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2. 아스파루흐와 콘스탄티노스 4세의 전쟁3. 테르벨 전쟁4. 콘스탄티노스 5세의 불가리아 원정5. 카르담과 콘스탄티노스 6세의 전쟁6. 크룸 전쟁7. 테오필로스와 프레시안 1세의 전쟁8. 시메온 전쟁9. 스뱌토슬라프 전쟁10. 바실리오스 2세의 불가리아 전쟁11. 아센과 페터르의 난12. 칼로얀 전쟁13. 이반 아센 2세와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니케아 제국의 전쟁14. 미하일 아센 1세 vs 테오도로스 2세15. 이바일로의 난16. 토도르 스베토슬라프의 동로마 전쟁17. 안드로니코스 3세의 불가리아 전쟁18. 제2, 3차 팔레올로고스 내전19.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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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볼가 강 연안에서 불가르 칸국을 수립했던 불가르족이 하자르의 침략을 피해 동로마 제국의 영역이던 다뉴브 강 이남의 발칸반도로 진입하면서 촉발된 동로마 제국과 불가리아의 전쟁.2. 아스파루흐와 콘스탄티노스 4세의 전쟁
668년, 하자르의 침략으로 불가르 칸국이 붕괴되었다. 이에 아스파루흐는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데리고 다뉴브 강 이북 지대로 이동했다. 이 무렵 동로마 제국은 한창 우마이야 왕조군의 침략에 시달렸고, 급기야 674년부터 678년까지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을 치렀다. 아스파루흐는 이 틈을 타 다뉴브 강을 건너 동로마 제국의 여러 요새를 공략했고, 도브루자 북부 일대를 점거했다.680년, 황제 콘스탄티노스 4세는 우마이야 왕조와 강화를 맺은 뒤 발칸 반도의 제국 영토를 잠식해가는 불가르족을 공격하기로 했다. 그는 대규모 함대를 직접 이끌고 보스포루스를 거쳐 흑해로 들어가 다뉴브강 삼각주 바로 북쪽에 상륙했다. 아스파루흐는 적군의 수가 많은 걸 보고 페브키 섬에 건설된 요새로 후퇴했다. 황제는 즉각 이 요새를 포위하러 진격했지만, 사전에 척후병을 보내지 않아 이 지역이 늪이 많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결국 동로마군은 조직적인 행군을 하지 못했고 병사들 사이에 전염병이 창궐했다. 급기야 콘스탄티노스는 통풍에 걸려 인근의 메셈브리아로 가서 며칠 쉬었다. 그런데 돌연 황제가 도망쳤다는 소문이 돌자 병사들이 겁먹고 도주했다. 불가르군은 이 기회를 틈타 추격하였고, 다뉴브 강을 건너 모에시아까지 진격하여 제국군 병사들을 학살했다.
아스파루흐는 여세를 몰아 동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었던 7개의 슬라브 종족을 손쉽게 정복하였고, 발칸 산맥 이남의 동로마 영토를 약탈했다. 결국 동로마 제국은 불가르족과 협상하여 681년 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평화 협약을 체결하여 불가리아의 건국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공물을 매년 바치는 대신 불가르족이 발칸 산맥 너머로 약탈하는 걸 금지했다. 또한 양측은 무역 관계를 맺기로 했다. 이렇게 동로마 제국의 동의를 받아낸 그는 폴리스카를 수도로 삼고 칸을 칭했다.
3. 테르벨 전쟁
705년, 지난날 폐위되었던 유스티니아노스 2세가 불가르 칸 테르벨을 찾아가 자신을 도와달라고 청했다. 테르벨은 유스티니아노스 2세를 따뜻하게 맞이했고, 15,000명의 군대를 빌려주는 대가로 제국의 부황제가 되기로 약조받았다.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불가리아군의 지원에 힘입어 황위를 되찾고 자신을 축출한 레온티오스와 티베리오스 3세를 처형한 뒤, 테르벨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초청했다. 그리고는 그의 어깨에 자주색 황제복을 걸쳐주며 부황제로 공식 선임했다. 그는 이외에도 자르고나 일대와 황금 및 다양한 귀중품들을 받고 불가리아로 귀환했다.08년경,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불가리아가 너무 커지자 위협을 느끼고 원정군을 일으켜 다뉴브 강 하구의 앙키알로스를 공격했다. 그러나 테르벨의 역공으로 제국군이 참패했다. 711년 유스티니아노스 2세가 필리피코스의 반란으로 참살된 뒤, 그는 원수를 갚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712년 동로마 제국을 침략하여 여러 촌락을 파괴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벽으로 들이닥쳤다. 그러다 옵시티온 테마 부대가 보스포로스 해협을 건너와 필리피코스를 폐위하고 수도에 주둔하자, 본국으로 귀환했다. 이후에도 매년 동로마 제국을 침략하였고, 716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재차 진격했다. 당시 우마이야 왕조의 압박에 시달리던 테오도시오스 3세 황제는 그와 협의 끝에 다음과 같은 조건으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
1. 값비싼 붉은 가죽을 불가리아에 기증한다.
2. 자고리아 지역을 포함한 불가리아 왕국의 영역을 인정한다.
3. 양국은 정당한 통치자에 대해 음모를 꾸민 혐의로 기소되어 망명한 자들을 인도한다.
4. 각국 정부의 인감이 있는 상품만 수입할 수 있으며, 위반 시 압수될 수 있다.
2. 자고리아 지역을 포함한 불가리아 왕국의 영역을 인정한다.
3. 양국은 정당한 통치자에 대해 음모를 꾸민 혐의로 기소되어 망명한 자들을 인도한다.
4. 각국 정부의 인감이 있는 상품만 수입할 수 있으며, 위반 시 압수될 수 있다.
717년 여름 우마이야 왕조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대대적으로 침략하자(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동로마 제국 황제 레온 3세는 테르벨에게 구원을 청했다. 그는 이에 응했고, 718년 초 콘스탄티폴리스 인근에서 혹독한 추위로 고통받던 아랍군을 상대로 완승을 거두었다. 참회자 테오파네스의 연대기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22,000명에 달하는 아랍인이 전사했다고 한다. 아랍군은 패배의 여파를 견디지 못하고 철수했다.
719년, 지난 날 테오도시오스 3세에게 축출되었었던 전 황제 아나스타시오스 2세는 불가리아를 찾아가서 자신을 복위시켜달라고 청했다. 그는 군대와 50 센타나리온의 금화를 주었고, 아나스타시오스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레온 3세는 이를 격퇴하고 아나스타시오스 2세를 붙잡아 처형했다. 이후 테르벨에게 서신을 보내 "지난날 아랍에 공동으로 싸워놓고 어찌 이러느냐?"라고 항의했다. 이에 테르벨은 제국 국내문제에 끼어든 걸 사과하였고, 불가리아에 망명한 아나스타시오스의 잔당을 레온 3세에게 보냈다.
4. 콘스탄티노스 5세의 불가리아 원정
753년, 불가르 칸에 오른 코르미소쉬는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노스 5세가 불가리아와의 국경 지역을 요새화하고 아르메니아인과 시리아인들을 트라키아에 정착시키는 걸 보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사신을 보내 협약 위반이라고 항의라면서 공물을 더 보내준다면 양해해줄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 콘스탄티노스 5세가 사절을 추방하는 것으로 응답하자, 코르미소쉬는 전쟁을 선포했다. 이리하여 불가리아와 동로마 제국간의 대규모 전쟁의 막이 올랐다.756년, 코르미소쉬는 대군을 일으켜 트라키아로 진격해 콘스탄틴폴리스에서 40km 떨어진 아나스타시아 성벽에 도착했다. 콘스탄티노스 5세는 이에 맞서 친정하였고, 양측은 대규모 회전을 벌였다. 그 결과 불가리아군이 대패하여 본국으로 패주했다. 이후 콘스탄티노스 5세는 불가리아로 8번이나 원정을 감행해 대부분 성공하였고, 763년에는 800척의 배에 기병 9,600명과 보병대를 태워 안키알로스로 진격했고, 그해 6월 30일 안키알로스 평원에서 불가리아군에게 참패를 안겼다. 이후에도 불가리아에 지속적으로 공격을 가해 타격을 입혔고, 이로 인해 6명에 달하는 불가리아 칸이 잇따라 폐위되었다.
775년 텔레리그 칸이 "제국에 망명하고 싶으니 이를 도와줄 불가리아 내 인사들을 알려달라"라는 서신을 보내자, 정말로 망명할 거라 믿고 그들의 정보를 전달했다. 텔레리그는 즉시 그들을 숙청해 후환의 싹을 잘랐다. 황제는 감히 자신을 속인 그를 응징하고자 775년 8월 친정하였으나, 도중에 폭염으로 다리가 붓자 아르카디오폴리스를 거쳐 회군하다가 9월 14일에 배 위에서 죽었다.
777년 궁정 쿠데타로 축출된 텔레리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망명을 신청했다. 콘스탄티노스 5세의 아들인 레온 4세는 그를 기꺼이 받아들여 파트리키오스 칭호를 주었고, 테오필락토스라는 세례명을 주어 정교회로 개종시켰으며, 이리니 황후의 사촌과 결혼시켰다.
5. 카르담과 콘스탄티노스 6세의 전쟁
791년 4월, 동로마 제국 황제 콘스탄티노스 6세는 스트루마 강에 침입하여 동로마군을 섬멸한 불가리아군을 응징하기 위한 원정을 개시했다. 하지만 사전에 적이 쳐들어올 거라는 정보를 입수한 카르담은 아드리아노폴리스 근처 프로바트 마을에서 군대를 사열하였고, 적군이 근방에 이르자 역공을 가했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동로마군은 패퇴하였고, 불가리아군은 적의 기지를 점령했다. 하지만 더 밀고 들어가지는 않고 본국으로 귀환했다.792년 7월 콘스탄티노스 6세는 앞선 패배를 보복하고자 또다시 군대를 이끌고 불가리아-동로마 제국 국경 근처에 도착했다. 그는 마르켈라 요새(현재 카르노바트 인근)를 건설하여 전진기지로 삼고자 했다. 카르담은 7월 20일 그의 군대와 함께 인근 고지를 점거한 후 동로마군의 상황을 정찰하였다. 이때 점성술사 판크라티우스가 별자리를 보니 불가리아군을 섬멸하는 미래가 보였다고 주장하자, 황제는 이에 고무되어 주둔지를 떠나 불가리아군이 점거한 고지로 진격했다. 그러나 불가리아군은 역공을 가해 동로마군을 격파하였고, 판크라티우스를 포함한 많은 장군들이 전사했다. 카르담은 황제의 천막과 수많은 물자를 점거했다. 결국 전의를 상실한 황제는 불가리아와 평화 조약을 체결하여 매년 공물을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796년, 콘스탄티노스 6세가 공물을 버티지 않자, 카르담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서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지 않으면 트라키아 전역을 파괴하고 금문으로 가겠다."라고 위협했다. 이에 콘스탄티노스 6세는 금 대신 똥물을 보내며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했다.
"당신에게 어울리는 공물을 보낸다. 당신은 늙었지만, 나는 당신이 평안히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나는 마르켈라에 가서 당신을 만나겠다.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그 후 콘스탄티노스 6세는 불가리아로 출정했지만, 아드리아노폴리스 북쪽 숲에 불가리아군과 대면하자 주둔지를 세워둔 뒤 꼼짝도 하지 않았다. 참회자 테오파네스에 따르면, 카르담이 17일 동안 어서 회전을 벌이자고 촉구했지만, 황제는 주둔지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동안 양측은 평화 협상을 이어갔고, 792년의 조약을 갱신하기로 합의했다. 불가리아에 대한 거듭된 원정 실패는 콘스탄티노스 6세의 위상을 실추시켰고, 결국 797년 어머니 이리니가 정변을 일으켜 아들을 붙잡아 실명형에 처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6. 크룸 전쟁
카르담의 뒤를 이어 칸위에 오른 크룸은 803년부터 805년까지 2년간 카롤루스 대제와의 전쟁에서 큰 타격을 입은 아바르 칸국을 상대로 공세를 개시해, 프랑크 왕국이 아바르 칸국의 서쪽 영역을 장악하는 동안 동쪽 영역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프랑크 왕국과 불가리아는 다뉴브 중류를 따라 새 경계선을 정했다. 이렇듯 날로 강성해지는 불가리아가 조만간 제국을 침략할 것을 우려한 니키포로스 1세는 807년 불가리아를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소집하여 아드리아노폴리스로 진군했다. 그러나 도중에 내부에서 반란이 터지는 바람에 원정을 중단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와야 했다.크룸은 로마군이 국경 근처까지 왔다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접하자, 동로마 제국을 응징하기로 마음먹었다. 808년, 그는 다뉴브 강의 지류인 싀트루마 강 계곡에서 동로마군을 습격해 큰 타격을 입히고 막대한 양의 금을 압수한 뒤 병사들에게 골고루 분배했다. 이후 809년 동로마 제국의 요세인 세르디카(현재 소피아)를 포위 공격한 끝에, 수비대에게 항복하면 살려주겠다는 약속을 하여 항복시킨 뒤 도시에 입성하자마자 수비대 전체를 몰살했다.
세르디카 함락에 진노한 니키로포스 1세는 군대를 끌어모아 응징에 나섰다. 니키포로스 1세가 수도에 보낸 서신에 따르면, 황제의 군대는 불가리아 국경을 통과해 플리스카에 입성한 뒤 철저히 파괴했다.[1] 황제는 돌아오는 길에 세르디카에서 요새 재건 작업을 실시한 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귀환했다. 811년, 아나톨리아의 테마 부대들과 타그마 부대들을 총동원해 대규모 병력을 모집한 니키포로스 1세는 이번 기회에 불가리아를 파괴하고자 대대적인 공세를 감행했다. 그해 5월, 아들 스타브라키오스와 함께 불가리아 영내로 진입한 니키포로스 1세는 6월 말에 마르셀라를 공략한 뒤 15일 이상 주둔했다.
크룸은 이번에는 이기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사절을 보내 평화 협정을 맺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니키포로스 1세는 불가리아를 멸망시킬 작정으로 온 터라 이를 거부하고 계속 진군하면서 잔학행위를 벌였다. 참회자 테오파네스에 따르면, 동로마군은 진군로 주변에 살던 민간인들을 모조리 죽였는데, 특히 여성과 유아들을 반드시 쳐 죽여서 씨를 말려버리려 했다고 한다. 크룸은 5만 병력을 규합해 반격했으나 동로마군에게 패배하고 산악 지대로 피신했고, 플리스카에 남겨진 12,000명의 수비대는 7월 20일 최후의 한 사람까지 결사적으로 싸웠지만 끝내 전멸했다. 그리하여 플리스카에 입성한 동로마군은 건물 전체를 파괴하고 주민들을 학살한 뒤, 그곳에 남겨진 수많은 보물을 나눠가졌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하던 니키포로스 1세는 811년 7월 25일 바르비사 협곡 인근에서 크룸이 이끄는 불가르군의 기습으로 전사하고 병력 대부분을 잃었다. 크룸은 니키포로스 1세의 두개골의 살과 가죽을 벗긴 뒤 은으로 다듬어서 술잔으로 개조한 뒤 슬라브 지도자들과 함께 잔치를 벌일 때 두개골에 술을 따르며 명예를 지키고 나라를 구원하게 해준 신에게 감사를 표했다고 한다.
812년, 812년, 크룸의 군대가 국경을 넘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하면서 그곳을 보호하는 여러 요새를 공략했다. 그렇지만 테오도시우스 성벽의 위용을 잘 알고 있던 그는 새 황제 미하일 1세에게 매년 자신들에게 공물을 바치고 포로를 돌려보낸다면 물러가겠다고 제안했다. 미하일 1세가 제안을 거부하자, 크룸은 812년 메셈브리아를 포위했다. 그는 일찍이 니키포로스 1세에게 고용되었다가 황제의 강압적인 태도에 불만을 품고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이탈하여 불가르군에 가담한 아랍 공성 기술자들을 동원해 각종 공성 무기를 제작했다. 결국 메셈브리아는 함락되었고, 도시에 있던 그리스의 불 무기들이 불가르군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813년 2월, 크룸은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했지만 동로마군에 의해 격퇴되었다. 미하일 1세는 이 성공에 고무되어 동로마 제국 전역에서 군대를 소집해 적과 일전을 벌이려 했다. 양측은 813년 6월 아드리아노폴리스 인근의 베르시니키아 인근에서 마주쳤다. 2주간 대치가 이어진 끝에 6월 22일 본격적인 교전이 벌어졌다. 한 때 동로마 좌익 부대가 상대를 밀어붙이면서 전세가 동로마 쪽으로 기울어지는 듯했다. 그런데 아르메니아 출신의 장성 레온 5세가 이끌던 우익 부대가 독단적으로 도주하면서 동로마 전열이 무너졌고, 불가르군이 이 틈을 노려 대대적으로 공격하는 바람에 참패당했다. 그 후 잔여 병력을 수습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온 뒤 아내 프로코피아의 반대를 무릅쓰고 레온 5세에게 황위를 넘겼다.
베르시니키아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크룸은 여세를 몰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 앞에 진을 치고 불가르인들이 섬기는 신들을 위한 의식을 거행하는 한편, 도랑을 파고 요새를 쌓아 오랫동안 주둔할 기색을 내비쳤다. 그러면서 레온 5세에게 약속한 대로 금, 비단, 그리고 미인을 달라고 요구했다. 이로 볼 때 레온 5세는 사전에 크룸과 밀약을 맺었던 것으로 보인다. 레온 5세는 크룸과 골든혼 해변가에서 협상하자고 제안했고, 크룸은 이에 따라 몇몇 수행원을 대동하여 협상장으로 갔다.
그러나 크룸 일행이 혐상장에 도착하자, 사전에 매복해 있던 궁수들이 그들을 향해 화살을 일제히 쐈다. 이로 인해 수행원들이 대부분 죽었고, 크룸 역시 부상을 입었지만 타고 다니던 군마가 재빨리 달아나 준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 일로 극도로 분노한 크룸은 불가르 군대를 이끌고 셀렘브리아 등 콘스탄티노플 인근 지역을 유린하였으며 아드리아노플을 함락하여 주민 1만 명을 학살했다. 이에 레온도 보복으로 메셈브리아를 공격하여 그곳의 불가르 수비대를 학살했다.
크룸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켜 동로마 제국을 끝장내기로 작정하고, 슬라브인과 아바르인을 소집하고 강철로 제작된 충차 5,000대 등 공성병기들을 실은 함대를 준비했다. 이 소식을 접한 레온 5세는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보강하는 데 힘을 기울이는 한편 신성 로마 제국의 군주 루도비쿠스 1세에게 사절을 보내 불가리아의 후방을 공격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루도비쿠스 1세는 제국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을 수습하는 데 애를 먹고 있던 터라 동로마 제국을 돕지 못했다.
이제 동로마 제국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접어드는 듯했던 814년 4월 13일, 크룸이 급병에 걸려 사망했다. 레온 5세는 이 소식을 접하자 반격에 착수해 815년 말 또는 816년 초 제국 함대를 파견해 불가리아의 후방 지대인 네세바르 요새를 공략했다. 여기에 동로마 육군이 동부 트라키아의 여러 요새를 공략했다. 결국 불가리아의 새 칸 오무르타그는 평화 협약을 맺기로 결의했고, 816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라 양측의 국경지대, 특히 트라키아의 경계가 정해졌고, 동로마 제국 내 슬라브인들의 거취는 개개인의 의사에 맡기기로 했으며, 동로마 제국은 불가리아의 이교 신앙을 용인하고 불가리아는 자국 내 기독교인들을 박해하지 않기로 했다. 이리하여 9년간 이어진 전쟁은 막을 내렸다.
7. 테오필로스와 프레시안 1세의 전쟁
평화 조약이 체결된 후, 동로마 제국과 불가리아의 사이는 호전되었다. 823년 동로마 황제 미하일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한 슬라브인 토마스의 반란군을 물리쳐달라고 요청하자, 오무르타그는 헬라클케아 부근 케둑토스 평원에서 반란군을 습격해 막심한 타격을 입혔다. 토마스는 잔여 병력을 수습한 뒤 디아바시스로 후퇴하였지만, 결국 토벌대에게 패배하고 몰락했다.그러나 836년, 동로마 황제 테오필로스는 20년간 이어지던 평화 협약을 파기하고 불가리아로 침공하여 국경 일대를 황폐화시켰다. 불가리아군은 즉시 보복에 나서 필리포폴리스와 그 주변 일대를 공략했다. 837년 테살로니키 근처의 슬라브인들이 동로마 제국의 지배에 반기를 들자, 불가르 칸 프레시안 1세는 카반 이스불 장군에게 군대를 맡겨 이들을 지원하게 했다. 카반 이스불은 필리포폴리스 인근에서 동로마 제국군을 격파하고 필리포폴리스를 점령했다. 이리하여 불가리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테살로니키 사이의 육로를 차단했고, 테살로니키 근처의 슬라브인들은 불가리아의 산하로 들어갔다.
842년 블라스티미르 대공을 위시로한 세르비아 부족들이 테오필로스 황제의 동의하에 자치국을 세우자, 이에 위협을 느낀 프레시안 1세는 세르비아를 전격 침공했다. 그러나 3년간의 전쟁에서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845년 별다른 영토 변경 없이 평화 협약을 맺기로 합의했다. 이후에도 동로마 제국과 불가리아간의 유혈충돌이 몇 차례 벌어지다가 863년 동로마 황제 미하일 3세의 강한 압박과 기근과 지진에 시달리는 국내 사정을 못이긴 보리스 1세가 정교회 개종을 결의하면서 양자는 전쟁을 멈췄다.
8. 시메온 전쟁
불가리아 내부에서는 정교회 개종에 대한 반감이 거셌다. 정교회로 개종하는 것은 형식상으로나마 불가리아의 칸에 대한 로마 황제의 우위를 인정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889년 보리스 1세가 퇴위한 후 칸위에 오른 장남 블라디미르가 반기독교 정책을 펴며 이교도 국가로 돌아가려 했다가 892년 보리스 1세의 쿠데타로 폐위되기도 했다. 그 후 보리스 1세에 의해 새 칸으로 지명된 시메온 1세는 정교회를 국교로 확립하면서도 동로마 황제를 제치고 자신이 정교회 최고 수장이 되기로 마음먹고, 이를 이루기 위해 동로마 제국과 전쟁을 벌일 구실을 찾았다.894년경, 동로마 제국 황제 레온 6세는 장인이자 스틸리아노스 자우치스를 체신부 장관(Logothetes tou dromou)이라는 요직에 임명해 제국의 대내외 정책을 총지휘하게 했다. 자우치스는 자기 심복 두명에게 불가리아 무역의 독점권을 내주었다. 그들은 제국으로 수입되는 모든 물품에 대해 불가리아 상인들이 지불하는 관세를 대폭 인상하고 물자 집산지를 콘스탄티노플에서 테살로니키로 옮겼다. 그러자 불가리아와 제국간 무역로가 붕괴되었다. 시메온 1세는 즉각 항의했지만 무시당하자 이를 구실 삼아 전쟁을 단행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전쟁은 896년 6월 7일 불가로피곤 전투에서 시메온이 이끄는 불가리아군이 대승을 거두면서 불가리아 쪽으로 급격하게 기울었다. 시메온은 이 전투에서 승리한 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하며 모든 마을을 파괴하고 수많은 동로마인들을 잡았다. 불가리아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한 뒤 포위했지만, 시메온 1세는 함락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고 협상을 재개했다. 그 결과 양자는 포로를 교환하고 전쟁을 벌이지 않기로 했으며, 불가리아는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빼앗은 디라키움을 포함한 30개 요새를 반환하는 대가로 흑해와 스트란자 산맥 사이의 영토를 넘겨받으며, 매년 막대한 공물을 받기로 했다. 여기에 전쟁의 빌미가 되었던 교역소는 테살로니카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갔다.
시메온은 전쟁에서 승리한 뒤 프리슬라프에서 대대적인 토목 공사를 단행하고 세르비아 일대의 부족장 페타르를 통치자로 인정하는대가로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게 하는 등 위세를 떨쳤다. 하지만 그는 내심 여기서 그치지 않고 동로마 제국을 완전히 무너뜨리거나 불가리아에 굴복하게 만들고 싶은 야망을 품었다. 904년 아랍인들이 동로마 제국에서 2번째로 큰 도시인 테살로니카를 약탈하고 시민들을 대거 끌거가면서 도시가 텅 비자, 시메온 1세는 즉시 군대를 그쪽으로 보내 에게 해의 중요한 항구인 테살로니카를 자국의 영역으로 삼으려 했다. 이에 레온 초이로스파크테스가 레온 6세의 지시에 따라 시메온에게 가서 협상했다. 그 결과 동로마 제국이 테살로니카를 계속 점유하는 대가로 불가리아가 영토를 남쪽으로 좀더 확장하는 걸 허용했다.
912년 5월 11일, 레온 6세가 사망하고 동생 알렉산드로스 2세가 황위에 올랐다. 시메온은 콘스탄티노플에 사절을 보내 알렉산드로스의 즉위를 축하하면서 평화 조약을 갱신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그 조약은 형 레온이 맺은 것이니 무효라면서 앞으로는 조약 따위는 필요도 없고 더는 공물도 바치지 않겠다고 큰소리를 치고는 그들을 쫓아버렸다. 이에 시메온은 콘스탄티노플로 진군할 준비에 착수했다.
913년 8월, 시메온 1세가 대군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은 알렉산드로스 2세의 급사와 당시 7살이었던 콘스탄티노스 7세의 등극, 콘스탄티노스 두카스의 반란으로 인해 혼란에 빠졌기에 불가리아군을 상대로 전력을 다해 맞서 싸울 수 없었다. 불가리아군은 순조롭게 남하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 인근에 도착했다. 그들이 세운 진영은 마르마라 해에서 황금뿔 만의 상류 구역까지 이어지는 육로 성벽을 따라 세워졌는데, 그 길이가 6km에 달했다고 한다. 시메온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어지는 육로를 차단하고 주변 촌락들을 철저하게 파괴하겠다고 으름장 놓으면서 햅도몬 궁전을 장악한 뒤 전령을 보내 협상할 의사가 있음을 통지했다.
당시 콘스탄티노스 7세를 대신해 섭정을 맡고 있던 니콜라오스 미스티코스 총대주교는 시메온의 두 아들을 수도로 초청해 콘스탄티노스가 참석한 가운데 블라케르나이 궁전에서 성대한 연회를 열었다. 이후 그는 헵도몬 궁전에 있던 시메온을 찾아갔다. 시메온은 총대주교 앞에 엎드렸고, 총대주교는 자신의 관을 시메온에게 씌우며 그가 차르를 칭하는 걸 용인했다. 이후 두 사람은 밀약을 맺었다. 시메온은 그동안 밀린 공물을 보내라고 요구하면서 콘스탄티노스와 자신의 딸을 결혼시킬 것을 제안했다. 니콜라오스가 이 제안을 받아들이자, 시메온은 불가리아로 철수했다. 그러나 이 밀약이 알려지자 니콜라오스와 함께 어린 황제를 보좌하고 있던 섭정단이 반발했다. 니콜라오스가 그런 중차대한 일을 혼자서 결정한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데다 시메온의 딸을 황후로 삼게 했다가는 시메온이 공동 황제가 되려 들 테고, 그랬다간 불가리아 국왕이 제위까지 얻게 되므로 제국은 불가리아에게 넘어갈 게 뻔했다.
섭정단은 914년 2월 정변을 일으켜 니콜라오스를 실각시키고 수도원에 유폐되었던 조이 카르보노프시나 황태후를 복위시켜 섭정을 맡게 했다. 또한 황후의 옛 친구들과 조언자들 역시 원직에 복귀했다. 다만 니콜라오스는 정치 문제에 절대로 뛰어들지 않겠다는 약속을 걸고 총대주교직을 유지했다. 이로 인해 딸을 황제에게 시집보내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시메온 1세는 915년 9월 군을 이끌고 아드리아노플로 진군해 손쉽게 현지 총독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러나 조이 황태후가 도시를 수복하기 위해 대군을 파견했다는 급보를 접하자, 이렇게 빨리 맞대응할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던 시메온은 황급히 철수했다. 이후 시메온은 2년 동안 테살리아와 이피로스의 크고 작은 도시들을 수시로 공략했다.
917년 6월, 동로마 제국은 불가리아에 전력을 쏟기 위해 아바스 왕조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여기에 디라키움의 스트라테고스인 레온 랍도초스는 불가리아로부터 독립할 기회를 노리던 세르비아 공작 페타르를 설복해 동로마 제국 편으로 끌여들었다. 하지만 사전에 페타르의 배신을 전해들은 시메온은 테오도로스 시그릿사를 파견해 세르비아를 공격하게 했고, 시그릿사는 페타르를 순조롭게 무찔렀다. 페타르는 체포된 후 불가리아로 끌려간 뒤 그곳에서 1년 만에 사망했다. 시메온은 파블레를 새 세르비아 공작으로 선임했다.
한편, 크리미아 케르손의 군사 총독 요안니스 보가스는 조이 황태후의 밀명을 받았던 불가리아 북동부의 스텝 지대에 거주하고 한 때 시메온과 함께 마자르인들을 협공했던 페체네그인들에게 막대한 선물을 보내며 불가리아를 협공하게 했다. 동로마 함대는 페체네그족을 다뉴브 강 건너편으로 수송해줄 것이며, 그동안 제국 육군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진군할 것이었다. 그러면 대규모 협공에 걸려든 시메온은 강화를 제의하는 것 외에 대안이 없을 터였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함대 지휘관 로마노스 레카피노스는 요안니스 보가스와 만나자마자 서로 자신의 권한이 우월하다며 심한 말다툼을 벌였다. 그러더니 로마노스가 군대 수송을 거부해버렸다. 페체네그인들은 제국 함대가 좀처럼 오지 않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한편 대 레온 포카스가 이끄는 육군은 수도를 떠나 흑해 연안을 따라 행군했다. 이들은 불가리아로 진입했다가 8월 20일 새벽에 앙키알로스 항구의 외곽에 진지를 차렸다. 시메온은 이들을 기습해 무자비하게 살육했다. 이날 제국군은 거의 전멸했고 레온 포카스를 비롯한 소수의 병사들만이 가까스로 콘스탄티노플로 귀환했다. 재앙의 소식이 수도로 전해지자, 조이 황태후는 로마노스 레카피노스를 공식 심문에 회부하여 실명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그의 친구들이 중재에 나서 준 덕분에, 로마노스는 간신히 처벌을 면제받았다.
917년, 시메온은 군대를 이끌고 헬라스로 진군해 코린토스 지협까지 도달했다. 수많은 피난민이 에우보이아 섬과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달아났지만, 미처 달아나지 못했던 이들은 생포되었고 현지 주민들은 불가리아에 세금을 내도록 강요받았다. 헬라스 속주의 수도 테베는 함락당했고 주변의 요새들은 파괴되었다. 그해 겨울, 시메온은 동부 트라키아를 유린한 뒤 콘스탄티노플 성벽까지 밀어닥쳤다. 조이 황태후는 다시 레온 포카스에게 군대를 맡겼다. 그러나 레온 포카스는 카사시르타이의 서쪽 외곽에서 또다시 시메온에게 완패했다. 하지만 시메온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육지에서 공격해봤자 승산이 없다는 걸 잘 알았기에 이쯤에서 물러났다.
조이 황태후는 2차례의 참패로 자신의 입지가 위태로워지자 자신과 아들을 지켜줄 후견인을 모색했다. 그녀는 레온 포카스를 황궁으로 불려들어 조언자로 삼았지만 황제의 가정교사 테오도로스는 레온이 적임자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로마노스 레카피노스에게 보호를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이에 로마노스는 어린 황제를 받들어 모시겠다고 선언하고 919년 봄에 함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진군했다. 황태후는 그에게 함대를 해산하라고 명령했지만 로마노스는 황태후가 보낸 시종장을 체포했다. 이에 황태후가 해명을 요구하는 사절을 보냈지만, 그들은 돌맹이 세례를 맞고 쫓겨났다.
사안이 심각해지자, 황태후는 부콜레온에서 각료 회의를 소집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그녀에게 등을 돌렸고, 결국 그녀는 아들이 "어머니의 섭정을 끝내고 니콜라오스 총대주교와 옛 섭정단원인 마기스테르 스테파노스에게 공동 섭정을 맡기겠다"고 연설하는 걸 지켜봐야 했다. 이튿날 아침 한 무리의 병사들이 조이 황태후를 성 에우페미아 수녀원으로 호송하러 찾아왔다. 하지만 콘스탄티노스가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자 병사들은 마음이 흔들렸고, 그 덕분에 그녀는 권력만 잃은 채 황궁의 규방에 머물 수 있었다. 대 레온 포카스가 이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지만 곧 진압당했고, 로마노스 레카피노스는 920년 12월 17일 공동 황제 로마노스 1세로서 권좌에 오른 뒤 자신의 딸 엘레니 레카피니를 콘스탄티노스 7세의 황후로 삼았다.
시메온은 로마노스를 찬탈자로 간주했으며, 일개 아르메니아 농민의 아들이 자신이 원하는 지위를 차지한 것에 모욕감을 느꼈다. 그는 로마노스로부터 혼인을 통해 친족 관계를 맺자는 제의를 거부하고 920년 가을 대군을 일으켜 트라키아로 진군해 다르다넬스 해협에 도착하여 소아시아의 람파쿠스 시 바로 맞은편에 있는 갈리폴리 반도 해안에 숙영지를 세웠다. 만약 불가리아군이 갈리폴리와 람파쿠스를 확보한다면,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에게 해로부터 단절될 수 있었다. 총대주교 니콜라오스가 시메온을 찾아가 협상을 시도했지만, 시메온은 "찬탈자 로마노스가 물러나지 않는 한 협상은 없다"며 거부했다.
시메온은 자신을 격퇴하러 오는 동로마군을 잇따라 격파하고 황금뿔만 건너편의 스테논(Stenon) 일대를 약탈했고, 로마노스가 아끼던 페게(Pegai)의 궁전들을 불태워 버렸다. 한편 시메온에 의해 세르비아 공작으로 선임되었던 파블레가 동로마 제국의 편으로 돌아서자, 921년 자하리야를 파견해 그를 토벌하게 했다. 자하리야는 파블레를 물리치고 세르비아를 장악했지만, 얼마 후 동로마 제국의 편으로 돌아섰다. 923년, 시메온은 아드리아노플을 점령한 뒤 끝까지 저항하다가 붙잡힌 모롤레온 총독을 고문 후 처형했다.
하지만 악명높은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뚫기엔 역부족이라는 걸 잘 알았던 그는 924년 파티마 왕조와 협상하여 함대를 지원받고 해상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하려 했다. 그러나 아랍 대표들을 데리고 귀국하던 불가리아 사절들은 공해상에서 로마 제국 함대에게 사로잡혀 콘스탄티노플로 압송되었다. 로마노스는 불가리아 사절을 억류하고 아랍인들에게는 선물을 안겨주면서 칼리프에게 화친의 의사를 전하고 시메온이 주겠다는 선물보다 더 많은 공물을 매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로 인해 파티마 왕조는 시메온을 돕지 않기로 했다. 설상가상으로, 924년 배신자 자하리야를 토벌하는 임무를 맡아 세르비아에 파견되었던 테오도로스 시그릿사와 마르마이스가 세르비아군의 매복 공격을 받고 전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시메온은 상황이 좋지 않게 돌아가자 로마노스와 평화 협상을 갖기로 했다. 924년 9월 9일, 로마노스는 친히 협상 자리에 나와서 시메온과 대면했다. 그는 이어진 회의에서 분위기를 주도했다. 그는 평화를 구걸하기보다는 그리스도교도로서의 선한 본성에 호소하면서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생각을 바꾸라고 열심히 설득했다. 또한 그는 연례 공물을 늘리겠다고 제안하면서도 그 제안을 설교 속에 포함시킴으로서 자신이 양보하는 것이 아니라 '자애로운 후원자가 선뜻 도와주는 것처럼' 느끼게 했다. 당대 문헌에 따르면, 그 순간 독수리 두 마리가 하늘 높이 날아 함께 선회하더니 서로 떨어져서 한 마리는 콘스탄티노플의 망루 위로 급강하하고 다른 한 마리는 서쪽의 트라키아 쪽으로 날아갔다고 한다.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은 불가리아와 로마 제국은 하나로 뭉칠 수 없다는 신의 계시라고 여겼다고 한다.
평화 협상 결과, 제국은 매년 최고급의 공물을 불가리아에게 보내주는 대신 시메온은 제국의 영토에서 철수하고 그동안 점령한 흑해 연안의 요새들을 반환하기로 했다. 또한 동로마 황제는 시메온이 "불가리아의 차르"를 칭하는 걸 받아들이기로 했다. 시메온 1세는 여전히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확보하고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고 싶었기에, 평화 협상을 맺은 후에도 비밀리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하기 위한 원정을 준비했다. 그러나 927년 5월 27일 63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그의 야망은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시메온 1세 사후 차르에 오른 페터르 1세는 외삼촌 기오르기 수르수볼과 함께 원정을 개시하여 트라키아로 진군해 여러 요새를 공략한 후 동로마 제국에게 평화 협상을 다시 맺자고 제안했다. 이에 양자는 메셈브리아에서 협상했고, 927년 11월 페터르 1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찾아온 뒤 로마노스 1세의 손녀 마리아 레카피니와 결혼하면서 평화 협약이 최종적으로 맺어졌다.
동로마 제국은 공식적으로 불가리아 군주의 차르 칭호를 인정하면서도, 불가리아 차르는 동로마 황제의 "영적인 아들"로 간주한다는 문구를 삽입함으로써 은연중에 로마가 불가리아보다 우월한 국가라는 의식을 드러냈다. 또한 불가리아 대주교회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부터 완전히 독립하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에 의해 다섯번째로 독립적인 동방 정교회 교구청이 되었다. 불가리아는 시메온 1세가 점령한 트라키아, 테살리아, 헬라스 일대를 돌려주는 대신 마케도니아 대부분과 이피로스 대부분에 대한 지배권을 유지했다.
9. 스뱌토슬라프 전쟁
시메온 전쟁 이후 동로마 제국과 불가리아는 40년간 평화를 누렸지만, 동로마 제국 내부에서는 불가리아에게 빼앗긴 도나우강 이남의 발칸 반도를 되찾아야 한다는 여론이 점차 거세졌다. 특히 니키포로스 2세 치세에 아바스 왕조 및 여러 아랍 토후국들을 상대로 연전연승한 끝에 유프라테스 강 중부의 아미다, 다라, 니시비스를 급습하고 에데사를 공략하고 크레타를 탈환하고 소아시아 일부 영토를 회복하는 등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에 자신감을 품은 니키포로스 2세는 965년 공물을 수령하기 위해 찾아온 불가리아 대사 앞에서 불가리아인들을 혐오스럽고 더러운 거지 민족이라고 비난하고 불가리아 왕은 짐승 가죽 옷이나 입는다고 욕한 뒤 내쫓았다. 그후 니키포로스는 군대를 일으켜 불가리아 변방으로 쳐들어가 국경 요새 몇 곳을 함락시켰다.그리하여 장기간 이어지던 평화를 깨뜨린 뒤, 니키포로스 2세는 예상되는 불가리아의 반격에 대처하고자 제4대 대공 스뱌토슬라프 1세에게 귀족 칼로키로스를 사절로 보내 금 1만 5천 파운드를 줄 테니 불가리아를 공격해 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스뱌토슬라프 1세는 하자르 칸국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어 유명무실하게 만들고 볼가 강 전역을 확보하고 주변의 유목 부족들 역시 복속시키면서 기세를 한껏 뽐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불가리아를 공격해달라는 제안을 받자, 루스의 영역을 확대할 절호의 기회라고 여기고 승낙했다.
968년 8월, 스뱌토슬라프 1세는 6만 대군을 이끌고 불가리아로 쳐들어가 실리스트라 전투에서 3만 명의 불가리아군을 격파하고 도브루차 일대 대부분을 공략했다. 19세기 불가리아 역사가 바질 즐라타르스키에 따르면, 루스군은 불가리아 북동부의 80개 마을을 약탈하고 파괴했다고 한다. 페터르 1세는 루스군에게 참패하고 국토가 짓밟히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심한 충격을 받은 나머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니키포로스 2세는 처음에는 불가리아군이 루스군에게 참패했다는 소식에 기뻐했지만, 루스군이 불가리아 동부 일대를 삽시간에 휩쓸고 있다는 추가 소식을 듣고 당황했다. 그는 이러다가 루스가 불가리아를 완전히 병합하여 제국에 크나큰 위협이 될 것을 우려해 페체네그인들을 부추겨서 키예프를 급습하게 했다. 키예프에 남겨져 있던 어머니 키예프의 올가로부터 "페체네그인들이 키예프를 포위하고 있으니 구원하러 와라"는 전갈을 받은 스뱌토슬라프 1세는 키예프로 급히 철수해야 했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겨우 기운을 차린 페터르 1세는 루스군이 또다시 쳐들어올 것을 두려워해 동로마 제국에 사절을 보내 힘을 합쳐 루스군에 대항하자고 호소했다. 니키포로스 2세는 이번에는 사절을 정중하게 대했지만, "우리와 손잡고 싶다면 페터르 1세는 퇴위하고 두 명의 로마 황제 바실리오스 2세와 콘스탄티노스 8세가 보리스의 딸인 불가리아 공주와 결혼해야 한다"는 요구사항을 내걸었다. 페터르 1세는 요구에 따라 수도원으로 은퇴했다가 969년에 사망했고, 동로마 제국에 인질로 보내졌던 보리스가 불가리아 수도 프리슬라프로 돌아간 뒤 보리스 2세로서 즉위했다.
969년 여름, 스뱌토슬라프는 자신에게 복종한 페체네그인과 마자르 동맹군을 거느린 채 불가리아로 돌아가 불가리아군을 또다시 격파하고 불가리아 동부와 북부에 대한 통제권을 빠르게 확립했으며, 도로스톨론과 프리슬라프에 수비대를 배치했다. 보리스 2세는 루스군을 도저히 이길 가망이 없다고 여기고 그의 가신이 되면서 명목상이나마 불가리아 차르로서의 지위를 유지했다. 스뱌토슬라프는 불가리아군을 자신의 군대에 대거 끌어들인 뒤 동로마 제국 마저 제패할 마음을 먹었다.
한편, 동로마 제국에서는 969년 12월 11일 궁중 쿠데타가 발발하면서 니키포로스 2세가 암살당하고 요안니스 1세가 새 군주로 등극했다. 요안니스는 스뱌토슬라프 1세에게 제국의 영토에서 떠나 준다면, 전에 니키포로스 2세가 불가리아를 공격하라고 할 때 주겠다고 해놓고 지불하지 않은 돈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그러나 스뱌토슬라프는 콧방귀를 뀌며 거부했고, 일전에 니키포로스 2세가 불가리아를 쳐달라고 요청하기 위해 파견했던 사절인 칼로키로스를 로마 황제로 내세웠다.
970년 초, 스뱌토슬라프는 루스군에 마자르, 페체네그, 불가리아군까지 끌어들인 대군을 이끌고 트라키아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이어진 전쟁에서 요안니스 1세와 바르다스 스클리로스 등이 이끄는 동로마군에게 연전연패한 끝에 971년 7월 24일 도로스톨론 전투에서 최종적으로 패한 후 동로마 제국과 평화 협약을 맺었다. 요안니스 1세는 스뱌토슬라프 1세가 돌아가고 나면 또다시 쳐들어올 것을 우려해 페네체그인들에게 뇌물을 줘서 루스군을 기습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하여 스뱌토슬라프는 972년 봄 드네프르 강으로 이동하다가 페체네그족의 급습으로 살해되었다.
요안니스는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선식을 거행한 뒤 불가리아의 보리스 2세를 폐위하고 동부 불가리아를 다시 제국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또한 불가리아 총대주교청은 폐지되었고 그 휘하 교구들은 다시 콘스탄티노플 세계 총대주교청에 귀속되었다. 요안니스는 보리스에게 동로마의 명예 마기스테르라는 관직을 줬지만 보리스의 동생 로만은 거세되었다. 그러나 서부 불가리아는 제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났고, 소피아 백작 니콜라의 네 아들 다비드, 모세, 아론, 사무일이 세력을 일으켜 동로마 제국에 대항했다.
이들은 973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1세에게 사절을 보내 동로마 제국에 공동 대응하자고 제의했다. 또한 다비드는 테살로니키와 테살리아 주변의 국경 지대를 지켰고, 모세는 에게 해 연안과 세레스에 대한 공격의 전초기지가 될 스트로비차를 지켰으며, 아론은 스레데츠를 통치하며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베오그라드로 들어가는 길목을 지켰고, 사무일은 비딘의 강력한 요새에서부터 불가리아 북서부를 통치했다. 이들은 장차 옛 수도 프리슬라프를 포함한 동부 불가리아 영토를 해방시킬 기회를 노렸다. 그러던 976년 1월 요안니스 1세가 시리아 원정을 마친 뒤 귀환하던 중 사망했다. 이에 사무일 형제는 로마에게 빼앗긴 영역을 되찾기 위한 전쟁을 단행했다.
10. 바실리오스 2세의 불가리아 전쟁
976년, 사무일 형제는 동로마 제국이 내분에 휩싸인 틈을 타 불가리아 동부 일대로 쳐들어갔다. 그 중 다비드는 테살로니카를 공격하다가 전사했고, 모세는 부하의 배신으로 살해되었다. 하지만 사무일과 아론은 공세를 성공적으로 이어갔다. 동로마 제국군은 패배를 거듭해 트라키아로 패주하였고, 동로마의 정복에 반대하지 않았던 불가리아 귀족과 관리들이 모조리 처형되었다. 986년, 바실리오스 2세는 이들을 토벌하고자 불가리아 깊숙이 진군했으나 트라야누스 관문 전투에서 참패했다.그 후 사무일은 바실리오스 2세가 바르다스 포카스의 반란을 수습하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 동로마 제국 영역 깊숙이 침투하여 베로이아 등 여러 중요한 요새들을 점령했다. 또한 남쪽에서는 이피로스를 장악했고, 서쪽에서는 아드리아 해의 디라키움을 공략했다. 하지만 991년 내전을 수습한 바실리오스 2세는 대반격에 착수했다. 그는 트라야누스 관문 전투의 전훈을 뼈저리게 되새기며 매사에 신중하고 치밀하게 움직였고, 불가리아군은 동로마군을 상대로 악전고투하면서 차츰 영토와 병력을 상실했다. 매복이나 기습 공격으로 일관했지만, 트라야누스 관문 전투의 전훈을 뼈저리게 익힌 바실리오스 2세가 워낙 철저하게 대비했기 때문에 통하지 않았다.
전황이 갈수록 악화되자, 불가리아는 내분을 겪기 시작했다. 디라키움 총독 아쇼트는 사무일의 장인인 요안니스 크리셀리오스, 아내이자 사무일의 딸 미로슬라바와 함께 동로마 제국에 충성을 바치기로 결의했다. 아쇼트와 미로슬라바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망명하였고, 크리셀리오스는 동로마 제국 사령관 유스타시오스 다프노멜리스에게 디라키움을 내주었다. 1006~1007년, 바실리오스 2세는 불가리아 영역 깊숙히 침투하여 상당한 타격을 입혔고, 1009년 테살로니카 근방의 크레타에서 사무일의 군대를 괴멸시켰다. 황제는 이후에도 불가리아의 영토에 매년 침공하여 진군로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했다.
1014년, 바실리오스 2세가 불가리아로 또다시 쳐들어왔다. 사무일은 이제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겠다고 판단했다. 이대로 소모전을 지속한다면, 동로마 제국에 비해 국력이 현저히 약한 불가리아는 패망하고 말 것이었다. 매복 공격으로는 아무런 성공을 거둘 수 없다는 걸 잘 알았기에, 바실리오스 2세가 깊숙이 들어오기 전에 길목을 차단하기로 했다. 그는 클레이디온 협곡을 점거하여 두꺼운 나무 벽을 세우고, 적이 길고 위험한 우회로로 가도록 유도했다. 그해 여름 클레이디온 협곡에 도착한 황제는 나무벽을 공격했지만 많은 사상자만 기록할 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한편 사무일은 적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 네스토리차 장군에게 테살로니키를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네스토리차 장군은 클류치 인근에서 동로마군에게 패배했다.
바실리오스 2세는 나무벽을 어떻게 뚫을 지를 놓고 고심했다. 이때 니키포로스 시피아스가 일부 병력을 몰래 숲이 우거진 언덕 사면으로 보내자는 제안을 했다. 능선을 따라 불가리아군의 뒤까지 가서 협곡으로 내려간 다음 후방을 기습하자는 것이었다. 황제가 승낙하자, 시피아스는 엄선된 병사들을 이끌고 몰래 본진을 빠져나간 뒤 숲을 가로질러 가다가 협곡의 반대편 끝, 즉 불가리아군의 후위까지 간 뒤 숲에서 나왔다. 7월 29일, 그는 공격을 개시했고 황제도 동시에 나무벽을 향해 맹공을 퍼부었다. 불가리아군은 협공을 견디지 못하고 패주했다. 이때 사로잡힌 병사는 14,000~15,000명에 달했다.
사무일 역시 한때 사로잡혔지만, 아들 가브릴 라도미르가 대단한 무용을 선보여 적병을 모조리 몰아내고 포박당한 아버지를 말에 태운 뒤 포위망을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바실리오스 2세는 바르다르 계곡을 완전히 점령하려면 스트루미차를 손에 넣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테오필락토스 보타니아티스에게 스트루미차 주변의 요새와 성곽들을 정리하도록 했다. 자신은 직접 스트루미차를 공격하기로 했다. 테오필락토스는 요새들을 손에 넣었지만 곧이어 가브릴 라도미르의 복병을 만나 대패하고, 테오필락토스 본인도 전사했다. 전해지는 바로는 가브릴 라도미르가 직접 창으로 테오필락토스를 찔러 살해했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입은 손실이 적지 않았는지 바실리오스 2세도 스트루미차의 포위를 풀고 철군했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에 따르면, 바실리오스 2세는 1만 5천 명의 포로를 100명씩 150개조로 나눠서 99명은 두 눈을 모두 뽑아 장님으로 만들고 나머지 1명은 한 눈만 뽑은 뒤 애꾸 한 명이 나머지 99명을 인솔해서 돌아가게 했다고 한다. 후대 역사학자들은 이것은 과장되어 전해진 이야기로 간주하지만, 불가리아군이 막대한 손실을 입은 건 사실이다. 사무일은 패전에 깊이 상심한 나머지 쇠약해졌고, 1014년 10월 15일에 사망했다.
사무일 사후 차르에 선임된 가브릴 라도미르는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이어갔다. 10월 24일 사무일의 사망 소식을 접한 바실리오스 2세는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군의 방향을 돌려 마케도니아로 진격해 크르나 계곡을 거쳐 가브릴이 있는 비톨라로 향했다. 비록 비톨라 요새를 공략하진 못했지만, 차르의 궁전을 불태우고 철수했다. 1015년 초, 가브릴은 바실리오스 2세에게 앞으로 황제에게 복종하겠다고 약속하는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바실리오스 2세는 이를 의심하여 니키포로스 시피아스와 콘스탄티노스 디오예니스 장군을 모글레나로 파견해 적군을 섬멸하고 모시노폴리스에서 트리아디차로 진군하여 그 일대를 평정하고 보아나 요새를 점거하도록 하였다.
동로마군이 뒤이어 모글레나 요새를 포위하자, 가브릴은 구원군을 이끌고 요새를 구하려 했다. 그러나 포위망이 워낙 견고하여 구원하기 어려웠다. 그러자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쳐들어가 압박을 가함으로써 적군이 포위를 풀고 물러가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리하여 불가리아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쳐들어갔지만, 동로마군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수일 간 테오도시오스 성벽 주위를 맴돌다가 별 수 없이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모글레나 요새는 함락되었고, 가브릴의 입지는 매우 위태로워졌다.
바실리오스 2세는 이반 블라디슬라프에게 차르가 되는 데 도움을 주고 앞으로 호의를 베풀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넘어간 블라디슬라프는 1015년 8월 페트리스크 마을 근처의 숲에서 사냥하던 가브릴을 습격해 살해하였다. 그는 가브릴의 가족과 지지자들을 모두 처형하고 차르가 되었다. 1016년에는 차르 사무일의 가신이자 사위였던 두클랴 대공 요반 블라디미르를 유인하여 살해했다.
이반 블라디슬라프는 차르에 오른 뒤 바실리오스 2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평화 협약을 맺으려 하였다. 그러나 바실리오스 2세는 그를 믿지 않고 암살자를 보냈으며, 암살이 실패하자 1015년 말 군대를 이끌고 오스토보와 소스크로 진격해, 펠라고니아 평원을 황폐화하고 수많은 불가리아인을 포로로 잡았다. 블라디슬라프는 오흐리드를 버리고 프레스파 요새에서 버텼다. 바실리오스 2세는 오흐리드를 점거한 뒤 좀더 공세를 이어가려 했지만, 불가리아군이 배후를 습격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모시노폴리스로 귀환하였다.
블라디슬라프는 비톨라를 새 수도로 선택하고 요새화한 뒤, 1016년 비톨라로 쳐들어온 동로마군을 격파하고 페르니크를 88일간 포위공격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철수했다. 1017년 바실리오스 2세의 요청을 받아들인 키예프 루스군이 불가리아 북동부를 침공하여 프레슬라프를 점령하고 수많은 전리품을 확보했다. 바실리오스 2세는 그 사이에 남쪽으로 진군하여 카스토리아를 포위했다. 블라디슬라프는 사절을 파견하여 루스군을 아군으로 끌여들이려고 애쓰는 한편, 페체네그와 연합하여 테살로니키를 공략하려 하였다.
바실리오스 2세는 페체네그가 다뉴브 강을 건너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카스토리아 포위를 풀고 오스트로보 호수 근처로 이동하여 페체네그와 대치했다. 페체네그는 곧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고, 바실리오스 2세는 남쪽으로 돌아가서 사무일의 궁전이 있던 세티나를 점령하고 그곳에 보관된 식량을 다수 확보하였다. 그해 가을, 이반 블라디슬라프는 콘스탄티노스 디오예니스의 별동대를 기습 공격했지만, 바실리오스 2세가 친히 구원군을 이끌고 달려오자 전의를 상실하고 도주했다.
1018년 2월 이반 블라디슬라프는 디라키움 요새를 포위하여 공성전을 벌이던 중 전사했다. 장남 프레시안 2세가 뒤를 이어 차르가 되었지만, 사무일, 가브릴 라도미르, 이반 블라디슬라프 휘하에서 활약했던 크라크라를 비롯한 불가리아 귀족들은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제국에 대거 귀순했다. 바실리오스 2세는 세레스에서 개인적으로 크라크라를 접견하고, 그에게 파트리키오스 칭호를 수여했다. 프레시안 2세는 어떻게든 항전을 이어가기로 하고, 두 남동생인 알루시안과 아론, 이바츠 장군과 함께 알바니아 남동부의 토모르 산에 있는 토모르니차 요새에서 농성했다. 그러나 동로마군이 요새를 4개월간 포위 공격하면서 식량이 바닥나자, 결국 프레시안 2세는 1018년 8월 항복했다. 이리하여 42년간 이어진 동로마 제국과 불가리아의 전쟁은 막을 내렸다.
바실리오스 2세는 이바츠를 실명시키는 등 위험인물로 간주된 자들을 철저히 숙청했지만, 프레시안 2세와 알루시안, 아론 형제, 마리아 황후, 불가리아 총대주교 다비트 등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송한 뒤 귀하게 대접했다. 마리아 황후는 제국에서 여성이 받을 수 있는 가장 높은 작위인 조스테 파트리키아에 봉해졌고, 프레시안 등 아들들은 주요 테마의 스트라테고스로 임명되었다. 또한 불가리아 귀족들의 자제들은 동로마 여인들과 결혼하였고, 딸들은 동로마 남편감을 찾아주어 제국 귀족층에 편입시켰다.
또한 전쟁으로 폐허가 된 불가리아 속주 주민들이 세금으로 고통받지 않도록 세금을 인하하고 곡물로 현물 납부할 수 있도록 하였고, 불가리아 정교회 역시 대주교를 황제가 서임하게 된 것 외에는 건드리지 않아서 독립성을 유지하도록 했다. 또한 불가리아의 남은 군대를 그대로 제국 불가리아 테마병들로 편입하였는데, 이 병력은 제국이 불가리아를 제압하는데 소모한 것으로 추정되는 병력을 거뜬히 초과하는 수치로 추산된다.
바실리오스 2세의 이같은 조치 덕분에, 불가리아인들은 동로마 제국에 순순히 복종했다. 그러나 바실리오스 2세 사후 후임 황제들이 외적과의 전쟁과 내정 관리를 명목삼아 불가리아인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매기고 징병, 징용을 반복하면서, 제국에 대한 불가리아인들의 반감은 갈수록 증폭되었다. 그들은 페터르 데얀과 콘스탄틴 보딘을 앞세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려 했지만 모조리 진압되었다. 그러나 1185년 이반 아센 1세와 페터르 4세 형제가 봉기하면서, 동로마 제국의 입지는 급격히 흔들렸다.
11. 아센과 페터르의 난
1180년대, 이사키오스 2세는 발칸 반도로 쳐들어온 시칠리아 왕국과 전쟁을 벌이면서 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불가리아에 무거운 세금을 매기고 장정들을 징집했으며, 심지어 새로 황후를 맞아들인 뒤 결혼 축의금을 마련하라는 명분으로 특별세를 부과했다. 이에 타르노보 인근에 사유지를 경영하고 있던 토도르와 아센 형제는 1185년 킵셀라에 있던 이사키오스 2세에게 세금 경감과 자치권, 그리고 세금을 내는 데 필요한 수도원 수입을 받기 위해 하이모스 산 근교의 토지를 하사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요청은 거부당했고, 황제의 삼촌인 요안니스 두카스는 아센의 얼굴을 때리며 요구가 너무 무례하다고 꾸짖었다.아센 형제는 메시아로 돌아간 뒤 반란을 꾀했지만, 동료들은 쉽사리 그들을 따라 제국에 맞서려 하지 않았다. 1185년 여름, 살로니카의 성 디미터르의 이콘이 터르노보에서 발견되었다. 이에 토도르와 아센 형제는 성 디미터르가 "불가리아인과 왈라키아인을 해방하라는 신의 뜻을 받들어 오랫동안 지고 있던 멍에를 벗었다"고 주장하며 반란을 선동했다.이에 가혹한 징세에 시달리던 민중이 호응하면서 대규모 반란이 발발했다.
토도르와 아센 형제는 군중을 끌어모아 반란을 일으킨 뒤, 불가리아 제1제국의 수도였던 프리슬라프에는 상당 규모의 제국군이 주둔하고 있는 점을 고려해 타르노보에 새로운 수도를 세웠다. 토도르는 차르만이 사용하던 휘장을 채택하고 페터르 1세의 후계자로 자처하면서 페터르 4세로 자칭했고, 아센 역시 이반 아센 1세로 칭했다. 그 후 형제는 각지를 빠르게 공략해 1186년 봄 무렵에 불가리아 북부 전역을 석권했으며 트라키아 일대를 약탈했다. 또한 프리슬라프를 포위하여 공성전을 벌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한 이사키오스 2세는 1186년 여름 친히 대군을 일으켜 반란군 진압에 나섰다. 형제는 산악 지형에 의지하여 동로마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1186년 4월 21일 일식이 찾아와서 어둠이 완전히 깔린 틈을 타, 동로마군이 대대적으로 공격해 반란군을 격파했다. 형제는 잔여 병력을 수습하여 도나우 강 이북으로 도망쳤고, 이사키오스 2세는 성 디미터르의 이콘을 페터르의 집에서 획득해 반란의 명분마저 박탈했다. 이사키오스 2세는 아직 잔당이 남아있긴 했지만 이정도면 다 이겼다고 여기고 승리를 자축하며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했다.
그러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형제는 쿠만족의 원조를 받아내는 데 성공한 뒤 1186년 가을 도나우 강을 건너 점령지에 주둔하고 있던 동로마군을 격파하고 이전의 영토를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모이시아 전역까지 장악했다. 이사키오스 2세는 요안니스 두카스에게 진압을 명했고, 요안니스는 반란군을 상대로 벌인 몇차례의 소규모 접전에서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황제로부터 반역을 꾸미고 있다는 의심을 받고 지휘관직에서 해임되었고,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가 지휘권을 넘겨받았다. 그러나 칸타쿠지노스는 어느 산채를 포위했다가 반군의 급습을 받아 참패당했고, 페터르와 아센은 그의 예복을 노획한 뒤 대중에 전시했다.
이사키오스 2세는 칸타쿠제노스를 경질한 뒤 알렉시오스 브라나스에게 지휘권을 맡겼다. 그러나 그는 부하들로부터 황제로 추대받은 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쳐들어갔다. 황제의 2번째 처남인 콘라드 1세가 브라나스를 전사시키면서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지만, 페터르와 아센 형제는 그 사이에 입지를 확고히 다져놨다. 그 후 양측은 몇 차례 접전을 치렀지만 전황에 큰 영향은 없었다. 결국 이사키오스 2세는 1187년 페터르와 평화 협정을 체결해 불가리아 제국을 사실상 인정했다.
1187년 10월, 살라흐 앗 딘이 기독교의 성지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이에 제3차 십자군 원정이 추진되었고, 1189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대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사키오스 2세가 비협조로 나오면서, 양자간의 갈등은 갈수록 심해졌다. 페터르와 아센 형제는 이를 기회로 여기고 프리드리히 1세에게 동로마 제국을 협공하자고 제의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이를 심각하게 고려했지만, 예루살렘을 탈환하러 가는데 동로마 제국과 쓸데없이 싸울 이유는 없다고 판단하고 거절했다.
프리드리히 1세의 군대가 아나톨리아로 건너간 뒤, 이사키오스 2세는 불가리아와의 전쟁을 재개했다. 1190년 7월, 황제는 함대를 도나우 강 하류에 파견하여 쿠만족이 강을 건너지 못하게 한 뒤 타르노보를 포위했다. 그러나 페터르와 아센 형제는 적이 올 것을 예상하고 요새 수비를 강화해뒀다. 황제는 요새 공략을 좀처럼 달성하지 못하다가 9월에 쿠만족이 도나우 강을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 수도로 귀환하기로 했다.
이반 아센 1세는 트랴브나 협곡에 병사들을 매복시켰다. 그는 적 선봉대가 협곡을 지나가도록 내버려둔 뒤, 본대가 협곡에 완전히 들어섰을 때 급습했다.(트랴브나 전투) 동로마군은 제대로 된 저항도 못해 보고 괴멸되었고, 이사키오스 2세는 군대와 자금, 황제관과 황복을 죄다 내팽개치고 몇몇 측근만 대동한 채 도주했다. 페터르와 아센은 이사키오스 2세의 왕관과 성모 마리아와 관련된 유물을 포함한 '황제 휘장'을 대중에 전시했다.
이후 아센 형제는 쿠만족과 함께 동로마 제국의 영역을 잇달아 공격하여 바르나와 포모리를 약탈하고 트리아디사를 파괴했으며, 불가리아의 성인인 이반 릴스키의 유물을 확보했다. 1192년, 이사키오스 2세는 사촌 콘스탄티노스 앙겔로스 두카스를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트라키아에서 불가리아 약탈부대를 격파했다. 그러나 그는 반란을 일으켰다가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진압되어 실명형에 처해졌다.
아센 형제는 1192년 통치하에 있던 영토를 분할하기로 했다. 페터르는 북동부 지역을 받고 프리슬라프에 수도를 세웠고, 아센은 나머지 지역을 관할하여 타르노보에 정부를 꾸렸다. 당시 동로마 제국에서는 페터르를 동생에게 끌려다니는 자로 묘사하고, 아센을 무모하고 완고한 반란자로 지칭했다. 이로 볼 때 페터르는 동로마 제국과 화해하려 했지만 아센이 전쟁을 지속하고 싶어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193년, 아센은 형 페터르와 함께 트라키아를 침공했다. 이사키오스 2세는 알렉시오스 기도스와 바실리오스 바티치스를 파견했지만, 형제는 이들을 아르카디오폴리스 전투에서 섬멸하고 폴로브디프를 포함한 트라키아의 일부 지역을 공략했다. 이사키오스 2세는 트라키아를 되찾기 위해 킵셀라에서 군대를 모집했으나, 1195년 4월 8일 형 알렉시오스 3세에게 체포되어 실명형에 처해졌다. 알렉시오스 3세는 페터르와 아센에게 사절을 보내 평화 협정을 맺자고 제안했지만, 형제는 거부했다.
아센은 동로마 제국으로 진격하여 알렉시오스 아스피에티스를 격파하여 생포한 뒤 스트루마 강 연안의 요새를 공략했다. 알렉시오스 3세의 사위 이사키오스 콤니노스가 이들을 물리치려 했지만, 아센은 쿠만군과 함께 세르스 인근에서 격파했다. 이때 쿠만족이 이사키오스 콤니노스를 생포하자, 아센은 포로를 넘겨주라고 명령했다. 이에 쿠만족 지휘관 보야르 이반코는 반감을 품었다.
당대의 동로마 제국 역사가 니키타스 호니아티스는 이후에 벌어진 상황에 대해 두 가지 이야기를 동시에 전한다. 한 이야기에 따르면, 이사키오스 콤니노스가 이반코에게 딸을 시집보낼 테니 아센을 죽이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또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이반코가 아센의 아내의 여동생과 성관계를 맺다가 발각당하자, 이반코가 죽임을 당할 것을 우려했다고 한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불확실하지만, 확실한 사실은 1196년 가을 이반코가 아센을 타르노보에서 살해했다는 것이다.
이반코는 동로마 제국의 새 황제 알렉시오스 3세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황제는 마누일 카미치스를 파견했다. 그러나 군중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이를 수습하느라 더 이상 진군할 수 없었고, 페터르는 그 사이에 타르노보로 쳐들어갔다. 이반코는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도주했고, 페터르는 타르노보에 입성하여 반란 주동자들을 숙청한 뒤 동생 칼로얀을 새 지배자로 세운 후 프리슬라프로 돌아갔다.
1197년, 페터르는 동족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니키타스 호니아티스에 따르면, 그는 귀족 한 명의 칼에 찔러 죽었다고 한다. 반면 이스트반 바사리는 페터르가 폭동을 진압하던 중 살해되었다고 기록했다. 그 후 불가리아 제국의 단독 차르가 된 칼로얀은 두 형의 잇따른 죽음으로 혼란해진 정국을 재빨리 수습했다. 이후 트라키아를 연이어 습격하여 동로마 제국에 타격을 입혔으며,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협상을 청하는 서신을 보냈다.
1197년 봄, 알렉시오스 3세는 스트루미카와 프로세크 인근에서 페터르 4세와 이반 아센 1세의 조카인 도브로미르 크리소스에 대항하는 원정을 벌였다. 하지만 쉽사리 결판이 나지 않자, 황제는 결혼 동맹을 맺기로 하고 마누일 카미치스의 딸을 크리소스와 결혼시키게 했다. 당시 마누일 카미치스의 딸은 유부녀였지만, 이혼을 강요당하고 크리스소와 억지로 재결합했다고 한다.
알렉시오스 3세는 칼로얀을 견제하기 위해 동로마 제국에 망명한 이반코를 필리포폴리스의 사령관으로 삼았다. 이반코는 로도피 산맥의 두 요새를 점령했지만, 1198년 칼로얀의 회유를 받아들여 제국에 반기를 들었다. 마누일 카미치스가 이를 막으려 했으나 오히려 사로잡혔고, 이반코는 마누일을 타르노보로 보냈다. 칼로얀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몸값을 보내라고 요구했고, 마누일 카미치스 역시 황제에게 몸값을 달라고 애원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거부당했다. 그렇게 약 1년간 포로 생활을 보낸 끝에, 사위 도브로미르 크리소스에 의지하여 몸값을 마련해 겨우 풀려났다. 이렇듯 동로마 제국이 이반코의 반란에 신경을 집중하는 사이, 칼로얀은 1199년 봄과 가을에 쿠만족과 함께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여 브라니체보, 벨버즈드, 스코페, 프리즈렌 등을 공략했다.
1200년, 알렉시오스 3세는 이반코에게 평화 협약을 맺자고 제안했다. 이반코는 젊은 약혼자를 보내고 자신의 영역을 인정할 것이며, 황제가 자신을 해치지 않는다고 성경에 맹세하라고 요구했다. 황제는 그렇게 해주겠다고 약속하고, 사위 알렉시오스 팔레올로고스와 테오도로스 라스카리스를 파견했다. 이반코는 협약을 논의하기 위해 그들을 만나러 갔다가 현장에서 체포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되었다.
1201년 3월, 칼로얀은 쿠만족과 함께 콘스탄티아를 파괴하고 바르나를 함락시켰다. 한편, 사위 덕분에 겨우 풀려난 마누일 카미치스는 황제에게 사절을 보내 사위가 지불한 몸값을 대신 갚아달라고 청했지만, 황제는 역시 거절했다. 이에 격노한 마누일은 칼로얀의 지원하에 사위 크리소스와 함께 동로마 제국에 쳐들어가서 펠라고니아와 프릴레프를 점령했다. 이후 크리소스는 프릴레프에 남았고, 카미치스는 테살리아로 진격했다. 이로 인해 제국이 혼란에 빠진 사이, 레온 스구로스가 펠로폰네소스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마케도니아 동부의 스몰레나 테마 총독이었던 요안니스 스피리도나키스도 반란을 일으켰다.
알렉시오스 3세는 우선 스피리도나키스의 반란을 진압한 뒤 1201년 가을 카미치스의 난을 진압하러 출진했다. 그는 크리소스와 접촉해 손녀 테오도라를 아내로 삼게 해주겠다고 제의했고, 크리소스는 곧 이에 동의하여 카미치스와 관계를 끊고 펠라고니아와 프릴레프를 넘겨줬다. 이에 동시에 환관인 요안니스 오이노폴리티스는 테살리아로 가서 카미치스에게 신분을 원상 회복하게 해줄 테니 귀순하라고 제안했다. 카미치스가 거절하자, 알렉시오스 3세는 친히 테살리아를 침공했다. 카미치스는 이에 맞섰으나 패배했고, 스타노스 요새로 피신했지만 곧 함락당하자 불가리아로 도망쳤다. 그 후 쿠만족이 철수하자, 칼로얀은 알렉시오스 3세와 평화협정을 맺고 그해 말 트라키아에서 철수했다. 이리하여 양국의 전쟁은 막을 내렸다.
12. 칼로얀 전쟁
1204년, 동로마 제국이 제4차 십자군 원정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면서 일시적으로 멸망하고 라틴 제국이 수립되었다. 1205년 아드리아노폴리스의 동로마 귀족들이 라틴 제국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면서 불가리아 차르 칼로얀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칼로얀은 곧 지원군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라틴 제국 황제 보두앵 1세가 한발 앞서 아드리아노폴리스를 포위했다.칼로얀은 14,000명 이상의 병력을 소집하여 즉시 아드리아노폴리스로 진격하였고, 1205년 3월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라틴 제국군을 섬멸하고 보두앵 1세를 생포했다. 니키타스 호니아티스는 그가 보두앵을 고문하고 살해했다고 기술했고, 게오르기오스 아크로필리티스는 보두앵의 두개골이 칼로얀의 술잔으로 사용되었다고 기록했다. 반면 보두앵 1세의 동생이자 후임 황제인 앙리는 칼로얀이 생포된 십자군을 정중하게 대우했다는 내용의 서신을 교황에게 보냈다.
칼로얀은 라틴 제국의 영역으로 쳐들어가서 대대적인 약탈을 자행했다. 1205년 5월 하순 세레스를 포위하여 신변 보장을 약속해 항복을 받아냈지만, 약속을 어기고 포로로 잡았다. 이후 베리아의 주민 대부분을 학살했으며, 모글레나에서도 심각한 약탈을 벌였다. 이렇듯 약탈을 심하게 저지르고 주민들을 학살하는 그에게 반감을 품은 필리포폴리스 시민들은 불가리아에 반기를 들기로 결의하고, 알렉시오스 아스피에티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이 소식을 접한 칼로얀은 필리포폴리스를 에워쌌고 6월에 주민들의 신원을 보장하겠다는 조건으로 항복을 받아냈다. 그러나 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그를 비롯한 도시 지도자들을 모조리 처형했다. 니키타스 호니아티스에 따르면, 알렉시오스는 수 시간 동안 거꾸로 매달려있다가 토막난 뒤 협곡에 던져져서 독수리에게 먹혔다고 한다.
게오르기오스 아크로필리티스에 따르면, 칼로얀은 바실리오스 2세가 불가리아 제1제국을 멸망시킨 후 불가록토노스(Boulgaroktonos, 불가르인 학살자)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것을 기억하고, 자신을 로마녹토노스(Romanoktonos, 로마인 학살자)라고 자칭했다고 한다. 하지만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의 그리스인들은 그의 만행에 격분하여 라틴 제국에 충성을 바치기로 했다. 앙리 황제는 테오도로스 브라나스를 파견해 아드리아노폴리스와 디디모티콘을 지키도록 하였다. 1205년 6월 불가리아군이 디디모티콘을 공격했지만 십자군의 역공으로 패배했다. 8월 20일 킬리안이 직접 디디모티콘을 함락하고 주민들을 대량 학살했다. 그 후 아드리아노폴리스를 포위했지만, 앙리 황제의 역공으로 큰 피해를 입고 트라키아에서 철수했다. 그 후 앙리 황제가 10월에 불가리아를 공격하여 20,000명을 포로로 잡았다.
라틴 제국을 굴복시키려면 동맹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그는 니케아 제국 황제 테오도로스 1세와 손을 잡았다. 앙리 황제가 소아시아로 건너가 아드라미티온 근교에서 니케아 제국군을 격파하자, 테오도로스 1세는 불가리아에게 구원을 청했다. 칼로얀은 트라키아를 공격했고, 앙리는 소아시아에서 철수했다. 1207년 4월 아드리아노폴리스를 재차 포위했지만, 수비대의 저항으로 좀처럼 함락되지 않다가 함께 싸우던 쿠만족이 초원으로 돌아가자 어쩔 수없이 포위를 풀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그에게 라틴 제국과 화해하라고 촉구했지만 따르지 않았다.
1207년 7월 테오도로스 1세와 휴전 협약을 맺은 앙리는 테살로니카 왕국의 보니파시오와도 협의했다. 그러나 보니파시오는 테살로니카로 돌아가던 중 모시노폴리스에서 불가리아군의 매복 공격을 받아 살해되었고, 그의 머리는 칼로얀에게 전달되었다. 칼로얀은 즉시 테살로니카를 포위공격했지만, 수비대의 저항으로 쉽사리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러던 1207년 10월, 그는 돌연 사망했다. 게오르기오스 아크로필리티스는 그가 늑막염으로 죽었다고 기술했지만, 옆구리에 창으로 때린 듯한 흔적이 있어서 신의 분노로 인해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밝혔다. 불가리아군은 칼로얀이 죽자 곧바로 철군했다.
13. 이반 아센 2세와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니케아 제국의 전쟁
동로마 제국이 무너진 후, 제국의 후신을 자처하는 이피로스 전제군주국과 니케아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한시바삐 입성하여 라틴 제국을 무너뜨리고 동로마 제국을 부활시키고 싶어했다. 불가리아 제2제국의 차르 이반 아센 2세 역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장악한 뒤 불가리아를 동로마 제국의 뒤를 잇는 정교회의 종주국으로 격상시키고 싶어했다. 3강은 서로 힘을 합쳐서 라틴 제국을 상대하거나 서로를 견제하면서, 상대방보다 먼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얻으려 했다.1221년, 이반 아센 2세는 이피로스 전제군주국과 평화 협약을 체결했고, 테오도로스 콤니노스 두카스의 동생 마누일 두카스와 자신의 딸 마리아를 결혼시켰다. 그러면서도 1228년 라틴 황제 보두앵 2세에게 딸 엘레나를 아내로 삼으라고 제안했다. 이피로스의 군주이자 테살로니키 제국의 황제 테오도로스 두카스 콤니노스는 이 소식을 듣고 불가리아를 경계했다. 그는 자신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노릴 때 불가리아가 뒤통수를 칠 수도 있겠다고 여겼다. 1228년 9월, 그는 라틴 제국과 1년간의 휴전을 합의하고 불가리아를 먼저 손봐주기로 했다.
1229년 말, 테오도로스 콤니노스 두카스는 테살로니키에 8만에 달하는 대군을 집결한 뒤 1230년 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하는 척 했다가, 갑작스럽게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에브로스 계곡을 따라 불가리아로 진격했다. 테오도로스는 승리를 확신하여 처자식까지 거느리고 진군로 주변의 마을들을 약탈하며 천천히 진군했다. 그러나 이반은 당황하지 않고 수천 명의 기병대를 거느리고 반격에 착수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이반 아센 2세는 창끝에 테오도로스의 배신으로 휴지조각이 되어버린 상호방위조약서를 달고 있었다고 한다.
1230년 4월, 이반은 클로코트니차 마을에 주둔하고 있던 테살로니키 제국군을 급습했다.(클로코트니차 전투) 기습을 예상치 못했던 테살로니키 제국군은 맥없이 무너졌고, 테오도로스는 포로로 붙잡혔다. 그는 평화 협약을 어기고 침략한 죄를 물어 테오도로스를 실명시키고 타르노보의 지하 감옥에 가두었다. 그 후 그의 군대는 이피로스로 쳐들어갔다. 마케도니아의 오흐리드, 프릴리프, 세레스, 아드리아노폴리스, 데모티카, 플로브디프 등지가 불가리아에 넘어갔고, 테살리아의 대 블라키아도 함락했으며, 과거 보릴에게 반기를 든 뒤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고 있던 알렉시오스 슬라브의 체피나 성도 공략했다. 테오도로스의 뒤를 이어 테살로니키 제국의 황제가 된 마누일은 도저히 당해낼 수 없다고 여기고 불가리아의 봉신이 되었다.
아센은 정복한 영토를 지키기 위해 수비대를 중요한 요새에 배치하고 부하들에게 세금을 징수하도록 했다. 하지만 과거 칼로얀이 정복지 주민들을 학살하다가 그리스인들의 분노를 샀던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지방 관료들이 계속 지위를 유지하도록 했고 백성들을 가급적 해치지 않았다. 그는 타르노보로 귀환한 뒤 승리를 기념하는 금화를 주조하였고, 성 순교자 성당을 세우고 성당의 기둥 중 하나에 자신을 "불가리아인, 그리스인, 및 다른 종족의 차르"라고 알리는 글귀를 새기게 하였다. 또한 동로마 황제를 모방하여 황제의 휘장을 갖추는 등 장차 발칸 반도 전역의 주인이 되겠다는 야망을 드러냈다.
1231년 라틴 제국의 귀족들이 예루살렘 왕이었던 장 드 브리엔을 보두앵 2세의 섭정으로 선출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반은 니케아 제국과 손을 잡아 라틴 제국을 압박하기로 하고, 세계총대주교 게르마노스 2세에게 사절을 보냈다. 이후 1235년 니케아 제국 황제 요안니스 3세의 후계자 테오도로스 2세와 자신의 딸 엘레나의 결혼을 성사시켰다. 엘레나는 아우구스타 칭호를 받고 요안니스 4세, 이리니 라스카리나, 마리아 라스카리나, 테오도라 라스카리나, 에우도키아 라스카리나를 낳았다. 그 후 니케아 총대주교 게르마노스 2세가 불가리아 총대주교구를 부활시키기로 하면서, 불가리아 교회는 정교회에 복귀했다. 그렇게 니케아 제국과 손을 잡은 뒤, 아센은 라틴 제국에 대한 공세를 개시해 마리차 강 서쪽 지역을 정복했다. 이후 니케아 제국군과 연합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지만, 1235년 말 베네치아 함대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하면서 포위망을 풀 수 밖에 없었다. 이듬해 초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했지만 공략하지 못했다.
1237년 라틴 제국의 섭정을 맡던 장 드 브리엔이 죽자, 그는 난공불락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계속 공격하기보다는 라틴 제국과 손을 잡기로 마음 먹고, 니케아 제국과 동맹을 파기하고 엘레나를 불가리아로 데려와서 보두앵 2세와 결혼시키려 했다. 1237년 여름 라틴군과 연합하여 니케아 제국에 속한 카에노프루리온 요새를 포위 공격했다. 그런데 타르노보에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아내 안나 마리아와 아들 한 명, 불가리아 총대주교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이를 신의 징벌로 생각해 철수하였고, 딸 엘레나도 니케아로 돌려보냈다.
14. 미하일 아센 1세 vs 테오도로스 2세
1241년 5월 또는 6월, 라틴 제국을 멸망시키거나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공작을 지속적으로 펼치던 이반 아센 2세가 붕어했다. 그 후 차르에 오른 칼리만 아센 1세는 7살에 불과했고, 설상가상으로 1242년 몽골 제국군이 불가리아에 침입해 막대한 타격을 입히면서 더 이상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연연할 여유가 없었다. 여기에 소아시아 동부 일대에서 니케아 제국을 견제하던 룸 술탄국은 일 칸국의 침략으로 막심한 피해를 입고 쇠락의 길을 걸었기에, 니케아 제국이 발칸 반도로 진출하는 것을 방해할 요인은 사라졌다. 요안니스 3세는 이러한 이점을 발판삼아 트라키아를 완전히 탈환하고 이피로스 공국에 적극적인 군사 원정을 감행한 끝에 자신에게 복속시켰다.1254년 11월 3일 요안니스 3세가 사망한 뒤 아들 테오도로스 2세가 황위에 올랐다. 이에 불가리아의 차르 미하일 아센 1세가 공세를 감행해 트라키아의 스타니마카, 페루시티사, 크리힘, 체피나 페르페레크 요새를 탈환했다. 테오도로스 2세는 즉시 주력군을 소아시아에서 발칸 반도로 파견하여 불가리아군을 물리치고 로도프 산맥의 요새 대부분을 탈환했다. 1255년 말, 미하일 아센 1세는 헝가리 왕 벨라 4세의 손녀 안나 아르파드와 헝가리의 봉신인 로스티슬라프 미하일로비치 대공의 딸인 안나 로스티슬라브나와 결혼하였고, 앞으로는 헝가리의 군대를 지원받기로 하였다.
1256년 봄, 미하일 아센 1세는 헝가리의 지원에 힘입어 니케아 제국을 공격하여 트라키아를 약탈했지만, 곧 테오도로스에게 격파되었다. 그해 6월 장인 로스티슬라프에게 불가리아와 니케아의 화해를 중재해줄 것을 요청했다. 테오도로스 2세는 미하일이 불가리아가 일전에 잃었던 영토를 더 이상 요구하지 않을 때에야 평화 협약에 서명하겠다고 하였다. 로스티슬라프는 이에 동의하였고, 양국은 마리차 강의 상류를 국경으로 정했다.
귀족들은 이 결정에 격노했고, 칼리만 아센 2세는 터르노보 근교에서 사냥하던 미하일 아센 1세를 습격해 살해하고 황위를 찬탈했다. 그러나 미초 아센과 콘스탄틴 아센 1세가 이에 불복하여 각자의 지배지에서 차르를 칭하면서, 불가리아는 심각한 내란에 휘말렸다. 니케아 제국은 이 때를 틈타 1261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해 동로마 제국을 부활시켰다.
15. 이바일로의 난
1277년, 킵차크 칸국에게 바치는 공물을 마련하고자 신민들을 핍박하는 불가리아 정부에 반감을 품은 이바일로가 봉기했다. 이바일로는 먼저 북동부 불가리아를 약탈하던 몽골군을 격파한 뒤 자신을 진압하려던 콘스탄틴 아센 1세를 격파하고 차르를 칭했다. 불가리아의 대다수 도시와 마을은 이바일로를 지지했고, 콘스탄틴 아센 1세의 아들 미하일 아센 2세는 수도 타르노보만 통제했다.동로마 황제 미하일 8세는 이바일로가 지나치게 강성해지자 동로마 제국에도 큰 위협이 될 거라 판단하고, 지난날 동로마 제국에 망명했던 미초 아센의 아들 이반 아센 3세를 자기 딸 이리니 팔레올로기나와 결혼시킨 뒤 새 차르로 옹립 후 트라키아 대부분을 공략했다. 이리하여 이바일로의 반란군과 이반 아센 3세의 동로마군에게 동시에 압박받게 되자, 교회 통합 정책을 추진한 것에 반감이 있던 데다 도와주진 못할 망정 새 차르를 세운 삼촌에게 분노한 마리아 황후는 자기 남편을 죽인 이바일로와 연합하는 길을 택하고, 협상 끝에 그와 결혼하되 자신의 아들인 미하일 아센 2세를 공동 차르로 삼게 하였다.
미하일 8세는 미하일 글라바스가 이끄는 군대를 파견해 타르노보를 공략하게 했지만, 이바일로는 모조리 격파했다. 이에 킵차크 칸국에 도움을 청했지만, 이바일로는 칸국의 군대까지 다뉴브 강 이북으로 축출했다. 그 사이에 동로마군이 시프카 가도와 흑해 반도에서 불가리아를 협공했지만 격파당했다. 하지만 킵차크 칸국의 주력 부대가 재차 침입하자, 이바일로는 이번엔 쉽게 막아내지 못하고 드러스터르 요새에서 3개월간 포위되었다. 귀족들은 이 때를 틈타 타르노보에서 반란을 일으켜 마리아 황후와 미하일 아센 2세를 폐위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추방하고, 이반 아센 3세를 새 차르로 옹립했다.
그러나 이바일로가 포위망을 돌파하고 킵차크 칸국 군대를 본국으로 돌아가게 한 뒤, 타르노보를 포위했다. 1279년 미하일 8세가 급파한 동로마군 10,000명이 타르노보로 접근했지만, 이바일로는 데비나에서 이들을 괴멸시켰다. 다시 5,000명의 동로마군이 추가로 파견되었지만, 발칸 산맥을 지나가던 중 매복에 걸려 패배했다.
이반 아센 3세는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다고 판단하고, 타르노보에서 도망치면서 왕실의 보물을 모조리 가지고 갔다. 그는 메셈브리아로 간 뒤 배를 타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피신하였다. 하지만 귀족들은 게오르기 테르테르 1세를 새 차르로 추대하고 이바일로에 계속 맞섰고, 거듭된 전쟁에 지칠대로 지친 지지 세력이 등을 돌리면서 세력이 급격히 약화된 이바일로는 1280년 킵차크 칸국으로 망명하였다.
얼마 후, 이반 아센 3세는 미하일 8세의 지시에 따라 킵차크 칸국으로 갔고, 이바일로가 거기에 있다는 걸 알게 되자 도움을 요청했다. 킵차크 칸국의 노가이 칸은 두 차르를 놓고 저울질하다가 미하일 8세에게서 막대한 뇌물을 건네받고 이바일로를 처형했다. 다만 이반 아센 3세 역시 불가리아 차르로 복귀하지 못했고, 동로마 제국으로 돌아와서 소아시아 트로드의 영지에서 여생을 보내다 1303년경 사망했다.
16. 토도르 스베토슬라프의 동로마 전쟁
1300년, 불가리아 차르에 오른 토도르 스베토슬라프는 이반 아센 2세 사후 60년간 혼란스러웠던 불가리아를 재정비하고 킵차크 칸국의 간섭을 물리쳤다. 이후 지난날 불가리아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 트라키아 북부를 빼앗은 동로마 제국을 응징하기로 결의했다. 1304년, 토도르는 공세를 감행해 메셈브리아, 안키알루스, 소조폴, 아흐토폴 등을 공략했다. 안드로니코스 2세의 아들 미하일 9세는 이에 맞서 군대를 일으켜 스카피다 강 인근에서 불가리아군과 마주쳤다. 초기의 전투 후 불가리아군이 후퇴하자, 동로마군은 추격에 나섰지만 강 위의 다리가 돌연 허물어졌다. 그 순간 불가리아군은 반격하였고, 동로마군은 속절 없이 붕괴되었다. 미하일 9세는 가까스로 빠져나왔고, 토도르는 흑해 연안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1304년 8월, 미하일 9세는 전 재산을 털어서 군대를 재조직한 뒤 슬리벤 주변의 일대를 공격하여 황폐화시켰다. 이리하여 흑해 연안을 재확보했지만, 그해 가을에 토도르가 다시 반격하여 흑해 연안을 공략하고, 소조폴을 확실히 정복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안니스 12세 코스마스를 체포했다. 또한 크란의 데스포티스 알디미르는 토도르의 지시에 따라 트라키아 일대를 침공해 약탈을 자행했다.
안드로니코스 2세는 가뜩이나 튀르크에게 밀리는 상황에서 불가리아 마저 강성해지면 제국을 지키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전 차르 스밀레츠의 형제이며 스레드나 고라 산맥 일대에서 독립된 세력을 꾸리고 있던 라도슬라프, 보이실을 후원해 내전을 일으키려 했다. 라도슬라프는 크란의 데스포티스이자 게오르기 테르테르 1세의 형제인 알다미르와 공모하여 토도르를 타도하려 하였다. 그러나 토도르는 이 음모를 간파하고, 1305년 알다미르를 순식간에 제압하고 라도슬라프의 군대를 격파해 라도슬라프 및 13명의 동로마 장성을 붙잡았다. 라도슬라프는 실명형에 처해진 뒤 감옥에 갇혔고, 13명의 동로마 장성은 여전히 동로마 제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던 토도르의 부친 게오르기 테르테르 1세와 교환되었다. 토도르는 돌아온 부친이 정해진 도시에서 호화롭게 지내도록 배려하면서, 그 대가로 정치에 일절 간섭하지 않도록 하였다.
1306년, 알란 병사 16,000명은 동로마 제국의 푸대접에 불만을 품고 토도르에게 불가리아 망명을 허가해 달라고 호소했다. 토도르는 즉시 1,000명의 분견대를 보내 그들의 탈출을 도왔다. 그러나 알란족은 불가리아 영토로 건너가는 과정에서 카탈루냐 용병의 공격을 받아 대패했다. 카탈루냐 용병의 전투 능력에 깊은 감명을 받은 토도르는 그들이 동로마 제국과 심각한 갈등을 벌이고 있는 걸 고려하여 용병대 지도자인 베렝가르 데 로카포르트에게 불가리아로 건너올 것을 제안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여동생이자 카라 쿠위크(Kara Küçük)[2]의 미망인인 엘레나 테르테르를 결혼시키겠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협상은 좌절되었고, 카탈루냐 용병대는 아테네 공국을 정복하여 그곳에 정착하였다.
1306년 말, 토도르는 동로마 제국과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 안드로니코스 2세는 흑해 연안 도시의 상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의도적으로 결정을 연기했다. 이에 토도르는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곡물을 가득 실은 갤리선 2척을 보냈다. 이에 시민들은 황제에게 불가리아와 평화 협약을 맺으라고 압박했다. 결국 1307년 양국의 평화 협약이 맺어졌고, 미하일 9세의 딸 테오도라 팔레올로기나와 토도르의 결혼이 성사되었다. 이리하여 토도르는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얻어낸 영역을 그대로 인정받았다.
17. 안드로니코스 3세의 불가리아 전쟁
1322년, 게오르기 테르테르 2세는 제1차 팔레올로고스 내전이 한창이던 동로마 제국의 혼란을 틈타 동로마 제국으로 쳐들어갔고, 1322년 7월 플로브디프 요새를 공략한 뒤 2,000명의 경무장 보병과 1,000명의 기병으로 구성된 불가리아 수비대를 두었다. 그해 8월, 에디르네 요새를 공략하였지만 안드로니코스 3세의 반격으로 패배하여 본국으로 귀환했다. 1322년 9월, 안드로니코스 3세는 트라키아 북부의 불가리아 영역에 쳐들어가서 약탈을 자행한 후 귀환했다.1323년 봄, 게오르기 테르테르 2세가 돌연 사망했다. 비딘의 데스포티스였던 시슈만이 지지자들을 끌어모아 차르로 선임된 뒤 미하일 아센 3세로 개명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 전 불가리아 차르 스밀레츠의 형제이자 스레드나 고라 산맥의 데스포티스 보이실은 크란을 공략하여 코프시스와 4개의 다른 요새를 정복했다. 또한 안드로니코스 3세는 얌볼, 라르데아, 크테니아, 루소카스토르, 안키알루스, 소조폴, 아가토폴 등지를 공략했다. 이리하여 불가리아는 안드로니코스 3세가 공략하지 못한 플로브디프를 제외한 트라키아의 모든 영토를 빼앗겼다.
미하일 아센 3세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남하했다. 플로브디프가 동로마군의 공세를 견디는 사이, 상실한 불가리아 북동부를 탈환하였다. 이후 불가리아군이 플로브디프로 접근하자, 안드로니코스 3세는 포위를 풀고 철수하기로 했다. 하지만 플로브디프 수비대 사령관 이반 루시나가 전투가 끝났다고 여기고 주군에게 달려간 사이, 동로마군 별동대가 재차 쳐들어가서 별다른 전투 없이 플로브디프를 점령했다. 그 후 미하일 아센 3세는 보이실과 1년간 전쟁을 벌였고, 1324년 크란에서 축출했다.
1324년 트라키아를 약탈하고 있던 킵차크 칸국의 통치자 우즈베크 칸의 도움을 받아 동로마 제국으로 쳐들어가 비라와 트라노폴에 당도했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병력이 부족해 감히 전투에 나서지 못하고, 대신 미하일 아센 3세에게 전령을 보내 두 사람이 결투를 벌여 승부를 가르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차르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펜치로 뜨겁게 달궈진 쇠를 그의 손 대신 사용하는 대장장이는 멍청이다."
그 후 미하일 아센 3세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이며 안드로니코스 3세와 갈등을 벌이고 있던 안드로니코스 2세와 손을 잡고, 안나 네다를 수도원으로 추방한 뒤 안드로니코스 3세의 누이이자 토도르 스베토슬라프의 미망인인 테오도라 팔레올로기나와 결혼했다. 또한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문장인 날개를 펼친 쌍두 독수리를 채택하였으며, 베나르를 비딘의 데스포티스로 임명하였다. 이리하여 불가리아는 동로마 제국과 우호 관계를 맺었지만, 세르비아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한편 안드로니코스 3세는 할아버지의 결정에 불복하여 전쟁을 벌이려 했지만, 1324년 8월 불가리아의 사절이 찾아와 자신의 누이와 차르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전해듣자 평화 협약을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양국의 전쟁은 종식되었고, 양국의 국경선은 플로브디프-체르노멘-소조폴로 정해졌다.
1326년 안드로니코스 2세와 안드로니코스 3세간의 불화가 깊어졌다. 할아버지 안드로니코스 2세는 세르비아의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안드로니코스 3세는 미하일 아센 3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1327년 5월 13일, 체르노멘 요새 근처에서 미하일과 안드로니코스 3세가 만나 안드로니코스 2세와 세르비아에 대한 공동 군사 행동을 규정하는 비밀 협정을 체결했다. 이리하여 재개된 내전에서, 안드로니코스 2세의 위세는 크게 꺾였고, 1328년경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주변 일대만 통치했다. 스테판 우로슈 3세 데찬스키에게 버림받자, 안드로니코스 2세는 미하일에게 도움을 청했다. 미하일은 동로마 제국의 내전이 지속되길 바랬기에 이에 동의했다. 그는 이반 루시나가 이끄는 기병 3천 명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파견하여 안드로니코스 2세를 돕게 하였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즉각 선발대를 이끌고 불가리아 기병대에게 다가갔다. 그는 불가리아 기병대 지휘관에게 철군 명령을 내리라면서, 불과 1년 전에 차르와 맺은 동맹을 정면으로 위반할 셈이냐고 따졌다. 그러면서 안드로니코스 2세에게 서신을 보내 저 불가리아 기병대를 콘스탄티노폴리스 내부로 들인다면 불가리아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접수할 거라고 경고했다. 안드로니코스 2세는 두려움에 떨며 기병대의 입성을 거부하였고, 결국 이반 루시나는 기병대를 이끌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얼마 후 안드로니코스 2세는 수도에 입성한 손자에게 폐위되었고, 제1차 팔레올로고스 내전이 종결되었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이전에 맺었던 협의대로 동부 트라키아를 불가리아에 넘기기를 거부하였고, 미하일은 안드로니코스 3세와 전쟁을 벌이기로 했다.
킵차크 칸국의 타타르 용병대를 고용한 미하일은 에디르네와 디모티카를 약탈했다. 이에 안드로니코스 3세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불가리아의 디암볼 요새를 공략하고 파괴했다. 1328년 11월, 미하일은 다시 침략을 개시해 불케론을 정복하였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디모티카 인근에 진을 쳤다. 이후 양군은 한달간 서로 공격하지 않고 서로를 지켜봤다. 두 군주는 체르노멘 협약을 위반했다는 비난을 주고받다가, 미하일이 불케론을 돌려주는 대가로 금전적 보상을 받는 데 합의한 뒤 양측 모두 철군하였다.
1329년 5월 평화 협약이 공식적으로 체결된 뒤, 미하일은 세르비아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당시 세르비아 왕국은 불가리아와 동로마 제국간의 갈등을 이용하여 불가리아 영역 일부를 점령했다. 미하일은 갈수록 강성해지는 세르비아를 지금 손봐주지 않으면 언젠가 불가리아에 화가 되리라 여기고, 안드로니코스 3세와 손을 잡기로 했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세르비아가 빼앗아간 마케도니아 북부를 탈환하길 원했고, 미하일은 불가리아의 북서부와 남서부를 탈환하길 원했다. 이리하여 1330년 초여름, 동로마 제국군이 마케도니아 북부를 침공했다. 그러나 안드로니코스 3세는 세르비아의 영토 깊숙이 진군하지 않았고, 국경 지대의 몇몇 요새를 장악하는 데 만족했다. 그는 불가리아가 행동에 나서기 전에는 위험을 무릅쓸 생각이 없었다.
한편 미하일은 1330년 7월 19일 수도 터르노보에서 출진하여 비딘으로 진격해 타타르와 왈라키아 용병들과 합세한 뒤, 남쪽으로 진군하여 세르비아의 국경 지대에 위치한 젬린 마을에 이르렀다. 그러나 뒤이은 벨버즈드 전투에서 세르비아 왕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에게 참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전투 소식을 접하자 즉시 세르비아에 대한 전쟁을 중단하기로 하고, 점령지에 일부 병력만 남겨두고 귀환했다. 이후 그는 목표를 불가리아로 변경하고, 흑해의 불가리아 도시와 마을들을 공격해 안키알루스, 메셈브리아, 아에토스, 크테니아, 루소카스트로, 디암폴리스 등을 공략했다.
동로마 제국의 이같은 침략에도 별다른 대응하지 못하는 차르 이반 스테판에 불만을 품은 불가리아 귀족들은 1331년 3월 이반 알렉산더르를 내세워 정변을 일으켰다. 이반 알렉산더르는 얼마 후 역시 정변을 일으켜 세르비아 왕위를 얻은 스테판 두샨에게 여동생 엘레나를 시집보내면서 세르비아와 동맹을 맺은 뒤, 세르비아와 함께 공동으로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여 이전에 빼앗겼던 트라키아 북동부를 되찾고 아드리아노폴리스를 포위했다.
얼마 후 미하일 아센 3세의 형제이며 비딘의 데스포티스인 베나르가 이반 스테판의 복위를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 알렉산더르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병력을 모집했지만, 1332년 여름 동로마 제국 황제 안드로니코스 3세가 트라키아로 쳐들어오자, 우선 동로마군부터 막기로 했다. 그는 소규모 군대를 이끌고 신속하게 남하하여 루소카스트로에서 동로마군과 마주쳤다. 그는 강화 협상을 하려는 인상을 내비쳐 동로마군을 방심케 한 뒤, 타타르 기병을 앞세워 기습을 가해 적을 루소카스트로 요새로 내몰고 이 지역의 여러 도시를 복종시켰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이반 알렉산더르의 우위를 인정하고, 딸 마리아와 알렉산더르의 장남 미하일 아센 4세를 약혼시키기로 했다. 이리하여 동로마 제국과 불가리아의 전쟁은 중단되었다.
18. 제2, 3차 팔레올로고스 내전
1341년 안드로니코스 3세가 사망한 후 제2차 팔레올로고스 내전이 발발했다. 네전을 일으킨 요안니스 6세가 세르비아의 지원을 받자, 사보이아의 안나 황후는 이반 알렉산더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알렉산더르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동로마 제국 영내에 들어갔다. 그의 군대는 마리차 강을 따라 행군하며 약탈하며 요안니스 6세를 압박했다. 그러나 요안니스 6세가 끌어들인 우무르의 투르크군 분견대의 급습을 받고 대패하였고, 알렉산더르는 타르노보로 철수한 뒤 1342년 요안니스 6세와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이후 요안니스 6세는 테살로니키 포위에 들어갔지만 쉽사리 함락하지 못하자 스테판 두샨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는 사이 사보이아의 안나의 지지자인 알렉시오스 아포카브코스는 디모티카 요새를 포위했다. 사보이아의 안나는 알렉산더르에게 디모티카 요새 포위전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알렉산더르는 이 요청에 응해 디모티카 요새 성문 앞에 도착했지만, 요새를 자기 것으로 하는 걸 인정하기 전에는 공성전에 도움을 주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러던 1343년 요안니스 6세의 구원 요청에 응한 우무르 베이의 투르크군 29,000명이 380척의 배와 함께 접근해오자, 알렉산더르는 타르노보로 철수했다.
1344년 사보이아의 안나는 플로브디프와 로도피 산맥의 주요 요새 8개를 불가리아로 넘길 테니 요안니스 6세를 공격해달라고 호소했다. 알렉산더르는 이에 응했지만, 우무르가 철수하기 전에는 군대를 파견할 수 없다고 하였다. 한편 로도피 산맥의 산악인 지원 부대의 지도자 보비드 맘칠(Voivode Momchil)은 알렉산더르의 의뢰에 응해 페르페리콘 요새(오늘날 카르즈할리 인근)를 공략하고 불가리아 이콘을 이곳에 설치했다. 이렇듯 불가리아의 확장 야욕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자, 요안니스 6세는 1345년 초 오스만 베이국의 아미르 오르한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1345년 7월 7일, 투르크군과 요안니스 6세의 동로마군은 부루그라드 요새 인근에서 맘칠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이에 알렉산더르는 확장 정책을 잠정적으로 중단했다.
1352년, 요안니스 5세와 요안니스 6세간의 갈등이 깊어지면서 제3차 팔레올로고스 내전이 발발했다. 그해 여름, 요안니스 5세는 군대를 이끌고 처남인 마세오스의 영역을 침범해 아드리아노플을 포위했다. 마세오스가 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요안니스 6세는 오르한 1세로부터 상당 규모의 튀르크 병력을 빌려서 아드리아노플로 파견했다. 이에 요안니스 5세는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에 손을 빌렸고, 스테판 두샨과 알렉산더르는 원군을 보냈다. 양측은 마리차 강에서 격돌했고, 튀르크군이 세르비아와 불가리아 연합군을 격파했다. 이후 튀르크군은 약탈 허가를 얻고 인근의 소도시와 촌락들을 모조리 약탈했다. 이로 인해 요안니스 6세는 이겨놓고도 인기가 폭락하는 상황에 놓였고, 결국 1354년 민심을 등에 업은 요안니스 5세에게 밀려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