이후 두 교회는 성상파괴설과 삼위일체론 등 신학적 문제, 그리고 현실적인 세력권 문제로 격하게 치고받고 싸웠다. 교황이 로마 교구 휘하의 주교들만이 참석한 시노드를 열어 교황의 권위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파문하거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유명무실해진 다른 세 총대주교들의 서명을 받아 교황에게 파문장을 날리거나. 물론 파문당한 장본인들은 서로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한편, 키예프 공국의 대공이었던 블라디미르 1세가 989년 정교회를 키예프 공국의 국교로 선포하였으며, 이를 기점으로 현대의 러시아우크라이나, 벨라루스와 같은 루스 지역도 정교회 문화권으로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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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오스와 교황사절들의 상호 파문으로 최종적으로 교회가 둘로 분열되었다. 이는 동로마 제국의 특이한 상황과 남부 이탈리아의 엇갈리는 이권에서 기인하였다. 전통적으로 동로마 황제는 너무나 거대하고 강력한 자국의 교회를 견제하기 위해 항상 로마와 제휴하곤 했다. 11세기 동로마 제국은 내부의 세력 다툼으로 약해져 있는 상태였고, 황제의 권력 또한 매우 약해져 총대주교의 권력이 황제를 압도할 정도로 강해져 가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황제였던 미하일 7세는 교황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찍어 눌러 달라는 의미의 서한을 보냈다. 당시의 교황 레오 9세는 즉각 황제의 요구에 부임하여 로마 교회에서 가장 완고하며 호전적인 세 추기경을 사절로 보내 공의회를 개최하도록 했다.

그러나 당시 총대주교였던 미카일 케룰라리오스 또한 만만치 않은 인물로, 황제를 구워삶아 황제로 하여금 교황 사절로 온 추기경들을 오히려 적대하게 했다. 11세기에 노르만인들은 남부 이탈리아시칠리아를 정복하여 이곳의 정교 교구를 강제로 교황에게 복속시켰는데, 이를 구실로 삼아 오히려 교황을 비난하게 한 것이다. 이 기간 중 내내 격렬한 논쟁이 오갔으며 양자 간 합의는 없었다. 결국 열이 단단히 뻗친 3명의 추기경들은 어느 날 밤 성 소피아 대성당의 제단 위에 총대주교에 대한 파문장을 올려놓고 로마로 떠나 버렸다. 다음날 아침 이것을 보고 격노한 총대주교는 그 세 명을 파문하고 교황의 이름을 기도문인 딥티호(Δίπτυχο)에서 지워 버렸다. 당시 동서 교회 간의 파문 사건들은 위에 말했듯 무척이나 빈번했지만, 이번 사건은 꽤나 양측이 격노할 만한 일이었기에 학자들은 이날 이후로 동서 교회가 최종적으로 분열되었다고 본다. 재밌는 점은, 당대인들은 이 사건들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동서교회 간의 불화와 분리가 놀랍지 않은 일이었다.

이후 교회 분열은 십자군 전쟁 시기에 더욱 심화되었다. 동로마 제국은 제1차 십자군 전쟁 때부터 십자군들과 갈등을 빚었다. 1차 십자군은 체계적인 통제가 안 되는 집단이었기 때문에, 동로마 제국 내에서 약탈을 벌이는 집단들이 있었으며, 이들과 전투를 벌인 것은 사실이다. 이 외에 정치적 문제, 예를 들면 수복한 지역의 영유권 문제 등에 의해 십자군 지도자들과 긴장 관계에 있기는 했다. 물론 대체로 동로마 황제와 십자군 지도자들과는 충성 서약을 맺는 등 적대 관계는 아니었다.

하지만 동로마 제국은 십자군이 기대했던 전폭적인 지원(병력과 물자 지원)을 제공하지 않았고 좀 심하게 말하면 제국은 십자군을 장기판의 말로 취급했다.[58] 결국 제국군이 위기에 빠진 십자군을 돕지 않고, 십자군이 제국에 반환하기로 한 영토를 반환하지 않으면서 양측은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다. 이밖에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라틴인 학살 등과 같은 사건으로 십자군과 동로마 제국 간의 사이에는 깊은 골이 파이게 되었으며 이 불신은 제4차 십자군 전쟁 중 일어난 12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으로 이어졌고, 이후 동방과 서방은 돌이킬 수 없는 불화에 빠져들게 되었다. 동로마의 한 역사가는 서방에서 온 십자가 든 악마보다는 차라리 동방에서 온 초승달 괴물이 훨씬 낫다고 기록할 정도였다.

십자군 이후로도 많은 신학적 차이들이 발생했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14세기의 수도자 그리고리오스 팔라마스가 주창한 헤시카즘이다. 헤시카즘은 인간의 이성으로 하느님을 이해하자는 골자의 당시 서방 신학 주류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이론이다. 이는 간단히 말해 인간의 인지능력으로는 하느님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전제 아래에 논리적인 생각을 거부하고, 단순한 기도와 묵상을 통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평신도들에게는 호응을 얻었으나, 당연하게도 당대의 지식인들과 신학자들에게 큰 반발을 샀다. 헤시카즘은 고대 그리스부터 이어진 학문적 전통상 받아들이기에 매우 불쾌한 것이었고, 결국 팔라마스는 교회에 의해 파문되었다. 하지만 그의 사상은 당시 동로마 제국 내부의 정치적 투쟁에 이용되었고, 결국에는 세력의 방향추가 돌아가 교회가 팔라마스의 파문을 철회하고 헤시카즘을 정식 교리로 인정하게 되었다. 이로써 삼위일체론 이외에도 서방과 동방의 신학에 큰 괴리가 생겨났다.

6.2.1. Caesaropapism(황제교황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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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 시절에는 평신도인 황제가 제국 내 교회에 대해 최고의 지배권을 가지며 교의(敎義)처럼 보통 교권으로 보류된 문제에까지도 이를 행사하였는데, 이를 'Caesaropapism'라 하며 국내에 통상적으로 '황제교황주의'라 번역된다. 번역어 때문에 오해가 참 많지만, '황제=교황'이 아니라 '황제가 교권에 개입한다'라는 의미로 이해하여야 본래의 의미에 가깝다. 이 개념은 고대 로마 황제의 ‘최고 신관’(pontifex maximus)의 기능이 동로마 황제에게 이식된 것이다. 황제가 곧 교황이라기보다는, 훗날 개신교권 국가들의 국가교회주의를, 특히 근대 초 성공회를 생각하면 쉬울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단지 황제의 예스맨으로 머무른 것은 아니며[59] 서방에서도 속권이 교권에 간섭을 안 한 것도 아니지만,[60] 서로마 제국이 붕괴하고 난 후, 점차 힘을 키워낸 로마 주교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대등한 관계에 가까운 자치적 권력을 수립한 서방에 비해 동방에서는 황제가 교권과 속권의 두 영역에서 독점적인 지배권을 추구하여 Theocratia(신정정치) 체제가 상대적으로 강력하게 들어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6.3. 근세·근대

15세기 초반에는 동로마 제국황제들이 멸망 직전의 국가를 구하기 위해 교황에 굴복하였다.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는 피렌체 공의회 이후로 교황의 수위권을 따를 것을 선언하였으나, 전체 정교회 세계에서 극심한 반발이 있었고 이를 인정하는 국가는 도시국가 수준으로 전락한 동로마 제국뿐이었다. 하지만 동방교회 내에서도 반발이 대단해서 황제 따라간 통합 찬성파 일부는 돌아가면 맞아죽을까봐 이탈리아에 눌러앉았다. 이들 성직자들과 학자들은 르네상스의 촉진제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예컨대 그리스 출신의 베사리온 추기경베네치아에 기증한 장서가 교황청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던 장서의 수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동로마 제국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외교적 목적으로 다시 교회 통합을 선언했지만 교회 통합은 말뿐이었고, 실질적으로는 제국을 친통합파와 반통합파로 분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61] 거기에 동유럽의 정교권이 반발하여 정교 측에서도 각 교회 간 연결이 크게 약해지게 되었다. 어쨌든 결국 당시의 총대주교는 사임하고,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 메흐메트 2세의 지원하에 새로 즉위한 총대주교 예나디오스 스홀라리오스가 피렌체 공의회의 결정을 무효화하였다.

오스만 제국 입장에서도 자국 내 교구들이 교황의 영향을 받으면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기도 하거니와 막 형성된 제국의 틀을 다지기 위해서라도 정교회의 도움이 필요했고, 정교회에서도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실제로 오스만 제국 시대 내내 정교회는 그간 전란으로 무너진 성당, 수도원에 대한 재건을 지원받았고, 셀림 1세로부터 "천재지변으로 인해 무너진 성당, 수도원이라도 반드시 복구되어야 하며, 파괴행위를 엄격히 금한다."라는 칙령을 받아냈으며 이는 이후 내셔널리즘의 시대에 들어 각 민족들이 오스만 제국에 반기를 들어 독립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오스만의 통치하에 그리스발칸 반도에서는 제한적으로 종교의 자유를 누렸다.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이후 모스크바 대공국은 '제3의 로마'를 자처하였으며, 1589년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의 동의를 받아 루스 차르국에서 모스크바 총대주교좌가 설립되었다. 모스크바 총대주교좌가 설립된 이후부터 러시아 정교회의 독립성과 영향력이 강화되었고 러시아 정교회는 오스만 제국의 압제를 받아 자유롭지 못한 콘스탄티노플을 대신해 정교회의 수장으로 군림하려 했다. 러시아 정교회는 서방과 타협한 과거가 있는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순수성을 잃었고 동로마 제국의 멸망 역시 그러한 순수성 상실과 '타락' 때문에 멸망했다는 논리를 펼치기도 했으며[62] 투르크 파디샤의 통제하에 놓인 콘스탄티노플의 어려운 상황을 논하며 자유로운 러시아 정교회가 콘스탄티노플의 뒤를 이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17세기에는 당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키릴로스 1세가 칼뱅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아 정교회의 교리를 변개하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실패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의 처리를 위한 야시 시노드, 예루살렘 시노드에서 정교회 정통 신앙을 다시 한 번 확인하였다. 그리고 17세기의 러시아 정교회는 동란기 동안 누구를 차르로 인정하냐는 문제 때문에 세속과 함께 내전을 겪었다. 그리고 폴란드-리투아니아와의 전쟁으로 수많은 교회가 파괴되고 약탈당했으며 폴란드의 지배를 받게 된 교구들은 가톨릭으로의 변화를 강제당했다.[63]

6.3.1. 고의식파(古儀式派) 분열

17세기 중엽에는 니콘 대주교가 러시아 정교회의 지나친 현지화와 '변형'을 개혁하려고 했다. 성경을 재번역해 오류를 수정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처럼 성호를 그을 때 두 손가락이 아닌 세 손가락으로 긋는 방식을 도입했다. 그리고 교회 슬라브어로 진행하는 예배를 당대 러시아어로 진행하도록 바꾸고 여러 분야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와의 일치를 추구했다. 1654년의 교회 회의에 모인 주교들은 니콘에 대해 지지를 표명했으나, 러시아 정교회의 전례와 교회 예식을 그리스와 러시아의 전통에 일치시킬 것을 제안했다. 니콘의 개혁은 니콘 개인의 지나친 야심과 차르와의 불화로 인해 좌초되는 듯 보였으나, 니콘은 내쳤어도 그의 개혁은 존중한 차르와 개혁 찬성파의 지지 덕분에 지속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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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식파를 추종한 이유로 체포되는 귀족 여성을 그린 그림 《대 귀족부인 모로조바》[64][65]

그러나 니콘의 개혁에 반발한 세력도 적지 않았다. 소위 '구교도'(舊敎徒)[66]라 불리는 반대파들은 니콘의 개혁으로 러시아 정교회의 전통이 무너진다고 판단하여 개혁을 격렬하게 반대했다. 차르와 개혁파들은 이들을 모두 파문하고 화형하기까지 했으나, 이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계속 지켜나갔다. 정부도 완전히 구교도들을 '개종'시키거나 없애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하여 갖가지 차별을 가하는 방식으로 전환했으나, 구교도들은 반란을 일으켜 저항하거나 정부의 통치력이 약한 지방으로 이주하는 식으로 대응하여 생존했다. 그리고 구교도들의 이주로 인해 지방의 농민들과 카자키들 사이에서 구교도의 영향력이 매우 강해져서 이들을 뿌리 뽑는 것이 불가능해지고 도리어 인구의 상당수가 구교도가 되어버렸다. 서방 교회가 구교(舊敎)와 신교(新敎)로 갈린 것처럼 러시아 정교회도 니콘의 '종교 개혁'으로 인해 '전통의식파(구교도)'와 개혁파(니콘파)'로 나뉘어 버린 것이다.

다만, 고의식파들은 정부와 개혁파의 탄압과 세력 이주, 교회의 분산으로 인해 일체된 조직을 유지하지 못하고 여러 분파로 쪼개졌으며 이 과정에서 이단 종파들이 양산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전통의식파의 한 갈래인 '흘리스트파'에서[67] 나온 극단주의 종파인 '거세파'인데 이들은 생식기와 유방(여성의 경우)을 원죄의 상징으로 간주하고 이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한 세력으로서 19세기 초에 제정 러시아 정부에게 발각당했다. 발각당하자마자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마니교' 이단, '보고밀파' 이단으로 간주받고 크게 탄압받았다.

18세기의 러시아 정교회는 국가에 완전히 종속당하기 시작했다. 1700년, 모스크바 총대주교 아드리안이 사망하자 표트르 대제는 대북방 전쟁 발발을 이유로 총대주교 선출을 금지하고 자신이 총대주교를 직접 임명했으며 대북방 전쟁에서 승전한 이후에는 모스크바 총대주교좌를 폐지하고 러시아 정교회 조직을 차르가 통제하는 종무원(宗務院)으로 대체했다. 이로 인해 러시아 정교회는 차르에게 완전하게 종속당했고 독립성을 상실했다.

19세기 중반부터 교회의 독립 운동이 시작되는데, 1833년 그리스 교회가 독립한 것을 시작으로 1860년 불가리아 정교회, 1879년 세르비아 정교회, 1885년 루마니아 정교회가 독립 교회가 되었다. 이러한 국가별 독립 정교회의 형성은 20세기로 이어져 1917년 조지아 정교회, 1922년 알바니아 정교회가 독립 교회가 되었다. 이러한 독립교회의 형성은 근세의 민족주의 바람과 연관되어 있다. 오스만 치하에서는 그리스인이라는 개념이 다소 희미했으며 정교회인을 묶어서 생각했다. 그러나 내셔널리즘이 발흥한 후 정교회권 각국은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한 후 정교회 신앙을 바탕으로 민족 국가를 세웠다.

근대 들어서는 오스만 제국의 힘이 빠지고 정교회권 각국이 독립하면서 다시금 가톨릭과 많은 갈등을 빚었다. 대표적으로 가톨릭이 동방 가톨릭 교회라는 이름으로 해당 지역의 교회를 일치라는 명목하에 받아들이면서 현지의 교회가 분열된 문제 등이 있다. 신학적으로도 가톨릭에서 독자적으로 교황무류성, 성모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 등을 교리로 선포하면서 정교회와의 간극이 커졌다. 19세기 말~20세기 초의 가톨릭은 신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보수적이었고 교회 일치에 대해서도 가톨릭이 우선이라는 입장을 버리지 않았다. 교황 비오 9세와 정교회 4대 총대주교 및 주교단 명의로 주고받은 서신에서 가톨릭과 정교회의 갈등과 충돌을 볼 수 있다.

6.4. 현대

1965년에 교회 분열 이후 911년 만에 교황 바오로 6세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아티나고라스 1세(Αθηναγόρας, Athenagoras)가 예루살렘의 올리브 산에서 역사적인 만남을 이루었으며 1054년의 동서 대분열에 의한 상호 파문을 9백여 년 만에 철회하는 공동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동유럽 공산권이 붕괴하면서, 러시아 등 공산권이었던 나라의 정교회들이 새로운 자유를 얻었지만, 동시에 각 교회의 위상을 둘러싼 문제들이 생겨났다. 예컨대 소련이 해체된 뒤, 세계 최대의 정교회로 부각된 것은 '제3의 로마'를 자처한 러시아 정교회였다. 그러자 '새로운 로마'를 자처한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청의 위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러시아 교회는 988년 키예프 루스블라디미르 1세가 세례받음으로써 시작되었는데, 16세기에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로부터 자치 독립권을 부여받았다. 그런데 지금은 교세 면에서 오히려 모스크바 총대주교청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청을 앞지른 것이다.

정교회는 현재 딥티호(Δίπτυχο)와 자치 독립교회 문제들을 둘러싸고 교회들 간에 입장 차이가 워낙 커서 ‘하나 되는 길’이 멀고도 험난하다. 같은 정교회로서 한 목소리를 내고 자치 독립권을 부여하는 합리적인 과정을 마련해야 한다는 데에는 모두가 동의하지만, 문제는 ‘합의를 이루어내는 방식’과 ‘자치 독립교회를 선언하는 방식’을 둘러싸고,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모스크바 간 기싸움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청은 모스크바의 제3의 로마 주장을 인정하지 않고, 모스크바 총대교구청이 아메리카 정교회와 중국 정교회, 일본 정교회 등에 부여한 자치 독립권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청에서 사용하는 딥티호에서는 이들 교회를 언급하지 않는다.

2018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가 우크라이나 정교회를 독립된 자치교회로 인정하자 러시아 정교회의 갈등이 깊어졌다. 러시아 정교회 측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정교회와의 관계를 단절한다고 선언하는 등 갈등이 더욱 심해졌다.# 자세한 것은 2018 정교회 분열 참조.

7. 타 종파·종교 간의 관계

7.1. 가톨릭과의 관계

아직 완전한 통합은 이루지 못했지만 현재는 지상에 유일한 보편교회의 일원들로서 서로를 인정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 그 어떤 다른 그리스도교 종파보다도 가톨릭과의 관계가 개선된 종파가 바로 정교회이다.

정교회와 가톨릭은 서로 간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로 인정하는데, 정교회는 정통성(orthodox)을 더 강조하고 가톨릭은 보편성(catholic)을 더 강조할 뿐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정교회가 정통성, 가톨릭이 보편성을 더 강조한다는 분석도 정확하지는 않다. 양쪽 모두 스스로를(그리고 서로를) 정통적이고 보편적인 세계 교회라고 주장하며, 정(통)교회, 보편교회라는 명칭은 분열 이후 어쨌건 둘 다 정당성을 가졌으니 양쪽을 구별하기 위해 원조 국밥, 정통 국밥이라는 식으로 붙여진 이름에 가깝다. 본디 가톨릭과 정교회는 한 몸이었고, 동서 대분열(東西大分裂) 이전에는 세계에 단 하나의 교회만이 있었다. 동서 대분열이 없었다면 굳이 스스로를 정통이라고 밝힐 필요가 없으므로 (Ορθοδοξία)교회란 말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정교회측에선 자신들이야말로 그리스도교의 정통이라고 확신하기에 가질 수 있는 자부심 넘치는 간판이다.

사실 자부심으로 따지면 가톨릭도 만만치가 않다. 가톨릭 역시도 자신들이 그리스도교의 정통이라고 확신한다. 가톨릭은 스스로를 Ecclesia Catholica라고 하는데, 이를 해석하면 '모든 민족, 모든 지역, 모든 국가가 보편적으로 믿는 신자들의 모임' 즉 교회가 된다. 두 종파는 둘 다 정통이고, 둘 다 보편되며, 둘 다 사도로부터 이어온다. 이 두 종파가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들로부터 이어져온 하나의 교회를 이룬다.

가톨릭 쪽에선 정교회를 포함한 모든 고대 교회, 즉 사도전승의 교회들이 가톨릭의 주교좌들이었다가 갈려져 나갔으며, 여기에 비사도전승인 개신교도 가톨릭으로부터 갈려져 나갔음을 강조하며 자기네들의 정통성을 중시한다. 전자의 분열은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성사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교회적으로는 하나이지만 그 안의 내분 정도로 인식하며, 후자는 성체성사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교회 바깥으로의 분열로 인식한다. 전자는 이교(離敎) - 이교도라는 뜻의 이교(異敎, paganism)가 아니라 갈려질 이(離)자를 써서 이교(schism), 후자는 열교(裂敎) 또는 이단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정교회도 정통성을 중시하면서도 동시에 여러 주교좌가 대등한 가운데에 하나되고 보편되었다는 보편성을 강조한다. 보편성을 뜻하는 가톨릭이라는 명칭은 초기 정교회도 고수하던 이름이었다.

가톨릭과 정교회 모두 초대교회의 정통적 계승자로 주장한다. 객관적으로 둘 다 사도좌에서 출발한 교회기 때문에 두 교회의 주교들은 모두 사도들의 계승자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따지자면 어느쪽이 더 정통성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당연히 가톨릭 신자들은 가톨릭의 최고 정통성을, 정교회 신자들은 정교회의 최고 정통성을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다만 두 교회의 주교들이 사도들의 계승자라는 것만큼은 이견의 여지가 없고, 그를 넘어서는 논쟁한다면 토론을 해보더라도 한쪽을 납득시키기가 어려우므로 더 이상의 자극은 서로서로 자제하는 것이다.

이 두 보편 교회들은 자기들 외의 다른 그리스도교 교단, 특히 개신교는 교회가 아니라 분열되어 나가 만든 종교라는 뜻의 '열교' 또는 '교회적 공동체'로만 언급하고 있다. 삼성직의 성직 체계[68]를 갖춘 보편교회와 달리 만인사제설을 주장하여 사도전승의 주교제와 그에 딸린 하위 2성직을 거부하는 개신교들은 완전한 교회의 구조를 이루고 있지 못하다고 보기 때문에 한 지붕 아래의 그리스도인이긴 하되, 교회(敎會)로는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단, 가톨릭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 개신교에 대해 '열교'라는 명칭을 자제하고 '갈라진 형제'라는 표현으로 포용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가톨릭에서 부제(副祭, Deacon)라고 하는 직위를 정교회에서는 보제(補祭)라고 한다. 하지만 한국어 번역상의 문제로 '받들다'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디아코노스(Διάκονος)'에서 나온 것은 같다. 결혼한 이가 사제가 되는 건 가능하나 주교(主敎)는 결혼하지 않은 이에서만 뽑고[69], 서품 뒤의 사제는 결혼, 재혼이 불가능하다.

성체성사는 성체(빵)만을 주로 모시는 가톨릭과 달리 양형 영성체(兩形領聖體, 빵+포도주)를 주로 한다. 가톨릭의 양형 영성체는 빵을 포도주에 적셔 입에 넣어주지만, 정교회의 양형 영성체는 포도주가 담긴 성작에 빵을 넣어 숟가락으로 떠먹이는 방식을 취한다. 성찬예배의 예식은 가톨릭의 미사와 비교해도 무척 화려하다.

가톨릭에서는 부득이한 경우(가톨릭 교세가 없는 지역의 장기 체류 등) 정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하고 있으며, 이론상 정교의 성찬례는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의 적법한 성사이므로 여기에 참석하여도 미사 참례의 의무를 충족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가톨릭에서 공심재(空心齋) 전통을 영성체 전 3시간에서 1시간 전으로 완화하였고, 현실적으로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단식 및 금육 등의 의무를 소홀히 하고 있기 때문에[70] 가톨릭 신자가 정교회에서 영성체를 하면 정교회의 입장에서는 독성(모령성체, 冒領聖體)이 될 위험이 매우 높다. 결국 신자 개인이 정교회 성당에 찾아가서 예배에 참례할 수는 있으나 영성체까지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반대로 한국에서 정교회 성사 참여가 불가능한 상황인 정교회 신자(군인 등)는 천주교 성체성사 참여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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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회의 여성 신자는 가톨릭처럼 미사보를 쓰는 대신 머리에 스카프를 두른다. 특히 러시아를 비롯한 슬라브권 정교회에서 많이 볼 수 있으며 정교회 한국대교구의 경우 간혹 외국인 여성 신자가 스카프를 두르고 성찬예배에 참례하는 것을 볼 수 있어 정교회 밖으로 나오면 이슬람교도로 착각하기 쉽다.[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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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깔끔하게 면도하는 가톨릭의 성직자·수도자와는 달리 정교회의 성직자·수도자는 수염을 풍성하게 기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서방교회는 세상을 버린다는 의미로 삭발과 면도를 한데 반해 동방교회는 구약성경의 판관기에 나오는 나지르인의 사상 속에서 머리를 기르고 수염을 기른다. 더불어 서로마는 라틴 문화의 영향으로 수염을 자르는 것이 풍습이었고 동로마는 그리스 문화의 영향으로 수염을 기르는 것이 풍습이었다.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오스만 제국 치하에 놓이게 된 발칸반도 정교회 신도들은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수염을 기르는 풍습이 존재했던 이슬람 문화권의 영향까지 더해졌으며, 러시아의 경우 몽골-타타르의 멍에 이후로는 훗날 표트르 대제에 의해 콧수염만 기르고 턱수염은 깎는 서유럽 스타일로 바뀌기 전까지 몽골의 영향을 받아 수염을 기르는 문화가 강했다. 그래서 그게 종교에도 전통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동방과 서방 교회 간의 쟁점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가장 중요한 것만 뽑자면 대략 이 정도다.

7.1.1. 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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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후반, 가톨릭에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열어 정교회와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 결과 그리스도교 세계의 양대 보편교회인 가톨릭과 정교회의 관계 개선이 크게 진전되었다. 1965년에 교회분열 이후 911년 만에 교황 바오로 6세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아티나고라스 1세예루살렘의 올리브 산에서 역사적인 만남을 이루었으며 1054년의 동서 대분열에 의한 상호 파문을 9백여 년 만에 철회하는 공동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난 후 바오로 6세는 1967년 7월 튀르키예를 방문, 이스탄불에서 아티나고라스와 다시 만났고, 그해 12월에는 아티나고라스가 처음으로 바티칸을 방문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특히 정교회와의 대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79년에는 이스탄불을 방문, 총대주교 디미트리오스 1세(Δημήτριος, Demetrius I)를 만난 것을 계기로 가톨릭-정교회 합동 위원회가 구성됐다. 교황은 또 1987년에는 총대주교 디미트리오스를 바티칸으로 초청한 데 이어 1995년 그 후임자인 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스 1세를 초청했다. 교황이 루마니아(1999)를 비롯해 우크라이나와 아르메니아(2001)를 방문했을 때나 2000년 대희년을 맞아 시나이, 예루살렘, 시리아, 그리스를 순례했을 때 정교회와 고대 동방교회들과 일치가 주요 사안이었다. 특히 1995년에 발표한 회칙 〈하나되게 하소서(Ut unum sint)〉는 교회 일치를 위한 교황의 염원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 문헌이다.

가톨릭과 정교회는 1978년 이후 해마다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에는 가톨릭 대표단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좌가 있는 이스탄불을 방문하고, 성 베드로와 성 바울로 사도 대축일에는 정교회 대표단이 로마를 방문하고 있다.

결국 2016년 2월에 교황 프란치스코와 러시아 정교회 총대주교 키릴쿠바의 수도 아바나에서 회동(3시간 개별면담)하고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서로 포옹하면서 "마침내 (만났다.)"라는 감탄사와 함께 "우리는 형제다."라며 서로의 볼에 3차례 입맞춤하고서, 총대주교 키릴은 통역을 통해 "이제 상황이 잘 풀릴 것"이라고 말했다. 공동 성명에는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박해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어려움과 관련한 내용도 포함되었다.

7.1.2. 상호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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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회는 하나인 교회로부터 로마 측이 분열되어 나갔다고 인식하며, 가톨릭은 정반대로 하나인 교회로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측이 분열되어 나갔다고 인식한다.

다만 양측에서는 모두 서로에 대한 시선이 개신교에 대한 시선과는 차이가 있으며, 분열 전 역사를 어떤 형태로든, 즉 정교회 우위의 역사관이든 가톨릭 우위의 역사관이든 공유한다고 인식은 하고 있다.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는 고대 로마 제국 이래로 그리스도교 세계의 중심지로 기능해 오고 있었으며, 상호 간의 위계는 세속권과 성직권이 서로 얽혀 복잡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제1차 니케아 공의회 기준으로 교회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의 세 중심지를 중심으로 운영되었으나, 로마 제국의 천도에 의한 신흥 세력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부상과 알렉산드리아의 하강으로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양측의 긴장 관계가 야기되었다.

교회 서열로는 교회법상 교황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보다 우위에 있었으나, 이 우위를 전체 교회에 대한 지배력인지 아니면 그저 같은 총대주교들 중 첫 번째의 지위인지에 대해서는 전 세기를 막론하고 의견이 팽팽히 갈리고 있었다.

일단 로마 지역 교회가 가진 특별한 무언가가 인정이 되었다는 것은 루터교 신학자인 아돌프 폰 하르낙도 동의할 정도로 널리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
From the close of the first century the Roman church was in a position of practical primacy over Christendom. It had gained this position as the church of the metropolis, as the church of Peter and Paul, as the community which had done most for the catholicizing and unification of the churches, and above all as the church which was not only vigilant and alert but ready[72] to aid any poor or suffering church throughout the empire with gifts.[73]
1세기 말부터 로마교회는 전체 그리스도교 지역에 대한 실질적 수위권이 있었다. 로마교회는 메트로폴리스의 교회로서, 베드로와 바오로의 교회로서, 교회들을 가톨릭화하고 통일하는데 최고로 활동하는 공동체로서, 무엇보다도 경계하고 경고할 뿐만이 아니라 제국의 어떤 가난하고 교통받는 교회든 기부로 돕는 교회라는 점에서 이 위치를 얻었다.
-Adolf von Harnack, The Mission and Expansion of Christianity in the First Three Centuries,[74] James Moffatt 옮김 (Grand Rapids, MI: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395쪽

여기서 "로마 지역 교회가 가지는 어떤 특별한 무언가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살아남은 로마 제국의 도읍이라는 특별한 위치를 누리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특수성과 로마가 가진 특별한 무언가가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지"를 어떻게 답하느냐에 따라서 누가 누구에게서 분열되어 나간 것인지에 대한 답이 다르게 나올 것이다.

7.1.3. 교황의 실질적 수위권 논쟁

우선 정교회 측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교가 공인될 시기 로마 제국 시절에 총대주교좌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에 있었다. 처음에는 오랫동안 제국의 수도인 로마는 당연했고 제국 제2의 도시 알렉산드리아와 제3의 도시 안티오키아에 총대주교좌가 있었다.[75] 그러다가 콘스탄티노폴리스(비잔티움)로 천도하고 나서 약간의 문제가 생겨났다. 콘스탄티노폴리스(비잔티움)이 새로운 로마 제국의 수도가 되었으나 총대주교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초기 교부들과 공의회는 카파도키아를 비롯한 소아시아 출신 동방 교부들이 주도하기는 했으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부상을 로마 측은 불쾌하게 여겼다. 비록 로마의 교회 내 위상에 제국의 (옛) 도읍이라는 정치적 배경이 없지는 않았으나 어디까지나 주된 이유는 '베드로'라고 여겨졌고,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각각 베드로에게[76] 연결되는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의 위상도 옹호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부상은 "지역 교회의 위상이 도시의 세속 정치적 위상에 의해 결정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과 연결되었다.[77]

더군다나 4세기 후반 안티오키아 출신 네스토리우스가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의 낙하산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가 되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선 강한 반발이 터져나왔다. 네스토리우스의 신학적 문제와 안티오키아 학파 대 알렉산드리아 학파 구도가 되면서 네스토리우스를 비롯한 안티오키아 학파는 에페소 공의회에서 축출되었고,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단성론은 칼케돈 공의회에서 나란히 축출되며 새로 서열을 조정하여 로마 다음의 지위는 새로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총대주교좌로 승격하고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는 한 단계씩 서열이 강등, 예루살렘은 성지의 특성상 새로이 승격되며 총 5곳의 총대주교좌가 성립이 되었다.

이후 서열에 관해 동방과 서방에서는 격한 논쟁이 오갔다. 일단 명예상으로는 로마의 주교가 가장 앞선다는 것에 동서방 양측은 동의한다.
Τὸν μέν τοι Κωνσταντινουπόλεως ἐπίσκοπον ἔχειν τὰ πρεσβεῖα τῆς τιμῆς μετὰ τὸν τῆς Ῥώμης ἐπίσκοπον, διὰ τὸ εἶναι αὐτὴν νέαν Ῥώμην.
Verumtamen Constantinopolitanus episcopus habeat honoris primatum praeter Romanum episcopum, propterea quod urbs ipsa sit iunior Roma.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는 로마 주교에 이어 명예 특권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이 도시는 새 로마이기 때문이다.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교령 3.

그러나 로마 주교는[78] 모든 교구를 실질적으로 지배할 권리가 있다고 보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비롯한 다른 총대주교들은 로마의 교황이 사도들 중 첫 번째 서열인 베드로부터 사도직을 이어온 교회의 명예상으로 으뜸되는 주교라는 점은 인정하나, 어디까지나 다섯 총대주교 중의 한 사람이며 주교들 간에 서로 동등한 위치에 있다고 주장했다. 즉 로마 주교인 교황은 총대주교들 중 서열 순서에 따라 단지 명예상 1위에 해당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어쨌든 교황의 수위권 논쟁은 신학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쟁점으로, 현실적으로 보았을 때 가장 중요한 갈등이었다.

한편 동유럽이나 중동의 가톨릭 교회 중에서는 외견이 정교회 같은 종류도 있는데, 이는 동방 가톨릭 교회로써 교황의 수위권 아래로 들어간 옛 정교회 소속 교회들이다. 역으로 정교회로 넘어간 서방 교회 신자들도 있다. 아무래도 동서 교회가 분열될 때 교황의 수위권을 따르는 것을 거부한 교회들인 듯. 이런 이유로 가톨릭에는 동방 전례 교회가 덤으로 있고, 정교회에는 서방 전례 교회가 덤으로 있다. 사실 교회의 초기 구조를 따져보면 별로 이상할 것도 없다. 수위권을 어디다 두느냐의 차이일 뿐. 원래 동서 교회는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었을 뿐이다. 문제는 동로마 제국이 있던 시절에 황제의 권력과 부유한 동방의 재력 때문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영향력이 증가하고, 이것이 '서열상 1위'인 교황과 갈등이 일어난 원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가톨릭은 으뜸 주교인 교황이 실질적인 권한을 갖고 행사한다고 하지만, 정교회는 교황이라는 칭호부터 부정적이고 교황을 모두 동등하고 평등한 주교들 중의 대표 격으로 생각하기에 교황의 실질적 권한을 인정하지 않는다. 사도들로부터 이어진 명예로운 전통적 서열은 인정하지만, 사도들 간에 동등했기 때문에 수위권 같은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지금에 와서는 갈등의 이유가 많이 사라졌다. 다만, 하도 오래 연결이 끊어져 있다 보니 서로 모습이 너무 달라져서 다시 연결되기가 굉장히 힘들다는 것일 뿐. 또한 역설적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완전히 아작난 상태라서 정교회 안에서 자체적으로 좀 다른 의미의 수위권 분쟁이 유발되므로, 더욱 합쳐지기가 힘들다. 모스크바라든가


이에 대한 가톨릭의 입장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교황수위권 문서에도 나와 있듯 로마 제국의 그리스도교 공인 이전, 빈번히 박해받던 교회 초기(1~3세기)부터 성경 문헌을 기초로 하여 베드로그리스도에게서 수위권을 받았다는 인식이 존재했고, 또한 전통적으로 로마 주교는 베드로의 후계자로 여겨졌기에 최종 결정을 베드로의 후계자인 로마 주교=교황에게 맡기는 일이 빈번했다. 즉 로마가 제국의 수도이고 지역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로마 총대주교'라는 직위 또한 중요하던 게 아니라[79], 총대주교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부터 로마 주교의 중요성과 수위권은 성전으로 존재하던 것이라는 것.

여기서 일단 동서방 양 교회가 합의하고 있는 점을 먼저 거론하자면, 가톨릭과 정교회의 신학자들은 초기의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 논쟁에 특히 동방의 교부들이[80] 크게 공헌했다는 것은 모두 동의하고 있다. 이를테면 니케아 공의회부터 신학적 논쟁은 동방이 주도했고, 공의회의 주된 주제인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을 다룬 초기 교부들은 거의 다 동방 쪽 인물들이었다. 애초에 구약 70인역과 신약성서는 헬라어였고 예루살렘과 사도들의 사역은 동방이 위주인데다가[81] 역사적으로 로마 제국 시절 정치적으로는 로마에 정복되었을 지언정 문화적 학술적으로는 헬라 문화권의 영향이 오히려 로마를 압도했기 때문이다. 로마에서도 물론 실용 학문인 법률이나 건축 쪽이면 몰라도 다른 모든 학문의 권위를 헬라 문화권에 있는 걸 대체로[82] 인정했기 때문에 로마시대 귀족들도 그리스인 선생을 가정교사로 모시거나 장성해서는 아테네나 로도스섬으로 유학을 보냈던 것이다. 물론 서방의 교부들이 아무것도 한 게 없냐 하면 그건 아니다. 은총론과 역사신학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활약했으며[83] 칼케돈 공의회의 그리스도론은 로마 주교인 레오 1세가 명백히 주도하였다.

그리스인들이 로마와 본격적으로 접촉하던 시기에 보여주던 라틴인에 대한 경멸은[84] 콘스탄티누스 1세 시절에는 그 이전보다 상당히 희석되어 있었다. 물론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비그리스 지역에는 학문 자체가 존재할 리가 없다는 식의 경멸은 제1차 니케아 공의회 시점에서 이미 수백 년 전 이야기였다.[85] 당대의 그리스도론 논쟁을 보자면, 대체로 동방 교부들이, 특히 이집트와 시리아의 교부들이 그리스어를 국제어로 사용하며 주도하되, 서방 역시도 유의미한 영향을 끼치며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에페소 공의회에서 시리아 학파가[86] 타격을 받고, 칼케돈 공의회에서 이집트 학파가[87] 타격을 받으며, 로마콘스탄티노폴리스로 학술적 주도권이 넘어간 것이라 보면 크게 이견이 없을 것이다.

한편 그리스도교 공인 이후에도 속권으로는 초기 공의회의 소집이 로마의 주교가 아닌 황제의 주도로 행해졌다. 즉 초기 공의회는 신학쪽으로는 동방의 교부들이 주도하고, 속권에 있어서는 동방의 황제가 주도한 것이며, 이 부분 역시도 가톨릭과 정교회 양측이 모두 동의하고 있다. 사실 4대 공의회 시절만 하더라도 로마황제의 소집과 동방 교부들이 주도하였지, 로마 쪽에선 별로 신학자들이 오지도 않았다. 물론 7~8세기 이후 실질적으로 동서 간에 균열이 생긴 이후에는 로마에서 실질적으로 서방에 수위권을 주장했지만 이민족으로 초토화가 되어 로마의 권위로 대동단결하던 서방과는 달리 안정된 통치가 이루어지고 로마와의 물리적 거리도 먼 동방과는 의견 차이가 있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무슨 해석에 이견이 발생하여 동서방의 두 교회를 갈라놓은 것일까? 그것은 세계 공의회에서[88] 가장 권위가 있던 주교를 누구로 해석하느냐의 문제이다. 이를테면 에페소 공의회의 경우, 치릴로는 첼레스티노의 권한으로 네스토리우스를 파문했다. 조금 더 깊게 파고 들자면, 사실 이때 로마 측에서는 3명의 사절을 보냈는데 도착이 지연되자 치릴로가 자신의 신념과 교황의 견해가 일치한다는 신념하에 도착하지도 않은 로마 측 권위에 호소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우스울 수 있지만 당시 치릴로가 (당연히, 크든 작든 유형적으로 분명히 존재한다고 주위에 받아들여지던) 로마 주교의 권위에 상당히 기대었던 건 뚜렷한 사실이다.
다른 이들에게 매우 존경받는 네스토리오스는 우리의 초청에 응하려고 하지 않았고 우리가 보낸 거룩하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주교들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네스토리오스가 야기한 불경에 대해서 조사하기 시작하였다. 낭독한 그의 서한들과 저서들을 바탕으로, 최근에 그가 '이 도시'에서 말한 것과 증인들이 확인한 것을 바탕으로, 우리는 그가 불경스럽게 생각하고 이러한 것을 선포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 따라서 법규들과
지극히 거룩한 우리의 아버지이자 동료이며 로마 교회의 주교인 첼레스티노가 쓴 서한에 따라, 우리는 네스토리오스에 대해 애통해하면서 어쩔 수 없이 다음과 같은 유감스러운 판결을 내리게 되었다.

네스토리오스에게서 모욕을 받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극히 거룩한 이 공의회를 통해 네스토리오스가 주교의 품위와 사제가 참여할 수 있는 모든 집회에서 배제되었음을 확정하셨다.
에페소 공의회, 네스토리오스에 대한 단죄

또한 칼케돈 공의회의 경우를 보자면, 역시 로마 측 사절에 의해 공의회가 최종적으로 승인되었고, 교황 레오 1세의 훈령에 따라 디오스코로스가 공의회에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초기의 세계 공의회와 그 논제인 삼위일체론, 그리스도론 연구가 동방의 교부들에 의해 주도되었고,[89] 그 소집은 황제가 주도한 것은 맞는데, 어느 주교의 권위가 가장 높게 인정되었냐는 점에서 논의가 꼬여버리는 것이다. 에페소 공의회의 경우 네스토리오스의 파문에 로마의 권위가 있었고, 심지어 칼케돈 공의회의 경우 교황 레오 1세가 신학적 의미에서 공의회를 주도하기까지 했는데,[90] 이러한 사례들을 구체적으로 각각 아래처럼 해석함에 따라 논란이 발생하고 있다.
  1. 교황이 수직적인 위계상으로 다른 동료 주교들보다 위에 있다.
2. 단지 동방의 주교들이 명예상 으뜸 주교인 교황을 존중해 줬기에 일어난 의례적 과정이다.
3. 교황 개개인의 카리스마 문제이지, 교황이라는 자리 자체가 가진 권위와는 별개이다.

7.1.4. 성상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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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상 논쟁 시기에 동로마 제국에서 제작된 성경시편 사본의 삽화. 성상파괴주의자들이 교회에서 물에 적신 해면으로 예수의 성상(벽화)을 지우는 것을, 병사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고 장대에 꽂은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셔 예수에게 갖다 댄 것[91]에 대비시키고 있다.

성상 논쟁에 관해, 과거에는 가톨릭 교회적 관점[92]의 영향으로, 서유럽 중심적 역사 서술에 따라 성상 논쟁이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 사이의 논쟁이라는 관점의 역사 서술이 횡행했으나, 실제에 있어서 성상 논쟁은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대립이기 이전에, 동방 교회 내부의 대규모 이단 내지는 이교의 발흥이었다. 서방 교회와의 논쟁은 그 와중에 있었던 곁가지에 가깝다.

성상 파괴파는 사실 동방 교회 내에서도 상대적으로 비주류의 분파였으나, 이것이 동로마 제국 황제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되면서 동로마판 문화대혁명과 같이 되었을 뿐이며, 동서방 교회가 성상 공경과 성상 파괴로 입장이 나뉘어 대립한 것도 이렇게 동방 교회가 성상 파괴파 황제의 영향 아래 있었던 일시적인 기간뿐이었다. 그러므로 원칙적으로는 이것이 동서 대분열로 직결된 바도 없다. 단지 서방 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는, 잘 써오던 성상을 놓고 갑자기 동방 교회(의 일부)가 괜한 시비를 건 것이며, 이 때문에 서방 교회가 동방과 사이가 멀어진 원인 중 하나이긴 하다.

그러나 동로마 외에 프랑크 제국의 루트비히 경건왕[93]의 장자 로타르도 교황에게 검토해보라 했었다.[94] 그때 교황이 내세운 근거가 서민에 대한 교육이었다.

이슬람교에서는 자신들과 접촉하는 그리스도교를, 특히 성상 공경과 관련하여 우상 숭배로 매도하는 경향이 있었고, 이에 영향을 받은 소아시아 지역에서는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성상을 우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싹텄다. 이후 8세기에 권력을 잡은 소아시아 출신의 레온 3세가 성상을 거부하면서 성상 파괴주의가 시작되었고, 그 아들 콘스탄티노스 5세가 신학적인 사유를 동원하여 나름대로 논리적으로 기존의 전통적인 성상 공경을 열심히 까댔으나, 동방 교회 주류에선 이런 과격한 주장에 거부감이 강했다.

이러한 성상 파괴주의 황제들은 성상 파괴에 저항하는 기존의 총대주교들을 쫓아내고, 성상 파괴를 지지하는 성직자들을 그 자리에 앉혔다. 이후 동로마 제국 내부에서는 성상 파괴파와 정통파 간의 투쟁이 일어나 정통파는 무수한 박해를 받으며 동시에 수많은 문화재가 파괴되었다.

성상파괴주의는 내적으로는 유럽 및 소아시아 해안지대 속주들과 대립하는 소아시아 내륙 속주 간의 알력, 동로마 제국의 세속 권력과 교회 권력 간의 내부 투쟁이 얽혀들어 전개되었다. 이는 결국 한세기 반에 걸친 내전으로 치달았으며, 대외적으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교구 및 동로마 황제와 알력관계에 있던 교황의 세력까지도 논쟁에 합세하였다.

이 논쟁은 서기 787년 레온 4세의 부인으로서 아들 눈알 뽑고 여황제가 된 이리니가 니케아 공의회에서 성상파괴파를 이단으로 간주함으로써 일시적으로 종결되었다. 이후 레온 5세가 성상 파괴주의를 부흥시켜 제2차 성상파괴가 일어났으나, 서기 843년 섭정 황후 테오도라에 의해 논쟁이 종식되고 성상이 다시 인정받게 되었다. 그렇다 해도 성상 파괴파에 대한 양보로 정교권에서는 되도록이면 성상 중 이콘만을 사용하도록 권고하였고,[95] 정교권에서는 이날을 '정교주일'이라는 축일[96]로 기념하였다.

이 시기 동안 많은 성유물과 이콘 화가들이 박해를 피해 동로마 제국을 떠나 서유럽으로 옮겨왔으며, 이들은 중세 초기 서유럽 종교 미술의 수준을 제고하였다.

7.1.5. 삼위일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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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9년 톨레도 교회회의에서는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 수정을 가했다. 기존에는 성령성부에게서 발현한다고 되어 있었으나, 톨레도 교회회의에서는 성자의 위격 또한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래 '성령께서는 성부에게서 발하시니'라고 되어 있던 것을 '성령께서는 성부와 또한 성자에게서 발하시니'라고 수정하였다. 라틴어 신경에서 '또한 성자에게서'를 뜻하는 것이 'filioque('filio(아들에게서)'+'que(또한)')'라는 단어이기 때문에, 이것을 필리오퀘 문제라고도 부른다. 로마는 레오 3세 때는 교의적으로는 찬성하나 신경 수정에는 반대한다는 입장이었고, 11세기에는 교의적 차원과 신경 수정에 둘 다 찬성했다. 동방 교회에서는 이 수정을 서방 교회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여겨 크게 분노했다. 서로의 입장이 팽팽히 갈리는 가운데 타협안은 이루어질 수 없었고, 두 교회 간의 사이에는 불화만이 오갔다.

그나마 현대에 들어와서는 화해 일치의 시도가 있어왔다. 교회일치적 관점에서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같이 외우기도 하는데, 이 경우 '성령께서는 성부에게서 발하시니'라는 신경을 기준으로 한다.

왜냐하면 가톨릭이 반대하는 것은 '성부에게서만 발한다'라는 명제이지, '성부에게서 발한다'라는 명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즉 가톨릭에서 본래의 공의회 신앙 고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학적인 당연한 결론으로서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라는 신앙 고백 역시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는 형식상 배려의 형식일 뿐이고, 가톨릭은 성부와 성자로 부터 성령의 발출을, 정교회는 성부로부터 성령의 발출을 주장하는 것은 변함없다.

다만 정교회가 '성부로부터 성자를 통하여'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 것은 아니다. 성령의 활동(경륜)에 있어서는 성부로부터 성자를 통하여 성령이 활동한다는 것을 정교회 역시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니케아 신경의 요점은 '성령의 기원'이지 '성령의 활동(경륜)'이 아니다.

이미 가톨릭과 정교회 사이의 차이가 너무 커져서 필리오퀘 문제에서만의 합의만으로는 분열을 완전히 해소하기가 어려운 상황은 맞다. 그러나 필리오퀘 문제가 결코 가벼운 문제라고 말할 수만은 없으며, 그리스도교 신학의 근본이 되는 삼위일체를 다루기 때문에 (최소한) 동서방의 신학에 간접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건 명백하다.

7.1.6. 성사 교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가톨릭은 정교회와 화해하였고, 가톨릭은 상호파문을 철회하면서 성사교류가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정교회는 신도들에게 이러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단지 일반적으로 가톨릭의 세례는 인정하되(한국의 경우), 정교회의 견진을 받지 않은 경우엔 일반적으로 가톨릭 교인의 성사 참여 역시 금지되고 있다. 또한 가톨릭 견진성사는 아예 가톨릭으로 옮겼을 경우에만 가능하며 정교회 견진성사도 아예 정교회로 옮겼을 경우에만 가능하다.

가톨릭의 경우 성사 교류는 오직 위급상황에서만 한정된다. 가톨릭 신자의 경우 주일과 겹쳐 외딴 섬으로 여행갔는데 그 섬에 가톨릭 성당은 없고 정교회 성당만 있는, 가톨릭 미사 참례가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경우에만 정교회 영성체가 허락된다. 또한 큰 병에 걸렸거나 사고를 당했거나 혹은 전장에 투입되거나 하는 긴급한 경우에 주위에 성사를 집행할 수 있는 가톨릭 사제가 없고 정교회 사제가 있을 경우, 정교회 사제에게 병자성사를 요청하여 받는 것도 원칙적으로는 가능하다. 그런 조건이 아닐 때 정교회 성사에 무단으로 참여하거나 요청하는 것은 가톨릭 교회법상 불법 행위다.

더불어 정교회에서는 가톨릭 신자들이 정교회 영성체에 참여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보는데, 이유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가톨릭이 공심재, 금육, 금식 규율 등 여러 신앙 규율들을 과거에 비해 크게 완화시켰기 때문에 정교회 입장에서 가톨릭 신자들의 정교회 영성체에 참여하는 것은 모령성체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또한 정교회는 영성체 직전 신자 한명 한명의 세례명을 부르며 성체를 입에 넣어주는 방식을 취하기에, 규모가 작고 새로 온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는 한국 정교회에서는 가톨릭 신자가 성체를 암암리에 받으려고 해도 불가능한 구조이며 일반적으로 정교회는 타 교파 교인들에게 성체를 개방하지 않는다. 괜히 시도했다가 상처 받지는 말자. 그리고 애초에 한국에서 가톨릭 신자가 꼭 정교회 성당을 찾아가는 일은 개인적인 교양, 흥미 차원에서 같지만 다른 신앙의 형제 구경 좀 하자는 경우 빼곤 거의 없다.

정교회 신자의 경우 가톨릭 신자가 정교회 성사를 받는 것보다는 가톨릭 성사를 받기는 쉽다. 한국에서 정교회 교세가 상당히 적고, 본당이 전국에 10곳도 안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교회 성당이 없는 곳으로 이사가거나 군에 입대했을 경우 가톨릭에서 미사 중에 영성체를 하거나 고해성사를 받을 수는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톨릭이 베푸는 것일 뿐이고, 정교회는 신자들의 타 교파 영성체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영성체는 그 교회와 온전히 일치를 하겠다는 소망 아래에서 행하는 것인데 정교도로서 멋대로 타 교파의 성체를 영해서는 안된다. 군에 입대한 정교회 신자들이나 정교회 성당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어 가톨릭 성당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된 정교회 신자들은 각 본당의 신부님께 신앙생활을 앞으로 그 곳에서 어떻게 할지 제대로 된 조언을 구해야 하며 나무위키에 쓰여 있다고 해서 멋대로 타 교파의 성체를 영하지 않도록 주의하자. 한국 정교회 홈페이지에서는 근처에 정교회 성당이 없을 경우 가정에서 예배서를 통해 약식으로 예배를 드리고, 적어도 한 두 달에 한번은 성당을 찾아 성찬예배를 드리기를 제안하고 있다.#

정교회는 성사의 교류를 하나인, 거룩하고 보편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 즉, 정교회와 일치한 신자들에게 허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가톨릭의 성체(성사)는 성체가 아니고 성사도 아니다'라는 식으로 해석하기보다는 교회와의 일치라는 부분을 엄격히 해석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7.2. 개신교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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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황직!
정교회: 어느 주교도 무류하지 않다!
개신교: 사도전승 거부! 오직 믿음! 오직 성서!
정교회, 가톨릭: 꺼져.
일단 역사적으로는 개신교 VS 가톨릭 사이보다 개신교 VS 정교회 간의 신학적 거리가 더 멀다. 왜냐하면 개신교는 당대 가톨릭교회가 부패했기에 이를 개혁하겠단 명목으로 나타났던 것이기에, 동-서 교회 신학적 갈등 이슈에 대해선 거의 같은 서방 교회에 속한 가톨릭교회와 입장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구원론이나 삼위일체에서는 가톨릭보다 멀지만, 창조론이나 종말론, 일부 부차적인 신학에서는 오히려 가톨릭보다 가깝다. 정교회와 개신교는 근본적으로 사도전승이나 성상, 성인과의 통공, 전례적인 면 등에서 서로 대화가 어려운 종교이다.

한국의 개신교는 일단 가톨릭에 대해서는 국내외에서 영향력과 교세가 상당하기 때문에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어느 정도 관심은 갖지만 정교회는 워낙 한국에서 교세가 별로 없고 마이너하며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 입장은 신자 개개인마다 천차만별이다.

개신교에서는 정교회에 대해 가톨릭과 마찬가지로 무의미한 교회의 전통 숭배와 미신을 믿는 것과 다름없는 신적 대상(천사들과 성인들)을 통해 복을 받으려고 하는 복음이 변절된 교회 내지는 근본주의자는 아예 이단이라고 보기 때문에 그들에게 '참 기독교'인 자신들의 신앙을 전파하는 것은 당연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근본주의 개신교인이나 반(反)에큐메니즘 성향에서는 주적(?)은 가톨릭이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정교회를 비난하는 건 드문 일이다. 정교회 한국대교구의 존재감이 미미하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개신교 내에서도 정교회는 가톨릭과 동급인 이단이라는 시선과 교리 측면에서 동의할 수 없는 게 많지만 그래도 정통성 측면에서 가톨릭보다는 나은 집단이라는 시선, 교리적으론 차라리 같은 서방 교회인 가톨릭이 더 가깝고 타당하다는 등 여러 시선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단 한국에서는 1996년 정교회 한국대교구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회원으로 가입했다. 물론 KNCC 회원 교단 전부가 개신교 교단들이긴 하지만, 이 KNCC가 교회일치운동 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므로 정교회도 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었다.

이 문제 때문에 정교회와 반교회일치운동 개신교 교단들 사이는 선교 문제 때문에 불편하다.결국 밥그릇 싸움 왜냐하면 WCC에서는 회원교단의 나라 중 특정 교파가 교세가 강한 곳에서는 공격적 선교를 자제하기로 결의했는데, 일부 개신교에서는 WCC 문제로 같은 교단 내에서도 입장 차이로 분열이 되어 있는데다가 반WCC 교파에선 정교회 세력이 강한 러시아 등 동유럽과 중동 등지에 개신교 선교사를 파송하고 정교회에서는 이를 저지 탄압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선 어느 정도 양측 입장에 논리가 있긴 하다. 정교회 측에선 동유럽과 중동에는 이미 정교회가 고유의 신앙으로 뿌리내렸고 서로를 이교로 보지 않는 그리스도교 여러 교파에서 존중해 주기를 바란다. 정교회 우세 지역에 대해 선교하고 있는 개신교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반박한다. 첫째 개신교와 가톨릭 문명인 유럽, 미국에도 한국 개신교 선교사가 이주민과 유학생, 교포들을 위해 파송하고 있다. 둘째 러시아와 동구권은 공산정권을 거치며 비종교화가 이뤄져서 러시아의 경우 정교회 신자가 40%에 불과하며 이 정도의 숫자도 상당수가 형식적 신자이고 러시아의 경우 유럽 지역에 편중된 터라 아시아 지역은 무종교나 타종교도 상당히 많고, 이곳 지역은 러시아 정교회도 수백 년간 선교에도 거의 실패한 점이다. 특히 시베리아 오지 지역에서는 원시 전통 신앙이 아직도 많은데 서양인보다 얼굴 모양 비슷(?)하고 한글과 노래 알려주고 말벗은 물론 소수 민족을 대변하는 등 실질적인 도움이 되어주는 개신교 선교사들을 환영한다는 것이다. 셋째 정교회 우세 지역의 공격적 선교에 대한 정교회의 거부 반응과 이를 막으려는 시도는 근대적 종교 자유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후진적인 자세라는 것이다. 서유럽과 미국에서 종교 간 이동뿐 아니라 교파 간 이동까지도 자유롭게 허용하는 데 반해 정교회 우세 지역의 국가들은 대부분 공산주의 정권이나 기타 권위주의 정권의 독재를 겪은 적이 있거나 지금도 겪고 있기 때문에 근대적 종교의 자유에 대해 서유럽과 미국만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파 간 이동이 정교회 측에서는 거부감이 들 수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엄연한 근대적 시민권 행사로써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 정교회 우세 지역에서 선교하는 개신교 측 입장이다.

교회일치운동에 동참하는 개신교 교단들은 이 문제에 대해 딱히 통일된 입장을 내놓지는 않는데, 정교회 교세가 워낙 한국에서 세가 적은 데다가 차라리 가톨릭을 경쟁 관계로 생각하지, 정교회에는 별 생각도 관심도 없다.

정교회 측에서는 당연히 동유럽과 중동에는 역사적으로 정교회가 고유의 신앙으로 뿌리내렸기 때문에 개신교에서 이를 존중해주기를 바란다. 이 점은 다른 그리스도교의 동유럽 선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개신교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정교회는 가톨릭 교회의 러시아 선교에도 역시 비슷한 입장을 취한다. 정교회 한국대교구 제2대 대주교 암브로시오스 대주교는 “한 학생의 아버지가 (개신교) 목사인데, 사도 요한요한묵시록을 썼던 파트모스 섬에 선교를 하기 위해 갔다고 했다. 그래서 물었다. ‘그곳 주민들이 사도 요한 당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는 것을 네 아버지는 모르느냐’라고.”라는 일화를 소개하면서, "개신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사람들조차 전도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최근 한국인들의 동유럽이나 러시아 여행이 잦아지면서 성지순례나 단기선교여행을 빙자한 한국의 개신교 신자들의 추태들이 생기면서 이로 인해 정교회와 현지 주민들 사이에서는 개신교에 대한 반감이 갈수록 솟아나고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정교회 측에서도 여러 수단을 동원하여 개신교의 전도행위를 방해하고 차단하는 한편 개종한 개신교인들을 압박하고 이에 맞서서 개신교 선교사들 역시 프리즌 브레이크를 감행함으로써 정교랑 개신교 간의 종교적 갈등이 증폭되어 가고 있는 실정이다.

대표적인 정교회 국가인 러시아에서는 정교회와 개신교의 사이가 영 좋지 않다. 러시아 제국 시절에는 '독일 교회'[97][98]라고 부르면서 적대시했고, 현대에는 미국 교회영국 교회 혹은 서방 교회로 인식하고 있다. 외형적인 면에서 정교회나 가톨릭과 어느 정도 호환되는 면이 있는 루터회성공회도 썩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아예 외형이 다른 장로교회오순절교회에 대해서 러시아인들이 느끼는 이질감은 매우 크다. 소련 시절에는 개신교인들이 굴라그로 끌려갔고[99]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현대 러시아에서도 개신교에 대한 인식은 이방의 교파로 부정적인 편이다.[100]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 정부와 정교회의 관계가 밀접해졌고, 개신교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정교회의 입김이 세졌는데 이는 정책으로 연결되었다. 옐친 대통령의 재임 때는 개신교와 가톨릭의 선교를 제한하는 법안이 의회에서 통과되었으며, 비자 문제로 추방되는 개신교 선교사들의 수도 적지 않은 편.

그러나 이러한 반감은 정교회의 공식 입장은 아니다. 정교회가 전반적으로 신학적 성향이 전통적이며, 사도전승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사도전승이 이어지지 않은 개신교에 큰 관심을 두고 있지도 않는다. 정교회 교회들 대부분이 스스로 이슬람교 및 공산주의와 치열한 싸움을 벌이면서도 초대 교회 때부터 내려오는 신앙을 간직하고 있다는 역사적 자부심이 대단하기 때문이고 가톨릭과 달리 개신교와의 중대 역사적 교류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관계이니 한국의 개신교가 먼저 정교회를 잠식하는 선교 활동을 하는 것에 대증요법 개념으로 대응을 하는 것이라 이해하는 것이 옳다.[101] 이렇게 정교회는 가톨릭과 개신교까지 모두 예수를 믿는 하나의 형제인 것으로 보기에 WCC에도 가입한 상태이다.

반면 러시아 정교회에선 개신교의 어그로를 무시하는 측면이 강하며 가톨릭에 대한 거부감도 강하다. 앞서 서술한대로 17세기부터 가톨릭의 동진 정책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고 이를 교회 일치에 가장 큰 걸림돌이라 보고 있다. 러시아 정교회는 핀란드 국교회(루터파)와 교류가 활발한 편이다. 핀란드가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핀란드에선 정교회에 대해 연구가 있고 국립 헬싱키대학 신학부 교수들을 중심으로 핀란드 학파가 형성되어 개신교 신학과 정교회 신학의 공통점에 집중하여 연구하고 있다.

그런데 가톨릭과 더불어 전례와 7성사 중에서도 제병(빵)과 제주(포도주)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하시는 순간성체성사를 중심으로 한 전례, 의식, 신앙적 공동체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는 정교회 측에서는 개신교 신학의 '마음(믿음)만 있으면 된다'라는 식의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적 접근법 자체를 좋게 보지 않는다.

비단 러시아나 그리스뿐만 아니라 전통적으로 정교회 신앙이 뿌리 깊이 내린 중동 및 유럽 국가들 대부분에서는 현지의 역사나 문화와 전혀 연고도 없으면서 돈은 많은 미국과 한국 등지의 복음주의 계통 개신교도들이 갑자기 찾아와 사회적으로 소외되기 쉽고, 사회에 원한이 많은 빈민, 노동자, 병자 등을 상대로 금전적 지원과 봉사 등으로 도움을 주면서 집중적으로 포교하며 세력을 늘려나가는 경향이 있다. 비단 정교회 국가만이 아니라 인도 같은 타종교권 국가에서도 비슷한 선교 양상을 보이며, 이는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선교의 기본 정석이다.

그런데 근본주의 교회를 중심으로 한 개신교 일각에서는 자신들의 잣대로 정교회를 함부로 그릇되고 이단적인 교회라고 평가하며 돈과 물질적으로 현지인들을 빼내려는 태도를 취하고 있어 이러한 양측의 태도는 그리스도교 교파 간 화해에 굉장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결국 정교회에서 바라봤을 때, 개신교의 이러한 선교 행동은 당연히 서로 다른 교단의 신자들을 쟁탈전의 대상 내지 자기 교단의 교리를 강요하고 정교회를 폄하하는 행위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교회 한국대교구의 암브로시오스 대주교는 개신교인들의 타종교를 폄하하고 공격하는 식의 선교 방식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키는 것과 같은 그런 짓은 그리스도를 거스르는 행위다. 그런 선전포고가 그리스도의 참모습이라면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 강압적으로 개종을 재촉하는 것은 인간 본연의 가치를 존중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정교회는 초대 교회 때부터 신자 수를 늘리기 위해 남의 집 문을 두드리는 식의 전도를 금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스스로 원치 않는 이를 강압하지 않고 자유의지를 존중하며 기다리시는 분이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미국에서는 개신교 복음주의에서 정교회로 단체 개종하는 사례가 있었다. 1979년 설립된 복음주의 정통 교회(Evangelical Orthodox Church)가 그것. 대학생선교회(CCC)[A]에서 선교사로 사역하던 피터 길퀴스트(Peter E. Gillquist)를 비롯한 동료들은 교회사와 초기 교부들의 저작을 공부한 끝에 고교회적 전례를 회복할 필요성을 느끼고 1979년 EOC를 설립하였다. 이들은 이스탄불로 가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디미트리오스 1세를 만나는 한편,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였던 이그나티오스 4세가 로스앤젤레스에 왔을 때 접촉하기도 하였다.

결국 사도전승의 필요성을 느낀 신도 2천 명은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청 산하의 북미 대교구로 교적을 옮겼다. 이 개종을 이끈 길퀴스트는 정교회 수석사제로 복무하며 정교회에 관한 저작을 쓰는 활동을 하다가 2012년 타계하였다. 북미에는 여러 총대주교청 산하의 여러 정교회 교파가 있는데, 이때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청 산하로 옮기지 않은 나머지 신자들은 모스크바 총대주교청에서 자치 교회로 인정하는 아메리카 정교회(OCA)로 이적하였다.

정교인이 개신교 국가에서 개종 없이 왕비가 된 사례가 존재한다. 파벨 1세의 딸 안나 파블로브나 여대공이 그 주인공으로 네덜란드 국왕 빌럼 2세의 왕비가 되었는데 그녀는 독일보다도 더 희한한 형태의 교회를 믿는 왕이란 소리에 기겁했지만, 막상 결혼하자 남편이 쿨하게 정교회 신앙을 존중해주어서 별 탈 없이 살 수 있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네덜란드의 사회적, 종교적 분위기에 적응을 못해서 가톨릭 우세 지역인 남부 지방을 더 좋아했다고 하며, 자식들은 모두 개신교도로 키워야 했다. 그리고 이 사례는 오늘날 가톨릭 신자인 막시마 소레기에타의 상황으로 재현되었다.

7.2.1. 성공회와의 관계

현대에 가톨릭과 성공회의 관계가 매우 복잡한 것처럼, 정교회와 성공회의 관계 또한 신학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매우 복잡하다. 우선 과거 정교회와 가톨릭 양측 일각에서 성공회를 사도전승 교회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인지를 논의하고 검토한 바가 있었는데, 당시 성공회가 여성 사제직을 허용하기로 결정하면서 유야무야 됐던 일이 있었다. 당시도 그렇고 현재도 그렇고 양측 모두 사회적/종교적 여성의 지위와는 상관 없이[103] 사도전승 교회에는 여성 사제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기 때문에 성공회의 이런 움직임에 당혹감을 표하며 모든 논의를 중단한 바가 있었다. 가톨릭과 정교회 양측 모두 일각에서는 여성에게도 사제직의 길이 열려야 한다는 입장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들은 여성 사제직을 가지고 성공회의 사도전승 교회 지위 부여 논의의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을 비판하기도 한다.

또한 정치적 문제도 정교회와 성공회의 관계 이면에 존재한다. 이는 성공회의 교세는 영국을 비롯한 영연방 국가들과 미국에 기반을 두고 있고, 정교회의 교세는 많은 경우 러시아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빈번한 영미권과 러시아 사이의 정치적, 군사적 갈등에 종교 갈등이 끌려오는 사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영국과 영연방 국가들, 미국의 정교회에 대한 안 좋은 이미지나 러시아의 성공회에 대한 안 좋은 이미지는 이런 정치적 갈등의 심화에 따라 더욱 심화되고 확산되는 경향을 보인다.

일반적으로 정교회 신자들에게 성공회에 대해 물어본다면 대부분의 경우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으며, 관심을 가지더라도 상술한 열교의 이미지, 특히 앵글로색슨인들의 입맛대로 뒤틀린 뭔가 맛이 간 개신교로서 성공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강하다. 반면 성공회 신자들에게 정교회에 대해 물어본다면,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신자들은 별 다른 관심이 없지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경우 칭찬과 찬사 혹은 모욕과 경멸의 사이를 오가는 다양한 대답을 들을 수 있다. 워낙 성공회 자체가 고교회파, 에큐메니컬파 등 다양한 면모를 보이고 있기는 하다. 이는 사실 성공회가 신자 개개인이 가지는 신앙과 관련한 관점에 별 다른 개입을 하지 않는 편이기 때문인데, 마찬가지로 가톨릭에 대해 몰어봐도 가톨릭의 수위권을 인정하는 교회통합론에서부터 교황 적그리스도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대답을 내놓는 게 성공회 신자들이다. 그가 속한 교파나 다니는 예배당의 성향 등을 보면 어느 정도 신앙의 방향과 사고의 성향을 파악할 수 있는 다른 개신교 교단의 신자들과 달리, 성공회 신자들의 성향은 천차만별로 가늠이 힘들기 때문에 친해져서 허울 없이 얘기할 수 있는 사이가 아니라면 가급적 정교회 등 다른 교파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것은 자제하는 것이 좋다.

7.3. 이슬람과의 관계

보통 종교전쟁 하면 가톨릭이슬람 간의 십자군 전쟁을 생각하기 쉽지만, 정교회 역시 이라클리오스 황제 시절에 “성십자가를 되찾자”라는 명분으로 동로마 제국사산조 페르시아[104]에 성전을 선포한 적이 있었다.[105] 성십자가를 되찾자는 종교적 명분으로 전쟁이 합리화된 것이다. 참고로 그 십자가는 샤한샤에게 네스토리우스파 총대주교가 선물 받아 가지고 있었다.[106] 비록 실질적 이유는 당시 제국의 국가적 위기에서 찾아야 하지만, 명분은 종교에서 찾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107]

이때문에 정교회는 가톨릭보다 이슬람과는 말 그대로 최악의 사이 그 자체였는데 이는 상당히 복잡한 일이 있다. 서유럽 지역이라 이슬람의 영향이 옅은 가톨릭과 달리 동유럽에 있는 정교회는 이슬람교의 공세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어 있었다. 물론 가톨릭 역시 이베리아 반도 측에서 공격을 받았지만, 프랑크 왕국카롤루스 대제가 푸아티에 전투에서 아랍 제국을 격파하자 이후 공세가 적어지고 이베리아 반도에서 레콩키스타를 통해 최종적으로 이슬람을 몰아낸 이후[108] 1453년 방패막이 역할을 해왔던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기 전까지 직접적인 충돌을 피한 반면, 정교회 측은 이슬람의 중심권인 오스만 제국과 중동 지역과 바로 가까웠기에 이슬람으로부터 훨씬 엄청난 공세를 받았다. 아예 정교권이었던 발칸 국가들이 오스만 제국에게 수백 년간 지배당한 것도 덤. 그래서 이슬람와 유대교의 영향을 받았는데, 그중 하나가 성상 파괴주의.[109] 다만 성상 파괴주의자들에 대한 양보로 정교회권에서는 가톨릭에서 볼 수 있는 3D 스타일의 성화상을 멀리하고 이콘 스타일의 성화만 쓰고 있다. 그 때문에 지금은 그리스도교 종파 중에서도 가장 많이 정형화된 이콘(성화)을 이용한다. 이콘은 아무렇게나 그려지는 게 아니라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규범이 있다.

위치가 위치인 만큼 이슬람과의 사이가 매우 나쁘지만, 가톨릭과의 접경지는 가톨릭하고 사이가 나빴던 편. 대표적인 예가 크로아티아세르비아로서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가톨릭이 중심인 크로아티아는 독일의 위세를 등에 업고 악랄하게 정교회 신자를 잡았고, 이 사이에 끼인 보스니아의 무슬림이었던 보슈냐크인들도 독일을 등에 업고 정교도인 세르비아인들을 악랄하게 학살하였다.(우스타샤, 한트샤르) 이런 원한이 유고연방 붕괴 이후, 세르비아에서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의 독립에 대해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가 되었으며, Remove Kebab으로 유명한 세르비아어 군가에서도 우스타샤를 경계하라는 가사가 나올 정도다.

더불어 아랍권에선, 과거 십자군 전쟁 같이 전쟁 규모가 컸던 가톨릭이나 지금 가장 미워하는 나라인 미국 하면 떠오를 개신교에 비하면 그나마 이미지가 나쁜 편은 아니다. 정교회 문화권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동남아시아권은 말할 것도 없으며, 심지어 이들은 정교회 세가 강한 러시아와 사이가 좋다. 그러나 캅카스 지방의 무슬림들은 이곳을 정복했던 러시아 제국의 국교가 정교회였고, 정복의 이유도 정교회를 퍼트리기 위함이라고 공식적으로 천명했기 때문에 정교회라면 치를 떤다.

2010년대 유럽 난민 사태에서 불가리아북마케도니아, 세르비아 같은 발칸 반도의 정교권 국가들이 시리아 등 중동 이슬람권 국가들의 전쟁 난민들을 수용하라는 독일 등 EU 강대국들의 난민 할당제에 반대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이들 국가들이 오스만 제국 등 이슬람 세력에게 지배를 당한 트라우마 때문이란 이야기도 있다.

8. 가톨릭과의 비교

과거형일 경우 ※표시

9. 창작물에서의 정교회

아시아권에서는 가톨릭에 비해 마이너라서 그런지 서브컬처계에서는 별로 주목받지 않는 편이다. 서구 쪽에서도 그다지 주목받지 않는 느낌. 다만 가톨릭의 이미지를 따온 것이 너무 흔하다 보니까 신선함을 위해서 대안 스킨(?)으로 취급되는 듯하다.

9.1. 크루세이더 킹즈 시리즈

중세 유럽 배경의 역사 대전략 게임인 만큼 정교회도 주요 신앙으로 등장한다. 아직 동로마 제국이 건재하고 개신교가 탄생하지 않은 시기가 배경인 만큼 가톨릭과 함께 그리스도교의 쌍벽을 이룬다.
이슬람교를 포함한 이교도 플레이가 불가능하며 천주교와 정교회 영주로만 진행할 수 있다.
총대주교가 십자군을 선포하지 못해서 십자군이 활성화된 시기 이후의 천주교보다 컨텐츠는 적지만, 정교회를 믿는 동로마 영주일 때 로마의 유산 DLC가 있다면 정교회+동로마 전용 컨텐츠를 즐길 수 있다.

예를 들어, 상실했던 총대주교좌를 하나씩 수복할 때마다 고유 이벤트가 뜬다거나... 5대 총대주교좌를 모두 복구하면 동서 대분열 종식을 선언할 수도 있다! 대분열이 종식되면 가톨릭은 정교회의 이단으로 간주되고, 모든 가톨릭 교도들은 정교회의 전례를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이단자의 낙인이 찍힐 것인지에 대한 양자택일을 요구받게 된다.

이 외에도 교황의 수위권이 구현된 가톨릭에 비해 5대 총대주교좌의 관할 범위와 그 외 왕국의 독립 총대주교들이 구현되어 있다거나, 700년대 시나리오에는 성상 파괴주의 분쟁이 구현되어 있는 등[113], 깨알같이 재미있는 고증이 많으니 역사 마니아라면 꼭 해 볼 만한 게임이다.

만약 플레이어가 동로마로 시작해서 가톨릭으로 개종한다면 가톨릭의 강력한 파문권[114]과 5개나 되는 종교 기사단을 활용할 수도 있지만, 그냥 정교회로 플레이하거나 아예 그리스 신화로 갈아타는 등 플레이어에 따라 양상이 다양하므로 이렇다고 특정할 수는 없다. 이슬람의 맹공세에 그리스가 정복당하고 정교회가 멸망의 길에 접어든다거나, 오히려 정교회가 맹공세를 펼쳐 이슬람을 밀어내고 성지 예루살렘까지 수복하는 등 플레이마다 상황이 다른 편이다.

하지만 시대를 다루는 EU4와 달리 정교회만의 고유 요소는 애매하다.[115] 가톨릭은 십자군을 교황에게 요청할 수 있지만 정교회를 포함한 다른 그리스도교 교파는 종교 지도자로 총대주교가 있어도 침략전쟁 명분 얻기를 제외하면 십자군을 선포하지 못한다. 정교회를 믿는 동로마 황제라면 5대 교구를 모두 확보한 뒤 동서 통합 디시전을 통해 정교회를 정통 교회로 확립하고 가톨릭을 이단으로 만들 수 있지만, 동로마가 아닌 다른 정교권 국가는 불가능하다. 굳이 동서교회 통합 후 동로마가 아닌 다른 정교권으로 플레이하려면 중간에 동로마 황제가 됐다가 다른 황위를 만든 뒤, 동서교회 통합 후 제3자에게 동로마 황위를 넘겨 줘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이단이 된 가톨릭이 정통파가 되더라도 십자군은 정교회로 통합되지 않은 가톨릭만 가능하므로 이단에서 복권된 가톨릭은 십자군을 쓰지 못한다.

Holy Fury DLC에서 종교 지도자(교황, 총대주교)가 있는 그리스도교 교파는 신자 캐릭터가 정해진 조건을 맞추면 사후 랜덤으로 시복시성되는데 정교회도 포함된다.
십자군이 불가능한 단점은 전작과 같으나, 867년과 1066년은 성지 대부분이 동로마령이라 정교회 영주가 보유한 성지마다 추가 열정[116]을 제공하는 으뜸 교구정 교리 덕분에 열정 관리가 천주교보다 쉽다. 또한 게임 시작시 천주교와 함께 세계 교회주의 특별 교리를 받은 신앙이라 동서교회 통합 전까지는 내부 이단 및 이슬람교 영주와의 성전에서 패하지 않도록 관리해 주면 된다. 그리고 동로마가 아니라도 그리스도교를 믿는 황제라면 5대 교구를 모두 지배할 때 동서교회를 통합할 수 있게 바뀌어서, 크킹2와 달리 시작부터 동로마가 아닌 이상 통합 때 반드시 동로마 황제가 될 필요는 없어졌다.

9.2. Europa Universalis 시리즈

크루세이더 킹즈를 만든 회사인 패러독스 인터랙티브에서 만든 대전략 게임인데 중세를 다룬 크킹과 달리 다음 시대인 근세를 다루고 있고 정교회 역시 등장한다.

EU1과 EU2, EU3에서는 역사대로 정교회권에서 주로 믿으며 EU3에서는 개척자 +1, 선교사 생성률 +0.25, 선교 효율 +5%, 안정도 비용 +15% 효과를 받는다.

Europa Universalis IV에서는 5대 총대교구인 펜타르키를 모두 수복해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를 모두 정교회로 개종시키면 펜타르키 복원 이벤트가 활성화된다. 이벤트가 뜨면 가톨릭의 교황청 시스템이 날아가버리고 가톨릭은 교황청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온갖 버프가 사라져 원시종교만도 못한 쓰레기 종교가 돼버린다. 원래 교황령은 교황청 시스템이 종속하는 이상 로마가 점령당해도 랜덤한 가톨릭 지역에서 다시 생겨나는데[117] 펜타르키를 복원하면 교황청이 소멸되어 버린다.

애물단지 취급당하는 크킹의 정교회와 달리 여러 번의 패치로 강력한 성능을 자랑한다. 특히 국가 불만도 감소와 이콘의 버프 등이 매우 높은 성능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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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번역하면 "로마의 정교회"이다. 아랍의 정교회 신자들이 자기들의 교회를 오리엔트 정교회와 구별하기 위해 "동로마에서부터 믿었던 정통 교회"라는 의미를 담아 이름에 "로마(روم, Rum)"를 붙인 것이다. 아랍권 정교회 신자들은 "동방정교회"를 직역한 "الكنيسة الأرثوذكسية الشرقية"보다 이 단어를 더 많이 사용한다.[2] 동서대분열 이전의 교회를 가톨릭으로 볼지, 정교회로 볼지의 시선은 양측이 다르지만 아무튼 (감정적으로는 여러 얼굴 붉힐 일이 있었을지언정) 서로를 가장 가까운 관계로 보는 건 사실이다.[3] 아우구스티누스가 '가톨릭'과 '정교'를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4] ὀρθόδοξος[5] καθολικός[6] 물론 정교회 내부에서는, '가톨릭'은 엄밀하겐 정교회 자신을 일컫는다. 그래서 정교회 신자가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를 외울 때 '가톨릭' 교회는 정교회를 겨냥한 의미이다. 똑같은 원리로, 동방 가톨릭 전례문에서 '정교회'는 가톨릭 교회를 일컫는다. 그리고 역시 정교회와 가톨릭 공통으로, 아무 수식어 없이 그냥 '교회'라고만 말하면 스스로의 교회를 말하는 것이다.[7] οἰκουμενικός[8] οἰκουμένη[9] οἰκέω [oikéō][10] 이 단어는 '아버지'라는 말에서 유래한 주교 등 고위 성직자에 대한 경칭이었으며, 나중에는 교황이나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등 최고위 성직자에게 쓰이는 경칭이 되었다.[11] 아버지란 뜻도 있지만, 클리엔텔라파트로누스(후원자)를 의미하기도 한다.[12] 본문 출처: 하인리히 덴칭거, 『신경,신앙과 도덕에 관란 규정·선언 편람』 44판(번역: 덴칭거 책임번역위원회) 제5106항[13] 현대에는 폴란드 출신 요한 바오로 2세가 선출된 1978년부터 40년 넘게 이탈리아의 수석주교가 이탈리아 출신이 아닌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14] 비슷한 사례로 라틴이고 게르만이고를 떠나서 가톨릭 신자들은 과거에 라틴으로 묶여서 지칭되기도 했다.[15] 이게 바로 에큐메니컬의 개념이다. 다소 차이가 있지만 모두 한 몸이라는 것.[16] 물론 요한 크리소스토모스 성인이 모든 것을 만든 것도 아니고 요한 성인의 시대 이후로 전례가 불변한 것도 아니지만, 관습상 이 전례의 이름은 요한 크리소스토모스에게 돌린다.[17] 다만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전례를 간소화한 라틴 예법 가톨릭이나 애초부터 비성경적이란 이유로 전례를 무시하던 개신교와 달리, 정교회와 비잔티움 예법 가톨릭에는 화려함이 상대적으로 잘 보존되어 있다.[18] 초기에는 좀 더 간결한 관이 황제의 관이었다. 궁금하다면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를 그린 프레스코의 제관을 살펴보면 된다. 깔끔하게 생긴 게 상당히 간지난다.[19] 이와는 별개로 스페인은 이슬람과의 또 다른 최전선인 이베리아반도를 지켰다는 자부심 덕에 한때 가톨릭 문화권의 맹주 노릇을 했다. 한편 이베리아반도 이슬람 문명의 후신인 모로코는 그리스도교와의 최전선에서 자신들의 옛 피지배자였던 스페인에 의해 역관광을 당하는 와중에도 계속 버텨내며 이베리아 반도 이슬람 문명을 대대로 계승해왔다는 자부심이 강하다.[20] 정작 정교회의 본산인 동로마 제국에서는 황제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간의 다툼이 정말 심해서 동로마 황제가 교황과 결탁하곤 했다.[21] 신성통치종무원이 다스리던 시절을 끝내고 200년만에 처음으로 모스크바 총대주교 자리에 오른 티혼의 서임식은 제정 러시아 말엽도 아니고, 볼셰비키 10월 혁명이 터진지 3일 뒤, 즉 나라 공식적으로 망한 다음에야 이루어졌다.[22] 지역 교회별로 살짝 다르기도 하다.[23] 사실 그리스인들이 처음 사용한 아시아라는 개념은 (이후 소아시아라 불리게 된) 아나톨리아 반도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리스의 동쪽, 에게 해 너머에 있는 그 땅덩이를 아시아라고 부른 것. 하지만 그 땅덩이 너머에도 엄청나게 넓은 땅덩이가 있었던 것이다.[24] 단, 안티오키아의 칼케돈파인 마론파는 처음엔 비칼케돈파에 밀려 소수였지만 현재는 상황이 역전되어 오히려 비칼케돈파인 시리아 정교회가 소수가 되었다. 마론파레바논/역사 문서 참조.[25] 물론 다수였던 비칼케돈파 사제 및 신자들은 반발했다.[26] 카톨리코스(καθολικός)는 총대주교라는 직분이 세워지기 전부터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던 아르메니아 교회와 조지아 교회의 대주교를 지칭하는 단어이다. 오늘날에는 따로 실질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27] 이 문서에는 자세히 적지는 않았으나 불가리아는 동로마와의 전투를 통해 오흐리드를 지배한 적이 있었고, 이때 불가리아 총대주교 산하 대교구를 설립한 역사가 있다.[28] 이들 중에는 카자크들도 있다.[29] 이들 중에는 폴란드 독립 이후 반정교회 분위기하에 가톨릭 신자나 무신론자로 위장하여 살다가 훗날 폴란드의 반정교회 분위기가 완화되자 정교회 신자로 커밍아웃한 경우도 있을 것이며, 조상 대에 러시아령 폴란드를 떠나 러시아 본토로 이주하여 러시아 문화에 동화되어 종교도 정교회로 개종했다가 훗날 조상의 나라인 폴란드로 돌아온 경우도 있을 것이다.[30] 전자의 경우 프로이센 왕국의 국교인 루터교회가 유입되었으며, 후자의 경우 오스트리아가 옛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처럼 가톨릭 국가였던 관계로 폴란드인들의 가톨릭 신앙이 어떤 탄압도 받지 않고 온전히 유지되었다.[31] 독립 교회로 승인받지 못한 큰 이유 중 하나는 아메리카 정교회(OCA)가 미국에서 가장 큰 교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미국에 있는 정교회 공동체 중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교구 산하 미국 그리스 정교회(Greek Orthodox Archdiocese of America, GOARCH)와 OCA에 버금가는 규모를 차지하는 북아메리카 안티오키아 정교회(Antiochian Orthodox Christian Archdiocese of North America, AOCANA)를 고려하지 않고 모스크바가 일방적으로 독립을 승인한 것에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안티오키아의 두 총대주교가 이의를 제기했었다.[32] 16세기 이전은 가톨릭. 다만 핀란드 가톨릭 교회의 경우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1세 바사미카엘 아그리콜라가 주도한 종교 개혁으로 핀란드 내 교세가 엄청나게 약해졌다. 핀란드 정교회가 핀란드의 최대 소수 종교인 것과 비교하면 핀란드 가톨릭의 교세가 약한 점이 더욱 부각된다.[33] 본명은 이반 카삿킨, 초대 도쿄 대주교. 현재는 열성되어 성 니콜라이 사도대등자(亜使徒聖ニコライ)라고 불린다.[34] 1923년부터 채택된 수정 율리우스력의 사용을 거부한 분파.[35]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교구 홈페이지 : https://auroca.org[36] 소련 시절, 모스크바 대주교 Sergius가 스탈린에 충성맹세를 했는데, 당시 해외러시아정교회(ROCOR)는 Sergianism을 정죄했었음[37] 서유럽 교구 홈페이지 : https://trueorthodox.eu/[38] 그리스식 전통을 러시아 전례에 도입하는 것이 개혁의 주된 내용이었다. 예를 들어 성찬예배 때 알릴루이아(Αλληλούια, Аллилуйя)를 3번 외우는 것이나, 십자성호를 그을 때 손가락 3개를 펴고 2개를 접는 방식을 채택한 것 등.[A] CCC는 한국에만 있는 조직이 아니며, 한국과 미국의 CCC는 서로 교류하는 단체이지만 피터 길퀴스트는 한국에서 선교한 이력이 없다.[40] 대한교구 모스크바 총대주교청 대한교구의 주장: 현재 콘스탄티노폴리스 정교회 한국대교구에서는 신도총회의 만장일치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관할을 옮겼다고 말한다. 해당 안건은 신도총회의 투표에서 과반을 약간 넘은 상태였는데 찬성파가 반대파를 모두 추방하여 만장일치를 만든 것이었다. 신도총회 투표 결과가 만장일치라 하더라도 신도총회는 소속 관할을 변경할 수 없다. 즉, 엄연히 교회법상 불법이다.[41] 한국대교구 정교회 한국 대교구의 주장: 앞의 모스크바의 주장은 증명되지 않은 이야기이다. 먼저, 한국 정교회 대교구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청 휘하에 있는 것에 대하여 모스크바 총대교구를 제외한 거의 모든 정교회 공동체에 인정받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오히려 모스크바가 한국에 설립한 교회가 분파상태로 파악되고 있다. 이것이 그리 심각한 문제로 여겨졌다면 타 정교회가 왜 모스크바 산하 대한교구를 정통으로 인정하지 않는단 말인가? 또한, 당시 전쟁 직후에 일본에 이어 사실상 적국과 다름없는 모스크바 소속 교회의 일원이 되길 희망하는 한국인들이 많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신빙성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마지막으로 납북당한 김의한 신부의 따님은 콘스탄티노폴리스 휘하의 한국 정교회에 계속 출석하셨고 전쟁 이후 살아남은 백군계 러시아인들 역시 한국 정교회에 계속 출석했다.[42] 그리스도교 신자수가 매우 적기로 유명한 중국과 일본의 신자 수(각각 4%, 1%)보다도 훨씬 적은 0.005%다.[43] 그리스에는 1967년에서 1974년까지 그리스 군사정권이 있었는데 이 시대는 그리스에서도 가장 어둡고 암울한 시기였으며 외국과의 교류 등도 적었다. 그리스판 5공 시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44] 오히려 한국은 개신교도가 많은 미국,영국 아니면 가톨릭 신도가 많은 프랑스, 이탈리아 등과는 교류가 그리스보다 더 많았다.[45] 의외로 가톨릭에서 개종하는 경우는 상당히 드물다.[46] 당시에는 아직 본토러시아정교회와 해외 러시아 정교회의 일치가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47] 엄밀히 말하여 러시아 정교회의 선교가 재개된 것이 아니라 해외 러시아 정교회의 선교가 시작된 것이다. 모스크바 총대주교청은 이 선교에 개입한 바가 없기 때문이다.[48] 단 세계 총대주교청은 모스크바 총대주교청과 성사교류를 단절한 바 없음[49] 바울로 강영광 신부는 모스크바 총대주교청 소속이 아니다. 모스크바 총대주교청과 해외 러시아 정교회는 2007년 이후 서로 일치는 이루었지만, 교회 치리상의 행정은 예나 지금이나 독립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여 바울로 강영광 신부는 모스크바 총대주교청 산하 대한정교회에 소속되어 성직자로 활동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해외 러시아 정교회 한국선교부 소속 사제 신분으로 활동한 것이다. 다만 대한정교회의 교구장인 테오판 대주교의 축복으로 비록 타교구 소속이지만 대한정교회에서 봉직할 수 있는 허가를 받음으로써 새로운 해외 러시아 정교회 성당이 생기기 전까지 대한정교회에서 방문자 신분으로 봉직한 것이다.[50] 대한대교구라는 이름에서 흥미로운 것은 '대한'이라는 남한에서 사용하는 자칭명(endonym)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북한에서는 '조선'을 선호한다.[51] 인천광역시 중구 영종도에 위치함[52] 인천 연수구 함박뫼로50번길 101, 2024년 11월 15일 건립 예정[53] 경북 경주시 금성로372번길 52[54] 세례명 유스티노스.[55] 한국 콘스탄티노폴리스 대교구 측에서는 어떤 교회법 위반인지에 대해 밝히고 있지 않다[56] '러시아 정교회'가 아니라 '해외 러시아 정교회'이다. 강태용이 서품받을 당시에는 두 교회가 갈라져 있었다.[57] 당연히 이에 대응한 동로마 제국은 12세기까지 안티오키아 탈환을 꾸준히 시도했고, 십자군 전쟁을 포함해서 몇 번 성공하기도 했다.[58] 물론 이때의 동로마 제국이 내란과 외침, 경제난으로 사정이 좋지 않아 십자군을 도와줄 여건이 안 된 것도 있다.[59] 아르카디우스의 아내인 에우독시아 황후와 요한 크리소스토모 총대주교가 갈등을 빚은 바 있고, 이후로도 황제와 총대주교가 갈등을 빚는 일은 많았다. 황제 미하일 8세요안니스 4세의 눈을 뽑고 폐위시킨 일로 아르세니오스 아우토리아노스 총대주교에게 파문당하는 일도 있었다.[60] 애초에 서방 교회는 속권의 통제하에 놓여 있다시피한 상황이었다. 교황 폐위와 세속 권력이 로마 교황을 압박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3세는 로마 원정(1046~1047) 때 교황을 폐위한 것을 비롯해 교황을 3명이나 갈아치웠다.[61] 오죽하면 1453년 당시 동로마 제국의 대표적인 철학자이자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옌나디오스 스홀라리오스(Γεννάδιος Σχολάριος)가, '참된 신앙을 버리고 제국을 존속시키느니, 차라리 신앙을 지키고 제국의 운명은 하느님의 뜻에 맡기는 것이 낫다'라는 식의 발언을 했을 정도. 참고로 이 인물은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어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오스만 제국파디샤 메흐메트 2세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가 된다. 제국은 망했지만 어쨌든 신앙은 지켜냈다[62] 러시아 정교회는 바젤과 피렌체 공의회를 비롯한 여러 공의회에서 동로마 황제서방 교회와의 '일치'를 통해 제국의 생존을 보장받으려한 시도를 당대에도 격렬하게 비난했다. 문제는 피렌체 공의회 당시 키이우와 전 러시아의 총대주교 이시도루스 역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와 같이 해당 공의회에 참석해 공의회의 사항들을 함께 결의했다는 것. 이후 피렌체에서 돌아온 이시도루스는 군주 바실리 2세 대공에 의해 파면되어 감옥에 갇히고(...) 후일 탈옥해 로마로 도망쳐 추기경이 되었다.[63] 그리고 이 교구들은 러시아 제국의 팽창기에 다시 정교회로 변화할 것을 요구받아 매우 난처한 처지에 놓였다. 대표적인 교회가 우크라이나를 위시한 루테니아 교회들이며 이 교회들은 지배 국가가 바뀔 때마다 준 내전 상태에 빠졌다.[64] 바실리 수리코프(1848~1916) 그림.[65] 그림에서 체포되는 귀족 여성이 손가락 두 개를 치켜들고 십자가를 그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이들이 세 손가락 대신 두 손가락으로 성호를 긋는 행위 자체를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삼았음을 뜻한다. 또 주변 배경 인물들을 자세히 보면 실로 다양한 군상의 모습이 묘사되었는데, 좌측에서 끌려가는 귀족부인을 비웃는 남자들의 모습, 그저 오랜만의 볼거리를 호기심어린 눈으로 보는 여인들, 우측 편에는 눈시울을 훔치거나 고개를 숙이고 경의를 표하는 여인들이 묘사되어 있으며 맨 오른쪽 아래에는 한 거지 남자가 두 손가락을 치켜들고 부인을 축복하고 있는데, 이는 러시아 정교회 특유의 영성에서 발달한 개념인 '유로지비(바보 성자)'를 묘사한 것이다. 모로조바 부인은 '고의식파'의 수장인 아바쿰 대주교와 교류하며 그를 지원하였기에 차르의 분노를 사서 체포되었고 보로프스키 수도원에 유폐되어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66] 일반적으로 구교도라고 하면 서구에서는 가톨릭 신자를 의미하지만, 러시아 문헌이나 문학에서 묘사되는 구교도는 정교회 전통의식파를 일컫는 표현이다.[67] 금욕주의를 강조하고 사제의 존재, 성경, 성인 공경을 부정한 종파로서 사도전승과 성경을 인정하는 종파들 입장에선 흘리스트파도 이단이었다. 재밌는 점은 그리고리 라스푸틴도 흘리스트파의 영향을 받았다.[68] 주교>신부>부제[69] 다만 성문법이 아닌 관습법에 의해서다. 독신 사제가 없는 경우 기혼 사제가 별거를 조건으로 주교가 될 수 있다.[70] 정교회에서 이를 좀 더 엄격히 요구하지만, 이는 가톨릭 신자들에게도 분명히 의무다.[71] 사실 정교회 문화권 자체가 이슬람교를 믿는 튀르크 문화권과 영향을 많이 주고받았기 때문에(러시아는 킵차크 칸국의 봉신국이던 시절에, 그리스·불가리아·세르비아 등 발칸 반도의 정교회 국가들은 오스만 제국 치하에서 튀르크계 무슬림들과 문화적 영향을 주고받았음)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72] (책 속 주석)Evidence is forthcoming from the second and the third centuries, for Corinth, Arabia, Cappadocia, and Mesopotamia (cp. above, pp. 157, 185, 376; and below, Book IV.). In a still larger number of cases Rome intervened with her advice and opinion.[73] (책 속 주석)A considerable amount of the relevant material is collected in my History of Dogma, I. pp. 455 f. (Eng. trans., vol. ii. pp.149-168), under the title of “Catholic and Roman.”[74] 원제: Die Mission und Ausbreitung des Christentums in den ersten drei Jahrhunderten[75] 알렉산드리아는 지금의 위상과 다르게 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도시였고 경제적으로도 이집트가 로마 제국의 식량 창고 노릇을 한 곡창지대였다. 안티오키아도 지금은 소도시에 불과하지만 헬레니즘 시대 셀레우코스 제국 시절에는 수도였고, 로마 시대에는 동방 무역의 중심지라 매우 부유해서 지금과 비교할 수 없는 위상이었다.[76] 알렉산드리아는 마르코를 통해서 간접적으로.[77] 비잔티움 교회가 사도 안드레아에 의해 설립되었다는 이야기가 5세기에 나오면서 결과적으로 이 질문은 해결(혹은 미봉)되었다. 모스크바의 세속 정치적 위상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넘어서기 전까지는.[78] 이후에 Papa라는 용어가 굳어지는데, Papa라는 말은 본래 동서방을 막론하고 주교들에게 쓰이던 말이다. 곧,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이든 로마의 주교이든 모두 Papa인 셈. 이것이 영어 Pope나 한자어 교황으로 번역되면서 본래의 뉘앙스(아버지)와는 멀어졌지만, 본래는 특별할 것이 없는 칭호다. 괜히 21세기에도 교황들이 공식 직함에서는 꼬박꼬박 '로마의 주교' 등을 선호하는 게 아니다.[79] 애초에 '로마 총대주교'란 직함 자체는 공식적으로 존재한 적 없으며, 굳이 따지자면 서방 총대주교란 명칭이 역사적으로 가장 부합한다.[80] 정확히 말하자면 이집트 학파와 시리아 학파. 동방 교회의 신학적 주도권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학자들이 쥐어잡은 것은, 에페소 공의회에서 시리아 학파가 타격을 입고, 칼케돈 공의회에서 이집트 학파가 타격을 입은 이후이다. 여기서 시리아 학파의 관점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면 네스토리우스파가 되고, 이집트 학파의 관점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면 단성론(에우티키우스주의)이 되고, 그 중간점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칼케돈 공의회의 합의이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신학에서 가장 목소리가 크던 두 학파가 몰락하면서 신학적 주도권이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동한 것이다.[81] 다만 베드로가 로마의 교회를 돌보았다는 전승을 회의적으로 보는 개신교와는 달리, 가톨릭과 정교회는 베드로가 로마 교회를 사역하고 로마에서 순교하였다고 본다. 물론 바오로도 로마에서 순교하였다고 보고.[82] 로마에서도 그리스 학문이 아닌 로마만의 학문을 강조한 학자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대 카토라든가.[83]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은 동방에서는 서방보다 지지가 약하긴 하지만, 여전히 동방 교회에서도 존경받는 교부이고, 역사신학의 명저인 「신국론」 등 그가 은총론에서만 활약한 것도 아니다.[84] 로마와 접촉했을 때 그리스인들은 라틴어가 짐승끼리 꽥꽥거리는 소리로 들린다고 경멸할 정도였다.[85] 동방의 그리스도론과 성서신학을 명백히 주도한 이집트와 시리아부터가 그리스어권이 아니었고 다만 국제어로 그리스어가 통용된 지역일 뿐이었다. 라틴인들 역시도, 동방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 경우에는 국제어로 그리스어를 사용했다.[86] 성서 신학에 있어서 역사적, 문자적 해석법을 선호. 그리스도의 인간적 본성을 강조. 극단주의로 네스토리우스파가 있다.[87] 성서 신학에 있어서 알레고리적 해석법을 선호. 그리스도의 신적 본성을 강조. 이후 콥트 교회로 발전하고, 극단주의로 에우티키우스주의(단성론)이 있다.[88] 지역 공의회와의 구분을 위해서 이렇게 부른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주도한 카르타고 공의회가 대표적인 지역 공의회. 현재 모든 그리스도교파에서 이단으로 선고된 펠라기우스의 사상은 로마에서 인기를 끌었는데 이것이 신학적으로 그릇됨을 아우구스티누스가 직접 반박했고, 교황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펠라기우스의 단죄로 결론난다. 또한 가톨릭 교회에서 받아들이는 73권의 정경 목록(동방과는 이견이 있다)이 자리잡은 것도 카르타고 지역 공의회의 공헌이다. 다만 지역 공의회의 경우는, 세계 공의회와 같은 권한을 지니지는 않기에 정경 목록은 다소 느슨하게 받아들여졌다. 이는 훗날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세계 공의회의 권한으로 확정하여 가톨릭 내부에서 이견이 사라졌다.[89] 이에 반해 서방의 경우 원죄론, 은총론 등 의화와 관련된 분야에서 강점을 보였다. 다만 원죄론은 동방에서 교의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편 초기의 세계 공의회라고 할지라도, 칼케돈 공의회의 경우 명백하게 교황 레오 1세가 신학적으로도 주도하였다.[90] 다만 칼케돈 공의회 교령 28조(콘스탄티노폴리스 시가 로마 시와 동등한 특권을 누리기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교회 서열 2위로 격상)에 대해서는 로마 측이 동의하지 않았고, 이는 끝까지 합의를 못봤다.[91] 루카 복음서 23, 36 참조.[92] 더 정확히는 서유럽에서 뒤늦게 성상 논쟁이 발생한 종교개혁적 관점.[93] 왕이라고 번역하나 엄연히 황제에 올랐다.[94] 출처는 'P.G.맥스웰-스튜어트, 박기영 옮김, "교황의 역사", 서울, 2005, 갑인공방'.[95] 이콘 이외의 성상을 금지한 것은 아니지만 가톨릭에 비교하면 잘 사용되지 않는 편이다.[96] 사순 제1주일로, 성상 논쟁에서 정통 교리가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이콘를 들고 행렬을 한다.[97] 제정 러시아 시대에는 독일인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이 자리매김 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작품이 스페이드의 여왕.[98] 이와 비슷하게 그리스에서도 개신교를 앙겔라 메르켈과 엮어서 싫어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메르켈 독일 총리는 루터교회 목사의 딸이다.[99]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도 언급된다.[100] 일례로 20세기 초반, 연해주로 파견된 장로회의 최관흘 선교사는 한국 개신교 최초의 외국 파견 선교사였으나 현지 정교회 및 러시아 정부와의 대립 끝에 정교회로 개종해 버렸다.[101] 정교회 한국대교구 교리 시간에 언급된 공식 교리로는 정교회, 가톨릭, 개신교 모두 하나를 믿는 교회로 보나, 정교회가 더욱 영성을 잘 받는다는 식의 이해라고 한다. 예를 들면 예수가 아궁이의 불이라면 정교회는 아랫목이기에 가장 따뜻하고 가톨릭과 개신교는 윗목이라서 덜 따뜻한 수준으로 본다는 것. 이는 가톨릭의 교리와도 흡사하며 (위 내용대로 비유하면 가톨릭은 가톨릭을 아랫목, 정교회는 중간목, 개신교는 윗목 정도로 여긴다), 이전 서술과 달리 정교회는 예수를 믿는 타 종파를 이단시하거나 공격적이라 보지 않는 게 공식 교리이고 가르침이다.[A] [103] 당연히 둘 다 여성을 포함한 모든 인간이 신의 피조물이자 한 사회의 주체적 구성원으로서 평등하고 존중받아야 한다고 여긴다. 사도전승과 관련된 사제직 문제는 이런 사회적 문제와는 다른 종교 내부의 전통 계승의 문제로 해석해야 한다.[104] 다만 당시 사산조 페르시아의 종교는 이슬람이 아니라 조로아스터교였다. 물론 정교회를 믿는 동로마 입장에서는 조로아스터교도 이슬람처럼 이교도였지만.[105] 황제의 의중이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등 종교계 인사의 의중이 아니라는 식으로 할 수도 있지만, 당시 정교회의 움직임에서 이 둘을 완전히 구분하는 것은 어렵다.[106] 크리스토프 바우머, 안경덕 옮김, "실크로드 기독교 동방교회의 역사", 서울, 2016, 일조각.[107] 따지고 보면 가톨릭의 십자군 원정 또한 명분과 실질적 목표는 따로 놀았으니.[108] 다만 레콩키스타가 최종 종결되는 건 그라나다가 스페인 왕국에게 점령된 1492년의 일로 동로마가 멸망하고 약 40년이 지난 뒤였다.[109] 그러나 결국 이 성상 파괴는 동로마 제국 내부의 교도권과 황제권 간의 투쟁에서 나온 것이고, 두 세력이 합의함에 따라 폐기되었다.[110] 역자가 오역임을 인정하고 수정했다.[111] 에리의 할머니는 러시아 사람이다.[112] 출처는 스쿨 아이돌 다이어리 에리 편 82~95페이지.[113] 700년대 시나리오의 경우 황제가 정교회 이단인 성상파괴주의 신자이고 총대주교 역시 성상파괴주의자로 정교회의 정통 총대주교좌는 해체되어 있는 상태인데 신하들의 경우 정교회 신앙이 주류인 실로 난감한 상황이다. 성상파괴주의를 정통신앙으로 만들고 기존 정교회를 이단화하든, 황제가 성상파괴주의를 포기하든(해당 디시전은 게임 내용을 보면 세계공의회를 소집하는 것이다), 스트라테고스 하나 잡고 이단 황제를 몰아내든 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무시무시한 아바스 왕조의 공세에 제국이 순삭될 것이다.[114] 각 국가별 독립교회 개념까지 잘 구현된 탓에, 교황만 통제할 수 있으면 같은 가톨릭교도에게는 자유롭게 파문을 날릴 수 있는 가톨릭 시스템과는 달리 정교회의 경우 다른 총대주교좌 관할 범위에 속한 인물에게는 파문 요청이 안 통한다.[115] 위에도 설명된 것처럼 정교회 자체의 콘텐츠는 가톨릭에 비해 상당히 초라하지만 정교회권 국가의 두목뻘인 비잔티움(동로마) 제국 전용 콘텐츠(주로 로마 재건 관련 콘텐츠) 중 상당수가 발동 조건으로 정교회 신앙을 요구한다. 이것까지 정교회 콘텐츠라고 본다면 비잔티움 제국 황제 플레이를 하는 경우에 한해서는 가톨릭 못지 않게 충실한 콘텐츠를 갖추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그래도 가톨릭 플레이처럼 플레이 전체에 걸쳐 종교(교황청)과 주거니 받거니 밀고 당기며 영향력을 주고받는 맛은 없고, 로마뽕 맛은 좋지만 일회적인 이벤트가 많아 그래도 좀 심심한 편.[116] 크킹2의 종교 권위.[117] 사실 이것도 다른 국가들이 파문 때문에 교황과 척을 안 지려고 하는 탓에 쉬운 일이 아니고 로마를 점유하면 가톨릭 국가는 엄청난 페널티를 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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