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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신공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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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원인3. 문화권별 사례
3.1. 기원3.2. 고대 지중해 문명3.3. 유럽3.4. 아메리카
3.4.1. 아즈텍 제국
3.5. 중국3.6. 일본3.7. 한국3.8. 인도 아대륙3.9. 종교
3.9.1. 유대교, 기독교3.9.2. 불교
4. 창작물
4.1. 예시

1. 개요

인신공양(人身供養, human sacrifice)은 살아있는 사람을 의식용 제물로 바치는 것이다. 인신공희(人身供犧)라고도 한다. 현대 사회에선 비인격적 행위로 살인죄에 해당된다.

중국 상나라나 지중해 페니키아 등 고대에는 유라시아에서도 국가 주도로 일어나는 경우가 꽤 많았다. 가장 가까운 역사에서 체급이 큰 국가가 국가 단위로 인신공양을 실시한 경우로는 잉카 제국, 아즈텍 제국 등 15세기 중남미 국가의 사례가 있다. 이후 점점 사라져서 거의 다른 형태의 종교 의식으로 바뀌긴 했지만 어느 지역에서든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고, 전쟁이나 재난 등 여러 이유로 중세까지 국소적으로 꾸준히 발생했다. 현대에도 제3세계 오지 등 제대로 된 국가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는 사적으로 행하는 인신공양이 존재한다.

2. 원인

인신공양이 일어나는 이유는 원시 종교에서 제사를 지낼 때 귀한 제물을 바칠수록 신이 기뻐하고 더 큰 은혜를 내린다는 인식이 보편적이었기 때문이다.[1] 그리고 가장 귀한 가치를 지닌 것은 고대나 지금이나 인간이었기 때문에, 통념과 달리, 종교 제사에서 제물을 바치는 건 곡물이나 동물에서 인간을 바친 게 아니라 반대로 인간에서 동물로, 동물에서 곡물로 변한 것이다. 때문에 인신공양이 동물공양으로 대체되기 위해서는 대형 가축의 존재와 더불어, 일개 가축이 인간 제물을 대체할 가치가 있을 수 있는지를 정당화하는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종교 교리가 필수적이었다.

과거에는 기근, 재해, 전쟁, 질병 등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재난에 의한 죽음이 즐비했고, 따라서 인간은 이에 대한 공포를 종교에 의존해서 극복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런 재난들을 피하기 위해 신의 힘을 빌리고자 했으며, 때문에 인간이 바칠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가치있는 것, 즉 다른 인간을 바치는 인신공양 문화 자체는 어느 지역이든 인류 역사적으로 꾸준히 실행되어 왔다. 실제로도 대부분의 문명에서 행해지는 종교 의식은 크게 인신공양에서 동물공양을 거쳐 최종적으로는 기도 및 제사로 변화했다. 단적인 사례로 구약 성경에서 이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치려고 했다가 신의 명령으로 제물을 새끼양으로 바꿨다는 유명한 일화는, 고대 근동 종교에는 인신공양이 보편적이었고, 이것이 히브리 민족에서는 아브라함계 종교에 의해 동물로 대체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증거로 여겨진다. 또 이 전통을 계승한 유대교의 동물 제사는 이후 그리스도교에서 예수가 십자가에서 희생해 인류의 죄를 대속했다는 교리에 의해 보다 추상화된 기도 의식의 형태로 변화된다.

고대 사회는 신분제였기 때문에 당연히 제물로 쓰이는 인간도 등급이 있었다. 전쟁에서 사로잡은 포로노예를 바치는 경우가 많았지만 상기한대로 결국 인신공양은 가치가 있는 것을 바치는 것이 가장 의미가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귀족이나 등 매우 높은 신분의 사람이 제물이 되거나 제물을 자처하는 사례도 있다.

인신공양은 미디어에서 표현되는 것처럼 무조건 단순무식하게 진행되는 야만 문화일 것이라는 편견과 달리, 사실 매우 제도적이고 체계화된 의미에서 이루어지기도 했다. 가령 후술하겠지만 아즈텍에서는 전쟁에 지속적으로 투입되는 각국 전사계급이 포로로 잡히더라도 그들의 종교적 특권을 보장하는 한편, 신들이 화신의 형태로 지상에 정기적으로 방문한다는 믿음을 백성들에게 줌으로써 기근과 재해에 대한 공포를 불식시키는 노릇을 했다. 또 정치공학적인 계산으로 이루어지기도 했는데, 고대 유라시아 문명에 흔했던 순장은 자식의 권력을 찬탈할 만한 신하를 향해 진정한 충신은 주군의 저승길까지 모신다는 명분으로 저승으로 함께 끌고 가는 '너 죽고 나 죽자' 식의 정적 제거 의미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반대로, 위기상황에서 신앙의 힘으로 어떤 사건을 수습해보겠답시고 비체계적이고 비효율적인 인신공양을 저지르는 사례들도 역사상에 있었다. 페니키아 지역의 인신공양 등이 그 예시다.

3. 문화권별 사례

3.1. 기원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인신공양의 흔적은 현대 튀르키예의 자외뉘 유적에서 발견된 것으로, 기원전 6천 년대의 흔적이라고 추정한다.

3.2. 고대 지중해 문명

메소포타미아팔레스타인 지역은 바알, 다곤, 그모스, 몰렉을 숭배하면서 인신공양이 이루어졌다. 몰렉은 페니키아인들이 믿는 유력한 신령이었는데 폭풍과 풍요의 신이던 바알-함몬과 동일시되기도 했다.

지중해의 고대 역사가들의 기록에 따르면 페니키아인들이 몰렉에게 제사를 지내는 방식은 매우 무시무시하여 후세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거대하게 청동으로 몰렉 신상을 만들었는데 신상은 (마치 물건을 받을 때처럼) 거대한 손바닥을 편 자세를 취했다. 신상의 몸체 가운데엔 거대한 아궁이가 있는데 아궁이에 불을 지펴 몰렉 신상을 빨갛게 달구어 놓고 페니키아 시민들의 맏아들을 갓난아기일 때 산 채로 빨갛게 달궈진 몰렉 신상의 손 위에 올려놓는다. 이때 아기는 타 죽으면서 굴러 떨어져 아궁이로 들어가고 아기의 비명과 부모의 울부짖는 소리를 지우기 위해 엄청나게 큰 북을 두드렸다.

이러한 페니키아인들의 풍습은 그들이 세운 지중해 전역의 도시들에도 존속되어 카르타고 시민들은 전투에서 대패하자 귀족 아기 300명을 몰렉에게 제물로 바치기도 했다. 이들은 처음에는 평민노예 아기들을 추려서 300명을 바쳤지만 그래도 싸움이 잘 풀리지 않자 귀족들의 아기를 바쳐야 효험을 본다는 주장에 귀족 아기 300명을 바친 것이다. 토펫 문서도 참조.

페니키아인들의 이러한 풍습은 로마인들이 3차 포에니 전쟁 이후 카르타고의 멸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언급하는 소재이기도 하였다. 즉, '이런 악독한 민족은 멸망당하고 노예로 팔리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이다.

3.3. 유럽

카르타고의 인신공양 풍습을 비판하던 로마인들도 인신공양을 한 적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기원전 216년 칸나이 전투에서 패하자 로마인들은 공황에 빠져 신이 내린 징계라고 생각해 죄를 지었다고 판단한 여사제를 생매장하고 우량아를 아드리아 바다 한가운데에 산 채로 던져넣었다. 또한 킴브리 전쟁 당시 로마군이 게르만족에게 연전연패하였을 때에도 급하게 인신 공양을 실시했다.

이외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죄수를 검투 경기에서 맹수 먹이로 던져준 것은 사형의 일종으로 연쇄살인범, 유괴살인범 등 중범죄자나 도적단의 수괴, 기독교도 같은 사상범에게 내려지곤 했다. 로마 이전 에트루리아의 검투 경기는 일종의 제사였고 로마의 검투사 경기도 초기에는 전쟁 포로들을 데리고 벌이는 희생제적 성격이 있었다. 고위층의 주관 하에 추모 경기로도 자주 벌여졌으며 스파르타쿠스반란을 일으키며 로마군 포로들로 전사자들에 대한 추모 경기를 벌여 복수하기도 했다.

카이사르갈리아 전기 제6권의 16절에 켈트족이 나무를 엮어 만든 거대한 사람 모양 우리에 사람과 가축 등을 집어넣고 불에 태웠다는 내용이 언급된다.[2] 저 기록을 기반으로 1973년 위커맨이란 영화가 개봉했다. 근세에 이르러 고대 켈트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과 동시에 당시의 인신공양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해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상상도가 나오기에 이르렀다. 카이사르와 비슷한 시기인 기원전 1세기에 그리스 지리학자 스트라본도 켈트족의 인신공양 풍습을 저서에서 짤막하게 언급했다.

그러다가 2세기 초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처음으로 로마 제국 전역에 인신공양 금지령을 내린 뒤 지중해 지역을 중심으로 로마 제국 영토에서 인신공양 문화는 완전히 소멸하였으며 이후 로마 제국이 기독교화되면서 인신공양은 자연스럽게 최대의 금기로 자리잡았다.

게르만족에서도 인신공양을 행한 기록이 있다.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아르미니우스게르만족 전사들에게 습격당해 궤멸당한 바루스 예하 로마군 3개 군단의 포로들 가운데 장교급 인물들의 해골들은 예외 없이 나무에 꽂혀 있었는데 이들은 게르만족의 부족들에게 붙잡힌 뒤 산 채로 나무에 꽂혔다는 목격담을 전하였다. 9세기 무렵 프랑스를 침략한 노르드인 바이킹들도 붙잡은 포로들을 모두 나무에 매달아 죽였는데 이는 전쟁신 오딘에게 바치고자 일부러 인신공양을 한 흔적이었다.

슬라브족, 발트족도 기독교가 전래될 때까지 성숙한 처녀나 청년들을 대지나 풍요의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인신공양 풍습을 유지했다. 이를 토대로 제작된 발레가 봄의 제전이다.

유럽에서 과거에 실제로 인신공양을 하였다는 구전설화들 중에는 과거 이민족에게 당한 납치나 약탈 등을 비유하거나 은유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폴란드의 도시 크라쿠프의 건립과 관련하여 '바벨의 용' 전설이 있다. 옛날 그 땅을 그락(Grakch)이란 임금이 통치하였는데 그락 시절 바벨 언덕 아래 동굴에는 무시무시한 용(Smok Wawelski)이 살았다. 이 용은 매일 기어나와 집을 파괴하고 가축들을 잡아먹었는데 이 용을 달래기 위해 왕은 어쩔 수 없이 용이 좋아하던 처녀들을 용에게 제물로 바쳤으먄서도 전국의 용사들에게 용을 물리치는 자에게 큰 상을 주고 공주와 결혼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다. 많은 용사들이 용을 상대했으나 안타깝게도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스쿠바(Skuba)라는 신발 제작공이 임금을 찾아와 양가죽과 유황을 부탁했다. 스쿠바는 유황을 양가죽에 넣고 용의 동굴 앞에 두었다. 용이 동굴에서 나와 이것을 잡아먹자 엄청난 갈증과 고통이 엄습했다. 그래서 동굴 앞에 있던 강물을 허겁지겁 퍼마셨는데 너무 많이 마신 나머지 그만 배가 터져 죽었다고 한다. 왕은 약속대로 신발장이에게 공주와 결혼을 허락했고, 그 뒤 스쿠바는 장인의 이름을 따 크라쿠프라는 도시를 세웠다고 한다.[3] 이 이야기가 암시하듯 초기에 이 마을은 평화롭지만은 않았는데 현재의 해석으론 이 이야기의 용은 6세기 후반 이 일대를 침입했던 아바르 칸국을 상징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4]

참고로 이와 비슷한 처녀를 용, 뱀, 지네 등에게 바치는 구전 전승은 동아시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등에도 흔하다. 대개 유럽이나 동아시아의 인신공양 설화는 주인공이 괴수를 무찌르면서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과 다르게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는 소닝케족의 인신공양 설화에서 보듯 비극적 결말로 이어지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한다.

소설이기는 하지만 독일의 슈토름이 쓴 <백마의 기수>에는 사람 대신 강아지를 제방에 묻으려다 주인공의 제지로 구해지지만 인부들은 영 못마땅해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제방 같은 걸 세우려면 인신공양은 아니더라도 생명 하나 정도는 바쳐야 한다는 풍습의 반영으로 읽히기도 한다.

3.4. 아메리카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근세까지 인신공양 풍습이 존재했다. 물론 아메리카 대륙은 현생 인류가 정착한 시기와 고대국가 수준의 사회 체계가 형성된 것이 유라시아 대륙보다 훨씬 늦었음은 염두에 둬야 한다.

특히 메소아메리카에서 인신공양은 보편적인 풍습이었다. 이런 경향은 중남미 문명을 한 번 리셋시킨 거대한 가뭄 이후 급격히 늘어났는데 가뭄으로 말미암은 기근의 공포가 인신공양을 지속하게 한 요인이었던 듯하다.

아메리카 대륙에선 대형 가축이 전무했다. 따라서 재해에 대비하여 신에게 바칠 만하다고 여겨질 게 인간밖에 없었기에 인신공양이 15세기까지 지속되었다. 낙타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1만여 년 전에 멸종했고 가축이라고 해봐 야 토끼, 칠면조, 정도였으며 남미 한정으로는 라마알파카가 전부였다. 단적으로 라마와 알파카라는 대형 초식동물을 가축화하는 데 성공한 잉카 제국은 근세까지의 아메리카 대륙 국가들 중에선 인신공양의 규모가 작은 편이었다.

잉카 제국은 선택된 대상을 절벽에서 떨어뜨려서 에게 바치는 방식을 사용했다. 어린이를 제물로 바치는 카파코챠(capacocha)라는 의식도 있었는데 요한 라인하르트(Johan Reinhard) 등 학자들이 미라를 연구하여 여러 가지가 알려졌다. 1년에 2명 정도씩 성스럽다고 여겨진 산꼭대기 제단에서 어린이들을 교살하거나 둔기로 머리를 강타해 죽이거나 잔뜩 취하게 한 후 산 채로 파묻는 방법으로 살해했으며 취하게 한 후에 산꼭대기 제단에 그대로 방치하여 얼어죽게 하기도 했다.

1999년 아르헨티나 룰라이랄코 화산에서는 잉카 제국 시기 제물이 된 걸로 추정되는 어린이의 미라 3구가 발견되어 연구가 크게 진척되었다. 해당 미라들을 연구한 결과, 미라들에게 다량의 알코올, 마약 성분과 평상시에는 영양 상태가 그리 좋지 못했지만 사망하기 얼마 전부터 상류층들이 먹는 것과 같은 식사를 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따라서 하층민 아이들을 제물로 선택하여 한동안 매우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게 해 주었으며 공양의 순간에는 취하게 만들었다고 추측된다. 미라들의 머리카락이 짧았는데 잉카에는 신분이 바뀌면 머리카락을 자르는 관행이 있었다. 아마도 이들은 제물로 선택된 뒤 신분이 상승한 것 같다.

미라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15세 가량 소녀의 미라에서는 다른 미라들에 비해 매우 많은 알코올과 마약 성분이 발견되었는데 죽기 직전이 아니라 무려 1년쯤 전부터 복용한 것이었다. 다른 제물들은 어려서 몰랐지만 이 소녀는 자신에게 닥칠 일을 알았고 소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유독 많은 알코올과 마약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한다.

마야 문명에서는 국왕이 자신의 위엄을 높이고 신의 존엄을 드러내고자 스스로 출혈을 하거나 혀에 구멍을 뚫는 식으로 자해했다고 한다.[5] 건장한 전사들을 뽑아 3kg 남짓한 무거운 고무공을 허리와 허벅지로 쳐 내는 마야 공놀이(pitz)를 하고 그 선수를 제물로 바치곤 했다. 인터넷에서는 패자를 제물로 바친다거나 승자를 제물로 바친다고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승패에 관련 없이 제물로 찍힌 쪽을 바쳤다고 한다. 마야 유적지에는 마야 공놀이를 하는 장소와 함께 이들을 인신공양한 연못(Cenote)을 발견할 수 있다. 마야의 공놀이에서 공양된 사람의 숫자는 제물의 머리로 벽을 쌓을 정도였다.[6] 이런 사혈 의식은 신대륙 다른 지역과 고대 문명에서 흔한 형태의 의식이었다.

북아메리카의 아메리카 원주민들 사이에선 중남미의 마야나 아즈텍, 잉카에 비해 인신공양은 적었지만 미시시피 문화권 대도시에는 제례 목적의 희생 및 순장 풍습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평원에 살았던 포니족[7] 등 일부 부족에게 풍요를 기원하는 인신공양 의식이 있었다고 한다.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방영한 인신공양 관련 다큐에 따르면 흙을 쌓아 만든 거대한 산 모양의 제단에서 행했다. 제물로 선택된 인간은 말뚝에 묶인 채 화살에 맞아 죽었는데 이때 흘러내린 피가 땅을 기름지게 만든다고 믿었기 때문에 희생자를 곧바로 처형하지 않고 몸 곳곳에 화살을 쏘아 고슴도치로 만들며 천천히 진행하다가 마지막에 급소를 맞혔다. 이들이 인신공양을 행하던 제단은 아직까지 남아 있다.

사실 토목공사판엔 인신공양류 루머도 제법 있는 편인데, 기술이 발전하고 노동자 안전에 대한 관심이 훨씬 커져 이전 시대에 비해 사망자가 크게 줄어든 현대에도 토목 판에는 간간히 희생자가 나오고 다양한 루머와 미신들이 존재하는 마당에 근대 이전엔 더 심했을 것이라는 추정은 가능하다. 이게 여러 억측과 겹쳐서[8] 이런저런 인신공양류 루머로 발전한 것 아니냔 말도 있다.

3.4.1. 아즈텍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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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의 마야와 아즈텍, 잉카 문명 일대에서는 인신공양이 보편적인 관습이었다. 아즈텍 제국은 15세기까지 대규모 인신공양 제도가 남아있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아즈텍의 인신공양은 대체로 물질계에 신화를 재현하는 의식으로 여겨졌다. 이는 일종의 '죽음이란 요소가 포함된 연극'과도 같은 것으로, 태양의 수명을 늘리기 위해 신들이 자신의 또는 서로의 심장을 꺼내 그 기운 '토날리'를 바쳤다는 전설들의 내용을 인간이 재현함으로써 인간 역시 신화에 참여하는 주체로 여겨졌다. 때문에 인신공양에 참여하는 모든 인간은 신의 아바타로 생각되었다. 특히 케찰코아틀, 테스카틀리포카, 틀랄록, 위칠로포치틀리 등의 '최고신의 화신', 즉 '현인신'을 지정하고, 그를 지상을 방문한 신으로서 왕 이상으로 극진히 대접하여 축일 또는 일정한 나이대가 될 때 그의 심장을 바침으로써 태양의 수명을 늘리는 제의가 아즈텍 인신공양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으로 여겨졌다. 때문에 인신공양은 제물을 무조건 소나 돼지 등의 가축으로 취급할 것이라는 통념과 정반대로, 메소아메리카에서 제물은 죽을 때까지 신과 같은 대우와 예우를 받아야 한다는 순교자로 취급되었다. 이는 설령 제물이 노예, 포로, 하층민일지라도 동일하게 적용되었으며 적국의 전사들 역시 이 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인신공양은 굉장히 난해하고 까다로운 절차로 전개되었으며 매우 많은 자원을 필요로 했다. 길게는 십년 이상에 걸쳐 제물이 될 사람들을 최고위 계급으로 대우하며 먹여 살려야 할 만큼 많은 자원[9], 또 이를 모든 백성에게 납득시킬 수 있을 복잡한 종교 교리와 제물의 지상 도래를 환영하는 몇 차례에 걸친 성대한 축제 및 그 명예를 공인하는 엄숙한 의식이 뒷받침될 필요가 있는 고도의 정치종교적 관습이었으며, 미디어에서 표현되는 것처럼 야매로 진행될 수 있는 야만 문화라고 보기 어렵다. 이런 의식은 신들이 화신의 형태로 지상에 정기적으로 방문한다는 믿음을 백성들에게 줌으로써 기근과 재해에 대한 공포를 불식시키는 역할을 했다.

흔히 인신공양 제물을 수급하기 위해 주변국을 인육목장으로 취급했다는 낭설이 퍼져 있고 '꽃전쟁'이 그 증거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상 아즈텍 제국은 주변국가는 물론 자국 내 복속된 정복지의 자치권까지 허용해야 할 정도로 이들을 모두 관리할 힘이 없었다. 틀락스칼라를 포위하고 공격하려고 한 사례는 많지만 단 한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스포츠처럼 동수를 보내서 싸우는 꽃전쟁은 실존했지만 인구가 많고 상무적인 아즈텍 제국전사들의 무위를 뽐내는 의도와 더불어 같은 수의 훌륭한 전사들을 줄여나가면 보다 인구가 많은 아즈텍이 유리했고, 상대 측에서도 아즈텍 전사 포로를 사로잡아 인신공양과 내치에 활용하거나 몸값을 뜯어낼 수 있었기 때문에 합의 하에 그런 관행을 지속한 것이다. 물론 꽃전쟁의 포로들도 상기했듯이 죽기 전까지 해당 국가의 전사로서 대접과 예우를 받는 순교자로 취급되었다. 이런 까닭에 꽃전쟁은 현실적인 이유에서 세력 균형 유지와 영향력 과시가 목적이었긴 하지만, 역시 나와틀인들에게는 종교적 의례로서의 의미가 강했다. 특히 승리하든 패배해서 인신공양이 되든, 북유럽 신화로 치면 발할라에 해당하는 '토나티우 이찬'으로 가기 위한, 신들의 전쟁을 재현하는 의식으로 받아들여졌다. 또 모든 국가에서 이렇게 전사하거나 인신공양되서 태양신이 사는 낙원에 들어가는 것을 전사계급만의 특권으로 여겼다. 이런 신앙은 전쟁에 지속적으로 투입되는 각국의 전사계급이 포로로 잡히더라도 이들의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특권을 보장하는 역할을 했다. 이런 식으로 전투를 일종의 종교 의례로서 신성시하는 의식은 바이킹스키타이 등 방랑 생활을 했던 전투민족들에게 흔했던 종교 교리이기도 하다.[10]

따라서 한국 인터넷에 알려진 대로 인신공양을 위해 주변국과 백성을 가축 취급했다는 설은 사실이 아니며, 그 증거로 알려진 우에이 촘판틀리 등의 자료들도 콩키스타도르가 자신들의 전적을 부풀리고 영웅화하기 위한 과장과 왜곡이 많이 가미되었다. 사실 촘판틀리 역시 적국에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존재한 유물이 아니라 순교자의 유해(성해)를 전시하는 의미로 그 명예를 기리는 유적이었으며 주변국 역시 공유하던 형태의 유적이었다. 또 인신공양한 후에 소량의 인육을 먹었다는 설 역시 진위여부에 대해서 현대에 논란이 많으며, 2020년대 이후 아예 종교제의에도 식인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설이 부상하고 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인신공양과 식인은 구별해서 볼 요소라는 것이다. 인신공양과 식인이 동시에 이루어진 사례도 있으나, 인신공양은 존재해도 식인이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도 흔했다. 또 다른 문명까지 살펴보면 인신공양은 없었어도 고인을 추모하는 차원에서 시체의 고기를 먹는 풍습도 존재한다. 또 더 근본적으로 식인 행위가 관측되었더라도 현대 역사학과 문화인류학의 대전제는 식인 자체에 주목해서 그 도덕성을 따지는 게 아니라, 그것이 이루어진 맥락이 기근 시기에서 생존을 위한 것인지, 종교적 의례로서 제물의 명예를 존중하며 치루어진 것인지, 원수를 향한 증오와 복수의 의미에서 치루어진 것인지도 분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최근 학계에서는 메소아메리카 문명에서 '위대하게 여겨지는 인물 또는 신격화된 존재의 신체에서 소량의 인육을 절개해 사제가 섭취하는, 신과의 동화 의식으로서의 절차화된 식인 제의'가 존재했을 여지가 있을 뿐, 콩키스타도르가 주장한 식량 수급 관점에서의 아즈텍의 대규모 식인설 또는 대규모 식인 제의설은 신뢰하기 어렵다고 보는 추세다.

아메리카에 파견되었던 스페인 선교사들이 증언했던 체계화된 종교적 관습으로서의 식인, 즉 소금만으로 간한 밍밍한 국물에 상기한 신성한 인물의 시체에서 체취한 15g 가량 소량의 인육이 고명처럼 올라가 일종의 성체성사로서 행해졌다는 기록은 존재한다. 이런 '신성의 내제화' 신앙은 그리스도교에서의 성체성사와의 유사성을 통해 아즈텍인의 카톨릭 개종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나와틀인들에겐 가톨릭의 성체성사와 유사한 제의가 두 개 있었는데, 하나는 피를 묻힌 옥수수 반죽을 먹음으로써 신의 살을 먹는 제의이다.(대응되는 가톨릭 교리: 면병 속의 예수) 또 하나는 주기적인 인신공양을 통해 희생자를 신의 사자이자 신의 모상teotl ixiptla으로 고백하는 식인 제의이다.(대응되는 가톨릭 교리: 예수의 십자가 희생 제사, 예수의 살을 먹음으로써 십자가 위의 예수와 전례적으로 결합되는 회중) 다만 아즈텍 제국/인신공양 문서의 식인 논쟁에서 알 수 있듯이 더 깊게 들어가면 아즈텍에 인신공양 풍습이 존재했어도 정말로 식인을 한 게 맞는지는 논쟁거리임에 유의할 것. 별개로, 식인을 하지 않았더라도 카톨릭의 '면병 속의 예수' 에 대응되는 성체성사 교리는 아즈텍 종교에 존재하므로 두 종교 간의 여러 유사성이 나와틀인 개종에 기여했다는 기록은 신뢰할 만한 자료이며 이는 현대에도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11]

참고로 과거에 이루어진 식인 제의라고 하면 흔히 야만인들이 약자를 도축해 잔치를 열어 음식처럼 먹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역사학계에서 말하는 식인 제의란 식사나 잔치 행위따위가 아니다. 그리고 제물들은 대체로 그 사회에서 신성하게 여겨지는 강자, 즉 지도층이거나 최소한 전사계급이었다. 종교적이고 상징적 의미를 담은 의례였으며, 절대다수가 시신에 대한 훼손을 최대한 방지한 채 희생자의 살을 극소량만 먹는 형태였다. 즉 기독교의 성체성사와 유사하게 '신과의 합일이나 정신적 계승의 의미'를 지닌 경우가 많았다. 가령 메소아메리카에서는(아즈텍은 식인 제의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신성한 존재인 희생자의 심장과 피를 태양에게 바친 후, 사제와 고위전사 중 엄선된 소수의 사람이 영웅과 신으로 생각되는 제물의 작은 조각을 나누어 먹었으며, 이는 신의 신성을 내제화하는 의식이었다. 또 오세아니아폴리네시아 부족들은 죽은 자, 특히 부족장이나 위계가 높은 전사 등 영적 지도자들의 영혼과 하나가 된다는 의미로 조각난 살을 먹거나 뼈를 가루로 만들어 마시는 의식을 행했고, 이게 대중매체에서도 유명한 마나를 흡수하는 의식이다. 식인 제의의 실체가 이렇게 상기한 대로 과거의 체계화된 명예로운 의식이었지만 현재 여러 왜곡된 정보가 퍼진 이유는, 자극적인 미디어의 식인종 에피소드로 생긴 허구적인 이미지와 더불어 콩키스타도르 등 신대륙, 아시아, 아프리카를 침략한 정복자들이 이걸 왜곡해서 식인 잔치가 벌어졌다고 호도했고 이게 밈화되서 지금까지 퍼졌기 때문이다.

콩키스타도르와 이후 정복자 출신 지배층이 아즈텍 침공과 노예화를 정당화하기 위해 제시했던, 소위 '식량 수급과 쾌락을 위한 식인 또는 무절제한 대규모 식인 제의'의 증거로서 쓰이는 유골들은 시신이 사냥 혹은 제의에 사용되었다는 근거가 없다. 오히려 어느 문명이든 심각한 기근 시기에 민간에서 발생하던,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식인의 흔적이었을 여지가 크며,[12] 정복자 측에서 상당한 날조를 가미해 유포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 소기파같이 당시 진주하였던 스페인인들이나 그들의 앞잡이 행세를 하는 동족들에게 분개하여 그들을 살해하고 복수심에 음식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있긴하나, 이러한 증오와 복수심에 의한 식인은 유라시아 등지에서도 흔하게 관측되는 행위들 중 하나이며, 오히려 이러한 식인들의 증거 역시도 부정확하기에 온전히 식인에 이용되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칼질 등을 하다가 생긴 상처일지 불확실하다. 무엇보다 식인이 일상화되고 종교화되었다는 테노치티틀란에선 살을 발라내거나 인간의 이빨로 인해 상처가 나는 등의, 도축의 흔적이 있는 유골이 발견되지 않았다.[13]

여기까지 읽으면 짐작이 되겠지만, 아즈텍이 멸망한 원인은 인신공양에 대한 원한 때문이 아니다. 아즈텍은 메소 아메리카에서 고립된 문명이었므로 여타 문명에 비해 부족한 점이 많았다. 유라시아 대륙에 있는 문명들은 좋건 싫건 이웃 문명에게 발명된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 되었지만 아메리카 대륙은 주식이 되는 식량 종자를 키울 수 있는 유효 범위가 매우 협소하고[14] 그 경로가 정글로 덮여있었기 때문에 문명들끼리 교류가 힘들어서 문화의 보존과 전파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예를들어 유라시아의 경우 식량작물은 대개 한품종을 근원으로 하지만, 아메리카의 식량작물 옥수수는 먹지 못하는 강아지풀에서 4~5번에 걸쳐 독립적으로 개량되었다. 어디 한군데에서 우연히 돌연변이된 옥수수를 발견해도 그걸 보존하고 이웃문명에 전파하지 못해서 애서얻은 옥수수 돌연변이 종자가 매몰되고, 이후 다시 동일한 돌연변이가 생기는 우연을 각각의 문명들이 4~5번이나 얻었어야했다는 것이다.

유라시아 대륙에서는 국가의 위기상태가 닥쳐 문명이 멸망해도 그 문명이 만들어낸 성과와 문물은 이웃문명들에게 전파되어 살아남았다. 하지만 고립된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그 문명의 성과가 보존되지 못하고 잊혀진 후 긴 시간이 지나 그 자리에 세워진 다른 문명에 의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된다. [15] 따라서 유라시아와 같은 행정 기술의 발전이 고도화된 문헌의 형태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이는 중앙집권적인 법률 제도와 그에 필수적인 조세 제도의 부재로 이어졌다. 이에 오래동안 비합리적이고 소통이 부재된, 강압적인 공물 정책이 유지되었고, 이는 타 원주민 부족들의 불만이 누적되는 결과로 돌아왔다. 이에 따라 콩키스타도르의 침략과 함께 전통적 적대국이었던 틀락스칼텍을 중심으로 반 아즈텍 원주민들이 들고 일어나며 멸망하게 된다.

이런 혹독한 환경, 자원 부족 문제와 잦은 기근, 이에 따른 문명의 단절은 아즈텍뿐만 아니라 톨텍 문명 등 이전의 메소아메리카 문명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리스크였다. 그래서 다른 문명권에 비해 메소아메리카 문명은 잠깐의 전성기 뒤에 순식간에 무너지고 다시 건설되는 일이 흔했다. 애초에 메소아메리카 문명권에서 인신공양 풍습이 이렇게 오래 지속되었던 이유 역시 문명 정착 시기가 늦어서 농업이 늦게 발현했다는 점과, 여러 문명이 순식간에 무너질 만큼 자연재해가 흔했기에 인신공양 종교로 이에 대한 두려움을 불식시킬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 원인이었다. 그나마 대형가축이 있었다면 인간을 이로 대체할 여지가 있었겠으나, 메소아메리카는 그마저도 부재했다.

자세한 내용과 경위는 아즈텍 제국/인신공양 문서 참조.

16세기에 중남미의 대부분이 에스파냐의 식민지로 통합되면서 새로운 지배자가 된 에스파냐는 인신공양을 금지하고 엄격한 가톨릭 신앙을 부족들에게 강요했으며 그들의 종교시설을 파괴했는데 이 과정에서 인신공양은 부족의 전통문화와 함께 소멸하였다.

이 여파는 오래 남아서 21세기에도 틀락스칼라와 테노치티틀란의 후예라 할 수 있는 멕시코 시티간의 지역감정이 좋지 않다. 오늘날 틀락스칼라 입장에서는 멕시코 시티 측이 스스로를 과거 적국이었던 아즈텍의 후예로 지칭하는 것에 더불어 아즈텍 시기에 두 도시는 콩키스타도르가 오기 전부터 적대관계였는데 앞잡이라고 비난하는게 부당하다 여기고, 멕시코 시티 입장에서는 틀락스칼텍이 스페인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같은 나와틀 문명권 국가인 아즈텍 제국을 배신하고 멸망시킨 뒤 메소아메리카의 고유 문화와 독립운동에 대한 탄압을 자행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3.5. 중국

중국에서는 희생의 제물로 사람을 쓴 적이 있는데 사람을 팽(烹)[16]하거나 칼로 죽여 그 피를 희생의 제물로 썼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상나라 시대에는 주변국에서 포로를 잡아 인신공양을 하는 일이 팽배했고 상나라 건축물 유적지에는 건물의 안정을 기원하고자 기둥마다 사람 머리를 수십 개씩 묻었던 흔적이 발견되기도 했다. 또한, 상나라의 왕묘 유적에는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내고 나서 제물의 뼈를 파묻은 흔적인 제사갱이 발견되는데, 이런 제사갱에서도 다량의 인골이 발굴됐다.[17] 사마천이 사기에서 전하는 상 왕조 마지막 왕인 주왕(제신)이 달기와 함께 행했다는 포락(불에 달군 쇠기둥)이니 돈분(뱀구덩이)이니 하는 갖가지 해괴한 형벌들이 상의 인신공양 풍습을 설화적으로 각색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다. 상나라의 멸망 원인은 인신공양으로 인해 원한이 쌓인 주변국의 불만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채나라 채), (어려울 난) 등 몇몇 한자는 인신공양의 풍습에서 유래한다고 추측한다.

순장 풍습도 있었는데 금지부활이 반복되다 청나라 중반기 대에 이르러서야 완전히 사라졌다.[18] 물론 순장을 악습이라고 비난하는 사람은 오래 전부터 있었는데, 공자도 순장[19] 풍습을 천벌받아 자손이 끊어질 일이라고 저주했고, 춘추전국시대 인물인 서문표가 인신공양을 일삼으며 백성들을 착취하는 무당과 지배세력을 그럴듯한 핑계를 대며 인신공양을 하던 강물에 던져넣어 인신공양 풍습을 없앤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 중국 사회에서도 오래 전부터 지식인들은 이를 혐오하는 모습을 보였다. 허나 한족 이외에도 거란족, 만주족 등 순장 풍습을 유지하고 있던 유목민족들이 계속 유입되어 쉽게 없어지지 않은 듯하다. 물론 이는 순장이라는 풍습이 지닌 의외의(?) 정치적 유용함도 한몫했다. 순장 항목 참조.

오죽하면 당태종이나 당현종의 치세에도 '궁을 짓는데 어린 남녀를 기둥 밑에 묻어서 압승(壓勝)한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아서 사람들이 집집마다 자식을 숨기는 지경에 이르렀고, 황제가 이를 알고 불쾌하다며 관에 명령해 엄금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 이런 동아시아 지역에 널리 퍼져있던 고전적 토착 인신공양 풍습이 외래 종교인 대승 불교와 오랜 기간 결합하여 동아시아 대승 불교 내에서 독특한 풍습들을 만들어내기도 했는데, 이런 풍습들 중 하나를 소신공양이라고 한다. 동아시아 지역 내에서 광범위하게 전해지는 불가 승려들의 자기 희생 설화가 이런 배경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3.6. 일본

고대까지 일본에서는 인주(人柱)[20]라 하여, 큰 공사인 성 쌓기, 다리 놓기 등을 할 때 사람(주로 포로나 하층민들)을 산 채로 묻거나 기둥에 묶어 화장시키거나 물에 빠뜨려 죽이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현지에선 히토바시라라고 불리기도 한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스이닌 덴노 재위 28년(기원전 2년?)에 천황이 직접 순장을 금한다는 지시를 내렸다는[21] 기록이 있다. 이는 반대로 말하면 고대에는 순장이 자주 이뤄진 것으로 보이며, 실제 《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인조를 보면 247년 (왜국 여왕) 비미호가 사망하니 무덤을 크게 만들었는데 지름이 100여 보이고, 매장된 노비가 백여명이었다는 구절이 있다.

그러다 중세와 근세를 거치며 고대부터 이어진 순장 금지령과 불교, 유교의 도입, 그리고 국가에 의한 법치 체제가 강화되며 비인격적, 미신적 제도도 점차 줄어드는 양상을 보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인신공양을 없애고자 정치가들도 애썼다. 헤이케모노가타리에는 12세기 타이라노 키요모리가 송나라와 교역하려는 거점으로 삼고자 지금의 고베에 신도시 후쿠하라를 건설하면서 앞바다에 인공섬 쿄가시마(経が島)라는 섬을 조성할 때 매립공사가 수월하게 진행되지 않아서 오래된 미신에 따라 동자 서른 명을 제물로 바다에 던져서 공양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키요모리는 '사람 먹고 살자고 하는 공사인데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며 거절하고 대신 불경을 적은 돌을 매립부지에 던져넣어서 공사를 마칠 수 있었다는 일화가 있다.

도쿄 천황 거처인 황거(옛 에도 성)의 입구에는 1628년에 세운 망루인 후시미야구라(伏見櫓)가 있었는데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파괴되었다. 이후 수리하고자 성문 아래를 파냈는데 1925년 6월에 시신 16구가 발견되었다. 당시 풍문에 따르면 시신은 똑바로 선 상태에서 머리 위에 옛날 동전 한 닢씩을 얹은 채 묻힌 기괴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전술한 '히토바시라'로 바쳐진 시신이 아니냐는 소문이 무성하게 퍼지자[22] 이에 궁내성도쿄제국대학의 문학박사 쿠로이타 카츠미(黒板勝美) 교수에게 조사를 의뢰하였는데 조사 결과 '시신이 똑바로 서 있지도 않았고 여러 가지 요소들을 봤을 때 그냥 옛날 무덤의 흔적'이라는 결론이 나와 발견된 시신을 수습하고 일을 마무리했다.

구체적인 조사 결과 및 현재의 학설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사찰 경내에 무덤을 쓰기도 하는데 16세기 말 도쿠가와 가문이 에도 성을 접수하고 거대하게 확장할 적에 해당 부지에 있던 신사와 사찰들을 이전시켰는데 이들이 이전하면서 미처 챙기지 못하고 남은 무덤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 무덤들을 관리하던 사찰이 사라지고 시간이 흐르자 이 무덤들의 존재가 잊혔고 후대에 이를 모르고 평탄해진 무덤들 위에 망루를 지었다고 한다. 인신공양을 금지하고 성리학을 국가 통치 이념으로 받아들인 에도 막부가 히토바시라를 썼다는 것이 말이 안 되기 때문에 이들이 히토바시라였다는 것은 오늘날 부정된다. 이처럼 인신공양의 흔적임이 부정되었지만 우연의 일치로 후시미야구라에서 시신이 발견된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두고 두고 남아 '인신공양 아니었겠느냐.'는 도시전설로 이어진다.

한반도 측 기록 중 중세 일본인들의 인신공양에 관련해 언급하는 고려사 변안열 열전 기록이 있다. 고려 말 고려를 침공한 왜구가 1380년 진포 해전으로 고려 해군에 의해 돌아갈 선박을 망실하자 육지로 피신해 내륙을 휩쓸던 와중에 두 세 살 정도 된 여자아이를 죽이고 배를 갈라 그 시체를 씻어서 뱃속에 쌀을 넣고 제사를 지낸 후 그 쌀을 먹고 점을 쳤다는 기록이 있다.

3.7. 한국

삼국지 위서 동이전을 통해 고대 한국의 인신공양 풍습이 기록되어 있다. 부여에는 흉년이 들었을 때 을 죽이는 인신공양 풍습이 존재했고, 가야에는 권력자가 사망했을 때 하인 등을 함께 묻는 순장 풍습이 있었으며[23] 신라도 순장 풍습이 존재했다. 그러다 신라지증왕 때인 6세기 초반에 법으로 순장을 금지했고, 6세기 중반 진흥왕 때 가야를 정복하면서 가야 일대도 순장 풍습이 사라진다.[24]

2000년에 현 국립경주박물관 터를 발굴하면서 남북국시대의 신라 왕실에서 직접 관리한 것으로 추정되는 우물에서 아이의 가 발굴되었다. 아이가 사고로 죽은 뒤 폐쇄된 우물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학자들은 우물에서 발견된 동물의 종류가 15종이라는 점, 밑에 함께 묻힌 토기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점, 가장 위쪽에 아이의 인골이 엎어져 있던 점, 인골 위에 바로 덮인 우물 상석과 그 위를 흙과 자갈로 매립한 흔적이 남아 있는 점, 아이가 우물에 빠졌음에도 그 시체를 건져내지 않은 점을 들어 인신공양을 행했다고 추측했다. 하지만 언제, 무엇을 목적으로 인신공양을 하였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해당 내용을 다룬 KBS 역사스페셜 영상.

2017년에는 경주 월성 터에서 성벽 아래에 묻힌 인골 두 구가 발견되기도 했다.# 같이 묻힌 제사용인 듯한 토기나 인골의 위치 등을 보아 일본, 중국처럼 인주(人柱)를 한 사례라고 추정한다. 만약 인주가 맞다면 지금까지 한국에서는 최초로 발견된 사례. 신라시대 인신공양의 흔적은 2021년에도 추가로 발굴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월성의 축조시기가 4세기 중엽으로 추정되어 6세기 지증왕 때 순장을 금지했다는 기록과 모순되지 않는다.

에밀레종이라는 이름으로도 잘 알려진 성덕대왕신종은 전설에서 종을 만들기 직전 쇳물에 살아있는 아이를 넣고 만들었다는 인신공양 내용을 담은 전설이 널리 알려졌지만 현대에 과학적으로 조사한 결과 사실이 아니라는 게 밝혀졌다. 당장 위에서도 설명했듯 신라는 지증왕 이후로 순장과 같은 인신공양을 금지하였고 생명을 중요시하는 불교에서 종을 만든다고 살아있는 아이를 쇳물에 넣는 일도 말이 안 맞기 때문이다.[25] 쇳물에 아이를 넣으면 잔혹성은 둘째 치더라도 불순물 때문에 진작에 종에 금이 가거나 심하면 깨져서 박살났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일제강점기에 쓴 소설 내용이 잘못 전해졌다는 설도 있는데 성덕대왕신종 항목 참고.

삼국시대 후기부터는 지배 계급이 순장을 포함한 인신공양을 적극적으로 금지해서 만약 걸리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하게 처벌을 가했다. 게다가 고려 중기 이후 불교유교가 자리잡으면서 민간에서도 인신공양은 천벌받을 만한 사악한 짓이라는 생각이 보편화된다. 덕분에 고려시대에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사라졌지만 동시에 민간 사회에서는 지속적으로 인신공양 풍습이 소문으로 떠돌았던 모양이다. 대표적인 일화로 고려의 권신 최충헌이 집을 지을 때 어린아이들에게 오색 옷을 입혀서 네 귀퉁이에 묻어 재앙을 피하려고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자 백성들이 두려워 아이들을 숨겼고, 최충헌은 놀라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는 방을 붙여 소문을 진정시켰다고 하다.

다만 민간에서 인신공양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장담할 순 없는 것이, 조선 전기 문신 신숙주가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오는 뱃길에서 풍랑을 만나자 뱃사람들이 해신의 분노를 잠재워야 한다면서 어린 여자를 바다에 산제물로 바치려고 했는데 신숙주가 그걸 못하게 막았다고 쓴 기록도 있다. 해당 내용은 민간에서의 잡담 및 만담을 모은 야사집인 서거정(徐居正)의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있는 기록으로 신빙성 여부는 논란이 있지만, 당대 민간에서 이런 설화가 떠돌았다는 사실은 알 수 있다. 물론 이는 실제 있었다손 치더라도, 전근대 국가의 통치력이 완벽히 미치지 못하는 그늘에서 이뤄지는 특수한 사례들이었을 것이다.

당장 임금과 권력자를 비난하는 유언비어 1순위가 '왕이 궁을 짓는데 기둥 밑에 어린아이를 잡아다 묻는다 하니 아이가 있는 사람은 멀리 도망가야 한다.'였다. 반대로 생각해 보면 조선은 일반 백성까지 인신공양을 끔찍한 악습으로 생각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강계군 곡하면에는 여진족이 처녀를 제물로 바쳐 제사를 지냈다는 옛터인 인제원(仁濟院)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26]

3.8. 인도 아대륙

인도에서는 과부를 불살라 죽이거나 본인이 뛰어드는 사티라는 인신공양이자 악습이 힌두 사회에서 꾸준히 반복되어 금지와 부활이 반복되었다. 그나마 근현대 사회 들어선 많이 줄어들었지만, 21세기에도 관련 기사가 종종 뜰 정도로 질기게 남아있는 풍습이며 19세기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였던 시절이 배경인 쥘 베른의 소설 80일간의 세계일주에서도 관련 묘사가 나올 정도다.[27] 여담으로 인도의 마피아라고 할 수 있는 범죄 조직 터기무굴 제국 시절 칼리 여신에게 제물로 바치기 위해 여행객들을 살해하던 광신도 집단에서 기원했다고 알려졌지만 실제론 금품을 노린 노상강도들이었다는 게 정설이다.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의 죽음의 사원 편이 터기를 모티브로 해서 만들어졌다. 영화에서 인신공양하는 광신도들이 믿는 신도 칼리다.

네팔에서는 쿠마리라는 어린 여자아이를 여신의 화신으로서 바치는 악습이 존재하는데, 그나마 사람을 죽이는건 아니라 얌전한 편이긴 하다. 물론 인신공양의 범주 안엔 든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월경이나 상처로 인해 피를 흘려서 은퇴(?)하기 전까지만 이렇게 하고 은퇴한 후에는 국가로부터 연금을 받는 등 앞의 사례들에 비하면 훨씬 대우가 낫다. 물론 이러니저러니해도 일종의 아동 학대라 선진국에서 비판이 나오자 쿠마리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등 개선이 이뤄지고 있기는 하며 쿠마리들도 카트만두, 파탄, 박타푸르의 쿠마리만 제외하면 자유롭게 사는 편이다.

3.9. 종교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 불교, 유교에서는 모두 인신공양을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이 종교들의 초기 역사는 인신공양 타파와 도덕적 인식 개선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래에서도 설명하지만 소신공양순교는 인신공양으로 치지 않는다.

3.9.1. 유대교, 기독교

기독교 성경에서도 인신공양의 예가 자주 언급된다. 기본적으로 인신공양을 비난하고 비난과 혐오감을 드러내는 것은 성경에서 이스라엘인이 아닌 이민족을 비난하는 데 자주 쓰이는 레퍼토리다.

열왕기에는 궁지에 몰린 모압 왕이 자기네 신에게 자기 왕세자를 제물로 바쳐 이스라엘인들을 물리치는 내용이 있다.[28] 다만 예외적으로 야훼에 대한 인신공양이 묘사되는 경우가 있는데 예시로는 아브라함야훼에게 충성을 보이기 위해 아들인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고 하는 내용[29]이 대표적이다. 그나마 이 경우에도 이사악이 희생되기 전에 야훼가 천사를 보내 아브라함을 말린다.

한편으로 판관기입다가 자신의 딸을 제물로 바쳤다는 일화가 있는데 이 일화 자체는 인신공양을 정당화하는 일화가 아니라 고대 이스라엘의 연례 행사에 얽힌 전설을 설명한 것이다. 일화에서도 입다가 섣부른 맹세를 했다가 딸을 잃는다는 부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섣불렀을 뿐 아니라 애초에 모세를 통해 받은 율법에 인신공양을 금하는 내용이 있었음에도 인접국의 악한 문화를 따라했다는 점에서 레위 지파에 의해 율법이 제대로 가르쳐지지 않았던 사회 전반의 타락상을 보여준다. 그나마 주의 대리자로서 나라를 구한 입다의 수준이 이랬으니 나머지 백성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왕이 없어서 각자 제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다는 본서의 테마에 부합되는 행태였다.[30]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마시고 살을 먹는' 성체성사가 일종의 인신공양으로 오해를 사기도 했다.[31] 다만 유일신 그 자체인 예수가 십자가에 못이 박힘으로써 스스로를 희생해 인류를 구원했다는 일화는 신이 원죄를 지고 살아가는 인류를 가엾이 여겨 스스로 어린 양이 되어 자신의 몸을 인신공양했다고 해석하기 충분하다. 가톨릭, 정교회 등에서는 성체성사를 통해 그러한 예수의 피와 살을 취함으로서[32] 그를 내면에 받아들이기 때문에 성체성사를 예수를 희생양으로 삼는 인신공양이라고 여겨도 딱히 오해만은 아니다. 이런 신앙은 상술한 아즈텍 지역과 같이 인신공양이 남아있던 문명에서 교리의 유사성을 통해 원주민 개종에 기여했다.

3.9.2. 불교

불교에선 소신공양이 인신공양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있다.

널리 알려져 있듯 생명과 불살을 중요시하는 불교에서는 원칙적으로 자살을 금지하고 있으나 묘법연화경 '약왕보살 본사품'에 따르면 약왕보살이 향유를 몸에 바르고 일월정명덕불(日月淨明德佛)앞에서 보의(寶衣)를 걸친 뒤 신통력의 염원을 가지고 스스로 자기 몸을 불살랐다 한다. 경전은 이를 찬양하여, "이것은 참다운 법으로써 여래를 공양하는 길이다. 나라를 다 바치고 처자로 보시하여도 이것이 제일의 보시이다."라고 하는 주장에서 유래한 논란이다.

교과서에도 나오는 등신불 같은 소설 때문인지 불교가 분신자살과 인신공양으로 깨달음을 얻거나 인신공양을 조장한다는 왜곡된 인식을 가진 사람들도 종종 있지만 소신공양 '퍼포먼스'는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고 지속적으로 행해지지도 않았으며 '바친다'는 목적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공양'이라는 말은 엄밀히 따지면 부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법화경에 묘사되는 소신공양도 '분신자살' 그 자체보다는 '자기 희생을 통해 중생을 구원하려는 정신'을 강조하는 내용이며, 정작 소신공양의 출처가 되는 법화경에서도 소신공양이라는 말은 사용되지도 않았다.

즉신불도 육신을 부처에게 바친다기보다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최종적으론 육신마저 포기하는 고행에 가깝다.

현대에 와선 불교가 과거 국교였던 독재 국가 등에서 탄압에 맞서는 비폭력 저항의 상징이 되기도 하는데 대표적으로 남베트남의 부정부패와 종교 탄압에 맞서 소신공양으로 불의에 저항한 틱꽝득 승려의 사례가 있다. 틱낫한마틴 루터 킹 목사에게 틱꽝득의 소신공양은 서구 사회가 기독교의 도덕 관념에 따라 이해하는 것과는 다르다며, 그것은 서구 사회가 이해하는 것처럼 '자살'이나 '저항'의 행위가 아니라 오로지 압제자들의 마음에 경종을 울리고 베트남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하였다. 이는 중국티베트 탄압에 맞서 소신공양을 택한 티베트 승려들의 소신공양에도 적용될 수 있다.

자살의 정의는 '스스로 자기의 목숨을 끊음.[33]'이므로 목적이 어떻든 문자 그대로는 자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유가 '부처를 위해서 목숨 바쳐야지'가 아니므로 자살은 맞지만 인신공양은 아니다.

4. 창작물

야사나 민담, 동화 등에서는 드래곤 등의 환상종이 마을을 파괴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마을에서 처녀를 선발하여 보내는 등의 예가 자주 언급된다. 이런 경우는 지나가던 사람에 의해 환상종이 퇴치되면서 처녀가 구출되는 플래그가 성립된다.

한국에 남아 있는 민속설화들을 살펴봐도 인신공양의 피해자가 어떤 신성한 사람이나 동물의 힘으로 구원을 받고 인신공양을 받는 악역을 물리치는 형태로 인신공양이 악당의 한 가지 클리셰로 자리잡았다. 대표적으로는 개성지네산 전설 등이 있다. 대체적으로 그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일반적인 영웅 설화와는 달리 일개 미물이 은혜를 갚기 위해 싸워서 문제를 해결한다는 특징이 있으며 문제의 해결에 있어 남성의 역할이 사실상 거의 강조되지 않는다는 것도 특징이다. 다만 간혹 새로 부임한 판관이나 벼슬아치가 직접 내려와서 그 괴물을 응징하는 스토리도 소수이지만 있는데 이런 예로 대표적인 것은 제주도 김녕사굴 구렁이 전설이다.[35] 이 전설을 본격적으로 다룬 작품으로 박우근 작가의 소설 「구렁이놀음」이 있다.

이는 먼 옛날에는 알 수 없는 자연현상이나 재해에 대해 인신공양으로 대처하려 했으나 점차 문명이 발전하면서 이러한 것들이 부정됨과 함께 자연스럽게 나타난 설화인 듯하다.

심청전에서도 주인공인 심청이가 인당수에 몸을 던져 파도를 가라앉히는 제물로 쓰이는데 동화가 되면서 순화가 되었을 뿐 심청이 인신공양으로 희생될 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인간을 사용한 XXX라는 점에서 고독이나 무당방울과도 비슷하다. 다만 이쪽은 목적이 사리사욕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대장장이가 만드는 전설적인 무기 중에는 사람을 쇳물에 녹였다거나 혹은 피로 담금질했다는 이야기가 종종 언급되는데 실제로 대장장이가 주술사를 겸했던 시기에는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났다고 전해진다. 비교적 최근의 문학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모비 딕에서도 에이허브 선장이 자신의 새로운 작살을 선원 셋의 피로 담금질하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선원들을 죽여서 피를 낸 건 아니고 팔을 좀 그어서 약간 낸 정도다.

도자기와 관련된 인신공양 이야기도 있다. 전술한 대장장이 이야기와 비슷한데 도자기를 구울 때 희생자를 가마에 넣는다거나 반대로 자꾸만 도자기를 굽는 데 실패하자 낙담한 도공이 마지막으로 자신의 몸을 가마에 던지고 그 결과 걸작인 도자기가 나온다는 형태다. 연극 '아라 아라'가 이 스토리 플롯대로 각본이 짜여 있고 마지막에 도공이 가마 안으로 몸을 던진다. 1990년대 토요미스테리 극장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각색되어 소개된 적이 있었는데[36] 해당 에피소드에서는 한 도공이 평론가들로부터 "어린 아이와 같은 순수한 예술혼이 부족하다"는 혹평을 듣고 순수한 영혼을 담기 위해[37] 병으로 죽은 어린아이의 무덤을 파서 시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가마 불에 넣어 구워내 도자기를 완성하였고[38] 이 도자기는 큰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후에 이 도자기를 사간 자산가의 집에서 아이의 혼령이 나타나는 등 불길한 일이 계속되는 바람에 자산가가 도자기를 돌려보냈고 자신을 도자기에서 내보내 달라는 아이의 영혼과 갈등을 빚던 도공은 결국 자신의 혼을 도자기에 불어넣기 위해 그 앞에서 자살한다. 해당 에피소드 영상

4.1. 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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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때문에 대부분의 지역에서 중요한 제사일수록 제물로 최고급 소, 말 등 자신들이 가진 것 중에 가장 귀한 가축을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것이다.[2] 사람이 아닌 짐승만 나무에 엮은 바구니에 넣어 죽이는 일은 17세기 프랑스에서도 있었다. 루이 14세 시절의 프랑스 왕국에서는 커다란 바구니 안에 여우와 토끼와 들쥐 같은 짐승들을 집어넣고서 불에 던져 그 짐승들을 태워죽이면서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의식을 치렀다.[3] 바벨 성 아래에는 진짜로 동굴이 있다. 성벽의 구석 모퉁이에 자리한 조그마한 문을 지나 아주 폭이 좁은 나선형 계단을 타고 내려갈 수 있다. 성에 입장할 때 설명을 읽지 않고 무심코 들어갔다가 바깥으로 나와버리면 다시 그 길로 돌아갈 수 없고 얄짤없이 다시 정문으로 돌아가야하니 성의 모든 관광을 마치고 들어가도록 하자. 동굴을 나오면 쇠로 만든 재미있게 생긴 용의 동상이 있는데 이 녀석은 매 시간마다 하늘을 향해 불을 뿜는다. 한편, 중세 시대에 이 동굴에서 메머드의 것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뼈 3점이 발견되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진짜 용의 뼈라고 믿고 이것들을 바벨 성당의 정문 위에 걸어두었다. 지금도 이 뼈는 문 위에 남아 있는데 뼈가 땅으로 떨어지는 날엔 세상이 망한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4] 그 증거가 아바르족 기마병들이 들고 다녔던 깃발인 드라코인데 마치 용의 머리처럼 생긴 두상에 배너가 달린 모습이었다.[5] 간혹 흉년이 들면 왕과 왕비는 스스로 성기를 찢어(!) 피를 종이에 적셔 태우고 그 냄새를 맡았다.[6] 공놀이가 발생된 초기에는 순전히 친선과 놀이 목적으로 행해진 장식들이 발견되지만 중남미를 덮친 가뭄 이후에는 공놀이에도 인신공양이 도입되었다.[7] 포니족의 조상 역시 미시시피 문화권에 속해 있었다.[8] 예전엔 노동 인권도 열악하다 보니 특히 아메리카에서 비백인계 노동자들은 사고로 죽으면 제대로 된 형식의 장례도 안 치러주고 묻어버리는 경우도 있었을텐데, 이게 수장이나 화장 등처럼 간단한 방식으로 이뤄지고 확대 해석되어 소문이 나버리면 딱 인신공양처럼 보일 수도 있긴 하다.[9] 신들은 여신들을 아내로 두었다는 전승에 따라 미녀들로 이루어진 하렘도 주어졌다. 이 여인들도 지상에 방문한 여신의 아바타로 대우되었다.[10] 바이킹들 역시 전투에서 잡은 포로를 라그나로크에서 오딘의 편에서 싸울 에인헤야르로서 바치는 의식을 거행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오딘이 지혜를 얻기 위해 나무에 매달렸다는 신화를 재현하기 위한 교수형 의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또 스키타이인들은 전쟁의 신 아레스를 위한 희생 제의를 자주 치뤘다. 다만 스키타이인들은 제물을 아레스와 태양신을 위한 공물로 여겼지 바이킹과 아즈텍처럼 신들의 편에서 싸울 사후세계의 전사로 여기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스키타이인들 역시 전장에서 죽은 전사는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그의 용맹을 기렸는데, 그들이 행했던 죽은 적장의 머리를 술잔으로 만들었던 의식은 그를 모욕하는 게 아니라 그 술잔을 가죽과 금으로 덮어 그 용맹을 기리는 방식의 하나였다.[11] "원주민들은 성체성사에서 그리스도의 희생제사적 살을 먹는 전례가 에스파냐 도래 전 자신들의 희생제사 및 의례 전통과 유사하다는 걸 이해한 것 같다."It seems that indigenous people understood the ritualized act of ingesting Christ’s sacrificial flesh during the Eucharist as similar to their tradition of sacrifice and pageantry that was practiced before the arrival of the Spanish."(〈Disseminating Devotion: The Image and Cult of the Black Christ in Disseminating Devotion: The Image and Cult of the Black Christ in Colonial Mexico and Central America〉, Elena FitzPatrick Sifford)[12] 특히 정복 직후부터 정복지에 대한 수탈, 가뭄, 질병 등으로 기근이 매우 자주 닥쳤기에 이러한 유골들은 민간 혹은 재판에서 쉽게 확보할 수 있었다.[13] 물론 아즈텍 내에서 인골을 통한 공예가 존재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문화 역시 유라시아에서 흔히 존재해왔고, 심지어 서양 문명의 근간이었던 로마 제국의 황제 니키포로스 1세는 불가르 족에게 죽임을 당한 이후 두개골이 불가리아 칸국의 칸이었던 크룸 전용의 은으로 장식된 술잔이 되었다. 또 상술했듯이 이런 공예 문화 역시 현대 학계에서는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모욕을 위한 것이라는 설은 와전된 것이고, 사실 죽은 자의 명예와 용맹을 기리기 위한 종교 및 전사문화 의식의 일종이었다고 보고 있다.[14] 경도가 다르다고 기후나 식생이 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위도가 달라지면 기후나 식생이 크게 달라져 교류가 힘들고 그 지식이 쓸모없기 십상이다. 밀은 동일 경도대에 빠르게 퍼졌지만 옥수수나 바나나 코코아는 조금만 위도가 달라져도 기온과 강수량 토질이 달라져 자라지 않는다.[15] 유라시아 대륙에서도 고립된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히말리야와 카프카스 산맥등 이웃문명과 교류가 힘든 지역에서는 비슷한 일이 일어나서 문명이 제자리 걸음만 반복했다.[16] 끓는 기름이나 뜨거운 물에 던져넣어 죽이는 방법이다. 조선 시대에 이를 형벌로써 다루는 팽형이 실존했는지의 여부는 논란이 있으며, 조선왕조실록에는 관련 기록이 없으나 명예형으로 다루어져 당사자는 공식적, 행정상으로 사망자로 기록된다는 조선총독부 출신 서대문 형무소장을 역임한 일본인의 설만이 있을 뿐이다.[17] 이는 순장 풍습과 관련은 있으나, 순장과는 별개의 것이다. 매장이 완료된 뒤에도 계속 제사를 지내며 제물을 바쳤기 때문이다.[18]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공자님도 깐 미개한 순장 풍습이 명나라에 아직도 있다.'는 식으로 비판한 기록이 있다. 자세한 건 순장 항목 참조.[19] 공자는 순장뿐 아니라 사람 대신 인형을 같이 묻는 것조차도 사악하다고 비판했다. 애초에 유교 등 여러 인류애적 사상이 이런 풍습을 없애기 위해 나왔다고 봐도 될 정도다. 보통 유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인과 예이고 괴력난신을 피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다.[20] 직역하면 사람기둥. 만화 나루토인주력, 인주 앨리스의 그 인주다.[21] 노미노스쿠네가 대신 하니와(土輪)라는 흙인형을 묻는 방법을 제안하여 천황으로부터 포상을 받았다는 전승이 이때의 일이다. 그러나 고고학적으로 하니와의 등장은 노미노스쿠네가 살았던 시대보다 훨씬 후대의 일이라고 한다. 실제 일본서기의 고대 덴노들 연대는 신뢰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당장 후술된 히미코(비미호)가 기록상으론 후대 사람인데도 순장 잘만 하고 있다.[22] 후시미야구라를 세우는데 자꾸 무너지니까 건물을 튼튼히 하고자 제물로 바쳤다는 것이다.[23] 특히 대가야에서 유행했던 것으로 보인다.[24] 고구려백제는 순장이 유행한 것 같진 않다. 발굴조사에선 딱히 흔적이 없고, 기록상으론 고구려가 중천왕 때인 3세기 중반, 동천왕 사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순사(자사 순장)가 벌어지자 이에 놀란 중천왕이 이를 금했다는 기록이 있다.[25] 그렇다고 신라도 이후에 인신공양이 아주 없어진 건 아니었다. 그보다 후인 조선시대에도 인신공양 시도 기록이 남아있는데 신라라고 없을 리가 없다.[26] 사실이라면 이 지방이 여진족의 땅이었던 고려 시대의 일일 것이다.[27] 당시 이를 보고 주인공인 필리어스 포그가 이 풍습 영국에서 금지시킨 거 아니었냐고 묻자 현지에서 근무하는 영국 군인 크로마티 경이 대부분의 지역에선 없어졌지만 일부 지역에선 손도 못 쓴다고 알려주는 장면이 있다. 여담으로 이때 사티에 희생될 뻔한 여인인 아우다 부인은 포그의 하인인 파스파르투가 극적으로 구조해내며 이후로도 포그를 따라다니다 영국까지 와서 포그와 결혼하게 된다.[28] 신명기 12장 31절, 레위기 20장 3절, 열왕기하 3장 27절, 16장 3절, 21장 6절 등을 참조할 것.[29] 제물로 바치기 직전에 하느님이 보낸 천사가 만류하여 이사악은 죽음을 면했고 옆에 지나가던 숫양이 대신 제물로 바쳐졌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이것을 예수가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류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써 인류를 구원할 것을 예고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사악은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류를, 숫양은 인류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를 상징한다는 것이다.[30] 입다의 딸의 최후에 대한 해석이 분분한데 정말 번제로 바쳐졌다는 해석과 신녀로서 평생 야훼를 모시며 정결한 삶을 살았다는 해석으로 나뉜다.[31] 혹은 인신공양을 번제로, 번제를 다른 것으로 순화시키는 과정에서 이런 흔적이 남았을 수도 있다고 볼 수 있겠다.[32] 비유, 상징적인 의미라거나 영적으로 성체에 강림하는 것이 아니다. 가톨릭, 정교회 등에서는 성체와 성혈이 실제로 예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실체변화설을 따른다.[33] 표준국어대사전[34] 가장 유명한 사례는 역시 두꺼비이다.[35] 이 이야기의 결말은 판관이 구렁이의 저주를 받고 죽는 배드 엔딩인데 이걸 두고 조정에서 내려온 중앙세력(서판관)과 제주 유력자(김녕리 토호) 세력의 갈등이 '육지부 조정에서 온 지방관의 구렁이 퇴치' 설화로 은유되어 전해져오는 게 아닐까 하는 의견이 있다.[36]재일교포 시청자가 제보한 내용을 드라마로 각색하였다.[37] 극중에서는 평론가들의 혹평이 예술혼과 순수함에 집착하게 만들었고 그 집착이 뒤틀린 광기로 변했다고 언급된다.[38] 도자기를 구울 때 가마 불에 어린아이의 신체 일부를 넣으면 순수한 아이의 영혼이 깃들 것이라고 믿어 한 행동이었다.[39] 만약 막고 있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가면 그 사람들과 같이가던 중에 그 사람들한테 잡혀서 죽게된다.[40] 알버트 웨스커가 직접 등장해 에이다를 구해준다.[41] 희생 없이 신앙력을 얻으려면 백성들을 데려다 제단 앞에 내려놓아서 숭배의식을 진행하게 하고, 숭배의식 중 굶지 않도록 급식을 해 주면 된다. 이쪽은 성향에 변동이 없는 대신 신앙력이 일시불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올라가는 형식이며, 숭배의식을 진행하는 노동력이 될 사람들도 여럿 필요하다.[42] 주인공의 친구도 결국 악마로 변한뒤 마왕에게 잡아먹힌다. 아이러니하게도 친구는 전 촌장의 딸이었는데, 촌장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 세뇌당하지 않은 대신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고 결국 죽고 말았다.[43] 이때 색 닥터가 죽으면 유닛은 다시 살아나게 된다.[44] 사람을 참수해 그 수급으로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하자 제갈량은 돼지고기를 밀가루 반죽에 감싸서 만든 떡으로 사람의 수급 대신 올려서 제사를 지냈다.[45] 건곤언월도는 자기보다 역량이 낮은 호시요미를 홀려 그의 성향을 변질시켰으며 탈귀 또한 자신을 만든 토슈를 조종했고 마지막에는 누적된 데미지로 인해 자신이 부러지는 것을 막기 위해 토슈에게 자신의 데미지를 전달해 죽게 만들었다. 만룡은 요기를 얻은 것이 오히려 화가 되어 폭류파에 제대로 얻어맞아 산산조각나며 주인 반코츠와 함께 패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