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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3 19:05:05

1961년 프랑스 국민투표

1961년 프랑스 국민투표
Le référendum sur l'autodétermination de l'Algérie
استفتاء حول تقرير المصير في الجزائر
{{{#!wiki style="margin: -7px -12px" 1958 1961 1962. 04. }}}
사유 알제리인들의 자결권과 정부 조직 구성을 위한 헌법상 절차
투표율 92.2%
개표
찬성
반대
75% 25%
결과
알제리 독립을 위한 협상 시작

1. 개요2. 배경3. 투표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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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Carte_du_référendum_sur_l'autodétermination_de_l'Algérie_de_1961.svg
Approuvez-vous le projet de loi soumis au peuple français par le président de la République et concernant l'autodétermination des populations algériennes et l'organisation des pouvoirs publics en Algérie avant l'autodétermination?
알제리의 자기결정에 우선하는 알제리의 자결권과 공공 기관 조직에 관한 공화국 대통령의 법안을 프랑스 국민에게 제출한 것을 승인하십니까?
1961년 1월 8일 프랑스에서 실시된 국민투표로 92.2%의 투표율을 기록하였으며, 투표 결과 알제리 독립을 위한 협상이 시작되었다.

2. 배경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알제리 전쟁 문서
번 문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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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탈식민지화의 대세와 흐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제4공화국은 자신들의 식민지, 특히 인도차이나알제리를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식민지에서 일어나는 독립 요구를 무력으로 탄압하였다. 하지만 무력으로 탄압을 해도 오히려 역효과만 났고 국제사회의 비난이 가중되는 가운데 결국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참패하면서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알제리에서도 민족해방전선무장 독립투쟁이 계속 이어지면서 프랑스 국내에선 알제리 독립 여부를 둘러싸고 심각한 사회혼란이 초래되었다. 밑빠진 독 수준으로 들어가는 전비 때문에 경제위기가 닥친 상황에서 군부는 알제리 독립 절대반대를 외치면서 쿠데타를 시도했고, 2차대전 이후 은둔하던 샤를 드골이 전격적으로 정계에 복귀해서 임시정부 총리로 정권을 장악한다.

이후 샤를 드골은 1958년의 국민투표를 통해 프랑스 헌법의 개헌안을 기초로 하는 프랑스 제5공화국을 수립하고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알제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간다.

3. 투표 결과

1961년 프랑스 국민투표
선택 프랑스 본토 알제리 합계
찬성 15,200,073 (75.3%) 1,749,969 (69.5%) 17,447,669 (75.0%)
반대 4,996,474 (24.7%) 767,546 (30.5%) 5,817,775 (25.0%)
사실상 알제리 독립에 대한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는 75%의 찬성을 보였다. 프랑스 정부는 알제리 임시정부와의 휴전협정인 에비앙 협정을 다음 해 3월에 체결하였고 에비앙 협정의 승인여부를 같은 해 4월에 국민투표에 부친다.