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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스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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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란트 재무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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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내전 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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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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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 발발(루거우차오 사건) · 제2차 국공합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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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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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황허 홍수 |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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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 협정
1939년
4월
스페인 내전 종결 |
5월
할힌골 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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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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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겨울전쟁
1940년
4월
노르웨이 침공 |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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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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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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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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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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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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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샤바 게토 봉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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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스크 전투 ·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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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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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4월
대륙타통작전 |
6월
바그라티온 작전 · 노르망디 상륙 작전 · 필리핀해 해전 · 사이판 전투 |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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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바르샤바 봉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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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지 전투
194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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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도쿄 대공습 · 연합군의 독일 본토 침공 |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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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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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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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 만주 전략 공세 작전 · 일본 제국의 항복 |
9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 매년 전황·추세 등 상세한 내용은 연표 해당 연도 참고 }}}}}}}}}}}}
쿠르스크 전투
Курская битва
Unternehmen Zitadelle(성채 작전), Die Schlacht bei Kursk(Schlacht am Kursker Bogen)
Battle of Kursk, Operation Citadel
제2차 세계 대전독소전쟁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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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국방군소련군의 배치도
날짜
1943년 7월 5일 ~ 8월 23일[1]
장소
소련 러시아 SFSR 쿠르스크
원인
독일 국방군의 쿠르스크 돌출부 포위 시도
교전국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소련|]]
지휘관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게오르기 주코프|]]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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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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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 로코솝스키|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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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코네프|]]
[[틀:깃발|
기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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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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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폰 만슈타인
]]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귄터 폰 클루게|
귄터 폰 클루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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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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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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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파울 하우서|]]
결과
소련군의 승리
영향
소련군의 동부 전선 주도권 장악
독일 국방군에게 빼앗긴 하리코프를 비롯한 소련 영토 탈환
전력[3] 성채 작전
- 1,910,361명
- 전차 5,128대
- 포 25,013문
소련군 반격기간
- 약 250만 명
- 전차 7,360대
- 포 47,416문
- 항공기 약 3,000기
성채 작전
- 780,900명
- 전차 2,928대
- 포 9,966문
소련군 반격기간
- 940,900 명
- 전차 3,253대
- 포 9,467문
- 항공기 2,110기
피해규모[4] 전사/실종 254,470명
부상 608,833명
포 5,244문
전차 6,094대
항공기 1,626기[5]/4,618기[6]
전사/실종 49,878명[7]
부상 134,677명
전차 약 800대[8]
항공기 524기

1. 개요2. 서론3. 1943년 동부전선의 상황4. 성채 작전5. 소련군의 방어
5.1. 사상 최대의 방어 작전5.2. 정보전의 승리
6. 독일군의 공세
6.1. 쿠르스크 북쪽 방면
6.1.1. 독일군의 초기 공세6.1.2. 포니리 공방전
6.2. 쿠르스크 남쪽 방면
6.2.1. 독일군의 초기 공세6.2.2. 제2SS기갑군단의 약진
6.3. 프로호로프카 전투6.4. 독일군 공세 종료
7. 소련군의 반격과 전투 종료
7.1. 쿠르스크 북쪽 방면(쿠투조프 작전)7.2. 쿠르스크 남쪽 방면(루미안체프 작전)
8. 결과9. 편제
9.1. 추축군의 편제
9.1.1. 중부집단군9.1.2. 남부집단군
9.2. 소련군의 편제
9.2.1. 중부 전선군9.2.2. 보로네즈 전선군9.2.3. 스텝 전선군
10. 매체에서의 묘사11. 여담
11.1. 튀르키예11.2. 제2SS기갑군단의 이탈리아 차출11.3. 올가 체코바

[clearfix]

1. 개요

이제 우리 독일군과 소련군은 완전히 동격이다. 우리만 할 수 있고, 그들이 할 수 없는 일은 한 가지도 없다.
독일 육군 제6보병 사단장 '호르스트 그로스만(Horst Großmann, 1891 ~ 1972)'
이제 독일군은 패배의 쓴 잔을 맛보게 되었고, 강력한 적을 무너뜨리는 소련군의 용맹성을 알게 되었다.
게오르기 주코프, 내셔널 지오그래픽 <"전쟁의 대가들"> 중에서

독소전쟁 중이었던 1943년 7월 4일~1943년 8월 23일까지 쿠르스크 일대에서 벌어진 소련나치 독일 간의 전투이다. 제3차 하리코프 공방전 이후 형성된 쿠르스크 돌출부를 포위하려는 독일 국방군의 시도로부터 발발했다.

이 전투는 동부전선에서 독일의 마지막 전략적 공세[9]였으며, 동시에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서서히 소련군의 우세로 넘어가던 동부전선의 주도권이 소련으로 완전히 넘어간 전투였다.[10] 이 전투에서 패배한 독일군은 이후 동부전선에서 전략적 공세를 펼칠 역량을 완전히 상실했다.

2. 서론

쿠르스크 전투의 30초 전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처참한 패배 이후 독일 국방군은 캅카스에서 전면 후퇴를 결정한 이후로 소련군의 공세에 족족 밀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독일군은 제3차 하리코프 공방전에서 소련군을 저지하는데에 성공했고 이후 전선은 소강 상태에 이르렀으나, 그 과정에서 쿠르스크 지역에 남북으로 250km, 동서로 160km에 달하는 거대한 돌출부가 형성되어 독일 소련 양측의 크나큰 이목을 끌었다. 독일군은 동부전선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이 돌출부를 포위하는 성채작전을 계획했다.

원래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계획에 따르면 성채 작전은 5월 3일에 게시되어야 했으나 완고한 소련군의 방어에 맞추기 위해 독일군은 2달이 넘는 기간 동안이나 공격을 미뤄야 했다. 소련군은 독일군이 여름 중으로 쿠르스크 돌출부에 공격을 가할 것이라고 상당히 정확히 예측하여, 자군 총 인력의 40%와 기갑 부대의 75%를 쿠르스크 지역에 투입하였다.

7월 4일 성채 작전이 게시되고 독일군은 쿠르스크 돌출부의 북쪽과 남쪽 두 군데로 공격을 가했다. 북쪽에서의 공격은 시원찮았으나 남쪽에서는 양측 모두 상황이 급박해 격렬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3제곱킬로미터 불과한 지역에 수백대에 전차가 뒤엉키며 서로에게 포화를 내뱉는 아비규환이 벌어졌으며 양측 도합 전차 약 700대 이상이 파괴되었다.

독일군은 진격에 실패하고 주저앉았고 7월 10일 시칠리아에 서방 연합군이 상륙하며 이탈리아로 진입하자 히틀러는 공세 중단을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육군최고사령부의 반대로 논쟁이 이어지던 와중에 소련군이 독일군의 공세가 끝나기도 전인 7월 12일부터 오룔 방면으로 쿠투조프 작전을 시작했으며 이를 막기 위해 7월 13일에 성채 작전은 공식적으로 취소되었다. 상대적으로 사정이 나았던 하리코프 방면에서는 17일까지 롤란드 작전을 진행했으나 미우스 방면에서 소련군이 공세를 시작하면서 공세가 중단됐다. 이어서 8월 3일부터 벨고로드 방면으로 시작된 소련군의 반격이 8월 23일까지 이어졌고 독일로부터 벨고로드시와 하리코프시를 탈환하는 데에 성공하며 쿠르스크 전투는 끝을 맺었다.

흔히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인류 역사상 최대의 전투로 알려졌지만, 이는 사실 최대 규모의 사상자를 낸 전투라고 해야 적절하다. 쿠르스크 전투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와는 달리 역사상 최대 수준의 기갑, 항공전력이 동원된 가장 규모가 거대한 전투였다.[11] 이 전투의 일부인 쿠르스크 남부, 오보얀 쿠르스크 북부에서 일어난 프로호로프카 전투는 사상 최대의 항공전이자 최대의 전차전이기도 하였으며[12][13] 한 달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단일 전역에서 양 군의 병력 약 340여만 명, 포 5만 6천여 문, 전차 약 1만여 대, 항공기 약 천여 대라는 가공할 전력이 충돌하였다.[14]

한편 스탈린그라드 전투제2차 세계 대전의 주도권 전환의 시발점이였다면, 쿠르스크 전투는 전쟁에서 소련군이 완전히 우위를 차지하였음을 확인시켜준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독일군은 소련군을 제대로 격파할 수 없었으며 도리어 소련군의 반격에 주요 도시들을 탈환당하는 등 앞으로 두번 다시는 동부전선에서의 대규모 공세를 이어나갈 수 없게 되었다.

3. 1943년 동부전선의 상황

파일:1943-07-01GerWW2BattlefrontAtlas.jpg
쿠르스크 전투 이전의 전황
1942년 겨울, 독일은 제 6군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통째로 잃고 말았고, 후방 부대들은 캅카스에서 전격적으로 후퇴하게 된다. 소련군은 이를 추격하여 하리코프를 일시적으로 탈환하는데 성공했지만, 독일군은 과감한 반격을 개시하여 소련군 선봉을 섬멸하고 다시 하리코프를 재탈환했다.

해당 공방전 결과, 동부전선에는 쿠르스크를 중심으로 거대한 돌출부[15]가 형성돼 양쪽 수뇌부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4. 성채 작전

파일:attachment/Kursk.jpg

이 무렵 나치 독일은 이 거대한 전쟁을 수행하기엔 자신들의 역량이 충분치 않음을 느꼈다. 동부전선의 소련군은 미국으로부터 천문학적인 규모의 무기대여법 지원을 본격적으로 받아가며 점점 거대한 괴물로 성장하고 있었고, 북아프리카에선 에르빈 롬멜 원수의 아프리카 기갑군이 수세에 몰려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럽 영토 어딘가에 연합군이 대규모의 상륙작전을 감행한다면 독일군은 과거 제1차 세계 대전의 악몽이었던 양면 전선을 강요당할 수밖에 없게 되고,[16][17]이는 독일로서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것이었다.

이런 부담은 독일군 수뇌부에게 획기적인 전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직전의 3차 하르코프 공방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가능한 빠르게 이 기세를 몰아서 북쪽으로 공세를 취하는 한편, 중부 집단군이 남쪽으로 공세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8] 반면 기갑총감인 하인츠 구데리안과 전차 생산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알베르트 슈페어는 '동부전선에서의 공세는 더 이상 불가능하다'며 반대하였다.

하지만 만슈타인이 보기에 소련군은 이전의 전투로 비틀거리고 있었고 쿠르스크 인근에 아직 정교한 방어선이 구축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에 히틀러도 선제 공격안을 받아들였고, 구체적인 작전안은 총통의 제안에 열렬히 동의한 쿠르트 차이츨러 참모총장이 맡았다.

그리고 마침내 쿠르스크 돌출부에 협격을 가해 전선을 축소하고, 동시에 최대한 소련의 전략 예비대[19]를 섬멸해 동부전선을 안정시키고 주도권을 되찾겠다는 골자로 성채 작전(Unternehmen Zitadelle)을 입안했다.

만슈타인은 하리코프에서 적에게 막대한 피해을 입힌 당시가 적기이며 늦어도 5월 초에는 공격을 시작해야 한다 주장했으나, 당시는 해빙기로 인한 진흙탕으로 공세를 펼치기 좋지 않은 상황이었고 소련군과 마찬가지로 큰 손실을 입은 중부집단군의 증원도 필요했기에 히틀러는 기갑부대의 보충이 끝나는 6월 12일로 작전 개시일을 결정했다. 그런데 히틀러는 여기서 또 완벽한 전력 우위를 확보해야 한다며 작전을 추가로 연기시켰다. 물론 맨 위의 개요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전력 우위를 점한답시고 끌어모은 게 고작 소련군의 절반 수준이었다. 방어도 아니고 공세를 펼치려는 주제에![20][21]

당시 독일군은 히틀러의 의견대로 보충이 필요했던 상황이긴 했으나, 문제는 소련군의 보충 속도가 독일군의 보충 속도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공세가 연기된 동안 소련군은 인민과 병력들을 총동원하여 수백 km 길이의 도랑을 팠고, 대전차포와 지뢰로 철벽 방어선을 구축했으며 병력과 각종 장비들을 어마어마하게 보충했다. 1943년 4월 쿠르스크 지구에 배치된 소련군의 병력은 약 122만 명이었으나, 성채 작전이 실제 시행된 7월 당시 소련군의 병력은 단 3개월만에 약 190만 명 이상으로 병사만 70만여 명이 증원되어 있었으며, 포병 전력은 2배, 기갑 전력은 무려 4배 가까이 증원되었다. 당연하지만 고정 방어 진지도 석 달 사이에 더 많이 구축된 상태였다.[22]

물론 공세가 언제였든 결과를 뒤집기는 어려웠다. 당시 독일의 사정상 이런 돌출부 전체를 절단하려는 대규모 공세를 하는 것 자체가 무리에 가까웠다. 연기를 하거나 말거나, 어차피 '아주 낮은 성공확률 vs 낮은 성공확률'의 비교에 불과하다. 그래서 당시 독일에게 있어서 최소한 동부전선을 공략할 최고의 전략은 돌출된 지역 제거가 아닌 후방에 안정적으로 구축된 요새로 소련군을 끌여들여 기동방어를 하는 것이 더 나았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연합군의 물량이 나날이 독일을 압도해 가고 있었기에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리해지고, 소극적으로 방어만 한다면 갈수록 전쟁의 주도권을 잃게 되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즉 독일군 입장에서는 전황을 단번에 바꿀 수 있는 대규모의 회전을 통하여 소련군에게 치명타를 입혀 주력군을 소멸시키는 것 역시 분명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성채 작전은 이런 관점에서 입안되었고, 만슈타인을 비롯한 즉시 공세파들은 공세를 연기하면 오히려 전력차가 더 벌어질 것으로 보고 즉시 공격을 주장했다.[23][24] 한편 중부집단군 사령관 귄터 폰 클루게 원수는 히틀러가 주관한 회의에서는 성채 작전에 적극 찬성했으나, 쿠르스크 방면의 두터운 소련군 방어 진지와 오룔 돌출부 주위에 100만 소련군이 집결하는 것을 항공 정찰로 파악한 발터 모델은 성채 작전에 회의적이었다. 이후 클루게 또한 이에 동의하여 모델이 제안한 히틀러가 명시적으로 금지했던 오렐 돌출부 후방의 방어진지 구축을 허락했다. 특히 모델은 '성채 작전이 성공하더라도 오룔 방면에 위치한 소련군의 위협은 그대로이기 때문에 성공 가능성도 낮은 성채 작전은 아예 완전히 포기하고 오렐에 집중된 중부집단군을 동부전선의 전략적 예비대로 가용할 것을 주장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6월 중순, 치타델 작전이 중단될 가능성이 제로가 되자 9군을 공세 작전 위주로 훈련하여 재편성하였다.[25]

계획 단계에서도 보이듯 성채 작전을 강하게 주장한 것은 육군최고사령부였으며 모델은 처음부터 공세에 회의적이었기 때문에 공세에도 적극적이지 않았다. 반면에 만슈타인은 늦은 공세에 회의적이기는 했어도 공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며 공세 시작 이후에는 적극적이었다. 이는 양측의 입장이 매우 다르기 때문인데 모델의 경우, 공세를 진행하는 9군 자체가 이미 오룔 돌출부를 방어하고 있었으며 북쪽의 2기갑군을 향한 소련군의 압력이 이미 심각한 상태였다. 따라서 공세 시작 이후에도 공세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모델이 기갑전력을 선봉으로 세우던 독일 교리를 따르지 않고 소련과 유사하게 돌격포와 보병 위주로 돌파를 시도한 데에는 이러한 영향이 있었다. 반면 만슈타인은 1기갑군과 6군에서 기갑전력을 차출하면서까지 쿠르스크에 기갑 전력을 집중시켰으며 주공이 남부 방면이었기 때문에 사령부의 지원 역시 남부 집단군에 집중됐다. 그만큼 이 작전이 남부 집단군에게 중요했기 때문이었는데 중부 집단군은 1년 넘게 방어전을 치르면서 매우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했으나 기껏해야 몇 달전에 탈환한 곳에서 공세를 시작할 남부 집단군의 경우에는 공세가 실패할 경우 소련군을 막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26]

성채 작전은 독일 입장에서 앞선 작전과 비교해 볼 때 전역의 크기 대비 유례없는 병력과 무기의 증강이 이루어졌으나, 정작 작전의 목표는 모호했다. 그리고 확실한 목적이 없었던 만큼 사령부의 의지도 자연스럽게 약해졌다. 칼 바그너 소장의 회고를 보면 히틀러조차도 '성공의 가능성이 높지 않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이것밖에 없다'고 말하는 상황이었다. 연합국의 이탈리아 상륙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독일 육군 최고사령부는 동부 전선에 예비가 없었고 국방군 최고 사령부는 이탈리아와 발칸, 프랑스에 투입할 전략 예비가 없었다.[27] 독일군은 전략 예비 확보를 위해 반드시 전선을 단축해야 했다. 쿠르스크 바로 북쪽에는 독일군의 오룔 돌출부가 있었기 때문에 오룔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쿠르스크 돌출부를 정리해야만 했고 히틀러는 단 한치의 땅도 내줄 생각이 없었다. 작전은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독일군의 강박감 속에 점점 미뤄졌다. 결국 작전 입안자들의 확신은 사라지고 야전 사령관들도 회의감에 빠진 상황에서, 성공해도 얻을 것은 별로 없고 실패할 시 잃을 것은 많은 작전이 결국 실행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독일군은 쿠르스크 일대에 50개 사단으로 편성된 병력 90만, 전차 및 자주포 2700대(전차만 3천 대에 이른다는 설도 있음), 비행기 2천대, 야포 1만 문 이상이라는 엄청난 전력을 집결시켰다. 히틀러는 드디어 전력 우위를 갖췄다고 판단했고, 작전 개시일은 7월 5일로 결정되었다.

5. 소련군의 방어

5.1. 사상 최대의 방어 작전

한편 소련군은 첩보로 독일군의 공세목표가 쿠르스크라는 것을 정확히 예측하고 있었다. 따라서 독일군의 공세를 완벽하게 막아내기 위해 가공할 규모의 방어 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사실 쿠르스크 지역이 돌출부라는 것 자체가 적의 선제 공격 목표가 된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한편 스탈린은 모스크바 공방전의 승리와 스탈린그라드 승리 이후에 그랬던 것처럼 독일군에게 대규모 선제 공격을 할 생각을 또 품었지만, 총군부사령 게오르기 주코프와 총참모장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등이 겨우겨우 설득하여 이전같이 쓸데없는 재앙을 피할 수 있게 됐다.

방어전의 주력인 콘스탄틴 로코소프스키의 중앙 전선군과 니콜라이 바투틴의 보로네즈 전선군에는 엄청난 전력이 보강되기 시작했다. 쿠르스크 일대에는 민간인 30만 명을 동원하여 총 3천 마일이 넘는 참호와, 종심이 175km에 달하는 6중 방어선이 구축되었고 여기에 무려 40만 개가 넘는 지뢰매설, 가짜 공군기지 50개와 비행장 150여 곳 건설, 그리고 말뚝 전차 장애물도 구축되었으며 포병의 우세를 중시하는 소련군답게 야포가 약 1만 3천 문, 카츄사 다연장 로켓 9200대를 배치했다.

또한 독일군에 공세를 저지한 후 역습을 가할 주력으로 선정된 스텝 전선군에도 병력 40만과 1개 기갑군이 배치되었다. 이렇게 동원된 소련군의 총 전력은 병력 약 170만, 야포 1만 9천 문, 전차 및 자주포 3600대(8천 대로 추산하는 설도 있음[출처]) 항공기 3100대에 이르는 대규모였고 이는 당시 소련군 전체 병력의 40%, 기갑부대의 75%를 이곳에 배치한 것이었다.

5.2. 정보전의 승리

소련군의 예상으로도 독일군이 공세에 나선다는 것은 자명했으나, 문제는 그 시기가 언제냐는 것이었다. 소련군은 5월 초에 독일군이 공세에 나설 것이라고 파악했지만, 성채 작전이 연기되면서 소련군은 큰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일선 장군들에게 비상이 걸렸는데 상술했듯이 스탈린은 대규모 공세를 주장한 적이 있었고, 이를 주코프바실렙스키가 설득하면서 겨우 포기하게 만들었었다. 하지만 아무리 전쟁영웅인 주코프라 할지라도 최고 권력자의 심기가 뒤틀렸을 경우에는 계속 방어전을 주장하기가 어려웠다. 이는 결과적으로 스탈린의 주장도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다.[29]

그 후 5월 중순이 되자 독일군의 공격이 6월 12일로 연기됐다는 정확한 정보를 입수했으나, 히틀러가 공격을 또다시 7월로 연기하자 소련군 내부에서도 서서히 사기 저하나 병사들의 경계 태세 약화 등의 문제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스탈린도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지만, 다행히 42년과는 달리 끈기를 보이며 방어 준비는 계속 진행시켰다. 일본에 있던 소련군의 첩보망은 연기 사실을 즉각 전달했지만, 점차 독일에서 흘린 '공격이 취소됐다'는 역정보가 돌았다.

여기서 영국에 있던 '다섯 번째 사나이'가 활약했다.[30]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는 소련 정부가 포섭한 대학생 5명(케임브리지 5인조)이 있었는데, 이 중 영국 정보부에 들어간 '다섯 번째 사나이'를 통해서 정확한 정보를 얻어내었다. 하지만 그는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고 쿠르스크 전투 개시 전에 자신의 임무를 포기한다. 어쨌거나 영국 정보부의 정보 수집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 소련군은 정확한 정보들을 받을 수 있게 된다. 7월 4일에는 투항한 독일 병사가 7월 5일 새벽 3시에 공세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자백했다. 이어 7월 5일 오전 2시에 소련군 진지에 침투해 지뢰밭을 개척하던 독일군 공병대원을 생포하여 한 시간 후에 공세가 시작된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소련군은 공세가 시작되기 직전 선제 포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히겠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고, 이제 더 이상 망설일 것이 없었다. 주코프 원수는 항공 폭격과 일제 포격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 기습적인 포격에 의한 독일군의 피해는 크지 않았는데, 아직 독일군 대부분이 공격 출발선에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초기에는 독일군이 오히려 소련군의 대규모 공세를 의심했으나, 더 이상 포격이 이어지지 않자 독일 중부집단군 사령관 클루게 원수는 발터 모델이 지휘하는 독일 9군에 공격을 명령했다. 드디어 두 달의 기나긴 대치 기간이 끝나고 쿠르스크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6. 독일군의 공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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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 진격하는 독일군 3호 돌격포와 장갑차들

6.1. 쿠르스크 북쪽 방면

6.1.1. 독일군의 초기 공세

7월 5일 오전 5시 30분, 포병의 화력지원을 받으며 독일 9군이 소련 13군에 공세를 시작했다. 9군 사령관 발터 모델 상급대장은 독일의 전통인 기갑부대의 돌파 대신 보병에 돌격포를 지원하여 방어선을 돌파한 후 기갑전력을 예비로 투입했다. 모델은 두터운 소련군의 방어진지를 돌파하기 위해 6항공군에 폭격을 요청했고, 독일 공군이 제공권을 완벽하게 장악하면 기갑부대를 선두로 손쉽게 방어선을 돌파할 수 있으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1943년의 소련 공군은 이제 독일이 경시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루프트바페Ju 87 슈투카의 맹폭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소련 전투기 400여 대가 접근했고 곧바로 항공전이 시작되었다. 비록 독일 공군이 여전히 기체의 성능, 조종사 숙련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소련 공군은 이에 맞서 최저한의 기량을 갖춘 수적 우위로 승부했다. 덕분에 독일군은 예전처럼 일방적으로 제공권을 장악할 수 없었다. 결국 방어선 전면에 공세를 펼치던 독일군 23군단과 47기갑군단은 엄청난 숫자의 대전차호, 강철 피아노 줄[31]지뢰, 기관총 진지가 끝없이 배치된 방어선을 돌파하는 동안 눈에 띄게 소모되기 시작한다.

독일 23군단, 47기갑군단이 고전하는 한편, 41기갑군단과 46기갑군단이 각각 소련군 방어선의 양익을 압박하며 진격을 시작했다. 41기갑군단은 우익을 방어하던 소련 81보병사단을 격파했으나, 소련군의 신속한 증원에 진격을 중지했다. 46기갑군단은 소련 15보병사단, 32보병사단을 섬멸하고 포니리를 향해 맹렬하게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46기갑군단에게 방어선이 뚫린 소련군은 2개 보병사단을 추가로 투입했으나 이 또한 엄청난 사상자를 내고 돌파당했다.

이렇게 독일군은 힘겨운 사투 끝에 소련군 제1방어선을 돌파하고 포니리 북쪽에 교두보를 마련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성과는 도저히 승리라 부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중부집단군 대부분의 기갑 전력을 일거에 투입했음에도 하루 내내 겨우 6.5km를 전진했을 뿐이었고, 독일군은 투입된 전력의 거의 20%를 상실하고 있었다.

6.1.2. 포니리 공방전

7월 6일, 새벽에 독일군을 향해 가해진 소련군의 반격을 완벽하게 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소련의 2차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한 채 진격이 돈좌된다. 소련군은 전차 300여 대를 잃고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방어선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7월 7일, 다급해진 발터 모델 대장은 가용 가능한 모든 기갑 전력을 끌어모아 전차 400여 대와 10개 보병사단을 동원해 포니리와 올호바트카를 잇는 철도선에 공세를 개시했다. 당시 포니리와 올호바트카는 오렐과 쿠르스크를 잇는 철도선의 중심으로 독일군과 소련군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지역이었다. 불과 10km 정도에 불과한 전선에서 양군 합계 40만에 가까운 대병력이 충돌하는, 역사상 유례 없는 전투가 벌어졌다. 독일군은 폭격기와 전차로 맹공을 펼쳤지만 소련군은 방어에 성공한다. 독일군의 공세는 날이 바뀐 7월 8일에도 이어졌으나, 소련군의 방어 진지는 도저히 무너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32] 게다가 소련군의 부대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계속 증원되었다. 독일군은 압도적인 교환비를 보여주며 선전하고 있었지만 전력 차이는 오히려 점점 더 벌어지고 있었다. 불과 사흘 만에 쿠르스크 북방면 독일군의 공세는 한계에 다다르기 시작했다.

7월 8일 저녁, 모델 상급대장은 야전작전회의에서 제공권도 확실하지 않은 현 상황에서는 방어선을 돌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중부집단군 사령관 귄터 폰 클루게 원수는 모델 대장에게 공격을 계속할 것을 명령했다. 모델 대장은 소모된 병력을 다닥다닥 긁어 모아 다음날 공세를 재개했으나 결국 방어선을 파훼하는 데는 실패했다.

7월 10일, 모델 대장은 강력한 소련군의 방어선을 향해 공격하는 것은 무의미한 소모전만을 강요당할 뿐이며, 획기적인 전술적 보완이 있거나 공세를 유지할 만한 전력이 보충되지 않는 이상 돌파는 불가능하다고 중부집단군에 건의했다. 히틀러는 공세를 계속할 것을 명령했지만 모델은 휘하 부대에게 휴식을 명령하고 공세를 중단했다.

7월 11일, 아직까지도 클루게 원수는 아직 소련군의 방어선을 돌파할 수 있다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2개 사단을 보충하여 올호바트카에 야습을 가하기로 결정한다. 11일 밤, 독일군은 소련 70군을 향해 공세를 가했으나 저지당하고 말았다. 이것으로 독일 9군은 완벽히 공세종말점에 도달하였고, 성채 작전이 시작된 지 불과 5일 만에 쿠르스크 북부 전선의 공세는 실패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6.2. 쿠르스크 남쪽 방면

6.2.1. 독일군의 초기 공세

7월 5일, 쿠르스크 남부 전선에서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지휘하는 남부집단군의 공세가 시작됐다. 당초에 독일군은 북부보다는 남부에서의 공격이 성공적일 것이라 예상했다. 이는 소련군이 독일 중부집단군을 주공으로 판단하여 북쪽에 더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한 탓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독일 남부집단군은 전차 및 자주포 1600여 대를 보유해 중부집단군보다 타격력이 월등했기 때문이다.[33]

남부집단군의 주공은 제4기갑군 예하 제48장갑군단으로, 독일 국방군 최정예 부대인 그로스도이칠란트(GD)사단[34], 제3기갑사단, 제11기갑사단, 그리고 최신예 전차인 판터를 무려 194대나 장비한 제10기갑여단으로 막강한 기갑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남부집단군은 제48기갑군단과 파울 하우서의 제2SS기갑군단이 보로네즈 전선군의 정면을 강타하고, 베르너 켐프 중장의 켐프 분견군이 도네츠 강 동쪽에서 공격을 가하며 일제 공세를 시작했다.

공세 직전 제4기갑군 사령관 헤르만 호트 대장은 10기갑여단의 판터 194대를 GD사단에 배속시켜 선봉에 설 것을 명령했는데, 이 덕분에 GD사단은 350대의 전차 및 돌격포를 보유해 막강한 공세 역량을 가지게 된다. 당시 GD사단의 기갑전력은 제2SS기갑군단의 전체와 맞먹는 것으로, 소련군이 이를 저지하기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GD사단은 3기갑사단과 11기갑사단의 측면 엄호를 받으며 보로네즈 전선군의 정면으로 진격하였으나, 기대와 달리 GD사단은 소련 67근위소총사단과 3기계화군단의 저지선에 가로막혔고 소련 공군 전폭기에 의해 피해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해 판터의 고장이 속출하면서 판터의 1/3이 기동 불가능 상태가 되는 불운까지 겹쳤다.[35] 또한 GD사단의 대규모 전차부대를 통제하기 위한 10기갑여단의 임무도 GD전차연대장의 비협조, 판터의 신뢰성 문제가 겹쳐 엉망진창이 된다.[36][37]

허나 측면의 3기갑사단이 다행히 방어선을 파훼하였고, 이에 탄력을 받은 48기갑군단은 우선 소련의 제1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해당 기갑부대들이 초전부터 입은 손실은 예상치를 훨씬 뛰어넘은 것이었다. 여기서부터 남부 전선의 공세 또한 암울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한편, 48기갑군단의 동쪽에서 도네츠강 동안 고지대의 소련 제7근위군 방어선의 돌파와 4기갑군의 측면을 엄호하는 임무를 맡은 켐프 분견군 역시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켐프 분견군은 공세 시작과 동시에 3개 기갑사단[38]으로 구성된 제3기갑군단과 2개 보병사단으로 구성된 라우스 군단을 도하시켜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작전 개시 첫날부터 제6기갑사단장 발터 폰 휘너스도르 중장이 소련 저격수에게 저격당해 치명상을 입고[39], 제19기갑사단장 헤르만 폰 오펠른 브로니코우스키 중장이 루프트바페의 오폭에 부상을 입는 등 여러 악재가 겹쳤다. 여기에 제6기갑사단이 건너던 교량이 일부 부대만 도강한 상태에서 붕괴되는 바람에 6기갑사단은 작전 첫날 제대로 된 공세도 하지 못하고 발이 묶였다. 19기갑사단은 도강은 했으나 지뢰들 때문에 진격이 지체되었고, 7기갑사단만이 성공적으로 소련군의 1차 방어선을 돌파했다. 이런 혼란은 최전선 소련부대들을 2차 방어선으로 후퇴시키고, 예비부대들을 투입해 방어선을 강화할 시간을 주었고, 강화된 방어선과 지뢰지대들 때문에 제3기갑군단의 공세는 7월 11일에 제6기갑사단이 야습으로 진격로를 확보할 때까지 수일간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한편 3기갑군단 남쪽에 있던 라우스 군단은 기갑부대의 지원이 없었음에도 작전 첫날 소련의 1차 방어선을 돌파했다. 이후 이어진 소련군의 반격도 격퇴하는 데 성공했지만 작전 첫날에만 사상자 2천여 명이 발생했다.

6.2.2. 제2SS기갑군단의 약진

제2SS기갑군단은 48기갑군단보다 성공적인 진격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48기갑군단의 우익을 엄호하며 공격을 시작한 제2SS기갑군단은 소련 6근위군의 방어선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며 오보얀-쿠르스크를 향해 돌격하였다. 이 때 만약 6근위군이 완전히 무너지고, 켐프 분견군이 도네츠 강을 따라 계속 진격하여 독일 4기갑군과 합류하게 된다면, 쿠르스크 남부 전선은 전면적으로 붕괴될 위험에 직면할 수도 있었다. 이에 보로네즈 전선군 사령관 바투틴 대장은 곧바로 증원을 시작했으나 이미 방어선에 공백이 발생하기 시작했고, 7월 7일, 2SS기갑군단은 이틀만에 쿠르스크의 핵심지역인 '쿠르스크-오보얀 도로'를 향해 20마일(30km)이나 전진하였다.

그러나 이 날을 기점으로 제2SS기갑군단은 공세종말점에 도달하고, 결국 소련 제1전차군에 의해 저지되었다. 7월 9일, 호트의 4기갑군은 기갑사단을 한데 모아 토텐코프 사단을 선봉으로 하여 쿠르스크 도달 전 마지막 장애물인 프숄강(江)을 돌파하고, 제3SS기갑사단 토텐코프는 참호를 구축했다. 하지만 이후로 북서쪽 쿠르스크 방면으로 진격하기는 더 이상 불가능해졌다.

6.3. 프로호로프카 전투

이어 두 부대가 만났을 때, 양 편의 병사들은 좁은 차창을 통해 적군의 규모를 확인하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사방이 구릉지였기 때문에 돌아갈 곳도 없었다. 거대한 두 부대가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고, 이로써 희대의 대전차전이 시작되었다. 이전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1,500대가 넘는 전차가 뒤엉킨 전투는 없었다. 게다가 이 전투에는 그 어떤 계획된 전술도, 일관된 지시도 없었다. 양측의 전차는 서로의 위에 올라타기도 하고, 파괴하고 파괴당하는 악전고투를 겪었다. 한 목격자는 전장이 너무 비좁아보였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8시간에 걸친 맹렬한 전투 끝에 두 부대는 서서히 뒤로 물러나 전열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소련은 300여대의 전차를 남겨둔 채 퇴각했고, 독일 역시 비슷한 손실을 입었다. 하지만 소련은 신속하게 전차를 보강한 반면, 독일에게는 그럴 여력이 없었다.[40]
- 영국 크롬웰 프로덕션, '2차대전사' - <독일 육군의 선봉, 기갑부대> 편

결국 호트는 주력 공세를 북동쪽의 작은 철도 교차점인 프로호로프카로 돌렸다. 이 7월 9일부터 14일까지가 쿠르스크 공세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무장친위대 기갑사단들[41]의 352대의 전차들은 진격하며 소련군 기갑전력을 분쇄하였다. 이에 7월 6일에 스탈린은 제5근위전차군 사령관 파벨 로트미스트로프 장군에게 생일 축하 겸 손수 전화를 하면서, 그에게 예비 병력의 일부를 주고 프로호르프카 방어를 지시한다. 7월 7일 오전 1시 30분, 소련 5근위전차군은 사흘간 370km(230마일)이 넘는 거리를 독일의 Ju 87 급강하 폭격기의 공격을 받으며, 밤낮으로 이동하여 7월 10일에 전선에 도착하였다. 사실 이 정도 거리는 원래 기차로 이동을 해야 정상인데[42] 전차가 직접 주행한 탓에 승무원이나 기계에 많은 무리를 줬으나 사기는 왕성했다.

주코프는 로트미스트로프에게 T-346호 전차 티거에게 화력에서는 제압당하지만[43][44]기동성이 앞서니 '기계화 부대의 백병전'을 하라고 지시하였다. 7월 12일 아침, 제2SS기갑군단 소속 독일군 전차 294대 남짓과 소련군 전차 790여 대가 대치했다.[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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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아침 7시, 대규모의 독일 폭격기 부대가 소련군 진영을 맹렬히 폭격하였고 이에 맞서 소련 전투기들이 출격하였다. 폭격기들이 돌아간 후, 소련군은 대지공격기와 카츄샤 로켓을 동원하여 인근을 쑥대밭을 만들었다. 오전 8시 30분, 로트미스트로프는 강철이란 뜻의 '스탈'이라는 암호로 공격 명령을 하달했고, 곧이어 독일측에서도 LSSAH의 전차들이 몰려나왔다. LSSAH는 수비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는데, 소련군보다 먼저 전장에 도착하여 해당 지역에 구축되어 있던 대전차호와 회랑을 선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날, 겨우 3제곱 킬로미터에 불과한 지역에 수백대의 전차들이 뒤엉켰다.[46]

독일군은 공격해오던 소련군보다 월등한 교환비를 보이며 격퇴하였으나, 소련군은 병력을 재편성하여 끈질기게 공격했다. 전투 과정에서 소련군 170전차여단장이 전사하기도 하였다. 특히 옥챠브리스키에서는 미하일 비트만이 소속된 티거 전차 4대가 소련군 전차 100대 중 수십대를 격파해 버렸다. 결과적으로 소련군의 반격은 실패하였고 엄청난 손실을 입는다. 독일군은 제4기갑군 전구에서 프로호로프카의 4호 전차 4대 손실을 포함해 43~80대의 기갑차량을 손실했고 소련군은 약 300~400대의 기갑차량을 손실했다. 독일군의 전과 주장으로는 하우서의 제2SS기갑군단이 244대를 파괴한것으로 집계되었다. 산술적으로 소련군의 3개의 전차군단중 1개의 전차군단이 사라진 셈이다. 소련군은 70대의 티거를 파괴하였다고 선전하였으나 실제로는 옥챠브리스키와 프로호로프카 근방에서 완파된 1대를 빼면 없다. 즉 전술적으로는 독일군의 완승이었다. 압도적인 숫적 우위에도 소련군이 패퇴하게 된 데에는 미숙한 지휘체계로 여단급 전차부대를 축차투입해 각개격파 당하는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었다.[47] 게다가 상술됐듯 프로호로프카는 독일군이 이미 유리한 방어 진지를 선점한 데다가 구릉 지대였기 때문에 공세를 벌이기 이상적인 지형도 아니었는데, 제5근위전차군은 아군이 구축해놓은 대전차호의 위치조차 몰랐을 정도로 부실한 지형정찰만 수행한 채 조급하게 역습을 실시하다 가공할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월등한 교환비에도 불구하고 공세탄력을 크게 상실한 독일군은 진격이 지지부진해졌다. 소련군도 엄청난 손실로 추가적인 반격이 전혀 불가능하였다. 7월 13일, 로트미스트로프에게는 5근위군 등에서 증원이 계속 도착하긴 했지만, 5 근위전차군의 기동 가능 전차는 50대 밖에 없었고 병력은 반토막이 났다. 다음날 계속 전투가 진행되었지만 이는 소규모에 불과했으며, 독일군의 진격은 소련군의 방어선에 막혀 돈좌되었다. 이 전투의 결과만 따져 봤을때는 독일 기갑군의 전술적 승리에 가깝지만, 독일군은 이 전투에서 입은 손실로 인해 소련군의 돌출부를 제거하려는 최초의 목표를 달성할 수 없게 되었으니 전략적으로는 소련의 승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전투가 실제로는 소련군이 일방적으로 대패했고, 대패를 감추고 싶었던 소련에 의해 독일군의 손실이 부풀려진 전투라는 주장도 있다. 소련측 논리는 본인들이 SS기갑군단의 전차 300대를 격파했다고 주장하는데 SS기갑군단이 보유한 전차수가 352대 정도이며 다스라이히와 토텐코프는 프로호로프카에 있지도 않았다.

훗날 바실렙스키는 이 전투를 회상하면서 '죽을 때까지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고 회고했으며, 한 종군 기자에 따르면 이 지역은 전투가 끝난지 수십주가 지날 동안 끔찍하고 황량한 사막으로 남아있었다고 한다.

사실 이 시점에서 남부 집단군의 공세 역량은 그다지 소진되었다고 보기 힘든 상황이었다. 남부 집단군은 여전히 24기갑군단을 예비로 보유중이었으며 독일군 정비부대는 소련군보다 월등했기 때문에 보충속도가 매우 빨랐다. 만슈타인 역시 생각보다 피해가 크긴 하나 적의 2차 방어선을 거의 돌파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2SS기갑군단이 멈춘 것은 우익의 3기갑군단의 진격이 지지부진하여 우익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독일군은 계획단계에서 우려했던 부분이 현실이 되었다. 보병의 수가 너무 부족해 측면 확보가 불가능하며 기갑부대로 이를 보완하려 했으나 결국 이조차도 불가능했다.[48] 실제로 9군의 공세가 중단된 이후에도 4기갑군은 공세를 지속했으며 2SS기갑군단과 3기갑군단은 16일까지 전선을 연결하는데 성공했다. 문제는 17일부터 미우스 방면에서 소련군의 새로운 공세가 시작되었다는 것이었다. 남부 집단군의 기갑전력은 모두 쿠르스크 방면에 있었기 때문에 6군은 이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49] 결국 17일에 만슈타인은 남부 집단군 단독으로 진행하던 롤란드 작전을 중단시켰고 24기갑군단을 남쪽으로 파견함과 동시에 공세 개시선으로 퇴각할 것을 명령했다.

6.4. 독일군 공세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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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0일, 서방 연합군이 시칠리아에 상륙하면서 히틀러는 귀중한 병력을 남부로 돌릴 수 밖에 없었다. 7월 13일, 성채작전은 공식적으로 취소되었고, 2SS기갑군단은 이탈리아로 이동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호트 장군을 비롯한 휘하 장군에게는 성채작전 이전의 방어선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만슈타인 원수는 작전을 계속할 것을 주장했지만, 이미 다른 곳으로 돌려진 히틀러의 관심을 되돌릴 수 없었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히틀러의 공세 중지 결정은 이탈리아의 연합국 상륙보다는 이어진 소련군의 쿠투조프 작전으로 돌출부가 남부 집단군 전력만으로 방위가 불가능할 정도로 신장되었기 때문이며, 이는 정설이 되어가고 있다. 공세를 계속했으면 독일군이 승리할 수 있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실제로는 만슈타인 주장대로 공세를 지속했으면 위험한 쪽은 독일군이였다. 냉전 이후에 공개된 정보에 의하면 쿠르스크 전투에서 소련군은 전투에 투입되지 않은 스텝 전선군을 비롯한 엄청난 숫자의 예비대들이 전선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었다.[50]

즉, 쿠르스크 전투의 독일군 공세 국면에서 소련군은 전력을 다하지 않았으며, 외려 반격 국면에서는 독일군의 방어에 엄청난 손실을 내면서도 공격기세가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방어선을 돌파해 버렸다. 독일군 장병 개개인의 전의는 공세 종료까지도 여전히 드높았지만, 그것과 별개로 4기갑군의 전투 능력은 8일간의 엄청난 격전으로 급감한 상태였다.[51] 물론 완전히 손실한 전차/돌격포의 수는 200대 미만으로 독일군에게 아직 공세를 펼칠 여력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상은 전차 반 이상이 격렬한 전투로 정비가 필요해 당장은 투입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Zetterling과 Frankson(2000)에 따르면 7월 13일에 남부집단군의 각 군단이 보유하고 있던 가동 가능한 전차와 돌격포의 수는 다음과 같다. 단 2호 전차와 마르더 대전차자주포는 제외된 수치이다.
따라서 그대로 공세를 유지했다가는 기갑군 자체가 와해되는 결말 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국 독일군의 쿠르스크 공세는 7월 15일에 종료되었으며 이탈리아의 상황이 급박해지자[52] 히틀러는 8월 1일 동부전선의 길이를 축소하고 서유럽으로 돌릴 병력을 확보하기 위해 오룔 돌출부로부터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7. 소련군의 반격과 전투 종료

7.1. 쿠르스크 북쪽 방면(쿠투조프 작전)

7월 12일, 쿠르스크 북쪽에서 오룔[53]과 브랸스크를 탈환하여 독일 중부 집단군을 무너트리기 위한 쿠투조프 작전이 개시되었고, 이는 독일 9군의 후방을 위협했다. 이 구역은 루돌프 슈미트 상급대장의 2기갑군이 담당하고 있었지만 이름만 기갑군으로 휘하 기갑전력은 보잘것 없었다. 3개 군을 선봉으로 한 서부 전선군, 브랸스크 전선군은 초기엔 독일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딫혔으나, 추가로 3개 군을 더 투입하자 독일군의 방어선 일각이 돌파당한다. 7월 21일, 방어선 일부가 돌파당하자 히틀러는 마지못해 무조건 전선을 사수하는 대신 제한적 기동방어를 허가했으나 7월 25일, 무솔리니가 체포됐다는 소식에 오룔 돌출부를 포기해 예비대를 확보하기로 한다. 클루게는 그동안 공들여 만든 방어선을 넘겨주는 것을 반대했으나 소용없었다. 작전 과정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은 소련군이 주춤하는 사이 7월 28일부터 독일군은 새 방어선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후 8월 5일에 오룔이 함락되고, 8월 18일에는 브랸스크 시가 소련의 손에 들어갔다.

하지만 독일군은 얌전하게 후퇴하지 않았다. 7월 12일부터 8월 18일, 총 38일간 독일군 49만 2천 명을 섬멸하기 위해 소련군 128만 2천명이 투입된 상황에서 독일군은 사상자 6만 804명, 전차 손실 250대를 기록한 반면 소련군은 사상자 42만 9890명, 전차 손실 2586대라는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만 했고, 거기에 독일군은 소련군 포로 1만 1732명까지 데리고 하겐 라인으로 무사히 퇴각했다.

클루게 원수와 모델 상급대장은 이전 성채 작전을 준비하면서도 오룔 북쪽 방면에서 소련이 공격해올 것을 예상했었다. 이에 방어에 용이한 예비 전투 지구를 미리 확보해 두었고, 9군 사령관 모델이 제2기갑군의 사령관을 겸임하며 지휘 체계를 통일시켰다. 결과적으로 중부집단군은 퇴각했음에도 5개 기갑사단을 비롯한 19개 사단의 전력을 보존하여 가용 병력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7.2. 쿠르스크 남쪽 방면(루미안체프 작전)

남쪽에서의 반격은 쿠르스크 전투가 끝나고 한참 뒤인 8월 3일, 주코프가 지휘하는 루미안체프 작전으로 개시되었다. 작전목표는 하리코프의 탈환으로 쿠르스크 후방에 있던 이반 코네프의 스텝 예비전선군을 주공으로 하였다.

소련군은 7월 17일, 조공으로 남서전선군과 남부전선군이 도네츠강의 1기갑군과 미우스강의 6군에 공세를 시작했다. 조공이었음에도 독일군은 전력의 열세가 심각했고 LSSAH 사단을 제외한 제2 SS 기갑군단과 24기갑군단[54]을 급파했다.

8월 3일, 주코프가 보르네즈 전선군, 스텝 예비전선군, 남서부전선군의 우익으로 공세를 개시했다. 이 때 로스토프 방면 수비를 위해 기갑부대를 재배치시켰던 만슈타인과 독일군은 완전히 허를 찔리게 된다. 8월 5일, 기세를 몰아쳐 소련군은 벨고로드 시를 점령한다. 이후 독일군은 중부집단군에서 차출된 증원부대와 긴급 배치된 일부 기갑부대로 일시적으로 소련군의 진격을 중지시킨다. 이 과정에서 히틀러가 후퇴를 거부한 탓에 4기갑군과 켐프 분견군[55] 사이에 10km 정도 틈이 생겼다. 그런데도 히틀러는 하르코프 사수만을 외치며 SS 사단들과 라우스의 11군단을 도시로 밀어넣었고, 이 틈새는 엄청난 나비효과가 되어 결과적으로는 전선 자체가 붕괴했다.[56] 거기에 최남단 6군에게 가해지는 압력도 더이상 버티기 힘든 지경이었다.

8월 7일, 히틀러는 어떻게든 하리코프와 도네츠강 유역만은 지키고 싶어했지만 서부전선군, 칼리닌전선군의 좌익이 11개군과 기타 군소대를 동원해 스몰렌스크 방면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8월 13일, 마침내 스텝전선군이 하리코프에 돌입했고, 10일간 치열한 시가전 끝에 8월 23일에는 하리코프 시를 점령하였다. 결국 독일군이 도네츠강 유역을 포기하고 드네프르강 서쪽으로 후퇴함으로써 쿠르스크 전투는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퇴각 과정에서 드네프르 강 전투가 벌어지면서 키예프 전투(1943년),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 카메네츠-포돌츠크 포위전으로 이어졌다.

8. 결과

독일은 동부전선에서 벌어진 이 한번의 작전에 거의 모든 기갑부대를 동원했다. 하지만 작전은 실패했고, 얼마 남지 않은 기갑부대마저 소련군에 쫓기는 신세가 됐다. 소련도 손실이 적은 것은 아니었지만 워낙 많은 병력을 보유한데다 군수품 생산까지 빨라 금세 복구할 수 있었다. 독일은 점점 궁지로 몰려갔다. 치타델레 작전 준비에 모든 힘을 쏟아부은 육군과 공군, 그리고 군수공장은 이제 여력이 없었고, 큰 손실을 복구하기란 불가능했다. 쿠르스크 돌출부는 독일군 병사들과 전차부대의 무덤이 된 셈이었다. 결국 히틀러에게는 볼가 강이 동부전선의 한계였고, 이후 독일의 진격로는 서쪽으로의 일방통행로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후 2년동안 독일은 소련에 대해 완강한 방어전을 펼쳐보였고, 양측의 전차부대가 맞붙는 일도 심심치않게 일어났다.
크롬웰 프로덕션 <2차대전사>, 독일 육군의 선봉, 기갑부대
독일군의 기갑 부대는 이 전투 이후로 전략적 공세 가능성을 완전히 상실했다. 기갑부대의 전술적 역량 자체는 판터 전차를 비롯한 신형 기갑장비의 보충으로 오히려 증강되었으며 포병 전력의 증강과 제병협동을 통해 전쟁 후반기까지 최고 수준이었다. 독일의 전차 생산량도 43-44년에 최대치였다. 그러나 소련 대전차전 역량의 증가로 더 이상 기갑부대만으로는 전선의 돌파가 어려워졌으며 동부전선의 제공권 상실이 독일에게는 굉장히 뼈아픈 상황이었다. 이는 독일 기갑부대가 전술적 수준에서는 여전히 매우 강력할지라도 더 이상 작전제대로서는 큰 의미를 갖기 힘들게 되는 원인이 된다. 수적 열세 역시 큰 문제로 쿠르스크에서는 양측이 엄청난 기갑전력을 집중시켰기에 상대가 되었을지 몰라도 독일은 공세가 실패하자마자 타 전선에서 압도적인 열세가 되었다. 소련 기갑전력의 주공이 된 남부집단군은 드넓은 전선을 담당할 병력 자체가 모자랐으며 전선군 규모의 예비대를 갖고 있던 스타브카와 달리 독일 육군 사령부는 예비대는커녕 병력을 이탈리아와 프랑스로 차출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하여 전후 대중매체나 역사서에서 흔히 언급되는 '같은 제대의 미군 보병부대보다 전차 숫자가 적은 독일 기갑부대'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이 전투 이후의 일이었다. 물론 소련도 엄청난 손실을 입었는데, 인명 피해는 독일의 4배, 전차는 거의 7배에 달하는 손실을 입었으나,[57] 독일군은 쿠르스크 돌출부의 소련군 포위섬멸이라는 작전 목표와 예비대 소모로 전략적 격차를 줄이겠다는 전략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 실패했다. 또한 동부전선에 배치했었던 기갑부대 상당수를 잃었다. 따라서 쿠르스크 전투는 소련의 승리고 이 점에 대해서 모든 전쟁사가들의 견해가 일치한다. 만슈타인 역시 자신의 회고록《잃어버린 승리》에서 '작전이 잘 안 풀렸던 상황'이란 것은 인정했다.

그리고 독일은 이탈리아에 서방 연합군이 상륙하여 더 이상 소련군만 상대할 수 없었고, 전력의 상당부분을 서부전선에도 할애해야 했다. 물론 1944년 중반까지 서유럽 전체의 공업지대[58]와 자원을 보유한 나치 독일은 이론상 소련보다 훨씬 높은 전쟁 역량을 가질 수도 있었지만, 정작 이런 공업력을 완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이는 독일에게 대단히 나쁜 소식이었다.[59]

독일은 그동안 하계에 실행했던 전략적인 공세 대신 돌출부를 정리하려는 제한적 공세를 벌였고 이를 위해 동부전선의 기갑전력과 항공전력을 끌어모았으나 막상 전투가 시작되니 소련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것조차 독일군의 능력 밖이라는것이 드러났다. 이게 방자가 훨씬 많은 병력과 무기로 적의 공세 위치와 시기를 알고 방어준비를 한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엄청난 교환비와 전술적 성과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수적 열세를 극복할 수 없음이 확실히 드러난 것이다. 쿠르스크 전투는 양면 전선이 열리기 직전 불확실한 목표와 의지로 벌인 독일의 마지막 공세였으며 이후 독소전쟁은 소련의 무한공세 속에 선봉부대가 공세종말점에 도달하면 독일이 전술적 반격을 가해 공세를 멈추고 소강상태가 되는 양상으로 흘러갔다.

이와 같이 전략적으로는 소련군의 분명한 승리였으나 전술적으로는 소련군의 성적이 좋지 않았다. 독일군의 공세 기간동안 소련군은 2배의 인명피해와 7배의 전차 손실이 발생했으며 반격 기간에는 6배의 인명피해와 8배의 전차 손실이 발생했다. 항공기 손실 역시 최소 3배이며 최대 8배로 추산된다. 소련군은 본인들의 의도였던 독일군의 기갑전력을 소모시킨다는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 중부집단군은 공세 역량이 고갈되어 공세를 중단했으나 애초에 소련군의 공세에 대비해 기갑 예비대를 남겨두었으며 결과적으로 소련군은 오룔 탈환 과정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고 차후 공세에서도 바그라티온 작전 이전까지 중부집단군을 상대로 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60] 남부집단군의 공세가 멈춘 것은 측면에서 시작된 소련군의 공세 때문이었으며 극단적으로 보면 오히려 소련군의 기갑전력이 쿠르스크에서 소모된 수준이었다. 이후 드네프르 전역에서 소련군이 큰 성과를 거두긴 하지만 이는 소련군이 쿠르스크 전투 이전부터 수적으로 우세했고 보충 능력이 훨씬 뛰어난 덕분이었지 독일군이 약해져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독일 기갑 전력은 더 증강됐으며 드네프르 전투 기간 내내 적어도 소련군의 절반 이상의 기갑 전력을 유지했다.

소련군은 쿠르스크 전투 이후 드네프르강을 확보하기까지 200만 명 가량의 사상자를 내는 막대한 인명손실을 입지만, 1941년 동부전선 개막 직전에도 상주인구가 2500만 명은 족히 넘던 드네프르 강 서안, 서부 우크라이나를 탈환하여 인구 밀집지대에서 징병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인력 손실을 어느 정도 보충할 수 있었을 것이다.[61]

이 전투의 패배를 계기로 독일군 장병들 사이에서 회의주의, 비관적인 인식이 퍼지기 시작했다. 사실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재앙에도 불구하고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의 대승리로 독일군 장병들의 사기는 여전히 높았었고, 성채 작전을 준비하던 기간에는 전례없는 엄청난 병력과 장비들이 배치되는 것을 보며 마침내 결정적 전투로 소련군을 완파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방어선을 뚫기는 커녕 고작 1~2주 만에 처참히 후퇴하는 상황은 독일군 장병들의 사기를 추락시키기에 충분했다.

물론 후퇴하는 도중 반격해오는 소련군에게 막대한 손실을 강요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열심히 준비한 회심의 공세는 시작하자마자 금방 실패했고 전선은 뒤로 밀려나버린 게 현실이었다. 이는 독일군 SS보안부대의 보고서에서도 드러나는 부분으로, 보고서에서는 휴가 등으로 귀가한 동부전선 출신 병사들에게서 서서히 더 많은 비관적 견해가 관찰된다는 우려를 표했다. 여러가지 자료와 회고록으로 볼 때 병사들뿐만 아니라 고급 장교와 독일 국내의 관료들 사이에서도 이 전투의 실패 이후 대놓고 내색만 안 할 뿐이지 전황이 암울하다는 현실을 본격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62]

9. 편제

9.1. 추축군의 편제

출처: 위키피디아https://en.m.wikipedia.org/wiki/Battle_of_Kursk

9.1.1. 중부집단군


예비대까지 합치면 8개 기갑사단, 2개 기갑척탄병 사단, 25개 보병사단, 1개 강습사단이 동원됐다.

제9군은 전차를 567대[64], 돌격포와 각종 자주포들[65]까지 다 합치면 전차 및 자주포를 1120대 보유하고 있었다. 제9군이 작전 개시 시점에서 보유하고 있던 전차 및 자주포의 세부적인 수는 다음과 같다. 출처는 스웨덴 국방 대학의 연구원 니클라스 제털링(Niklas Zetterling, 1963 ~ )과 앤더스 프랭크슨(Anders Frankson, 1965 ~ )이 저술한 1943년 쿠르스크: 통계학(Kursk 1943 : A statistical analysis, 2000)과 이탈리아 군사학자 피에르 파올로 바티스텔리(Pier Paolo Battistelli)가 저술한 독일 기갑사단:동부전선 1941 ~ 43년까지(Panzer divisons: The Eastern Front 1941-43, 2008)이다. 지휘전차의 수량은 포함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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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2. 남부집단군


예비대까지 합치면 6개 기갑사단, 5개 기갑척탄병 사단[88], 10개 보병사단이 동원됐다.


제4기갑군은 전차 911대[89], 돌격포와 각종 자주포들[90]까지 다 합하면 전차 및 자주포 1250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켐프 분견군은 전차 339대[91], 그 외에 돌격포나 각종 자주포들[92]까지 다 합치면 전차 및 자주포를 458대 보유하고 있었다. 제4기갑군과 켐프 분견군이 작전 개시 시점에서 보유하고 있던 전차 및 자주포의 세부적인 수는 다음과 같다. 출처는 Niklas Zetterling과 Anders Frankson이 저술한 Kursk 1943 : A statistical analysis(2000)과 Pier Paolo Battistelli가 저술한 Panzer divisons: The Eastern Front 1941-43(2008)이다. 지휘전차의 수량은 포함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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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기갑군


* 켐프 분견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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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소련군의 편제

출처는 위키피디아https://en.m.wikipedia.org/wiki/Battle_of_Kursk_order_of_battle이다.

9.2.1. 중부 전선군


예비대까지 합치면 도합 4개 전차군단[110], 공정사단[111], 39개 소총사단[112][113], 3개 포병사단[114], 1개 박격포사단, 5개 대공포병사단과 기타 지원부대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제16항공군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9.2.2. 보로네즈 전선군


예비대까지 합치면 도합 4개 전차군단[115], 1개 기계화군단, 35개 소총사단[116], 1개 대공포병사단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제2항공군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9.2.3. 스텝 전선군


예비대까지 합치면 도합 2개 전차군단, 1개 기계화군단[118], 2개 공정사단[119], 5개 소총사단[120], 2개 대공포병사단과 기타 지원부대가 투입되었으며 제5항공군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이 외에도 제4근위군, 제27군, 제47군, 제53군이 스텝 전선군에 소속되어 있었으닌 이들은 전투에 투입되지 않았다.

10. 매체에서의 묘사

11. 여담

11.1. 튀르키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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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3년 6월경 쿠르스크 전투 직전 실시한 대규모 기동 훈련에 초대한 튀르키예군 장성과의 만찬에서 시가를 피우는 독일 국방군의 에리히 폰 만슈타인 야전원수.

독일은 쿠르스크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대규모 기동훈련에 튀르키예군 수뇌부를 초청하여 참관시켰고, 히틀러와 접견하게 하는 등 튀르키예에 호의를 보이려 애썼다. 당시 친독 성향의 중립국인 튀르키예를 끌어들일 경우 정치외교적인 이익뿐만 아니라, 소련군의 차량연료의 생산지인 캅카스 지역을 공격하는 등 군사적으로도 중대한 의의가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역사적으로도 과거 1차대전, 튀르키예와 독일은 같은 동맹국이었고 러시아는 협상국으로 참전하여 총을 겨눴다는 사실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튀르키예는 전신인 오스만 제국이 1차 대전의 결과로 공중분해당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신중했다. 당시 패전의 대가로 제국 해체뿐만 아니라 아나톨리아 북부 이외의 모든 영토를 잃어버릴 뻔했으나, 아타튀르크로 대표되는 튀르키예인들의 강력한 저항 끝에 영국/프랑스는 포기, 끝까지 물고늘어졌던 그리스도 나가떨어지면서 겨우 아나톨리아와 동부 트라키아를 지켜낸 역사가 있었다.

시간이 지나 쿠르스크 전투가 독일군의 전략적 패배로 마무리되자, 튀르키예는 대전 말까지 중립을 지키다가 1945년 2월 23일에서야 줄서기식으로 연합군에 참가하여 추축진영에 선전포고했다. 양 세력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행보가 기회주의적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다.[121]

연합국에 대해서는 당시 튀르키예는 소련을 최대적성국으로 상정하고 있었다. 소련과 국경을 맞닿은 지정학적 요소와 이미 1920년대에 스탈린이 카르스를 비롯한 북동쪽 땅을 소련에게 넘기라는 요구를 하자 튀르키예는 20만이 넘는 군대를 배치하면서 전쟁 준비를 했고, 영-미도 튀르키예를 지원하겠다는 소식에 스탈린도 포기하고 물러난 바 있었다. 따라서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를 분할점령하자 튀르키예는 다음은 우리일 것이라고 소련 쪽을 예의주시했다. 때문에 이러한 소련과 손잡은 연합군에 대해 섣불리 지지를 표명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리고 튀르키예에 인접한 캅카스 방면 전선은 분명 소련에게 아킬레스건이라 할 수 있지만, 이 지역은 수비에 유리한 산지인 데다 튀르키예군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으니 튀르키예로서도 위험한 도박이라 할 만했다.
추축국에 대해서는 튀르키예는 명목상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옆나라인 그리스가 맥없이 떨어지는 걸 보고 나름대로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징병령을 확대하고 사실상 1942년부터 총동원 체제에 들어가 있었다. 그리스-튀르키예 인구 교환이 불과 20여 년 전에 벌어졌으니 그리스에 살고 있지만 과거 튀르키예 땅에 거주했고 여전히 일가친척이나 옛 이웃들이 남아있던 그리스 주민들도 많았는데, 이들이 튀르키예로 피난오는 것도 승인했고 특히 테살로니키유대인들은 대부분이 튀르키예로 피난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또한 2차대전이 끝나고 소련이 튀르키예를 통해 유럽으로 침공할 가능성도 있었기에 미국이 엄청난 지원과 함께 아르메니아 학살 문제를 덮어버렸던 걸 봐도 당시 튀르키예에 대하여 뭐라고 따질 겨를도 없었다.

위와 다른 견해로 튀르키예 전쟁사가는 이미 독소전쟁 개전부터 튀르키예는 독일의 패배를 직감하고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다는 설도 있다. 이에 신빙성을 더해주는 것이 현대 튀르키예 건국자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살아 생전에 히틀러를 미쳤다고 봤으며, 2차 대전의 발발과 미국이 필연적으로 전쟁에 참여할 것이고 그로 인해 승전할 것이라는 예상까지 하였다. 또한 2인자인 이스메트 이뇌뉘[122]에게 히틀러를 편들지 말라고 충고하기도 하였다.

11.2. 제2SS기갑군단의 이탈리아 차출

성채작전 종료 뒤 제 2SS기갑군단의 이탈리아 차출에 대해서는 많은 토론이 있었다. 특히 이 사건에 의해 동부전선 기갑전력에 큰 공백이 생겼고, 이 때문에 소련군 반격기간에 도네츠강에서 맥없이 후퇴할 수 밖에 없었는 주장이 주요쟁점이다. 일단 군사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동부전선 > 이탈리아가 맞기는 했다. 투입된 병력 규모에서 동부전선과 이탈리아전선의 비교는 불가능하고, 대전 내내 독일이 당면한 최대의 적은 소련군이었다. 그리고 지형적으로 이탈리아 북부는 알프스 산맥으로 막혀있고 중부에도 아펜니노 산맥 + 많은 강들로 지연전을 펼칠 수 있었다. 따라서 어차피 돌파당할 이탈리아 남부로 동부전선의 귀중한 정예기갑병력을 차출한 것은 전략적 미스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상술한 주장은 군사측면의 단편적인 견해로 볼 수도 있다. 이탈리아는 1943년 연합국이 상륙하자마자 추축국에서 빠르게 탈퇴했고, 이후 이탈리아 왕국은 독일군의 이탈리아 반도 축출을 거들었으므로 이탈리아의 중요성에 대한 히틀러의 판단은 그른 게 아니었다. 히틀러는 급히 이탈리아 국왕에 의해 체포된 무솔리니를 구출하여 괴뢰국인 살로 공화국을 만들어 이탈리아 북부를 맡겼다.
한편 이탈리아 전선에 대해서는 알베르트 케셀링 원수가 연합국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냈고, 해당 전선은 종전까지도 대치상태로 그쳐 별로 중요성이 없다고 간주되곤 한다. 하지만 만약 추축국의 유이한 유럽 열강 국가인 이탈리아가 이탈할 경우, 근방의 추축국들 역시 도미노처럼 무너져서 독일만 혼자 남는 상황이 되어버릴 수도 있을 노릇이었다. 즉, 이탈리아의 군사적 가치는 동부전선보다는 낮았을지언정 정치적 가치는 절대로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단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탈리아 안정을 위해 작전을 취소한 히틀러의 결정이 잘못되었다고 보는건 다소 편협하다고 볼 수 있다.

11.3. 올가 체코바

이 전투에는 한 여성이 개입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 여인은 바로 올가 체코바이다. 독일에서 배우로 활동하며 히틀러의 환심을 샀는데 이렇게 해서 쿠르스크 전투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는 것이다. 얼마나 결정적인 정보를 얻었는지는 논란이 있으나 소련 정보부에 올가가 감사를 표한 서신이 남은 걸로 보면 첩자였던 건 분명한 듯하다. 어차피 이 무렵의 스타브카는 NKVD의 '붉은 관현악단'으로 대표되는 첩보전의 압도적 승리로 인해서 독일 야전 제대들보다 먼저 작전 명령서를 받을 정도로 소련의 정보력이 우세했고 심지어 독일군 내에 친공 성향 장성이 20여 명에 달했다는 소리까지 있을 정도였기 때문에 한 개인이 결정적 제보를 했다고 보긴 힘들다.


[1] 7월 5일부터 7월 15~16일까지는 독일 국방군의 공세, 7월 12일부터 8월 23일까지는 소련군의 공세.[2] Werner Kempf, 군인으로 동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 출신이었다. 생몰은 1886년 ~ 1964년이었다.[3] 쿠르스크 전투에 참가한 양 측 병력이 기록에 따라 다 다르다. 작성 시점에서의 수치는 Axis Forum 등의 여러 웹사이트들과 다른 문헌들을 참고했다.[4] 여기 적힌 소련군의 피해는 소련군이 남긴 공식 기록이지만 러시아 학계에서조차 과도하게 축소되었다는 논란이 있다. 특히 항공기에 관한 경우, 교차검증해보면 괴리가 심각한데 독일 공군의 경우 전과 추정이 까다롭기로 유명해서 전후 교차 검증 결과 소련군이 항공기 10만 대를 손실한 것에 비해 독일군이 격추한 소련기는 4만 5천 대로 절반이 채 안된다. 아무리 소련 공군이 비전투 손실이 높다고는 해도 영•미 공군의 손실이었던 4만 대에 대해 2만 5천 대 격추만 기록한 것만 봐도 독일 공군의 기록보다 실제 전과가 높았으리라 쉽게 알 수 있다. 문제는 소련 공군의 피해 기록이 독일 공군의 격추 기록보다도 훨씬 낮다는 것이다.[5] 소련 공군의 전투 손실 기록[6] 독일 공군의 격추 기록, 여기에는 비전투손실과 육군의 격추 기록이 제외되어 있으므로 실제 소련군의 피해는 더 컸을 것이다.[7] 독일군의 인명 피해는 7월 1일부터 8월 20일까지 중부집단군 소속 2기갑군, 9군, 2군과 남부집단군 소속 4기갑군, 켐프 분견군의 인명피해 기록이다.[8] 독일군의 경우 쿠르스크 전투에 포함되는 3개 작전의 전차 손실에 관한 자료가 없다. 대신 같은 기간 동안 전체 손실에 관한 추정은 해볼 수 있는데 7~8월 동안 독일군이 손실한 전차 및 돌격포는 1331대, 같은 기간 동안 소련군이 손실한 전차 및 자주포는 9294대로 약 1:7 정도의 비율이었다. 쿠르스크에서의 전차 피해를 일반적으로 1:7~1:8로 보기 때문에 소련군 피해인 6천 대와 비교하여 760~870대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9] 작전술적 범위에서 보면 독일군은 전쟁이 끝나는 날까지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10] 다만, 쿠르스크 전투 자체가 소련군의 우위를 확실히 한 전투이기는 하나 쿠르스크 전투 자체가 동부전선의 향방을 결정한 것인지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다. 하술하겠지만 성채 작전은 애초에 성공 가능성이 극도로 낮았으며 이는 이미 전쟁의 무게추가 소련으로 넘어간 상태였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11]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시가전이라는 특성상 보병 위주의 교전, 그리고 천왕성 작전으로 독일군을 포위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지, 기갑과 항공 전력의 대규모 충돌은 없었다. 물론 두 전투 중 어느 전투가 더 거대했느냐는 외국에서도 논쟁의 대상이다.[12] 과거엔 사상 최대의 전차전으로 알려졌으나 독일 측 사료가 연구결과, 프로호로프카 전투의 독일측 전차 수량이 더 적게 추정되었고 참가 전차 숫자면에서는 1940년 벨기에 장블루 전투가 더 컸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13] 다만 1940년에는 중전차를 대규모로 운용하지 않았고, 경전차같은 가벼운 체급의 차량들이 기갑전력의 주축이었다. 반면 쿠르스크에서는 기본이 중형전차 이상에 각 군이 애지중지하는 중전차를 다수 투입한 대규모 교전이 자주 일어났다. 따라서 전차들의 화력을 기준으로는 쿠르스크 전투가 최대의 전차전이라고 볼 수도 있다.[14] 6.25 전쟁 3년 동안 투입된 자유진영&공산진영 양측 병력 합계가 약 270여만 명이다. 즉, 독일과 소련 양측에서 이 전투 하나에 쏟아 부은 전력이 6.25 전쟁 때 자유진영&공산진영이 총 쏟아 부은 전력보다도 많은 셈이다.[15] 위의 지도에서 Orel(오룔)과 Kharkov(하리코프)사이의 튀어나온 구역[16] 사실 전술적 범위를 넘어 전략적으로 본다면 이미 독일은 양면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2차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영국을 꺾기 위해 치렀던 대서양 전투에서 유보트 건조에 들어간 비용과,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소모된 전투기와 폭격기, 영국 본토 타격을 위해 개발된 V1, V2 등의 개발 및 생산 비용, 관련 인력에 대한 인적 비용을 다 합치면 150억 라이히스마르크에 달했는데, 이것은 250개 보병사단을 2년간 유지할 수 있는 비용이며, 이 자본을 생산으로 돌렸을 경우 4호 전차를 20만 대 생산할 수 있었다. 즉 독일이 영국과 미국을 상대로 벌인 전쟁에서 소모한 국력은 독소전쟁과 비교했을 때도 많으면 많았지 결코 적지 않았다.[17] 특히나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전까지 서부전선에서 요구되는 인적자원들은 하나 같이 고급인력(파일럿, 승조원, 엔지니어, 과학자)이었다는 것도 문제였다. 막말로 일개 알보병들이 연 단위로 계속 소모되는 것도 국가 입장에서는 굉장히 부담스러운 일인데, 이런 고급 엘리트들을 소모전에 밀어넣는 건 제아무리 전쟁에 미쳐가는 나치독일이라도 해서는 안 될 짓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18] 만슈타인의 주장은 성채 작전과 유사성을 띠며 실제로 작전의 모체가 되었다.[19] 전략적으로 후방에서 대기하며 적시 투입을 기다리는 부대의 의미로, 예비군과는 다른 뜻이다.[20] 물론 독일군은 연합군의 그 어떤 중전차와도 호각 또는 우세로 맞서 싸울 수 있는 최신형 중형전차인 5호 전차 판터 실전 배치를 앞두고 있었기에 독일군의 증원이 절대 단순히 수량이 적다는 이유로 가볍게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배치된 판터 전차의 초도 물량에는 히틀러가 예상하지 못한 기계적인 결함이 많았고 독일 지휘관들이 티거의 측면 장갑에는 훨씬 못 미치는 측면 장갑을 지닌 판터를 티거처럼 운용하는 실책을 해버리는 바람에 쿠르스크 전투에서는 기대한 것에 비해 훨씬 못 미치는 성과를 내게 되었고, 이는 결국 성채 작전 전체가 크게 삐걱이는 결과를 초래했다. 히틀러가 작전을 거듭 연기한 이유는 이러한 중전차들의 충원을 기대한 것도 큰데 저런 결과를 냈으니 독일군 입장에서 꽤 뼈아픈 실패였다.[21] 통상 공자는 방자의 3배 이상의 전력을 갖추어야 된다고 본다. 심지어 이건 적이 아군의 공세를 알고 요새화까지 진행한 상황이다.[22] 다만 소련군은 이미 봄부터 독일군이 쿠르스크에 공세를 가할 것을 예측했으며 방어의 주축이 될 보로네시 전선군과 중부 전선군에는 5월까지 목표치에 근접하는 인원을 보충했고 70% 정도로 장비를 지급한 상태였다.[23] 다만 증언에 따르면 만슈타인 역시 성채 작전엔 회의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모델처럼 선방어 후역습을 주장한 것까진 아니지만 돌출부 전체를 절단하려는 대규모 작전은 어렵고 남부지역 돌출부 일부만을 잘라내는 것은 가능하다고 본 것이고 이 정도 목표라도 달성하려면 소련군이 방어진지를 구축하기 전인 5월에 공세를 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는 스텝 전선군이라는 독일군과 만슈타인이 전혀 모르고 있던 거대한 예비대의 존재를 감안하면 이 남부지역 일부 절단조차도 달성하기 어려웠을 것이다.[24] 5월에 공세를 할 경우 소련이 준비가 덜 되어 7월 공세보다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었다는 의견이 있으나 이 때는 독일군도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 독일도 소련과 마찬가지로 몇 달째 쉬지 않고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소련군은 공세종말점을 무시한 결과 하르코프에서 괴멸당했고 독일 역시 벨고로드 북쪽으로는 진군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당장 7월 공세 당시에도 독일은 병력 부족으로 진격로 측면 보호에 애를 먹었다. 하물며 5월에는...[25] Kursk: The German View[26] 이는 작전 중단 이후에도 남부 집단군 단독으로 공세를 이어나가는 원인이 된다.[27] 전쟁이 진행되며 육군사령부는 동부전선을 맡았고 국방군사령부는 서부, 북부, 남서, 남동전선을 맡게 된다. 그래서 요들 상급대장은 타 지역에 필요한 예비대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성채 작전에 명백히 반대했다.[출처] Niklas Zetterling, Kursk 1943 (Frank Cass 2000) 140p[29] 쿠르스크에서 소련군은 독일군을 막아내기는 했으나 예상치를 훨씬 뛰어넘는 극심한 피해가 발생했다. 따라서 수적으로 매우 우세한 전력을 보유한 소련군이 괜히 쿠르스크에서 한방 싸움에 나서주면서 엄청난 피해를 초래했다는 의견도 있다. 결과적으로 쿠르스크에서의 승리는 스타브카가 의도한 대로 독일 기갑전력을 소모시킨 것이 아니라 본인들만 엄청난 피해를 입고 예비 전력들의 공세로 적의 공세를 중단시킨 것이 되어버리면서 차후 공세에도 엄청난 차질이 발생했다.[30] 이 다섯 번째 사나이라는 네이밍에 얽힌 이야기도 재미있다. 소련에 정보를 제공한 첩자 4명은 전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잡히게 되지만, 이 다섯 번째는 오랜 기간 잡히지 않았다. 영국 정보부는 첩자가 5명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았고, 이것이 대중들에게도 퍼지면서 '다섯 번째 사나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후일 관련 영화도 제작된다.[31] 오픈탑 차량에 탑승한 승무원을 공격하는 용도.[32] 정면 장갑의 두께가 최대 20cm에 달하는 중(重) 대전차 자주포인 페르디난트 2개 대대 90대는 원거리 전차전에서 압도적인 능력을 보였으나 야지(野地)기동시에 엔진이 과부하되었고 지뢰로 인해 총 수의 절반가량이 손실되었다.[33] 남부집단군은 과거 캅카스 방면 부대를 포함하였다. 캅카스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와 함께 히틀러가 주요 목표로 삼은 3곳 중 하나였고, 장거리 이동을 위해 무장 수준이 굉장히 좋았다. 그리고 6군이 스탈린그라드에서 버텨준 덕분에 이 부대들이 무사히 탈출하여 당시의 남부집단군에 합류할 수 있었다.[34] Großdeutschland. 독일 국방군의 최정예 사단으로 일단 독일 국방군 사단들과 달리 독일 제3제국 전역에서 신병을 모집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이 사단은 나치가 지원을 몰빵해 주던 친위대 사단과 견줄만한 장비를 가졌다. 나치당 이념과 전혀 관계없이 병사들을 선발했으며 심지어 프랑스계 독일인과 프랑스 출생 게르만족도 그로스도이칠란트사단에 정부대원으로 입대할 수 있었다. 다만 이 사단은 독일 국방군 최정예사단이라는 이름에 아깝지 않은 훈련을 자랑한다. 부상자 후송 훈련으로 실제로 교관들이 마우저 소총 실탄을 발사하는 등 한달에 약 24명 정도의 신병들이 교육 도중 사망했다고 한다.[35]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엔진과 변속기로 인한 고장은 그리 많진 않았고 현가장치의 고장이 제일 큰 비중을 차지했다. 여기에는 미완성된 전차를 억지로 투입시키려 계속 개수하는 바람에 전차병들이 훈련할 수 있는 시간 자체가 거의 없었다는 이유가 있다.[36] 여기엔 전투 직전 기갑전의 가장 뛰어난 지휘관 중 하나인 사단장 헤르만 발크 중장이 전출가고 부상당했던 원래 사단장 발터 회른라인 중장이 돌아온 것이 영향을 끼치게 된다. 회른라인은 GD 전차연대장 스트라흐비츠 대령과 10기갑여단장 데커 대령의 지휘권 다툼을 사실상 방치했고 결국 이를 해결한건 데커 대령의 지휘권을 박탈한 48기갑군단장 크노벨스도르프 기갑대장이었다. 전쟁의 향방을 정할 공세의 핵심 부대에서 일어난 어이없는 사건이었지만 군단의 역할을 제대로 못해 휘하 사단과 여단이 다 따로 싸운 소련군에 비하면 훨씬 나은 수준이었다.[37] 여담으로 쿠르스크 전투 직전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장이었던 헤르만 발크는 전후에도 대 소련군 전문가로서 역량을 인정받아 1979년부터 1980년 초까지 미 육군참모대학에서 이뤄진 NATO군 연합 참모 세미나에 패널로 참여했다. 헤르만 발크는 당시 86세의 노령이었음에도 풀다 갭 종심 깊숙히 소련 충격군 주력을 과감히 끌어들인 뒤, 미 육군 제 8보병사단 예비 전력인 6개 전차/기보대대으로 소련군 전차 사단 측면을 역습, 분쇄하는 과감한 작전을 선보여 NATO군 고위 장성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38] 제6기갑사단, 제7기갑사단, 제19기갑사단[39] 그는 이 부상으로 인해 7월17일에 결국 병원에서 사망했다.[40] 1500대는 소련측 주장으로 전형적 프로파간다이다. 독일군이 600대의 전차를 동원했다 주장하는데 프로호로프카전차전이 일어난 회랑에는 라이프슈탄다르테의 요아힘 파이퍼 대대, 마르틴 그로스의 장갑대대, 미하일 비트만과 4대의 티거, 그리고 구스타프 크니텔의 정찰대대, 알베르트 프라이의 제1SS장갑척탄병 연대만이 소련군들을 상대했다.[41] 제1 SS기갑사단 라이프슈탄다르테 아돌프 히틀러 (LSSAH), 제2 SS기갑사단 다스 라이히, 제3 SS기갑사단 토텐코프[42] 독일군은 티거나 판터는 10수 km 정도의 기동이라도 가능한 한 열차를 이용했다.[43] 판터는 프로호로프카 전차전에 투입된적 없다. 판터 194대 전량이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에 배속되었으며 프로호로프카 회랑에서 싸운건 라이프슈탄다르테 일부 부대이다.[44] 로트미스트로프는 또한 LSSAH사단이 보유하고 있는 티거의 숫자를 과대평가했다.[45] Zetterling, Niklas; Frankson, Anders (2000). Kursk 1943: A Statistical Analysis. Cass Series on the Soviet (Russian) Study of War. London, UK: Taylor & Francis (Frank Cass). ISBN 0-7146-5052-8.[46] 독일 외무부장관의 아들 루돌프 리벤트로프의 7대의 4호 전차와 요아힘 파이퍼의 기갑척탄병 대대는 2개 전차연대와 9 공수군 병력의 소련군 병력을 상대로 혈전을 치렀다. 쿠르트자메트라이터는 5대의 마르더 구축전차를 이끌고 소련 전차 32대 중 혼자서 24대를 처리하기도 했다. 알베르트 프라이의 1기갑척탄병연대는 다스라이히의 전구로 접근해가는 9공수사단의 병력을 격퇴하였다.[47] 전투 내내 소련의 군단급 제대들은 자신들의 역할을 거의 수행하지 못했다. 소총군단은 사단과 야전군 사이를 연결해주는 역할외에는 아무것도 하지못해 군과 전선군 참모부에 과부하가 걸렸으며 이는 사단이 없고 여단만을 보유한 정예인 전차,기계화 군단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다만 소련의 군단은 바르바로사 당시 해체되었다가 쿠르스크 전투 시점에서는 재건된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48] 심지어 쿠르스크에 도달한 것도 아니고 겨우 1/3정도 온 상황이었다.[49] 소련군은 쿠르스크 전투 내내 독일군을 정면에서 막는데는 사실상 실패했으며 측면에서의 공세로 독일군이 공세를 유지할 측면 확보가 불가능해지면서 공세가 중단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50] 다만 스텝 전선군이 직접 방어선에 투입되지는 않았던 것일뿐, 프로호로프카 전투를 비롯한 기갑전으로 소모가 심한 전방 전선군에게 각종 기갑장비를 차출하였다. 그리고 반격 국면에서도 기갑전력 보충이 상당히 필요했고, 이 때도 스텝 전선군의 장비가 상당수 이전되었다. 물론 어쨌건 독일군 남부집단군이 파고드는 상황에서도 전선군 자체는 예비대로 투입되지 않았을 정도로 독일군의 공세가 결정적이지 못했던 건 사실.[51] 병사와 장비손실은 물론이고 남아있는 병사들의 피로가 엄청났다. 물론 상부에선 쇼카콜라페르비틴의 대규모 보급으로 버텼지만. 둘다 피로감을 잊게 만들 뿐인걸 생각하면 공세는 지속 불가능했다.[52] 상술했듯 최근 학계에서는 원인을 달리본다.[53] 오렐이라고도 한다.[54] 제5 SS 기갑사단 '비킹', 제17기갑사단, 제23기갑사단[55] 8월 22일, 해임당한 켐프 기갑대장 대신 부임한 오토 뵐러 보병대장과 함께 8군으로 재편되었다.[56] 그때가 되어서는 히틀러도 현지 사수고 뭐고 퇴각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고 사실상 전선이 없어진 상황에서 서로 강에 먼저 도달하기 위한 경주를 벌였다.[57] 로트미스트로프의 제5근위전차군은 600여 대에서 50대로 쪼그라들어서 간신히 방어전을 이어나갔다. 이 전투에서 T-34가 독일 전차에게 크게 밀리게 되자 소련은 전차 개량의 방침을 방어력 개량에서 화력 강화 쪽으로 변경하게 된다. 동부전선의 독일 1개 기갑군단은 대략 소련의 1개 기갑군을 상대하였는데, 전략적 관점에서 1:4의 교환비는 소련에게 나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소련의 전차군단은 타국의 기갑사단 규모이므로 수량에서 큰 차이는 없다. 편제 상 43년 말 독일 완편 기갑사단은 1개 전차연대 휘하 대략 180대의 전차가 있고 소련 전차군단은 3개 여단 휘하 200대 정도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58] 여기에 추축국을 도왔던 중립국 스웨덴까지[59] 독소전쟁 초기, 소련은 급히 후퇴하는 중에도 서부 지역에 있었던 공장시설들을 뜯어서 우랄 산맥 지역으로 이전하였고, 4발 중폭격기 개발이 뒤쳐졌던 독일은 이를 때리지 못했다. 하지만 영국 본토 항공전에 이어서 미국이 본격적으로 끼어들면서 영미측이 밤낮으로 중폭격기를 동원해서 공습을 가하자 서유럽 공업지대에는 피해가 누적되었다.[60] 43년 겨울-44년 봄까지 소련군은 중부 전구에서 약 10차례의 공세를 진행했으나 완벽히 실패했고 소련은 이후 기록을 남기면서 르제프와 마찬가지로 이 시기의 전투에 관한 언급을 피했다.[61] 오히려 인력 부족은 압도적인 교환비를 보여준 독일이 훨씬 심각했다. 성채 작전을 계획할 때부터 사령부에서는 측면을 보호해줄 보병 전력이 부족한 것에 대해 크게 우려했으며 이 때문에 만슈타인은 모델과 달리 보병이 아닌 기갑전력으로 공세를 개시하기로 했다. 모델의 경우 측후면을 노리는 서부전선군과 브란스크 전선군의 존재 때문에 기갑전력을 온전히 활용할 수가 없었다.[62] 매체에서도 쿠르스크 직전에 낙관적인 연출을 보여주는 장면이 많다. 포화속의 우정(2013)에서 하르코프 공방전에서 승리한 직후, 주인공의 상사가 쿠르스크 전투를 들어가기 전 작전을 논의하며 쿠르스크 이후 최종 승리를 할 수 있다며 들떠 있거나 철십자 훈장(1974)에서도 동부전선의 향방이 확실하게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프랑스에서 편하게 근무하던 장교가 훈장을 받기 위해 자진해서 지원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63] 7월 12일에 제2기갑군에 증원됐다.[64] 2호 전차 26대, 38(t) 9대, 3호 전차 203대, 4호 전차 298대, 티거 31대[65] 3호 돌격포 227대, 마르더 대전차 자주포 150대, 페르디난트 대전차 자주포 89대, 4호 돌격전차 45대, 베스페 자주포 24대, 훔멜 자주포 18대.[66] 이 중 4대는 105mm 곡사포를 탑재한 상태였고 나머지는 75mm 장포신을 탑재한 돌격포였다.[67] 모두 75mm 장포신을 탑재한 돌격포였다.[68] 그 중 전차는 98대다[69] 50mm 단포신 탑재형 10대, 75mm 단포신 탑재형 20대.[70] 75mm 단포신 탑재형 5대, 75mm 장포신 탑재형 29대.[71] 이 때는 명칭이 중돌격포였다.[72] 이 중 9대는 105mm 곡사포를 탑재한 상태였고 나머지는 75mm 장포신을 탑재한 상태였다.[73] 이 중 9대는 105mm 곡사포를 탑재한 상태였고 나머지는 75mm 장포신을 탑재한 상태였다.[74] 그 중 전차는 295대다[75] 50mm 단포신 탑재형 8대, 50mm 장포신 탑재형 12대, 75mm 단포신 탑재형 20대[76] 75mm 단포신 탑재형 1대, 75mm 장포신 탑재형 59대[77] 50mm 단포신 탑재형 8대, 50mm 장포신 탑재형 30대[78] 75mm 단포신 탑재형 8대, 75mm 장포신 탑재형 30대[79] 50mm 단포신 탑재형 2대, 50mm 장포신 탑재형 10대, 75mm 단포신 탑재형 5대[80] 75mm 단포신 탑재형 9대, 75mm 장포신 탑재형 40대[81] 75mm 장포신 탑재형 22대, 105mm 곡사포 탑재형 9대[82] 전량 75mm 장포신 탑재[83] 그 중 전차는 174대다[84] 전량 75mm 단포신 탑재[85] 75mm 단포신 탑재형 1대, 75mm 장포신 탑재형 79대[86] 50mm 단포신 탑재형 15대, 50mm 장포신 탑재형 15대, 75mm 단포신 탑재형 6대[87] 75mm 단포신 탑재형 1대, 75mm 장포신 탑재형 36대[88] 이 사단들은 명칭은 기갑척탄병 사단이였지만 기갑사단처럼 기갑연대가 편제되어 있었다. 특히 제2SS기갑군단 예하의 3개 기갑척탄병사단과 그로스도이칠란트 기갑척탄병사단은 기갑연대에 티거 중전차로 구성된 중전차 중대까지 편제되어 있어 상당히 강력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89] 2호 전차 27대, 3호 전차 322대, 4호 전차 285대, t-34 26대, 판터 194대, 티거 57대[90] 3호 돌격포 172대, 마르더 대전차자주포 89대, 베스페 자주포 48대, 훔멜 자주포 30대[91] 2호 전차 27대, 3호 전차 159대, 4호 전차 108대, 티거 45대[92] 3호 돌격포 75대, 마르더 대전차자주포 32대, 베스페 자주포 6대, 훔멜 자주포 6대[93] 그 중 전차는 521대다[94] 이들 중 14대는 화염방사전차로 개조된 상태였다.[95] 50mm 단포신 탑재형 8대, 50mm 장포신 탑재형 34대, 75mm 단포신 탑재형 17대[96] 75mm 단포신 탑재형 2대, 75mm 장포신 탑재형 21대[97] 50mm 단포신 탑재형 11대, 50mm 장포신 탑재형 51대, 화염방사형 13대[98] 75mm 단포신 탑재형 1대, 75mm 장포신 탑재형 25대[99] 75mm 장포신 탑재형 22대, 105mm 곡사포 탑재형 9대[100] 전차는 390대다[101] 전차는 339대다[102] 50mm 장포신 탑재형 34대, 75mm 단포신 탑재형 18대, 화염방사형 14대[103] 전량 75mm 장포신 탑재형이다.[104] 50mm 장포신 탑재형 43대, 75mm 단포신 탑재형 12대[105] 75mm 단포신 탑재형 1대, 75mm 장포신 탑재형 37대[106] 50mm 단포신 탑재형 5대, 50mm 장포신 탑재형 22대, 75mm 단포신 탑재형 11대[107] 75mm 단포신 탑재형 2대, 75mm 장포신 탑재형 36대[108] 전량 75mm 장포신 탑재형이다.[109] 75mm 장포신 탑재형 23대, 105mm 곡사포 탑재형 9대[110] 이 당시 소련의 전차군단은 이름은 군단이였지만 규모가 타국의 군단보다는 사단에 가까웠다. 각 기갑군단은 3개의 전차여단과 1개의 차량화보병여단, 그리고 대공포연대와 대전차연대[123] 등 여러 지원부대들로 편성되어 있었는데 이 당시 각 전차여단들이 보유한 전차의 수는 53대 또는 65대였다. 여단이 53대의 전차를 보유하는 여단 편제는 T-34의 생산량이 부족했던 시기에 도입됐던 편제로 T-34 21대로 편제된 1대대, T-34 10대와 T-70 경전차 21대가 혼성 편재된 2대대, 그리고 여단 본부[124]와 기타 지원부대들로 구성되어져 있었다. 1개 여단이 전차 65대를 보유하는 여단 편제의 경우 T-34 21대로 편제된 대대 3개, 그리고 여단본부[125]와 기타 지원부대들로 구성되어져 있었다. T-34가 충분해지자 1개 전차여단이 전차 65대를 보유하는 편제로 대체되어 가는 추세였으나 이 때까지는 아직 완전히 대체가 되지는 않아 2가지 편제가 혼재되어 있었다. 일부 군단들은 이런 기본 편제에 중전차 21대로 구성되는 중전차연대나 SU-122 8대와 SU-76 9대로 혼성 편제된 자주포연대가 군단에 하나 추가되기도 했다.[111] 3개 사단 모두 근위 칭호를 수여받은 상태였다.[112] 보병사단이라고 보면 된다.[113] 이 중 4개 사단이 근위 칭호를 수여받은 상태였다.[114] 이 중 2개가 기존의 포병사단 편제에서 203mm 곡사포 여단이 추가된 돌파포병사단이였다.[115] 이 중 2개 군단이 근위 칭호를 수여받은 상태였다.[116] 이 중 14개 사단이 근위 칭호를 수여받은 상태였다.[117] 훗날 소련 붕괴우크라이나가 독립하면서 우크라이나 육군 제22기계화여단이 되었는데, 2024년 쿠르스크 전투의 주력 병력으로서 쿠르스크에 다시 발을 붙이게 된다.[118] 근위 칭호를 수여받은 상태였다.[119] 2개 사단 다 근위 칭호를 수여받은 상태였다.[120] 5개 사단 다 근위 칭호를 수여받은 상태였다.[121] 애초에 국제정치에서는 기회주의적인 것은 오점이 아니다.[122] 2차 대전 당시 튀르키예 대통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