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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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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이름
3.1. 한국어에서
3.1.1. 멸칭
3.2. 이름의 유무에 대한 논의
4. 회화적 표현과 묘사5. 신격과 특징
5.1. 유일성5.2. 초월성5.3. 전지·전능·전선5.4. 만들어지지 않은 신
5.4.1. 존재 그 자체(ipsum esse)
5.5. 성(性)이 구별되는 존재가 아님5.6. 일신인가 주신인가5.7. 기독교의 신관(神觀)
5.7.1. 삼위일체론5.7.2. 구원5.7.3. 비종교인을 위한 구원관 비유
5.8. 이슬람의 신관(神觀)
5.8.1. 다른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들의 신과 동일한가
6. 논란7. 매체와 모티브8. 관련 문서9. 외부 링크

1. 개요

야훼(𐤉𐤄𐤅𐤄)는 히브리 민족의 민족신이자 유대교, 사마리아교, 기독교, 이슬람교, 바하이 신앙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에서 숭배하는 유일신[1]을 가리킨다.

아브라함 계통 종교가 로마 제국이슬람 제국에서 국교로 채택되며 교세를 확장한 덕에, 야훼는 적어도 16세기 이후부터 현재까지 세계에서 가장 널리 숭배되는 신이 되었다.[2] 과거 중근동에 야훼와 함께 존재했던 신격인 이집트아몬-, 바빌론마르두크, 수메르, 가나안다곤, 바알 등이 모두 사라진 것과는 대조적이다.

2. 역사

고대 히브리어로 야훼를 가리키는 가장 직접적인 표현은 'הַשֵּׁם הַמְּפֹרָשׁ(hashem ham'forash; 명시적 이름)'이다. 그런데 이 이름은 모세 시대에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던 신인 '엘'(אֵל; el) 에서 파생된 제의적인 이름일 것으로 보고 있다. 엘은 가나안 만신론에서 가장 위대한 신으로서 신들 중에 최고의 신이며 신들의 아버지라고 불렸다. 가나안 원시종교인 우가리트 신화에 나오는 최고 신인 이 바로 야훼이다. 엘은 그는 초기 가나안 신화에서 주도적이었으나 후에는 그의 아들 바알로 대치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히브리인들은 온 세상을 다스리는 최상의 신의 개념을 가지고 야훼를 숭배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신들은 거의 다 자연 종교의 신들로서 그 신들은 대부분 이 땅에 사는 인간들의 생활을 좌우하는 자연의 변화를 주기적으로 주관하는 것일 뿐이었다. 그 신들은 농경 사회나 유목민 사회를 막론하고 제례를 통해서 자연을 주관하는 신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정도였다. 그러나 그 신들의 행위는 매우 제한적이었으며 먼 미래까지도 주관하는 기능을 가진 적은 없었다. 가령 바알은 매 7년마다 찾아오는 풍년과 흉년의 사이클에서 풍년을 위해서 자연법칙을 주관하는 일만 했었다. 그러나 야훼는 달랐다. 야훼는 그 어떤 자연물과도 동일시되지 않았고 각자 담당하는 분야가 있는 다른 신들과 같은 제한을 받지 않는다. 모든 것을 주재하는 신이었다. 자연을 주관했지만 오히려 자연법칙은 야훼의 전능함을 보여주는 많은 도구 가운데 하나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리고 성경에 나와 있는 야훼의 권능은 주기적으로 반복을 거듭하는 자연계의 사건들과 관련되어 있기보다 반복될 수 없는 역사적인 사건들과 관련이 있다. 히브리 민족을 이집트에서 구출해올 때, 야훼는 자연계의 모든 권능, 예를 들면 전염병이나 바닷물, 바람, 지진, 메뚜기, 개구리와 같은 것들을 이용해서 자신의 전능함을 보여주었다. 더욱이 그는 매 역사 가운데 고통당하는 자신의 백성을 직접 찾아와서 각각의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해답을 내린다. 비록 이스라엘에도 야훼를 위한 제사가 있었지만 다른 신들의 숭배에서 보는 것과 같이 신을 달래기 위한 것이나 신들의 인간적인 관계회복을 촉구하기 위한 제사는 아니었다. 야훼를 위한 제사는 야훼가 모든 역사 가운데 직접 개입해서 그 백성을 인도해 주는데 대한 감사와 찬양의 제사였다. 그러므로 이스라엘과 야훼는 제사를 통해서 정기적으로 만나야만 했다.

보편적으로 학계에서는 야훼 종교의 기원을 기원전 9세기 중엽에 두고 있다. 기원전 840년경 세워진 메사 석비에 의하면 이스라엘 왕국과의 영토 분쟁을 종식한 모압의 왕 메사가 느보에 있던 야훼의 기물들을 모압의 신인 크모시 제단에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반면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야훼 종교는 기원전 15세기 모세에 의해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사건에 대한 기록이 타나크[3] 탈출기 3장에 나타난다. 야훼 종교라는 이름 그 자체는 성경에 나타나지 않지만 야훼를 유일신으로 섬기는 사람들의 종교를 일반적으로 야훼 종교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파일:external/www.crystalinks.com/mosesbush.jpg

타나크(구약성경)에 의하면 야훼가 자기 이름을 맨 먼저 나타낸 사건은 모세가 떨기나무 근처에서 그를 만났을 때 야훼가 직접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준 것에 기인한다(탈출기 3장 14절). 여기에서 야훼는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다"라고 말하는데 이 히브리어 음역 "אֶהְיֶה אֲשֶׁר אֶהְיֶה(eh'yeh asher eh'yeh; 에흐예 아셰르 에흐예)"[4]를 직역하면 나는 존재하는 자로서 존재한다이다.

우가릿 문서에 의하면 이 '엘'이라는 어구는 '창조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단어를 '창조하다'라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나는 창조하는(탄생시키는) 야훼다"라는 의미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고대 이집트의 문헌들 가운데 아문 라 신과 아톤 신에게 적용했던 정형구절 가운데 탈출기 3장 14절과 유사한 표현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나는 존재하게 된 것을 있게 하는 그분이다"라고 나타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 말의 의미는 야훼는 그 존재의 기원이 무엇이며 누구에 의해서 생성되거나 출생되었다거나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즉, 야훼는 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도 아니며 스스로 있는 자존자라는 말이다. 이러한 야훼의 이름에 담겨 있는 속성이 아브라함계 종교와 다른 신앙의 차이점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다른 신화에 나타나는 신들은 저마다 그 기원이 있고 대부분이 창조되거나 부모 신들의 결합으로 생긴 것들이지만 야훼는 자존자로서 그 어느 누구의 간섭이나 도움이 없이 스스로 존재하는 자인 것이다.

족장 시대의 야훼는 한 부족의 신으로만 섬겨졌으며,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요셉 이 네 족장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족장 시대에는 야훼는 한 집안의 신으로만 섬겨졌다. 물론 성경 저자는 이 시대에도 야훼가 온 우주를 통치하는 신이었음을 강조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히브리인들은 부족 공동체였으며 야훼 역시 그 부족의 신으로만 섬겨졌다.

특히 야훼가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창세기 12장 1-3절)에 의하면 지금은 비록 한 개인에 불과한 족장들이지만 그 후손의 시대에 가면 그 민족이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와 같이 번성할 것임을 약속했다. 그래서 이 약속이 족장 시대를 이어서 내려오게 되었다. 예를 들면 야훼는 아브라함에게 한 언약을 상기시키기 위해 이사악에게는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이다"라고 말했고, 야곱에게는 "네 조부 아브라함의 하느님"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요셉에게는 "네 조상 아브라함의 하느님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야훼의 언약이 족장 시대를 걸쳐서 계속 전수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오토 카이저나 아이히로트와 같은 학자들은 구약성경의 주제를 "하느님의 언약"이라고 보았으며 그 언약이 가장 잘 전수되는 이야기가 바로 족장들의 이야기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족장 시대의 야훼는 그저 한 부족이 섬기는 유일신에 불과했다.

왕정 시대에 들어가면서 야훼와 이스라엘의 관계는 야훼가 왕이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백성이 되는 신정정치로 접어든다. 그러므로 야훼와의 관계가 좋은 왕들은 그 왕권을 보장받게 되고 그렇지 못한 왕들은 왕권을 보장받지 못하게 된다. 야훼와의 관계가 대체로 좋았던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에는 이스라엘 왕국이 유례 없는 번성을 했지만 야훼를 떠난 악한 왕들의 통치가 계속되던 시기에는 마침내 나라가 분열되고 다른 나라에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결과를 낳았다. 성경 저자는 이 모든 결과가 사람들이 야훼와의 관계를 잘 유지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포로 시대에도 야훼는 그 백성 이스라엘에게 끊임없이 소망을 불어 넣어 주었으며 마침내 고국 땅으로 귀환한 이스라엘은 그 동안 야훼와의 관계가 좋지 않아서 이런 결과가 왔다고 생각하고 야훼와의 관계회복을 위해서 성전을 건축하고 종교의식을 개혁하는 등의 일련의 조치를 취함으로써 야훼의 백성으로서의 위치를 확립하려는 노력을 했다.

야훼가 모세에게 가르쳐 준 이름이 바로 야훼이다. 통상적으로 히브리인들은 야훼라는 이름 대신 아도나이(אֲדֹנָי)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지엄한 야훼의 이름을 피조물이 감히 부를 수 없어서 야훼를 경외하는 의미에서 "주"(主)라는 의미를 가진 아도나이라고 부른다. 야훼를 가리키는 이름은 그 외에도 여러가지가 있는데 모든 이름이 다 야훼의 인격적 특성과 관련되어 있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야훼는 유일신이다. 아브라함 이후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은 야훼는 이스라엘의 친권자로서 그 권리를 행사하고, 이스라엘은 야훼의 자녀로서 그 의무와 권리를 행사하게 되었다. 야훼는 매우 인격적인 동시에 신적인 권위를 함께 가지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 이스라엘을 위해서 안타까워하며 때로는 분노하기도 한다. 이스라엘의 죄를 보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기도 하며 죄에 대한 엄중한 심판을 내리기도 한다.

한편 이스라엘 왕국에서는 야훼 외의 이방신을 같이 섬기던 풍습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래 '표현' 문단에 서술된 '야훼와 그의 아세라'도 이와 관련되었다는 관점도 있다. 유일신으로서 야훼는 스스로 다른 신들과 같은 가치를 가지고 숭배될 수 없다. 따라서 오직 야훼만이 숭배의 대상이므로 다른 신들을 섬기는 자들은 야훼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왕정 시대의 야훼주의는 강력한 정치적인 뒷받침이 있어야만 그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야훼는 왕들에게 자신과의 관계를 잘 설정해서 그 계약 안에서 정치를 할 경우 그 치세를 축복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이때 야훼와의 관계를 비교적 잘 유지했던 다윗이나 솔로몬, 히스기야와 같은 왕들의 통치기간은 매우 평화로운 날들이었지만[5] 므낫세나 오므리와 같은 왕들의 통치는 매우 불행한 시간의 연속이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야훼는 자신의 뜻을 전달할 때 항상 예언자(선지자)나 판관(사사) 등을 통해서 말한다. 아주 특별한 경우 야훼가 직접 백성들 사이에 나타나기도 하지만, 이것은 그야말로 아주 특별한 경우로서 구약에서도 단 몇 차례만 나타날 뿐이다.[6] 대부분은 간접적인 방식으로 나타나서 자신의 의지를 알린다. 제사장들이나 예언자들은 야훼의 뜻을 알기 위해 신점 의식을 치렀는데, 그 가운데 가장 흔한 것이 제비뽑기였다. 이 제비뽑기에 대해서는 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제비를 뽑아서 범인을 잡거나 제자를 택하는 일은 그 당시에는 매우 흔한 일이었다.

그 외에도 고대 근동에는 여러 종류의 신점 행위가 있었는데 대표적인 행위로는 동물의 간이나 내장을 이용해서 점을 치는 행위, 그릇에다 물을 채워놓고 그 위에 기름을 떨어뜨려 기름이 퍼지는 모양을 따라서 점을 치는 행위, 막대기를 이용해서 점을 치는 행위, 화살을 이용해서 점을 치는 행위, 꿈을 통해서 점을 치는 행위 등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 야훼의 방식을 알고자 했고, 는 예언자들을 통해서 전파되었다.

바빌론 포로 시기는 야훼 종교가 매우 침체된 시기였다. 70년 간의 포로생활 동안 이스라엘은 민족적 정체성을 많이 상실했으며 종교적으로도 암울한 시기였다. 아시리아에 의해서 먼저 기원전 722년에 식민지가 된 북왕국 이스라엘과 아시리아를 정복한 바빌론에 의해서 기원전 586년 식민지가 된 유대는 야훼에 대한 종교적 의무를 수행하지 않았으며, 그 결과 안식일과 할례를 제외한 모든 종교의식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 때에도 야훼는 포로기의 예언자인 에제키엘이나 예레미야를 통해서 야훼와의 계약관계를 기억하고 충실한 종교적 생활을 할 것을 강조했으나, 이스라엘은 너무도 쉽게 바빌론의 문화와 종교에 동화되어 버렸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이 바빌론의 포로가 된 것은 야훼와의 관계를 잊어버렸기 때문이라는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면서 동시에 포로기의 암울한 현실 가운데서도 야훼가 그들을 구원하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말 것을 선언했다. 그러나 한마디로 말하면 포로생활을 하는 기간은 야훼 종교의 암흑시기라고 할 수 있다.

바빌론 포로 시기 이후 하깨즈가리야 그리고 느헤미야, 즈루빠벨, 에즈라와 같은 젊은 개혁가들에 의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후 가장 먼저 실시된 개혁이 바로 야훼에 대한 종교적인 의식과 가르침의 회복이었다. 그들은 무너진 야훼의 제단을 수축하고 안식일과 할례, 파스카를 강조했으며, 도덕적 성결과 윤리적 정결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제 다시 포로 시기와 같은 암울한 현실을 당하지 않으려면 다시 야훼에 대한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그들은 바빌론에서 태어나서 성장한 제2세대를 위해서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하는가 하면, 야훼가 그들의 조상들을 위해 한 일들을 되새길 수 있도록 토라(모세 5경)를 강조하는 교육을 강화했다. 이러한 일련의 개혁을 통해서 개혁가들은 야훼에 대한 신앙을 회복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포로생활을 하고 귀환한 지도층과 포로기간 동안 이스라엘에 남아서 온갖 수탈과 착취를 경험했던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한 갈등은 쉽게 해소되지 않았으며, 포로생활을 하고 온 지도층 사람들에 의해서 주도된 종교개혁은 결국 본토에 남아있던 사람들의 방해에 의해서 일시 중단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연이어서 기원전 4세기부터 시작된 그리스의 통치는 더욱 더 심한 다신론적 상황을 야기시켰고, 기원전 54년 로마가 그리스를 정복하고 예수 시대 전까지 온갖 예언과 환상이 즐비한 혼란스러운 시대가 다시 시작되었다. 한편 이 시기에 야훼 신앙은 그리스 철학, 좀 더 확실하게 말하자면 플라톤 철학과 만나게 되었다. 야훼에 플라토니즘적 존재론이 들러붙으면서 온갖 떡밥이 생성된 것이었다.

야훼는 유일신이며 창조자이기 때문에 그리스인들은 야훼를 존재론적으로 이해하게 되었고, 나중에 플라톤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영향을 받으면서, 야훼는 영원불변의 절대적 존재인 우주의 제1 원리 같은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런데 시간공간을 초월하는 절대 존재가 질투를 한다는 둥, 분노를 한다는 둥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논쟁이 벌어졌다. 초월적 존재가 왜 인간처럼 사사로운 감정을 보이냐는 것.

일단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 플라톤 철학이 대세였기 때문에 여기서 비롯된 질문, "왜 이 이 세상을 이 따위로 만들었나?" "온 세상을 창조한 절대자가 왜 유대인만 편애하고 타민족은 잡아 죽이냐?" 하는 등의 질문이 무시될 수는 없었다. 반면 플라톤 이후에 나타난 헬레니즘 철학[7]플라톤의 불생불멸적 이데아를 수용하지 않았고, 심지어 유물론적인 경우까지도 있었으므로 기독교가 이런 헬레니즘 철학과 연결된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기독교 신학이 나올 수가 없다. 기독교 신학에서 문제가 되는 그리스철학은 플라톤 철학을 말하는 것이다.

중세 신학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정통으로 삼는데, 전자는 플라톤 철학을, 후자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활용해 신학 체계를 만들었다. 하여 현대 기독교 신학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과연 '예수가 플라톤 주의자였는가?'라는 문제다.

이와 같이 야훼 종교는 약 2천년 이상의 역사를 통해서 많은 변화와 갈등을 겪었다. 우리가 이러한 역사적 변화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야훼 종교 역시 그 시대적인 삶의 자리에 따라서 부흥과 쇠퇴의 길을 걸었다는 것이다.

한편, 예수가 주장하는 아버지가 야훼인지에 대해서는 반론이 있다.[8] 첫번째로 토마스 복음서[9]에서는 예수가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그리고 나의 것은 나에게."라고 말한다.[10] 로마 황제와 야훼를 동일선상에 놓고, 자신을 따로 말하고 있다.

두번째로, 논리적으로는 아버지라는 말 자체에 인격성이 있는데 이러한 인격신은 그 자체로 제약성을 띠기 때문에 절대적인 유일신일 수 없다는 의견이다. 이에 의하면 예수가 말하는 신의 절대성은 '존재의 절대성'이 아니라 '인간과의 관계의 절대성'이 된다고 한다.[11] 예수의 가르침만 봐도 예수의 아버지는 구약에 나오는 야훼와는 여러 모로 차이가 있다. 애초에 신을 개인적인 아버지로 규정한다는 것부터가 구약과 매우 다르다. 이건 모세 오경이든 후대의 예언서든 마찬가지의 문제. 또한 전술/후술하듯 구약에서 야훼는 본래 유대 민족의 신이었다. 탈출기만 봐도 "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불평하는 소리를 들었다. 너는 그들에게, '해거름에 고기를 먹고 아침에 떡을 실컷 먹고 나서야 너희는 나 야훼가 너희 하느님임을 알게 되리라.' 하고 일러주어라."[12]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러한 해석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반론이 있다. 첫째, 신구약 중간 시대의 변천에 대한 고찰이 결여되어있다. 메시아가 하느님의 아들로 올 것이라는 전승은 예수 출현 훨씬 이전부터 유대교 분파 중 에세네파 공동체에서 내려오던 전승이었다.[13] 에세네파가 소수 종파이고 기독교와의 관계성도 논란이므로 넘어간다고 치더라도, 두번째로 예수 자신의 발언은 그가 아버지를 야훼라고 주장했음을 입증한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시편의 기도문을 인용하는 등 그는 구약을 즐겨 인용하고, 스스로를 이사야서의 다음 구절에 나오는 야훼의 종과 명백하게 동일시하였다.

그리고 사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의외로 엉뚱한 곳에 매우 명확하게 제시되어있다. 바로 이레네오의 저서 "이단논박"[14]에 나오는 저술이 그것으로, 이레네오는 단호하게 "신이라 불리는 존재는 아버지(성부), 그의 아들(성자), 그리고 입양된 자들 뿐이다."라고 말한다. 사도전승/개신/개혁을 통틀어 그리스도계 전반에 걸처 하느님의 자녀란 말을 자주 쓰는데, 이게 그냥 생각없이 할 소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레네오의 이단논박에서의 서술은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이 하느님의 아들로 입양되는 것이며, 이레네오는 극초기 기독교의 인물이기 때문에 매우 신뢰성 높은 서술이다.[15] 야훼를 아버지라 지칭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것이다.
공동번역 성서 가톨릭 성경 개신교 개역개정
"이제 나의 종은 할 일을 다 하였으니,
높이 높이 솟아오르리라.
무리가 그를 보고 기막혀 했었지.
그의 몰골은 망가져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었고 인간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제 만방은 그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고
제왕들조차 그 앞에서 입을 가리리라.
이런 일은 일찍이 눈으로 본 사람도 없고
귀로 들어본 사람도 없다."

그러니 우리에게 들려주신 이 소식을 누가 곧이들으랴?
야훼께서 팔을 휘둘러 이루신 일을 누가 깨달으랴?
그는 메마른 땅에 뿌리를 박고
가까스로 돋아난 햇순이라고나 할까?
늠름한 풍채도, 멋진 모습도 그에게는 없었다.
눈길을 끌 만한 볼품도 없었다.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퇴박을 맞았다.
그는 고통을 겪고 병고를 아는 사람,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고 피해 갈 만큼
멸시만 당하였으므로 우리도 덩달아 그를 업신여겼다.

그러나 실상 그는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주었구나.
우리는 그가 천벌을 받은 줄로만 알았고
하느님께 매를 맞아 학대받는 줄로만 여겼다.
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주었구나.
우리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며
제멋대로들 놀아났지만,
야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구나.
그는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 번 열지 않고 참았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깎는 어미 양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억울한 재판을 받고 처형당하는데
그 신세를 걱정해 주는 자가 어디 있더냐?
그렇다, 그는 인간 사회에서 끊기었다.
우리의 반역죄를 쓰고 사형을 당하였다.
폭행을 저지른 일도 없었고
입에 거짓을 담은 적도 없었지만
그는 죄인들과 함께 처형당하고,
불의한 자들과 함께 묻혔다.

야훼께서 그를 때리고 찌르신 것은
뜻이 있어 하신 일이었다.
그 뜻을 따라 그는 자기의 생명을
속죄의 제물로 내놓았다.
그리하여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오래 살리라.
그의 손에서 야훼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그 극심하던 고통이 말끔히 가시고
떠오르는 빛을 보리라.
나의 종은 많은 사람의 죄악을 스스로 짊어짐으로써
그들이 떳떳한 시민으로 상게 될 줄을 알고
마음 흐뭇해 하리라.
나는 그로 하여금 민중을 자기 백성으로 삼고
대중을 전리품처럼 차지하게 하리라.
이는 그가 자기 목숨을 내던져 죽었기 때문이다.
반역자의 하나처럼 그 속에 끼여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그 반역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기 때문이다.
보라, 나의 종은 성공을 거두리라.
그는 높이 올라 숭고해지고 더없이 존귀해지리라.
그의 모습이 사람 같지 않게 망가지고
그의 자태가 인간 같지 않게 망가져
많은 이들이 그를 보고 질겁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는 수많은 민족들을 놀라게 하고
임금들도 그 앞에서 입을 다물리니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것을 그들이 보고
들어 보지 못한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우리가 들은 것을 누가 믿었던가?
주님의 권능이 누구에게 드러났던가?
그는 주님 앞에서 가까스로 돋아난 새순처럼,
메마른 땅의 뿌리처럼 자라났다.
그에게는 우리가 우러러볼 만한 풍채도 위엄도 없었으며
우리가 바랄 만한 모습도 없었다.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렇지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 떼처럼 길을 잃고
저마다 제 길을 따라갔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이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다.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구속되어 판결을 받고 제거되었지만
누가 그의 운명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던가?
정녕 그는 산 이들의 땅에서 잘려 나가고
내 백성의 악행 때문에 고난을 당하였다.
폭행을 저지르지도 않고
거짓을 입에 담지도 않았건만
그는 악인들과 함께 묻히고
그는 죽어서 부자들과 함께 묻혔다.

그러나 그를 으스러뜨리고자 하신 것은 주님의 뜻이었고
그분께서 그를 병고에 시달리게 하셨다.
그가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면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 살고
그를 통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그는 제 고난의 끝에 빛을 보고 자기의 예지로 흡족해하리라.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
그러므로 나는 그가 귀인들과 함께 제 몫을 차지하고
강자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게 하리라.
이는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버리고
무법자들 가운데 하나로 헤아려졌기 때문이다.
또 그가 많은 이들의 죄를 메고 갔으며 무법자들을 위하여 빌었기 때문이다.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그가 나라들을 놀라게 할 것이며 왕들은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그들에게 전파되지 아니한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이사야 52장 13절-53장 12절
화자가 야훼인지 이스라엘 사람인지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묘사되어 굉장히 독특한 느낌을 주는 운문이다. 워낙 중요한 구절이다보니, 역판 모두 번역자들이 영혼을 갈아넣어 맛깔나는 번역을 보여준다. 굳이 세 번역을 다 인용한 것도 이 때문이다. 사실 성경에는 여러 화자가 동시에 발언하는 장절이 상당히 많다. 단순히 야훼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열조나 그리스도가 같이 등장하는 경우는 굉장히 흔하며, 심지어 화자중 성경을 읽는 독자가 껴있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모호하게 화자를 섞어둔 책 중 대표적인 것이 대관절 누가 누군지 도저히 구분이 되지 않는 요한의 묵시록. 그나마 화자를 구분하기 쉬운 경우는 아가서를 꼽을 수 있다. 술람미 여인, 왕, 열조로 보이는 화자단이 그나마 명확히 구분된다. 이사아 52~53장의 기록도 시각에 따라서는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가 받을 고난과 그를 통해 열리게 된 구원의 길만을 말하는게 아니라, 그가 걸은 길을 따라 역시 고난을 받을 성도들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이 기록에서 한가지 의문을 줄 수 있는 부분은 "속건제물"을 언급하는 부분인데,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성경 어디를 찾아봐도 예수를 명확하게 인생 전부를 위한 속건제물이라 언급하는 곳이 없으며, 그나마 있는 곳이 이 이사야의 기록 하나 뿐이다. 예수는 성경 전반에서 화목제물이라 언급되지 "속건제"에 해당되는 제물이라 언급되지는 않는다. 그냥 넘기기 쉬운 부분이지만, 제사장직이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넘어가게 되는 과정에서 정통성 부분에서 매우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반드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화목제"와 "속건제"는 전혀 다른 것이다. 끊어진 야훼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제사가 화목제이며, 그 끊어짐을 만드는 원인인 "죄"를 사하는 제사가 "속건제"이다. 옛 율법에 집착하는 것은 기독교에 있어 어처구니 없는 일이나, 기독교는 엄연히 유대교에 대해 장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종교[16]로 "서자"이며,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역사가 서자의 역사이기에 우습게 넘길 문제가 아니다. 유대인으로부터 장자의 권리를 주장해 빼앗은 종교가 기독교이기 때문에 당연히 정통성의 입증이 필요하다.

세번째로, 야훼의 성전에서 모친 성모 마리아에게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발언한 점(루가의 복음서 2:49, 공동번역 성서)에서 예수는 자신의 아버지를 야훼로 인식하고 있다. 네번째로 "너희가 사람의 아들을 높이 들어올린 뒤에야 내가 누구라는 것(Ego sum)을 알게 될 것이다. 또 내가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주신 것만 말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요한 8, 28)"에서 보듯 예수는 자기 자신을 Ego sum이라고 드러내는 독특한 화법으로 자신을 야훼라고 선언하였으며,자신과 아버지는 동일한 본질을 지녔다고 설명했다. 이 문서에서 여러번 강조되지만, 야훼는 성부에게만 해당되는 호칭이 아니다. 그리고 Ego sum은 존재적 절대성을 극도로 강조하는 표현이다. 다섯번째로, 애초에 유대교에서 고백하는 야훼는 인격신이다. 따라서 예수가 주장하는 아버지에게 인격성이 있다고 해서, 야훼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넌센스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대교에서도 예수가 주장하는 아버지가 야훼가 아니라는 식의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유대교가 부정하는 것은 예수가 진짜 야훼의 아들이다라는 믿음이지, 예수가 스스로를 야훼의 아들이라고 믿었다는 것은 부정한 바가 없다. 애초에 예수를 처형한 죄목부터가 스스로 야훼의 아들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즉, 예수가 말한 '아버지' 가 야훼가 아니었다는 게 아니었다.

그나마 이슬람의 경우에는 이야기가 다를 수 있는데, 이슬람교에서는 성경은 본래 야훼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으나 변개되었고, 쿠란에는 그 메시지가 100% 온전히 보전되어있다고 본다. 그리고 쿠란에서 예수가 야훼의 아들이며 야훼 그 자체라는 말이 강하게 부정된다. 어차피 성경은 이슬람교의 입장에서 보자면 변개되어 신뢰성에 문제가 있기도 하고. 보통 예수에 대해 언급할때는 복음서의 예수를 말하지만, 굳이 복음서에 한정시키지 않는다면 가장 유효한 반론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비슷한 사례로, 역사적 예수 떡밥을 도입하여 복음서의 묘사에 반론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다. 다만 역사적 예수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거의 난장판에 가까울 정도로 정립이 안되어있고, 특히 예수가 주장하는 아버지가 야훼가 아니라는 떡밥이 학계에서 논의된 적은 없다.

3.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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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000,#ddd> 위에서부터 페니키아 문자(BCE 10세기), 고대 히브리 문자(BCE 10세기~2세기), 히브리 문자(3세기~현대)로 나타낸 테트라그람마톤. 메사 석비(기원전 840년경)에 음각된 테트라그람마톤.
[𐤕 𐤟 𐤅𐤓𐤇𐤌𐤕 | 𐤊𐤉 𐤟 𐤋𐤏𐤔𐤕𐤓 𐤟 𐤊𐤌𐤔 𐤟 𐤄𐤇𐤓𐤌𐤕𐤄 | 𐤅𐤀𐤒𐤇 𐤟 𐤌𐤔𐤌 𐤟 𐤀[𐤕 𐤟 𐤊
𐤋𐤉 𐤟 𐤉𐤄𐤅𐤄 𐤟 𐤅𐤀𐤎𐤇𐤁 𐤟 𐤄𐤌 𐤟 𐤋𐤐𐤍𐤉 𐤟 𐤊𐤌𐤔 | 𐤅𐤌𐤋𐤊 𐤟 𐤉𐤔𐤓𐤀𐤋 𐤟 𐤁𐤍𐤄 𐤟 𐤀𐤕
[𐤉𐤄𐤑 𐤟 𐤅𐤉𐤔𐤁 𐤟 𐤁𐤄 𐤟 𐤁𐤄𐤋𐤕𐤇𐤌𐤄 𐤟 𐤁𐤉 | 𐤅𐤉𐤂𐤓𐤔𐤄 𐤟 𐤊𐤌𐤔 𐤟 𐤌𐤐𐤍[𐤉 𐤅
여종들을 (죽였다.) 왜냐하면 내가 아쉬타르 그모스를 위해서 제물로 구별해 놓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야훼의 …을/를 탈취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그모스 앞으로 옮겼다. 이스라엘의 왕은
야하스를 건축하였다. 그리고 그는 나와 전쟁을 하는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그모스는 그를(내)앞에서 쫓아냈다.
메사 석비 17~19행. 성서학연구소 BIBLIA (PDF) 번역.

유대인은 십계명 중 제3계명 '주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를 따랐다. 성경을 읽을 때 주님의 이름을 소리 내지 않았다. 꼭 말해야 할 때는 '아도나이(, 주님)'라고 했다. 신학자들에게 굳이 어느 쪽의 확률이 높을지 묻는다면 야훼 쪽이 좀 더 우세하다.[17]

성경에서는 야훼를 ''로 부르는 용례가 많다. 성경에서의 용례를 보면 가나안 원시종교(우가리트 신화)의 야훼의 전신인 엘과, 아브라함의 하느님을 일컫는 엘을 개념적으로는 구분하고 있지만, 용어 자체는 가나안의 '엘'에서 영향을 받았다. 비슷한 사례로, 라틴어에서 제우스를 일컫던 이칭인 'Deus'와 불교에서 제석천을 일컫던 이칭인 '천주(天主)'가 기독교의 어휘에 흡수된 사례를 들 수 있다. 라틴어그리스어의 공통조어인 인도유럽조어로 빛나는 하늘, 낮 하늘을 가리키는 '*Dyḗus'가 시간이 지나며 각 언어로 분화되고 라틴어에서는 Deus, 그리스어에서는 Zeus로 변화하였다. 여기서 제우스를 일컬어 'Deus Pater(아버지 신)'로 불렀고 이 단어가 변화해 라틴어로 제우스를 뜻하는 'Juppiter'가 나왔다.

원래 유대인들은 신의 이름을 히브리어로 'יהוה'라고 기록하였는데, 이를 라틴어계 문자로 옮기면 YHWH 또는 YHVH가 된다. 후일 그리스어로 '테트라그람마톤(τετραγράμματον)[18]'이라고 불리게 되는 이 네 글자 단어는 십계명의 '주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규율에 따라 직접 불려서도 기록되어서도 안 되었기 때문에, 읽을 때는 '아도나이(나의 주님)'라고 바꾸어 읽었다.

그러나 고대 히브리 문자는 자음만으로 표기되었기 때문에[19], 세대가 지나며 어떤 모음을 붙여서 읽는지를 잊어버렸다. 지금까지 발견된 여러 히브리 성경 사본 중에는 후대에 모음을 잘못 붙여 내용이 왜곡되는 것을 막기 위해 회화적으로는 사장된 모음을 굳이 붙인 성경도 여럿 존재한다. 다만, 이러한 사본 역시 계명을 철저하게 지키기 위해 테트라그람마톤만은 모음을 붙이지 않았다. 말 그대로 감히 읽기가 두려워 읽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후세 학자들이 YHWH를 어떻게 읽는지 연구한 끝에 여러 학설이 나왔다. 르네상스기에 신의 이름을 음역해보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재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임시방편으로, 기록된 네 자음(JHVH)에 '주님'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독음 아도나이(אֲדֹנָי; adonay)의 모음을 끼워넣어서 나온 단어가 바로 יְהֹוָה(Y'HoWaH, 여호와)[20]이고, 이를 한국의 개신교에서 받아들였다. 덕분에 개역성경이나 개역개정판성경은 죄다 여호와로 기록되어 있다.

יהוה(YHWH)의 원래 발음에 대해서는 야흐오, 야흐와 등의 다양한 학설이 있지만, 야흐웨 또는 야훼[21]라고 읽는다는 주장이 가장 유력하게 여겨지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학자들간에 YHWH의 첫번째 모음이 'a' 라는 데에는 이론이 없으나 2번째 모음 이후부터 이견이 존재하는 상황이다. 아무튼 19세기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성서학자들은 야훼라는 이름을 다시금 사용하기 시작했다.

'야흐웨'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탈출기(출애굽기) 3장을 보면
3:13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개역개정)
위와 같이 신이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라고 말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이 표현의 원문이 'אֶהְיֶה אֲשֶׁר אֶהְיֶה'(eh'yeh asher eh'yeh, 에흐예 아셰르 에흐예)[22]이고, 여기서 '(나는) 존재한다'를 의미하는 אֶהְיֶה(eh'yeh)[23]의 동사 원형 הָיָה(hayah)의 다른 형태인 הָוָה(hawah)에서 유래했다고 보는 것이다. 실제로 הָוָה의 사역 3인칭 남성 단수 미완료형은 יַהְוֶה(yahweh, 야흐웨)이고 이 활용형의 의미는 '(그는) 존재하게 한다'이다. 미완료형이기 때문에 그리스 철학의 '본질'의 개념이 아니라 '현상적', '기능적' 개념에 가깝다.

그리스어 필사본도 '야훼'라는 발음의 근거가 된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그리스어 70인역 사본은 테트라그라마톤을 ΙΑΩ(야오)로 옮긴다.[24] 이 외에도 기원전 역사가 디오도로스와 2세기 신학자 오리게네스Ἰαῶ로 적었다. 유대 태생인 교부 에피파니오스는 이를 Ἰά(Ia, 야) 또는 Ἰάβε(Iave, 야베)로 음차했고, '전에도 계시고 지금도 계시며 항상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Ἰαοὺ(Iaoú, 야우)[25]로 기록했고, 테오도레투스사마리아인들은 Ἰαβέ / Ἰαβαί (야베)로 부른다고 기록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가톨릭 신자가 전례나 기도 중에 신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에 맞추어 가톨릭 성경 역시 그 부분을 주님(dominus, κύριος) 등으로 치환하여 재판하였다. '야훼'의 발음이 언제든지 잘못된 것으로 밝혀질 여지가 남아있을 뿐 아니라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10계명의 계명[26]에 충실하기 위해서이다. 다만 가톨릭 신자가 학술적인 이야기를 하는 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개신교의 개역 성서에서는 옛날부터 사용했던 이름인 '여호와'를 존중하여 개정판에도 그대로 수록했으나, 표준새번역 및 새번역 성경에서는 YHWH를 모두 '주'로 치환하였다. 이는 70인역 및 불가타, 루터 독일어역, 제임스 흠정역 등이 모두 그 4글자를 '주'로 치환한 교회의 전통을 따른 것이라고 한다.[27] 물론 YHWH와 결합된 이름인 여호와 이레, 여호와 닛시, 여호와 샬롬, 여호와 샤마 등은 그냥 개역 성서의 표기에 익숙해진 독자들을 고려해 여호와로 표기했다.[28]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속한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교단은 개신교임에도 '야훼'로 호칭한다. 조용기 목사가 설교 때 항상 야훼라고 발음한 것의 영향이다.

야훼라는 이름 뒤에 수식어가 붙어 하나의 뜻을 형성하기도 하는데 대표적인 예로는 다음 것들이 있다.
테트라그람마톤에 해당하는 Y, H, W, H 이 4문자를 게마트리아로 풀면 각각 10, 5, 6, 5로 26이 나온다.

이슬람에서는 야훼를 지칭하는 이름이 99가지나 있는데 이를 아스마 알라 알 후스나(أسماء الله الحسنى; 신의 아름다운 이름들)라고 한다. 그 이름들 중에서 자주 쓰이는건 알라(الله). 알라는 정관사 알(ال)과 신을 뜻하는 일라(إله)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아랍어 단어이며, 아랍어와 같은 셈어파히브리어아람어의 '엘'(אֵל)과 어원이 같다. 그런데 흔히 '알라'라고 하면 오직 이슬람의 신만을 뜻한다고 생각하지만 아랍계 기독교인들도 자신들의 신을 '알라'라 부르며, '알라'는 아랍 지역에서 신이라는 뜻을 가진 보통명사로 자주 쓰인다.

한편으로 현대 천주교의 정상급 신학자로 평가받는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자신의 저서 <나자렛 예수>에서 다음과 같이 이 이름을 풀이한 바 있고, 가톨릭 성경에서 이 이름을 직접 서술하는 게 기피되는 까닭도 이 글로 이해하는게 가능하다.
당시에는 많은 신이 있었다. 그래서 모세는 하느님의 이름을 묻는다. 실제로 하느님은 다른 신들과 비교해 특별한 권위를 지닌 분으로 당신의 신분을 밝히신다.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의 이름이라는 관념은 일차적으로 다신교를 믿는 세계에서 통용되는 관념이다. 그러니 이런 세계에서는 모세의 하느님도 당신의 이름을 말해주어야 했다. 그러나 모세를 부르신 하느님은 여느 신이 아니고 진짜 하느님이시다. 본래 참된 의미의 하느님이란 여럿일 수 없다. 하느님은 본질상 한 분 뿐이시다. 그러기에 그분은 신들의 세계에 있는 신들 중 하나로 등장하실 수 없다. 그분의 이름이 다른 신들의 이름 가운데 하나일 수는 없다.
이와 같이 하느님이 주시는 응답은 모세의 물음에 거절하는 답이기도 하고 그 물음에 응하는 답이기도 하다. 그분은 당신 자신에 대해서 "나는 있는 나다."하고 말씀하신다. 그러니까 그분은 단순히 '있는 분'이다. 이스라엘에서는 하느님이 당신의 신원을 몸소 밝혀주신 이름, 곧 '야훼YHWH'라는 이름을 소리내서 부르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그것은 그분의 이 이름을 다른 신들의 이름 가운데 하나로 격하시키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성경을 새로 번역하면서 이스라엘에게는 언제나 신비에 차 있고 함부로 발음해서는 안 되었던 이 이름을 여느 이름처럼 적어놓는 경우가 있다. 그 결과 그분의 신비를 일반적인 종교사의 평범한 사례로 끌어내리게 되었는데 이것은 옳지 않다. 하느님께는 그분을 그려 보일 수 있는 어떤 그림도, 그분을 부를 수 있는 어떤 이름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자렛 예수> 국역번 1권 221~222p에서 인용

3.1. 한국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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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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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천주교정교회, 성공회여호와의 증인하느님, 대부분의 개신교 교파들과 후기성도 교회, 이슬람하나님이라고 호칭한다. 최초로 천주교 교리서를 동양 언어로 집필한 마테오 리치가 '신'을 대체하기 위한 표현으로 동양권 내의 문화에서 적절한 표현을 찾던 중에 불교제석천을 의미하는 '天主'를 사용했으며, 한국 가톨릭의 신자들도 '천주님'이라고 불렀다. 이 번역덕에 많은 신자들은 '기독교의 YHWH'를 상제(上帝), 제석천 등의 관념과 유사하게 이해하였고, 이것은 매우 큰 효과를 발휘하여 한국 대중들이 별 거부감이나 이질감 없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하는데 공헌했다.[30]

이후 개신교가 한국에 유입되면서, 가톨릭을 따라하여 역시 '천주님'으로 절대신을 호칭한다. 문제는 당시 개신교를 보는 가톨릭의 입장은, '빼도박도 못하는 이단 놈들'이었고, 당연히 개신교 쪽과 가톨릭 쪽의 갈등이 있었다. # 이후 개신교 측에서 '천주님'이라는 호칭을 '하ᄂᆞ님'(하ᄂᆞᆯ + 님)으로 변경하고 [하나님]이라 발음했다.[31] '하ᄂᆞ님'을 '하나님'이라고 읽은 이유는 당시 개신교 숫자가 많았던 평안도 지방[32]에서 '하ᄂᆞᆯ(天)'을 '하날'이라고 발음해서 '하ᄂᆞ님' 또한 '하나님'이라 발음했기 때문이다. 결국 신명을 표준어가 아닌 서북방언을 개신교가 쓰고 있는 것이다.

이후 1977년 가톨릭과 개신교가 함께 '공동번역성서'를 출간하면서, 한국 가톨릭에서도 이 '하ᄂᆞ님'이란 번역을 받아들였다. 이 당시에는 표준어가 널리 퍼졌기 때문에 그에 따라 당연히 '하나님'이 아닌, '하느님'을 공식적인 호칭으로 채택하게 된다. 공동번역성서를 사용하는 '성공회'와 '정교회' 역시도 하느님이라는 호칭을 채택한다. 다만 당시 천주교측과 합의한 종파는 개신교 중에서는 마이너였고, 공동번역성서에 참가하지 않은 대다수의 개신교 종파들은 하나님이라는 호칭이 여전히 주류이다. 일부 견해로는 이를 유일신의 의미를 강조한 '하나' + '님'으로 풀이하여 '하느님' = '하늘' + '님'과 구분하기도 한다. 한국 이슬람에서도 '하나' + '님'이라는 해석을 받아들이고 있다.[33]

3.1.1. 멸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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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내에서 매우 흔히 통용되는 멸칭으로 ‘사막잡귀(沙漠雜鬼)’ 혹은 ‘사막잡신(沙漠雜神)’이 있는데[34], 이는 특히 구약에서 야훼가 전지전능전선의 유일신이라고 보기에는 납득하기 어려운 졸렬하거나 사악한 행적을 다수 보이기 때문에 유통되는 멸칭이다.# 특히 현대적인 윤리관에서는 도저히 납득하거나 용납할 수 없는 잔혹한 범죄, 제노사이드급의 악행들도 많은데 이런 것을 태연히 믿는 극우 개신교도들이 많다보니[35] 그 참상을 접하게 되는 비신자 입장에서는 사막잡귀라는 표현을 저절로 사용하게 되는 것.

이에 더해 개신교인들의 비매너 행동이나 민폐행동을 지적할 때에도 즐겨 사용되는 멸칭 #이라고 할 수 있다. 구체적인 어원이나 단어가 생긴 시기는 불명이다. 다만 해당 멸칭의 사용은 적어도 20년 가까이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보인다. 구글 서치를 하면 가장 오래 전으로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약 2007년 정도로 보인다. #

야훼 신앙의 기원지가 되는 가나안 지역은 사막과 접하고 있긴하나 그 자체로 사막기후는 아닌데 아마 사막잡귀라는 명칭이 붙은 것은 이집트를 탈출해 홍해를 가르고 도망쳐 나와 광야를 방랑했다던 출애굽기가 뭇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기 때문인듯하다. 모세가 방랑했다는 그 광야가 바로 현대의 시나이 반도네게브 사막으로 이 지역 일대는 사하라 사막의 연장으로 극히 건조한 사막기후이다. 네게브 사막은 현재 이스라엘의 영토이기도 하기 때문에 사막잡귀라는 명칭이 아예 잘못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성경의 배경이 되는 지역 가운데 상당수가 당대에도 사막이었거나 당시에는 사막이 아니었으나 지금은 사막화되어 사막이 된 곳들이 다수이다.

개신교인들은 이러한 멸칭에 대해 상당한 거부반응을 보이는듯 하다.# 이런 심리를 역으로 이용해 사람들은 근본주의 개신교도, 극우 개신교도들을 도발하기 위해서 일부러 사막잡귀, 혹은 사막잡신 같은 명칭을 즐겨 쓰기도 한다.

한편 일부에서는 이슬람의 주신인 알라를 모욕하고자 사막잡귀라는 표현을 쓰는 개신교도들도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3.2. 이름의 유무에 대한 논의

흔히 '야훼'라고 불리지만, 야훼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그는) 존재하게 하다'와 같이 동사 활용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 '야훼'라는 발음을 추정하는 데에 바탕이 된 말 '에흐예'(אֶהְיֶה)는 모세가 이집트인들이 신의 이름을 물으면 뭐라 대답하냐고 물은 것에 대한 대답으로 처음 등장한다. 모세가 이런 질문을 한 것은 당대 중동, 이집트, 그리스 등을 포함한 인도유럽의 원시종교는 이름에서 그 권위가 나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몇몇 신화에선 이름이 곧 하나의 신격체를 상징하여, 이름이 바뀌면 권위나 능력, 성격, 외형, 가족관계 등이 달라지기도 하고 분명 동일시되는 두 이름의 신이 동시에 등장하기도 했다. 다시 말해 '태양의 신 라'와 '창조의 신 아툼'은 하나의 같은 신일 수도, 다른 신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일부는 그 이름을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름은 곧 신의 전부였다. 신화에서도 항상 이름을 말함으로서 권위를 드러내고, 드러나지 않은 이름을 찾으려 애쓰거나, 이름이 여러개라 하나의 모습으로 한정지을 수 없다는 등의 이야기가 나온다.[36]

여기서 야훼는 파격적으로 그저 '나는 나다'라는 말로써 그 제한될 수 없는 권위를 드러낸 것이다. 쉽게 말해 나는 '번개의 신 야훼'라거나 '물질의 신 야훼'라거나 '사랑의 신 야훼'라거나 '창조의 신', '모든 것의 신', '이스라엘인의 신', '우주의 신'같은 게 아니라 그런 수식적 표현과 이름에 속박될 수 없는, 그저 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야훼라는 말은 일종의 회피성 표현이 되는 것이라 드러내지 않은 진짜 이름이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런데 여기서 야훼에게 진짜 이름이 있다면 애초에 야훼는 스스로 존재하는 신이며 모든 것 앞에 존재하는 최초의 존재이므로, 자기가 자기 이름을 직접 지은 것이 된다. 모세 이전에 야훼와 동등하게 이야기한 자가 없었으므로 피조물이 그의 이름을 지어준 것도 아니고. 따라서 이것은 단순히 야훼가 진짜 이름이 맞냐 아니냐의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이름의 철학적 의미와 이름지음과 이름불러짐의 철학적, 신학적 논쟁을 함께 바라보아야 한다.

범재신론에 따르면 모든 것을 궁극적으로 포괄하는 신은 그 자신을 다른 무언가와 분리해서 부르는 '이름'을 가질 수 없다고 한다. '이름'이 있는 순간부터 모든 것을 포괄한 그 자신의 바깥 영역이 존재한다는 소리가 되니까. 예컨대 우리는 동그랗고 딱딱한 과일에게 '사과'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사과인 것'과 '사과가 아닌 것'을 구분하는데, 신학적으로 신은 모든 것을 포괄한 존재이므로 신을 신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와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철학적으로 접근했을 때 소쉬르의 이론에 따르면 이름을 가진 특정 기호는 다른 기호와 구분되는 것으로만 자신을 특정할 수 있는데, 이 경우 신에게 이름을 붙이게 되면 신과 같은 층위에서 '신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있다고 필연적으로 가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물론 기독교는 범재신론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본인이 본인 스스로를 다른 신...으로 불리는 무언가들과 구분하기 위해 이름지었다는 점에서 결국 비슷한 상황이긴 하다. 우리가 우주를 그냥 '우주'라 부르지 '우리 우주'[37]라고 부르지 않듯, 신이 하나면 그냥 신으로 부르면 되지 다른 이름이 있을 필요가 없다는 설명이다.[38]

사실 이러한 생각은 영지주의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영지주의 요소가 포함된 위경 중 하나인 요한 비밀의 서에서 야훼 위의 존재가 없고 야훼는 피조물이 아니므로 이름이 있을 수 없다고 한다.[39]

물론 성경상의 신은 스스로에 대해 "나는 나다" 같은 표현으로만 언급하며[40], 고전 히브리어로 '야훼'가 갖는 의미는 앞선 항목에서 설명한 것처럼 '존재하다'를 의미하는 동사의 활용형으로 '(그는) 존재하게 한다'[41]이기에, 신이 갖는 특성(창조주)을 설명하는 발음에 가깝다. 즉 '야훼'는 오늘날 성경의 신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처럼 쓰이지만 본질적으론 고유명사가 아니기에 애초에 이름의 유무에 대해 논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4. 회화적 표현과 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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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천지창조』. 오른쪽 옷을 입은 노인이 야훼이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해와 달과 초목의 창조』에서 묘사된 야훼.
고전 시대부터의 예술작품에서 야훼는 그리스 로마 신화제우스와 같이 백발과 흰 수염이 있는 백인 노인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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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훼의 가장 널리 알려진 표현 중 하나인 섭리의 눈.[42]
이외에 출애굽기의 묘사처럼 온 몸이 빛나는 인간의 형상인 경우도 있다. 따져보자면 인간의 몸을 입고 왔을 당시 즉 예수의 모습, 보통은 예수와 비슷하게 생긴 흰 세마포 옷을 입었을 수도 있지만, 보통은 머리와 수염이 하얀 구름 위에 있는 노인 정도로 묘사하거나, 말로 표현하기 힘든 초현실주의적으로 그려지거나 아예 실체가 없는 빛의 덩어리로도 묘사한다.

한편 토마스 아퀴나스
신은 시작도 끝도 없는 무한한 바다와도 같다.
이 바다는 끊임없이 출렁이며 물살과 물방울, 안개를 시도 때도 없이 형상하는데 이는 우리 존재물들이다.
바다는 물방울을 포괄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 부분은 물방울 속에 들어있기도 하다.
바다가 출렁일 때 모든 것이 잠깐 나타났다 곧 사라진다.
허나, 이 바다는 무작정 출렁이기만 하는 것이 아닌 끝없는 지혜와 거룩한 의지로 충만해 자신의 계획대로 출렁인다.
라며 신을 무한한 바다로 표현했다.
어떤 묘사를 하든, 이는 모두 신의 영광 또는 신의 위엄으로 신이 현현한 모습이지 신의 본체는 아니다. 신은 영이라 실체가 없다.

야훼는 어떤 모습이라도 취할 수 있는 존재이며 모습을 취할 필요가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성경에서는 하느님은 영이시라 인간과 같은 형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며, 신학을 조금이나마 안다면 창세기의 "우리의 모습을 본 따 우리와 같이"의 신의 말이 물리적 형태가 닮았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것은 알수 있다.

애초에 모든 것을 초월했다는 시점에서 그에게 본모습이란 개념은 통하지 않는다. 무엇을 그리거나 표현해도 그게 야훼의 모습이 될 수 있다. 전지전능하니 원하는 모습으로 언제든지 바꿀 수 있으니까.

시간적으로 보면 과거부터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일반상대성 이론에 시공간은 같은 본질이므로 공간적인 개념도 마찬가지로 이곳에 있는 동시에 저곳에 있고 모든 곳에 동시에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형태 자체를 논할 수 없다. 모든 곳에 동시에 있는 물체는 어떻게 생겼는가를 묻는 질문과도 같다.

간단하게 말하면 전지전능한 초월한 존재기 때문에 우리의 능력으로는 그려낼 수도 없다는 것. 비유하자면 ∞을 100으로 나누어 봤자 간단하게 표현해도 여전히 ∞이라는 식이다. 때문에 유대교나 기독교, 이슬람에서는 그림이나 석상 등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은 신성 모독으로 간주하거나 다른 이교도 신으로 여긴다. 기독교 중 개신교, 그중에서도 츠빙글리와 칼뱅의 영향을 받은 개혁교회들은 시각적 요소를 엄격하게 배제하고 있다. 이슬람에서는 매우 중요한 문제로, 이슬람교에서 신은 그 어떤 시각화한 이미지도 가지지 않는다. 인간의 형상이 아닌 하다못해 두루뭉술한 빛으로도 표현해서는 안된다.

5. 신격과 특징

5.1. 유일성

야훼와 고대 근동 종교 문헌의 가장 크고 분명한 차이점은 신의 숫자이다. 창세기는 다수의 신을 믿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신은 오직 한 분이라고 가르친다. 창세기에서는 오직 하나의 신이 하늘과 땅, 바다, 땅과 식물, 천체, 동물과 사람 등 만물을 창조하였다고 나온다. 따라서 각 창조물이나 영역에 별도의 신이 존재하지 않고, 신들끼리 경쟁하지도 않는다. 유일신이 만물을 주재하며, 모든 것을 통제하는 것이다.

5.2. 초월성

위의 유일성과 연동해서 또한 창세기 기사에서 눈여겨 볼 점은 초월성이다. 즉 야훼는 모든 피조물 이전에 존재했었고, 만물을 창조한 주인으로, 만들어진 사물과는 구분된다. 어떤 의미에서 야훼는 자연 질서를 초월하여 그 외부에 있는 '초자연'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 말에서 '초자연적'이라는 단어가 파생했다.

우리는 이런 야훼의 특성이 당시 이스라엘 이웃 나라들의 신관과 얼마나 다른지 볼 수 있다. 그들에게는 하늘과 달, 태양 등이 곧 신이었고, 최소한 신들은 이런 자연요소와 불가분의 관계였다. 이집트의 세티 1세가 지었거나 그를 위해 지은 오시리스 신전 천장에는 누트 여신의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 누트는 하늘처럼 공중에 펼쳐져 있었다. 공기의 신 슈가 누트를 떠받들고 있다. 슈는 땅의 신 게브 위에 서 있다. 해와 달과 별을 포함한 다른 신들은 누트의 다양한 부위에서 형성되었다가, 적절한 시간에 다시 돌아갔다. 슈는 누트를 떠받들고 있을 뿐 아니라, 넷에서 여덟 신의 도움을 받아 하늘에 있는 물을 막고 있다. 이처럼 세상의 각 요소는 개별 신과 연결되었다.

그런데 성경에 계시된 신관은 다르다. 야훼는 태양이나 폭풍 가운데 있지 않고, 이 세계를 초월하여 다스린다. 그리하여 공간이든 시간이든 만물을 다스리는 유일신은 자연법칙에 종속되지 않는다. 자연과 우주마저 야훼의 일부가 아니라, 그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피조물에 불과했다.[43]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러한 초월성 때문에 극히 제한적인 안목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하느님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바둑 초보가 바둑 프로 기사의 수를 이해하는 것도 불가능한데, 인간이 전능자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 것이다.

5.3. 전지·전능·전선

전지(全知, Omniscience)·전능(全能, Omnipotence)·전선(全善, Omnibenevolence)

말 한 마디로 만물을 창조하고(창세기), 홍해를 갈랐다가 도로 합쳐놓으며(출애굽기), 소돔고모라를 하루만에 불과 유황으로 흔적도 없이 날려버린다.(창세기) 그리고 이미 폐경한 늙은 부부가 아이를 낳고, 의미가 담긴 꿈을 꾸게도 한다. 물론 천지창조 7일째 되는 날 안식하였다고 나오지만, 일곱째 날에 피곤해서 안식했다는 암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44] 오히려 안식일의 '쉼'은 창조 활동의 마감을 뜻했다.[45] 이외에도 수많은 기적을 행했지만 전지전능하기 때문에 해 멈추기(여호수아)[46], 죽은 사람 살리기(4복음), 흐르던 폭포물 자르기(여호수아)[47][48][49] 모든 첫 생명을 죽이기(출애굽기) 등등 인간이 생각할 때 과학적으로 말도 안되고 우주의 법칙을 근간째 뒤흔들며 위배하는 행동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야훼에게는 정말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바빌로니아 서사시 에누마 엘리쉬에 등장하는 압수[50] 주신은 자신의 소생 에아[51]의 주술로 잠에 빠진다. 그는 잠을 자는 동안 결박을 당하고, 죽음에 이른다. 그러나 야훼는 이 정도로 유약하지 않다. 그는 창조 세계에 속하지도 않고, 종속당하지도 않고, 오히려 창조 세계를 초월한다. 성경에서 야훼는 자신을 물질세계와 시간을 초월하는 존재로 계시한다. 야훼는 세계를 창조했지, 세계에 얽매이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7일 창조에 대한 의문에 대해 히브리 시대의 '하루'는 24시간 단위의 '하루'만 칭하는 것이 아님을 유의하는 게 좋다. 성서의 다른 책들에서도 하루(날)가 수 일에서 수십 일을 가리키곤 한다. 즉, '창조의 날들'은 실제의 일주일이 아니라 일곱으로 나눠진 수천만년의 기간일 수 있다는 것. 이러한 해석을 신학적으로는 '골격해석'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성서무오설을 믿는 사람들이 들으면 스프링처럼 튀어오르며 반발한다.[52] 애초에 지구가 도는지 태양이 도는지도 모르는 고대인들에게 '우주는 137억년 전에 빅뱅을 통해 힉스입자가...' 하며 설명해주는 게 의미가 있을까? 성경은 그런 과학책이 아니다.

다만 오해를 막기 위해 말하자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전능'은 '절대자의 본성에 모순되지 않는 한 하고자 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능력'을 일컫는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본성에 모순되지 않는 한 하고자 하시는 것을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능력. 하느님의 작용적 속성에 속한다. 하느님께 있어서 지성과 의지와 능력은 하나이며 서로 명확히 구별되지 않는다. 이 능력은 하느님이 지니신 최고 권위의 표현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9)고 하신 말씀에서 그 권위가 나타나 있다. 이 능력으로 세상에 하느님의 왕국을 확장시키는 것이다. 전능은 세상의 창조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인식되었고(창세 2:7, 이사 29:15-16, 예레 18:1-6, 로마 9:19-24), 지혜와 관련되었다(지혜 7:24-25, 욥기 37:14). 하느님의 전능은 또한 당신의 구원능력을 통하여 나타났고(출애 4:1-5, 예레 16:21, 이사 50:2),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을 이루었다(마태 8:1-27, 골로 1:10-12). 그리스도의 강생, 기적, 부활 등은 그리스도가 지닌 능력의 표현이며(루가 1:35, 사도 2:22-24), 그리스도 자신은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이 지니신 전능의 표현이다(1고린 1:18-25). 이 전능에서 성령이 참여하고(1고린 2:4-5, 에페 3:16, 로마 1:4, 15:13:19), 사도계승을 통하여 교회 안에 전달되며(사도 1:8, 1데살 1:5, 2디모 1:7-8), 성세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 교인들에게 전해진다(에페 6:10-13, 골로 2:12).
가톨릭 대사전, '전능' 항목
따라서 "하느님은 전능하시니까 나쁜 짓도 하실 수 있나요?" 같은 질문은, 기독교 교의로 볼 때 상당히 맥빠지는 질문인 감은 있다.

성부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삼위일체론 교리에 의하면 같은 본질이나 다른 위격, 단순하게는 외아들인 걸로 나온다. 청나라에선 기독교 신자인 홍수전이라는 사람이 뭔가 계시를 받는 듯한 꿈을 꾸고서, 이 성부의 둘째 아들을 자처하며 태평천국운동을 일으켰다. 홍수전 외에도 성부의 둘째 아들 같은 걸 자칭한 사람은 종종 있었다.

이 이외에도 기본적으로는 선을 나타내지만, 선이라는 개념을 좀 더 명혹히 하기 위해 그에 반하는 악을 만들어내고 반면교사로 만들어내기 위한 수단으로써 악을 방치한다는 것. 악을 저지르면 지옥에 가기 때문에 현세의 사람들이 악인들이 벌받는 것을 보고 선과 악의 개념이 더 명확해진다는 설이다.

비신자의 입장에서는 성경에서의 하느님의 모습이 절대적으로 선해 보이지 않을 수 있으나, 기독교에서는 죄를 회개하고 하느님과 가까워질수록 성령으로 말미암아 잘못된 선입견이 제거되고 하느님의 선하심을 깨닫게 된다고 본다.

또 하나로는 전지(모든 것을 알고)·전능(모든 것을 행할 수 있는) 성질에 있다는 것. 특히 전지(모든 것을 알고 인식한다)라는 것은 애초에 인간만이 멋대로 신이 선하다고 믿는 것일 뿐 사실 신에게는 그런 경계가 없다는 것이다. 선과 악의 경계 자체를 초월하여 그냥 이것 저것 만들다보니 선인도 악인도 창조된 것이라는 설이다. 이를 자조적으로 보는 입장의 소설이나 애니메이션 등에서는 마치 신이 세상을 심시티 게임하는 것처럼 묘사하기도 한다.

등등등 이런 식으로 아예 이 전지전능을 부분을 하나의 항목으로 만들어도 될만큼 여러가지 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딱히 대다수 사람들에게 공감 받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특히 소설이나 애니메이션 등에서 해석된 신은 종교인들이 보면 펄펄 뛸 정도의 내용들로 가득한지라.

허나 일단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실을 놓고 보면 이런데…
때문에 교의적인 원안을 놓고 보면 전지전능신이라는 것은 기독교 형성 이후에 갑툭튀, 그것도 한 4세기쯤에나 튀어나온 주장이 아닌가 하는 의견이 있다. 그러나 정작 유대인들도 그들의 신을 전능한 하느님이라 불렀으며, 결정적으로 야훼는 출애굽기에서 이미 자신이 전능한 하느님이요, 창조주임을 밝혔기 때문에 전지전능성이 기독교 형성 이후의 갑툭튀라 보기는 어렵고 히브리인들이 아주 독특한 종교관을 가졌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초기 교부들이 모세오경을 유대인들 모르게 고쳐서 유대인들에게 나눠준게 아닌 이상은…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는 모세가 히브리인들을 이끌고 출애굽한 다음부터 본격적으로 형성되는데 이미 모세에게 야훼는 자신이 전능자이며 지존자임을 분명히 밝혔고, 모세오경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위의 전능하다는 고백이 4세기에 갑툭튀 했다는 주장은 기독교로서만 본지라 정작 그 틀이 된 유대교의 교리를 고려하지 못한 것. 즉,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는 그 시초부터 야훼가 전능하다는 고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5.4. 만들어지지 않은 신

다른 종교의 신화 속에는 그들의 신들이 만들어진 과정이 나와 있다. 그런데 출애굽기에는 모세가 처음 야훼를 만났을 때, 당신의 정체가 무엇이냐고 묻는 장면이 있다. 이에 대해, 야훼는 자신을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다.'라는 말로 설명했다.

자신을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고 설명한 까닭은 자신은 누군가의 자식이거나 혹은 어떤 초월자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말한 것이다.

인간이 섬기는 대다수의 신들이나 초월자들은 대부분 자신을 낳아준 부모가 있다.[53][54] 즉, 그들은 스스로 존재하고 싶어서 존재한 신이 아니라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태어나거나 만들어진 신이다.

반면 야훼는 자신은 스스로의 의지로 존재한다는 것을 말함으로서 다른 신들과 구별되는 초월적인 존재임을 부각한 것이다.[55] 물론 다른 종교에도 이와 비슷한 창조주나 조물주라는 개념은 있지만[56] 이런 신들은 우주의 법칙을 관장하지 인간사에 관여하는 신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섬기지는 않았다. 창조신이면서도 인간사에 깊게 관여하는 야훼가 굉장히 특이한 케이스. 즉, "창조신을 섬기는 근본주의"임을 주장한 것인데… 이것도 좀 사연이 있는 편이다.

사실 중근동의 종교는 지역 실세에 따른 종교의 문제가 있어서, 도시국가 1이 지역의 패권을 잡으면 그 도시국가의 종교가 킹왕짱이 되는 습성이 있었기 때문에 "주신의 위치는 언제나 변동성"이 있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실 이런 창조신 놀이는 그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으로 "주신이 부족신들 위에 서기 적당한 형평성"을 주장하기 위한 일종의 설정놀이라고 할 수 있겠고, 달리 말해서 "그 다른 신들(후대의 천사)"위에 서는 당위성은 그 신들의 "애비이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고려되는 것과도 같은 논리다.

후대 유대교의 해석 개념에서는 이것이 태초로부터 스스로 존재하기로 규정된 것, 즉 태초의 무한으로부터 처음 존재하게 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하며, 실제로 이 개념은 카오스로부터 태어난 우라누스와 가이아 등과 비슷한 견지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이것이 나중에 "다신교의 신들보다도 우위에 있는 근본적인 신의 존재"를 부각하기 위해 공식화된 것으로 볼 수 있을 듯.

자신이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고 믿는다는 점에서 야훼는 인간 버전의 무신론자를 한 단계 뒤로 미룬 무신론자일 뿐이라 볼 수도 있다. '제작자를 만든 제작자를 만든 제작자...'라는 무한한 퇴행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결국 어느 단계에서는 이렇게 무신론적인 구조를 취할 수 밖에 없는 것.

5.4.1. 존재 그 자체(ipsum esse)

위 서술의 연장선이다. 출애굽기에서 나타난 존재론적 고찰의 연장선으로, 토마스 아퀴나스가 집대성한 특성이다.[57][58] 야훼는 그 어떤 가능태도 배제되는 순수 현실태이며, 그렇기에 야훼는 불변한다. 또한 그는 완전한 순수 현실태이기 때문에, 그 어떤 존재자도 그의 원인이 될 수 없다. 그렇기에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야훼에게 가장 적합한 이름은 '거기 있는 자'(신학대전 I, 13, 11)이다. 그러므로 야훼는 '그의 존재이다'(신학대전 I, 3, 4c). 따라서 존재야말로 야훼의 본질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후세의 신학자이자 20세기의 가장 저명한 가톨릭 신학자로 꼽히는 카를 라너(Karl Rahner)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을 계승하면서도 스승이었던 하이데거의 철학을 수용하여, 인간이 유한성(시간성)에 걸릴때 무한성인 야훼를 인식할 수 있으며, 이는 피조물 중 오직 인간에게만 부여된 능력이라 하였다. 이해가 안간다면 "I am a wiki-user"라는 문장을 생각해보자. I와 wiki-user는 존재자이며, am에 대응되는 것이 바로 '존재'다. 존재는, 그것을 통하여 존재자가 있게하는 그러한 완전성이다. 그리고 서방교회에서는 바로 이 '존재'를 야훼라고 해석한다.

5.5. 성(性)이 구별되는 존재가 아님

하느님께서는 결코 인간의 모습이 아니시다. 그분께서는 남자도 여자도 아니시다. 하느님께서는 성을 구별할 여지가 없는 순수한 영(靈)이시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의 ‘완전성’은 하느님의 무한하신 어떠한 완전성, 곧 어머니의 완전성, 아버지와 남편의 완전성을 반영한다.
가톨릭 교리서 370항
다른 종교 및 신화, 전설의 신들은 사람과 비슷한 존재로 묘사된다. 중근동 신화는 물론이고 대표적으로 그리스 로마 신화북유럽 신화만 봐도 드라마를 방불케 하는 신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물리적, 성적 정복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이는 피조물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야훼는 다르다. 야훼는 우월한 인간이 아니다. 야훼에게는 약점이 하나도 없다. 창세기는 야훼가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 즉 "남자와 여자"를 창조했다고 말한다.[59] 결코 성별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야훼는 남자도 여자도 아니지만, 양성 모두 야훼의 일부분을 표현한다.

5.6. 일신인가 주신인가

구약에서 나오는 야훼에 대한 내용은 일관적으로 일신교적이며, 다른 이방신의 실존에 대한 묘사는 찾아볼 수 없다. 십계명의 두번째 계명에서 다른 이방신들을 서술한 내용 때문에 모세오경에서 야훼의 유일신적 요소와 다신교 신앙의 주신(主神)적 요소가 함께 묘사된다는 오해가 있는데, 이는 부적절한 이해이다. 해당 계명에서는 이방신을 섬기는 행위를 범죄로 못박고 있는 것이지, 이방신이 실제로 존재하여서 세계에 영향력을 끼친다는 묘사가 없기 때문이다. 모세오경에는 이방신이 권능을 행사하는 장면이 전혀 없으며, 야훼의 목소리는 지속적으로 서술되지만 이방신들은 야훼의 권능 행사에 대항하는 묘사조차 없다. 창세기 천지창조 일화의 야훼는 해와 달과 별과 괴물들마저도 창조하는데, 이는 천체와 신을 동일시하고, 흔히 괴물들을 신의 대적자로 설정하는 고대 다신교 세계관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다신교에 대한 서술들은 야훼가 다신교의 주신이라는 내용보다는, 유대인이 야훼 신앙을 받아들인 이후에도 다신교적 습관을 버리지 못한 흔적을 후대 기록자들이 남긴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아브라함이 하란 땅에서 부름을 받을 당시에, 유대인들은 각기 다른 신을 믿었다고 묘사되며, 아브라함이 팔레스타인에 정착할 때 최초로 야훼만을 믿기로 계약하고, 그 후에 모세이집트에서 유대인들을 모아 탈출한 이후에 계약이 갱신된다. 그럼에도 이집트나 바빌론 지역에서도 다신교적 습관은 남아있었고, 이런 다신교적 습관을 범죄로 정한 것이 신명기 5장과 그 병행구절인 출애굽기 20장에서 나오는 십계명의 두번째 계명인 것이다. 여기서 야훼는 스스로를 질투하는 하느님으로 묘사한다. 또한 신명기 7장에서는 이방신의 제단은 허물어야 한다고 묘사된다.[60]

생각건대, 타나크가나안 정착 과정 및 이후에도 이방 풍습의 유입을 막지 못하고, 다신교처럼 야훼와 바알을 동시에 숭배하거나, 혹은 동일시하던 유대인들을 경계하기 위해 쓰였던 점으로 검토한다면 이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즉 지금 너희가 동일시하는 그것들은 신도 아니며[61] 적어도 모세오경의 뼈대가 되는 텍스트가 작성되는 시기에는,[62] 유일신적 요소와 주신적 요소가 병존된 것으로 보인다.[63]

사실 신격에 있어서 차이는 있을지 모르나, 성경의 서사구조의 입장에서 보면 주신-조력자 <-> 적대자 구도 자체는 다신교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조력자의 위치에 천사가 있으며 적대자에 악마가 위치한다.

5.7. 기독교의 신관(神觀)

예수메시아로 믿고 구원의 주체로 받아들이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시작이며, 4세기 이후 여러번의 종교적인 논의 끝에 예수가 유대교의 야훼와 동일한 존재로 설파되었다. 삼위일체론을 정설로 채택한 주류 교단들은 예수와 성부, 그리고 성령의 세가지 페르소나가 야훼라는 하나의 본질 및 본성을 지닌 한 하느님으로 믿는다. 다만 예수는 특이하게도 인간의 본질 및 본성도 지닌다. 말하자면 참 인간이자 참 하느님인 자. 현대 기독교 종파 대부분은 일반적으로 예수를 하느님이자 그리스도로 믿으면서 예수를 통한 구원을 인정한다.

5.7.1. 삼위일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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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아브라함계 종교가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삼위일체론을 믿는 기독교에서는[64] 야훼가 실체로는 하나이되, 성부-성자-성령의 3가지 위격을 이룬다고 본다. 그렇기에 예수 역시 실체로는 야훼라고 보며, 야훼에 대응되는 개념은 '성부'가 아니라 '주(Dominus)'로 본다.[65] 그러나 이 문서와 나무위키에서 야훼는 '성부' 쪽을 가리키는 경우가 굉장히 많으므로 이 부분에는 오해에 주의하여야 한다.
야훼란 이름의 의미에 관해서는 견해가 갈린다. ① ‘그분이다!’는 의미의 환호성(yah!)이라는 견해 ② ‘있다’는 의미의 동사(hyh 혹은 hwh)에서 유래한다는 견해, 즉 모세가 하느님으로부터 ‘나는 곧 나다’(출애 3:14)라고 들었던 이름을 백성에게 전할 때 간접화법으로 ‘그는 곧 그다’라고 했다는 견해, ③ 모세의 질문에 대한 주님의 거절이라는 견해(소극적으로 유비적인 답변을 하신 예, 출애 33:19-23) ④ 주님의 영원성을 강조하여 ‘나는 곧 나였던 나일 것이다’(I shall be what I was)라고 번역하는 견해, ⑤ 하느님의 속성을 가리키는 자존(自存)을 의미한다는 견해 등이 그것이다. 생각건대, 이 모든 설명은 하느님의 이름이 출애 3:14에서 동사 ‘있다’(qal)의 형태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간과하는 흠이 있다. 문법적으로 야훼는 이 동사의 원인을 나타내는 형식이어서 "그는 있도록 한다. 그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그렇게 존재하도록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 이름은 만물의 창조주이신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묘사하는 것이다.
가톨릭 대사전, 야훼 항목 中
야훼가 성부 지칭하는 명칭이라는 주장은 당연히 틀린 것이라고 봐도 된다. 나무위키뿐만 아니라 많은 경우에 야훼는 성부의 뉘앙스로 말해지는 경우가 많지만, 삼위일체를 전제로 할 땐 그 어디에도 예수가 야훼가 아니라는 서술은 없다. 물론 성자와 성부를 구분지어 말할 때 예수는 당연히 성부가 아니며 예수는 당연히 야훼의 아들로 신약에서 고백되지만,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의 고백처럼 또한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야훼의 아들인 야훼)'이기도 하다.

야훼라는 호칭이 성부에 한정된다는 오해는, 구약에서 드러난 하느님은 모두 성부라고 넘겨짚는 오해 때문이다. 하지만 구약에서든 신약에서든 야훼는 3개의 페르소나를 가진 하나의 실체이며, 그렇기에 구약에서 말하는 야훼를 굳이 성부에 한정할 필요는 없다. 물론 그렇다고 구약에 나온 야훼가 성부인지 성자인지 성령인지 명확하게 구분할 필요도 없고, 성공적으로 구분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냥 '성부만 활동한 건 아니구나' 정도로만 이해하면 족할 것이다.[66][67]

근본적으로 이런 오해는 삼위일체론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나오는데, 삼위일체론에 의하면 성부는 야훼가 맞다. 그리고 성자도 야훼가 맞으며, 성령 또한 야훼이다. 예수를 보고 '하느님'이라고 부를 수 있고, 또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부를 수도 있듯이, 예수는 '야훼'로도 '야훼의 아들'로도 모두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 되었을때 그 호칭이 '예수는 하느님이 아니다'라는 선언이 될 수 없듯이, '야훼의 아들'이라는 말 역시도 '예수는 야훼가 아니다'라는 선언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해서 삼위일체론은 성부, 성자, 성령이 합체(?)해서 야훼가 된다는 이론이 아니며, 각각의 페르소나는 완전히 100% 야훼라고 고백된다.

종합해서 정리하자면 다음 명제는 삼위일체론을 전제로 할 때 모두 참이다.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에서는 여호와가 예수 그리스도의 전세에서의 호칭이라고 가르친다. 정확히는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를 입고 인간의 모습이 되기 전의 상태였을 때의 이름이며, 따라서 여호와와 예수 그리스도를 동일 인물이라고 가르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이자 아들이라고 가르치는데, 이는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의 백성의 영적인)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 시대에서는 일종의 대리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주 하나님이자 아버지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약을 맺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부활 이전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자 아버지로서, 부활 이후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자 구세주로서의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즉 몰몬교는 이단으로 취급되고 있으므로 이러한 내용을 평범한 개신교 교회 안에서 떠들고 다닌다면 매우 피곤해질 것이다.

5.7.2.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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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계 종교적 관점으로는 야훼의 나라와 야훼는 죄를 거부하나 안타깝게도 첫 번째 사람인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68] 지은 이후로는 모든 인간의 죄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여기서 기독교의 경우 인간이 죄 사함을 받고 죄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그가 나의 모든 죄를 다 지고 죽었음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이게 기독교의 근본, 핵심 교리이며 예수를 왜 믿어야 하는지의 이유, 예수야말로 신이 인간을 위해 놓아준 유일무이한 다리이며 모든 교회(가톨릭, 정교회, 개신교 등등)가 이 부분만은 완전히 동일하다. 포용적인 가톨릭에서조차도 예수를 배제한 구원은 잘 모르겠으나 예수를 통한 구원은 100% 확실한 구원이라고 말하고 있다.

얼핏보면 이교도나 무신론자도 죄만 안지었다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식으로 쓰여있으나 실상 예수 이외의 확실한 구원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진정으로 예수를 믿지 않는다면 기독교도 역시 신의 품에 안길 수 없다.

게다가 성경에서는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은 일종의 무고죄라고한다. 완전무결하며 오류가 없는 성부 하느님이 "이는 너희를 위해 내주는 내 아들이며 나의 대행자이다."라고 말하며 예수를 보내고 기적을 행함으로서 직접 보여주기까지 했으나 그걸 거짓으로 치부하고 결국 완전무결하며 오류가 없는 야훼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죄를 씌우는 무고죄를 범한다는 것. 물론 비그리스도인들이 들으면 펄쩍 뛸 얘기지만..

예수님 믿으면 지옥에 안 간다[69]라는 구원관(매우 거친 요약이지만)을 내세웠으나, 역사적으로 수많은 굴곡을 거쳐 현대 가톨릭정교회의 구원관은 "성부도 믿고 예수도 영접하고 착한 일도 해야 천당 간다."로 바뀌었다… 라고 잘못 아는 사람들이 많다. 엄밀히 따지면 이 문장은 명제 자체가 잘못되었다. 가톨릭과 정교회에서는 '~~해야 구원받는다'라고 교리에 규정지어 놓지 않았다.[70][71] 자세한 내용은 가톨릭항목에서 '개신교와의 교리적 차이'부분을 참조하면 될 것이다. 사실 성경에서도 ~해야 구원받는다라는 주장은 없다. 구원은 신이 일방적으로 뿌리는 기프트의 개념이며 구원 받은 자가 어떠한 자격 요건을 충족하거나해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구원을 주고 말고는 전적으로 신이 결정한다. 그것이 설령 인간의 시선으로는 왜 저딴걸 구원해주지? 하며 이해 못할 인물이라도.[72]

가장 중요한 것은 '착한 일 하면 구원받는다'라는 주장은 가톨릭정교회가 분리되기도 전에 이단취급 받은 '펠라기우스'라는 자의 주장이다. 기독교의 기본적이고 종파를 초월한 공통된 구원관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신다는 것이고 이를 베이스로 하여 종파별로 해석이 달라진다. 그러나 어느 종파든 간에 인간의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보는 것은 잘못된 시각이라고 규정한다. 로마서에서 사도 바오로(바울)가 인간은 자신의 능력으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여하튼 매우 강경한 개신교와 다르게 가톨릭정교회가 '타종교를 존중'하는 자세로 전환한 건 사실이지만 여전히 유일신을 믿으며 '구원은 주님을 통해'임은 변하지 않는다.[73]

한편 개신교에서는 교파와 상관없이 이신칭의, 즉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며 옳은 행위는 믿음의 열매[74][75][76]라고 본다. 이는 신학적 진보 보수 여부와 상관없이 대다수 교파가 동의하는 것이다.

자세히 후술하겠지만 예수를 믿지 않고 죽은 위인들이 지옥에 갔느냐는 논제에 대하여 성경에 명확하게 나오지 않아서, 함부로 판단하기 어렵다.고 한다. 이런 근본주의적 맥락에서 보면 충무공 이순신이나 세종대왕예수를 믿지 않았으니 지옥에서 훨훨 타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하지만 공식적으론 모른다는 것이 답이다. 성경에 안 나오는 것을 멋대로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은 행위로 간주하기 때문.[77] 같은 맥락으로 보자면 '자살하면 지옥간다'란 말도 개신교 교리상 잘못된 말이다.[78][79] 다만 로마서엔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은 양심에 따라 심판한다는 구절이 있다. 그러나 명확히 듣도보도 못한 이의 구원을 확실히 말해주진 않아서 모른다고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결론을 내리자면, 그 어떤 정통 그리스도 교단에서도,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같이 예수를 믿지 않고 죽은 위인들이 지옥에 가거나 가지 않았다고 확정적으로 말하는 교단은 단 하나도 없다.[80][다만][82] 어디까지나 성경에 없으므로 모른다이다. 이는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개신교 자체가 사람은 그 자신의 의로움으로 천국에 갈 수 없으며, 무조건 예수를 향한 믿음을 통해서만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교리를 확고한 진리로 상정하기 때문이지만, 듣도보도 못한 사람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 '그럼 소위 복음을 들었더라도 예수를 안 믿은 의로운 사람이나 위인들은 지옥에 간 것이냐?'라는 비판에 대해서 말하자면 개신교 교리상 의인은 오직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하나뿐이기 때문에 이런 비판은 애초에 무시한다.[83]

여하간 이러한 구원관이 유대교와 이슬람, 기독교의 가장 중대한 차이기도 한데, 유대교에서는 구원의 대상이 유대인, 이스라엘 민족만이다. 그러던 것이 기독교에 와서는 구원의 대상이 전 인류로 확장되었다.[84] 이로 인해 유대교에서 파생된 기독교는 자신들의 교리를 널리 세계에 전파하려고 했기에 세계에서 손꼽히는 유명한 종교 중 하나가 된 것이다. 그런데 사실 기독교와 이슬람 이전에도 이미 유대교는 유대 민족의 차원을 넘어 세계 종교화되는 모습을 보여왔는데, 구약성경의 많은 대목들에서 '열방(세계의 여러 민족)이 주님께로 돌아오리라'는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85]

뭐 사실 이 문제는 세계화보다는 "영방이라는 개념이 가진 좁은 의미" 문제인데, 부족국가 사회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사실 영방을 따져 봐야 그 주변국에 대한 문제만을 생각했을테니 뻔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당연하지만 그들이 알고 있는 부족 국가 간의 한계가 극명하니 어쩔 수가 없었던 듯.

또한 그 기독교의 포교개념에도 실은 이런 저런 문제가 많은데, 사실 유일신의 배타적 개념은 여기서 탄생한다. 이슬람과는 다르게, 기독교가 포교 대상으로 삼은 지역들은 남미 등 대륙에서 떨어진 지역들이었고, 이런 것에는 사실 사연이 있다. 종교개혁 당시 점점 위축되는 가톨릭 세력에 위기감을 느낀 스페인-합스부르크 왕가는 이 당시부터 "가톨릭 개종을 늘려서 새로운 동맹을 창출"하는 것을 모토로 중남미로 밀고 들어가게 되고, 개신교는 북미 지역을 공략하게 되는데, 공통점은 "종교가 바로 동맹의 여건"인 것이었다. 당연하지만, 무기기술의 우위를 바탕으로 해서 밀고들어간 이들이 문명화를 이유로 내세운 플롯이 종교였고, 당연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우월한 문명을 지닌 것은 유일신을 믿기 때문"이라는 주장으로 귀결되는 개종 강요는 실은 흔한 일이었지만, 실은 이 과정에서는 종교동맹이라는 요소가 강조되어 "개신교로 개종하거나 가톨릭으로 개종하거나"라는 사연이 있는 것은 당연했다.

정교회의 경우는 좀 더 복잡한데, 사실 러시아 정교회나 각국 정교회가 부흥하게 된 시점은 합스부르크로부터 동유럽권이 독립을 하려 하고, 러시아가 동구권에 큰 영향을 주던 그 시점부터이다. 즉, 반대로 가톨릭을 고수하는 것은 매국적 관점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친러/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정교회가 주류를 차지하게 된 것.

전자와 후자의 차이는 극명해서 전자의 경우는 사실은 "이교도의 신에 대해 문명의 우월성을 기반으로 하여 개종을 강요하는 경우"다. 즉, 전자의 유일신은 "필히 전지전능해야하고, 다른 신을 찍어 눌러야 하는" 신이었고, 후자의 경우는 같은 신을 믿는데 형식주의적인 부분에서 다른 점(주로 정치적인 부분)의 논쟁이 주안점이 되며, 실은 "기독교와 이슬람" 역시 같은 선상에 있다는 것이 문제다.

즉, 정리하면 당연한 말이지만, 구원에 대한 논증을 하는 가톨릭이나 정교회의 문제 역시, 기타 교리적 상이점과 더불어서 "근본 교리의 수정은 불허하되, 지엽적 차원에서의 해석에는 개방된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 된다. 반대로 "개혁주의적인 입장의 개신교는 거의 무조건 과거 형식을 비판해야 하는 관계로 구원관에 대한 명확한 분기에 대해 다른 해석을 주장할 수 밖에 없는 경우"였고, 이런 결론으로 말미암아서 각각의 개념 차이가 발생하고 유일신에 대한 관점해석이 달라지는 것은 뭐 별달리 이상한 일은 아닌 게 된다.

허나 그보다 더 근본적인 부분은 종파의 구조적인 면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개신교는 인정하지 않고 정교회나 가톨릭은 인정하는 것, '보편교회의 권위'라는 면이다. 이 두 종파의 경우,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사도들을 주교로 삼아 세웠고 현재의 주교들은 그 사도들의 후계자라고 믿는다. 그렇기에 '성경' 뿐만 아니라 교회의 전승, 사도단(주교단)의 해석 등을 모두 중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특히 성서 비평이 본격적으로 발달한 근대 이후로는, 이 두 교회는 성경에 대한 문자주의적 오류에 빠져들 위험이 그나마 줄어들게 된다. 그렇기에 구원관에 있어서 현대에는 다소 유화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는 것이다. 가톨릭에서 세례와 구원의 관계만 하더라도 이러한 면모를 볼 수 있다. 종교개혁 시기에 있었던 트렌토 공의회에서 "만일 누가 세례는 자유로운 것으로서 구원에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그는 파문받아야 한다.(7차 회기 中)"라고 언급할 정도로 가톨릭 교회는 세례가 구원의 유일한 수단임을 강경하게 표현하였으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그러나 구원 계획은 창조주를 알아 모시는 사람들을 다 포함하며, 그 가운데에는 특히 무슬림도 있다.(교의헌장 中)"라고 언급하고 무신론에 대해서도 기독교 신자들의 잘못된 언행이 오히려 무신론의 발생 원인 중 하나가 되고 있음을 지적할 정도로(사목헌장 19) 입장이 온건해졌다.[86]

물론 두 교회의 이러한 구조는 아전인수식 교리 해석을 부추기는 부작용이 나올 수 있다는 문제점이 있다. 특히 전근대 시대에는 해당 사회 속에서 두 교회가 하나의 공공기관 역할을 하였기에, 교회가 세속적인 패권을 민중에게 휘두르는 폐단이 있었다. 이를테면 교무금(헌금)을 세금으로써 거두고 세례성사와 장례미사에 대하여 높은 대금을 받는 행태가 그것이다.[87] 이러한 면에서 볼때 두 교회의 구원관이 유화적 것에 대해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불리해지니까 설정놀음 하는거 아니냐?"라는 교회 밖의 비판도 비록 신자들은 억울하게 느낄 수 있을지언정, 불합리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 비판이라고는 할 수 없다. 교회가 공공기관 역할을 하였고 유럽인들의 윤리관과 분리할 수도 없던 전근대와 달리, 근대에는 교회와 윤리의 분리가 시도되었고 기독교의 구원관이 편협하다는 비판 역시도 다수 제기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유화적 구원관을 재검토할 수 밖에 없었던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에서는 특히 수직적이고 단일화된 교단 체제를 갖춘 가톨릭이 비판을 피해가기 어렵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애초부터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명제를 받아들이다가 뒤늦게 설정 뒤집기했다는 비판이 타당한가에 대한 반론에 여지도 있을 순 있는데, 이에 대해선 Extra Ecclesiam nulla salus 문서 참조.

고로 실제로 이 구원관의 차이를 보면 유일신의 해석에 대한 정도 차이가 있음은 실은 간단히 파악할 수 있는 문제랄 수 있겠다.

5.7.3. 비종교인을 위한 구원관 비유

위의 글이 너무 난잡해 비유로 풀어 쓰면 이렇다.
"또 다른 비유를 들겠다. 어떤 지주가 포도원을 하나 만들고 울타리를 둘러치고는 그 안에 포도즙을 짜는 큰 확을 파고 망대를 세웠다. 그리고는 그것을 소작인들에게 토지로 주고 멀리 떠나갔다.
포도 철이 되자 그는 그 도조를 받아오라고 종들을 보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 종들을 붙잡아, 하나는 때려주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쳐 죽였다.
지주는 더 많은 종들을 다시 보냈다. 소작인은 이번에도 그들에게 똑같은 짓을 했다.
주인은 마지막으로 '내 아들이야 알아보겠지.' 하며 자기 아들을 보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그 아들을 보자 '저자는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이고 그가 차지할 이 포도원을 우리가 가로채자.' 하면서 서로 짜고는
그를 잡아 포도원 밖으로 끌어내어 죽였다.
그렇게 했으니 포도원 주인이 돌아오면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 악한 자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고 제때에 도조를 바칠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원을 맡길 것입니다."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 마태오의 복음서 21장 33절~41절
이 비유에서 포도원세상, 소작인사람, 주인야훼, 아들예수로 보면 명확하다. 모든 인간이 결국에 멸망하는 이유는 자신이 이 지구의 주인이 아니면서 주인행세를 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그것이 각종 매체에도 나오는 기독교의 첫번째 죄 교만이다.
이 비유에서 농부들이 주인이 왔을 때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는데 뭘까? 그것은 주인이 보낸 아들을 존대하고 그를 따르는 것이다.

5.8. 이슬람의 신관(神觀)

이슬람의 신은 종교학적·계보적으로는 유대교·기독교의 야훼와 같은 존재이고, 따라서 이슬람도 기독교와 유대교랑 같이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로 묶어 분류된다. 역사적으로도 중세 유럽에서는 이슬람과 자신들이 같은 신을 믿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대에는 일부 개신교에서는 신학적인 노선 차이 때문에 다른 신이라고 주장하며 동질성을 부정하기도 한다. 가톨릭에서는 이슬람과 기독교가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어지는 창조신이자 유일신 신앙을 공유하고 있으며, 이슬람에서 고백하는 신은 기독교의 하느님과 동일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

5.8.1. 다른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들의 신과 동일한가

이슬람교에서는 자신들의 신을 유대교기독교의 신인 야훼와 동일시한다.[88] 무슬림들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이 세 종교의 신자들을 가리켜 'Ahl al Kitab(People of the Book, 성서의 사람들)'이라고 칭한다. 또한 쿠란에는 "우리의 신과 너희의 신은 같은 한 분의 신이시니, 우리는 그 분께 순종함이라."고 되어있다 한다. 무함마드가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다른 다신교도들과 다르다고 여겼던 것도 같은 신을 믿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일례로 이라클리오스 황제가 이끄는 동로마 제국의 군대가 로마-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하자 예언자 무함마드와 초기 무슬림들이 크게 기뻐했다는 기록이 있다.

다음은 가톨릭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인류의 빛〉(Lumen Gentium, 교회헌장)의 내용이다.
그러나 구원 계획은 창조주를 알아 모시는 사람들을 다 포함하며, 그 가운데에는 특히 무슬림도 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간직하고 있다고 고백하며, 마지막 날에 사람들을 심판하실 자비로우시고 유일하신 하느님을 우리와 함께 흠숭하고 있다.
〈인류의 빛〉 16

또한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권고 〈아프리카 교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대화의 노력에는 모든 선의의 무슬림들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무슬림들이 아브라함의 신앙을 본받고 십계명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권고 〈아프리카 교회〉

비슷한 취지의 말을 베네딕토 16세는 권고 〈중동 교회〉에서 하였다.
교회는 그 보편적 성격과 소명이 요구하는 대로 다른 종교인들과 대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중동에서 이 종교간 대화의 토대는 그리스도인을 유다인과 무슬림과 결합시켜 주는 정신적 역사적 유대입니다. 이 대화는 주로 정치적 또는 사회적 질서를 실질적으로 숙고해 보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 관한 신학적 관심사를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에 근거하고,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과 비기독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 「우리 시대」(Nostra Aetate)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유다인과 그리스도인과 무슬림은 똑같이 모든 사람을 창조하신 한분이신 하느님을 믿습니다.
베네딕토 16세 권고 〈중동 교회〉

다만, 교리적으로는 기독교에서 보는 신과 이슬람에서 보는 신의 성격이 매우 다르다. 이슬람에서 신은 '낳지도 태어나지도 않으신'[89] '유일한' 존재이나 기독교에서 신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적 특성을 포함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 속성이 매우 다른 존재라고 보고 있다. 기독교의 신은 예수를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지만 이슬람의 신은 그를 그저 한 명의 예언자로 여기는 등 차이가 많다.

또한 아랍어에서 신을 일컫는 명칭 '알라'는 아라비아의 메카 쿠라이시 부족이 믿었던 토착 종교(아랍 신화)의 최고신이었던 알라 탈라[90]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주장하는 몇몇 그리스도인과 유대인들은 알라가 야훼와 같은 존재라는 말을 불쾌히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다.

기독교 중 진보적인 성향의 개신교 종파는 이슬람의 신과 기독교의 신이 종교학적으로는 동일하다고 분석하지만, 보수적인 성향의 개신교 종파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유대교에서는 기독교의 신도 자신들의 야훼와 같은 존재로 보지는 않는다. 이 역시 삼위일체가 문제가 되기 때문으로 기독교에서는 유대교의 야훼를 자신들과 같은 존재로 보지만, 유대교에서는 이를 부정한다. 이는 이슬람과 기독교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91]

우선 이를 이해하려면 이슬람의 교리에서 성전(聖典) 개념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신이 인류에게 내린 계시는 전체 140여개이며, 그 성전 중 가장 신성한 것은 모세에게 내린 오경, 다윗의 시편, 예수의 복음서, 무함마드의 쿠란 4종이다. 그 중에서 무슬림들은 쿠란을 신의 뜻을 전달한 가장 완전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무슬림들은 쿠란과 함께 다른 계시서를 믿고 있으며 유대교와 기독교 등 계시서를 믿는 사람들을 '경전을 가진 사람들'(people of the Book)'이라고 일컫는다. 쿠란 이전에 많은 계시가 있었지만 이슬람의 기본 입장은 쿠란이며, 현존하는 "성서"들은 본래 의미를 상당부분 잃어버리고 변질되었다고 여긴다. 그래서 무슬림들은 성경을 근거로 주장하다가도, 쿠란과 상충되는 부분은 "변질된 부분"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92]

그렇다면 계시가 되는 성전을 보면 기독교의 신 그리고 유대교의 신은 결국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과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기독교의 신관과 이슬람의 신관은 엄연히 차이가 있다. 다만, 종교학적으로 치면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로서 두 신은 같다고 볼 수 있다.

기독교에서 보는 신은 이른바 삼위일체로서의 하느님이고, 이슬람에서의 신은 그 어떤 중간자도 존재할 수 없다는 대원칙을 강조한다. 쿠란 112장에는 "영원하신 하나님, 그는 오직 한 분이시다. 그는 낳음당한 적도 없고, 태어나지고 않았고 그를 낳은 자도 없느니라"라고 한다. 이것은 이슬람의 신은 신민적인 신이 아니고 신의 피조물인 삼라만상의 신이라는 것이고, 신 그 자신 외에는 어떤 사람이나 동물로 신격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93]

일부 기독교 신자들은 아래와 같이 주장하기도 한다.
"알라는 메카 지방의 여러 신들 중 최고신인 후발이고, 다만 무하마드가 메카지방에서 이동 후 유대인들을 포섭하기 위하여 유대교의 하느님과 동일하다고 변경한 것이므로 엄연히 따지면 유대교와 기독교의 하느님과는 같은 존재가 아니다. 코란의 초기 부분에 알라의 두 딸에 대한 이야기가 써있지만 이 역시 알라와 하느님을 동일시 하면서 이것들을 부인하는 구절이 적히게 된다."

우선 메카 만신전의 알라는 후발과 구분되는 별개의 신이었고, 후발은 알라의 딸로 여겨졌다. 고대 아랍인들이 생각했던 알라가 원시천존처럼 명목상 최고신인지, 아니면 실질적인 기능을 하고 있었는지조차 불분명하다. 일단 만신전 내에서도 다른 신들과는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창조자였으며, 우상으로 형상화되지 않았다. 게다가 만약 저것이 사실이라도 신의 성격이 변경된 이후의 종교가 이슬람교인 것이며, 이러한 변경은 종교의 근본 자체에 대한 수정이기 때문에 수정 전의 아랍 이교와 이후의 이슬람 종교는 서로 단절된 관계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고대 아랍인들이 생각했던 '알라'는 튀르크인들이 믿었던 '텡그리'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쿠란에서는 아랍인 정령숭배자들이 알라에게 딸이 있다는 거짓 왜곡을 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구절을 여럿 찾을 수 있다. 가나안의 엘과 유대교의 엘로힘[94]이 별개인 것처럼.

개신교 내에서 바울로 신학의 권위자인 김세윤 교수는 기독교의 신은 초월자인 동시에 내재자인데 이슬람의 신은 초월자이지만 내재자는 아니라고 주장한다.[95] 즉, 같은 신으로 보지 않는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기독교의 신과 이슬람의 신이 서로 다르다고 말하지는 않았으나 이와 동일하게 이러한 두 종교 간 신관(神觀)의 차이에 대해 언급하기도 하였다.

6.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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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매체와 모티브

7.1. 레젠다리움일루바타르

작중에서 대놓고 묘사되지는 않지만 그 이름의 뜻(영어로 All Father)로 정체를 암시하고 있고, 아틀란티스 전설과 누메노르를 동일한 것으로 묘사하면서 둘을 동일존재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이름인 에루의 경우는 The One/He that is Alone이라는 뜻이라 더 노골적이다.[96] 기독교와 아무 관련이 없는 아틀란티스가 근거로 등장하는 것은 톨킨의 세계관인 레젠다리움이 고대 지구의 이야기라는 설정 상 현실의 전설과 연결시킨 부분이기에 아틀란티스를 멸망시킨 신 역시 독실한 가톨릭인 톨킨의 입장에서는 유일신인 야훼일 수 밖에 없고, 따라서 아틀란티스와 동일시되는 누메노르를 멸망시킨 일루바타르와 야훼를 동일하게 여겼다는 방증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반지의 제왕에 나온 내용만으로는 일루바타르와 야훼가 동일한 존재인지는 알 수 없으며, 톨킨 본인이 일루바타르와 야훼가 동일한 존재라고 직접 언급한 적은 없다. 일루바타르와 야훼가 동일한 존재라는 주장은 톨킨의 성향과 일루바타르와 야훼의 유사성 등을 총합적으로 봤을 때 나온 주장이다.

그래서인지 누메노르인들이나 요정들이 일루바타르에 대해 보이는 신앙을 언급하면서도 그 형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이들의 신앙은 시대상으로 엄청난 과거의 이야기인 만큼 기독교가 아니고 관련도 없다. 그러나 작가인 J. R. R. 톨킨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그 뼈대는 종종 나타난다.[97] 그 신이 기독교의 야훼/하느님과 동일존재라도 별 문제가 없을 정도로 톨킨은 자신의 신화가 가톨릭 교리와 조화를 이루게 저작했다.

일루바타르와 아훼의 인식이 위의 내용들과 차이가 나는 이유는 이 문서에서 다루는 야훼는 구약의 야훼, 즉 유대인의 야훼를 다루기 때문이다. 일루바타르는 톨킨이 믿는 20세기 중후반 신약에서의 야훼를 바탕으로 했다.

7.2. 기타

8. 관련 문서

9. 외부 링크



[1] 기독교 신학 내부에서는 '존재 자체'로 정의하기도 한다. 루터교회 신학자 폴 틸리히는 야훼를 신 대신 존재 자체로 정의할 것을 제안하였다.[2] 흔히 거론되는 힌두교의 경우 일단 다신교임을 차치하고라도 2020년대를 기준으로 약 11억 명의 신자가 있다고 추정되나, 이들 대부분은 인도에 살고 있으며 모든 신자 수를 합쳐도 기독교와 이슬람에 미치지 못한다. 또한 현대의 인도 공화국과는 달리 16세기 당시 인도의 인구는 약 1억에서 1억 6천만 명에 불과했으며, 이 때 무굴 제국의 국교는 마찬가지로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인 수니파 이슬람이었다(힌두교 문서 참조).[3] 유대교의 경전이며, 기독교에서의 구약성경에 해당한다.[4] 영어로는 보통 "I am who I am" 정도로 번역된다.[5]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다윗&솔로몬 치세 시절은 이스라엘 역사상 최전성기로 기록되어 있다.[6] 단 구약시대에 활동했던 야훼는 주로 성부이고, 신약성경에서는 성자가 직접 인간이 되어 예수라는 이름으로 3년 40여 일간 활동한 후 다시 하늘로 되돌아간다. 이는 흔히 하는 착각인데, 야훼는 삼위를 가지지만 동시에 그 삼위가 일체다. 구약의 신=야훼=성부가 아니라 야훼=성부,성자,성령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며, 신약에서조차 성부와 성자,성령은 늘 함께 있다. 한 가지의 예외를 빼고 당연히 구약에서도 성부,성자,성령은 함께였으며, 예수는 복음서에서 이를 몇번 드러낸 바가 있다.(아브라함보다 먼저 난 예수,야곱보다 위대한 예수,태초에 성부와 함께 있어 만물을 함께 창조했다는 신의 말씀 예수)[7] 스토아 학파에피쿠로스 학파 등.[8] 실제로 중세 시기에도 이로 인한 논쟁이 있기도 하였으며,(물론 다르다고 주장한 쪽이 이단이 되었다) 더 예전으로 올라가면 사도 바울로로 대표되는 유대화파(기독교를 유대교의 연장선으로 봤다)와 반대파 간의 충돌부터 현대에 일부 종교학/신학자들간의 논쟁에 이르기까지 생각보다 뿌리깊은 논쟁이기도 하다.[9] 이 내용이 Q 문서나 공관 복음서와 어느 정도나 연관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심한 논쟁이 있다.[10] 공관 복음서에서는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마태 22, 21)”라고 끝맺는다.[11] 완전함이란 성질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절대우위를 가진 존재[12] 탈출기 16장 12절, 공동번역성서.[13] 이걸 생각한다면 하느님 아버지, 하느님의 아들이란 개념이 구약에서 없던 갑툭튀라는 주장은 할 수 없다.[14] 본래의 그리스어 제목은 "요즘 진리랍시고 돌아다니는 '소문'에 대한 산파적 접근과 분석"이다.[15] 별로 알려져 있지 않던 이단논박이 재발굴된 것은 수세에 몰렸던 가톨릭에게 한줄기 빛처럼 힘이 되어준 책이기 때문이었다. 이레네오라는 극초기 기독교의 기억을 아직 대다수 간직하고 있는 인물이 그리스의 기상이 느껴지는 철저한 논리적 분석으로 이단 사상을 박살내준 것이니 당시 온갖 논쟁에서 고생하던 카톨릭 입장에서 통쾌할 수밖에.[16] Claimant(권리 요구).[17] 이유 중 하나는 할렐루야이다. '할렐루(찬양하라)+야(주님을)'이라는 의미이다.[18] 코이네 그리스어로 네 글자라는 뜻. 해당 문서 참고.[19] 모음 기호가 확실하지 않은 것은 중동 지역 문자의 특징이다. 현대 아랍어에서도 의미를 명확히 할 절대적인 필요성이 있는 쿠란 외에는 자음만 나열하는 것이 대부분. 아랍어에는 나름대로 모음이 붙는 규칙이 있어서 규칙에 따라 단어가 파생되기 때문에 원어민들은 읽는데 별 어려움이 없지만, 외국인에게는 이만큼 지독한 언어도 없다. 어떤 단어든지 일단 외우지 않으면 쓰여있어도 제대로 읽을 수가 없으니까. 하지만 원어민들 입장에서는 오히려 모음 기호를 병기하면 글자를 읽기 굉장히 어려워진다.[20] '야호와'가 아닌 이유는 'אֲדֹנָי'(아도나이)의 첫 모음 하타프 파타흐(חֲטַף פַּתַח; hataf patah) ֲ 가 '어' 또는 '으'로 발음하는 셔바(שְׁוָא; sh'va) ְ 의 변이음인 데다, 인두음 자음(알레프א, 헤ה, 헤트ח, 아인ע)에서만 ֲ (/a/)로 실현되고 다른 자음에서는 ְ (/ə/)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로마자로 전사할 때 ְ (셔바)는 보통 e로 전사하기 때문에 יְהֹוָה(Y'HoWaH)는 JeHoVaH로 옮겨졌고 영어권에서는 '지호바'에 가까운 발음이 되었다.[21] 정확한 발음은 야흐웨(יַהְוֶה; yah'we)다. 즉 현재 가장 유력한 재구 발음에 따르면 원문 יהוה(YHWH)은 3음절 단어로서 י-ה-וה(Y-H-Wh)로 끊어 읽는다. 단, 2번째 음절은 묵음을 의미하는 셔바(ְ )로 폐음절이라 '야ㅎ웨'처럼 빠르게 발음하기 때문에 거의 2음절(YH-Wh)에 가깝긴 하다. 그래도 이미 익숙해져서 여호와, 야훼, 야웨가 두루두루 사용되는 상황이다. 덧붙여 ו(/waw/, 와우)는 고대 히브리어에서 /w/ 음가를 갖는 반모음이자 준모음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대 히브리어에서는 자음의 특징이 더 강해져서 자음일 때 /v/ 음가를 갖는다. 따라서 현대 히브리어를 기준으로 하면 יהוה는 /ja-h-veh/ 즉 '야흐베'에 가까운 발음이 된다.[22] 한국어판은 어떤 번역본이든 의역된 문장이며 원문 히브리어를 직역하면 \'나는 존재하는 자로서 존재한다\'이다. 영어로 치면 I am that I am.[23] 동사 활용을 엄밀하게 분석하면 1인칭 단수 미완료형으로서 기본적으로 '연속성', '반복성' 등을 의미하며 문맥에 따라서는 현재 진행, 미래, 긍/부정 명령, 가정법, 희망 등 다양한 용법으로 쓰인다. 특히 현대 히브리어에서는 미완료형이 미래형에 대응되기 때문에 앞선 영어 번역 I am that I am도 I will be that I will be라고 직역된 표현도 찾아볼 수 있다.[24] 나머지 사본에서는 전부 'κύριος(kyrios, 주)'로 치환되었다.[25] 일부 사본에서는 ἰα οῦε(ia oúe, 야우에)[26] 가톨릭, 루터교회의 경우는 제2계명, 성공회를 비롯한 기타 개신교정교회유대교의 경우에는 제3계명.[27] 'LORD', 'HERR(N)' 등의 표기.[28] 일부 보수적인 목사들은 이걸 가지고 표준새번역은 자유주의 사상에 물들었다고 까기도 했다. 반대로 다른 부분에는 문제가 있지만 '여호와'라는 이름을 남발하지 않았다는 것만큼은 오히려 잘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목사들도 소수 있다.[29] 정확히는 אֲנִי יַהְוֶה רֹפְאֶךָ(aniy yah'we rof'ekha; 아니 야흐웨 로프에카), 즉 '나는 너를 치료하는 야훼이니라'라고 나온다.[30] 가끔 왜 신(神)으로 번역하지 않았는지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도 있는데, 사실 한자의 신(神)은 god보다는 spirit이나 ghost의 개념이다. 과거 한국 가톨릭에서 성령(Spiritus Sanctus)을 '성신'으로 번역한 것이 그 예. 다만 이후 神이라는 한자의 뜻이 god 의미가 강해졌기에 이를 반영하여 성령으로 번역을 수정한 것이다. 같은 원리로 과거 가톨릭은 천사를 천신(天神)으로 번역했다. 당연히 하늘의 god이라는 의미는 아니고, 하늘의 spirit이라는 뜻이다. 지금에야 어감이 이상한 건 부정할 수 없지만…[31] 가끔 하나님이나 하느님이라는 표현을 '기독교가 근래에 만들어낸 신조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하나님'이라는 표현 자체는 기독교의 전래 이전에도 한국에 있던 표현이다. 조선시대 중기의 시인 '노계가'에서도 확인되는 나름 유서깊은 표현이다. 제일 왼쪽 열을 참고.[32] 최초의 성경 번역본인 예슈셩교누가복음젼셔가 스코틀랜드 출신 존 로스 선교사와 서북 출신 서상륜 등에 의해 번역되는 등 초기 한국 개신교 역사에서 평안도의 역할은 대단히 크다.[33] 물론 당연히 아래아가 시간이 흘러 ㅡ로 바뀐 것에 따라 기존의 하ᄂᆞᆯ도 하늘로 발음이 바뀌었을 뿐이다. 개신교는 과거부터 쓰던 표현인 하나님의 발음을 관습적으로 유지하여 그대로 하나님으로 쓰는 것이고 가톨릭은 하ᄂᆞᆯ이 하늘로 바뀜에 따라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하느님으로 고쳤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34] 야훼나 예수를 "잡귀신"으로 비하하는 것은 의외로 그 역사가 오래되어, 김동리 작가의 소설 무녀도를 보면 무당 어머니가 개신교로 개종한 아들의 면전에서 서역 잡귀신이라 비하하는 장면이 나온다.[35] 야훼가 천주교나 정교회의 신이기도 하지만 정교회의 경우 한국에서는 존재감 자체가 미약하며 한국에서 가톨릭교도들은 개신교에 비해 큰 논란을 일으킨 사례가 현저히 적으므로 천주교를 도발할 만한 상황 자체가 흔치 않아 사막잡귀, 사막잡신이라하면 십중팔구 개신교를 도발하는 상황이다.[36] 이집트 신화는 위의 세 가지 설화를 전부 가지고 있다. 이집트 신화 뿐만 아니라 다른 그리스 로마 신화인도 신화등에서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특징이 드러난다.[37] 물론 우주가 여러개라고 여길 때는 우리 우주라고 부르긴 하지만 애초에 야훼의 이름에 대한 논의는 야훼가 유일신이라고 가정하기에 의미있는 것이므로 이건 다른 상황이다.[38] '과일에는 사과가 있고, 포도가 있고, 파인애플이 있고....수박이 있다.'는 자연스럽다. 그런데 이건 '신에는 야훼가 있고...그뿐이다'와 같은 상황이란 것이다. 굳이 신 아래에 야훼라는 하위 범주를 만들어 구분지을 필요가 없다. 물론 실제 세상에선 종교란 게 이거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이해를 돕기 위해 현실적으론 이름을 붙일 수 밖에 없다. 야훼라는 이름은 이런 타협의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와중에 그 이름에도 최대한 묶이지 않으려고 '나는 나다'라는 이름을 붙였다.[39] 은근히 기독교 신학 중에는 영지주의 등의 이단에서 처음 던진 질문이나, 영지주의의 설명이 그대로 차용된 설명이 많은데 이는 기독교의 신학이 이런 이단들과 싸우는 과정에서 확립되었기 때문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정통 기독교보다 신학 형성 및 신관 확립이 더 빨랐다. 이미 확고한 전통이 있는 그리스 로마 신화와 그리스 철학이란 강력한 무기를 기반삼아 기독교 요소를 설명하는 영지주의는 초기 기독교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몇몇 영지주의자들은 기독교가 절대로 피해갈 수 없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초기 기독교 신학은, 이런 영지주의자의 주장에 대한 반박이 주를 이뤘다. 즉, 당대 영지주의의 주장을 논파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던진 몇몇 질문들이 확실히 연구가치가 있다고 생각되었고, 그것이 그대로 기독교 신학에 넘어와 논의되었던 것이다.[40] 한국어로 예를 들면 집에 들어설 때 굳이 자기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나다/저에요'라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41] 자연스러운 한국어로 번역하면 \'존재케 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42] 오스트리아 에 위치한 '성 카를 성당'(Karlskirche) 내부에 묘사된 모습이다.[43] 그렇기에 하느님을 떠나 정상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피조물은 존재하지 않으며, 천사가 하느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 마귀라는 절대악의 존재가 되고 인간이 하느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 죄 밖에 지을 수 없는 상태가 된다.[44] 이는 2차 창작물에서도 마찬가지이며 밀턴의 실낙원에서는 자신이 만든 게 잘 돌아가는지 확인하는 과정이었다고 한다. 즉, 힘들어서 뻗은 게 아닌 창조활동의 마지막을 뜻하는 쉼이었다.[45] 안식일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사바트'에서 유래했다. 동사로는 '멈추다'라는 뜻이다.[46] 고대 중동인들에게는 하늘에 떠 있는 천체 하나를 잠시 멈춰둔 정도겠지만, 현대인의 시점으로 보면 지구 자전을 멈춰놓으면서 지구의 자전 정지로 나타날 수 있는 여러 요소들을 어떠한 힘으로 다 틀어막은 셈이다.[47] 고작 폭포 자르는게 뭐 그리 대수냐 싶겠지만, 여기서 말한 폭포 자르기는 물 자르기를 마치 점토 자르듯이 야훼가 원하는 부분의 물만 잘라내고 나머지 부분은 계속 흘렀다는 것이다.[48] 쉽게 설명하자면 무리가 강을 건너는데 제사장이 밟고있는 부분은 발원지에서부터 물이 뚝 끊겨서 그만큼의 라인이 비어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걸음 옮기면 발이 떨어진 자리에는 다시 발원지로부터 물이 흐르고 발이 닿은 곳에는 또 그만큼 물이 끊기니 어찌보면 바람을 이용해 일시적으로 바다 가르기보다 더 대단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49] 이 기적을 일으키면서 야훼가 무시한 물리법칙은 유체역학이다. 게임인 마인크래프트의 물 블록조차도 비어있는 곳을 채우는 유체의 성질을 가지고 있음을 생각하면...[50] 아프수[51] 엔키[52] 그러나 정작 신학의 양대산맥이라 불리는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는 문자 그대로의 7일을 부정했다. 신학에 의하면 그저 7단계로 나뉜 아주 긴 시간이라고 한다. 애당초 신학은 신이 뿅!하고 창조하는 것이 아닌 신이 뭔가에 뜻을 품게 되면 서서히 진화하면서 만들어진다고 본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경우 이를 존재의 장(물리학적으로 보면 퍼텐셜에 가깝다.)이라고 하였다.[53] 제우스, 오딘, 안, 라(전승에 따라서 부모 없이 생겨났다는 이야기도 있다), 바알, 심지어 옥황상제까지. 다만 첫 번째 신은 대체로 부모가 존재하지 않는다. 반고, 가이아 등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는 나와도 부모는 없다.[54] 반고는 알에서 태어났고, 라는 바다에서 솟아올랐으며, 가이아는 카오스 속에서 나타났으므로 이 신들도 시작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건 반고와 라,가이아의 자리를 알과 바다,혼돈이 대체한 것 밖에 되지 않는다. 세상은 이미 준비는 갖춰져있었으나 시작이 될 계기(반고가 알을 깨부수고 나옴)가 없거나, 모든 가능성으로 가득한 혼돈(카오스)이었다는 설정이다. 어찌보면 어느순간 탄생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그저 존재했다.는 야훼와 비슷하다. 결국 제1원인론은 존재하는 것이다.[55] 이우혁은 이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는 설명이 감명이 깊었는지 퇴마록에도 비슷한 '스스로 존재하는 자들'이란 개념이 등장한다. 복수형으로 보아 유일신은 아니지만 다른 신이나 악마들보다는 더 상위의 존재들로 언급된다.[56] 불교의 본초불이나 힌두교의 브라흐마, 한국 신화의 미륵 등이 해당된다.[57] 집대성한 사람이 토마스 아퀴나스이기에, 유대교와 동방교회에서는 조금 다를 수 있다.[58] 그러나 정작 구약성경에서도 야훼는 태초부터 존재하고 불변하며, 인간의 일생은 야훼에 비하면 있었다가 없었다가하는 안개같은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을 보면 유대교라고 딱히 차이가 있지는 않을 것이다.[59] 인간에게 자신의 거룩한 성품, 형상을 부여했다는 뜻이다. 결코 야훼 본인의 외모대로 사람을 창조했다는 뜻이 아니다! 야훼는 완전히 영적인 존재이다. 때문에 외모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60] 오늘날의 기독교에서는 정말 극단적인 종파가 아니라면 어차피 이방신들은 존재하지도 않는데, 섀도우 복싱을 할 필요가 있나 생각해서인지 이런 것에 무덤덤하다. 때문에 바티칸에다가 이집트오벨리스크를 멋지다며 세워둘 수 있는 것.[61] 예를 들어 바알은 근동에서 풍요의 신으로서, 바알 역시 어떤 실체가 있는 존재라기보다는 풍요 자체에 대한 욕망에서 만들어낸 기원의 대상이다. 신명기 7장 13절에서는 하느님이 주시는 축복들을 열거하고 이어서 이민족 징벌 명령과 우상숭배를 경계하는 계시가 이어지는데, 이는 13절의 축복들마다 그에 해당하는 우상들이 있었음을 추측케한다.[62] 야훼계 문헌: 솔로몬 시기(BCE 940년경), 엘로힘계 문헌: 북왕국에서 서술되어 BCE 722년 남왕국에 수용된 것으로 추정, 신명기계 문헌: BCE 622년 초기 형태가 사용된 것으로 추정, 사제계 문헌: 바빌론 유배 이후 작성된 것으로 추정.[63] "만일 야훼를 섬기고 싶지 않거든, 누구를 섬길 것인지 여러분이 오늘 택하시오. 유프라테스 강 건너편에서 여러분의 조상들이 섬기던 신을 택하든지, 여러분이 들어와서 살고 있는 이 땅 아모리인의 신을 택하든지 결정하시오. 그러나 나와 내 집은 야훼를 섬기겠소." 여호수아서 24장 15절, 공동번역성서.[64]삼위일체론을 믿지 않는 타종교에서는 이야기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부터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종파는, 가톨릭이든 정교회이든 오리엔트 정교회이든 네스토리우스파이든간에 삼위일체의 기본 개념, 곧 한 하느님의 실체가 세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다는 개념은 고유한다. 다만 예수가 하느님 실체와 인간 실체를 따로 지니는지, 하느님 본성과 인간 본성이 따로 있는지, 하느님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가 따로 있는지 등등의 '그리스도론'에서 구체적 해석이 갈라질 뿐이다.[65] 이 부분은 삼위일체론 항목을 참조해보자.[66] 구약의 야훼의 행적들에서 각 위격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로 나타났는지는 추측 불가다. 심지어 구약에서는 '성부,성자,성령'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이 나오지도 않는데 성자의 위격이 어떤 형태로 발현되었는지를 찾는 것 자체가 무리수다. 의외로 성령은 간간히 나온다. 위격을 가진 존재보다는 신성의 능력을 나타내는데 쓰여서 그렇지.. ex)사울이 성령에 감동되어..[67] 또한 그리스도인이 신구약 양쪽에서 묘사되는 하느님을 인식함에 있어서, 구약에서는 성부만 활동하다가 신약에서 성자와 성령이 '추가'되었다고 인식하는 것 역시도 곤란하다. 그보다는 신구약에서도 동일한 하나의 하느님을, 신약의 텍스트에서는 셋의 페르소나로 더 엄밀하게 표현하였다고 이해하여야 기독교의 성경 이해방식에 가깝다. 즉 '구약에는 삼위일체적인 표현을 안 쓰네? 그렇다면 구약의 야훼는 성부구나'라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에는 삼위일체적인 표현을 안 쓰네? 그렇다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페르소나 구분에 집착하면 안 되겠구나'라고 이해하여야 하는 것이다. 한편 성부, 성자, 성령의 3가지 페르소나라는 표현을 거부하는 유대교에게 있어서도 구약에서 묘사하는 야훼가 성부만을 가리킨다는 표현은 설득력이 없다. 애초부터 삼위일체 교리가 없는 유대교에서 야훼를 '성부'로 여길 것이라는 가정 자체가, 지극히 비유대교적인 가정이다. 즉 기독교에 의하면 구약의 야훼를 성부에 국한시키면 삼위일체에 대한 오류이고, 유대교에 의하면 구약의 야훼에게 성부라는 용어를 적용시키면 유일한 페르소나를 지닌 유일신 신관에 대한 오류이다.[68] 일반적으로 원죄라고 부르는 것이나 성경에서 명활하게 원죄라는 개념이 제시된 적은 없다. 원죄와 자범죄의 구분은 어디까지나 성경의 내용을 해석하면서 나온 신학적 개념일 뿐, 그리스도인으로 자칭하는 모두가 절대적으로 믿는 근본 교리는 아니다.[69]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길로 주장하고 있으니 이게 틀린 얘기라는 괴이한 주장이 있는데, 삼위일체론 교리를 접어두고 생각하더라도 예수를 믿고 성부는 안 믿는다는 건 애초부터 성립불가다. 이 두 위격은 본질이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너희가 설령 나는 못 믿겠다하여도 나를 보내신 아버지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내가 행한 그 일은 믿으라고 한 적이 있긴하다.[70] 일부 개신교의 입장에서는 양대 보편교회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와 구원 문제에서 교회의 역할과 7성사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변형된 행위구원론, 혹은 구원에서 인간의 역할을 중요시하는 것으로 여겨 잘못된 것으로 여겨진다고 보는데 가톨릭과 정교회의 신학 기준으로 교회의 역할은 교회가 단순한 인간 공동체가 아니라 성자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성자의 온전한 지체이고, 성사 역시 가톨릭 교리에 따르면 성사라는 행위의 주체는 하느님이므로 단순히 인간의 행위로서 이해해서는 안 된다.[71] 다만 이는 구원에서 교회의 역할을 중요시하는 양대 보편교회의 입장인 것이고 개신교 종파들은 가톨릭, 정교회만이 성자의 지체라고 하는 그 교리 자체를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이는 그저 보편교회 입장에서 설명한 순환논법일 뿐이다. 개신교 종파들은 가톨릭과 정교회가 구원에서 교회의 역할과 성사를 매우 중요시하는 것과 달리 개인의 믿음이 구원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교리를 공통적으로 채택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개신교가 교회라는 공동체를 등한시여기는 것은 전혀 아니다.(무교회주의라고 정말 등한시하는 종파도 있기는 하다.) 허나 애초에 7성사 중에 세례와 성찬만을 성경에 나온 전통으로서 인정하며 보편교회만이 성경 해석의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믿는 개신교 종파들의 입장에서 보면 7성사나 보편교회에 구원의 절대성을 부여하는 것은 변형된 행위구원론이라고 볼 여지가 있는 것이다. 이는 그저 관점의 차이일 뿐이다.[72] 바울은 사울로 살던 시절 누구보다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재판에 세워 순교하게 하던 사람이었다. 오죽했으면 예수가 바울의 눈을 멀게한 뒤 어떤 신자의 집에 찾아가 고침을 받으라 말해놓고 먼저 신자를 찾아가 바울이 오면 눈을 고쳐주라고 하였음에도, 예수를 믿는다는 신자가 감히 예수에게 아니, 저런 애를 왜 살려주십니까?!라고 따질 정도로..[73] 물론 가톨릭에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스스로의 길을 '구원의 필연성'으로 두고, 다른 종교나 믿음 혹은 무신론에서도 하느님의 뜻에 맞는 생활(아마도 사랑)을 통한 '구원의 가능성'을 인정한다. 이게 만인존중사상과 더불어 '타종교를 존중하는 태도'의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자세한 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항목을 참조하자.[74] 구원 받기 위해 예수 믿고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았기에 예수를 진정으로 믿을 수 있고,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며 살다보니 그 행위의 결과가 착한 일이 되는 것이다.[75] 간단히 말해 착해서 구원 받는다가 아니라 구원 받아서 점차 착해진다.[76] 아예 성경에서는 구원 받지 못한 자, 즉 예수를 믿지 하는 자들은 예수를 믿을 수 없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는 구절조차 존재한다. 역시 비그리스도인이 들으면 펄쩍 뛸 얘기..[77] 성경이 가라 하면 가고 멈추라 하면 멈추는 것이 개신교인의 성경 해석하는 태도이다. 성경에 자신의 사견을 가감하는 행위는 요한계시록에서 엄중히 경고하고 있다. 일종의 하나님의 권한을 침해한 월권행위와 같다.[78] 가톨릭의 경우는 '익명의 그리스도인 이론'을 통하여 비신자들의 구원에 대해 긍정적인 해석이 나왔으며, 결국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비신자들의 구원 가능성에 대한 논의도 있었다. 다만 가장 올바르고 정석적인 구원의 길이 예수 그리스도가톨릭 교회에 있다는 점도 분명하게 명시하였다. 자세한 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항목을 참조.[79] 하지만 자살 자체가 신이 주신 목숨을 함부로 끊어낸 죄이니.. 신이 납득할만한 사유가 있는 것이 아닌 이상은 사실상 지옥행 확정이라고 여겨지긴한다.[80] 개신교에서는 연옥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사람이 죽으면 1차적으로 낙원과 스올을 거쳐 최종적으로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고 믿는다. 개신교 교리상 구원을 얻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를 향한 믿음뿐이고, 어떤 인간도 예수를 믿지 않고 죽으면 그 어떤 방법으로도 천국에 갈 방법이 없다고 하니 반박의 여지가 없다. 후술하지만 개신교 교리상 인간은 스스로 의인이 될 수조차 없다.[다만]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과거에는 하나님께서 각 족속들그들의 길로 행하는 것을 상관하지 않으셨으나, 이제는 아니다. 라고 한 바가 있기에 예수의 이름을 듣도보도 못한 아담부터 예수 이전까지의 모든 인물이 지옥행 확정인 것은 아닐 것이라고 추측한다. 예수를 통하지 않는 구원이 없다는 것은 다른 말로 원칙적으로는 예수 이전에 살았던 유대인들조차 얄짤없다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 예수 이전의 유대인들은 민족과 국가단위로 번제와 화목제, 속죄제, 요제 등으로 신에게서 죄를 사함 받았고 유대민족에서 끊어져나가지 않는 이상 낙원을 약속받았으며, 이는 유대교로 개종한 외국인들에게도 해당되는 사항이었다.[82] 여담으로 구약시절 죄를 사함받는 방식은 소나 양같은 동물로 흠없는 산제물을 잡아 그들에게 죄를 전가하는 의식을 치르고 그것들을 죽여 신에게 제사드리고 신이 정하게 한 제물들을 먹음으로서 죄를 사함받는 것이었다. 단순히 신이 너 무죄! 하며 죄를 사하여 준 것이 아니라는 것. 물론 성경 세계관 속에서 짐승은 영혼이 없기에 죽으면 그대로 끝이다. 딱히 신의 나라에도, 지옥에도 가지 않는다.[83] 개신교의 교리상 인간은 아담의 원죄 이후로 본성 자체가 비틀어져서 스스로 의인이 될 수 없고, 의인이라고 자칭, 타칭하는 것은 신에 대한 반역행위나 다름 없다. 기독교의 의로움의 기준은 상당히 높다.[84] 예수 그리스도십자가 수난과 죽음과 부활로 모든 인류의 죄가 사해진 후, 베드로의 하늘에서 내려오는 보자기 사건 이후이다.[85] 구약에서 가장 대표적인 변곡점이 바로 느헤미야서이다. 구원의 대상인 유대인의 기준이 혈통적인 유대인에서 종교적인 유대인으로 넘어가는 상황이기 때문. 물론 이 전의 율법서들을 읽어보면 이방인이 유대인이 되는 방법에 대해 친절히(?) 설명이 되어있다. 즉 유대인 아니면 구원 못 받나요?라는 질문에, 유대인이 되세요로 대답한 것.[86] 물론 가톨릭이 종교다원주의를 표방한다거나 하는건 아니다. 그리고 세례가 구원에 필수적이라는 교리 역시도 수정된 바가 없다. 왜냐하면 수세(흔히 말하는 세례)와는 별개로, 화세 역시도 엄연히 세례에 속하기 때문이다. 곧, 가톨릭적 입장에 의하면 지나가던 무슬림이나 무당이 (심지어 당사자도 모르는 상태에서) 세례를 받았던 그리스도인일 가능성이 존재한다.[87] 약간 변호를 해주자면, 전근대 시기 교회는 말 그대로 '공공기관'이고 복지, 교육, 연구 등을 폭넓게 담당하였기에 세금을 받아먹는 것 자체까지 뭐라 하긴 힘들다. 그렇다고 가진 것 없는 농노들에게서 소를 강제로 뜯어 장례미사 대금으로 쓰는 등의 행태가 잘한 짓은 아니지만. 즉 돈을 받는 것 자체보다는, 돈을 과도하게 받았냐의 여부가 문제가 된다.[88] 이슬람의 신이 만든 최초의 남자의 이름이 아담이다. 그 아내의 이름은 하와. 그리고 아브라함까지는 구약의 계보와 동일하나, 아브라함의 두 아들 중 본처의 아들이자 차남인 이사악의 후손들이 유대인이고, 후처의 아들이자 장남인 이스마엘의 후손들이 아랍인들이다.[89] 쿠란 수라 112 이클라쓰 장. 본문은 이러하다. '낭송하라, 하나님은 한 분뿐이시고 영원하시며, 낳지도 태어나지도 않으셨고 이 세상에 그분과 같은 자 없노라'[90] 고대 아랍인들은 알라에게 네 명의 투정 부리기 좋아하는 딸 신이 있으며 이 딸 신들에게 소원을 열심히 빌면 딸 신들이 알라에게 대신 효과적으로 소원을 들어주게 만든다고 믿었다.[91] 완전히 같은 케이스는 아니다. 우선 기독교는 유대교의 한 갈래로 시작되었고, 그 신의 존재론적 속성에 대한 설명과 타나크 해석이 유대교와 다른 것인데 이런 교리 차이는 그 내부의 교파들 끼리도 있다. 반면 이슬람은 애초 두 종교와 독립적으로 아라비아에서 시작됐고 두 종교와 무관한 인물이 "타나크가 변개되었기에 그 신에게 바른 계시를 다시 받았다"고 주장하며 등장했는데, 그 쿠란은 타나크와 전혀 다른 내러티브를 담고 있다. 관점에 따라 유대교와 이슬람의 유일신을 같게도 다르게도 볼 수 있지만, 유대/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에는 수니와 알라위 사이에서 보이는 그런 신의 존재론적 차이 이전에 셈족신앙 분화과정의 다른 경로를 타고 정립된 유일신교라는 측면의 차이도 있다는 의미다.[92] 간과하기 쉬운 사실인데 성경 전문이 아랍어로 번역되기 시작한 것은 르네상스 시대의 레반트 지역의 마론파 선교사들이 시작한 일이다. 무슬림들은 성경을 직접 읽는 일은 사실상 거의 금기시되어 있었으며, 압바스 왕조 치하에서 고대 그리스와 인도, 페르시아의 철학, 의학 서적이 번역되는 동안에도 성경에 대한 번역은 의도적으로 방치되었다.[93]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지음, 『세계종교사입문』(2004, 파주, (주)도서출판 청년사), pp669-679.[94] 고대 히브리어의 '신들'이라는 뜻의 엘로힘아람어 문헌에서 복수형에서 단수형으로 바뀌고 관사가 붙어서 알라하(Allaha)라는 단어로 바뀌었고, 아랍어 단어 Allah의 기원이 되었다.[95] 기독교에선 신은 인간과 함께 하며 천국은 신과 인간이 합일한 상태이지만, 이슬람에서 신은 인간과 결코 합일할 수 없다. 또한 기독교에서 신은 스스로 제약을 걸지만 이슬람은 신의 절대적 초월성을 강조한다.[96] 인터넷 초기에 "에루 일루바타르"를 "하느님 - 만물의 아버지"로 번역하는 것에 대해 논쟁이 벌어진적도 있다. 다만 톨킨이 야훼와 일루바타르의 동일시를 의도했다 하더라도, 종교적 문제나, 독자적인 세계관인 레젠다리움을 기독교 신화로 오해 문제가 있을 수 있기에 채택되지 않았으며, 톨킨 번역지침에 따르면 에루 일루바타르는 퀘냐 단어이기 때문에 번역할 이유가 없다.[97] 일례로 골룸을 살리는 것에 대한 대화나 일루바타르의 의도가 있다.[98] 디자인도 당시 야후! 로고를 패러디하였다.[99] 하지만 유하바하의 포지션 자체는 예수에 가깝고 진짜 야훼에 가까운 존재는 그의 아버지다.[100] 또는 묵시록의 어린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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