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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fff><colcolor=#23235A> 출생 | 1890년 11월 22일 | ||
프랑스 노르파드칼레 노르 릴 (現 프랑스 오드프랑스 노르 릴) | |||
사망 | 1970년 11월 9일 (향년 79세) | ||
프랑스 그랑테스트 오트마른 콜롱베레되제글리즈 | |||
재임기간 |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 주석[A] | ||
1944년 6월 3일 ~ 1946년 1월 26일 | |||
제80대 총리 | |||
1958년 6월 1일 ~ 1959년 1월 8일 | |||
제18대 대통령[A] | |||
1959년 1월 8일 ~ 1969년 4월 28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373a3c,#ddd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ffffff><colcolor=#23235a> 부모 | 아버지 앙리 드골 (1848 ~ 1932) 어머니 잔 드골 (1860 ~ 1940)[3] | |
형제자매 | 형 그자비에 드골 누나 마리 아녜스 카요드골 남동생 자크 드골, 피에르 드골 | ||
배우자 | 이본 드골 (1900 ~ 1979)[4] | ||
자녀 | 장남 필리프 드골 (1921 ~ 2024) 장녀 엘리자베트 드골 (1924 ~ 2013) 차녀 안 드골(1928 ~ 1948) | ||
학력 | 스타니슬라스 콜레주 (프레파 과정 / 학사) | ||
종교 | 가톨릭 | ||
신체 | 196cm[5][6], O형 | ||
군사 경력 | |||
임관 | 생시르 육군사관학교 (1912년 임관)[7] | ||
복무 | 프랑스 육군 | ||
1912년 ~ 1944년 | |||
최종 계급 | 준장 (프랑스 육군) | ||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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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세계대전 종군 시절 당시의 샤를 드골.[8] |
프랑스의 군인이자 제18대 대통령.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자유 프랑스의 지도자로서 대독 저항 운동을 지휘했으며, 전후 프랑스 총리와 프랑스 제5공화국 초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2. 생애
2.1. 성장기
프랑스 북부 공업지대의 중심도시인 릴의 가톨릭계 고등학교 교사였던 앙리 드골과 잔 드골 부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드골의 출생지인 릴은 벨기에와 프랑스의 접경 도시로 다른 지역들과는 달리 벨기에·네덜란드의 개신교 문화의 세가 커 다소 금욕적이고 노동 중시적인 도시였다. 이 탓에 드골은 다수 프랑스인들과의 문화적 거리감이 있었지만,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패배의 굴욕을 되갚기 위해 군인의 길을 선택하는 등 강경 프랑스 민족주의자로 성장했다.2.2. 야전 군인 시절
고등학교를 졸업한 드골은 1909년 생시르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9] 그러나, 자부심이 강한 성격과 큰 키 때문에 동기들에게 '꺽다리 황제', '아스파라거스' 등으로 불리며 놀림받았다. 이런 동기들 중에서 가장 친했던 이들이 훗날 자유 프랑스의 주요 지휘관이 되는 앙투안 베투아르(Antoine Béthouart)와 알퐁스 쥐앵(Alphonse Juin)이다.1912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보병 소위로 임관한 드골은 훗날 제1차 세계 대전의 영웅으로 부상하는 필리프 페탱 보병 대령의 지휘하의 아라스 제33보병연대에 배치된다. 이후 제1차 세계 대전 때 대위로 베르됭 전투에 참가했으나, 부상을 입고 32개월 동안 독일 제국군의 포로로 잡혀 있었다. 이때 5번의 탈출을 시도했으나, 196cm의 장신[10] 탓에 변장할 옷을 구할 수 없는 등 잡다한 문제로 모두 실패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포로에 대한 대우는 신사적이어서, 잦은 탈출 시도에도 불구하고 독방형으로 끝났다.
또한 이때 제정 러시아 육군 장교로 참전했다가 포로로 잡힌 미하일 투하쳅스키와 친구가 되었다.[11] 또 다른 인물로는 조르주 카트루(Georges Catroux)가 있는데, 당시 육군 중령이던 카트루는 드골의 군사적 식견과 사상에 감명을 받았고, 훗날 자유 프랑스에 가담해 드골보다 상급자임에도 드골을 충실히 따랐다.
종전 직후 육군 원수가 된 페탱의 전속부관으로 복무했고, 후에는 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의 교관을 맡았다. 그러나, 자부심이 강하다 못해 오만하다고도 평가받는 성격 탓에 근무고과가 나빠 10년 이상을 대위에 머물러 퇴역 위기에 몰렸었으나, 페탱의 천거로 소령으로 진급하게 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페탱과 드골의 관계는 우호적이었으나, 1938년 드골이 페탱의 원고를 무단 수정해 자신의 이름으로 저서를 발간한 일로 관계는 단절된다.
그럼에도 미운 정은 남아있는지 훗날 페탱이 나치 독일의 괴뢰정부 비시 정부 수립의 주동자로서 재판을 받을 때 페탱에게 "한때 저의 상관이자 모범이었던 각하. 그런 각하는 어디로 사라지셨습니까?"라며 한탄하고, 구명운동을 벌여 사형이 아닌 무기징역으로 낮춰 페탱의 목숨을 구했다.
여하튼 이런 드골의 행동은 페탱 원수를 숭상하던 당시 프랑스 육군 상층부의 미움을 사 대령 진급이 2번이나 누락되거나, 드골이 맡은 기갑부대인 507 부대를 당시 메스(Metz) 군관구 사령관인 앙리 지로의 훈련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뛰어난 성적에도 불구하고 부대를 해체시켜 버리는 등 전방위 견제를 받게된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 드골은 전차를 집단운용하는 기갑사단 4개, 기계화보병으로 구성된 정찰여단, 그리고 이들을 지원하는 포병과 근접항공지원의 원활화를 위해 통신/보급 능력을 갖춘 독자적 활동이 가능한 최대 10만 명 규모의 기동군을 총사령부 직할 전략예비대로 활용해야 한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12] 그러나, 마지노 선을 맹신하던 군 보수파들은 물론 기동전에 대한 이해가 전무하다시피 한[13][14] 군 수뇌부에 의해 무시된다. 결국 기갑사단은 드골과 소수의 소장파 장교들의 발악에 가까운 노력으로 프랑스 침공 직전 간신히 창설된다.
2.3.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과 자유 프랑스 수반
1940년 5월 프랑스 침공이 시작되자 약식으로 준장으로 진급한 드골은 편성시작 단계의 제4기갑사단을 지휘해 분투했다. 대표적 활약상으로는 아라스 전차전이 있다. 드골의 제4기갑사단은 종심 깊숙이 진격하느라 측방이 위험해진 하인츠 구데리안 장군의 제19기갑군단의 후방으로 기동했고, 구데리안의 사령부에서 2km 앞까지 파고드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를 알아챈 19군단 군수참모 요한 폰 킬만스에크(Johann von Kielmansegg) 육군 일반참모 대위의 대처[15]로 드골의 공세는 좌절된다. 전후 재창설된 독일 연방군에 육군 장교로 재임관, 대장까지 진급해 NATO 중부유럽군 사령관에 임명된 킬만스에크 장군은 당시 드골의 공세를 "시간적, 공간적으로 완벽한 역습."이라 극찬했다.[16] 드골은 훗날 자신의 회고록에서 자신의 주장했던 기동군이 있었다면, 아니면 최소한 육군과 공군의 합동작전 교리가 사전에 준비되어 있어서 근접항공지원이 제대로 되었다면 아라스 전투에서 독일군 전체의 공세를 저지하고 전쟁을 장기전으로 끌고 갈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탄했다.
그러나 이런 분투에도 불구하고 1940년 6월 프랑스 정부는 나치 독일에게 항복을 선언했다. 이에 드골은 불복하여 몇몇 동지들과 함께 영국으로 망명, 이후 에밀 뮈즐리에 제독 등이 합류하여 망명 정부 자유 프랑스를 조직했다.[17] 하지만 1940년 프랑스군 주력은 페탱이 이끄는 비시 정부에게 장악되었었고, 식민지 역시 다수가 비시 프랑스를 지지해 드골의 자유 프랑스는 실질적 영향력은 거의 없다시피했다. 오로지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가 이끄는 영국 정부만이 자유 프랑스를 지원했을 뿐이다. 게다가 1941년 처칠의 지원으로 드골이 주도한 다카르 상륙작전의 실패와 전황 악화로 인해 드골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졌고, 여기에 드골 특유의 오만한 성격 탓에 같은 연합국 지도자들인 처칠과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 전쟁 내내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18] 그나마 처칠과는 상호 존중 관계였지만, 루스벨트의 경우에는 1945년까지 드골을 프랑스 지도자로 인정하길 꺼리다 마지못해 드골을 워싱턴 D.C.에 초청하며 공식적으로 인정했다.[19]
1942년 카사블랑카 회담에서 루스벨트는 프랑스군의 영웅이자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의 민간, 군사분야 총사령관인 앙리 지로 장군을 드골과 동석시켜 지로를 자유 프랑스의 지도자로 옹립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런 미국측의 뻔한 드골 견제로 인한 반감과 지로의 정치능력 부재로 인해 지로는 드골에게 밀려났다. 거기다 프랑스령 북서아프리카의 최고 선임자였던 해군 원수 프랑수아 다를랑 제독이 암살[20]되어 더 이상 자유 프랑스에 드골을 대체할 만한 인물은 없었고, 1943년 이후 북아프리카의 식민지들이 차례로 드골의 자유 프랑스 지지로 선회하면서 드골의 입지는 확고해져갔다. 그리고 1943년 6월 드골은 프랑스령 알제리의 수도 알제에서 프랑스 국가자유위원회(CFLN)를 출범시켜 자유 프랑스를 연합국의 일원으로 공식적으로 편입시켰다.
파리를 행진하는[21] 드골과 조르주 비도,[좌측] 필리프 르클레르[우측] |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성공하고 파리 해방이 목전으로 다가오자 전후 프랑스 주도권을 위해 미군, 비 드골계 우익 레지스탕스, 공산당과 파리 해방을 놓고 경쟁을 벌였다. 결국 드골의 자유 프랑스 육군 2개 사단이 파리 내의 레지스탕스와 시민들의 협조를 받아 파리를 해방시키고, 드골과 자유 프랑스군이 수십만 파리 시민의 열렬한 환호 속에 개선 행진을 하며 해방자 드골의 신화가 만들어진다. 당시 파리 해방에 대한 표현 중 하나가 이를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제 드골은 프랑스 전체를 손에 쥐었다." 이때부터 비로소 프랑스의 통치자로 다른 연합국에게 인정받고 평생 그의 정치적 자산이 된다. 이 과정을 그린 영화가 1966년 르네 클레망이 감독한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24]
이렇게 써놓으면 드골이 다된 밥에 숟가락 올리려고 달려든 기회주의자처럼 보일 수 있으나, 실제로는 그보다는 좀 더 깊은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 미국은 원래 자유 프랑스를 제대로 된 연합국의 일원으로 보지 않아서[25] 얄타 회담을 비롯한 전후 세계질서 재편을 위한 중요 회담에서 결국 프랑스를 제외했다. 그러나 이 사건 덕분에 마지막에는 프랑스 정국을 장악한 드골을 인정하고 프랑스를 연합국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으니 프랑스 전체를 위해서도 자유 프랑스가 파리를 선점한 것은 득이 된 셈이다.[26]
1945년 11월 제헌의회에 의해 내각 수반으로 임명된 드골은 대(對)독일 저항운동의 주역이었던 프랑스 공산당(PCF)을 내각에서 제외[27]하고 우파만의 정부를 세웠으나, 국민 다수의 지지를 얻는 좌파와 중도파[28]를 권력에서 배제하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으며, 1946년 6월 제헌의회 총선에서 중도 우파 정당인 대중공화운동이[29] 원내 제1당에 등극하긴 했지만 개헌저지선조차 넘기지 못한 상태였고 결국 다시 치러진 1946년 11월 총선에서 공산당이 원내 제1당으로 올라서면서 그해 말 정계에서 은퇴를 선언한다.
2.4. 정계 복귀
1950년대 중반까지 전쟁 회고록 집필 등으로 소일하며 칩거하던 드골은 1958년 화려하게 정계에 복귀할 수 있었다. 당시 프랑스 제4공화국은 수에즈 전쟁에서의 패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패배, 알제리 전쟁의 장기화로 위기에 직면했다.
본래 프랑스 제4공화국은 좌우파 가릴 것 없이 식민지 유지에 강한 집착을 보였다. 그러나 인도차이나에선 미국의 지원과 막대한 군사비를 쓰고도 1954년에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콩에게 개털리면서 쫓겨났다. 거기다 아프리카 전체의 1/4인 광대한 프랑스 식민지 전역에서 독립요구가 분출했고, 특히 베트남의 독립전쟁에 영향을 받은 알제리는 민족해방전선(FLN)과 프랑스군이 맞선 알제리 전쟁으로 엉망진창이었다.[30] 2차대전의 피해와 인도차이나 전쟁, 알제리 전쟁에 따른 막대한 군사비로 경제는 엉망진창이었고, 외환보유고는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결국 제4공화국 중도파 내각은 현실과 타협하여 알제리 독립을 시사했으나, 극우세력과 군부는 '알제리는 식민지가 아니라 프랑스의 영토'라며 강하게 반발했고 공공연히 쿠데타 위협을 가했다. 심지어 알제리 주둔군이 파리 공항에 공수부대를 투입하고 기갑부대를 동원하여 의회를 점령한다는 식의 구체적인 쿠데타 시나리오가 공공연히 거론될 정도였다. 정부의 알제리 독립 세력과의 협상 시도에 분노한 프랑스 극우파들이 총궐기하여 알제리에서 대대적인 군사행위를 일으키고 공수사단 등을 동원하여 코르시카 섬을 점령했고, 나아가 남프랑스를 통해 파리로 진군할 계획을 세웠다. 이를 1958년 5월 위기(Crise de mai 1958)라 한다.
군부 세력은 드골이 의회에서 인정한 프랑스의 지도자가 되지 못하거나, 알제리 독립에 찬성한 프랑스 공산당이 집권하려 하거나, 드골이 군사력 사용을 요청한다면 파리 진군을 실제로 실천하려 하였다. 이는 드골이 권좌에 앉을 것을 촉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궁지에 몰린 제4공화국은 르네 코티 대통령과 피에르 플림랭 총리를 통해 드골에게 총리직에 오를 것을 요청하였다. 드골은 정계 복귀에 무관심한 태도를 나타내기도 했지만[31] 결국 코티 대통령의 요청에 대해 6개월 한시 비상대권을 자신에게 부여할 것, 헌법을 개정해 대통령 임기를 7년으로 하고 그 권한을 강화할 것 등을 조건으로 내걸고 수락했다. 드골은 1946년 제4공화국 수립 당시부터 강한 행정부, 강한 대통령을 주장해왔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이제 이를 실현할 기회가 온 것이다.
프랑스의 좌파들은 총궐기하여 드골은 박물관에나 들어가라고 반(反)드골 시위를 벌였지만 만약 드골의 집권이 저지된다면 프랑스 공산당이 정권을 장악할 것이란 예상을 한 사회당이나 급진공화당을 비롯한 여타 제도권 좌파와 중도세력들은 동요하였다. 이들은 결국 '드골의 집권은 작은 불행이나 공산당의 집권은 큰 불행'이란 결론을 내리고 드골의 정권 장악을 용인하였다. 프랑스 국민의회의 총리 및 내각 인준 표결은 찬성 329 대 반대 224로 통과되었고 드골은 총리가 되었다.
이와 동시에 드골은 비상대권을 쥐었고, 이를 통해 헌법 개정안을 의회에 상정하여 통과시킨 후 1958년 9월에 국민투표에 붙여 76%의 찬성을 얻었다. 새 헌법에 따라 국민의회 의원과 상원의원, 지방의회 의원을 선거인단으로 하는 간선제 방식의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고, 드골은 여기서 당선되었다.
2.5. 제5공화국과 프랑스 대통령
권력을 쟁취한 드골은 우파와 중도파의 기대를 무너뜨리고 알제리에 민족자결 원칙을 적용할 것을 천명했다. 이외에도 집권 후 현실을 직시하고 식민지 독립을 승인해서 1960년에 모든 아프리카 식민지가 독립하고 대신 프랑스연합이라는 국제기구를 결성했다. 이로 인해 격노한 군부와 정면으로 대치하였고, 1962년 8월 공군 중령 장 바스티앵티리의 드골 암살 시도 등 군부는 계속해서 쿠데타와 드골 암살 시도 등으로 저항했지만, 샤를 드골은 이를 헤쳐나가며 정권을 강고히 한다. 프레더릭 포사이드의 소설과 영화로 유명한 《자칼의 날(The Day of the Jackal)》이 바로 알제리 독립 직후 군내 극우파 결사인 OAS(Organisation de l'armée secrète, 비밀군사조직)와 드골 정권 간의 암투를 다룬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반란을 진압하고 1961년에 알제리에 자치권을 부여하고 민족자결 원칙을 인정하는 방안을 국민투표에 회부하여 다수 프랑스 국민(알제리 포함)의 동의를 얻었다. 그리고 알제리 독립진영과 협상을 시작하여 1962년에 알제리독립을 인정한 에비앙 협정을 체결했다. 이 역시 프랑스 본토 및 알제리에서 국민투표에 회부되어 프랑스에서는 91%의 찬성, 알제리에서는 거의 100% 찬성으로 알제리 독립이 인정되었다.1963년 단체 내 자국 대표단의 발언권 보호를 위하여 영국의 유럽 경제 공동체(EEC) 가맹에 두 차례 거부권을 발동했으며, 독자적인 핵무장, 사실상 미국의 지휘 아래에 있는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에서의 탈퇴 등 '위대한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민족주의의 부흥을 위한 주체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프랑스와 독일의 관계를 크게 개선하도록 노력했다. 이 유럽 민족주의의 부흥을 위해서 프랑스 혼자서는 한계가 있음을 드골도 알고 있었고, 프랑스와 협력할 만한 국가가 필요했다. 하지만 양차 대전의 동맹국이던 영국은 이 부분에선 명백히 프랑스와 거리를 두었고, 남은 국가는 서독 뿐이었다. 마침 서독 또한 프랑스와 협력해서 기존의 프로이센식 독자 노선이 아닌 서유럽 세계로의 완전한 편입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양국이 협력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63년에는 서독의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와 회담하여 프랑스와 독일의 오랜 갈등관계를 종식하고 경제와 외교분야에서 협력하는 '독일·프랑스 화해협력조약'을 맺었다.
1961년 본에서 열린 서독의 아데나워 총리와의 정상회담. 유럽 연합의 시발점은 이 두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배경으로 있는 비행기는 프랑스 최초의 제트 여객기인 쉬드 아비아시옹 카라벨. |
영국은 처음에는 EEC에 반대했지만 자국 경제가 악화되자 1963년과 67년 가입을 시도하는데 두 차례 모두 드골의 비토로 무산된다. 드골은 영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된 자국 농업이 입을 타격과 유럽 통합 주도권, 특히 영국이 미국이 유럽에 보내는 트로이 목마가 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영국은 드골의 사임 이후에야 가입에 성공한다.
1964년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을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1965년에는 대선이 치러졌는데 당시 드골의 인기가 워낙 대단했기 때문에 좌파진영에선 반포기 상태였지만 이때 상대후보가 좌파의 단일화를 주장하며 2차 결선투표까지 진출했다. 비록 드골의 연임을 막지는 못했지만 45% 정도로 득표하며 나름 의미있는 성적을 거두었는데, 그 상대가 바로 훗날 프랑스 사회당이 배출한 첫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이다.
1967년에는 당시 분리독립 문제로 내부 갈등이 심각하던 캐나다 퀘벡을 방문하여 공식 연설 중에 외교적 관례를 무시하고 "자유 퀘백 만세"를 외치면서 분리독립에 반대하는 캐나다인들을 격분시키기도 했다. 덕분에 영국 및 캐나다 정부는 스팀을 좀 받았다.[32] 아이러니한 건 제2차 세계 대전 도중 대다수의 퀘벡인은 드골이 아니라 비시 정부를 지원했다는 것이다.
1967년 몬트리올 국제박람회. 시청 광장 앞에 모인 군중에게 당시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골은 발코니에 나서서 연설을 시작한다. 그리고 세인트로렌스 강을 내려오면서 맞이한 수많은 환호 군중을 보면서 그는 독일에게서 해방된 파리에 당당히 재입성했을 때를 상기했다며 짧은 연설을 이런 말로 마무리했다. 위의 영상 7분 35초부터 보면 된다.
Vive Montréal ! Vive le Québec !
몬트리올 만세! 퀘벡 만세! (환호)
Vive le Québec... libre !
자유... 퀘벡 만세! (길고 열광적인 환호)
Vive le Canada français ! Et vive la France !
프랑스계 캐나다 만세! 그리고 프랑스 만세! (환호)
몬트리올 만세! 퀘벡 만세! (환호)
Vive le Québec... libre !
자유... 퀘벡 만세! (길고 열광적인 환호)
Vive le Canada français ! Et vive la France !
프랑스계 캐나다 만세! 그리고 프랑스 만세! (환호)
드골의 통치는 상당히 권위주의적이었으나, 유럽 국가답게 신대통령제가 행해진 다른 국가들보다는 유연한 면도 많았다. 이는 언론 통제 정책만 봐도 알 수 있다. 신문, 잡지 등 활자 언론에 꽤 관대했으나[33] 방송은 친정부 논조로 철저하게 통제했다. 그래서 68운동 와중에는 공영방송국(당시 명칭은 ORTF)[34] 직원들이 편집의 독립성을 요구하며 대대적으로 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신문과 다르게 방송은 당연히 정부의 목소리를 전달해야 한다는 당시 정부 관리들의 구태의연한 인식[35]과 함께 신문에 불신감을 가진 샤를 드골이 방송에 적극적으로 통제를 가했기 때문이다.
드골 시절에도 제5공화정의 대통령 권력집중은 유럽 현대 정치사에서 유례가 없는 것이었고 후일 한국의 10월 유신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36] 뢰벤슈타인은 이러한 드골의 통치를 38년간 계엄령을 유지한 장제스 치하의 대만, 한국의 이승만 정부, 박정희 정부처럼 대통령이 의회와 법원을 압도하는 신대통령제로 분류하였다. 드골은 현재의 프랑스 대통령의 권한과 달리 지자체의 권한을 제한하는 여러차례의 국민투표를 통해서 사실상 독재적 권한을 행사했다. 드골의 정치방식은 강력한 경찰력과 정보기관에 의존하는 비민주적 독재는 아니지만, 민주공화제 국가의 대통령이 주도하는 독재정치에 영향을 크게 주었다. 개인적인 인기에 의존하여 정국이 난관에 부딪칠 때마다 국민투표를 통해 강력한 권력을 확인받는다는 점에서 정치학적으로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에 해당한다.
당시 브레튼우즈 체제의 해체를 시도하던 미국에 반대하면서 금본위제의 강화를 주장한 드골의 대외 금융정책은 미국과 주변국의 강력한 견제를 받았다. 결국 1971년 당시 미국 대통령인 리처드 닉슨이 달러의 금태환 정지를 선언하면서 1944년 이후 지속된 브레튼우즈 체제가 붕괴되었다. 이것은 전후 케인스주의의 종말과 통화주의 체제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결국 1967년 총선에서 드골계 우파는 부진을 거두며 겨우 과반수를 확보하면서 싸늘해진 민심을 확인하였고 이어 1968년 프랑스의 경제성장률이 집권 이후 최저인 4.4%로 하락하면서 경기가 악화되었으며, 드골 체제의 경직된 권위주의에 반발하는 전후세대와 이에 합세한 노동자들이 주도한 68운동(이른바 '5월 위기')이 발생한다. 이 당시 드골 정권이 직면했던 위기 자체는 '정권이 붕괴 직전이었다'라는 평가까지 받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전후세대 학생과 이에 합세한 노동자들의 시위는 대략 5월 초부터 시작되어 점차 격화되면서 5월 22일 무렵부터는 전국 각지에서 경찰과 전투라고 불릴 정도의 대규모 충돌이 산발적으로 일어났고, 그 결과 25일 무렵에 이르면 (영국의 언론인이자 역사가인 로널드 프레이저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부는 몇몇 주요 도시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
프랑스 제 2의 도시인 리옹의 경우, 22일~25일 사이 격화된 시위대가 사실상 도시 전체를 장악한 상태에서 지방 경찰 병력 전부가 정부의 마지막 거점인 도청을 방어하기 위해 집결했으며, 수도 파리에서도 시위대가 프랑스 경찰의 시위 진압 전문 기동대인 CRS와 충돌하면서 도시 곳곳을 점거했다. 결국 25일~27일 사이, 정부는 당시 총리였던 조르주 퐁피두를 내세워 시위대와의 협상을 시도하지만 이 역시 결렬되었고, 시위는 더욱 격화되면서 당시 각의에서는 시위대가 대통령궁이나 의회를 점거하는 상황까지 우려하게 되었을 정도.[37] 그리고 29일, 드골 비판 구호를 외치는 시위대가 대통령궁 앞을 행진했을 때 드골은 대통령궁을 비운 상태였다. 드골은 당시 서독에 주둔해 있던 프랑스 육군 정예부대의 지지를 확인하기 위해 독일에 간 것이었다. 시위대는 이 상황을 '드골이 도망쳤다!' 고 받아들여 커다란 승리감에 젖었다고 하고, 반대로 드골의 부재에 큰 충격을 받은 프랑스 국민들 사이에서는 이후 '드골이 국민들에게 자신의 중요성을 깨우쳐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몸을 숨겼다'라는 도시전설이 생겨났다고 하지만 결국 밝혀진 바에 따르면 급박한 상황에서 내각에게도 알리지 않고 외국에 나간 것이었다. 전시체제의 최고지도자로서 군대의 위력과 위험성을 잘 알고 있는, 드골을 포함한 장성급 장교 출신 공직자들이 심각한 위기 상황에서 군대에 대한 통제력 확보를 우선시해야 한다고 판단할 만큼 매우 심각한 위기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프랑스 육군의 기갑부대들은 국방부의 명령에 따라 대도시들을 포위하면서 계엄령의 선포를 기다리고 있었고, 헌병대도 대부분의 인원들이 폭동진압에 투입되었다.
이렇게 정치적 위기를 맞고 총리직을 야당에게 내줄 위기에 처하지만 이 직후(6월 셋째주) 의회 해산권을 발동하여 치러진 총선에서는 예상과는 전혀 달리 드골파가 압승, 그것도 개헌선(394/485)을 넘어가는 초압승을 거두면서(득표율은 58.1%) 국면이 전환되었다. 이런 결과가 나온 이유를 따져보면, 당시 드골 정권을 붕괴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68운동 세력의 주축은 학생들이었고, 당연히 이들은 투표권이 없었다.[38]
그리고 운동의 격화로 정권 붕괴는 둘째치더라도 정부의 국가 장악력 자체가 위험한 상황이 되자(즉, 프랑스 대혁명 이후 계속 일어났던 몇번의 혁명 혹은 파리 코뮌에 근접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보수파가 결집하였다. 즉, 기존의 드골 지지자뿐 아니라 운동의 급진성과 과격성에 위협을 느낀 보수파 및 중도파 전반, 그리고 일부 온건 진보세력까지 (68운동의 반대항인) 드골 지지로 집결한 것.
반면, 반 드골 노선의 운동세력에게는 선거에서 승리할만한 정치적 조직과 구심력이 없었다. 즉, 운동세력 자체는 거대했지만 이들을 대변할 정치조직이 없고, 이들을 대표할 후보자도 없었다. 이건 어떻게 해결할 방법도 없는 문제인 것이, '대의제 민주주의적 제도 자체가 일부 정치 기득권층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형태로 변질되었다고 여기고, 이에 대한 대책으로써 대중의 직접적 정치 참여를 요구하는 목소리'와 '기존의 경직된 정치 조직에 대한 반감으로 조직화되지 않은 대중의 정치적 참여를 요구하는 목소리' 자체가 운동의 중요한 원동력이었던 것. 즉, 선거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고 여긴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온 것이니 당연히 선거를 위한 정치적 조직이 갖춰질 리 없고, 어디에 속한 사람이라도 좋고, 아무데도 속하지 않은 사람도 좋으니 누구든지 다 오라고 사람을 모았으니 모인 사람들 전체를 아우를 조직이 없는 것 역시 당연하다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정치적 상황 덕분에 드골 정권은 총선에서 압승,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드골을 반대하는 대중운동이 정권 전복 위협 직전까지 격화되었을 정도로 드골의 통치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은 상황 자체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고, 그에 더해 5월 위기 자체가 (일단 극복에 성공했다고는 하지만) 드골의 리더십에 입힌 타격 역시 상당했다. 결국 드골은 1969년 4월 '지방행정과 상원의회 개편을 위한 국민투표'에서 개헌안이 47%대 53%로 부결되자 4월 28일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Je cesse d’exercer mes fonctions de président de la République. Cette décision prend effet aujourd’hui à midi."
(저는 공화국 대통령직 정무를 중단합니다. 이 결정은 오늘 정오부터 유효합니다.)
- 1969년, 샤를 드골의 하야 연설이다.
(저는 공화국 대통령직 정무를 중단합니다. 이 결정은 오늘 정오부터 유효합니다.)
- 1969년, 샤를 드골의 하야 연설이다.
드골은 임기 내내 수세에 몰릴 때마다 자신이 제안한 정책에 대한 국민투표와 자신의 재신임을 결부하는 방식으로 돌파하는 방법을 즐겨 사용했다. 즉, "제가 제안한 이 정책에 국민 여러분께서 동의하지 않으신다면, 국민 여러분께서 저를 신임하지 않으시는 줄 알고 사임하겠습니다" 라고 승부수를 여러 번 던진 것이다. 이 경우 대통령을 사임까지 하도록 만드는 것은 지나치다거나, 대통령이 사임할 경우 발생할 혼란 등에 대한 우려로 그 정책 자체에는 그리 동의하지 않더라도 할 수 없이 찬성표를 던지는 사람들이 많아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드골은 임기 내내 이 방법을 이용하여 자신이 원하는 정책을 추진할 동력을 얻고,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릴때마다 분위기를 일신해왔으며 이 때문에 "독재자라고 할 수는 없으나 권위주의적 포퓰리스트였다" 같은 비판을 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통령 신임과 결부된 국민투표>에 익숙한 상태였던 프랑스인들이 드골의 제안을 부결시켰다는 것이 가지는 의미는 명백하다. 68운동이 정부를 붕괴시키기 직전까지 몰아간 상황에서 일단 정부가 붕괴되기를 원치 않기에 68운동의 반대항인 드골파에게 투표했지만, 드골 자신을 신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68년 5월 위기의 결과로써 드골 반대파는 패배했지만, 드골도 같이 패배했다.
2.6. 사망
이후 프랑스 동북부 콜롱베레되제글리즈(Colombey les Deux Églises)의 사저에 칩거하다가 회고록을 출판한 직후인 1970년 11월 9일 급성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샤를 드골의 관을 운구하는 파나르 EBR 장갑차 |
3. 평가
3.1. 긍정적인 평가
"앞으로 우리 프랑스가 외세의 지배를 또다시 받게 될지언정 민족을 배반하는 인간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나치 부역자들을 처형, 처벌한 후 자국민에게 고한 말
많은 프랑스인들은 2차 세계 대전 당시 그를 '나치의 압제에서 프랑스를 해방시킨 영웅'이자 전후 프랑스의 재건을 주도한 인물로 높이 평가하며, 그가 프랑스 제5공화국을 설립시키는 과정에서 나치 세력을 철저히 배제했다는 점에서 존경을 받는다. 20세기 프랑스에서 가장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라는 데는 이의가 없는 듯. 현재 프랑스 해군은 최신예 항공모함에 그의 이름을 붙여서 샤를 드골급 항공모함으로 명명하고 파리 샤를 드골 국제공항은 현재 프랑스 최대 규모의 공항이자 유럽의 대표 관문으로 활약하고 있다. 또한 드골이 정치적인 야심가였고 독선적인 기질의 소유자이긴 했으나 그가 최선을 다해 나치에 항전했던 애국자임은 분명하다. 나치 부역자들을 처형, 처벌한 후 자국민에게 고한 말
아무튼 그가 1958년 집권하면서 탄생한 제5공화국 역시 기존 민주정에 비해 상당히 독재적인 성격이 강한 것은 분명하지만 제1세계로부터 이익을 취하면서 동시에 비동맹 노선을 확립한 그의 외교는 프랑스의 국익에 비추어 볼 때 매우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전후 베트남과 알제리 등에서 무리한 식민주의 정책으로 몸살을 앓던 프랑스가 본격적으로 탈식민주의 노선으로 전환한 것도 드골 정권부터이다.
그리고 그가 권위주의적인 면모를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민주주의 체제를 파괴하고 독재자가 되어 국민들의 인권을 탄압할 정도로 막 나가지는 않았다. 낙후되어 있던 사회보장제도가 정비된 것도 바로 드골 집권 시기이다. 그의 집권 동안 전 국민을 대상으로 투표권이 확대되었고, 1962년에는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대체복무를 인정했다.[40] 아울러 내각과 대통령의 권력 분점이 가능한 이원정부제를 채택하면서 국회를 단순히 거수기 역할로 만들지 않았다. 비례대표제를 폐지해 제 3, 4 공화국의 군소정당 난립을 끝내면서도 결선투표제로 양당제의 한계를 보완했다. 전체적으로 전시 재상의 성격이 강했던 윈스턴 처칠과 달리 드골은 전쟁 당시보다는 전후의 혼란기에 능력을 발휘했다는 면에서 정치인으로서는 더 뛰어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드골 시기는 영광의 30년(Les Trente Glorieuses)으로 대표되는 경제적 고도성장기였다. 지금 현재도 프랑스의 자존심이자 대표 산업으로 꼽히는 우주항공산업이 콩코드 여객기나 에어버스의 전신인 Caravelle를 통해 본격적인 발전을 이룩하기 시작했고, 현재도 프랑스 산업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는 자동차 산업도 이 시기에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 무엇보다 1870년 이래로 영국에 추월당했던 본토 GDP를 1964년 거의 100년만에 추월하기도 했다.[41] 전후 복구를 넘어 독일 못지 않은 경제적 기적을 이뤘던 시기라 지금도 드골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국내 좌익민족주의 계열에서는 레지스탕스를 이끌었던 지도자였던 점과 전후 나치협력자 청산 관련한 부분에서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특히 그들은 식민지 체제 협력자에 대한 처리와 관련해서 프랑스의 예시를 들어 비교하며 아쉬워하기도 한다.[42] 다만, 프랑스의 나치 협력자 청산은 전후 독일과 비교해야 할 정도로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편이다.[43] 이는 보수 우파 세력들의 반발에 따른 것으로서 실질적인 나치 청산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도 68 혁명 시기에나 가능했다.[44] 한편으로 우익 쪽에서도 드골이 군인 출신 대통령이면서 강한 민족주의 성향, 서유럽에서 드물게 강력한 대통령제의 전형을 보여준 서방의 지도자였다는 점에서 평가가 좋았다. 이승만이나 박정희 시절에도 드골에 대한 평가는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3.2. 부정적인 평가
프랑스 내에서 드골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에서는 그를 독재자로 평한다. 그에게는 권위적인 자세가 있어 미 대통령인 루즈벨트가 매우 경계했다. 그는 수세에 몰릴 때마다 재신임 투표[45]를 통해서 실질적인 독재를 펼쳤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참고자료 자신이 주장하는 법안과 자신의 재신임을 결합시키면서 정책에 대한 비판을 피해간다는 것은 곧 민주주의의 대원칙을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재신임투표에 대한 반성으로 법학계에서는 대부분의 국민투표에서 대통령의 재신임을 결부시키는 것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다.[46] 대중이나 반목하는 정치 세력에게 결과뿐만 아니라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신뢰를 얻고 끊임없이 소통하는 것 자체가 민주 국가의 현대 정치인에 대한 필수 덕목인데 드골의 리더십은 이를 무시했다. 프랑스 역사에 없었던 것도 아닌데, 나폴레옹 3세가 독재정치를 펴고 황제가 된 기반이 바로 재신임 투표, 국민투표에 의한 포퓰리즘이었기 때문.또한 식민지였던 아프리카의 나라에서는 신식민주의 체제인 프랑사프리크(Françafrique) 정책을 이 사람이 시작하여 정치, 경제, 외교를 옛 식민지 국가를 독립 후에도 예속시켰다는 비난을 받는다. 예를 들어 1963년 8월 15일에 일어난 콩고 공화국의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날 때 초대 대통령 퓔베르 율루의 지원 요청을 거부함으로서 그를 실각하게 만들거나, 가봉의 초대 대통령 레온 음바가 1964년 쿠데타시도가 일어날 때 군을 파견하여 구데타를 진압하는 데 일조하였으며, 기니가 1958년에 다른 아프리카 식민지들과 달리 전면적인 독립을 추진하자 프랑스가 기니에 깔아놓은 모든 인프라들을 파괴하고 떠나서 기니의 경제를 철저히 파탄나게 만들었고, 이후에도 쿠데타 사주와 위조지폐 살포로 아메드 세쿠 투레 정권을 전복시키려 했다.[47]
토고의 초대 대통령인 실바뉘 올랭피오[48]가 반불정책을 펼치자 1963년 1월 13일에 프랑스군 출신의 냐싱베 에야데마 주도의 쿠데타를 지원하였다는 의혹도 있으며, 코트디부아르의 펠릭스 우푸에부아니, 세네갈의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장 베델 보카사, 토고의 냐싱베 에야데마, 가봉의 오마르 봉고와 같은 친불 성향의 구 프랑스 식민지 국가들의 지도자들과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그들을 강력히 후원하면서 니제르, 말리, 부르키나파소,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차드, 카메룬, 콩고 공화국, 베냉, 토고 같은 구 식민지 아프리카 국가들에게 정치, 경제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넘어서 국정 전반에 큰 영향력을 끼쳐서 신식민주의라는 비판을 받았다. 다만 이러한 정책기조가 없었다가 드골때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의 프랑스 식민지들은 기니[49]를 제외하면 드골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후 독립을 했기 때문에 프랑스가 독립을 시켜주면서 계속 세력권 안에 놓았다고 볼 수 있다.이후에도 정권이 바뀌어도 이러한 정책 기조가 현재까지 변하지 않고 있다. 다만 식민지들의 독립 이후 이러한 외교기조가 시작된 것은 드골 정권이 맞기 때문에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리고 이러한 정책은 2020년대 들어 아프리카의 말리, 부르키나파소, 니제르, 가봉 등의 국가들에서 오랜 프랑스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반불 성향의 군사독재 정권들이 들어서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130년 넘게 식민 지배를 당한 알제리에선 히틀러에 맞먹을 정도로 미움을 받는다. 드골이 4공화국을 무너뜨리고 현실을 직시해 알제리를 독립시키기는 했다. 드골은 에비앙 협정을 끌어내고 FLN과 프랑스 정부의 정치적 협약을 물리적으로 분쇄하려한 OAS의 쿠데타를 막아 알제리 독립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 드골도 2차대전 당시 미국과 영국 측에게 '알제리는 우리 프랑스의 영원한 영토이자 안방과 같은 곳'이라고 말했고, 현역 정치인일 때 말뿐이나마 대프랑스 식민주의적 관점을 유지하며 진짜 막판에 가서 군 내 극우파를 숙청하기 전까진 오히려 이들과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그 역시 진정으로 알제리의 독립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예전 알제리 여행을 하던 고려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김화영 교수가 알제리인에게 프랑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그 사람이 김 교수에게 드골 이름을 듣더니 "그 새낀 우리나라 알제리에선 히틀러요!"라며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김 교수가 높이 평가한 것도 아니고 단순히 과거 이야기를 하며 언급한 수준임에도 이랬던 반응을 보였던 걸 봐도 알제리에서 평가는 아주 극악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처럼 2차대전 당시 드골은 '알제리는 프랑스 땅으로 다른 아프리카와 다르다'고 처칠에게 거듭 강조했던 인물이며 알제리 독립전쟁 당시 수백만 알제리인의 사망을 초래했으므로 알제리에선 히틀러급으로 증오를 받기도 했다. 레지스탕스의 영웅 장 물랭을 죽인 전직 나치 친위대원인 클라우스 바르비의 변호를 담당했던 변호사 자크 베르제는 클라우스 바르비의 범행에 대해 "프랑스가 알제리한테 한 것처럼 한 것 뿐이다"라고 반박하기도 했다. 프랑스인들과 똑같은 잘못을 한 것뿐인데 왜 프랑스인들처럼 당당하지 못하냐는 뜻이다.[50] 그리고 모리스 파퐁[51]이 발포 명령을 내려 파리 중심부에서 평화 시위를 하던 알제리인 수백 명을 학살해도 파퐁을 비호해주며 파퐁이 처벌을 피하도록 했다.
1960년 콩고 내전 때 촘베 장군의 쿠데타로 유엔군이 파견될 당시, 드골은 콩고 카탕가 반군 지역의 우라늄 광산 등을 노리고 용병 부대를 파견했다.[52] 용병들은 대규모 부대를 조직해 반군 지역으로 쳐들어갔으며, 촘베 장군의 사주를 받고 각종 사보타쥬 및 광산 점령에 나섰다. 많은 민간인들이 죽거나 다쳤으며, 고전을 면치 못하던 유엔군의 위상을 떨어뜨려 국제 질서를 문란케 하였다.
한국에서는 친미 성향의 일부 밀덕후 사이에서 국가로서의 프랑스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널리 퍼져 있고 이들은 대표적인 정치인이었던 드골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경향이 있다. 그런 정책 때문에 프랑스는 나토와 공산권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면서도 양쪽으로부터 여러가지 이권은 있는 대로 다 챙기고 제3세계에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대표적인 것이 무기 수출인데 미국과 소련 모두로부터 자유롭고자 했던 비동맹 국가들에게 적당한 가격에 괜찮은 성능의 현대식 무기를 공급할 수 있는 나라는 프랑스뿐이었다. 그의 대외 정책은 현재 프랑스 대외 정책의 기본이 되고 있으며 훗날 드골과 상극인 좌파 사회당의 미테랑 정부도 드골의 대외 정책 기조는 이어나갔다.
4. 가족 관계
자세한 내용은 샤를 드골/가족 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5. 어록
제 정신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국민들과 패배하고 흩어져 달아나는 군대를 목격하고, 더욱이 우리를 경멸하고 있는 적의 무례한 태도에 대해 전해듣고, 나는 끝없는 분노가 복받쳐 오른다. 아, 너무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이 전쟁은 처음부터 대단히 잘못 시작된 전쟁이다. 그러므로 전쟁은 계속되어야 한다. 이 세상에 희망이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나는 싸움이 필요한 곳을 보면 어디든 달려가 싸울 것이다. 싸움이 필요한 곳에서, 싸움이 필요한 만큼, 적이 패배할 때까지, 국가의 임무가 깨끗이 청산될 때까지 나는 싸울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바로 그날,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다.
바로 그 날이란 파리가 함락당한 날을 의미한다고 한다.La France a perdu une bataille, mais la France n'a pas perdu la guerre.
프랑스는 전투에서 졌습니다. 하지만 프랑스는 전쟁에서 지진 않았습니다.
- 샤를 드골 À tous les Français 1940년 8월 판의 인터뷰 중
프랑스는 전투에서 졌습니다. 하지만 프랑스는 전쟁에서 지진 않았습니다.
- 샤를 드골 À tous les Français 1940년 8월 판의 인터뷰 중
à mon sens, la France ne peut être la France sans grandeur.
내 생각에, 위대하지 않은 프랑스는 프랑스가 아니다.
1954년 전쟁 비망록 1권에서.
내 생각에, 위대하지 않은 프랑스는 프랑스가 아니다.
1954년 전쟁 비망록 1권에서.
나 드골 장군이오! - 1940년 6월 18일,
BBC방송을 통해 프랑스에 전파한 호소문의 문구. 드골이 누군지 모르던 프랑스인들에게 자유 프랑스의 존재와 결사항전에 대한 주장을 통해 자신을 처음으로 부각한 연설이다.일견 보기엔 루이 14세를 떠올리게 하는 병맛같은 발언이지만, 그 당시 영국과 미국에서 비시 프랑스를 회유해보려는 시도에 대해 비난하고 프랑스의 정통성이 자신에게 있음을 강경하게 주장하는 발언이다. 이러한 상징성 때문에 현재 프랑스 정치인들의 선거유세용 단골 표어 중 하나라고. 유럽연합 결성 이후에는 "내가 곧 유럽이다"로 업그레이드 되었다. 물론 유럽의 중심, 아니 세계의 중심이 프랑스라고 생각하는 프랑스인들은 이런 표어를 기꺼워한다고.
Paris outragé ! Paris brisé ! Paris martyrisé ! mais Paris libéré !
파리는 상처입었습니다. 파리는 파괴되었습니다. 파리는 고문받았습니다. 하지만 파리는 해방되었습니다.
1944년 파리 해방 직후 연설에서.
Je vous ai compris!
나는 여러분들을 이해했습니다!
1958년, 알제리에서의 연설.
나는 여러분들을 이해했습니다!
1958년, 알제리에서의 연설.
알제리 독립을 인정한 연설이라고 한국에선 잘못 알려져 있지만 이것은 드골의 초창기 지지자들이었던 알제리 거주 프랑스인들과 프랑스 극우파들을 위한 발언이다. 이들은 드골의 집권을 초창기에 매우 환영했는데 드골이 알제리를 사수할 강경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고 드골도 이런 발언을 하면서 이들의 뜻에 부합하나 했지만... 결국 알제리 독립의 길로 가버렸다.
드골 개인적으로는 알제리 독립에 매우 부정적이었다. 드골 정부는 알제리 독립진영과 협상을 시작할 때 세 가지 선택지를 제안했는데, 프랑스의 자치령, 프랑스의 동등한 주, 독립이었다. 그리고는 "난 알제리인들이 독립이라는 파멸의 길로 가지 않으리라 확신한다"라는 발언을 할 정도였다. 드골의 원래 구상은 알제리를 자치령으로 만드는 것이었고 이 방안이 FLN같은 '일부 극단주의자'[53]가 아닌 일반 알제리인의 지지를 얻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알제리인은 절대다수가 독립을 지지했고 결국 독립으로 나아갔다.
이는 드골이 가졌던 인식의 한계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보여준 통찰력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일화이기도 하다. 사실 알제리 문제에 대한 드골의 기본적인 인식 자체는 알제리 지배를 고집했던 당시 프랑스 극우파들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드골 역시 제국주의 시대의 끄트머리에 태어나 성장한 인물이었기에 자국의 식민지 제국주의를 당연시했고, 식민지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역량이 거세게 성장하고 있다는 현실 역시 이해하지 못했던 것. 그러니까 프랑스가 알제리에 대한 지배력을 지극히 강압적, 폭력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일부 극단주의자가 아닌 대부분의 선량한 알제리인들은 프랑스의 지배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독립에 찬성하지 않을 것이다'와 같은 몽상적인 예측을 바탕으로 투표를 제안했던 것이다. 하지만 투표 결과는 드골의 예상과는 전혀 달리 압도적인 독립 지지로 드러났고, 이에 드골은 '드골이라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절대로 알제리 지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여기고 그를 지지했던 극우파의 예상과는 달리 더이상 식민지배를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이를 포기하는 결단을 내린 것. 위 연설에서 드골은 (알제리 독립에 반대하는) 알제리 거주 프랑스인과 극우파들을 '이해한다'고 발언했는데, 분명히 이해하기는 이해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샤를 드골이라는 정치인의 행보에서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 된 것은 바로 '위대한 프랑스', 즉 열강으로써 프랑스의 지위를 지켜야 한다는 욕망이었고, 당시 프랑스의 정치계와 사회 전반에서 '식민지의 유지는 식민제국 열강으로써 프랑스의 지위 유지에 필수적이며, 특히 그중에서도 알제리는 가장 중요한 식민지'라는 인식이 강력했기 때문이다. 즉 드골 개인의 성향을 보면 어떤 의미에서든 알제리의 독립에 극히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는 것이 당연했고, 알제리의 독립을 막으려는 현지 프랑스인 및 극우파의 입장을 단순히 '이해했다'를 넘어 상당히 공감하기까지 했을 가능성이 높아보이는 것. 하지만 식민지 유지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자 비교적 빠르게 손절하고 대신 핵개발 및 자주국방을 위한 비용 투자등으로 국제적 지위를 유지한다는 새로운 노선을 선택한 것이다. 현실 정치인으로써 보더라도 '이해했다'는 애매한 표현을 통해 자신의 강력한 지지자들에게 등을 돌리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장래의 정치적 행보를 제약할 구체적인 입장 표명 역시 피한 것이다.
그 친구, 사격실력이 형편없구만.
여섯 번째 암살 시도 당시 여러 번의 총격을 가하고도 하나도 맞추지 못한 암살범을 두고 한 농담.
여섯 번째 암살 시도 당시 여러 번의 총격을 가하고도 하나도 맞추지 못한 암살범을 두고 한 농담.
Vive la France ! La France accède au statut de grande puissance.
위대한 프랑스 만세! 오늘 아침 이후로 프랑스는 더욱 강력하고 자랑스런 국가가 되었다.
- 1960년 프랑스의 첫 핵실험 직후 성공 소식을 발표하며 던진 첫마디.
이 문장을 모티브로 한 유로트럭 DLC가 발매되었다. 항목 참조.위대한 프랑스 만세! 오늘 아침 이후로 프랑스는 더욱 강력하고 자랑스런 국가가 되었다.
- 1960년 프랑스의 첫 핵실험 직후 성공 소식을 발표하며 던진 첫마디.
Vive Montréal ! Vive le Québec ! Vive le Québec libre ! Vive, vive, vive le Canada français ! Et vive la France !
몽레알 만세! 퀘벡 만세! 자유 퀘벡 만세! 프랑스계 캐나다 만세! 프랑스 만세!
- 1967년 캐나다 퀘벡 몬트리올 국제 박람회 연설 도중에 한 말.
당시 퀘벡 분리독립 문제가 한창이던 상황이라 그의 발언은 사실상의 내정간섭이였고, 대단한 물의를 일으켰다.몽레알 만세! 퀘벡 만세! 자유 퀘벡 만세! 프랑스계 캐나다 만세! 프랑스 만세!
- 1967년 캐나다 퀘벡 몬트리올 국제 박람회 연설 도중에 한 말.
Es lebe Bonn! Es lebe Deutschland! Es lebe die deutsch-französische Freundschaft! Es lebe ein großes Volk!
본 만세! 독일 만세! 독불 친선관계 만세! 위대한 민족 만세!
- 1962년 서독 국빈 방문 중 자신들에게 환호하는 독일 청중들을 향해 행한 연설.
유창한 독일어로 연설하여 청중들의 마음을 얻었다. 정작 연설 직후 드골은 측근과의 사적인 대화에서 "저 친구들이 정말 위대한 민족이라면 날 향해 환호하지는 않았겠지."라고 냉소했다고 전해진다.본 만세! 독일 만세! 독불 친선관계 만세! 위대한 민족 만세!
- 1962년 서독 국빈 방문 중 자신들에게 환호하는 독일 청중들을 향해 행한 연설.
그럼 친구를 바꿔보시오.
드골과 정치성향이 반대인 의원이 “각하, 제 친구들은 각하의 정책을 매우 마음에 들어 하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자
드골과 정치성향이 반대인 의원이 “각하, 제 친구들은 각하의 정책을 매우 마음에 들어 하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자
영국은 미국의 유럽 내 영향력 확보를 위한 ‘트로이의 목마’다.
1967년 11월 27일 영국의 유럽경제공동체(EEC) 가입 신청에 대해 거부권(veto)을 행사하며 남긴 말
1967년 11월 27일 영국의 유럽경제공동체(EEC) 가입 신청에 대해 거부권(veto)을 행사하며 남긴 말
자유프랑스를 후원했던 영국 입장에서야 배신감을 느낀 말이지만, 드골에게 있어서 영국은 프랑스에게 못 믿을 존재였다. 역사적인 것이야 차치하고, 1951년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창설에도, 1957년 EEC 출범에도 영국은 동참하지 않았다. 그러다 영국 경제가 침체에 빠진 반면, 다른 서유럽 국가들은 번영하기 시작하자 EEC 가입을 추진한 것은 드골 입장에서 가당치 않았을 것이다.
골수 좌파 철학자이자 소설가인 사르트르는 평생동안 드골에 대해 살벌한 비판을 가했다. 하지만 드골은 표현의 자유와 (좌파도) 애국심에 행하는 발언이라는 이유로 해를 가하지 못하게 하였다. 드골 옹호자들이 드골 정권의 권위주의적인 면은 인정해도 민주주의적 정치 참여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와 가치는 포기하지 않았다고 항변하며 종종 인용하는 예시이다.
Comment voulez-vous gouverner un pays où il existe 246 variétés de fromage?
“치즈 종류가 246가지나 되는 나라를 어떻게 통치할 수 있을까?”
대통령 재직 중에 여론의 분열로 프랑스를 통치하기 어려움을 토로하며“치즈 종류가 246가지나 되는 나라를 어떻게 통치할 수 있을까?”
"결과적으로 명백한 점은 우리 프랑스는 전적으로 프랑스의 국익을 위해 어디에서나 즉각 동원될 수 있는 군사력, 즉 독자적 핵타격력이 필요하고, 이것을 수년 내에 반드시 달성하여야 한다. 군사력의 기본이 핵무장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그것을 제조하든 혹은 돈으로 구입하든 간에 그것은 우리 수중에 있어야 한다. …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독자적 핵전력을 갖추지 못하면) 더 이상 유럽의 강대국도 주권국일 수도 없고 통합된 위성국에 지나지 않게 된다."
(핵우산을 제공하려는 미국에 대해) "미국은 파리를 지키기 위해서 뉴욕을 희생할 수 있겠는가?"
"어느 나라든지 다른 나라를 도와줄 수는 있어도, 다른 나라와 운명을 함께 해주지는 못한다."
프랑스 전 대통령, 샤를 드골.
프랑스의 핵무기 개발 선언시에 미국, 영국이 핵우산을 보장한다는 말을 비슷하게 하자, 드골은 위와 같은 말을 하면서 결국엔 미국이든 영국이든 자신의 국익을 우선시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강대국의 핵우산 제공을 강하게 불신하며 독자적 핵무장을 주장하는 측에서 자주 내세우는 명분으로 인용되고 있다. "어느 나라든지 다른 나라를 도와줄 수는 있어도, 다른 나라와 운명을 함께 해주지는 못한다."
프랑스 전 대통령, 샤를 드골.
Je cesse d’exercer mes fonctions de président de la République. Cette décision prend effet aujourd’hui à midi.
나는 공화국 대통령직 정무를 중단합니다. 이 결정은 오늘 정오부터 유효합니다.
1969년 대통령 사임 당시의 연설.
이게 대통령 사임 연설의 전부다. 이 때문에 드골을 높게 평가하지 않는 사람들 중에도 그의 사퇴만은 '쓸데없는 미사여구나 변명도 없고, 꼼수도 부리지 않고 깔끔하게 물러났다.'라고 높게 평가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나는 공화국 대통령직 정무를 중단합니다. 이 결정은 오늘 정오부터 유효합니다.
1969년 대통령 사임 당시의 연설.
아파! - 유언
정확히는 목을 가리키며 아프다고 했다. 유언이라기 보다는 급작스러운 단말마에 가까운 발언.6.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1947 - 1955 | - | |
1958 - 1968 | - | |
1968 - 1970 | - |
7. 여담
- 1961년 존 F. 케네디와 그의 부인 재클린 케네디와의 정상회담에서. 당시 70을 넘은 나이에도 저 정도 덩치였다. 참고로 케네디의 키는 185cm.[54]
- 성씨에 있는 de라는 전치사[55]에서 알 수 있듯이 본디 노르망디와 부르고뉴 지역을 연고로 한 하급 귀족 가문 출신이다.
- 샤를리 엡도의 'Charlie'가 샤를 드골을 뜻하기도 한다. 샤를리 엡도의 전신격인 Hara-Kiri Hebdo[56]라는 주간지가 있었다. 그런데 샤를 드골이 사망했을 때 같은 해에 있었던 클럽 화재사고와 비교해 "한명 죽은거 가지고 뭔난리임?"이라는 고인드립을 쳐서 프랑스 정부의 어그로를 끌었고, 결국 폐간해야 했기 때문. 그래서 Hara-Kiri Hebdo를 출판하던 사람들 거의 전부가 샤를리 엡도란 이름으로 새로 주간지를 출판했다.
- 2017년에 그의 무덤이 괴한에게 훼손되어 물의를 빚기도 했다. 정확히는 묘비의 십자가를 떼어 버린 것. 재빨리 복구되기는 했지만, 마크롱 대통령을 비롯한 프랑스 정계의 주요 인사들이 이를 일제히 비판했다.
- 2020년 그의 타계 50주기를 기리기 위해, 프랑스는 드골의 초상을 새긴 2유로 동전을 발행했다.[57]
- 어록 중 드골이 '나는 독일을 사랑한다. 그래서 독일이 여러 개였으면 좋겠다.' 라고 말했다는 루머가 유명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드골은 이런 발언을 한 적이 없고, 작가 프랑수아 모리아크가 한 말이다.
- 키가 매우 커서 196cm나 되었으며[58] 덕분에 루저의 난 당시 연합군 승리에 결정적 공헌[59][60]을 한 지도자라는 농담이 나돈 2차 대전 갤러리 "핼구"의 작품 여기에 더해서 윈스턴 처칠에게 가려서 알려지지 않았을 뿐 하루 두 갑을 태우는 애연가였다고 한다. 다만 1950년에 금연을 선언했는데 금단 증상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엄청나게 신경질을 내고 다녔다고 한다.
- '프랑스인 치고는' 지독할 정도로 시간 관념에 철저해서 식사 시간이 30분을 넘기지 않았다고 한다. 가족들조차도 원칙과 권위를 내세우는 인물로 집에서도 침실 밖에서는 계절에 관계없이 정장을 입었으며 식사 시간에는 정치 등의 공적인 이야기를 금지했다고 한다. 술은 잘 못했지만 식욕은 왕성해서 대식가였다고 하는데, 그래서 노년에 당뇨로 식단 조절을 할 때 왕성한 식욕을 조절 못하는 게 가장 힘들었다고 한다.
- 결국 자유의 투사와 독재자라는 평가를 동시에 받고 있는 이 사람의 일생을 관통할 수 있는 말은 독단성일 것이다. 이러한 그의 성향이 주위에 많은 반감을 샀지만 프랑스의 독자적 정부수립과 독자적인 대외노선을 관철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음은 분명하고, 가끔은 이러한 독단성이 하나의 인간적인 매력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처칠은 그의 영국에 대한 불신과 독단성에 대해 넌더리를 내며 그를 혐오했지만 동시에 그 독단성에서 나오는 그의 비타협적인 태도와 대담함에 경의를 가지고 있었고, 그를 지지했다. 이렇게 보면 그냥 정치인의 수사 아닌가 하지만, 2차대전 당시에 둘은 엄청나게 사이가 나빠서 만나기만 하면 프랑스어나 영어로 고성에 막말을 하며 개와 고양이처럼 싸웠고, 처칠의 경호원들은 처칠이 드골의 총에 맞아 죽는 게 아닌가 걱정할 지경이었다. 이러한 둘의 대립은 전후 프랑스의 권력구도에서 드골을 떼어내기 위해 루스벨트가 처칠에게 압력을 가하면서 점점 심각해진다. 드골에 대해 혐오를 느끼던 처칠은 드골과의 관계를 정리하려고 했지만 영국 내각에서는 프랑스 식민지에서 영향력을 갖추어가던 드골을 버릴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그 둘의 성격도 보통이 아니었다. 자칫 잘못하면 연합군을 파멸로 몰고 갈 수도 있었던 삼각관계는 드골의 승리로 끝을 맺었지만 그도 당시의 고난을 잊지 못했는지 D-day 전날 처칠이 했던 말[61]을 두고두고 회고하곤 했다고 한다. 전후에도 처칠에 대해 이런 뒷담화를 까는 것과 동시에 고마움을 표시하고 그의 장례에도 그들이 함께했던 때처럼 군복 차림[62]으로 마지막 길을 지켰던 걸 보면 드골에게 있어서 처칠은 말 그대로 애증의 대상이었던 듯하다.
다운 증후군 환자인 딸과 함께 찍은 사진
- 대체로 가족들도 상대하기 힘든 완고한 인물이었지만, 가족들에게 애정을 표현하는 편지를 굉장히 자주 보내곤 했으며 편지 속의 문장은 평소의 드골의 이미지와 다르게 따뜻하고 부드러운 분위기라고... 다운 증후군 환자로 태어난 둘째 딸을 평생 아끼고 사랑했으며 딸이 스스로를 비정상으로 여기지 않도록 주변 분위기를 만들어주기 위해 애썼다고 한다. 이 부분은 2017년 11월 26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뤄졌다.
- 아끼던 후배 장교가 병으로 일찍 죽었을 때 슬퍼하면서 6개월간 상복을 입고 다닌 것도 유명한 일화.
- 프랑스 정치인들은 19세기부터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사생활은 화려하기 이를 데 없지만, 드골은 예외적으로 자기 와이프에 충실했으며, 매우 가정적인 남자였다. 사생아는 물론이거니와 그 흔한 애인 한 명 두지 않았으니... 프랑스 정치인들의 사생활은 가히 화려한데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부터 현 에마뉘엘 마크롱까지 모든 대통령들은 꼭 성 스캔들이 있었으며 드골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프랑수아 미테랑은 사생아까지 낳았다. 과연 드골이 특이할 수밖에 없다. 역대 프랑스 공화정의 지도자 중에서도 드골보다 사생활이 더 깔끔한 사람은 이 부분에서 끝판대장급으로 청렴했던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 정도뿐이다.
2차대전 중 아들(左)과 함께.
- 아들 필리프 드골 제독(1921 ~ 2024)은 해군 장교로 입대해 2차대전 중엔 아버지를 따라 자유 프랑스 해군에서 복무했으며, 프랑스 해방 이후에도 복무하다가 해군 감찰감(Inspecteur général de la marine) 보직을 마지막으로 해군 대장 계급으로 예편했다.[63] 그후 정계에 진출하여 국회의원을 역임했다가 은퇴하였다. 위 사진에 나온 사람. 역시 유전자는 속일 수 없는지 이 사람도 아버지와 같은 196cm의 장신이다. 필리프 드골은 슬하 4남을 두었다.
- 사임 후 시골에서 부인과 함께 지내다가 갑자기 바닥에 쓰러지면서 엄청난 고통을 호소했는데 이 때가 드골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내에게 불평을 한 때였다고. 마지막으로 한 말도 (목을 가리키며) '여기가 아프다'였다고 한다. 그 말을 한 후 의식을 잃고 몇 분 후에 숨졌다.
- 드골이 사망하자 영국의 극작가 노엘 카워드 경은 "드골이 하느님과 무슨 대화를 나눌 것 같냐?"는 질문을 받았고, 그는 "그야 하느님의 프랑스어 실력에 달렸겠지요."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이는 드골의 고집에 대한 비아냥인데 영어를 못하는 건 아니지만 프랑스어를 쓰는 것을 고집했으므로, 하느님과의 면담에서도 그 고집을 부릴 거라는 소리.
-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히틀러와 혼동되기도 한다(...). 물론 문제는 그 콧수염. 여기에 길쭉한 얼굴형과 제복과 정모 차림의 복장도 한몫 한다.
-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땡땡주의자이기도 하다. "나의 유일한 라이벌은 땡땡이다. 그는 거인에 맞서는 소인이라는 점에서 나와 같다"라는 연설을 대통령 취임식 때 대놓고 한 것으로 유명. 노린것인지는 불명이지만 정작 자신의 키는 196cm로 무척 큰편의 거인이다.
- 입냄새가 무척 심각해서 사람들과 가까이에서 대화하지 않고 멀찍이 떨어져서 대화하곤 했다고 한다.
- 2차대전 종전 후 제5공화정을 수립하기 전까지 정계에서 은퇴해서 칩거생활을 할 때,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전쟁통에 자택을 비롯한 부동산은 쑥대밭이 되었고 그 외의 재산도 마땅치 않은 데다 수입이라곤 준장 계급의 연금뿐이었기 때문. 그런데, 프랑스 의회에서 드골의 계급을 진급시키는 안건을 발의하자 정작 드골은 이에 대해 강하게 반대했다. 진급을 한다면 연금 또한 인상되어서 경제적으로 넉넉하겠지만, 전쟁도 끝났는데 이제 와서 진급한다는 건 자신의 품위를 해칠 수 있다는 게 드골의 주장이었다.[64] 그래서 드골의 공식 계급은 준장으로 고정되어 있다.
- 드골은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어머니와 영원히 이별해야 했다. 드골의 어머니인 잔 마리 드골은 전쟁이 발발했을 때 병으로 건강이 많이 나빠진 상태였다. 프랑스가 항복하고 영국으로 탈출하기로 결정했으나, 드골 혼자서도 망명하기 힘든 판에 환자인 어머니까지 모시고 가기엔 무리였다. 결국 드골은 망명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만난 뒤 혼자 영국으로 떠나야 했다. 드골의 어머니는 드골이 망명한 직후인 1940년 7월 16일에 사망했고, 드골은 임종은커녕 어머니의 장례식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 형제자매들 중에서 막내 동생인 피에르 드골과 가장 사이가 좋았는데 피에르가 샤를 드골과 외모가 너무 닮아서 대통령 경호원들이 피에르 드골을 샤를 드골로 착각해서 그에게 종종 실수로 경례를 한적이 있었다.
8. 대중매체에서
8.1. 영화/드라마
- 영화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1966)에서는 드골이 등장하는 실제 영상이 사용됐는데, 목소리 연기는 클로드 리치가 맡았다.
- 영화 자칼의 날(1973)에서는 프랑스 배우 아드리앙 칼리아-르그랑이 드골로 분했는데 배역명은 '대통령'이다.
- 영화 그레이스 오브 모나코(2014)에서는 프랑스 배우 앙드레 펜베른이 드골로 분했다.
- 영 인디아나 존스에서 1차 대전 당시 포로 수용소에서 인디와 만나는 걸로 설정된다. 역시 몇번 탈출하다 잡히고 마지막 순간에 국경 지대에서 인디와 헤어져서 생포되는 것으로 처리했다. 극에서는 이렇게 끝나지만 원래 시놉시스에 따르면 인디는 흘러 흘러 베를린으로 가서 1차 대전의 주역을 만난다는 설정이었다.
- 히치콕 감독의 동일명 영화의 원작인 레온 유리스의 토파즈에서는 약간 치매끼가 있고 극도의 미국비판론자로서 결국 소련의 첩보조직에 자신도 모르게 휘둘리는 프랑스 대통령으로 묘사된다. 작중에서 미국 및 나토에게 악몽과 같던 프랑스의 나토 탈퇴도 이 첩보조직의 공작행위의 결과라고. 물론 이름은 다르지만 작중 묘사되는 북아프리카의 행각이나 알제리 사건 등에 대한 묘사, 결정적으로 '2차대전 당시 레지스탕스 출신', '반미 민족주의자 정치인'이란 표현을 보면 드골이 맞다.
- 자도빌 포위작전에서도 등장, 콩고 내전에 외인부대를 파견한다.
8.2. 만화/애니메이션
- 굽시니스트의 본격 2차세계대전 만화에서는 키가 크다는 걸 과하게 반영해서 키다리 아저씨로 패러디되었다. 작중에서 얼굴을 한 번도 안 드러내며, 실제 사진에서조차 몸을 길게 늘려 머리가 컷 밖으로 벗어날 정도. 그리고 드골의 일생은 god의 <어머님께>로 패러디되었다.
8.3. 게임
- 스타크래프트: 브루드 워의 진영 중 하나인 UED 1차 원정 함대 총사령관인 제라드 듀갈의 모티브로 추정된다. 일단 이름부터 비슷하고, 출신지가 프랑스, 길쭉한 얼굴과 커다란 콧대의 외모, 권위주의적이면서도 명예를 중시하는 성격도 닮았으며, 유언의 마지막 부분도 프랑스어인 Au Revoir(다시 보자).
- 강철의 왈츠의 특수임무에 등장하는 여자 소대장 앨리스 드골의 모티브로 추정된다.
- 국산 SF 모바일 게임 엘라의 2048에서는 샤를 드 골의 DNA로 탄생시킨 클론 소녀 카렌이 등장한다. 자유분방하지만 임무 성공률도 높다는 전투요원.
- 문명 4에서 루이 14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함께 프랑스 문명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 Hearts of Iron IV에선 프랑스가 항복하면 나오는 자유 프랑스의 지도자로 나온다.
- HoI4의 모드 카이저라이히에선 국민 프랑스[66]의 우익대중주의 왕당파로 등장하며 집권하면 오를레앙 왕조를 전제군주정으로 복고한다.
- 다른 모드 The New Order: Last Days of Europe에선 추축국이 2차대전에서 승리해 코트디부아르 남쪽으로 쪼그라든 자유 프랑스에서 20년 째 파시즘에 맞서 항쟁 중이다. 그러나 동쪽에 존재하는 범아프리카 해방전선의 카메룬 아프리카국이 이들을 제국주의 세력이란 이유로 방해를 하고 있다.[67] 아프리카 국가들을 괴뢰국으로 복속시키거나 아예 아프리카 국가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동맹을 맺어 본토로 돌아갈수 있다. 만약 범아프리카 또는 서아프리카 동맹에게 패배해 아프리카에서도 쫓겨난다면 나폴레옹과 비슷하게 케르겔렌 제도에서 최후를 맞이한다.[68]
- 콜 오브 듀티: WWII의 파리 해방 미션에서 도시에 진입하고 있다며 언급된다.
8.4. 소설
- 히틀러가 되었다에서는 원 역사처럼 영국에 망명정부인 자유 프랑스를 세웠다. 하지만 영국이 독일과 강화조약을 맺으며 입장이 난처해지고 푸대접을 받게 된다. 그러나 처칠이 그와 접촉한 후 정권을 잡게 되면서 그에게 지원을 받게 되고, 처칠이 불리한 상황에서도 기어코 독일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자 너무 이르다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샴페인을 터트린다. 이후 디에프 상륙 작전에 참가하나 작전의 대실패로 3년 만에 돌아온 프랑스 땅에서 다시 도망가야 했다. 이후 영국마저 독일에게 패배하면서 영국 땅에서도 도망가야 했고, 캐나다에 도착한 뒤 이전보다도 더욱 푸대접을 받는 처지가 되어 "위대하지 않은 프랑스는 프랑스가 아니거늘..."이라고 한숨을 쉰다.
- 검은머리 미군 대원수에서도 등장. 스탈린에게 '당신'이라며 반말을 듣고, 몇 개의 사단이나 거느리기에 이런 귀한 자리에 왔냐고 까인다. 그래도 꿋꿋이 '난 자유 프랑스의 지도자'라고 스탈린에 응수하며, 프랑스의 국익을 위해 노력한다. 키 이슈는 여기서도 화제인지, 주인공 유진 킴이 아버지에게 "꺽다리(...) 구경하고 가시라"며 권유하기도 한다. 물론 킴의 아버진 '꺽다리가 다른 나라 대통령을 의미하는 게 아니길 빈다 '며 황당해한다.
- 카이저를 구했다에선 1차 대전 파트에서 첫 등장한다. 원 역사처럼 포로수용소에서 탈출을 거듭했으나, 키(...) 때문에 눈에 잘 띄어 번번히 잡힌다고 투정한다. 이후 2차 대전 파트에선 처음엔 프랑수아 드 라 로크의 파시즘을 지지했으나, 그의 폭정을 보고 민주파로 전향해버린다.
- 내 독일에 나치는 필요없다에선 라 로크의 정치적 파트너로 등장. 그와 함께 추축국 가입을 추진했고, 침공군 사령관으로써 영국 땅을 밣는다. 이후 라 로크의 독선에 질려서 사이가 요원해지나, 패전을 피하는 대신 연합국으로 전향한 프랑스에서 화포를 풀며 화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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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사고 | 제1차 세계 대전 · 제2차 세계 대전 · 68운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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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 가계도 · 아들 필리프 드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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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안도라 공동 영주 겸임[A] [3] 혼전성은 '마요(Maillot)'.[4] 혼전성은 '방드루(Vendroux)'.[5] 역대 프랑스의 지도자 중 2위 장신이다. 1위는 프랑수아 1세(200cm).[6] 거구 정치인의 상징적 인물. 당대 세계의 주요 정치인들 중에서 제일 체구가 컸다. 보통 체구가 큰 사람이 위엄을 풍긴다는 점을 감안하면 샤를 드 골은 그 중에서도 제일 본좌인 셈. 다만 당대 유럽 지도자들 중 최장신은 아닌데, 키가 조금 더 컸던 독일의 파울 폰 힌덴부르크(198cm),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10세(201cm), 프레데리크 9세(198cm) 부자가 있었다.[7] 당시 수여받은 학위는 석사.[8] 보통 샤를 드골 하면 가장 유명한 사진이며 평가 불문하고 전쟁 당시 적국에 맞서 싸우는 당당한 애국자의 면모가 잘 들어난다고들 많이 말한다.[9] 제5공화국 유일의 비 국립행정학교, 비 그랑제콜 출신인 대통령이다.[10] 20세기 중반보다 평균 신장이 커진 현재에도 거인 수준으로 보일 정도의 큰 키이니, 당시의 키면 말 다한 수준이다. 196cm이면 독일 남성 기준 상위 1%로 눈에 띄는 건 당연하다. 꽤 자주 보인다고 인식하는 이유는 도시의 중심가는 유동인구가 많으니 일어나는 일종의 착시다.[11] 드골과 달리 1917년에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훗날 투하쳅스키는 소련군의 총참모장이 되었지만, 스탈린에게 숙청당했다.[12] 당시 기동전에 대한 이해가 가장 높았다던 독일 국방군조차도 보수파들의 반발로 기갑군 창설 대신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이란 애매한 형태로 임시 편성하는데 그치는 정도였다. 자세한 내용은 프랑스 침공 문서에 있다.[13] 당시 프랑스군 수뇌부는 '전차란 속도가 느린 보병 부대의 진격을 따라 천천히 이동하며 장애물을 제거하는 이동 포대'라는 시대에 한참 뒤쳐진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전차를 수십, 수백대 단위로 모아서 집단운용한다는 개념 자체를 전혀 이해를 하지 못했으며, 이런 사고방식 때문에 2차대전 당시 프랑스 전차에는 황당하게도 무전기가 없었다![14] 하지만 실제로는 전차 자체가 참호전을 극복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기관총과 철조망에 의해 무력화된 기병의 역할을 현대적으로 다시 되살린 것이다. 다시 말해 기병이 진격하여 보병을 밟아버리는 전통적인 전술의 연장선으로 만든 것이다.[15] 후퇴 병력들을 재편성하고, 공병들에게 대전차 지뢰를 설치하게 했으며, 가용한 대전차포와 전차 몇 대를 긴급 배치했다.[16] 기갑사단의 역습을 일개 대위가 임시로 긁어모은 부대로 좌절시킨 것을 보고 드골의 공세가 대단치 않은 것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이는 프랑스군의 본질적인 한계 때문이었다. 프랑스군은 공군을 후방에 아껴두고 있었고 육군과 공군의 연계도 고려하지 않았다. 따라서 수많은 부대의 동시다발적 공격이 아닌 드골 부대 단독의 역습이라면, 독일군은 소수의 부대라도 동원해서 지연시키면서 공군을 불러 폭격하는 방식으로 물리칠 수 있었다. 게다가, 프로이센 시절부터 참모의 권한이 강하던 독일 육군 특성상 대위 계급이라 해도 군단 참모라는 직책 그것도 일반참모 교육 수료자면 급할 경우 군단장 명의로 명령문을 선발송하고 사후 승인받는 것도 가능했으니, 이는 사실상 군단장 권한으로 동원 가능한 병력을 죄다 동원한 것이다.[17] 자유 프랑스 조직 이전에 프랑스 제3 공화정의 내무장관이었던 조르주 망델을 비롯한 정치인들이 모로코에서 망명 정부를 수립하려 했으나 모로코 총독인 샤를 누게 대장이 그들을 체포하여 나치 독일에 넘겨버렸다.[18] 이는 드골과 영, 미 연합국 지도자들의 관점차에서 기원한 문제로, 드골은 프랑스가 독일의 전쟁의 부역자로 취급받아 군정이 실시될 것을 두려워했다.[19] 루스벨트는 전후 드골이 독재자가 될 것이라 의심했다. 이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전후 드골이 신대통령제를 제창하며 일부 현실화되기는 했다. 참고로 루스벨트는 워싱턴 이후로 내려오던 2선 관례를 깨고 4선이나 해먹었다 물론 루즈벨트는 전례가 없던 세계 대전이라는 참사를 맞아 다수 미국인들의 투표를 통한 동의 하에 4선을 한 것이기 때문에 독재자와는 관계가 없으며 지금까지 이를 문제삼는 미국인도 없다. 그냥 농담으로만 받아들이자.[20] 이로 인해 다를랑 제독 암살 배후에 드골이 있다는 음모론이 당대에 유행했다.[21] 사진상으로 보면 키가 워낙 크다 보니 딱히 누구라고 찍어 말하지 않아도 드골을 찾아낼 정도다. 혼자만 키가 엄청 큰 사람이 드골이다.[좌측] 레지스탕스 지도자 장 물랭 사후 레지스트랑스를 이끌었다. 전후 여타 프랑스인과 마찬가지로 식민지 유지에 강경한 입장을 펼쳤고, 결국 정계에서 퇴출되었다. 드골과 사이가 매우 나빴으며, 이를 소재로 자칼의 날에서 드골과 대립하고 암살을 사주하는 비밀군사조직 OAS의 창설자로 등장한다.[우측] 자유 프랑스 육군 제2기갑사단장으로 복무했으며, 파리 해방의 최선봉으로 나섰다. 드골과 유사 사제 관계로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24] 당시 히틀러는 연합군이 진격해 오자 파리를 완벽하게 파괴해서 잿더미만을 남겨주고 철수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파리 해방을 두고 경쟁하던 자유 프랑스군, 미군, 좌익 레지스탕스 등 여러 그룹이 "조용히 항복하면 독일군의 안전을 보장하겠다"면서 밀사를 파견해오자 파리 주둔 독일군 사령관 디트리히 폰 콜티츠(Dietrich von Choltitz, 1894 - 1966) 중장은 명령을 받고도 차일피일 계속 미루다가, 파리 외곽까지 도달한 자유 프랑스군에 항복한다. 이 순간까지도 히틀러는 계속 독일군 사령관한테 파리를 불태우라고 닥달하고 있었다. 그래서 영화 제목이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Is Paris Burning?).[25] 사실 2차대전 내내 주류는 비시 프랑스였다. 하지만 자유 프랑스도 나름 할 만큼 해서 북아프리카의 주요 식민지는 나중에 가면 대부분 자유 프랑스로 넘어오긴 했다.[26] 김구가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여 미 전략사무국과 공조하여서 서울진공작전을 펼치려고 했던 것도 비슷한 의도이기 때문이다. 비록 1945년 8월 일본의 무조건항복으로 인해서 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만약 성공했다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광복 후에도 미군과 소련군에게 정식으로 인정받았을 것이고 지금의 남북한 대치 상태는 없었을지도 모를 것이라고 김구는 생각했을 것이다[27] 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국내 레지스탕스의 70%가 프랑스 공산당 지하조직이었다.[28] 1945년과 1946년의 두차례 총선결과를 보면 급진당(중도파)과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현 프랑스 사회당의 전신)를 제하면, 드골파는 과반수는커녕 개헌저지선을 넘기지조차 못했고 나머지 우파를 합해도 의석의 40%를 넘기지 못했다.[29] 대중공화운동이 드골과 정치적 입장이 비슷하고 서로 연대하기는 했으나, 대중공화운동은 공산당, 사회당과 함께 내각제를 지지한 3당 체제의 일원이었고, 드골은 대통령제를 지지해 결국 사이가 틀어지고 말았다. 드골의 정당이라 불릴만한 정당은 조르주 클레망소 전 총리의 아들 미셸 클레망소가 이끄는 자유공화당이었다.[30] 6.25 전쟁 때 유엔군으로써 참전한 프랑스 부대들은 종전 이후 인도차이나 전쟁에 참전하여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대다수가 죽음을 맞이하였고 이후 알제리 전쟁에 옮겨져 여기서도 많은 죽음을 맞게된 실로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다행히 51년에 연령 제한으로 라울 마그랭 베르느레 장군은 프랑스에 귀국하였으며 이 부대는 프랑스에 복귀한 1962년에 해체했다.[31] 군부의 집권 요청에 대해 "나보고 독재자가 되라는 거냐?"라는 반응을 보인 적도 있다.[32] 2차대전의 동지였던 윈스턴 처칠이 죽은 직후인 1965년부터 드골의 영국 견제는 싹수가 보였다. 처칠 생전엔 당연히 눈치가 보였고...[33] 드골 본인이 르몽드 설립에 관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뤼마니테(L'Humanité)같은 기존의 좌파 성향 신문 역시 존속을 허락받았다.[34] 드골 시절에는 방송국이 하나 뿐이었고, RdF→RTF→ORTF로 국명이 3번 바뀌었다. 나중에 지스카르데스탱이 방송법을 대대적으로 개정하면서 독점체제가 붕괴됐다.[35] 그래서 알제리 전쟁 때 TV방송에선 현장상황을 제때 볼 수 없었다고 한다.[36] 7년이라는 대통령 임기는 대한민국 제5공화국의 임기 기준이 되었다. 원래는 대한민국 제4공화국처럼 6년을 하려고 했다고.[37] 당시 각의에서 중요하게 다뤄진 안건 중에는 "만약 시위대가 핵무기 발사 통제 설비가 있는 엘리제궁(대통령궁)을 점거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가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시위대가 대통령궁을 점거한다는 것은 단순히 건물(시설물) 하나가 점거당한다는 의미를 넘어 '정부가 그 기능과 권력의 가장 핵심적 상징을 빼앗겼다'는 강력한 정치적 의미를 가지게 되는데, 그 의미가 바로 "핵 발사 통제실을 빼앗길 수도 있다"는 한 문장으로 요약된 것이다. 물론 가능성을 진지하게 따진다면 시위대가 정말 핵 통제실까지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핵 버튼을 누를 가능성은 지극히 낮고, 만의 하나 정말 누르려 하더라도 여러 보안절차들을 뚫지 못할테니 '시위대가 핵무장하게 된다'는 것은 좀 과한 농담이다. 하지만 이런 위기 상황에서 <정치적 후폭풍을 감수하고라도 군대등을 동원해서 시위대를 강제로 진압, 해산시킬 것인가?> 아니면 <시위대의 요구를 들어주고 해산을 유도할 것인가?>, 하다못해 <주요 설비와 문건등을 당장 이관하거나 파기하고 비상조직을 설치하는 등 중요 시설 점거에 대비할 것인가?>까지 뭔가 당장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이라는 인식이 형성된 것.[38] 이때까지만 해도 프랑스의 투표 연령은 만 21세였다. 현재의 투표 연령인 만 18세로의 하향은 1974년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대통령 정부에서 이루어졌다.[39] 대신 드골의 사망 직후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닉슨 당시 미국 대통령 등의 국내외 주요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 미사가 거행되었고, 파리 시민들도 개선문을 행진하며 드골을 추모했다.[40] 유럽에서는 상당히 늦은 편이다. 영국은 1922년, 네덜란드는 1948년, 독일은 1955년에 각각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권리를 법적으로 인정했다.[41]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de_Gaulle[42]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제작한 다큐인 <백년전쟁 이승만> 편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프랑스의 나치 청산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지 알 수 있다.[43] 전후 프랑스 정부가 수십 만을 기소해 수 만명을 사형 선고했다고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사형당한 건 수백 뿐이었고 다수가 사면받았다. 나치에 협력한 고위 공직자, 기업인, 공무원, 군인, 핵심 협력자들은 제대로 처벌받지 않고 비교적 협력 정도가 낮은 여성이나 사회적 지위가 낮은 이들을 중심으로 처벌이 이뤄지기도 했다.[44] 친일반민족행위자 청산과 일대일로 비교하기 부적절한 것이, 우선 한국의 일제강점기는 무려 35년이었던 반면 나치의 프랑스 점령은 4년 남짓이라 부역자 식별 및 분류 난이도부터가 달랐다. 또한 해방 직후 한국은 세계 최빈국이었던지라 국가 지탱을 위해서라도 일제 부역자들을 등용해야 했으나, 프랑스는 영국과 자웅을 겨루던 열강인 만큼 인적 자원이 풍부해 나치 부역자들을 철저히 청산해도 국가 운영에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물론 반민특위가 바보도 아니고 그런 상황에서도 기소한 이들은 가장 악질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라는 건데, 친일 청산보다 반공을 우선한다고 반민특위를 강제 해체시켜 한 사람도 실형을 집행하지 못한 건 명백한 친일 청산 실패가 맞다.[45] 자신이 내걸었던 법안이 부결되면 사임하겠다는 조건을 건 투표.[46] 가령 대한민국의 경우, 박정희 대통령은 1975년 유신헌법의 찬반투표를 재신임투표로 하면서 압도적인 찬성표를 얻어내 장기집권에 성공했다. 심지어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사유 중 하나가 재신임 투표 제안 발언(청구도 아니었다. 대한민국은 플레비사이트를 인정하지 않는다)이 역시 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반발과 비판에 올바르게 대처하지 못하는 태도로 보인 것이 큰 이유였다. 헌법에 규정된 국민투표에 레퍼랜덤의 성격만 있느냐 플레비사이트의 성격만 있느냐에 대한 법리적 논쟁은 현재까지 지속 중이기는 하나 헌재에서 인정한 것은 레퍼랜덤뿐이다.[47] 덤으로 조르주 퐁피두 총리는 1962년 적반하장격으로 아프리카의 식민지 출신 국가들에게 "세쿠 투레의 경험이 펼쳐지도록 합시다. 많은 아프리카인들은 기니 정치가 자살 행위이며 아프리카 전체의 이익에 반한다고 느끼기 시작했습니다"는 막말을 퍼붓기도 했다. #[48] 독립운동가 출신이었으며, 독립한 토고군에 프랑스군 출신 토고인 군인들을 입대시키려 하지 않았던 인물이었다.[49] 이 나라도 드골이 대통령 취임하기 몇 개월 전에 독립했다.[50] 자크 베르제는 크메르 루주 정권의 키우 삼판, 국제 테러리스트 카를로스 '자칼' 같은 유명인사들을 대변했던 변호사이다. 이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든 감독 마르셀 오퓔스는 마치 바르비가 알제리의 민간인들과 똑같은 수동적인 피해자였나보군 이라하며 서구 열강이 유럽 외에서 저지른 제국주의의 기만성에 대한 비판이 엉뚱하게 그냥 대놓고 대량학살을 주장했던 파시스트 정권에 대한 옹호로 변질되는 것에 일갈한 바가 있다.[51] 비시 프랑스 시기 공무원으로서 유대인 추방(추방된 유대인들은 나치 강제수용소로 끌려갔으나, 파퐁은 강제수용소의 존재는 몰랐다고 한다)에 앞장선 나치 부역자였음에도 드골에 빌붙으며 살아남아 학살 당시에는 파리 경찰서장을 역임 중이었다.[52] 콩고민주공화국은 프랑스가 아니라 벨기에의 식민지였으나 벨기에령 콩고당시 프랑스어의 영향력이 강력해서 프랑스어권 국가이다. 그래서 프랑스의 식민지가 아니었지만 프랑스와의 외교관계가 밀접한 편이다.[53] 드골은 FLN을 일부 극단 알제리 민족주의자의 조직이라고 생각했다. 근거가 없는 생각은 아니었지만 알제리인들은 FLN의 과격성에 대한 우려보다는 프랑스 식민통치에 대한 염증이 더 컸다.[54] 185cm라는 케네디가 작게 보인다. 물론 185cm는 현대 기준으로도 전세계 어딜 가나 거의 다 큰 키이다. 단지 드골이 너무 커서 작아 보일 뿐이다.[55] 영어를 제외한 게르만어와 로망스어 인명의 전치사/관사는 붙여쓰는 것이 원칙이다. 다만 관습적으로 빈센트 반 고흐와 같이 띄어쓰는데, 간혹 이때의 '반' 따위를 미들네임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56] Hara-kiri는 일본어의 腹切り로, <주간 할복>이라는 이름이 된다.[57] 이보다 4년 앞선 2016년에는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서 역시 그의 초상이 새겨진 2유로 동전이 프랑스에서 발행된 바 있다.[58] 위의 사진들을 보면 알겠지만 현재 기준으로도 키가 큰 편인 존 F. 케네디(185cm), 콘라트 아데나워(187cm)를 압도한다. 실제로 드골 본인부터가 네덜란드계 혈통이 있었다. #[59] 연합국 지도자들의 평균 키가 딱 180cm인데 드골이 196cm이니 위너가 되게 만들었다는 개드립이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185cm으로 한 기럭지 했었지만 휠체어를 탔고, 윈스턴 처칠과 이오시프 스탈린은 168cm, 장제스가 169cm다. 추축국 지도자들은 히틀러가 175cm, 무솔리니가 169cm, 히로히토가 165cm였다. 역대 프랑스 대통령 최단신인 나폴레옹 3세(160cm)보다 36cm 더 크다. 유난히 장신이 많은 게 특징인 미국 대통령들중에서도 샤를 드골보다 컸던 사람은 없다. 다만 에이브러햄 링컨이 공식 신장은 193cm이지만 197cm였다는 말도 있다.[60] 다만 추축국 지도자들도 당대 기준으로는 평균 이상이었다. 1895년생 기준, 독일 남성의 평균키는 171cm, 이탈리아 남성의 평균키는 167cm, 일본 남성의 평균키는 159cm였다. 마찬가지로 중화민국의 장제스 또한 당대 중국 남성의 평균키(160cm)보다는 10cm 가까이 컸다.[61] 유럽과 대양을 놓고 선택을 해야 한다면 우리는 늘 대양을 선택할 것이며 마찬가지로 당신과 루스벨트를 놓고 선택을 해야 한다면 루스벨트를 선택할 것이라는 처칠의 말에 드골은 프랑스와 미국 간의 불화가 있을 경우 영국이 미국의 편을 드는 것으로 알겠다고 답했다고 한다.[62] 처칠은 1939년 4월 4일 왕립 공군의 명예 준장 계급을 받았으며 드골은 1940년 5월 23일 임시로, 6월 1일 정식으로 장성 계급에 진출하였다. 모로코 마라케시에 위치한 자유 프랑스 병영 시찰이나 1944년 11월 11일 파리 샹젤리제 가두 행진 등 수많은 자리에서 그들은 준장 군복 차림으로 동행했다.[63] 아버지가 대통령에 취임하고 사망한 이후에도 현역 군인으로 지냈다(1982년 예편).[64] 아들인 필리프 드골의 회고에 의하면, 샤를 드골은 옛날부터 돈 이야기를 별로 안 좋아했다고 한다. 일화중 하나로 어렸을 때 식사중에 아버지보고 월급이 얼마냐고 물어봤는데, 밥먹는데 그런거 이야기하는거 아니라고 야단 맞았다고...[65] 이유는 당연히 키.[66]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나 본토가 프랑스 코뮌이 되자 보수세력이 북아프리카 식민지에 세운 임시정부[67] 정작 카메룬은 자유 프랑스 보다 훨씬 제국주의 국가인 일본 제국과 대동아공영권의 지원을 받으며 범아프리카주의의 탈을 쓴 카메룬 패권주의를 지향한다.[68] 대놓고 죽음만을 기다린다는 설명이 나오는걸 보아 본토가 앙투안 피네에 의해 민주주의를 가지지 않는 이상 배드엔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